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8년 고구려가 망한 후, 고구려 유민들은 산산이 흩어지게 되었다. 신라로 귀화한 사람, 당으로 들어간 사람, 만주의
말갈족과 혼재하여 사는 사람 등 패망국의 한을 안고 살게 되었다. 당(
唐)나라는 고구려 유민 2만 8000여 가호를 중국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이때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
大祚榮;뒤의 고왕)도 그의 아버지로 알려진
걸걸중상(
乞乞仲象 또는
大仲象)과 함께 요서지방의 영주(
營州;조양)로 옮겼다. 당시 영주는
당나라가 북동부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운영한 전략도시였다.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나라의 세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러던 중 696년에
거란족 출신 이진충(
李盡忠)이 요서지방에서
측천무후(
則天武后)가 통치하던 당나라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난은 1년여 만에 진압되기는 하였으나, 당나라는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돌궐의 힘을 비는 등 상당한 어려움에 처하였다. 이러한 혼란기를 틈타 고구려 출신인 대조영이 유민들을 규합하고
걸사비우(
乞四比羽)가 이끄는 말갈 세력과 손을 잡아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당나라는 대조영 세력을 공격하였으나, 대조영은 공격해오는 이해고(
李楷固)의 군대를 천문령(
天門嶺) 싸움에서 격파하고 당나라의
세력권에서 벗어나 남만주 지역에 위치한
동모산[
東牟山, 지금의
길림성 돈화성 부근에 있는 육정산(
六頂山)]에 정착하여 성을 쌓았다. 그리고 새로운 나라를 개국하고, 국호를 발해, 연호를 천통(
天統)이라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 사서(
史書)에 진국(
震國)이라 칭하던 것을 '발해군' 왕으로 봉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재평가되고 있다.
발해는 고구려 출신 대조영(고왕
高王)이 국가를 세웠으나, 만주지방에 혼거하던 말갈족도 함께 포용하여,
일반적으로 고구려 유족이 주로 상류 지배층을 형성하였고, 말갈족이 하류층을 형성하였다. 대조영은 북서쪽의 거란이나
돌궐족의 성장으로 요서지방이 막혀 당나라의 방해를 받지 않고 발해를 안전하게 운영할 수 있었다. 당도 결국 발해의 자립을 인정하고 외교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대조영을 이어 그의 아들 대무예(
大武藝)가 제2대 무왕(
武王)으로 즉위하여 연호를 인안(
仁安)으로 하고, 부왕이 건국한 발해를 무력을 통한
강력한 대외정책으로 국토를 넓히는 데 주력하였다. 무왕은 당시 송화강 유역에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흑수말갈(
黑水靺鞨)을 압박하였다. 또한 그 과정에서 동생
대문예(
大門藝)가 말갈을 공격하라는 왕명을 어기고 당나라로 망명하자,
장문휴(
張文休)로 하여금 당나라의 등주(지금의
산둥반도)를 공격하게 하여 성주를 살해하고 당나라에 위압적으로 대항하는 면모를 보였다. 이 공격에 성공함으로써 당나라로 하여금 발해를 더 이상 멸시하지 못하게 하고, 발해 북쪽의 흑수말갈과 유대관계도 약화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제3대 문왕(
文王)은 즉위 후 연호를 대흥(
大興)이라 하고, 부왕이 군사력을 이용한 대외적 팽창에 주력한 데 비하여 주로 내치와 외교에 주력하였다. 우선 문왕은 좁은 지역인 동모산(
東牟山)에서 벗어나 약간 남쪽에
중경현덕부(
中京顯德府)를 건설하고 도읍을 옮겼다. 농경지가 넓어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리고 또 다시 얼마 후 북쪽에 위치한
상경용천부(
上京龍泉府)로 천도하였다(742~755년 사이). 이곳은 발해 북쪽에 세력을 펴고 있던 흑수말갈의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한 적극적인 전략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즉, 발해의 국세는 말갈 세력을 충분히 압도할 수 있는 수준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또 다시
두만강 하류 지역에 위치한
동경용원부(
東京龍原府)로 옮겼다(785~794년 사이). 이곳은 동해로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있다. 발해는 일본과의 외교관계와 교역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는 물론 관무역의
경제적 발전을 꾀하였다. 발해는 당과도 사신을 수시 파견하여 친당외교를 폈고,
공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신라와는 경계하는 입장으로 활발한 교류를 하지 않았다.
그뒤 여러 왕들이 단명하다가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
大野勃)의 4세손인 대인수(
大仁秀)가 제10대 선왕(
宣王)으로 15년간 재위하였는데, 이 시기는 영토를 넓히고 내치를 충실히 한 발해 중흥기라 할 수 있다. 우선 영토를 크게 넓혀 흑룡강 하류 지역까지 개척하고 흑수말갈을 압박하여 말갈과 당나라의 교류가 중단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문왕 때의 3경 외에 2경을 더 개척하여
서경압록부(
西京鴨綠府)와
남경남해부(
南京南海府)를 둠으로써 전국이 5경
15부 62주의
행정구역을 갖추었다. 그리하여 과거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고 오히려 북쪽
연해주 지역으로 더 진출한 형세를 갖게 되었다. 발해는 '해동성국(
海東盛國)'이라고 호칭할 정도의 국세를 가지게 되었다.
발해는 제15대 왕인
대인선(
大諲譔)에 이르러 종말을 고했다. 북서쪽으로부터 점차 성장하던 거란족[
契丹族]이 중국 중원으로 나가기 이전에 후환이 될 수 있는 발해를 먼저 공략하였다. 결국 926년
야율아보기(
耶律阿保機)는 발해 상경용천부를 공격하여 쉽게 굴복시켰다. 발해는 15대 228년간의 역사를 남긴 채 사라졌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로서, 중국이나 신라 등과 활발한 정치, 경제적 교류를 하였더라면 보다 강력한 왕조로서 그
역사적 역할이 막강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면으로는 고구려의 문화 바탕위에 불교적 색채가 강한 문화를 발전시켰고, 당과의 교류를 유지하여 당문화를 받아들여
문화국가로서의 입지를 유지하였다. 특히, 오랫동안 수도로 사용된 상경용천부의 도성터는 동서 길이가 약 4.6㎞, 남북 약 3.3㎞의 크기로 짜임새있는 도성임이 밝혀졌다. 이는 중국
장안성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 것이다.
[발해의 역대 왕]
구분 |
왕 |
이름 |
재위기간 |
제1대 |
고왕(高王) |
대조영(大祚榮) |
698∼719 |
제2대
|
무왕(武王)
|
대무예(大武藝)
|
719∼737
|
제3대
|
문왕(文王)
|
대흠무(大欽茂)
|
737∼793
|
제4대
|
|
대원의(大元義)
|
793
|
제5대
|
성왕(成王)
|
대화여(大華璵)
|
793~794
|
제6대
|
강왕(康王)
|
대숭린(大嵩璘)
|
794∼809
|
제7대
|
정왕(定王)
|
대원유(大元瑜)
|
809∼812
|
제8대
|
희왕(僖王)
|
대언의(大言義)
|
812∼817
|
제9대
|
간왕(簡王)
|
대명충(大明忠)
|
817∼818
|
제10대
|
선왕(宣王)
|
대인수(大仁秀)
|
818∼830
|
제11대
|
|
대이진
|
831∼857
|
제12대
|
|
대건황(大虔晃)
|
857∼871
|
제13대
|
|
대현석(大玄錫)
|
871∼894
|
제14대
|
|
대위해
|
894∼906
|
제15대
|
|
대인선
|
906∼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