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이황과 율곡이이의 업적좀요 빨리

퇴계이황과 율곡이이의 업적좀요 빨리

작성일 2010.02.04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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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이황과 율곡이이의 업적좀요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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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1501~1570]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이다. 이기호발설이 사상의 핵심이다. 영남학파를 이루었고, 이이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와 대립, 동서 당쟁과도 관련되었다. 일본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도산서원을 설립,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힘썼다.

 

율곡 이이


조선 중기의 학자·정치가.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이다. 호조·이조·형조·병조 판서 등을 지냈다. 선조에게 '시무육조'를 바치고, '십만양병설' 등 개혁안을 주장했다. 동인·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노력 했다. 저서는《성학집요》,《격몽요결》,《기자실기》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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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퇴계이황의 생애>

1. 출생 : 퇴계의 성은 이, 이름은 황(李滉 : 1501~1570),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 등이며, 관향은 진보(眞寶)이다.
퇴계는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사 이식(李植)이고, 어머니는 의성 김씨와 춘천 박씨 두 분이다. 김씨는 잠, 하, 신담부인 등 2남 1녀를 두고 별세하였고, 재취로 들어온 박씨가 서린(일찍 죽음), 의, 해, 증, 황 등 5형제를 낳았는데 퇴계는 그 막내이다.


2. 초년기 : 출생에서 33세 때까지 유교경전을 연구하는데 열중하였던 수학기

 퇴계의 부친은 서당을 지어 교육을 해 보려던 뜻을 펴지 못한 채, 퇴계가 태어난지 7개월 만에 40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고, 퇴계는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게 되었다. 부친이 돌아가시던 당시 맏형 한 분만 결혼하였을 뿐 다른 형제는 모두 어려서, 가족의 생계를 어머니가 홀로 농사와 누에치기로 이어가는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어머니는 전처에서 난 자녀를 차별하지 않고 길렀다고 한다.
 퇴계가 "나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준 분은 어머니"라 할만큼 어머니는 "과부의 자식은 몇 백배 더 조신해야 한다."는 엄한 가법을 세워 자녀를 교육하였다.

 퇴계는 6살 때 이웃에 사는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는 것으로 학문을 시작했으며, 12살 때 병으로 휴직하고 집에 와 있던 숙부에게 '논어'를 배웠다. 13세와 15세 때에는 형과 사촌 자형을 따라 청량산에 가서 함께 독서할 만큼 성장하였고, 16세 때에는 사촌 동생과 친구를 데리고 천등산 봉정사에 들어가 독학하기도 하였다.17세 때 안동 부사로 재임 중이던 숙부가 별세하여 물을 곳도 없게 되어 스승 없이 대부분을 혼자 공부하였다. 그 때문에 퇴계는 글자 한 자도 놓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연구하게 되었고, 비록 옛 성현의 글이라도 의심을 가지고 파고들어 재해석하는 학문 방법을 개척하게 되었다. 19세 때 '성리대전'의 첫 권 '태극도설'과 마지막 권 '시·찬·함·명·부'의 두 권을 구해 읽고 나서는,"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솟아나고 눈이 열렸는데, 오래 두고 익숙하게 읽으니 점차 의미를 알 게 되어 마치 들어가는 길을 얻은 것 같았다. 이 때부터 비로소 성리학의 체계를 친숙하게 알 게 되었다."고 하였다. 20세 때 용수사에서 먹고 자는 것도 잊고 '주역'을 연구하는데 몰두하여 건강을 해치게 되고, 이로 인해 평생 동안 몸이 마르고 쇠약해지는 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21세에 허씨 부인과 결혼하고 23세에 잠시 성균관에 유학하였고, 27세에 향시, 28세에 진사 회시, 32세에 문과 별시, 33세에 경상도 향시에 합격하였고, 수 개월간 다시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3. 중년기 : 34세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여 49세 때 풍기 군수를 사직하고 귀향할 때까지의 임관기

 퇴계는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43세 때까지 대체로 순탄한 관료 생활을 보낸다. 그러나 이때에도 끊임없이 학문 연마에 정진하였다. 종3품인 성균과 대사성에 이른 43세의 퇴계는 이 때부터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갈 뜻을 품는다.
이 후 52세 때 까지 그는 세 차례나(43, 46, 50세) 귀향과 소환을 반복하면서 관료 생활에서 벗어나 야인 생활로 접어드는 일종의 과도기를 준비한다.

 퇴계는 외척의 권력 투쟁이 격심하였던 혼란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성실히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경적(經籍 : 옛날 성현(聖賢)들이 유교의 사상과 교리를 써 놓은 책)을 관장하고 글을 짓거나 임금의 질문에 대답하는 역할을 맡은 홍문관(弘文館)의 관직에 가장 오래 재직하였다. 45세 때 을묘사화(乙卯士禍)가 일어나 많은 선비들이 희생당하고, 그 자신도 한 때 파직당하였으나 복직되었다.

 46세 때 고향으로 돌아와 양진암을 짓고 호를 퇴계라 하며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굳힌 것으로 보이며, 외직을 구하여 단양군수(9개월)와 풍기군수(1년 2개월)로 나갔다가 끝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특히 풍기 군수로 있을 때는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을 조정에 요청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최초의 사액을 받게 하였다.
그가 물러나기를 결심한 것은 당시 외척들이 권력을 독점하여 어지러운 정치적 상황 속에서, 벼슬에 나가 한 시대를 바로 잡는 일 보다 학문 연구와 교육을 통해 인간의 올바른 삶의 도리를 밝혀 후세를 위해 참다운 표준을 제시하는 데 그 자신의 역할이 자각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사생활에서도 불행한 일이 속출하여 27세에 허씨부인을 잃고, 30세에 권씨 부인과 재혼하였는데 46세 때 그 권씨부인마저 잃는다. 더구나 단양순수로 나가던 해(48세)에는 둘째 아들마저 잃는 슬픔을 겪는다. 50세 때에는 친형인 좌윤공 해를 사화의 격동 속에서 잃는다.


4. 만년기 : 50세~70세 때까지 임명과 사퇴를 반복하면서 고향에서 연구, 강의, 저술에 전념한 강학기

 퇴계는 50세 이후에는 고향의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과 계상서당 및 도산서당을 세우고, 그의 학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문인들을 가르치며 성리학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물러난 후에도 조정에서는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 우찬성, 판중추부사 등 계속하여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거듭 사직 상소를 올려 받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잠시 나갔다가도 곧 사퇴하여 귀향하기를 반복하였다.

 끊임없이 사퇴하려는 퇴계의 뜻과 놓아주지 않으려는 임금의 뜻이 항상 교차하여 문서상의 임명과 사퇴가 계속된 것이 노년기의 특징이다. 이렇게 된 까닭은 건강이 좋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소망이 벼슬에 있지 않고 학문에 있었기 때문이다.
퇴계의 중요한 저술 또한 주로 노년으로 접어드는 50대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의 저술 가운데 천명도설(天命圖說 : 1553년)과 천명도설후서(天命圖說後敍 : 1553년),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 1527~1572)과의 8년 간에 걸친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 錄辨 : 1559~1566),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 1556), 자성록(自省錄 : 1558), 전습록논변(傳習錄錄辨 : 1566),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 1568), 성학십도(聖學十圖 : 1568) 등은 한국유학사상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60세에 도산서당을 지어 스스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인도하는데 힘썼는데 그의 강학은 사망하기 전달까지 계속되었다. 


5. 사망

 선비의 품격은  생애를 마치는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퇴계는 70세 되던 1570년(선조 3년)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앞서 그는 11월 초에 병환으로 강의를 그만두고 제자들을 돌려 보냈는데, 그 소식을 듣고 조목 들 몇 사람의 제자들이 찾아와 간병을 하였다.12월 3일 자제들에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서적들을 돌려보내게 하였으며, 12월 4일 조카에게 명하여 유서를 쓰게 하였다. 이 유서에는 1)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 것, 2)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의 전면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라고만 새기고, 그 후면에는 간단하게 고향과 조상의 내력, 뜻함과 행적을 쓰도록 당부하였다. 12월 5일 시신을 염습할 준비를 하도록 명하고, 12월 7일 제자 이덕홍에게 서적을 맡게 하였으며, 그 이튿날 세상을 떠났다.

참고자료 - 1) "이퇴계의 실행유학" / 권오봉 저 / 1997년 학사원
2) "퇴계의 삶과 철학" / 금장태 저 / 1998년 서울대출판부 3) "퇴계선집" / 윤사순 역주 / 1993년 현암사

 

 

 

<업적, 배울점>

1. 공직자

① 깨끗한 청백리로서의 모습을 보여줌
② 백운동서원을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으로 만들었음
③ 79번이나 벼슬을 사퇴하여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의연한 모습을 보여줌
④ 경복궁의 기문과 상량문, 현판 글씨, 외교 문서 등을 작성하여 명성을 떨침

2. 교육자

① 서원건립에 힘써서 많은 서원의 기초를 마련하고 많은 제자를 양성함
② 과거시험준비나 출세를 하기 위한 학문 풍토를 개선함
③ 올바른 교육을 위하여 손수 교과서를 만들고 새로운 교육과정을 수립함
④ 학문하는 태도의 모범을 보이고 바람직한 선비상을 확립함
⑤ 제자를 사랑하는 올바른 스승상을 정립함

3. 문학자

① 2000편이 넘는 많은 시를 남김

4. 사상가

① 고봉 기대승과의 4단 7정에 관한 논쟁을 통하여 학문적 논쟁의 모범을 보여주고, 성리학의 심성론을 크게 발전시킴
② 수양론의 실천방법을 정밀하게 규명하여 조선시대 도학의 기본틀과 독자성을 정립함
③ 일본에 많은 영향을 줌

5. 생활인

① 예안향약 곧 향약입조 28조를 정하여 향촌의 풍속을 교화함
② 합리성을 존중하여 현실에 맞는 예법을 시행함
③ 한 평생 '경'의 태도를 실천하여 인격자의 모범을 보여줌
④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극진함

 

 

 

 

2.

생애 및 업적

조선시대의 학자, 정치가로서 호는 율곡 ·석담·우재가 있다. 강원도 강릉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어머니 신사임당에게 학문을 배워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모두 아홉 차례나 과거에 장원하여 '9도 장원공'이라 일컬어졌다. 29세에 호조 좌랑에 처음 임명되어 예조 좌랑·부교리·춘추기 사관 등을 지내면서 '명조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임진왜란 전에는 10만 대군을 양성할 것과 대동법·사창제 등을 건의하여 사회 정책에 이바지하였다. 또한 민중의 계몽을 위하여 '서원 향약' '해주 향약' 등의 규례를 만들었다.저서에 '성학집요' '격몽요결' '경연일기' '동호문답' 등이 있다.

연 대/나 이/생애와 업적

1536강릉 북평촌에서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 사이에서 태어남.

1539/4세  글방에 가서 글을 배우기 시작함.

1543/8세 아버지와 함께 파주 율곡촌에 감.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시를 지어 재능을 인정받음.

1545/10세  강릉 경포대의 경치를 묘사한 경포대부를 지음.

1548/13세 생원과 진사를 뽑는 시험인 소과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함.

1551/16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남.

1554/19세  불교를 공부하기 위하여 금강산으로 향함.

1555/20세  보응 스님으로부터 의암이라는 불명을 받고 산에 서 내려옴.

1557/22세  성주 목사 노경린의 딸과 혼인함.

1558/23세  이황을 만나, 스승과 제자 의를 맺음. 별시에 응시하여 천도책이라는 글로 장원 급제함. 천도 책과 함께 그의 이름이 명나라에까지 알려짐.

1561/26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남.

1564/29세  생원과 진사 시험에 다시 장원 급제하여 구도 장원공이라 불림. 호조좌랑으로 벼슬길에 오름

1565/30세  윤원형과 보우의 횡포를 임금에게 상소하여, 그들을 귀양 보냄.

1568/33세   천추사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감.

1569/34세   홍문관 교리가 됨. 이때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힌 동호문답을 지음 청주목사가 되어 백성들을 다스림.

1574/39세   당시 사회의 일곱가지 부조리를 지적한 만어봉사를 임금에게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음.

1576/41세  벼슬에서 물러나, 해주의 석담으로 가서 청계당을 짓고 100여 명의 친천과 함께 지냄. 제자들과 일반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격몽요결을 지음.

1581/46세  병조판서가 되어 여진족을 물리침.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10만 양병설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음.

1584/49세   1월 16일 세상을 떠남.



십만양병설


이이는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 사이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유난히 총명하여 신동으로 소문이 났고 열세 살 에는 진사에 합격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 후 1582년 겨울, 함경도 변방을 지키던 수령으로부터 여진족 오랑캐들이 남쪽으로 내려와 우리 나라를 쳐내려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조는 조정내에 의논할 대신이 없어 이이를 병조판서로 명을 내렸다. 병조판서에 임명된 이이는 군사들의 실태를 파악하고 장수들을 모으고 의용군들을 모아 여진족을 물리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다음 해 이이는 '시무육조'를 지어 선조 임금에게 올렸다. 시무육조란 조정에 어질고 능력있는 선비를 등용시키고 변방에 병력을 배치하여 나라의 경계를 더욱 철저히 하고 전쟁에 필요한 군마를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선조는 이이의 주장을 찬성했으나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대신들은 무조건 그의 주장을 반대하였다. " 우리 나라는 당파싸움으로 나라의 힘이 말할 수 없이 약해졌습니다. 이대로 십년만 더 가면 외적의 침입을 막지 못하고 나라에 어려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십 년 내에 군사 십만명을 양성하여 한양에 이만명과 각 도에 일만명씩을 두고 위급한 사태를 대비해야 합니다. "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이이의 '십만양병설'이다. 그러나 이이를 평소에 시기하던 대신들이 나라의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나섰으며 선조도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이가 이것을 주장한 지 9년이 지난 서기 1592년 선조 25년에 온 나라를 불바다로 만든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다. 1584년 4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율곡 이이의 집안에는 부싯돌 한개가 유산으로 남아 있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임금은 사흘 동안이나 슬피 울었다한다.

 

율곡의 업적

 

<자실기 (箕子實記)> 와  <경연일기 (經筵日記)> 를 완성하였으며 왕에게  시무6조를 지어서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 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노력에도 불구

하고, 선조가 이 이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에 따라 ,그가 주장한 개혁안

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동인. 서인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 되면서 그도 점차 중립

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율곡으로부터의 교훈

 

율곡은 언젠가 오성대감이라 불리는 이항복에게,  "슬프지 않은 울음에는 고춧가루 싼 수

이 좋다." 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율곡의 "십만양병" 주장을 가볍게 생각하고

미리 국난을 대비하지 못한 선조와 대신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까지 피난해야 했고

명나라에 원병을 청할 수밖에 없게 되어 선조는 한음 이 덕형을 명나라로 보내어 신종 황제

로부터 원병을 받아냈습니다. 그래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끄는 4만의 원군이 오게 되었

는데, 이 때 이 항복은 이들을 맞이하는 접빈사가 되었습니다.

국난에 처해 어쩔 수 없이 청병을 했지만 조금도 즐거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이항복은 명의

원군을 고맙게 맞이 한다는 표정이 얼굴에 전혀 나타나지 않아 고민이었습니다. 그때 이항

복은 은연 중에 율곡선생의 가르침이 떠올라 일부러 고춧가루를 싼 수건을 넣고 가서 눈물

을 흘리며, 감격해 맞이하는 모습을 연출했다고 합니다. 오성은 이제서야 비로소 율곡선생

이 자기에게 말한 것이 명나라에 청병하라는 뜻이었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율곡은 임진왜란 10년전에 화두같은 말을 이항복에게 남김으로 어려움을 지혜롭게

대처하도록 하였습니다.

 

 

 

 

 

퇴계이황과 율곡이이의 업적좀요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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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성리학자 퇴계이황, 율곡이이 왜...

... 다른 역사인물들에 비해 역사업적도 별로없는데 일반인들에게 물어보면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업적 모르는 사람도 많은데 율곡퇴계는 조선의 인문학에서 엄청난 의미가...

퇴계이황에 대해 & 율곡이이~~~

헬로~~ 방가루~~~ 퇴계이황에 대해서 아주 간략!!!!!!하게... 뽀너스렁~~~~~ 율곡이이~~~~해주세영~~~~간략~~ 이황 1.... 큰 업적을 남겼다. 사창(社倉) 설치, 대동법 실시, 십만양병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