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 대왕의 업적 10가지

광개토 대왕의 업적 10가지

작성일 2011.07.07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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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담탱이가 광개토 대왕의 업적 10가지를 조사해 오라내요 그래서 지금 할수 없이 지금 이거 하고 있어요 ㅠㅠ 제발 오늘까지 올려주세요 내공 있어요


#광개토 대왕의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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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개토대왕의 內治(내치)

- 삼국사기에서 광개토대왕 재위 22년 동안 광개토대왕이 남긴 내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재위 2년(392)에 아홉개의 절을 세운 것과 재위 16년(406)의 궁궐의 중축과 수리 그리고 재위 18년(408) 독산성 등 여섯 성을 쌓고 평양 주민을 이주한 것과 그 해 8월에 남쪽 지방을 순행한 것이 전부다.

- 먼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대왕조'의 기록을 제시해 둔다. 2년(392) 평양에 아홉개의 절을 창건하였다. 16년(406) 봄 2월에 궁궐을 중축 수리하였다. 18년(408) 가을 7월에 나라 동쪽에 독산 등 여섯개 성을 쌓고 평양 주민들을 옮겼다. 화려한 광개토대왕의 외치에 비해 내치가 이처럼 초라하게 나타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왕의 외치에 따른 업적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나타난 상대적인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고구려의 기본적인 내치가 왕 이전에 이미 충분히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즉 광개토대왕의 조부인 소수림왕 시대에 이미 국가체제가 전반적으로 정비되었던 것이다. 불교의 국가적 공인, 태학 설립, 율령 반포 등 고구려를 동북 아시아의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하는 내부 정비가 이미 소수림왕 때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광개토대왕은 바로 이러한 기틀 위에서 다져진 힘을 외부로 마음껏 발휘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이 짤막한 기록에 보이는 광개토대왕의 내치는 상당한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392년 평양에 아홉개의 절을 세운 것은, 불교를 국가적으로 공인한 조부 소수림왕의 정책을 계승한 것으로 국가와 국민의 정신적 통일을 꾀하기 위한 종교정책의 일환으로 보인다. 이는 부왕 고국양왕 재위 9년째인 392년 불교를 숭배하여 복을 받게 하라는 교서를 내린 정책과도 맥을 같이 한다고 하겠다. 아홉개의 절을 평양에 창건했다는 사실은 평양의 중요성도 아울러 인식케 한다. 406년 궁궐의 중축과 수리는 커져가는 국가의 규모와 정치의 효율성을 위한 조치로 보이며, 이 역시 부왕 고국양왕이 392년 사직을 세우고 종묘를 수리케 한 정책에 뒤 이은 상당히 중요한 조치로 생각된다. 그리고 408년 7월 나라 동쪽에 독산성 등 여섯개의 성을 쌓고 평양 주민을 이주시킨 조치 역시 매우 의미심장한 조치이다. 이에 따라 평양에 대해서도 모종의 조치가 뒤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이주 정책을 실시한 바로 그 다음달인 8월에 왕이 친히 남쪽 지방을 순행하고 있는 사실에서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그 아들 대인 장수왕이 재위 15년째인 427년에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것도 광개토대왕 때 이미 그 시초가 마련되었기에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평양의 중요성이 광개토대왕 때에 와서 부각되고 있다는 사실도 위 짤막한 기록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은 이러한 의미있는 내치와 외치를 통해 영토확장과 국내안정을 동시에 도모했고, 결과적으로 그 아들인 장수왕대에 고구려의 최대 판도가 연출되고 그 후 약 2백년간 태평성세를 이루는 기초가 닦여졌다.

2. 광개토대왕의 外治(외치)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은 '國岡上廣開土境平安 好太王(국강상광개토경평안 호태왕)'으로 불렸다. 또 國內城(국내성) 부근에서 발견된 牟頭婁墓(모두루묘)의 墨書銘(묵서명)에는 '國岡上廣開土地好太聖王(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으로 부르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廣開土王(광개토왕)'이라 하였다. 모두가 국토를 넓힌 왕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들이라 할 수 있다.

- 종래 광개토대왕의 외치에 대한 논의는 북진적 영토확장을 강조하던 경향과 질적인 측면에서 남진적 성격을 강조하는 경향이 대립되는 양상을 보였다. 북진적 성격에 대한 강조는 일제 시대 독립투쟁의 일환에서 민족주의 사가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는 오늘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반면에 고구려 대외정책을 입체적으로 검토하여 광개토대왕의 외치가 주로 남진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밝힌 연구도 나왔다.

광개토대왕의 외치는 그 후 장수왕의 대외정책의 성격과 평양천도로 미루어 볼 때 남변에 상당히 큰 중점을 두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남진 정책이 제대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서변과 동북변, 즉 중국과 북방 민족에 대한 정책이 선행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의 외치에 대해서는 이 양자를 계기적으로 이해할 때 그 진상을 바르게 파악할 수 있으며, 광개토대왕의 업적도 이에 따라 어떤 왜곡이나 편향없이 평가될 것이다.

(1) 서변정책

- 광개토대왕의 즉위 당시 고구려의 서변 정세는 고구려에 상당히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 西晉(서진) 왕조의 내부에서는 이른바 '8왕의 난'이라는 제왕들간의 정권쟁탈전이 벌어져 결국은 361년 서진이 멸망하고 말았다. 이후 중국 역사상 '5胡 16國(5호 16국)', '南北朝 時代(남북조 시대)'로 불리는 혼란기가 초래되었다. 이 혼란은 그로부터 약 300년 간 계속되었다.

- 이러한 정세에 따라 고구려 서변에서는 4세기에서 5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에 前燕(전연:337 370) 前秦(전진:350 394) 後燕(후연:384 407) 北燕(북연:407 436)이 잇달아 일어났다 망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밖에도 南燕(남연:398 410) 西燕(서연:384 394) 前凉(전양:317 376) 後凉(후양:386 403) 南凉(남양:397 414) 北凉(북양:401 414) 西凉(서양:400 421) 등이 잇달아 생멸했다. 광개토대왕의 서변 개척에 관한 기록으로는 비문에서 永樂 5年(영락 5년:395) 碑麗(거란) 정벌과 영락 17년(407) 후연에 대한 정벌을 찾을 수 있고, {삼국사기}에서는 재위 원년의 거란 정벌을 들 수 있다.

(2) 남변 정책

- 고구려의 남변 정책은 광개토대왕의 즉위 초부터 주로 백제를 주된 대상으로 하여 적극적으로 단행되고 있다. 여기에 왜와 신라가 한데 어우러져 상당히 복잡한 양상을 띤다. 기록에서도 나타나다시피 고구려의 남변 정책의 주요 대상은 백제로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 왜와 신라가 얽혀 있는 상황이다. 백제는 일찍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위협해 왔다. 특히 근초고왕은 371년(고구려 고국원왕 41년) 3만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고구려의 남변 정책에 있어서 백제라는 존재는 눈엣가시와 같았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의 남변 정책이 백제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비문에 백제 및 백제와 손잡은 왜를 百殘이나 倭寇(賊)로 표현하고 있는 것도 과거 백제에게 당한 수모를 갚는다는 의식의 발로일 것이다.

- 한편 백제는 직접 고구려를 공격하는 외에도 왜와 연계하여 신라를 침공하는 우회전략으로 고구려에 압박을 가했고, 곤경에 처한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396년의 공격으로 한강 유역까지 내려가 백제에 대한 주도권을 크게 장악한 고구려는 400년 신라 구원을 계기로 신라와 주변 지역에 대한 영향력도 확대했으며, 404년 왜를 크게 격파하여 한반도는 물론 해상권에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장수왕 때 백제를 공격해 개로왕을 살해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나 중원 고구려비가 설 수 있었던 힘도 실은 광개토대왕 시대에 이미 마련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종래 비문의 辛卯年 기사는 마치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식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 특히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다. 왜구의 공적비가 아닌 이상 이런 해석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결국 신묘년 기사의 왜를 둘러싼 여러 논쟁들은 고구려 남변 정책의 큰 틀 안에서 합리적으로 이해해야 제 가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앞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고구려의 남변 정책은 광개토대왕 당시부터 상당히 치밀하게 준비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쌓은 일곱개의 성이나 평양 주민의 이주정책 그리고 대중국 정책 등이 모두 계기적으로 연결되어 고구려의 남변 정책에 반영되었다고 할 것이다.

(3) 동북변 정책

- 기원전 1세기 말 이후 계속되어온 고구려와 부여간의 통합 전쟁은 5세기 말인 494년 경에 부여왕이 "처자를 데리고 와서 나라를 바치고 항복함"에 이르러 고구려의 승리로 끝나는데, 승리의 결정적인 주역은 역시 광개토대왕이었다. 이 부여에 대해서는 한반도 동북부에 비정하는 종래의 설이 있었으나 최근의 고고 발굴성과에 따른 부여 전기의 왕성 확인 등으로 볼 때 고구려 동북부에서 그 존재를 찾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는 부여의 넓은 지역을 개척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 광개토대왕 당시의 동북변에 대한 정책의 모습을 이 단편적인 기록만으로 확인하기는 어렵겠지만, 고구려가 서변과 남변에 대한 확장 정책과 함께 동북변에 대한 관심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광개토대왕의 대외정책은 서, 남, 동북 모든 방면에 걸쳐 효율적으로 추진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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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주지역으로 영토를 넓협습니다

2.백제의 10개의 성을 빼앗고 관미성도 함락됩니다.

3.백제 북쪽 10개의성(황해도지역)을 함락시키고 고구려 북쪽 거란을 정복합니다

4.평양에 9개의 사찰을 건립, 진무가 이끄는 백제1만대군을 막아내요

5.고구려 남쪽의 수곡성이 위기에 쳐했으나, 정예기병을 보내 막아냈답니다

6.수륙 양쪽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의성 58개를 함락시키고 한강유역을 차지하였고요

7.숙신을 정복하고 신라를 굴복시켰는데 이 때부터 신라가 고구려에 조공을 바쳤다고 합니다

8.백제의 요구를 받아들여 신라를 침략한 왜구를 격퇴하고요, 고구려군이 남쪽에 있는동안 침략해온 북쪽의 후연군에 반격을 하여 고구려의 신성과 남소성을 다시 회복합니다

9.남쪽국경에 침입한 백제,왜 연합군을 격퇴해요

10.북쪽국경을 침략한 후연군을 격퇴합니다

11.후연이 망하고 북연이 등장하자 북연을 고구려에 굴복시키고, 백제를 다시 공격하여 6개의 성을 함락시킵니다.

12. 동부여와 연해주를 공격하여 64개의 성을 획득합니다

이상 허접한 답변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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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 학원 담탱이가 광개토 대왕의 업적 10가지를 조사해 오라내요 그래서 지금 할수 없이 지금 이거 하고 있어요 ㅠㅠ 제발 오늘까지 올려주세요 점수 있어요

 

 

 

내. 광개토대왕 우리나라 역사의 자존심이죠.

 

내 순서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1.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의 58개성을 함락 시키고 한강 북쪽의 땅을 차지하였다.

 

2.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신라에 쳐들어온 왜.백제.가야연합군을 물리쳤다.

 

3. 동예를 통합하였다.

 

4. 중국연나라의 모용희를 반격하여 700여리의 땅을 탈취하였다.

 

5. 동부여를 정벌하였다.

 

6. 후연을,  요동땅을 점령했다.

 

7. 거란을 정벌하였다.

 

8. 평양에서 9사를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였다.

 

9. 숙신을 정벌하였다.

 

10 . 대방에 침입한 백제,왜 연합군을 섬멸했다.

 

11.  만주지역으로 영토를 넓혔다.

 

12 .  연해주 지역으로 영토를 확대하였다.

 

13.  말갈을 정벌했다.

 

14. 성왕과 태왕의 호칭을 사용하였다.

 

 

이중에서 10가지를 쓰시면되고요.

 

광개토대왕에대해 더 자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와! 이런넓은땅이! 우리나라 역사에 있다니!

정말 놀랍지 않씁니까?

 

만약.. 대륙 삼국설이 진실이라면 우리나라 역사는 장난아닐껄요 ㅇㅅ;;

 

 

더 자세한 걸.. 아실려면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1886 

 

이 곳에 들어가셔서 더 자세하게 알으셔도됩니다. 정말 멋있어용!

 

고구려의 제19대 왕인  광개토대왕의  생존시의  칭호는  영락대왕이었다.  11세에
 태자로  책봉되고, 16세 때에  왕위에 올랐다.  391년에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영락'이라 함으로써  중국과  대등함을 보였다.  396년에  백제를 쳐서  한강 이북을
 차지하고,  400년 이후  여러 차례  연나라와 싸워서  북으로 영토를 넓혔다.
 또한,  5만의 군대를  파견하여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무찔렀다.  이리하여  고구려
 는  요동을  확보함으로써  만주 지방의  주인공
이 되었으며,  남쪽으로는  그 세력
 이  한강  상류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이렇게  고구려의  땅을 넓혀  놓았을 뿐만 아니라,  나라
안의   정치에도  관심을 기울여  정치 제도의  정비에도  노력
하였다.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후세  사람
들은  그를  고구려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꼽는다.  그의 능
의 위치는  자세하지 않으나,  414년에  장수왕이  
만주의
지안 현에  세운  광개토대왕의  비석에는  그의 생애와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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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구려의 독자적인 연호 ' 영락'을 제정해 고구려가 중원을 따르지 않음을 선포한다.
2. 관미성을 포함한 40여개 성을 공략해 백제를 복속시킨다.
3. 신라와 동맹을 맺어 신라를 복속시킨다.
4. 한반도를 위협하던 일본 해적을 토벌한다.
5. 고구려의 영토를 크게 넓혀 요서지방, 요북지방, 요동지방에 닿게 한다.
6. 고구려의 적국인 후연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7. 고구려 주위의 4개의 오랑캐를 토벌한다.
8. 한강을 차지해 한반도를 재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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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개토대왕의 內治(내치)

- 삼국사기에서 광개토대왕 재위 22년 동안 광개토대왕이 남긴 내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재위 2년(392)에 아홉개의 절을 세운 것과 재위 16년(406)의 궁궐의 중축과 수리 그리고 재위 18년(408) 독산성 등 여섯 성을 쌓고 평양 주민을 이주한 것과 그 해 8월에 남쪽 지방을 순행한 것이 전부다.

- 먼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대왕조'의 기록을 제시해 둔다. 2년(392) 평양에 아홉개의 절을 창건하였다. 16년(406) 봄 2월에 궁궐을 중축 수리하였다. 18년(408) 가을 7월에 나라 동쪽에 독산 등 여섯개 성을 쌓고 평양 주민들을 옮겼다. 화려한 광개토대왕의 외치에 비해 내치가 이처럼 초라하게 나타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왕의 외치에 따른 업적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나타난 상대적인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고구려의 기본적인 내치가 왕 이전에 이미 충분히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즉 광개토대왕의 조부인 소수림왕 시대에 이미 국가체제가 전반적으로 정비되었던 것이다. 불교의 국가적 공인, 태학 설립, 율령 반포 등 고구려를 동북 아시아의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하는 내부 정비가 이미 소수림왕 때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광개토대왕은 바로 이러한 기틀 위에서 다져진 힘을 외부로 마음껏 발휘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이 짤막한 기록에 보이는 광개토대왕의 내치는 상당한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392년 평양에 아홉개의 절을 세운 것은, 불교를 국가적으로 공인한 조부 소수림왕의 정책을 계승한 것으로 국가와 국민의 정신적 통일을 꾀하기 위한 종교정책의 일환으로 보인다. 이는 부왕 고국양왕 재위 9년째인 392년 불교를 숭배하여 복을 받게 하라는 교서를 내린 정책과도 맥을 같이 한다고 하겠다. 아홉개의 절을 평양에 창건했다는 사실은 평양의 중요성도 아울러 인식케 한다. 406년 궁궐의 중축과 수리는 커져가는 국가의 규모와 정치의 효율성을 위한 조치로 보이며, 이 역시 부왕 고국양왕이 392년 사직을 세우고 종묘를 수리케 한 정책에 뒤 이은 상당히 중요한 조치로 생각된다. 그리고 408년 7월 나라 동쪽에 독산성 등 여섯개의 성을 쌓고 평양 주민을 이주시킨 조치 역시 매우 의미심장한 조치이다. 이에 따라 평양에 대해서도 모종의 조치가 뒤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이주 정책을 실시한 바로 그 다음달인 8월에 왕이 친히 남쪽 지방을 순행하고 있는 사실에서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그 아들 대인 장수왕이 재위 15년째인 427년에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것도 광개토대왕 때 이미 그 시초가 마련되었기에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평양의 중요성이 광개토대왕 때에 와서 부각되고 있다는 사실도 위 짤막한 기록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은 이러한 의미있는 내치와 외치를 통해 영토확장과 국내안정을 동시에 도모했고, 결과적으로 그 아들인 장수왕대에 고구려의 최대 판도가 연출되고 그 후 약 2백년간 태평성세를 이루는 기초가 닦여졌다.

2. 광개토대왕의 外治(외치)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은 '國岡上廣開土境平安 好太王(국강상광개토경평안 호태왕)'으로 불렸다. 또 國內城(국내성) 부근에서 발견된 牟頭婁墓(모두루묘)의 墨書銘(묵서명)에는 '國岡上廣開土地好太聖王(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으로 부르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廣開土王(광개토왕)'이라 하였다. 모두가 국토를 넓힌 왕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들이라 할 수 있다.

- 종래 광개토대왕의 외치에 대한 논의는 북진적 영토확장을 강조하던 경향과 질적인 측면에서 남진적 성격을 강조하는 경향이 대립되는 양상을 보였다. 북진적 성격에 대한 강조는 일제 시대 독립투쟁의 일환에서 민족주의 사가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는 오늘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반면에 고구려 대외정책을 입체적으로 검토하여 광개토대왕의 외치가 주로 남진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밝힌 연구도 나왔다.

광개토대왕의 외치는 그 후 장수왕의 대외정책의 성격과 평양천도로 미루어 볼 때 남변에 상당히 큰 중점을 두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남진 정책이 제대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서변과 동북변, 즉 중국과 북방 민족에 대한 정책이 선행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의 외치에 대해서는 이 양자를 계기적으로 이해할 때 그 진상을 바르게 파악할 수 있으며, 광개토대왕의 업적도 이에 따라 어떤 왜곡이나 편향없이 평가될 것이다.

(1) 서변정책

- 광개토대왕의 즉위 당시 고구려의 서변 정세는 고구려에 상당히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 西晉(서진) 왕조의 내부에서는 이른바 '8왕의 난'이라는 제왕들간의 정권쟁탈전이 벌어져 결국은 361년 서진이 멸망하고 말았다. 이후 중국 역사상 '5胡 16國(5호 16국)', '南北朝 時代(남북조 시대)'로 불리는 혼란기가 초래되었다. 이 혼란은 그로부터 약 300년 간 계속되었다.

- 이러한 정세에 따라 고구려 서변에서는 4세기에서 5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에 前燕(전연:337 370) 前秦(전진:350 394) 後燕(후연:384 407) 北燕(북연:407 436)이 잇달아 일어났다 망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밖에도 南燕(남연:398 410) 西燕(서연:384 394) 前凉(전양:317 376) 後凉(후양:386 403) 南凉(남양:397 414) 北凉(북양:401 414) 西凉(서양:400 421) 등이 잇달아 생멸했다. 광개토대왕의 서변 개척에 관한 기록으로는 비문에서 永樂 5年(영락 5년:395) 碑麗(거란) 정벌과 영락 17년(407) 후연에 대한 정벌을 찾을 수 있고, {삼국사기}에서는 재위 원년의 거란 정벌을 들 수 있다.

(2) 남변 정책

- 고구려의 남변 정책은 광개토대왕의 즉위 초부터 주로 백제를 주된 대상으로 하여 적극적으로 단행되고 있다. 여기에 왜와 신라가 한데 어우러져 상당히 복잡한 양상을 띤다. 기록에서도 나타나다시피 고구려의 남변 정책의 주요 대상은 백제로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 왜와 신라가 얽혀 있는 상황이다. 백제는 일찍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위협해 왔다. 특히 근초고왕은 371년(고구려 고국원왕 41년) 3만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고구려의 남변 정책에 있어서 백제라는 존재는 눈엣가시와 같았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의 남변 정책이 백제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비문에 백제 및 백제와 손잡은 왜를 百殘이나 倭寇(賊)로 표현하고 있는 것도 과거 백제에게 당한 수모를 갚는다는 의식의 발로일 것이다.

- 한편 백제는 직접 고구려를 공격하는 외에도 왜와 연계하여 신라를 침공하는 우회전략으로 고구려에 압박을 가했고, 곤경에 처한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396년의 공격으로 한강 유역까지 내려가 백제에 대한 주도권을 크게 장악한 고구려는 400년 신라 구원을 계기로 신라와 주변 지역에 대한 영향력도 확대했으며, 404년 왜를 크게 격파하여 한반도는 물론 해상권에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장수왕 때 백제를 공격해 개로왕을 살해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나 중원 고구려비가 설 수 있었던 힘도 실은 광개토대왕 시대에 이미 마련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종래 비문의 辛卯年 기사는 마치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식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 특히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다. 왜구의 공적비가 아닌 이상 이런 해석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결국 신묘년 기사의 왜를 둘러싼 여러 논쟁들은 고구려 남변 정책의 큰 틀 안에서 합리적으로 이해해야 제 가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앞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고구려의 남변 정책은 광개토대왕 당시부터 상당히 치밀하게 준비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쌓은 일곱개의 성이나 평양 주민의 이주정책 그리고 대중국 정책 등이 모두 계기적으로 연결되어 고구려의 남변 정책에 반영되었다고 할 것이다.

(3) 동북변 정책

- 기원전 1세기 말 이후 계속되어온 고구려와 부여간의 통합 전쟁은 5세기 말인 494년 경에 부여왕이 "처자를 데리고 와서 나라를 바치고 항복함"에 이르러 고구려의 승리로 끝나는데, 승리의 결정적인 주역은 역시 광개토대왕이었다. 이 부여에 대해서는 한반도 동북부에 비정하는 종래의 설이 있었으나 최근의 고고 발굴성과에 따른 부여 전기의 왕성 확인 등으로 볼 때 고구려 동북부에서 그 존재를 찾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는 부여의 넓은 지역을 개척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 광개토대왕 당시의 동북변에 대한 정책의 모습을 이 단편적인 기록만으로 확인하기는 어렵겠지만, 고구려가 서변과 남변에 대한 확장 정책과 함께 동북변에 대한 관심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광개토대왕의 대외정책은 서, 남, 동북 모든 방면에 걸쳐 효율적으로 추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광개토 대왕의 업적 10가지

학원 담탱이가 광개토 대왕의 업적 10가지를 조사해 오라내요 그래서 지금 할수 없이 지금 이거 하고 있어요 ㅠㅠ 제발 오늘까지 올려주세요 내공 있어요 1. 광개토대왕의...

내물왕의 업적을 좀 알려주세요

저는 내물왕의 업적을 약 10가지 정도 찾고있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업적도 괜찮으니 될... 7.광개토대왕의 도움을 받아 왜를 물리침. 8.서라벌(경주)와 근처 지역에...

중2 국사 업적요;;

저 중2 국사 삼국시대 업적10가지 적어주세요!!! 내일까지 적어주세요!! 지금... 400, 광개토대왕의 왜군 격파(광개토대왕) 427 평양 천도(장수왕) 475 한성 함락(장수왕)...

삼국시대 대표유물좀요 ㅜ.ㅜ10가지...

... 4.광개토대왕비 :장수왕이 아버지인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가리기위한 비 5.수렵도 : 고구려인의 씩씩한 기상을 엿볼수있는 벽화 ▶ 백제 1.정림사지 :정림사지는 백제의...

삼국시대&고려시대의 유뮬 10가지

삼국시대 유물 10가지하고요 고려시대 유물 10가지를 알고싶어서... 이러한 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비석이 광개토대왕비이다. 이 비석은...

6학년 사회 1학기 숙제여!

... 고구려의 유물 10가지와 쓰임, 미친영향 2. 백제의 유물 10가지와 쓰임, 미친영향 3.... 광개토 대왕비 장수왕 2년(414)에 19대 임금인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아유빨리요사회고구려문화재요!...

제발숙제좀고구려문화재 사진말고설명만고구려문화재10가지정도 고구려의 문화재... 이 비는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長壽王)이 왕 2년(414년)에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고구려 유물

... 유물 10가지 부탁드립니다 급해요 빨리 부탁드릴게요 내공은 잇는 거 다... 호우명 그릇 :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적혀 있는 그릇 5.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 6. 성석편 7....

우리나라 위인의 업적과 훌륭한점

... 한 10가지 이상 정도 간단하게 적어주세여.... 사람들은 광개토대왕이라고 하지만 원래이름은... 그의 업적으로는 고구려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고 왕권강화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