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은 1500년 포르투갈인(
人) P.
카브랄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적색염료(
赤色染料)의 원료로 쓰이는 브라질나무의 이름을 따서 브라질로 불리게 되었다. 1531년
포르투갈은 북동부에 식민을 시작하여, 유목·반유목의 생활을 하는 원주민을 절멸시키거나 내륙부로 추방하고, 그 대신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수입하여 사탕수수 재배를 시작했다. 17세기에는 식민지의 중심이 북동부에서 남부로 옮겨짐에 따라 ‘반데이란테스’라는 개척자들이 원주민의 저항을 물리치면서 오지(
奧地)로 전진하여, 거의 현재의 국경을 확정했다. 그때
미나스제라이스주(
州)에서 금·다이아몬드 등이 발견되어, 18세기 중엽에는 금수출에서 세계 제일을 자랑했다.
1769년의 ‘티라덴테스’ 운동에 나타난 상인·민족적 지주(
地主) 등의 독립의 꿈은
나폴레옹의 포르투갈 점령과 더불어 19세기 초에 빗나간 형태로 실현되었다. 즉, 1808년 나폴레옹에 쫓겨 일족(
一族)과 함께 피해 온 포르투갈 왕실의 황태자 돔 페드루는 1822년 9월, 국왕 주앙 6세가 귀국한 후,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하고 스스로 페드루 1세라 칭했다. 1831년
페드루 1세가 전제(
專制)를 이유로 물러나게 된 후,
페드루 2세 치하의 브라질은 인근의 여러 나라로 진출하였고, 커피 재배의 보급과 유럽 이민의 대량유입에 의해 자본주의 발전에 박차를 가했다.
1888년에는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으나, 대지주와 지방의 세력자 등으로 이루어진 계급집단인 ‘콜로네레스’는 이에 불만을 품고 이듬해인 1889년 무혈반란(
無血反亂)으로 왕제(
王制)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답변확정했다. 그후 40년 동안은, 19세기 말에 세계
총생산의 3/4을 차지한 커피 생산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경제를 바탕으로, ‘콜로네레스’의 지배가 계속되었다. 19세기 말의
바이아주(
州) 농민의 대봉기(
大蜂起), 1912∼1915년의 남부농민이 일으킨 반란 등은 진압되었으며, 1922년 ‘테니엔테스(청년장교)’의 반란을 지휘한 프레스테스는 1924∼26년에 한 부대를 이끌고 정부군과 싸우면서 2만 4000km나 행군했으나, 정권을 타도하지는 못하였다.
1930년 세계 대공황(
大恐慌)하에서 커피 생산이 타격을 받게 된 것을 기회로
리우그란데두술주(
州)의 목축·공업자본을 대표하는 G.바르가스가 청년장교의 지지를 얻어서
쿠데타에 성공하여, 비로소 ‘콜로네레스’의 지배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1920년 바르가스 집권 이후 쿠데타에 의한 잦은 정권교체로 정치적 혼란이 이어졌다. 바르가스가 독재적인 경향을 강화한 데 대해, 1935년
공산당을 중심으로 결성된 ‘민족해방동맹’이 봉기하였으나, 오히려 대중으로부터 고립되어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1937년 바르가스는 선거 전의 혼란을 이유로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신국가’라는 이름 아래 전체주의적인 독재제(
獨裁制)를 수립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연합국 측에 서서
이탈리아 전선에 부대를 파견하였으며, 전후에는 민주적 정책을 취하려고 했으나, 1945년 군의 지지를 얻은 극우세력의 쿠데타로 정권을 빼앗겼다. 1946년 E.G.두트라 대통령하에서 브라질의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헌법이 답변확정되었다.
1950년 선거에서 바르가스는 노동당의 지지를 얻어 다시 정권을 잡고,
국가자본주의의 육성에 진력했으나, 1954년 재정악화에 얽힌 분쟁으로 해서 자살하였다. 그후 1956~1964년은 민주정권이 통치하였는데, 1956년 선거에서 대통령에 취임한 J.
쿠비체크는 외국의 자본을 바탕으로 공업을 확장하는 동시에,
민족자본의 육성, 신수도인 브라질리아건설 등
공공사업을 추진하는 데 주력하였다.
1961년에 대통령이 된 J.콰드로스가 반년 만에 사임함으로써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J.B.굴라르는
쿠바 혁명의 영향 등으로 해서
농지개혁·외자기업(
外資企業)의 접수 등을 시도했으나 사회·경제의 혼란을 한층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964년 3월 육군에 의한 무혈 쿠데타로 굴라르 정부가 무너지고, C.브랑쿠 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하여 반대파의 추방,
인플레이션 억제정책 등을 실시하였다. 1967년 3월 헌법개정으로
대통령의 권한이 강화되었고, 국명이 브라질합중국에서 브라질연방공화국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1979년 3월에 취임한 J.B.
피게이레두 대통령까지 5명의 대통령은 모두 군부지도자가 차지했으나, 1985년 1월의 선거에서 T.A네베스가 당선되어 군정 20년 만에 민정으로 이양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T.A.
네베스가 4월에 병사하자 부통령 J.
사르네이가 대통령직을 승계함으로써 새 민간정부가 출범하였다.
1988년 새헌법이 승인되어 1989년 12월 국가재건당의 F.A.코요르 데 멜루가 29년 만에 처음으로 치른 직접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코요르는 결승투표에서 좌익노동자당의 시우바를 이겼다. 코요르 정부는 1985년 21년간의 군정을 마감하고 들어섰던 사르네이의
과도정부가 남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자유시장 경제체제의 옹호, 정부기구의 개편, 사회복지제도의 확대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1992년 부정축재 혐의로 사임한 후
프랑코 부통령이 승계하였으며 1994년 11월 페르난두
엔히크 카르도주가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카르도주 대통령은 집권 후 인플레이션을 줄이는 등의 업적을 남겼지만 일자리 감소와 농업개혁에 따른 문제점 등으로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1998년 재선에 성공함으로써 2002년까지 브라질을 이끌었다.
2002년 카르도주 대통령을 이어 대통령에 당선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Luiz Inacio Lula da Silva) 대통령은 집권당인 노동자당(PT)이 연루된 정치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탄핵 위기에 몰리기도 했지만 2006년 10월 재선에 성공함으로써 카르도주 대통령에 이어 브라질 역사상 두 번째로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이 되었다. 최초 집권 당시
중남미 좌파의
대명사처럼 불리기도 했지만 이후 실용주의 노선을 답변확정해 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룰라 대통령이 당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과제로는 경제성장과 개혁작업의 가속화, 그리고 현격한 빈부격차에 따른 사회갈등 해소 등이다.
특히 브라질은 신흥 경제대국을 상징하는
브릭스(
BRICs)의 일원이면서도 높은 경제성장을 기록하고 있는 중국과 인도에 훨씬 뒤 떨어지고 있다. 또한 빈곤층
문제 해소를 위해 많은 예산을 투여하고 있지만 소득수준의 불평등 구조가 좀처럼 변할 조짐을 보이고 있지 않아 빈곤층뿐만 아니라 중산층까지 상대적 박탈감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는 실정이다. 대외적으로 룰라 대통령은 ‘개발도상국의 대변인’의 입지를 살려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를 통한 브라질 주도의 중남미 통합과 개발도상국 연대 강화를 계속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