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군의 문화재

진천군의 문화재

작성일 2020.06.01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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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군에 현재 소재하고 있는 문화재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자세하게 올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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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의 문화재)

1.진천 연곡리 석비

종 목 보물 제404호

지 정 일 1964.09.03

소 재 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김유신길 641 (연곡리 485-2)

시 대 고려시대

거북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비머리를 얹은 일반형 석비로 비문이 없어 일명 백비라고 불려 더욱 유명한 비석이다. 거북 모양의 받침돌은 얼굴면이 손상되어 말머리같이 되었으며 앞 발톱이 파손되었다. 등 무늬는 정교하게 조각되어 단아한 느낌을 주고 비몸을 받치는 받침부분의 연꽃무늬는 잎이 작으면서도 양감이 있어 아름다운 느낌을 준다.

비머리에는 아홉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려고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조각하였다.

거북모양 받침돌의 머리 형태와 비의 규모에 비해 얇은 몸, 옆으로 긴 네모꼴의 비머리형태 등 고려 초기 특징을 지니고 있다. 건립 연대나 양식상 월광사 원랑선사비와 비교되는 작품이다.

2.진천 영수사 영산회괘불탱

종 목 보물 제1551호

지 정 일 2008.03.12

소 재 지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영구리길 60-125 (영구리 산542)

시 대 조선시대

영수사 괘불은 『묘법연화경』에 의거하여 석가모니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청문중을 중심으로 그린 영산회상도로서, 1653년 명옥을 비롯한 4명의 승려화원들이 그렸다. 석가모니의 대좌 앞에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사리불을 비롯하여 좌우에 시립한 많은 권속의 묘사는 조선후기 영산회상도 중에서도 영산회상을 가장 장엄하고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특히 밝은 채색과 유려한 필치, 다양하면서도 능숙한 인물묘사가 돋보인다.

영수사 괘불은 제작시기가 1653년으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다는 시기성, 사리불이 청법자로 등장하는 가장 빠른 괘불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비록 부분적으로 후대에 수리한 흔적이 보이지만 17세기 영산회상도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3.진천 김유신 탄생지와 태실

종 목 사적 제414호

지 정 일 1999.06.11

소 재 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김유신길 170-4 (상계리 56) 외 129필지

시 대 신라

이곳은 흥무왕 김유신 장군이 탄생한 곳으로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13세손이다. 김유신 장군은 만노군 태수(만노: 진천의 옛이름) 김서현장군의 아들로 진평왕 17년(595년) 진천읍 상계리 계양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나이 15세 되던 609년(진평왕 31년)에 화랑이 되고 낭비성 싸움에 공을 세워 압량주 군주가 되었다. 선덕여왕 때 상장군, 무열왕 7년(660년) 상대등이 되어 당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후 나당연합군의 대총관이 되어 고구려를 정벌(668년)하고 태대각간이 되었으며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다시 찾아 삼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여 흥무대왕 으로 추봉되었다.

지금의 계양 마을 입구에 장군터(태수 관저가 있던 곳)라 불리워지는 곳에 1983년에 유허비를 건립하였으며, 이곳에서 북서 방향 2㎞지점에는 태수 관저에서 사용했다는 우물터 연보정이 현존하고 있으며 무술 연습을 했다고 전해오는 투구바위와 치마대가 있다.

4.진천 산수리와 삼용리 요지

종 목 사적 제511호

지 정 일 2011.07.28

소 재 지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산수리 196-7와 이월면 삼룡리 산518-10 외

시 대 백제

진천 산수리와 삼용리 요지는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을 끼고 전개되어 있는 야산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부고속도로 건설에 따른 문화유적조사 중 1987~1991년까지 대전 한남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 된 유적이다.

산수리 요지에서는 총 8기가 조사되었으며, 길이 3m내외 소형이 4기, 8m내외의 대형이 4기였다. 소형은 능선 바로 가까이에 대형은 그보다 약간 아래 경사 면에 위치해 있었다. 기본 구조는 모두 같아 아궁이의 바로 밑이 불을 때는 곳이 수직인 수혈식 연소실과 토기를 놓았던 소성실로 구성되었으며, 산사면의 경사를 이용하여 만든 등요(굴가마)였다. 가마의 형태는 소형의 경우, 천정이 지상에 노출된 반지하식이고, 대형은 바닥과 벽이 지하로 들어가 지하에 설치된 완전 지하식이었다.

삼용리 요지는 6기가 조사되었으며, 길이 2.4m에 불과한 소형부터 7.9m에 이르는 대형까지 크기는 다양하며, 모두 바닥과 벽은 땅을 파 지하에 설치하고 천정은 지상에 나온 반지하식 등요였다. 이 지역 토기 가마터들은 3세기 전반에서 4세기 중반까지 조성되어 토기를 생산하였으며, 청주·천안·황성·원주·서울지역까지 공급되었다. 또한 초기 소형의 규모에서 점차 대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진천 산수리와 삼용리 토기요지는 한반도 중서부지방에서 원삼국토기 또는 마한토기로부터 백제토기로의 전환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이다.

5.진천 농다리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8호

지 정 일 1976.12.21

소 재 지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601-32

시 대 고려시대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앞을 흐르는 세금천에 놓인 다리로 '농다리'라고 불리고 있는 아름다운 모양의 돌다리이다.

『상산지』(1932)에는 '고려초기에 임장군'이 축조하였다고 전해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본래는 28수를 응용하여 28칸으로 만들었으나 지금은 25칸만이 남아 있으며, 길이는 93m에 이르고 있다.

사력암질의 붉은 색 돌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아 올려 교각을 만든 후, 상판석을 얹어 놓고 있다. 이 다리의 특징은 교각의 모양과 축조방법에 있는데, 돌의 뿌리가 서로 물려지도록 쌓았으며 속을 채우는 석회물의 보충 없이 돌만으로 건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교각의 폭은 대체로 4m 내지 6m 범위로 일정한 모양을 갖추고 있고, 폭과 두께가 상단으로 올수록 좁아지고 있어 물의 영향을 덜 받게 하기 위한 배려가 살펴진다.

비슷한 예가 없는 특수한 구조물로 장마에도 유실되지 않고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으며, 상판석의 돌은 특별히 선별하여 아름다운 무늬를 잘 보여주고 있다.

6.신잡 영정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5호

지 정 일 1977.12.06

소 재 지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논실길 113-10 (노원리 824)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신잡 선생의 영정이다.

신잡(1541∼1609) 선생은 이조참판, 형조참판을 지낸 이로, 임진왜란 때 선조임금을 의주까지 호위한 공을 인정받아 호성공신에 봉해지기도 했다.

비단 위에 그려 놓은 그림은 가로 90㎝, 세로 167㎝의 크기이다.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으로, 시선은 오른쪽을 바라보며, 두 손은 소매 안에서 마주잡고 있다. 사모를 쓰고, 중요의식 때 입었던 관복을 입고 있으며, 가슴에는 두 마리의 학이 그려진 흉배가 표현되어 있다.

선생이 57세 되던 선조 40년(1607) 때의 모습을 김이섭이 그린 것으로, 조선 중기의 화풍을 잘 보여주고 있다.

7.진천 태화4년명 마애여래입상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1호

지 정 일 1981.05.01

소 재 지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산7

시 대 신라

진천읍에서 동쪽으로 진천이 자랑하는 넓은 덕문리 들을 지나 10여리 가면 덕산 쪽에서 흘러오는 미호천의 한 지류를 만나게 된다. 이 개울을 건너면 바로 고개에 접어들게 된다.

넓은 찻길을 가되 양쪽에 산이 와 닿아있어 산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짐짓 방향이 남북으로 바뀌는 부처당고개 마루턱, 왼쪽 벼랑에 자세히 살펴 보아야만 알 수 있는 불상, 그리고 몇 글자의 음각이 새겨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천여 년을 모진 비바람 속에 버티어 왔음인가, 고개를 지키는 기운이 다했음인가 형체는 다만 아랫부분에 옷주름을 볼 수 있을 뿐 심한 마모 속에 그 모습을 숨기려 하고 있다. 오히려 그 옆에 새겨진 몇 글자의 한자가 뚜렷하니 단국대학 정 영호 박사 팀에 의해 그 연대가 밝혀진 근거를 제시해주고 있다.

마애불상 머리 부분의 왼쪽에 아래로 내려 쓴 서너 줄의 한자 글씨 중 '미륵불……태화 사 년 경술 삼월 일'의 문구를 판독해 낸 것이다. 이 '태화 4년'은 연호로 네 번 등장하는 데 그 중 간지가 '경술'인 해는 수나라 명제 4년 (서기 230년) 경술이 있으나, 이 해는 너무 오랜 시기이고 신라 흥덕왕 5년(서기 83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8.진천향교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01호

지 정 일 1981.12.26

소 재 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문화5길 30 (교성리 416)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진천향교는 조선 태조(재위 1392∼1398) 때 지은 것으로 순조 4년(1804)에 명륜당과 동재·서재를 고치고 풍화루를 지었다. 1816년에는 대성전을 고쳤으며 그 후 여러 차례의 수리가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대성전·동무·서무·명륜당·풍화루 등과 부속건물들이 남아있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으로 동무·서무와 함께 제사공간을 형성한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공부하던 강당으로 이것을 중심으로 배움의 공간이 이루어진다. 풍화루는 학생들의 휴식공간이면서 누문의 기능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책·노비 등을 지급 받아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에는 교육적 기능은 사라지고 봄·가을 2차례에 걸쳐 제사만 지내고 있다.

9.진천 사곡리 마애여래입상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4호

지 정 일 1982.12.17

소 재 지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 산68-1

시 대 고려시대

충청북도 진천군 사곡리에 있는 전체 높이 7.5m의 불상으로, 큰 바위 한면을 다듬어 몸 전체를 감싸는 듯한 커다란 광배를 만들고 그 안에 불상을 새겼다. 앞면에 뚫려 있는 구멍으로 보아 원래는 불상을 모시던 나무로 만든 방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얼굴은 단아한 스님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목에는 3줄로 새긴 삼도가 뚜렷하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U자형으로 흘러내리고 있으며, 왼팔 등에도 촘촘하게 주름이 새겨져 있다. 특징적인 광배와 함께 도식적인 옷주름 표현 등에서 형식화가 진행되는 고려시대 불상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신라말의 마애불 양식을 계승하여 고려시대에 만든 것 가운데 하나로 수준있는 작품이다.

10.진천 용화사 석조여래입상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8호

지 정 일 1984.12.31

소 재 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소강정1길 83 (신정리 584-4)

시 대 고려시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신정리에 있는 높이 7m의 커다란 불상으로 타원형의 얼굴에 은근한 미소가 보인다.

머리 꼭지에는 벙거지 같은 것이 올려져 있는데 나중에 고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목에는 3줄로 새겨진 삼도가 있고 그 아래에 표현된 목걸이 장식은 얼굴과 함께 불상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신체는 부피감이 거의 없는 커다란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다. 옷은 가슴을 드러낸 채 양 어깨에 걸쳐 입었고 하체에는 U자 모양의 주름을 겹쳐 나타냈다. 가슴 앞에 들고 있는 오른손이나, 연꽃을 들고 배에 댄 왼손은 작게 표현되었다.

거대한 크기, 부피감 없는 사각형태, 빈약한 세부표현에서 고려시대 지방화된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11.진천 이시발 신도비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2호

지 정 일 1984.12.31

소 재 지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192-11

시 대 조선시대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시발(1569∼1626) 선생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이시발은 선조 22년(1580)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임진왜란(1592), 이봉학의 난(1596), 이괄의 난(1624) 당시 큰 공을 세웠으며, 생을 마친 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선조, 광해군, 인조에 걸친 세 임금을 섬기면서 백성의 생활안정과 지방민을 평온하게 하였던 그의 공로를 찬양하고자 이 비를 세웠다.

조선 효종 9년(1658)에 세운 비로, 비문은 송시열이 글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이정영이 새겼다.

12.진천 정철 신도비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7호

지 정 일 1996.01.05

소 재 지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송강로 523 (봉죽리 531)

시 대 조선시대

신도비는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입구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정치가이며 가사문학의 대가로 유명한 송강 정철(1536∼1593) 선생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정철은 26세 되던 명종 16년(1561) 진사시에 1등을 하였고 이듬해 문과에 장원급제를 하여 수많은 관리직을 역임하였다. 또한 시조, 가사, 한시 등 많은 작품에 뛰어난 재질을 발휘하여,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등을 지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문은 숙종 10년(1684) 문정공 송시열 선생이 글을 지었으며, 김수증 선생이 글씨를 썼다.

13.진천 노원리 석조마애여래입상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9호

지 정 일 1997.06.27

소 재 지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산39-2

시 대 고려시대

이 마애불은 상호에서 대좌까지 얕은 부조로 조각하였다.

이 불상은 전체적으로 도식화되었으나 두광과 신광 등이 뚜렷하며 상호에서 보이는 원만상은 타불상의 특징이 있다.

불상의 크기는 높이 6.1m, 너비 4.2m이며 부드러운 미소, 감은듯한 두 눈, 통견의 법의, 수 평으로 조각된 대좌 등 고려시대에 유행한 거대불상의 특징과 계보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 한 불상이다.

14.진천 영수사 신중도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17호

지 정 일 2011.02.01

소 재 지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영구리길 60-125 (영구리 542)

시 대 조선시대

진천 영수사 신중도는 조선후기 형식과 양식이 잘 갖추어져 있으며, 화기에 불화를 그린 화사의 기록이 남아 있고 절대편년이 나오는 중요한 자료이다.

불화를 그린 화사는 수화사인 금어로 상원, 천여, 편수는 학능, 출초는 재근, 체훈이 맡아 참여하였으며, 이들은 경기도와 전라도, 경상도 등에서 19세기 후반 활발하게 활동하였던 화사들이다.

또한 신중도를 그린 화사들은 조선후기 불교회화사에 있어서 저명한 인물들이며, 현재 불화의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15.길상사

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1호

지 정 일 1975.02.21

소 재 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문진로 1411-38 (벽암리 508)

시 대 조선시대

삼국통일의 주역이였던 김유신(595∼673)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김유신은 15세 때 화랑이 되었고, 무열왕 7년(660) 상대등이 되었다. 그 뒤 중국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나당연합군의 대총관이 되어 고구려를 정벌하고 삼국통일(676)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신라와 고려 때에는 장군이 태어난 태령산 아래 장군의 사당에서 봄과 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와서 관리가 소홀하다가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폐허가 된 것을 철종 2년(1851) 백곡면에 ‘죽계사’를 세워 장군의 영정을 모셨다. 고종 1년(1864)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렸는데 1926년 후손 김만희의 노력으로 지금 있는 자리에 길상사를 다시 세웠고, 1975년 정비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장우성이 그린 그의 초상화와 흥무전, 흥무대왕신성비 등이 있다.

16.진천 정송강사

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9호

지 정 일 1976.12.20

소 재 지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562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전기 문신이며 시인인 송강 정철(1536∼1593)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선생은 정치인보다 시인으로서 천부적인 재질을 나타냈는데, 관찰사로 재직하면서 『관동별곡』, 『훈민가』, 『성산별곡』 등을 지었고 낙향한 뒤에는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많은 가사와 단가를 남겼다.

이 사당은 경기도 고양에 있던 정철의 묘를, 현종 6년(1665) 송시열 선생이 정한 현 자리로 옮기면서 지은 건물이다. 지금 있는 것은 규모가 너무 작아 1979년 새로 지은 것이다.

사당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현재 이곳에는 선생의 유품인 은배, 옥배를 보관하고 있으며, 사당 남쪽에는 송강의 묘소와 시비 그리고 비각이 있다.

17.진천 이상설 생가

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77호

지 정 일 1987.03.31

소 재 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이상설안길 10 (산척리 산21-9)

시 대 조선시대

독립운동가인 이상설(1870∼1917) 선생의 생가로, 선생은 충청북도 진천 출신이며 호는 보재이다.

선생은 이시영, 이규형 등과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통분을 금치못해 길거리에서 연설한 후 집 밖에 나오지 않았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조선이 독립국임을 주장하는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1917년 연해주에서 생애를 마쳤다.

가옥은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로 흙벽돌로 쌓고 진흙으로 마감한 초가이다. 40여년 전에 무너졌던 것을 최근에 복원·수리하였다.

18.진천 대모산성

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83호

지 정 일 1990.12.14

소 재 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성석리 산1-4

시 대 삼국시대

할미성이라고도 불리는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의 대모산성은 『삼국사기』 전투기사에 보이는 모산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남쪽으로 넓은 평야를 끼고 낮은 구릉지 위에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내·외성과 자성(子城)을 갖춘 특이한 형식이다.

성의 총길이는 1,260m에 이르고 있으며 남쪽과 북쪽에 문터로 짐작되는 자리가 있다. 내성의 벽은 자연지형을 충분히 이용하여 흙을 층층이 다져서 쌓았고, 외성의 벽은 아래 기초부분에 자갈돌을 넣고 점토가 많이 섞인 흙을 채웠다. 성의 외부는 경사가 급한 지형을 이루고 있으나 안쪽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다.

성안에서는 선사시대 이래의 석기와 토기 조각들이 발견되었으며, 성의 바깥에서는 최근에 백제 초기의 저장구덩이와 더욱 오래된 시기의 무덤자리, 신라의 돌방무덤이 조사되었다.

이 성은 고려시대 초기에 진천지역 호족인 임희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개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고대사회의 행정구역과 산성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진천 이집 묘갈

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104호

지 정 일 1995.06.30

소 재 지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 137-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 효자 이집의 묘 앞에 자리하고 있는 비이다.

이집의 본관은 고성으로 어릴 때부터 효심이 지극하여 부모가 병으로 누워있으면 옷을 벗지 않고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대변을 맛보아 병을 짐작하고 밤에는 밖에 나가 하늘에 기도하였다고 한다.

보호각 내 비는 네모 반듯한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정교한 조각솜씨가 돋보이는 머릿돌을 올린 형태이다. 머릿돌에는 두 마리 용의 모습이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듯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비는 1727년(영조 3)에 세웠다.

20.신화국 백자청화 묘지

종 목 충청북도 민속문화재 제7호

지 정 일 1982.12.17

소 재 지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논실길 113-10 (노원리 824) 노은영당

시 대 조선시대

묘지는 죽은 사람의 이름과 태어나고 죽은 일시, 행적과 무덤 방향 등을 적어 무덤 안에 묻은 돌이나 도판에 새긴 글로 광지라고도 한다.

이 묘지는 신화국의 무덤 안에 들어있던 것인데, 신화국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모셨고 병조판서를 지내기도 한 신잡선생의 아버지이다.

묘지는 백자합과 같이 출토되었으며, 3개가 모두 직사각형의 사기판이다. 흰 바탕에 파란색 글씨로 신화국의 선조와 후손들의 업적을 기록해 놓았는데, 그 형태나 글씨가 잘 보존되어 있다.

21.진천 신헌 고가

종 목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호

지 정 일 1985.12.28

소 재 지 충북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826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후기 무신이면서 외교가였던 신헌(1810∼1884)이 살던 집이다. 신헌은 중요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강화도조약과 조미수호조약 등을 체결하여 조선의 개항에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 집은 1850년경 신헌이 전통 한옥 형태로 지은 건물이다. 세울 당시에는 사랑채와 행랑채, 안채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안채와 광채만 남아 있다.

안채는 2층 기단 위에 세운 ㄱ자형 평면을 갖춘 집으로 오른쪽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고, 왼쪽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광채는 부속 건물로 곡식이나 여러 생활용품을 보관해 두던 곳이다.

22.진천 금성대군 사당

종 목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0호

지 정 일 1990.12.14

소 재 지 충북 진천군 초평면 수의1길 75-8 (용기리 416)

시 대 조선시대

세종대왕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1426∼1457)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어머니는 소헌왕후이며 이름은 유이고, 1433년에 금성대군으로 봉해졌다. 형인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이 되자 조카인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반역죄로 처형당하였다.

사당은 영조 16년(1740)에 세운 것이고 1974년에 보수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23.진천 산수리 마애여래입상

종 목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20호

지 정 일 1998.01.09

소 재 지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인화길 83 (산수리 산98)

시 대 고려시대

충청북도 진천군 산수리에 있는 이 여래좌상은 커다란 암석에 상반신만 두껍게 돋을새김하였다.

얼굴 생김새는 원만한 인상이며, 귀는 길게 늘어져 있고, 목에는 3줄의 주름인 삼도가 표현되어 있다. 얼굴 위로 연꽃줄기 위에 앉아 있는 3구의 작은 부처를 배치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하반신을 조각하지 않은 점 또한 특이하며, 전체적인 선이 둥글어 원만한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신체 표현은 충청북도 진천 지역의 불교 조각 양식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24.진천 교성리 연화대좌

종 목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40호

지 정 일 2003.08.14

소 재 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문진로 1323 (교성리 산41-10)

시 대 고려시대

이 연화대좌는 불상은 없어진 채 대좌만이 자리하고 있으며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하고 조각솜씨가 뛰어난 반구형의 빼어난 작품이다.

이 대좌는 자연석의 석재를 지대석으로 중·하대석은 팔각으로 상대석은 방구형으로 겹쳐 놓았다.

상대석에는 연화문과 보상화문이 각각 아래·위로 조각되어 있는데, 연꽃씨와 잎을 장식하여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이 연화대좌는 충북지역에서 보기 드문 불상 대좌로 대좌의 구성요소를 잘 갖추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불상대좌의 변화과정을 살필 수 있는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25.진천 강세황 묘소

종 목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83호

지 정 일 2011.03.04

소 재 지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도하리 510-10

시 대 조선시대

표암 강세황(1713~1791)은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평론가로써 시 · 서 · 화 삼절로 불렸고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서 중추적인 구실을 했다.

본관은 진주, 자는 광지, 호는 침재·산향재·박암·의산자·견암·노죽·표암·표옹·해산정·무한경루·홍엽상서 등이다. 6세부터 글을 짓고 8세 때 숙종 국상에 어울리는 구장에 대한 시를 짓는 등 재주가 뛰어났으나, 형 세윤이 귀양살이하는 것을 보면서 과거에 응시할 생각을 버렸다. 32세 때 처가인 안산으로 옮긴 뒤 약 30년간을 지내면서 문인으로서 시·서·화를 고루 갖추고 그 깊이를 더해갔으며, 안산15학사․여주이문의 인사들 및 예인들과 교유하였다. 1763년 영조가 그가 서화를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심이 좋지 않아서 천한 기술이라고 업신여길 사람이 있을 터이니 다시는 그림 잘 그린다는 말을 하지 말라"라고 말하자, 이에 감격하여 이때부터 거의 20년 동안 붓을 놓고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1773년 영조의 배려로 61세의 나이에 처음 벼슬길에 올랐다. 1776년 기구과, 1778년 문신정시에 수석합격하여 관계가 가선대부에 이르렀다. 그 뒤 영릉참봉, 사포별제, 호조참의, 병조참의, 한선판윤 등을 두루 거쳤다. 1784년 천추부사로 북경에 갔을 때 덕보 · 박명 · 김간 등 당시 중국 들과 접촉하면서 자신의 문화적인 면모와 긍지를 발휘했다. 1790년 78세에 지중추가 되었다.

묘소는 조선시대 일반적 형태로써 상석과 향로석을 세우고 좌우로 문인석, 망주석 각 1조의 배치형태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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