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학년 사회문제 입니당~ 급해요ㅠ(오늘까지)

6학년 사회문제 입니당~ 급해요ㅠ(오늘까지)

작성일 2010.03.17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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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바로 문제  낼게요 똑똑한 지식인들 부탁 드립니당~

 

1.발해의 건국

2.발해의 민족구성

 

발해 문화의 특징 3가지

 

발해의 역사적 의의 2가지

 

해동성국(海東成國)의 뜻을 알아보자

 

무역왕 장보고

 

1. 이름에 대하여

2.당나라에서

3.신라로 돌아와서

4.삼행시 짓기

 

통일 신라 후 신라의 발전 모습을 조사하여 역사 신문 기사를 써 보자.(정치,사회,문화,경제,등 한 가지 선택하기)

 

김유신과 김춘추

1.김유신

2.김춘추

 

신라의 통일과정

삼국의 통일 과정을 연표로 나타내어 보자.

 658    660                668              675  676  
 내용


 

삼국통일의 원동력3가지

 

삼국통일의 의의

 

통일 신라의 발전과 쇠퇴3가지

 

꼭 부탁드립니다~ 문제가 많으니까 95드릴게요 ㅠㅠ 적지만 받아주세요 100드리고 싶지만 백이 없어요

ㅠㅠ

내공 냠냠 신고ㅠ 꼭 부탁드립니다늦었어요ㅠㅠ


#6학년 2학기 사회문제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홍익인간의 뜻을 자세히좀 알려주세여.

-홍익인간은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가사에서 1절에서 볼수있는 단어죠

홍익인간은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이거죠↓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뜻으로, 국조(國祖) 단군(檀君)의 건국이념이며, 고조선 개국 이래 한국 정교(政敎)의 최고 이념.<-백과에서 배낌.

이 말은 《삼국유사》의 고조선조에 나오는 말이다. “옛날 환인(:하느님이란 뜻)의 서자 환웅()이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세상을 탐내어 찾았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아래로 삼위태백()을 굽어보니 인간을 널리 유익하게()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천부인() 3개를 주어 천하로 보내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부하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이름하여 신시()라 하였다. 이를 일러 ‘환웅천왕’이라 한다”는 대목이 있다. 이 환웅천왕과 곰[]이 사람으로 화()한 웅녀()와의 결혼에서 태어난 아들이 단군 왕검()이라고 하였다.

홍익인간은 이 때부터 한국의 건국이념이 되었고, 1949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민주헌법에 바탕을 둔 교육법의 기본정신이 되기도 하였다. 곧 교육법 제1조에는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구유하게 하여 민주국가 발전에 봉사하며 인류 공영()의 이상 실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것도

2.그리고 고구려의 역사 진행순서도여

-아 이거 엄청나게 긴대

각각의 왕들의 업적과 무슨왕이 있었는지 알려줌

1대왕-동명성왕,주몽,동명왕,추모왕(절대 4명 아님 ㄱ- 어떻게 말하는지 4개만 말한거임..)
주몽은 2006~2007년때 나온 드라마도 있는데..

봤다면.. 아실겁니다

대표적으로 뽑자면

1.주몽이 알에서 태어났다2.주몽이 일행과 같이 강 건널때 하백한테 빌어가주고 거북하고 물고기가 올라온

전설도 있죠3.참고로 고구려 도읍지 졸본성->국내성->평양성임 사회에서는 국내성이 먼저 나오는데

주몽때 졸본성이 였음..(저 6학년임.)

2대왕 유리왕

주몽에서 약간 봤었을겁니다

유리가 소나무 일곱돌에서 칼 한쪽 찾아본 일화

알것임...

유리는    주몽과 예씨한테서 나온 사람임

주몽과 소서노 한테서 태어난 사람은

장남-비류 차남-온조가 있습니다

원래 소서노는 우씨라는 사람과 결혼했는데

죽어서 과부가 됐삼

그래서 다시 주몽과 재혼함..

아 그리고 유리왕은 황조가라는 시 지었삼

차희와 또 여자 한명있는데 둘이 싸워가주고 결국 차희가 궁궐을 떠났는데

유리왕은 그 소식을 듣고 차희(아 근데 차희 맞나?) 를 찾으러 가는데

결국 그녀는 돌아오지않아 유리왕이 지은 시

3대왕 대무신왕

이건 분명히 알것임..

바람의나라 드라마를 봤으면.

바람의나라는 대무신왕 일대기를 그린것이며

자명고에서도 나옵니다...(자명고는 호동이 주인공이죠)

대무신왕(무휼)은

주몽-예씨

유리-??(저도 모름)

도절 해명 무휼 등등

이렇게 주몽의 손자고 유리의 아들이죠

4대왕 민중왕

민중왕은 별로 설명 할게 없삼(재위 5년밖에 안 했소..)

아 있다

                       주몽-예씨

유리-??(모름)

도절 해명 무휼 색주(무휼 아우)

(많은 어려움만 겪다가 5년만에 병으로 죽음..)

5대왕 모본왕

모본왕은 처음엔 선군이었지만 한나를 이겨 먹자

자신은 자만심에 빠져 밤마다 신하를 불러 배게로 삼았습니다

단 한치의 움직임이 있었으면 그자리에서 호위장군이나 장수를 불러 그냥 죽었죠

하지만,고구려는 말종시대가 아니였습니다

두로라는 신하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친한친구가 있었는데 그를 찾아가 맨날 하소연 했죠

두로는 매일 왕의 배게가 되었어야 했죠.

하지만 친한친구의 말로

두로는 충신답게 왕을 유인한다음 충의롭게 왕 죽였습니다

6대왕 태조왕

태조왕은 119세까지 장수하신 고구려 최장수왕입니다(무려 장수왕보다 20년 더살음)

초반에는 태후가 섭정하여 별 어려움 없이 해냈습니다

성년이 되서도 말이죠

하지만 그에겐

왕자 수성이 있습니다

왕자 수성은 난폭했습니다

이제 이 이야기는 둘째 치고

태조왕의 업적-동옥저를 부셔버림(한마디로 멸망 시킴) 

이후 태조왕은 갈사국 조나국 주나국 등을 쳐서 멸망시킵니다

그후 선배제도를 실시하는데 동맹때 여는 행사입니다 무술시합이죠 2번째 종목은

활쏘기입니다 셋째 앙감질입니다 앙감질은 한발을 들고 한발로만 뛰는거죠 요즘 시대로 말하자면

깽깽이..

이제 둘째로 넘어갑니다

왕자 수성은 처음엔 태조왕의 명령을 따르다가

자신이 70살까지 되는데도 태조왕이 살자 태조왕을 별궁에 가둡니다

그리고 자신은 왕 자칭하다가

고구려의 충신 명림답부에게 k.o

7대왕 차대왕

왕자수성입니다

자신이 70살까지 쳐먹자 태조왕을 별궁에 가두고

자신은 악한 짓을 많이하고 하얀 여우를 사냥하다가 점쟁이가 불길한 징조라고 하자

차대왕은 그를 베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최후는

명림답부에게 k.o

8대왕 신대왕

신대왕은 77살에 즉위해서 90살 넘게 즉위하신 왕입니다(그러고 보니 고구려왕들은 다 장수 했네)

신대왕은 죄인들을 모두 풀어주고 차대왕의 아들인 태자 추안까지도 용서했습니다(아주 인자로움)
9대왕 고국천왕

왕후 우씨와 결혼한 고국천왕

안류를 불러서 을파소를 데려온 업적도 있죠

10대왕 산상왕

왕후 우씨와 재혼한 인간입니다..

왕비는 고국천왕의 형인 발기를 찾아가 왕위를 줄려고  했는데

결국은 안되자 연우를 찾아가 결혼함

나머지는 다 복사함.. 아 손아파.

고구려 왕들의 업적......

 

 

동명성왕 →  고구려의 시조. 설화의 내용이 주된 인물 .  부여에서 탈출하여, 졸본을 도읍으로 삼는 고구려를 건국했다. (기원전 1세기)

(고주몽.)

 

 

고국천왕→  고구려 8대왕. 을파소를 재상으로 세워 진대법을 실행 하였다. 왕위 부자 상속세 확립, 5부족을 행정적 5부로 개편했다. (기원전 2세기)

 

 

미천왕→   왕손이 었으나 전대왕이 였던 봉상왕의 폭정을 피해 도망쳐 다녔다. 후에 왕위에 올라 대대적이 영토전재을 하고,  북위와 대립한다.

              후에 북위가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갈 정도로 북위를 위협했다. 낙랑군 서안평 점령 (기원전 4세기 초)

 

소수림왕→ 율령(현재 현법)을 반포하고, 태학(현재 대학)을 설립했다. 불교를 수입하였다. (4세기 후반)

 

 

광개토대왕→ 일명 "영락제" 대외적인 영토전쟁을 크게 하였고, 그 결과 고구려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졌다. 막강한 군사력으로 북경을 점령. 신라에 쳐 들어온 왜구(현

                 재 일본)를 격퇴 시켰다. (5세기 초)

 

장수왕→  선왕이였던  광개토대왕의 땅을 잘 지키고, 한반도의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남진정책을 강력하게 실행하였고,  외교정책을 잘 펼쳤다. 평양천도 백제를 공

             격해 개로왕을 죽이고, 한성응 함락시킴 한강 이남 점령 (5세기 후)

보장왕→ 업적은 크게 없으나 당태종의 침략을 안시성에서 양만춘이 격퇴. 연개소문이 죽고, 연개소문 아들들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나.당 연합군의 침략으로 멸망

            (7세기 후)

3.고조선의 주변 나라를 알려주세요

이건 지도를 보면 알것입니다

중국땅에는
한이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아래에는 진국이라는 나라가 아닌 50여개의 부족이 있는데 그들중 백제 신라 가야가

전부 싹쓸이합니다

4.고조선은 무엇으로 유명한가요.......

아 고조선은

우리나라 5000년 역사중 가장 먼저 세운 나라입니다

5.고조선은 무엇으로 발달되었을까요

./.....(할말 잃음..)
고조선은

청동기겠죠,...<-이것만 알음 is true!!

6.고조선은 왜 망했을까요?
오 이건 아는거임

고조선은 처음에는 강력했습니다

하지만 준왕은 사치가 심하여 위만을 너무 믿다가

위만이 왕위를 찬탈정도로 해서

위만조선이 세워지지만

그의 손자가 나라를 말아먹진 않았습니다

단지 항복 하지않으려는 집념으로 인해 튼튼하던 평양성은 무너지고 우거왕은 그대로 암살 당하여

간신은 한무제에게 끌려가 나라를 배신한 이유로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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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만

국호 [편집]

계림, 사로, 서라벌 등으로도 불렸으나 지증 마립간 4년 504년 국호를 '신라'로 확실히 하며 왕에 대한 칭호를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에서 "왕"으로 정했다. 이 일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4년 겨울 10월에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시조께서 나라를 창업하신 이래로 국호가 정해지지 않아 혹은 '사라'(斯羅)'라 일컫고, 혹은 '사로'(斯盧)라 일컬었으며, 혹은 '신라'(新羅)라고도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신'이라는 글자는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나'라는 글자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으로 생각해온즉, 이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 예로부터 나라를 가진 이들을 보면 모두 '제'(帝)나 '왕'(王)을 일컬었거니와,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워 지금에 이르기까지 22세 동안 단지 방언으로만 왕호를 일컫고 존귀한 칭호를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이제 여러 신하들이 한 뜻으로 삼가 '신라 국왕'이라는 칭호를 올리나이다" 라고 하니, 왕이 그대로 좇았다.

역사 [편집]

한국의 역사 (연표)  v  d  e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환인
환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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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
진국
삼한

 



 
 
 


 
 
 


   

   
 


고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삼별초의 항쟁
홍건적의 고려 침공
조선
역대국왕 / 조선왕조실록
임진왜란 / 병자·정묘호란
경복궁·창덕궁·종묘·화성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정기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신라의 국가 성립 [편집]

신라는 처음 진한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하였는데,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이민 집단의 결합으로 기원전 57년 건국되었다. 이후 동해안으로 들어온 석탈해 집단이 등장하면서 박, 석, 김의 세 가문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군주)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4세기 내물 이사금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다. 이것은 왕권이 안정되고 다른 집단들에 대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내물 이사금 때에는 해안가에 나타나던 왜구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 후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한편, 고구려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성장해 나갔다.

신라의 정치적 발전 [편집]

신라는 내물 마립간 이후 고구려의 간섭을 받았으나, 5세기 초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5세기 말 신라는 6촌을 6부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면서 발전하였다.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군주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또한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을 복속시키기도 하였다. 국호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는 지방의 지배 세력을 확실하게 장악하여 갔다.

이어 법흥왕은 병부 설치, 율령 반포, 공복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또한 골품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김해 지역의 금관 가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다.

신라의 팽창 [편집]

신라는 6세기 진흥왕 때에 이르러 내부 결속을 다지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이를 토대로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는 이후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신라가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편집]

고구려수나라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신라에서는 신흥 귀족김춘추김유신과 제휴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어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서서히 주도해 나갔다.

그러나 고구려의 반격을 우려하여 백제가 침공해 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회담이 결렬되자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어 백제를 멸망시키려 하였다.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했다. 이미 내부적으로 정치 질서의 문란과 지배층의 향락으로 국가적 일체감을 상실한 백제는 결국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당시 고구려는 잦은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했고, 더구나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하여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결국 고구려도 당나라의 공격으로 668년 멸망하였다.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결국 신라를 이용하여 삼국의 영토 전체를 장악하려는 야심 때문이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과 연합하여 당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한편,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이어 남침해 오던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나라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나라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었다(676년). 하지만 옛 고구려의 영토인 한반도 북쪽과 만주 일대를 차지하지 못하고 발해가 들어서면서 불완전한 통일을 이룩하였다.

신라의 발전 [편집]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 신라는 그 영역의 확대와 함께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대외 관계가 안정되어 생산력도 크게 증대되었다. 또한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도 안정되었다.

백제와 고구려 멸망을 전후하여 나타난 중요한 정치적 변화는 왕권이 전제화되었다는 점이다. 태종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 군주로서 통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이때부터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만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나아가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다. 이로써 통일 이후 진골 귀족 세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전제화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정치 변동과 호족 세력의 성장 [편집]

8세기 후반 신라에서는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중앙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이 치열해지고,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에서 군사력과 경제력 그리고 새로운 사상을 갖춘 호족 세력이 성장하였다.

진골 귀족들은 경제 기반을 확대하여 사병을 거느리고 권력 싸움을 벌였다. 혜공왕이 죽고 상대등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진골 귀족들 사이에는 힘만 있으면 누구나 군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이에 경제력과 군사력을 확보한 귀족들은 왕위 쟁탈전을 벌였다.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연합적인 정치가 운영되었으며, 시중보다 상대등의 권력이 더 커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녹읍을 토대로 한 귀족들의 지배가 유지되는 한편, 대토지 소유가 확대되었고, 농민들의 부담은 무거워졌다. 자연 재해가 잇따르고, 왕족과 귀족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면서 백성들에 대한 강압적인 수취가 뒤따랐다. 살기가 어려워진 백성들은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거나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중앙 정부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높아지고 지방에서 반란이 잦아졌다.

9세기 중엽의 문성왕(文聖王) 이후 중앙 귀족은 지방 세력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왕위 쟁탈을 위요(圍繞)한 정쟁(政爭)을 식히고 점차 타협하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한편 골품제로 말미암아 중앙의 정치 무대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막힌 이들 지방 세력은 중요한 활동 무대를 해상무역(海上貿易)에서 찾게 되었다. 이리하여 공적인 조공(朝貢)의 형식으로 행해지던 대외무역은 점차 민간무역에서 주도하였다. 이들은 당뿐만 아니라 일본과도 활발히 교역했다. 그러나 당과의 무역이 가장 성하여서, 신라인의 왕래가 빈번한 산둥반도(山東半島)나 장쑤성(江蘇省) 같은 곳에는 신라방(新羅坊)이 생기고, 이를 관할하기 위한 신라소(新羅所)라는 행정 기관이 설치되었다. 또 거기에는 신라원(新羅院)이라는 사원이 세워졌는데, 장보고가 문등현 적산촌(文登縣赤山村)에 세운 법화원(法花院)은 가장 유명한 것이었다.

지방 세력가들의 민간 무역이 성행하는 반면 해적(海賊)의 출몰이 잦았다. 이러한 해적의 출몰은 성행하는 해상무역에 큰 타격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 해상의 군진(軍鎭)이 설치되었다. 신라는 본래 변경의 수비를 위하여 육지에 설치하던 군진(軍鎭)을 해적들의 활동이 심한 해안의 요지에 설치하여 이를 방비하였다. 청해진(淸海鎭 : 완도)·당성진(唐城鎭 : 남양)·혈구진(穴口鎭 : 강화) 등이 그것이며, 그 중 흥덕왕 3년(828년) 장보고(張保皐)가 설치한 청해진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다.

장보고는 해적 출몰의 방비는 물론 국제 무역을 하여 황해의 왕자가 되었고, 다시 중앙의 정치에도 간여하였다.

장보고의 경우와 유사하게 지방에서 일정한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대를 이어가며 행사하는 세력가들이 이 시기에는 수없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보통 성을 쌓고 스스로 성주(城主)라고 자처하였다.

9세기 이후에 나타난 신라 사회의 이러한 커다란 변화는 상업 발달에 따른 대상인(大商人)의 대두와 대토지 소유의 확대로 점차 구체화되었다. 중앙 집권 체제의 약화에 따라 지방의 토호와 귀족들은 점탈 또는 매매의 방법으로 농장을 확대하여 대지주로 성장하였다. 또 신라 지방 행정의 말단인 촌락의 인민을 통제하던 촌주(村主)도 역시 토지와 인민을 다스리며 세력을 확장해 갔다. 약화된 국가 권력은 이들 지방 세력을 규제할 수 없었다. 한편 국가의 비호 밑에 발달한 사원도 면세(免稅) 특권을 가지고 토지를 겸병(兼倂), 농장을 확대해 갔다.

한편,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가 귀국한 6두품 출신의 유학생들과 선종 승려들은 신라의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진골 귀족들에 의하여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없게 되자 은거하거나 지방의 호족 세력과 연계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하였다.

후삼국의 성립 [편집]

10세기로 들어오면서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과 궁예는 신라 말의 혼란을 이용하여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신라는 그 지배권이 일대로 축소되어 다시 삼국이 정립하는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었다.

신라의 멸망 [편집]

고려 태조는 실각한 전(前) 임금인 궁예와는 달리 신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우호 정책을 내세웠다. 그의 신라에 대한 우호 정책은 신라인들을 회유하는 데 유용하였다. 실제로 태조는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고려군을 파견하여 신라군을 도와 후백제군과 같이 맞서 싸움으로써 신라인들의 신망을 얻었고, 그 결과 경순왕의 자진 항복을 받아내어 신라를 무혈 정복할 수 있었다.

통치 제도 [편집]

삼국 시대 [편집]

신라는 원래 육부(六部) 연맹에서, 출발 근처의 작은 부족 연맹을 병합·정복하여 국세가 점점 강성하여져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통일 신라를 이룩했다. 따라서 지방 관제도 그 국세의 확장에 따라서 확대·발전되어 갔다.

그리하여 지증왕 때는 주군(州郡) 제도가 처음 생겼고, 영토의 비약적 발전을 보게 된 법흥·지증왕 때에는 그 지방관제가 확립된 듯하다. 신라의 지방 행정조직은 군사조직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 중요한 곳은 주(州)로 삼았다. 주에는 군주(軍主)를 두어 그 영역의 군정을 맡아서 이를 통치하게 하였다. 군주 밑에는 여러 성주가 있었다. 또 《양서》신라전에 따르면, 신라가 동해 남단에 편재(偏在)할 당초에는 경주 부근에 6부(六部)[1]가 있었고, 기외(畿外)에는 52읍륵(邑勒)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영토가 확대됨에 따라 차차 주현 제도가 확립되어 갔다. 한편 중요한 곳, 즉 아시촌(阿尸村)[2]과 국원(國原)[3]에는 소경(小京)을 두고, 지방장관인 사신(仕臣)을 파견하여 다스렸다.

남북국 시대 [편집]

신라의 중앙 관제, 신라의 행정 구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삼국 통일 후 신라는 확대된 영역을 통치하기 위하여 보다 강력한 왕권 아래 정치 체제를 재정비해야 했다.

통일 사업의 단서(端緖)를 마련한 태종무열왕 때부터는 왕족의 혈연적 제약을 벗어나, 종래 ‘성골(聖骨)’의 신분만이 계승한 왕위는 이후 ‘진골(眞骨)’로 바뀌었고, 왕권이 강화되면서 골품제는 진골을 제1급으로 하여 확립되었다. 또 종래의 불교식 왕호 대신 중국식 칭호를 사용하여 왕권의 존엄성을 높였다.

모든 관료는 엄격한 신분 제약을 받아야 했고, 율령정치(律令政治)가 강화되면서 전통적인 족장 회의제의 정치 체제는 관료 정치의 성격으로 전환되었다. 따라서 중앙 관료를 감찰하는 기관을 위시하여 여러 중앙 관서가 분화·확충되었다. 골품제와 더불어 신라의 17관등(官等)의 관료 체제가 확립된 것도 실제로는 통일 신라 시대의 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최고의 행정기관인 집사부(執事部)가 진덕왕 5년(651년)에 설치되고, 형률(刑律) 사무를 관장하는 이방부(理方府)의 규범 60여 조가 새로 정해지고, 감찰 기관인 사정부(司正府)가 신설되었으며, 문무왕 때에는 주·군에 외사정(外司正)을 두어 지방 관리의 감찰을 담당케 하였다.

이 밖에도 조부(調部)·예부(禮部)·선부(船部) ·위화부(位和府)·사록관(司祿館)·병부(兵部)·창부(倉部)·승부(乘部)·예작부(例作府)·영객부(領客部) 등을 설치했고, 도성(都城)의 수축이나 사찰을 영조(營造)할 때마다 소관의 관서가 세워졌다.

왕권의 강화의 추세에 따라 군현의 명칭과 관호(官號)가 전면적 중국식으로 개편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관료 체제의 지향은 진골 신분의 반발 때문에 혜공왕(惠恭王) 때에는 다시 원래의 칭호로 환원되었고, 이후 진골 신분 간에는 치열한 왕위 쟁탈전이 야기되었는바 선덕왕·원성왕은 모두 그러한 싸움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즉위하였다.

신라는 영토 확장에 따라 신문왕 때 9주와 군현을 설치하여 갔고, 또 정치·군사상의 요지에는 5소경(五小京)을 두었다. 종래 전략상의 의의가 컸던 주의 장관인 군주(軍主)는 문무왕 때에는 총관(摠管)으로, 원성왕 때에는 도독(都督)으로 개칭되어 점차 지방 행정적인 임무를 맡게 되었다.

주 밑에는 군(郡)을 두고, 군 밑에 현(縣)을 두어, 장관을 각기 태수(太守)·현령(縣令)이라 칭했다. 이들 지방 장관은 관계(官階)상으로 일정한 제한이 있었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세력을 규합하기 위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귀족을 일정한 제한 밑에서 신라의 관료 체제에 흡수하였다.

군현 외에 신라에서 특수한 것으로는 일종의 천민 집단(賤民集團)인 향(鄕)·소(所)·부곡(部曲)이 있었다. 지방의 호족은 지방 관서의 하급 관리로 임명하고, 이들을 검찰하고 번상(番上)·시위(侍衛)케 하여 그들의 지방에서 발호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통일 후 신라는 강력한 군사 조직이 필요하자 종래의 6정을 개편·확충하고 중앙의 군단 조직인 9서당(九誓幢)과 지방의 군대 조직인 10정(十停)을 배치하여 복속민을 회유·견제했다. 또 5주서(五州誓)와 3무당(三武幢) 등을 두어 군제를 보충 내지 확충하였다.

통치 조직과 운영 [편집]

통일기에 접어들어 나타난 두드러진 변화의 하나는 민(民)에 대한 국가의 지배력이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삼국 후기부터 지방 통치 조직이 확대됨에 따라 전국의 민과 토지에 대한 국가의 지배력이 점차 강화되었는데, 이는 통일기에 들어서 제도적으로 정비되었다.

이 시기 신라 행정 조직의 말단 단위는 촌(村)으로, 이는 자연적인 경계에 따라 형성된 촌락이었다. 이런 촌을 단위로 3년마다 경작지의 면적, 호구, 가축, 과실수, 뽕나무 등이 조사되어 문서가 작성되었고, 그 기간 내에 변동된 사항도 그때마다 보고되어 문서에 추기(追記)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매년 조세와 역역(力役)이 부과되었다. 각 촌의 위에는 이 같은 자연촌락 몇 개가 묶인 행정촌이 있었으며, 거기에는 촌주(村主) 한 명이 있어 행정 업무를 도왔다. 촌주는 현지인이 되었는데, 삼국 시기와는 달리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각 행정촌은 상급 기관인 현에 귀속되었으며, 현은 군에 속하였다. 그리고 소경과 군에 직접 귀속된 촌들도 있었다. 군의 상급 기관이 주였고, 주와 소경은 조정에 직속되었다. 업무에 따라 중앙에서 군에 직접 하달하고 군에서 중앙으로 직접 보고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밖에 부곡(部曲)과 향(鄕)이 있었다. 이들의 성격에 대해선 일반 군·현의 주민과는 달리 천민 신분에 속하는 이들이 거주하던 지역을 특수 행정 단위화한 것이라고 보는 설이 있어왔는데, 근래에는 군·현으로 편제하기에는 규모가 작은 지역을 부곡과 향으로 삼았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각급 지방관은 중앙에서 파견하였고, 주와 군에는 각각 감찰관을 따로 파견하였다. 그리고 10정(十停)이라 하여, 전국의 주요 지점 열 곳에 군영을 설치하고 군대를 상주시켰다.

그밖에 지방민의 신앙과 의례(儀禮)의 대상이 되어온 전국의 주요 산과 하천에 대한 제사도 정비하여 중앙에서 간여하였다. 이들 제사는 지방민의 결집에 구심점이 될 수 있는 것이므로 이를 통제하고자 한 것이다.

중앙의 각급 관서들도 확충되었다. 그중 왕 직속의 집사부(執事部)가 행정의 중심기관이 되었다. 또 감찰기구인 사정부(司正部)가 강화되었는데, 이는 확충된 관료기구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앙군의 핵심으로 9서당을 두었고, 왕실의 경호를 맡는 시위부(侍衛府)를 개편, 강화하였다. 이들 기구는 왕권과 중앙권력을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물리력이었다.

삼국 시기 이래 관리에 대한 주된 보수 지급 방법은 녹읍(祿邑)을 주는 것이었다. 녹읍은 촌 이상의 단위로 주어졌고, 녹읍의 거주민들이 국가에 내야 하는 조세를 관리가 대신 받아가게 하였다. 이 같은 녹읍은 7세기 후반 신문왕대에 폐지되고, 대신 관리들에게 녹봉(祿俸)이 매달 지급되었다. 이는 녹읍지의 민으로부터 관리가 직접 조(租)를 받는 데 따른 민에 대한 경제외적 침탈을 막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이 역시 귀족들의 세력을 억제하고 중앙 집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런데 757년 다시 녹봉제가 폐지되고 녹읍제가 부활하였다. 이는 행정적인 번거로움과 함께 귀족 세력의 반발 등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듯 일단 외형상 고도로 중앙 집권화 된 통치 조직이 정비되어 국가 권력이 촌락 내부에까지 깊숙이 뻗쳤다. 하지만 국가 권력이 촌락 사회에 작용한 정도는 아마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삼국 시기와 비교할 때 집권력이 현저하게 강화되었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정비된 통치 조직을 바탕으로 왕은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귀족 회의는 존속하였으나 권능이 크게 약화되었고 왕은 전제군주의 면모를 지녔다. 유교적 정치이념이 전면에 내세워졌고, 충과 효가 주요한 덕목으로 강조되었다. 왕호도 유교식이어서, 6세기에서 7세기 중반까지의(中古期) 불교식 왕명과 차이를 보였다. 《삼국사기》에서는 신라사를 시기 구분하면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에서부터 그의 직계 후손인 왕위를 이어간 통일기의 1백여 년간의 시기를 중대(中代)라 하였다. 이런 구분은 상당히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관료 조직이 정비되고 왕권이 전제화되었지만, 중대의 집권체제는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먼저 관료제는 그 실제 운영에 있어 신분제에 의한 제약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관리들은 출신 신분에 따라 관직의 임용에서 차별을 받았고, 비(非)진골 신분의 인사들이 승진하는 데는 제도적 한계가 있었다. 중요 관서의 장은 진골 귀족만이 취임할 수 있었으므로, 자연 권력은 소수의 진골 귀족 출신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관리의 선발은 보편적인 제도 없이 궁술(弓術)과 추천에 의거해서 이루어졌다. 활이 주요 병장기였던 고대 초기에는 궁술이 개인의 능력을 나타내주는 기준이 될 정도의 의미밖에 없었다. 결국 관리가 되는 주된 길은 귀족의 천거를 받는 것이었다. 천거를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제한된 것일 수밖에 없었으니, 자연 중앙 정부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은 매우 좁았다.

이런 관리 선발 방식은 왕권과 중앙 정부의 정치적 지지 기반을 근원적으로 취약하게 만들었고, 한편으로는 진골 귀족의 정치권력을 증대시켜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7세기 후반 통일 전쟁과 새로운 체제의 정비 과정에서 이루어진 귀족층에 대한 대규모 숙청으로 귀족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지만, 점차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골 귀족의 세력이 재차 강화되었으니, 이는 신라 중대의 지배체제를 기저에서부터 위협하는 것이었다.

중앙 관제
관부 이름 직무 장관

집사성(執事省)
병부(兵部)
조부(調部)
창부(倉部)
예부(禮部)
승부(乘部)
사정부(司正部)
예작부(例作部)
선부(船部)
영객부(領客部)
위화부(位和部)
좌우이방부(左右理方部)
공장부(工匠部)

국가 최고 정무
군사(軍事)
공부(貢部 : 세금 관계)
창고 사무(倉庫事務)
교육 의례(敎育儀禮)
마정(馬政)
감찰(監察)
영선(營繕)
주선(舟船)
외빈 접대(外賓接待)
인사 사무(人事事務)
사법(司法)
공장(工匠)

중시(中侍)
영(令)
영(令)
영(令)
영(令)
영(令)
영(令)
영(令)
영(令)
영(令)
영(令)
영(令)
감(監)



사회 [편집]

삼국 시대 [편집]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한 시기가 늦은 편이었다. 그런 만큼 신라는 여러 부족의 대표들이 함께 모여 화백회의를 통하여 왕권을 견제하면서 정치를 운영하고 사회를 이끌어갔다. 특히 최고 신분층인 진골 귀족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그들은 중앙 관청의 장관직을 독점하였다. 6두품 출신은 학문적 식견과 실무능력을 바탕으로 국왕을 보좌하면서 정치적 진출을 활발히 하였다. 그렇지만 신분의 제약 때문에 중앙관청의 우두머리나 지방의 장관 자리에는 오를 수 없었다.

신라에는 혈연에 따라 사회적 제약이 가해지는 골품제도가 있었다. 골품은 신라 사회에서 개인의 사회활동과 정치활동의 범위까지 엄격히 제한하였다. 관등 승진의 상한선이 골품에 따라 정해져 있었으므로 일찍부터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골품제도는 가옥의 규모와 장식물은 물론, 복색이나 수레 등 신라 사람들의 일상생활까지 규제하는 기준으로서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귀족들은 금일택이라 불린 저택에서 많은 노비와 사병을 거느리고 살았으며, 불교를 적극 후원하였다. 여기에 드는 비용은 지방에 소유한 영지와 목장 등에서 나온 수입으로 충당하였다. 귀족들은 국제 무역을 통하여 수입한 진기한 사치품을 선호하였다.

신라 청소년들은 화랑 활동을 통하여 전통적 사회 규범을 배우고 여러 계층이 같은 조직 속에서 일체감을 갖도록 하여 계층 간의 대립과 갈등을 완화하는 구실을 하였다. 이들은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제펀의식을 행하고 사냥과 전쟁에 관하여 교육을 받음으로써 협동과 단결 정신을 기르고 몸과 마음을 연마하였다. 화랑은 신라가 정복 활동을 강화하던 진흥황 때에 국가 차원에서 그 활동을 장려하여 조직이 확대되었다.[4]

백성들은 하지 못하는 것이 상당했는데,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4두품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방의 길이와 너비가 15을 넘지 못한다. 느릅나무를 쓰지 못하고, 우물천장을 만들지 못하며, 당기와를 덮지 못하고, 짐승 머리 모양의 지붕 장식이나 높은 처마 등을 두지 못하며, 이나 구리 등으로 장식하지 못하고, 또 보를 가설하지 못하며, 석회를 칠하지 못한다. 대문사방문을 만들지 못하고 마구간에는 2마리만을 둘 수 있다.

남북국 시대 [편집]

삼국 통일 후 관료 체제가 확충되는 데 따라서 토지 제도상으로도 획기적인 변혁이 일어났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일부 귀족·관료들에게 식읍(食邑)·사전(賜田)의 형식으로 토지·인민 또는 노비가 분배되었다. 한편 관리에게 특수한 경우에 세조(歲租)가 지급되는 수도 있었으나, 일반적으로는 대소(大小) 족장이었을 관리들은 토지와 인민을 녹읍(祿邑) 형식으로 사여(賜與)받아, 그들 원래의 생활 기반을 그대로 지배할 수 있게끔 보장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왕권의 강화와 관료 정치화의 추세에서 이와 같은 토지 사여 형식은 재편성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문왕 때(689년) 내외 관료의 녹읍을 폐지하고 그 대신 일종의 녹봉제(祿俸制)로서 관료전(官僚田)[5]을 급여하였다. 성덕왕(聖德王) 때에는 정전제(丁田制)가 실시되었다. 또한 최근에 와서 발견된 신라의 민정 문서(民政文書)를 통하여 수취 체제 확립을 위한 신라 왕조의 노력을 엿보게 해준다.

신라의 수도인 금성(경주)은 정치 중심지로서 인구가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국내 교역은 물론 중국·일본과의 공·사무역(公私貿易)이 성행하여 수도는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통일 이전인 5세기 말에 조정에서는 상인으로 하여금 좌상점포(坐商店鋪)[6]를 개설케 하였으나, 효소왕(孝昭王) 때에 이르러서는 수도의 동·서·남·북에 시전(市廛)을 갖추게 되고 시전(市典)이라는 관청을 두어 이를 감독케 하였다.

지방에는 행상(行商)에 의한 향시(鄕市)가 일찍부터 벌어져서 물물교환이 행해졌다. 한편 해상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관무역은 물론 사무역(私貿易)이 더욱 성행하였다.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교역된 물화(物貨)는 각종 금은세공품(金銀細工品)·직물을 위시하여 신라의 인삼, 당나라의 (茶)와 서적 등이었다. 왕실·귀족과 관서의 수요 물품은 ··부곡민의 노역으로 운영된 관영 수공업(官營手工業)으로써 생산되었고, 마포(麻布)나 견직물은 농민으로부터 징수하였다.

농민 생활 [편집]

평민의 대다수는 농민이었고, 소수는 상업수공업에 종사하였다. 농민은 촌락 단위로, 연령에 따라 6등급으로 구분되었다. 정(丁)과 정녀(丁女)인 20세에서 59세 사이의 남녀를 중심으로, 그 이하의 사람들을 조자(助子)·조여자(助女子), 추자(追子)·추여자(追女子), 소자(小子)·소여자(小女子)로, 그리고 60세 이상은 제공(除公)·제모(除母), 노공(老公)·노모(老母)로 분류되었다. 이런 분류에 따라, 노동력 징발 시 각 촌에 부과될 인원이 정해졌다.

촌락 내에 있는 농민의 토지는 논과 밭으로 구분되어 각각 결부법(結負法)에 따라 면적이 조사되었으며, 이에 따라 조세 부과량이 정해졌다. 결부법은 절대 면적을 기준으로 조세 부과량을 산출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수확량을 기준으로 하였다. 결부법에서의 계산 단위는 결(結)·부(負)·속(束)·파(把)[7]이다. 파는 한 움큼의, 속은 한 묶음의, 부는 한 짐의 곡식 줄기를 뜻하였으며, 또한 각각 10배씩 증가하였고 다만 100부가 1결이었다. 나아가 각 단위는 곧 그만큼의 수확을 내는 토지 면적을 가리킨다. 아직 비료를 사용하지 않았던 시대이므로 농토에 따라 비옥도의 차이가 컸고, 산과 계곡이 많은 자연지형이었으므로 절대 면적을 기준으로 한 농토의 측량이 여의치 않았던 조건에서, 비교적 손쉽게 면적을 산출할 수 있고 조세 부과에 나름의 합리성을 지닌 방법으로 고안된 것이 결부법이었다.

통일 신라 시대에 들어서 이 같은 결부법에 의거한 양전 사업(量田事業)이 널리 이루어졌다. 이후 결부법은 농업 기술의 발달과 농업 생산력의 증대에 따라 면적 산정 방법이 수차에 걸쳐 보완되면서 19세기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당시 농토는 전반적으로 상경화(常耕化)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농토, 특히 그중 밭의 경우는 2~3년에 한 번 경작되었다. 농민들은 조세를 내고 부역을 지는 외에 그 지역에서 나는 특산물을 현물세로 내야 했다.

토지는 국유제가 표방되었고, 722년에 백성에게 토지인 정전(丁田)을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때 황무지와 같은 일부 토지를 농민에게 분여하였을 수는 있겠지만, 전국적인 토지 분급이 행해졌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서원(西原)[8] 소경 부근의 네 개의 촌락에 관한 기록을 담은 장적 문서(帳籍文書)에서는 ‘연수유전답(烟受有田沓)’이라 하여, 농민이 가지고 있는 땅을 모두 국가에서 분급한 것처럼 표현하고 있으나, 이는 전국의 모든 땅은 왕의 것이라는 왕토사상(王土思想)에 따른 표현일 뿐이다. 왕토사상은 국가에서 조세 수취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한 명목이었고, 실제로는 토지의 사적 소유가 널리 행해졌다. 단 농민의 토지 소유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

노비 [편집]

당시 일반 농촌에는 노비가 많지 않았다. 위의 장적 문서를 보면, 전체 인구 462명 중 노비가 25명뿐이었다. 그리고 노비 중 정남과 정녀가 19명이었고, 3년간 태어난 노비의 수는 매우 적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노비가 자신의 호(戶)를 이루며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들은 외거 노비(外擧奴婢)가 아닌 솔거 노비(率居奴婢)였을 것이며, 당시 일반 농촌에서 노비의 노동력은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렀을 것이다.

노비의 주된 소유층은 진골 귀족이었고, 왕실이 최대의 노비 소유자였다. 숫자가 과장된 감이 없지 않지만, 《신당서(新唐書)》에서는 신라의 재상가(宰相家), 즉 진골 귀족이 노비를 3천 명이나 소유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당시 귀족들은 각지에 농장과 목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신이 소유한 노비를 부려 그곳에서 경작과 가축 사육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경우 노비의 예속 형태는 외거 노비였다. 지역적으로 노비가 제일 많이 있었던 곳은 역시 수도였다. 서른다섯 개의 금입택(金入宅)과 같은 귀족의 대저택이 있었고, 그런 집에는 다수의 노비가 있었다. 수도에 사는 귀족의 노비들은 가내 노동과 귀족의 사치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일들에 종사하였고, 일부는 수공업품 생산에도 종사한 것으로 보인다. 왕실과 사찰이 소유한 노비의 경우도 예속 형태가 비슷하였을 것이다.

수공업과 상업 [편집]

신라의 국가 체제 정비와 함께 종래의 재지(在地) 수장층(首長層)이 소유하고 있던 수공업 생산 수단과 기술 인력이 국가와 왕실 및 일부 귀족에 귀속되었다. 지방 장인(匠人)들의 경우 생산품을 특산물 현물세(調)의 형태로 공납하였고, 중앙에선 이들을 통제하였다. 이러한 면은 통일 신라 시대에 들어서 더욱 강화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 신라의 수공업은 장인들의 소속처에 따라, 내성(內省) 산하의 궁실 수공업, 주요 관서에 귀속되었던 관영 수공업, 귀족들의 사영 수공업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각 장인들의 처지는 국가의 통제하에서 신분화되었다. 장인 중 하급 관등을 받아 골품을 지닌 이들이 있었고, 기술 노역만 제공한 평민도 있었다. 노비로서 생산에 참여한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궁실 수공업의 주된 노역자였다. 궁실 및 관영 수공업은 국가와 왕실에 소요되는 물품을 할당받아 생산하였다. 귀족의 사영수공업도 주로 골품제의 의례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생산하는 등 귀족집안 자체의 수요에 부응하는 형태였다. 이와 같이 수공업은 시장을 상대로 한 상품 생산의 형태로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이외에 일반 농민의 가내 수공업은 농업과 함께 결합되어 농민층 자신의 수요를 충당하는 형태였다.

그런데 통일 이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상업이 발달해갔다. 긴 평화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농업 생산이 늘고 계층 분화가 진전되었으며, 지역 간의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인구의 이동이 있게 되고 수도의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그런 가운데 상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상품에 대한 수요가 커졌으며, 일부 상품의 질도 고급화하였다. 통일 신라 시대 초기 당나라와의 조공 무역에서 신라가 보낸 물품은 주로 자연산 특산품이었는데, 이후 점차 고급 비단과 금속 공예품 등이 많아졌다. 일본과의 교역에서는 금속 제품과 모직물 등을 수출하고, 풀솜과 견직물을 수입하였다. 당시 고급 물품은 주로 수도의 궁실 및 귀족에 소속된 공장(工匠)들이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조정도 상업을 장려하여, 수도에 시장이 두 곳 더 개설되었다. 당시 상업에 주요 교환매체였던 견포(絹布)의 길이를 정하는 등의 조치는, 상업 발달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한편 불교계에서도 승려의 상행위는 금지하였지만 일반 신도들의 상업 활동은 인정하였다. 그리고 유가론(瑜伽論)의 ‘공교명사상(工巧明思想)’이 유포되었는데, 이는 배우고 익힌 기술로 적은 노력을 들여 많은 재보(財寶)를 만들어 모아, 이것을 여러 중생에게 베풀어 이익을 줄 것을 강조한 사항이었다. 이는 승려들이 장인으로 활동하는 것을 정당화해 줄 수 있는 논거로 받아들여졌고, 나아가 장인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제고하는 데 기여하였다. 실제 당시 유명한 승장(僧匠)이 적지 않았고, 불교 사원에서도 수공업이 행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8세기 후반 이후 집권 체제에 동요가 생기고 국가의 통제가 약화됨에 따라, 상업 활동이 한층 활발해졌다. 해외 무역은 조공 무역 외에 점차 민간인이 행하는 사무역이 성행하게 되었다. 새로운 부원(富源)을 찾아, 그리고 좀 더 자유로운 인간관계하에서 더 나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바다로 나가 활동하였다. 또한 많은 수의 신라인들이 당나라에 건너가 해안 지대 각지에 신라방(新羅坊)이란 집단적인 거류지를 형성하였다. 신라 상인들에 의한, 신라와 당과 일본을 연결하는 중계무역도 성행하였다. 남부 중국의 무역항을 거쳐 수입된 동남아시아와 서남아시아산 사치품들이 수도의 귀족층 사이에서 애용되었고, 신라 상인들이 아랍 상인들과 직·간접으로 접촉하기도 하였다. 신라에 대한 지식이 아랍 지역에 알려진 것도 이 시기였다.

이렇듯 무역이 성행함에 따라, 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세력이 서부와 남부 해안지역에서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신라 하대에 기존의 국가질서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기도 하였다.

문화 [편집]

삼국 시대 [편집]

국보 91호 도제기마인물상.

신라의 문화는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중국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인 만큼 늦게 발전하였다. 반면에 나름대로 독자적인 문화도 발전하였다.

중국의 한자가 전래됨에 따라 사서가 편찬되었고 또한 언어생활에서 이중성이 생겨났다. 중국어와 고대 한국어의 언어 구조가 판이하고 한자가 표의 문자이기 때문에, 구어(口語)와 문어(文語)가 일치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불편함을 완화하기 위해 이두(吏讀) 또는 향찰(鄕札)이라는 표기법이 생겨나고, 그에 따른 문학도 발생한다.

고분 출토 유물로는 금관을 비롯해서 다양한 금속 공예품과 유리 제품·토기 등이 있는데, 신라 금관은 그 양식이 시베리아의 샤먼의 관과 통하는 점을 지니고 있어, 불교 수용 이전 시기 신라 문화의 성격의 일면을 전해 주고 있다. 유리 제품은 유리의 질과 제품의 양식이 서남아시아 지역의 것과 연결되며, 토기 양식 중에도 그러한 요소가 보인다.

또한 신라의 불교 문화는 특기할 만하다. 우선 왕명이 불교식으로 바뀌어 있는데, 법흥왕이나 진성여왕 등이 모두 불교식 이름이다. 한편 호국불교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남북국 시대 [편집]

황금 도금한 불국사의 불상.

통일 신라의 문화는 사회의 안정과 번영을 토대로 하여 삼국의 높은 문화유산을 집대성한 데 특징이 있다. 그러나 통일 신라의 문화가 그처럼 난숙할 수 있었던 것은 당나라 문화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통일 신라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이 된 불교는 지배층의 적극적 장려로 더욱 융성,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경주 부근에는 사천왕사(四天王寺)·불국사(佛國寺)·봉덕사(奉德寺) 등 대사찰이 세워졌으며, 지방에는 부석사(浮石寺)·통도사(通度寺)·화엄사(華嚴寺)·범어사(梵魚寺)·법주사(法住寺) 등의 대사찰이 세워졌다.

불교의 융성에 따라 학덕이 높은 승려가 많이 나왔다. 자장(慈藏)·의상(義湘)·원측(圓測)·혜초(慧超)가 대표적으로 이들은 당나라 또는 인도에 가서 역경(譯經)과 저술에 종사했으며, 혜초는 인도에 가서 불적(佛跡)을 순례한 후 《왕오천축국전》을 지어 당시 인도와 서역 여러 나라의 상태를 알려주었다.

고승의 배출과 함께 불교의 여러 종파가 수입되었으니, 열반종(涅槃宗)·계율종(戒律宗) 외에 새로이 화엄종(華嚴宗)과 법성종(法性宗)·법상종(法相宗)이 개창되어 이른바 5교(五敎)가 성립되었다. 이들 다섯 종파는 모두 불교의 경전을 중요시하는 교종(敎宗)에 속하는 것으로서, 귀족들 사이에 신봉되었다.

원효(元曉)는 여러 종파의 대립·상쟁(相爭)을 높은 차원에서 조화·통일하려 하였으며, 불교의 대중화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전도에 따라 대중의 지지를 받는 정토교(淨土敎) 신앙을 대중 속에 널리 유행시켰다. 한편 신라 후기 불교계에는 또 하나의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선종(禪宗)의 유행이 그것이다.

통일 신라 왕조의 지배층은 불교의 장려와 동시에 유교 사상을 권장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신라의 지배층이 중앙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신문왕 2년(682년)에는 국학이 설립되었으며, 원성왕 4년(788년)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 제도가 실시되었다. 이러한 유교 진흥책은 종래의 골품제를 지양하고 학벌(學閥) 본위의 관료 체제를 확립하려는 것이었으나 골품제의 강인한 존속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웠다.

유학의 보급에 따라 도당유학생(渡唐留學生)[9]이 증가되고, 강수(强水)·설총(薛聰)·김대문(金大問) 같은 유명한 학자가 배출되어 많은 저술을 남겼다.

자연과학, 분야 특히 농업천문학 분야에서도 큰 진전을 보여 7세기에는 첨성대(瞻星臺)가 축조되고, 8세기 이후 당나라의 과학 기술이 수입되어 천문 관측기구가 제작되었으며, 수학·의학이 발달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신화전설이 기록되었고, 통일 전에 발생한 향가(鄕歌)는 더욱 발달하여 풍부한 서정적 내용을 담은 작품이 많이 나왔다.

삼국 시기의 초기 향가는 아마도 가야의 〈구지가(龜旨歌)〉와 같은 성격의 노래가 그 시초 형태였던 것 같고, 따라서 민요적인 소박성을 지녔으며, 주술적 기원을 담은 주가(呪歌)의 요소를 지녔다고 여겨진다. 통일기의 향가에도 그런 전통이 이어지는 면이 보이나, 주술적 기원을 불교 신앙을 빌려서 행하는 측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런 점에서 향가는 신라인의 우아하고 숭고한 이상과 기원을 담은 아름다운 종교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소개하는 〈제망매가(祭亡妹歌)〉는 그러한 한 예이다. 여기서 작가인 승려 월명사(月明師)는 젊은 나이에 죽어간 누이와의 사별(死別)을 서러워하면서, 내세에 아미타불의 서방 극락정토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여, 인생의 덧없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지극한 심신을 표현하였다.

또한 이 시기 향가 중에는 종교성을 벗어나 짙은 서정성(抒情性)을 담아 노래하거나, 〈처용가(處容歌)〉처럼 남녀의 성 문제를 해학적으로 읊은 것도 등장하여, 그 내용과 문학성이 더욱 풍부해졌다.

향가의 형식은 원래 4구체(四句體)였던 것 같다. 통일기에도 4구체 향가는 여전히 남아 있었으나, 이 시기 다수의 향가는 10구체(十句體)의 정형시로서 완성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8구체(八句體)의 향가도 지어졌다. 이러한 향가는 9세기 말 진성여왕 때에 편찬된 《삼대목(三代目)》에서 집대성되었다. 하지만 이 책은 전해지지 않고, 《삼국유사》에 향가의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이 시기 한시로서는 최치원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최치원은 유(儒)·불(佛)·선(仙)·삼교(三敎)에 깊은 소양을 지닌 빼어난 문장가로서, 한시뿐 아니라 변려체(騈儷體)로 된 다수의 글을 남겨 신라 한문학의 최고봉을 이루었다.

불교의 융성에 힘입어 발달한 미술은 통일 신라의 문화 중 가장 큰 특색을 지니고 그 빛을 후세에 길이 남기게 되었다. 뛰어난 제작 기술과 고상한 미적 감각으로 경탄을 자아내는 신라 미술품 중 가장 정채(精彩)를 발휘하는 것은 석굴암(石窟庵)이다. 조각 미술의 전당을 이룬 석굴암은 김대성(金大城)이 발원(發願)함으로써 8세기 후반에 축조된 것으로, 신라 예술의 극치를 나타내었다.

이 시기 미술의 대표적인 것은 8세기 중엽에 세워진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窟庵)이라 할 수 있다. 불국사는 귀족 김대성(金大成)의 원찰(願刹)로 처음 지어졌는데, 그 목조 건물들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불타 버렸다. 현존하는 건물은 17세기 중엽과 근래에 각각 복원된 것이다. 정문인 자하문(紫霞門)으로 올라가는 구름다리 층계와 석축은 신라 당대의 것으로, 주변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고 있다. 중문 안을 들어서면 석가탑(釋迦塔)과 다보탑(多寶塔)이 대웅전 앞의 좌우에 서 있다. 이 중 석가탑은 통일기 신라 탑의 일반형인 3층 석탑의 대표적인 것이다. 통일기 초에 등장한 3층 석탑인 감은사탑이나 고선사탑에선 웅장하고 강건한 품격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이 석가탑 단계에 오면 극도로 세련된 미적 감각과 절제된 균형미가 무르익어 조화의 극치를 보여준다. 3층 석탑은 이 단계를 지나면서 세련미가 과도해져 유약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이 역시 신라 귀족 사회의 전반적인 기풍의 변화와 유관한 것이다. 다보탑은 신라 석탑의 특수형에 속하는 것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이다. 화려한 모습과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으면서 전체적으로 안정된 균형미를 과시하고 있다.

군사 [편집]

신라에는 당(幢)과 정(停)이라는 군제의 기본을 이루는 일종의 군단이 있었다. 당·정은 어떤 표지(標識)를 중심으로 하여 모여드는 집단, 혹은 단체를 의미한 말로 특히 당에는 크고 작은 많은 종류의 것이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것이 대당(大幢)과 귀당(貴幢)이었다. 대당은 수도 부근에 설치된 듯한 대군영(大軍營) 또는 대군단(大軍團)이며, 귀당은 지방의 가장 중요한 군관구에 두던 군영이었다. 정은 대당·귀당에 비해 조금 떨어지지만 지방 군관 내의 본부·본영으로서 거의 각 주치(州治)에 설치되었다. 당과 정은 지방의 중요성 여하에 따라 개칭되기도 하고 폐지되었다.

9서당 [편집]

9서당(九誓幢)은 신라 삼국 통일 이후 군대 편제의 하나이다. 진평왕 5년(583년)부터 증설되어 신문왕 7년(687년)에 완성된 중앙의 군단(軍團)으로 신라인뿐만 아니라 고구려인, 백제인 등을 포함하여 만들어진 군대로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직속 부대였던 듯하다. 이는 이국민(異國民)에 대한 반란의 위험을 덜고, 중앙의 병력을 강화한다는 두 가지 효과를 노린 것으로, 금색(衿色)에 의하여 부대를 구별하였다.

10정 [편집]

10정(十停)은 통일 신라의 군대 편제 가운데 하나이다. 9주·5소경의 완성과 거의 같은 시기에 설치된 것으로 추측되며, 지방에 배치된 중요한 부대였다. 10정은 가장 지역이 넓고 또 국방상의 요지인 한산주(漢山州)에만 2개 정을 설치했으며, 다른 8개 주에는 1개 정씩을 배치했다. 이 10정은 국방만이 아니라 경찰의 임무까지도 담당한 듯하다.

신라의 대외 교류 [편집]

신라의 교역은 주로 상업이나 외교 활동과 관계가 있었다. 676년의 삼국 통일 후 평화가 계속되며 생산이 늘었고,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신라의 주 교역 상대는 당나라일본이었고, 발해와도 교역을 했다.

  • 수입품
    • 당나라 : 비단, 약재, 공예, 서적
    • 일본 : 풀섬, 견직물

일본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소 소략해 일본 쪽 자료를 보충하지 않을 수 없지만, 양쪽 자료를 종합해보면 670년부터 779년까지 한 세기 동안 신라 사신들이 일본에 39차례나 파견됐다. 같은 기간에 일본 사신들은 신라를 25차례 방문했다. 그 기간에 당나라로 견당사(遣唐使)를 보낸 것은 불과 10차례였다. [10]

신라사의 시기 구분 [편집]

  • 일반적으로 신라의 역사를 시기 구분할 때는 《삼국사기》의 구분을 따른다. 《삼국사기》에서는 왕실의 변화에 따라 상대·중대·하대로 나누었다.
    • 상대(上代:시조∼28대 진덕여왕, BC 57∼AD 654)는 성골이 왕위를 독점하던 시기이다. 실제 골품 제도가 성립되고 성골 왕실이 확립된 것은 상당히 후대의 일이며 원시 부족 국가·씨족 국가를 거쳐 고대 국가로 발전하여 골품 제도가 확립되는 단계이다.
    • 중대(中代:29대 무열왕∼36대 혜공왕, 654∼780)는 성골 왕통이 끝나고 무열왕계 왕실이 이어지던 시기이다. 대체로 삼국을 통일하고 전제왕권(專制王權)이 확립되어 문화의 황금기를 이룬 시기와 일치한다.
    • 하대(下代:37대 선덕왕∼56대 경순왕, 780∼935)는 무열왕계 왕실이 끊어지고 내물왕계 진골 왕실이 성립된 시기이다. 골품제도가 붕괴되고, 족당(族黨)의 형성 및 왕권의 쇠퇴로 호족(豪族)·해상세력이 등장하고 멸망에 이르는 시기이다.
  • 삼국유사》는 불교와 연관지어 상고·중고·하고로 신라사를 구분하였다.
    • 상고(上古:시조~22대 지증왕, BC 57~514)는 불교 전래 이전 시기이다. 역사적으로는 신라가 고대 국가로 발전하기 이전 단계를 구분할 때 사용된다.
    • 중고(中古:23대 법흥왕~28대 진덕여왕, 514~654)는 불교식 왕명이 사용되던 시기이다. 역사적으로는 골품제 하에 성골 왕실이 성립되어 소멸하기까지의 시기로 보고 있다.
    • 하고(下古:29대 무열왕~56대 경순왕, 654~935)는 불교식 왕명 사용이 끝난 이후의 시기이다. 하고 시기 구분은 역사적으로 중대와 하대의 구분이 없기 때문에 잘 사용되지 않는다.
  • 한국사 전체를 통해서 볼 때는 보통 제29대 무열왕 이전을 삼국시대, 그 이후를 통일신라시대로 크게 구분한다. 최근에는 발해와 신라가 병립한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라는 용어보다는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통일신라라는 용어에도 문제제기가 되고 있으며 이를 후신라 혹은 대신라로 부르기도 한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발해는 고구려가 망하고 고구려의 장군인 대조영이 세웠습니다.

2. 대부분인 말갈족이 백성이고요

    소수인 고구려인이 귀족이네요.

발해의 문화는

당나라의 특별함??과 고구려의 씩씩한 기상을 물려받은 문화입니다.

발해는 고구려가 멸망하고 고구려를 이은 씩씩한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라는 것에서 역사적 의의를 두죠

해동성국 자체가 발해입니다.

 

 

ㅈㅅㅈㅅ 여기까지 밖에 못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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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요점 정리만 뽑아 봣어요 ㅎㅎ...
  | 사회 ~ 2단원(함께 살아가는 세계) |

1. 세계를 한눈에
◦ 5대양 :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북극해, 남극해
◦ 6대륙 : 아시아, 유럽,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 세계 지도
◦ - 둥근 모양의 지구 표면을 평면 위에 그린 것이다.
◦ - 세계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 - 쓰임새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다.
◦ - 휴대가 간편하다.
◦ - 주제별 탐구를 할 때 편리하다.
◦ 지구본
◦ - 둥근 모양의 지구를 줄여 놓은 모양이다.
◦ - 육지나 바다의 위치 등이 정확하다.
◦ - 두 지점 간의 가장 짧은 거리(대권 항로)를 구하기 쉽다.

2. 우리와 관계 깊은 나라들
◦ 중국
◦ - 수도는 베이징(북경)이며,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
◦ - 상하이 : 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있던 곳이다.
◦ - 옌볜 : 조선족 자치주가 있는 곳이다.
◦ 일본
◦ - 수도는 도쿄이며, 태풍, 해일, 지진 등의 피해가 많다.
◦ - 나라 : 우리 삼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 - 오사카 : 일제 강점기에 끌려간 교포들이 많이 살고 있다.
◦ 미국
◦ - 수도는 워싱턴 D.C이며, 세계적인 농산물 생산국이다.
◦ -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 우리 교포들이 많이 살고 있다.
◦ - 그레이트 플레인스(중앙 평원) : 옥수수, 밀 등을 대량생산하고 있다.
◦ - 뉴욕 : 미국 최대의 도시로, 상업/금융/무역의 중심지이다.
◦ 러시아
◦ - 수도는 모스크바이며,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다.
◦ - 우주 항공 과학과 기초 과학이 발달하였다.
◦ - 상트페테르부르크 : 옛 러시아 제국의 수도로, 6~7월에는 백야 현상이 나타난다.
◦ - 시베리아 : 인구가 적고 몹시 추운 지역이다.
3. 더 가까워지는 세계의 여러 나라

◦ 서남아시아(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이란, 이라크 등)
◦ - 석유 자원 수출이 많고, 이슬람 교를 믿는다.
◦ 동남 아시아와 남아메리카
◦ - 식량, 석유, 천연 가스 등의 자원이 풍부하다.
◦ -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 - 동남 아시아의 경우에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을 결성했다.
◦ 유럽
◦ - 서유럽 : 영국, 프랑스, 스위스, 독일, 오스트리아 등
◦ - 북유럽 :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등
◦ - 남유럽 : 에스파냐,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등
◦ - 동유럽 : 러시아, 헝가리, 폴란드, 체코 등

4. 인터넷으로 하나가 된 지구촌
◦ 교통의 발달과 지구촌 생활의 변화
◦ - 고속 철도 : 에너지 효율성이 높아 지구 환경보전에 적합하다.
◦ - 비행기 : 대형화 ,고속화, 연료 절약 및 소음 경감의 방향으로 발달해 가고 있다.
◦ - 우주선 : 과학 기술의 발달로 우주 여행이 가능해졌다.
◦ 통신의 발달과 지구촌 생활의 변화
◦ - 통신 위성 : 지구촌 곳곳의 소식을 빠르게 전해 준다.
◦ - 인터넷 : 전자우편을 주고받고, 상품 구입을 할 수 있다.
◦ 과학 기술의 발달과 지구촌 생활의 변화
◦ - 로봇 : 사람이 하기 힘든 일을 대신한다.
◦ - 유전 공학 : 식량 생산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 - 생명 공학 : 인류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건강을 증진시킨다.

5. 지구촌의 여러 문제
◦ 지구촌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
◦ - 열대 우림 파괴 : 무분별한 개발로 아마존 강 유역의 열대 우림이 파괴되었다.
◦ - 기상 이변 : 엘니뇨, 라니냐 등이 자주 일어난다.
◦ - 물 부족 : 우리 나라는 UN이 정한 물 부족 국가이다.
◦ - 황사 : 각종 호흡기 질환과 가축의 질병을 일으킨다.
◦ - 기아 문제 :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이 끼니를 굶고 있다.
◦ - 문맹 문제 : 전세계 인구 중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 - 난민 : 전쟁으로 인한 고아와 피난민들이 많다.
◦ 지구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체
◦ - 한국 국제 협력단 : 개발도상국의 경제, 사회 발전을 돕고 그들 나라와의 우호를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 UN : 물 부족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 - 국경없는 의사회 : 민간 의료 구호 단체이다.
◦ - 유니세프 : 전쟁 피해국의 아동을 구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출 처 밝 힘 !!!!            답변확정 해주시면 감사 ㅎㅎㅎㅎ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발해의 건국

 발해는 고구려를 잇는나라입니다.

고구려유민들은흩어졋어요..신라로귀화한사람당으로간사람..등등만주의말갈족가혼재해서사는사람들은패망국의한을,,그당시당은고구려유민2만명을8000여가호를중국땅으로강제이주를시켯음..이때대조영이걸걸중상과 요서지방의영주로옮겻다영주는당이북동방이민족을제어하기위한전진기지임ㅎ

이곳에는고구려유민말갈인거란인등다수민족이잇엇다 이들은당이약화되면언제든지발란을..

그때거란족출신이춘진이당에발란을일으켯지만..1년만에진압이당햇다당은돌궐의힘을빌어난을진압하는등어려운상황에..이럴때대조영이유민들을규합하고말갈걸사비우와손을잡고당에반기를일으켯다당은대조영을공격햇으나이해고의당군을천문령싸움에서격파하고당의세력권을벗어나남만주지역에위치한동모산에정착하여성을쌓고나라를개국하고 처음에는   '진'  나라라고새웟지만

당인가?그쪽에서발해머엿지?어쩌구저쩌구해서..발해로바끼엇다

2.민족구성위에잇잔수..

장보고:장보고는 신라인으로 섬사람이라는미천한신분때문에신라에서재능을펼치지못해당으로가서 공을새우고..장수가돼엇다그리고불법으로신라인을잡아서노비로파는해적들을잡앗다

그리고나중에신라로가서청해진에 무역센타?를만들엇다..

그리고무역을활발하게하다가왕이자신의아들과장보고의딸을결혼시킨다고하자..

신하들이반대하엿다..

그리고태자가왕이됀디결혼을할려고하자신하들이거세게반대하자..어떤방법이잇냐고묻자..

하지만그당시장보고의군대가정부의군대보다강햇다.

염기장수?가나서서암살을하겟다고햇다그는옛장보고가아끼던부하엿다.

그리고그가장보고의집에가서부하엿다는이유로무시당하다는등어떤다는등이유를대며..술을마시게한뒤만취생태일때암살을하고도망쳣다.그리고왕은청해진의세력을제거하고청해진도없앳다.

김유신:김유신은3국통일의인물로김수로의10대손이며신라의통일을이끈사람이다

김유신은김춘추와함께삼국을통일햇다 그리고김춘추는외교를햇다그래서당은삼국통일을도와주엇다

김유신은백제를공격하엿다 그때마지막왕의자왕은 놀기만바쁘고..많은충신들을무시하다가망햇다.

고구려는그때김유신을쇠약해서실제로는못갓지만그때당에서전쟁을벌이는데

그때눈이많이왓다..그러자당은식량이없어서도움을요청햇다 그러자신라는군량미를보내왓다

그런데..군량미를받더니 편지가왓는데군량미덕에굶어죽지않고돌아가게되서기쁩니다..

군량미를받고점령을못햇다 그렇지만..고구려도많은공격때문에흩어진민심..

성안에는이미배신자가잇엇다..그리고연개소문이죽자아들3명이권력을가질려고하지만도망가고

남건이권력을잡고막리지가되엇다 그러자대사가 강..어쩌구저쩌구의손자가성문을지키고잇는데

대사가막리지가찾는다면서오라고한다음에성문을열어주자당의군대가들어와서고구려를점령시켯다

원동력?

김유신의 뛰어난지략 작전

김춘추의 외교

화랑들의 정신?

6학년 사회문제 입니당~ 급해요ㅠ(오늘...

안녕하세요~ 바로 문제 낼게요 똑똑한 지식인들 부탁... 졸본성->국내성->평양성임 사회에서는 국내성이 먼저 나오는데 주몽때 졸본성이 였음..(저 6학년임.) 2대왕 유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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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학년인데요 저희쌤이사회뭐안했다구82~~90쪽에서100문제를내서오라네요ㅠㅠ 제발저좀도와주세요ㅠ 음 거기선 저도 잘 해결이 잘 않되고 10문제정도는 내줄수가있어요. 1....

6학년 1학기 사회 문제좀요!!!(급해요ㅠ)

내일까지 해가야하는 사회 문제 풀이 숙젠데....... 내용이 엄청 많고 어려워요ㅠㅠ 쌤이... -우리 나라의 전통공업은 생산 규모가 작고 ( )생산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오늘날...

진짜급해요 오늘까지 좀답부탁드립니다

6학년 국어 가 139쪽에 더좋은우리동네 만들기로 논설문 쓰는게있는데 저는 주장을... 근거 2: 다툼이 커져 일이 커질 수 있다 이웃 간의 갈등은 종종 더 큰 사회 문제로 확장될 수...

6학년 사회문제 ( 제발요..급해요!!)객관식

머머머 어쩌구저쩌구 이러쿵 되서요 _ 6학년 사회문제좀 풀어주세요.. ___... _ 6학년수준인데..좀 어려운거같아여 _ 아....너무 급해여 !! 채택가능임!...

사회문제좀 풀어주세요.. 초딩6학년꺼...

... ④지역의 문제를 피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간다. 3.다음 중 국회에서 하는 일이... 1. 다음 중 민주 정치의 세 가지 원리에 속하지 않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 ①국가의...

6학년 사회 지역간의 갈등 정말 급해요...

안녕하세요 저는 지금 6학년인데요 사회시간숙제가 지역간의 갈등을... 혐오시설건설문제를 원만히 해결했을 뿐 아니라 적지 않은 예산절약 효과까지 이끌어낸것은 비슷한...

6학년 사회문제..급해요::

제가 오늘 사회 숙제를 내일까지 꼭 해야 합니다..ㅜ 1. 1월에 가장 추운 곳 2. 1월에 가장 따뜻한 곳 3. 8월에 가장 더운 곳 4. 8월에 가장 서늘 한 곳 2. 남북의 기온 차이 비교 3....

6학년2학기 사회문제입니다!! 급해요!!...

... 저는 6학년 어느 학생입니다. 제가 학교에서 숙제를 받았는데 사회책과 탐구를 놓고 와서,,, 이렇게 도움을 청합니다.. 문제1.조수미,정명화,정경화,정명훈,장영주,강수진...

6학년1학기사회문제 고려의멸망까지...

... 50~70문제 ㅜㅜ 학교숙제여서 ,, 답도가치쫌 해주세여 ^^ 여러가지로 교과서 위주로 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까지숙제입니다 급해요급해 [사회62~65쪽참고] <보기> 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