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신라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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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1.05.31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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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산라문화제의문화제를간단히이름,만들어진시기로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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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문화재)

 

1.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


종 목  국보  제85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한남동 747-18 (리움미술관) 
시 대 고구려


1930년 황해도 곡산군 화촌면 봉산리에서 출토되어 현재는 리움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불상으로 높이 15.5㎝이다. 하나의 커다란 광배(光背)에 본존불과 좌우보살상을 조각한 형태의 삼존불로 현존하는 같은 형식의 불상 중에서 가장 크다.


좌우의 보살상은 본존불보다 훨씬 작게 만들어 광배의 끝에 겨우 매달린 듯 보이는데, 이는 본존불을 한결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본존불의 가슴과 광배의 오른쪽 끝에 약간의 흠집이 있을 뿐,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본존불은 얼굴이 풍만하고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으며,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두껍게 표현되어 있으며, 옷자락은 양 옆으로 펼쳐지면서 발목까지 덮고 있다. 오른손은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은 내려서 손끝이 아래로 향하면서 손바닥을 보이고 있다. 광배는 불상과 분리되며 본존불의 등 뒤에 달려있는 뾰족한 촉으로 고정시켜 준다.


배 모양의 광배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표현하였고, 그 안에 연꽃무늬, 덩굴무늬, 인동초무늬를 새겼다. 머리광배와 몸광배의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새기고, 그 사이에는 작은 부처를 조각하였다. 광배의 아래쪽 끝부분에 새겨진 두 협시보살은 큼직한 얼굴에 원통형의 빈약한 체구를 지니고 있다. 가슴에는 X자형의 옷자락이 새겨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본존불에 비해 솜씨가 서툴러 보인다.


광배 뒷면에는 다섯 사람이 모여 그들의 스승과 부모를 위해 이 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다. 글에 나타난 사람 이름이나 불상의 양식으로 보아 고구려 불상으로 보이며, 글에 나타난 ‘신묘(辛卯)’는 고구려 평원왕 13년(571)년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인 불상 형태는 큼직한 얼굴과 손, 추상적인 신체 표현 등에서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국보 제119호)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지만, 강인한 기품이 줄어들고 유연하면서 세련된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2.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

 

종 목  국보  제119호

지 정 일 1964.03.30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고구려


고구려와 관련된 글이 새겨져 있는 불상으로, 옛 신라 지역인 경상남도 의령지방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광배 뒷면에 남아있는 글에 따르면 평양 동사의 승려들이 천불을 만들어 세상에 널리 퍼뜨리고자 만들었던 불상 가운데 29번째 것으로, 전체 높이는 16.2㎝이다.

 

머리는 삼국시대 불상으로는 유례가 드물게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큼직한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다. 얼굴은 비교적 작은데, 살이 빠져 길쭉한 가운데 미소를 풍기고 있다.

 

오른손은 앞으로 들어 손바닥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허리 부분에서 손바닥이 정면을 향하게 하여 아래로 내리고 있다. 왼손의 세번째와 네 번째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는 모습은 삼국시대 불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모습이다. 유난히 두꺼운 옷에 싸인 신체는 굴곡의 표현이 없지만, 전체적인 체구와 약간 보이는 어깨의 골격 등에서 강인한 힘을 느끼게 한다. 새의 날개깃 모양의 옷자락은 좌우로 힘차게 뻗쳐 있는데, 날카롭고 힘있는 모습이 중국 북위 이래의 양식을 보여준다. 불상과 함께 붙여서 만든 광배는 앞면에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듯한 불꽃무늬가 선으로 새겨져 있다.

 

광배의 일부분이 손상되었으나 도금까지도 완전히 남아 있는 희귀한 불상으로, 광배 뒷면에 남아있는 글과 강렬한 느낌을 주는 표현 방법 등으로 볼 때 6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고구려 불상으로 보인다.

 

3.중원고구려비

 

종 목 국보 제205호

지 정 일 1981.03.18

소 재 지 충북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부락 280-11

시 대 고구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1979년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기도 했지만 비의 중요성을 몰랐던 동네 주민들이 우물가의 빨래판으로 사용하기도 하여 발견된 당시 비문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석비는 돌기둥 모양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4면에 모두 글을 새겼는데, 그 형태가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 읽을 수 있는 상태로, 내용 중 처음에 ‘고려대왕’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여기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뜻한다. ‘전부대사자’·‘제위’·‘사자’ 등 고구려 관직 이름과 광개토대왕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등의 글자가 보이고, ‘모인삼백’·‘신라토내’ 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들이 쓰여 있어 고구려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표시하는 비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지역까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충주지역에까지 확장되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4.성석편

 

종 목  보물  제642호  
지 정 일 1978.12.07
소 재 지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11-1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시 대 고구려


이것은 고구려의 평양성을 쌓을 당시 비교적 평평한 자연석 위에 글자를 새긴 것이다.

 

평양성은 고구려의 도성으로 외성, 중성, 내성, 북성 등 4성으로 나누어져 있다. 성의 길이는 전체 15㎞로 성곽주변은 강으로 둘러싸여 평양시의 중심부를 이루고, 주로 내성벽은 돌로, 외성벽은 흙으로 축성되어 있다. 성의 내부에는 당시 고구려의 도시구획터가 아직도 남아있다. 이 성곽에서 현재까지 글자가 새겨진 4개의 성석(城石)이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성석편은 두 번째로 발견된 것이다. 성석에 새겨진 글자 수는 모두 7행 27자로, 그 내용은 ‘기유년 5월 21일 이곳으로부터 아래쪽 동쪽을 향하여 12리 구간을 물성소형 배 ■백두(物省小兄 俳 ■百頭)가 구축한다’라고 풀이되어지고 있다.

 

이 성석의 현재 상태는 두 번째 행의 깨어져 나간 부분과 함께 전체 9조각으로 균열되어 있어 석고로 고정시켜 놓은 상태이다. 

 

5.광개토대왕릉비

 

중국 지린성 지안현 퉁거우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 비신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상고사,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6.연꽃과 짐승얼굴무늬 수막새

 

전형적인 고구려시대의 짐승얼굴무늬 기와이다. 중국에서 짐승얼굴무늬가 기와에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북위시대이며,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짐승얼굴의 모습을 하였다.

 

이러한 짐승얼굴무늬 기와는 평양부근을 중심으로 출토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고구려 중기부터 본격적으로 유행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짐승얼굴무늬 기와는 강력한 힘을 느낄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짐승얼굴무늬 기와는 부릅뜬 눈, 두 눈썹 사이의 혹, 힘을 준 코, 위로 올라간 수염, 크게 벌린 입 등에서 고구려적인 역동감을 느낄 수 있다.

   

 

7.짐승얼굴무늬 수막새


짐승얼굴무늬(귀면문)는 짐승의 얼굴을 표현한 것으로 주로 건축물이나 공예품에 사용되어 나쁜 것을 물리치는 상징으로 표현되었다. 고구려 기와에 나타나는 짐승얼굴무늬는 지안 퉁거우 지역의 무덤 주변에서 발견되고 있어 상당히 일찍부터 기와무늬로 이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고구려의 짐승얼굴무늬 수막새는 무늬의 선이 예스럽고 소박한 멋이 있으면서도 예리하고, 부릅뜬 눈, 두 눈썹 사이의 혹, 힘을 준 코, 위로 올라간 수염, 크게 벌린 입 속에 앙증맞게 튀어나온 이 등에서 전체적인 조형감각의 힘과 해학성이 느껴진다.

  


8.기마인물도 벽화


쌍영총 널길 서쪽 회벽 위에 그려졌던 벽화편이다. 쌍영총 널길 벽에는 수레와 말 탄 사람, 악대 등 풍부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없어졌다. 이 벽화편은 1913년 일본인에 의해 쌍영총이 조사될 때에는 벽면에 부착되어 있었지만, 그 후 떼내어져 조선총독부박물관에 보관되어 오늘에 전한다.

 

2개의 편으로, 중앙의 연결부분은 조사 당시 유리건판 사진을 토대로 복원한 것이다. 말 탄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 당시 고구려의 복식과 말갖춤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9.금동관

 

세 개의 세움장식이 남아 있는데, 중앙의 세움 장식은 상부가 없어 그 원형을 알 수 없다. 중앙을 중심으로 좌우의 세움 장식은 서로 대칭된다. 세움장식 내부는 역하트 모양의 구멍(투창)을 내면서, 내부에 세고리잎(삼엽) 무늬를 표현하였다. 이 세고리잎 무늬에는 무엇인가를 매달기 위한 한 쌍의 못 구멍이 상하로 뚫려 있다.

 

또한 세움장식 가장자리를 촘촘히 오려낸 다음, 하나씩 꼬아서 새의 깃털처럼 표현하였다. 이런 표현 기법은 다분히 고구려적인 것으로, 경주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은관과 의성 탑리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에서도 보이고 있어 직접적인 비교가 가능하다.

 

개마총 널방 천장 동측 제1층 평행고임 측면에 그려진 행렬도에서 이러한 금속 관을 관모인 절풍(折風)에 꽂고 있는 모습이 확인된다.

  

 

10.봉황모양 꾸미개

 

평안북도 운산군 동신면 용호동 1호 무덤은 고구려 돌방무덤의 하나로, 1918년 세키노 타다시에 의해 조사되었다. 조사 당시 무덤은 중앙부가 무너져 내려앉은 상태였다. 봉황모양꾸미개는 무덤의 널방(현실)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부뚜막, 토기 등과 함께 출토되었다.얇은 금동판을 오려서 봉황의 옆모습을 만들었다. 역S자로 휜 몸에, 커다란 꼬리깃이 뻗어있는 모습으로, 날개는 별도로 만들어 결합하였지만, 온전하게 남아있지 않다.

 

표면에는 별다른 장식이나 무늬가 없어 단순한 느낌을 준다. 일직선으로 뻗은 두 다리 끝에 각각 하나의 못구멍이 있어 어딘가에 부착하였던 장식으로 생각된다. 비록 단순한 형태이지만, 봉황 특유의 당당함이 느껴진다.

 

 

11.산모양장식품


관 장식의 하나로 추정되는 것으로, 중앙과 하부가 일부 떨어졌다. 금동판을 산山자 모양으로 오린 후, 구멍(투창)을 내어 장식하였다. 내부는 역하트 모양의 구멍(투창)을 내면서, 내부에 세고리잎(삼엽) 무늬를 표현하였다. 이 세고리잎 무늬에는 한쌍의 못 구멍이 상하로 뚫려 있는데, 금실로 둥근 금동판을 매달았다. 이러한 방식은 고구려 깃털모양 금동관의 장식 모티브와 유사하다.

 

이와 유사한 장식품이 북연의 풍소불묘에서도 발견되어 고구려 문물교류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12.충주장미산성

 

종 목 사적 제400호

지 정 일 1997.11.11

소 재 지 충북 충주시 가금면 장천리 산77-1외

시 대 고구려

 

충주시 가금면에 있는 장미산의 능선을 따라 둘러 쌓은 둘레 약 2.9㎞의 삼국시대 산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14권에 보면 ‘하천 서쪽 28리에 옛 석성이 있다’라는 기록과 『대동지지』에 ‘장미산의 옛 성의 터가 남아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1992년 조사결과 성 안에서 발견된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들을 통해 백제·고구려·신라가 차례로 이 성을 점령, 경영하였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북쪽에 있는 절인 봉학사 지역 일부를 빼고는 성벽이 원래 모습대로 남아 있다. 성벽은 돌을 대강 다듬어 직사각형으로 쌓았는데, 서쪽과 서남쪽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북쪽 정상부분의 성벽을 따라 있는 좁고 긴 군사용 참호는 주변 성벽의 재료를 이용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남쪽의 대림산성과 강 건너편 탄금대의 토성, 충주산성과 서로를 보호하며 도왔을 것으로 보인다.

 

파주의 오두산성(사적 제351호)과 지형조건이 비슷해 성을 쌓은 시대나 배경 등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유적이다.

 

13.포천반월성지

 

종 목 사적 제403호

지 정 일 1998.02.20

소 재 지 경기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 산5-1외

시 대 고구려

 

 포천시 군내면에 있는 산성이 있는 자리로 길이는 1,08포천시 군내면에 있는 산성이 있는 자리로 길이는 1,080m이다. 산성은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쌓았다고 전해지나, 조사결과 고구려 때 쌓은 성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여러 책에 고성(古城), 산성, 반월산성 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대동지지』를 통하여 광해군 10년(1618)에 고쳐 쌓고, 인조 1년(1623)부터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연려실기술』, 『포천군읍지』, 『견성지』에서도 돌로 쌓았다는 기록과 함께 여러 가지 당시 성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현재 성의 옛 자취를 엿볼 수 있는 시설물로는 남쪽과 북쪽의 문터, 성벽 바깥쪽에 사각형 모양으로 덧붙여 만든 치성 4개소, 건물터 6곳, 배수시설이었던 수구터, 장수의 지휘대였던 장대터,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세웠던 망대터 등이 있다.

 

14.연천 신답리 고분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210호

지 정 일 2005.10.10
소 재 지 경기 연천군  전곡읍 신답리 17-42,17-43 
시 대 고구려


봉토석실분은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이다. 고구려 봉토석실분은 평양으로 천도 이후 지배층의 묘제 양식이 적석총에서 석실봉토분으로 변화하면서 보편화되기 시작한다. 남한지역에서 나타나는 고구려계 봉토석실분은 그 수가 얼마되지 않아 그 정확한 성격을 알 수는 없으나 고구려의 남진과 관련한 중요한 자료로 인식되고 있다. 

 

15.동수묘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유순리에 있는 고구려시대 벽화고분. 북한 국보 제28호. 안악 제3호분이라고도 하며, 북한의 지정 명칭은 ‘하무덤’이다. 높이 7m, 남북 길이 33m, 동서 길이 약 30m에 이르는 방대원형의 토분으로, 1949년에 발굴 조사하였다. 널방 안에 진나라 때 사경체로 쓴 묵서가 있어 이 고분이 357년(고국원왕 27)에 조성된 한국 최고의 벽화고분임이 밝혀졌다.

 

 

16.장군총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석릉. 3세기 초부터 427년까지 고구려가 도읍한 지안현 퉁거우평야에는 광개토왕릉비와 고구려 최대형급의 무덤인 태왕릉, 사신총 등 석릉과 토분 1만 기가 있으나 외형이 거의 완존한 석릉은 이것뿐이다.

 

 

17.태왕릉

 

중국 지린성 지안현 여산 남쪽 기슭에 있는 고구려의 기단식 돌무지무덤.

 

현재는 분구의 대부분이 무너져내린 기단부와 그 위층의 방단부 일부만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무덤의 동북 500m 거리에는 유명한 광개토왕릉비가 있다. 명문전의 내용, 무덤의 규모, 근처의 건물터, 광개토왕릉비 등을 근거로 광개토왕의 능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8.각저총

 

중국 지린성 지안현 여산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벽화고분.

 

이 벽화고분은 다른 고분과는 달리 청룡 ·백호 ·주작 ·현무와 같은 사신그림이 없지만, 앞방에 들어가면 왼쪽과 오른쪽 벽에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그려져 있고, 앞쪽 벽에는 눈동자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듯한 사나운 개가 그려져 있다. 널방의 동쪽 벽에는 이 이름이 붙여지게 된 씨름그림이 나무를 중심으로 그려져 있고, 북쪽 벽에는 묻힌 사람의 생전의 실내모습을 연출한 듯 지붕과 커튼을 친 집안에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서쪽 벽에는 소가 끄는 수레와 안장을 얹은 말이 그려져 있으며, 천장은 화려한 불꽃문양과 인동당초문으로 장식되어 있다. 무늬 사이로 삼족오가 있는 해와 두꺼비가 있는 달이 있다. 벽의 네 모서리에는 두 팔을 치켜 들고 천장을 떠받치는 형상의 역사상을 배치하였다. 축조방식이나 시기 ·벽화의 내용 등이 무용총과 비슷하다.

 

19.무용총

 

광개토왕릉비의 북서쪽 약 1km 지점에 있으며 각저총과 나란히 있다. 기저의 한 면이 약 15m인 방추형 분구이며 높이는 3m 내외이다. 널방은 약 3m 사방의 널방과 가로로 긴 앞방, 이것들을 연결하는 통로 및 널길로 되어 있는데, 널방의 바닥면에는 오른쪽 벽에 치우쳐서 4장의 판석을 배열한 널받침시설이 있다.

 

널방은 괴석을 쌓았고, 모줄임천장이며 회반죽을 두껍게 칠한 벽면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주실 정벽의 접객도는 이 무덤의 주인공인 듯한 인물이 상궤에 앉아 있고 그와 대화하듯 두 사람의 삭발한 승려가 역시 상궤에 앉아 있으며, 이밖에 시동) 세 사람이 그려져 있다.

 

오른쪽 벽은 수렵도가 대부분의 면적을 차지하고, 왼쪽 벽에는 주인을 표현한 인물의 기마도와 주방 등의 가옥 2동 외에 5명의 남녀 군무상, 9명의 합창대상이 그려져 있다. 이 장면의 특이함에서 무용총이라고 명명되었는데, 천장에는 연화문 등의 장식문, 사신도·일월상도를 포함한 그림이 있다. 앞방의 벽화는 박락되어 가고 있다.

 

20.을밀대

 
종 목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9호 
소 재 지  평양시 중구역 경산동 금수산 
시대  고구려시대 

 
북한의 사적 제7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9호로 변경되었다. 금수산의 을밀봉에 있는 평양성 내성의 북장대로, 6세기 중엽에 처음 건립되었다. 평양성 중 가장 북쪽에 있기 때문에 사방이 트여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는 의미에서 '사허정'이라고도 한다. 원래 이 자리에는 최승대가 있었는데 1714년(조선 숙종 40)에 축대를 보수하면서 최승대는 모란봉으로 옮겨 가고 누정을 다시 지었다. 


을밀대는 고구려 때 쌓은 높이 11m의 축대 위에 세운 단층 누정이다.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석축은 경사지를 절벽으로 이용하여 쌓은 단애성벽이다. 이는 산이 많은 우리나라의 지연 지형을 잘 이용한 성벽 축조기술로, 평지성과 산성 등지에 자주 사용되었다. 축대 위에는 3면에 여장(성벽 위의 담)을 쌓고 총구멍을 냈다.


축대 위에 세운 누정은 정면 3칸(7.5m), 측면 2칸(5.3m)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상부구조는 5량가 형식이다. 비바람의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높이 1m 정도의 4각 돌기둥 위에 흘림기둥을 세우고 2익공 공포를 얹었다. 기둥 위 화반은 귀면무늬와 연꽃무늬로 장식했다. 내부 천장은 통천장이다. 세련된 부재의 장식과 누정에 입힌 화려한 모로단청이 잘 어울리는 건물이다.


을밀대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는 평양팔경의 하나인 ‘을밀상춘(을밀대에서 바라보는 봄 경치)‘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을밀대는 ‘을밀선인‘이 자주 하늘에서 내려온 장소 또는 ‘을밀장군(을지문덕 장군의 아들)‘이 싸워서 지켰던 곳이라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칠성문루와 규모는 비슷하지만 그 의장의 격식이 한층 높다고 평가받는다.



21.보통문 
 

종 목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3호 
소 재 지  평양시중구역 보통문동 
시 대  고구려시대 


6세기 중엽 고구려가 평양성을 쌓을 때 성의 서문으로 세웠으며, 현재 건물은 조선시대인 1473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이 문은 평양성 서북쪽 방향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국방상·교통상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시대부터 고려·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중요시되었다.


축대는 화강암을 다듬어 쌓은 축대 위에 문루가 있는 형태이다. 축대 중심부에는 높이 4.55m, 너비 4.4m의 홍예문(무지개문)이 있고 2층 문루는 정면 3칸(14.8m), 측면 3칸(9.15m)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바깥기둥은 모두 1층 지붕에 이어지고 안쪽의 네 기둥은 1층에서 2층까지 관통하여 세웠다.


바깥기둥과 안기둥 사이에 연결된 툇보 위에는 짧은 2층 기둥이 놓여 있다. 두공은 1·2층 안팎이 모두 3포로 되어 있고, 두공첨차의 간격은 바깥쪽보다 안쪽이 더 크다. 다른 성문들에 비하여 전체 높이가 조금 낮고 1층 면적에 비하여 2층 면적이 상대적으로 좁다.


또한 측면에서 1층 양쪽 바깥기둥의 밑둥과 마룻도리를 연결하는 3각형, 그리고 정면에서 축대바닥 양쪽 끝과 문루의 용마루 중심을 연결하는 3각형은 거의 정3각형에 가깝게 되어 있어 더욱 장중하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현존하는 한국 성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며, 고구려의 건축양식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22.평양성  
 
종 목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호 
소 재 지  북한 평양시 중구역과 평천구역 
시대  고구려 후기 


고구려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때는 427년(장수왕 15)이다. 이 당시의 왕궁은 평양시 대성산 기슭의 안학궁이었다. 안학궁 뒤편에 대성산성을 축조해 전쟁 때는 이곳으로 옮겨갔다. 이러한 평지성과 산성이 한 조를 이루는 것은 고구려 도성의 특징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 산성으로 피란하면 평지성은 불타 없어지게 된다.


그래서 586년(평원왕 28)에 수도를 장안성으로 옮기는데, 이곳이 현재 평양 시가를 둘러싸고 있는 평양성이다. 안학궁과 대성산성을 전기 평양성, 장안성을 후기 평양성이라고도 한다. 


평양성은 평지성의 장점과 산성의 장점을 종합해 축성했다. 내성·외성·북성·중성으로 이루어졌으며, 성벽의 길이는 약 23km이다. 내성은 대동문 아래에서 서북쪽으로 남산고개를 지나 만수대까지이고, 외성은 대동강과 보통강을 둘러싼 평지성이며, 북성은 만수대 북쪽으로 모란봉을 둘러싼 부분이고, 내성 남쪽으로 대동교에서 안산까지 연장된 성이 중성이다.

 

(신라의 문화재)

 

1.북한산 신라 진흥왕순수비

 

종 목 국보 제3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신라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세운 순수척경비 가운데 하나로, 한강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뒤 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원래는 북한산 비봉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비를 보존하기 위하여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의 형태는 직사각형의 다듬어진 돌을 사용하였으며, 자연암반 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웠다. 윗부분이 일부 없어졌는데, 현재 남아 있는 비몸의 크기는 높이 1.54m, 너비 69㎝이며, 비에 쓰여져 있는 글은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2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내용으로는 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까닭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비문에 새겨진 연호가 닳아 없어져 확실하지 않으나, 창녕비가 건립된 진흥왕 22년(561)과 황초령비가 세워진 진흥왕 29년(568) 사이에 세워졌거나 그 이후로 짐작하고 있다.

 

조선 순조 16년(1816)에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고 판독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비에 새겨진 당시의 역사적 사실 등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2.분황사석탑

 

종 목 국보 제30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구황동 313 분황사

시 대 신라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탑은 넓직한 1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장식이 놓여 있다.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백제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3.경주 첨성대

 

종 목 국보 제3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 839-1

시 대 신라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 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이다. 내물왕릉과 가깝게 자리잡고 있으며, 높이는 9.17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길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占星術)이 고대국가에서 중요시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국가의 큰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는 첨성대 건립의 좋은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동북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긴 하나 거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4.창녕 신라 진흥왕척경비

 

종 목 국보 제33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

시 대 신라

 

빛벌가야(지금의 창녕)를 신라 영토로 편입한 진흥왕이 이곳을 순수(두루 돌아다니며 순시함)하며 민심을 살핀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당시 빛벌가야는 신라가 서쪽으로 진출하는데 있어 마치 부채살의 꼭지와 같은 중요한 길목이었는데, 진흥왕 16년(555) 신라에 병합되어 하주로 바뀌었고, 565년에는 대야주(지금의 합천)와 합쳐져 비사벌군 또는 비자화군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비는 목마산성 기슭에 있던 것을 192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비각안에 모셔 둔 것으로, 자연석의 앞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비문을 새기고, 그 둘레에 선으로 윤곽을 돌려놓은 모습이다. 다른 순수비와 달리 ‘순수관경’이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아 척경비(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 일컫고 있으나, 임금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수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있어 판독하기가 힘든 상태이나, 후반부는 명확히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선명하다. 다른 순수비의 내용을 참고할 때 대략 진흥왕이 빛벌가야를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한 사실과 왕의 통치이념, 포부 등이 실려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후반부에 당시 왕을 수행하던 신하들의 명단이 직관, 직위, 소속의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어 당시 지방행정조직, 신분제 및 사회조직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대가야가 멸망하기 1년 전인 진흥왕 22년(561)으로, 이 지역을 가야진출의 발판으로 삼고자 한 왕의 정치적인 의도가 엿보인다. 또한 진흥왕 당시의 사실을 기록해 놓아『삼국사기』의 기사를 보완해줌으로써, 이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 이해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5.울주 천전리각석

 

종 목 국보 제147호

지 정 일 1973.05.04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산210

시 대 신라

 

태화강 물줄기인 내곡천 중류의 기슭 암벽에 새겨진 그림과 글씨이다. 아래 ·위 2단으로 나누어 서로 다른 내용이 다른 기법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조각이 가득하다.

 

윗단에는 쪼아서 새기는 기법으로 기하학적 무늬와 동물, 추상화된 인물 등이 조각되어 있다. 사실성이 떨어지는 단순화된 형태인데 중앙부의 태양을 상징하는 듯한 원을 중심으로, 양 옆에 네 마리의 사슴이 뛰어가는 모습과 맨 왼쪽의 반인반수(머리는 사람, 몸은 동물인 형상)상이 눈에 띈다. 표현이 소박하면서도 상징성을 갖고 있는 듯한 이 그림들은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진다.

 

아랫단은 선을 그어 새긴 그림과 글씨가 뒤섞여 있는데, 기마행렬도, 동물, 용, 배를 그린 그림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기마행렬도는 세 군데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간략한 점과 선만으로도 그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배그림은 당시 신라인의 해상활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글자는 800자가 넘는데 왕과 왕비가 이 곳에 다녀간 것을 기념하는 내용으로, 법흥왕대에 두 차례에 걸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 중에는 관직명이나 6부체제에 관한 언급이 있어 6세기경의 신라사회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사람이 이루어 놓은 작품으로, 선사시대부터 신라시대까지의 생활, 사상 등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어느 특정 시대를 대표한다기보다 여러 시대의 모습을 담고 있어 더욱 의미가 깊은 유적이다.

 

 

6.단양 신라적성비

 

종 목 국보 제198호

지 정 일 1979.05.22

소 재 지 충북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산3-1

시 대 신라

 

 성재산 적성산성 내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비로,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인 이 곳 적성을 점령한 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다. 1978년에 30㎝ 정도가 땅속에 묻힌 채로 발견되었는데, 비면이 깨끗하고 글자가 뚜렷하다.

 

비는 위가 넓고 두꺼우며, 아래가 좁고 얇다. 윗부분은 잘려나가고 없지만 양 측면이 거의 원형으로 남아있고, 자연석을 이용한 듯 모양이 자유롭다. 전체의 글자수는 440자 정도로 추정되는데, 지금 남아있는 글자는 288자로 거의 판독할 수 있다. 글씨는 각 행마다 가로줄과 세로줄을 잘 맞추고 있으며, 예서에서 해서로 옮겨가는 과정의 율동적인 필법을 보여주고 있어 서예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비문에는 신라의 영토 확장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신라의 형벌 및 행정에 대한 법규인 율령제도 발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노역체제, 재산 분배에 관한 국법이 진흥왕 초반에 마련된 것과 적성 지방에 국한된 관습을 법으로 일반화하고 있는 사실 등이 그러하다.

 

비문 첫머리에 언급된 10인의 고관의 관등과『삼국사기』의 내용을 견주어 살펴볼 때, 비의 건립은 진흥왕 6∼11년(545∼550)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북방공략의 전략적 요충지인 적성지역에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은 새 영토에 대한 확인과 함께 새로 복속된 고구려인들을 흡수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비록 순수비(왕이 직접 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기념으로 세우는 비)는 아니지만, 순수비의 정신을 담고 있는 척경비(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7.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종 목 국보 제199호  

지 정 일 1979.05.22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산89

시 대 신라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단석산 중턱에 이르면 거대한 암벽이 ㄷ자 모양으로 높이 솟아 하나의 석실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 인공적으로 지붕을 덮어서 석굴 법당을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바위면에는 10구의 불상과 보살상이 새겨져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동북쪽의 독립된 바위면에는 도드라지게 새긴 높이 8.2m의 여래입상이 1구 서 있다. 둥근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며, 머리 위로 2단으로 된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작게 솟아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에는 U자형 주름이 선명하고, 트인 가슴 사이로는 띠매듭이 보인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은 내려 손끝이 아래로 향하여 손바닥이 보이게 하고 있다.

 

동쪽면에는 높이 6m의 보살상이 새겨져 있는데, 상반신에는 옷을 걸치지 않았으며, 왼손은 들어서 가슴에 대었고 오른손은 몸 앞에서 보병을 쥐고 있다.

 

마멸이 심해서 분명하지는 않지만 남쪽면에도 광배가 없는 보살상 1구를 새겨서 앞의 두 불상과 함께 삼존상을 이루고 있다. 이 보살상의 동쪽면에는 400여 자의 글이 새겨져 있는데, ‘신선사에 미륵석상 1구와 삼장보살 2구를 조각하였다’라는 내용이다.

 

북쪽 바위면에는 모두 7구의 불상과 보살상, 인물상이 얕게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왼쪽에서부터 여래입상, 보관이 생략된 보살입상, 여래입상, 반가사유상을 나란히 배치하였다. 반가사유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왼손을 동쪽으로 가리키고 있어 본존불로 인도하는 독특한 자세를 보여준다.

 

아래쪽에는 버선같은 모자를 쓰고 공양을 올리는 모습을 한 공양상 2구와 스님 한분이 새겨졌는데, 신라인의 모습을 추정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7세기 전반기의 불상 양식을 보여주는 이 마애불상군은 우리나라 석굴사원의 시원 형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클 뿐만 아니라, 당시 신앙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8.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종 목 국보 제201호  

지 정 일 1980.09.16

소 재 지 경북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 657-1

시 대 신라

 

 경상북도 봉화군 북지리에는 신라시대의 ‘한절’이라는 대사찰이 있었고, 부근에 27개의 사찰이 있어 500여 명의 승려들이 수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작품은 자연암벽을 파서 불상이 들어앉을 거대한 방모양의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높이 4.3m의 마애불을 매우 도드라지게 새긴 것이다.

 

넓고 큼직한 얼굴은 양감이 풍부하며 전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어서 박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깨는 다소 움츠린 듯하지만 체구는 당당한 편이며,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에서 U자형의 굵직한 주름을 이루면서 양 팔을 거쳐 길게 늘어져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까지 덮고 있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가슴에 들고 왼손은 무릎에 내리고 있는 모습으로 큼직하게 표현되어 불상의 장중한 멋을 더해주고 있다.

 

불상 뒤편의 광배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구분하였으며, 곳곳에 작은 부처를 표현하였고, 머리광배의 중심에는 정교한 연꽃무늬를 새기고 있다.

 

불상을 만든 시기는 얼굴이나 신체에 표현된 부드러운 모습 등을 고려할 때 7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며, 영주가흥리마애삼존불상(보물 제221호)과 함께 이 시기 영주·봉화 일대 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신라 불교조각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9.영일 냉수리신라비

 

종 목 국보 제264호

지 정 일 1991.03.15

소 재 지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토성리 342-1 신광면사무소

시 대 신라

 

 지금까지 남아있는 신라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1989년 마을주민이 밭갈이를 하던 중 발견하였으며, 재산분배를 확인하는 증명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형태는 네모난 자연석으로 밑부분이 넓고 위가 줄어드는 모습이며, 앞면과 뒷면, 그리고 윗면의 3면에 글자를 새겼다. 비문은 거의 닳지 않아 눈으로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보존상태가 좋다. 글자는 총 231자이고 서체는 해서체로 보이나, 예서체의 기풍이 많이 남아 있어 비문의 형태와 글씨체면에서 중원고구려비(국보 제205호), 울진봉평신라비(국보 제242호)와 매우 비슷하다.

 

비문은 절거리라는 인물의 재산소유와 유산상속문제를 결정한 사실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공문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각 부의 여러 귀족들이 참여하여 재산권 분쟁을 처리하고 있는데, 이는 왕권을 강화하기 이전에 미약했던 신라왕권의 한계를 알려주고 있다. 또한 소를 잡아 하늘의 뜻을 묻고 제천의식을 행하던 당시 풍속제도의 실상이 잘 담겨져 있다.

 

내용중 ‘계미’라는 간지와 ‘지증왕’등의 칭호가 나오고 있어 신라 지증왕 4년(503)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국가에서 세운 비로서 신라의 왕명을 다룬 초기 율령체제의 형태를 보여주어 당시 사회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신라역사 연구와 금석학 연구에도 중요한 유물이다.

 

 

10.금관총 금관

 

종 목 국보 제87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 76 국립경주박물관

시 대 신라

 

 경주시 노서동에 있는 금관총에서 발견된 신라의 금관으로, 높이 44.4㎝, 머리띠 지름 19㎝이다.

 

금관은 내관과 외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금관은 외관으로 신라금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즉, 원형의 머리띠 정면에 3단으로 ‘출’자 모양의 장식 3개를 두고, 뒤쪽 좌우에 2개의 사슴뿔모양 장식이 세워져 있다. 머리띠와 ‘출’자 장식 주위에는 점이 찍혀 있고, 많은 비취색 옥과 구슬모양의 장식들이 규칙적으로 금실에 매달려 있다. 양 끝에는 가는 고리에 금으로 된 사슬이 늘어진 두 줄의 장식이 달려 있는데, 일정한 간격으로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달았으며, 줄 끝에는 비취색 옥이 달려 있다.

 

이 같은 외관에 대하여 내관으로 생각되는 관모가 관 밖에서 발견되었다. 관모는 얇은 금판을 오려서 만든 세모꼴 모자로 위에 두 갈래로 된 긴 새날개 모양 장식을 꽂아 놓았다. 새날개 모양을 관모의 장식으로 꽂은 것은 삼국시대 사람들의 신앙을 반영한 것으로 샤머니즘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금관은 기본 형태나 기술적인 면에서 볼 때 신라 금관 양식을 대표할 만한 걸작품이라 할 수 있다.

 

11.경주월성

 

종 목 사적 제16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 387-1

시 대 신라

 

월성은 신라 궁궐이 있었던 도성이다. 성의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하여 반월성·신월성이라고도 하며, 왕이 계신 성이라 하여 재성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파사왕 22년(101)에 성을 쌓고, 금성에서 이곳으로 도성을 옮겼다고 전한다. 이 성은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었으며, 문무왕 때에는 안압지·임해전·첨성대 일대가 편입되어 성의 규모가 확장되었다.

 

성을 쌓기 전에는 호공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탈해왕이 어렸을 때 꾀를 내어 이곳을 차지했다고 한다. 남해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탈해왕을 사위로 삼았으며, 신라 제4대 왕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성의 동·서·북쪽은 흙과 돌로 쌓았으며, 남쪽은 절벽인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성벽 밑으로는 물이 흐르도록 인공적으로 마련한 방어시설인 해자가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임해전으로 통했던 문터가 남아있다. 성 안에 많은 건물터가 남아있으며, 1741년에 월성 서쪽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석빙고가 있다.

 

 

12.경주계림

 

종 목 사적 제1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교동 1

시 대 신라

 

 계림은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곳이라는 전설을 간직한 숲이다. 원래 신라를 건국할 때부터 있던 숲으로, 시림이라고 하던 것을 알지가 태어난 뒤로 계림이라 하였다.

 

탈해왕 4년(60)에 왕이 금성 서쪽 시림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하여, 날이 밝은 후 신하를 보내어 살피도록 하였다. 신하가 시림에 이르러 보니 금으로 된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 울고 있어 돌아와 고하니, 왕이 즉시 시림으로 가서 궤짝을 열어 보았다. 그 속에는 총명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있었고, 왕은 하늘에서 보낸 아이라 하여 태자로 삼았다. 아기라는 뜻의 '알지'라는 이름을 주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

 

왕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후에 알지는 파사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그 후 알지의 7대 후손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미추왕이다. 이후 내물왕부터 신라가 망할 때까지 김알지의 후손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으며, 계림은 신성스러운 곳으로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곳에는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운 김알지 탄생에 대한 비가 남아있다.

 

13.나정


종 목  사적  제245호 
지 정 일 1975.11.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탑동 700-1 
시 대 신라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난 전설을 간직한 우물이다.

 

신라가 세워지기 전의 경주지역 일대는 진한의 땅으로 6명의 촌장들이 나누어 다스리고 있었다. 그 중 고허촌장인 소벌도리공이 양산 기슭 우물가에서 흰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 것을 발견하여 그곳으로 가보니 빛이 나는 큰 알이 하나 있었다. 알 속에서 남자아이가 태어나자 하늘에서 보내준 아이라고 생각하여 잘 길렀다. 박처럼 생긴 알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성을 박(朴)이라 하고, 세상을 밝게 한다는 뜻에서 이름을 혁거세라고 하였다. 아이가 13살이 되던 해인 B·C 57년 왕의 자리에 올라 나라를 세우고 서라벌이라고 이름지었다.

 

이곳에 있는 비석은 조선 순조 2년(1802)에 박혁거세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14.남산성

 

종 목  사적  제2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탑동,남산동,배반동,배동 
시 대 신라


경주 남산의 북쪽에 있는 신라 산성으로 ‘신라 남산신성’이라고도 한다.

 

신라 진평왕 13년(591)에 쌓았다고 전하며, 신라 문무왕 19년(679)에 성을 크게 고쳐 쌓았는데, 지금 성벽이 잘 남아있는 부분은 이때 쌓은 것으로 보인다. 남산 꼭대기를 중심으로 돌로 쌓았으며, 성 안에는 3개의 커다란 창고가 있어 무기와 식량을 저장하고 전쟁에 대비하였다.

 

성 부근에서 발견된 남산신성비에는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와 일정한 길이의 성벽을 맡아 쌓았으며, 만일 3년 이내에 성벽이 무너지면 벌을 받을 것’이라는 서약의 글과 함께 관계한 사람들의 벼슬·성명·출신지를 새겨져 있다.

 

경주평야 일대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이 산성은 서쪽의 서형산성과 동쪽의 명활성, 그리고 북쪽의 북형산성과 함께 신라의 왕도를 호위했던 성으로서 역사적 의의가 있으며, 지금도 큰 창고 자리에서는 불에 탄 쌀이 나온다고 한다.

 

15.황룡사지

 

종 목  사적  제6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구황동 320-1 
시 대 신라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경주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하여 17년 만에 완성되었다. 그 후 574년, 인도의 아소카왕이 철 57,000근·금 3만분으로 석가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것을 재료로 삼존불상을 만들게 되었는데, 5m가 넘는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584)에 금당을 짓게 되었다.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바램의 9층목탑을 짓게 되는데,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645년에 완공되었다.


이와 같이 황룡사는 93년간에 걸친 국가사업으로 조성된 큰 절이었으며, 신라의 3가지 보물 중 천사옥대를 제외한 2가지 보물이 황룡사 9층목탑과 장육존상이었다는 것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땅이 곧 부처가 사는 땅'이라는 신라인들의 불교관이 잘 나타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없어져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늪지를 메워서 그 위에 지은 황룡사는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1탑식 배치였다. 그러나 장육존상과 목탑 등이 조성된 후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이 배치되는 1탑 3금당식으로 바뀌고, 탑의 좌우에 종루와 경루가 대칭을 이루어 배치되었다. 또 사방은 복도와 같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독특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종루에는 거대한 종이 있었는데, 몽고가 침입했을 때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1976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에서 금동불입상·풍탁·금동귀걸이·각종 유리 등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높이 182㎝에 이르는 대형치미는 건물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금당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다고 전하며, 목탑지에서 발견된 당나라 백자항아리는 당시의 문물교류를 잘 알 수 있게 한다.
 

 

16.양산 신기리산성


종 목  사적  제9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남 양산시  신기동, 호계동, 북정동 
시 대 신라


해발 232m의 산성봉 정상일대를 돌로 쌓은 성으로, 서낭산에 있어 서낭산성이라고도 불리운다.


대부분 무너졌으나 둘레 2,600m, 높이 1m 정도가 남아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가 낙동강을 통해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양산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과 성 안에서 신라 토기조각이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신라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고있다.


성의 남쪽에는 이 산성과 규모가 비슷한 북부동산성이 있어 쌍성의 형태를 이룬다. 서낭산에는 양산부부총으로 유명한 6세기경의 신기리 무덤들이 흩어져 있어 이 일대가 신라시대의 중요한 곳으로 여겨진다.
 

 

17.하동 고소성


종 목  사적  제151호 
지 정 일 1966.09.06
소 재 지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산31 
시 대 신라


신라 때 돌로 쌓은 산성으로 능선을 따라 5각형에 가까운 형태를 띠고 있다.


현재 성 안의 특별한 시설물들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성의 내력에 대해서는 『하동군읍지』가 유일한 자료이다. 이 기록과 성의 위치 및 규모로 보아 신라가 군사적 목적으로 쌓은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5세기 전반 고구려 광개토왕이 신라를 거쳐 왜군을 토벌하면서 남하했을 때 쌓은 고구려 계통의 성으로 보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성벽은 네모나게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사용하여 견고하게 쌓았다. 산성의 동·북·서·남면은 성벽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으나, 서남쪽 섬진강을 굽어보는 구간은 거의 허물어져서 돌무더기만 남아있다.


지리산의 험한 산줄기를 뒤에 두고 섬진강이 앞을 가로막는 천연의 요새로서 남해에서 호남지방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길목이다. 이러한 지형을 이용하여 크고 견고하게 지은 산성이다.

 

 

18.온달산성


종 목  사적  제264호 
지 정 일 1979.07.26
소 재 지 충북 단양군  영춘면 하리 산67 
시 대 신라


남한강이 보이는 성산의 정상부근을 돌로 둘러쌓은 산성이다. 온달산성은 고구려 평원왕(재위 559∼590)의 사위인 온달장군의 이야기가 이 지방에 전해오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성이 언제 쌓아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전기에 이미 성산성이란 이름으로 있었던 기록이 있다.


벽의 안팎을 모두 비슷한 크기의 돌로 가지런히 쌓아 올린, 둘레 683m의 소규모 산성이다. 성 안에는 삼국시대의 유물이 출토되며, 우물터가 남아있고, 성벽 바깥부분에는 사다리꼴 모양의 배수구가 있다. 남서쪽 문터의 형식과 동문의 돌출부는 우리나라 고대 성곽에서 드물게 보이는 양식으로 주목할 만하다.


성의 북동쪽 남한강의 강변 절벽 아래에는 온달굴이라는 석회암 동굴이 있고, 성을 바라보는 북쪽 강 건너의 산에도 온달과 관계되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성벽의 보존 상태가 좋아, 축성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유적이다.
 

 

19.구정동 고분군


종 목  사적  제350호 
지 정 일 1991.03.3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구정동 145-1 
시 대 신라


경주 구정동에 있는 높이 40m의 단독 원형 구릉 정상부에 있는 3개의 무덤이다. 1951년 동검, 말방울을 비롯한 철제품이 수습·보고된 후, 1982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발굴하였다.


내부시설은 구덩이를 파 그 안에 나무널을 넣은 덧널시설이 있는 덧널무덤(토광목곽묘)이다. 제1무덤은 구릉경사면에 있으며, 제2무덤과 제3무덤은 구릉정상부에 있는 부부 합장무덤로 추정된다.


제1무덤에서는 와질토기와 도질토기가 출토되었다. 길이 6m, 너비 1.2m의 제2무덤은 화로형토기와 대형철투겁창(철모)25점, 도질토기가 나왔다. 길이 8m, 너비 1.5m의 제3무덤에서는 고리자루칼(환두대도)와 갑옷, 와질토기, 도질토기가 출토되었다.


와질토기와 도질토기가 함께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도질토기 초기단계인 4세기 전반경으로 판단된다. 갑옷은 11매의 세로 철판을 연결한 고식(古式)갑옷이며 대형철겁창은 의기적 성격을 가졌다. 이 시기 다른 무덤에 비해 입지조건이나 규모, 껴묻거리(부장품)의 질과 양으로 보아 이 지역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5세기 이후 무덤들은 다량의 금동제품을 포함하고 있어, 무덤 발달과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20.김유신 탄생지 및 태실


종 목  사적  제414호 
지 정 일 1999.06.11
소 재 지 충북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18번지 외 129필지 
시 대 신라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김유신 장군이 태어난 곳과 그의 태실이다. 태실은 아이가 출산한 뒤 나오는 탯줄을 보관하는 곳을 말한다.


김유신이 태어난 곳은 만노군 태수로 부임한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 김서현 장군이 집무를 보던 곳이다. 김유신 장군의 태실은 태령산성의 정상부에 있으며 자연석을 둥글게 기단으로 쌓고 주위에 돌담을 쌓아 신령스런 구역임을 나타내고 있다. 원형으로 3단의 석축을 쌓은 뒤, 그 위에 흙을 덮은 봉분형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태실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탄생지 뒤편에 있는 태령산성은 태실을 둘러싼 돌담의 성격으로, 고대 신라의 산성 축조술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고구려와신라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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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오늘 사회 숙제 해야하는데 문화재를 알아야 하고 그림 그리고 구체적 설명 필요 질문 순서 나열함 1.고구려 백제 신라 암거나 상관없음 2.문화제 이름 3.문화제 이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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