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때 의병들의 활약

이순신 장군때 의병들의 활약

작성일 2010.04.21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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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때 의병들의 활약좀 가르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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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조선에서 일어났습니다

의병을 이끄는 지도자들은 일어났고 이순신장군은 자꾸 승전보를 전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20만의 대군이 행주산성을 공격할 때에 승병과 의병들은

적들을 섬멸하여 승리를 이끌고

권율장군이 나머지 군들을 죽였습니다

이렇게 의병의 등장은 조선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임진년)에서 1598년까지 일본이 조선을 공격함으로서 시작한 전쟁을 말한다. 왜란이라고 통상적으로 부르지만 삼포왜란과 같은 이른바 일본인들의 소요가 아니라 조선과 일본 양국 간의 전쟁이므로 조일전쟁, 또는 정유재란과 구분하여 제1차 조일전쟁으로 부르는 시도도 있다. 일본은 초반에 서울을 포함한 한반도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였으나 이순신 및 권율 등의 명장들과 각 지방의 조선 백성들의 조직적 자발적 저항에 부딪혀 7년만에 일본이 패하여 완전한 철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제1차 침략을 임진왜란, 1597년의 제2차 대대적 침략 공세를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구분해서 부른다. 한편 일본에서는 당시의 연호를 따서 분로쿠·게이초의 역(文禄・慶長の役)이라고 부르며, 두 차례의 전쟁을 각각 ‘분로쿠노에키(文禄の役)’, ‘게이초노에키(慶長の役)’라고 한다. 또한 중국에서는 만력조선역(萬曆朝鮮役), 북한에서는 임진조국전쟁(壬辰祖國戰爭)이라고 한다.

임진왜란은 조선 시대 최대의 위기이자 극복이였으며 정치·문화·경제와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언어, 풍속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쟁이였다. 이를 기점으로 조선 시대는 전기와 중기로 구분하기도 한다.

목차
[보이기]
1 원인
2 각 국의 정치적 상황 및 군사력
2.1 조선의 정세
2.1.1 조선의 대략적인 정치적 상황
2.1.2 조선의 대외관계
2.1.2.1 일본과의 관계
2.1.2.2 명과의 관계
2.1.3 조선의 군사력
2.1.3.1 조선 초기의 국방 체계
2.1.3.2 국방력의 와해
2.2 일본의 정세
2.2.1 센고쿠 시대 통일
2.2.2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치·경제 개혁
2.2.3 일본의 군사력
2.3 명의 정세
2.3.1 명의 대략적인 정치적 상황
2.3.2 명의 대외 관계
2.3.2.1 조선과의 관계
2.3.2.2 일본과의 관계
2.3.3 명의 군사력
3 경과
3.1 제1차 침략
3.2 제2차 침략
4 전쟁 결과가 3국에 미친 영향
4.1 조선에 끼친 영향
5 당시 사용된 무기
5.1 조선(한국)
5.2 왜
5.3 양국 전함 비교
5.3.1 조선
5.3.2 왜
6 주요 인물
6.1 조선 (한국)
6.2 왜 (일본)
6.3 명 (중국)
7 같이 보기
8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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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원인
1590년 일본 열도의 정권을 잡고 오랜 전국 시대를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간파쿠(關白)가 되어 그의 야망을 동아시아 정복으로 확장하려 했다. 오랜 전국 시대를 끝냈지만 아직 산재해 있던 일본 내의 불평 세력의 관심을 외부로 향하려는 의도로 1591년 명나라를 정복하려고 하니 조선은 길을 빌려 달라는 주장을 사신 현소(玄蘇) 등을 보내 와서 ‘명나라를 치려고 하는데 조선에서 길을 인도해 달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일본은 항상 명나라가 자신들의 조공(朝貢)을 허락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저지른 일이었다고 한다. 조선은 대의(大義)로 준엄하게 거절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온 나라의 군사를 총동원하여 대대적으로 조선을 향해 침입하였다.[6]


[편집] 각 국의 정치적 상황 및 군사력

[편집] 조선의 정세

[편집] 조선의 대략적인 정치적 상황
조선 왕조는 개국 후 100여년 동안 창업을 주도했던 개국공신과 이후 세조의 집권을 도왔던 공신 집단과 그 후손들로 형성된 훈구파 세력과 더불어 왕조의 안정과 융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훈구파는 정권이 안정됨에 따라 임꺽정 등의 의적들이 등장할 만큼 민심을 저버리는 등 그 부패가 심해졌고, 이런 변화 속에서 이른바 사림파 세력이 등장하여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정치, 사회 질서의 재정립을 강조하고 나섰다. 그 결과 신진 사림 세력과 기존의 훈구파 세력과 마찰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이러한 마찰은 성종이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들을 삼사의 청요직에 등용하면서 표면화되었다.

그 결과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중엽에 이르는 근 반세기 동안에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 네 차례에 걸친 사화가 일어나 신진 세력은 큰 타격을 받고 정국은 큰 혼란을 겪게 되었다.

이 영향으로 정치, 경제, 사회 각 방면에서는 큰 혼란이 일어나 신분 제도와 군역 제도가 무너지면서 권문세도가에 의한 농장의 확대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공납 제도도 문란해져서 민생이 도탄에 빠지는 등 사회 전반이 동요의 기미를 보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조정은 왕위 계승을 둘러썬 왕실 척신들의 정권 쟁탈전인 을사사화가 발생하였으며 사림 역시 내부 분쟁으로 인해 상호 대립하는 새로운 정쟁의 양상이 나타났다.

그 후 명종이 모후의 대리 정치에서 벗어나 직접 왕권을 행사하게 되자 외척 세력이 정치의 중심에서 제외되고 명종의 개혁 의지를 뒷받침하는 새로운 신진 사림 세력이 국정 운영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신진 사림 세력은 선조 연간에 이르러 다시 동인, 서인 양대 세력으로 분열되어 대립을 거듭함으로써 국정의 효율적 운용에 장애를 끼쳤다.


[편집] 조선의 대외관계

[편집] 일본과의 관계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를 기본적으로 교린(交隣) 정책을 유지하였다. 고려 말기부터 번번히 왜구는 한반도의 해안 지대를 침범, 약탈하였다. 이에 조선 때에 와서는 수군의 군사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성능이 뛰어난 대포와 전함 등을 대량 생산하는 등 왜구 소탕에 노력하였다.

이에 따라 약탈이 어려워진 일본이 평화적인 무역 관계를 요청해 오자, 조선은 부산, 울산 등 일부 항구만을 제한적으로 개방하는 형태의 무역을 허용해 주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왜구의 약탈이 계속되자 이를 강력히 응징하기 위하여 세종대왕은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 섬을 공격하였다.


[편집] 명과의 관계
조선과 명나라 간의 관계는 ‘책봉-조공 체제’의 가장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었다.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는 조선 전기에는 기본적으로 책봉-조공 체제에 기반한 사대 관계를 바탕으로 조선이 명나라를 섬기는 상황이었다.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는 형식적으로 군신·상하 관계가 성립되고 조선은 제후국으로써 예와 명분에 합당한 불평등한 국가 지위를 감수해야 했다. 구체적으로는 명나라 황제에 의한 조선 국왕 책봉의 수용, 명나라 연호의 사용, 정례적인 조공 등 제후로서의 의무 등이 부과되었다.

하지만 명나라의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은 전혀 없었으며, 초기에는 태조의 조선 국왕 인정 문제와 여진족 문제, 조공 문제로 알력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특히 태조와 정도전이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는 차원에서 요동 정벌을 계획하면서 명나라와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15세기에는 이처럼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표방하면서도 경우에 따라서는 명나라와 대결을 시도할 정도로 주체적 움직임이 있었으나 16세기에는 화이론을 옹호하는 사림파가 전면에 등장하여 명나라에 대한 사대가 문화적 동질 의식과 춘추대의에 바탕을 두고 이해와 시세를 초월해서 수행되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면서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는 15세기 이래의 기조를 유지하였다.

평화적이고 안정적인 양국 관계가 지속되는 가운데 조선은 명나라와 약속한 ‘1년 3공’의 규정을 넘어서까지 명나라와의 교섭에 적극성을 보였고 그를 통해 명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는데 열심이었다. 16세기 이후 양국 관계에서 중요해진 측면은 경제적 관계였다. 15세기 이래 조선은 책봉-조공체제 아래 규정된 당초의 조공 부담을 줄이는데 주력하여 금과 은을 조공 품목에서 제외받는 성과를 얻었다.

양국 사이의 통상은 부진한 상황이었으나 15세기 말부터 조선 내부의 농업 경제력 향상과 함께 중국산 견직물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명나라로부터 대량의 비단과 원사가 유입되었다.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무역 관계의 진전은 조선의 은광 개발과 일본으로부터의 은 유입을 가속화시켰으며 궁극에는 은을 매개로 조·명·일 삼국 사이의 무역 구조가 정착되는 단초가 되었다.

이처럼 16세기까지 양국 관계는 대체로 우호적인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요동 정벌 문제, 여진족 문제 등 일부 현안을 놓고서 상당한 갈등을 겪었다. 조선은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고 선진 문물을 수용하려는 의도에서 사대 관계를 받아들였지만, 명나라의 압력에 의해 자주성이 침해되거나 국익이 심하게 손상받는 상황에 처할 경우엔 명나라에 대한 저항도 불사하는 양면적 입장을 보여던 것이다.

결국 명나라에 대한 사대 외교는 왕권의 안정과 국제적 지위 확보를 위한 자주적인 실리 외교였고, 선진 문물을 흡수하기 위한 문화 외교인 동시에 일종의 공무역이었다.


[편집] 조선의 군사력

[편집] 조선 초기의 국방 체계
조선의 기본적인 병역 원칙은 양인개병(良人皆兵)과 병농일치(兵農一致)제로 노비를 제외한 16세 이상 60세 이하에 이르는 양인의 정남(正男 : 장정)은 누구에게나 병역의무가 부과되었다. 이 경우 정남은 정병(正兵 : 현역 군인)으로서 실역을 마치거나, 보인(保人 : 보충역)으로서 실역 복무에 소요되는 경비를 부담 하는 두 가지 중의 한 가지로 구분되었다.

이와 같은 원칙을 전제로 하여 군은 크게 중앙군인 경군(京軍)과 지방군인 향군(鄕軍)으로 구분 편성되었다.

중앙군은 태조 3년(1394)부터 세조 초년까지 약 60년간에 걸쳐서 여러 차례의 개혁을 거쳐 5위 체제(의흥위(義興衛), 용양위(龍?衛), 호분위(虎賁衛), 충좌위(忠佐衛), 충무위(忠武衛))의 편제가 확립되었다.

5위 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중앙군은 의무병인 정병을 비롯하여 시험으로 선발된 정예부대와 왕족, 공신 및 고급관료들의 자제들로 편성된 특수병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복무 연한에 따라 품계와 녹봉을 받았다.

지방군인 향군은 육군과 수군의 두 가지 병종으로 구분되어 국방상 요지인 영(營), 진(鎭)에 주둔하면서 변방 방어에 종사하거나 일부 병력은 교대로 수도에 상경하여 도성 수비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영진군은 주로 해안 및 북방 변경 지대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내륙 지방에는 거의 군대가 주둔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병력 부재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향리, 관노, 무직 백성, 공노비 등으로 구성된 예비군인 잡색군(雜色軍)을 편성하여 해당 지역의 수령 지휘하에 두었다.

지방군의 방어 개념은 각 도에 주진으로서 병영(병마절도사가 지휘)과 수영(수군절도사가 지휘)를 설치하고 그 아래에 각 처의 요충지에 거진(첨절제사가 지휘), 진(동첨절제사가 지휘) 등 대소의 진영을 두어 유사시에 주진 진장의 지휘하에 지역 방어에 임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주진을 중심으로 한 방어 체제는 신속한 병력 집결이 이루어지지지 않는 취약점이 노출되어 이를 보완하기 위해 세조 1년에 거진을 독립된 방어 편성 단위로 하고 그 아래에 군, 현의 병력으로 제진을 관할하게 하는 진관 체제가 답변확정되었다.

그 후 을묘왜변을 전후로 한 시기에 조선의 군사적 환경이 급변하면서부터 근 1백여년 동안 고수해 오던 진관 체제는 변모를 가져와 제승방략의 분군법으로 방위 체제가 전환되었다. 분군법은 지역 수령들에게 사전에 작전 지역을 배정해 주고 유사시에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진관지역에서 작전 지역으로 병력을 이동시켜 작전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이 제도는 유사시 최전방에 병력을 집중시킬 수 있는 장점을 갖추고 있는 반면에 작전 지역에 집결한 병력은 중앙에서 파견되는 경장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그 지휘를 받아야 하는 시간상의 문제점이 있었다. 또한 최전방에 대한 과도한 병력 집중으로 말미암아 후방 지역이 공백화 될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이와 같은 방위 체제는 일본과 여진족 등 야만족들이 소규모의 노략질을 자행하던 시기에 방어 병력을 집중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는 이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큰 전란을 겪지 않은 조선 조정으로서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편집] 국방력의 와해
조선왕조는 건국 후 2백여 년간 이렇다 할 외환을 겪지 않은 가운데 평화가 계속됨과 동시에 문치를 국가 정책의 중심으로 삼음으로써 국가의 기풍을 문약에 빠짐과 동시에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국방체제도 점차로 이완되기에 이르렀다. 국방의식이 희박해지고 군정이 이완되어 감에 따라 각종 국방 제도도 그 자체가 형식화되어 남해안과 북방의 변경 지역에서 근근이 그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대부분의 전국 각지에서는 군역을 부과하지 않거나 대역인을 세우고 군포를 납부하도록 하는 방군수포와 대역납포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미 병력은 장부상으로만 존재하였으며 군은 실제로 무력한 대역인으로만 편성되어 병력 부제 현상은 더욱 심화되어 갔다. 결국 임진전쟁을 치러야 할 선조 때에 와서는 경군(중앙군)과 향군(지방군) 모두 병부에 편제 상의 정원만 기록되어 있을 뿐 실병력은 거의 없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편집] 일본의 정세

[편집] 센고쿠 시대 통일
1392년 일본에서는 무로마치 막부의 제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남북조의 분열을 종식시키고 전국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그 후 15세기 중엽에 이르러 봉건영주세력에 대한 쇼군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지방의 봉건영주인 슈교다이묘들이 사분오열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1467년의 오닌의 난을 계기로 무로마치 막부가 몰락하고 그로부터 100여년 동안 군웅이 할거하는 센고쿠 시대가 개막되었다. 이 혼란의 시기에 지방의 신흥무사집단이 구 세력인 슈고다이묘 집단을 대신하여 자립 태세를 갖추어 전국대명으로 등장하였다.

그러던 중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오다 노부나가가 출현하여 다수의 경쟁 세력을 굴복시키고 일본의 실질적 지배권을 장악함으로써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어 갔다. 그러나 1582년 오다가 그의 부장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피살당하는 이변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실권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인물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로 돌아가고 말았다. 도요토미는 아카치의 반란 세력을 토벌하고 오다의 유지를 계승하여 일본 통일 사업을 계속 추진하였다.

1583년 히데요시는 시바타 카쓰이에(柴田勝家)와 시즈가타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거의 수중에 넣었다. 같은 해 3월에는 수륙교통의 요지인 혼간사 자리에 장대한 오사카 성을 쌓기 시작했으며 1584년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인 오도 노부오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연합군과 전쟁에 들어갔다.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보로 화의가 성립됨으로써 후방을 안정시킨 히데요시는 1585년 시코쿠를 평정하고 조정으로부터 간파쿠, 다음 해에는 다이죠 다이진에 임명되고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 출신 성분이 미천한 히데요시는 천황의 권위를 이용하고자 했다. 간파쿠가 된 히데요시는 천황으로부터 일본 전국의 지배권을 위임받았다고 칭하며, ‘소부지(墜無事, 전국의 평화)’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이를 바탕으로 쟁란을 거듭하던 다이묘들에게 정전을 명령하고, 영토의 확정을 히데요시 자신에게 맡기도록 강요했다. 1587년에는 명령에 따르지 않던 규슈의 시마즈 씨를 정벌하고 1590년에는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오다와라 성을 함락시켰으며 도후쿠의 다이묘를 복속시키면서 전국 통일을 완성했다.


[편집]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치·경제 개혁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는 곧 강력한 정치, 경제 개혁을 시작하였다. 도요토미 정권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검지(檢地)라는 토지 제도 개혁과 가타나가리(刀狩)라는 무기 몰수 정책이었다.

1591년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검지장과 구니에즈(지도)를 제출하게 하여 전국 통일을 과시했다. 검지장을 토대로 토지를 측량하고 수확고를 조사하여 전국의 생산력을 쌀로 환산하는 ‘고쿠다카(石高)제’를 실시하고 다이묘에게는 고쿠다카에 상응하는 군역을 농민에게는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대신에 고쿠다카에 합당하는 연공을 징수하였다.

가타나가리는 농민들에게서 무기를 몰수하고 농민의 신분을 명확히 하기 위해 1588년에 시행되었으며 1591년에는 ‘히토바라이(人掃)령’을 내려 신분상의 이동을 금지하고 사농공상의 신분을 확정하여 병농분리를 완성시켰다.


[편집] 일본의 군사력
15세기 중엽의 센고쿠 시대에 이르러서 전투의 양상이 대규모의 집단 보병 전술로 전화됨에 따라 전투의 주체도 소수의 특정한 영웅이 아닌 보병의 밀집 부대로 옮겨지게 되었다.

전투 임무를 수행하는 아시가루(足經)라는 경장비보병이 출현하여 전투의 승패를 갸름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들은 16세기 중엽에 철포(조총)와 화약이 전래되면서부터 철포 부대인 철포조와 궁사 부대인 궁조로 편성되어 전투 시 공격의 주역을 맡았다.

당시의 전국 다이묘 세력 가운데서 가장 먼저 이와 같은 전술 변화를 이용하여 통일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이 바로 오다 노부나가였다. 1572년 오다 노부나가는 다케다군과의 전투에서 조총을 보유한 보병을 주력으로 다케다군의 기병을 격파하여 전술의 변화에 획기적인 전기를 열었다.

그 후 1582년에 이르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투 부대의 병종을 기병과 보병의 두 가지로 대별하고, 시대장(侍大將)의 지휘 하에 기병, 총병, 궁병, 창검병 등의 단위대를 편성한 후에 각조의 지휘관으로 기사, 보사 등을 두었다.

이 무렵의 일본군은 부대를 삼진 또는 사진으로 나누어서 단계적으로 공격을 수행하는 것을 기본적인 전벅으로 답변확정하고 있었다. 즉, 제 1진의 기병이 2개 대로 전개하여 포위 태세를 갖추면 제2진의 총병이 적의 정면에서 조총을 쏘면서 돌격을 감행하고 이어서 제3진의 궁병이 진격하면 제4진의 창검병이 뒤따라 돌진하여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비(非)전투 요원으로서는 소인(전령 업무), 하부(수송 업무), 선두 및 수주(순박운앙 업무), 대목부(감찰 업무), 의사, 승려 등이 전투 부대와 작전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도요토미는 이와 같이 변모된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여 1586년 무렵부터 대규모의 건조 계획을 추진하여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 이미 천여 척의 전함을 확호한 데에 이어서 종전 무렵에 이르러서는 3천여 척이라는 대규모의 선단을 보유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인 1591년에는 서해, 남해, 산양, 산음 및 기내 이동의 일부 지역에 동원령을 내려서 33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할 준비를 갖추었다.

이 무렵의 일본군은 철포, 창, 궁시, 왜도 등 4가지의 개인 무기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주종 간의 단결력이 강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실전 경험이 풍부하였기 때문에 전쟁에 있어서 탁월한 전력을 발휘할 수가 있었다.


[편집] 명의 정세

[편집] 명의 대략적인 정치적 상황
1368년 개국된 명나라는 15세기 초인 영락제 때에 이르러 그 국세를 크게 떨쳤으나 영락제가 죽은 후 국력이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449년에 정통제가 몽골의 오이라트부를 친정하다가 도리어 패전하여 포로가 된 ‘토목보의 변’을 계기로 명나라의 국제적 영향력이 약화되었으며, 내부의 기강은 땅에 떨어졌다.

그 후, 16세기에 이르러 환관의 발호로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전국이 반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만큼 크게 동요하였고, 이 무렵부터 기세를 떨치기 시작한 왜구 집단은 명나라의 변경 해안 지대를 휩쓸어 제국의 존망을 위협하였다.

이에 따라 명나라는 북쪽으로는 몽골족의 침입을, 남쪽으로는 왜구의 침입을 막아서 싸워야 하는 이른바 ‘북로남왜’의 우환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 되엇으며, 이러한 외부의 압력은 자연히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던 것이 만력제가 등극하면서부터 10년 간은 장거정(張居正) 같은 대정치가가 나타나 해이해진 기강을 바로잡고 세정(稅政)을 일신하는 한편, 밖으로 몽골과 강화함으로써 북쪽 국경을 평온하게 하고 요동 섬서(陝西)를 개척하였으며, 남쪽에 반기를 든 이족(異族)을 평정하는 등의 치적을 쌓았다.

그러나 장거정이 죽자 만력제는 나랏일을 돌보지 않고 환관에게 맡겨 기강이 다시 문란해졌다. 명나라는 또한 서북변경 영하(寧夏)에서 일어난 몽골의 항장(降將) 보바이(知拜)의 반란과 귀주(貴州)지방의 토관(土官) 양응룡(楊應龍)의 난을 평정해야 하는 어려움과, 임진왜란으로 조선에 원군을 보내는 일 등으로 국력을 크게 소모하게 되었다.


[편집] 명의 대외 관계

[편집] 조선과의 관계
명나라는 1368년 건국 후 대내적으로는 전제왕정을 강화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자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질서를 형성해 나갔다. 명나라는 주변 나라들을 중화주의에 입각한 조공책봉체제로 편입시켰다. 조선은 왕권의 정통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국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일본 등 이웃 나라들과 함께 명나라의 조공책봉체제를 받아들였다.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조선은 매년 서너 차례에 걸쳐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해금정책을 취한 명나라와의 무역은 조공무역 형태로 이루어졌다. 조공 무역은 명나라의 황제가 주변 국가의 왕을 임명하는 책봉의 대가로 해당 국가들은 조공을 통해 황제에게 헌상물을 바치는 형식이었는데, 조선으로부터 견직물과 고려인삼 등을 받으면 명나라에서는 그 대가로 고급 견직물과 자기, 서적, 약재 등을 주었다. 조공무역은 조선에게 더 이익이 많았는데, 이는 조공 횟수를 둘러싼 두 나라의 주장을 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명나라가 조선에게 3년 1공, 즉 3년에 1번의 조공무역을 주장한 반면, 조선은 거꾸로 명나라에게 1년 3공, 즉 1년에 3번의 조공무역을 주장했다. 조선에서 이와 같은 주장을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반적인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조공무역은 제후국에서 제국에게 일방적으로 갖다 바치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제후국에서 조공을 가져와 바치면 제국에서는 그에 대해 사여를 내리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사여품이 조공품보다 더 귀하고 많아야 한 것 또한 원칙이었다. 더불어 사절단의 체제비와 물품운반비를 명나라측에서 모두 부담하였다. 이는 상국으로서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방도였다.


[편집] 일본과의 관계
명나라는 일본의 조공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멀리 바다 건너 섬에 웅거해 있으면서 말을 잘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1404년 명나라는 일본의 요구에 따라 10년에 한번씩 조공을 오되 인원을 200명 이내로 제한하며, 칼을 가지고 오면 도둑으로 치부해 죄를 따진다는 조건을 붙였다. 무역 장소는 절강성의 영파(寧波) 지역으로 지정했다.

이렇게 제한을 가한 것은 유황, 구리, 칼 등 일본의 물품이 명나라에서 요긴한 것도 아닌 데다 천황이 아닌 영주들의 배가 주로 왔으며, 체류 경비를 부담하는 것도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그 뒤 인원을 300명으로 늘렸으며, 그런 대로 조공 관계를 유지했다. 16세기 초반부터 일본의 규슈 지방 상인들이 명나라 복건성 쪽 항구에 드나들면서 은을 옷감과 교환하는 무역을 벌였다.

이 무렵 에스파냐 상인과 포르투갈 상인들까지 절강성, 복건성 등지에 와서 무역 행위를 하자 명나라에서는 이들을 몰아내면서 일본 상인들도 함께 쫓아냈다. 그래서 1547년 이후 일본의 조공선이 명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 뒤 상인들은 아오먼(澳門, 마카오)을 근거지로 삼았다.

그 결과 일본 상인들의 후원을 받는 왜구가 더 극성스럽게 해적질을 했던 것이다. 왜구는 명나라와 조선을 공격 목표로 삼아 횡행했다. 일본은 포르투갈 상인의 중개 무역을 통해 명나라 상품을 사들이는 것이 불편해 공식 무역의 길을 트려고 노력하면서 조선에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조선은 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정권을 잡은 후 명나라와 무역을 하려고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편집] 명의 군사력
명나라는 개국 초부터 징병제와 모병제의 장점을 절충한 위소제도라는 군제를 채용했다. 위소의 최소 단위는 백호소로 정원은 병사 백명과 지휘관인 총기 2명, 소기 10명 등 총 112명이었다.

총기는 각각 소기 5명을 지휘하고, 소기는 각각 병사 10명을 지휘했다. 10개의 백호소로서 1개의 천호소를 구성하고, 5개의 천호소로서 1위를 구성한다. 유사시에는 위의 지휘관으로 참장, 유격장, 파총 등을 임명하고 중앙에서 파견되는 총병관이 이를 총괄 지휘하였으며, 1위의 병력규모는 5,600명이었다.

수 개의 위가 모여서 도지휘사사라는 군단을 형성하는데, 그 지휘관은 도지휘사이다. 여러 도지휘사사는 중앙의 오군도독부에 분속하도록 되어 있었다. 위소의 병사들은 평시에는 둔전 및 군사 훈련에 종사하면서 전시에 대비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가 전시에는 중앙에서 내려온 총병관의 지휘하에 전투임무를 수행하였다. 군단인 도지휘사사는 각 성 혹은 전략상 중요 지역에 소재하고 있었으므로 명대에는 13성의 도지휘사와 요동, 만전, 대령 등의 도지휘사사를 비롯하여 관할구역이 광대한 지역에는 행도지휘사사를 두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6세기 전반기까지 명나라는 전국에 16개 도지휘사사, 5개 행도지휘사사, 2개 유수사를 두고 여기에 소속된 493개의 위, 2,593개의 소가 있었으며, 도사에게 직속된 315개의 수어천호소가 있어 그 병력은 총 329만여 명에 달했다. 이 밖에도 황제의 친위군으로서 궁성의 수호를 담당하는 금의, 금오, 우림 등의 25위가 있어 그 병력 수가 15만여 명에 달했다.

명나라 군제의 근간인 위소제도의 경제적 기반은 군둔(軍屯)이었으며, 그에 대한 초기의 세금 부과는 매우 경미하엿으므로 위소제도의 운영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영락제 연간부터 군둔 관리 체제의 정비와 함께 둔전병의 부담이 가중되어 군둔의 기초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후 1449년의 '토목보의 변'을 계기로 위소제도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민병 모집을 통한 병력 보충이 이루어졌다.

이 민병은 북방의 몽골족과 동남 해안 지역에 출몰하는 왜구를 격퇴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정치 기강의 문란과 더불어 군의 기강이 해이해짐으로써 그 전투력이 약화되어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편집] 경과

[편집] 제1차 침략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쓰시마 도주에게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에 복속할 것과 명나라 정복을 위해 일본군의 길잡이를 맡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쓰시마 도주는 명나라 정복을 위해 길을 빌려달라는 말로 바꾸어 조선에 교섭을 해 왔으나 조선은 들어줄 수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교섭이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4월 15만 명의 군대를 조선으로 파견해 침략하게 하였다.

일본군의 작전은 육군은 종래 일본 사절단이 조선에서 이용하던 세 길을 따라 북상하고, 수군은 조선 남해와 황해를 돌아 물자를 조달하면서 육군과 합세하는 것이었다. 일본군이 물밀듯이 북상해 오자 왕실과 조정은 서울을 떠나고 북쪽으로 피신하였다. 일본군은 개전한 지 20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으며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한반도 북부까지 쳐들어갔다.

숱한 싸움을 겪었던 일본군은 전쟁 경험이 풍부하였고 잘 훈련되고 조직되었다. 반면 조선군은 오랜 평화기를 누린 상태에서 군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며 실전 경험도 없었다. 조선이 전쟁 가능성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련한 대책은 하나같이 효과적이지 못한 것뿐이었다. 또한 병사들이 일본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탈영해버리는 사태도 빈번하였다.

무력한 조정과 관군을 대신하여 1592년 6월 이후 조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의병은 충의의 뜻을 강하게 지닌 선비와 전직 관료, 일본군의 침략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지키려는 농민과 상인 등으로 구성되었다. 자신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진하여 전쟁에 참가한 이들은 사기가 높았고 향토지리에 밝은 이점이 있었다. 조선 조정은 비상대책으로 또 하나의 조정을 만들었는데 왕세자 광해군이 이를 이끌고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의병 봉기를 촉구하고, 의병 부대를 국가의 정식 군대로 인정하였다. 의병들은 곳곳에서 일본군의 무기와 식량보급로, 통신망을 차단하여 일본군을 곤란에 빠뜨려놓았다. 의병의 봉기로 민심은 차츰 제자리를 찾게 되었으며 조선 관군도 재기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되었다.

또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압도적인 화력과 탁월한 전술을 앞세워 일본 수군을 한산도 등지에서 싸우는 족족 쳐부수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일본군은 보충병력과 군수품 수송이 어려워져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조선 수군과 의병의 활약은 조선에 불리하였던 전세를 단숨에 뒤집는 원동력이 되었다. 육지에서는 김시민이 진주 대첩에서 분전하여 큰 승리를 거뒀고, 권율도 행주 대첩에서 크게 승리하여 일본군은 점점 조선군에 밀리게 되었다.

한편, 의주로 몸을 피신한 선조는 명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명나라에서는 여론이 분분하였으나 자국의 영토에까지 전쟁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한반도에서 적을 막는 것이 상책이라는 판단 아래 대규모 원병을 파견하였다. 1593년 1월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은 조선군과 합세하여 평양을 수복하고 일본군은 서울로 퇴각하였다. 명군은 처음 3천여 명의 병력을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10만 명 정도의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켰다.


[편집] 제2차 침략
일본군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화의에 나섰다. 명군도 벽제관 전투에서의 참패를 겪고 난 후 자국의 이해를 우선시하여 종전을 원했으므로 화의교섭이 시작되었다. 조선은 삼국 중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으므로 화의에 결사반대하여 교섭에서 제외되었다.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 조정은 군사제도를 능률적으로 개편하고 의병부대를 관군으로 편입시키는 등 군사력을 강화해나갔다. 일본군은 남해안으로 물러가 왜성을 쌓고 대기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양측은 서로 자국이 유리한 입장에서 화의교섭을 하려 하였다. 일본은 한반도의 남부지방을 내줄 것, 감합무역을 부활할 것 등을 명나라에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요구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3년에 걸친 화의교섭은 결렬되었다. 남해안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은 1597년 다시 전쟁을 시작하였다.

일본군은 조선의 남부지방만이라도 차지하기 위해 전라도 지방을 집중 공략하였다. 일본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물리쳤고 일본 육군은 전라도 각 지역을 함락시키면서 방화, 약탈, 학살을 자행하였다. 일본군은 전공을 증명하기 위하여 조선인들의 코나 귀를 베어 일본에 보냈고, 남녀노소를 불분하고 마구 잡아 노예상인에게 팔아넘겼다. 그러나 곧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이 직산 소사평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면서 북상을 저지하였고 잠시 파직 되었던 이순신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 하면서 일본군은 다시 남해안으로 물러났다. 일본군은 극심한 군량 부족 상태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이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은 이를 극비에 부치고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이순신은 노량에서 철수하는 일본군을 쫓아 대파하였으나 전투 중에 전사하였고 7년 전쟁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편집] 전쟁 결과가 3국에 미친 영향

[편집] 조선에 끼친 영향
거듭된 전쟁으로 인한 농지의 황폐화, 국가질서의 문란과 더불어 관리와 토호들의 부정행위는 민중과 국가 재정을 모두 궁핍하게 만들었다. 전후 대책으로 실시된 군비확장과 시설복구에 지출이 계속 증가하자, 대대적인 토지 조사를 실시하였으나, 2번에 걸쳐 청나라가 침범해 왔기 때문에 농지를 전쟁 이전 수준으로까지 회복하는 데에는 상당한 기간이 걸렸다. 농민에게는 과대한 부담이 강요되어 농민의 농지 이탈 현상이 증가하였다. 조정에서는 민생을 안정시키고 관리들의 부정을 방지하고자 조세제도를 전면적으로 개편하였다.

전쟁 중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던 문서들이 모두 불태워지고, 공명첩이 발행되면서 사회절서 유지의 근간인 신분제도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또 궁궐과 서원 등 중요한 건축물과 많은 서적, 미술품 등이 소실되거나 약탈되었다. 사상적으로는 전쟁 중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인물들을 숭배하는 풍조가 고양된 반면, 일본군에 의한 피해로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일본인을 더욱 멸시하고 적대시하는 경향이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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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들의 활약

유학자, 농민, 승려 등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의병장으로는 사명대사, 곽재우, 정인홍, 고경명, 조헌, 김시민, 서산대사 등이 있다.

 

☆사명대사: 임진왜란 때 금강산에서 활약한 승병장으로, 유성룡, 권율 부대와 함께 큰 승리를 거두고, 포로로 잡혀갔던 조선의 백성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서산대사의 휘하에 있었다고 합니다.

 

☆곽재우: 군사 1,000여 명을 모아 낙동강을 따라 왕래하면서 왜군을 무찔러 경상 우도의 여러 성을 수복하였다. 전쟁터에서 늘 붉은색 옷을 입고 싸워서 '홍의 장군'이라고 불리며 의령, 창녕, 친주 등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정인홍: 손인갑장수와 왜적을 무찔렀다.

 

☆고경명: 6,000여 명의 의병을 일으켰으며 남원일대에서 왜적을 무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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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조선에서 일어났습니다

의병을 이끄는 지도자들은 일어났고 이순신장군은 자꾸 승전보를 전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20만의 대군이 행주산성을 공격할 때에 승병과 의병들은

적들을 섬멸하여 승리를 이끌고

권율장군이 나머지 군들을 죽였습니다

이렇게 의병의 등장은 조선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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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 침략 :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길을 열어달라고 핑계로 1592년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여 침략을 시작하였다.
- 조선군의 패배와 왜군의 북상 : 부산과 동래에서 조선군은 힘껏 싸웠으나 방어에 실패하였고 왜군은 충주 전투에서 승리한 후 서울까지 함락하였다. 왜군은 계속해서 평양과 함경도 지방까지 북상하여 한반도 전체를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였다.

<수군의 활약>

- 수군의 승전 : 이순신 장군은 적의 침략에 대비하여 거북선을 만들고, 전함과 무기를 정비하였으며, 수군을 훈련시키고 군량을 저장하여 전쟁에 대비하였기 때문에 왜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일본 수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 전법으로 크게 물리쳤다. 이것이 한산도 대첩이다.

<의병의 활약>

- 의병의승리 : 전국 각 지역에서 유생, 양반, 농민, 승려 등이 의병을 조직하여 왜군과 맞서 싸우기 시작했으며, 의병은 자기 고장의 지리에 밝았으므로 지형을 잘 이용할 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자연 조선에 알맞은 무기와 전술을 활용하여 적은 희생으로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 대표적 의병장 : 곽재우, 조헌, 고경명, 사명당, 서산대사 등
- 임진왜란을 막아 낸 의의 : 관군, 의병, 승병 등 국민의 단결된 힘으로 국가의 어려움을 극복하였으며, 외적을 막아 냄으로써 민족의 생명과 문화를 지켰다.

이순신 장군때 의병들의 활약

이순신 장군때 의병들의 활약좀 가르쳐주세요 <임진왜란> - 침략 :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길을 열어달라고 핑계로 1592년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여 침략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대한 숙제...

... 만약 임진왜란이면,, 이순신 장군때←이것 처럼 간단하고... 활약으로 보급로가 끊기자 전세는 조선쪽으로 기울였습니다. 명에서 이여송의 구원병이 오고, 전국에서 의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