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신라백제발해가야역사

고구려신라백제발해가야역사

작성일 2011.05.19댓글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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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년 가야,거질미왕이 즉위함
292년 고구려,봉상왕이 즉위함
298년 신라,기림왕이 즉위함, 백제,분서왕이 즉위함
300년 고구려,미천왕이 즉위함
304년 백제,비류왕이 즉위함
310년 신라,흘해왕이 즉위함
313년 고구려,낙랑군을 멸망시킴  -----------------------이런식으로해주세여---------------

그리구요 연도별로 계열해주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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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57년-박혁거세, 신라 건국. 왕호 거서간 사용
 BC 37년-주몽, 졸본에서 고구려 건국
 BC 18년-온조, 위례성에서 백제 건국
AD  32년-고구려, 낙랑군 정벌
 42년-김수로, 금관가야 건국
 53년-고구려, 태조왕 즉위(~146)
 194년-고구려, 진대법 실시
 313년-백제와 고구려의 협공으로 낙랑군 멸망
 372년-고구려, 불교 전래
 372년-고구려, 태학 설치
 384년-백제, 불교 전래
 400년-고구려 광개토대왕, 신라에 군사 지원
 405년-백제, 한학을 일본에 전함
 427년-고구려 장수왕, 평양 천도
 433년-백제와 신라, 나제동맹을 맺음
 475년-백제 문주왕, 웅진 천도
 494년-부여, 고구려에 의해 멸망
 502년-신라, 우경 실시
 512년-신라, 우산국 정벌
 520년-신라, 율령 반포
 527년-신라 법흥왕, 불교 공인. 이차돈 순교
 532년-금관가야, 신라에 멸망
 538년-백제 성왕, 사비 천도
 545년-신라, 《국사》 편찬
 562년-신라, 대가야 병합
 598년-수 문제, 고구려 침공
 612년-고구려, 살수대첩
 632년-신라, 경주 첨성대 건립
 642년-고구려, 연개소문의 정변 발생
 645년-고구려, 안시성싸움 승리
 646년-고구려, 천리장성 완성
 660년-백제 멸망
 668년-고구려 멸망
 676년-신라, 삼국통일 완성
 682년-신라, 국학 세움
 685년-신라, 9주 5소경 설치
 698년-발해 건국
 751년-신라, 불국사ㆍ석굴암 창건
 788년-신라 원성왕, 독서삼품과 설치
 828년-신라, 장보고의 요청으로 청해진 설치
 888년-신라, 삼대목 편찬
 892년-견훤, 후백제 건국
 901년-궁예, 후고구려 건국
 918년-왕건, 고려 건국
 926년-발해, 거란에 의해 멸망
 935년-신라 멸망
 936년-고려, 후삼국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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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의

삼국시대 고대국가 중의 하나.

2. 개설

기원 전후 무렵에 성립하여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영역으로 하는 제국을 건설하였으며, 668년에 멸망하였다. '고구려'라는 나라 이름은 성(城)을 뜻하는 '구려'라는 고구려어에 '고(高)'라는 한자어 미칭을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6세기 이후에는 고려(高麗)라고 불렀다. 시조는 동명왕 주몽(朱蒙)이며, 그뒤 27대의 왕위를 이어갔다고 전한다.

3. 역사

700여 년 동안 계속된 고구려 역사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시기는 국가 성립에서 3세기 말 봉상왕대까지로 국가 성립 및 발전기이며, 둘째 시기는 4세기 초 미천왕대에서 6세기 초 문자왕대까지로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대외발전을 이룬 전성기이고, 셋째 시기는 6세기 중엽 안장왕 이후 멸망할 때까지로 쇠퇴기이다.

(1) 성립과 발전
고구려가 처음 일어난 곳은 압록강 중류와 혼강 일대였다. 기원전 2세기 경부터 철기문화가 확산되면서 각 지역에서 '나(那)'라고 불리운 여러 소국들이 성장하였다. 이들은 기원전 75년 무렵에 현도군을 몰아내고 서로 통합하여 연맹체를 형성하였다. 고구려 연맹체는 다섯 개의 나부(那部)로 구성되었는데, 이를 고구려 오부라고 한다. 처음에는 소노부(消奴部)가 중심이 되었으나, 뒤이어 계루부가 연맹왕권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첫 수도는 졸본(卒本:지금의 중국 요녕성 환인현)이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국내성(國內城:지금의 중국 길림성 집안현)으로 도읍을 옮겼다. 1세기에 들어서 태조왕대에는 크게 발전을 이루었다. 안으로는 관직제 등 여러 통치기구를 갖추고 5부체제를 정비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밖으로는 산악지대라는 취약한 경제적 기반을 보완하기 위해 활발한 대외팽창을 꾀하여 동옥저·동예 지역을 복속시켰다. 그리고 중국 군현에 대해서도 공세를 취하여 요동군과 현도군을 여러 차례 공격하였다. 3세기에 들어 중국이 삼국으로 분열되자, 동천왕은 이를 이용하여 중국 오나라와 외교를 맺고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242년(동천왕 16)에 중국 위나라 장군 관구검(·丘儉)의 역습을 받아 수도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당하는 시련을 겪으면서 대외 활동이 한동안 위축되었다.

(2) 체제정비와 정복활동
4세기에 접어들어 고구려는 다시금 대외정복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313년(미천왕 14)에는 낙랑군·대방군을 병합하여 한반도 서북부 곡창지대를 확보하였으며, 요동의 주도권을 놓고 선비족 모용씨(慕容氏)가 세운 전연(前燕)과 힘을 겨루었다. 그러다가 고국원왕대에 전연의 침입으로 수도 국내성이 파괴되는 국가적 위기를 맞기도 하였고, 다시 백제의 근초고왕의 침입을 받아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련 속에서 소수림왕 때에는 율령을 반포하고 태학을 설립하여 국가체제를 새롭게 정비하고, 또 불교를 받아들여 사상계의 통일과 발전을 꾀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을 통해 국력을 다시 일으킨 고구려는 광개토왕과 장수왕대에 비약적인 팽창을 거듭하였다. 광개토왕의 정복활동은 현재 남아있는 광개토대왕릉비에 자세히 전하는데, 이에 의하면 남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남한강유역을 확보하고 신라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북으로 동부여와 숙신을 정복하였다. 또 서쪽으로는 후연과 공방을 거듭하던 요동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 뒤를 이은 장수왕은 광개토왕의 업적을 계승하여 고구려의 전성기를 연출하였다. 427년(장수왕 15)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남진정책을 추구하여 한반도 중부 일대를 손에 넣었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영토는 북쪽으로 송화강 일대, 동쪽으로 두만강 하구와 연해주 남부지역, 서쪽으로 요하유역, 남쪽으로 아산만과 죽령을 잇는 선까지 이르는 제국을 건설하였다. 더욱 중국의 남북조 및 북방의 유연(柔然)과 등거리 외교관계를 맺고 중국세력을 견제하면서 동북아시아에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고구려가 정치·경제·문화의 모든 면에서 가장 완비된 제도를 갖추게 된 것도 이때였다. 그리하여 광개토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를 보면 당시 고구려인은 스스로 천하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여 동북아시아의 주인공으로서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3) 쇠퇴와 멸망
6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고구려는 차츰 쇠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먼저 왕위 계승을 놓고 정권 다툼이 거듭되면서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에 왕권이 약해지고, 점차 귀족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당시 유력한 여러 귀족가문은 서로 연합하여 권력을 나누어 쥐고 정치를 마음대로 하였는데, 이를 귀족연립정권이라고 한다. 이러한 정치체제는 말기에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차지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국제정세의 변동도 고구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551년(양원왕 7) 백제와 신라의 동맹군의 공격을 받아 한강유역을 빼앗겼으며, 또 6세기 말에는 3백여 년간 분열되었던 중국이 수(隋)나라에 의해 통일되면서 고구려를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세력권을 지키려는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결전을 불사하였고, 612년(영양왕 23) 수양제의 백만 대군을 살수(薩水:지금의 청천강)에서 격파하기도 하였다. 수나라의 뒤를 이은 당(唐)나라 역시 중국을 재통일한 후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645년(보장왕 4) 당 태종에 의한 고구려 침공을 안시성(安市城) 전투에서 격퇴하였으나, 오랫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이미 고구려의 국력은 상당히 쇠약해져 있었다. 결국 668년(보장왕 27) 나당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되어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고구려 왕위 계보]
(1) 동명왕(B.C.37-B.C.19)
(2) 유리왕(B.C.19-18)
(3) 대무신왕(18-44)
(4) 민중왕(44-48)
(5) 모본왕(48-53)
(6) 태조왕(63-146)
(7) 차대왕(146-165)
(8) 신대왕(165-179)
(9) 고국천왕(179-197)
(10) 산상왕(197-227)
(11) 동천왕(227-248)
(12) 중천왕(248-270)
(13) 서천왕(270-292)
(14) 봉상왕(292-300)
(15) 미천왕(300-331)
(16) 고국원왕(331-371)
(17) 소수림왕(371-384)
(18) 고국양왕 (384-391)
(19) 광개토왕(391-413)
(20) 장수왕(413-491)
(21) 문자왕(491-519)
(22) 안장왕(519-531)
(23) 안원왕(531-545)
(24) 양원왕(545-559)
(25) 평원왕(559-590)
(26) 영양왕(590-618)
(27) 영류왕(618-642)
(28) 보장왕(642-668)

4. 분야별 개관

(1) 정치제도
초기에는 계루부왕을 중심으로 각 나부를 대표하는 대가들이 연합하여 정치를 운영하였기 때문에, 관등과 관직도 이러한 체제에 알맞게 성립되었다. 왕은 중앙의 관등으로서 상가(相加)·대로(對盧)·패자(沛者)·고추가(古鄒加)·주부(主簿)·우대[優台] 등을 두고, 그 아래에 하급 관원으로서 사자(使者)·조의(皂衣)·선인(先人) 등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리고 각 나부의 대가들도 자기 소속의 사자·조의·선인 등을 별도로 둘 수 있었다. 다만 왕의 관리들이 나부의 관리들보다는 우월한 지위에 있었다. 중앙관직으로는 국상(國相)·중외대부(中畏大夫) 등이 설치되어 왕을 보좌하고 국정을 관장하였으나 나라 안팎의 중요한 일들은 각 나부의 유력자들로 구성된 제가회의(諸加會議)에서 결정하였다. 4세기 이후 율령이 반포된 이후에는 중앙의 국왕을 중심으로 일원화된 관등체계를 가지게 되었다. 관등의 등급은 시기에 따라서 약간의 변천이 있는데, 6∼7세기에는 13등급이었다(아래 관등표 참조). 고구려 관등의 특징은 '형(兄)'계 관등과 '사자(使者)'계 관등이 주축이 되어 구성된 점이다. '형'은 연장자의 뜻으로 지난날 나부의 제가세력들을 편제한 관등이며, '사자'는 행정실무를 담당한 관직에서 비롯된 관등이었다. 6세기 이후 귀족연립정권이 등장하면서 최고위 관등인 대대로는 3년마다 귀족들이 스스로 선임하였고, 위두대형 이상의 관등에 오른 소수의 귀족들이 귀족회의의 구성원이 되어 정치를 운영하였다. 또 말기에 연개소문(淵蓋蘇文)은 막리지(莫離支)가 되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2) 지방제도
초기에는 제가들이 각 나부를 독자적으로 다스렸고, 고구려에 정복된 동옥저·동예 등에 대해서도 그 지역의 족장층에게 통치를 위임하는 간접지배방식이었다. 그러다가 3세기 말부터 점차 중앙에서 지방관이 파견되어 지방을 다스렸는데 고구려 지방제도의 특징은 성(城)을 단위로 행정구역을 편제한 것이다. 후기에는 3단계로 나누어 큰 성에는 욕살(褥薩)을 두었고, 그 아래 단위의 성에는 처려근지(處閭近支) 또는 도사(道使)라는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그 보다 작은 성에는 가라달(可邏達)·누초[婁肖] 등의 지방관이 있었다. 욕살은 6세기에 설치되었는데, 중앙의 명령을 받아 하위 행정단위를 통솔하는 역할을 하였다. 고구려 멸망기에 이러한 지방의 성은 모두 170여 개가 넘었다. 성 아래에는 촌(村)이 있었으나, 지방관은 두지 않았다. 그리고 3경(京)제도를 실시하여 수도인 평양성과 국내성, 한성을 3경이라 하였는데, 이들 도성의 행정구역은 5부로 나뉘었다. 이들 3경에는 주로 지배층이거주하였으며, 3경의 주민은 일반 평민이라 하더라도 지방민들보다는 우대를 받았다.

(3) 군사제도
고구려는 일찍부터 대외정복이 활발하였기 때문에 군사제도를 잘 갖추었다. 초기에는 나부가 군사조직의 단위가 되어, 제가들이 부병(部兵)을 거느리고 전쟁에 참여하였다. 신분적으로는 지배층인 대가(大家)들이 전투에 참여하고, 피지배층인 하호(下戶)는 군량 보급 등 노역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4세기 이후 정복전쟁이 활발해지고 대규모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일반민을 군대에 동원하는 군역체계가 마련되었다. 또 군사조직도 정비되어 중앙군의 무관직으로는 군사령관에 해당하는 대모달(大模達)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1,000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말객(末客)을 두었다. 말객 아래에는 당주(幢主)가 있어 군사 100명을 거느렸다. 지방의 군사조직은 지방행정조직과 하나로 짜여져, 지방관이 지방 군대를 통솔하였다. 수나라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활약하였던 각 지방의 성주는 곧 지방관이며 동시에 군지휘관이었다. 이렇게 지방행정제도와 군사제도가 결합되어 고구려의 강력한 군사력이 형성될 수 있었다. 군사훈련으로는 수렵 행사 및 열병과 행렬을 실시하였는데 고분벽화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지방의 교육기관인 경당(扃堂)에서도 군사훈련이 이루어져, 평민들의 자제는 이곳에서 책을 읽고 활쏘기를 하였다. 고구려의 군대는 육군과 수군으로 나뉘는데, 육군이 중심이었다. 육군은 기병과 보병을 결합시켜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하였다. 특히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듯이 병사는 물론 말까지 갑옷으로 감싼 중무장 기병부대는 광개토왕과 장수왕대의 정복활동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4) 경제
고구려의 주된 산업은 농업이었다. 초기에는 산악지대라서 식량사정이 충분치 않았으나, 점차 농업이 발전하고 한반도와 요동 지역을 확보하여 식량 문제는 해결되었다. 농사는 주로 밭농사를 지었는데, 평양 일대나 황해도, 한강유역에서는 논농사도 점차 증가하는 추세였다. 일반민은 가내수공업을 통해서 옷감 등을 마련하였고, 국가에서는 전문 장인들을 두어 여러 종류의 수공업을 운영하였다. 특히 무기나 농기구 등의 철제품이나 궁궐이나 관청 등을 짓는데 필요한 기와 등의 자재를 생산하는 수공업이 발달하였다. 수도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는 국가가 관리하는 시장과 상업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말·소·돼지 등을 기르는 목축도 적지않게 이루어졌고,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는 말갈족 등은 유목생활을 하였다.

(5) 사회
초기 고구려의 사회계층은 가(加)와 호민(豪民)과 하호(下戶)로 크게 나뉘었다. 대가와 소가로 이루어진 가 계급은 나부를 통솔하는 지배층이었으며, 호민은 읍락의 지배층이었다.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나라 안의 대가(大家)는 농사를 짓지 않고, 좌식자(坐食者)가 1만여 명이다. 하호가 식량과 고기, 소금을 져다가 바친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대가와 좌식자가 곧 고구려 지배층이었다. 하호는 피지배층으로 이들에게 예속되어 있으며, 농사 등 경제활동에 종사하고 공물을 바쳤다. 고구려에 복속된 동옥저 등의 주민들도 고구려에 식량과 여러 특산물을 공물로 바쳤다. 4세기 이후 중앙집권체제가 정비되면서 가와 호민층은 귀족계층이 되었으며, 하호 등은 국가의 양인층이 되었다. 후기에 양인농민은 국가에 대해 인세(人稅)로 포 5필과 곡식 5섬을 바쳤으며, 빈부에 따라 3등급으로 나뉘어 가호 단위로 조(租)를 바쳤다. 또 15세 이상의 일반 농민은 역(役)의 부담을 져서, 군대에 차출되기도 하고, 또는 성을 쌓거나 저주지의 제방을 쌓는 등의 각종 노역에 동원되었다. 고구려 사회의 최하층은 노비층으로서, 전쟁포로나 혹은 형벌과 채무·매매 등을 통하여 노비가 되었다. 또 거란이나 말갈 등 이민족 집단은 말기까지도 집단예민이 되어 공납을 바치거나 군사로 동원되었다.

(6) 학문
문자는 한자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한자의 음과 훈을 빌어 우리말을 기록하는 표기법이 만들어져 사용되었는데, 이는 뒤에 신라에 전해져 이두(吏讀)가 되었다. 역사서로는 ·유기(留記)· 100권이 있었다고 하나 그 시기는 알 수 없다. 영양왕 때에는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이 ·유기·를 정리하여 ·신집(新集)· 5권을 편찬하였다. 고구려 때 만들어진 비문으로는 광개토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가 현재 남아 있다. 특히 광개토왕릉비의 문장과 서체는 매우 뛰어나서 당시 고구려의 수준 높은 한학을 전해준다. 한학(漢學)과 더불어 유교가 발달하였다. 372년(소수림왕 2)에는 중앙에 태학(太學)을 세워 유교를 교육하고 관료를 양성하였으며, 지방에는 경당(扃堂)이 있어 젊은이들이 이 곳에서 독서를 하거나 활쏘기를 익혔다. 고구려인들은 오경(五經) 등의 유교 경전이나 사기(史記) 등의 역사책, 문선(文選)과 같은 문학책 등을 읽었다.

(7) 종교와 사상
고구려에서는 매년 제천행사인 동맹(東盟)을 성대하게 열고, 시조 주몽신과 그 어머니인 유화신을 제사지냈다. 이러한 천신(天神)사상은 주몽설화에 잘 나타나 있다. 불교는 372년(소수림왕 2)에 전진(前秦)에서 순도(順道)가 불경과 불상을 전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수용되었다. 이후 불교는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지배체제를 갖추는 데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지배층의 불교는 호국적 성격이 강하였고, 일반 백성들도 현세의 복을 빌기 위하여 불교를 많이 믿었다. 고구려의 불교 철학은 특히 삼론종(三論宗)이 크게 발달하였다. 5세기 말에는 승랑(僧郞)이 중국으로 건너가 삼론종의 대가로 활약하였으며, 영류왕 때 혜관(慧灌)은 일본에 삼론종을 처음으로 전하였다. 도교 역시 고구려 중기 이래 크게 유행하였다. 고구려 벽화고분에서는 장생불사를 상징하는 천인(天人)·신선(神仙)의 모습을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도교가 귀족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음을 보여 준다. 특히 연개소문은 국가적으로 도교를 크게 장려하였다.

(8) 예술
문학으로는 왕자 호동(好童)이나 온달(溫達) 등 역사적 인물을 다룬 설화가 남아 있으며, 유리왕이 지었다는 '황조가(黃鳥歌)'와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수나라 장군 우중문에게 지어 보냈다는 오언시가 전해지고 있다. 음악에서는 왕산악(王山岳)이 유명한데, 그는 중국의 칠현금을 개량하여 현학금(玄鶴琴)을 만들고, 1백여 곡을 지었다. 이 현학금은 뒤에 신라에 전해졌다. 또 일찍부터 중국·서역에서 여러 악기와 악곡이 전래되었는데, 당시 고구려에서 쓰인 다양한 악기는 고분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 미술의 대표적인 유산으로는 고분벽화를 들 수 있다. 수도인 평양과 집안 일대에서 지금까지 80여 기의 벽화고분이 발견되었다. 벽화의 내용은 초기에는 무덤 주인공의 초상과 살아있을 때의 생활 모습을 그린 풍속도가 중심이었다. 점차 신선·괴수·해·달·별자리·수목·각종 문양 등 관념적인 소재가 다루어지다가, 후기에는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인 청룡·백호·현무·주작의 사신도가 중심 소재가 되었다. 대표적인 벽화고분으로는 안악3호분·덕흥리고분·쌍영총·무용총·각저총·강서대묘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고구려 고분벽화는 오늘날 전해지는 동아시아 전체의 문화적 업적 중 가장 뛰어난 것의 하나로 꼽는다.

(9) 과학·기술
고구려는 농업사회였기 때문에 당연히 천문기상학에 관심이 높아 일관(日官)이란 관직을 두었으며, 일식·월식·지진·우박 등을 관측하고 기록하였다. 이러한 천문관측의 수준은 매우 높아 고분벽화에 많이 남아 있는 별자리 그림을 보면, 고구려의 독자적인 별자리 체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건축술도 발달하여 중국 척(尺)과는 다른 고구려척이 사용되었고, 백제·신라·일본에 전해져 널리 쓰였다. 장군총과 태왕릉과 같은 거대한 돌무지 무덤을 만드는 건축술이 돋보이며, 돌방무덤의 경우도 모줄임천장 양식은 고구려의 특색을 보여주는 건축 기법이다. 또한 성곽 축조술이 뛰어나서 흙이나 돌로 쌓는 기술과 다양한 성곽의 시설물들은 한국식 성곽 축조 양식의 원류가 되었다. 고구려 산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치(雉)·옹성·퇴물림양식 등이 그것이다. 또 평양성 유적을 보면 도성 건설과 도시구획 등에서도 매우 높은 수준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628년(영류왕 11)에 당나라에 봉역도(封域圖)를 보냈다는 기록에서 고구려에서 지도 제작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무기와 농기구 등 생산도구를 만드는 철생산과 철제품의 제작도 국력의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국가적으로 힘을 기울인 사업이었다. 이와 함께 평양에서 발견된 금동제 관장식 등은 고구려의 세공기술이 매우 발달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5. 역사적 위치

고구려는 넓은 영토와 그 안에 다수의 종족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아울러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는 물론 중앙아시아 지역과도 교류하여 다양한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독자적이면서도 국제성이 풍부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러한 제국적 발전과 다종족국가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우리 역대 왕조 중에서 독특한 성격을 갖고 있다. 또한 삼국 중에서도 가장 선진적인 문화 기반을 이루어 이를 백제와 신라에 전하여 민족문화의 원류를 이루었다는 점도 주목되며, 나아가 정치적으로는 중국세력과 유목세력의 진출을 막고 동북아시아에서 독자적 세력권을 구축하여, 민족사의 방파제 구실을 하였다는 점도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고구려 전성시대도

4세기 고구려의 대외관계를 나타냄.


국내성 석축

만주 집안현에 위치한 고구려 시대의 두번째 도성인 국내성의 석축.


무용총벽화

수렵도. 고구려인의 기상을 엿볼 수 있다.


덕흥리벽화고분

십삼군태수도. 평남 대동군.


우현리대묘

우현리대묘에서의 청룡도.

백제:

 

기원 전후한 시기에 마한의 소국으로 출발하여 한반도 중부와 남서부를 차지하고 고구려, 신라와 삼국을 이루었다. 일본 등과 우호관계를 유지하여 일본의 문화에 영향을 끼쳤고,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궁남지 포룡정 다리 / 궁남지는 백제의 궁이었던 사비성(지금의 부소산성) 남쪽에 있는 왕을 위한 인공 연못이다. 연못의 섬에는 포룡정이라는 정자가 있으며 그곳까지 이어지는 다리가 놓여 있다.
본문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졸본부여 사람인 비류()와 온조()가 남쪽으로 함께 내려온 뒤 비류는 미추홀()에,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각기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으며, 비류가 죽자 그 신하와 백성이 모두 위례성으로 옮겨오므로 비로소 백제()라는 큰 나라로 성장했다고 한다.

한강 유역을 통합하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 실질적인 시조로 등장한 것은 고이왕()이며, 근초고왕() 때 마한() 전역을 통합한 뒤 크게 발전하여 역대 31왕()으로 이어지면서 660년까지 존속한 고대 왕국이다.

유리한 자연환경과, 지배층이 북방 유이민()을 모체로 한 단일체제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등의 이점()으로 일찍부터 정치·문화적 선진성()을 과시하고, 4세기 중엽에는 일본, 중국 랴오시[西] 지방·산둥반도[] 등지와 연결되는 고대의 해외 상업세력을 형성하였으며, 특히 일본 고대문화의 지도자 역할을 하였다.

[백제의 역대 왕]

구분
왕명
재위기간
제1대
BC18~AD28
제2대
28~77
제3대
77~128
제4대
128~166
제5대
166~214
제6대
214~234
제7대
234
제8대
234~286
제9대
286~298
제10대
298~304
제11대
304~344
제12대
계왕
344~346
제13대
근초고왕
346~375
제14대
375~384
제15대
384~385
제16대
385~392
제17대
392~405
제18대
405~420
제19대
420~427
제20대
427~455
제21대
455~475
제22대
475~477
제23대
477~479
제24대
479~501
제25대
501~523
제26대
성왕
523~554
제27대
554~598
제28대
혜왕
598~599
제29대
법왕
599~600
제30대
무왕
600~641
제31대
641~660
 

 

신라:

 

BC 1세기에 영남지방에서 일어나,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한 국가(BC 57∼AD 935).
그릇과 숟가락 /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통일 신라.
본문

시조 혁거세()로부터 경순왕까지 56대, 992년간 존속하였다. 국호는 신라·신로()·사라()·서나(:)·서야(:)·서라(:)·서벌() 등으로 불렀는데, 모두 마을[]을 뜻하는 사로()로 해석된다.

신라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3기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① 상대(:시조∼28대 진덕여왕, BC 57∼AD 654)는 원시부족국가·씨족국가를 거쳐 고대국가로 발전하여 골품제도가 확립된 시기이다. ② 중대(:29대 무열왕∼36대 혜공왕, 654∼780)는 삼국을 통일하고 전제왕권()이 확립되어 문화의 황금기를 이룬 시기이다. ③ 하대(:37대 선덕왕∼56대 경순왕, 780∼935)는 골품제도의 붕괴, 족당()의 형성 및 왕권의 쇠퇴로 호족()·해상세력이 등장하고 멸망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밖에 30대 문무왕 이전을 삼국시대, 그 이후를 통일신라시대로 크게 구분한다.

[신라의 역대 왕] 

구분

왕명

별칭/이름/시호

재위기간

제1대

박혁거세

박혁거세거서간

BC57~AD4

제2대

남해왕

남해차차웅, 남해거서간

4~24

제3대

유리왕

노례이사금

24~57

제4대

탈해왕

탈해이사금

57~80

제5대

파사왕

파사이사금

80~112

제6대

지마왕

지마이사금, 지미왕

112~134

제7대

일성왕

일성이사금

134~154

제8대

아달라왕

아달라이사금

154~184

제9대

벌휴왕

벌휴이사금, 발휘왕

184~196

제10대

나해왕

 

196~230

제11대

조분왕

조분이사금, 제귀왕

230~247

제12대

첨해왕

첨해이사금

247~261

제13대

미추왕

미추이사금

262~284

제14대

유례왕

유례이사금

284~298

제15대

기림왕

기림이사금,기립왕

298~310

제16대

흘해왕

흘해이사금

310~356

제17대

내물왕

 내물마립간

356~402

제18대

실성왕

실성마립간

실금왕, 실주왕

402~417

제19대

눌지왕

눌지마립간

417~458

제20대

자비왕

자비마립간

458~479

제21대

소지왕

소지마립간, 조지마립간

479~500

제22대

지증왕

지증마립간, 지대로, 지도로, 지철로

500~514

제23대

법흥왕

 원종

514~540

제24대

진흥왕

삼맥종, 심맥부

540~576

제25대

진지왕

사륜, 금륜

576~579

제26대

진평왕

백정

579~632

제27대

선덕여왕

덕만, 성조황고

632~647

제28대

진덕여왕

승만

647~654

제29대

태종무열왕

무열왕, 춘추

654~661

제30대

문무왕

법민

661~681

제31대

신문왕

일초, 정명

681~692

제32대

효소왕

이공, 이홍

692~702

제33대

성덕왕

천중, 융기, 흥광

702~737

제34대

효성왕

승경

737~742

제35대

경덕왕

헌영

742~765

제36대

혜공왕

건운

765~780

제37대

선덕왕

양상

780~785

제38대

원성왕

경신

785~798

제39대

소성왕

준옹

798~800

제40대

애장왕

청명, 중희

800~809

제41대

헌덕왕

언승

809~826

제42대

흥덕왕

수종, 수승, 경휘

826~836

제43대

희강왕

제륭, 제옹

836~838

제44대

민애왕

838~839

제45대

신무왕

우징

839

제46대

문성왕

경응

839~857

제47대

헌안왕

의정, 우정

857~861

제48대

경문왕

응렴

861~875

제49대

헌강왕

875~886

제50대

정강왕

886~887

제51대

진성여왕

만, 원

887~897

제52대

효공왕

897~912

제53대

신덕왕

경휘

912~917

제54대

경명왕

승영

917~924

제55대

경애왕

위응

924~927

제56대

경순왕

927~935



가야:

 

기원 전후부터 562년까지 낙동강 하류지역에 있던 여러 국가들의 연맹 왕국 또는 그 지역에 위치한 각 국가들의 명칭.
가야 금관 / 지산동 35호 고분 출토.

가야에 관한 역사책으로는 고려 문종 대 금관주지사(:김해지역에 파견된 지방관)를 지낸 문인이 저술한 《가락국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는 것은 이를 발췌한 《삼국유사》의 <가락국기()>뿐이다. 이 기록은 내용이 워낙 소략하기 때문에 가야사를 복원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일본서기》에도 가야의 역사가 단편적으로 언급되고 있으나 일본인들이 많이 왜곡하였으므로 사료비판이 요구된다. 가야는 문헌기록에 따라 가야(··)·가라()·가량()·가락()·구야(·)·임나() 등 여러 명칭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야는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변한() 12국에서 발전하였는데, 여기에는 미리미동국()·접도국(고자미동국(고순시국(반로국()·악노국(군미국(미오야마국(감로국(구야국(주조마국(안야국(독로국()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고자미동국은 고성, 미오야마국은 고령, 구야국은 김해, 안야국은 함안에 위치하였음이 확인되고, 나머지는 그 위치에 대해 여러 설이 분분하다.

《삼국지》가 3세기 중반의 상황을 전한 것이므로 이 시기까지 가야란 명칭은 쓰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아라가야(:함안)·고령가야(:함창)·대가야(:고령)·성산가야(:성주)·소가야(:고성)·금관가야(:김해)·비화가야(:창녕) 등의 명칭이 나오며, 《일본서기》에도 다른 기록에 보이지 않는 탁순()·탁기탄() 등이 나온다. 특히 《삼국유사》 기록은 대략 3세기 중반 이후에 변한지역의 12개국 가운데 일부 국가들이 가야연맹체를 형성하면서 가야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음을 반영한 것이다.

 
 
 
발해: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 동부·연해주·한반도 북부에 있던 나라(698∼926년).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 동부·연해주·한반도 북부에 있던 나라(698∼926년).
상경용천부 성벽유지 /
본문
668년 고구려가 망한 후, 고구려 유민들은 산산이 흩어지게 되었다. 신라로 귀화한 사람, 당으로 들어간 사람, 만주의 말갈족과 혼재하여 사는 사람 등 패망국의 한을 안고 살게 되었다.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2만 8000여 가호를 중국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이때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뒤의 고왕)도 그의 아버지로 알려진 걸걸중상( 또는 )과 함께 요서지방의 영주(;조양)로 옮겼다. 당시 영주는 당나라가 북동부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운영한 전략도시였다.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나라의 세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러던 중 696년에 거란족 출신 이진충()이 요서지방에서 측천무후()가 통치하던 당나라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난은 1년여 만에 진압되기는 하였으나, 당나라는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돌궐의 힘을 비는 등 상당한 어려움에 처하였다. 이러한 혼란기를 틈타 고구려 출신인 대조영이 유민들을 규합하고 걸사비우()가 이끄는 말갈 세력과 손을 잡아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당나라는 대조영 세력을 공격하였으나, 대조영은 공격해오는 이해고()의 군대를 천문령() 싸움에서 격파하고 당나라의 세력권에서 벗어나 남만주 지역에 위치한 동모산[, 지금의 길림성 돈화성 부근에 있는 육정산()]에 정착하여 성을 쌓았다. 그리고 새로운 나라를 개국하고, 국호를 발해, 연호를 천통()이라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 사서()에 진국()이라 칭하던 것을 '발해군' 왕으로 봉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재평가되고 있다.

발해는 고구려 출신 대조영(고왕 )이 국가를 세웠으나, 만주지방에 혼거하던 말갈족도 함께 포용하여, 일반적으로 고구려 유족이 주로 상류 지배층을 형성하였고, 말갈족이 하류층을 형성하였다. 대조영은 북서쪽의 거란이나 돌궐족의 성장으로 요서지방이 막혀 당나라의 방해를 받지 않고 발해를 안전하게 운영할 수 있었다. 당도 결국 발해의 자립을 인정하고 외교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대조영을 이어 그의 아들 대무예()가 제2대 무왕()으로 즉위하여 연호를 인안()으로 하고, 부왕이 건국한 발해를 무력을 통한 강력한 대외정책으로 국토를 넓히는 데 주력하였다. 무왕은 당시 송화강 유역에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흑수말갈()을 압박하였다. 또한 그 과정에서 동생 대문예()가 말갈을 공격하라는 왕명을 어기고 당나라로 망명하자, 장문휴()로 하여금 당나라의 등주(지금의 산둥반도)를 공격하게 하여 성주를 살해하고 당나라에 위압적으로 대항하는 면모를 보였다. 이 공격에 성공함으로써 당나라로 하여금 발해를 더 이상 멸시하지 못하게 하고, 발해 북쪽의 흑수말갈과 유대관계도 약화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제3대 문왕()은 즉위 후 연호를 대흥()이라 하고, 부왕이 군사력을 이용한 대외적 팽창에 주력한 데 비하여 주로 내치와 외교에 주력하였다. 우선 문왕은 좁은 지역인 동모산()에서 벗어나 약간 남쪽에 중경현덕부()를 건설하고 도읍을 옮겼다. 농경지가 넓어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리고 또 다시 얼마 후 북쪽에 위치한 상경용천부()로 천도하였다(742~755년 사이). 이곳은 발해 북쪽에 세력을 펴고 있던 흑수말갈의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한 적극적인 전략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즉, 발해의 국세는 말갈 세력을 충분히 압도할 수 있는 수준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또 다시 두만강 하류 지역에 위치한 동경용원부()로 옮겼다(785~794년 사이). 이곳은 동해로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있다. 발해는 일본과의 외교관계와 교역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는 물론 관무역의 경제적 발전을 꾀하였다. 발해는 당과도 사신을 수시 파견하여 친당외교를 폈고, 공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신라와는 경계하는 입장으로 활발한 교류를 하지 않았다.

그뒤 여러 왕들이 단명하다가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의 4세손인 대인수()가 제10대 선왕()으로 15년간 재위하였는데, 이 시기는 영토를 넓히고 내치를 충실히 한 발해 중흥기라 할 수 있다. 우선 영토를 크게 넓혀 흑룡강 하류 지역까지 개척하고 흑수말갈을 압박하여 말갈과 당나라의 교류가 중단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문왕 때의 3경 외에 2경을 더 개척하여 서경압록부(西)와 남경남해부()를 둠으로써 전국이 5경 15부 62주행정구역을 갖추었다. 그리하여 과거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고 오히려 북쪽 연해주 지역으로 더 진출한 형세를 갖게 되었다. 발해는 '해동성국()'이라고 호칭할 정도의 국세를 가지게 되었다.
 

발해는 제15대 왕인 대인선(諲譔)에 이르러 종말을 고했다. 북서쪽으로부터 점차 성장하던 거란족[]이 중국 중원으로 나가기 이전에 후환이 될 수 있는 발해를 먼저 공략하였다. 결국 926년 야율아보기()는 발해 상경용천부를 공격하여 쉽게 굴복시켰다. 발해는 15대 228년간의 역사를 남긴 채 사라졌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로서, 중국이나 신라 등과 활발한 정치, 경제적 교류를 하였더라면 보다 강력한 왕조로서 그 역사적 역할이 막강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면으로는 고구려의 문화 바탕위에 불교적 색채가 강한 문화를 발전시켰고, 당과의 교류를 유지하여 당문화를 받아들여 문화국가로서의 입지를 유지하였다. 특히, 오랫동안 수도로 사용된 상경용천부의 도성터는 동서 길이가 약 4.6㎞, 남북 약 3.3㎞의 크기로 짜임새있는 도성임이 밝혀졌다. 이는 중국 장안성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 것이다.

[발해의 역대 왕] 

구분

이름

재위기간

제1대
 

고왕()
 

대조영()
 

698∼719
 

제2대


무왕()


대무예()


719∼737


제3대


문왕()


대흠무()


737∼793


제4대



대원의()


793


제5대


성왕()


대화여()


793~794


제6대


강왕()


대숭린()


794∼809


제7대


정왕()


대원유()


809∼812


제8대


희왕()


대언의()


812∼817


제9대


간왕()


대명충()


817∼818


제10대


선왕()


대인수()


818∼830


제11대



대이진


831∼857


제12대



대건황()


857∼871


제13대



대현석()


871∼894


제14대



대위해


894∼906


제15대



대인선


906∼926


 
상경용천부 성벽유지 /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660년 백제 멸망

668년 고구려 멸망

676년 나당 전쟁 신라 승 삼국통일

 

죄송합니다 이것밖에 못들여서...

고구려신라백제발해가야역사

고구려신라백제발해가야역사를 말해주세여 빨리답변하면채택확률 씍씍 291년 가야,거질미왕이 즉위함 292년 고구려,봉상왕이 즉위함 298년 신라,기림왕이 즉위함...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조선, 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조선, 조선, 가야역사좀 알려주세요(급해요ㅠㅠ) 되도록이면 빨리 해주셨으면 좋겠구요.. 오늘 6시까지요.. 아님 넉넉히 6시30분까지만이라도...

역사신문(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 그런데 그 역사신문이 엄청난 조점수가 달린 중요한 것이어서 빠르고 정확한 답변 부탁드립니다. 저희 조의 주제는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인데요, 문화재, 왕, 혹은...

고구려,백제,가야,신라,발해의 건국된...

... 사회 시험에서 고구려,백제,가야,신라,발해의 건국된 년도와 도읍지를 써야되는 게... 올바른 역사 인식이 자라는 새싹부터 있는 것이 낳을 것 같아 그저 적었습니다. ㅋㅋ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도 토지...

... 과전법ㆍ직전법ㆍ관수관급제처럼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도 토지 제도가... 삼국시대의 역사도 고려 시대에 지은 삼국사기에 의존할 뿐이니 기록이 적을 수밖에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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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백제,신라,통일신라,가야,발해 유적,유물 10개씩좀요 내공검 (고구려의 문화재)... 또한 역사적으로 고구려신라, 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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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의 문화

고구려,백제,신라,가야,발해의 문화에 대해 조사해 주세요.. 요약해서 최대한 빨리... 사진이 있음 좋구요... 고구려 문화의 특징:씩씩하고 굳센 기상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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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요 사회 숙제로 고구려와,백제,신라,발해,고려,조선... 현재 성균관이 개성역사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재위하면서 가야, 왜구, 말갈의 침입을 막음. -경애왕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