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시의자연환경,유물,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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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9.08.19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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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은 문화재에 포함이 됩니다.

 

1.자연환경

 

1) 북쪽에 차령산맥, 남동쪽에 계룡산이 주요 산계를 이루고 있으며, 동서방향으로 금강이 관류하고, 유구천, 정안천, 대교천, 제민천, 혈저천등 대소의 지류군이 합류되고 있다. 
 
2) 국가하천(금강)1개소, 지방1급하천(유구천)1개소가 분포하고 있으며, 하천의 총연장은 1,159km 에 이르고 있다. 
 
3) 차령산맥이 차가운 북풍을 막아 그 북쪽보다는 훨씬 따뜻하나 내륙분지로 금강의 영향을 받아 한서의 차가 큰 대륙성 기후를 보이고 있다. 

 

2.기후

 

공주의 봄철 평균 기온은 약 11.3°C로 대도시를 제외한 인근 지역에 비해 높은 편이다. 공주의 봄철 기온은 서해안보다 약 0.5°C 정도 높고 인근 대전보다는 약 0.7°C 정도 낮다.

여름철 공주의 평균기온은 약 23.3°C로 인근 부여의 23.8°C보다 낮고, 대전의 24.3°C 보다 1°C 정도 낮다.

공주의 가을철 평균기온은 약 12.1°C로 대전의 13.8°C보다 무려 1.7°C 낮고, 부여 13.4°C보다 약 1.3°C 낮다.

충남지역의 겨울철 평균기온은 -1.5°C ~ 0.5°C 정도이며, 공주의 평균기온은 약 1°C 정도로 주변보다 높은 편이다.

 

3.위치

 

1) 수리적 위치 
 
공주시는 충청남도의 동부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 경도 상으로 볼 때 동쪽은 연기군의 서면, 남면, 금남면과 그리고 대전광역시의 유성구, 서구와 접하고 있으며, 동쪽의 맨 끝은 반포면 봉암리의 동쪽으로 동경 127도 17분 39초이다. 서쪽은 예산군의 대술면, 신양면과 청양군의 운곡면, 대치면, 정산면, 목면, 청남면과 접하고 있으며 서쪽의 맨 끝은 신풍면의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국사봉으로 동경 126도 53분 05초이다 .

 

위도 상으로 보아 남으로는 논산시의 두마면 , 상월면, 노성면과 그리고 부여군의 부여읍, 초촌면과 접하고 있으며 남쪽의 맨 끝은 탄천면 화정리의 아랫가실 마을의 남쪽으로 북위 36도 16분 20초이다. 북쪽으로는 아산시의 송악면과 천안시의 광덕면에 접하고 있으며 북쪽의 맨 끝은 유구읍 탑곡리의 봉수산으로 북위 36도 40분 06초이다. 공주시의 남북의 위도 차이는 대략 23분 46초로 그 거리는 약 44km이고, 동서의 경도 차이는 대략 24분 43초 차이로 그 거리는 약 36km가 된다. 
 
2) 지리적 위치 
 
차령산맥은 태백산맥의 오대산 부근에서 갈라져 충청북도와 경기도의 경계를 따라 남서방향으로 뻗어서 충청남도의 중앙부를 거쳐 비인만에 이르는 산맥이다 . 이러한 차령산맥의 일부가 공주시의 북동에서 남서로 뻗어 있어서 무성산(613.6m), 국사봉(590.6m), 금계산(574.8m), 갈미봉(515.2m) 등의 산들이 사곡면, 정안면, 유구읍 지역에 분포하고 있어 북부지역의 넓은 지역은 비교적 높은 산지 지역을 이루고 있다.

 

남동 지역은 국립공원인 계룡산 (845.1m)지괴가 분포하고 있다. 그 사이의 중앙부에 금강 본류가 동에서 서로 흐르고 있고 그 지류인 유구천, 정안천, 대교천, 용성천 등의 하천들이 흐르고 있어서 그 주변에는 약간의 평야를 이루고 있다. 평균 해발고도는 대체로 200~300m 정도의 구룡성 산지로 되어있다.

 

기후적으로는 중위도상에 위치하여 온난 다습한 기후지역에 속한다 , 그러나 우리나라 기후는 온대계절풍대에 속하여 한서의 차가 심한 편이다. 공주지역은 기후 구분 상으로는 중부서안형과 남부서안형 사이쯤에 위치하고 있지만 시 경계까지만 하여도 북은 아산만에서 약 42km, 서는 천수만에서 약 40km나 떨어져 있어 내륙적인 기후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지역간의 거리를 보면 대전광역시와 36.9km, 논산시와는 34.3km, 부여읍과 32.5m로서 대전시의 생활권에 포함되어 배후도시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위치라 할 수 있다. 
 
3) 관계적 위치 
 
관계적 위치는 수리적 위치나 지리적 위치보다도 한 국가나 지역의 발전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고 볼 수 있다 . 타국 또는 타 지역과의 관련된 입장에서 보아 관계적이며, 그 중요성이나, 가치적인 면에서 시대에 따라 상대적이고, 위치 자체도 가변적인 것이다. 따라서 관계적인 위치는 역사적 위치이며, 가변적 위치라고도 볼 수 있다. 공주시는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불운국이였고, 백제가 위례성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475년(문주왕1)이후 538년(성왕16) 부여로 천도하기까지 63년 동안 백제의 수도로 한나라의 중심적인 위치였었다. 백제가 멸망한 후 당나라는 웅진도독부를 두었고, 670년 신라가 차지한 후, 686년(신문왕6) 웅천주를 설치하여 13개 군 29개 현을 통괄하는 지역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757년(경덕왕16)에는 옹주로 개칭하였다가 940년(태조23) 공주로 개칭하였고, 983년(성종2)에는 전국 12복 중하나인 공주목이 되었으며 993년(성종12)에는 하남도(河南道)에 속하였고, 1341년(충혜왕2)에는 목(牧)으로 승격하여 지역 중심지가 되었다.

 

조선조 세조 때에는 공주에 진관이 설치되었으며 1581년(선조14)에 충청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되어 다시 충청도의 중심지적인 위치로 되었다. 그후 1895년(고종32) 공주군으로 개편되었고, 충청남도의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1931년 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되면서 공주는 하나의 면이 되면서 군중심지로 되었다. 그후 1938년에 공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6년에 공주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공주군과 분리되었다. 1995년에 다시 공주시·군이 통합되어 현재와 같은 위치로 되었다 
 
4) 교통적 위치 
 
공주는 과거 금강의 하운 편이 좋아서 백제의 전성기에는 중국과 교역하고 일본에 선진문화를 전파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던 위치였었다. 그러나 근세에 들어와서 금강을 이용한 내륙수로는 경부선, 호남선, 장항선의 개통과 함께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1933년에 건설된 금강대교는 공주가 철도교통 대신에 자동차교통의 중심지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주시를 중심으로 국도 23번, 32번, 36번, 39번, 40번 등 5개 노선이 남북으로 아산, 천안, 논산, 부여와 동서로는 대전, 조치원, 청양 등과 연결되어 있어 충청남도의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공주시는 호남고속철도계획과 대전-당진, 천안-논산, 공주-서천간의 고속도로 계획으로 장래 충청남도의 교통요충지로서의 그 역할은 한층 더 강화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4.문화재

 

1)갑사 삼신불 괘불탱

 

종 목 국보 제298호  

지 정 일 1997.09.22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52 갑사

시 대 조선시대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석가와 노사나불 등 삼신불이 진리를 설법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괘불이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던 대형 불교그림을 말한다.

 

이 그림은 길이 12.47m, 폭 9.48m의 크기로 전체적으로 상·중·하 3단 구도를 이루고 있다. 맨 윗부분에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상, 제자상, 금강역사상 등이 배치되어 있고, 가운데에는 비로자나불, 석가, 노사나불 등 삼신불을, 맨 아래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상, 사천왕상, 사리불 등이 묘사되어 있다.

 

가운데부분의 비로자나불은 등뒤로 광배를 가지고 있으며 둥근 얼굴에 두 어깨를 감싼 옷을 걸치고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싼 지권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큰 얼굴과 큼직한 손에 비해 몸은 다소 왜소하며 어깨에 비해 무릎 폭이 넓은 모습이다. 비로자나불의 왼쪽에 있는 노사나불은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두 손을 어깨까지 들어올려 설법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오른쪽의 석가불은 악귀를 물리친다는 뜻의 손모양인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비로자나불과 석가불은 기둥처럼 솟은 특이한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

 

맨윗부분은 붉은 색의 두광을 가진 관음·세지보살과 십방제불, 나한 등이 화려한 빛깔의 구름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천상세계를 만들고 있다. 비교적으로 단순한 구성을 보이고 있는 맨아래부분은 사천왕과 문수보살·보현보살, 사리불이 배치되어 있다. 채색은 녹색, 홍색, 황색과 같은 중간 색조와 금으로 채색하여 화면전체를 밝고 화려하게 나타내었다.

 

이 괘불은 효종 원년(1650)에 제작되었는데 중단의 삼신불을 크게 강조한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다. 또한 그림에 괘불 조성에 필요한 많은 물품의 시주자를 적어놓고 있어 17세기 중반의 생활상과 사찰의 재정규모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2)신원사 노사나불 괘불탱

 

종 목 국보 제299호

지 정 일 1997.09.22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8 신원사

시 대 조선시대

 

화엄종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대신하여 노사나불이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인 영산회상을 그린 괘불이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이다.

 

길이 11.18m, 폭 6.88m 크기의 이 괘불은 노사나불이 단독으로 중생을 설법하는 모습으로, 노사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10대보살과 10대제자, 사천왕 등이 그려져 있다. 단독으로 그려진 노사나불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으며, 손은 신체에 비해 큰 편으로 손바닥을 들어올려 설법하는 모습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녹색과 홍색, 분홍색 등을 이용하여 옷을 표현하였고, 5가지색으로 빛을 형상화하여 주변 배경을 표현하였다. 중심 불상의 좌우에는 각기 다른 물건과 두광이나 옷색의 차이 등을 이용해 10대보살들을 표현하고 있다. 보살 위의 10대제자들은 서로 다른 얼굴 방향과 표정, 각기 다른 옷과 물건, 자연스러운 동작과 모습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인조 22년(1644)에 제작된 이 괘불은 짜임새있는 구도, 섬세한 표현, 밝게 표현된 색조 등이 세련된 솜씨로 표현되어 있어 조선 후기 불화양식을 보여주는 17세기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3)반죽동 당간지주

 

종 목 보물 제15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반죽동 301

시 대 통일신라

 

기도나 법회 등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사찰의 입구에 세워 부처와 보살의 성덕을 표시하는 기를 당이라 하며, 이를 달아매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이 장대를 양옆에서 지탱하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대통사의 옛터에 남아 있는 이 당간지주는 서로 마주보는 안쪽 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으나, 바깥쪽 면은 가장자리를 따라 굵은 띠 모양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기둥머리 부분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모를 둥글게 깎았으며, 안쪽 위·아래 2곳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해 네모난 구멍을 파 놓았다.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지주의 받침돌과 한쪽 기둥의 아래부분이 많이 손상되었으나,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형태가 간결하다. 이 일대의 다른 유물들과 함께 백제의 유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받침돌에 새겨진 안상을 조각한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4)마곡사 오층석탑

 

종 목 보물 제799호  

지 정 일 1984.11.30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 마곡사

시 대 고려시대

 

마곡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으며, 구한말에는 독립운동가 김구와도 인연이 깊었던 사찰이다. 김구는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일본인 장교를 죽인 후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이 절에 숨어서 승려로 지냈는데, 지금도 대광보전 앞쪽에는 김구가 심었다는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절마당에 우뚝 서 있는 이 탑은 탑 전체의 무게를 받쳐주는 기단을 2단으로 쌓고, 그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올린 모습이다. 탑신의 몸돌에는 부처, 보살 등을 조각해 놓았고, 지붕돌은 네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보이는데, 현재는 5층 지붕돌에만 1개의 풍경이 남아 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이 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으로, 중국 원나라의 라마탑과 그 모습이 비슷하다.

 

길쭉한 감이 있어 안정감은 적으나 당당한 풍채로 버티고 서있다. 만들어진 시기는 머리장식의 독특한 모습으로 보아 원나라의 영향을 받았던 고려 후기 즈음으로 여겨진다. 즉 고려 후기 당시 원나라와의 문화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라마교 계통의 문화도 고려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 탑은 그 문화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탑 안의 보물들을 거의 도난당하였으나, 1972년 해체하여 수리하는 과정에서 동으로 만든 향로와 문고리가 발견되었다.

 

 

5)청량사지 오층석탑

 

종 목 보물 제1284호

지 정 일 1998.09.15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산18

시 대 고려시대

 

청량사터에는 칠층석탑과 오층석탑 등 2기의 석탑이 남아 있는데, 이 두 탑을 가리켜 오누이탑 혹은 남매탑이라 부르기도 한다. 옛날에 상원이라는 승려가 어려움에 처한 호랑이를 구해주자, 호랑이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처녀를 업어다 주었다. 상원은 처녀와 남매로서의 관계만을 유지하며 수도에 정진하였고, 처녀의 아버지가 그 갸륵한 뜻을 기려 두 탑을 세웠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 탑은 그 중 오층석탑으로, 1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얹은 모습이다.

 

바닥돌과 그 위에 둔 기단의 아랫돌은 각 4장의 돌로 짰다. 특이한 점은 기단의 가운데기둥을 별도의 돌로 끼워두었다는 것이다. 탑신의 각 층 지붕돌은 얇고 넓어서 균형과 안정감을 잃고 있다. 1·2층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2단인데, 모두 딴 돌을 끼워넣은 구조이다. 3·4층의 몸돌과 지붕돌은 따로 한 돌씩이며, 4층의 지붕돌받침은 아래층들과 달리 1단의 돌로 만들어져 있다. 4층 지붕돌 위에 5층 몸돌이 있으나, 지붕돌은 없어진 상태이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둥근 머리장식이 남아 있다.

 

전체적인 수법으로 보아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 비인오층석탑(보물 제224호)으로 이어지는 백제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일부 없어진 부분이 있지만 위로 올라가면서 과감하게 생략된 부분이 있고, 세부적인 조각수법이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시대에 와서 한 절에 각기 특징있는 두 가지 유형의 백제탑을 세운 것은 역사적, 미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6)청량사지 칠층석탑

 

종 목 보물 제1285호

지 정 일 1998.09.15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산18

시 대 고려시대

 

1단의 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을 세워 두었으며, 전체적으로 폭이 좁고 길쭉한 형태이다.

기단은 각 면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을 딴 돌로 세운 점이 특이하다. 탑신은1층 몸돌의 한 면에 직사각형 모양의 감실(불상을 모셔두는 방)을 새겼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1층이 2단이고 7층이 1단이며, 2·3·4층은 후대에 만든 것이라서 원래의 모습을 확인하기가 어렵다. 2층 지붕돌 낙수면의 경사가 1층 보다 급하고, 2∼7층까지 몸돌이 줄어드는 비율이 그리 크지 않아 탑 전체의 안정감과 균형을 해치고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모두 없어지고 이를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

 

전체적인 수법으로 보아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 익산왕궁리오층석탑(국보 제289호)으로 이어지는 석탑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일부 없어진 부분이 있지만, 위로 올라가면서 과감하게 생략된 부분이 있고, 세부적인 조각수법이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7)공산성

 

종 목 사적 제1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산성동 2외

시 대 삼국시대

 

공산성은 백제의 수도가 공주에 있을 때, 공주를 지키던 백제의 산성이다.

 

금강변 야산의 계곡을 둘러싼 산성으로, 원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쳤다. 쌓은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며,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공산성으로,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렀다.

 

4방에 문터가 확인되는데,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있고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있다. 암문·치성·고대·장대·수구문 등의 방어시설이 남아 있으며, 성 안에는 쌍수정·영은사·연지·임류각지, 그리고 만하루지 등이 있다. 또한 연꽃무늬 와당을 비롯하여 백제 기와·토기 등의 유물들과 고려·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백제 멸망 직후에 의자왕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으며,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지이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김헌창의 난(822)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이괄의 난(1623)으로 인조가 피난했던 곳이기도 하다.

 

백제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의 백제 도성이었으며, 이후 조선시대까지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크고 연구할 가치가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8)송산리 고분군

 

종 목 사적 제1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금성동 산5-1

시 대 백제

 

공주시 금성동에 있는 웅진 백제시대 왕들의 무덤이 모여있는 곳이다.

 

무령왕릉을 포함한 이 일대의 고분들은 모두 7기가 전해지는데, 송산을 주산으로 뻗은 구릉 중턱의 남쪽 경사면에 위치한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무령왕릉과 5 ·6호분이 있고 동북쪽에는 1∼4호분이 있다. 1∼6호분은 일제시대에 조사되어 고분의 구조와 형식이 밝혀졌고, 무령왕릉은 1971년 5 ·6호분의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

 

먼저 1∼5호분은 모두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무덤 입구에서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널방(현실)에 이르는 널길이 널방 동쪽벽에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1∼4호분은 바닥에 냇자갈을 깔아 널받침(관대)을 만들었는데, 5호분은 벽돌을 이용하였다. 이처럼 같은 양식의 무덤이면서 구조와 규모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나는 것은 시기 차이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5호분은 원형으로 남아 있으나, 1∼4호분은 조사되기 전에 이미 도굴되었다. 이외에 벽돌무덤(전축분)으로 송산리벽화고분이라고도 불리는 6호분과 무령왕릉이 있다.

 

6호분은 활모양 천장으로 된 이중 널길과 긴 네모형의 널방으로 되어 있는데, 오수전이 새겨진 벽돌로 정연하게 쌓았다. 널방 벽에는 7개의 등자리와 사신도 · 일월도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무령왕릉도 6호분과 같이 연꽃무늬 벽돌로 가로쌓기와 세로쌓기를 반복하여 벽을 쌓았다. 벽에는 5개의 등자리가 있고, 무덤주인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지석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6호분과 무령왕릉은 현재 남아있는 백제의 벽돌무덤으로, 모두 터널형 널방 앞에 짧은 터널형 널길을 가지고 있으며 긴 배수로도 갖추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벽돌무덤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벽화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무령왕릉의 경우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어, 백제사회의 사회 ·문화상을 연구하는데 절대자료로 평가된다.

 

 

9)학봉리 도요지

 

종 목 사적 제333호

지 정 일 1990.08.2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산22-1외

시 대 조선시대

 

요지란 도자기, 기와, 그릇 들을 만들어 굽던 가마터를 말한다. 유성에서 동학사쪽으로 들어가면 신도안과 동학사로 가는 길이 있는데, 그 일대 계룡산 기슭에 여러 곳의 가마터가 분포한다. 그 중 이 학봉리 도요지가 중심이 되며,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시대에 조사된 보고서에 의하면 가마는 산록의 경사면에 여러 개를 축조하였고, 구조는 땅을 약간 파 길다란 구덩이를 만들고 천장과 벽을 진흙으로 둥글게 쌓아올린 형태라고 한다. 철화분청자·귀얄청자·백자 등이 출토되었고 그 가운데 철화분청자가 대표적이다. 그릇의 종류로는 대접·접시·술병·주전자 등 다양하며, 새겨진 무늬는 국화무늬·연꽃무늬·물고기무늬·새무늬 등 다양하다.

 

철화분청자의 대표적인 생산지로서 그 의미가 크며, 자유분방하고 대담한 무늬를 새긴 것으로 유명한 가마터이다.

 

 

10)석장리 구석기유적

 

종 목 사적 제334호

지 정 일 1990.10.3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장기면 장암리 98외

시 대 석기시대

 

대전에서 공주로 가는 금강가에 있는 구석기시대의 유적이다. 구석기시대란 인류가 돌을 깨뜨려 도구로 사용하고 사냥이나 물고기잡이, 식물채집을 통해 생활한 문화단계를 말하는데, 인류가 태어나 1만년 전까지의 시기로 보고 있다.

 

찍개·긁개·주먹도끼·새기개 등의 석기류가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후기 구석기층의 집자리에서는 숯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으로 연대측정을 한 결과 약 2만 5천년에서 3만년전으 집터임이 확인되어, 당시에 사람들이 이곳에서 생활하였음을 알았고 전후 시기에도 살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꽃가루를 조사한 결과 이 일대에 소나무·전나무·목련·백합을 비롯한 다양한 식물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구석기시대의 자연환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우리나라 구석기시대에 사람이 살았음을 처음으로 알게해 준 중요한 유적이다.

  

11)우금치 전적지

 

종 목 사적 제387호  

지 정 일 1994.03.17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금학동 산78-1외

시 대 조선시대

 

우금치 고개는 1894년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을 상대로 연합군을 상대로 최후의 격전을 벌인 장소이다. 공주에서 부여로 넘어가는 견준산 기슭의 고개로 우금고개, 우금재 또는 비우금 고개라고도 부른다.

 

1894년 9월,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과 경제적 약탈을 규탄하며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재봉기를 했다. 일단 우금치를 장악하면 중부지역의 거점인 공주 점령의 기선을 잡을 수 있는 중요한 곳이었다. 공주를 중심으로 향후 전쟁을 이끌어 나가려던 동학농민군은 죽검으로 총에 맞서 싸우다 결국 거의 전멸하게 되었다.

 

우금치 싸움 후, 재기를 노리던 전봉준이 체포되어 이듬해 3월 처형됨으로써 1년 동안 전개된 동학농민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동학군의 넋을 달래기 위해 1973년에 이 고개의 동학혁명위령탑이 세워졌으며, 동학농민전쟁 100년이 지난 1994년 이르러 우금치는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동학농민전쟁은 비록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역사발전의 큰 계기가 되었다.

 

우금치는 동학농민군이 반봉건·반외세 기치를 걸고 마지막 항전을 이루어냈던 장소로, 한국 근대사의 한고비를 이루는 무대가 된 뜻깊은 장소이다.

 

 

12)수촌리 고분군

 

종 목 사적 제460호

지 정 일 2005.03.03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의당면 수촌리 201 외 일원

시 대 백제

 

공주수촌리고분군은 공주시에서 계획한 의당농공단지 조성 예정부지에 대한 지표조사 후 유적의 존재가 확인되어 해당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각종유물이 발견되었다.

 

공주수촌리고분군 일대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 초기철기시대 토광묘, 백제시대 부묘(대형토광목곽묘, 횡혈식 석실분, 수혈식 석곽묘)등이 조사되었다.

 

초기철기시대 토광묘는 세형동검과 검파두식(검자루끝장식) 등 다양한 청동제품과 점토대토기(점토띠토기), 흑고장경호 등 토기가 매장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초기철기시대 묘제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백제시대 분묘는 공주지역 백제고분의 변천과정을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일 뿐만 아니라 출토된 유물이 백제의 웅진천도 이전에 조영된 것으로 짐작되어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 금동관과 금동신발, 금제이식, 환두대도(고리자루큰칼), 중국제 흑유도기, 흑유 계수호(닭머리모양 주전자)등 위세품으로 판단되는 유물들이 함께 부장되어 있어 피장자의 신분이 당시 공주지역 유력자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이는 한성 백제시대의 중앙과 지방의 상호관련성을 보여주는 백제사의 중요한 자료이다.

 

 

13)공북루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7호

지 정 일 1976.01.08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금성동 165

시 대 조선시대

 

공산성의 북문으로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남북통로의 길이다. 조선 선조 36년(1603)에 관찰사 유근이 쌍수산성을 고쳐 세우면서, 이 자리에 있었던 망북루를 다시 지어 공북루로 고쳐 부르고, 그 옆에 월파당을 지었다고 한다. 현종 4년(1663) 관찰사 오정위가 낡은 것을 다시 지었으며 기록은 송시열이 하였다. 월파당은 효종 5년(1654)에 붕괴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앞면 5칸·옆면 2칸으로 규모가 큰 누각 건축이어서, 윗층에는 누마루를 깔았고 아랫층은 통행로로 쓰고 있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공북루’라고 쓴 현판은 성의 안쪽에 해당하는 추녀 밑에 걸려있다.

 

공북루는 송시열이 쓴 기록을 비롯해 여러 글이 걸려 있어 멋스러운 경치를 더해 주는 건물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루이다.

 

 

14)공주향교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75호

지 정 일 1978.03.3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교동 21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초기에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며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처음 지은 정확한 연대는 알지 못하나, 원래 웅진동 송산 기슭에 있던 것을 인조 원년(1623)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다고 전한다. 그 뒤 여러 차례의 보수가 있었고, 1954년 문묘·명륜당·동재·존경각 등을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그 양쪽에 동재와 존경각이 있다. 뒤쪽 한층 높은 곳에 있는 내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사당인 대성전이 있으며, 그 양쪽에 동무와 서무가 있다. 즉 교육공간은 앞쪽에, 제사공간은 뒤쪽에 구분하여 배치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급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경장(1894) 이후 교육기능은 없어지고 제사기능만 남아있다

 

 

15)선화당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2호

지 정 일 1980.12.2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32-9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충청도 관찰사가 공무를 집행하던 곳이다. 도내의 일반 행정·군사·조세 및 중요한 재판이 행해졌다. 원래 태조 4년(1395)에 충주에 설치되었으나 선조 35년(1602)에 공주로 옮겨와 충청도 전체를 관장하는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여지도서』에는 선화당을 비롯하여 50여 채의 건물과 칸수를 기록하고 있으나, 지금은 선화당과 포정사 및 삼문, 부속건물 1채만 남아있다. 지금의 선화당 건물은 순조 33년(1833)에 지은 것으로, 원래는 공주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자리에 있었으나 1932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었다.

 

앞면 8칸·옆면 4칸의 규모인데, 원래는 앞면 9칸·옆면 5칸이었던 것이 옮기면서 축소되었다. 지붕의 옆선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내부는 칸을 막지 않고 전체를 통칸으로 하여 넓은 공간을 마련하였고 2열로 기둥을 세웠다. 중앙은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주위의 퇴간은 서까래가 드러난 연등천장으로 꾸몄다. 임금의 덕을 드러내어 널리 떨치고 백성을 교화하는 건물임을 뜻하는 ‘선화당’이라는 현판을 앞면 중앙에 달았다.

 

조선 중기의 수법이 남아있는 조선 후기의 관아 건축으로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6)포정사 문루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3호 

지 정 일 1980.12.2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32-9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충청도 관찰사가 공무를 집행하던 선화당 앞에 서있던 정문이다.

 

공주는 충청도 전체를 관장하던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감영에는 50여 채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선화당과 포정사 및 삼문, 부속건물 1채 만이 남아있다. 원래는 공주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옆에 있었는데, 옛 공주군청 옆으로 옮겨지어 공주 제2감리교회 등으로 사용되어 왔다. 1993년 선화당 앞 지금의 위치에 복원하였다.

 

포정사는 앞면 5칸·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문루건물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우진각지붕집이다. 우진각 지붕은 지붕면이 4면으로 경사진 지붕을 말하며, 이 건물에서 지붕 모양 이외에는 문루 건축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찾아볼 수 없다. 1층의 양 옆은 판자벽으로 막고 가운데 3칸만 문을 만들어 출입할 수 있게 하였으며, 2층은 누마루로 난간을 돌리고 서쪽에 오르내리는 계단을 만들었다. 교회·사무실 등으로 사용되어 내부와 창틀 등이 개조되었으나, 겉모습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삼문은 솟을지붕 형태로 공포를 짜지 않은 소박한 민도리집 계통이며, 양 옆칸은 민가로 사용되고 있다. 교동에 있던 것을 1993년 선화당 앞에 복원하였다.

 

포정사 및 삼문은 다른 용도로 사용되면서 변형이 있었지만 조선 후기 관아건물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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