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과 김정호에 대한설명좀해주세요.

한복과 김정호에 대한설명좀해주세요.

작성일 2011.05.27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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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초5학년인데여

숙제가 한복과 김정호에대하여 알아오는 것이여서요.

제발가르쳐주세요.ㅠㅠ(되도록빨리)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한복이란 우리나라 전통 의상입니다.

명절때 대부분 한복을 입고 뜻깊은날이있을땐 한복을입고.... 그만큼 유명하고 대단한것이죠

요즘엔 옛 한복의 단점을 극복하고 개량한 생활한복이나와서 현대사회속에서도 한복을 입을수있게되었죠

 

김정호는 우리나라의 전체지도를 만든것으로 유명하신분입니다.

그 당시엔 인공위성도 없어서 우리나라 전체모습을 보기가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란 우리나라 전체도를 만들었죠

우리나라의 외곽부분을 보면 종이를 여러번 덧댄것이 보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걸로인해 여러번 돌아다녔고 수정했고 이랬던것이 아닐까요?

아 거기엔 교통로, 토지이용 등이 내용으로 있어서 전쟁할때 적군이 그걸 뺏어갈까봐

금지하기도했었다는데.... 뭐 이부분은 신경안쓰셔도되고....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  한복의 모든 것

 

한복이란? 

 

한복은 우리의 옷이다. 한복의 역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 부족국가시대를 거쳐 삼국시대에 이르면 두루마기를 중심으로 저고리, 바지, 치마, 두루마기를 중심으로 모자, 허리띠, 화 또는 이를 착용하는 고유의 식 양식으로 이루어진다. 우리 옷은 아 한대성 기후로 삼한 사온이 계속되는 자연 조건과 북방 유목민 계통의 문화요소가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속옷부터 겉옷인 두루마기에 이르기까지 몸을 싸는 형식이다. 또 저고리와 바지가 떨어져있고, 앞이 트여 있는 활동적인 옷이다. 복식이란 사람의 몸위에 표현되는 것이다.

 

한복의 소재 -

 

우리 옛조상들은 봄과 가을, 여름, 겨울에 따라 소재를 달리하여 계절에 맞는 옷을 입어왔다. 제철에 맞는 옷감 선택은 한복의 멋과 품위를 살리고, 전통소재들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가을옷

 

봄·가을 소재로는 원래 무명을 비롯해서 국사, 갑사, 은조사, 항라 등의 다양한 옷감들이 있었으나, 요즘은 구하기조차 어려운 실정 이다. 가을은 자미사, 명주, 숙고사, 국사, 실크가 잘 어울리는 계절이 다. 특히 자미사로 옷을 지어 입으면 광택이나 문양, 걸을 때마다 스 치는 옷의 소리 등이 가을을 실감케 한다.

 

 

여름 옷


  여름에는 모시, 삼베가 주소재로 시원한 소재가 역시 인기이다. 초여름에는 무명이나 다듬이한 모시로, 흰색이나 푸른색과 청색 염색 을 하는데, 자연소재가 갖고 있는 미색 그대로의 빛깔로 만들어 입어 도 멋스럽다. 또 명주하면 의례 더운 옷감으로 알고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상식이다. 예전부터 생명주, 모시, 항라 등을 여름철 옷감으로 사용했으며, 익히지 않은 명주도 여름철 옷감으로 사용해 왔다. 한여름에는 베나 쟁친 모시(다듬이질 하지 않은 모시)로 적삼을 즐겨 입었고, 반저모시 로는 흰 치마저고리를 즐겨 입었다.

 

 

겨울 옷   

겨울에는 양단과 공단, 실크 등으로 치마저고리를 지어 입고, 겉옷으로 두루마기를 지어 입으면 좋다. 겨울 한복은 물겹바느질을 하는 천으로 지어 입는 것이 제격인데 수직실, 명주, 위사수직, 자미사 등이 그나마 요즘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겨울용 옷감이다. 겨울 한복은 방한용으로, 외출시엔 두루마기나 반두루마기, 갖 저고리를 걸치고 가벼운 외출시에는 배자를 걸치면 추위를 막을 수 있다.

 

 

◐ 한복의 종류 -

 

◐  저고리 -

 

저고리는 성인 남자,성인 여자,남자 아이,여자 아이의 4가지로 구분이 된다.
저고리의 주된 명칭은 다음과 같다.


 


성인남자용

겹 저고리

  저고리의 모양이 여자 저고리의 모양과 비슷하고 명칭도 같다. 그러나 치수가 크고 모양이 여자 저고리와 같이 예쁜 곡선으로 되어있지 않고 평평하다. 치수가 넉넉하여 풍성하게 보이며 압박감을 주지않아서 입으면 매우편하다.


성인 여자용



저고리의 구성은 몸체를 이루고 있는 몸판, 깃, 여밈 부분의 섶, 팔 부분의 소매통 등으로 대별된다. 이 중에서 가장 변화의 폭이 심한 곳은 저고리 길이와 도련, 소매의 형태를 들 수 있다. 섶은 저고리의 좌우에 각각 달리는데 기능적으로 양쪽의 앞을 여미는 여분이 되며, 미적으로도 변화의 선으로 형태미를 부여할 수 있다. 깃은 앞몸판에서 뒷몸판까지 연결되어 목둘레를 장식하며 한국 복식의 형태를 인식할 수 있는 특징 중이 하나이다. 옷고름은 기능적으로 의복을 정돈하는 목적으로 사용하였으나 후대에 갈수록 저고리의 길이는 짧아지고 옷고름은 점차 길어지면서 장식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동정은 의복의 관리면에서 세탁하기에 편리한 방법으로 이용된 기능적인 역할을 하는 부위로 저고리의 단정함을 결정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회장 저고리

  회장 저고리는 우리나라 고유 복식의 하나로서 깃,부리,단,고름에 서로 다른 색 천을 댄 저고리 이다. 원래선을 댄 목적은 푸서 처리를 위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점차적으로 장식을 위한것으로 변천하였다.회장 저고리 중 곁 마기가 있는것을 삼회장 저고리,없는것을 반회장 저고리라고 한다.
회장감의 색은 원래 자주색 한가지로 정해져 있었으나 근래에 와서는 같은 색깔 계통의 빛깔이나 또는 대조적인 다른 색깔을 쓰는 것도 볼 수 있다.


 

색동 저고리

  회장 저고리와 같이 한국 고유 옷의 하나로 소매를 색동으로 한다.색동의 색은 오행설에서 유래되었다.종전에는 길의 색을 연두색,노랑색,옥색 만을 사용했는데 요즈음은 여러가지 색을 전부 다 사용한다.

깨끼 저고리

  안팎이 비치는 엷은 옷감을 두 겹으로 박아 지은 저고리다. 바느질이 어렵고 세탁할때 만지기가 어려워 많이 입지 않았으나 근래에는 옷감의 발달과 함께 다리지 않고도 그냥 만져 입을 수 있는 옷감이 나와서 많이들 입는다.
깨끼는 안팎을 무늬 없는 같은 감으로 만드는 것이 특징이나 무늬 있는 감으로 할 때는 안감은 무늬 없는 감을 사용한다.무늬가 있는 것이나 없는것의 형태는 같다.


남자 아이용

저고리

  모양 이나 만드는 방법은 성인용 저고리와 같고 빛깔은 옥색,분홍색,연두색 등 이 많이 쓰인다.명칭고 형태도 성인용 저고리와 같다.


여자 아이용

색동 저고리

  이옷은 첫 돌 부터 6~7세 어린이들 에게 알맞은 옷으로 한국적인 미를 잘 나타내는 대표적인 옷이다.원래 색동 저고리는 돌날 남녀 구분없이 입혔으나 단 돌띠만은 구별하여 남아는 남색, 여아는 자주색을 달았다. 돌이 지나면 남아는 그대로 길게, 여아는 짧게 하여 입혔고 저고리의 길은 연두색으로 하였다


 

 

◐  바지 -

 

고의(袴衣)라고도 불리워지는 바지는 남성들의 외의(外衣)로 삼국시대 이전부터 착용되었다. 저고리의 변천과 함께 바지의 형태도 북방 한대 기후의 수렵 유목에 적합하도록 활동성이 요구되던 바지폭이 좁은 궁고(窮袴)에서 점차 폭이 넓은 대구고(大口袴)로 바뀌었다.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바지는 남녀 모두의 기본적인 하의로 겉옷이나 치마 아래에 입었고, 신분에 따라 바지의 폭, 길이, 색 등을구분한 것으로 보인다.남자의 경우 바지는 계속 겉옷으로 착용되어 조선시대에 이르러 양각이 분리된 형태, 앞뒤가 절개된 형태, 사폭(斜幅)으로 구성된 형태를 보이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또한 신장을 중심으로 폭을 잡아 제작되기 때문에 체형에 꼭 맞는서양의 바지보다는 여유가 많아 좌식생활에 편리한 구성으로 되어있는 것이특징이다.

 

 

성인 남자용



겹바지

  남자 바지는 통이 넓어서 좌식 생활에 편리한 옷이여서 가내 생활에 애용 되고 있다.겨울에는 명주 바지에 솜을 넣어 지으면 겨울철의 방한용으로 대단히 좋다. 바지는 허리띠와 대님을 매는 번거로움과 허리가 통으로 되어있어 입은 모양이 간단해 보이지 않고 처지기 쉬우므로 입기에 불편하나 가정에서 입기에 이상적이며 손쉽게 만들어 입을수 있어 경제적이다.

 

남자 아이

풍차바지

  풍차 바지 풍채 바지라고도하며 주로 활동하기 시작한 2세부터 4~5세까지의 어린이들이 입는 옷이다.어른 바지와 같이 큰 사폭 작은 사폭을 달아 막히게 하여복부를 가리게 하고 밑을 트고 재물무를 달아 뒤로 여미게 한 것이다.입는 법은 저고리속에 입는것이 원칙이나 평상복으로 입힐때에는 저고리 위에 입혀 웃옷으로 사용하면 입고 벗기에 편리하고 보온도 잘된다.솜으로 누벼입기도 하며 요즘같이 누빈천이 많이 있을때에는 그것으로 만들어 입기도 한다.

 

 

◐  치마 -

 

치마는 여자를 위한 옷이다.바지와 대조적이라고 말할수 있겠다.치마는 성인 여성과 여자아이용이 있다.


 치마는 저고리의 아래에 입는 여성의 하의로 형태는 치마의 몸체와 허리띠, 끈으로 간단하게 구성돼 있다. 치마의 폭은 평면의 천을 이용하여 그대로 쓰지만 상부에 주름을 잘게 잡아 허리띠의 속으로 집어넣는다. 입을 때는 앞에서 둘러 입고 뒤에서 한 쪽으로 여며지게 하여 끈으로 묶으며 치마의 폭은 그대로 풍성하게 둥근 분위기를나타낸다. 특히 치마의 형태는 잘게 잡혀진 주름이 아래로 수직적인 분위기를 주며허리띠의 색을 흰 것으로 하여 치마색을 돋보이게 한다.치마는 폭이 넓어 우리나라의 온돌생활에 적합한 기능성이 있는 반면 뒷중심 여밈이 열리게 돼 있어 할동하기에 편리할 뿐만 아니라 미적으로도 기품있고 우아한 멋을 더해준다. 


성인 여자


  의복의 한가지.허리에서 그 아래부분을 가리어 입는 여성 겉옷의 한가지 이다.요즘의 치마는 주로 세폭의 주름을 잡아 어깨 허리를 달아 입는데 만드는 방법이나 에 따라 홑치마,겹치마,누비치마가 있다. 그리고 모양에 따라 뒤를 여미고 입는 풀치마와 뒤가 막힌 통치마가 있다.그밖에 예복용인 스란치마와 대란치마,일할때 입는 앞치마가 있으며, 겉치마 밑에 받쳐입는 속치마와 무기치마가 있다.

 

겹치마

  한복 치마의 한가지.겉감만으로 바느질한 홑치마에 대하여 안을 넣어 겹으로 바느질 한것이다.

 

풀치마

  한복 치마의 한가지. 양쪽으로 선단이 있어 둘러 입게 된 치마이다.치마폭이 통으로 된 통치마에 상대되는 것으로 한복치마의 기본이다.띠허리나 어깨로 치마허리를 만들고, 치마폭과 치마허리를 맞추어 주름을 잡으면서 치마허리와 치마폭을 붙여 박는다. 

 

통치마

  한복치마의 한가지. 양쪽 선단이 없이 통으로 지은 치마이다.띠허리를 달아 뒤로 여며 입는 풀치마와는 달리 통으로 박아 주름을 잡은 치마폭에 조끼허리 또는 어깨 허리를 단다.조끼허리의 앞은 여미게 되어 있으며 풀치마에 비해 간편하고 활동적이다.길이에 따라 긴 통치마와 짧은 통치마로 구분 된다.

 

스란 치마

  치마에 금박무늬의 스란을 댄 치마.옛날에 궁중이나 일반 부녀자들이 입었던 예복용 치마로 폭이 넓고 길어서 입으면 발이 보이지 않는다. 왕비는 용무늬 세자빈은 세자빈은 봉황무늬, 공주나 옹주는 꽃과 글과 무늬,일반 부녀자들도 꽃과 글자무늬를 놓았다.스란을 두층 댄것을 대란치마라 한다. 

 

앞치마

  부엌일을 할때 옷을 더럽히지 않도록 앞에 두르는 작은 치마.행주 치마, 또는 에이프런 이라고도 한다. 가정에서는 흰색이나 밝은색의 무명천이 많이 쓰이고 그밖에 음식점, 생선가게, 정육점 등 에서는 가죽 제품이나 고무 제품등이 쓰인다.

 

속치마

  여성용 속옷의 한 가지. 겉치마 밑에 받쳐서 입는 치마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조끼허리에 겉치마와 비슷한 치마폭을 이은것과 겉치마폭이 푸하게 퍼지도록 하는 무지기치마가 있다.

 

무지기 치마

  여성용 속옷의 한가지. 한복으로 정장 차림을 할 때 치마바로 밑에 입는 속치마의 한가지 이다.홀수인 3층,5층,7층 등으로 각기 길이가 다른 여러 개의 치마를 겹쳐서 한 허리에 이어 붙여 만든다. 각 단 밑 부분에 각각 다른 색으로 물을 들이며, 가장긴 것이 무릎 아래에 이르고 차차 짧아지므로 무지개 색을 이룬다 하여 무지기 라는 이름이 붙었다.


여자 아이

치마

  여아의 치마는 대개 설빔으로 많이 입히는데 평상복으로 입는 경우가 적으므로 화려한 감을 준다.색은 다홍색이 많이 쓰이는데 남색,초록색,분홍색 등도 많이 쓰인다. 


 

 

 

◐  두루마기 -

 

두루마기는 갑오경장 이후로 등장하였다.
     두루마기에는 성인 남자,성인 여자,남자 아이용이 있다 .

  저고리와 바지 위에 입는 두루마기는 고구려 벽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미 상고시대 부터 입어온 우리의 민족복이다. 추위를 막기 위한 방한용으로 착용하였으나 후대에 내려오면서 예를 갖추기 위한 의례복으로 그 착용 범위가 넓어진다.벽화의 두루마기는 저고리와 마찬가지로 깃, 소매, 부리, 도련의 선을 두르고 저고리의 맺음과 중복되지 않도록 두루마기의 띠는 뒤중심, 혹은 옆허리 주변에서 매도록 하여 기능적인 구조의 지혜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 두루마기는 고려시대의 백저포(白苧袍)로 이어져 왕실과 귀족, 관료 및 평민의 평상복으로 착용되었으며 조선시대에 와서는 보편적으로 착용한 겉옷으로서그 가짓수도 매우 다양하여 왕과 신하의 제복을 비롯하여 조복(朝服), 상복(喪服) 뿐만 아니라 사대부의 직령포,단령포, 창의, 중치막, 천릭 등과 같은 각종의 두루마기 형태로 발달하였다.특히 선비사회의 상징이랄 수 있는 옥색의 이 도포는 옷이 갖고 있는 풍성함과너그러움, 권위의 장엄함마저 깃들어 있어 지고한 선비의 위엄을 느끼게 한다.

성인 남자

남자 두루마기를 웃옷으로 입게 된것은 고종 31년 이후의 일이다. 백궁의 통상 예복 으로 입게 된 것이 오늘날 남자 두루마기의 시초다. 그후 두루마기는 남자 한복의 웃옷으로 착용되어 왔으며 밖에서는 예복또는 방한복으로 사용되는 유일한 한복의 웃옷이었다.또 두루마기는 실내에서 제사를 지내거나 세배할때 착용한다. 두루마기의 종류로는 박이 두루마기(여름용)와과 홑단 두루마기(춘추용)가 있다.

 

 홑단 두루마기 이것은 등바대, 겉바대를 대고 섶에 다른 단을 댄다. 도련,소매부리의 단을 꺽는데 소매부리는 2~3cm, 도련은 5~6cm 안으로 단을 접어 놓고 공그른다.

 박이 두루마기 홑단 두루마기와 비슷한데 박이 두루마기는 다시 뜻지 않도록 아주 꿰매는 옷이라서 바느질은 박음질과 감침질로 한다.보통의 박이 두루마기는 베나 모시로 짓는다.

 
성인 여자용

두루마기 두루마기는 갑오경장 이후로 부터 입게 되었다. 개화기 이후 옷의 간소화와 여성의 외출이 잦아지면서 내외류 쓰개류였던 장옷,쓰개치마 등 이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따라서 남자들과 같이 봄,가을에는 겹 두루마기, 여름에는 홑 두루마기 겨울에는 솜 두루마기를 입었었지만 경제적 부담과 손질의 번거로움때문에 많이 보급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는 섬유의 발달로 손질이 간편해져서 웃옷이나 방한복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치마 저고리 위에 입으므로 한결 옷차림이 돋보이는 웃옷이다. 

 

 남자 아이

두루마기 남아용 두루마기는 연두색 색동 소매를 달거나 연두색,분홍색 등의 단색으로 만든다. 또 길과 소매는 연두색, 섶은 노랑색,무는 자주색,고름과 깃은 남색으로 하는것을 까치 두루마기라고 한다.

 

 

 

 

◐  조끼 -

 

 

조끼는 성인 남자와 남자 어린이가 입는 옷이다.


조끼

  조끼는 우리나라 고유의 의상은 아니다.이옷은 원래 영국의 "VEST", 프랑스의"GILET"이라는 의복을 흉내낸 것으로 여겨진다.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착용된것은 일본의 영향인듯 하다.하지만 외국에서 온 의상이 우리의 정서에 맞게 디자인 된것도 우리의 자랑이다.
조끼는 저고리 위에 입는 것인데 주머니가 달려 있어 일용품을 넣기에 편리하고 미관상으로도 손색이 없는 옷으로 오늘날 남자복식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만큼 중요 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마고자 -

 

마고자는 성인 남자, 성인 여자,남자 어린이용 으로 구분 된다. 마고자의 주된 형태와명칭은 다음과 같다.
 

성인 남자용

마고자

  마고자 원래 마고자는 만주인의 의복이었으나 대원군이 만주 보정부에서 유거 생활에서 풀려나와 귀국할때 입고 돌아오면서 널리 착용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말기 이후에 특수계층의 집안에서 방한을 겸한 사치복으로 등장 했었다.
마고자는 일명 덧저고리 라고도 불리며 용도에 따라 재봉법이 다르고 방한용으로 남녀가 같이 널리 착용 되고 있으며 남자에 있어서 저고리 위에 조끼를 입고 그 위에 덧입는 옷이므로 옷의 모양을 갖추기 위해서 입기도 한다.




 

성인 여자용

마고자

  실내에서 방한용으로 입는 덧저고리 였는데 요즘은 외출용 으로 쌀쌀한 늦봄과 이른 가을에 입으므로 치마 저고리의 감과 색이 잘 어울리는 것을 선택하여야 한다. 형태는 저고리와 같으나 깃과 섶 옷고름이 없다.



 

남자 어린이

마고자

  남아용 마고자는 거의 입혀지지 않았다.
방한용의 경우 동색이 많이 쓰이며 바지, 저고리의 색에 맞추기도 한다.
형태나 명칭은 성인용것과 같다.

 

 

 


 

  남성용 특별복

단령 조선시대 백궁들이 상용복으로 입던 것이 고종때에 이르러 대례복이 되었는데 혼사나 대례를 치를때 입었다.개화 이전까지 신랑의 예복으로서 마지막 남자 예복이다.

도포 도포는 우리옷의 풍성한 기풍을 엿볼수 있는 대표적인 외출복 이다. 두루마기와 같은 넓은 배래와 곡선, 갈라진 손자락 위에 덮인 전삼등은 풍유를 느끼게 하는 홑옷이다

 

 

◐   여성용 특별복

 

 

적삼 적삼의 삼은 홑옷이라는 뜻인데 모시,배,면으로 만들며 속저고리와 저고리 속에 입는 속적삼도 이에 하나다. 사처럼 얇은 감으로 만든것을 사적삼 이라고 한다. 적삼은 여름에 입는 홑옷이다. 한여름에 입는 배,모시등 얇고 빳빳한 감으로 만든 적삼을 홑적삼이라 하며, 봄이나 가을에 입는 적삼도 있는데 이는 박이 적삼이라 한다.

 
◐   남아용 특별복.-

 

전복 갑오경장이전에는 문관들이 편복으로 입었고 조선 말기에 초립동들이 두루마기 위에다 입었다. 남아의 돌이나 명절때 입었었으나 요즘에는 돌날의 정장으로 이용한다.전복은 대개 복건과 같이 입는다.


복건 복건은 머리에 쓰는 수건이 변한것으로 갑오경장 이전에도 도사복에 사용하였고 조선 말에는 초립동들이 전복과 함께 사용했던 것이 오늘날에는 남아의 돌옷의 하나가 되었다


◐  한복의 시대별 변천사.

 

상고시대. -  우리나라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고조선과 그 북족에 부여, 동북쪽에 예맥, 남쪽에 진이들 부족국가는 한사군이 설치되자 북쪽에 옥저 동예등이 나타났으며 남쪽에는 삼한이 이루어졌다.고조선은 단군광검에 의하여 기원전 2333년 에 세워졌다 단군 조선때의 복식에 관해서는 <증보문헌비고>에 머리에 개수아는 법을 가르쳤다 라고 기록된것으로 보아 우리 고유의 복식이 이미 이때부터 형성된것으로 보인다. 또한 위만 조선이 조선에 입국할때 추결만이복 하였다고 기록한것으로 미루어 우리나라의 복식은 한족과는 달리 북방호족 계통임을 알려 준다.

 

 부여 해모수가 기원전 59년에 세웠는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보면 흰옷을 좋아하여 흰천으로 지은 대메포와 바지를 입고 갖신을 신었다고 한다.옥저와 동예는 후에 고구려에 복속하게 되었는데 의복제도는 곡령을 입었으며 남자는 은화장식을 하고 여자는 바지를 입지 않고 준의를 입었다.삼한중 마한 사람들은 무명을 짜고 전잠을 하였으며 상투틀고 목걸이와 귀걸이를 하였다고 한다. 또한 변한진한 사람들은 잘발에다가 흰옷을 즐겨 입었으며 고깔을 좋아하고 넓은 폭의 곱고 자는 삼베를 잘 짰다고 한다.

 

◐  삼국시대. -

 

 우리나라 상고 복식의 원형은 저고리 바지 치마로 갈라져 있는 북방 호복계통의 옷이다. 삼국시대에 복식은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서 볼수있는 데 머리에는 관모를 썼으며 저고리가 엉덩이까지 내려오고 직선으로 교차시켜 여미는 깃형태의 직령교임식으로 외쪽여밈이다. 또 깃 부리 도련에는 다른 천으로 선을 두르고 바지는 가랑이가 좁은 홀태바지 형이다 그리고 양복바지와 같은 궁고 가랑이가 넓은 광고 잠방이와 같은 바지도 있었다. 치마는 길이가 길고 거단까지 잔주름이 잡혀 있다 두루마기는 무릎을 내려갈 정도로 길고 저고리와 같이 선도 보인다. 신은 주로 화를 신고 이도 병용하여 신었다. 이와 같이 실용적이고 활동적이며, 북방 한대성 기후에 알맞은 옷이다.
 

<<관모>>

        (책) (절풍) ( 걱권 ) ( 금제내관)


: (안악 3호분 주인도) 주로 고구려인의 대가주부가 썼다.

절풍: (쌍영총 기마상) 변상의 관모 고구려에서 신라까지 이용 깃털꽂은건 귀인용이고 자주색 비단으로 만든 소골이라는 관은 일반 남자들이 썼다.무풍적인 기상과 높은지위의 표상을위해 변형두 함

: 7세시경부터 , 폐양립은  원성대양조의 소립 이란 말이 최초의 기록이며 이소립은 순수한 죽제의 갓..

건권 : 하나의 수건과 같은 것으로 남녀가 같이 이용 머리가 흘러 내리는 것을 올리기위해 주로 부인의 관모로 착용

금관: 경주 교동출토의 금관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됨 우리나라 고유의 관모
 

<<저고리>>

         (짧은 저고리)(바지) (색동치마)


저고리: 유,다의라구 하였고 신라에서는 위해라구 일컬음 구성상으로 유나 삼으로 표기 , 유는 겹저고리, 삼은 홑저고리를 말한다. 저고리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거의 같고 형태도 남녀가 비슷 색갈문양이 다양하고 왼쪽여민에 통소매 노동착의로 짧은 저고리를 입었다. 소매길이, 선도 문양과 색깔이 다른것을 보면 귀족과 평민의 계급적표시

 

바지: 고,경의라구 함 신라에서는 가배.가반, 여자의 바지는 고쟁이로 불리게 됨 .  상고시대부터 남녀가 모두 입음 부인들도 기마를 했으므로 편한바지를 입었을것이다.

 

치마: 상 또는 군으로 표현 , 고구려벽화에는 치맛단에 잔주름이 있고 장식선이 붙어 있음.
 

<<두루마기>>


두루마기: 솜을 둔 긴옷, 바지저고리 치마저고리위에 입음 방한을 위한 목적으로 모두 입음

◐  신라시대 -

 신라의 복식은 관모에는 복두 상의로는 표의 , 반비, 단의 ,내의 배당이 잇었다. 띠에는 보통의 띠와 용대가 있었고 하의로는 고와 상, 발에는 버선,이 화대가 달린 화를 신었으며 표라는 목수건이 있었다. 통일신라는 문화의 전성기로 복식도 발달. 흥덕왕9년에는 계급적 복식질서를 쥬지하기 위해 복식금제명령이 내려짐.우리고유의 관모인 소골,절풍 대신 진골에서 평민에 이르기 까지 일률적으로 복주를 썼는데 이것은 당나라의 절상건에서 나온것으로 여겨지며 단석산 공양인물도에서 복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표의,바지,저고리 :웃옷으로 표의라는 두루마기가 잇는데 남자의 겨우는 포란이라 하였다. 이포란의 형태는 문관은 옆이 막혀있고 무관은 아래가 한자 정도 틔어 잇어 직책에 잘 어울렸다. 표의는 상하구별없이 통요되었으며 평인은 마포나 갈포를 사용하고 4두품이상은 면주로 하였다.저고리는 흥덕왕 복식 금제에 단의라 기록하고 있는데 그뜻은 요즘의 저고리 처럼 길이가 짧아서 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또 내의 는 포를 입엇을때 저고리`를 말하는것과 같다.치마, 반비 배당 : 신라에서 당나라의 복식을 모방하여 상을 입었으나 여자의 치마인 군과는 다른 형태이며 의례용이었던것같다 복식 금제에서는 내상과 표상의 구별이 보이는데 내상은 속치마로 추측된다.반비는 남녀공용으로 소매가 짧으며 전복이나 답호와 같다. <지봉유설>에 보면 배자와 같다고 한다. 배당에도 배자와 같으며 소매가 없다 복식금제에서 보면 6두품에서 4두품까지 여자에게 허용하였던 옷이다.

관모: 남자의 두발을 보면 소년은 매는 형이고 성인은 상투를 틀었으며 머리에 스는 대표적인것은 복두였다

<<관모>>

 

 

◐  고려시대 -

 

남자복식
 

백관의 공복을 4가지 색으로 구분하여 제정한것으로 원윤이상은 자삼, 중단경,이상은 담삼,도항경 이상은 비삼, 소주부이상은 녹사밍었다. 이로부터 고려는 22대 강종 원년 1212년까지 거란,송,요,금등의 관복을 다르고 있다.

왕복: 상복,공복,조복,연복,에복이 있다. 상복은   고려도경에 의하면 오사고모를스고 금벽을 수놓은 담황색의소매가 좁은 포를 입었으며 자색 늑건을 띠었다고 기록되어잇다. 여기에 오사고모는 중국천자의 조사절상건은 복두에서 일어난것으로 조선시대의 익선과이 되었다고 한다.공복으로는 자라공복을 입고 상아홀과 옥대를 갖춘다 조복은 평상복위에 복두를 쓰고 속대를 띠며 연복은 조건에 백저포를 입어 서민과 다를 바 없이 우리 고유 복식을 입었다고 한다. 제복으로는 구류면,구장복은 면복인데 이것은 나라의 제향 ,가례등 특수의식에 입는 법복으로 면류관과 거기에 따르는 복식의 총칭이다. 의복만을 할때 십이면류 십이장문을 수놓은 십이장복이다. 제복의 구성을 보면 면류관,면복,상,백사중단,폐슬,수,혁대,옥패,대대,흰버선,붉은신이다. 그런데 제례인 경우에는 방심곡령을 한다. 또 고려말 공민왕 19년 5월에 명의 복제의 영향으로 자주성을 모색해 보고자 중국황제와 동격의 십이류면,십이지장복을 입었으며, 조복에도 중국천자와 같은색의 원유관에 강사포,홍상 백사 중단 강사폐슬 백가대 방심곡령 홍햐대흰버선,검은신을 제정하고 있다. 고종18년 몽고의 침입을 받아 그영향 권에 들어섬..

백관복: 제복,조복,상복,공보이 있다 제복에서는 칠류면 오장복은 1풍의 6월을 입고 오류면,삼장복은 2품에 대상경 이하 15원 까지 무류면은 3품의 41원 이 입었다.조복과 상복에 대하여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고 공복은 복두를 쓰고 광종대의 사색공복제도에 따르고 있는데 그 색복계급에 잇어 자, 단, 비, 녹의 4색 공복을 이루고 있다.

 

민서복 : 몽고풍에 비해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고 소매가 좁아 졌으며 고름을 매게 되었다.  진사는 사대문락건에 조주구를 입고 흑대를 혁리를 신었다. 농민이나 상인은 백저포에 조선, 민장은 조주구에 문라건,흑각대,오혁리였다. 뱃사람은 바지저고리를 입지 아ㅎ고 죽관에 단갈만 입었다고 하는데, 그형태는 잘 안수 없느나 현재의 승복인 동방과 비슷한것으로 짐작된다.불자는 일반사람들이 좋아하는 청적황배흑의 5가지 색을 제외한 잡색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국사는 납기사에 장수편삼과 자상을 입고 오혁대를 띠면 행전과 같은 금발을 치고 방울 달린 영리를 신었다. 두루마기는 유학자들은 조주구위라는 중국식두루마기를 입엇다. 농공상기인들은 두루마기형의 백저포를입고 속대를 띠었다.  
 

<<백저포>>

 


여자복식
 

고려의 여자복식은 통일신라 이래 별로 변함이 없었고 다만 원의 영향을 받안 몽고풍이 궁양을 이루었다.왕비복과 귀부녀복을 중심으로 알아보자

왕비복: 원과의 국혼관계로 원의 공주가 고려의 왕비가 됨으로 궁중관복에 몽고의 영향을 받았으나 이것은 상류층의 극소수에 지나지 않고 서민사회에서는 예복도 우리의 고유 복식을 입었다. 궁중관복은 고려 말렵 공민왕 19년 5월에 면의 효자황후가 보내온 적의 를 보면 알수 있는데 이것은 칠적관,적의 중단,폐슬 대대 혁대 ,수 .청말,청석으로 이어짐

<< 삼회장저고리>>

 

위부녀복 : <고려도경>에  보면 고려의 미혼귀녀들은 황의를 많이 입었다고 하며 상류층에서는 멱시 몽고의 영향을 많이 받음.

몽수 :  고려도경에 보면  귀부인들은 머리의 쓰개로서 몽수를 쓰고 다녔는데 그것은 1폭의 길이가 8자나 되는 검은 비단 3폭으로 만들며 이것을 머리위에서 드리워 얼굴만 내놓고 나머지는 땅에 끌리게 하고 다녔다고 한다. 일면 개두라구 함

화관,족두리 :화관은 신라문무왕 당시 당의 복식 제도에서 수입하여 궁양의 관모가 되었고 그후 고려세서도 귀족예급의 예복에 착용하였다.족두리는 고고리라하여 변발에 아름답게 장식하여 예복에 착용하였는데 이것은 중국의 원세조후의 고고관과 비슷하다.

두루마기 : 남자두루마기와 비슷한 형의 백색 두루마기를 입고 허리띠를 맸다. 이띠에는 채색끈에 금방울이나 향낭을 찼는데 이것이 많을 수록 귀인으로 여겼다고 한다.

저고리: 저고리는 차차 짧아져 띠가 없어지고 원의 영향을 받았을대는 아주 짧아진 것을 볼수 있다. 그리고 저고리 길이가 허리위로 올라가게 됨으로 자연히 저고리 의 띠가 없어지고 고름이 생기게 된것으로 보인다.

바지 : 무늬있는 비단으로 만든 통넓은 것을 입었는데 생견으로 안을 받쳐서 옷이 몸에 붙지 않도록 품을 크게 하는 관고를 좋아했다..

 

치마 : 가을과 겨울에는 색이 짙거나 엷은 황색면주치마를 공격대부의 부인에게 사민 유녀에 이르기 까지 특별한 차별없이 입었다.그리고 왕비의 겨울용치마는 홍색에 수를 놓았는데 일반 부녀자들의 치마에는 못하게했다. 이것이 조선조의 스란치마가 될것같고 이로부터 황유홍상이니 녹의 홍상이니하는 조선여자의 복색이 된것으로 짐작된다.

 

선군 : 속치마의 일종으로 치마폭을 넓게 하기위한것이었으며 조선시대의 무지기치마 같은것이었다.따라 이 선군위에 입는 겉치마는 8폭에 길이가 꽤 길어 서 걸을때 겨드랑이에 끼고 다녔다고 하는데 부귀한 집의 부인은 치마 한벌 만드는 데 옷감을 7~8필이나 드였다고 한다.

 

저상 : 3폭을한 가랑이로 한다는 것으로 왕에게 서민에 이르기까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입었다.옷감으로주로 여름에는 모시를 겨울에는 비단을 사용

또한 선이 없어지고 대신 동정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손끝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워 비록 주채를 들 때라도 붉은 주머니로 손을 가렸는게 이것은 한삼의 용도와 비슷하다.


<<고고관>>

 

◐  조선시대 -

 

 

남자복식
 

조선중기후기의 임진,병자 양란 후에 실학 사상으로 말미암아 복식에도 실용성을 부여하게 되고 단순화 시키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고종 21년 갑신정변과 더불어 복제 변경을 단행하였다 개화기에 이르러 우리나라 복식은 고유복식과 양복의 소용돌이 속에서 끈질기게 그전통을 발전시켜 왔다.


<<왕복>>

 

왕복 : 제복으로 면복,조복에는 원유관,강사포,상복에는 익선관,곤료오,첩리,답호가 있으며 전쟁시에 전립으에 융복을 입고 한가히 지낼대는 편복을 입었다.

면복: 왕의 제복및 대례복으로 면류관에 곤복으로 구성된다 면류관은 위모관과 더불어 중국 고유의 관모로 주나라에서 유래된것이다. 면류는 황제가 12류 12옥이고 황태자,친왕은 9류 9옥이며 옥의 색채도 5채옥과 3채옥등을 엮었다.

 

익선관.곤룡포: 익선관에는 왕의 상복으로 평상 집무때입는 옷이다. 세종 26년 3월 에 사은사 유수강이 명나라에서 가져온 왕의 상복을 보면 익선관,곤룡포로 기록되어 있다. 익선과은 복두를 모방하여 만든 관모로 탕건위에 썼다.그리고 명사 <여복지>에 기록된 곤룔포를 보면 황제는 황색포에 앞뒤와 양어깨에 용문을 직금하엿고 황태자는 색만 다른 홍색포역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친왕례에 따라 세종조에서 조선 말가지 홍색의 곤룡포를 입었으나 고종의 황제가 된후에는 황색포를 입었다.

 

사인복 : 사인복은 유관자 아닌 반인 계급의 복식을 말한다.,

 

남삼,심의 : 남삼은 단령에 선을  두른 형태로 상사의 복식으로 삼앗는데 이것은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입는 옷이다. 아울러 생원,진사,창방이 입었으며 앵삼과 같은 것으로 옥색길에 검은선을 둘렀다. 심의는 고대 중국 의 천자 ,제후의 평복이었고 사대부에게는 상복,서인에게는 길복이었으며 유자의 법복이었다 그형태는 백포로 만들어 의 4폭,상 12폭을 서로 연하여 둥근 소매,모난깃,굽은 단을 가졌으며 깃,도련,부리에 검은선을 두르고 복건을 썼다. 굽은 단을 가졌으며 깃,도련,부리에 검은 선을 두르고 복건을 썼다. 여기서는 치마폭의 12폭인 것은 1년 12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심의의 재료는 세포(세마포),명주를 썼으나 툭수층은 비단을 사용하였다. 이옷에 매는 띠오 흰색에 검은 선을 2줄 둘렀으며 매는 방법은 동심결로 맨다.
 

<<심의>>

 


여자복식 
 

조선시대의 여자 의복에는 저고리 치마 속옷 비롯하여 버선신까지 포함한 평상복과 의식이나 혼레때 입던 적의 활옷,원삼, 당의 등 예복이 있다.

 

저고리: 조선초기 1530년대의 순천 김시의 갈색명주 솜저고리 는 길이가 70cm이며 1580년 청주 한시의 덧저고리 길이가 70cm이며 1580년 청주 한씨의 덧저고리 길이는 81cm나 되었는데 1616년 판것이고 1700년대의 누비 삼회장 저고리는 길이가 42cm 점점 짧아지고 깃도 당코깃으로 변하엿다 1780년 청연군주의 문단 삼회장저고리는 길이가 19.5쎈티이며 조선만 1900년대의 저고리길이가 극도로 짧아진 때는 14.5센티로 거의 진동선 과 일치하게 되고 진동의 길이는 13센티이며 곁마기는 진동선위로 올라가는데 앞도련이 가장 짧아진 부분의 길이는 12센티밖에 안된때도 잇었다.1930년대의 반회장저고리는 길이가 26센티인데 이때부터 현재의 저고리길이와 비슷한 25~26센티 정도의 기이로 정착된 것을 볼수 있다 이들 저고리의 길이가 아주 짧아지는 변천은 임진란 전 조선 초기의 저고리들과 비교하면 그특징이 더욱 두드러지는데 이러한 복식흐름의 성향은 전란 후라는 사회적 요인에 의하여 단순화된것이며 형태는 축소되고 계급적으로 평등화되엇으며 제도적으로 자유화되는 혀낭으로 해석할수 있다,

 

배자 : 장배자,단배자,배자의 세종류가 있다 장배자는 양옆을 꿰매지 않은 요즈음원삼이고 다배자는 뒤의 다으이를 말하며 반비의 짧은 것이 요즈음 볼수 잇는 배자이다.

갓저고리: 초구라고도하며 중국 혁철족의 복식에 서 그 원류를 볼수 잇다. 갓저고리와 갓두루마기는 상류층에서 입은거 같고 세종11년   2월 사헌부에서는 초구피를  양반자제에게 허용 하였다.

 

치마 :우리나라 여자옷의 기본인 치마 저고리 의 형태가 다 같이 단일적이면서 저고리에는 다소 변화를 갖는데 비해 치마에는 별로   변천이 없었고 그길이는 저고리와 마찬가지로 일정한 주기로 유행하였다 속치마는 겹겹이 5~6겹입었는데 처음은 짧게 하고 차례로 길게 하여 겉치마를 입은 모습은 비약한 가슴에 비해 둔부는 종을 엎어 놓은 듯하였고 그 위로 긴 치마가 끌릴 때의 미는 생명력을 갖고 유행하엿던 것을 알 수있다,치마입는법은 반가부인은 외로 여미고 서민 계급은 바로 여며 반상을 가렸다. 색에 있어서는 양반 계급은 어려서부터 출가하여 아기를 낳을 때가지 다홍치마를 주로 입고 중년이 되면 남색치마 노년이 되면 옥색회색 계통의 치마를 입었으나 부부가 함께 살아 있으면 아무리 늙었어도 큰일 때에는 남색치마를 입었다. 노비들은 5세가량까지는 별차이 없이 다홍치마를 중년이후에는 감색이나 고동색을 많이 입었다. 옷감에 있어서 양반은 주로 단 사 주 를 입었으며 고동색을 많이 입었다.

 

두루마기 :두루마기는 갑오경장이후의 표를 말하며 삼국시대에는 포로 불리었는데 그 모습을 고구려 벽화에서 볼수 있고 신라의 표의 백제 국사의 포가 그것이며 고려 조선시대까지도 남녀 비슷한 형태엿다. 두루마기 원류는 구에서 발전한것으로 보이며 그 복식용어는 조선후기로 보는데 몽고의 xurumakci에서 나왔다고 한다.조선시대의 여자 의복에는 저고리 치마 속옷 비롯하여 버선신까지 포함한 평상복과 의식이나 혼레때 입던 적의 활옷,원삼, 당의 등 예복이 있다.

 

◐  생활풍습과 한복
 

혼례복

 우리나라 전통혼례의 절차는 네가지 의례로 이루어진다. 즉결혼의사를 타진하여 혼례일을 정하는 납채, 예물을 보내는 납폐, 혼례식을 올리는 친영이 그것이다. 요즘 전통혼례식이라고 하 는 것은 친영만을 일컫는 것이고 혼례식을 마친 신부가 시댁의 부모 와 친척에게 첫인사를 올리는 절차인 현구고례는 아직도 폐백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혼례식에서 신랑은 바지 저고리와 조끼, 마고자 위에 두루마기 를 입고 단령을 입고 사모관대를 하고 목화(木靴)를 신는다. 관대는 단령의 겨드랑잉 고리가 있어 그 고리에 끼우는데 대체로 허리나 가 슴둘레보다 크기 때문에 고정이 되지 않는다. 앞가슴의 흉배 중앙에 관대가 위치하도록 한다.

 

 신부는 청홍 스란치마와 노랑저고리위에 원삼을 입고 족두리를 쓰고 용잠에 앞댕기와 도투락댕기를 드린다. 홍치마의 앞부분을 한번 접음으로써 속에 입은 청치마의 스란단이 나 오도록 입는다. 원삼의 봉띠는 가슴을 지나 뒤에서 속끈으로 묶도록 되어 있고 봉때는 옹매지 않고 속끈에 걸쳐서 한 번만 묶으며, 길게 늘인 끝 부 부분에도 같은 방법으로 한 번만 묶는다. 폐백 때의 옷인 활옷은 공주의 대례복이었던 것으로 혼례시에 는 일반인에게도 허용이 되었던 옷이다. 다홍색 바탕에 장수와 길복 의 뜻을 지닌 십장생 길상 문양이 옷 전체에 수놓아져 있는 화려한 옷으로 머리에 화관을 쓰고 앞댕기와 도투락 댕기를 드린다.
 

여자아이 돌옷 

 여자 아이에게는 연두색이나 노랑색의 천으로 저고리를 해주고 돌이나 명절같은 특별한 날에는 색동 저고리를 입혀 아이를 곱게 꾸 몄다. 이때 저고리의 깃과 고름은 자주로 달았다. 요즈음 돌을 맞 은 여자아이에게 당의를 입히는 풍습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머리에는 검정공단으로 지어 오색술을 단 조바위를 씌우기도 하는데, 아이에게 씌울 때는 수를 놓거나 금박을 입혀 화려하게 꾸미기도 한 다. 조바위가 일반화되기 전에는 굴레를 씌웠다.
 

남자아이 돌옷 

 남자 아이가 입는 옷은 여자아이들의 옷에 비해 가짓수가 더 많다. 돌이나 명절에는 아이에게 연한색으로 옷을 해 입혔는데 보통 긴 남색 고름을 단 연분홍 저고리에 대님을 붙박은 연보라색 풍차 바 지를 입고, 그위에 남색조끼와 초록색 마고자를 입혔다. 그 겉에는 자주색으로 무를 달고, 남색으로 깃, 고름을 단 오방장 두루마기를 입 혔다. 이 전대는 남자아이가 띠는 돌때이다. 머리에는 쌍희자 무늬 와 길한 문자 무늬로 금박을 입힌 복건 또는 호건을 썼다.
 

회갑연 

 회갑연 즉, 수연(壽筵)때는 자녀들이 회갑을 맞은 부모께 헌수 를 하는데, 큰상을 차려 술잔을 올리면서 축수를 하는 의례이다. 이때 회갑을 맞는 남자(양반가문에서) 금관초복을 입었고 정해진 예복 은 없지만 여자는 소례복인 당의를 예복으로 입기도 했다. 당의는 조선시대 비, 빈, 상궁과 사대부의 여인들이 소례복으로 입었던 예복의 한가지로 치마와 함께 입는다. 당의는 겨드랑이 아래에서부터 양 옆이 트여있고 완만한 곡선으로 되어 있어 우리옷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는 옷이다.
 


◐    한복 보관하기
 

계절이 바뀌어 오랫동안 보관할 때는 저고리는 동정을 뜯고 치마는 허리를 뜯어 주름을 펴서 두어야 하며, 모시 옷은 풀을 먹인 상태로 두면 좀이 슬기 쉬우므로 풀기를 완전히 빼고 다려서 둔다. 그리고 많은 옷을 눌러 넣어두면 옷의 모양이 변하기 쉬우니 눌리지 않게 적당히 넣어야 한다. 옷을 보관하는 용기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며, 옷장만도 용도에 따라 이층장, 삼층장, 반닫이, 양복장 등오로 그 형태가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오동나무로 만든 옷장은 가볍고 뒤틀리지 않으며 , 습기가 많을 때에는 자연히 팽창되어 외기의 침입을 막고 또 내부의 습기를 흡수하기 때문에 장 속의 옷은 항상 건조 상태를 유지 할 수 있어서 옷장으로는 가장 이상적이다. 옷을 장기간 보관 할 때는 비닐이나 폴리폴리에틸렌 주머니를 이용하는 경우가 있는 데 통기성이 없어 밀폐할 수 있으나 충분히 건조시키지 못한 옷을 넣으면 오히려 좋지 않다. 옷을 보관 할 때는 충해를 막기 위해 방충제를 반드시 종이에 싸서 옷갈피에 넣어두도록 하고 , 습기를 방지하는 방습제도 함께 넣어 두면 좋다. 그리고 맑은 날 통풍이 잘 되는 곳에서 자주 거풍하는 것도 충해를 방지하는 방법 중의 하나다. 거풍된 옷은 솔로 털고 다시 잘 개켜서 보관한다. 

한복 개키기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선이 가지 않도록 크게 개켜 두는 것이 좋다.

ㄱ. 저고리
저고리는 잘 펼쳐서 고름을 가지런하게 옆으로  뼻?놓고 양쪽 소매를 길 쪽으로 진동선을 꺾어 접어 개킨다. 남자 저고리의 경우에는 다음에 길의 아랫부분을 어깨선까지 접어 올려 놓는다. 그러나 자주 입는 경우에는 등솔을 중심으로 하여 반을 접어 진동선이 닿게 옷걸이나 횃대에 걸어 둔다.

ㄴ. 치마 
치마는 폭과 폭선을 합하여 반씩 접은 후 길이로 반을 접어 개킨다. 자주 입는 경우에는 허리를 끈으로 돌려 묶어 옷장 속에 걸어두기도 한다.

ㄷ. 바지 
바지는 밑위 중심선을 중심으로 하여 반으로 접어 양 가랑이를 포개어 놓고 밑 아래와 밑 위 부분을 각각 반으로 접어 개킨다. 대님과 허리띠는 바지 갈피나 조끼 주머니에 넣어 둔다.

ㄹ. 조끼 
조끼는 뒷 중심선을 중심으로 하여 반으로 접어 앞뒷길 4겹이 되게 개킨다.

ㅁ. 두루마기 
두루마기는 잘 펼쳐서 고름을 가지런하게 옆으로 접어 놓고 양 쪽 소매를 길 쪽으로 진동선을 꺾어 접은 후 위에서부터 길이의 1/3 선을 양 손으로 쥐고 병풍 접기로 세 번 접어 개킨다. 보관 장소가 협소할 때에는 양쪽 무를 길 위로 접어 개켜도 좋다.

한복 다리기
 
 
    다림질을 할 때에는 덧 헝겊을 덮고 옷감에 따라 적당한 온도로 다려야 옷감이 상하지 않고 모양의 변화도 적다.

ㄱ. 저고리
 저고리는 먼저 안감을 다리고, 도련과 부리의 안감이 겉으로 밀려 나오지 않도록 안 쪽에서 눌러 다린 다음 겉감을 다린다. 겉감은 뒷길과 소매 뒤, 앞길과 소매 앞, 안깃, 겉깃, 고름의 순으로 다리며, 특히 앞길을 다릴 때에는 섶코에 실을 꿰어 잡아 당기면서 다려야 섶코가 예쁘게 빠진다.

ㄴ. 치마
치마는 아랫단과 선단을 안감 쪽에서 먼저 다리고 치마 폭을 아래에서부터 다린 후 허리를 다린다. 이 때에 주름은 너무 누르지 말고 다려야 치마의 풍성함을 살릴 수 있다.

ㄷ. 바지
바지는 먼저 허리와 부리의 안감이 겉으로 밀려 나오지 않도록 안쪽에서 눌러 다리고, 마루폭 솔기를 약간 잡아 당기면서 다린 다음 마루폭 솔기를 접어 놓고 사폭과 허리를 다리며, 나중에 대님과 허리띠를 다린다.

ㄹ. 기타
조끼는 안감을 먼저 다린 후 겉감을 다리며, 마고자와 두루마기는 저고리와 같은 방법으로 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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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한복이 위아래로 나뉜것은 수렵과 유목 생활을 하는북방 민족의 영향을 받았습니다.그리고 이러한 옷차림은

하나의 옷으로 몸을 감싸는 것보다 활동하는 데 편리하고 추위에도 잘 견딜 수 있었습니다.

여자 : 우리나라 전통의 여자옷은 몸매를 드러내지 않으면서풍성한 느낌을 줍니다.치마,저고리가 기본이며 여기에 다양한 빛깔과 꾸밈새로한껏 멋을 냈습니다.

남자 : 남자의 기본 옷차림은 바지,저고리,두루마기이며 옷의 모양이나옷을 입는 격식은 시대에 따라 달랐습니다.

 

◎김정호

(1) 태어난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1800년 황해도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것

으로 알려져 있음. 호는 고산자.

(2) 어려서부터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학문을 익히고, 지도에 관심을 가짐.

(3) 한양에 있는 규장각으로 지도를 구하러 갔다가 먼 친척을 만나 지도를 많이 가 지고 있는 선비를 소개 받음. 그러나 그 지도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는 직접 확인하여 지도를 그리기로 결심함.

(4) 혼자서 실지의 지도를 그리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30여 년 간 돌아다님.

(5) 부인이 딸 하나를 남기고 죽자, 황해도에서 딸과 함께 한양 만리재로 이사.

(6) 한양 남촌에 살던 조선 후기의 대표적 학자 최한기와 사귐.

(7) 1834년 (순조 34년), 상·하 두 권으로 된지도 ‘청구도’를 완성.

(8) 최한기와 함께 ‘지구도’란 세계 지도를 대추나무 판자에 탑본으로 새김.

(9) 1861년 (철종 12년), ‘대동여지도’22첩을 완성.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의 땅을 16만 2000분의 1로 줄였고, 남북을 22단(1단은 120리)으로 나눔. 다시 각 단을 6치 6 푼의 폭(1폭은 80리)으로 하여 가로로 나눔.

(10) 1864년 ‘대동지지’를 펴냄. 모두 32권 15책으로 각 읍의 역사, 성곽, 다리, 풍 속 등 39가지의 내용을 담고 있음.

(11)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 없으며, 대동여지도의 판목도 전해지지 않음.

김정호가 나라의 기밀을 누설하여 감옥에서 죽었다는 것은 엉터리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한 인물을 감옥에 보냈다고 한 것은 우리를 어리석은 민족으로 깎아내리려는 일본의 뜻이 숨겨져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제 잘못된 우리의 역사를 똑바로 보고 바로잡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야한다. 어렵게 생활하는 김정호를 보고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김정호는 밝게 웃으며, “나는 어떤 대가를 바라고 지도를 만들지는 않았소. 다만 내가 원해서 했을 뿐, 내가 만든 지도가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고 바랄 뿐이오.” 하고 말했다고 한다. 김정호의 말대로 그는 나라에서 시켜서 지도를 만들었거나 나라로부터 돈을 받으면서 지도를 그린 것이 아니다. 오직 좀 더 정확하고 분명한 지도를 만들겠다는 뜻이 그 힘든 일을 해냈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업적은 더욱 빛이 나는지도 모른다. 역사의 한 장을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보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긴 분이다.

후손으로서 떳떳치 못한 것은, 김정호가 딸과 함께 평생 동안 애써 만든 대동여지도의 판목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숱한 전쟁 통에 불태워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대동여지도는 1861년과 1863년 두 차례 찍어 낸 것이 지금까지 남아 있을 뿐이다. 김정호는 끝내 이름 없는 선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역사 위에 영원히 남을 큰 발자국을 남겨 놓고 갔다.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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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는 1880년경 태어났을 것으로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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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전 5학년입니다.

김정호는 아주 큰 일을 했다고들 하는데요.....

억울하게 죽었다고합니다.

힘들게 지도를 만들었는데 그만 그 지도가 왜구에게 넘어가서 왜구가 자기 나라를 더 잘 알수있게

했다고들하면서 김정호를 처벌했다.,

한복에대해서....

한복은 남자와여\자가 다르고 신분ㅊ이로 한복색상이 달라졌다.

남자는 저고리 바지 조끼등이있고 여자는 속치마 치마 저고리 조끼등이있습니당~
많은 도움 되셨길.......

한복과 김정호에 대한설명좀해주세요.

저는 초5학년인데여 숙제가 한복과 김정호에대하여 알아오는 것이여서요. 제발가르쳐주세요.ㅠㅠ(되도록빨리) ◎한복 한복이 위아래로 나뉜것은 수렵과 유목 생활을...

김기창 청산도

... 그림에 대한 설명좀 해주세요 초기의 사실적 작품을... 한복으로 정장한 여인이 박물관에서 관람하는... 1974(61세)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의 영정과 임진왜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