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시대에 음악적특징과 작곡가분들하고 음악작품 좀.... 알려주세여...

르네상스시대에 음악적특징과 작곡가분들하고 음악작품 좀.... 알려주세여...

작성일 2009.08.26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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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시대의 음악

 

 

 

 

                 Ⅰ. 르네상스 음악의 개괄           

                      1. 르네상스시대

                      2. 종교개혁 - 종교음악

                      3. 세속음악

                  Ⅱ. 르네상스음악의 개괄

                      1. 르네상스와 자유로운 창작

                      2. 인간 중심의 음악

                      3. 던스터블과 부르고뉴 악파

                      4. 플랑드르 악파

                      5. 후기 르네상스의 음악

                      6. 르네상스 음악의 가는 길

                      7. 르네상스와 독일 음악의 발전

                   Ⅲ. 악파

                      1. 아르스 노바(Ars Nova)

                      2. 부르고뉴(Burgandy)

                      3. 플랑드르

                      4. 로마악파

                      5. 베네치아 악파

                 Ⅳ. 음악형식, 특징

                 Ⅴ. 대표음악가 및 작곡가

                 Ⅵ. 결론 요약

 

 

 

 

중세와 근세 사이(14~16세기)에 서유럽 문명사에 나타난 역사 시기와 그 시대에 일어난 문화운동. 학문 또는 예술의 재생·부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프랑스어 renaissance, 이탈리아어의 rina scenza, rinascimento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다. 고대의 그리스·로마 문화를 이상으로 하여 이들을 부흥시킴으로써 새 문화를 창출해내려는 운동으로, 그 범위는 사상·문학·미술·건축 등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5세기 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중세가 시작되었다고 보고 그때부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를 야만시대, 인간성이 말살된 시대로 파악하고 고대의 부흥을 통하여 이 야만시대를 극복하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르네상스는 15세기 중엽 이후 16세기 초까지 절정기를 맞는다. 신대륙 발견과 부의 유입에 따른 물질적 기반이 융성함에 따라 정신적인 경향도 종교적 세계관에서 세속적이고 인문주의적인 관점으로 점차 이동하게 된다.

 

Ⅰ. 르네상스 음악의 개괄

 

1450년부터 1600년까지를 음악사에서 보통 르네상스시대라 부른다. 고대문화 특히 그리스의 연극, 문학의 재생을 의미하는 르네상스 운동은 음악에 있어서는 다른 예술분야보다 약간 늦게 일어났다. 미술과 문학은 고대 그리스의 규범이 있었기 때문에 고대예술의 부활과 재생이 가능했지만 음악은 그 추상적 성격 때문에 그 규범으로서 그리스 음악은 남아있지 않았다. 따라서 음악에서의 르네상스 운동은 고대 그리스 음악의 재생이라기 보다는 그리스 인들의 인간정신(humanism)의 부활이며 억압되지 않은 인간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려는 예술운동이었다. 종교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것에서부터 현세적인 것을 추구하는 인본주의적 세계관의 반영으로 볼 수 있는 것들 즉, 음악가의 개인적인 감정이 중요시되기 시작하였고, 엄격한 형식의 소멸, 음악과 가사의 긴밀한 결합, 음에 빛깔을 부여하는 반음계의 사용, 기악음악의 발달 등에서 보여지는 괄목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음악은 미술이나 문학보다 조금 늦은 15세기 초 영국의 던스터블과 부르고뉴악파에 의해 그 터전이 마련된 후 플랑드르악파에 의해 계승되어 화려한 꽃을 피우면서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르네상스 작곡가들은 당시 획일적으로 사용되던 플랑드르악파의 폴리포니기법에 그 지역 특유의 음악어법을 가미했기 때문에 각 지역마다 독특한 다양한 민족양식의 음악이 발달되고 새로운 음악기법과 장르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대륙과 떨어진 영국은 일찍이 부르고뉴 시대이전부터 3도, 6도 같은 음정을 사용하는등 영국 특유의 음악이 발달되었고, 대중에게 친근한 류트가곡(Lute song), 버지날(Virginal)과 같은 기악음악이, 이탈리아에서는 마드리갈(Madrigal)과 플로톨라(Frotolla)와 같은 이탈리아 특유의 경쾌한 음악양식이 발달하였다. 스페인에서는 특히 비우엘라(Vihuela), 오르간과 같은 기악음악이 발달하였고 비얀시코(Villancico)와 로만세(Romance)와 같은 그나라 특유의 음악장르와 기법이 발생되었다. 독일에서는 뒤늦었지만 이자크, 젠플(Senfl), 라수스에 의해 게르만적 특질이 넘치는 다성가곡의 음악양식을 만들어 후일 독일가곡(Lied)의 모체가 되었고,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시민정신에 부합되는 자유스러운 샹송이 중요한 양식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기악음악의 꽃은 보다 많은 세월이 필요했으며 바로크시대 후반에 가서야 그 결실을 보게된다.

 

♭종교개혁. 르네상스 음악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517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에 의한 종교개혁이다. 이 운동은 종교적, 정치적으로 대변혁을 일으켰지만 음악사에도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종교개혁으로 인해 교회는 가톨릭교회와 루터파 교회로 분리되었으며 음악에 있어서도 코랄이라는 루터파 교회의 새로운 양식이 생겨났다. 종교개혁가 루터(1483-1546)는 음악에 깊은 관심과 이해를 갖고 있던 인물이었다. 류트와 플루트를 잘 연주하였고 합창에서는 테노르 파트를 불렀고 약간의 작곡도 남겼다.「내주는 강한성」, 「고뇌의 깊은 심연으로부터」등은 루터 자신이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수 없다. 당대의 유명한 음악가들과도 친교가 깊었고 그는 신학 다음으로 음악에 필적할 만한 학예(Ars)는 존재 않는다는 것, 신학만이 할 수 있는 일, 즉 영혼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루터에 의하면 음악은 신의 선물이었다. 이러한 루터의 음악관 때문에, 또 만인이 사제라는 그의 전례관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음악을 의외로 중요하게 여겼다. 독일어를 음악과 긴밀하게 일치시켰으며, 회중이 쉽게 노래할 수 있는 음악을 이상으로 하였다. 이러한 요청에 의해 복음교회 회중가로서 코랄이 성립하게 되었다. 코랄은 원래 회중가로서 단선율 형식으로 제창으로 불리워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성가대와 음악적 소양을 가진 사람을 위해 폴리포니 기법에 의한 코랄도 필요하게 되었다.

 

루터의 음악적 협력자였던 요한 발터(Johann Walter 1496-1570)는 많은 다성 코랄을 작곡했는데 이곡들은 플랑드르풍의 폴리포닉한 전개를 하고 있다. 그 후 루카스 오시안더(Lucas Osiander)는 다성 코랄은 종래에 주선율을 테노르(중성부)에 두던 것을 최상성부에 두어 4성의 호모포닉한 화성으로 작곡하여 누구라도 일제히 부를 수 있게 하였다. 16세기말부터 17세기초에 걸쳐 한스 레오 하슬러(Hans Leo Hassler, 1564-1612), 미하엘 프레토리우스(michael Praetorius, 1571-1621) 등은 대규모 모테트풍의 코랄을 작곡하였다.이 시기의 독일 프로테스탄트 작곡가들은 수난곡을 잘 작곡하였느느데 요한 발터의 「마태 수난곡」은 개인이 말하는 부분은 레시타티브 풍의 단선율 악구를, 군중이 말하는 부분은 단순한 호모포닉 합창을 할당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당시 음악적으로 미개하였던 독일 음악은 비로서 독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고, 그후 독일 프로테스탄트 음악은 17세기 하인리히 쉬츠(Heinrich Schutz, 1585-1672), 헤르만 샤인(hermann Schein, 1586-1630), 요한 세바스챤 바하(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등으로 이어지는 바로크기의 독일 음악의 도도한 전개를 이룩하게 된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신학적인 문제가 아닌 헨리 8세의 이혼문제로 인한 교황과의 대립으로 1554년 수장령의 발표와 함께 영국 국교회(성공회)가 성립되어 독자의 예배형식과 그것에 맞는 교회음악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아직 영어가 국교회의 공용어로 확정되어 있지 않아 영어가 아닌 라틴어로 작곡되는 경우가 많았고, 여기에 정치적 상황이 얽혀 음악가들은 국교회와 가톨릭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고, 양 교회 모두를 위해 작곡하기도 했다. 가톨릭의 미사에 해당하는 예배음악인 서비스(Service)와 가톨릭의 모테트에 해당되는 앤섬(anthem)이 태어났으며 서비스는 또 대위법적이고 장식적인 선율을 사용하는 대서비스(great service)와 단선율적이고 수직화성 선율을 사용하는 소 서비스(short service)가 생겨났다. 앤섬도 짜임새가 대위법적이고 합창단이 부르는 완전 앤섬(full anthem) 과 기악반주를 동반하는 독창과 합창이 교대로 부르는 운문앤섬(verse anthem)이 생겨났다.

 

토마스 탈리스(Thomas Tallis)는 라틴어에 의한 미사, 모테트와 영어에 의한 서비스, 앤섬등 양쪽 교회를 위한 작품을 남겼다. 전체적으로 초기 작품에는 폴리포닉한 기교적 경향이 강하며 종교개혁이후의 작품에는 전례의 개혁 지침을 반영하는 단순한 화성적구성의 작품이 많다. 「그대외에 바램없도다」(Spem in alium)는 8개로 나누어진 5성부 합창단이 서로 모방해 나가는 도합 40성부를 위한 대규모작품이다. 여기에 비해 만년의 2곡의 「예레미아 탄가」는 대위법적 중후한 색체적 화성이 균형을 이룬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탈리스의 제자인 윌리엄 버드(William Byrd)도 스승과 마찬가지로 영어와 라틴어에 의한 2종류의 종교작품을 남겼다. 3성, 4성, 5성을 위한 각각 1곡씩의 미사를 남겼는데 모두가 그의 대표작이다. 그외「종교곡집」(Cantione sacrae),「그레듀아레」(Graduale) 등의 곡집에 수록된 60곡 이상의 라틴어 모테트에는 버드의 폴리포니기법이 종횡으로 전개되고 있다. 특히 4성의 「주님의 성체」(Ave verum corpus), 6성의 「오늘이야 말로」(Haec dies) 등은 특히 유명하다. 버드는 국교회를 위한 서비스도 4곡 썼으며, 버드에 의해 영국음악은 비로서 대륙의 음악과 비교할 수준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16세기 전반까지에도 종교음악이 유럽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플랑드르 악파의 폴리포닉한 종교작품은 높은 기술적 완성을 추구한 나머지 가사의 전달이 불분명한 점등 전례음악으로서의 결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교회당국에 의해서 어떤 형태든지 개혁을 필요로 하였다. 마침내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이 파문을 진정시키기 위해 1545-1563년 사이에 북 이탈리아의 트렌트 공 의회가 열렸다. 여기에서는 가톨릭 교회의 교리뿐만 아니라 교회음악에 대한 여러 가지 지적이 있었는데 세속적인 정선율의 사용, 악기의 과다한사용, 불분명한 가사의 사용에 대한 지적이 있었다. 결국 신의 집이 진정한 기도의 집 이 될수 있도록 불결, 음란하고 세속적인 음악과 비교육적 언어는 교회 내에서 자제하라는 것이었다. 16세기 후반에 바로 이와같은 시기에 르네상스 전기간을 통해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서 교회음악의 왕자로 칭송되고 있는 팔레스트리나(Palestrina)가 출현하였다. 순수한 이탈리아인이었지만 그의 음악적 기조는 역시 플랑드르 악파의 폴리포니 기법에 의거하고 있다. 확실히 그의 작품에는 플랑드르 악파의 특징인 선율이 중단됨이 없이 흐르는 통모방양식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특히 초기 미사곡에는 정선율을 테노르 성부가 독점하고 있으며, 기교적으로 카논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 등 플랑드르적 수법이 강하게 보인다. 그러나 팔레스트리나의 경우 기계적인 엄격한 모방은 아니고 선율을 다소 변형함으로써 화성적인 효과를 높이고 있으며, 또한 트렌트 공의회의 개혁안을 적극 수용하여 가사의 정확한 전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으며 다성적인 짜임새(폴리포니)가 가사의 전달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였다. 화성적인 충실을 극히 중요시하여 가급적 반음계 사용을 회피하여 그의 음악은 다른 작곡가보다 부드럽고 투명한 음향을 갖는 소위 ?팔레스트리나 양식?을 만들었다. 이러한 사실은 조스캥의 음악과 비교해 들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베네치아 악파 16세기 후반 베네치아는 로마와 함께 이탈리아 교회음악의 중심지였다. 13세기이래 유럽 유일 항구로서 동양으로부터 면사, 향료, 주단 등을 수입하였고 북구의 은, 주석, 모직물을 수출하여 부를 누리고 있었고, 로마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의 정치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베네치아의 모든 정치, 종교, 문화적 행사는 산 마르코 성당과 그 광장에서 거행되었으며 각종 행사 때 사용되는 음악은 교회와 도시의 위엄을 과시할 수 있도록 화려하고 장엄하였다.

 

1527년 플랑드르 음악가 아드리안 빌라르트(Adrian Willert)가 산 마르코 성당의 악장으로 취임하여 플랑드르 악파의 폴리포니 기법 베네치아에 전파하였다. 빌라르트는 복합창(cori spezzati)와 반음계법을 사용하여 새로운 음악을 개척하였다. 빌라르트는 비잔틴 건축양식에 의해 2개의 오르간과 합창대를 위해 회랑이서로 대치되는 산 마르코 성당의 특이한 내부구조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종전에 없던 음악에 색채적이고도 화려한 극적 표현을 만들었다. 그를 뒤이어 산 마르코 성당의 악장으로 부임한 안드레아 가브리엘리(Andrea Gabrielli, 1561-86)와 그의 조카 조반니 가브리엘리(Giovanni Gabrielli, 1553-1612) 등의 활약에 의해 베네치아 악파는 더욱 번영의 길을 걸었다. 안드레아 가브리엘리는 교회작품에 오르간이나 관악기를 사용하여 그 색채감과 극적 표현력을 증대시키려 하였으며, 그의 조카이자 제자였던 조반니 가브리엘리는 강약의 대비, 에코 효과등을 의식적으로 사용하여 음악에 극적이고도 화려함을 더하였다. 이와 같은 가브리엘리의 음악기법속에서 곧이어 태동할 바로크 음악이 성숙되고 있었다. 1613년 산 마르코 성당의 악장으로 부임한 몬테베르디(Monteverdi)의 교회작품에도 르네상스적인 폴리포니기법에 의한 제1작법과 바로크적인 협주양식(Concerto)내지 오페라양식의 제2작법이란 2가지 음악적 유형이 공존하고 있었다. 특히 제 2작법에 의한 그의 음악에는 바로크적인 양식이 성숙되어 있었다.

 

베네치아는 플랑드르적인 폴리포니 종교음악을 받아들여 여기에다 오르간이나 관악기를 덧붙인 색채적인 옷을 입혀 바로크풍으로, 또 피렌체와 만토바에서 시작된 오페라와 로마와 볼로냐에서 시작된 기악합주등에 독특한 양감과 표현력을 덧붙여 전유럽 음악계가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타당한 것으로 만들었다. 르네상스에서 바로크에 이르는 음악사의 대변동은 베네치아라는 도시를 축으로 전개되어 갔으며 바로크 시대로 이어지는 100년 이상을 이탈리아가 유럽음악을 주도하게 된다.

 

 

 

♪ 세속음악

르네상스시대의 본격적인 세속성악곡은 이탈리아에서 개화한 16세기 마드리갈이라 할 수 있다. 초기 마드리갈은 이탈리아에서 활약하던 플랑드르 작곡가에 의해 주도되었고 폴리포니 기법을 도입하여 귀족들을 위한 음악으로 작곡되고 애용되었다. 1530년대부터 50년대까지 마드리갈은 3성, 4성이 많았고 모방수법과 호모포닉한 기법이 절충되어 있었다. 16세기 후반이 되면서 마드리갈 작곡의 주도권은 이탈리아인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이때 활약한 작곡가들은 페스타(Festa), 아르카델트(Arcadeft)이다. 초기 마드리갈은 프로톨라처럼 사랑을 주제로 하지만 가사가 지나치게 장식적, 감상적이고 경박한 것에 대한 반동으로 귀족적 취향을 갖고 있었지만 아랫 성부는 화성반주에 지나지 않는 수직화성적 짜임새를 갖고 있다. 1540년대부터 마드리갈의 중심지는 당시 가장 부유한 도시의 하나였던 베네치아로 옮겨가게 되는데 이곳 산 마르코 성당의 악장이자 베네치아 악파의 시조인 빌라르트가 중기 마드리갈을 시작하였고 그의 후임이자 제자였던 데 로레에 의해 계승되어 중기 마드리갈의 특징을 이루게 된다. 로레(Cipriano de Rore)의 마드리갈은 플랑드르의 대위법에 바탕을 둔 4-5성부 곡으로 모방기법이 많이 사용되었고, 무엇보다도 각 단어를 음악적으로 묘사하여 시 전체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반음계 적인 변형을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16세기말, 17세기 초는 이탈리아 마드리갈의 전성기로 이탈리아 작곡가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마렌치오(Luca Marenzio, 1553년-1599), 제주알도(Don Carlo Gesualdo, 1561-1613)와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1567-1643)등이 이시대의 대표적 작곡가이다.

마렌치오의 마드리갈은 균형잡힌 폴리포니기법이 중심이 되어있지만 이탈리아 풍의 명쾌하고 뚜렷한 리듬과 선율이 뛰어나다. 특히 마렌치오의 작품에 일관에 나타나는 기품과 격조있는 표현의로 인해 르네상스 이탈리아 마드리갈은 고전전 완성에 도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 마렌치오의 마드리갈은 이탈리아 뿐만아니라 플랑드르, 영국, 독일에서도 출판되어 국제적으로 애창되었다. 마렌치오의 마드리갈은 특히 엘리자베스 1세, 제임스 1세 통치하의 영국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영어고유의 악센트와 영국적 기질이 반영되어 영국 마드리갈의 황금기를 구가하게 된다. 최초의 영국 마드리갈 작곡가로는 윌리엄 버드와 그를 이은 토마스 몰리(Thomas Morley, 1557-1602)이다. 1593년 간행된 몰리의 <3성 칸초네트 곡집>에는 이탈리아기법이 영국 특유의 낙천적이고 명랑한 표현과 일치되어 있다. 더욱이 유명한 「이제 5월이 왔다」(Now is the month of Maying), 「나의 연인은 사랑스럽다」(My bonny lass she smileth) 등을 포함한 1595년에 출간된 「5성 발렛토곡집 제 1권」(The First Booke of Balletts to five voices)에는 이탈리아의 발렛토가 완전히 영국의 토양에 동화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발렛토 특유의 ?파라라?의 후렴은 빠른 악구와 느린 악구와의 교대, 흐르는 듯한 경쾌한 선율, 각 성부간의 짧은 모티브에 의한 모방 등 모든 요소가 영어의 정확한 억양에 뒷받침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몰리에 이어 수많은 영국 마드리갈 작곡가들 파나비(Farnaby), 죤 파머(John Farmer), 필킹턴(Pilkinton), 토마스 톰킨스(Tomkins), 죤 윌비(John Wilbye), 토마스 윌크스(Thomas Weekes) 등에 의한 마드리갈 곡집이 차례로 출판되어 엘리자베스 왕조기 영국 마드리갈의 황금시대가 형성되었다. 이 가운데서도 윌크스는 마렌치오풍의 약간 중후한 표현을 장기로 하는 작곡가로서 그의 「오 근심이여 빨리 떠나라」(O Care, thou wilt dispatch me)은 ?파라라?와 같은 경쾌한 후렴을 갖고 있지만 효과적인 반음계와 불협화음의 사용에 의해 어두운 탄식의 세계를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외 소박한 민요풍의 작품을 보이는 파머, 필킹턴이 있고, 폴리포닉한 처리에 훌륭한 톰킨스, 윌비 등은 각각 독자적인 매력을 가진 가작을 많이 작곡했다. 이시기의 영국 마드리갈의 융성은 눈부신바가 있다.

 

이탈리아 후기 마드리갈 작곡의 끝을 맺는 몬테베르디의 마드리갈은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마드리갈중 첫 4권은 르네상스적인 무반주 다성 성악 앙상불의 곡이고, 다음 2권은 바로크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것이며, 콘체르토(Concerto)라고 제목을 붙인 마지막곡집인 제 7집은 기악반주를 갖는 독주, 이중주곡으로 뚜렷이 바로크적인 양식상의 변화를 보여준다. 그의 후기 마드리갈은 초기 마드리갈과 달리 음악 동기가 레시타티브와 같이 낭송적이며, 짜임새도 다성적이 아니라 베이스의 화성적 반주를 갖는 이중주적인 것으로 이미 바로크 경향이 무르익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몬테베르디의 위대함은 르네상스의 전통적 음악서법(제 1작법)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독창성으로 바로크(제 2작법) 세계를 개척했다는 점이다. 몬테베르디의 손에 의해 이탈리아의 마드리갈은 공전의 극적 표현력을 획듬함과동시에 붕괘점에 도달한 르네상스 마드리갈은 몬테베르디에 의해 바로크 양식의 아리아 내지 칸타타로 변화되어 해체되었다.

 

Ⅱ. 르네상스 음악의 개괄

 

1. 르네상스와 자유로운 창작

 

 ?르네상스?라는 말은 ?거듭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처음에는 중세교회의 억압에서 벗어나 그리스 문화를 되찾자는 뜻으로 쓰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 뜻이 넓어졌고, 쓰임새 또한 다양해졌다. 중세는 사람들의 생활과 생각이 크리스트교 신앙에 따라야만 했으며, 학문과 예술도 교회가 정해 주는데 따르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시대였다. 그런 중세를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게 살았던 ?암흑의 시대?라고 비판하면서 사람다움과 자연스러움을 되찾자는 운동이 바로 르네상스운동이다. 이 르네상스 운동은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중심으로 미술가들과 문학가들한테서 시작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그리고 단테나 보카치오 등이다.

 

 음악은 누가 앞서서 르네상스 음악 운동을 벌인 것이 아니다. 세상이 달라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민속 음악들이 음악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자유스러운 음악 표현도 나타났다. 즉, 아르스 노바(새로운 예술) 운동이 모든 음악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중세의 교회 음악과 르네상스 음악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시의 내용을 뚜렷이 살린 노래들이 나타남. 시의 운율이 음악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② 음악도 시처럼 느낌을 살리려고 애를 쓰게 되었다.

③ 악절과 악절이 뚜렷이 구분되는 음악 형식으로 정리되었다.

④ 소리의 울림과 높낮이가 다양해졌다.  

 

2. 인간 중심의 음악

 

 흐르는 듯 부드럽게 나아가는 그레고리오 성가에 비해 르네상스 음악은 약간 무디고 딱딱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여러 소리가 풍부하게 어울려 음악을 듣는 즐거움을 준다는 특징이 있다. 뿐만 아니라 악기들이 쓰이게 되었으며, 노래가 빠진 악기만을 위한 기악곡도 나타났다. 그렇지만 여전히 종교적인 주제를 가진 음악들이었다. 성가 역시 새로운 음악의 영향을 받아 크게 탈바꿈했다. 이어서 종교 개혁이 일어나자, 신교도들은 완전히 새로운 음악 형식에 따라 찬송가를 만들어 부르게 되었다. 민속 음악들은 여전히 민속 음악의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예전처럼 민속 음악을 천박하게 여기거나 멀리하는 일은 없었다.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 민속 음악이 자연스럽게 자리잡아 모두 음악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종교 음악과 민속 음악이 나란히 놓이게 되자, 그 두 가지를 골고루 섞은 음악인 창작 음악이 나타나 음악도 미술이나 문학과 함께 예술이 되었다. 그전까지는 예배의 한 부분에 들었던 종교 음악과 오락을 위한 민속 음악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작곡법이 나타났고, 작곡가들은 자기의 뜻과 느낌을 또렷하게 나타낼 수 있게 되었다. 또 신에게 바치는 음악이 아니라,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아름답고 감정이 흘러 넘치는 음악을 만들었다.  

 

 르네상스 음악가들의 작품은 밝고 균형이 잘 잡혀 있다. 꾸밈음이나 떨림음, 당김음들을 장식음이라고 하는데, 민속 음악에는 장식음이 많지만 르네상스의 창작 음악들은 장식음이 거의 없었다. 그것은 듣는 이들에게 기쁨, 즐거움, 힘, 슬픔 따위의 감정을 억지로 안겨 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과 깊은 정신이 깃들인 시를 주제로 하는 일이 많았다. 그 시의 내용과 형식을 음악으로 살려내기 위해 장식음들을 멀리하고 균형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르네상스 음악은 반주가 없는 합창이나 같은 악기들의 합주곡이 많다. 그러나 듣고 있노라면 전혀 다른 악기들을 모아 합주하는 듯이 들리며, 합창도 여러 높이의 소리들을 다 존중해 주고 있는 까닭에 매우 다양하게 들린다. 그런 르네상스 음악을 대표하는 두 갈래의 흐름이 있었는데, 부르고뉴 악파와 플랑드르 악파이다.

 

3. 던스터블과 부르고뉴 악파

 

 유럽 음악사에서 영국은 그다지 큰 구실을 하지 못했다. 다성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던스터블과 뒷날의 헨리 퍼셀을 빼면,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음악가들 가운데 영국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영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예로부터 민속 음악이 발달한 나라였다. 섬나라였기에 로마 교황의 간섭도 약했고, 대륙으로부터 받아들이는 종교 음악이 영국 사람들에게 맞지 않았던 데도 이유가 있었다. 영국의 다성 음악은 유럽 대륙과는 달리 민요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일찍부터 화음이 있는 음악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잘 발달된 화음 음악과 종교 음악을 하나로 하다 보니 다성 음악이 태어나고 말았던 것이다. ?포부르동?이라는 이 영국의 다성 음악이 유럽 대륙으로 건너갔다.  

 

 존 던스터블(1370?~1453)은 15세기 유럽을 대표하는 음악가였다. 그는 영국에 르네상스 음악의 바람을 일으킨 사람이었으며, 부르고뉴 악파가 이루어지게 한 주인공으로, 음악가이면서 천문학자, 수학자이기도 했다. 피타고라스를 닮은 그의 됨됨이는 르네상스 바람에 너무나 잘 어울렸다. 던스터블은 불협화음과 당김음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매우 힘차게 운동하는 음악을 만들어 냈다. 그가 만든 음악들은 정선율을 충분히 자유스럽게 이용해 마치 많은 장식음을 이용한 듯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그는 악기의 반주가 있는 노래도 작곡했다. 그는 또 종교 음악 외에 샹송이라고 하는 유행가도 작곡해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샹송은 프랑스에서 발라드라고 하는 민속 춤곡에 이어 나타난 노래로, 독창이 높은 소리를 맡고 반주 악기가 2가지 높이의 소리를 맡는 형식이다. 그래서 3가지 높이의 소리가 한꺼번에 들리게 된다.  

 

 부르고뉴 악파는 던스터블의 영향을 받아들여서 새로운 음악을 만든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음악가들을 말한다. 질 뱅슈아(1400?~1460)와 기욤 뒤파이(1400?~1474)가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이 작곡한 샹송은 마치 그림을 그리듯 거리의 모습, 전쟁 장면, 숲등을 음악으로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레고리오 성가를 다성 음악 형식으로 바꾼 다음 장식음을 섞고 리듬까지 변화시킨 디스칸투스 미사곡도 만들었다. 디스칸투스 미사곡을 들으면 그레고리오 성가의 본래 소리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민속 춤곡인 발라드를 발전시켜 궁정의 춤곡으로 만들기도 했다.  

 

4. 플랑드르 악파

 

 플랑드르 지방에서 번성한 플랑드르 악파는 네덜란드 남부의 일부지방을 포함해 네덜란드 악파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플랑드르 악파는 부르고뉴 악파의 영향을 받았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들은 선배 악파들과는 달리 감정을 음악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보다는 수학공식에 가까운 어려운 음악을 만드는데 몰두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악보를 보는 연주자는 수학 문제를 풀 듯 노력을 기울여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게르만 족의 음악과 라틴 족의 문화를 조화시켜 매우 부드러운 음악을 만들어 냈다. 그들이 음악을 어렵게 작곡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더불어 살려면 서로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올바른 질서는 사람의 행동이 올바른지 아닌지를 판단하게 해 주는 과학적인 것이기 때문에 감정이 섞여서는 안 된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음악 역시 사회와 모든 사람들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데 따라야 하기 때문에 과학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작곡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음악은 매우 어렵긴 하지만 질서가 뚜렷하고 그러면서도 부드럽게 연주된다.

 

 플랑드르 악파의 대표적인 사람들은 오케겜(1430?~1495), 오브레히트(1450?~1505), 이자크(1450~1517), 조스캥 데 프레(1450?~1521)등이다.

오케겜은 플랑드르 악파의 시조라 할 수 있다. 그는 훌륭한 인격과 뛰어난 음악적 재능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사람들은 오케겜을 ?음악의 왕?, ?부활한 오르페우스?라고까지 불렀다. 그의 음악의 거의 3박자로 매우 부드럽다. 또 베이스와 같은 낮은 소리를 처음으로 합창과 기악곡에 넣어 음악을 더욱 풍부하게 했으며 무게감을 주게 되었다. 그는 장식음을 많이 썼는데, 특히 당김음과 반박자를 많이 썼다. 그가 작곡한 ?신에게 감사?는 36가지 높이의 소리가 4부로 나뉘어 부르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는 다른 소리들이 나타나도록 작곡되어 있다.

오브레히트, 이자크, 조스캥은 오케겜의 복잡하고 세밀한 작곡법을 마지막까지 발전시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오케겜은 옛 음악을 버리지 못했던 것에 비해, 그들은 용감하게 옛 음악에서 벗어나 르네상스 운동에 참여했다.

오브레히트는 2박자를 많이 사용했으며, 박자의 강약의 매우 뚜렷한 작품들을 남겼다.

이자크는 모든 음악 형식을 있는 대로 자유롭게 활용한 작곡가였다. 그는 플랑드르에서 뿐 아니라 이탈리아에서도 음악 활동을 했으며, 프랑스어로 샹송을 작곡하기도 했고 독일어로 독일 가고(리트)을 작곡하기도 했다. 오늘날까지 카톨릭 교회에서 쓰이는 있는 ?콘스탄체 코랄집?을 만든 사람이다. 프레는 플랑드르 악파의 막내인 셈이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오케겜의 음악과 가장 멀어져 있다. 선배들에 비해 그는 훨씬 간단하고 단순하게 작곡했지만, 더욱 잔손질이 많이 간 작품을 만들었다. 그는 오늘날의 화성 음악의 길을 튼 주인공이었다. 감정을 누를 수 있는데 까지 눌렀던 선배들의 작품에 비해, 그의 작품은 우아하고 밝으며 흥분된 힘이 그대로 드러난다.  

 

5. 후기 르네상스의 음악

 

 르네상스에 힘입어 유럽의 여러 민족들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 동안 크리스트교의 지배 아래서 자기가 어느 민족이며,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거의 잊은 채 살아왔기 때문이다. 나라마다 민족마다 자기네 말로 노래하고 시를 쓰게 되었으며, 자기 나라 백성들의 삶을 그림으로 옮기게 되었다. 16세기에 들어서서 이탈리아의 보카치오, 영국의 셰익스피어, 에스파냐의 세르반테스 등이 앞장서 자기 나라말로 문학을 창작했다.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이 미술 작품을 통해 자연속에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삶의 고통과 기쁨, 슬픔과 즐거움을 솔직하게 나타냈다.

 

 플랑드르 악파의 새로운 음악의 이탈리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영향을 받아 베네치아 악파와 로마 악파가 태어났다. 자기 민족의 성격을 그대로 음악에 담았던 그들은 스스로 르네상스를 이어받은 ?후기 르네상스?라고 했다. 게다가 독일에서 일어난 종교 개혁은 교회 음악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독일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중세 암흑의 시대를 벗어나 새로운 시대로 들어선 것이 되었다. 종교 개혁에 반대하는 로마 카톨릭 교회 역시 신교에 맞서 교회 음악을 새롭게 정리하였다.  

 

 16세기 음악을 대표하는 것은 ?마드리갈? 이라는 남녀의 사랑을 주제로 하는 음악이다. 이 마드리갈은 매우 아름답고 자유스러우며 독특한 음악인데, 민속 음악이 아닌 귀족들의 음악이었다. 그래서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슬픈 사랑의 이야기를 다룬다던가 해서 억지 슬픔을 자아내기도 한다. 플랑드르 출신의 베르들로(1480~1545), 그리고 아르카델트(1514~1567)와 이탈리아의 페스타(1490?~1545)는 유명한 마드리갈 작곡들이다. 아르카델트의 ?아베마리아?는 오늘날까지 애창되는 노래이다.

 

6. 르네상스 음악의 가는 길

 

 한편, 16세기에 들어서자 반주 악기의 사용이 두드러졌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대성당에 있는 파이프 오르간들이 바로 그때 설치된 것들이다. 악기를 사용하면서 나타난 것이 ?2중 합창?이었다. 악기와 사람의 목소리가 서로 대화하듯 어울리고 다투는 진행을 본딴 것이다.  

 2중 합창을 처음으로 만들어 베네치아 악파의 시조가 된 사람이 빌라르트(1490?~1562)이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새로운 음악을 찾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빌라르트의 제자 가운데 오늘날까지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은 안드레아 가브리엘리(1510~1586)와 조반니 가브리엘리(1557~1612)이다. 베네치아 악파를 이룬 이들은 화음을 모자람 없이 이용했으며, 반음계를 많이 써서 매우 환성적인 음악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미술처럼 내용을 상세하게 전달하려고 ?음화법?을 개발했다. 그런 노력으로 얻어진 결실이 곧 ?2중 합창?이었다.  

 

 안드레아 가브리엘리의 음악에는 자유 도시 베네치아의 분위기가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다. 화려한 축제를 생생하게 그려내게 위해 화음을 다양하게 사용했으며, 악기들과 사람들의 목소리가 낼 수 있는 모든 소리들이 다 나타나기도 하는 그의 음악이다. 합창과 기악이 잘 어울리는 ?신성 교향곡?은 교향악의 시조이기도 하며, 오라토리오나 칸타타의 모범이 되기도 한다. 그의 오르간 음악은 아직까지 연주되고 있다.  

조반니 가브리엘리는 스승 빌라르트의 음악 정신을 가장 높은 데까지 끌어올린 사람이다. 호화찬란하고 리듬과 빠르기가 다양한 그의 음악의 베네치아 악파의 대표로 여겨지고 있다.  

 

7. 르네상스와 독일 음악의 발전  

 

 

르네상스 음악에서 독일의 음악은 거의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르네상스 음악이 꽃을 피우고 끝으로 열매를 맺게 되는 곳이 바로 독일이다. 19세기에 이르러 독일 가곡을 찬란하게 꾸민 슈베르트야말로 르네상스 음악의 마지막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일찍부터 독창 가곡(리트)이 발달해 있었다. 민네쟁거와 마이스터징거의 음악은 다성 음악이기도 했지만, 독창으로 부를 수 있는 음악이었다. 15세기 독일에서는 글로가우 가곡집, 로하머 가곡집이 출판되었다. 그리고 몇 개의 가곡들을 한데 묶은 매우 재미있는 우스개 가곡집 쿼들리베트가 시민들에게 널리 불려지고 있었다. 독일의 가곡 작가로서 플랑드르 악파의 이자크를 들 수가 있는데, 그의 ?인스부르크여, 안녕?은 500년이 지난 오늘까지 널리 불려지는 가곡이다.  

 

 독일 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종교 개혁이었다. 종교 개혁은 1517년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가 카톨릭 교회에서 반대해서 일으킨 새로운 종교 운동이었다.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교회의 권력에 반대하고, 오직 성서와 신앙만이 구원의 힘이라는 루터의 주장은 카톨릭 교회로 보면 엄청난 혁명이었다. 종교 개혁으로 이룩된 신교(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중세 이후 전해져 내려오는 종교 음악을 버리고 새로운 교회 음악을 찾게 되었다. 신교 교회는 게르만 민족의 성격과 민속 음악, 가곡을 써서 찬송가를 만들었다. 이것을 코랄이라고 부른다. 날이 갈수록 신교가 넓게 퍼지자 카톨릭 교회는 위협을 느꼈다. 그들은 신교에 대항하기 위해 카톨릭 자체를 탈바꿈시켜야 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교회 음악을 바꾼 것이었다. 카톨릭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음악을 바탕으로 새로운 성가를 만들었다. 그들은 모든 학교에서 새로운 성가를 부르게 했으며, 세계 곳곳으로 선교사들을 보내 새로운 성가를 보급했다. 종교 개혁으로 새로운 찬송가가 만들어진 것은 루터자신이 음악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루터는 음악에 대한 깊은 지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고대 그리스 인들의 음악 정신을 지지하고 있었다. 루터는 친구들의 도움을 얻어 20년 가까이 꾸준하게 ?종교 가곡집?을 만들어 냈다. 그 가곡집에는 그레고리오 성가를 독일어로 번역한 것도 있지만, 민속 음악에 종교적인 가사를 단 가곡 등도 들어 있다. 이 가곡집의 노래들은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으며 언제 어디서나 부를 수 있는 가곡들이다. 루터 자신이 작곡한 합창곡도 있는데, 가장 유명한 곡이 ?주는 나의 강한 성?이다. 찬송가에 대한 루터의 노력은 그 후 독일 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바흐를 비롯한 독일 음악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기초를 마련해 준 것이 루터의 합창곡(코랄)이었다.  

 

Ⅲ. 악파

 

1. 아르스 노바(Ars Nova, 1300-1400)

 음악사에 있어서 14세기는 아르스 노바(Ars Nova,신예술)의 시대라고 일컬어 진다. 음악사적인 면에서 아르스 노바는 중세의 종식을 의미하는 한편, 르네상스 경향의 징후가 나타나는 시기였다. 아르스 노바란 말은 프랑스 시인, 음악이론가이자 작곡자였던 필립 드 비트리( Phillippe de Vitry, 1291년경-1361년)가 쓴 <Ars Nova>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나온 말로서 오늘날의 학자들은 아르스 노바를 1300년부터 1370년까지의 프랑스 음악을 명명하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비트리는 이 시기의 음악을 구 예술 (아르스 안티콰, Ars Antiqua), 즉 중세 다성음악이 정점에 도달했던 파리의 노트르담 악파의 음악과 구별하여 아르스 노바로 불렀다. 이 시기는 음악의 역할이 신을 위한 예배의 목적에서 음악자체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으로 서서히 바뀌게 되었고, 보다 아름답게 들리기 위해 반음계적 기법이 나타났다. 작곡가의 존재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음악은 작곡가의 이름이 없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마쇼, 란디니, 던스터블과 같은 음악가들의 이름이 음악사에 비로소 등장하게 되었다.

 

I. 프랑스의 아르스 노바

프랑스에 있어서의 신예술은 이탈리아의 경우에서 보다 더욱 구예술을 기반으로 발전적으로 확대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음악형태와 기법이 발전되었고 리듬의 복잡성은 이탈리아보다 더욱 뚜렷했다.

 

II. 이탈리아의 아르스 노바 (트레첸토 음악)

 

14세기 프랑스의 음악을 대표하는 양식으로 아르스 노바라는 용어를 쓰는데 비해 음악학자들은 동시대의 이탈리아 음악을 지칭하는 용어로 트레첸토(trecento)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이태리어로 ?1300?이라는 밀레 트레첸토(mille trecento)를 줄인 것으로서 1300년대 즉 14세기를 지칭하는 것이다. 프랑스 음악의 변천 과정과는 달리 14세기 트레첸토 다성음악이 어떻게 그 이전의 단성음악으로 발전했는지, 100년동안 화려한 꽃을 피우던 이태리 음악 전통이 왜 15세기에 완전히 끊겼는지 명확한 해답이 없다.

 

 14세기의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같이 중앙집권적인 왕정에 기반한 왕국이 아니라 도시를 중심으로 이룩된 도시국가 형태였다. 당시 북부에는 볼로냐, 파도바, 모데나, 밀라노는 강력한 도시국가로 부상했으며 중부의 피렌체는 당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도시였다. 피렌체는 '신곡'의 저자 단테에 이어 '데카메론'을 쓴 보카치오와 시인 페트라르카를 탄생시킨 문학의 세계적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중세의 단조로운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회화기법을 창시한 지오토를 탄생시킨 르네상스 미술의 요람이었다.  

 

 이와 같은 문화적 배경 하에 14세기는 피렌체를 중심으로 이탈리아의 작곡가들이 처음으로 서양음악사에 등장하는 시기다. 이 당시 대부분의 음악은 다성 세속노래였으며 종교음악은 매우 작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14세기 프랑스 작곡가들이 복잡한 리듬의 변화를 강조한 반면에 이탈리아 작곡가들은 리듬보다는 선율의 흐름에 중점을 두었다. 즉 음악적 구성이 보 단순하고 화려한 성악 양식을 도입했다.

 이탈리아의 트레첸토 음악은 초기에 그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유지하며 발전하였으나 란디니(Francesco Landini, 1325-1397) 시대에 오면서 점점 더 프랑스의 영향을 받게 된다. 한편 프랑스 음악은 15세기에 가까와지면서 복잡한 리듬의 사용을 절제하고 선율을 강조하는 이탈리아의 영향을 나타내게 된다. 이러한 혼합된 양식은 중세의 끝을 장식하는 작곡가인 요하네스 치코니아(Johanes Ciconia, 1370-1412)의 음악에 잘 나타난다. 두 나라의 음악양식이 혼합 통일되면서 자연히 민족주의적인 특성은 사라지고 15세기에는 지금까지 서양음악사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던 영국에서 던스터블(Dunstable)과 같은 음악가의 출현으로 대륙이 영향을 받아 유럽 중심부의 음악 어법은 통일된 양상을 띄게 되었고 이러한 음악 어법은 르네상스 음악양식의 기반이 되었다.

 

2. 부르고뉴(Burgandy)

 

 프랑스 파리의 남동쪽지역. 956~1477 사이에는 공국으로 있었고 Valosi(1364~1477) 공작치하에서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떨쳤고 부르고뉴궁은 당시 음악의 메카였다. 부르고뉴공들은 대부분이 음악의 열열한 후원자였으며 이 시기를 부르고뉴기(epoch) 그리고 당시 그곳에 몰려들었던 음악가들을 통칭하여 부르고뉴악파라 불린다. 당시 부르고뉴공은 국제적 음악의 중심지였고, 프랑스어를 통해 범세계적 음악 양식을 확립하였다. 부르고뉴공이 지배하는 지역은 지리학적으로 단일체가 아닌 이질적인 지역이 모여서 설립돈 것에 불과하였다. 첫 공작인 대담한 필립공(Philip the Bold, 1364~1404)은 1364년 그의 형 샤르르 5세왕으로부터 부르고뉴공국을 계승하였고 결혼에 의해 당시 상업의 중심지였던 겐트(Ghent), 부뤼지(Bruges), 레퍼(Leper)등이 속해있던 플랑드르주를 합병하였다. 용감무쌍한 요한(1404~19)은 프랑스가 백년전쟁으로 분활된 틈을 타 부르고뉴 영토를 확장하였고, 선량한 필립공(1419~67)의 오랜 통치기간중 홀란드, 브라방(Brabant), Hainault, Limbourg, 룩셈부르크 등이 합병되었다. 대담한 샤르르(Charles the Bold, 1467~77)는 베네룩스와의 조급한 영토확장을 기도하던중 낭시(Nancy)전쟁(1477)에서 급사함으로써 부르고뉴는 프랑스 왕위국에게 병합되었다. 베네룩스의 부르고뉴 재산은 샤르르의 딸이며 유일한 상속자였던 마리아(1477~82)에게 상속되었고 마침내 그녀 아들 Philip the Fair(1482~1506)에게 상속되었다. 부르고뉴공들은 열열한 음악의 후원자였으며 미술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대담한 샤르르는 하프를 잘 연주하였고 샹송과 모테트를 작곡하기도했다. Philip the Bold에 의해 1384년 조직된 부르고뉴 예배당은 그가 죽을 때 1404년에는 성가대원이 28명으로 성장하여 프랑스 왕이나 아비뇽의 교황예배당의 성가대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선량한 필립공시절 성가대는 가장 규모나 질적인 면에서 명성을 얻었다. 이때 활약한 음악가로는 뱅수아(Binchois), Constans Breuwe, 뷔뉘아(Busnois)는 샤르르공의 음악가였다. 선량한 필립공, 대담한 샤르르는 수도 디종에 보다는 Lille, Bruges, 브륏셀 등의 도시에 오래 거주했다. 부르고뉴궁의 성가대원들은 사제로서 예배에 직접 가담하는 것외에 연주가, 작곡가, 교사, 서기로 일했으며 매일의 미사를 돕기도 했다. 보통의 미사시는 단성가가 불리워졌으며 특별한 축일에는 폴리포니 찬가가 중간 중간에 불리워졌다. 그러나 부르고뉴공들은 호사스럼움과 사치를 좋아하여 종교음악보다는 세속음악을 장려하였고 폰테인(Fontaine), 뱅수아, 뷔누아 등은 주로 샹송을 많이 작곡했다. 세속음악은 대부분 음유시인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기악주자들은 주위 국가로부터 고용되었다. 당시 트럼펫, 탬버린, 벡 파이프, 숌 등 큰소리를 내는 악기가 선호되었다. 선량한 필립공에 의해 Lille에서 1453년 2. 17에 거행되었던 유명한 ?꿩의 향연?에 28명의 음유시인이 각종 악기를 연주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성가대 가수와 마찬가지로 당시 음유시인들은 공작의 행열이나 전쟁터에까지 수행을 했다. 대머리 샤르르가 낭시 전쟁에서 사망하자 부르고뉴궁의 음악기관은 마리아와 남편 막시밀리언 1세에 의해 승계 유지되었다. 1493년 이것은 다시 샤르르의 손자인 Philip the Fair에게 계승되었고 그는 라뤼(La Rue)나 아그리콜라(Agricolar) 등 유명한 음악가를 초치하였고 성가대를 더욱 키워 1506년 그가 죽을 때 당시 유럽에서 최대 규모인 33명의 성가대를 확대하였다.

 

3. 플랑드르

 

 부르고뉴 지방이 완전히 프랑스의 문화권 안에 있었던 것에 비해 플랑드르 지방은 게르만적 영향을 함께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플랑드르 지방은 반 아이크, 루벤스, 보슈, 반 다이크 등 회화사에 찬란한 빛을 발휘한 인물들을 배출했으며, 음악에 있어서도 그와 같은 찬란한 빛을 발휘한 작곡가를 많이 배출했다.

 

15세기 유럽음악의 중심지였던 부르고뉴 공국은 선량한 필립공(Phillip the Good, 1419-67)의 사후 샤를르 용담공(Charles the Bold, 1433-77)에 의해 계승되었지만, 1477년 낭시(Nancy)전에서 샤를르가 전사함에 따라 이 공국은 루이 11세 치하의 프랑스 왕국에 통합되었다. 그 속국인 플랑드르는 샤를르의 딸 마리아(1457-82)에게 승계되었고 고상한 취미를 가진 음악의 열열한 후원자였던 그녀는 후에 신성로마 황제가 된 막시밀리언 1세(통치기간 1493-1519)와 결혼함에 따라 플랑드르는 결국 합스부르크가의 영지가 되었다. 당시의 플랑드르 지방은 모직물업, 금속세공업, 무역업등으로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그 중 암스테르담, 안트베르펜(Antewerp)등은 이탈리아를 비롯한 각 국의 상점들이 즐비한 세계 제1급의 도시로 발전되었다. 음악에 있어서도 여러 제왕 후, 시민들의 보호에 의해 현저한 발전을 하였다. 막시밀리언 1세와 마리아의 딸인 마르가레테(Margarete von Ostreich, 1480-1530), 황제 카를르 5세(Karl V), 카를로스 1세(스페인을 통치, 통치기간 1516-56) 등이 거느렸던 궁정예배당 성가대(capella)의 명성은 당시 국제적이었다. 특히 카를로스 황제는 여행과 전쟁시에 성가대를 이끌고 원정하여 플랑드르 음악가를 전 유럽에 알리게 하였다. 캉브레, 안트베르펜, 브뤼게(Brughes), 브뤼셀 등 플랑드르 지방에 있던 대성당 소속의 가수 양성소는 이미 15세기 초엽 부터 국제적으로 정평이 났었다.

 

부르고뉴 작곡가들의 창조적 활동은 15세기 중반 까지 계속되었으나 후반에 접어들면서 플랑드르 악파가 주도적 역활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의 음악적 기법은 전 유럽에 퍼졌고, 1450년부터 1550년까지의 유럽음악을 지배하였다. 플랑드르 악파는 네델란드 악파라고도 불리워지고 있는데 오늘날의 네델란드가 아닌 북 프랑스로부터 남 벨기에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이 악파는 프랑코-플랑드르 (Franco- Flemish) 또는 프랑코-벨기에 (Franco-Belgian)악파로 불리워진다. 플랑드르악파 작곡가들 활동무대는 전유럽에 미쳤지만, 작곡가의 개개인이 활동한 지역에 따라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의 지역적 경향도 있다. 예를 들면 조스캥은 이탈리아적, 이자크는 독일적 경향을 보이고 있으나 플랑드적인 특질이 일관하여 흐르고 있다. 이들은 생의 대부분을 스페인, 독일, 보헤미아, 오스트리아로 다니면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랑스의 왕, 로마 교황을 위해서 일하거나 이탈리아의 궁정들에서 일하였다. 특히 이탈리아의 나폴리, 피렌체, 페라라, 모데나, 만토바, 밀라노, 베네치아의 궁정들은 플랑드르 작곡가들의 활동 무대였다. 이렇게하여 플랑드르 악파의 음악양식은 유럽의 르네상스 음악에 공통적으로 쓰여지는 범세계적 음악양식으로서의 자리를 굳히게 된다.

 

플랑드르 악파는 부르고뉴 악파의 영향을 받았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선배격인 부르고뉴 악파와는 달리 감정을 음악에 드러내지 않는 수학적으로 정교한 폴리포니(다성음악)를 만들어냈다. 전대의 부르고뉴 악파로 활약을 했던 뒤파이도 말년에는 플랑드르의 캉브레에서 후진 양성에 노력하고 있었지만, 플랑드르 악파의 대표적 인물들은 이보다 한 세대 후인 15세기 중엽부터 16세기 중엽 까지 1세기에 걸쳐 활약하였다. 플랑드르악파의 대표적 인물은 오케겜(1430경-1497경), 오브레히트(1452경-1505), 조스캥 데 프레(1440경-1521), 이자크(1450-1517), 라수스(1532-1594)들로서 이 시기의 유럽 음악의 주도권을 장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영국, 폴란드 등에서 활약하면서 플랑드르의 음악서법을 국제적인 음악기법으로 발전시켰다. 당시 유럽 각지의 대성당과 궁정예배당에 있었던 성가대의 명부와 회계장부는 그 태반이 플랑드르 출신 음악가의 이름으로 채워져 있었다. 또한 1501년 이탈리아의 페트루치(Ottaviano Petrucci, 1466-1539)에 이해 활자에 의한 악보인쇄가 가능하게 되어 단 시일 내에 전 유럽에 인쇄된 악보가 보급 되게되었다. 기존의 필사 악보 뿐만 아니라 인쇄되어 보급된 악보에서도 많은 페이지가 플랑드르 작곡가들의 작품으로 채워져있었으며, 특히 종교음악 장르에서는 이들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플랑드르악파 음악의 특성

 

 플랑드르악파 음악의 두드러진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면 엄격한 성악 폴리포니양식이라 말할 수 있다. 각 성부는 각각 평등하게 취급되었고, 고유의 리듬을 갖고 독립한 가운데, 복잡하게 서로 성부가 엉켜져 있었다. 한편 각각의 독립된 성부를 하나의 동기에 의해 통일하여, 모방수법으로 악곡전체를 구성해 가는 소위 통모방양식은 조스캥에 의해 그 절정에 이른다.

 

종래의 3성부 중심의 서법 대신 그때까지 최저 성부였던 테노르 성부 보다 더 낮은 바수스(bassus)가 부가되어 수페리우스(superius), 알투스(altus), 테노르(tenor), 바수스의 4성부가 (16세기 후반에는 5성부가 표준적으로 되었다) 한층 유행되어 음악은 보다 풍성한 울림을 획득하게 되었다.

 

불협화음의 취급은 전시대에 비해 신중하게 되었고 가사의 내용을 음화적으로 표출하려는 의욕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가사 그리기, 반음계, 화성, 장식음, 리듬과 짜임새의 대비 등을 통해 가사를 마치 눈앞에 보듯이 생생하게 표현하는 음악을 당시에 소위 ?뮤지카 레제르바타?(musica reservata) 즉 함축된 음악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가사의 의미가 음악에 함축되어 있다는 뜻이다. 플랑드르악파의 음악은 한마디로 말하면 르네상스의 합리적 사고를 기초로 한 예술이며 이런 점에서 중세음악과는 두드러진 대조를 이룬다. 샹송에는 중세 기사 가곡의 전통이 계승되어 있는 면도 있지만, 플랑드르 음악가는 의식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독특한 폴리포니 서법을 강조하는 새로운 방향을 개척해 나갔다. 플랑드르악파는 조스캥을 정점으로, 고전적 내지 르네상스적인 완결된 작품을 만들었고, 플랑드르적임과 동시에 보편적이고도 범세계적인 음악을 만들었다. 플랑드르악파의 음악작품에 있어서 정선율의 복잡한 변주, 음에 의한 상징주의, 오케겜에서 특히 두드러진 정교한 대위법적 서법, 복잡한 카논 수법 등은 플랑드르 예술 특유의 고딕적 표현을 반영하고 있다. 정교한 대위법을 바탕으로 카논이라는 새로운 양식이 만들어졌던 사실은 플랑드르 지방에서 번성했던 상공업 길드에서 연마된 장인정신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세속적 내지 현세적 경향도 플랑드르악파의 음악 작품에 두드러져 있다. 예를 들면 미사곡의 정선율로 세속선율을 많이 사용하는 경향, 사적인 기도에 관련된 마리아 모테트에 세속가곡풍의 선율, 무곡 리듬을 빈번히 사용하는 경향 등을 들 수 있다. 이와같은 의미에서 플랑드르 악파의 음악은 당시 플랑드르 시민정신에 떠받쳐 지고, 기초된 예술이라 할수 있다.

 

4. 로마악파

 

 트론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반종교개혁의 카톨릭교회 음악을 개혁한 팔레스트리나를 정점으로 팔레스트리나의 음악양식을 계승한 악파.  

팔레스트리나는 가사의 정확한 전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폴리포니의 짜임새가 가사 전달에 방해 받지 않도록, 그리고 가급적 반음계 사용을 회피하여 한층 부드럽고 투명한 음향을 갖는 소위 팔레스트리나 양식을 만들었다. 팔레스트리나 사후 그의 제자와 후계자들에 의해 팔레스트리나 양식에 기초를 둔 폴리포니 교회 음악의 전통이 계승되었다. 여기에는 팔레스트리나의 제자로 성 마리아 마조레 성당에서 그 후임자가 되었고 후에 교황청 예배당의 지휘자가 된 조반니 마리아 나니노 (Giovanni Maria Nanino, 대략 1545-1607)가 속하며 그는 로마 악파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들 중의 하나이다. 펠리체 아네리오 (Felice Anerio, 1560-1614)는 나니노의 제자로서 1594년 교황청 예배당의 정식 작곡가로서 팔레스트리나의 뒤를 이었다. 조반니 아니무치아 (Giovanni Animuccia, 대략 1500-1571)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팔레스트리나의 전임자였다. 그는 특히 로마의 오라토리오 집회를 위하여 라우다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이 집회는 피렌체의 사제인 필리포 네리 (Filippo Neri 후에 성자 명부에 오름)가 종교적인 강의와 신앙적인 수업을 목적으로 조직한 회합에서 발전되어 나왔는데, 이 회합은 라우다를 노래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 이름은, 회합을 하던 원래의 장소, 즉 로마 어느 성당의 ?오라토리(기도하는 작은 예배당)?에서 유래하였다. 라우다나 이와 비슷한 경건한 노래는 후에, 대화나 다른 극화된 형식으로 진행되기도 하였다.

팔레스트리나 다음으로 로마악파에서 가장 중요한 작곡가는 스페인 출신의 토머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 (Thomas Luis de Victoria, 1548-1611)이다. 빅토리아는 1565년 로마의 예수회의 독일 대학 (Collegio Germanico)에 갔는데 팔레스트리나와 함께 공부한 것 같다. 1571년에는 팔레스트리나의 후임으로서 신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1587년경에 스페인으로 돌아간 그는 황후 마리아의 전속 사제가 되었는데 1603년 황후의 죽음에 임하여 유명한 진혼 미사곡을 썼다. 그의 작품들은 오로지 종교 음악뿐이다. 그의 양식이 팔레스트리나의 양식과 비슷하다고는 해도 빅토리아는 매우 개인적이며 전형적으로 스페인적인 강렬한 가사의 표현을 그의 음악에 종종 불어넣는다. 모테트 [오, 모든 사람들이여 (O vos omnes)]는 그의 작품의 좋은 예이다. 이 곡은 팔레스트리나의 유연하고 평이한 리듬과는 달리, 선율선이 마치 흐느끼는 절규처럼 분산된다.

 

5. 베네치아 악파

 

 16세기 후반 베네치아는 로마와 함께 이탈리아 교회음악의 중심지였다. 13세기 이래 유럽 유일 항구로서 동양으로부터 면사, 향료, 주단등을 수입하였고 북구의 은, 주석, 모직물을 수출하여 부를 누리고 있었고, 로마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의 정치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베네치아의 모든 정치, 종교, 문화적 행사는 산 마르코 성당과 그 광장에서 거행되었으며 각종 행사 때 사용되는 음악은 교회와 도시의 위엄을 과시할 수 있도록 화려하고 장엄하였다.

 

1527년 플랑드르 음악가 아드리안 빌라르트(Adrian Willert)가 산 마르코 성당의 악장으로 취임하여 플랑드르 악파의 폴리포니 기법 베네치아에 전파하였다. 빌라르트는 복합창(cori spezzati)와 반음계법을 사용하여 새로운 음악을 개척하였다. 빌라르트는 비잔틴 건축양식에 의해 2개의 오르간과 합창대를 위해 회랑이서로 대치되는 산 마르코 성당의 특이한 내부구조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종전에 없던 음악에 색채적이고도 화려한 극적 표현을 만들었다. 그를 이어 산 마르코 성당의 악장으로 부임한 안드레아 가브리엘리(Andrea Gabrielli, 1561-86)와 그의 조카 조반니 가브리엘리(Giovanni Gabrielli, 1553-1612) 등의 활약에 의해 베네치아 악파는 더욱 번영의 길을 걸었다. 안드레아 가브리엘리는 교회작품에 오르간이나 관악기를 사용하여 그 색채감과 극적 표현력을 증대시키려 하였으며, 그의 조카이자 제자였던 조반니 가브리엘리는 강약의 대비, 에코 효과등을 의식적으로 사용하여 음악에 극적이고도 화려함을 더하였다. 이와 같은 가브리엘리의 음악기법속에서 곧이어 태동할 바로크 음악이 성숙되고 있었다. 1613년 산 마르코 성당의 악장으로 부임한 몬테베르디(Monteverdi)의 교회작품에도 르네상스적인 폴리포니기법에 의한 제1작법과 바로크적인 협주양식(Concerto)내지 오페라양식의 제2작법이란 2가지 음악적 유형이 공존하고 있었다. 특히 제 2작법에 의한 그의 음악에는 바로크적인 양식이 성숙되어 있었다.

 

베네치아는 플랑드르적인 폴리포니 종교음악을 받아들여 여기에다 오르간이나 관악기를 덧붙인 색채적인 옷을 입혀 바로크풍으로, 또 피렌체와 만토바에서 시작된 오페라와 로마와 볼로냐에서 시작된 기악합주등에 독특한 양감과 표현력을 덧붙여 전유럽 음악계가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타당한 것으로 만들었다. 르네상스에서 바로크에 이르는 음악사의 대변동은 베네치아라는 도시를 축으로 전개되어 갔으며 바로크 시대로 이어지는 100년 이상을 이탈리아가 유럽음악을 주도하게 된다.

 

Ⅳ. 음악형식  

 

아이소 리듬(동형리듬,Isorhythm) 모테트  : 아이소리듬이란 하나의 리듬형과 선율형을 반복해서 전체 모테트의 테노르 성부를 작곡하는 기법으로, 리듬형을 탈레아(talea), 선율형을 콜로르(color)라 부른다. 반복되는 리듬형인 탈레아와 반복되는 선율형인 콜로르는 반드시 탈레아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령 10개의 음가를 가진 탈레아와 15개의 음가를 가진 콜로르가 있을 경우 탈레아는 세번 반복하고 콜로르는 두번 반복해야만 두 패턴은 동시에 처음부터 시작되어 테노르의 처음으로 돌아가는 결과가 된다. 이러한 기법의 사용은 중세 다성음악에서 구조적으로 가장 중요한 성부인 테노르파트를 강조함으로써 곡 전체에 형식감을 성취하는 효과를 주었다.

 

정형시 형식(formes fixes) : 프랑스 아르스 노바의 기수인 마쇼는 시인으로도 유명했기 때문에 세속 노래 분야에서 그 업적이 두드러지고 있다. 마쇼는 트루베르(Trouvere) 시절 부터 간간히 사용되어오던 시형식들을 일정한 형태로 고정시켰는데 이러한 시형식을 정형시 형식(formes fixes)이라고 한다. 그는 이 형식으로 여러 성부를 위한 세속노래를 작곡했다. 정형시 형식에는 발라드, 론도, 비를레의 3종류가 가장 유명하며 이 형식들은 1500년경 까지 지속적으로 쓰여졌다.

 

  발라드 (Ballade) : 발라드는 같은 음악을 가진 여러개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부분(A)이 다른 가사와 다른 종지부로 반복되는 AAB 형식에 따른 것이었다. 발라드는 최상성부에 선율 및 리듬상의 중요성을 두는 3성부 형식의 음악이었다.

 

  론도 (Rondeaux) : 다성적인 트루베르 형식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며 같은 가사의 같은 음악이 반복되는 후렴(A)을 가지고 있다. 론도는 2성부, 3성부 또는 4성부의 형태로 작곡 되었는데 하나의 독창 성부와 악기를 위한 보다 느린 리듬의 2 저성부를 가진 3성부로 작곡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었다.

 

  비를레 (Virelai) : 14세기에 샹송 발라데(chanson balladee)라고 불렸던 비를레는 론도와 마찬가지로 단성 트루베르 형식에서 발생된 것이며 시의 각 연에 AbbaA식 구성을 적용시킨 것이었다. 샹송 비를레는 대부분 단성적이지만 다성 작품도 이런 형식으로 많이 작곡되었다.

 

  마드리갈 (Madrigal) : 이탈리아의 가장 오래된 다성형식으로 14세기 중엽에 크게 유행하였다. 마드리갈은 두개 혹은 세개의 2박자의 각 연을 3박자의 3행절과 리토르넬로(ritornello)라고 불리는 반복구로 구성된다.  

 

  카치아 (Caccia) : 카치아는 ?사냥?이라는 뜻으로 1345년경-1370년경까지 번성한 엄격한 모방에 기초를 둔 카논(canon)의 원리를 최초로 사용한 음악형식이다. 2개의 상성부는 똑같은 선율로 엄격한 모방을 하였고 3성부인 최저성부는 기악에 의해 느리게 움직이는 자유스런 형식으로 작곡되었다.

 

  발라타 (Ballata) : 프랑스의 발라드(ballade)와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원래 춤을 위한 노래였는데 마드리갈이나 카치아보다 약간 늦게 발전했다. 발라타의 구조는 프랑스의 비를레와 똑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트레첸토의 다성 세속노래 중 발라타 만이 정형시 형식을 갖고 있다. 대부분이 2성 혹은 3성으로 작곡되었으며 가사의 내용은 고귀한 사랑이 주된 것이었다.

 

Ⅴ. 대표음악가 및 작곡가

 

아르스 노바    마쇼 / 란디니 / 던스터블

부르고뉴 악파  뒤파이 / 뱅수아

플랑드르 악파  오케겜 / 오브레히트 / 조스캥 데프레 / 팅토리스

               이자크 / 피에르 라 뤼 / 젠플 / 라수스

로마 악파      팔레스트리나

 

베네치아 악파   빌라르트 / 안드레아 가브리엘리 / 지오반니 가브리엘리

                메룰로 / 몬테베르디

이탈리아 마드리갈 작곡가  마렌치오 / 가스톨디 / 제주알도

프랑스 르네상스 작곡가   클레망 자느캥

영국 르네상스 작곡가   테버너 / 타이 / 탈리스 / 버드 / 몰리

                       다울랜드 / 윌비 / 윌크스 / 기번스

스페인 르네상스 작곡가  모랄레스 / 빅토리아 / 게레로 / 로보

독일 종교개혁시대의 작곡가  루터 / 발터 / 스벨링크 / 하슬러 / 쉬츠

 

Ⅵ. 결론 요약

 

◈ 르네상스 음악

  1400-1600년... 200년 간

  1. 문학과 시각예술에 있어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모델로 삼았지만 음악에 있어서 1560년까지 그 영향력을 찾을 수 없다.

  2. 네덜란드 악파

    Ockegem. Obrecht, Issac, Josqin, Lasso, Dufay

  3. 가장 중요한 장르

    - 미사

    - Motet (모테트) : 16c 종교음악에 가장 많이 쓰임. 라틴어로 된 합창곡

    - Chanson (샹송) :불어로 "노래"라는 뜻  cf. melody..예술가곡

  4. 세속음악 : 대부분 귀족, 왕족을 위해 쓰여졌다.

    - 다성음악

    - 마드리갈 (madrigal) : 이태리에서 유행. 4성부-6성부

  5. 종교개혁음악

    - 루터 : 1517년

      →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 왕권, 교황, 신앙에의 도전

    - 루터 직접 작곡

      ↓영향

    - 스위스, 프랑스.. 종교개혁 일어남

      .. 쯔빙글리히 : 예배에서 음악 제외

      .. 칼빈 : 시편만 노래. 나머지는 ×

  6. 르네상스 기악곡

    - 관악기가 가장 발전

    - 새로운 악기.. Harpsichord (하프시코드), Timpani (팀파니)

    - 바이얼린  계열의 악기 개량

    - Lute (류트).. 가정에서 가장 보편화

      → 주로, 성악곡의 반주역할 : 1600년 이후(르네상스 이후, 바로크 시대부터) 독립된 기악곡이 작곡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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