임진왜란과병자호란에대해서...(급해요!!!)

임진왜란과병자호란에대해서...(급해요!!!)

작성일 2013.07.21댓글 3건
    게시물 수정 , 삭제는 로그인 필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대한것과, 사진,동영상도 주세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임진왜란

 

정의

 

임진왜란이란 임진년(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된 전쟁으로 그 후 1598년까지 7년 동안 전쟁이 계속되었다.


 

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후 일본인들의 관심을 밖으로 돌릴려고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또한 명나라를 정복할려는 야심도 있었던 걸로 보인다.

 

과정

 

-명을 공격하려 하니 길을 비켜달라고 요구하였으나 조선이 거절

-1592년 15만명이 넘는 대군으로 침략

-선조임금이 의주로 피난을 감

-20여일만에 왜군이 한양(서울)을 점령

-육지에서 관군이 패하는 동안 바다에서 이순신장군이 승리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서 많은 활약을 함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옴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왜군이 7년만에 물러감. 

 

결과

 

꽤 많은 결과를 초래했다. 많은 유적들이 불타고, 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붙잡혀 갔으며, 조선의 땅이 폐허가 될 만큼 농사짓기도 힘들었고 많은 기술자들을 강제로 데리고 갔다.

 

영향

 

민 심 (백성들의 마음) 이 나라에서 멀어졌다. 나라가 혼란스러워졌으며 명나라도 국고 (나라의 창고) 가 비어 청나라의 공격을 막을 힘이 거의 없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예술이 일본의 예술을 발달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병자호란

 

정의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제2차 침입으로 일어난 전쟁이다. 병자년에 일어나 정축년에 끝났기 때문에 병정노란이라 부르기도 한다.

 

원인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조선에 대해 명을 공격하기에 필요한 군량과 병선을 요구하는 등 무리한 요구를 계속했으며 군신의 관계를 강요했다. 더구나 1636년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친 이후에는 압력을 더욱 강화해 노골적인 사대관계를 요구해왔다. 조선정부가 척화파의 주장에 따라 이러한 청의 요구를 거절하자 청 태종은 기병을 위조로 한 10만의 군사를 동원해 조선에 침입했다(1636. 12. 9).

 

과정


임경업 등이 거느리는 조선군은 백마산성에서 청군의 공격을 저지했으나 청군은 기병을 동원해 직접 서울로 진공했다. 당황한 조정에서는 왕자 2명과 왕실을 강화도로 피난시키고 청과의 강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화평교섭이 실패로 돌아가자 인조는 하는 수 없이 소현세자 및 대신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

 

그러나 강화도와 서울이 함락되고 남한산성은 청군에 의해 고립되었다. 성 안의 조선군과 그 일대의 백성들은 청군을 상대로 저항을 계속했다. 하지만 원군이 청군에게 패배하고 성안의 식량이 떨어져가자 조정에서는 화친을 하자는 주장과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치열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결국 최명길 등 화친론자들의 주장에 따라 조선조정은 포위된 지 45일 만에 청과의 화친에 응했다(1637. 1. 30).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에서 나와 삼전도(송파)에서 청 태종에게 큰절을 하는 치욕을 감수해야 했다.

 

조선이 받아들인 청의 요구는 「청에 대해 신하의 예를 다할 것」,「세자 및 둘째 왕자, 대신의 자녀를 인질로 보낼 것」,「해마다 황금 100냥 등 20여 종의 물품을 바칠 것」 등 굴욕적인 조건이었다.

 

결과


병자호란의 결과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끊고 청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전쟁 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두 왕자가 청에 인질로 끌려갔으며, 청과의 싸움을 강력히 주장했던 홍익한 · 윤집 · 오달제 3학사는 청에 끌려가서 처형되고 김상헌도 뒤에 끌려가서 옥중생활을 했다.

 

뒷날 봉림대군이 귀국해 왕위(효종)에 오른 후 이때의 굴욕을 씻기 위해 청을 정벌하기 위한 북벌계획이 추진되기도 했다. 

 

 
ltah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친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
<SCRIPT type=text/javascript> var currentPlayer; var wT = document.title; function setCurrentPlayer(_id) { if (currentPlayer != undefined && currentPlayer != _id) { var player = nhn.FlashObject.find(currentPlayer); player.stopSound(); } currentPlayer = _id; document.title = wT; } function flashClick() { document.title = wT; } window.onload = function() { document.title = wT; } </SCRIPT>

거북선임진왜란 때 큰 전과를 거둔 조선 수군의 돌격용 전선이다. 거북 모양의 등 위에는 창칼을 꽂고, 배의 앞에는 용머리를 달았으며, 배의 좌우에는 각 6개의대포 구멍을 내었다. 승선인원은 130여 명이었다. 사천포해전 때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었다.

1597년 제2차 침략전쟁을 따로 정유재란이라고도 하며,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초[文祿慶長]의 역(役),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役)이라고 한다. 조선 조정에서는 남해안 지방에 왜구들이 자주 침략하자 군국기무(軍國機務)를 장악하는 비변사(備邊司)라는 합좌기관(合坐機關)을 설치하여 이에 대비하였으나, 선조 때에 지배계급은 당파를 중심으로 분열하여 서로 반목질시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파쟁으로 중앙에서는 국방정책조차도 마련하지 않고 변해가는 동양의 국제정세를 명(明)나라와의 친선관계만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또 안일 속에서 고식적인 대책에만 만족해하던 지배층은 인접국가인 일본이나 대륙의 여진족의 정치적 변동이나 사항을 구체적으로 탐지하려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16세기 말에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通信使)도 당파적인 엇갈림에 치우쳐 상반된 내용을 보고하였다. 한편 이이(李珥)는 10만 양병설(養兵說)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조선사회는 이미 오랜 평화 속에서 지배계층인 사대부의 편당(偏黨)정치, 기강의 해이, 전세제(田稅制)의 문란 등 여러 폐단으로 인심이 동요되었다. 조정에서는 각 도에 왜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성곽을 수축하고 군비를 정비하라는 명령을 내려도 몇 곳을 제외하고는 민폐를 야기시킨다는 원성만 높았으며 이에 동조한 일부 수령들도 전비(戰備)를 중지하라는 장계(狀啓)를 올리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대륙침공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은 1585년경부터였고 1587년에 그는 국내 통일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규슈[九州]정벌을 끝마치고 대마도주(對馬島主) 소 요시시게[宗義調]에게 조선 침공의 뜻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조선 사정에 정통한 쓰시마도주는 이 계획이 무모한 것임을 알고 조선이 통신사를 파견할 것을 건의하였다.

따라서 쓰시마도주는 가신인 다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를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로 하여 1587년 조선으로 파견, 일본 국내사정의 변화를 설명하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 첫번째 일본 사신이 부산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의 영접에 대한 가부와 서계(書契)의 서사(書辭)가 종래와 달리 오만하다 해서 문제가 되어 조정에서는 여러 논의가 있었다. 특히 공주교수(公州敎授) 조헌(趙憲)은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시폐(時弊)와 국방을 논하는 등 일본 정벌의 강경론을 주장하자 결국 조정에서는 수로미매(水路迷昧)를 이유로 통신사의 파견을 거절하였다. 도요토미의 첫번째 외교가 실패하자 다시 쓰시마도주의 알선으로 1588년 10월과 89년 6월, 두 차례에 걸쳐 조공과 함께 통신사의 파견을 간청하고 앞서 왜구의 앞잡이가 되어 노략질한 조선인을 잡아 보내왔다. 이에 조선 정부는 1590년 3월 황윤길(黃允吉)을 정사(正使), 김성일(金誠一)을 부사(副使), 허성(許筬)을 종사관(從事官)으로 한 통신사 일행을 파견하였고 이들은 이듬해 정월 일본의 답서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일본의 답서에는 종래의 외교관례에 따르지 않는 무례한 구절과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뜻하는 글이 있어 침략의 의도가 분명하였으나 1591년 3월 이들 사신이 복명하는 자리에서 정사 황윤길(서인)은 왜가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한 데 반해 부사 김성일(동인)은 왜가 침범할 동정이 없다는 상반된 보고로 당파적인 엇갈림과 함께 조정의 의견도 통일되지 못하였다. 동인세력은 서인들이 전쟁을 빌미로 정치적 위기를 넘기려한다고 의심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어 제3차 일본 사신 일행이 조선 통신사보다 한달 늦게 입경하여 일본이 가도입명(假道入明)하리라는 통고에 조정은 놀라 그 해 5월에 일본의 서계 내용과 함께 왜정(倭情)을 명에 알리는 한편 일본의 침공에 대비하여 김수(金晬) ·이광(李洸) ·윤선각(尹先覺) 등으로하여금 경상 ·전라 연안의 여러 성을 수축하게 하고 각 진영의 무기를 정비하게 하였다. 신립(申砬) ·이일(李鎰)에게는 변비(邊備)를 순시하게 하는 등 요충지인 영남지방의 방비에 힘을 기울였으나 이미 시기가 늦었다. 이 동안 일본의 침략계획은 더욱 성숙하여 내전을 통해 연마한 병법·무예·축성술(築城術)·해운술 등을 정비하고 조총(鳥銃)의 대량생산도 진행되었다. 1592년 4월 13일 경상도 동래부 다대포 응봉봉수대(鷹峰烽燧臺)에서는 왜군의 700여 병선(兵船)이 쓰시마를 출항하여 부산포에 이르고 있다는 상황보고가 곧 경상·전라도의 각 감영(監營)과 중앙에 전달되었다.

그러나 경상좌수영군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궤멸되었고 14일에는 왜군 선발대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약 1만 8000 병력이 부산성을 공격하여 십수시간의 혈전 끝에 부산성(釜山城)을 사수하던 부산진첨사(釜山鎭僉使) 정발(鄭撥) 등의 전사로 성을 빼앗겼다. 이튿날 동래(東萊)에 진격한 왜군들과 맞선 동래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 이하 군민(軍民)은 끝까지 항전하다 순국하였다.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왜군의 후속부대는 계속 상륙해 와서 4월 18일에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제2군 2만 2000여 병력이 부산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제3군 1만 1000여 병력이 다대포(多大浦)를 거쳐 김해(金海)에 상륙,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와 함께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등의 9,000여 수군(水軍)이 편성되어 바다에서 이들을 응원하였다. 일본 국내의 잔류병력과 쓰시마 등지의 주둔군 등 일본 침략군의 총병력은 약 20만이었는데 이 중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제1군은 중로(中路)로 동래-양산(梁山)-청도(淸道)-대구(大邱)-인동(仁同)-선산(善山)-상주(尙州)-조령(鳥嶺)-충주(忠州)-여주(驪州)-양근(楊根)-용진(龍津)나루-경성동로(京城東路), 제2군 좌로(左路)는 동래-언양(彦陽)-경주(慶州)-영천(永川)-신녕(新寧)-군위(軍威)-용궁(龍宮)-조령-충주-죽산(竹山)-용인(龍仁)-한강, 제3군 우로(右路)는 김해(金海)-성주(星州)-무계(茂溪)-지례(知禮)-등산(登山)-추풍령(秋風嶺)-영동(永同)-청주(淸州)-경기도의 3로로 나뉘어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4월 17일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으로부터 왜군 침공의 급보가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신립을 도순변사(都巡邊使), 이일을 순변사, 김여물(金汝岉)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하여 왜군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김성일을 경상우도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 김근(金玏)을 좌도안집사(左道安集使)로 삼아 민심수습과 항전을 독려하도록 하였다. 북상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이일에게는 중로(中路)인 조령 방면을, 유극량(劉克良)과 변기(邊器) 등에게는 각기 죽령과 추풍령을 방비하게 하였고 도순변사 신립과 도체찰사(都體察使) 류성룡(柳成龍)으로 하여금 이일을 응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일이 4월 24일 상주에서 가토에게 패하여 충주로 물러나자 왜군은 조령과 죽령 등지에서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충주까지 진격하였다.

이일의 뒤를 이은 신립은 충주 탄금대(彈琴臺)에서 방어작전을 폈으나 패하였다. 이일 등이 죽령·조령·추풍령 등의 요새를 방어하기 위해 출발한 후 조정은 적군의 수도 공격에 대비하여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수성대장(守城大將)으로 삼아 도성의 성곽을 축성하게 하는 한편 전 북병사(北兵使)였던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都元帥)를 삼아 한강을 수비하게 하였다. 신립의 패전보고가 있자 4월 30일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개성을 향하여 피란길에 올랐다. 서울이 함락되자 선조는 다시 평양으로 달아났다. 파천에 대한 민심이 거제지자 파천을 주동한 사람은 영의정 이산해로 내몰고, 류성룡은 파천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는 거짓 죄목으로 귀양을 보냈다. 그리고 임해군(臨海君)은 함경도로, 순화군(順和君)은 강원도로 보내어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였지만 백성들은 오히려 두 왕자를 붙잡아 왜군에게 인도하였다. 한편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여 수복을 꾀하고자 하였다. 왕이 달아나자 백성들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고 특히 하삼도(下三道)는 무정부적 혼란상태가 더했다. 왕이 피난해 있는 사이 민란이 일어나 공사노비의 문적이 있는 장례원(掌隷院)과 형조의 건물을 불태우고 경복궁·창덕궁  등 궁궐과 관청에 들어가 약탈을 하였다. 상륙 20일만에 서울은 왜군에게 점령되었으며 서울에 입성한 왜군은 대오를 정비하여 고니시의 부대는 평안도, 가토의 부대는 함경도, 구로다의 부대는 황해도로 진로를 정하는 한편 서울을 지키는 부대를 두고 경상·강원·전라도 방면으로 진출하여 후방지역을 담당하였다. 강원도·황해도 방면으로 모병하러 간 두 왕자도 왜병의 포로가 되고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왜군에 의해 개성·평양은 부산 상륙 이후 60일도 못 되어 함락, 거의 무방비상태인 전국토는 함경도까지 진출한 왜군에게 짓밟히게 되었다.

서울이 함락되고 함경도 지역까지 왜군의 침략을 당하고 있을 때 해상의 싸움은 전라도 해안으로 진출하는 왜병을 막아내고 있었다. 조선 수군의 편제와 전술은 고려 이래로 왜구 방어 위주였으므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따라서 각도에는 수영(水營)이 있어 이를 수군의 근간으로 하였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으로 침입한 왜선단(倭船團)에 경상좌수영과 우수영은 해상에서 제대로 싸움조차 하지 못한 채 대패하였다. 전라좌수영의 수군절도사로 있던 이순신은 경상우수영으로부터 왜군의 침입보고를 받자 출동하여, 옥포(玉浦)의 첫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한산도(閑山島)·부산 등지에서 계속 전과를 거두었다. 특히 한산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진주성(晉州城)싸움·행주산성(幸州山城)싸움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으로 꼽는다.
 


[임진왜란 해전도]

[임진왜란 해전도]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과 왜군의 전함 비교]

- 조선수군의 전함

거북선

판옥선

- 왜군의 전함

아타케부네

세키부네

고하야


이순신의 활약으로 해상권을 장악한 조선군으로 인해, 전라도 해안으로 진출하려던 왜군의 작전은 분쇄되었다. 해상에서의 승리와 함께 육지에서는 부산진·동래의 수성전(守城戰)과 김해성(金海城)의 저항, 경상우방어사(慶尙右防禦使) 조경(趙儆) 휘하의 돌격대장 정기룡(鄭起龍)의 추풍령전투, 밀양 작원(鵲院)에서의 밀양부사 박진(朴晉)의 선전, 유도대장(留都大將) 이양원(李陽元)의 해유령(蟹踰嶺) 승전 등 치열한 접전이 있었다. 한편 혼란과 민심의 이산 속에서도 근왕(勤王)을 부르짖는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였다. 영남에서는 유림 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 등이, 호남지방에서는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 호서에서는 조헌(趙憲) 등이, 함경도에서는 정문부(鄭文孚)가 거병하였다. 또한 조선 사대부들에게 천대만 받았던 승려들이 봉기하여 가세하였다.

조헌은 충청도 옥천(沃川)에서 일어나 청주의 왜병을 축출하고 금산(錦山)의 왜병을 공격하다 전사하였고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宜寧)에서 거병하여 의령·창령 등지에서 적을 물리치고 진주에서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적병을 격퇴하였다. 고경명은 전라도 장흥(長興)에서 거병하여 금산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으며 김천일은 수원에서 거병하여 제2차 진주싸움에 참가하였다.

정문부는 함경도에서 활약하여 경성(鏡城)·길주(吉州) 등을 회복하고 관동지방의 적을 축출하였다. 이 외에도 대소의 허다한 의병이 봉기했으며 휴정(休靜)·유정(惟政) 같은 승려들이 승병을 거느리고 싸움에 참가하기도 하여 이러한 의병의 활동은 왜군의 군사행동에 심한 타격을 주었다. 왕이 파천하는 도중 사신을 명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자 명에서는 조선 땅에서 왜군을 격퇴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파병을 결정하여, 선봉장으로 낙상지(駱尙志)와 사대수(査大受) 등이 먼저 건너오고 이어서 송응창(宋應昌)·이여송(李如松)이 4만 5000의 동정군(東征軍)을 이끌고 조선의 김응서(金應瑞) 등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 이를 탈환하였다.

계속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던 명군은 벽제관(碧蹄館)에서 왜군과 일대 접전이 벌어져 개성으로 퇴각하고 왜군은 서울에 집결하여 함경도에서 철수하는 가토의 군대와 연합,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행주산성에는 전 전라도순찰사 권율(權慄)이 이치(梨峙)싸움에서 승리한 후 명의 원군과 호응하여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웅거하였으나 벽제관싸움에서 명군이 패퇴하자 고립되었다. 권율은 조방장(助防將) 조경, 승장(僧將) 처영(處英)과 함께 약 2,300의 정병으로 행주산성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몇 차례의 격전 끝에 왜군을 물리치자 왜군은 다시 서울 이북에 출병하지 않고 서울 철수를 서두르게 되었다. 임진강을 끼고 조선·명의 연합군과 왜군이 대치하고 있을 때, 일본측 고니시의 강화회담 제의로 이덕형(李德馨)과 일본의 야나가와 초신[柳川調信]·겐소[玄蘇] 사이에 강화회담이 시작되어 강화는 교섭단계에 들어갔다. 그 즈음 왜군은 앞서 김시민에게 패퇴한 진주성을 재차 공격해왔는데 김천일·황진(黃進)·최경회(崔慶會) 등이 역전했으나 함락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진주싸움은 행주싸움에 못지않은 격전이었고 특히 제1차 진주성싸움은 임진왜란 3대첩에 든다. 조선측의 강화반대에도 불구하고 명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회담은 진척되어 심유경(沈惟敬) 등이 일본에 파견되었고 우리측에서도 황진을 통신사로 보내게 되었다. 강화회담이 계속되는 동안 전쟁은 소강상태로 들어갔고 명은 왜군의 재공격이 없을 것이라 판단하여 주력부대를 철수시켰다. 그러나 5년간 계속된 명·일간의 강화회의는 1596년 9월 일본 오사카성[大阪城] 회담에서 결렬되었다. 회담이 결렬된 이유는 명에서는 도요토미를 일본의 왕으로 삼고 그 입공(入貢)을 허락한다는 봉공안(封貢案)으로써 국면을 해결지으려 했으나 도요토미는 ① 명의 황녀로써 일본의 후비(后妃)로 삼게 할 것, ② 조선의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③ 감합인(勘合印:貿易證印)을 복구할 것, ④ 조선의 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 등을 요구하였다.

심유경은 이 요구를 명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여 명은 봉공안에 의해 1596년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칙서와 금인(金印)을 보냈는데, 화의는 결렬되고 이듬해 왜군은 재차 침입하게 되었다. 이 때에는 조선도 왜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경상도의 금오(金烏)·공산(公山)·화왕산성(火旺山城)을 비롯하여 각도의 산성을 수축하는 등 군비를 갖추었고 양호(楊鎬)를 경리, 마귀(麻貴)를 제독(提督)으로 한 명의 원군 5만 5000도 즉시 출동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경상도를 중심으로 맴도는 데 그쳤다. 1596년 12월에 고니시군이 부산에 상륙하고 이듬해 1월에는 가토군이 다대포(多大浦)에 상륙하여 양산(梁山)을 함락하고 서생포(西生浦)에 진을 쳤다. 정유재란 때의 왜군 총병력은 14만 1500으로, 수군도 강화되었다. 왜군은 임진년 당시와는 달리 경상·충청·전라도의 완전 점령을 전략으로 하여 전주를 점령한 후 북진할 계획을 세워, 7월 말부터 좌군은 남해(南海)·사천(泗川)·고성(固城)·하동(河東) 방면에서, 우군은 광양(光陽)·순천(順天)·김해(金海)·창원(昌原) 방면에서, 가토는 밀양(密陽)·초계(草溪)·거창(居昌) 등을 거쳐 각기 전주로 향하였다. 왜군은 황석산성(黃石山城)의 싸움에서 고전 끝에 승리를 거두었으나 고령(高靈)에서 상주목사 정기룡(鄭起龍)군에 패한 데 이어 직산(稷山) 싸움에서도 패하여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하고 남하하여 순천·울산 등지의 연해안에 진주하게 되었다. 해전에서는 1597년 1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왜군의 본거지를 공격하지 않고 소극적이라는 죄명으로 하옥되고 원균(元均)이 그 후임이 되었으나 7월의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아 원균과 전라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의 수군이 전멸하였다. 이에 다시 이순신이 수군통제사에 임명되어 남은 12척의 병선으로 전선을 수습하고 전열을 재정비하여 명량(鳴梁)대첩에서 적함 133척을 맞아 격전 끝에 대승을 거두고 다시 제해권을 회복하였다.  

8월 도요토미가 죽자 이를 계기로 왜군은 총퇴각하였다. 왜군의 가토가 울산의 도산성(島山城)에서 퇴각하고 순천의 고니시도 퇴각하려 했으나 이순신의 수군이 이를 차단하자 왜의 수군 300여 척이 이를 후원하려 노량(露梁)에 이르러 최후의 해전이 벌어졌다. 이순신은 명의 수사제독(水師提督) 진린(陳璘)과 합세하여 왜선 200여 척을 격파하여 임진왜란 최후의 이 해전에서 승리하고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이로써 전후 7년간에 걸쳤던 왜란은 조선·명·일본 3국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특히 싸움터였던 조선은 국토가 황폐화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으며 정치·경제·문화·사회·사상 등 각 방면에 걸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따라서 위정자들의 급선무는 전란으로 인한 문물의 파괴, 재력의 탕진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정치·군사적인 면에 있어서는 비변사(備邊司)의 강화와 훈련도감을 비롯한 군사기구의 개편이 시작되었다.

또한 난중에는 각종 무기가 제작되어 이장손(李長孫)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변이중(邊以中)은 화차(火車)를 각기 발명하였고 왜의 조총과 명군이 사용한 서양식 대포인 불랑기포(佛郞機砲)도 모조하여 사용하였다. 전화로 인한 농촌의 황폐, 은결(隱結)의 증가, 국가질서의 문란 등으로 대동법(大同法)의 실시, 면세전(免稅田) 확대의 방지, 균역법(均役法)의 시행, 기민(饑民)을 위한 환곡(還穀)·모곡(耗穀)의 회수책 등이 제도화되었다. 한편 혼란한 사회와 민심의 흉흉함을 틈타 이몽학(李夢學)의 난 등 사방에서 일어나는 민란과 함께 시행된 속오군(束伍軍)제도, 공명첩(空名帖)의 발행 등은 조선의 신분제도 붕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문화적 손실로는 왜병의 방화로 불국사·경복궁 등의 건물과 사고(史庫)에 보관 중이던 역대 왕조의 실록·서적 등이 소실되고 많은 문화재를 약탈당하였다. 한편 전쟁으로 인한 질병의 만연으로 질병퇴치를 위한 의학서인 《동의보감(東醫寶鑑)》이 편찬되었고 사상적인 측면으로는 의병·승병을 통한 애국심의 발로와 자아반성과 함께 명의 내원(來援)에 대한 사대사상이 고조되는 반면에 왜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사상이 더욱 강해졌다.

전란 중에 대두하기 시작한 여진의 청(淸)나라에 의해 명나라가 망하고 일본에서도 도요토미 대신 도쿠가와[德川]의 막부(幕府)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침략의 결과로 조선으로부터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술을 처음으로 도입하게 되었고 포로로 잡아간 도자기 기술자에 의해 획기적으로 요업(窯業)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약탈하여 간 많은 서적은 성리학(性理學) 등 그들의 학문에 크게 기여하였다.

관련이미지

이미지 이전

옥포만 경남 거제시.

이미지 갤러리

출처: doopedia.co. kr

 

병자호란

 

1627년 후금(後金 : 뒤의 淸)의 조선에 대한 1차 침입 때 조선은 무방비 상태로 후금에 당함으로써 후금에 대해 형제의 맹약을 하고 두 나라 관계는 일단락되었다.

한편,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의 요구를 들어 1628년(인조 6) 이후 중강(中江)과 회령(會寧)에서의 무역을 통해 조선의 예폐(禮幣 : 외교관계에서 교환하는 예물) 외에도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당초의 맹약을 위반하고 식량을 강청하고 병선(兵船)을 요구하는 등 온갖 압박을 가해왔다. 그뿐 아니라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에 침입해 약탈을 자행하므로 변방의 백성과 변방 수장(守將)들의 괴로움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후금의 파약(破約) 행위로 조선의 여론은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척화배금(斥和排金 : 후금에 대하여 화의를 반대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격증하게 되었다.

당시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부근까지 공격하면서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君臣)의 의(義)’로 개약(改約)하자고 요청을 해올 뿐 아니라, 황금·백금 1만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종전보다 무리한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까지 요구해왔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그들의 요구에 응하려 하지 않고 화의 조약을 무시하고 후금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려는 움직임까지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1636년 2월에는 용골대(龍骨大)·마부태(馬夫太) 등이 후금 태종(太宗)의 존호(尊號)를 조선에 알림과 동시에 인조비 한씨(韓氏)의 문상(問喪)차 조선에 사신으로 왔는데, 그들이 군신의 의를 강요해 조선의 분노는 폭발하게 되었다.

조정 신하들 가운데 척화(斥和)를 극간(極諫)하는 이가 많아 인조도 이에 동조해 사신의 접견을 거절하고 국서(國書)를 받지 않았으며 후금 사신을 감시하게 했다.

조선의 동정이 심상하지 않음을 알아차린 그들은 일이 낭패했음을 간파하고 민가의 마필을 빼앗아 도주했는데, 공교롭게도 도망치던 도중에 조선 조정에서 평안도관찰사에 내린 유문(諭文)을 빼앗아 본국으로 가져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이 후금에 대한 태도가 무엇인지를 그들도 비로소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고 재차 침입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같은 해 4월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연호를 숭덕(崇德)이라 했으며, 태종은 관온인성황제(貫溫仁聖皇帝)의 칭호를 받았다.

그는 이 자리에 참석한 조선 사신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서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공략하겠다고 협박했다. 이와 같은 청나라의 무리한 요구는 척화의지가 고조되고 있는 조선 조정에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그 해 11월 심양(瀋陽)에 간 조선 사신에게 그들은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을 주창하는 자를 압송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내왔으나 조선에서는 그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이에 청나라는 조선에 재차 침입해왔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경과

청태종은 몸소 전쟁에 나설 것을 결심하고 1636년 12월 1일에 청군 7만, 몽고군 3만, 한군(漢軍) 2만 등 도합 12만의 대군을 심양에 모아 예친왕(禮親王) 대선(代善), 예친왕(睿親王) 다이곤(多爾袞), 예친왕(豫親王) 다탁(多鐸)과 패륵(貝勒) 악탁(岳託)·호격(豪格)·두도(杜度) 등을 이끌고 다음 날 몸소 조선 침입에 나섰다.

9일에 압록강을 건너 다탁은 전봉장(前鋒將) 마부태에 명해 바로 서울로 진격하도록 했다. 마부태는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이 백마산성(白馬山城)을 굳게 수비하고 있음을 알고, 이를 피해 밤낮을 달려 심양을 떠난 지 10여일 만에 서울에 육박했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입했다는 급보가 중앙에 전달된 것은 12일로서 의주부윤 임경업과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장계(狀啓)가 도착한 뒤였다. 보고에 접한 조정에서는 비로소 적의 형세가 급박한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이렇게 빨리 진격해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13일 오후 늦게 재차 장계가 이르러 청군이 이미 평양에 도착했다고 하자 조정은 갑작스런 변란에 황망해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도성 안은 흉흉해 성을 빠져나가는 자들로 줄을 이었다.

다음 14일 개성유수의 치계(馳啓)로 청군이 이미 개성을 지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자 급히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檢察使)로, 부제학 이민구(李敏求)를 부사(副使)로 명하고 강화유수 장신(張紳)으로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직시켜 강화를 수비하도록 했다.

한편, 원임대신(原任大臣) 윤방(尹昉)과 김상용(金尙容)에게 명해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강씨(姜氏), 원손(元孫), 둘째아들 봉림대군(鳳林大君), 셋째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을 인도해 강화도로 피하도록 했다. 심기원(沈器遠)을 상중에서 불러내어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고 호조참의 남선(南銑)을 찬획사(贊劃使)로 삼았다.

인조도 그날 밤 남대문으로 서울을 빠져 나와 강화도로 향했으나, 적정을 탐색하던 군졸이 달려와서 청국군이 벌써 영서역(迎曙驛 : 지금의 서울 은평구 대조동과 불광동 사이)을 통과했으며, 마부태가 기병 수백을 거느리고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해, 한 부대를 보내 양천강(陽川江)을 차단해 강화도로 가는 길이 끊겼다고 보고했다.

인조는 다시 성안으로 들어와 남대문 누각에 앉아 사후 대책을 물으니, 전 철산부사 지여해(池如海)가 정병(精兵) 500을 주면 사현(沙峴)에 나가 청군의 선봉 부대를 무찌르겠다고 했다.

그 말에 여러 신하들은 500의 군사로 적을 시험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반대 의사를 개진했다. 결국,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이 홍제원 청군 진영에 나가 술과 고기를 먹이며 출병의 이유를 물으면서 시간을 지연시키는 사이에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인조 일행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뒤 영의정 김류(金瑬) 등은 본 산성이 지리적으로 불리함을 들어 야음을 타서 강화도로 옮겨갈 것을 역설하므로 다음 15일 새벽에 인조는 산성을 떠나 강화도로 떠나려 했다.

그러나 마침 눈이 내린 뒤라 산 언덕에 얼음이 얼어서 왕이 탄 말이 미끄러져 왕은 말에서 내려 걸어서 갔는데, 여러 번 미끄러져 몸이 편안하지 못해 강화도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산성으로 돌아왔다.

훈련대장 신경진(申景禛)이 서울로부터 뒤따라오니 그에게 동성(東城) 망월대(望月臺)를 지키게 하고, 이영달(李穎達)을 중군(中軍)으로 삼고 총융사 구굉(具宏)에게 남성(南城)을 지키게 했다.

또, 수원부사 구인후(具仁垕)를 부장(副將)으로 삼고 상중에 있던 이확(李廓)을 불러 중군을 삼았으며, 어영대장 이서(李曙)는 북성(北城)을, 수어사 이시백(李時白)은 서성(西城)을 지키고 이직(李稷)을 중군으로 삼았다.

이때 영남의 분방병(分防兵)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채 여주목사 이필원(李必遠), 이천부사 조명욱(曺明勗), 양근군수 한회일(韓會一), 지평현감 박환(朴煥) 등이 약간의 군사를 이끌고 입성했고, 파주목사 기종헌(奇宗獻)이 수백의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구원했다.

이때 성안에 있는 군사는 1만 3000명으로 성첩(城堞)을 지키도록 하고, 도원수·부원수와 각 도의 관찰사와 병사에게는 근왕병(勤王兵)을 모으도록 하는 한편, 명나라에 위급함을 알려 원병을 청했다.

이 때 성안에는 양곡 1만 4300석(石), 장(醬) 220 항아리가 있어 겨우 50여 일을 견딜 수 있는 식량에 불과했다. 청군의 선봉 부대는 12월 16일에 이미 남한산성에 이르고 대신 담태(潭泰)의 군사도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서울에 입성해 그 길로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청태종은 다음해 1월 1일에 남한산성 밑 탄천(炭川)에서 20만의 군사를 포진하고 성 동쪽의 망월봉(望月峰)에 올라 성안을 굽어보며 조선군의 동태를 살폈다. 포위를 당한 성안의 조선군은 12월 18일 어영부사(御營副使) 원두표(元斗杓)가 성안의 장사를 모집, 성을 빠져나가 순찰중인 적군 6명을 죽이고, 동월 20일 훈련대장 신경진의 군이 출전해 또 적군 30명을 죽였으며, 다음날 어영대장 이기축(李起築)이 군사를 이끌고 서성을 나가 적군 10명을 또 죽여 성안에 사기를 올렸다.

그러나 이렇다할 큰싸움없이 40여일이 지나자 성안의 참상은 말이 아니었다. 이러할 즈음 각 도의 관찰사와 병사가 거느리고 올라왔던 관군들은 목적지에 이르기도 전에 무너졌다.

충청도관찰사 정세규(鄭世規)의 군사는 험천(險川)에서 패해 이성현감(尼城縣監) 김홍익(金弘翼), 남포현감(藍浦縣監) 이경(李慶) 등이 전사했고, 경상좌병사 허완(許完)과 경상우병사 민영(閔泳)의 군사도 광주(廣州) 쌍령(雙領)에서 괴멸해 두 병사도 전사했다.

전라병사 김준룡(金俊龍)은 경기 용인 광교산(光敎山)에 이르러 적장 액부양고리(額駙揚古利)를 죽이고 승첩을 거두었으나 뒤에 역습을 당해 수원으로 퇴각한 뒤 전군이 무너졌다.

또, 평안도관찰사 홍명구(洪命耉)는 금화(金化)에서 전사하고 부원수 신경원(申景瑗)이 맹산(孟山) 철옹(鐵甕)에서 사로잡혔으며, 도원수 김자점의 군사가 토산(兎山)에서 패주하고 강원도관찰사 조정호(趙廷虎), 함경남도관찰사 민성휘(閔聖徽)의 군사도 패배해 중도에서 좌절되니, 남한산성은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절망적인 상태가 되었다.

앞서 명나라에 구원을 청한 것도 국내 유적(流賊)으로 인해 원병을 보낼만한 처지가 못되었고, 겨우 등주총병(登州總兵) 진홍범(陳弘範)에 명해 수군을 동원하려 했으나 그것도 바람과 파도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때 경기·호남·경상도 등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서, 경기도에서는 적병이 강화성을 공략할 때 다소의 전과를 거두었고, 호남에서는 전 참의 정홍명(鄭弘溟)이 많은 의병을 이끌고 공주에까지 이르렀으나 이미 화의가 이루어진 뒤라 군사를 파했다.

경상도에서는 김식회(金湜會)의 의병이 여주에서 퇴주하는 경상도관찰사 심연(沈演)의 군사와 함께 조령(鳥嶺)·죽령(竹嶺) 사이를 잠행하다가 청군의 기습이 있다는 와전(訛傳)을 듣고 도산해 실전에 임해보지도 못했다. 또한, 의승군(義僧軍)도 봉기했으나 큰 전공을 세우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상에서 보는 것과 같이 남한산성으로 구원오는 군사가 모두 붕괴되고 성중은 안과 밖이 끊어져서 의지할 곳이 없게 되자 차차 강화론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주화파(主和派)는 주전파(主戰派)와의 여러 차례 논쟁을 거듭했으나, 주전파 역시 난국을 타개할 방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 이조참판 정온(鄭蘊)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강화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1637년 1월 3일 최명길·이식(李植)·장유(張維)로 하여금 회답하는 국서를 초(草)하도록 했는데, 최명길의 글이 공손하다 하여 그것을 답변확정하고 좌의정 홍서봉(洪瑞鳳), 호조판서 김신국(金藎國) 등을 청군 진영에 보내 화호(和好)를 청했다.

그러나 청태종의 답서는 조선 국왕이 친히 성안에서 나와 자기 군문(軍門)에 항복하고 척화주모자 2, 3인을 결박지어보내라는 내용이어서, 조선은 이에 응하지 않고 정론(政論)이 구구해 주저하고 있었다. 이 때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성안에 이르렀다.

강화도 수비를 맡은 검찰사 김경징은 대신이나 대군의 말도 믿지 않고 마음대로 일을 처리해 성안에 있는 피난민이나 섬 사람들의 신임을 얻지 못했으며, 청군이 강화도만은 침입하지 못할 것이라 호언장담을 했다.

강화유수 겸 주사대장 장신은 ‘검찰사의 지휘 명령을 받들 사람이 아니라’고 서로 배척하는 등 알력이 심해 강화 수비에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1월 21일 밤 초경(初更)에 청군이 강화도를 침입하자 김경징은 그제야 놀라서 파수계책을 일르면서 화약과 총탄을 나누어주었다.

부마(駙馬) 윤신지(尹新之)로 대청포(大靑浦)를 지키게 하고, 유정량(柳廷亮)은 불원(佛院)을, 유성증(兪省曾)은 장령(長零)을, 이경(李坰)은 가리산(加里山)을 각각 지키게 하는 한편, 김경징 자신은 진해루(鎭海樓) 아래로 나가서 갑곶(甲串)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군사가 적은데다 새로 모집하는 군사들도 흩어져서 결국 강화도성을 지키기로 했다.

한흥일(韓興一)과 정백형(鄭百亨)을 시켜 성안에 피난온 사람을 이끌고 성첩을 나누어 지키게 하고, 연미(燕尾) 서쪽을 풍덕군수 이성연(李聖淵)이, 연미 북쪽은 개성유수 한인(韓仁)이, 갑곶 아래는 첨지(僉知) 유성증이, 선원(仙源) 이하는 유정량이, 광성 이하는 윤신지가 각각 지켰다.

청군이 나루터에 주둔해 홍이대포(紅夷大砲)를 쏘니 포탄이 물을 넘어 육지 몇 리밖에 떨어졌다. 이를 본 김경징과 이민구는 놀라 부성(府城)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주위의 반대로 들어가지 못했다.

주사대장 장신은 해전을 벌리려다 도중에 퇴각해 싸움을 회피하니 강화도의 위급은 촌각에 달려 있었다. 청군은 복병을 의심해 배를 출발시키지 않고 1척을 먼저 보내 7명을 상륙시켰다. 이것을 본 관군이 조총(鳥銃)을 쏘았으나 화약에 습기가 차서 불발되었다.

적병 7명은 해안을 둘러봐도 사방에 복병이 없자 흰 깃발을 흔들어 부르니 일시에 적의 대군이 밀어닥쳤다. 성의 수비를 맡은 김경징과 이민구는 말을 버리고 나룻배를 타고 장신의 전선에 올라타고 함께 도망하니, 남은 것은 부성 안에 있는 빈궁(嬪宮)과 왕자 및 대신들로 싸움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뿐이었다.

대신들이 명해 부성을 사수할 것을 결의했다. 빈궁이 일의 급박함을 듣고 통곡하며 성을 나가 바다를 건너가려 했으나 비국(備局)이 문을 굳게 지키고 열지 않았다.

이에 내관 김인(金仁) 등을 불러 원손을 보호하고 피신할 것을 부탁해 그들은 원손을 모시고 교동(喬桐)에 이르렀다가 주문도(注文島)로 옮겨 그대로 당진(唐津)으로 향했다.

부성이 함락되자 청군은 성안에 들어와 숙의(淑儀)와 빈궁과 봉림·인평 두 대군 및 대군의 부인을 협박해 나오게 하고, 드디어 군사를 풀어 크게 약탈을 자행하고 관가(官家)와 사가(私家)를 막론하고 모조리 불사르며 살육과 약탈을 자행한 뒤 다시 물을 건너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강화도에서 순절한 사람으로는 원임대신 김상용 등의 관원과 어린이, 부녀자들도 많았다.

한편, 남한산성에서는 적의 포위 속에 있으면서 화(和)·전(戰) 양론이 팽팽이 맞서다가 주화론이 우세해 인조의 출성이 목전에 다가오자 예조판서 김상헌과 이조참판 정온이 화의를 반대 자결을 꾀하려다 실패했다.

이 때 청군은 강화도에서 포로가 된 대군의 수서(手書)와 재신(宰臣) 윤방과 한흥일 등의 장계를 보이면서 독촉했다. 강화도의 함락 사실을 확인한 인조는 드디어 출성을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홍서봉·최명길·김신국 등이 적진을 왕복하며 항복의 조건을 제시하고, 또 청군 진영에서도 용골대·마부태 등의 사신이 우리 성안에 들어와서 조건을 제시한 끝에 다음과 같은 조약에 합의했다.

첫째, 조선은 청에 대해 신의 예를 행할 것. 둘째, 명에서 받은 고명책인(誥命冊印)을 바치고 명과의 교호(交好)를 끊으며 조선이 사용하는 명의 연호를 버릴 것. 셋째, 조선왕의 장자와 차자 그리고 대신의 아들을 볼모로 청에 보낼 것.

넷째, 청이 명을 정벌할 때 조선은 기일을 어기지 말고 원군을 파견할 것. 다섯째, 가도(椵島, 椴島라는 설도 있음.)를 공취할 때 조선은 배 50척을 보낼 것. 여섯째, 성절(聖節)·상삭(上朔)·동지(冬至)·중궁천추(中宮千秋)·태자천추·경(慶)·조(弔) 사신의 파견은 명의 구례(舊例)를 따를 것.

일곱째, 압록강을 건너간 뒤 피로인 중에서 도망자는 전송할 것. 여덟째, 내외제신과 혼인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아홉째, 조선은 신구(新舊) 성원(城垣)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열번째, 올량합인(兀良合人)은 마땅히 쇄환할 것. 열한번째, 조선은 기묘년(1639)부터 세폐를 보낼 것 등이었다.

이상 11조문은 조선으로서는 힘겨운 부담이며 고통이었다. 드디어 1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호곡(號哭) 소리가 산성 안을 가득히 채운 채 서문으로 출성해 한강 동편 삼전도(三田渡)에서 성하(城下)의 맹(盟)의 예를 행한 뒤 한강을 건너 서울로 돌아왔다.

청은 왕자를 비롯한 강화의 부로(浮虜)를 일부 송환한 다음 군중에 유치하였던 조선의 세자·빈궁·봉림대군(뒤의 효종)을 볼모로 삼고 미리 유치했던 척화론의 주모자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을 잡아 제도의 군사를 거두어 심양으로 돌아갔다.

비록, 한달 남짓한 짧은 전쟁 기간이었으나 그 피해는 임진왜란에 버금가는 것이요 조선으로서는 일찍이 당해보지 못한 일대 굴욕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청군은 철수하는 도중 4월에 가도의 동강진(東江鎭)을 공격했는데 이때 청태종은 패륵 악탁과 명나라의 항장(降將) 공유덕(孔有德) 등에 명해 용산(龍山)에서 병선을 만들게 했다.

조선에서도 황해도의 병선을 얻어 그 준비를 갖추었는데, 항복 조건에 따라 조선은 평안병사 유림(柳琳)을 수장(首將), 의주부윤 임경업을 부장(副將)으로 삼아 청군을 도와 싸우게 하였다.

임경업은 척후장 김여기(金礪器)를 몰래 보내 명 제독 심세괴(沈世魁)에게 피하도록 알렸으나, 그는 굴하지 않고 1만의 군사와 함께 역전하던 끝에 전사해 동강진은 17년 만에 완전히 붕괴되었다.

결과

일단 전쟁이 끝을 맺자 전후 처리 문제가 거론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강화도의 실함이 인조의 남한산성 출성(出城)을 재촉케 했으니 우선 강화도 방수에 직임을 맡았던 장수들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강화유수 겸 주사대장(舟司大將)으로 해상의 방어를 맡았던 장신은 바다를 지키지 않고 도주한 죄로 왕명에 의해 스스로 자살하도록 했다.

검찰사로서 강화 수비의 총책을 맡았던 김경징이 사사되었으며, 강화 수비의 부책임자였던 이민구는 영변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충청수사 강진흔(姜晉昕)은 사력을 다해 바다를 지켰으나 억울한 주검을 당했다.

한편, 강화부성이 함락될 때 전현직 관료나 아직 벼슬에 나가지 않은 많은 선비들이 순절했고, 부녀자들이 바다에 뛰어들거나 목을 메어 절개를 지켰는데 난이 끝나자 이들의 충절과 절개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벼슬을 추증하거나 정문(旌門)을 내렸으며, 단(壇)을 설치해 죽은 자들의 영혼을 위로했다. 또 전장에서 싸우다 전사한 자에게까지 휼전(恤典)을 베풀고 시상했다.

난이 끝난 뒤 조선과 청 두나라는 종번관계(宗藩關係)로 굳어져 가면서 청의 위협과 조선의 복종이 강요되었다. 조선은 병자호란을 종속시키기 위한 화의 교섭을 통해 명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청조로부터 ‘조선국왕’으로 책봉됨으로써 군신 관계가 재확인됐다. 이로부터 조선은 속국이 확인된 셈이다.

청은 또 인조가 항복의 예를 행한 삼전도에 청태종의 공덕을 칭송하고 청군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한 비의 건립을 조선에 강요해 어쩔 수 없이 응하게 되었다.

인조가 남한 출성에 앞서 합의한 강화 조약의 기본 원칙에는 연호 문제가 주요 사안으로 답변확정되었다. 그것은 조선이 지금까지 사용해오던 명의 ‘숭정(崇禎)’이란 연호를 버리고 청의 ‘숭덕(崇德)’이라는 연호를 사용한다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에도 수개월 동안은 제대로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다. 이에 청은 청나라의 연호만 쓸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이에 결국 인조는 청과의 불필요한 분쟁을 사전에 막기 위해 공사 문서에 청나라 연호인 숭덕을 사용할 것을 내외에 명했다. 그러나 개인 문서나 제향(祭享)의 축사(祝詞)에는 의례히 명의 연호가 사용되고 있다.

청에 대한 배척 의식이 고조되어가는 과정에서 청은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선군의 출병을 요구해왔다. 그것은 청태종이 명의 금주(錦州)를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파병 반대 여론이 강했으나 군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청군과 함께 참전한 조선군의 상장 임경업은 청군들이 모르게 40여척의 병선을 중도에서 빼돌리고 남은 80여 척의 배만 이끌고 대릉하(大凌河)·소릉하(小凌河) 하구를 거쳐 개주(蓋州)에 도착한 다음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명·청 양군의 대결을 관망하고 있었다.

이를 알아챈 청태종은 임경업에게 조선 전함 3척을 명과의 경계선인 등주(登州) 앞바다에 척후로 보내어 명군의 움직임을 살피게 하고 임경업의 조선 수군을 철저히 감시했다.

그러나 임경업은 척후선으로 명군과 은밀히 내통해 청군의 동태를 명의 진영에 보고하고 조선의 파병이 불가피한 것이었음을 알리게 하였다.

임경업의 반청 행위가 탄로되자 청태종은 임경업의 군대를 조선에 돌려보내 강화 조약의 불이행을 엄중히 항의했다. 1641년 청태종은 또 조선에 대해 원군의 파견을 요청해 조선은 2,000명에 달화는 포수·기병·마부 등을 동원하여 유림(柳琳)을 주장으로 삼아 출동하게 했다.

조선군은 심양에 도착해 청태종의 열병을 받고 5월에 청군과 함께 금주 싸움에 참가했다. 그러나 명·청 양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전개하는데도 조선군의 주장 유림은 병을 이유로 싸움에 나가지 않고 은밀히 군중에 명해 공포를 쏘아 명군에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했다.

조선군이 대명전에서 싸움을 기피하는 것을 알아차린 청은 조선군의 주장을 교체시킬 것과 포수 500명을 증원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조선 정부는 통제사 유정익(柳廷益)을 유림의 후임으로 삼아 포수 500명을 이끌고 금주로 향하도록 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조선 원군의 파병은 청의 일방적인 강압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조선군이 전투에 임하는 자세는 지극히 소극적이었다. 따라서 조선군의 협력을 얻어 명을 치자는 청의 의도는 실효를 거둘 수 없었고 조선의 반감만 증폭시켜 청에 대한 적개심만 조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후에 처리해야 될 심각한 문제는 청군에게 강제 납치된 수만(다른 기록에는 50만)인의 속환 문제였다. 특히, 청군도 납치한 남녀노소의 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속가(贖價: 포로를 풀어주는 대가로 내는 돈)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실과 양반의 부녀를 되도록 많이 잡아가려 했다.

그러나 대부분 잡혀간 사람들은 속가도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속가는 싼 경우 1인당 25 내지 30냥이나, 대개의 경우 150 내지 250냥이었고, 신분에 따라 비싼 것은 1,500냥에 이르렀다.

여기에 순절하지 못하고 살아서 돌아온 것은 조상에게 죄를 짓게 된다고 해 속환 사녀(士女)의 이혼 문제가 정치·사회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10년의 볼모 생활을 하다가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은 1645년(인조 23)에 환국했으나 세자는 2개월 만에 죽었다.

그리고 인조의 뒤를 이은 봉림대군은 왕위에 오른 뒤 볼모 생활의 굴욕을 되새기며 재야의 인사를 발탁하고 군비를 확장하는 등 북벌의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 역시 재위 10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

 

1임진왜란)  일본에 군주들에 다툼에서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나 도요토미히데요시는 막강한 군사력을 가만히 나두면 반역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전쟁을 일으키려 합니다

 

조선은 눈치를 채고 사절단을 보내지만 한쪽에서는 도요토미는 그 정도에 그릇이 되지않고 오히려 처드러 온다면 우리가 일본을 점령하면 된다고 하였고 한쪽에서는 이이에 말에이하여 10만 병력을 보내서 방어를 철저하게해야한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선조는 그 문제를 논하지 않게하고 1592년 4월 13일에 부산진성을 공격합니다

 

2병자호란)   명나라는 7년간에 임진왜란이 있을때 우리를 도와줌으로써 명에 경제가 바닥을 드러내면서 반란이 일어나고 후청이라는 나라가 생겼다. 후에 이 나라가 청나라가 되고 명나라에 버팀목은 조선이라고 생각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2.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났을때 조선의 상황

 

1임진왜란) 당시 건국된지 100일이 됬을 적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고 추정한다.

그리고 위에 나왔듯이 아무대비도 하지않았다.

 

2병자호란)  7년간에 임진왜란과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조선은 매우 불안정된 상태였다. 우선은 문화재가 많이 없어졌다는것 부터 이미 땅은 황폐해져있었다

 

3. 임진왜란때 의병들의 활약

 

1)  우선 크고 작은 의병의 수는 8000여개였다고 한다

 

대표적인 의병장들의 이름은 정문부, 김면, 곽재우, 고경명, 조헌 ,영규대사 , 유정(사명당)

등 많다. 또한 관군은 정발 ,송상현 ,신립 ,이일 ,김명원 ,권율 ,이순신 ,김시민 등등이 있다.

3번에 대한 답은 아니지만 의병말고도 이순신에 연속된 해전에 승전이 바다로는 식량을보내고 군사는 진군하려하던 일본의 전술을 하지못하게했기에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영원히 지배당할 위기를 넘겼다고 볼수있죠 물론 1900년대에 식민지가 됬지만

 

4.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남긴 공통점

 

1)  뭐니 뭐니해도 일본과 명나라가 아닌 조선이 전쟁터였다는 것이겠죠^^

명나라도 자신들의 땅이 전쟁터가 되지 않게하려고 원병을 보낸거였고요..

그리고 두 차례의 큰 전쟁으로인하여 많은 문화재가 손실되었고 땅이 황폐해지고

사람이 많이 죽은거에요



해양에서는 이순신이 바다를 지켰고 식량이 육지로 못들어 오게 막았다

이순신은 겨우 5척으로 그 많은 일본배들을 유인하여, 포위해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이 패한후.일본은 조선을 뺀 명나라와 협상을했지만, 3년넘게 걸린 이 협상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결국 조선은 임진왜란에서 일본을 크게 무찔렀다

병자호란

 

1.정묘호란-1627년 1월 후금(여진족)이 명나라와 친선을 끊고 후금과 같이 잘지내보면 어떻냐고 라며

간단하게 지나갔던 전쟁이다

 

2.병자호란-1차때 정묘호란때 인조가 알았다고 했는데,명나라와 계속 친하게 지내자, 2차로 들어온다.

인조는 나라를 버리고 남한산성 안으로 들어갔지만 당시 50일치의 식량밖에 없었고,청나라(후금)은 남한산성을 둘러싸서 기다린다결국 인조는 항복을 하게된다.


임진왜란과병자호란에대해서...(급해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대한것과, 사진,동영상도 주세요. 임진왜란 정의 임진왜란이란 임진년(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된 전쟁으로 그 후 1598년까지 7년 동안 전쟁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내공 50)

... 제가 학교숙제를 하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달라진 조선의 상황에 대해서 잘 써주시기 바래요~ 내일 까진데, 정말 급해요! 내공 50 겁니다! 서기 1592년 4월 일본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간단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간단히 정리해주세요 ㅠㅠ 정말 간단하게 핵심단어가... 이전투를 끝으로 임진왜란은 막을 내리게 되죠 병자호란 우선 병자호란에 대해서 말하죠 좀...

임진왜란과병자호란대해서 내공100

급해요. a4용지 한장을 가득채울정도로 조사해주시면 내공100을 드리겠어요.. 병자호란의 원인과 시대적 배경 -명나라와 후금(나중에 '청'이라고 나라의 이름을 바꾼다.)사이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수행평가

... -중심인물 -내용 -결과 급해요 !!!!!!!!!!!!!!!!!!!!!!! 임진왜란 임진왜란 발생 당시의... (가토군)에 대해서 동시에 공격하는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왜교성 전투로 패배하고...

알려주세요! 급해요!!!!!!!! 9월26일까지

... 저 급해요 최대한 빨리! 9월 26일까지 꼭 올려주세요!... 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도성인 위례성으로 보는 견해와...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도성 외곽을...

한국 조선 대해서 알려주세요!!

한국 조선 대해서 알려주세요!! 급해요ㅠㅠ 조선에 대해 1. 조선은 14세기 초에서 20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 성리학에 대한 반성으로 실학이 크게 일어났으나...

실학의 발생배경~~!!!(급해욧!!)내공 50!!

... 도움되시길 바랍니다*^^* 신고 의견 쓰기 re: 실학의 뜻과 배경에 대해서 자세히... · 생겨난 배경 : 1)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어려워진 나라를 잘 살게 하고자...

호란때의 포로들

... 포로들에 대해서 가르쳐주세요!! 외워서 발표를 하는건데요 발표를 하면 대략 1분정도되는 길이로요!!! ㅠㅠ급해요!!!!!!!! 내공 30걸어요!! 왜 요즘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