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인종에 대해 궁금증이 있습니다~~

인간의 인종에 대해 궁금증이 있습니다~~

작성일 2006.01.26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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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보면 인간의 시초는 아담과 하와 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사람들이 멸종하고

 

노아 그 일가족만 남게 되었잖아요? 그런데 저희 엄마가 그러시더라고요

 

셈은 황인종인고 야벳은 백인종인고 함은 흑인종이 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런건 주제에 상관은 없지만 아무튼 그사람들을 시초로 어떻게 인종(흑인 백인 황인)이

 

변화되었는지궁금합니다. 멜라니 색소에 대해 설명해 주시구요 ..

 

적도지방의 사람들은 환경때문에 (기후 음식 등)

 

흑인이 돼어서 우성이 흑인피부색이고 열성이 다른색이라고 들은적있습니다만.

 

저는 진화론은 믿지 않구요 그런 가설은 없다는 전재 하에 답변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생물파트의 유전이나 진화론에 대헤 다시 공부할 생각인데 그 과목에 대해 설명도 해주시

 

면서 답변 해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기독교 신자 이자 구원파 입니다. 상담을 해서 궁금증

 

을 풀어보려고 했으나 전화 번호도 모르고 일요일 까지 기다리기에 궁금해서 질문드립니

 

다.  내공 있어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허허...

 

원래 아담과 이브는 무슨 색이었다, 라는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림에서는 대부분 백색입니다만 그건 어디까지 백인들의 생각입니다.

 

어쨌든 아담과 이브는 원래 같은 색이었고, 수만년이 지나면서 변화되었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만.

 

진화론을 믿지 않으신다니 이런 말씀은 해답이 안 되겠군요. 하지만 성경 어디를 찾아도 여기서부터 흑인 혹은 백인의 시작이었다, 라는 말은 찾으실 수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태초부터 쓰여진 게 아니라, 특정한 시대에 천사의 말을 들은 사람이 태초의 일부터 쓰기 시작한 것이니까요. 그리고 천사는 여기서부터 시꺼먼 놈이 나오기 시작했어 알겠지? 따위의 말까지는 해주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처음 사람은 흑인이었으나, 아프리카의 기후에 못이겨 점점 다른 대륙으로 퍼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적도지방 사람들은 검은 피부, 추운 지방사람들은 흰 피부, 습도변화가 심하고 온난한 기후 사람들은 황색 피부를 지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기후 차이라는 말이지요. 이도 사람이 진화했다는 겁니다.)

 

진화론은 다윈이 창시한 것으로 사람은 원숭이에서 진화하여 지금의 사람이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유전이란 다윈이 어떻게 사람이 원숭이에서 진화했는가를 설명해주는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진화의 단계이지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안녕하세요

 

일단 제가 아는것만 알려드리겠습니다

 

진화론 ----------------------------------------------------------------------

 

인류의 진화

 

인류가 지구상에 처음 출현한 것은 지금부터 약 300만년 전으로 추정되며,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인류의 조상은 아프리카 초원지대에서 발견된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이다. 이들의 겉모습은 원숭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두발로 서서 걸었고 간단한  도구를 제작하여 사용함으로써 동물과 구별되는 인류로서의 중요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50만년 전에 이르러 인류는 직립보행과 함께 지혜가 더욱 발달하여 간단한  언어로 의사를 전달하였고 불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20만년 전에는 뗀석기를 사용할 줄도 알았고, 시체를 매장하기도 하였다.

  우리의 직접적인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현생인류는 지금으로부터 약 3-4만년 전 에 출현하였다. 이들의 외모와 지능은 오늘날의 인류와 거의 비슷하였으며, 더욱 세련된 뗀석기를 사용하였으며 활과 창을 이용하여 사냥을 하기도 하였고 주로 동굴 속에  살면서 동굴 벽에 여러 가지 동물그림을 남기기도 하였다.

 

다른 동물과 비교되는 인류의 특징

  최초의 인류라고 알려진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는 ‘남방의 원숭이’라는 뜻으로 1925년 남아프리카에서 유골이 출토되었다. 외형상 침팬지와 매우 유사하지만 이를 최초의 인류라고 보는 까닭은 이들의 치아 모양이나 배열이 인류에 가깝고, 직립보행을 했다는 생물학적 측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직립보행은 인류가 지닌 가장 큰 특징으로서 직립보행을 하면서 손이 몸을 지탱하는 일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손의 기능도 발달하여 정교한 손놀림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직립보행을 하게 되면서 두개골을 압박하던 머리 뒷근육이 퇴화되어 뇌 용량이 더욱 커지게 되어 두뇌가 발달하였다. 인류는 발달된 지능을 이용하여 다양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였고, 불을 이용할 줄도 알게 되었으며, 언어를 사용하여 다른 동물과 뚜렷이 구분되는 문화를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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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창세기에는 아담과 이브가 카인, 아벨, 세트를 낳았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유전학자들은 최근 10명의 아담과 18명의 이브가 인류의 조상이라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고 미국의 <뉴욕타임스>와 인도의 <더스테이츠맨> 등이 잇따라 보도했습니다.
미국 에모리의과대학의 더글러스 월리스 박사는 70년대 말부터 어머니를 통해서만 전달받는 미토콘드리아DNA를 통해 `이브'를 추적한 결과 현존하는 인류는 모두 18명의 서로 다른 모계에서 출발했다고 최근 발표했습니다.

미토콘드리아DNA는 난자에만 있는 데다 세포의 핵밖에 위치해, 아버지의 유전자와 섞이지 않은 채 태초의 이브 것을 원형대로 유지합니다. 단지 세포분열때 잘못 복제되는 등의 변이가 일어날 수 있는데, 유전학자들은 대략 1만년에 한번씩 변화가 오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방법을 처음으로 도입한 학자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브라이언 사이키스 교수로, 그는 지구상의 모든 햄스터는 1930년 시리아 사막에서 잡은 한마리 임신한 햄스터에서 비롯됐다는 얘기를 미토콘드리아DNA 분석을 통해 실제로 확인했습니다.

월리스 박사가 전세계 각 인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유럽인들의 미토콘드리아DNA는 H·I·J·K·T·U·V·W·X 9가지형으로 대표되고, 아시아인들은 A·B·C·D·F·G 6가지, 아프리카인들은 L1·L2·L3 3가지로 압축됐습니다. 이들 중에서도 아프리카 동부에 기원을 두고 있는 L3가 진짜 이브에 해당합니다. 월리스 박사가 최근 그 뿌리를 찾아서 아프리카를 현지답사한 결과, 칼라하리 사막의 바시켈라 쿵족과 아프리카 중부의 비아카 피그미족이 가장 원형에 가까운 미토콘드리아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월리스 박사가 이들 미토콘드리아DNA의 특성과 연대를 분석한 결과, L3를 지닌 이브가 5만년전 아프리카를 떠나 3만9000~5만1000년전 유럽에 도착했습니다. 아시아에는 5만6000~7만3000년전 도달했는 데, 이중 일부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습니다.

특이한 것은 아메리카에서 발견되는 A·B·C·D·X형 가운데 A·C·D는 시베리아에서 발견돼 빙하기때 베링해를 거쳐 이전했음을 쉽게 추측할 수 있는데, B형은 아시아 남부에서만 발견될 뿐 시베리아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B형은 태평양을 건너 이주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또 X형의 경우 아시아에서는 아예 발견되지 않아 유럽의 X형이 대서양을 횡단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일 경우 인류의 조상들은 콜럼버스보다 몇만년 앞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셈이 됩니다.

아담에 대한 추적은 스탠퍼드대학의 피터 언더힐과 피터 외프너 박사팀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해주는 Y염색체 분석을 통해 하고 있습니다. 아직 연구결과가 공식발표되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략 아프리카에서 1·2·3번형의 Y염색체가 출발해, 나머지 대륙으로 번져가면서 6~10번형의 Y염색체로 변이됐다는 내용입니다. 인도는 5번, 카스피해 남부는 6번과 9번, 일본은 4번에 해당합니다.

특히 이 연구팀은 Y염색체 유형과 언어그룹이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데, 카스피해 남부에 살던 조상이 사용하던 유라시아어가 인도-유럽어족과 다른 중요한 언어그룹으로 발전한 것으로 연구결과 나타났습니다.

이 연구팀의 언더힐 박사는 “Y염색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모두 아프리카인의 형제”라고 말했습니다. 월러스 박사도 “우리 인류는 같은 가족이다. 계통학적으로 아프리카는 인류의 시작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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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사하라사막은 세계 최대의 사막입니다. 그러나 한때 이 사하라가 바다 속에 묻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실제로 사하라 사막의 지하층에서는 바다에서만 발견되는 뻘층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하라사막은 기원전 4000년 까지만 해도 푸르른 초원이였죠. 이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으므로 자세한 것은 피하겠습니다.

두번째는 이집트(나일강)지역. 이곳도 역시 옥토였습니다. 지금은 물 부족 현상이 나타나긴 하지만.

세번째는 조금 아래쪽으로 내려가서 에티오피아. 현재는 세계 최빈국이지만 이집트에 버금가는 역사와 전통을 지닌 나라입니다. 에티오피아 왕가는 몇백대를 이어서 내려왔다고 합니다. 일본의 황가의 역사는 비교도 안되죠.

에티오피아가 이만한 전통과 문화를 일구어낸것으로 볼 때 그곳도 살만했던 곳일 겁니다. 현재는 내전으로 엉망이 됬지만요.

그리고 네번째로 살펴볼 곳은 기니만 연안의 콩고분지입니다. 이곳은 토양이 결코 척박하지 않습니다. 나일강 유역만큼 옥토였죠. 현재는 석유개발로 또다시 세계무대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됬습니다.

다섯번째 탄자니아, 르완다 등지의 초원. 이곳은 솔직히 농사는 지을 곳이 못되죠. 그러나 유명한 마사이 족의 거주지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사냥과 목축으로 결코 부족하지 않은 생활을 이어왔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백인 지주와의 갈등, 물부족 현상 등으로 초원을 떠나 슬럼가를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죠. 얼마 전에 뉴스에도 나올 만큼 이들은 급속히 몰락했습니다.

여섯번째 남아공 일대. 현재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나라는 이집트와 남아공입니다. 이들 지역은 온난한 지역으로 농사와 목축이 잘 됩니다. 라틴아메리카의 팜파스와 같은 지역이죠. 지금은 지하자원의 개발로 급속히 공업화가 되고 있습니다.

일곱번째로 마다가스카르를 말씀드리려 했으나 내용이 길고 또 아프리카 본토와는 판이하게 다른 자연조건 등 여러모로 아프리카 본토와는 상관없다고 생각되어 생략합니다.

 

결론적으로 볼때 중앙아프리카를 제외한 지역은 모두 괜찮은 거주지였습니다. 아프리카에서도 카르타고, 이집트, 에티오피아 등 화려한 고대문명이 일어났습니다. 다만 열강들의 착취와 전통부족경계를 무시한 국경선(이것도 열강들이 남긴 상처 중 하나), 군부와 국민과의 갈등, 급속한 인구증가로 인한 무분별한 개발, 지배계급의 부정부패 등이 아프리카국가들을 세계최빈국으로 몰락시킨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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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의 빙하기가 있었는가?
Was there an Ice Age?

http://www.answersingenesis.org/docs/218.asp
번역 : IT 사역위원회

그렇다. 지구가 빙하기를 겪었다는 강력한 증거들이 있다. 빙하기는 전 지구에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위도상 북극과 남극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눈과 빙하는 캐나다와 미국북부, 북유라시아, 그린랜드, 남극대륙을 덮었다. 진화론자들은 수 차례의 빙하기가 반복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창조론자들은 빙하기가 단지 한번으로 끝났다고 믿는다.

빙하기의 원인은 진화론자들에게 미스터리이다. 분명 기후가 낮아질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적인 냉각은 아니다. 점차적 냉각은 많은 수증기와 눈을 발생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찬 기후와 많은 수증기의 발생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었을까?

창조론자들은 가능성이 큰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그것은 노아의 홍수 영향이다. '모든 깊음의 샘(all the fountains of the great deep)'이 터졌을 때 뜨거운 물과 용암이 지구 표면에 쏟아졌다. 이때 많은 수증기가 자체 발생했을 것이다. 화산 폭발시 흔히 많은 비율의 물이 방출된다. 그리고 이 물들이 바다로 쏟아졌다면, 수온은 상승하며 많은 수증기를 발생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공중의 많은 화산재들이 태양광선을 차단하여 지구를 식혔다.

즉, 화산재로 인한 태양광선 차단으로 대륙의 기후가 차가워지고, 수온 상승으로 인한 수증기의 생성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대륙에는 폭설이 초래됐던 것이다. 그리고 눈이 녹는 속도보다 내리는 속도가 빨랐다면, 대륙빙이 생성되었을 것이다.

이 빙상(ice sheets)은 몇 세기동안 지속되었고, 바다가 점차 식고 화산재가 공기 중에서 점점 사라지면서 빙상이 녹기 시작했을 것이다. 빙상이 빠르게 녹아 강이 범람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때 빙상에 갖혀 있던 매머드 같은 큰 동물들은 홍수에 쓸려 강기슭에서 묻히면서, 화석화되었을 것이다.

위의 내용은 기상학자인 Michael Oard 가 그의 전문 서적인 '창세기 홍수로 유발된 한 번의 빙하기(An Ice Age Caused by the Genesis Flood)' (ICR, 1990) 라는 책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또 어린이용 도서 '엄청난 빙하기에서의 생명(Life in the Great Ice Age)' (Beverley Oard 공저) 에서 간단한 과학적 설명과 그림으로 소개되었다.


*참조 : 자료실/Fossil/순환논법/지층과 화석-대홍수의 증거.

34) 빙하기(Ice age)는 화산폭발을 동반한 거대한 홍수 후에 초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빙하기는 늘 과학분야에서 풀어야할 과제 중 하나로 남아 있다. 북부아시아, 북부유럽, 캐나다, 미국의 1/4 지역이 한때 빙하로 덮였었다는 풍부한 증거들은 발견되고 있지만, 그 원인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지구의 냉각, 태양빛의 감소, 화산폭발 등 여러 시나리오들이 제안되어 왔지만 어떠한 것도 이러한 엄청난 변화를 적절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빙하기는 육지에 엄청난 양의 얼음층이 만들어진 시기이며, 얼음층은 눈이 극지방에 과도하게 축적된 후 무게에 의해 다져질 때 만들어진다. 그런데 얼음은 강도가 비교적 작기 때문에 과도히 축적되었을 경우 무게에 의해 낮은 쪽으로 흘러가게 된다. 빙하는 지구의 단지 일부분만을 덮고 있는데, 나머지 지역들은 녹아버려 존재할 수가 없다. 오늘날 육지표면의 10 %를 차지하는 얼음층은 과거에는 30 % 정도 차지했었으며, 엄청난 량의 물을 저장하는 역할을 하여 해수면을 약 120 m 정도 낮추는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람들은 4 번에서 60 번까지의 빙하기가 있었으며, 각각은 오랜 기간 지속됐고, 광대한 시간에 의해 나누어진다고 말하여 왔으나, 빙하기가 여러 번 있었다는 증거들은 희박하다.

많은 과학자들은 한번의 빙하기를 믿었으나, 빙하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은 퇴적층에 의해서 분리된 빙력토(till sheet)층이 1~4 개 또는 그 이상 발견됨으로서 당황하게 되었다. 몇몇 사람들은 deep-sea cores에서 산소동위원소 변동(oxygen isotope fluctuations)에 기초하여 신생대 말에 30회 이상의 빙하기가 있다고 하였으나, 대양에서의 결과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대륙에서의 4번의 빙하기와 일치하지 않았다. 4번의 빙하기는 알프스의 사력층 단구(gravel terraces)로부터 확립되어, 토양층위학(soil stratigraphy)에 의해서 더욱 지지를 받았는데, 추후 계속적인 연구에 의하면 알프스의 단구는 기후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반복되어진 tectonic uplift cycles의 결과라는 것이 밝혀졌으며, 빙력토 사이의 "간빙기 토양(interglacial soils)"은 표면에 유기 지평층(top organic horizon)을 잃어버려, 이것이 실제 토양인지의 의문이 제기되었고, 오늘날 토양형성률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온난화, 습도, 시간 등과 같은 요소들에 의존하기 때문에 여러 번의 빙하기가 있었다는 주장은 증거들이 부족한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으며, 오히려 한번의 빙하기가 있었다는 주장들이 다시 강력히 주장되고 있다.

많은 얼음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강설량이 많아야 하며, 내린 눈이 적게 녹아야 한다. 또한 너무 춥다면 공기는 많은 습도를 가질 수 없으며, 결국 많은 강설을 유발할 수 없다. 많은 강설을 위해서는 많은 증발이 필요한데, 이것은 따뜻한 바다일 때 쉽게 일어날 수 있다. 또한 많은 강설을 위해서는 극지방에 춥지 않은 겨울이 필요하며, 바다에서 증발된 습기가 대륙까지 이동될 수 있는 기후상태가 필요하다. 그리고 내린 눈이 녹지 않고 수년동안 축적될 수 있도록 추운 여름이 필요하다.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상태가 빙하기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이러한 상태가 어떻게 발생할 수 있었을까? 동일과정설에 의하면 과거도 오늘날과 동일하였음으로 이러한 빙하기의 조건들과 모순된다. 그러나 창조과학자들은 노아의 홍수를 빙하기의 열쇠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홍수전의 지구기후는 전체가 온난한 아열대 기후였을 가능성이 크고, 홍수동안 많은 해저 화산활동으로 인해 바닷물은 덥혀져, 홍수가 끝났을 즈음 바다는 오늘날보다 따뜻했을 것이다. 이러한 따뜻한 바다는 습기를 대기 중으로 지속적으로 발생시킴으로서 따뜻하고 축축한 겨울을 만들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홍수말기에 육지의 표면은 매끈한 진흙 펄과 같아서 태양열을 흡수하지 않고 상당부분을 반사시켜버림으로서 육지의 온도는 바다에 비해 매우 낮았을 것이며, 이러한 바다와 육지간의 상당한 온도차와 극지방의 냉각은 강력하고 지속적인 폭풍을 유발하여, 바다에서 증발된 습기를 극지방까지 운반하였을 것이다. 또한 홍수기간에 분출된 화산재들은 대기 중에서 태양열을 반사시켜 추운 여름을 유발하였을 것이다.

많은 증발, 따뜻한 겨울, 강력한 폭풍, 추운 여름의 결과는 무엇일까? 그것은 빙하기였던 것이다. 따뜻했던 바다가 식어지고, 화산활동이 감소되어지며, 식물들이 육지를 덮기 시작하면서 빙하기는 사라졌다. 이 기간은 홍수가 끝난 후 천년보다 적은 기간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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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발행되는 크리스천 투데이는

11일 정밀한 해상도를 가진 최첨단 인공위성 퀵버드(QB) 2호가

노아 방주 탐사를 목적으로 찍은 아라랏산 사진이 이르면

내달 중 공개된다고 보도했다.



전문가들은 고공에서 지상에 있는 직경 2피트(61cm) 크기 물체까지 식별해 낼 수 있는 QB2호가 찍은 사진이 공개될 경우 아라랏산 중턱에서 발견된 정체 불명의 물체가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인지 밝혀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QB2호는 아라랏산 중턱 해발 4275m 지점 만년설에 묻혀 있는 괴물체의 정체를 밝혀 내기 위해 지난해 10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반덴버그 공군기지에서 발사된 후 궤도 진입에 성공, 현재 아라랏산을 중심으로 터키 동부 상공에서 영상 촬영을 하고 있다.



아라랏산은 터키 동부 이란과 아르메니아 접경지역에 위치한 해발 5165m의 웅장한 산으로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머물렀던 곳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아라랏산은 여름에도 해발 3500m까지 눈이 쌓이고 4900m 이상은 만년설로 덮여 있는데다 1년내내 폭풍우가 몰아치는 험한 고지대여서 방주에 대한 연구는 답보상태에 있다.

동아일보 2002년 9월 16일

한국인이 ´노아의 방주´를 찾아낼 수 있을까?


터키 아라랏산


에베레스트산 등 7대륙 최고봉과 남·북극점을 모두 정복한 세계적인 산악인 허영호씨(48)와 한국 창조사학회 (회장 장국원)가 성경에 기록된 노아의 방주를 찾아나선다.

허씨를 탐험대장으로 한 한국교회, 아라랏 노아방주 대탐사 팀은 7월15일부터 1개월간 터키 아라랏산을 탐사한다.


아라랏 산은 성경에 하나님이 물로 세상을 심판한 뒤 노아의 가족과 생명체를 태운 방주가 닿은 곳으로 기록돼 있다. 이 산은 해발 5165m의 대 아라랏과 해발 3846m의 소 아라랏으로 구분되는 데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일부에서는 하나님의 동산에서 발원하는 네 강(江) 가운데 두 큰 강의 발원지이므로 에덴 지역을 아라랏 부근으로 보기도 한다.

해발 5165m의 대 아라랏과 해발 3846m의 소 아라랏

성경학자와 고고학자들이 아라랏 산에서 노아의 방주를 찾아온 것은 성경의 기록외에도 지정학적, 고고학적 근거 때문이다. 산 정상의 지름이 1㎞가 넘어 방주가 머무를 공간이 되는 데다 오래된 주거지의 흔적이 발견돼왔다.


산악인 허영호씨

허씨는 ˝신앙인은 아니지만 3년전부터 성경에 있는 노아의 방주에 관한 말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어 이번 탐험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면서 ˝과연 노아의 방주가 진실인지 실체를 밝히고 싶다˝고 말했다.


이번 탐사대는 허씨 등 전문산악인 5∼6명과 신학, 지질학 등 관련 분야의 전문가 10여명 등 20여명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아라랏 산의 높이는 에베레스트(8848m)산에 비해 훨씬 낮지만 산 정상에는 만년설이 있고 바람 등 기상 이변이 잦다. 성경과 영어권에서는 아라랏으로 불리지만 터키어로는 아아러다아아 . 아아러(고통)와 다아(산)의 합성어로 ´고통의 산´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허씨는 ˝등반 자체가 어렵지는 않지만 산소가 부족한 고지대에서 장기 체류하기 때문에 고산병 등 탐사대의 안전에 신경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탐사대는 특히 이 산의 4700m 지점을 중심으로 수십 m 깊이의 만년설 아래에 방주가 보존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이 지역을 집중적으로 탐사할 계획이다.


단장인 김진섭 교수(목사·천안대 구약학)는 ˝미국 우주항공국의 위성 사진과 각종 증언에 따르면 방주의 흔적이 보존돼 있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노아의 방주´가 기록 뿐 아니라 역사적 실체임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아라랏 산 지역은 91년이후 쿠르드족과의 영토 분쟁 등으로 접근이 극히 제한적으로 이뤄졌지만 이번 탐사에는 터키 정부의 협조로 1개월간 장기탐사가 성사됐다.


97년 창립된 창조사학회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 지역 등 국내외 학술탐사와 세미나 등을 통해 성경 기록의 진실성을 전파해왔다.


창조사학회는 또 이번 탐사에 참여할 교회와 목회자를 모집한다. 정상에 오르기를 원할 경우 신체검사를 받아야 하며 10명 이내로 제한할 예정이다. 02-2649-5415


<김갑식기자>[email protected]


<노아의 방주, 과연 실제인가?>
목격담 많지만 과학적 증거 미약

1872년 대영박물관의 이집트·앗시리아부 담당자인 스미스는 1852년 발굴된 한 점토판을 읽다가 뜻밖의 문장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이 점토판은 아슈루바니팔왕(기원전 668-628)이 세운 도서관 유적에서 발견된 것인데 “배가 니시르산에 도착한 다음 날려보낸 비둘기가 다시 배로 돌아왔다”고 쓰여 있었다. ‘구약성서’에 기록된 노아의 홍수 얘기 끝부분과 너무나 흡사했다.

점토판에 흥미를 느낀 스미스는 또다른 점토판을 찾아내 읽었다. 점토판 전체의 줄거리는 ‘구약성서’에 기록된 노아의 홍수 얘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스미스는 누락된 부분이 더 있다는 점을 깨닫고 발굴지를 직접 방문했다. 다행히도 그곳에서 누락된 나머지 점토판을 찾을 수 있었다.


성경에 삽입된 메소포타미아 신화

점토판의 내용은 유명한 ‘길가메쉬 대서사시’라고 불린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바빌로니아의 대서사시로 3천행에 이른다. ‘수메르 왕명표’에 따르면 길가메쉬는 홍수 후 수메르를 통치한 왕으로 기록돼 있다.

전설에 따르면 길가메쉬는 우트나피수팀이라는 현자가 영생을 얻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만난다. 우트나피수팀은 자신이 대홍수 때 겪은 얘기를 들려준다.
어느날 밤 우트나피수팀이 자고 있는데 에아신(神)이 그의 집 갈대벽을 뚫고 들어와서 조용히 경고했다. 바벨론의 최고의 신 엔릴이 타락한 인간을 응징하기 위해 대홍수를 일으킬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주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누구 한사람도 상대하려고 하지 않자 친족과 친구들만의 힘으로 집을 부셔 4각형의 방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7일째 되는 날 갑판까지 6층이나 되는 거대한 배가 완성됐다. 그는 자기 가족과 하인들을 방주에 태우고 금과 은, 그리고 ‘모든 살아있는 것의 씨앗’을 실었다.

드디어 6일 밤 6일 낮에 걸쳐 비가 쏟아지고 인간들은 모두 죽는다. 그가 탄 방주는 니시르라는 산에 닿았다. 우트나피수팀은 땅에서 물이 빠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들창을 열고 비둘기와 참새, 큰 까마귀를 날려보냈다. 어느날 큰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자 홍수가 끝난 것을 알고 배에서 내려 제일 먼저 신들에게 제물을 바쳤다.

우트나피수팀이 홍수를 일으킨 신들을 원망하지 않고 공경하자 이에 감명 받은 신들은 홍수의 결과에 대해 토론했다. 결론은 “두번 다시 홍수를 일으킬 것이 못된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자신들을 경배한 보상으로 영생을 선사했다.

이 얘기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기록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원래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살고 있던 셈족의 일원이다. 또 ‘구약성서’는 기원전 12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 경까지 약 1천년에 걸친 이스라엘 민족의 기록이다. 그렇다면 성경에 선조가 겪었던 이야기, 즉 메소포타미아의 신화가 삽입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 배는 과연 실제로 존재했을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 ‘구약성서’에 기록된 노아의 방주 얘기를 살펴보자.

‘구약성서’에 따르면 노아의 방주가 아라라트산에 닿아 그곳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7월 17일에 방주가 아라라트산에 머물렀으며, 물이 점점 줄어 10월 1일에는 산봉우리가 보였다(창세기 8장).

아라라트는 오늘날 터키와 이란, 옛소련 국경에 걸쳐있는 산이름이다. 아라라트산은 기후 변동이 심하며 만년설로 뒤덮여 있고, 늘 큰돌이 구르고 있는데다 높이가 5천여m에 달해 정상에 오르기 매우 힘든 산이다.

성경의 내용이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고 철저하게 믿는 성경학자와 고고학자들은 아라라트산의 정상 부근에 호수가 있다는 점을 알아냈다. 이 호수는 일년 중 열달은 얼음에 묻히기 때문에 위치조차 알아내기 어려운 곳에 있다. 이들은 노아의 방주가 아라라트산 근처에 도달했다는 성경 기록을 근거로 이 방주가 호수 안에 있다고 확신했다.


대홍수 증거 없어

고대부터 아라라트산은 사람들로부터 무척 신성하게 여겨졌다. 아라라트는 ‘노아의 방주’와 ‘에덴 동산’이 있던 성지로 하나님이 출입을 금한 금역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기원전 300년 바빌로니아의 신관 베로소스는 “방주가 있는 곳까지 올라간 사람들은 언제나 배에서 송진을 긁어내 악마를 물리치는 부적으로 삼았다”고 기록했다. 마르코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아무도 오를 수 없는 산봉우리, 만년설로 뒤덮인 그곳에 노아의 방주가 있다”고 썼다.

1829년 독일의 파로트교수는 최초로 아라라트산 꼭대기에 올랐다. 비록 그는 방주를 찾지 못했지만 “정상이 넓고 평평한 것을 보아 방주가 얹힐만 하다”고 말했다.
1876년 영국의 브라이스경은 3천9백m 지점에서 사람의 손으로 다듬은 것이 틀림없는 나무 조각을 가지고 돌아왔다. 비록 방주의 파편이라고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노아의 방주 유물 찾기’ 열기에 기름을 부은 사건이었다.

20세기에 들어 노아의 방주에 대해 더욱 구체적인 증거들이 보고되기 시작했다. 1916년 러시아 항공대의 코스코비키 중위는 아라라트산을 정찰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눈덮인 산꼭대기를 돌아 남쪽으로 날아가니 사파이어처럼 푸른 호수가 나타났다… 나는 낮게 떠서 그 언저리를 몇번이나 돌았는데, 거기에는 둥그스름한 지붕으로 덮인 묘하게 생긴 배 한척이 얼음에 파묻혀 있었다. 엄청나게 컸다.”

코스코비키 중위는 자신이 발견한 곳으로 탐험대와 함께 올라가 배의 크기를 재고 사진을 찍었다. 배 안은 몇백개나 되는 칸막이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어떤 방은 아주 크고 천장이 높았다. 1917 년 탐험대장은 사진과 함께 자세한 보고서를 황제에게 보냈다. 그러나 보고서가 보내진 직후 러시아 제국은 볼셰비키 혁명으로 무너졌고 보고서와 사진들은 사라지고 말았다.

1960년 터키 공군의 커어티스 소령은 아라라트산을 촬영하던 중 해발 2천m의 산허리에서 달걀 모양의 물체를 발견했다. 여러 차례 거듭된 화산폭발로 분화구에서 흘러나온 용암 속에 묻힌 기이한 물체였다. 사진을 조사한 한 전문가는 “노아의 방주 이외의 다른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사진은 사진측량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브런덴부르거 박사에게 보내졌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누가 뭐라 해도 나의 명예를 걸고 단언한다. 아라라트산의 2천m 지점에 있는 물체는 틀림없는 배다.”

1969년에는 미국의 고고학 탐험대가 대규모 조사단을 조직해 등정에 올랐다. 면밀한 조사 결과 북서부의 한 지점에서 깊이 6m의 빙하 밑바닥에 배 비슷한 물체가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커어티스 소령이 발견한 곳과 해발에서 차이가 나지만 크기는 비슷했다(약 1백50m). 이들이 회수한 나무 조각을 검사한 결과 4천-5천년 전 것임이 판명됐다.


수많은 목격자들이 증언한 배 형태의 물체가 아라라트산에 있다는 점에는 대부분 의견이 일치한다. 그렇다면 아라라트산에 있는 물체가 노아의 방주가 틀림없는 것일까? 성서에 따르면 노아의 방주는 길이 1백35m, 폭 22.5m, 높이 13.5m의 엄청난 크기다. 실제로 후대 사람들이 관측한 규모와 유사하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지구 바닷물의 양을 계산하면 아무리 세계를 뒤덮을 만한 홍수가 일어났다 해도 3천m 이상이나 되는 높이로 배를 끌어올릴 수는 없다고 단언한다. 더욱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그 정도의 대홍수가 일어났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


후대인이 제작한 기념물일 수도

그렇다면 아라라트산의 배 형체는 무엇일까. 성경의 문구 하나 하나에 진실이 담겨있다고 철저하게 믿는 사람들에게는 실망스런 얘기겠지만 아라라트산에서 발견된 나무 조각들은 노아의 방주 실물이라기보다 후대 사람들이 방주의 상륙지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의식용 배 또는 건조물의 일부일 수 있다.


이 가설을 증명해주는 얘기가 있다. 중세에 아라라트산 기슭에 있던 한 수도원이 많은 순례자들의 발길을 끌어들인 일이 있다. 수도원이 노아와 그 가족의 것이라고 알려진 유물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 수도사들은 산 정상에다 성경에 나오는 것과 같은 크기의 노아의 방주를 제작했을 가능성이 크다.


4천-5천년 전에 몇만t에 달하는 대형 배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설사 이런 배를 만들었다 해도 과연 부서지지 않고 물에 뜰 수 있었느냐도 의문이다. 따라서 아라라트산에 있다고 생각되는, 적어도 노아의 방주 전설과 관련되는 어떤 물체는 후대의 열성적인 종교인들이 제작했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 있어 보인다.





아라랏-우라르투

1955년 프랑스의 탐험가 페르낭 나바라(F. Navarra)는 터키의 최고봉 해발 5137m 높이의 아라랏 산에 올라가 해발 4000m 지점의 얼음 구덩이에서 검은 역청이 칠해진 1.5m 길이의 나뭇조각을 가져왔다. 이 나무의 샘플은 정확한 연대측정을 위해 유럽과 미국의 여러 연구소로 보내졌다. 측정 결과 한 연구소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서기 7∼8세기의 것으로 판정했다. 단 한 군데 과학적인 탄소동위원소 측정법을 사용하지 않은 스페인 마드리드의 임업연구소만 나무의 색깔과 밀도를 기준으로 5000년전의 것으로 판명했다. 참나무로 밝혀진 이 샘플의 밀도는 1.1로 밝혀졌는데 살아있을 당시는 0.8 정도이므로 그만큼의 세월이 흘렀다는 것이다. 나바라는 1974년 “내가 손으로 만진 노아의 방주”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모험담을 책으로 펴냈다. 이로부터 저자들의 자유로운 상상이 추가된 노아 방주의 이야기가 다시금 전성기를 맞게 된다.

◇ 아라랏은 곧 우라르투

창세기에서 홍수 이후 노아의 방주가 처음으로 안착했다는 아라랏은 원래 우라르투 왕국의 히브리어식 표기이다. 서기전 900년경 터키의 동부 지역의 반(Van) 호수를 중심으로 하는 고원지대에 우라르투 민족이 강력한 도시들을 중심으로 왕국을 형성했다. 원래 우라르투는 지역 이름이었고 서기전 13세기 앗시리아의 샬마네세르 I세의 기록에서 우루아트리(Uruatri)로 처음으로 등장하며 반 호수 근처의 소규모 왕국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서기전 900년경부터 이 지역에 대한 앗시리아의 끊임없는 군사적 원정을 견디다 못해 우라르투 민족은 좀 더 서쪽에 위치한 반 호수 근처로 그 중심지를 옮겼다. 서기전 830년 사르두리(Sarduri) I세는 천연적인 바위요새인 반 칼레시를 수도로 삼고 이를 투슈파로 명명했다. 투슈파는 반 호수의 동쪽 평원에 주위보다 100여m나 높고 길이가 1.8㎞에 달하는 천연적인 바위요새이며 오늘날 볼 수 있는 성채는 대부분 서기 1000년경 셀주크 시대부터 건설된 것이다.

서기전 714년 앗시리아의 사르곤 II세는 우라르투의 중심부를 점령했고 이 사건을 기점으로 우라르투의 세력은 점점 약화됐다. 나아가 코카수스 지방의 유목민인 키메리아 민족의 세력확장과 서기전 590년경 스키타이 민족이 메대 민족과 함께 터키 동부지역을 장악함에 따라 우라르투 왕국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 아라랏 산지에서 아라랏 산으로

구약성서에서 모두 4회 등장하는 아라랏은 특정한 산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이나 왕국을 의미했다. 노아 홍수 사건에서는 ‘하레이 아라랏’, 즉 ‘아라랏 산지’로 기록된 만큼 넓은 의미의 고원지대를 일컫는 것으로 봐야 한다. 서기전 586년 이후 바벨론으로 유배된 유다의 종교적 지도자들에 의해 최종적으로 편집된 창세기의 홍수 이야기는 전통적인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신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메소포타미아의 지리적 관점에서 대홍수가 그치고 물이 빠질 때 가장 높은 고원지대에 방주가 안착한다면 바로 아라랏 산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앗시리아 왕 산헤립의 암살사건을 다루고 있는 열왕기하(19:37)와 이사야서(37:37∼38)에 의하면 산헤립이 니느웨의 한 신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그의 아들들에 의해 살해됐고 암살자들은 쿠데타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라랏 땅”, 즉 우라르투 지방으로 망명한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 우라르투가 앗시리아의 적대세력임을 감안할 때 이 기록은 어느 정도 역사적인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예레미아서(51:27∼28)에서는 아라랏 왕국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구약성서의 아라랏은 특정한 산을 의미한다기보다는 고원지대에 위치한 지역 이름으로서 서기전 900년경 이후 300여년동안 번창했던 우라르투 왕국을 염두에 둔 것임을 알 수 있다.

◇ 베로소스의 아르메니아

서기전 590년 우라르투 왕국의 파멸과 함께 노아 방주의 안착 장소는 서서히 잊혀져 갔다. 서기전 3세기 바벨론 출신의 역사가 베로소스는 수메르 홍수설화를 인용하면서 창세기의 노아에 해당되는 지우수드라의 방주가 당시 아르메니아 지방에 있는 고르디예 산에 있다고 증언했다. 이 때부터 우라르투 대신 아르메니아가 아라랏 산이 있는 지역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중에서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두 산이 주디 산과 아르 산이다.

◇ 아르메니아의 주디 산

베로소스가 언급한 고르디예 산은 티그리스 강과 대 자브 강 사이에 위치한 해발 2114m 높이의 주디 산이며 이 지역의 네스토리아 기독교인들에 의해 노아의 산으로 신성시됐다. 따라서 해마다 9월14일 이 지역의 유대교인, 기독교인, 이슬람교인들은 모두 산 정상에 모여서 노아가 아라랏 산에 도착한 후 드린 첫 제사를 기념하는 의식을 가졌다. 이 전통은 서기 13세기까지 지속됐다.

◇ 아르메니아의 아르 산

서기 4세기 아르메니아에 기독교가 들어온 후 이 지역에서 구체적인 아라랏 산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베로소스를 인용한 서기 1세기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노아의 방주가 아르메니아에 있다고 기록했다. 서기 5세기 아르메니아 왕국이 아락세스 지역에서 독립한 후 이 왕국의 최고봉 아르 산이 최종적으로 아라랏 산으로 확정되게 됐다. 이 시기는 요세푸스의 기록이 아르메니아어로 번역된 시기와 일치한다. 터키어로 ‘아르 다으’, 즉 ‘아르 산’이라 불리는 아라랏 산은 터키에서 가장 높은 해발 5137m의 ‘대 아르’와 해발 3895m의 ‘소 아르’로 구성돼 있다.

주위와는 구분되는 우뚝 솟아있는 아라랏 산은 봉우리가 일년 내내 흰눈에 덮혀있고 정상은 대부분 구름에 가려져 있어서 신비감을 자아내게 하는 산이다. 창세기의 아라랏이 곧 우라르투 왕국을 염두에 둔 것이기 때문에 아라랏 산은 더 이상 특정한 봉우리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터키의 ‘아르 산’의 지리적 위치가 우리의 관심을 끈다. ‘아르 산’은 우라르투 영토인 반, 세반, 우르미야 등 3개의 호수를 연결하는 삼각지역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성서의 기록자들은 우라르투 왕국의 최고봉 ‘아르 산’을 염두에 두었을까.

/김 성 교수(협성대학교)

노아의 방주 발견?
[출처 : http://www.bostonherald.com/bostonherald/nat/ : 1998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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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쌓인 아라랏산(Mount Ararat) 정상부에 얼음으로 덮힌 군함 크기의 보우트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은 노아의 방주였다. 나귀를 대동하고 수일간의 도보등정으로 산에 오른 이태리인 안토니오 팔레고는 그 전설의 방주를 목격한 순간 "할렐루야"를 소리쳤다. 무신론자들은 노아의 방주를 한 흰수염의 노인이 스스로 만든 보우트를 사용하여 동물들과 인류를 구하였다는 어린아이들의 전설이야기 정도로 치부한다. 그러나 탐험가이자 성경학자인 팔레고는 그가 진정으로 터키의 아라랏산에 실재하고 있는 방주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성경의 창세기에 근거하여 계산한 바에 따르면 방주는 약 4천년 이상 얼음 속에 갇혀져 있다.

자택의 식탁 테이블에 늘어 놓은 일련의 사진들을 가리키면서 금년 63세인 은퇴한 화학자 팔레고는 그 거대한 보우트가 대략 길이 512피트, 폭 82피트, 높이 50피트로 열차 800량을 넣을 수 있는 규모라고 말했다. 그가 방주를 발견한 장소 부근에서 그의 친구인 한 프랑스 탐험가가 발견한 작은 나무조각의 연대가 대홍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에서 그의 발견이 사실임이 또한 뒷받침된다고 팔레고는 주장한다.

노아의 방주를 발견했다는 주장은 팔레고가 처음이 아니다. 여러 과학자, 고고학자, 지리학자들을 포함한 많은 방주탐험가들이 다양한 장소에서 그 유명한 선체를 발견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호주에서는 알렌 로버트라는 사람이 아라랏산 동남부 20마일 지점에 노아의 방주가 위치한다는 고고학적 증거를 발견했다고 주장한 직후 두 명의 과학자에 의해 사기죄로 고소당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법정은 이 사건을 기각하였다. 미국 CIA는 구 소련의 군사기지를 향하던 스파이 첩보기가 산정에 놓인 선체 형상의 사진을 보내왔을 때 구약의 방주 설화는 실제일 것이라고 믿었다. 몇몇 방주의 발견자들은 그들이 본 방주의 모형을 만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팔레고에 따르면 많은 탐헙가들, 특히 미국의 여러 탐험가들이 방주를 발견하였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본 것은 성경에 묘사된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CIA도 앞서 말한 사진 속의 물체의 크기가 성경에 쓰여진 크기와 일치하지 않음을 발견하고는 그 사진들을 공표하지 않기로 하였다.

성경 창세기에 의하면 노아는 길이가 3백 규빗(cubit), 너비가 50 규빗, 높이가 30 규빗인 방주를 제조하였으며 지상의 모든 종(species)들의 암수 한 쌍 씩을 승선시켰다. 1 규빗은 20 인치에 해당한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큰 물을 준비하였으니 고퍼(gopher) 나무로 방주를 지으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방주가 완성된 후 40 주야의 홍수로 온 세상이 물에 잠겼고 물이 빠진 후 방주는 터키 북동부 아라랏산에 멈추었다고 쓰여 있다. 이에 대해 회의론자들은 24시간 내에 모든 종을 한 쌍 씩 승선시키려면 초당 460 마리씩 배에 실어야 하며 더욱이 수 톤에 달할 이들의 배설물을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한다. 그러나 창조론자들은 간접증거들이 방주사건을 지지한다고 말한다.

일단의 과학자들이 약 7천년 전 나이아가라 폭포수의 200배에 달하는 힘으로 쏟아진 막대한 양의 홍수가 있었으며 이 홍수에 의해 빙하가 녹아 내리고 거대한 퇴적토가 흑해를 지중해로부터 분리시켰다는 증거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는 성경의 연대보다 앞선 것이다. 한편 기상학자들은 전세계 규모의 홍수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고 믿으면서도 국지적인 홍수는 존재했으며 그것이 지중해 동부에서 발생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실제로 한 지질학 연구팀이 현 이라크의 유프라테스 강변에 위치했던 고대 수메르 제국의 도시인 우르(Ur)를 발굴하던 중 약 4천 년 전에 홍수가 있었다는 증거를 발견하였다. 또한 부인할 수 없는 홍수의 증거는 한 지질학자 팀이 아라랏산을 탐헙하던 중 발견한 것으로 고대 선체의 안정성 유지를 위해 바닥에 매달았던 구멍 뚫린 암석(drogue stone)이다.

그레고는 더 많은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현장을 다시 찾을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현재까지 그는 13번의 등정을 통해 단 한 번 멀리서 방주를 목격할 수 있었다. 팔레고는 그러나 한 이태리의 텔레비전 방송국이 비용을 지불하기로 되어 있는 헬리콥터 여행을 위해 터키 정부의 허가를 얻어야만 한다. 그가 여행할 장소는 쿠르드 지역 내에 있으며 한 때 그가 억류되기도 했던 군사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는 쿠르드 정부도 그에게 탐사허가를 발급해 줄 것을 희망하고 있다. 그는 그곳을 다시 찾기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신성한 임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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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필트다운 초기 인류화석 사기극

 

필트다운은 영국의 고고학 유적지로 1908년과 1912년 사이에 인간, 유인원, 그리고 다른 포유류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1913년에 근처의 유적지에서 송곳니가 사람처럼 닳아 버린 유인원의 턱뼈가 발견되었다. 영국의 고고학자들의 협회에서는 이것이 한 사람의 도개골과 한 유인원의 턱뼈라는 생각을 받아들였다. 1953년에 필트다운인은 조작으로 밝혀졌다. 이 두개골은 현대인의 것이고 이빨은 유인원의 턱뼈임이 밝혀졌다.

과학에 대해서 회의적인 사람 예를들어 챨스 포트와 포티안들은 필트다운 사례를 과학이 터무니 없는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 증거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자연과 과학의 한계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필트다운은 잘못된 길에 들어섰지만 결국은 그런 우회도로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목적지에 찾아가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과학자들이 속았는가? 스테판 제이 굴드는 몇가지 이유를 설명한다. 물론 소망적 사고라던가 문화적인 편견이 영국의 고고학자들 사이의 비평적 사고를 못하게 한 주요한 요인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필트다운 사기극은 과학적인 지식에 있어서 속아넘어갈 수 있다는 것과 인간의 자질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이론과 사실이 어떻게 과학과 관련이 되는지를 증명하고 있다. 이론은 해석되는 사실에 의해서 걸러지게 된다(포퍼). 이론은 사실을 설명하고 납득시켜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실은 이론을 검증하는데 사용된다. 굴드는 오늘날에는 인간의 두개골과 유인원의 턱뼈는 극히 있을 수 없는 억지 주장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금세기 초기에는 고고학자들은 인간의 커다란 두개골로 인하여 진화론적 특징이 나타나고 이것으로 인하여 다른 특징들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문화적인 편견에 쌓여있었다. 인간의 두뇌가 분명히 다른 어떠한 인간의 구조에 비해서 먼저 발달했을 것이라는 선입관이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 두개골과 유인원의 턱뼈는 오늘날 처럼 의심을 불러 일으키지 않았다. 필트다운 이후로 발견된 화석들은 분명히 뇌는 작지만 직립보행에서 큰 뇌의 직립보행을 하는, 원숭이와 다른 형태의 호미니드들이 발견되었다. 과학자들은 사실을 가지고 모델을 세워나가지 그들의 모델을 가지고 사실을 짜 맞추는 것이 아니다. 정보는 우리에게 "문화, 희망, 그리고 기대"라는 필터를 통해서 전달된다고 굴드는 말하고 있다(Gould 1982, p. 118). 일단 이론이 받아들여지면 우리는 이론에 맞는 것을 보게 된다.

필트다운의 사기가 좀더 빨리 발견되지 않은 것은 과학자들이 이 증거를 볼 수 있도록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국의 박물관에 엄중한 보안속에서 보관되고 있었다. 과학자들이 두눈으로 사기극을 발견할 수 있도록 "사실"의 검증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그들에게 전혀 물리적 증거에 접근이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단지 회반죽으로 만든 모형이나 모형이 실물을 정확하게 만든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잠깐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일부 과학자들이 쉽게 속아넘아가는 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이 그토록 나빠서 사기극을 의도적으로 꾸민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그들의 본성 때문이기도 하다. 어쨋거나 필트다운이 남긴 것은 이제 어느 누가 속임수를 꾸몄는가를 밝히는 많은 내용이 출간되고 있다. 용의자들은 아래와 같다.

챨스 도슨, 아마츄어 고고학자로 그가 처음으로 필트다운에서 두개골을 가져왔다.

틸하드 드 샤르댕, 신학자이고 과학자인 그는 도슨과 아서 스미스 우드워드(Keeper of Geology at the British Museum [Natural History] in 1912)와 동행하여 필트다운에 탐사를 가서 그들이 하악골을 발견했다.

W.J. Solass, 옥스퍼드의 지질학 교수

그라프톤 엘리옷 스미스, 1913년에 이 발견에 대한 글을 쓴 사람

아서 코난 도일, 셜록 홈즈의 창조자 그리고

Martin A.C. Hinton, 필트 다운 사기극이 일어날 당시의 동물학의 큐레이터. 힌톤의 이니셜이 새겨진 트렁크가 런던 자연사 박물관의 다락방에서 발견되었다. 그 트렁크에는 필트다운 화석과 동일한 방법으로 색칠되어있고 조각된 뼈가 있었다.

각각의 증거들은 정황증거들이며 그다지 중요한 것들이 아니다. 앞으로 누가 필트다운의 사기극을 벌였는지를 밝혔다고 주장하는 많은 책들이 나올 것이 분명하다.

필트다운의 교훈

필트다운의 교훈은 과학이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고 인간은 자연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빠른 길만을 택해서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두개골과 유인원의 턱뼈를 가진 화석의 발견 같이 비정상적인 일이 일어나면 그 사람은 새로운 이론에 맞추어 보던가 아니면 발견된 해석에 있어서 실수는 없었는가 다시 살펴보거나 또는 비정상적인 현상이 실제로는 전혀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이론에 잘 들어맞는다는 것을 보이려 한다. 과학자가 선택하는 길은, 색깔없고 몰개성적인 사실들을 수집과 축적하여 객관적인 진리와 지식의 일반론으로 독단주의적으로 정리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신비한 객관성이 아니라, 과학자 개인의 희망과 문화적인 편견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을 거만한 익살꾼으로 그들은 종종 틀린 것으로 밝혀질 주장을 한다고 특징짓거나 과학이 틀릴 수 있으며 절대적인 어떠한 주장에 이를 수 없다는 것으로 풍자한다면 그것은 과학의 본질에 대해서 심각한 오해를 잘못 전달하는 것이다. 진짜 광대들은 어느 누구도 절대적인 것을 가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확실을 요구하는 사람들이며 과학에서 확률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진짜 거만한 사람들은 과학자들이 실수를 하고 어떤 경우에는 심한 실수를 하고 종종 그들의 편견을 강요하기 위해서 사기를 치기 때문에 과학이 단지 사색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거만한 사람들은 검증할 수 있는 가설과 검증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지 않으며 모든 주장은 모두 다 비슷비슷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광대들은 바로 과학자들이나 창조과학자들 그리고 다른 사이비과학자들이 이론을 제안하며 이것들이 모두 똑 같은 정도의 이론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모든 이론이 경험적인 것이 아니며 그 경험적인 것들에서도 모두 똑 같이 정도로 추론적인 것도 아니다. 게다가 필트다운 사건은 과학자들이 뼈의 연대측정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주장하는 창조과학자들은 연대측정 방법이 1910년 이후로 엄청나게 발전했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과학은 내용이 공개된다는 것과 사용하는 방법이 일반적이라는 점 그리고 대다수의 과학자들이 자신의 검증되지 않은 이론에 혹은 검증할 수 없는 편견에 사이비과학자들처럼 목매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과학자들이 실수한 것은 다른 과학자들에 의해서 발견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발견은 과학을 다시 정상적인 길로 가게 한다. 이러한 똑같은 현상이 돌팔이들의 역사와 사이비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의 실수는 그들의 이론이 적절하게 검증되지 않아서 발견되지 않는다. 또한 설사 비평가들에 의해서 그들의 잘못이 발견되어도 믿고자 하는 이들에게 무시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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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남방의 원숭이라는 뜻으로서 원인, 혹은 인원, 또는 근인 심지어

원시인과 같은 여러 가지로 불리는 집단의 총칭입니다.

이들 집단은 인류진화성 최초의 완전한 단계를 이루고 있는 집단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기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라마피테쿠스로 부터 300만년 보다 훨씬 이전에 진

화되었다고 봅니다.

1925년 다트 R.A. Dart에 의해 남아프리카 케이프주에 있는 타웅 마을에서 발견된 작은 원

시인류 표본을 설명할 때 만들어 졌습니다.

그의 타웅어린아이 두개골 분석에 의하면 대후두공의 복부 부분과 서로 관계를 이루고 있

는 작은 송곳니는 인간의 특성을 지녔고, 작은 뇌와 상대적으로 큰 코는 원숭이와 유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등 몇개의 구별되는 특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호모류"의 한 구성원으로서 볼수는 없으나 대형 유인원과 다른 속의 특징을 가

졌다는 것 때문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원시인류의 조상으로 인정하고 인간과 유인원

사이의 비슷한 등급의 중간쯤의 위치에 놓고자 하였습니다.

1913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미국, 프랑스 합동 조사단이 하다 유적지 일대를

조사하였는데 당시 미국측 발굴 단장은 도날드 요한슨으로 첫해 조사에서 매우 중요한 호

미니드의 입천장 뼈 조각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를 조사한 결과, 많은 뼈 화석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발견된 뼈 화석들은 한 개체에 속하는 것으로 한 어른 개체의 거의 46%에 달하는 양이

었습니다.

그는 이 뼈화석을 "루시"라 명하였는데 루시는 약 90cm의 작은 키와 침팬지보다 더 가벼

운 몸무게를 가지고 있는 여자 어른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또한 다음해 아파 지역 333으로 분류된 지역에서 13개체의 호미니드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요한손과 그의 동료들은 이 13개체의 호미니드가 홍수와 같은 천재지변에 의해 일시적으

로 파묻힌 한 사회집단일 것이라고 추측하였습니다.

하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호미니드는 연대 측정 방법에 따라 약 300만년 내지 350만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1978년 라에톨리 유적지에서 일부가 잘라져 나간 발자국이 단단하게 굳어진 화산재 바닥

에 남겨진 것을 발견하였는데 이 발자국을 조사해 본 결과 두 발로 걷는 세 개체의 생물체

가 남긴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메리 리키는 이 발자국을 남긴 후미니드는 인류의 직접조상으로 보여지는 선상에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이 발자국은 360만년 전에 살던 가장 이른 시기 호미니드의 발자국으로 이들이 두발로 이

미 걷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요한손과 그의 발굴팀은 루시와 다른 화석들을 단일종으로 보고...

 이를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라 이름지었습니다.

 

[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는 300만년 전으로 추정이 됩니다.

그런 이유는 중'남부 아프리카 지금의 탄자니아 , 케냐 , 모잠비크

이런 지방에서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는 원숭이의 진화형 입니다.

최초 의 화석이 바로 이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입니다.

이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는 결국 구석기 시대때 베이징인 ( 지금의 중국 북경 )의

살았던 이들이 유럽, 아프리카 쪽으로 번져나가자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와 싸우게 되었는데 오스트랄로 피테쿠스가 이겨 베이징인을 쫓아냈지만 (북경)으로 하지만 결국 호모 사피엔스 인들의 인해 결국 멸종 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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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까지 화석을 기준으로 두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최초의 인류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예 대하여서는 많은 이 분야의 학자들이 조사중인데요. 그중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최초의 인류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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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에 따르면 원숭이에서 사람으로 진화하는 최초의 혈통을 라마피테쿠스라 한다. 이는 미국인 필빔에 의해 처음으로 주장됐다. 이 때문에 진화계통도로 보면 라마피테쿠스는 원숭이와 사람의 분기점이 된다. 이를 첫 유인원(類人猿)이라 한다. 유인원이란 원숭이에서부터 현대 인류까지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라마피테쿠스의 화석은 지금으로부터 1200만년 전 것으로 진화론자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라마피테쿠스는인류의 조상이 아니다라고 번복됐다. 그것도 처음 주장했던 필빔에 의해 뒤바뀐 것이다. 그는 1976년 파키스탄에서 발굴한 많은 화석으로 턱뼈와 이빨을 조립한 결과턱뼈와 이빨을 그럭저럭 연결한 것이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학설을 뒤집어버렸다. 이렇게 뒤집힌 학설이 지금도 버젓이 정설인 양 진화계통도를 장식하고 있다.

라마피테쿠스는 그 후 장구한 세월이 흐른 뒤 300∼400만년 전에 와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됐다는 것이다. 오스트랄로란 남쪽의,피테쿠스는 원인이라는 뜻으로남쪽에서 온 원인이란 의미다. 이것이 90만년 전에는 호모하빌리스로,60만년 전에는 호모에렉투스로,30∼75000년 전에는 네안데르탈인으로 각각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네안데르탈인은 다시 크로마뇽인으로 진화했으며 거기서 지금의 인류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문제의 필트다운인은 바로 네안데르탈인보다 훨씬 앞선 화석인류라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금세기 최고의 과학사기로 판명됐다

 

기사를 보시다 시피 라마 피테쿠스는 1200만년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보다 900만년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간 부분을보면 

라마피테쿠스

라마피테쿠스의 화석은 지금으로부터 1200만년 전 것으로 진화론자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라마피테쿠스는인류의 조상이 아니다라고 번복됐다. 그것도 처음 주장했던 필빔에 의해 뒤바뀐 것이다. 그는 1976년 파키스탄에서 발굴한 많은 화석으로 턱뼈와 이빨을 조립한 결과턱뼈와 이빨을 그럭저럭 연결한 것이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학설을 뒤집어버렸다. 이렇게 뒤집힌 학설이 지금도 버젓이 정설인 양 진화계통도를 장식하고 있다

 

이렇듯 학자들은 자신의 명성을 위해 허위로 발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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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 없는 인류들

 

 

라마피테쿠스 : 마이오세부터 플라이오세에 걸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
는 화석 영장류. 인도 북부‧파키스탄‧터키‧그리스‧헝가리‧케냐 등지에서 이와 턱뼈가 발견되었는데, 인류의 직계 조상이라는 설과 유인원이라는 설이 있다.

 

드리오피테쿠스 :신생대 제3기에 유라시아 대륙에 퍼져 살았던 화석 영
장류. 1856년에 프랑스에서 아래턱뼈가 최초로 발견되었는데, 오늘날의 유인원의 선조로 여겨진다.

 

시바피테쿠스 : 1910년에 인도 북서부의 시왈리크(siwalik)에서 발견
된 화석 유인원. 플라이오세 전기에서 중기까지의 것으로 보이는 아래턱이 발견되었는데, 오랑우탄의 선조로 추측되고 있다.

 

필트다운인 : 1911~1915년 영국의 서식스 주의 필트다운에서
발견된 화석 인류. 두개골 및 아래턱뼈 조각이 나왔는데, 처음에는 50만 년 전의 화석 인류라는 감정이 있었으나 오랜 동안의 논쟁 끝에 영국의 아마추어 지질학자 도슨이 명성을 얻기 위하여 위조한 것이 밝혀져 과학 사상 최대의 사기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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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의 허상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이라는 책이 나온 후, 진화론은 특별한 과학적 검증을 거치지도 않고 상식처럼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다윈은 [~일 것이다. ~라고 생각된다. ~라고 여겨진다.]등의 추측하는 단어를 매우 자주 쓰고 있습니다. 검증이 되지 않은 상상속에서 만들어진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자들로부터 인정을 받기도 전에 그 시대의 상황과 맞아 쉽게 받아들여 졌습니다.
다윈의 이론은 이미 이론이 아닌 하나의 사실로 굳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의 정설에 의문을 품는 것을 이단이라고 간주하던 옛 종교비판 시절처럼 진화론을 비판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과학적으로 검증이 잘 되지 않자 몇몇 학자들이 진화론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1981년 11월 5일, 패터슨 박사는 미국 자연역사 박물관에서 진화론 전문가들을 앞에 놓고 강연을 했는데, 거기서 그는 감히 자기들이 지금까지 상식으로 알고 있는 이론이 단순한 억측에 불과하며, 그것을 지탱할 중요한 증거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로서는 20년 이상이나 어떠한 형태로든 진화론의 연구에 관계해 왔습니다만,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하룻밤 사이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20년 이상이나 연구해 온 일인데, 무엇하나 알고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로부터 몇 주일동안 여러 사람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지며 돌아다녔습니다. <귀하는 진화론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있소, 무엇이든 하나라도 좋으니 검증 가능한 것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대답은 언제나 침묵 뿐이었습니다.
과거 여러해 동안 진화론에 관하여 조금이라도 생각해 보았다면 그것은 지식으로써가 아니라 신앙으로써 그랬던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진화론은 과학적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정반대의 것처럼 생각합니다."

다윈에 대한 비판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생물학의 권위자 중에서는 진화론을 포기해 버린 사람이 속출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에 관한 기사는 일반 출판물에는 별로 보도되지 않고 있지만, 학술회의나 학술잡지에는 때때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진화론 쇠퇴의 최초의 징조가 나타난 것은 아리러니칼하게도 1959년 시카고 대학에서 열린 진화론 1백주년 기념대회에서 였습니다. 강연자 중 한 사람인 에베레트 클레아 올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많은 생물학을 전공한 학생들이 다윈이즘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진화론에 대한 비판조차도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처음부터 진화론을 인정하지 않고, 비판하기 위하여 일부러 대규모의 자료를 갖추어 반론을 쓴다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낭비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동안 갖고 있던 침묵이 깨어졌습니다. 이전에는 낮은 목소리의 속삭임이 항의의 소리가 되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의 생물학자 그랏세 박사는 "추측에 근거를 둔 불명료한 공리를 사용하여 진화론이라는 가짜 과학이 만들어졌다. 더구나 이것이 생물학의 중심에 뿌리를 박음으로써, 그 이후의 생화학자나 생물학자들은 얼마나 피해를 입었던가"라고 거의 매도라고 할 수 있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윈이즘이 학회에서 공식적으로 부정되던 날
1980년에 진화론을 토의하기 위하여 세계의 분자생물학자, 발생학자, 생태학자, 생물학자가 시카고의 필드 박물관에 모였습니다. 회의실은 금방 전통파와 개화파와의 대결장으로 변했습니다. 그곳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회의가 끝날 무렵 진화론에 관해서 역사적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실감하였습니다.
토의의 중심 테마는 과거 40년 동안 지배적이었던 [진화종합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금세기 초에 발전한 유전학의 연구를 중심으로, 생물학의 모든 성과를 다윈이즘에 결합시킨 것입니다. 회의 중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것은 개체의 차원에서의 작은 유전자의 변화를 쌓아올린 것이, 과연 신종의 출현이라는 종의 차원에서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라는 문제였습니다. 즉, 종(種)의 작은 변화가 누적되고 시간이 흐르면 사과가 오렌지가 되는 것같이 최종적으로 새로운 종이 된다는 것인데, 이것이 사실인가 아닌가라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결론은 부정적이었습니다.
진화론에 대한 부정적 견해들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고등학교 생물 시간 등 교육과정에서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진화의 증거들


1. 화석

모든 교과서와 대부분의 책들에는 진화의 직접적인 증거로 화석을 들고 있지만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종과 종사이를 연결시키는 중간단계 형태의 화석들이 발견되지 않고 중간형태 없이 완전한 형태로 각 종류대로 나타난다면 화석은 틀림없이 창조론을 증거하는 것이다.
진화론자들의 주장대로 무척추 동물에서 척추동물인 물고기로 물고기에서 양서류로 양서류에서 파충류로 파충류에서 조류와 포유류로 변할 때 마다 반드시 중간단계의 생물들이 존재해서 화석으로 발견되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화석들 가운데 그러한 중간단계 화석은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음은 그 동안의 수 백만 개의 화석을 연구한 결과이다.

(1) 선 캄브리아기에서는 다세포 동물의 화석이 전혀 없다가 캄브리아 지층에서 갑자기 삼엽충, 해파리 등의 무척추 동물과 산호류 등이 나타난다. 단세포 동물에서 다세포 동물로의 전이화석이 없다.
(2) 다양한 물고기 화석이 중간형태 없이 대량으로 독립적으로 갑자기 나타난다. 심지어 캄브리아기 에서도 발견된다.
(3) 백악기에 형성된 여러 나뭇잎의 모양은 현존하는 식물과 똑같으며 전혀 변화가 없다.
(4) 어류에서 양서류로의 전이 생명체 화석이 없다.
(5) 많은 동물이 활동 중에 갑자기 화석이 되었다.
(6) 멸종된 생물을 제외하고는 화석의 생물형태는 그것이 발견된 지층에 관계없이 현존하는 생물의 형태와 동일하다.

위의 화석 연구결과는 모든 생물이 처음부터 종류대로 창조되었음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생물이 천재지변에 의해 갑자기 매몰되어 화석이 되었다는 격변설을 증거한다. 1980년 Newsweek誌는 "화석 기록에서 중간형태의 화석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의 법칙"이라고 기술하였다.
결국 종과 종사이를 연결시켜주는 중간단계의 화석이 발견되지 않는 한 진화론은 과학적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각 종류대로 창조되었다는 창조론을 뒷받침하는 결과가 될 수 밖에 없다.



2. 유인원 화석

종과 종사이의 연결이 가능하다는 대진화에서는, 원숭이로부터 인간으로 진화했으며 이들 사이에는 인간도 아니고 원숭이도 아닌 중간 형태의 괴물들, 즉 원시인들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들에 대한 화석 증거를 찾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밝혀진 원시인의 것이라고 주장되어진 증거들은 다음과 같이 허구임이 드러나고 있다.

1.1 원숭이 계열
(1) 오스트랄로피테쿠스 - 멸종된 큰 침팬지 종류로 원숭이의 변종에 다를 바 없으며 생태학적으로 갈라다 개코원숭이와 비슷하다는 것이 현재의 결론이다.
(2) 필트다운인 - 1922년, 도오손 등은 턱뼈와 두개골의 일부를 영국의 PILT DOWN 근처에서 발견하였다. 필트다운 인 또는 "처음 사람"(DAWN MAN)으로 명명된 이 표본은 50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1953년, 영국의 과학자들은 그것이 원숭이의 턱뼈이며 오래된것처럼 위장된 것임을 발견하였다. 치아는 사람의 것처럼 보이려고 줄로 연마하고 긁힌 자국이 있었다. 그것은 완전히 조작된 괴물이었다.
(3) 자바원인 - 1892년, 자바에서 듀보아는 각각 60피이트 거리에서 제각기 따로 떨어진 두개골, 치아, 대퇴골을 수집하였다. 이것이 50만년 전의 직립원인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1908년, 자바섬에서 분출한 용암은 500년을 넘을 수 없다고 독일의 탐험대가 발표했다. 1936년,듀보아는 자바인이 원숭이였다고 고백하였다.

1.2 인간 계열
(1) 네안데르탈인 - 1856년, 네안데르탈 인이 최초의 뼈가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발견되었다. 꾸부정한 모습을 지닌 이것들은 20만년 전쯤된, 원인으로부터 한층 진보한 인간으로 여겨졌다. 후에 이 네안데르탈인은 곱추병환자였음을 밝혀졌다. 팔레스타인 동굴을 비롯한 여러곳에서 직립보행 인간의 화석이 계속 발견되어 왔다. 그들의 두개골용적은 현대인의 그것보다 더 크다. 이것은 완벽한 인간의 두개골 일 뿐이다.
(2) 뉴우기니아인 - 현재 존재하는 인간
(3) 크로마뇽인 - 크로마뇽인의 화석은 프랑스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그것들은 5만년전 인간으로 계산되었다. 크로마뇽인의 뇌의 용적은 현대인의 그것보다 더 크다. 그들은 동굴에 정교한 벽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크로마뇽인 역시 현대 인류와 차이가 없는 완벽한 인간이었다.

1.3 허구의 존재
(1) 하이델베르그인 - 1907년, 독일 마우어에서 발견된 턱뼈를 재구성하여 진화론자들은 하이델베르그인이 25만년 전에 생존한 사람과 원숭이의 빠진 고리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하이델베르그인의 치아는 현대인과 완전히 같다. 그래서 유명한 진화론자인 인류학자 허들리카는 이렇게 말했다. "마우어(즉 하이델베르그인) 턱뼈의 치아는 완전히 보존되어있다. 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사람의 치아이다"
(2) 네브라스카인 - 1922년, 지질학자 헤롤드쿡(Haroid Cook)은 서부 네브라스카의 샛강 바닥에서 치아 한개를 발견하였다. 생물학자 오스본 교수는 그것이 원인(APEMAN)에 속한다고 말했다. 후에 그것은 멸종된 멧돼지의 치아로 판명되었다.

1.4 기타
(1) 북경원인 - 1922과 1939년 사이에 38개의 뼈들이 북경 서남방 주구점에서 발견되었다. 처음 발견된 치아중 하나에 대해 북경 유니온 의과대학 해부학 교수였던 블랙박사는 이 치아를 중국 고대 유인원, 혹은 사람과 유사한 동물이 존재한 증거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치아 두개를 제외한 이 북경인에 대한 모든 자료가 1941-1945년 사이에 모두 분실되었다. 자료없이 당시 진화론자들로 구성된 북경인 연구학자들이 남긴 자료에 근거해야하는 북경인은 인류 기원에 대한 증거물로 불충분하다.



3. 돌연변이

돌연변이나 유전자 재조합에 의한 변이에 따라 그 기능이나 구조가 조금씩 바뀌는 것은 종(種) 내에서만 인정될 수 있다. 따라서 같은 종 내에서의 작은 변이(진화론의 소진화)가 쌓여서 다른 종이 됐다고(대진화)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생물의 인위적 돌연변이 실험을 거의 반세기 동안 해왔어도 단 한번도 새로운 종을 만들어 낸 일을 없다. 초파리로 실험했을 때 비록 크기, 모양, 색깔 등이 조금씩 다른 초파리가 나왔지만 초파리가 아닌 것을 만들지는 못한다. 유전학적 한계 내에서, 즉 종 내에서 변이는 다양하지만 그것이 누적돼 수직적인 변이를 일으키지는 못한다. 실제로 생명체 내에는 망가지거나 손상된 염기배열을 고쳐 원래의 모습으로 바꿔주는 유전자 교정장치(DNA repair system)가 존재하고 있어 오히려 진화를 방해한다. 신다윈설을 증명한다는 예로 많이 인용되는 영국의 버밍헴지역의 불나방의 경우를 보자. 흰불나방과 검은 불나방의 비율이 주위의 환경에 따라 달라진 것은 사실이나 유전적 변화가 일어나서 그랬다는 설명은 타당치 않다.


개를 가지고 실험해도 역시 개로 끝나고 박테리아를 가지고 아무리 여러 가지 변이실험을 해도 조금씩 변화를 보이긴 하지만 끝까지 역시 박테리아다. 야생동물들을 자연상태로 내버려 두어도 자기 종류들 내에서만 번식해 간다. 간혹 잡종이 생길 수 있으나 잡종들은 그 당대에서 끝나고 더 번식을 못한다. 말과 당나귀는 서로 다른 종이지만 인공적으로 교배시켜 노새가 생기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노새는 번식을 못한다. 식물이나 동물세계에서 혹 인공적으로 더 나은 품종을 개발했다 해도 대개 번식력이 약화되어 몇 세대 이상 가지 못하거나 존속하기 힘든 약체가 된다. 그렇다면 돌연변이의 특성을 살펴보자.
돌연변이는 아주 드물게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돌연변이는 100만 마리의 동물 가운데 한 마리, 혹은 10만 내지 100만 세대에 한번정도 일어난다고 본다.


또한 돌연변이는 해로운 방향으로 일어난다. 1928년 이래 초파리에 X-선을 조사하여 인공돌연변이 실험을 해왔고 1946년에는 이 분야의 연구로 노벨상을 받은 밀러박사(H.G.Muller)가 말하기를 대부분의 돌연변이는 해롭게 나타나고 사실상 유익한 돌연변이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모든 돌연변이가 다 해롭다고 생각해도 좋다고 했다. 돌연변이는 생존능력의 약화, 유전적 질병, 기형을 만듦으로 그러한 변화는 진화를 성립시키는 요소가 될 수 없을 것 같다고 유명한 진화론자 도브잔스키(Dobzansky)도 말했다.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떨어진 원자탄으로 발생된 돌연변이의 경우 백혈병, 기형, 죽음을 초래했지 유익을 주지는 못했다. 유익한 변이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은 진화론을 설명하기 위한 필요성에서 나온 논리이지 실제의 돌연변이는 모두 해롭게만 일어난다.
돌연변이가 한 종에서 고등종류의 생물체로 진화하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돌연변이가 드물게 일어날 뿐 아니라 거의 항상 해롭게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4. 계통발생설

동물의 배(embryo) 발생과정에서 사람이나 물고기, 닭 등의 배가 비슷하여 진화의 증거라 하여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되풀이 한다'는 학설을 1866년 헤케르가 발표했다. 그러나 1920년대에 이미 여러 학자들(Ehrich, Holm)에 의해 부정되었다. 오늘날에는 대다수의 진화론자들 조차도 이 이론을 믿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화론 옹호의 이론으로 자주 이용되고, 초보적인 교과서에 게재되고 있는 것은 큰 잘못 중 하나이다.
수년전 유명한 진화론자인 몽태그(Ashley Montague)박사는 프린스턴대학 토론회에서 발생반복설이 진화론을 지지하는 이론으로서 더 이상 사용되지 말아야 한다고 언급했다. 동물의 배 발생과정에서 생기는 새궁(gill arch)이나 새열(gill slit)은 물고기의 것과는 다르다. 물고기 배의 새열은 숨을 쉬게 하는 아가미로 발전되지만 사람 배의 목부분에 있는 막대기나 나사홈 형태와 비슷한 부분은 물고기에서와 같이 아가미로 발전되지 않고, 아래 턱 귀의 중간부분 및 내분비선(gland)으로 자라게 된다. 따라서 외견상 비슷하다고 해서 같은 근원에서 출발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으며, 유전 정보상 서로 다른 근원을 가져서 다른 기관으로 발전하는 것이라고 보는 편이 과학적으로 더 타당하다.



5. 말의 진화

그 동안 시조새와 더불어 말은 가장 효과적으로 진화를 보여주는 표본인 것처럼 제시되어 왔다. 그것은 포유류에 속하는 말의 화석이, 생물군의 발전과정을 계통적으로 보여주는 소위 계열 화석을 이룬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어떤 진화론자들은 오히려 시조새보다도 말이 진화를 보여주는 더 좋은 보기라고 말한다.
진화론에서 말하는 말의 진화계열을 살펴보면, 에오히푸스(Eohippus)-메소히푸스(Mesohippus)-메리키푸스(Merychippus)-플리오히푸스(Pliohippus)
-에쿠스(Equus)로 진화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이러한 진화론적 말의 계열이 보여주는 것이 실제 진화의 증거가 되는 것인가 몇 가지로 나누어 검토해 보자

*말 화석의 치아 : 말 화석의 치아는 씹는 이와 가는 이 두 종류로 명백하게 구별되며 중간 형태를 나타내는 말은 전혀 없다.
*말의 크기와 주둥이의 길이 변화 : 말의 크기변화를 진화의 증거로 삼는다는 것은 불합리 하다. 현존하는 말 중에서도 아르헨티나의 팔라벨라와 같은 말은 키가 50cm에 불과하며 경기용 말은 2m나 된다. 그러므로 크기와 길이의 변화로서 진화를 주장할 수 없는 일이다.
*말 화석의 늑골 : 에오히푸스는 18쌍의 골을 지니며 오로히푸스는 15쌍, 플리히푸스는 19쌍, 현재의 말인 에쿠스는 18쌍의 늑골을 가진 것으로 보아 말 화석의 늑골은 진화가 점진적으로 되었다고 할 때 도무지 맞지 않는다.
*말의 발가락 : 말의 발가락 수도 진화의 증거가 못된다. 제3기 중간에서 발견되는 말의 발가락이 두개이거나 한 개로 변해 가는 것을 보여주는 전이 형태가 전혀 없다. 각각의 말들은 진화의 계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같은 시대에 살았던 다른 종류의 말이거나 혹은 돌연변이로 인하여 발가락 수가 준 멸종된 변종일 것이다.
*에오히푸스 : 최근의 많은 과학자들은 말의 가상적 진화계열 중 조상형 에오히푸스를 말과 전혀 무관한 오소리 비슷한 동물로 의견을 모으고 있다.
위와 같이 가상적 말의 진화 계열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으며 진화의 증거로 삼기에는 부적당하다. 그러기에 진화론자인 히칭 박사(Franis Hitching)까지도 다음과 같이 의문점을 제기하고 있다.

첫째, 최초의 말이라고 추측하는 에오히푸스는 적어도 말이 아니다. 실제 최초로 발견되어졌을 때는 그것은 그와 같이 분류되지 않았었다. 그의 골격구조와 삶의 생태를 추적해 볼 때 그것은 오늘날 바위 너구리(Hyrax)와 흡사하다. 더우기 에오히푸스의 화석은 에쿠스 네반덴시스 (Equus nevadensis), 에쿠스 옥시덴탈리스(Equus occidentalis) 등 현재의 두 말 종류와 같은 표층에서 나란히 발견되어 진다.


둘째, 말 화석의 완벽한 계열이 아래서부터 위층까지 적절히 진화론적인 질서로 암석층에서 정렬된 채로 발견되는 곳이 세상의 어느 곳에도 없다. 이러한 배열은 단지 구세계에서 신세계로 화석을 차례로 배열함에 의존하므로 그들이 어떤 순서로 들어가는가에 따라 심각한 논쟁이 있게 된다. 이에 대하여 어느 전문가는 "누가 그 이야기를 꺼냈는가에 의하여 크게 의존하고, 언제 그 이야기가 발표되었는가"에 따라 진화 계통수의 자리 다툼을 위해 경쟁하는 많은 화석 말들이있다고 하였다.


셋째, 발가락이 많은 동물로부터 한 개의 발가락을 지닌 동물로의 배열이라는 것은 순전히 이론에 불과한 순서배열로 많은 반론을 지닌 부자연스러운 배열이다.
이러한 모든 예를 통하여 볼 때 말 화석은 종류대로의 말을 보여주며 결코 진화의 증거로는 부적당한 것들임을 알 수 있다. 만일 동일한 종 내에서의 변이를 선입견을 가지고 대한다면 오늘 날 살아있는 사슴이나 기린 등도 말의 계열과 같이 진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배열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말의 화석이 진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져 온 것은 결코 객관적 증거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6. 시조새

진화론에서 파충류와 조류의 중간 형태라고 내세우는 가장 유명한 것은 시조새의 화석이다. 이제까지 발견된 많은 시조새의 화석 중 가장 선명한 것은 독일의 졸른호펜(Sornhofen)의 석회암에서 발견된 쥬라기 화석이다. 시조새의 새로서의 특징은 깃털, 날개, 부리이며, 파충류로서의 특징은 뼈가 있는 긴 꼬리, 날개 전면의 발톱, 부리의 치아 등이다. 그러면 시조새가 정말로 진화론에서 말하는 파충류와 조류의 중간 형태인지 알아보자.


진화론자들은 시조새의 깃털이 파충류의 비늘에서 진화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조새의 깃털은 다른 종류의 새들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발달한 형태이다. 시조새는 완전히 날 수 있는 새의 깃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깃털로서는 조류가 파충류에서 발생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다.
진화론에서 시조새가 파충류와 비슷하다고 주장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날개의 앞쪽 끝에 있는 발톱(날개 발톱)이다. 그러나 날개 발톱이 시조새가 파충류와 조류의 중간 형태라는 증거가 되지 못하는 이유로 현존하는 새 중에도 날개 발톱을 가진 새가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예를 들면 현재 남아메리카에 서식하고 있는 호애친(Opisthocomus hoatzin, 남미산의 뱀을 잡아 먹는 새)이라는 새는 날개 끝에 발톱 두개가 있다. 호애친은 100% 새이면서도 날개 발톱을 가진다. 그러므로 날개 발톱은 시조새가 중간 형태라는 증거로 전혀 사용될 수 없다.


그 다음으로 진화론자들이 내세우는 것은 시조새의 치아이다. 그러나 시조새의 치아도 시조새가 파충류와 조류사이의 중간 형태의 증거가 될 수 없는데 이유는 화석으로 나타나는 새들 중에는 시조새 외에도 치아를 가진 새들이 있기 때문이다. 치아의 유무가 파충류과 조류의 판별기준이 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오늘 날 파충류에도 거북이 같은 경우처럼 치아가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치아가 없는 포유류인 오리 너구리 등은 여러 모로 볼 때 모든 포유류 중에서 가장 "원시적인"동물이다. 그러므로 치아의 유무도 시조새를 전이 형태로 내세우려는 진화론자들의 입장을 지지해주는 기준이 되지는 못한다.
이상의 논리를 종합해볼 때 시조새를 파충류와 조류의 전이 형태로 답변확정한 것은 진화론자들의 편견 때문이지 객관적인 증거에 기인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진화론적 조류 전문가인 스윈톤은 "조류의 기원은 대부분 추론에 불과한 것이며 파충류에서 조류로의 변화를 명백히 보여주는 화석 증거는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은 화석 기록을 볼 때 조류가 파충류에서 진화했다는 진화론의 주장을 부정하는 동시에, 조류의 화석이 독립적으로 갑자기 나타날 것이라는 창조론의 예언과 완전히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한 기사는 이제까지의 진화론에 도전하고 있다. 1977년 9월 24일 발행된 <과학 뉴스-Science News>지 112권의 128페이지에 실린 한 짤막한 기사에서 새의 화석이 시조새와 똑같은 지질 시대의 암석에서 발견되었다는 놀랄 만한 사실이 발표되었다. 만일 실제 새가 시조새와 같은 시대에 존재했다면 시조새는 명백히 조류의 조상이 될 수 없으며 파충류와 조류 사이의 중간 형태도 아니다.



7. 상동기관

생물간의 유사성과 차이를 통해 근연관계와 그 계통을 유추하고자 하는 것이 진화론의 방법이기는 하지만 분자수준에서 유사성은 재고되어야 한다. 분자의 생화학적 상동현상이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진화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얘기다. 이제껏 진화론에 근거한 생물종간 비교와 아미노산 배열의 예는 거의 진화론을 지지하는 쪽으로 보고되고 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예는 진화론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러 동물의 체내에 존재하는 단백질인 인슐린의 아미노산 차이를 한번 비교해보자. 인슐린을 이루는 아미노산의 구조가 닭, 오리, 타조의 경우에는 거의 유사하며, 생쥐와 토끼도 서로 닮아있다. 그런데 가다랭이 (bonito)라는 물고기의 인슐린 구조는 같은 어류인 복어(toadfish)보다 오히려 닭이나 오리, 사람 등과 더 유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생쥐는 가까운 돼지보다는 오히려 닭, 방울뱀, 가다랭이와 더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예로 시토크롬 C는 에너지 대사에 중요한 효소인데 104개의 아미노산으로 이뤄져 있다. 이 아미노산의 동물간 유사성을 조사해 봐도 비슷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예컨대 젖먹이 동물인 회색고래의 시토크롬 C는 같은 젖먹이 동물인 원숭이보다 오리의 그것에 더 가까운 것으로 밝혀졌다. 또 두꺼비는 방울뱀보다 초파리와 더 유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참치의 시토크롬 C도 같은 어류인 돔발상어(dogfish) 보다 오히려 토끼의 그것과 닮았다. 이상의 예를 통해 볼 때 상동기관은 진화의 증거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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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진화

 

인간의 진화

진화론에서는 인간이 원숭이에서 부터 원시인을 거쳐 현대인으로 진화했다고 주장하며, 그 증거로 원숭이와 사람 사이의 중간형태의 화석(전이 화석)이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과연 화석은 진화를 증거 하는가를 살펴보자.


네안데르탈인

흔히 진화론에서 인간이 진화했다고 믿는 이유 중의 하나가, 원숭이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화석이 발견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이 네안데르탈인의 화석이다. 네안데르탈인은, 가장 중요한 두개골의 용량이 현대인보다 크거나 같았으며, 턱이라던가 어깨, 무릎, 등이 굽어 있어서 원숭이와 사람 사이의 중간 화석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네안데르탈인의 어깨와 무릎과 등이 굽었던 이유는 비타민 D 결핍으로 인한 곱추병(구루병) 환자였기 때문이었고,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두개골의 용량은 현대인보다 더 발달된, 즉 더 크거나 같았으며, 안면각도 미국 독립전쟁의 영웅인 라파이엣트 장군의 안면각과 같아서, 네안데르탈인이 원시인이라면, 미국의 지성인 라파이엣트 장군도 원시인이 되어야 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네안데르탈인은 원시인이 아니고 완전한 인간의 화석으로 밝혀졌다.


쟈바원인

또 인간이 진화했다고 믿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인도네시아 쟈바섬에서 발견된 피테칸트로프스 에렉투스, 즉 쟈바인의 발견 때문이었다. 쟈바인은 네덜란드의 의사인 듀보아 박사가 발견하였으며, 쟈바인의 화석은 머리뼈와 다리뼈가 발견되었는데 머리는 원숭이 같았고, 다리는 사람과 같아서 진화의 증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쟈바인의 화석은 한 곳에서 발견된 것이 아니고 머리뼈와 다리뼈가 15m나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으며, 사람의 다리뼈가 발견된 가까이에 사람의 머리뼈도 있었으나, 그것을 취하지 아니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원숭이의 머리뼈를 취하는 등, 과학적으로 크나큰 모순이 있었다. 그리고 듀보아 박사 이외에도 쟈바인을 발견한 보고가 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코끼리의 무릎뼈였음이 밝혀졌다.


듀보아 박사

쟈바인을 처음 발견했던 듀보아 박사가 그후 오랫동안 더 깊은 연구를 한 결과 노년에 들어서 자기가 발견했던 쟈바인의 머리는 원시인이 아니고, 긴팔원숭이의 화석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쟈바인은 이제 더 이상 진화의 증거로 쓰이지 않고 있다.


네브라스카인

또다른 진화의 증거로서 미국 네브라스카주에서 발견된 네브라스카인의 화석이 있다. 이것은 어금니 이빨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그것이 사람과 원숭이의 중간 형태를 띠고 있어서 원시인이라고 오해하여 상상화로 남자, 여자 원시인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그후 어금니뿐 아니라 온몸의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알고 보니 원숭이도 사람도 아니고 멧돼지의 이빨에 불과하였다. 그저 '진화'이고 싶은 생각에 엄청난 오해가 일어났던 웃지 못할 넌센스 사건이었다. 그 외에도 크로마뇽인, 하이델베르크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등의 많은 원시인의 화석 논쟁이 있으나 모두 인간 화석 아니면 원숭이 화석으로 밝혀졌고, 진화의 중간 단계의 화석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출처 : http://medpharm.university.ac.kr/youny/creat_sci/evol_animal.html



오스트랄로피테쿠스
1925년 R.A.다트가 남아프리카에서 출토한 유아두골(幼兒頭骨)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A. africanus)라는 학명을 주었던 것이 속명의 시초이다. 다트는 유인원의 화석인 줄 알고 이 이름을 붙였던 것이나 그 후 수십 년을 지나는 동안에 이것을 화석인류인 것으로 인정하게 되었는데, 학명은 그런 의미를 떠나서 최초의 명명을 존중하게 되어 있어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중 가장 후대의 자료는 S.B.리키 부부가 동아프리카의 올두바이 협곡(Olduvai Gorge)에서 발견한 것으로서 진잔트로푸스(Zinjanthropus boisei)로 명명하였으며, 그 후 별개의 인류화석 5체를 발굴하였는데,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능력있는 사람)라 명명하였고, 진잔트로푸스보다 진화한 것으로 호모 사피엔스(H. sapiens)의 조상형이라 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일반적으로 아파렌시스(Australopithecus afarensis), 로부스투스(A. robustus) 및 아프리카누스(A. africanus)의 3종으로 분류되었다. 아파렌시스는 두개골의 구조상 현생인류보다는 이전의 유인원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두개골을 제외한 나머지 골격구조는 현생인류와 매우 흡사한 형태를 하고 있어 직립보행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로부스투스는 다른 종에 비해 두개골과 안면 형태 및 치아 구조가 거대하고 튼튼하다. 특히 먹이를 씹는 기능을 가진 어금니가 매우 크다는 점이 이 종의 특징인데, 극단적인 경우 그 크기는 현대인의 4배에 달한다. 큰 어금니에 비해 앞니와 송곳니는 작은 편으로 전체적인 치열 형태는 뒷부분이 크게 벌어진 포물선형을 이루고 있다. 아프리카누스는 아파렌시스와 로부스투스보다 현생인류와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아프리카누스는 로부스투스와 상당기간 공존하였지만 로부스투스보다 일찍 소멸하였는데, 이에 대하여는 아프리카누스의 일부가 사람속(屬)으로 일찍 진화하였기 때문이라는 가설과 이미 발생한 사람속과의 생존경쟁 속에서 시간적인 차이를 두고 소멸하였다는 가설이 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주변의 식물을 채집하거나 육식동물이 먹다 남긴 찌꺼기를 먹으면서 작은 무리를 이루어 생활하였다는 설이 정설로 되어 있다. 이들은 유인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다운 특징을 지니고 있다. 즉, 생활근거지의 확보, 성에 따른 노동의 분담, 의사소통의 수단, 친족관계 등의 문화적 요소를 지니고 생활하였으며, 도구를 만들어 사용했다는 점 등이다. 이들이 만들어 사용한 석기군을 흔히 올두바이 공작(Olduvai Industry)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석기는 자갈돌 끝을 간단히 가공한 석기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기능적으로 전문화된 도구의 제작은 아직 뚜렷하지 않고 석기는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현생인류의 조상임에는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으나, 구체적인 진화의 과정에 대하여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많다.


호모사피엔스
인류의 진화단계를 원인(猿人)·원인(原人)·구인(舊人)·신인으로 구분했을 때 가장 진화한 단계가 호모사피엔스(지혜 있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4만∼5만 년 전부터 지구상에 널리 분포되어, 후기 석기문화(石器文化)를 가지며 농경·목축이라는 혁명적 생산수단을 발명하여 마침내 문명의 꽃을 피웠다. 분류학적으로는 구인, 즉 네안데르탈인(Homo neanderthalensis)도 호모사피엔스의 한 아종(亞種)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크로마뇽인
1868년 프랑스 크로마뇽의 바위 밑에서 남성 3, 여성 1, 태아 1구의 뼈가 발견되었는데, J.A.카트르파지가 그 특징에서 특별한 인종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크로마뇽인이라 명명하였다.

신장은 180cm 이상으로 매우 크며, 상지(上肢)가 하지(下肢)보다 현저하게 길다. 머리는 길고 입은 돌출하였으며, 턱이 발달되어 있다. 같은 종류의 뼈는 유럽 각지에서 후기 구석기와 함께 출토되어, 이 시대의 유럽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살았던 대표적 인종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리말디동굴에서는 이 인종과 함께 별종의 특징을 가진 화석 호모사피엔스가 출토되어, 당시의 인종적 다양성을 시사하는 것으로서 주목되었다.

프레사피엔스

호모사피엔스, 즉 신인(新人)의 화석은 최후의 빙하기인 제1아간빙기(亞間氷期) 이후 다수 발견되었으나, 그보다 더 오래된 지층에서 출토된 인골(人骨)로서 신인의 특징을 갖추고 있는 것을 총칭하여 프레사피엔스라고 부른다. 따라서 프레사피엔스는 구인(舊人)과 동시대 또는 그보다 선행하는 시대에 생존했던 것이 되어 신인이 구인으로부터 직접 진화하였다고 단순히 말할 수는 없다. 이전에 프레사피엔스로 알려졌던 중요한 화석 중에서 필트다운인(人)을 비롯하여 많은 것이 플루오르 연대측정법에 의하여 실격되고 현재 확실한 프레사피엔스로 인정되고 있는 것은 영국의 스완즈컴 ·프랑스의 폰테슈바드 등 소수에 불과하다.

호모하빌리스
동(東)아프리카의 올두바이에서는 많은 원인(猿人)화석과 원시적인 역기(礫器)가 같은 지층에서 발견되었다. 발견자인 L.B.리키는 처음 원인 진잔트로푸스가 역기의 제작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후 원인화석 가운데 진잔트로푸스보다도 약간 진보된 단계의 인류의 뼈를 구별할 수 있다고 하여, 이 일군(一群)을 '손재주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호모하빌리스라고 명명하였다. 진잔트로푸스는 그때 역기를 만들 능력에 이르지 못하였고, 역기를 만든 것은 이 호모하빌리스라고 결론을 내렸다. 호모하빌리스의 뼈는 어느 것이나 단편(斷片)이어서 진잔트로푸스와 구별할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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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아프리카 인종
전역의 주민을 함(노아의 아들)의 계열이라고 하며, 실제로 베르베족은 아프리카 북부 지중해 연안이나
사하라 사막에 사는 아랍인 그리고 베두인족과 더불어 함어계(語系)의 인종이다.
주민의 대부분은 원주민이던 베르베르인과 지중해인, 그리고 좁은 홍해를 사이에 두고 아라비아 반도에
접하여 있기 때문에 아랍 이민이 일찍부터 건너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현재는 양자의 혼혈도 많다.
양자 모두 지중해 인종계의 코카소이드(백인종)에게 이슬람어와 아랍어가 지역 전체에 보급되어 있다.
이집트 콥트인이고 아틀라스 산중에 베르베르족의 베르베리데족은 백인종의 특색을 가졌다.
현재의 베르베족은 아프리카 북부 지중해 연안이나 사하라 사막에 아랍인 ·베두인족과 더불어 분포되어 있는 함어계(語系)의 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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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는 이런 성서 해석도 있었습니다. '셈은 백인이고, 야벳은 황인종이고, 함은 흑인을 가리킨다.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가리워주어 복을 받았고, 함은 그것을 드러냈다가 저주를 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노예로 팔리는 신세가 되었다'. 아마 이렇게 성경을 해석한 사람은 '흑인을 노예로 매매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그런 성경해석을 했을 것입니다.

먼저영~~흑,백,황인종을 따지기 전에 셈족부터 따져봐야 해영~~왜냐!! 이스라엘의 직계 조상이 되기 때문여영.

홍수 이후에 셈족은 메사(Mesha : 페르시아만의 북서 끝에 위치한 바스라 지역)에서 세발(Sephar : 남서 아라비아에 있는 산)에 이르는 지역에 살았습니다. 이 두 지역은 모두 욕단부족이 사는 지역의 동쪽 변경에 위치하고, 세발은 욕단부족의 국경에 있는 산이었습니다. 셈은 아랍인과 히브리인의 조상이 되었고, 욕단은 셈의 5대손(셈의 넷째 번 자손)이었습니다. 욕단의 아버지는 에벨(Eber)인데, 에벨은 Heber로서 히브리인들의 조상이랍니다. 욕단은 카흐탄(Kahtan) 또는 예크탄(Yektan)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랍인들은 그를아랍인의 가장 오래된 조상으로 여겨지구 있졍. 그래서 아랍민족은 노아의 둘째 아들 셈을 조
상으로 하여 그 후손을 다음과 같이 두 혈통으로 나눈답니다.
첫째, 아브라함과 하갈의 아들이었던 이스마엘의 후손 아드난에 뿌리를 둔 북부 아랍인.
둘째, 에벨의 아들 욕단과 동일시되는 카흐탄에 뿌리를 둔 남부 아랍인이여영. 그러나일반적으로 아드난계보다는 카흐탄계 자손이 아랍인으로서 순수성이 있다고 하기도 하고, 또 셈족의 자손들이 쓰는 언어를 통칭하여 셈어라고 부르기도 한다졍^^.


자~~ 구럼 님이 원하시는 혈통과 혈색, 인류의 다양성 문제로 가볼까영^^

성경에 의하면 오늘날 지구상의 모든 인류는 노아와 그의 아내 그리고 세 아들들과 자부들로부터 기인하며, 그 이전의 기원은 아담과 하와로 거슬러 올라간답니다.
실제로 진화론자들도 여러 인종들이 각기 다른 기원을 지니지 않는다는 데에는 견해가 일치하구 있어여.
즉 그들이 다른 종류의 동물로 부터 각기 진화되지는 않았다는 것이 진화론자들의 일치된 입장인 것이졍.
그러므로 진화론자들도 동일한 고유의 집단으로부터 모든 인종이 유래하였다는 데에 관하여는 성서적 창조론자들과 견해를 같이한답니다. 오늘날 다양한 모습을 지닌 인종과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졍^^.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피부색깔에 관한 것이여여.
그러나 실은 단 한가지 피부 색소가 존재한답니다. 즉 그것은 멜라닌 색소인 것이여여. 약간의 멜라닌만을 만들어 낸다면 유럽계 백인을 의미하며 다량의 멜라닌을 만들어 낸다면 매우 검은 피부가 될 것입니당. 물론 이중에는 갈색 피부의 사람이 있을 것이져. 다른 피부의 색소는 존재하지 않아여.

이제 짧은 기간동안에 어떻게 다양한 피부색깔이 생겨나게 되었는지 설명해 줄 수 있는 몇 가지 관찰을 해볼까영?(여기서 피부색깔이라는 의미는 엄밀히 말해 하나의 피부색깔에서 나오는 다른 색조를 의미함이 더 정확해여).

피부색은 적어도 2조(組)의 유전자로부터 지배받고 있음이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을 A와 B로 부르고 여기에 대하여 잠재되어 있는 유전자는 a와 b로 부르기로 하자구영^^(이 경우 소문자는 소량의 멜라닌을 나타내 는 암호이랍니다. 그러므로 상호 결혼하여 오직 검은 피부의 2세만을 낳는 검은 피부의 사람은 AABB로 표시되는 것이여여. 마찬가지로 백색 피부를 지닌 사람의 경우는 aabb가 될 것이구여. 예를 들어 흑백혼혈(AaBb)인 경우에는 퍼닛구획법(punnet square)에 의하여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 를 보면 놀랍게도 단지 한세대동안에 완전한 백인으로부터 완전한 흑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범위 를 망라한 피부색깔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단지 특별한 유형의 중간 갈색피부를 지닌 양친 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랍니당.

AABB를 지닌 자녀들은 피부에 전혀 밝은 색조가 없는 유전자를 지닌 완벽한 흑인이랍니다.만일 그들이 결혼하여 그들의 후손들이 다른 피부색깔을 지닌 사람들과는 전혀 결혼할수 없는 지역으로 이주한다면, 그들의 모든 자녀들은 검은 피부일 것입니다. 즉 완전한 흑인혈통이 될 것이졍. a

abb의 사람들은 흰 피부랍니다. 만일 그들이 서로 결혼하여 다른 피부 색깔의 사람들과 서로 결혼 할 수 없는 지역으로 이주한다면, 그들은 완전한 백인의 혈통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검게 되도록 하는 유전자 즉 다량의 멜라닌을 만들수 있는 유전자를 잃어버린 것이졍.

그러므로 우리는 두 사람의 중간 갈색피부를 지닌 양친으로부터, 모든 피부색깔뿐 아니라 영원히 피부색이 다른 인종 들이 손쉽게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볼 수 있는 항상 유색을 지닌 인종들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여? 이것도 쉽게 설명이 가능하답니다^^.

aaBB라든지 AAbb와 같은 사 람들은 그들이 더 이상 다른 인종의 사람들과 결혼하지 않는다면 항상 중간 갈색 피부의 후손을 낳는 일이 가능해진답니다.
만일 지구상의 모든 인류가 자유로이 서로 결혼하고 자연스럽게 결합하여 스스로 지켜왔던 종 족간의 결속을 깨뜨린다면 모든 종류의 새로운 조합이 나타날 것이졍. 심지어 오늘날에도 어떤 특정한 인종 내에서 종종 다른 인종과 결합된 것과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목격이 된다네영. 예를 들어 여러분은 때때로 납작코를 지닌 유럽인이나 매우창백한 피부의 중국인을 볼 수 있을 것이여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또 다른 특징들을 연구하는 유전학자들은, 이제 각 인종간의 평균 적인 유전적 차이라는 것은 각 인
종간에 존재하는 상이점 만큼 그렇게 큰 것이 아님을 잘 알구 있어영. 이것은 역시 각 인종이
오랜 기간 개별적으로 진화되어 왔다는 것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졍.


어떻게....궁금증이 조금은 풀어지셨나영?^^**


@@@@@@@@@@@@@@@@@@@@@@ 보너스~~~^^**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현재의 50억 지구 인구가 가능합니까?

어떤 사람은 아담과 하와로 시작된 몇 천년의 인간 역사로는 현재의 50억 인구를 충분히 설명 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당. 그러나 참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는 그러한 시기가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고작 50억 밖에 되지 않은가 하는 문제졍. 간단히 홍수 이후 노아의 8식구로 시작 된 세계 인구는 통계학의 견지에서 볼 때 인구 연간 증가율이 0.5%만 되어도 현재 세계 인구에 도달하는 데에는 4,000년이면 충분합니다. 이는 세계 인구 증가율의 ¼에 불과해여.

이를 좀더 통계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애영.
애초에 이 땅이 아내와 남편, 즉 부모의 역할을 한 두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가정해 볼까여?. 가구당 평균 아이 수는 C명의 남자 아이 와 C명의 여자 아이인 2C였다고 가정할 때... 첫 번째 다음 세대는 C가구수 (2C와 처음 2명이 살아 있다)가 될 것이궁... 두 번째 세대는 (C가구수)×2C로 2C2이 된답니다. 세 번째 세대는 2C3가 되구영. n 세대에 전 인구 Sn은
Sn = 2 + 2C + 2C2 + 2C^3 +......+ 2Cn
= 2{C(n+1) - 2}/(C - 1)
실제인구를 얻기 위해서 첫세대 이후로의 사망자수를 빼내야 합니다. n 세대 이전에 이미 죽은 사람들은 (n-x)세대의 앞세대라고 한다면 사망자수 Sn-x는 다음과 같애여.
Sn-x = 2{C(n-x+1) - 2}/(C - 1)
따라서 실제 총인구 Pn은
Pn = Sn - Sn-x = 2{C(n+1) - C(n-x+1)}/(C - 1)
예를 들어, 5인 가족이 현 세계인구에 도달하는 데에는 52세대가 걸립니당.
평균가족의 수치로서 3명의 어린아이와, 수명은 한 세대만 살고 죽는다면 즉, C=1.5, x=1이라면 현 세계인구에 도달하는 데에는 52세대가 걸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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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대 인 구
---------------------------------------------
10 106
20 6,680
30 386,000
52 4,340,000,000
---------------------------------------------
성경의 역사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주교 어셔(Ussher)의 연대는 홍수가 4,300여년 전에 일어났다고 한다내영. 지구상의 현재인구는 최초로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창 9:19). 한 세대 를 43년으로 생각하면 노아로부터 100세대가 지났을 뿐이여여. 현재 인구 46억을 산출하기 위해(여 전히 x=1로 가정) 위의 공식을 이용하면 C는 다음과 같애영.
4,600,000,000 = 2(C)100
C = 1.24
따라서 한 가구당 2C의 어린아이가 있어야 하므로 약 2.5명의 어린 아이가 있게 되겠졍^^. 이는 단지 산술적 수치이지만 합리적임을 알 수 있어여. 또한 이는 인류의 역사가 성경홍수 후 연대가 보여주는 것보다 더 오래 되었다는 주장은 현재인구의 현실에 비추어 보아 있을 수 없는 것이구영. 이 정도 비율로는 만년동안 102,700 인구가 산출되어야 한답니다. 따라서 인류가 지구상에 거주한 기간 이 100만년이나 그 이상이라는 것은 불가능하고 설명이 곤란하겠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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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구분

 

지구상에는 현재 60억여 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이들은 여러 인종과
민족으로나누어져 있습니다.

인종은 체질이나 유전적인 신체의 특징에 따라 구분된 것으로
그 분류방법은 형태적적인 기준과 계측적 기준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형태적 기준으로는 피부의 빛깔(白·黃 ·黑 등), 머리털의 형태와 빛깔,
눈빛(靑 ·黑 ·灰 등)과 생김새 등에 따릅니다.

계측적 기준으로는 키 ·머리모양 ·코 ·혈액형 ·지문 등에 따릅니다.
일반적으로 계측적 기준은 머리모양 외의 것은 개인차가 크기 때문에
보조적으로만 이용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인종조사를 해보면 각 인종간에 혼혈이 많아 엄밀히
분류하기에 곤란한 점이 많습니다.

현재 세계의 인종은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말레이
등 5대인종으로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요 분포지역과 인종적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아시아 인종(몽골인종 ·황색인종)
동아시아 ·몽골 ·동시베리아 ·인도차이나 ·남서아시아·소(小)아시아 ·
중앙아시아 ·헝가리 ·핀란드 등에 분포합니다.
피부는 주로 황색이나, 일부는 담갈색이며, 넓은 이마, 낮은 코, 단두(短頭),
흑색 직상모(直上毛), 적은 체모(體毛) 등의 특징을 갖고, 신장(身長)은 중신
또는 단신입니다.

2. 유럽 인종(인도유럽 인종 ·백색인종)
유럽 전역 ·북아프리카 ·아라비아반도 ·아프가니스탄 ·북부 인도 ·
남북아메리카 등에 분포합니다.
피부는 흰색이나, 일부는 갈색이며, 넓은 이마, 높은 코, 장두(長頭),
파상모(波狀毛), 청갈색이나 검은 눈, 많은 체모등 등의 특징을 갖고, 신장은
장신 또는 중신입니다.

3. 아프리카 인종(니그로 ·흑색인종)
아프리카 중부 이남, 미국 등에 분포합니다.
피부는 구리빛이나 흑갈색으로, 입술이 두껍고, 낮은 코, 장두,고수머리,
검은 눈, 적은 체모를 갖고 있으며, 신장은 장신 또는 중신입니다.

4. 아메리카 인종(아메리카 인디언)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북극해 연안에 분포합니다.
피부는 구리빛이나 갈색, 머리털과 눈은 아시아 인종과 비슷합니다.

5. 말레이 인종(해안 도서 인종)
인도네시아 ·필리핀 ·뉴기니·멜라네시아 등에 분포합니다.
피부는 갈색이며 그 밖에는 아시아 인종과 흡사하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혼혈은 일반적으로 분류하는 5개 인종중에
정확히 어느인종으로 단정하기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혼혈이라도 어느 한 인종에 가까운 특징들이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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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흑인과 아프리카 흑인의 차이점

 

미국의 흑인은 서아프리카 흑인과 백인 ·인디언의 유전적 성질이 혼합된 것이라고 합니다.

1990년 통계에 의하면 미국인의 12 %로, 3000만 명 정도입니다.

17세기부터 주로 서아프리카로부터 강제이주한 노예 흑인의 자손입니다.

아프리카 흑인에 비하여 키가 5∼6 cm 크며,

남성은 백인남성보다 약간 작지만 여성은 반대로 백인여성보다 더 크다.

또한 아프리카 흑인에 비하여 머리부분이 길고 목이 넓다.

얼굴 폭도 넓으며, 코는 좁고 높다. 피부색도 담흑색(淡黑色)이다.

이런 차이점이 있다고 합니다.

 

미국 흑인을 보면 백인과 많이 혼합되고, 풍토에 따라 변화되어

 

거의 백인와 비슷하거나 더 큰 체구를 가지고 있는 편이고

 

아프리카 흑인들은 거기에 비하면 대개 단구에 머리가 작은 듯 보입니다.


아프리카의 주민에는 북부아프리카인종, 서부 아프리카 인종, 북동 아프리카 인종등이


있는데 그 중에 미국으로 노예로 온 것은 서부 아프리카인종입니다.


아프리카의 주민


아프리카의 인종군(人種群)의 분류는 학자에 따라 견해차가 있는 데다 아직 정설(定說)이 없고, 인종의 명칭도 구구하지만 대략 다음과 같이 나뉘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⑴ 북부 아프리카 인종:함-셈계(系)라고 할 수 있으나 학자에 따라서는 메디테라니데(지중해인) ·베르베리데(베르베르인) ·오리엔탈리데(아랍인) 등으로 분류한다. 고대 이집트인 ·콥트인 ·베르베르족(族) ·모르인 등이 메디테라니데에 속하며, 특히 베르베르족 중 아틀라스 산중에서 사하라에 걸친 지역에 사는 종족이 베르베리데라고 불린다. 이들은 전체적으로 코카소이드(백인종)의 특색을 지닌다.

⑵ 서부 아프리카 인종:이른바 검은 아프리카인은 ‘멜라노 아프리카 인종’이라든지 ‘네그리데’ ‘니그로이드’ 등 많은 이름으로 불린다. 그리고 서부 아프리카에 거주하는 ‘아인종(亞人種)’으로서는 ‘기니 아인종’ ‘콩고 아인종’과 ‘수단 아인종’ 또는 ‘바레 네그리데’ ‘수다니데’라고 부르는 종족이 있다. 전자는 기니만에서 콩고에 걸쳐 분포하는데 키는 160∼168cm 정도이며 턱이 튀어나오고 코가낮다. 이들은 중두(中頭) 또는 단두(短頭)이고, 체격이 늠름하며 주로 열대우림 지대에 살고 있다. 후자는 170cm 이상으로 키가 크고 턱이 심하게 튀어나온 데다가 코가 낮다. 이들은 얼굴이 길고 피부는 아주 검다. 이들은 세네갈강 유역에서 차드호(湖)에 걸친 서부 아프리카의 내륙 사바나 지대에 거주한다. 또한 카메룬 남부에서 콩고에 걸친 열대우림에는 ‘네그릴로 인종’ ‘피그미’ 또는 ‘밤부티데’라고 부르는 단신(短身:140cm 내외)에 황갈색 피부와 체모(體毛)가 발달한 인종이 살고 있다.

⑶ 북동 아프리카 인종:‘멜라노 아프리카 인종’ 중 ‘아이르 아인종’ 또는 ‘닐로티데’라 부르는 종족인데 마른 데다가 키가 아주 크고(180∼200cm) 팔다리가 길고 코가 좁으며 얇은 입술, 장두(長頭)를 특징으로 한다. 이 종족들은 나일강 상류에서 잠베지강 상류까지 동아프리카 대지구대 연변을 따라 거주한다. 또 다른 중요한 인종으로는 ‘에티오피아 인종’ 또는 ‘에티오피데’라고 부르는 인종이 있는데 이들은 키가 비교적 크고 피부는 상당히 검으나 머리의 모양이나 얼굴 생김새는 백인종적인 특성을 지닌다. 이들은 아비시니아 고원에서 소말리아에 걸쳐 살고 있으나, 마사이족 등 탄자니아의 내륙에 살고 있는 종족도 있다.

⑷ 동부 ·중부 ·남부 아프리카의 인종:‘멜라노 아프리카 인종’ ‘네그리데’라고 부르는 인종 중 ‘반투 아인종’이라든지 ‘반투이데’ 또는 ‘카프리데’라 부르는 아인종이 거의 적도 부근에서 남쪽 전지역에 걸쳐 분포한다. 키는 167∼169cm 정도이며 턱은 별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얼굴이 길고 피부색은 비교적 밝다. 그 밖에‘코이산 인종’이라든지 ‘코이사니데’라고 부르는 호텐토트족과 부시먼이 있다. 이 인종은 키가 작고 피부는 황갈색이며 장두 또는 중두, 둔부(臀部)의 돌출이 뚜렷한 특징을 지닌다. 또 언어에 ‘클릭’이라는 정지음(停止音)이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아프리카너’라고 자칭하는 토착백인(土着白人)이 있는데 ‘아프리칸스(Africaans:네덜란드어 방언의 일종)’를 독자의 언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또 마다가스카르섬에는 ‘몽골로이드’ 혹은 ‘바레몽골리데’라고 하는 말레이 폴리네시아어를 사용하는 인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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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만 올리겠습니다^^

 

내일 더 찾아서 올려드릴께요^^
 

인간의 인종에 대해 궁금증이 있습니다~~

... 어떻게 인종(흑인 백인 황인)이 변화되었는지궁금합니다. 멜라니 색소에 대해 설명해 주시구요 .. 적도지방의... 들은적있습니다만. 저는 진화론은 믿지 않구요 그런...

인간의 인종에 대해 질문있습니다~~~

... 어떻게 인종(흑인 백인 황인)이 변화되었는지궁금합니다. 멜라니 색소에 대해 설명해 주시구요 .. 적도지방의... 들은적있습니다만. 저는 진화론은 믿지 않구요 그런 가설은...

인종차별에 관하여

... 인종 차별에 대해 궁금한 마음을 이해합니다. 사실... 인종차별을 당하는 이유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문화적... 멋진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을...

세계의 인종들에 대해 궁금한게 있어요...

... 문화권들에 대해 공부하게됬어요 세계인종은 코카서스... 내공만빵이에여 ^^ 궁금증이 풀리려나 모르겟네요 .. ㅠ... 그래서 터키인들은 코카소이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백인이 타인종에 대해 인종차별을 하는...

... 타인종이나 타민족에 대해 배타적인 사람들은... 2-- 이부분이 들어갈수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언가 편향된... 즉 인간이 가지는 누군가를 짓밟고서라도 자신이 가치있다고...

미래인류 인종에 대해

... 인종은, 지구가 북극과 남극과 적도 지방이 있습니다. 약 1만년 전이거나, 약 3억년... 심지어는, 동물이나 물고기나 새들도, 피가, 인간처럼 빨강색이었습니다. 엄청나게...

인종차별의 문제점

... 인종 차별은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을 훼손하는 심각한 윤리적 문제입니다. 이는 특정 인종이나 민족에 대해... 수 있습니다. 인종 차별은 공정한 기회를 빼앗고 사회 경제적...

일본의 인종에 대해 궁금한것이 있습니다.

일본의 인종에 대해 궁금한것이 있습니다. 친구가 일본 혼혈은 전인구 50%이상... 그건이 인간이구요. 일본 역시, 북방계, 남방계등 다양한 민족이 만들어낸 다민족입니다. 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