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의 역사와 유뮬좀 알려주세요.

울산의 역사와 유뮬좀 알려주세요.

작성일 2011.01.27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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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역사와 유물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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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광역시 [蔚山廣域市]

 

〔정 의〕: 경상남도 북동부에 위치한 광역시. 동쪽은 동해, 서쪽은 경상남도 밀양시 경상북도청도군, 남쪽은 부산광역시 기장군과 경상남도 양산시, 북쪽은 경상북도 경주시와 접하고 있다.

 

〔위 치〕: 동경 128°58′∼ 129°27′, 북위 35°19′∼35°43′에 위치한다.

 

〔면 적〕: 면적은 1,056.74㎢이다.

 

〔인 구〕: 인구는 109만5,105명(200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 4개 구, 1개 군, 2개 읍, 72개 동, 46개 면, 8개 리가 있다.

 

〔시청 소재지〕: 광역시청은 울산광역시 남구 신정동에 소재한다.

 

〔지형〕: 지형은 전체적으로 북·서·남의 삼면이 태백산맥의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동남쪽으로 동해를 향해 트여 있다. 산지의 지세는 영남 동부 태백산지의 단층지괴와 관련되며, 대체로 남북방향으로 발달해 있다. 지괴는 양산시 물금읍에서 양산천 하곡을 따라 발달한 양산구조선, 수영강·회야강·동천강(東川江)의 골짜기를 따라 달리는 동래∼경주간 구조선, 울산∼포항간의 형산강구조선 등에 의해 크게 4개로 나뉜다.

 

양산구조선 서쪽 지괴는 밀양시와의 경계를 이루며 가지산(加智山, 1,240m)·천황산(天皇山, 1,189m)·재약산(載藥山, 1,108m)·간월산(肝月山, 1,083m)·신불산(神佛山, 1,209m)·취서산(鷲棲山, 1,059m)·고헌산(高獻山, 1,033m) 등 고도 1,000m 이상의 고산지로 이어진다.

 

양산구조선 동쪽 지괴는 부산광역시의 백양산(白陽山, 642m)·금정산(金井山, 807m), 양산시의 원효산(元曉山, 922m)을 거쳐 이 지역에서 정족산(鼎足山, 700m)·남암산(南巖山, 543m)·문수산(文殊山, 600m)·연화산(蓮花山, 531m)·국수봉(菊秀峰, 590m)으로 이어져 고도 500m 이상의 산들이 상당한 준령을 이룬다.

 

또한 이 지괴의 동쪽에는 부산광역시의 장산(長山, 634m)에서 이어지는 지괴가 본 지역의 대운산(大雲山, 742m)·은곡봉(銀谷峰, 717m)으로 연결되며, 이 지괴의 동사면은 남동방향으로 뻗은 고도 150m 내외의 지맥들이 해안구릉지를 이루며 동해로 이어진다.

 

한편, 울산∼포항간 형산강구조곡의 동쪽은 북쪽으로부터 울산만∼영일만의 동부지괴가 이어져 울산만 동북부에서 남쪽 끝을 이루며, 동대산(東大山, 444m)·무룡산(無龍山, 453m) 외에는 저산성 산지를 이룬다.

 

지질은 대체로 북북동∼남남서 방향의 양산구조선을 경계로 서부와 동부로 구분된다. 서부지역은 경상계 신라통의 상층부인 안산암류와 이를 관입한 화강암류로 이루어져 대부분 화성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부지역은 이암·사암 등의 누층으로 이루어진 경상계 신라통의 울산층이 전역을 덮고 있다.

 

〔해 안〕: 울산만은 동해안의 대표적인 만으로, 해안선 길이 42㎞, 어귀 넓이 7.5㎞, 폭 3.2㎞, 만입 길이 8.3㎞, 만내 수심 3.6∼9.1m이다. 또한 간만의 차이가 0.65m로 매우 작고, 주위의 지형이 방파제 구실을 하는 등 항구로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기후〕: 기후는 동쪽은 동해에 직접 면해 있어 난류의 영향을 받으며, 또한 동쪽을 제외한 삼면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겨울의 찬 북서계절풍을 막아 주어 온화한 편이다. 연평균기온 13℃~14.3℃, 1월 평균기온은 -1~4℃, 7월 평균기온은 25.5℃이며, 연강수량은 900∼1,500㎜로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여름철에 비가 많이 온다. 풍향은 겨울철에는 대체로 북북서 방향이 주를 이루나, 나머지 계절에는 일정한 풍향이 나타나지 않는다.

 

〔고 대〕

 

한반도의 동남쪽에 위치한 울산은 예로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터전이 되어 우리의 선인들이 아득한 석기시대부터 육로 또는 해로로 이곳에 들어와 정착사회를 이루어 살았던 곳이다.

 

서생면 신암리, 병영동 병영성지, 장현동 황방산의 신석기 유적이 있고 석검이 출토된 화봉동과 지석묘가 있는 언양면 서부리의 청동기 유적이 있다. 이 밖에 북구 중산동, 온산면 산암리, 언양읍 동부리, 삼동면 둔기리, 온양면 삼광리, 상북면 덕현리, 동구 일산동, 중구 다운동, 삼남면 방기리 등지에서 각종 유적과 유물이 관계 연구기관과 대학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다.

 

또한 사연댐 상류에 위치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암각화에는 고래·거북·사슴·멧돼지 등의 각종 동물그림이 있고, 두동면 천전리의 각석에는 원·삼각형·마름모 등의 각종 기하학적 무늬들이 있어 울산지방이 고대 인간사회의 유력한 생활터전이었음을 증명함과 동시에 당시 사람들의 의식세계를 보여 준다.

 

울산은 삼한시대에는 진한(辰韓)의 소속으로 중구 다운동(茶雲洞)을 중심으로 굴아벌촌(屈阿火村)이라는 읍락을 형성했는데, 신라 파사왕 때 이곳을 취해 굴아화현(屈阿火縣)을 두고, 남쪽에는 생서랑군(生西良郡), 동쪽에는 동진현(東津縣), 언양지방에는 거지화현(居知火縣)을 두었으며, 757년(경덕왕 16)에 하곡현(河曲縣, 일명 河西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월성군(月城郡) 외동읍(外東邑) 모화(毛火) 지방에 있던 임관군(臨關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언양지방은 본래 거지화현인데, 경덕왕 때 헌양현(헌陽縣)으로 개칭해 양주의 영현으로 하였다. 신라시대에 울산지방은 일찍부터 불교문화가 파급되어 태화사 등의 불사(佛事)가 성행하였다. ≪삼국사기≫ 열전에 나오는 우시산국(于尸山國)도 울산지방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지금의 울주군 웅촌면이 그 위치일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신라시대를 통해 울산지방에는 하곡현과 동진현이 임관군의 영현이란 격을 띠고 있었고 남쪽에는 동안군(東安郡)이, 서남쪽에는 우풍현(虞風縣)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 태조 때 개지변(皆知邊)을 지배하고 있던 호족 박윤웅(朴允雄)이 930년(태조 13)에 최환(崔奐)을 보내 항복을 청해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의 공이 컸으므로 하곡(河曲)·동진(東津)·우풍(虞風)의 3현을 합해 흥례부(興禮府, 또는 興麗府)로 승격함에 따라 임관군의 영현에서 벗어나 비로소 한 고을로서 발전해 오늘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983년(성종 2)에는 고려왕조가 지방제도를 강화해 중앙집권화를 추구하면서 전국에 12목을 설치하고, 995년(성종 14) 다시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해 전국을 449현으로 분할, 흥례부를 공화현(恭化縣)으로 낮추고 별호를 ‘학성(鶴聲)’이라 했다가, 1018년(현종 9)에 이르러 공화현·헌양현·기장현·동래현를 합해 울주로 개편하고 방어사(防禦使)·지울주사(知蔚州事)를 두었다.

 

1143년(인종 21)에 헌양현을 분립시켜 감무(監務)를 두었고, 동래도 현령(縣令)을 두어 분립시켰다. 울산은 바다와 접해 있고,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워 고려 후기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피해가 막심하였다.

 

〔조선시대〕

 

1397년(태조 6) 울주에 진(鎭)을 두어 병마사(兵馬使)가 지주사(知州事)를 겸하게 하다가, 1413년(태종 13) 지방행정 개편에 따라 진을 폐지하고 울산군으로 개칭해 비로소 울산(蔚山)이라는 칭호가 등장하게 되었다.

 

1417년 경상좌도병마절제사영(慶尙左道兵馬節制使營)을 경주에서 울산 병영동(兵營洞)으로 옮기고, 1418년 염포(염浦)를 개항해 왜관을 설치했으며, 1426년(세종 8)에는 병마절도사영을 폐지하고 다시 진을 두어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가 지군사를 겸하다가 1437년 병영을 다시 설치하였다.

 

같은 해 1월에 울산도호부(蔚山都護府)로 승격시키고, 판관을 더 두었다가 8월에 다시 군으로 강등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세종 때 울산군의 호구는 1,058호에 4,161명이었다.

 

1459년(세조 5)에는 동래에 있던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慶尙左道水軍節度使營)을 개운포(開雲浦)로 옮겼으며, 1510(중종 5)에 삼포왜란으로 염포가 폐쇄되고, 1592년(선조 25)에 개운포에 있던 경상좌수영이 다시 동래군으로 옮겨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울산 의병이 경주·울산을 수복하고 멀리 대구·창녕·동래까지 나아가 적을 무찌르는 등 큰 전공을 올렸다. 그 공훈으로 당시 좌의정 이덕형(李德馨)의 건의로 1598년 울산도호부로 승격하고 병마절도사 겸 부사를 두었으며, 이듬해인 1599년에 임진왜란의 피해로 자립할 수 없는 언양현을 울산도호부에 합쳤다가 1612년(광해군 4)에 다시 현으로 복구시켰다.

 

1616년에는 병마절도가 겸직하던 도호부사직을 전임의 도호부사를 두어 맡도록 하였다. 1681년(숙종 7)에는 하미면(下未面)을 기장현에 이관하고 받기를 되풀이하다가 1861년(철종 12)에 거의 다 되돌려주었다. 1771년(영조 47) 울산의 호구는 8,670호에 3만2,973명이었다.

 

〔근 대〕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를 개정해, 도제도를 폐지하고 23개의 부를 새로이 두었는데, 이 때 울산은 도호부를 군으로 개칭하고 언양·양산·동래·기장·거제·경주·영일·홍해군 등과 함께 동래부의 관할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906년에는 칙령 제49호의 시행으로 지방행정을 정리해 온남면의 일부와 외남·웅상면을 양산군으로 이속하였다. 1914년 부·군을 정리·폐합하는 지방제도 개편시 언양군을 울산군에 병합했는데, 이 때 태화강 이남의 삼산·달동·신정·옥동지방을 합해 울산면, 하부면과 내상면을 하상면으로 하고 현남면과 현북면을 합해 대현면이라 개칭하였다.

 

1931년 11월 1일 울산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34년 동면을 읍으로 승격시켜 방어진읍(方魚津邑)으로 하고, 1944년 대현면을 울산읍에 편입해 출장소를 두었다가 1946년 다시 대현면으로 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병영의 비밀청년회조직이 주도해 일본경찰과 충돌하는 격렬한 시위로 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언양·남창·웅촌·온산까지 만세운동이 파급되어 4명의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를 냈다.

 

〔현 대〕

 

해방 이후 울산은 경제개발정책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다. 1962년 2월 1일 울산읍, 방어진읍, 대현면, 하상면 전 지역과 청량면 두왕리, 범서면 무거·다운리, 농소면 송정·화봉리를 합해 울산특정공업지구로 지정, 공포하고 같은 해 6월 1일 울산시로 승격시키는 한편, 울산군을 울주군으로 개편하였다.

 

1963년 3월 12일 울주군 서생면이 동래군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양산군의 관할이 되었으나 1983년 2월 15일 다시 울주군으로 복귀하였다. 또 1973년 3월 12일 삼남면의 구수리를 언양면으로 편입시키고, 1973년 7월 1일 두서면에 속했던 소호리를 상북면으로 이속시켰으며, 1975년 10월 1일 온양면의 덕신리와 청량면의 용암·학남리가 온산면으로 편입되었다.

 

1985년 7월 15일 구제가 실시됨에 따라 중·남구가 설치되었고, 1988년 1월 1일 방어진출장소가 동구청으로 승격되어 3구 40개 동이 되었다. 1991년 1월 1일 울주군이 울산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 울산시와 울산군이 통합되고, 1996년 12월 31일 〈울산광역시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어 1997년 7월 15일 울산광역시로 출범하였다. 이에 따라 북구가 신설되고 울주군이 울주군으로 복군되어 4구 1군 체제가 되었다.

 

이후 1998년 3월 1일 동구 염포동 일부가 북구로 편입되었고, 2002년 남구 무거동 일부를 울주군 범서읍으로, 울주군 범서읍 일부를 남구 무거동으로 각각 편입하였다.

 

〔천연기념물〕

 

남구 신정동의 동쪽 바다는 울산극경(쇠고래)회유해면(蔚山克鯨廻遊海面, 천연기념물 제126호)이다.

 

〔민속놀이〕

 

이 고장의 중요한 민속놀이로는 줄다리기와 연날리기를 들 수 있다. 줄다리기는 마두희(馬頭戱)라고도 부르는데, 동대산(東大山)이 말머리 모양을 하고 동해로 들어가려는 형국을 하고 있어, 산머리를 서쪽으로 돌려야 풍수지리적으로 좋으므로 서편이 이기도록 해야 한다는 속설에서 기인한 명칭이라고 한다.

 

정초부터 각 마을에서 작은 규모의 골목줄을 당기다가, 정월 보름에 이르면 고을 단위의 큰줄다리기가 벌어진다. 시내 중앙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큰길을 기준으로 동편이 수줄을, 서편이 암줄을 마련해 대동놀이를 펼쳤던 것이다. 그러나 큰줄다리기는 1936년경 일제의 금지로 중단된 채 전승되지 않고 있다.

 

연날리기는 섣달부터 정월 보름까지 성행하는 놀이이나, 큰 연싸움은 대개 정월 보름경에 한다. 이 고장은 바닷가이기 때문에 항상 바람이 적당히 불고 연이 걸릴 곳이 적어 연날리기에 적합한 곳이다. 주로 방패연을 띄우고 탕건이라 해 연줄을 퉁겨 연을 곤두박질시키고 상하좌우로 날게 하는 재주부리기를 즐기는데, 연줄끊어먹기가 벌어지기도 한다.

 

연줄끊어먹기는 사기나 유리 가루를 밥풀이나 부레풀을 이용해 연줄에 묻혀 상대의 연줄을 끊는 시합이다. 이 밖에 지신밟기·윷놀이·널뛰기·달맞이·다리밟기·씨름 등의 세시적 놀이가 전승되고 있다.

 

〔민 요〕

 

울산시가 공업도시로 변해 전통적 생활공동체가 많이 붕괴되었음에도 노년층에서는 아직도 민요가 상당 부분 전승되고 있다. 이 고장을 대표하는 민요로는 〈담바귀타령〉·〈장타령〉·〈멸치후릿뱃노래〉 등이 전해지고 있다. 〈담바귀타령〉은 조선조 광해군 때 처음 우리나라에 유입된 담배가 동래와 울산에서 경작된 것을 서두로 해 부른다.

 

“담바귀야 담바귀야 동래울산의 담바귀야/너의나라 어디길래 대한나라 나왔느냐/우리나라 좋거니와 대한나라 더욱좋다/……소상반죽 동래반죽 열두마디 길게맞춰/담배한대 피고나니 목구멍에 안개끼고/또한대를 피고나니 배꼽밑에 요분난다.” 이 노래는 경상남도 일대에서 널리 불려지는데 다른 지방으로도 전파되어 전국적으로 채록되고 있다.

 

〈장타령〉은 각설이의 숫자타령과는 다른 유형으로 “……아가리크다 대구장(大邱場) 너무 넓어서 못보고/이산저산 양산장(梁山場) 산이 많아서 못보고/우루루갔다 울산장 하도바빠 못보고……”처럼 인근 지방의 시장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민요로, 역시 지방적 특성을 보여 준다.

 

〈멸치후릿배노래〉는 울산만에서 후리질을 해 멸치를 잡을 때 부르는 어업노동요이다. 앞소리꾼이 1음보를 노래하면 어부들이 후렴을 부르는 형식인데 노를 저을 때, 그물을 당길 때, 고기를 퍼 올릴 때 등 작업에 따라 후렴을 바꾸면서 노동의 동작에 따라 리듬을 맞추어 공동 작업을 능률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한다.

 

이 밖에 정초에 농악대가 각 가정에 가서 축원해 주는 〈지신밟기노래〉, 대장간에서 풀무질할 때 부르던 것이 아기를 어를 때 부르는 노래로 변한 〈불매노래〉, 골무를 만들어 파는 처녀와 그것을 사는 사람과의 대화로 된 〈골무노래〉, 주머니를 곱게 깁는 과정을 노래한 〈줌치노래〉, 여럿이 놀 때 선후창으로 부르는 〈쾌지나칭칭나네〉 등이 있다.

 

〔관광자원〕

 

예로부터 울산팔경으로 불릴 정도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석기시대 이후의 유서 깊은 문화유적도 많으며, 또한 우리나라의 대표적 중화학공업도시로서 산업관광지의 역할도 하고 있다. 특히 가지산 사계, 간절곶 일출, 강동·주전해안 자갈밭, 대왕암 송림, 대운산 내원암 계곡, 무룡산에서 본 울산공단 야경, 울산체육공원, 반구대, 신불산 억새평원, 작괘천, 태화강 선바위와 십리대밭, 파래소폭포를 울산 12경으로 관광상품화 하여 국내·외 널리 알리고 있다.

 

서부 외곽의 산지지역은 가지산과 신불산을 중심으로 7개의 산이 모여 이루는 수려한 산세와 풍광이 유럽의 알프스에 비견되어 ‘영남의 알프스’라 불린다. 가지산도립공원·신불산군립공원 등 자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 이들 산지는 울창한 활엽수림과 심산유곡이 조화를 이루며, 가을철에는 능선을 따라 단풍과 억새밭이 절경을 이룬다.

 

이들 산지에서 흘러내리는 태화강의 중류부에는 깊은 계곡과 우거진 숲으로 뒤덮인 맑은 호수 사연호와 대암호가 있으며, 또한 배냇골(梨川谷)의 파래소 폭포와 홍류계곡의 홍류폭포 등이 유명하다.

 

상북면 덕현리의 가지산 계곡에 자리잡은 석남사는 왜적을 물리친 호국불교 정신의 산실이며 여승들의 수도장이다. 삼남면 교동리의 작천정(酌川亭)은 작괘천변에 세워진 정자이며, 봄에는 1㎞가 넘는 진입로 주변에 수령이 50년 이상 된 벚나무가 벚꽃터널을 이룬다.

상북면 등억리와 삼남면 가천리 일원에 조성된 한국자수정산업관광지는 자수정 폐광을 이용한 동굴관광지로, 수영장·눈썰매장·인공폭포·놀이공원 등을 갖춘 종합관광휴양단지이다.

온양면의 울산온천은 라돈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 단순천으로 대중탕·실내수영장을 비롯해 숙박·휴양시설을 갖추고 있다. 상북면 등억리의 등억온천은 알칼리성 중조천으로, 약 22만 평에 이르는 국내 최대의 온천단지로 개발 중에 있다.

 

상북면 이천리에 이천자연휴양림, 삼남면 교동리의 작천정 인근에 간월자연휴양림이 조성되어 있다. 웅촌면에 있는 정족산 기슭의 무제치늪은 청정지역으로 자연생태의 보고이며, 청량면의 문수사, 온양면 운화리의 대운산계곡과 내원암, 범서면 입압리의 선바위(立巖) 등도 중요한 관광자원이다.

 

해안관광휴양지로 동구 일산동의 일산해수욕장은 반달형의 백사장이 1㎞에 걸쳐 펼쳐져 있으며, 동해에서 가장 돌출한 울기등대를 중심으로 500년 묵은 해송이 울창한 울기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또한 주위에는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문무대왕의 해중릉인 대왕암을 비롯해 관일대(觀日臺)·어풍대(御風臺) 등의 기암절벽, 고늘물탕이라 부르는 약수터, 천연석굴인 용굴(龍窟) 등이 있다.

 

중구 학성동의 학성공원은 시민들의 도심지 내 휴식처이며, 북구 강동동에는 정자 회센터와 정자해수욕장이 있다. 서생면 진하리의 진하해수욕장은 길이 1㎞의 모래사장과 울창한 송림이 조화를 이루며, 서생면 대송리 간절갑에는 대송등대가 있다. 온산읍에는 동해 용왕의 일곱 왕자 중 처용이 나왔다고 알려진 처용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목도상록수림 등이 있다.

 

산업관광자원으로는 태화강을 따라 울산만 우안에 현대자동차 계열 공장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고, 이로부터 동쪽의 해안에는 현대중공업 미포조선소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최대의 조선공업단지가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장생포를 중심으로 울산만 좌안에서 외황강에 이르는 지역에는 대규모 석유화학공업단지가, 온산항 중심의 남부해안지역에는 비철금속 및 석유화학제품의 기초소재를 생산하는 온산공업단지가 조성되어 있어 산업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문화유적으로는 특히 선사시대의 유적, 신라시대 이후의 불교문화 유적지, 왜적을 방어한 성터 등이 많다. 국보로는 두동면 천전리의 천전리각석과 언양읍 대곡리의 대곡리반구대암각화가 있고, 보물로는 청량면 율리의 망해사지석조부도와 청송사지삼층석탑, 상북면 덕현리의 석남사부도, 상북면 등억리의 간월사지석조여래좌상, 중구 학성동의 태화사지12상부도 등이 있다.

 

그 외에도 언양읍의 언양읍성, 중구 서동의 울산병영성, 중구 교동의 울산향교 등을 비롯해 많은 문화재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 그리고 울산극경회유해면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울산 연해에는 매년 11월에서 다음 해 3월까지 쇠고래가 회유한다.

 

 

 

울산의 문화재를 각 구 및 군별로 올려드립니다.

 

(울주군의 문화재)

 

1.울주 천전리 각석

종    목  국보  제147호 
지 정 일  1973.05.04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산210 
시     대 신라

태화강 물줄기인 내곡천 중류의 기슭 암벽에 새겨진 그림과 글씨이다. 아래 ·위 2단으로 나누어 서로 다른 내용이 다른 기법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조각이 가득하다.

윗단에는 쪼아서 새기는 기법으로 기하학적 무늬와 동물, 추상화된 인물 등이 조각되어 있다. 사실성이 떨어지는 단순화된 형태인데 중앙부의 태양을 상징하는 듯한 원을 중심으로, 양 옆에 네 마리의 사슴이 뛰어가는 모습과 맨 왼쪽의 반인반수(머리는 사람, 몸은 동물인 형상)상이 눈에 띈다. 표현이 소박하면서도 상징성을 갖고 있는 듯한 이 그림들은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진다.

아랫단은 선을 그어 새긴 그림과 글씨가 뒤섞여 있는데, 기마행렬도, 동물, 용, 배를 그린 그림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기마행렬도는 세 군데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간략한 점과 선만으로도 그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배그림은 당시 신라인의 해상활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글자는 800자가 넘는데 왕과 왕비가 이 곳에 다녀간 것을 기념하는 내용으로, 법흥왕대에 두 차례에 걸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 중에는 관직명이나 6부체제에 관한 언급이 있어 6세기경의 신라사회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사람이 이루어 놓은 작품으로, 선사시대부터 신라시대까지의 생활, 사상 등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어느 특정 시대를 대표한다기보다 여러 시대의 모습을 담고 있어 더욱 의미가 깊은 유적이다.

 

2.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종    목  국보  제285호 
지 정 일  1995.06.23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산234-1 
시     대 기타

높이 3m, 너비 10m의 ‘ㄱ’자 모양으로 꺾인 절벽암반에 여러 가지 모양을 새긴 바위그림이다. 바위그림을 암각화라고도 하는데, 암각화란 선사인들이 자신의 바램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커다란 바위 등 성스러운 장소에 새긴 그림을 말한다. 전세계적으로 암각화는 북방문화권과 관련된 유적으로 우리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1965년 완공된 사연댐으로 인해 현재 물 속에 잠겨있는 상태로 바위에는 육지동물과 바다고기, 사냥하는 장면 등 총 75종 200여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육지동물은 호랑이, 멧돼지, 사슴 45점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호랑이는 함정에 빠진 모습과 새끼를 밴 호랑이의 모습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멧돼지는 교미하는 모습을 묘사하였고, 사슴은 새끼를 거느리거나 밴 모습 등으로 표현하였다. 바다고기는 작살 맞은 고래, 새끼를 배거나 데리고 다니는 고래의 모습 등으로 표현하였다. 사냥하는 장면은 탈을 쓴 무당, 짐승을 사냥하는 사냥꾼,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어부 등의 모습을 묘사하였으며, 그물이나 배의 모습도 표현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선사인들의 사냥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길 기원하며, 사냥감이 풍성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바위에 새긴 것이다.

조각기로 쪼아 윤곽선을 만들거나 전체를 떼어낸 기법, 쪼아낸 윤곽선을 갈아내는 기법의 사용으로 보아 신석기말에서 청동기시대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과 점을 이용하여 동물과 사냥장면을 생명력있게 표현하고 사물의 특징을 실감나게 묘사한 미술작품으로 사냥미술인 동시에 종교미술로서 선사시대 사람의 생활과 풍습을 알 수 있는 최고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3.망해사지 석조부도

종    목  보물  제17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청량면 율리 산16 
시     대 통일신라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이 2기의 부도는 망해사의 법당 북쪽에 동·서로 자리하고 있는데, 동쪽 부도는 파손되어 있던 것을 1960년 11월 복원한 바 있다. 서로 규모와 양식이 같으며, 각 부분이 8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탑신을 받치는 기단은 3개의 받침돌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받침돌은 8각으로 구성하고, 그 위로 연꽃무늬를 조각한 돌을 올렸으며, 가운데받침돌은 높은 8각의 단 위에 다시 낮은 3단이 층을 이뤄 받치고 있다. 윗받침돌은 옆면에 16잎의 연꽃잎을 이중으로 조각하였는데 그 모양이 화사하다.

탑신은 각 면마다 창의 형태를 새겼고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으며, 4면에는 문짝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처마와 추녀가 수평으로 넓으며, 각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았던 작은 구멍들이 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 부분은 두 탑 모두 없어졌으나, 그 일부가 별도로 보관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전체적인 구성이나 조각수법이 다소 빈약하지만 각 부의 비례가 보기좋은 아름다운 작품이다.
 
 
4.석남사 부도

종    목  보물  제36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산232-2 석남사 
시     대 통일신라
 
석남사 동북쪽 언덕의 넓은 대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일찍부터 석남사를 세운 도의국사의 사리탑으로 불려왔다. 전체적으로 8각의 형태을 취하고 있으며, 8각의 바닥돌 위에 기단부와 탑신을 놓은 모습이다.

기단부의 아래받침돌은 8각으로 사자와 구름을 도드라지게 새겨 놓았다. 북모양을 하고 있는 가운데받침돌에는 상·하·좌·우에서 안쪽을 향하여 낮게 솟은 꽃모양의 안상을 새겼고, 그 안으로 꽃모양의 띠를 둘렀다. 윗받침돌은 연꽃을 새겨 탑신을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얇게 새겼고, 앞·뒷면에는 문짝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그 중 앞면에만 자물쇠가 새겨져 있다. 문의 양 옆으로 신장입상이 배치되어 있다. 지붕돌은 추녀가 짧고 서까래와 기왓골이 상세히 표현되었으며, 지붕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차례대로 얹혀져 있다.

전체적으로 넓이에 비하여 높이가 높은 부재로 구성되어 길쭉해 보이며, 바닥돌의 폭이 좁아 안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래받침돌의 구름무늬나 탑신의 신장상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고, 특히 가운데받침돌의 안상조각에서 시대가 내려옴을 볼 수 있으나 각 부분이 완전히 보존된 아름다운 작품이다.

1962년 해체, 수리할 당시 기단부의 가운데받침돌에서 사리장치를 두었던 공간이 확인되었으나 사리장치는 남은 것이 없었다.
 
 
5.간월사지 석조여래좌상

종    목  보물  제37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산139 
시     대 신라

경상남도 울산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의 간월사지에 있는 석조여래좌상으로 약간의 파손은 있지만 비교적 잘 보관되어 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로 상투 모양의 큼직한 머리(육계)가 자리잡고 있다. 얼굴은 둥글고 풍만하며 단정한 입과 긴 눈, 짧은 귀 등의 표현에서 온화하고 인간적인 느낌을 준다. 어깨는 좁아지고, 몸은 양감이 없이 펑퍼짐한 모습이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옷은 얇으며 U자형의 옷주름을 표현하고 있다.

얼굴과 신체의 풍만함과 좁아진 어깨 등에서 9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6.청송사지 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38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청량면 율리 1202, 1203-1 
시     대 통일신라

남암산 아래에 있는 청송사 절터에 있는 삼층석탑이다. 이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은 각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기고, 마감돌 위에 다른 돌로 2단의 모난 괴임돌을 끼워서 각각 윗돌을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이 특히 길고 크며, 2층 몸돌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각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이 있고, 추녀가 두꺼워 지붕 네 귀퉁이의 치켜올림이 약하며 처마는 수평으로 길이가 짧다.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을 받치는 노반만 남아 있다.

이 탑은 기단의 짜임새가 정연하지 못하고, 1층 몸돌이 지나치게 큰 반면 지붕돌이 작아서 좋은 비례로 보기 어려우나, 지방에 분포된 신라 석탑의 한 예로 주목할 만하다. 또한 1층 몸돌의 괴임돌이 다른 돌로 되어 있는 점은 탑의 특이한 조형과 아울러 9세기 이후에 조성된 것을 짐작하게 한다.

1962년 해체, 수리할 당시 위층 기단에서 동제사리함이 발견되었다. 그 안에 청동여래입상 1구를 비롯하여 유리구슬 16점, 수정으로 만든 곱은옥 1점, 관옥 1점 등 30여 점이 발견되었다.
 
 
7.천황산 요지군

종    목  사적  제129호 
면    적  195,702㎡ 
지 정 일  1964.06.10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산143-1 
시     대 조선시대

요지는 도자기나 기와·그릇을 만들어 굽던 가마터를 말한다.

천황산의 봉우리 중 평평한 고원지대에 위치하는 백자 가마터로 5∼6기가 있다. 높이1,100m가 넘는 험준한 산의 꼭대기부분에 있어,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가마터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발견되는 백자조각들은 대접·사발·바래기·접시·술잔조각 등이 대부분이며, 접시 중에는 아가리가 안으로 말리거나 밖으로 말려있는 것도 있다. 품질이 좋은 편이 아닌 중·하품의 백자를 굽던 곳으로, 순백자 뿐 아니라 검은 빛깔로 그림이 그려진 철화무늬 백자조각들도 발견된다. 철화무늬는 소박하고 화려하지 않은 풀무늬 또는 원 모양과 원점 모양의 무늬가 그려져 있다.

경상도 해안 가까운 지역에서 드물게 발견되는 조선 중기의 지방 철화백자 가마터로 의의가 있다.
 
 
8.언양읍성

종    목  사적  제153호 
면    적  42,950㎡ 
지 정 일  1966.12.27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언양읍 동부리,서부리 
시     대 조선시대

예부터 경주·울산·밀양·양산과의 교통 중심지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던 옛 언양 고을의 읍성이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처음에는 흙으로 성을 쌓았던 것을 이후 연산군 6년(1500)에 현감 이담룡이 확장하여 돌로 다시 쌓았다. 평지에 네모꼴로 만들어진 보기 드문 평지성으로, 원래는 둘레가 약 1,000m, 높이가 4m나 되었으며 성안에는 4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성을 쌓았던 큰 돌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성벽은 조선 전기 읍성 축조의 일반적인 방식이 반영되었다. 큰 돌을 대충 갈아 쌓은 후 빈 공간에 잔돌을 채워 성벽을 튼튼하게 하였다.

언양읍성은 전국의 중요 읍성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던 14∼15세기의 축조방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에 나타나는 축성법 변천 모습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9.울주 검단리 유적

종    목  사적  제332호 
면    적  6,000㎡ 
지 정 일  1990.08.21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웅촌면 검단리 산62외 
시     대 청동시대

이 유적은 청동기시대의 대규모 집단 마을터로서 낮은 구릉의 비탈면에 위치한다.

마을 둘레에 못(환호)을 파 놓았는데, 이것은 당시 마을의 방위개념을 보여주는 자료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V’형태로 판 이 못은 현재 길이가 약 300m, 너비 50∼200㎝, 깊이 20∼150㎝ 정도이며, 이전에는 더 깊고 넓었을 것으로 보인다. 집자리와 움집터가 확인되었고 다양한 토기류와 석기류, 가락바퀴(방추차), 그물추 등 약 4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마을의 개념을 나타내는 못의 발견, 각종 유물들로 인해 당시의 생활상을 살필 수 있어 중요하며 청동기시대 연구에도 큰 역할을 하는 가치있는 곳이다. 


 
10.상천리 국장생 석표

종    목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 
지 정 일  1997.10.09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삼남면 상천리 산37-15 
시     대 고려시대

장생표는 절의 영역을 표시하기 위해 절 주변에 세우는 것으로, 수호신, 이정표, 경계표 등의 구실을 하며 풍수지리설과 민속신앙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통도사의 장생은 왕의 명에 따라 세운 것으로, 특별히 국장생이라 하여 모두 12곳에 설치하였다. 이것은 그 중 하나로 통도사의 동북쪽인 삼천리에 자리하고 있다.

형태는 거친 막돌의 앞면만 다듬어 곧추 세운 모습이다. 비문의 내용은 보이지 않는 글자가 있어 확실히 파악할 수는 없으나 세워진 자리와 나라에서 명을 내려 세웠다는 내용, 세운 날짜 등이 나타나 있다.

제작연대는 통도사국장생석표(보물 제74호)와 함께 고려 선종 2년(1085)으로 짐작된다.
 
 
11.청송사지 부도

종    목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호 
지 정 일  1997.10.09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청량면 율리 산107-4 
시     대 조선시대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이 부도들은 청송사터에서 300m 정도 떨어진 곳에 남아 있으며, 모두 3기에 이른다. 서로 크기만 다를 뿐 거의 같은 양식을 하고 있어서, 높직한 받침 위로 2단의 기단을 두고 종모양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받침에는 연꽃무늬와 신장상을 새겼으며, 2개의 돌로 이루어진 기단은 연꽃을 위아래로 대칭되게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탑신은 아래에 고사리 무늬를 새겨놓았다. 3기 중 1기의 탑에는 탑신에 ‘서응당진흡대사’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꼭대기에는 꽃봉오리모양의 머리장식이 큼직하게 돌출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세워진 작품들로서, 청송사의 덕망높은 승려들의 사리를 모셔놓은 곳이라고도 한다. 3기중 1기는 그동안 넘어져 있던 것을, 1982년에 복원해 놓은 것이다. 
 
 
12.운흥사지 부도

종    목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
지 정 일  1997.10.09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웅촌면 고연리 산218 
시     대 조선시대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시신을 화장한 후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운흥사터에는 모두 7기의 부도가 있는데, 현재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금당터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2기의 부도이다.

크기만 서로 다를 뿐 거의 양식이 같아서, 바닥돌 위로 2단의 기단을 놓고 그 위로 종모양의 탑몸돌을 얹은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각각 꽃무늬, 구름무늬 등을 옆면에 새겼으며, 위층 기단은 밑면에 굵은 연꽃무늬를 둘러놓았다. 탑몸돌 위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이 조그맣게 돌출되어 있다.

조선시대 부도로서 작은 규모에 간결하면서도 소박한 멋이 흐른다. 지금은 관음사라는 작은 암자에서 이들을 보존, 관리하고 있다.
 
 
13.석남사 삼층석탑

종    목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호
지 정 일  1997.10.09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232-2 
시     대 통일신라

석남사 안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으로, 절의 기록에 따르면 이 절을 창건한 도의국사가 호국의 염원으로 이 탑을 세웠다고 한다.

형태는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위층 기단과 탑신의 각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고,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아담하고 소박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석탑으로,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14.언양향교

종    목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 
지 정 일  1997.10.09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 1086 
시     대 조선시대

향교란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께 제사지내고, 지방 백성들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했던 국립교육기관을 가리킨다.

언양향교를 처음 세운 시기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반월산 아래에 지었고 이후 여러 차례 옮겨 지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 숙종 22년(1696)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 대성전을 지었으며, 숙종 26년(1700)에는 명륜당과 동재·서재를 지었다. 지금의 건물들은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것이다.

낮은 언덕을 등지고 평지에 지었으며, 교육공간을 앞쪽에, 제사공간을 뒤쪽에 둔 전학후묘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건물이 배치되어 있지 않고 명륜당 축과 대성전 축이 꺾여져 있다. 이는 향교를 옮겨 지을 때 대성전을 먼저 지어서 뒤에 지은 명륜당과 축이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로는 제사 공간으로 여러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대성전,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 학생들의 생활공간인 동재와 서재, 그리고 내삼문·외삼문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책·노비 등을 지급받아 운영하였지만 지금은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있다. 향교의 입구 양쪽에 조선시대에 세운 선정비들을 볼 수 있다. 

 
 
15.반고서원 유허비

종    목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3호
지 정 일  2004.12.16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산200-1 외 
시     대 조선시대

유허비란 한 인물의 옛 자취를 밝혀 후세에 알리고자 세우는 비석으로, 이 비는 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

포은 선생은 고려 우왕 2년(1376) 성균관 대사성의 벼슬에 있으면서 중국 명나라를 배척하고 원나라와 친하게 지내려는 친원배명 외교정책에 반대하다가 이곳에서 1년가까이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 동안 반구대에 올라 "중양절감회"라는 시를 짓는 등 많은 자취를 남겼다. 그 후 지역인들은 선생을 추모하여 반구대를 "포은대"라 명명하기로 하였다.

숙종 38년(1712) 언양지역 유생들이 포은 정몽주, 회재 이언적, 한강 정구 세 분을 추앙하여 반고서원을 세우고 제서하였다. 그러나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서원은 문을 닫게 되었다. 그 후 지역 유림들이 포은대영모비(1885), 포은실록대비(1890), 반고서원유허비실기(1901) 3기의 비석을 차례로 세웠으며, 1965년 현위치로 이전하였다. 
 

 

16.경숙옹주 태실 및 비


종 목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2호

지 정 일 2004.12.16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범서읍 사연리 산107-1 외 
시 대 조선시대


태실은 왕이나 왕실 자손의 태를 모시는 작은 돌방이다. 예로부터 왕실에서는 왕실의 번영과 왕실자손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전국에 이름난 산을 찾아 태실을 만들고 태를 묻었다고 한다. 이러한 산을 태봉산이라하며, 태비는 태실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태실 앞에 세운 비석이다

 

태실과 태비는 울산지역에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태비앞면에 "왕녀합환아기씨태실(王女合歡阿己氏胎室)" 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성화이십일년팔월초육일입(成化二十一年八月初六日立)"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록으로 봐서 조선시대 제9대 임금인 성종 16년(1485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고, 또한 태실의 주인공이 경숙옹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70년 초 태실이 도굴되었으나, 다행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태실 유물인 태항아리 2점과 태지1점을 찾아 소장하고 있다. 

 


17.울산 인성암 신중도


종 목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7호

지 정 일 2007.11.22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687 인성암 
시 대 조선시대


이 탱화는 울산 인성암 대웅전 우측면에 봉안되어있는 것으로 가로 105cm, 세로 106.5cm 크기이다.

 

1폭의 면 바탕위에 화면의 왼쪽에는 보관을 쓰고 연꽃을 들고 있는 제석천을 금강권보살과 일궁천자가 왼쪽에서, 금강삭보살과 월궁천자가 오른쪽에서 시립하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긴 창을 들고 있는 동진보살을 주조신, 주산신, 호계대신, 복덕대신, 도장신, 가람신이 에워싸고 있다. 화면의 상단부 병풍 앞에는 7위의 천동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본 작품은 부분적으로 박락의 흔적이 보이나 권속들의 인물표현에 음영이 잘 묘사되어 표정들이 각기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작품 전반적으로 붉은색을 주로 사용하였다.

 

작품 아래에 남아 있는 화기의 박락상태가 심한 편이나 광서연호와 절 이름이 남아 있어 1880년대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조선후기 이 지역의 불교미술 연구 및 신앙연구에 중요한 가치가 있는 문화재이다. 

 

18.박제상 유적


종 목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호

지 정 일 1997.10.09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 산30-2, 범서면 척과리 산152 
시 대  신라시대


신라의 충신 박제상과 그의 부인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사당터이다.

 

박제상은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잡혀있던 왕자를 구출하기 위해 먼저 고구려에서 왕자 복호를 구하여 귀국시킨 후, 왜국으로 건너가 왕자 미사흔을 구출했다. 그러나 자신은 잡혀 심한 고문 끝에 불에 타 숨졌다.

 

박제상의 부인 김씨는 두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왜국으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다 죽어 망부석이 되었으며, 부인의 영혼이 새가 되어 날아가 숨은 곳을 은을암이라고 한다. 그후 왕은 박제상의 딸을 둘째 며느리로 삼고 박제상에게는 대아찬의 벼슬을 내렸다.

 

이곳에 사당을 세워 박제상과 그 부인의 충절을 기리는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정확한 건립연대나 규모는 알 수 없다.

 

 

19.언양 지석묘


종 목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2호

지 정 일 1997.10.09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언양읍 서부리 232-1 
시 대 청동시대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지상에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울산광역시 언양읍 서부리에 있는 이 고인돌은 규모로 보아 경상남도 최대의 바둑판식 고인돌이며 길이 8.5m, 너비 5.3m의 덮개돌이 사다리꼴 모양으로 비스듬히 놓여 있다. 6매로 된 받침돌의 높이는 2.8m∼3.1m 정도로 거대한 편이다.

 

서부리 주민들은 이 고인돌을 ‘용바우’라고 부르며, 민속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정성을 드렸다고 한다.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지하의 묘실 형태나 출토 유물은 알 수 없지만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덮개돌이 매우 큰 것이 특징이다.
 


20.간월사지


종 목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5호

지 정 일 1997.10.09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512-1 
시 대  신라시대


간월사는 신라 진덕여왕(재위 647∼654) 때 자장율사가 창건하여 법맥을 이어오다가 임진왜란 때 없어졌다고 한다. 그 후 조선 인조 12년(1634)에 다시 지었다고 하는데 그 후의 내력은 알 수 없다.

 

현재는 금당지 등의 건물터와 축대 등이 남아있다. 또한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70호)과 2기의 석탑이 남아 있는데, 이들은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남아있는 불상과 석탑은 고대 불교미술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21.만정헌


종 목  문화재자료  제2호

지 정 일 1997.10.09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상북면 명촌리 256 
시 대 조선시대


만정헌은 약 500여년전 현감벼슬을 지냈던 김자간이 경주에서 울산 명촌리에 들어와 자리를 잡으면서 세운 계림 김씨의 정각이다.

 

현재 건물은 약 200여년 전에 고쳐 지은 것으로 1칸이던 온돌방을 2칸으로 늘려 지었다.

 

규모는 앞면이 3칸인데 비해 옆면은 왼쪽이 3칸·오른쪽이 2칸으로 되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앞면에는 ‘명헌’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둥근기둥(두리기둥)에 싸리나무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약 500여년의 전통을 지닌 만정헌은 울산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문화재로, 지붕 처마의 날렵하게 치켜 올라간 곡선이 한국 건축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고 있다.
 


22.학성이씨 근재공 고택


종 목  문화재자료  제3호

지 정 일 1997.10.09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웅촌면 석천리 302 
시 대 조선시대


학성 이씨 파종가집으로 시조인 이예의 11손 이의창이 지었다. 고종 때 이의창의 증손인 이장찬이 고쳐 지었고 1934년경 다시 전체적으로 고쳐 지었는데, 이후로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석천마을 한 가운데 자리잡은 이 집은 문간채, 사랑채, 곳간채, 별당채, 안채 등과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갖추고 있다.

 

문간채는 대문에 딸린 건물이고 사랑채는 작은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생활공간을 나눈 영역 분리가 명료하고 독립된 사당을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상류층 종가의 면모를 보여 주는 집이다.


23.석남사 수조


종 목  문화재자료  제4호

지 정 일 1997.10.09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1064 
시 대 고려시대


석남사 내에 남아 있는 수조로, 스님들이 사용하는 물을 담아두는 곳이다. 석남사는 통일신라 현덕왕 16년(824) 도의국사가 창건하였으며, 지금은 비구니의 수도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수조는 일반적인 사각형의 형태와는 다르게 사각의 각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한 모습이며, 규모가 매우 큰 편이다. 각 면을 잘 다듬은 세련된 수법을 보이고 있어, 고려말·조선초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는 보호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는데, 지금도 물을 담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남구의 문화재)

 

1.학성 이천기 일가 묘 출토 복식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37호 
수 량  10점
지 정 일 1979.01.23
소 재 지 울산 남구  신정동 1412-13(국립경주박물관 위탁·관리) 
시 대 조선시대


학성 이천기 일가 묘 출토복식은 이천기(1610∼1666) 묘와 그의 부인 흥려 박씨의 묘, 그리고 이천기의 셋째 아들인 이지영과 그의 부인 평해 황씨의 부부 합장묘에서 1969년에 출토된 유물이다.

 

유물 중 이천기의 묘 출토복식(2종 3점)은 광다회대 1점, 면포 솜소모자·명주 솜소모자 2점이다. 이천기의 부인 흥려 박씨의 묘 출토복식(3종 3점)은 면포 솜장옷 1점, 옷감 1점, 면포 홑치마 1점이다.

 

이천기의 셋째 아들인 이지영과 그의 부인 평해 황씨의 부부 합장묘 출토복식(3종 4점)은 난봉화문단 겹장옷 1점, 명주 솜누비치마 1점, 면포 솜버선 1쌍이다.

 


2.부북일기


종 목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
수 량  1권
지 정 일 2006.01.26
소 재 지 울산 남구  신정1동 548-7 
시 대 조선시대


부북일기는 조선시대 선조~인조대에 무과에 급제한 울산출신의 무관 부자가 함경도 회령지역에서 약 1년씩 부방생활을 할 때 남긴 일기이다.

 

울산에서 회령까지 오가는 노정이 정확하게 기술된 무관일기로서 희소가치가 있으며, 당시 무인, 양반, 기생 등의 생활상을 밝혀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3.처용암


종 목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4호

면 적 207,000㎡
지 정 일 1997.10.09
소 재 지 울산 남구  황성동 668-1 
시 대 신라시대


세죽마을 앞바다 가운데에 놓여 있는 바위로, 처용랑과 개운포의 설화와 관련이 있다.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 헌강왕이 개운포에서 놀다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앞을 가려 볼 수 없게 되었다. 일관(日官:삼국시대에 천문관측과 점성을 담당한 관원)이 아뢰기를 동해 용의 조화이니 좋은 일을 행하여 용의 노여움을 푸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왕이 근처에 용을 위한 절을 세우도록 영을 내리니 곧 구름과 안개가 걷히고 해가 나 이곳을 개운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동해의 용은 크게 기뻐하며 바다에서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춤을 추었는데 그 아들 중 한명인 처용이 왕을 따라 서울인 경주로 가서 미모의 여자를 아내로 맞고 급간(級干)이란 벼슬을 얻어 정사를 도왔다고 한다.

 

이 때 처용이 바위 밑에서 나왔다고 하여 그가 나온 바위를 가리켜 ‘처용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4.개운포성지


종 목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6호

면 적 21,899㎡
지 정 일 1997.10.09
소 재 지 울산 남구  성암동 일원 
시 대 조선시대


울산광역시 남구 성암동에 있는 개운포성터는 해변과 야산 계곡을 이용하여 돌로 쌓은 성으로, 성암동성터라고도 불린다.

 

기록에 의하면 개운포성은 신라 때부터 왜구 방어의 요충지였으며, 조선 전기에는 수군이 머무른 뒤 한동안 폐지되었다. 그후 세조 때 경상좌도수군절도사의 진영으로 사용되었다가, 조선 후기에는 배를 만드는 곳으로 이용되었으며, 고종 32년(1895) 수군이 해산될 때 폐지되었다.

 

현재의 성은 조선 전기에 쌓은 것으로 동·서·남·북 4곳에 성문이 있었으나, 동문과 북문의 형태만 남아 있으며, 성벽 둘레에는 도랑을 판 흔적이 있다. 특히 성터 기단부의 돌 위에 큰 돌덩이를 세워 쌓은 특이한 방법은 학술적 자료로서 가치가 큰 것으로 여겨진다.

 

 

5.성암동 패총


종 목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25호

지 정 일 2000.11.09
소 재 지 울산 남구  성암동 451-4 
시 대 석기시대


이 성암동 패총은 신석기인들의 생활 폐기물인 조개 껍데기와 짐승뼈, 물고기뼈, 석기나 토기의 파편 등이 남아 있는 조개무지 유적으로 이 지역에 살았던 신석기인들의 생활 모습과 당시의 자연 환경 등을 짐작할 수 있는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수습된 유물로는 덧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 돌도끼, 그물추, 돌고래뼈, 피뿔고동, 참굴, 떡조개 등이 있다.

 

성암동 패총은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앞으로 학술 조사가 이루어지면 이웃에 있는 황성동 세죽 패총과 온산공업단지내에 있는 우봉리 유적과 함께 울산지역 신석기시대의 문화상과 한·중·일 3국의 문화적 교류 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6.이휴정


종 목  문화재자료  제1호

지 정 일 1997.10.09
소 재 지 울산 남구  신정동 1412-10 
시 대 조선시대


원래는 울산 도호부 객사였던 학성관의 남쪽 문루인데, 지금은 정자 형식을 갖추고 있다. 객사란 지방에 출장간 관리나 외국 사신이 얼마간 머물던 곳을 말한다.

 

태화루라 불리기도 했던 이 건물은 일제시대 말에 도서관을 겸해 사용해 오다가 1940년에 울산공립보통학교(지금의 울산초등학교)의 교정을 넓히면서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짓게 되었다. 옮겨 지을 당시, 학성 이씨 월진파의 정각이었던 이휴정의 이름을 빌려왔고 건물도 정자 형식으로 일부 고쳐 지었는데, 누 아래쪽 양쪽 칸을 막아 온돌방을 만듦으로써 문루 형식에서 정자 형식으로 완전히 탈바꿈을 하게 되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며, 부재와 건축 수법이 조선 후기 문루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중구의 문화재)

 

1.태화사지 12지상부도


종 목  보물  제441호 
지 정 일 1966.03.31
소 재 지 울산 중구  학성동 67 
시 대 통일신라


태화사터에 묻혀 있던 것을 1962년에 발굴하여 일시적으로 부산으로 옮겼다가, 다시 울산의 학성공원으로 옮겨와 보존하고 있다. 태화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로, 고려말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던 시기에 없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남아있는 유물로는 이 부도가 유일하다.

 

일반적인 부도들과는 달리 널따란 바닥돌 위에 종 모양의 몸돌이 놓인 간단한 구조로, 바닥돌에는 앞면과 옆면에 가느다란 안상(眼象)이 움푹하게 새겨져 있다. 종 모양을 하고 있는 몸돌은 윗부분에 감실(불상을 모시는 방) 입구를 만들고, 그 안쪽으로 깊숙이 파놓아 사리를 모셔 두도록 하였다. 감실 입구 아래로는 12지신상을 돌려가며 도드라지게 새겨놓았는데, 머리는 짐승이고 몸은 사람의 모습으로 거의 나체에 가깝다. 12지신은 띠를 나타내는 12동물로,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능을 보호하기 위한 의도로 조각되어 세워지기 시작하였는데, 이곳에서 처럼 부도에 새겨지는 것은 보기 드문 예이다. 부도를 하나의 묘로 보아 이들을 새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종모양의 부도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지니며, 수법이나 조각들의 기법들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2.울산 병영성


종 목  사적  제320호 
면 적 66,972㎡ (보호구역1,989㎡)
지 정 일 1987.07.18
소 재 지 울산 중구  서동 149-8외 
시 대 조선시대


경상좌도의 병마절도사가 머물던 성으로, 조선 태종 17년(1417)에 쌓은 해발 45m 이하의 낮은 구릉을 이용해 골짜기를 두른 타원형의 성이다.

 

초기에는, 성벽 위에서 담처럼 생겨 몸을 숨긴 채 총이나 활을 쏘는 시설인 여장을 비롯한 기본적인 시설만 갖추었다. 그 후 세종 때에 이르러 국방력 강화를 위해 성을 보호하고 공격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옹성·적대·해자 등 여러 방어시설을 설치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당시 성의 둘레는 3,723척(약 1.2㎞)이고, 높이는 12척(약 3.7m)이며, 성 안에는 우물·도랑·창고 등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의 영성이며, 조선시대 성곽연구에 중요한 유적이다. 


3.울산동헌 및 내아


종 목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

지 정 일 1997.10.09
소 재 지 울산 중구  북정동 349 
시 대 조선시대


동헌은 조선시대의 지방장관인 원이나 수령들이 공적인 일을 하던 중심 건물을 말한다. 울산 동헌은 울산이 부·현·도호부 등으로 자격이 오르거나 떨어질 때마다 옮기거나 폐쇄하거나 새로 지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선조 32년(1599)에 울산이 부로 승격된 후 숙종 7년(1681)에 부사 김수오가 지었으며, 숙종 21년에 김수오의 아들 김호가 ‘일학헌’이라 이름지었다. 그 뒤 영조 39년(1763)에 부사 홍익대가 다시 지어서 현판을 ‘반학헌’이라 고쳐 달았다고 하나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영조 36년에 다시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헌의 규모는 앞면 6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또한 관청의 안채인 내아는 앞면 6칸·옆면 1칸의 ㄱ자형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울산 동헌은 병마절도사가 머물던 관청·수군절도사가 머물던 관청과 더불어 울산의 대표적인 관청이었으며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다.

 

 

4.울산향교


종 목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

지 정 일 1997.10.09
소 재 지 울산 중구  교동 171-1 
시 대 조선시대


향교란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께 제사지내고, 지방 백성들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했던 국립교육기관을 가리킨다.

 

울산향교는 선조(재위 1576∼1608) 때 처음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다. 그 후 효종 3년(1652)에 현 위치로 옮겨 다시 지은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자를 비롯한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학문을 연마하던 명륜당을 비롯하여 동무와 서무, 동재와 서재, 청원루, 전사청, 전교실 등의 건물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로부터 토지와 서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30명의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적 기능은 사라지고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현재 이곳에서 한문서당을 운영하고 있다. 

 

 

5.효자 송도선생 정려비


종 목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0호

지 정 일 1998.10.19
소 재 지 울산 중구  북정동 350-1 
시 대 조선시대


정려비는 충신이나 효자, 열녀 등의 행동과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그들이 살던 마을의 입구에 세우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전기 때의 사람인 송도 선생의 효행을 기리고 있다.

 

울산에서 생원을 지내던 선생은 부모가 모두 오랫동안 병으로 고생하자 10여년동안 약을 지어 간호를 하였다. 1년 사이로 부모가 모두 돌아가시니 스스로 흙과 돌을 지어 묘를 만들고 묘곁을 지켰다. 그 이후에는 사당을 세워 부모의 신주를 모셔두고 새벽마다 향을 피워 절을 하였고, 해마다 정성껏 제사를 드렸다. 이러한 사연을 들은 세종은 비를 세워주고 정려각을 지어 그를 표창하였는데,『세종실록』에 이러한 사연이 잘 나타나 있다.

 

비는 낮은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큼지막한 머릿돌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던 것을 이곳 우정삼거리로 옮겨 다시 세워 놓았다. 
 


6.다운동 고분군


종 목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1호

면 적 179,955㎡
지 정 일 1997.10.09
소 재 지 울산 중구  다운동 산147 일원 
시 대 청동시대


태화강변과 척과천 사이의 야산 및 저지대에 분포하는 복합 유적이다.

 

이곳에는 청동기시대의 집자리유적과 원삼국·삼국시대의 무덤유적이 자리잡고 있다. 청동기 시대의 집자리는 사각형의 움집터(수혈식주거지)이며, 붉은 간토기·민무늬토기가 나왔다. 원삼국시대의 유구는 무덤군으로 널무덤(토광묘)·돌널무덤(석관묘)·돌방무덤(석실묘)이 있다. 출토된 유물은 굽다리 접시(고배)·조합식 쇠뿔손잡이 항아리(우각형파수부호)·화로모양토기·항아리 등 토기류와 금동관·금동제과대(허리띠)·대도(긴칼)·창·화살촉들이 나왔다.

 

다운동 유적은 청동기시대 전기에서부터 통일신라시기까지 울산지방의 고대 문화의 흐름을 알게 해주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7.수운 최제우 유허지


종 목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2호

면 적 3,449㎡
지 정 일 1997.10.09
소 재 지 울산 중구  유곡동 639외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후기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1824∼1864)가 수도생활을 하던 중 큰 깨우침을 얻은 곳으로 ‘여시바윗골’이라 한다.

 

몰락한 양반가 출신인 선생은 봉건적 체제에 대한 모순을 느끼고 “사람이 곧 하늘”이라 가르치는 동학을 창시하였다. 동학은 우리민족의 근대화에 결정적인 분수령을 형성하며, 당시의 도탄에 빠져있던 민중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었다.

 

민중들 속에서 동학의 교세가 확산되자, 당시 조정에서는 그를 체포해 그릇된 말로 정국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1864년 처형했다. 그러나 그의 순교 이후 교세가 더욱 커져 동학농민운동과 3.1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여시바윗골은 선생이 수도생활을 하던 중, 금강산 유정사에서 왔다는 한 스님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주신 글을 받고 큰 깨우침을 얻은 곳으로, 옛부터 ‘예수바우골’이라 하여 동학의 성스러운 땅으로 여겨왔다.
 


8.외솔 최현배선생 생가터


종 목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39호

지 정 일 2001.12.20
소 재 지 울산 중구  동동 613 
시 대 조선시대


이곳은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1894∼1970) 선생의 생가터로, 건물은 이미 없어졌으나 집터와 돌담만 남아 있으며, 현재 채소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한글학 연구 보급의 대가 외솔 최현배 선생은 1894년 10월 19일 이곳에서 출생하여 유년시절을 여기에서 보냈다.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1910년부터 3년간 주시경(1876∼1914)이 운영하던 조선어강습원에서 한글과 문법을 배웠다. 이후 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와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등에서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데에 전념하였다.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등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중 1942년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는 한글학회 이사장, 문교부 편수국장, 연세대학교 부총장,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하면서 나라사랑의 정신과 겨레의 얼을 되살리는 일에 헌신하였다. 《우리말본》《한글갈》《글자의 혁명》《나라 사랑의 길》 등 많은 책을 썼으며, 돌아가신 뒤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

 

우리말과 글 연구에 평생을 바친 외솔 최현배 선생의 생가터로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9.울산왜성


종 목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

면 적 59,678㎡
지 정 일 1997.10.30
소 재 지 울산 중구  학성동 100 일원 
시 대 조선시대


울산광역시 학성동에 있는 이 성은 신라의 계변성이라 불리던 성을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왜장 가또기요마사가 새로 쌓은 왜성으로, 우리측에서는 섬처럼 생긴 형상이라 하여 도산성이라 불렀다.

 

선조 30년(1597) 12월 23일부터 이듬해 1월 4일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왜군은 우리군과 명나라 연합군에 밀려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식량이 없어 소변을 마시고 말을 잡아먹으면서도 성을 지킨 왜군은 구원병이 오자 성벽을 3중으로 쌓아 수비를 강화하였다. 하지만 이듬해(1598) 2차 전투에서 패한 왜군은 밤에 성을 불태우고 후퇴하였다.

 

이 성은 산정상을 중심으로 본성을 두고, 북쪽과 서북쪽에 2∼3겹으로 성벽을 쌓았는데, 성벽의 길이는 1.300m이고 높이는 10∼15m이다. 여기에 망을 보기 위해 높이 지은 망루 12개를 만들었으며, 남쪽을 제외한 3면에 흙으로 제방을 쌓고 다시 그 위에 나무 울타리를 설치하였다. 남쪽은 바다를 접하고 있어 배가 성 아래까지 들어와 정박할 수 있었다.

 

10.유곡동 공룡발자국 화석


종 목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2호

지 정 일 2000.11.09
소 재 지 울산 중구  유곡동 54-1일원 
시 대 선사시대


이곳의 공룡발자국 화석은 약 1억년 전의 전기 백악기 시대에 살았던 공룡들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공룡들은 아열대 기후 아래 우기와 건기가 반복되고 열대 무역풍이 영향을 미치는 사바나 지역의 하천평야 일대에서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곳의 공룡발자국은 약 91㎡ 넓이의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초식공룡인 이구아나룡에 속하는 발자국과 육식공룡에 속하는 발자국 등 80여 개가 된다.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듯한 모양으로 남아 있어서 육식 마니랖토라공룡 한마리가 초식 이구아나룡에 속하는 고성룡 아홉마리를 추격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곳의 공룡발자국 화석은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지질시대 울산지역에 대한 자연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동구의 문화재)

 

1.동축사 삼층석탑


종 목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호

지 정 일 2000.11.09

소 재 지 울산 동구  동부동 565 
시 대 신라


동축사는 『삼국유사』의 황룡사 장륙조에 의하면, 인도의 아육왕이 인연 있는 국가에서 장륙존불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여 황철 5만 7천근과 황금 3만분을 배에 실어 띄울 때 함께 보냈다는 1불과 2보살의 상을 모시기 위하여 신라 진흥왕 34년(573)에 처음 건립하였다고 전해지는 절이다. 그 후 경순왕 8년(934), 고려 정종 때, 조선 세조 3년(1457), 1931년, 1975년,2005년에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동축사 삼층석탑은 신라의 전통양식인 중층기단 삼층석탑이다. 화강암으로 된 이 탑의 기단은 면석이 모두 없어져 원래의 정확한 높이를 알 수 없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모두 한개의 돌로 되어 있으며, 몸돌에는 네 모퉁이에 기둥을 본 떠 새겼는데, 지붕돌의 받침은 1·2층은 5단이나 3층은 3단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는 노반과 보개만 얹혀 있는데, 돌의 재질이 탑신부와 다른 사암계통이어서 이 석탑이 여러 차례에 걸쳐 고쳐졌음을 알 수 있다. 2005년 현 위치로 옮겨 기단부의 일부 부재를 첨가하여 복원 하였다.

 

2.주전봉수대


종 목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3호

지 정 일 1997.10.09
소 재 지 울산 동구  주전동 산193 
시 대 조선시대


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을 말하며,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울산광역시 동구 봉대산에 있는 이 봉수대는 조선 세조(재위 1455∼1468) 때 쌓은 것으로 둘레 5m, 높이 6m의 원통형으로 되어 있다. 세종 때 일반적으로 만들었던 사각형의 봉수대와는 형식상 차이가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남으로 화정의 천내 봉수대에서 봉수를 받아 북의 우가산 유포봉수대에 전하였는데, 뒤에 유포 봉수대가 폐지되면서 경주의 하서지에 전달하였다.

 

이 봉수대는 현존하는 많은 봉수대 가운데 그 원형이 잘 보존된 것으로, 봉수대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3.화정천 내 봉수대


종 목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4호

지 정 일 1998.10.19
소 재 지 울산 동구  화정동 산160-2 
시 대 조선시대


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을 말한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이 봉수대는 울산 화장장에서 남서쪽으로 약 70m 정상에 자리하고 있으며, 가리산 봉수대에서 연락을 받아 남목천(지금의 주전)봉수대에 전하던 곳으로, 울산만의 관문을 지키는 봉수대 가운데 핵심이 되는 곳이다. 조선 정조 때에는 별장 1명에 봉군 100명을 배치하여 경계를 서기도 했다.

 

흙으로 쌓은 지름 25m의 둥근 둑 안에 돌로 대(臺)를 쌓았는데, 그 지름은 8m이고, 높이는 7.5m이다. 

 

4.남목산성


종 목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8호

지 정 일 1998.10.19
소 재 지 울산 동구  동부동 산197-1외 12필지 
시 대 조선시대


울산광역시 동구에 있는 마성은 말이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목장 둘레를 돌로 막아 쌓은 담장으로, 높이 1.5m∼2m이고, 둘레는 1930보에 이른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사용할 말을 기르고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주로 해안가와 성 등을 중심으로 목장을 설치했다. 이 지역의 원래 지명은 남목이었는데, 목장이 설치되면서 남목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전한다. 성종 2년(1471)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에 보면 염포의 동쪽 산림 일대에 방어진 목장이 있고, 효종 2년(1651)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울산읍지』에도 남목 남쪽에 마성이 표시되어 있다. 『학성지』에는 1651년 새로 마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성이 남목마성으로 여겨진다.

 

목장 감독관조에 보면 문음 6품을 두어 말을 관리하였으며, 매년 말 4필을 상납하였다. 

 

5.주전봉수대 관련 고문서


종 목  문화재자료  제16호
수 량 기록문서11점
지 정 일 2000.11.09
소 재 지 울산 동구  주전동 산193 
시 대 조선시대


이 고문서는 주전봉수대(울산광역시 기념물 제3호)의 운영 실상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철종 9년(1858)∼고종 33년(1896)간의 것으로 모두 11점이며 한지에 필사한 것이다.

 

고문서에는 울산부사가 박춘복, 박명대 부자에게 내린 주전봉수대 별장 임명장과 별장과 인근 동수에게 근무를 철저히 하고 군포를 잘 징수하라는 전령문 그리고 미포 정자 등 봉수대 인근마을로 부터 군량 형식으로 거둔 금전의 내역을 기록한 문서와 울산부에서 주전봉수대에 내려준 조총 등 무기와 솥 등 장비의 목록 또 별장이 이를 점검하여 이상유무를 보고한 문서들이 있다.

 

이 고문서를 통해 주전봉수대는 수령의 관할 아래에 있었고 봉수군은 봉수를 담당하면서 유사시에는 적군을 맞아 싸우는 군사 역할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봉수군 역은 봉수대 인근 주민들이 담당하였고 군량 등 운영경비도 이들이 공동으로 부담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고문서는 조선 후기 봉수대의 운영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6.울기등대 (구)등탑


종 목  등록문화제 제 106호 
소 재 지  울산광역시 동구 일산동 905-5번지
지 정 일  2004년 9월 6일
시 대  조선시대
 
1904년 2월 8일, 만주와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러시아와 세력 각축을 벌여오던 일본이 여순항에 정박중인 러시아 함대를 야간 선제공격함으로 발발한 러·일 전쟁은 이듬해 9월 5일까지 계속되었으며, 그때 등대의 역할은 선박을 안전하게 항해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보다는 일본해군이 러일전쟁 시 해상권 장악을 위한 군사전략 목적으로 이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울기등간의 규모와 설치위치에 대해서는 정확한 자료가 없으나 그 설치시기는 현존하는 기록과 연혁에 의하면 1905년 2월 20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이후 동해 남부를 항해하는 선박의 안전항해를 위하여 1906년 3월 26일(고종 광무 10년)현재의 상태로 설치하여 1987년 12월 12일 까지 약 80년간 등대불을 밝혔다 울기등대 구 등탑은 구한말 시대의 건축양식을 내포하고 있어 근대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아 2004년 9월 4일 문화재청으로부터 등록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되었다.

 

(북구의 문화재)

 

1.어물동 마애여래좌상


종 목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호

지 정 일 1997.10.09
소 재 지 울산 북구  어물동 산122 
시 대 통일신라


‘방바위’라고 불리는 거대한 바위에 일광(日光)·월광(月光)보살을 협시로 하는 약사삼존불을 높게 돋을새김한 마애불이다.

 

모든 중생의 질병을 구제해준다는 중앙의 약사불은 비교적 길쭉한 얼굴로, 이목구비가 약간 마멸되었을 뿐 세련된 모습을 보여준다. 목에는 3개의 주름이 뚜렷하며, 당당한 어깨와 강건한 신체는 통일신라를 대표할 만한 조각 수법을 보여준다. 하지만 마멸이 심한 두 손과 오른쪽 옷주름 등에서는 다소 딱딱해진 면도 엿보인다. 좌우의 협시보살은 약간 모난 듯 긴 얼굴에 원통형 보관을 쓰고 있는데, 이마에 각각 해와 달을 표시하고 있어 일광·월광보살임을 알 수 있다.

 

바위 뒷면에는 서까래 같은 것을 걸쳤던 자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석굴사원 형식의 공간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2.울산부 선생안


종 목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8호

지 정 일 2009.02.05
소 재 지 울산 북구 중산동 964
시 대 조선시대


선생안은 조선왕조시대 중앙과 지방의 관서나 해당 관원의 성명·직명·지위와 부임 및 이임일자 등을 기록한 책을 뜻한다.

 

본래 책으로 묶여 있었지만, 현재는 낱장으로 떨어져 있다. 이 책의 분량은 표지를 포함하여 총 246쪽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확실하지는 않다.

책의 크기는 가로 37cm, 세로 50cm로 파손이 심하여 제목을 알 수 없으며, 일부는 읽기 어려운 상태이다.

이 책에는 1599년 병마절도사 겸 울산도호부사로 부임한 김응서로 부터 1906년 군수로 부임한 김덕한에 이르기까지 관장의 취임과 이임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울산에 전승되어 온 건치 연혁과 치소의 이동, 아울러 임진왜란 때의 상황이 비교적 상세히 적혀 있다.

 

이 선생안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부터 1906년의 대한제국 말기까지 울산에 부임한 지방관료 명단과 재직기간 동안의 당면과제 및 해결책을 같이 기록하여 당시의 정치·사회에 대한 주요 사실을 알 수 있는 자료이며, 특히 사족(지방 양반)으로 분류되는 좌수·별감과 호장 등의 명단이 첨부되어 있는 등 조선시대 후기의 울산 지방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문화재이다. 

 

3.중산동 고분군


종 목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9호

면 적 15,615㎡
지 정 일 1997.10.09
소 재 지 울산 북구  중산동 616-1 일원 
시 대 삼한시대


원삼국시대부터 신라시대에 걸쳐 만들어진 대규모 무덤들이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널무덤(토광묘)과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 구덩식돌방무덤(수혈식석실묘)을 비롯하여 다양한 무덤들의 내부구조가 확인되었다. 무덤 안에서 굽다리접시(고배), 긴목항아리(장경호), 오리형토기, 고리자루칼(환두대도) 등 각종 유물이 출토되었다.

 

중산동 무덤들을 통해 신라 무덤구조와 토기의 기원 및 연대측정에 도움을 주며, 이 지역문화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4.유가산 유포봉수대


종 목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3호

지 정 일 1998.10.19
소 재 지 울산 북구  당사동 230외1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울산광역시


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을 말하며,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자연석으로 지어진 원형의 봉수대는 지름 10m, 높이 3.5m이며, 주변에 돌로 쌓은 방호벽과 봉수군 막사터가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있다. 유포 봉수대는 남쪽의 남목천(지금의 주전)봉수대에서 연락을 받아, 북쪽의 경주 하서지 봉수대에 전달하는 울산의 마지막 지점으로, 인접한 유포석보에 소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해안지방의 봉수대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5.유포석보


종 목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7호

지 정 일 1998.10.19
소 재 지 울산 북구  정자동 625 
시 대 조선시대


석보란 돌로 쌓은 작은 성을 이른다. 이 성은 구릉기슭의 낮은 평지와 계곡을 감싸안아 그 주위를 좁게 쌓아 올린 형태로, 주로 울산과 경주 양진의 병사들이 교대로 이곳에 근무하면서 성을 지켰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문종 즉위년(1450)에 왜구를 막아내고자 나무를 이용해 성을 쌓기 시작하여 세조 원년(1455)에 끝마쳤으나, 그 전인 단종 즉위년(1452)부터 나무대신 돌로 쌓을 것을 논의하여 세조 5년(1459)에 이 성을 마무리하였다 한다. 

 

6.상안동 지석묘


종 목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30호

지 정 일 2000.11.09
소 재 지 울산 북구  상안동 284 
시 대 청동시대


지석묘는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는데,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 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유수한 지석묘 집중지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우라나라의 지석묘는 4개의 받침돌을 세워 지상에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것을 탁자식 또는 북방식이라 하고,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것을 바둑판식 또는 남방식이라 하는데, 바둑판식에서 받침돌이 없는 것을 따로 개석식 또는 무지석식이라 하여 구분한다. 울산지역에서는 주로 개석식과 바둑판식이 나타난다.

 

상안동 지석묘는 바둑판식 1기로서 상안동 신답마을의 경작지에 있다. 덮개돌은 화강암으로 땅 위에 반듯하게 놓여 있는데, 크기는 길이 210㎝ 너비 170㎝ 두께 100㎝ 정도이며, 덮개돌 위에는 작은 돌로 문질러서 둥글게 판 알 모양의 성혈이 10여 개가 있다. 이 성혈은 풍요와 다산을 의미하거나 태양을 상징한다고 한다. 덮개돌 아래의 양쪽에는 받침돌이 보이는데 내부 구조는 학술 조사를 실시하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다.

 

이 상안동 지석묘는 북구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것으로 청동기시대 상안동 일대의 정치·사회·문화 등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7.창평동 지석묘군


종 목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31호

지 정 일 2000.11.09
소 재 지 울산 북구  창평동 167, 산45-2 
시 대 청동시대


지석묘는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는데,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 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유수한 지석묘 집중지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우라나라의 지석묘는 4개의 받침돌을 세워 지상에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것을 탁자식 또는 북방식이라 하고,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것을 바둑판식 또는 남방식이라 하는데, 바둑판식에서 받침돌이 없는 것을 따로 개석식 또는 무지석식이라 하여 구분한다. 울산지역에서는 주로 개석식과 바둑판식이 나타난다.

 

창평동 지석묘군은 창평동 난골마을 구릉에 1기, 경작지의 논두렁에 1기가 있는데, 300m 간격으로 떨어져 있다. 덮개돌은 화강암으로 땅 위에 비스듬히 놓여 있는데 논두렁에 있는 것은 크기가 길이 210㎝ 너비 210㎝ 두께 90㎝ 정도이며 받침돌은 보이지 않고, 구릉에 있는 것은 길이 180㎝ 너비 150㎝ 두께 90㎝ 정도이고 받침돌로 추정되는 돌들이 덮개돌 아래에 깔려 있다. 내부 구조는 학술 조사를 실시하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다.

 

이 창평동 지석묘군은 청동기시대의 창평동 일대의 정치·사회·문화 등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8.달천철장


종 목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40호

지 정 일 2003.04.24
소 재 지 울산 북구  달천동 산20-1 일원 
시 대 삼한시대


철장이란 철의 원료인 토철 또는 철광석을 캐던 곳을 말하는데, 달천동 및 상안동 일대에 분포하는 이 유적은 원래 이름인 달내에서 유래하였으며, 그 역사는 삼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문헌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후한서』에는 '한, 예, 왜 모두가 여기서 철을 가져가며, 모든 시장에서 철을 사용하여 매매하는 것이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는 기사가 있다. 그래서 철이 당시의 화폐경제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문헌에 달천철장이 등장하는 시기는 조선시대 세종조부터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1452년 달천에서 생산된 철 12,500근이 수납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특히, 달천의 철은 경주 황성동의 제철유적에서 출토된 철과 함께 비소(As)성분이 확인되어 역사적 중요성을 더한다.

 

철 및 철기구를 만드는 곳을 쇠부리(쇠불이)터라 불렀는데, 달천 토철을 원료로 하는 쇠부리(쇠불이)터는 가까운 경주 외동읍 녹동리(덧거리)에서부터 멀리는 청도에까지 이르렀다. 

 

9.중산동 취락유적


종 목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41호

지 정 일 2003.04.24
소 재 지 울산 북구  중산동 656-1 일원 
시 대 삼한시대


이 유적은 옛 사람들의 집단거주지였던 곳으로 중산리 이화마을과 갓안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지역에 위치하며, 태화강 북쪽 지역을 대표하는 삼한후기∼삼국후기시대 취락유적으로 전국적으로 매우 희귀하다.

 

2002년 발굴기관의 시굴조사에서 주거지, 작업장, 방어시설 등이 확인되어 당시 취락의 구성, 범위, 배치 및 주변지역과의 교류, 변천과정 등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해주며, 또한 사로국에서 신라로 성장해 가는 신라초기 연구에 중요한 유적이다.

 

인접한 중산동 고분군(울산광역시기념물 제9호)을 축조한 주인공들이 바로 이 취락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들은 산사람들의 생활공간과 죽은자들의 영역을 철저하게 분리하였다. 또한 그들이 사용한 생산도구 중 철기구는 당시의 대표적인 철생산지였던 달천 철장(울산광역시기념물 제40호)의 철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10.대안동 쇠부리터


종 목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44

면 적 1,660㎡
지 정 일 2006.01.26
소 재 지 울산 북구  대안동 산177 
시 대 삼한시대


삼한시대 이래 영남지역 최대 철생산지였던 달천철장의 토철을 이용하여 쇠를 생산하던 쇠부리터는 울산, 경주, 밀양, 청도 일대에 약 120여기 이상 존재한다.

 

그 중 1기였던으로 판단되며,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과 작은 천이 옆에 있어, 쇠부리작업에 필요한 연료(숯)과 물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서 이곳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토둑, 노 일부가 잘 남아 있고, 주변에 관련 유적 및 쇠똥(슬래그)이 산재하고 있어 이 분야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11.매곡동 생활유적


종 목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45호

면 적 21,120㎡
지 정 일 2007.11.22
소 재 지 울산 북구  매곡동 351-10 
시 대  청동시대 ~ 조선시대


울산 매곡동생활유적은 북동쪽의 동대산(해발 444m)에서 동천을 향하여 남쪽으로 뻗어 내린 완만한 구릉에 분포하는 유적으로 2002년에서 2004년까지 3차례의 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으며, 유적의 성격은 무문토기시대 주거지, 삼국시대 주거지 및 고분, 측구부 탄요, 고려시대 분묘, 조선시대 탄요 등으로 청동기시대에서 조선시대에 해당하는 다양한 생활유적, 생산유적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다양한 유적들이 훼손되지 않고 잘 남아 있어 그 시대의 생활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판단되며, 특히 많은 탄요유적은 인근의 달천철장과의 관련성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이다.

 

지정구역은 매곡동유적 중 기존의 구릉이 훼손없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으며 유구 잔존상태가 양호하고, 그 분포 밀집도가 높아 유적의 중심지로 추정된다.

 


12.박상진의사 생가


종 목  문화재자료  제5호

지 정 일 1997.10.09
소 재 지 울산 북구  송정동 355 
시 대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가로 활약하던 고헌 박상진(1884∼1921)이 태어나고 자란 집이다.

 

박상진은 비밀 결사대인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총 사령관으로서 광복을 위해 활약한 분이다.

 

대문채와 사랑채, 안채 등 여러 부속 건물을 ㅂ자형으로 배치하였다. 사랑채는 마루와 방을 갖추고 있으며 뒤의 중문을 지나면 ㄱ자형 안채가 있다. 남녀의 공간을 작은 문으로 간단히 구획하여 각각의 공간에 독립성을 확보하고 있다.
 


13.대안동 신흥사 구 대웅전


종 목  문화재자료  제9호

지 정 일 1998.10.19
소 재 지 울산 북구  대안동 739 
시 대 조선시대


통도사에 딸린 절인 대안동 신흥사의 옛 대웅전으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신흥사를 세운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신라 때 세운 절이라고 전하며, 임진왜란 당시 승병활동의 거점이 되었던 절 중 하나이다. 신흥사에서 1998년 새로이 대웅전을 신축함에 따라 이 건물은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긴 것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짜올린 익공 양식으로 비교적 간결한 구조를 보인다.

 


14.관문성


종 목  사적  제48호 
면 적 892,014㎡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 산122,울산 북구 달천동,중산동 
시 대 통일신라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경주를 보호하기 위해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쌓은 산성이다.

 

원래 이름은 모벌군성·모벌관문이었는데, 조선시대에 관문성으로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박천이라는 냇물을 사이에 두고 동해를 향하여 쌓았으며, 673년에 쌓은 북형산성과 함께 경주의 동쪽을 지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관문성은 경주의 다른 산성들과 다르게 산과 산을 연결하며 길게 쌓은 특수한 방식의 산성으로, 그 규모가 12㎞에 달해 신라의 만리장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성 안에는 성문자리로 보이는 곳과 창고자리·건물자리 등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잘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산성으로, 경주의 남산성과 비교해볼 때 성쌓기 방식에서 훨씬 발달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 ,l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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