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문화나문화재좀알려주세요^^

제주도문화나문화재좀알려주세요^^

작성일 2012.06.09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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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수원의○○초등학교

4학년김모양입니다

저번읽기시간에제주도방언과문화,문화재,먹을거리를조사해오라고하셨습니다

그래서방언은일단조사해서요,,,

문화와문화재만부탁드릴꼐요

제발...2012년6월9일토요일(오늘)

12시까지부탁드릴꼐요

내공냠냠30입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제주도의 유형문화재)

 

1.관덕정

 

종 목  보물  제32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삼도2동 983-1 
시 대 조선시대


관덕이란 문무의 올바른 정신을 본받기 위해 ‘사자소이관성덕야’에서 따온 말로, 평소에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누정 건물은 『탐라지』에 의하면 조선 세종 30년(1448)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세웠다. 성종 11년(1480) 목사 양찬이 고친 뒤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69년 보수한 것으로 원래의 건축 수법은 17세기 전후의 것으로 추정한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건물은 사방이 탁 트이게 뚫려 있고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는 새부리 모양으로 뻗쳐 나온 재료를 기둥 위에 두 개씩 짜 놓았다.

 

관덕정의 편액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의 글씨였으나 화재로 손실되어 현재의 글씨는 선조때 영의정을 지낸 아계 이산해의 작품인 것으로 청음 김상헌이 지은 「남사록」에 의해 밝혀졌으며, 지붕 처마가 긴 것이 특징이었는데 1924년 일본인들이 보수하면서 처마 부분을 많이 잘라냈다. 제주도의 대표적 누정 건축으로 건축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이며 건물 안쪽 대들보와 그 아래에 그려진 작자를 알 수 없는 벽화도 상당히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2.불탑사 오층석탑

 

종 목  보물  제1187호  
지 정 일 1993.11.19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삼양1동 696 
시 대  고려시대


원당사의 옛 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이다. 원당사는 조선 중기에 폐지되었고, 1950년대 이후 절터에 새로이 지어진 불탑사가 대신 자리잡고 있다.

 

탑은 1단의 기단 위로 5층의 탑신을 두고,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 모습이다. 탑 주변에는 돌담이 둘려져 있다.

 

기단은 뒷면을 뺀 세 면에 안상을 얕게 새겼는데, 무늬의 바닥선이 꽃무늬처럼 솟아나도록 조각하였다. 탑신의 1층 몸돌 남쪽면에는 감실(불상을 모셔두는 방)을 만들어 놓았다. 지붕돌은 윗면의 경사가 그리 크지 않지만, 네 귀퉁이에서 뚜렷하게 치켜 올려져 있다. 꼭대기에 올려진 머리장식은 아래의 돌과 그 재료가 달라서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전체적인 탑의 모양이 조형성이 적고 무거워 보이는 점으로 보아 지방색이 강했던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3..삼성혈

 

종 목  사적  제134호 
지 정 일 1964.06.10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이도동 1313 외 
시 대 시대미상


삼성혈은 제주도의 고씨·양씨·부씨의 시조가 솟아났다는 3개의 구멍을 말한다.

 

3시조들은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사냥해 먹고 살다가, 다섯 곡식의 씨와 송아지·망아지를 가지고 온 벽랑국의 세 공주와 각각 결혼하여 농경생활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구멍은 품(品)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하나만 바다와 통하고 나머지는 흔적만 남아있다.

 

조선 중종 21년(1526)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단과 비석을 세우고, 주위에 울타리를 쌓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4.제주목관아

 

종 목  사적  제380호 
지 정 일 1993.03.31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삼도2동 43-3번지 등 일원 
시 대 조선시대


관아란 벼슬을 가진 사람들이 일을 보던 건물로서 제주목 관아터는 제주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였다.

 

발굴조사 결과 탐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관아의 중요한 시설이었던 동헌·내아 건물터 등의 위치와 규모를 확인하였다. 이로써 제주목 관아터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제주도의 중심지 구실을 한 중요한 곳임이 밝혀졌다. 관아터 남서쪽에는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조선 세종 30년(1448)에 세운 관덕정(보물 제322호)이 있다.

 

5.항파두리 항몽유적지 


종 목  사적  제396호 
지 정 일 1997.04.18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 1126-1외 
시 대 고려시대


고려 원종 14년(1273) 김통정 장군과 삼별초 대원들이 여몽연합군과 마지막까지 싸운 곳이다.

 

진도 싸움에서 패한 삼별초는 원종 12년(1271) 제주도에 들어와 안팎 2중으로 된 성을 쌓았는데 안쪽의 성은 성벽의 안팎을 수직에 가깝게 돌로 쌓았으며, 바깥성은 언덕과 계곡을 따라 흙으로 쌓았다.

 

이 성은 해발 약 190∼215m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고성천이 있고 서쪽으로는 소앵천이 있다. 남쪽은 높고 북쪽은 낮으며 동쪽은 완만하고 서쪽에는 하천이 있어 성을 쌓기에 적합한 지형이다. 주변에는 대부분 경작지, 목초지 들판이 있고 남쪽과 북쪽에는 논이 있었다.

 

당시에 쌓았던 토성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으며 돌쩌귀, 기와, 자기, 연못터 등 많은 유적이 발견되었다. 오늘날에는 유적 정화사업을 벌여 순의비, 순의문, 항몽유적기록화 7폭, 관리사무소를 두고 역사교육 시설로 활용하고 있다. 

 

6.고산리 선사유적

 

종 목  사적  제412호 
지 정 일 1998.12.23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3628번지 
시 대 석기시대


수월봉 앞 해안단구 대지에 넓게 형성되어 있는 신석기시대 전기의 선사유적이다. 신석기시대는 원시농경과 목축을 기반으로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인류문화 발달사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 시기이다.

 

발굴 결과 나온 유물로는 석기 99,000여 점, 토기조각 1,000여 점이 있는데, 특히 원시형 적갈색 섬유질 토기조각은 독특한 토기형태로 고산리식 토기라고 불린다. 당시 사람들이 사용했던 유물 조합을 통해 후기 구석기 말엽의 수렵채집 집단이 석기 전통을 계승하며, 초보적인 형태의 토기를 만들었던 것으로 짐작한다.

 

구석기 후기 문화에서 신석기 전기 문화로 옮겨가는 과정을 알 수 있고, 시베리아, 만주, 일본, 한반도 지역을 포함하는 동북아시아의 신석기 전기 문화 연구에 좋은 자료로서 중요한 유적이다.

 

7.삼양동 선사유적 

 

종 목  사적  제416호 
지 정 일 1999.11.16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삼양1동 1660-5외 
시 대 선사시대


제주시 삼양동 일대의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진행되던 당시에 발견된 선사시대 유적이다.

 

1997년 4월부터 1999년 7월에 걸쳐 제주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한 결과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집터 236곳을 비롯하여 돌을 쌓아 만든 담장, 쓰레기를 버리던 폐기장, 마을의 외곽을 두르고 있던 도랑 자리가 있는 큰 규모의 마을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집터 안에서는 구멍띠토기, 덧띠무늬토기(점토대토기), 적갈색항아리 따위의 그릇 종류와 돌도끼·대패·갈돌·숯돌 등 돌로 만든 도구종류와 철제도끼, 손칼, 동검, 칼자루끝장식(검파두식), 콩, 보리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됨에 따라 탐라국이 형성되던 시기의 제주도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유적이다.

 

8.서귀포 김정희 유배지

 

종 목  사적  제487호 
지 정 일 2007.10.10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1666-1번지 일원 
시 대  조선시대


서귀포시 대정읍성 동문자리 안쪽에 자리잡은 추사거적지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서화가였던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유배생활을 하던 곳이다.

 

김정희는 영조의 사위였던 김한신의 증손으로, 조선 순조 19년(1819)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이조참판 등의 벼슬을 지냈다. 그러다 조선 헌종 6년(1840) 55세 되던 해에 동지부사로 임명되어 중국행을 앞두고 안동김씨 세력과의 권력 싸움에서 밀려나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유배 초기에 포도청의 부장인 송계순의 집에 머물다가 몇 년 뒤 현재의 적거지로 지정된 강도순의 집으로 이사하였다. 이 집은 1948년 제주도 4·3사건 때 불타버리고 빈 터만 남았다가 1984년 강도순 증손의 고증에 따라 다시 지은 것이다.

 

김정희는 이 곳에 머물면서 추사체를 완성하고, <완당세한도>(국보 제180호)를 비롯한 많은 서화를 그렸으며, 제주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는 등 많은 공적을 남겼다.

 

추사 유배지는 추사 김정희선생이 제주에 남긴 유배 문학의 커다란 문화적 가치 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금석학과 유학, 서학의 의미는 역사적·학술적으로 크게 평가되고 있다.

 

9.성읍민속마을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188호

지 정 일 1984.06.07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시 대 조선시대

 

제주도는 조선 태종 16년(1416) 안무사 오식의 건의로 5세기라는 긴 세월동안 세 지역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그 중 성읍은 세종 5년(1423)에 지정된 정의현의 도읍지로서 산골 마을이면서 도읍지였다는 특이성을 갖추고 있다.

 

아늑한 터에, 주변으로는 마을을 둘러싼 높고 낮은 봉우리들이 의젓하게 감싸고 있다. 또한 길들이 굽이 돌아 나 있고 길과 길이 만나는 지점에 평상과 나무들을 두어 쉼터와 모임장소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 마을 민가는 뭍과는 다른 독특한 건축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대개 一자형 평면을 가진 집 2채를 중심으로 몇가지 배치방식으로 짜여있어 제주도 민속 ·문화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가옥으로는 조일훈 가옥(중요민속자료 제68호), 고평오 가옥(중요민속자료 제69호), 이영숙 가옥(중요민속자료 제70호), 한봉일 가옥(중요민속자료 제71호), 고상은 가옥(중요민속자료 제72호) 등이 있다.

 

정의현 관청건물이었던 일관헌을 비롯하여 느티나무와 팽나무(천연기념물 제161호)·정의향교·돌하루방·초가 등 많은 문화재가 있어, 소박하면서도 멋스러운 풍경과 함께 제주도의 고유한 생활풍습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10.제주향교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2호

지 정 일 1971.08.26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용담1동 298-1 
시 대 조선시대


제주향교는 공자를 비롯한 옛 성현들에게 제사지내고 지방민의 교육을 위해 세운 국립교육기관이다. 조선 태조 원년(1392) 제주성내 교동에 세웠으며 순조 27년(1827)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오늘에 이른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로는 공부하는 곳인 명륜당, 사당인 대성전과 계성사 등이 있다. 명륜당은 원래 아름다운 건물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콘크리트로 다시 지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책, 노비 등을 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지금은 제사만 지내고 있다. 

 

11.연북정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3호

지 정 일 1971.08.26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690 
시 대 조선시대


바닷가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정자로 조선 선조 23년(1590)에 조천관 건물을 새로 지은 후 쌍벽정이라 하였다가 선조 32년(1599)에 건물을 보수하고 이름을 연북정으로 고쳤다. ‘연북’이라는 정자의 이름은 제주도로 유배 온 사람들이 한양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면서 북쪽에 계시는 임금을 사모한다는 충정의 뜻을 담고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사람의 키보다 훨씬 높게 축대를 쌓고 다진 기단 위에 세웠다. 축대의 북쪽으로 둘러싼 타원형 성곽의 모양과 크기가 옹성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 망을 보기 위한 망대의 용도로 지은 것이라 추측한다. 기둥의 배열과 건축재료의 배열방법은 모두 제주도 주택과 비슷하다. 

 

12.대정향교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4호

지 정 일 1971.08.26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3126-1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께 제사지내며, 지방 백성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세운 국립교육기관을 가리킨다.

 

대정향교는 조선 태종 16년(1416)에 세웠는데 이후 터가 좋지 않다하여 여러 차례 옮기다가 효종 4년(1653)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영조 48년(1772)에는 명륜당을, 헌종 원년(1834)에는 대성전을 다시 지었다. 추사 김정희가 유배생활을 할 때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전한다.

 

앞쪽에 강학공간인 명륜당이 북향하여 자리잡고, 뒤쪽에 제향공간인 대성전이 남쪽을 향하여 자리잡고 있는 전학후묘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로는 대성전과 명륜당, 동재·서재, 내삼문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로부터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급받아 운영하였다. 지금은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있으며, 1948년부터는 문명학원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대정향교절목』등의 책이 남아있는데 유교경전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대정향교는 많은 보수로 인하여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지만 장식이 검소하고 단청을 하지 않아 전체적으로 간결한 느낌을 준다. 주위에 큰 소나무가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13.정의향교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5호

지 정 일 1971.08.26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820-1

시 대 조선시대 

 

정의향교는 조선 세종 5년(1423)에 진사리 현의 서문 밖에 처음 지었다가, 헌종 15년(1849)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지었다.

 

대부분의 향교 건물들이 남쪽을 향하는 것과는 다르게 이 향교는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대성전·명륜당·동재·서재·삼문 등이 남아있다.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대성전과 배움공간이었던 강당인 명륜당은 좌우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로부터 토지와 책·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학생을 가르쳤다.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 기능은 사라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14.향사당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6호

지 정 일 1975.03.12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삼도2동 970-2 
시 대 조선시대


무과에 합격하지 못한 각 고을 무반(武班)들이 봄·가을 2차례 모임을 갖고 활쏘기와 잔치를 베풀며 여러 가지 일들을 의논하던 곳이다.

 

가락천 서쪽에 처음 지었던 것을 조선 숙종 17년(1691)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짓고 향사당(鄕射堂)이라 이름지었다. 그 뒤 정조 21년(1797)에 이름을 향사당(鄕社堂)이라고 고쳤다. 조선 전기에는 좌수의 처소로 쓰이다가 고종 16년(1879)에 신성여학교 자리로 이용하였다.

 

이 건물은 1981년에 동남향이던 방향을 동북향으로 바꾸어 다시 지은 것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15.일관헌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7호

지 정 일 1975.03.12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809-1

시 대 조선시대

 

지금의 군청과 같은 건물로, 당시 정의현감이 업무를 보던 관청 건물이다. 원래 건물이 있던 곳에 왜구의 침입이 잦아 조선 세종 5년(1423)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지금 있는 건물은 최근에 원형으로 복원한 것이다.

 

4각 기둥을 사용하였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건물 주변이 느티나무(천연기념물 제161호)와 소나무로 둘러싸여 멋스러운 경치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6.신촌향사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8호

지 정 일 1975.03.12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 2156-1 
시 대 조선시대


신촌향사는 마을의 공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조선 순조 5년(1805)에 이곳으로 옮겨 지었다고 하며, 그 뒤로도 여러 차례 고쳐서 원래 형태에서 많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특히 최근 보수 때 침수에 대비하여 지대를 높이면서 본래의 분위기를 거의 잃었다.

 

앞면이 7칸으로 제주도의 일반 민가보다 규모가 크고 가운데에 있는 대청도 넓다. 그러나 구조와 양식 등은 민가와 거의 비슷하다.

 

신촌향사는 우리나라에 별로 많지 않은 용도의 건물로 주목 받고 있다. 

 

17.추자처사각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9호

지 정 일 1975.03.12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추자면 영흥리 285 
시 대 조선시대


처사 박인택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 후손들이 지은 사당이다.

 

언제 지었는지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고, 처음에는 마을에 소규모의 초가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 그 뒤 현 위치로 옮겨 짓고 2차례에 걸쳐 보수를 하였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후손이 병에 걸려 갖가지 약으로도 고치지 못하였는데 꿈에 박인택이 나타나 사당을 짓고 공을 드리면 나을 것이라 하여 그렇게 하자 병이 바로 나았다고 한다.

 

처사 박인택은 조선 중기에 추자도로 유배와 불교적 생활을 하면서, 주민들의 병을 치료해 주고 불교 교리도 가르치면서 살았다고 한다.

 

18.존자암지 세존사리탑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17호

지 정 일 2000.11.01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하원동 산1-1(존자암지 경내)

시 대 고려시대

 

존자암 터에 있는 석종 모양의 사리탑이다. 존자암 터의 북쪽에 위치해 있는 이 사리탑은 제주도에 많은 현무암으로 만들어졌다. 팔각으로 이루어진 기단 위에 탑신석이 있고 그 위에 옥개석을 얹은 모습이다.

 

팔각으로 이루어진 기단석 위 둥근 받침대 중앙에 마련된 볼록형 사리공은 탑신석 아래 오목하게 생긴 모양과 꼭 맞물리도록 되어 있다. 옥개석 위에는 보주로 장식하고 있어 유려한 곡선미와 세련된 조각미 등이 예술적·학술적으로 가치가 있다.

 

 

19.오현단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호

지 정 일 1971.08.26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이도1동 1421-3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이곳 제주도에 유배되거나 방어사로 부임하여 이 지방의 교학 발전에 공헌한 다섯 분(5현)을 기리고 있는 제단으로, 이들의 위패를 모시던 귤림서원의 옛 터에 마련되어 있다.

 

5현은 중종 15년(1520)에 유배된 충암 김정 선생, 중종 29년(1534)에 제주목사로 부임해 온 규암 송인수선생, 선조 34년(1601)에 안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선생, 광해군 6년(1614)에 유배된 동계 정온 선생, 숙종 15년(1689)에 유배된 우암 송시열 선생 등 다섯 분이다.

 

고종 29년(1892) 제주사람 김의정이 중심이 되어 비를 세우고 제단을 쌓아놓았는데, 원래는 선조 11년(1578) 임진이 목사로 있을 때, 판관 조인준이 가락천 동쪽에 충암 김정을 모시기 위한 충암묘를 지은 것이 그 시초이다. 현종 6년(1665) 판관 최진남이 이 묘를 장수당 남쪽인 지금의 자리로 옮겨놓은 뒤, 숙종 8년(1682) 예조정랑 안건지를 제주도에 파견하여 ‘귤림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여 김정 선생·송인수 선생·김상헌 선생·정온 선생 등 네 분의 위패를 모시도록 하였다. 숙종 21년(1695) 송시열 선생도 함께 모시면서 5현을 배향하게 되었으나, 고종 8년(1871) 서원 철폐령이 내렸을 때 서원이 헐리게 되어, 그 터에 이 제단을 설치하게 되었다.

 

단내에 있는 5현의 자취로는 철종 7년(1856) 송시열 선생의 글씨로 하여 판관 홍경섭이 바위에 새긴 ‘증주벽립’이라는 글씨와, 김정 선생과 송시열 선생의 ‘적려유허비’가 남아있다.

 

20.명월대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7호

지 정 일 1981.08.26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후기 이 지방 유학자들과 시인들이 어울려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남읍리와 함께 양반촌으로 알려진 한림읍 명월리에 있다.

 

명월대는 옆으로 맑고 고운 시냇물을 끼고 있으며, 수십 그루의 팽나무가 울창한 자연림을 이루고 있어 한여름 찌는 듯한 더위를 식히기에 좋은 곳이다. 또한 아담한 반달형 돌다리가 놓여 있어 운치를 한층 돋구고 있다.

 

21.대정성지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2호

지 정 일 1971.08.26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보성리,인성리,안성리

시 대 조선시대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조선 태종 16년(1416) 제주도의 행정 구역 정비로 대정현이 설치되고, 2년 뒤에 현감 유신이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읍성을 축조했다. 이 읍성은 산과 계곡을 끼고 있는 일반적인 읍성과는 달리 집과 밭들 사이에 만들어져 있다.

 

성벽의 둘레는 약 1614m이고, 높이는 약 5.1m이다. 지금은 성벽 안에서 군데군데 옛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성문은 동·서·남문 3개만 설치되고 북문은 처음부터 만들지 않았다. 이곳을 중심으로 관아와 창고들이 있었으며, 이 지역 방어를 위하여 10여 곳에 봉수대를 설치해 먼 곳에 외적의 침입을 알렸다.

 

22.법화사지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3호

지 정 일 1971.08.26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하원동 1071

시 대 고려시대

 

법화사는 12세기∼15세기에 제주도에서 번창했던 절이다.

 

18세기 전기에 제주목사 이형상이 제주도의 절 3곳을 불태워 없앨때 완전히 불타버렸으며, 지금의 건물들은 1987년 다시 세운 것이다.

 

현재의 법당 자리에서 금당지로 보이는 건물터가 발견되었는데, 앞면 5칸·옆면 4칸에 면적이 약 100평인 대규모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법화사는 건물 기단의 바닥돌이 2단으로 되어있고, 면석의 기법이 특이하며, 출토된 도자기와 기와조각 등으로 보아 10세기∼12세기 경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규모가 매우 큰 절로 제주도 3대 사찰 중 하나인 중요한 유적이다.

 

23.혼인지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7호

지 정 일 1971.08.26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 1693 
시 대 미상


혼인지는 탐라(지금의 제주)의 시조인 고·양·부 삼신인이 지금의 온평리 바닷가에 떠밀려 온 나무상자 속에서 나온 벽랑국의 세 공주를 각각 맞이하여 혼인을 올렸다는 조그마한 연못이다.

 

삼신인은 수렵생활을 하고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살다가, 나무상자 속에서 나온 송아지와 망아지를 기르고 오곡의 씨를 뿌려 태평한 생활을 누렸으며, 이때부터 농경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나무상자가 발견된 해안을 황루알이라고 부르는데, 황루알에는 세 공주가 바위에 디딘 발자국이 남아있다고 한다.

 

24.존자암지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43호

지 정 일 1995.07.13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하원동 산1-1 
시 대 미상


『동국여지승람』과 『탐라지』 등의 문헌에 나한을 모셨던 절로 기록되어 있는 절터이다.

 

나한은 아라한의 준말로 인간의 소원을 빨리 성취시켜 주는 복전이라 하여 일찍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다.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큰 절에는 대부분 영산전을 두어 석가의 10대 제자를 비롯하여 16나한, 500나한 등을 봉안하고 있으며 나한전이나 응진전을 따로 둔 절도 있다.

 

1990년대의 발굴조사에서 건물지, 부도, 배수시설과 기와조각, 분청사기조각, 백자파편들이 발견되었으며, 1998년부터는 복원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절을 세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건물지 북쪽에 있는 부도(제주도 유형문화재 제17호)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25.하원동 탐라왕자 묘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54호

지 정 일 2000.06.21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하원동 21 
시 대 조선시대


이원조의 『탐라지초본』, 『대정군읍지』와 김약익의 『심재집』과 같은 문헌기록과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통해 왕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내부구조는 잘 다듬어진 석재로 4∼8단의 판돌과 깬돌로 축조된 네모형의 돌덧널무덤(석곽묘)이다. 자기편과 소옥·지석좌대·석재향료·문인석 등이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에 축조되었음을 가르쳐 준다.

 

하원동 탐라왕자 무덤은 당시 고위층의 무덤으로 제주도 무덤 변천과정 연구에 높은 학술적·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26.서귀진지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55호

지 정 일 2000.11.01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서귀동 717-4번지 외 
시 대 조선시대


서귀진은 탐라십경의 하나로서, 조선시대 제주의 대표적인 방어유적으로 3성 9진에 속하며 정의현 관할이었다.

 

서귀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세종대왕실록』(1439. 2. 4) '서귀방호소에는 성곽이 없다고 하여 성을 쌓도록 요청하니, 허락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최초 축성은 1439년대로 판단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는 서귀성은 석축으로 주위가 161척(48m), 높이 5척(1.5m)이라 기록하고 있다.

 

서귀진은 본래 홍로천에 있었으나 조선 선조 23년(1590) 이옥 목사가 현재 위치로 옮겨 축성했다. 규모는 주위 251m, 높이 3.6m에 이르는 진성이었다 한다. 1920년대 한일합방 시기까지에는 기와 건물 3동과 성담이 남아 있어, 당시에는 일본군의 관청으로 사용되어지다가 제주도 4 ·3사건이 발생하자 이곳의 성담을 헐어 마을을 방어하는 축성용으로 사용하였고, 이후에는 주거용 건축 용도와 ‘밧담’으로 무분별하게 훼손되어, 지금에는 당시의 성담이었던 담들이 ‘우잣담’과 ‘성굽담’으로 일부 남아 있다. 이러한 서귀진의 자세한 자료는 1695년 제주목사 이익태의 탐라십경 중 하나로 서귀소라는 그림에 당시의 서귀진 규모가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서귀진은 조선시대 제주의 방어유적인 3성 9진의 하나로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크다. 

 

 

27.양금석 가옥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민속문화재  제3-45호

지 정 일 1978.11.14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신예1리 1313 
시 대 근대


60여 년전에 지은 양씨 종가댁이다. 600여 평의 대지 한가운데 안채가 있으며 바깥채는 안채와 마주보게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마루를 중심으로 왼쪽에 큰방이 있고 오른쪽에는 부엌이 있다. 툇마루는 큰방과 마루 앞에만 있어 부엌 공간이 넓으며, 바깥채는 가운데 마루를 중심으로 왼쪽 앞에 방과 뒤쪽에 곡물을 보관하는 고팡이 있다. 마루방의 앞쪽과 뒤쪽에는 툇마루가 배치되어 있다.

 

양씨 종가댁은 안채·바깥채를 통틀어 방이 넷이고 툇마루가 셋이며, 마루방 셋이 배치되어 있는 제주도 전통 초가 양식 중에서도 다양한 공간구성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28.송종선 가옥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민속문화재  제3-46호

지 정 일 1978.11.14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하천리 720 
시 대 근대


제주도 민가의 일반적 형태를 지닌 초가집이며 벽은 검은 돌로 쌓았다.

 

지붕은 선이 완만하고 매끈한 유선형이며 지붕이 날아가지 않도록 새(띠)를 바둑판처럼 얽어 놓았다.

 

제주도의 자연환경과 생활양식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29.선덕사 대적광전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제8호

지 정 일 2005.10.05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상효동 1156-6 
시 대 근대


대적광전은 주불을 법신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금당을 말한다.

 

선덕사 대적광전은 1987년에 시작하여 1993년에 완공되었다. 중층 목조건물로서, 하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 상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서 면적 197.48㎡이다. 공포는 다포식이며 하층은 외3출목, 내6출목, 상층은 외3출목 내7출목이다. 가구는 이고주칠량가이고 천장은 우물(井)반자 천장이며 바닥은 상하층 통층으로 우물마루이다. 지붕은 중첨으로 팔작지붕이다. 공포의 세부적인 특성은 쇠서 받침을 초화형으로 하였는데, 이러한 장식적 수법은 조선조 후기로 내려올수록 그 경향이 뚜렷한 것이 특징이다. 주불은 비로자나불이며 좌우에는 아미타불과 석가모니불을 모셨다.

 

선덕사가 있는 선돌에서는 오래 전부터 수행납자들이 수행하였다. 1870년대 쌍월선사와 응월화상이 수행하셨던 곳으로서, 현대에 와서는 고승 고암대종사에 의하여 1982년부터 조근호의 설판으로 중창불사가 이뤄졌다.

 

선덕사 대적광전은 이처럼 축조시기가 짧지만, 제주도내 사찰 금당 중에서는 유일하게 중층 목조로 축조되어 있는 등 사찰 건축물의 연구 자료로서의 학술적 가치가 높아 향토문화 보존에 필요하다고 인정되어 문화재자료로 지정하였다. 

 

(제주도의 무형문화재)

 

1.갓일


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지 정 일 1964.12.24
기능보유자  ①총모자 : 김인 (1920년 2월 16일생) 제주 제주시 도두 1동 1979번지
                  ②양 태 : 장인자 (1940년 9월 8일생) 제주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247번지


갓은 조선시대 성인 남자들이 외출할 때 반드시 갖추어야 할 예복중의 하나로 원래는 햇볕, 비, 바람을 가리기 위한 실용적인 모자였으나 주로 양반의 사회적인 신분을 반영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갓은 넓은 의미로 방갓형과 패랭이형 모두를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흑립·칠립·평립이라고 부르며 갓일은 갓을 만드는 과정을 말한다.

 

갓일은 총모자, 양태, 입자로 나뉜다. 총모자는 컵을 뒤집어 놓은 듯한 갓 대우 부분을 말꼬리털 또는 목덜미털을 사용해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양태는 대나무를 머리카락보다 잘게 쪼개서 레코드판처럼 얽어내는 과정을 말하며, 입자는 총모자와 양태를 조립하면서 명주를 입히고 옻칠을 해서 제품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세 가지 과정은 서로 재료가 다르고 솜씨의 격차가 심하기 때문에 생산지를 달리하거나 따로 행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 민족의 의생활에서 필수품목의 하나였던 갓은 의복의 변화와 단발령 이후 점차 수요가 줄어들어 현재 통영, 예천, 제주 등지에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문화재 보전차원에서 전통을 계승하고 보호하고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기능보유자로는 입자장에 정춘모, 박창영, 양태장에 장순자, 총모자장에 김인이 있다. 

 

2.망건장


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제66호  
지 정 일 1980.11.17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삼양동 2091번지
기능보유자  이수여(1923년 6월 1일생)


망건은 갓을 쓰기 전에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말총으로 엮어 만든 일종의 머리띠로, 고려말·조선초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망건을 만드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망건장이라고 한다. 본래 한국에서 발달되어 중국에까지 전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고 혹은 명나라 사신에게 전래되었다고도 하나, 재료나 용도, 형태가 중국의 것과 다르다. 그러므로 망건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토착화된 뒤 말총을 재료로 사용하는 방법을 도리어 중국으로 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망건은 윗부분을 졸라매는 당(살춤), 아랫부분을 졸라매는 편자(선단), 그물처럼 얽혀져 이마부분을 감싸는 앞, 뒤통수를 싸매는 뒤로 구성된다. 이 외에도 계급을 표시하는 장식품으로 망건을 사치스럽게 꾸미기 위한 관자와 풍잠이 있다. 망건의 재료로는 말의 꼬리털이나 사람의 머리카락을 사용한다. 사람의 머리카락은 귀하게 여겨 해진 망건을 수리할 때나 쓴다. 망건을 만드는 과정은 편자짜기에서 앞뒤뜨기로 이어지며 당을 걸고 망건을 삶아서 부드럽게 한 다음 염색을 하고 조립을 한다.

 

망건은 매우 한국적인 의관의 일부로서 소중하게 여겨 왔는데 개화기 이후 삭발에 따라 점차 쇠퇴해 수요가 거의 없게 되었다. 망건장은 전통적인 공예기술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으며, 기능보유자로 제주도의 이수여씨가 인정되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3.탕건장


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제67호  
지 정 일 1980.11.17
소 재 지  제주 
기능보유자  김공춘(1919년 5월 2일생)

 

탕건은 남자들이 갓을 쓸 때 받쳐 쓰는 모자의 일종으로, 사모나 갓 대신 평상시 집안에서 쓰며 말총이나 쇠꼬리털로 만든다. 이러한 탕건을 만드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탕건장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관직자가 평상시에 관을 대신하여 썼고, 속칭 ‘감투’라고도 하여 벼슬에 오르는 것을 일컫는 ‘감투쓴다’는 표현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한국의 탕건은 중국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고구려 벽화나 고대의 관모에서 변화된 것인지 밝히기가 어렵지만, 고려시대에는 중국 송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신라의 최치원이나 고려시대 인물인 이색, 정몽주 등을 그린 고려 후기의 초상화에서 쓰고 있는 모자가 탕건모양과 같기 때문이다. 이 모양은 조선 전기까지 이어진다.

 

탕건은 우리나라의 말총이 대부분 제주도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제주도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졌다. 탕건은 홑탕건과 겹탕건, 바둑탕건으로 분류된다. 모두 형태는 같으나 겹으로 또는 2중, 3중으로 엮어 나가는 방법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 것이다. 바둑탕건은 사각무늬를 놓은 것인데, 이는 탕건이 독립된 모자 구실을 함에 따라 장식화된 것이다.

 

탕건장은 전통적인 공예기술로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제주도 김공춘 씨가 탕건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4.제주 칠머리영등굿


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 
지 정 일 1980.11.17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 2097 
기능보유자  김윤수(1946년 7월 9일생)


제주 칠머리당영등굿은 제주시 건입동의 본향당인 칠머리당에서 하는 굿이다. 건입동은 제주도의 작은 어촌으로 주민들은 물고기와 조개를 잡거나 해녀작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마을 수호신인 도원수감찰지방관과 요왕해신부인 두 부부에게 마을의 평안과 풍요를 비는 굿을 했다. 부부수호신과 함께 영등신을 맞이하여 소중히 위하는 굿을 했는데, 영등신은 외눈백이섬 또는 강남천자국에서 2월 1일에 제주도에 들어와서 어부와 해녀들에게 풍요를 주고 2월 15일에 본국으로 돌아간다는 내방신이다.

 

당굿은 칠머리당에서 음력 2월 1일에 영등환영제와 2월 14일에 영등송별제로 한다. 주민들은 영등신이 환영제보다 성대한 송별제를 받고 이튿날인 15일에 구좌읍 우도에서 다시 송별제를 받은 뒤 떠난다고 믿는다. 따라서 환영제 때는 배의 주인이나 신앙심이 깊은 이들만 모여서 간소하게 굿을 하고, 송별제는 어업관계자와 해녀, 그밖의 신앙민들이 많이 모인 가운데 하루종일 큰굿으로 치른다.

 

굿날이 되면 건입동 주민 뿐 아니라 제주시내의 어부와 해녀들도 참가한다. 그리고 각 가정에서 제사에 쓰일 음식을 차려서 당으로 가져온다. 매인심방이 징과 북, 설쇠 등의 악기 장단에 맞추어 노래와 춤으로 굿을 진행한다. 굿의 순서는 모든 신을 불러 굿에 참가한 집안의 행운을 비는 초감제, 본향당신인 도원수감찰지방관과 요왕해신부인을 불러 마을의 평안을 비는 본향듦, 용왕신과 영등신이 오시는 길을 닦아 맞이하고 어부와 해녀의 안전을 비는 요왕맞이, 마을전체의 액을 막는 도액막음, 해녀가 바다에서 잡은 것들의 씨를 다시 바다에 뿌리는 씨드림, 영등신을 배에 태워 본국으로 보내는 배방송, 처음 불러들인 모든 신들을 돌려보내는 도진으로 끝이 난다.

 

제주 칠머리당영등굿은 영등신에 대한 제주도 특유의 해녀신앙과 민속신앙이 담겨져 있는 굿이며, 우리나라 유일의 해녀의 굿이라는 점에서 그 특이성과 학술적 가치가 있다. 

 

2009년 9월 30일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제주민요

 

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제95호 
지 정 일 1989.12.01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기능보유자  (후보자) 이선옥


제주도는 흔히 바람과 돌과 여자가 많다고 하여 삼다도라고도 한다. 직업의 종류에 따라 여러 가지 민요도 많이 전해지고 있어 민요의 보물창고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제주도에서 불려지는 토속적인 민요와 통속적인 민요는 민요를 부르는 사람들의 직업 종류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농사짓기소리, 고기잡이소리, 일할 때 부르는 소리, 의식에서 부르는 소리, 부녀요와 동요, 통속화된 잡요로 나눌 수 있다. 농사짓기소리로는 <사대소리>, <밭밟는소리>가 있고, 고기잡이소리로는 <노젓는소리>, <멸치후리는소리> 등이 있다. 일하면서 부르는 소리로는 <고래소리>, <가래질소리>, <방앗돌굴리는소리> 등이 있으며, 의식요에는 <행상소리>, <달구소리>, <꽃염불> 등이 있다. 부녀요와 동요로는 <시집살이노래>, <애기흥그는소리>, <원님노래> 등이 있다. 잡요로는 <오돌또기>, <이야홍타령>, <서우젯소리> 등이 있다.

 

제주민요는 일하면서 부르는 노동요가 많고 부녀자들이 부르는 민요가 흔하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노랫말도 특이한 제주도 사투리를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경기지역 민요보다 구슬프다. 제주민요는 한스러운 느낌을 푸념하듯이 나타내어 색다른 정취를 자아낸다.

 

6.해녀노래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제1호

지 정 일 1971.08.26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 852 
기능보유자  안도인


해녀노래란 제주도 해녀들이 배를 타고 나가거나 들어올 때 노를 저으면서 부르는 민요를 말한다. 이 민요와 노를 젓는 동작은 밀착되어 나타나며 노동을 한결 가볍고 즐겁게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한다.

 

해녀들은 일할 때 사용하는 테왁, 망사리, 빗창 등으로 장단을 치면서 부른다. 내용을 보면 일의 고됨과 일상생활을 정감있게 표현한 것으로 생업에 대한 강렬한 기백이 나타나 있고, 역동적이며 직설적인 색채가 강하다. 두 사람이 교대로 선소리를 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이여싸’등의 후렴으로 받는다. 때로는 어부가 선소리를 하고 해녀들이 뒷소리를 하기도 한다. 가창형태가 복잡해 선소리에서 나타나는 악구의 마디 수는 일정하지 않지만, 두 마디를 짝으로 하여 높은 음에서 낮은 음으로 이어지는 선율은 일정하게 반복된다. 박자는 규칙적인 6/8박자이며, 속도는 보통빠르기에서 아주빠르기까지 일하는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연결된다.

 

해녀노래는 어업요 중에서 가장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민요로 제주도에 사는 예능보유자인 안도인 씨와 보유단체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7.영감놀이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제2호

지 정 일 1971.08.26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 826 
기능보유자  이중춘(1933년 5월 3일생)


영감이란 도깨비의 제주도말인 도채비를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영감놀이는 제주도의 무당굿 중 놀이굿의 한 종류로 도깨비신에 대한 굿인 동시에 가면놀이이며, 물고기가 많이 잡히길 기원하거나 병이 낫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행해진다.

 

영감놀이는 마당에 제삿상을 차린 후 밤에 행해진다. 제삿상 위에는 돼지머리, 수수떡, 소주 따위의 영감신이 즐겨먹는 음식을 차린다. 한 사람이 나와 영감신에게 굿하는 시간과 이유, 그리고 참여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알린 후 영감신을 부르면, 종이로 된 도깨비탈과 헌 도포, 헌 짚신, 헌 갓, 곰방대로 분장한 무당 두 사람이 들어온다.

 

영감신은 해학적인 대화와 경망스런 행동으로 한바탕 수선을 떨면서 제삿상의 음식들을 대접받는다. 이 때 아픈 사람을 마당에 앉혀 돗자리로 환자의 몸을 두르고 푸닥거리를 한다. 푸닥거리가 끝난 뒤 제물을 실은 짚배를 바다 멀리 띄워 보낸다.

 

이 놀이는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종합예술제라는 점에서 민중의식을 엿볼 수 있으며, 또한 연극의 시작점을 찾아 볼 수 있는 가면극으로서 그 가치가 높다.

 

8.성읍민속마을 오메기술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제3호

지 정 일 1990.05.30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673 
기능보유자   김을정(1925년 12월 1일생)


제주도는 논이 매우 귀한 섬이라 쌀로 술을 빚지 않으며, 술의 재료는 밭곡식인 ‘조’다. 제주도는 근래까지도 청주나 소주를 좁쌀로 빚는 것이 정통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좁쌀로 술을 빚어 온 역사는 조의 경작만큼 오래되었다.

 

제주도에서는 좁쌀로 탁주와 청주 등을 빚어 왔는데 탁주를 두고 ‘오메기술’이라고 한다. 오메기술은 탁주를 만드는 술떡의 이름인 ‘오메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 떡으로 만든 술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오메기술을 만드는 데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 보통 40되들이 밑술을 담는데 메좁쌀 12되와 누룩을 만들 밀과 보리 10되가 든다. 술은 언제라도 빚을 수 있지만 24절기 중 상강(음력 10월 24일)이 지나서 새좁쌀로 빚어야 좋다. 성읍민속마을 오메기술은 기능보유자 김을정씨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9.송당리 마을제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제5호

지 정 일 1986.04.10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기능보유자  송당리마을제 보존회


송당리 마을제는 제주도 여러 마을의 당신들의 원조인 벡주또마누라신에게 제사를 지내 마을의 평화를 기원하는 마을단위의 제사이다. 매년 음력 1월 13일·2월 13일·7월 13일·10월 13일에 행하여진다.

 

벡주또마누라신은 서울 남산 송악산에서 태어나 다섯 곡식의 씨앗을 가지고 제주도에 온 산육·농경의 여신으로 한라산에서 솟아난 수렵·목축의 남신인 소로소천국과 결혼하여 아들 8명과 딸 28명을 낳았는데, 그 자손들이 고루 뻗어 제주도 전 지역 368개 마을의 당신이 되었다고 한다.

 

마을제는 마을사람들이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신문을 열어 달라고 비는 궷문열림으로 시작된다. 굿하는 장소와 시간을 고하고, 굿하는 이유와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알리는 초감제와 신궁문을 여는 군문열림, 그리고 신이 내려오는 길이 깨끗하도록 나쁜 기운을 없애는 새도림을 한 후에 옥황상제와 벡주또마누라신을 초청하는 신청궤를 행한다. 맞이한 신들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춤과 노래를 하는 풍니놀이와 마을의 운수를 점쳐보는 도산받음을 하고, 마을의 액운을 막고 행운을 비는 액막음과 마지막으로 초청해 온 신들을 돌려보내는 도진의 순서로 진행된다.

 

송당리는 ‘당신앙의 뿌리’가 되는 성스러운 장소로써 송당리 마을제는 제주도에서 행해지는 마을제 가운데 대표라 할 수 있다.

 

10.납읍리 마을제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제6호

지 정 일 1986.04.10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 
기능보유자  납읍리마을제 보존회


납읍리 마을제는 홍역신인 서신, 마을 수호신인 토신, 손님신인 포신에게 제사를 지내 마을의 평화를 기원하는 마을단위의 제사이다.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오다가 30여 년 전부터는 봄에만 지내고 있다.

 

제사는 제물을 제삿상에 올리는 전폐례로 시작된다. 술을 올리고 절하는 초헌례와 축문을 읽는 독축, 다시 술을 올리고 절하는 아헌례를 행한 후에 마지막으로 술을 올리고 절하는 종헌례를 거쳐 제삿상의 그릇들을 물리는 철변두와 향을 피우는 그릇과 위패를 물리는 망료위(望燎位)의 순서로, 유교적 제사방법에 따라 이루어진다. 제사가 끝나면 제물로 썼던 돼지를 잡아 제사관들과 참가자들이 나누어 먹는다.

 

납읍리 마을제는 남자들이 행하는 유교적 마을제인 포제와 여성들이 행하는 무속 마을제인 당굿이 병존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11.덕수리 불미공예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제7호

지 정 일 1986.04.10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덕수리 2137-8 
기능보유자  송영화


불미공예는 주철(무쇠)로 솥과 쟁기날을 제작하는 공예기술이다. 제주도는 예로부터 본토와의 교역이 불편했기 때문에 생활필수품이나 농기구의 대부분을 자급자족해 왔는데 덕수리의 불미공예가 대표적인 것이다.

 

제주도 주물공예의 형태는 손의 힘으로 바람을 일으켜 쇠를 녹이거나 달구는 손풀무와 땅바닥에 골을 파서 중간에 굴대를 박고 그 위에 널빤지를 걸쳐놓아 한쪽에 세 사람씩 서서 널빤지를 널뛰기하듯 디뎌가며 바람을 일으키는 골풀무가 있다. 손풀무는 다시 똑딱불미와 토불미로 구분한다. 똑딱불미에서는 달군 쇠를 두들겨 주로 칼이나 호미 등을 만든다. 토불미에서는 둑(용광로)에서 녹인 쇳물을 미리 만들어진 주물틀에 부어넣어 주로 솥, 볏, 쟁기날 등을 만든다. 골풀무를 청탁불미(또는 디딤불미, 발판불미)라 하는데 그 규모와 만들어지는 제품은 토불미와 같으나 바람을 일으키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제주도의 주물공예는 가장 단순한 구조인 똑딱불미에서 토불미, 그리고 발의 힘으로 바람을 일으켜 무쇠를 녹이는 청탁불미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짙다. 1945년 전후부터는 기계의 힘으로 바람을 일으키는 변형된 청탁불미가 도입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나, 그나마 무쇠솥 대신 양은솥이 사용되고, 쟁기 대신 경운기로 밭을 일구기 때문에 제주도의 주물공예는 점점 쇠퇴해가고 있다.

 

현재 불미공예 기능보유자인 송영화씨는 매년 10월중에 덕수리에서 불미공예 재현행사를 여는 등 불미공예의 전통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 

 

12.정동벌립장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제8호

지 정 일 1986.04.10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한림읍 귀덕리 1517 
기능보유자  홍달표('31.12.9)


정동벌립은 농부들이 쓰는 모자의 한 종류로 제주도 고유의 것이다. 패랭이와 비슷한 모양으로 비를 피하거나 햇빛을 막기 위하여 써 왔었다.

 

정동벌립의 제작은 북제주군 한림읍 귀덕 1리 성로동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 정동벌립이 언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어찌하여 귀덕 1리에서만 집중적으로 전승되어 오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정동벌립은 크게 절벤, 망, 천으로 나누어지는데, 이 외에도 맨처음 시작되는 가마귀방석 및 절벤과 망 사이, 망과 천 사이의 사갑바위 등이 있다. 정동벌립의 재료는 제주도 일원, 특히 산간에서 자라는 정동(댕댕이덩굴)을 쓴다. 작업공정은 크게 세 과정으로 나누어지는데, 제 1과정은 가마귀방석에서 절벤을 만드는 과정이고, 제 2과정은 절벤에서 망을 만드는 과정이며, 제 3과정은 망에서 천을 만드는 과정이다. 이렇게 하여 겯는 일이 마무리되는데, 정동벌립 하나를 겯는데 보통 4∼5일이 걸린다. 종류는 양태나 탕건처럼 뚜렷한 구분이 없으며, 단지 도리수의 차이에 따라 상질·중질·하질로 나누어진다.

 

정동벌립은 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보전되고 있으며, 기능보유자로 홍달표씨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13.방앗돌 굴리는 노래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제9호

지 정 일 1986.04.10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인덕면 덕수리 2511 
기능보유자  강원호


방앗돌굴리는 노래란 제주도에서 연자방아의 웃돌(굴리어 가는 맷돌)과 알돌 (바닥돌)을 들이나 산에서 만든 후, 마을 주민들이 마을 안으로 굴려 오면서 부르던 민요를 말하며, 솔깃소리라고도 한다. 연유를 보면, 방앗돌을 굴리는 일은 엄청난 힘을 필요로 하고, 많은 사람이 동원되기 때문에 단결된 힘을 돋우기 위하여 부르게 되었다.

 

이 민요는 한 사람의 선소리에 따라 일꾼들 모두가 일제히 ‘어기영차’하며 후렴을 받는 선후창형식으로, 가사는 작업실태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다. 단장형의 리듬꼴이 자주 나타나는 편이고, 속도는 대체로 느리며, 리듬적 변화가 많은 만큼 선율장식도 자주 발생하고 있다.

 

방앗돌굴리는 노래는 오늘날에 거의 사라져버린 운반노동요의 하나로, 남제주군 덕수리에 사는 강원호씨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14.멸치후리는 노래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지 정 일 1986.04.10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구좌읍 동김녕리 1667-8 
기능보유자  김경생(1929년 7월 18일생)


멸치후리는 노래란 제주도의 해안마을에서 여럿이 그물로 멸치를 후리면서 부르는 민요를 말하며, 멜후림소리라고도 하는데 멜이란 멸치의 제주도 말이다. 멸치후리기는 먼바다에서 그물로 멸치떼를 후린 후 모래가 깔린 해안가로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끌어당기는 작업이므로 단결된 힘을 돋우기 위해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이 민요는 한 사람의 선소리꾼이 노래를 이끌어가고, 그물을 당기는 사람들은 동작에 맞추어 후렴구를 부르는 선후창형식이다. 악곡구조는 두마디 선소리와 두마디 후렴으로 되어 있는데, 선소리와 후렴의 선율은 서로 다르며, 늦은 굿거리장단이나 중중모리장단으로 부른다. 가락이 안정되고, 강세처리도 박절구조에 따라 비교적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거의 변함없이 동일악구를 반복하면서 전개된다. 소리의 구성음은 도·레·미·솔로 되어 있고, 레로 끝마쳐서 씩씩한 느낌을 준다.

 

멸치후리는 노래는 어업노동요로, 멸치를 후릴 때 그물을 잡아당기는 동작과 밀착되어 있는데 1960년 이후 멸치후리기가 자취를 감추게 됨에 따라 일과 분리된 민요전승자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15.고소리술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제11호

지 정 일 1995.04.20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673 
기능보유자  김을정


이원진이 쓴『탐라지』에 다용소주라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 이 고소리술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술은 발효주인 오메기술을 증류시킨 것으로 조를 비롯한 잡곡을 재료로 삼았다. 술독에 묻어둔 밑술을 솥에 넣어 고소리로 증류해서 소주를 고아내는 것을 ‘술닦는다’라고 하고, 그 술을 두고 고소리술이라고 한다.

 

제주도에서 소주를 빚는 전통적인 용구로는 소줏돌과 고소리 두 가지가 있다. 소줏돌은 솥뚜껑처럼 돌을 다듬어 만든 것인데, 한가운데 구멍이 나 있다. 고소리는 소주를 고아내리는 오지그릇이다. 고소리술을 만들 때 누룩이 썩어서 검은색이 나지 않아야 하고, 술이 신맛이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쪄낸 술떡을 잘 식힌 뒤 누룩에 반죽해야 한다. 또, 고소리에서 헛김이 새 나오지 않도록 띠를 잘 매줘야 하며, 일정하게 불을 지펴주어야 한다.

 

고소리술은 현재 기능보유자 김을정씨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16.고분양태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제12호

지 정 일 1998.04.08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삼양2동 2079 
기능보유자  강경생


고분양태는 사라져가는 전통관모공예의 하나로 양태(갓에서 챙부분)중의 최고급이다. 고분양태의 재료는 날대와 빗대 등 대오리 등을 엮어서 만드는데, 기능이 복합적이다. 고분양태는 전통적인 관모공예로 대표적인 무형문화재이다.

 

17.제주큰굿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제13호

지 정 일 2001.08.16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 826 
기능보유자  이중춘


제주 큰굿은 ‘두이레 열나흘 굿’ 혹은 ‘차례차례 제 차례 굿’으로 굿을 하는 기간, 규모면에서 가장 큰 종합적인 연희이다. 이는 무당집에서 하는 ‘신굿’과 일반적인 가정에서 행하는 ‘큰굿’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우리나라 굿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고, 제주도 사람들의 인생관, 우주관, 자연관을 비롯한 삶의 지혜가 담겨 있다. 굿의 춤, 노래와 사설 모두가 문화재적 가치가 높고, 특히 사설은 중세어연구를 위한 국문학적 가치가 매우 높다.

 

4대째 무업으로 잇고 있는 이중춘은 16세부터 굿법을 배우기 시작하여 지금은 영감놀이를 비롯한 여러 큰굿을 주관하며 제주 큰굿의 원형보존과 전승에 힘쓰고 있다. 

 

18.제주도 허벅장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제14호

지 정 일 2001.08.16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구억리 171 
기능보유자  신창현


도공 신창현 선생은 남군 대정 구억리 옹기일을 하던 집안의 둘째 아들로 1993년 출생했다. 아버지 신봉오, 어머니 홍신생씨이다. 지금도 모두 고인이 되셨다. 당시는 신창현(이하‘신 도공’이라 표함)씨 가정을 비롯하여 구억 · 신평·고산·무릉·신도·영락 등지 반경5km 내에 대 단위의 제주도 전통 가마들이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구억리 마을은 약 80%가 옹기일에 전념을 하고 있었다.

 

신 도공이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형인 고, 신 창수 씨는 이미 도공일 을 하고 있었다. 집안의 분위기가 모두 옹기 만드는 일에 전념을 하고 있었던 터라 신 도공도 1954년 (15세)부터 는 본격적으로 도공에 뜻을 두게 되었다. 원래 옹기일 을 하던 아버지 신봉오씨는 당시 최대의 도공으로 명성을 떨치던 고, 신봉염 도공 밑에서 일할 것을 정했다. 신봉염 도공은 신 도공을 보고 약간의 일을 시키고 난 다음, 본인이 맘에 들었던지 신 도공에게 물레를 마련해 주고 본인의 물레 앞에 설치하도록 하여 완전한 실습 과정을 반복해 나가는 1:1의 전수 과정을 택했다. 신 도공은 스승의 지시를 따르면서 옹기일 에 관한 모든 것들을 두루 섭렵해 나갔다. 당시의 도공들은 힘들게 일하며 어깨 너머로 기술을 습득해 나가던 것이 일반적인 예이다. 그런데 도공은 스승에게 직접 사사를 받았던 것이다. 신 도공은 스승의 모진 질책과 특별한 배려로 제주의 전통 양식인 허벅을 위주로 하여 2백 여종의 질그릇을 정확하게 전수 받아가기 시작했다.

 

1956년(17세)에는‘아랫자리’라 하여 작은 그릇들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1958년 (19세) 신봉염 스승은 제주 전통의 모든 종류의 그릇을 대부분 전수가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직접 만들기 시작해도 좋다는 평가를 내렸다. 당 해부터 신 도공은 본격적인 한 가마를 들어가는 모든 종류의 그릇인'한굴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곧 사회적으로 평가를 받는 의미를 둔다고 하겠다. 그 결과‘한굴치’옹기들이 스승인 신봉염 선생과 너무나 똑 같이 나와서 옹기일 을 잘 하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고향인 대정읍 구억리에서 작업을 하다가 후에는 명성을 떨치면서 옹기 제작 주문을 많아져 대정읍 신평리·월광동 등에서 작업했다. 당시는 옹기를 잘 만들면 모든과정에 실패율이 적고 값도 비싸게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명장들에게는 선불을 줘야 옹기를 만들 수 있었을 만큼 주문이 쇄도했는데 신 대장도 그러했다. 한참 옹기 일도 주문이 많고 따라서 수입도 좋아지려는데 1960년대 중반 들면서 부터는 일거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제주전통 질그릇들이 갑자기 밀려드는 플라스틱 등 신소재 그릇들에 밀리면서 생간이 중단되었고 신 도공도 일 손을 그만두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 후부터 생계 유지 를 위해 닥치는 대로 막노동하며 근래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994년(54세) 대정읍 영락리 5번지(제주도예원)에서 전통 질그릇을 만들기 위한 작업들이 진행되자 이에 뜻을 같이했다. 그러나 도구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고 예전에 작업하셨던 사람들에게도 그 도구들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1998년(59세)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갖가지 도구들을 복원하여 도구 및 작업 실험 과정을 걸쳤다.

 

1999년(60세)에는 오랫동안 굳어진 기술을 점검하여 전통 옹기를 작업했고, 2000년(61세) 제주의 옛 허벅·항아리 등 수많은 질그릇을 전통방식 그대로 구워내면서 제주 전통 방식을 100%를 완벽하게 성공하였다. 이는 흙을 제취하고 하나의 그릇을 만들을 만들기까지 완전한 제주도 전통 수공예방식만을 고집하며 완성시킨 역사적이고도 힘든 작업이다.

 

제주도의 전통 질그릇들은 유약까지도 바르지 않을 정도로 자연에 고취된 제주만 의 양식을 하고 있다.

 

전 과정이 매우 전통적이면서도 과학적인 이러한 작업은 대규모로 인원을 투입해야 이뤄질 정도로 힘든 작업이다. 그러기에 제주 전통 질그릇 작업은 쉽게 맥이 끊겨버렸던 것 같다. 이제 도공 신창현 선생은 30여년만에 그 원류를 찾아 고집스럽고 외롭게 작업을 하며 그 제주의 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2000년 현재 도공 신창현 선생은 만드는 방식이 이미 사라져 버리고 제주도 도공들 외에는 만들 수 없었던 제주 전통 허벅을 비롯한 등덜기·죽절펭·통개·셋재비 등 약 80종을 복원해 놓고 있으며 2001년에는 120종 정도를 복원 계획을 세우고 작업해 나가고 있다.

 

19.제주 불교의식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제15호

지 정 일 2002.05.08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애월읍 시엄리 1068 
기능보유자  문명구(법명 성천)

 

제주도의 불교의식은 부처님께 드리는 음성공양과 재공양의 측면에서 육지부의 지역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특히 음성공양인 범음 곧 범패는 불교의식 중에서 재를 올리기 위해 부처님께 바치는 음악으로, 인간의 염원을 부처님께 전달하는데 사용된 현재까지 전하는 의식요이다.

 

불교적인 용어로 재라는 것은 죽은 자를 위한 영혼 천도를 위해 올리거나, 복을 받기 위해,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무운을 위해 올리는 의식으로 불교적 예배의식을 말한다.

 

이러한 불교 의례중 주로 상주권공재, 시왕각배재, 생전예수재, 수륙재, 영산재의 의식을 행하면서 부르는 노래를 일반적으로 범패라고 하며, 행해지는 각 재는 그 규모나 성격상에서 공통적인 부분도 있지만 약간은 다르다.

 

상주권공재는 죽은 자의 천도와 극락 왕생을 드리는 재로서 보통 하루가 걸리며 가장 규모가 작은 재이다. 49재, 혹은 소상, 대상에서 치러지고 있다.

 

시왕각배재는 저승을 관장하는 열 시왕에게 올리는 의례인데, 천도재나, 예수재, 영산재에서도 행해진다.

 

예수재는 윤년이 든 해에 치러지는 의식으로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의식이다.

 

수륙재는 물에 빠져 죽은 영혼을 위무 공양하거나, 절에서 강이나 바다로 나가서 방생재를 하면서 드리는 재이다.

영산재는 국가 단위의 큰 조직체를 위해 혹은 군인들의 무운장구를 위해서 올리는 재로써 규모가 가장 크며, 보통은 3일간에 걸쳐서 치러진다. 이러한 재에 따라서 불려지는 노래들이 고정되는 것은 아니고 영산재에서 불려지는 음악이 각 재에서 불려지고, 영산재는 위의 네재에서 불려지는 음악들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범패의 전래는 한 본토인 경우는 「삼국유사」월명사 조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불교가 전래되면서 의식을 진행하는 음악으로 자리했던 것이다. 제주도인 경우도 불교의 전래와 같이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일본의 도라악이 제주 불교음악이라고 하는 설이 이를 반증해 주고 있다.

 

그래서 불교의례 중 범음과 재 공양의 측면은 제주도 문화중 불교문화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많은 민중들의 호응을 얻고, 대를 이어 구전되어 내려온 한 문화형태라고 할 수 있다.

 

즉 제주불교의식은 제주에 불교가 유입, 전승되면서 제주의 전통문화와 연계되어 육지 지방과는 차별되는 특징이 있다. 즉 제주불교 세시의례 중 칠성제와 산신제가 육지지방에 비해 성대히 진행되고 있다. 이는 제주의 무속의례 중 산신제와 칠성제가 불교의례와 연계되어 전승되고 있기 때문이다.

 

육지지방에 비해 제주도의 불교의식은 사자천도의례가 중시되어 더욱 장엄하게 진행되고 있고, 천도재인 49재시에도 육지지방에서 소멸된 시왕각배를 시왕각청으로 순당하고 있고, 생전예수재의 경우에도 욕불(관불)의식이 전승되고 있다

 

불교의식 음악인 안채비 소리는 태징, 목탁, 북을 치면서 염불하는데, 육지지방에 비해 매우 느린 편이며, 제주지방의 토리를 가지고 있다. 또한 화청(회심곡)도 불교의 회심곡을 변이시켜 육지지방에서 불려지는 소리와는 다른 제주적인 토리로 불리워지고 있다.

 

20.제주농요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제16호

지 정 일 2002.05.08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건입동 1044-6 
기능보유자  이명숙

 

제주 지역에서 불리는 대표적인 밭일노래이다. 제주 지역은 화산회토의 자연 환경이 말해 주듯 밭일과 관련한 민요들이 많이 불렸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제주농요는 「밧 리는 소리」·「진사대 소리」·「타작질 소리」 등 세 수이며, 기능 보유자는 이명숙(여)이다.

 

제주농요는 밭농사가 지배적이었던 제주 지역의 일상적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불렸던 삶의 소리, 특히 노동 문화를 대표하는 노래로서 그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21.진사대소리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제17호

지 정 일 2005.10.05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 1589  
기능보유자  진선자 


사대소리는 제주도에서 불려지는 김매는 소리의 한 종류로 밭에서 김을 매면서 불려지기에 밭 내는 소리라고도 한다. 가락의 빠름과 느림에 따라 쪼른사대(자진사대소리)와 진사대 (긴 사대소리)로 나뉜다. 김매는 작업에서 불려지는 노래로는 제주도 전역에서 널리 불려지는 사대소리 외에 특정지역에서 부르는 노래로 아웨기,홍애기,더럼소리,상사소리,담불소리 등이 있으나, 이는 김매는 작업에서 다른 노래의 가악을 차용하여 김매는 노래 시설을 얹어서 부르기에 가락이 사대소리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사대소리 중 긴 사대소리는 여성들이 수눌음으로 함께 일을 하면서 목청을 길게 빼면서 느리게 불려지기에 상당한 가창 능력을 필요로 한다. 자진 사대소리는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제주도 해안마을에 널리 불려지는데,긴 사대소리는 특히 애월읍지역,그 중에서도 지금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장전리, 광령리, 용홍하, 소길리를 중심으로 독특한 창법으로 불려지고 있다. 자진 사대소리는 한 사람이 선로리를 부르면 여럿이“어긴여랑 사대로구나”와 같은 후렴을 받아 부르는 선후탕 방식 또는 여럿이 선소리를 돌려 부르는 교환창 방식이 주를 이루나, 긴 사대소리는 노래를 부르는 리더가 선창하면 여럿이 이러서 같은 가락을 부르는 제창과 유사한 창법으로 부른다. 따라서 특별한 후렴구가 긴 사대소리에는 없으며, 독창으로도 불리나 제창 방식으로 불려지는 것이 보편적이다. 이 노래는 사설과 가락에 대한 공감대가 김매는 작업에 참여한 여성들간에 널리 형성되어야 있어야 전승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특이한 노래이다.

 

긴사대 소리는 단락 중간에 길게 빼는 목청과 굽이를 꺾는 창법을 요구하는 보통 사람들이 부르기에 까다로운 노래다. 그런데 진선자씨는 목청이 곱고 낭랑할뿐만 아니라 60세로 연세도 많지 않아 긴 사대소리를 숨차해 하지 않고 유장하게 부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장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을 하면서 긴 사대소리 등 다양한 종류의 민요를 부모와 동네 어른들로부터 체득한 전승자임을 확인할수 있었다. 특히 주위 사람들로부터 민요가창 능력을 인정을 받으면서 민요 전수에 대한 강한 긍지와 자신감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자신이 부를 수 있는 민요를 젊은 사람들에게 전수시키고자 하는 데도 남다른 의욕을 가지고 있으나, 아직 큰 호응은 얻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번 긴 사대소리 조사에서도 진선자 씨 혼자서 부르는 것을 조사할 수밖에 없었다.앞으로 진선자 씨와 성장기에 함께 긴 사대소리를 부렀던 어느 정도 가창능력과 의욕을 가진 분들과 함께 애월 긴 사대소리의 전수를 위한 팀원 구성과 이 노래 의 독특한 창법을 되살리려는 노력이 뒤까른다면 애월 긴 사대소리가 지난 무형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정립시킬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22.귀리겉보리 농사일소리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제18호

지 정 일 2007.02.28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애월읍 하귀2리1893-1 
기능보유자  귀리겉보리 농사일소리 보존회

 

겉보리 농사일과 관련된 노동요로 다른 지역에서 전승되는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희귀한 농업노동요이다.

 

특히 마소와 인간이 함께 노동의 결실을 추구하는 협동과 화합의 노래로 육지부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유독 제주도에서만 전승되는 노래라는 점에서 무형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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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진구의 문화유산이나 자랑거리등 문화재 좀 알려주세요 급해요 급해요 (서울특별시 광진구의 문화재) 1.동국정운 종 목 국보 제142호 지 정 일 1972.03.02 소 재 지 서울 광진구...

지정된 문화재좀 알려주세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딘 문화재좀 알려주세요 한시가 급해요 수원 화성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3호로 지정되었다. 둘레 5,743m, 길이 5,520m, 높이 4.9m~6.2m이며, 면적은 18만 8048...

창원시의 문화재문화유산좀 알려 주세요

제가 숙제 때문에 10.7가지 창원시의 문화재문화유산 좀 알려 주세요. 제가3학년이라서 내공은5정도 밖에 없어서 내공5겁니다 (창원시의 문화재문화유산) 1.창원 불곡사...

우리나라의 문화재중 세계문화유산으로...

... 우리나라의 문화재중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천하는글좀 알려주세요. 내공 15개... 공룡화석지 제주도 자연유산지구 세계문화유산 등록의 이점 국내·외로부터의 관광객이...

제주도 역사.문화유적지좀여

... 알려주세요~ 제주도 역사.문화유적지좀여답변드립니다.서귀포시의 역사... 2.성읍민속마을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188호 지 정 일 1984.06.07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우리 문화재 좀 알려주세요.

... 제가 학교숙제를 해야되는데,우리문화재 좀 알려주세요...그래주시면 감사하겟습니다. 우리문화재는 너무많아서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 유산을 알려드립니다. [ 문화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