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에 전해내려오는 민요와 이야기

경기도에 전해내려오는 민요와 이야기

작성일 2009.12.26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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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민요)

 

1. 태평가

 

꽃을 찾는 벌나비는 향기를 쫓아 날아들고
황금같은 꾀꼬리는 버들사이로 왕래한다.

학도 뜨고 봉도떴다 강상 두루미 높이 떠서 두나래
를 훨씬 펴고 우줄우줄 춤을 춘다

개나리 진달화 만발해도 매란국죽만 못하느니
사군자 절개를 몰라주면 이보다 큰 설움 또 있으리

* 니나도 닐리리야 닐리리야 니나노 얼싸 좋아
얼씨구 좋다 벌나비는 이리저리
퍼펄펄 꽃을 찾아 날아든다.

 

2. 노랫가락

 

공자님 심으신 남게 안영증자로 물을주어 차사로
벋은 가지 맹자꽃이 피었도다
아마도 그 꽃 이름은 천주만대의 무궁한가

운종룡 풍종호라 용이 가는데 구름이 가고
범가는데 바람이 가니 금일송군 나도가요
천리에 임이별하고 추양상사로 잠못이뤄

산첩첩 천봉이로되 높고 낮음을 알건마는
창해망망 만리로되 깊고 얄음을 알건마는
사람의 조석 변이야 알길없네


3. 경복궁 타령

 

에~남문을 열고 파루를 치니 계명
산천 밝아 온다.

왜철죽 진달화 노간죽하니 / 맨드라미 봉선화가 영
산홍이로다

남산 하고 십이봉에 오작 한 쌍이 훨훨 날아 든다

우광쿵쾅 소리가 왠 소리냐 / 경복궁 짓는데 회방
아 찧는 소리라

* 에~에에헤 에야 얼럴럴 거리고 방아로다

 

(경기도의 이야기)

 

(1) 화성(華城)①

 

수원의 서호(西湖)에 옛 성터가 있다. 고구려 군사가 이 성을 지키고 있는데 적군이 공격하여 성을 에워싸고는 항복을 기다렸다. 이 때 가뭄이 들어 물이 없어서 쌍방이 어려웠는데, 하루는 고구려 군사들이 높은 산 위에 말들을 끌고 나와 하얀 물을 끼얹어 말을 씻겼다. 이를 본 적군은 성안이 물이 많아 쉽게 항복하지 않겠다 하여 철수하고 말았다. 사실은 물이 아니라 하얀 쌀이었다.

 

(2) 화성(華城)②

 

수원에 성을 쌓을 때 왕이 친히 와서 보았다. 어느 날 밤 왕의 꿈에 동자가 나타나 지금 성을 쌓는 자리는 적이 공격해 오면 쓸모가 없으니 다른 곳에 다시 쌓으라고 했다. 왕이 아침에 일어나 새 성터를 물색하다가 하얀 서리가 내린 것을 보고 그 자국을 따라 성을 쌓았는데, 그것이 지금의 화성이다.

 

(3) 이순신(李舜臣)의 힘

 

이순신이 뒤를 보고 있는데 호랑이가 달려들었다. 이순신이 호랑이 꼬리를 잡아당기자 호랑이가 도망치지 못했다. 호랑이가 아무리 힘을 내도 이순신의 나막신만 달막거렸다. 이순신은 뒤를 다 본 뒤 호랑이를 태질하여 죽였다. 다음날 이순신은 호랑이 힘을 알고 싶어 장정 50명과 줄다리기를 했더니 나막신이 달막달막했다. 뒤에 이순신은 명장이 되었다.

 

(4) 함평(咸平) 이씨(李氏)와 노루

 

수원군 봉담면 분천리에 함평 이씨가 많이 살았는데, 이 이씨의 조상이 가난하여 나무를 팔아 겨우 살았다. 어느 날 포수에게 쫓기는 노루를 구해주었더니 그 노루가 이씨에게 명당 자리를 가르쳐 주었다. 이씨는 그 부친의 묘를 썼더니 그 후 집안이 부유해지고 자손이 번성하여 문무공신이 많이 나왔다. 함평 이씨 후손들은 이 산을 노루고개라 하고 포수가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5) 메추라기와 여우

 

옛날에 배고픈 여우가 메추라기를 잡아먹으려 하는데, 메추라기는 자기를 살려주면 여우를 배부르게 해주겠노라고 하였다. 그렇게 했더니 메추라기가 광주리에 밥을 담아 이고 가는 여자 앞에 가 잡힐 듯이 팔딱팔딱 뛰었더니 여자가 광주리를 놓고 따라갔다. 그 틈에 여우는 밥을 배불리 먹었다. 이번에는 메추라기가 여우에게 우스운 꼴을 보여주겠다며 옹기장수 형제가 옹기를 잔뜩 지고 가는데, 앞에 가는 형의 옹기 짐에 앉았다. 뒤에 가던 동생이 이를 보고 잡느라고 작대기로 치다가 옹기를 깨고 말았다. 형이 화를 내며 동생이 미쳤다며 작대기로 동생의 옹기를 깼다. 메추라기와 여우는 웃었다.

 

(6) 엄청나게 큰 사람 장길손

 

옛날 장길손이란 사람은 키가 너무 커 옷 한 벌 얻어 입지 못했고 들어가 살 집이 없어 비바람을 맞으며 밖에서만 살았다. 겨울이 되어 부모가 왕에게 옷을 청하자 왕이 포목 오백필을 주어 옷을 짓게 했다. 부모는 그 이듬해 봄에 겨우 홑적삼 하나를 만들었다. 장길손은 너무 기뻐 춤을 추었는데, 그 때문에 바람이 불고 해가 가려져 그만 흉년이 들고 말았다. 백성들이 장길손에게 벌을 내리라고 청하여 왕이 잡아오라고 했는데, 길손이 그럴 것 없이 선 자리에서 엎드렸더니 머리가 대궐 마당에 닿았다. 볼기 오십대를 치라고 했는데, 볼기짝이 하도 멀어서 하인들이 가다가 지쳐 죽었다.

 

(7) 나이 어린 원님

 

옛날에 열 네 살 짜리 소년이 과거급제를 해서 고을의 원이 되어 내려가게 되었다. 가다가 쉬고 있는데 따라가던 하인들이 모여 앉아 어린애가 무슨 원님 노릇을 하느냐고 흉을 보았다. 소년은 이 말을 듣고서는 수수깡 하나를 뽑아오라고 해서 하인에게 소매에 넣어보라고 했다. 하인이 못 넣자 겨우 반년 동안 큰 것도 너희들이 소매 안에 못 집어넣으면서 열 네 해나 자란 내가 너희들의 수중에 들어가겠느냐고 하면서 하인들을 나무랐다. 하인들은 이 소년의 기상에 눌려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으며, 이 소년은 고을에 내려가서 잘 다스려서 명관이 되었다.

 

(8) 강원도(江原道) 노인(老人)이 서울 사람 속이다

 

강원도에 사는 한 노인이 나이 70이 되도록 쌀밥 구경을 못해 죽기 전에 쌀밥 한 번 먹어보려고 서울로 올라갔다. 한 집에 들어가서는 밥을 먹고 밥값으로 벌꿀집을 주니까 주인이 돈 수 천냥을 주면서 더 많이 가져오라고 했다. 그래서 실어다 주었더니 기뻐하면서 또 가져오라며 돈을 주었다. 그런데 노인은 돈은 받아 왔는데 벌꿀집이 없자 꾀를 내어서 좁쌀을 찧어 가짜 벌꿀집을 만들어다 주었다. 그리고는 이것을 다 무엇에 쓸 거냐고 물었더니 이 다음에 값이 오르면 비싼 값으로 내다 팔겠다고 했다. 과연 얼마 후에 값이 올라 서울사람이 내다 팔려고 보니 벌꿀은 없고 썩는 냄새만 났다. 그래서 속은 것을 알고는 시골로 내려가 노인에게 따지려고 하였다. 찾아올 줄을 미리 알고 있던 노인은 서울 사람을 데리고 나가 맛있는 것을 사주면서 산수구경을 시켜주었다. 저녁때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자 노인은 집에 안가고 폭포에 빠져죽겠다고 하면서 빠져 죽었다. 서울 사람은 살인누명을 뒤집어 쓸까봐 겁이 나서 서울로 그냥 돌아왔다. 노인은 잠시 뒤에 물에서 나와 다시 서울집에 가서 이 집주인이 자기 형님을 물에 빠져 죽게 했다고 하면서 소란을 피니까 이웃사람들이 몰려와 주인을 멀리 피신시켰다. 노인은 만나기만 하면 혼쭐을 내주겠다고 으름장을 놓고는 집에 내려와 편히 살았다.

 

(9) 계모(繼母)와 전실(前室) 아들

 

옛날에 아들 형제만 둔 어떤 사람이 상처를 해서 후처를 들였는데 후처는 이 아들들을 싫어했다. 그래서 산에 나무하러 보내고는 포수를 시켜 죽이려고 하였다. 포수가 불쌍히 여겨 형제에게 알려주어 멀리 도망가게 했다. 형제는 훗날에 만날 약속을 하고는 헤어졌다. 형은 길을 가다가 어느 마을의 서당 앞을 지나면서 글을 잘못 읽는 아이를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그 집 부모가 똑똑한 청년임을 알아보고는 사위로 삼았다. 동생은 가다가 어떤 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마당에 있는 말꾼들이 저 집에는 사람들이 들어가기만 하면 죽는다고 하며 못 들어가게 하였다. 동생은 궁금해서 들어가 보니 색시가 혼자 있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말하자 색시가 자기도 혼자 사는 몸이라고 하면서 같이 살자고 했다. 수년이 지나 약속기일이 다가오자 형제는 다시 만나서 아버지를 모셔다 잘 살았다.

 

(10) 억지 명점쟁이

 

옛날에 부잣집 아이인 돌이와 가난한 집 아이인 두꺼비가 살았다. 돌이는 두꺼비를 도와주려고 애를 썼는데, 하루는 집안에 은수저를 감추어놓고는 돌이에게 장소를 가르쳐주면서 자기 부모에게 점을 쳐서 찾아주게 하고는 상금을 받게 했다. 어느 날 대국(大國)에서 천자의 보물이 없어져서 찾느라고 난리가 났다고 하며 조선에 유명한 점쟁이가 없느냐고 사신이 왔다. 마침 돌이 아버지는 정승이었는데 두꺼비가 신통하다는 것을 알고는 나라에 추천을 하여 대국으로 떠나게 하였다. 두꺼비는 대국에 와서 일주일간의 말미를 얻었지만 찾을 길이 없어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드디어 약속 전날 저녁에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큰 한숨소리가 나며 말소리가 들려왔다. 자기는 몇 해 전에 전쟁터에 나갔다가 죽은 대장인데 자기 시체가 대궐 큰 기둥 밑에 있다고 하면서 파내서 장사를 잘 지내주면 보물이 있는 곳을 가르쳐주겠다고 하였다. 두꺼비가 장사를 지내 줄 테니 가르쳐달라고 하자 연못 밑에 있다고 하였다. 다음날 두꺼비는 기둥 밑에서 시체를 파내서 장사를 지내주고는 임금에게 연못에 보물이 있다고 가르쳐주었다. 임금은 기뻐서 두꺼비에게 좋은 벼슬을 주고 상금도 주었다. 두꺼비는 조선에 돌아와서 돌이랑 사이좋게 살았다.

 

(11) 불효(不孝) 아들 벼락 맞다

 

옛날 용수라는 땅에 형제와 늙은 어머니가 살았다. 형제는 노모를 닷새씩 번갈아 가며 모시기로 했다. 형이 봉양할 차례가 되었는데 형은 너무 가난해서 사흘밖에 모시지 못하고는 동생에게 사정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동생은 약속이 틀리다고 하면서 화를 냈다. 노모는 이제 갈 곳도 없고 배가 고파서 작은아들 보고 누룽지라도 달라고 하자 아들은 밥솥을 상 밑에 감추고는 밥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하늘이 별안간 캄캄해지더니 천둥이 치면서 벼락이 떨어져 작은 아들이 맞아 죽었다.

 

(12) 꽃메(뫼) 전설

 

옛날 한 동네에 아름답고 마음씨 고운 처녀가 병든 아버지를 봉양하면서 농사를 지며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처녀는 농사일이 힘들어 머슴을 두어 농사를 짓게 하고는 자기는 아버지의 병수발을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머슴이 천둥치고 비오는 날 밤에 처녀에게 흑심을 품고는 겁탈을 하였다. 처녀는 양반 집의 규수로서 수치심을 느껴 산에 올라가 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살을 하였다. 동네 사람들이 처녀가 자결한 자리에 정성스럽게 묻어주었는데 몇 해가 지나자 무덤에서는 나무 한 그루가 자라나서 때가 되면 꽃이 피고 꽃잎이 휘날리게 되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봉분처럼 생긴 그 산을 '화산(花山)'이라고도 하고 '꽃뫼'라고도 불렀다

 

(13) 교구정(交龜亭) 전설

 

용두암 앞을 막아 북지(北池)를 만든 후부터 용씨(龍氏)가 번성하게 되었다

 

(14) 옹기장수와 형평사 사원의 싸움

 

병점(餠店)은 떡전거리로서, 조선시대에 능을 재건할 때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떡장사를 하던 곳이다. 거기에는 소를 잡는 형평사(衡平社) 사원과 옹기 굽는 기술자들이 모였는데 서로 시비가 붙어서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때 옹기 굽는 기술자들이 이겼는데, 그것은 형평사는 단순히 칼로만 잘라서 파는 거고 옹기 기술자들은 인내력 있게 흙을 개어서 만드는 거라서 인내력이 강한 쪽이 이기게 된 것이다.

 

(15) 배다리[고색] 전설

 

고색은 옛날에 장지리라고 했는데, 비가 오면 흙이 너무 진해서 배다리를 건너지 못했다. 이곳은 얼마나 흙이 진한지 시집온 지 삼 년이 되어야 신발에 붙은 흙이 떨어진다고 할 정도이다. 그래서 흙이 나쁘니까 거기로 가지 말고 좋은 길로 가라, 배다리로 가지 말라고 해서 그런 지명이 생겨난 것이다.

 

(16) 서낭의 유래

 

서낭은 청동기 시대 때 마을의 경계선에다가 올라갈 적마다 돌멩이를 하나씩 쌓아올린 것인데, 일종의 석전무기(石戰武器)였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서 개발이 되고 총이 생기고 하니까 거기에 귀신이 있다고 해서 서낭이 된 것이다.

 

(17) 미투리 장수로 떼돈

 

율전동(栗田洞)에 열 여덟살 된 소년이 있었는데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 가지고 와보니 자기는 보리죽을 주고 할아버지의 후처가 데리고 온 아들은 보리밥을 주어 화가 나서 집을 나갔다. 나가서는 수원 시내로 들어와 아버지와 거래를 하던 객주집에 가서 삼백냥을 꾸어 가지고 서울에 가서 장안의 미투리를 다 사들였다. 그때는 마침 일제가 항만공사를 많이 하던 때라 노력동원에 왔던 사람들이 신발을 많이 사는 바람에 몇 배의 이익을 남길 수가 있었다. 이번에는 베가 싸서 많이 사놨는데 마침 전국에 호열자가 돌아서 죽는 사람이 많아 베가 잘 팔렸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 가지고 돌아와 꾼 돈을 갚고 아버지에게 가니 아버지가 야단을 안쳤다. 그후 소년은 보은의 대추를 왕창 사다가 장사를 해서 돈을 벌었고, 기미년에는 흉년이 들자 만주에서 좁쌀을 사와 장사를 해서 떼돈을 벌어 수원에서는 둘째가는 부자가 되었다.

 

(18) 퉁수바위

 

수원성 장안문 밖에는 연무동과 조원동이 있다. 옛날에 이 근처에 살고 있던 어느 부부가 오래도록 자식이 없자 치성을 드리기로 하고 남편은 연무동 바위에, 부인은 조원동 바위 위에 올라가 백일정성을 들이기로 했다. 그리하여 모든 금기사항을 지키고 정성을 드리는 동안에 서로 말을 하지 않고 퉁소를 불어서 무사함을 알리기로 했다. 서로 헤어져 백일기도가 시작되었고 둘은 퉁소를 불어가면서 안부를 전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인쪽 바위에서 퉁소 소리가 안 들려서 남편은 걱정이 되었으나 정성에 해가 될까봐 찾아가 보지도 못하고 계속 퉁소만 불었지만 연락은 없었다. 드디어 백일정성이 끝나고 남편이 찾아가 보니 부인은 그 동안에 병이 들어서 신음을 하다가 죽어간 것이었다. 남편은 부인을 잃고 쓸쓸히 살아가다가 그 후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연무동쪽 바위를 '할애비 퉁수바위'라고 하고, 조원동쪽 바위를 '할미 퉁수바위'라고 불렀다.

 

(19) 거문고 혈을 끊게 하다

 

조원동 갓모봉 바로 밑에는 백제왕의 사위였다는 우성위(禹城慰)라는 큰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해인가 흉년이 들어 농사가 잘 안되었다. 어느 날 스님이 와서 시주를 하라고 했으나 지독한 구두쇠인 우성위는 스님에게 물조차 주지 않았다. 스님은 가면서 마장산 줄기의 가운데를 파서 광교천에서 물을 끌어오면 가뭄을 극복할 수 있다고 가르쳐주며 떠났다. 우성위는 그 말을 옳게 여겨 물을 끌어오는 공사를 시작했으나 이곳은 광교천보다 지형이 더 높은 곳이라 공사를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흉년도 더욱 깊어져서 우성위의 가세는 날로 기울어져가 완전히 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스님이 일러준 자리는 마장산의 중간부분으로 거문고의 혈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즉 우성위는 거문고의 혈 때문에 부자로 살게 되었던 것인데 혈의 중간을 잘라 명아한 음률을 끊어 생명을 잃게 된 것이다.

 

(20) 이름난 의원

 

다른 자료에 '귀향'으로 나오기도 한다.

정광현은 세종 때 이름난 학자인 정인지의 후손으로서 상광교동에 살고 있었다. 초가을에 아랫마을에 사는 홍씨네 부인이 베를 짜다가 낮에 먹은 수수가 체해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금방 죽게 되었다. 정씨가 이를 듣고는 장정 넷을 시켜 부인을 베 이불에 싸 이리저리 굴리게 해서 낫게 해 주었다. 또 한번은 수원에 유수(留守)온 사람이 자기 아버지를 모시고 있었는데 이 아버지는 밖에 나오지 않고 집안에만 있다가 병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광교에 사는 정생원이 용하다는 얘기를 듣고는 가서 여쭙게 하니 쪽지에 처방을 적어주었는데 그것은 '귀향(歸鄕)'이었다. 그래서 그대로 했더니 병이 다 나았다.

 

(21) 벼락 과거(간촌 이생원 이야기)

 

{한국구비문학대계(경기도편)}에는 두 개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간촌 이생원과 관련된 이야기만 '벼락 과거'로 하고, 다른 이야기는 '정조와 능참봉'으로 분리했다.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은 애처롭게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화성군 태안읍 안녕리에 모시고는 자주 참배를 하러 오셨다. 어느 날 정조가 사복차림을 하고는 안녕리 근처를 지나다가, 마침 논에서 일을 하고 있던 간촌 이 생원이라는 농부를 만나게 되었다. 정조는 임금의 신분을 속인 채 아버님 산소를 가리키며 무엇이냐고 물어보니 농부는 화를 내며 뒤주대왕이신 애기능도 모르냐면서 정중하게 일러주었다. 정조는 기뻐서 농부와 더 이야기를 나누며 과거시험에서 여러 번 떨어진 농부를 위해 과거를 보게 하였다. 그래서 서울로 돌아와 갑자기 과거를 시행하게 하고는 제목도 '간촌 이생원과 어느 선비와의 대화'라고 내니 정답을 써 낸 사람은 농부밖에 없었으므로 그 농부가 장원급제를 하여 금의환향을 하게 된 것이다.

 

(22) 정삼품의 당상 소나무

 

정조가 화산능에 오갈 적에 소나무가 인덕원에서 지지대 고개가 끊어 넘어질 때까지 보였다고 해서 정조가 기특하게 여겨 정3품이라는 벼슬을 내려 대우한 소나무 이야기이다.

 

(23) 송충이를 깨물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화성으로 이장해 놓고는 자주 산소 참배를 하였다. 그리고 지지대 고개에서부터 화성 일대까지 각종 나무를 심어놓고 종자를 파종하며 20년간의 장기계획을 세워 조림사업을 하였다.

그러나 소나무에 송충이가 많아 아무리 정성을 들여 나무를 심어도 송충이가 다 갉아먹어 소용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상금을 주어 잡아들였으나 근절시킬 수가 없자 정조가 친히 산에 납시어서 나무에 있는 송충이를 하나 잡아서는 '너희 같은 미물이 정성들여 가꾼 솔잎을 갉아먹어서야 되겠느냐'고 야단을 치며 씹어먹었다. 그러자 임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무에 있던 송충이들이 다 떨어져 죽었다.

 

(24) 소나무마다 콩볶음이

 

흉년이 들면 사람들은 굶기가 어려워 소나무 껍질을 벗겨서 송기떡이나 송기죽을 쑤어 먹고, 아이들은 소나무의 속살을 벗겨서 씹어 먹기도 하고 가지를 꺾어 자치기도 하였기 때문에 나무가 구부러지게 되고 꼿꼿이 자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정조대왕은 이런 짓을 막기 위하여 콩을 볶아서 소나무에다 매달아 놓고는 콩을 따서 먹고 소나무를 꺾지 못하게 하였다.

 

(25) 행행(行幸) 길가 가옥구조가 바뀜

 

경기지방은 가옥구조가 안채는 기억자로서 남향이고, 행랑채는 안채와 조화를 이루어 니은자로 지으면서 바깥마당에는 사랑방과 툇마루를 두어 걸터앉아 쉬기도 하고 바깥손님이 드나드는 마루로 쓰이게 하였다.

그런데 정조대왕이 화산에 아버지의 능을 쓰고부터는 능참배를 너무 자주 하여 백성들이 예전처럼 마음놓고 툇마루에 걸터앉아 편히 쉬지를 못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임금이 행차를 하게 되면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길가에 사는 사람들은 아주 집의 구조를 바꾸어 툇마루를 없애고 임금이 지나가도 안보이게 들창문을 만들어서 살게 되었다.

 

(26) 여개 우물의 유래

 

남양군 서면 돌안말 안씨 집성촌에 안문경이라는 사람이 부모를 모시고 자식과 여러 형제를 거느리며 단란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병자호란이 일어나 동네사람들이 모두 가까운 섬으로 피난을 가게 되자 안문경도 가족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나섰다. 그때 건너마을에 사는 이서방이 와서 자기는 병든 노모 때문에 갈 수 없으니 자기 두 딸을 함께 데리고 가 달라고 하였으나, 안문경은 자기 가족도 많은데다 남의 과년한 딸들을 데리고 갈 수가 없어서 거절을 하고는 대부도로 떠났다.

그런데 마산포에 당도하니 배는 한 척도 없고 뒤에서는 오랑캐 군대가 쫓아오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기도를 했더니 갑자기 황새 한 마리가 나타나 해변가를 걸어가 가족이 모두 좇아서 바다를 건너갈 수 있게 되었다. 오랑캐 무리들도 안문경 가족이 건너는 것을 보고는 얕은 줄 알고 따라 건너다가 모두 죽게 되었고 가족은 난리가 끝난 후에 무사히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와보니 이서방네 두 딸들은 난리에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결하겠다며 돌안말 동네 앞에 있는 우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 우물은 본래 샘이 잘 솟고 물맛이 좋아 소문난 곳이었는데 이후에 우물의 위치를 위쪽으로 옮겨서 다시 팠으며 이름을 '예계우물(女界 또는 女二井)'로 불렀다.

 

(27) 수원 사람 빨가벗고 삼십리 뛴다

 

옛날 수원도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양반자손의 젊은이가 있었다. 이 선비는 평소에 조상의 산소에 치산을 잘하고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했던 선비여서 칭찬을 많이 받았는데, 어느 날 술집에 갔다가 술을 먹고는 취해서 그냥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 후 눈을 떠보니 바로 그 날이 선친의 제사날이었음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놀래 가지고 닭이 울기 전에 집에 도달할 생각에 옷도 제대로 갖추어 입지 않고 밤새 30리를 뛰어서 겨우 자정이 되기 전에 집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제사는 무사히 지낼 수가 있었으나 양반이 두루마기도 안입고 행장도 갖추지 않은 채 뛰어왔기 때문에 발가벗고 30리를 뛴 셈이 되고 말았다. 이후로 이 소문이 퍼져 수원 사람은 빨가벗고 삼십리를 뛴다는 말이 나게 된 것이다.

 

(28) 팔 부자집 거리

 

도시에 성만 쌓아놓으니까 황량해서 성안에 사람이 들어가 살게 했는데 900호 정도가 살게 되었다. 그래서 번성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 전국 팔도에서 돈있는 사람을 선출해 가지고 그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을 지어주어서 살게 하면서 무이자로 돈을 꾸어주고 돈도 월부로 받게 해서 이후로는 성안에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29) 볼기 한 대로 사형 집행

 

용주사는 원래 우리나라 불교 31본산 중에 하나로 신라 문성왕 16년(854)에 창건한 갈양사터에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모시면서 명복을 빌기 위하여 지은 사찰이다. 정조의 행차가 잦아짐에 따라 용주사 승려들의 권세도 당당해져 오만방자하게 되었다. 어느 날 저녁에 용주사 돌중 세 명이 술에 취해 샘터에 있던 아낙네들을 희롱하며 행패를 부리다가 결국은 여염집 여자를 겁탈하고 남편을 죽이자 여자도 따라 자결을 한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에 승려들은 벌을 안 받고 풀려나게 되었다. 그후 세월이 흘러 조심태라는 새로운 부사가 부임을 했는데 용주사 돌중들의 행패는 여전하여 또 부녀자를 희롱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수원부사는 돌중을 잡아넣고는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으나 임금은 곤장 한 대만 치게 하였다. 이에 부사는 묘안을 짜내서 곤장 한 대로 끝장을 보리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형벌을 집행하는 날이 되자 온 마을 사람들이 구경을 왔다. 돌중은 한 대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태연하였는데 사령이 곤장을 칠듯 칠듯하면서 약을 올렸다. 그래서 중은 온몸에 힘을 주다가는 다시 풀고 주다가는 다시 풀기를 수 차례 하다가 결국은 힘을 주지 않고 방심하고 있을 때 사령이 볼기 한 대를 내리쳤다. 그러나 그것은 항문 바로 위에서 치켜올리며 때린 것이라 항문에 바람이 들어가 중은 실실거리며 웃다가 결국은 죽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이후로 용주사 돌중들의 행패가 사라지게 되었다.

 

(30) '고만'이가 닥쳐 온 팔자

 

한 머슴이 십 여년 일을 해서 돈을 모아 가지고 장사를 해보려고 옹기를 사서 지게에 담아 시장에 한가운데 버텨놨다. 그런데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서 옹기가 다 깨져버려 자기는 운이 나빠 '고만'이라는 액운이 있는가 보다 하고는 관가에 가서 원님에게 하소연을 하였다. 그러자 원님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뱃사공을 불러놓고는 무어라고 기도를 하느냐고 묻자 사공은 동풍만 불게 해 달랜다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사공을 불러 똑같이 물어보니 자기는 서풍만 불게 해달란다고 하자, 원님은 두 사공에게 너희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회오리바람이 불어서 옹기가 넘어져 깨지게 된 것이라고 하면서 옹기 값을 물어주게 하였다.

 

(31) 후산(後産)에 좋다는 초립

 

과천 나무꾼이 나무를 지고 서울로 다니면서 장사를 하는데 하도 인색해서 다른 나무꾼들이 그 노인을 놀려주려고 꾀를 냈다. 그래서 나라의 국모가 지금 초립(지게 꼭대기에 씌워 가지고 다니는 것)이 없어서 후산을 못해 국상이 날 지경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노인은 돈을 벌 욕심에 마침 지나가는 나무꾼이 가진 초립을 비싼 값을 주고 사서, 대궐에 가서 주려고 하였다가 망신만 당하였다.

 

(32) 곡성(哭聲) 듣지 않은 상복

 

부모가 돌아가 남편이 시묘를 삼년 동안 하고 집에 와보니 부인이 아기를 낳았다. 남편은 어이가 없어 부인을 꾸짖으며 어째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하니까 부인은 분명 남편이 밤에 왔다가서 낳게 된 것이라고 하며 억울하다고 자살을 하였다. 그리고는 마을에 원님이 새로 부임할 때마다 귀신이 되어 나타나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원님들은 모두 놀래서 죽고 말아 그 동네는 황폐해지게 되었다. 결국 한 용감한 사람이 자청을 해서 원님으로 부임을 해와 사연을 들어보고는 해결해 주겠다고 하였다. 다음날부터 원님은 병이 들어 눕게 되어서 사방으로 약을 구하러 다니게 되었다. 원님은 자기 병은 곡소리를 안들은 상복을 삶아 먹어야 낫는다고 하며 그것을 구해오게 하였다. 그러자 거짓으로 상복을 입고 들어가 남편 행세를 하며 부인을 겁탈했던 범인이 자기가 입었던 상복을 가져다주면 상금을 줄줄 알고 가져갔다가 잡혀서 부인의 억울함이 풀려지게 되었다.

 

(33) 대황교(大皇橋)라는 이름

 

대황교는 정조 대왕이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러 다닐 때 건너던 다리로서 '임금이 건너다니는 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당시 중국에서는 우리가 그런 이름을 쓰자 자기네의 속국이 감히 황제라는 말을 쓴다고 하며 혼을 내주려는 목적으로 우리나라의 사신을 중국에 오게 하였다. 사신들은 거의 한 달이나 걸려서 중국에 도착했는데 가보니 마침 중국 임금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래서 사신들은 먼저 상복으로 갈아입고 문상을 하니 중국인들이 깜짝 놀라며 한달 전에 떠난 사람들이 어찌 한달 후의 일을 알았냐고 하니까 사신들이 떠나기 전에 천기를 보고 왔다고 하였다. 그래서 중국은 조선이 선견지명이 있는 나라라고 생각을 하고는 사신을 융숭하게 대접해 보냈으며 대황교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거론도 하지 않았다.

 

(34) 정묘조와 윤행임의 이야기

 

정묘조의 농신(弄臣) 윤행임은 아주 가까운 측근으로서 응수접대를 잘하였다. 하루는 어전에 들어오다가 조복자락이 치이자 '소꾀리'하니까, '우리까지 좋습니다'라며 소가 들어가는 '우리간'으로 대답을 하였다. 하루는 '拔劍絶而啖之 天下謂之無味'라고 지어가지고 조회를 들어가는데, 들어오는걸 실어다 연못에 빠뜨리게 하였다. 잠시후에 젖은 몸으로 조회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어디에 갔다왔냐고 왕이 물으니, 수궁에 가서 굴원이를 만났다고 했다. 그래서 굴원이가 뭐라고 했느냐고 물으니까 '吾逢暗君 投江而死(나는 어두운 임금을 만나서 물에 빠져 죽었다) 爾逢明君 何而投江(너는 명군을 만나서 어찌 강에 빠졌는고)'라고 했다면서 또 임금을 골탕을 먹였다.

 

(35) 중국 사신과의 문장 겨루기①

 

중국에서 유명한 문장가가 사신으로 오게 되자 조정에서는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중간에서 돌려보내기로 하고 유능한 문장가를 선발해 뱃사공으로 변장을 시켜서 내보냈다. 드디어 사신이 와서 배를 탔는데 애꾸눈인 사공을 보고는 '鳥琢沙工目(새가 사공의 눈을 쪼아먹었네)'이라고 하여 사공이 '風吹上使鼻(바람은 상사의 코를 건들이네)'라고 대답을 했다. 그래서 '鶯失一枝春(한가지에 봄을 잃었네)'하니까, '馬得千里鞭(말은 천리의 채찍을 얻었네)'라고 하였다. 또 '飛上下飛上下 飛飛上上下下(날아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은)는 花間探香之蝶(꽃 사이에서 향기를 맡고 있는 나비이네)'이라 하여, '潛浮沈潛浮沈 潛潛浮浮沈沈(잠겼다 떴다 잠겼다 떴다 하는 것)은 水上窺魚之鷗(물위에서 고기를 엿보는 갈매기라네)'라고 응수하였다. 그러자 사신이 놀라면서 사공이 어떻게 이런 글을 지을 줄 아냐고 하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자 사신이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하면서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36) 중국 사신과의 문장 겨루기②

 

사신이 와서 대꾸할 사람이 없어 고민을 하자 압록강에 사는 글자를 조금 밖에 모르는 무식한 뱃사공이 자기가 하겠다고 하였다. 드디어 사신이 와서는 애꾸눈인 사공을 보고는 '烏琢丁長目(까마귀가 사공의 긴 눈을 쪼았네)'이라고 하니까, 입이 삐뚤어진 사신을 보고 사공이 '風吹使臣口(바람이 사신의 입을 불어날렸네)'라고 하였다. '하늘은 둥근가'라고 하니까, 어제 떡을 먹은 사공은 둥근 떡을 먹었느냐고 묻는 줄 알고 네모진 떡을 먹었노라고 하며 '땅은 모난다'라 했다. 사신이 손가락 세개를 벌리며 '삼강(三綱)'을 아느냐고 하니까, 사공은 떡을 세 개 먹었느냐고 물어보는 줄 알고 다섯개를 벌리니, 사신은 '오륜(五倫)'을 안다고 하는줄 알았다. 사신이 또 수염을 쓰다듬으며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를 아느냐?'고 물으니, 사공은 '맛이 있더냐'고 묻는줄 알고는 배를 퉁기자 복희씨(伏羲氏)까지 안다고 하는 줄 알고 사신은 겁을 집어 먹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37) 바보 사위의 글짓기

 

다른 자료에는 '큰 사위 작은 사위'로 나온다.

일자무식인 사위가 정초에 처갓집에 갔다와서는 글자깨나 안다고 꺼덕거리는 동서와 장모가 꼴보기 싫어 다시는 안간다고 하자 부인이 절에 들어가서 삼년동안 공부를 하고 오라고 했다. 큰사위는 드디어 삼년동안 공부를 하고 와서 처갓집에 가 동서와 장모와 함께 글자놀이를 하게 되었다. 장모가 먼저 '고(故)'라는 운자를 내자, 동서가 '山高多石故(산이 높은 것은 돌이 많은 연고라)'하니 큰사위가 웃었다. 장모가 한번 지어보라고 하자 '天高多石故(하늘이 높은 것도 돌이 많은 연고냐?)'라고 하니까, '松之靑也中堅故(소나무가 푸른 것은 가운데가 굳은 연고이다)'라고 하자, '竹之靑也中堅故(대나무가 푸른 것도 가운데가 굳은 거냐?)'라고 하였다.

다음에 '鶴之長鳴長項故(학이 길게 뻗은 것은 모가지가 긴 연고다)'라고 하자 '蟬之長鳴長項故(매미가 길게 우는 것도 모가지가 긴 연고냐?)'라고 하니, '路柳不長閱人故(길가의 버드나무가 자라지 않는 것은 사람에게 시달린 연고다)'라고 하며 비꼬았다. 그러자 큰사위가 '丈母不長閱人故(장모가 자라지 못한 게 열인한 까닭이냐?)'하면서 키가 작은 장모를 비꼬자, 이렇게 나가다가는 집안 망신 다하겠다고 하면서 모두 자리를 떴다.

 

(38) 대감혜급웅사족(大監惠給熊四足)

 

평양감사가 도임을 해서 보니 부용이라는 제일 예쁜 기생이 원님한테 수청을 들고 있었다. 감사는 기생이 좋다는 말은 못하고 핑계를 대서 같이 사냥을 나가자고 하였다. 나가서는 글짓기 내기를 하였는데 감사가 먼저 '南山雪積熊走走(남산에 눈이 쌓였으니 곰이 뛰고 뛰네)'라고 하니, 기생이 '北天人歸犬吠吠(북천에 사람이 돌아오니 개가 짖네)'라고 하였다. 그런데 감사가 기생에게 홀려 깜박 하고는 '웅(熊)'에서 점 4개를 빼먹고 '능(能)'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기생도 '견(犬)'이라고 안하고 '대(大)'라고 하자, 감사가 자기 잘못은 생각도 안하고 기생을 꾸짖었다.

그러자 기생이 '大監惠給熊四足(대감이 은혜롭게 곰의 발 넷을 주셔서) 하여 少妾可惜犬一耳(소첩이 가히 애석하게도 개의 귀 하나를 빼먹었네)'라고 하였다. 그래서 감사가 '身空獨依門(몸이 비어서 이렇게 홀로 문에 기대고 서 있으니) 하여 魂追行人去(혼은 사람을 따라갔네)'라고 하였다. 그러자 기생이 또 '駑遲疑我重(노새가 더디게 가는 건 내 몸이 무거워서인가)이런가 했더니 添載一人魂(한 사람의 혼을 더 실어서 더디게 가는구나)'이라고 하였다.

 

(39) 박문수이야기(풍수장이의 조언)

 

박문수가 삼남지방을 시찰하다가 어느 지방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모여 앉아 저기 기와집에 사는 사람은 나가기만 하면 몇 천냥씩 가져온다고 하며 신기하다고 하였다. 박문수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그날 밤에 그 집에 가서 하룻밤을 묵기로 하였다. 다음날 주인이 집을 나서자 박문수도 같이 따라가 보니 산에 올라가 마침 장사를 지내던 무덤 옆을 지나면서 묘자리가 잘못 되었다고 가르쳐 주고는 다시 잡아주어 대접을 잘 받고 돈을 받아 가지고 돌아오게 되었다. 박문수는 이제서야 그 까닭을 알고는 떠나려고 하니 주인은 벌써 박문수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고 하면서 먼 훗날 꼭 써먹을 데가 있을 거라고 하면서 '靑鶴山下桂月枕 背年半月怨無死'라는 시구를 써주면서 고름에 매달아 밤낮으로 들여다보라고 하였다.

후에 기생과 동침을 하다가는 이 시구의 뜻을 해석해 내고는 기생이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래서 기생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자기가 여덟살 적에 박문수가 자기 아버지를 죽여서 원수를 갚으려고 일부러 기생이 되었는데 지금 실패해서 안타깝다고 하면서 울었다. 박문수는 기생의 효도하는 마음을 깊이 사서 용서를 해주고는 기적에서 빼주어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해 주었다.

 

(40) 구운 게도 다리를 떼고 먹어라

 

어떤 형제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시묘를 살았는데 내일이면 대상이 끝나 산을 내려가게 되었다. 그런데 형이 고기가 먹고 싶어 지나가던 장사꾼에게 남은 양식을 다 주고는 게와 바꾸었다. 드디어 게를 구워먹으려고 하는데 동생이 혹시 사람이 올지 모르니까 저 도랑에 걸쳐놓은 다리를 떼어내고 게를 먹자고 하였다. 그러나 형이 괜찮다고 하면서 그냥 게를 구워먹고 있는데 마침 다리를 건너 심방을 왔던 친구에게 게를 먹는 것을 들켜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동생이 형한테 "형님은 저 다리나 떼구 먹지 그냥 먹어서 들켰다"고 하면서 냇가의 다리를 안 떼고 먹은 것을 후회했다.

 

(41) 딸 주기가 아까와…

 

어떤 사람이 딸을 두었는데 용모며 성격이 모두 참하여서 이웃 사람이 딸을 참 잘 두었다고 하며 칭찬을 하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남 주기가 아까워'라고 말을 하였다. 이 얘기는 남주기 아까워서 자기가 데리고 산다는 뜻이 되고 말았다.

 

(42) 아저씨 개소리 좀 그만 하슈

 

자기 삼촌이 개장사를 하는데 저녁마다 개를 팔은 얘기만 하자 듣고 있던 조카가 지겨워서 "아저씨 거 개소리좀 그만 하시오"라고 하였다.

 

(43) 고까짓거! 더 큰 개도 업어 건너는데

 

아버지하고 장에 갔다오다가 개울 앞에 이르게 되었다. 아들이 바지를 걷어부치고 아버지를 업어 넘게 하자,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이 아들을 기특하게 여겨 장하다고 칭찬하였다. 그러자 아들이 갯바닥 개를 의미하여 대답하기를 "아 그까짓 개를요. 더 큰 개도 업어 건너는데"라고 대답을 하여 졸지에 아버지는 개가 되었다.

 

(44) 살인 누명을 벗는 이야기

 

선산에 사는 가난한 농부가 소 한 마리를 가지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해 소가 병이 들어 농부는 소를 장에다 내다 팔았는데 너무 병이 들어서 20원 밖에 못 받았다. 날이 저물어서 가까운 길로 가다가 풀숲에서 소변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족제비 한 마리가 다리 밑으로 지나가면서 돈주머니를 채가고 말았다. 농부가 막 쫓아가 보니 어느 무덤의 구멍 파진 곳으로 들어가 버려 할 수 없이 빈손으로 오게 되었다. 그런데 주머니에서 동전소리가 나서 열어보니 엽전이 있어 술이나 한 잔 사먹고 가려고 주막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술을 먹기 전에 국을 먹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개가 또 다리 밑으로 지나가면서 국을 엎질렀다. 그래서 너무 화가 나서 그릇을 던졌는데 그게 주모의 이마에 맞아 죽고 말았다. 잠시 후 마을 사람들이 와서 농부를 때리고는 경찰서로 끌고 갔다. 가서는 처음의 구멍난 묘자리 얘기서부터 자초지종을 얘기하자 한 경찰관이 농부에게 마을 사람 중에서 가장 심하게 때린 사람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경찰관은 그 사람이 주모의 부탁을 받고는 남편을 죽인 범인 이라는 자백을 받아내고는, 묘를 뒤져서 농부의 20원을 다시 찾아내어 주고는 돌려보냈다.

 

(45) 수원 축성비 조달을 위해

 

화성을 쌓을 때 돈을 조달하기 위해 성을 쌓는 앞에다 술집을 차려놓고는 당시에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기술자들이 여기에서 술을 마시게 함으로써 그 술값으로 축성비에 보태 쓰게 하였다.

 

(46) 어린이에 진 어른

 

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개울 옆을 지나게 되었는데 아이에게 물이 얼마만큼 깊으냐고 물으니 아이가 '목물'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건너보니 정강이밖에 안찼다. 그래서 왜 거짓말을 했냐고 물으니, 발목은 목이 아니냐고 하여 어른이 말싸움에 졌다. 그후로도 계속 어른이 아이에게 지다가 나중에는 그 아이 집의 소를 훔치려고 아이의 집을 물어보아서 같이 갔다. 그러나 집에 가서도 아이는 재치있게 행동을 하여 결국 이 소도둑은 잡히게 되었다.

 

(47) 사발자루

 

젊은 과부집에 머슴이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 머슴은 주인 여자에게 수작을 하려고 물을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물을 주는 여자의 손목을 쥐어 잡자 여자가 왜 그러냐고 물었다. 머슴은 사발자루인줄 알았다고 하면서 수작을 걸었다는 얘기다.

 

(48) 배 위로 물이 세 길

 

옛날 강태공 시절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노총각이 있었다. 이 총각은 당시에 벌채가 금지되어 있었는데 어머니를 위해 나무를 하러 갔다가 붙잡혔다. 그래서 사실대로 얘기를 했더니 효성에 감동이 되어 며칠간 말미를 주며 집에 가서 노모를 보고는 다시 관아로 돌아오라고 하였다. 총각은 집에 와서 강태공에게 의논을 하니 다시 살아날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아무 날에 모래사장에 누워서 석자나 되는 대통에 물을 넣고는 들고 있으라고 하였다. 그때 관에서는 총각이 안와서 점쟁이를 불러 점을 쳤는데 점괘가 물에 빠진 것으로 나와 관에서는 더 이상 총각을 찾지 않게 되었고 총각은 노모를 모시며 잘 살아가게 되었다.

 

(49) 당태종의 구인여행

 

당태종이 나라를 건국하기 전에 인재를 찾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어느 날 가다가 금방 신부가 죽을 자리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을 보고는 말리면서 누가 시켰는지를 알아보니 윗마을에 사는 유노인이라고 하였다. 또 가다보니 장사를 지내고 있는데 주마혈을 잡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거기가 나쁜 자리임을 가르쳐 주고는 누가 잡아주었나 알아보니 또 유노인이었다. 그래서 당태종이 노인을 찾아가 만나보니 노인은 벌써 당태종이 찾아올 것을 미리 알고는 일을 꾸몄던 것이다. 그래서 당태종은 이 노인이 비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는 데려다가 같이 건국을 해서 일등공신을 만들었다.

 

(50) 사돈끼리 소 개비하러 갔다가

 

가평과 포천군에는 사람들이 소를 타고 와서 소를 파는 풍속이 있었다. 어느 날 서로 사돈을 맺은 가평사람과 포천사람이 암소를 타고 팔러 나갔다가 장에서 만나게 되었다. 둘은 술집에 가서 술을 먹다가 취해 가지고 소는 팔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서로 소를 바꿔 타고 가게 되어 각각 사돈집에서 자게 되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보니 실수한 것을 알고는 속옷바람으로 집으로 도망가다가 중간에서 사돈끼리 만나게 되어서 서로 소문을 내지 않기로 하고 헤어졌다.

 

(51) 사돈집에 가 바지 벗고 자다가

 

결혼을 하고 나서 신랑아버지랑 사위가 후행을 왔다가 날이 저물어 사돈집에서 자게 되었다. 그런데 신랑아버지가 술이 많이 취해서는 자다가 한밤중에 소변을 보러 나왔다가는 집이 일자구조라서 어느 방인지를 몰라 아무 방이나 들어가서 잠을 자게 되었다. 그런데 이 노인은 잠을 잘 때는 바지를 벗고 자는 습관이 있어서 다 벗어버리고 자게 되었다. 새벽이 되어서 사돈마님이 일어나 보니 누가 엉덩이 짝을 까고는 잠을 자고 있는데 며느리랑 둘이서 어제 일을 하던 동네아줌마인줄 알았다. 그래서 불을 밝혀 보다가 불똥이 떨어져 일어나게 됐는데 보니까 사돈 영감이었다. 사돈은 주위에 부인들만 있는 것을 보고는 놀래 가지고 산으로 도망가니 사돈 마님이 바지를 들고 사돈을 부르며 쫓아갔다. 그러나 사돈영감은 자기를 때리려고 오는 줄 알고 계속 도망만 쳤다.

 

(52) 생거진천 사거용인

 

용인에 사는 어떤 여자가 아들 형제를 낳고 사는데 남편이 일찍 죽었다. 젊은 여자는 개가를 해서 진천으로 시집을 가서 또 자식 여럿을 낳고 살았다. 나중에 세월이 흘러서 용인 아들이 자기 어머니를 모셔다가 효도를 하며 살고 싶다고 하였으나 진천쪽의 아들들이 놓아주지를 않아 결국은 재판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재판의 결과는 결국 살 때는 그냥 진천에서 살고, 남편하고 돌아간 뒤에는 용인 쪽의 아들이 모시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53) 밑구녁 좀 다오

 

시아버지가 아들 사는 집에 오게 되었는데 마침 아들은 없고 며느리만 배추를 닦고 있었다. 시아버지는 배추가 먹고 싶어 배추소리는 빼고 "밑구녁좀 다오" 하니까, 며느리가 "아버님은 씹두 못하면서 밑구녁을 달라고 해요" 하였다. 나중에 시아버지가 돌아간다고 하자 며느리가 배웅을 하게 되었는데 마침 오른쪽 허벅지를 긁으면서 한다는 말이 "아버님은 요기두 못하고 가시면서…"라고 하였다.

 

(54) 게으른 며느리

 

아주 게으른 며느리가 있었는데 결국은 쫓겨나게 되었다. 그러자 동네사람들이 쫓겨난 이유에 대하여 수군대며 말하기를, 그 집안이 인색해서 그 며느리가 고기장수가 왔을 때 고기를 주물럭거리다가 그 손을 국속에다 넣어 가지고 씻어서 먹다가 쫓겨났다고 하였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사람이 한마디하기를 "아니 손이 그렇게 협해서 어떻게 해. 그 손을 갖다가 우물에다 뿌려야 동네 사람들이 다 먹지"라고 하였다.

 

(55) 효부의 대(代) 잇는 슬기

 

홀시아버지와 과부며느리가 한집에 살고 있었는데 며느리는 시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봉양을 하였다. 하루는 며느리가 시아버지 자고 있는 방에 들어가서는 정력을 시험해 보았다. 그리고는 친정 간다고 나가서는 마침 가난한 집의 어머니와 딸을 거리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딸을 길러주겠다고 데리고 와서는 자기 시아버지와 결혼을 시켜서 아들을 낳게 하여 집안의 대를 잇게 하였다.

 

(56) 세마대

 

왜군이 쳐들어와 권율 장군과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왜군은 삼천병마골 뒤에 숨어서 금방이라도 쳐들어올 듯이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면서 성안의 물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권율 장군은 적군의 이런 동정을 살피고는 군량미를 모두 꺼내어서 으스름 달밤에 전부 말에 뿌리게 하였다. 왜군은 이것을 보고는 성안에서는 물이 없어서 금방 죽는다고 했는데 물로다 말을 씻는 것을 보고는 겁을 집어먹고 도망을 쳐서 권율 장군이 왜군을 크게 무찌를 수가 있었다.

 

(57) 지지대

 

정조는 부친을 화산에 모셔놓고 자주 참배를 하셨는데, 끝나고는 바로 환궁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수원을 떠나 환궁하실 때는 북쪽에 있는 고개를 넘어가며 이 고개를 넘으면 한동안은 다시 부모를 볼 수 없음을 한탄하였다. 그래서 얼마쯤 가다가는 걸음을 멈추고 화산을 바라보고 다시 또 조금 가다가는 멈추고 하여 행차가 너무나 지지하여 그때부터 그 고개를 '지지대'라고 불러왔다

 

(58) 김홍집과 민요

 

김홍집은 고종 26년(1889)에 수원유수로 부임을 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세도정치가 날로 심해, 김씨네의 권세가 치솟는 반면 왕권은 쇠약해져 기강이 문란해지고 지방에서는 탐관오리들의 횡포가 심각하여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그 당시에 수원에서도 소위 '칼회'라는 집단이 있어서 일시에 봉기를 하여 당시 팔달문 밖 '인도레'라는 동네에 집단으로 살고 있던 김씨들을 습격하였다.

이 난동은 곧 일시적인 행동에 그치고는 즉시 해산이 되었는데 나라에서는 관군 300명을 파견하여 즉시 진압시키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김홍집은 이미 소요가 끝난 뒤고 또 군대가 수원에 오면 큰 소동이 일어날 것이 걱정이 되어 서둘러 한양으로 올라가서는 마침 한강에서 건널 준비를 하고 있던 군대를 만나게 되었다. 김홍집은 행군을 멈추게 하고는 조정에 들어가서 임금에게 군대를 거두어줄 것을 간곡히 간청하여 허락을 받아내게 되었다. 그 후 수원의 민요사건은 김홍집 유수가 긴급히 수습한 덕에 조용히 가라앉게 되었다.

 

(59) 정조와 능참봉

 

정조가 어느 날 화산릉을 참배하고 환궁하기 위하여 화성에 도착했을 때 마침 비가 오기 시작하여 가지 못하고 성내에 있는 행궁에 머물게 되었다. 비가 밤새도록 오자 정조는 땅속에 누워 계시는 아버지를 생각하고는 즉시 가서 묘를 살펴보게 하였다. 그리고는 능참봉이 만약에 불이라도 켜놓고 있으면 괜찮지만 편안히 자고 있으면 압송을 해오라고 시켰다.

군졸들이 가보니 능참봉이 정장을 하고는 퍼붓는 빗속에서 묘에 엎드려 있었다. 돌아와서 사실대로 전하니 정조가 기뻐하여 관복을 다시 내리고 상금과 벼슬을 주었다. 원래 능참봉이 이렇게 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어느 날 능참봉이 지나가던 초라한 사람을 잘 대접하여 주었는데 그 사람이 떠나면서 아무날 아무시만 잘 넘기면 된다고 일러주었다. 그런데 마침 그날에 임금이 행차를 하고 갔는데 비가 많이 와서 환궁을 못할 것을 미리 알고는 이렇게 처신함으로써 오히려 위기를 넘기고 복이 되게 하였다.

 

(60) 채정승과 목화

 

채제공은 조선 정조 때의 명상이며 뛰어난 학자였다. 정조는 많은 책을 읽어 해박하였는데 어느 날 불경을 읽다가 화도화(花桃花)라는 기묘한 구절을 보고는 이것이 목화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것을 알만한 사람이 많지 않아 과거시제로 낼까 하다가 채제공이 알고 있을 것 같아 그냥 덮어두었다. 그 후 채제공이 죽고 정조는 이것을 시제로 내었는데 마침 딱 한 사람만이 뜻을 바로 알고 썼다. 그래서 불러다가 물어보았더니 이 선비가 간밤에 채제공의 무덤 근처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꿈속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가르쳐주었다고 하여 임금은 채제공은 죽어서도 당할 수가 없는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61) 팔달산의 유래

 

이고는 고려말의 학사로서 공민왕 때에 나라가 점차 쇠망해질 것을 미리 알고는 은퇴하여 수원에서 살게 되었다. 이고가 사는 뒷산을 탑산이라고 불렀는데 공민왕이 당시에 사자를 보내어 무엇으로 소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으니까, 집 뒤에 작은 산이 하나 있는데 사방 막힌 데가 없이 사통팔달하여 아름답기가 그지없어 이곳에 살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하였다. 그후 조선 태조가 등극을 해서는 이고에게 나와서 벼슬을 하라고 여러 차례 권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자 화공을 시켜 산의 모습을 그려오게 하였다. 그림을 본 태조가 역시 아름답다고 하며 칭찬을 하고는 그 산을 팔달산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600여 년 동안 그렇게 불려져 내려오고 있다.

 

(62) 수원 깍쟁이

 

이 자료는 새로이 채록한 것이다. 제보자는 이일규(70세, 팔탄면 출생, 전 향남면장), 박춘옥(73세, 원래 피난민, 수원에 50년 거주)이다.

 

질: 양반 삼십리 뛴거. 그거 얘기 좀 해 주세요.

이: 수원 깍쟁이?

박: 수원 깍쟁이는 딴게 아니고 개성사람이랑 편지왕래를 서로 하는데 내중에 가보니까 수원 사람들은 뭔가 저 개성사람하고 편지왕래를 하는데 개성에 가니까 어쨌든 개성사람이 수원에 오니까 저 편지오는 걸 전부 물을 발랐드래. 그래서 수원사람 깍쟁이라고.

이: 그거는 지금 얘기한 거를 지금 내가 복원한다면 수원 깍쟁이가 왜 수원깍쟁이냐 하면 6·25사변 때 나온 얘기인데 개성 깍쟁이들은 고리대금업자들이거든. 함경도는 물장사고 개성 깍쟁이들은 고리대금업자라서 돈을 많이 벌고 하는데 6·25 때 피난을 딱 갔는데 노숙을 하다가 추우니까 전부 피난간 빈집에 들어가 자게 됐단 말이야. 개성 사람하고 경기도 사람하고 그 중에 수원사람이지. 그러면 그전에 지금 화성군도 그전에 수원군이었거든. 같이 자게 됐는데 추워서 잘 수가 없었거든. 그래서 개성 깍쟁이가 수원 깍쟁이한테 제의를 한 거야. "아 이거 추워서 도저히 못 잘 테니 찢어진 문을 재 바르고 자자. 그러니 나 혼자 바르기는 저기 하니 문풍지하고 풀을 사와야겠는데" 개성 깍쟁이가 수원 깍쟁이한테 그랬단 말이야. "그럼 넌 뭐 사올래?" 수원 깍쟁이가 "아 나는 문풍지를 사오겠다. 문풍지" 그러니까 천상 개성 깍쟁이는 풀을 사와야 될거 아니야? 그래 풀을 사다 바르고 자고 일어났단 말이야. 식전에 자고 일어나서 보니까 아 수원 깍쟁이가 바른 문을 홀랑 뜯어서 개거든. 그래서 개성 깍쟁이가 "야 그건 문에 바른걸 왜 뜯어가냐?" "야 임마. 이건 내가 돈주고 사온거야. 그러니까 나는 뜯어 가지고 또 딴데가서 바르고 자야겠어." 그래서 개성 깍쟁이는 풀을 사다가 붙였으니까 뜯어갈게 있어야지. 그래 수원 깍쟁이한테 졌다 이 말이야. 그래 수원 깍쟁이라는 것이 원래는 수원 깍쟁이가 아니라 남양 깍쟁이라는 거야. 원래는 남양 사람들이야. 그전에 남양군이 있었어요. 남양군에 있기 때문에 남양군이 이조 때 없어지고설랑 수원군으로 통합이 됐어. 그러다가 또 다시 광복과 동시에 화성군이 생겨서 헐려져 나갔고 그렇게 된 거야. 그래 수원 깍쟁이가 그래서 유래가 된 거지.

 

(63) 수원 나그네

 

조선 정조때 전해 오는 이야기이다.

 

지극한 효심을 지녔던 정조대왕은 수시로 사도세자가 묻힌 능으로 행차를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미복차림으로 아무도 모르게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 안녕리(지금의 수원이 조성되기 전까지 여기가 실제 수원이었다. 지금의 수원은 정조17년 1793년에 화성으로 이름 붙여지면서 시작되었다. 화성이 수원으로 바뀐 것은 고종 23년 1895년이었다.)로 암행을 하게 되었다.

 

그 때 마침 밭에서 일을 하던 농부를 만나게 되었는데,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에 대해 그 농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농부에게 능을 가리키며 저곳이 어떤 곳인가를 물은즉, 농부는 저곳은 뒤주대왕의 애기능이라고 대답하였다. 정치적 희생양으로 뒤주속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지만 않았어도 왕이 되었을 사도세자의 능이라 뒤주대왕이라 했고, 애기능이라 한 건 임금님들의 산소를 능이라 하지만 왕이 못되셨으니 그렇게 부른 것이라고 하였다.

 

정조는 내심으로 크게 기뻐하였다. 대신들의 반대로 사도세자를 추존하지 못하고 있던 차, 한 농부의 입에서 뒤주대왕 애기능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그 농부에 대하여 너무나 고마웠다. 그래서 농부에게 글을 얼마나 읽었는지 물어보았다. 그 농부는 책도 많이 읽고 과거도 여러 번 본 실력 있는 선비였으나, 번번이 낙방한 불운한 선비였다. 다시 한번 과거를 봐 보라는 정조의 말에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또 떨어질 것이 뻔하다 하면서 관심이 없었다.

 

정조는 그 농부의 마음을 겨우 돌려 다시 한번 과거를 보게 하였다. 그리하여 정조는 급히 환궁하여 과거시험을 보게 하는 영을 내렸다.

 

과거시험을 보러간 선비가 과거시제를 받아보니 융능 근처에서 있었던 자신과 어느 선비의 대화를 적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자신만 붙게 될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 급제하고 왕을 배알하던 중 알고 보니 그 어느 선비가 바로 임금님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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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민요)

 

1. 태평가

 

꽃을 찾는 벌나비는 향기를 쫓아 날아들고
황금같은 꾀꼬리는 버들사이로 왕래한다.

학도 뜨고 봉도떴다 강상 두루미 높이 떠서 두나래
를 훨씬 펴고 우줄우줄 춤을 춘다

개나리 진달화 만발해도 매란국죽만 못하느니
사군자 절개를 몰라주면 이보다 큰 설움 또 있으리

(경기도의 민요)

 

* 니나도 닐리리야 닐리리야 니나노 얼싸 좋아
얼씨구 좋다 벌나비는 이리저리
퍼펄펄 꽃을 찾아 날아든다.

 

2. 노랫가락

 

공자님 심으신 남게 안영증자로 물을주어 차사로
벋은 가지 맹자꽃이 피었도다
아마도 그 꽃 이름은 천주만대의 무궁한가

운종룡 풍종호라 용이 가는데 구름이 가고
범가는데 바람이 가니 금일송군 나도가요
천리에 임이별하고 추양상사로 잠못이뤄

산첩첩 천봉이로되 높고 낮음을 알건마는
창해망망 만리로되 깊고 얄음을 알건마는
사람의 조석 변이야 알길없네


3. 경복궁 타령

 

에~남문을 열고 파루를 치니 계명
산천 밝아 온다.

왜철죽 진달화 노간죽하니 / 맨드라미 봉선화가 영
산홍이로다

남산 하고 십이봉에 오작 한 쌍이 훨훨 날아 든다

우광쿵쾅 소리가 왠 소리냐 / 경복궁 짓는데 회방
아 찧는 소리라

* 에~에에헤 에야 얼럴럴 거리고 방아로다

 

(경기도의 이야기)

 

(1) 화성(華城)

 

1. 

수원의 서호(西湖)에 옛 성터가 있다. 고구려 군사가 이 성을 지키고 있는데 적군이 공격하여 성을 에워싸고는 항복을 기다렸다. 이 때 가뭄이 들어 물이 없어서 쌍방이 어려웠는데, 하루는 고구려 군사들이 높은 산 위에 말들을 끌고 나와 하얀 물을 끼얹어 말을 씻겼다. 이를 본 적군은 성안이 물이 많아 쉽게 항복하지 않겠다 하여 철수하고 말았다. 사실은 물이 아니라 하얀 쌀이었다.

 

(2) 화성(華城)

 

2.

수원에 성을 쌓을 때 왕이 친히 와서 보았다. 어느 날 밤 왕의 꿈에 동자가 나타나 지금 성을 쌓는 자리는 적이 공격해 오면 쓸모가 없으니 다른 곳에 다시 쌓으라고 했다. 왕이 아침에 일어나 새 성터를 물색하다가 하얀 서리가 내린 것을 보고 그 자국을 따라 성을 쌓았는데, 그것이 지금의 화성이다.

 

(3) 이순신(李舜臣)의 힘

 

이순신이 뒤를 보고 있는데 호랑이가 달려들었다. 이순신이 호랑이 꼬리를 잡아당기자 호랑이가 도망치지 못했다. 호랑이가 아무리 힘을 내도 이순신의 나막신만 달막거렸다. 이순신은 뒤를 다 본 뒤 호랑이를 태질하여 죽였다. 다음날 이순신은 호랑이 힘을 알고 싶어 장정 50명과 줄다리기를 했더니 나막신이 달막달막했다. 뒤에 이순신은 명장이 되었다.

 

(4) 함평(咸平) 이씨(李氏)와 노루

 

수원군 봉담면 분천리에 함평 이씨가 많이 살았는데, 이 이씨의 조상이 가난하여 나무를 팔아 겨우 살았다. 어느 날 포수에게 쫓기는 노루를 구해주었더니 그 노루가 이씨에게 명당 자리를 가르쳐 주었다. 이씨는 그 부친의 묘를 썼더니 그 후 집안이 부유해지고 자손이 번성하여 문무공신이 많이 나왔다. 함평 이씨 후손들은 이 산을 노루고개라 하고 포수가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5) 메추라기와 여우

 

옛날에 배고픈 여우가 메추라기를 잡아먹으려 하는데, 메추라기는 자기를 살려주면 여우를 배부르게 해주겠노라고 하였다. 그렇게 했더니 메추라기가 광주리에 밥을 담아 이고 가는 여자 앞에 가 잡힐 듯이 팔딱팔딱 뛰었더니 여자가 광주리를 놓고 따라갔다. 그 틈에 여우는 밥을 배불리 먹었다. 이번에는 메추라기가 여우에게 우스운 꼴을 보여주겠다며 옹기장수 형제가 옹기를 잔뜩 지고 가는데, 앞에 가는 형의 옹기 짐에 앉았다. 뒤에 가던 동생이 이를 보고 잡느라고 작대기로 치다가 옹기를 깨고 말았다. 형이 화를 내며 동생이 미쳤다며 작대기로 동생의 옹기를 깼다. 메추라기와 여우는 웃었다.

 

(6) 엄청나게 큰 사람 장길손

 

옛날 장길손이란 사람은 키가 너무 커 옷 한 벌 얻어 입지 못했고 들어가 살 집이 없어 비바람을 맞으며 밖에서만 살았다. 겨울이 되어 부모가 왕에게 옷을 청하자 왕이 포목 오백필을 주어 옷을 짓게 했다. 부모는 그 이듬해 봄에 겨우 홑적삼 하나를 만들었다. 장길손은 너무 기뻐 춤을 추었는데, 그 때문에 바람이 불고 해가 가려져 그만 흉년이 들고 말았다. 백성들이 장길손에게 벌을 내리라고 청하여 왕이 잡아오라고 했는데, 길손이 그럴 것 없이 선 자리에서 엎드렸더니 머리가 대궐 마당에 닿았다. 볼기 오십대를 치라고 했는데, 볼기짝이 하도 멀어서 하인들이 가다가 지쳐 죽었다.

 

(7) 나이 어린 원님

 

옛날에 열 네 살 짜리 소년이 과거급제를 해서 고을의 원이 되어 내려가게 되었다. 가다가 쉬고 있는데 따라가던 하인들이 모여 앉아 어린애가 무슨 원님 노릇을 하느냐고 흉을 보았다. 소년은 이 말을 듣고서는 수수깡 하나를 뽑아오라고 해서 하인에게 소매에 넣어보라고 했다. 하인이 못 넣자 겨우 반년 동안 큰 것도 너희들이 소매 안에 못 집어넣으면서 열 네 해나 자란 내가 너희들의 수중에 들어가겠느냐고 하면서 하인들을 나무랐다. 하인들은 이 소년의 기상에 눌려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으며, 이 소년은 고을에 내려가서 잘 다스려서 명관이 되었다.

 

(8) 강원도(江原道) 노인(老人)이 서울 사람 속이다

 

강원도에 사는 한 노인이 나이 70이 되도록 쌀밥 구경을 못해 죽기 전에 쌀밥 한 번 먹어보려고 서울로 올라갔다. 한 집에 들어가서는 밥을 먹고 밥값으로 벌꿀집을 주니까 주인이 돈 수 천냥을 주면서 더 많이 가져오라고 했다. 그래서 실어다 주었더니 기뻐하면서 또 가져오라며 돈을 주었다. 그런데 노인은 돈은 받아 왔는데 벌꿀집이 없자 꾀를 내어서 좁쌀을 찧어 가짜 벌꿀집을 만들어다 주었다. 그리고는 이것을 다 무엇에 쓸 거냐고 물었더니 이 다음에 값이 오르면 비싼 값으로 내다 팔겠다고 했다. 과연 얼마 후에 값이 올라 서울사람이 내다 팔려고 보니 벌꿀은 없고 썩는 냄새만 났다. 그래서 속은 것을 알고는 시골로 내려가 노인에게 따지려고 하였다. 찾아올 줄을 미리 알고 있던 노인은 서울 사람을 데리고 나가 맛있는 것을 사주면서 산수구경을 시켜주었다. 저녁때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자 노인은 집에 안가고 폭포에 빠져죽겠다고 하면서 빠져 죽었다. 서울 사람은 살인누명을 뒤집어 쓸까봐 겁이 나서 서울로 그냥 돌아왔다. 노인은 잠시 뒤에 물에서 나와 다시 서울집에 가서 이 집주인이 자기 형님을 물에 빠져 죽게 했다고 하면서 소란을 피니까 이웃사람들이 몰려와 주인을 멀리 피신시켰다. 노인은 만나기만 하면 혼쭐을 내주겠다고 으름장을 놓고는 집에 내려와 편히 살았다.

 

(9) 계모(繼母)와 전실(前室) 아들

 

옛날에 아들 형제만 둔 어떤 사람이 상처를 해서 후처를 들였는데 후처는 이 아들들을 싫어했다. 그래서 산에 나무하러 보내고는 포수를 시켜 죽이려고 하였다. 포수가 불쌍히 여겨 형제에게 알려주어 멀리 도망가게 했다. 형제는 훗날에 만날 약속을 하고는 헤어졌다. 형은 길을 가다가 어느 마을의 서당 앞을 지나면서 글을 잘못 읽는 아이를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그 집 부모가 똑똑한 청년임을 알아보고는 사위로 삼았다. 동생은 가다가 어떤 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마당에 있는 말꾼들이 저 집에는 사람들이 들어가기만 하면 죽는다고 하며 못 들어가게 하였다. 동생은 궁금해서 들어가 보니 색시가 혼자 있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말하자 색시가 자기도 혼자 사는 몸이라고 하면서 같이 살자고 했다. 수년이 지나 약속기일이 다가오자 형제는 다시 만나서 아버지를 모셔다 잘 살았다.

 

(10) 억지 명점쟁이

 

옛날에 부잣집 아이인 돌이와 가난한 집 아이인 두꺼비가 살았다. 돌이는 두꺼비를 도와주려고 애를 썼는데, 하루는 집안에 은수저를 감추어놓고는 돌이에게 장소를 가르쳐주면서 자기 부모에게 점을 쳐서 찾아주게 하고는 상금을 받게 했다. 어느 날 대국(大國)에서 천자의 보물이 없어져서 찾느라고 난리가 났다고 하며 조선에 유명한 점쟁이가 없느냐고 사신이 왔다. 마침 돌이 아버지는 정승이었는데 두꺼비가 신통하다는 것을 알고는 나라에 추천을 하여 대국으로 떠나게 하였다. 두꺼비는 대국에 와서 일주일간의 말미를 얻었지만 찾을 길이 없어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드디어 약속 전날 저녁에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큰 한숨소리가 나며 말소리가 들려왔다. 자기는 몇 해 전에 전쟁터에 나갔다가 죽은 대장인데 자기 시체가 대궐 큰 기둥 밑에 있다고 하면서 파내서 장사를 잘 지내주면 보물이 있는 곳을 가르쳐주겠다고 하였다. 두꺼비가 장사를 지내 줄 테니 가르쳐달라고 하자 연못 밑에 있다고 하였다. 다음날 두꺼비는 기둥 밑에서 시체를 파내서 장사를 지내주고는 임금에게 연못에 보물이 있다고 가르쳐주었다. 임금은 기뻐서 두꺼비에게 좋은 벼슬을 주고 상금도 주었다. 두꺼비는 조선에 돌아와서 돌이랑 사이좋게 살았다.

 

(11) 불효(不孝) 아들 벼락 맞다

 

옛날 용수라는 땅에 형제와 늙은 어머니가 살았다. 형제는 노모를 닷새씩 번갈아 가며 모시기로 했다. 형이 봉양할 차례가 되었는데 형은 너무 가난해서 사흘밖에 모시지 못하고는 동생에게 사정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동생은 약속이 틀리다고 하면서 화를 냈다. 노모는 이제 갈 곳도 없고 배가 고파서 작은아들 보고 누룽지라도 달라고 하자 아들은 밥솥을 상 밑에 감추고는 밥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하늘이 별안간 캄캄해지더니 천둥이 치면서 벼락이 떨어져 작은 아들이 맞아 죽었다.

 

(12) 꽃메(뫼) 전설

 

옛날 한 동네에 아름답고 마음씨 고운 처녀가 병든 아버지를 봉양하면서 농사를 지며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처녀는 농사일이 힘들어 머슴을 두어 농사를 짓게 하고는 자기는 아버지의 병수발을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머슴이 천둥치고 비오는 날 밤에 처녀에게 흑심을 품고는 겁탈을 하였다. 처녀는 양반 집의 규수로서 수치심을 느껴 산에 올라가 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살을 하였다. 동네 사람들이 처녀가 자결한 자리에 정성스럽게 묻어주었는데 몇 해가 지나자 무덤에서는 나무 한 그루가 자라나서 때가 되면 꽃이 피고 꽃잎이 휘날리게 되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봉분처럼 생긴 그 산을 '화산(花山)'이라고도 하고 '꽃뫼'라고도 불렀다

 

(13) 교구정(交龜亭) 전설

 

용두암 앞을 막아 북지(北池)를 만든 후부터 용씨(龍氏)가 번성하게 되었다

 

(14) 옹기장수와 형평사 사원의 싸움

 

병점(餠店)은 떡전거리로서, 조선시대에 능을 재건할 때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떡장사를 하던 곳이다. 거기에는 소를 잡는 형평사(衡平社) 사원과 옹기 굽는 기술자들이 모였는데 서로 시비가 붙어서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때 옹기 굽는 기술자들이 이겼는데, 그것은 형평사는 단순히 칼로만 잘라서 파는 거고 옹기 기술자들은 인내력 있게 흙을 개어서 만드는 거라서 인내력이 강한 쪽이 이기게 된 것이다.

 

(15) 배다리[고색] 전설

 

고색은 옛날에 장지리라고 했는데, 비가 오면 흙이 너무 진해서 배다리를 건너지 못했다. 이곳은 얼마나 흙이 진한지 시집온 지 삼 년이 되어야 신발에 붙은 흙이 떨어진다고 할 정도이다. 그래서 흙이 나쁘니까 거기로 가지 말고 좋은 길로 가라, 배다리로 가지 말라고 해서 그런 지명이 생겨난 것이다.

 

(16) 서낭의 유래

 

서낭은 청동기 시대 때 마을의 경계선에다가 올라갈 적마다 돌멩이를 하나씩 쌓아올린 것인데, 일종의 석전무기(石戰武器)였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서 개발이 되고 총이 생기고 하니까 거기에 귀신이 있다고 해서 서낭이 된 것이다.

 

(17) 미투리 장수로 떼돈

 

율전동(栗田洞)에 열 여덟살 된 소년이 있었는데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 가지고 와보니 자기는 보리죽을 주고 할아버지의 후처가 데리고 온 아들은 보리밥을 주어 화가 나서 집을 나갔다. 나가서는 수원 시내로 들어와 아버지와 거래를 하던 객주집에 가서 삼백냥을 꾸어 가지고 서울에 가서 장안의 미투리를 다 사들였다. 그때는 마침 일제가 항만공사를 많이 하던 때라 노력동원에 왔던 사람들이 신발을 많이 사는 바람에 몇 배의 이익을 남길 수가 있었다. 이번에는 베가 싸서 많이 사놨는데 마침 전국에 호열자가 돌아서 죽는 사람이 많아 베가 잘 팔렸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 가지고 돌아와 꾼 돈을 갚고 아버지에게 가니 아버지가 야단을 안쳤다. 그후 소년은 보은의 대추를 왕창 사다가 장사를 해서 돈을 벌었고, 기미년에는 흉년이 들자 만주에서 좁쌀을 사와 장사를 해서 떼돈을 벌어 수원에서는 둘째가는 부자가 되었다.

 

(18) 퉁수바위

 

수원성 장안문 밖에는 연무동과 조원동이 있다. 옛날에 이 근처에 살고 있던 어느 부부가 오래도록 자식이 없자 치성을 드리기로 하고 남편은 연무동 바위에, 부인은 조원동 바위 위에 올라가 백일정성을 들이기로 했다. 그리하여 모든 금기사항을 지키고 정성을 드리는 동안에 서로 말을 하지 않고 퉁소를 불어서 무사함을 알리기로 했다. 서로 헤어져 백일기도가 시작되었고 둘은 퉁소를 불어가면서 안부를 전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인쪽 바위에서 퉁소 소리가 안 들려서 남편은 걱정이 되었으나 정성에 해가 될까봐 찾아가 보지도 못하고 계속 퉁소만 불었지만 연락은 없었다. 드디어 백일정성이 끝나고 남편이 찾아가 보니 부인은 그 동안에 병이 들어서 신음을 하다가 죽어간 것이었다. 남편은 부인을 잃고 쓸쓸히 살아가다가 그 후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연무동쪽 바위를 '할애비 퉁수바위'라고 하고, 조원동쪽 바위를 '할미 퉁수바위'라고 불렀다.

 

(19) 거문고 혈을 끊게 하다

 

조원동 갓모봉 바로 밑에는 백제왕의 사위였다는 우성위(禹城慰)라는 큰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해인가 흉년이 들어 농사가 잘 안되었다. 어느 날 스님이 와서 시주를 하라고 했으나 지독한 구두쇠인 우성위는 스님에게 물조차 주지 않았다. 스님은 가면서 마장산 줄기의 가운데를 파서 광교천에서 물을 끌어오면 가뭄을 극복할 수 있다고 가르쳐주며 떠났다. 우성위는 그 말을 옳게 여겨 물을 끌어오는 공사를 시작했으나 이곳은 광교천보다 지형이 더 높은 곳이라 공사를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흉년도 더욱 깊어져서 우성위의 가세는 날로 기울어져가 완전히 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스님이 일러준 자리는 마장산의 중간부분으로 거문고의 혈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즉 우성위는 거문고의 혈 때문에 부자로 살게 되었던 것인데 혈의 중간을 잘라 명아한 음률을 끊어 생명을 잃게 된 것이다.

 

(20) 이름난 의원

 

다른 자료에 '귀향'으로 나오기도 한다.

정광현은 세종 때 이름난 학자인 정인지의 후손으로서 상광교동에 살고 있었다. 초가을에 아랫마을에 사는 홍씨네 부인이 베를 짜다가 낮에 먹은 수수가 체해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금방 죽게 되었다. 정씨가 이를 듣고는 장정 넷을 시켜 부인을 베 이불에 싸 이리저리 굴리게 해서 낫게 해 주었다. 또 한번은 수원에 유수(留守)온 사람이 자기 아버지를 모시고 있었는데 이 아버지는 밖에 나오지 않고 집안에만 있다가 병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광교에 사는 정생원이 용하다는 얘기를 듣고는 가서 여쭙게 하니 쪽지에 처방을 적어주었는데 그것은 '귀향(歸鄕)'이었다. 그래서 그대로 했더니 병이 다 나았다.

 

(21) 벼락 과거(간촌 이생원 이야기)

 

{한국구비문학대계(경기도편)}에는 두 개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간촌 이생원과 관련된 이야기만 '벼락 과거'로 하고, 다른 이야기는 '정조와 능참봉'으로 분리했다.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은 애처롭게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화성군 태안읍 안녕리에 모시고는 자주 참배를 하러 오셨다. 어느 날 정조가 사복차림을 하고는 안녕리 근처를 지나다가, 마침 논에서 일을 하고 있던 간촌 이 생원이라는 농부를 만나게 되었다. 정조는 임금의 신분을 속인 채 아버님 산소를 가리키며 무엇이냐고 물어보니 농부는 화를 내며 뒤주대왕이신 애기능도 모르냐면서 정중하게 일러주었다. 정조는 기뻐서 농부와 더 이야기를 나누며 과거시험에서 여러 번 떨어진 농부를 위해 과거를 보게 하였다. 그래서 서울로 돌아와 갑자기 과거를 시행하게 하고는 제목도 '간촌 이생원과 어느 선비와의 대화'라고 내니 정답을 써 낸 사람은 농부밖에 없었으므로 그 농부가 장원급제를 하여 금의환향을 하게 된 것이다.

 

(22) 정삼품의 당상 소나무

 

정조가 화산능에 오갈 적에 소나무가 인덕원에서 지지대 고개가 끊어 넘어질 때까지 보였다고 해서 정조가 기특하게 여겨 정3품이라는 벼슬을 내려 대우한 소나무 이야기이다.

 

(23) 송충이를 깨물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화성으로 이장해 놓고는 자주 산소 참배를 하였다. 그리고 지지대 고개에서부터 화성 일대까지 각종 나무를 심어놓고 종자를 파종하며 20년간의 장기계획을 세워 조림사업을 하였다.

그러나 소나무에 송충이가 많아 아무리 정성을 들여 나무를 심어도 송충이가 다 갉아먹어 소용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상금을 주어 잡아들였으나 근절시킬 수가 없자 정조가 친히 산에 납시어서 나무에 있는 송충이를 하나 잡아서는 '너희 같은 미물이 정성들여 가꾼 솔잎을 갉아먹어서야 되겠느냐'고 야단을 치며 씹어먹었다. 그러자 임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무에 있던 송충이들이 다 떨어져 죽었다.

 

(24) 소나무마다 콩볶음이

 

흉년이 들면 사람들은 굶기가 어려워 소나무 껍질을 벗겨서 송기떡이나 송기죽을 쑤어 먹고, 아이들은 소나무의 속살을 벗겨서 씹어 먹기도 하고 가지를 꺾어 자치기도 하였기 때문에 나무가 구부러지게 되고 꼿꼿이 자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정조대왕은 이런 짓을 막기 위하여 콩을 볶아서 소나무에다 매달아 놓고는 콩을 따서 먹고 소나무를 꺾지 못하게 하였다.

 

(25) 행행(行幸) 길가 가옥구조가 바뀜

 

경기지방은 가옥구조가 안채는 기억자로서 남향이고, 행랑채는 안채와 조화를 이루어 니은자로 지으면서 바깥마당에는 사랑방과 툇마루를 두어 걸터앉아 쉬기도 하고 바깥손님이 드나드는 마루로 쓰이게 하였다.

그런데 정조대왕이 화산에 아버지의 능을 쓰고부터는 능참배를 너무 자주 하여 백성들이 예전처럼 마음놓고 툇마루에 걸터앉아 편히 쉬지를 못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임금이 행차를 하게 되면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길가에 사는 사람들은 아주 집의 구조를 바꾸어 툇마루를 없애고 임금이 지나가도 안보이게 들창문을 만들어서 살게 되었다.

 

(26) 여개 우물의 유래

 

남양군 서면 돌안말 안씨 집성촌에 안문경이라는 사람이 부모를 모시고 자식과 여러 형제를 거느리며 단란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병자호란이 일어나 동네사람들이 모두 가까운 섬으로 피난을 가게 되자 안문경도 가족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나섰다. 그때 건너마을에 사는 이서방이 와서 자기는 병든 노모 때문에 갈 수 없으니 자기 두 딸을 함께 데리고 가 달라고 하였으나, 안문경은 자기 가족도 많은데다 남의 과년한 딸들을 데리고 갈 수가 없어서 거절을 하고는 대부도로 떠났다.

그런데 마산포에 당도하니 배는 한 척도 없고 뒤에서는 오랑캐 군대가 쫓아오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기도를 했더니 갑자기 황새 한 마리가 나타나 해변가를 걸어가 가족이 모두 좇아서 바다를 건너갈 수 있게 되었다. 오랑캐 무리들도 안문경 가족이 건너는 것을 보고는 얕은 줄 알고 따라 건너다가 모두 죽게 되었고 가족은 난리가 끝난 후에 무사히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와보니 이서방네 두 딸들은 난리에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결하겠다며 돌안말 동네 앞에 있는 우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 우물은 본래 샘이 잘 솟고 물맛이 좋아 소문난 곳이었는데 이후에 우물의 위치를 위쪽으로 옮겨서 다시 팠으며 이름을 '예계우물(女界 또는 女二井)'로 불렀다.

 

(27) 수원 사람 빨가벗고 삼십리 뛴다

 

옛날 수원도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양반자손의 젊은이가 있었다. 이 선비는 평소에 조상의 산소에 치산을 잘하고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했던 선비여서 칭찬을 많이 받았는데, 어느 날 술집에 갔다가 술을 먹고는 취해서 그냥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 후 눈을 떠보니 바로 그 날이 선친의 제사날이었음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놀래 가지고 닭이 울기 전에 집에 도달할 생각에 옷도 제대로 갖추어 입지 않고 밤새 30리를 뛰어서 겨우 자정이 되기 전에 집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제사는 무사히 지낼 수가 있었으나 양반이 두루마기도 안입고 행장도 갖추지 않은 채 뛰어왔기 때문에 발가벗고 30리를 뛴 셈이 되고 말았다. 이후로 이 소문이 퍼져 수원 사람은 빨가벗고 삼십리를 뛴다는 말이 나게 된 것이다.

 

(28) 팔 부자집 거리

 

도시에 성만 쌓아놓으니까 황량해서 성안에 사람이 들어가 살게 했는데 900호 정도가 살게 되었다. 그래서 번성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 전국 팔도에서 돈있는 사람을 선출해 가지고 그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을 지어주어서 살게 하면서 무이자로 돈을 꾸어주고 돈도 월부로 받게 해서 이후로는 성안에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29) 볼기 한 대로 사형 집행

 

용주사는 원래 우리나라 불교 31본산 중에 하나로 신라 문성왕 16년(854)에 창건한 갈양사터에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모시면서 명복을 빌기 위하여 지은 사찰이다. 정조의 행차가 잦아짐에 따라 용주사 승려들의 권세도 당당해져 오만방자하게 되었다. 어느 날 저녁에 용주사 돌중 세 명이 술에 취해 샘터에 있던 아낙네들을 희롱하며 행패를 부리다가 결국은 여염집 여자를 겁탈하고 남편을 죽이자 여자도 따라 자결을 한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에 승려들은 벌을 안 받고 풀려나게 되었다. 그후 세월이 흘러 조심태라는 새로운 부사가 부임을 했는데 용주사 돌중들의 행패는 여전하여 또 부녀자를 희롱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수원부사는 돌중을 잡아넣고는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으나 임금은 곤장 한 대만 치게 하였다. 이에 부사는 묘안을 짜내서 곤장 한 대로 끝장을 보리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형벌을 집행하는 날이 되자 온 마을 사람들이 구경을 왔다. 돌중은 한 대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태연하였는데 사령이 곤장을 칠듯 칠듯하면서 약을 올렸다. 그래서 중은 온몸에 힘을 주다가는 다시 풀고 주다가는 다시 풀기를 수 차례 하다가 결국은 힘을 주지 않고 방심하고 있을 때 사령이 볼기 한 대를 내리쳤다. 그러나 그것은 항문 바로 위에서 치켜올리며 때린 것이라 항문에 바람이 들어가 중은 실실거리며 웃다가 결국은 죽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이후로 용주사 돌중들의 행패가 사라지게 되었다.

 

(30) '고만'이가 닥쳐 온 팔자

 

한 머슴이 십 여년 일을 해서 돈을 모아 가지고 장사를 해보려고 옹기를 사서 지게에 담아 시장에 한가운데 버텨놨다. 그런데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서 옹기가 다 깨져버려 자기는 운이 나빠 '고만'이라는 액운이 있는가 보다 하고는 관가에 가서 원님에게 하소연을 하였다. 그러자 원님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뱃사공을 불러놓고는 무어라고 기도를 하느냐고 묻자 사공은 동풍만 불게 해 달랜다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사공을 불러 똑같이 물어보니 자기는 서풍만 불게 해달란다고 하자, 원님은 두 사공에게 너희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회오리바람이 불어서 옹기가 넘어져 깨지게 된 것이라고 하면서 옹기 값을 물어주게 하였다.

 

(31) 후산(後産)에 좋다는 초립

 

과천 나무꾼이 나무를 지고 서울로 다니면서 장사를 하는데 하도 인색해서 다른 나무꾼들이 그 노인을 놀려주려고 꾀를 냈다. 그래서 나라의 국모가 지금 초립(지게 꼭대기에 씌워 가지고 다니는 것)이 없어서 후산을 못해 국상이 날 지경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노인은 돈을 벌 욕심에 마침 지나가는 나무꾼이 가진 초립을 비싼 값을 주고 사서, 대궐에 가서 주려고 하였다가 망신만 당하였다.

 

(32) 곡성(哭聲) 듣지 않은 상복

 

부모가 돌아가 남편이 시묘를 삼년 동안 하고 집에 와보니 부인이 아기를 낳았다. 남편은 어이가 없어 부인을 꾸짖으며 어째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하니까 부인은 분명 남편이 밤에 왔다가서 낳게 된 것이라고 하며 억울하다고 자살을 하였다. 그리고는 마을에 원님이 새로 부임할 때마다 귀신이 되어 나타나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원님들은 모두 놀래서 죽고 말아 그 동네는 황폐해지게 되었다. 결국 한 용감한 사람이 자청을 해서 원님으로 부임을 해와 사연을 들어보고는 해결해 주겠다고 하였다. 다음날부터 원님은 병이 들어 눕게 되어서 사방으로 약을 구하러 다니게 되었다. 원님은 자기 병은 곡소리를 안들은 상복을 삶아 먹어야 낫는다고 하며 그것을 구해오게 하였다. 그러자 거짓으로 상복을 입고 들어가 남편 행세를 하며 부인을 겁탈했던 범인이 자기가 입었던 상복을 가져다주면 상금을 줄줄 알고 가져갔다가 잡혀서 부인의 억울함이 풀려지게 되었다.

 

(33) 대황교(大皇橋)라는 이름

 

대황교는 정조 대왕이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러 다닐 때 건너던 다리로서 '임금이 건너다니는 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당시 중국에서는 우리가 그런 이름을 쓰자 자기네의 속국이 감히 황제라는 말을 쓴다고 하며 혼을 내주려는 목적으로 우리나라의 사신을 중국에 오게 하였다. 사신들은 거의 한 달이나 걸려서 중국에 도착했는데 가보니 마침 중국 임금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래서 사신들은 먼저 상복으로 갈아입고 문상을 하니 중국인들이 깜짝 놀라며 한달 전에 떠난 사람들이 어찌 한달 후의 일을 알았냐고 하니까 사신들이 떠나기 전에 천기를 보고 왔다고 하였다. 그래서 중국은 조선이 선견지명이 있는 나라라고 생각을 하고는 사신을 융숭하게 대접해 보냈으며 대황교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거론도 하지 않았다.

 

(34) 정묘조와 윤행임의 이야기

 

정묘조의 농신(弄臣) 윤행임은 아주 가까운 측근으로서 응수접대를 잘하였다. 하루는 어전에 들어오다가 조복자락이 치이자 '소꾀리'하니까, '우리까지 좋습니다'라며 소가 들어가는 '우리간'으로 대답을 하였다. 하루는 '拔劍絶而啖之 天下謂之無味'라고 지어가지고 조회를 들어가는데, 들어오는걸 실어다 연못에 빠뜨리게 하였다. 잠시후에 젖은 몸으로 조회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어디에 갔다왔냐고 왕이 물으니, 수궁에 가서 굴원이를 만났다고 했다. 그래서 굴원이가 뭐라고 했느냐고 물으니까 '吾逢暗君 投江而死(나는 어두운 임금을 만나서 물에 빠져 죽었다) 爾逢明君 何而投江(너는 명군을 만나서 어찌 강에 빠졌는고)'라고 했다면서 또 임금을 골탕을 먹였다.

 

(35) 중국 사신과의 문장 겨루기

 

1. 

중국에서 유명한 문장가가 사신으로 오게 되자 조정에서는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중간에서 돌려보내기로 하고 유능한 문장가를 선발해 뱃사공으로 변장을 시켜서 내보냈다. 드디어 사신이 와서 배를 탔는데 애꾸눈인 사공을 보고는 '鳥琢沙工目(새가 사공의 눈을 쪼아먹었네)'이라고 하여 사공이 '風吹上使鼻(바람은 상사의 코를 건들이네)'라고 대답을 했다. 그래서 '鶯失一枝春(한가지에 봄을 잃었네)'하니까, '馬得千里鞭(말은 천리의 채찍을 얻었네)'라고 하였다. 또 '飛上下飛上下 飛飛上上下下(날아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은)는 花間探香之蝶(꽃 사이에서 향기를 맡고 있는 나비이네)'이라 하여, '潛浮沈潛浮沈 潛潛浮浮沈沈(잠겼다 떴다 잠겼다 떴다 하는 것)은 水上窺魚之鷗(물위에서 고기를 엿보는 갈매기라네)'라고 응수하였다. 그러자 사신이 놀라면서 사공이 어떻게 이런 글을 지을 줄 아냐고 하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자 사신이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하면서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36) 중국 사신과의 문장 겨루기

 2.

사신이 와서 대꾸할 사람이 없어 고민을 하자 압록강에 사는 글자를 조금 밖에 모르는 무식한 뱃사공이 자기가 하겠다고 하였다. 드디어 사신이 와서는 애꾸눈인 사공을 보고는 '烏琢丁長目(까마귀가 사공의 긴 눈을 쪼았네)'이라고 하니까, 입이 삐뚤어진 사신을 보고 사공이 '風吹使臣口(바람이 사신의 입을 불어날렸네)'라고 하였다. '하늘은 둥근가'라고 하니까, 어제 떡을 먹은 사공은 둥근 떡을 먹었느냐고 묻는 줄 알고 네모진 떡을 먹었노라고 하며 '땅은 모난다'라 했다. 사신이 손가락 세개를 벌리며 '삼강(三綱)'을 아느냐고 하니까, 사공은 떡을 세 개 먹었느냐고 물어보는 줄 알고 다섯개를 벌리니, 사신은 '오륜(五倫)'을 안다고 하는줄 알았다. 사신이 또 수염을 쓰다듬으며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를 아느냐?'고 물으니, 사공은 '맛이 있더냐'고 묻는줄 알고는 배를 퉁기자 복희씨(伏羲氏)까지 안다고 하는 줄 알고 사신은 겁을 집어 먹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37) 바보 사위의 글짓기

 

다른 자료에는 '큰 사위 작은 사위'로 나온다.

일자무식인 사위가 정초에 처갓집에 갔다와서는 글자깨나 안다고 꺼덕거리는 동서와 장모가 꼴보기 싫어 다시는 안간다고 하자 부인이 절에 들어가서 삼년동안 공부를 하고 오라고 했다. 큰사위는 드디어 삼년동안 공부를 하고 와서 처갓집에 가 동서와 장모와 함께 글자놀이를 하게 되었다. 장모가 먼저 '고(故)'라는 운자를 내자, 동서가 '山高多石故(산이 높은 것은 돌이 많은 연고라)'하니 큰사위가 웃었다. 장모가 한번 지어보라고 하자 '天高多石故(하늘이 높은 것도 돌이 많은 연고냐?)'라고 하니까, '松之靑也中堅故(소나무가 푸른 것은 가운데가 굳은 연고이다)'라고 하자, '竹之靑也中堅故(대나무가 푸른 것도 가운데가 굳은 거냐?)'라고 하였다.

다음에 '鶴之長鳴長項故(학이 길게 뻗은 것은 모가지가 긴 연고다)'라고 하자 '蟬之長鳴長項故(매미가 길게 우는 것도 모가지가 긴 연고냐?)'라고 하니, '路柳不長閱人故(길가의 버드나무가 자라지 않는 것은 사람에게 시달린 연고다)'라고 하며 비꼬았다. 그러자 큰사위가 '丈母不長閱人故(장모가 자라지 못한 게 열인한 까닭이냐?)'하면서 키가 작은 장모를 비꼬자, 이렇게 나가다가는 집안 망신 다하겠다고 하면서 모두 자리를 떴다.

 

(38) 대감혜급웅사족(大監惠給熊四足)

 

평양감사가 도임을 해서 보니 부용이라는 제일 예쁜 기생이 원님한테 수청을 들고 있었다. 감사는 기생이 좋다는 말은 못하고 핑계를 대서 같이 사냥을 나가자고 하였다. 나가서는 글짓기 내기를 하였는데 감사가 먼저 '南山雪積熊走走(남산에 눈이 쌓였으니 곰이 뛰고 뛰네)'라고 하니, 기생이 '北天人歸犬吠吠(북천에 사람이 돌아오니 개가 짖네)'라고 하였다. 그런데 감사가 기생에게 홀려 깜박 하고는 '웅(熊)'에서 점 4개를 빼먹고 '능(能)'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기생도 '견(犬)'이라고 안하고 '대(大)'라고 하자, 감사가 자기 잘못은 생각도 안하고 기생을 꾸짖었다.

그러자 기생이 '大監惠給熊四足(대감이 은혜롭게 곰의 발 넷을 주셔서) 하여 少妾可惜犬一耳(소첩이 가히 애석하게도 개의 귀 하나를 빼먹었네)'라고 하였다. 그래서 감사가 '身空獨依門(몸이 비어서 이렇게 홀로 문에 기대고 서 있으니) 하여 魂追行人去(혼은 사람을 따라갔네)'라고 하였다. 그러자 기생이 또 '駑遲疑我重(노새가 더디게 가는 건 내 몸이 무거워서인가)이런가 했더니 添載一人魂(한 사람의 혼을 더 실어서 더디게 가는구나)'이라고 하였다.

 

(39) 박문수이야기(풍수장이의 조언)

 

박문수가 삼남지방을 시찰하다가 어느 지방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모여 앉아 저기 기와집에 사는 사람은 나가기만 하면 몇 천냥씩 가져온다고 하며 신기하다고 하였다. 박문수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그날 밤에 그 집에 가서 하룻밤을 묵기로 하였다. 다음날 주인이 집을 나서자 박문수도 같이 따라가 보니 산에 올라가 마침 장사를 지내던 무덤 옆을 지나면서 묘자리가 잘못 되었다고 가르쳐 주고는 다시 잡아주어 대접을 잘 받고 돈을 받아 가지고 돌아오게 되었다. 박문수는 이제서야 그 까닭을 알고는 떠나려고 하니 주인은 벌써 박문수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고 하면서 먼 훗날 꼭 써먹을 데가 있을 거라고 하면서 '靑鶴山下桂月枕 背年半月怨無死'라는 시구를 써주면서 고름에 매달아 밤낮으로 들여다보라고 하였다.

후에 기생과 동침을 하다가는 이 시구의 뜻을 해석해 내고는 기생이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래서 기생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자기가 여덟살 적에 박문수가 자기 아버지를 죽여서 원수를 갚으려고 일부러 기생이 되었는데 지금 실패해서 안타깝다고 하면서 울었다. 박문수는 기생의 효도하는 마음을 깊이 사서 용서를 해주고는 기적에서 빼주어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해 주었다.

 

(40) 구운 게도 다리를 떼고 먹어라

 

어떤 형제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시묘를 살았는데 내일이면 대상이 끝나 산을 내려가게 되었다. 그런데 형이 고기가 먹고 싶어 지나가던 장사꾼에게 남은 양식을 다 주고는 게와 바꾸었다. 드디어 게를 구워먹으려고 하는데 동생이 혹시 사람이 올지 모르니까 저 도랑에 걸쳐놓은 다리를 떼어내고 게를 먹자고 하였다. 그러나 형이 괜찮다고 하면서 그냥 게를 구워먹고 있는데 마침 다리를 건너 심방을 왔던 친구에게 게를 먹는 것을 들켜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동생이 형한테 "형님은 저 다리나 떼구 먹지 그냥 먹어서 들켰다"고 하면서 냇가의 다리를 안 떼고 먹은 것을 후회했다.

 

(41) 딸 주기가 아까와…

 

어떤 사람이 딸을 두었는데 용모며 성격이 모두 참하여서 이웃 사람이 딸을 참 잘 두었다고 하며 칭찬을 하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남 주기가 아까워'라고 말을 하였다. 이 얘기는 남주기 아까워서 자기가 데리고 산다는 뜻이 되고 말았다.

 

(42) 아저씨 개소리 좀 그만 하슈

 

자기 삼촌이 개장사를 하는데 저녁마다 개를 팔은 얘기만 하자 듣고 있던 조카가 지겨워서 "아저씨 거 개소리좀 그만 하시오"라고 하였다.

 

(43) 고까짓거! 더 큰 개도 업어 건너는데

 

아버지하고 장에 갔다오다가 개울 앞에 이르게 되었다. 아들이 바지를 걷어부치고 아버지를 업어 넘게 하자,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이 아들을 기특하게 여겨 장하다고 칭찬하였다. 그러자 아들이 갯바닥 개를 의미하여 대답하기를 "아 그까짓 개를요. 더 큰 개도 업어 건너는데"라고 대답을 하여 졸지에 아버지는 개가 되었다.

 

(44) 살인 누명을 벗는 이야기

 

선산에 사는 가난한 농부가 소 한 마리를 가지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해 소가 병이 들어 농부는 소를 장에다 내다 팔았는데 너무 병이 들어서 20원 밖에 못 받았다. 날이 저물어서 가까운 길로 가다가 풀숲에서 소변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족제비 한 마리가 다리 밑으로 지나가면서 돈주머니를 채가고 말았다. 농부가 막 쫓아가 보니 어느 무덤의 구멍 파진 곳으로 들어가 버려 할 수 없이 빈손으로 오게 되었다. 그런데 주머니에서 동전소리가 나서 열어보니 엽전이 있어 술이나 한 잔 사먹고 가려고 주막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술을 먹기 전에 국을 먹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개가 또 다리 밑으로 지나가면서 국을 엎질렀다. 그래서 너무 화가 나서 그릇을 던졌는데 그게 주모의 이마에 맞아 죽고 말았다. 잠시 후 마을 사람들이 와서 농부를 때리고는 경찰서로 끌고 갔다. 가서는 처음의 구멍난 묘자리 얘기서부터 자초지종을 얘기하자 한 경찰관이 농부에게 마을 사람 중에서 가장 심하게 때린 사람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경찰관은 그 사람이 주모의 부탁을 받고는 남편을 죽인 범인 이라는 자백을 받아내고는, 묘를 뒤져서 농부의 20원을 다시 찾아내어 주고는 돌려보냈다.

 

(45) 수원 축성비 조달을 위해

 

화성을 쌓을 때 돈을 조달하기 위해 성을 쌓는 앞에다 술집을 차려놓고는 당시에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기술자들이 여기에서 술을 마시게 함으로써 그 술값으로 축성비에 보태 쓰게 하였다.

 

(46) 어린이에 진 어른

 

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개울 옆을 지나게 되었는데 아이에게 물이 얼마만큼 깊으냐고 물으니 아이가 '목물'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건너보니 정강이밖에 안찼다. 그래서 왜 거짓말을 했냐고 물으니, 발목은 목이 아니냐고 하여 어른이 말싸움에 졌다. 그후로도 계속 어른이 아이에게 지다가 나중에는 그 아이 집의 소를 훔치려고 아이의 집을 물어보아서 같이 갔다. 그러나 집에 가서도 아이는 재치있게 행동을 하여 결국 이 소도둑은 잡히게 되었다.

 

(47) 사발자루

 

젊은 과부집에 머슴이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 머슴은 주인 여자에게 수작을 하려고 물을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물을 주는 여자의 손목을 쥐어 잡자 여자가 왜 그러냐고 물었다. 머슴은 사발자루인줄 알았다고 하면서 수작을 걸었다는 얘기다.

 

(48) 배 위로 물이 세 길

 

옛날 강태공 시절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노총각이 있었다. 이 총각은 당시에 벌채가 금지되어 있었는데 어머니를 위해 나무를 하러 갔다가 붙잡혔다. 그래서 사실대로 얘기를 했더니 효성에 감동이 되어 며칠간 말미를 주며 집에 가서 노모를 보고는 다시 관아로 돌아오라고 하였다. 총각은 집에 와서 강태공에게 의논을 하니 다시 살아날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아무 날에 모래사장에 누워서 석자나 되는 대통에 물을 넣고는 들고 있으라고 하였다. 그때 관에서는 총각이 안와서 점쟁이를 불러 점을 쳤는데 점괘가 물에 빠진 것으로 나와 관에서는 더 이상 총각을 찾지 않게 되었고 총각은 노모를 모시며 잘 살아가게 되었다.

 

(49) 당태종의 구인여행

 

당태종이 나라를 건국하기 전에 인재를 찾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어느 날 가다가 금방 신부가 죽을 자리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을 보고는 말리면서 누가 시켰는지를 알아보니 윗마을에 사는 유노인이라고 하였다. 또 가다보니 장사를 지내고 있는데 주마혈을 잡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거기가 나쁜 자리임을 가르쳐 주고는 누가 잡아주었나 알아보니 또 유노인이었다. 그래서 당태종이 노인을 찾아가 만나보니 노인은 벌써 당태종이 찾아올 것을 미리 알고는 일을 꾸몄던 것이다. 그래서 당태종은 이 노인이 비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는 데려다가 같이 건국을 해서 일등공신을 만들었다.

 

(50) 사돈끼리 소 개비하러 갔다가

 

가평과 포천군에는 사람들이 소를 타고 와서 소를 파는 풍속이 있었다. 어느 날 서로 사돈을 맺은 가평사람과 포천사람이 암소를 타고 팔러 나갔다가 장에서 만나게 되었다. 둘은 술집에 가서 술을 먹다가 취해 가지고 소는 팔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서로 소를 바꿔 타고 가게 되어 각각 사돈집에서 자게 되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보니 실수한 것을 알고는 속옷바람으로 집으로 도망가다가 중간에서 사돈끼리 만나게 되어서 서로 소문을 내지 않기로 하고 헤어졌다.

 

(51) 사돈집에 가 바지 벗고 자다가

 

결혼을 하고 나서 신랑아버지랑 사위가 후행을 왔다가 날이 저물어 사돈집에서 자게 되었다. 그런데 신랑아버지가 술이 많이 취해서는 자다가 한밤중에 소변을 보러 나왔다가는 집이 일자구조라서 어느 방인지를 몰라 아무 방이나 들어가서 잠을 자게 되었다. 그런데 이 노인은 잠을 잘 때는 바지를 벗고 자는 습관이 있어서 다 벗어버리고 자게 되었다. 새벽이 되어서 사돈마님이 일어나 보니 누가 엉덩이 짝을 까고는 잠을 자고 있는데 며느리랑 둘이서 어제 일을 하던 동네아줌마인줄 알았다. 그래서 불을 밝혀 보다가 불똥이 떨어져 일어나게 됐는데 보니까 사돈 영감이었다. 사돈은 주위에 부인들만 있는 것을 보고는 놀래 가지고 산으로 도망가니 사돈 마님이 바지를 들고 사돈을 부르며 쫓아갔다. 그러나 사돈영감은 자기를 때리려고 오는 줄 알고 계속 도망만 쳤다.

 

(52) 생거진천 사거용인

 

용인에 사는 어떤 여자가 아들 형제를 낳고 사는데 남편이 일찍 죽었다. 젊은 여자는 개가를 해서 진천으로 시집을 가서 또 자식 여럿을 낳고 살았다. 나중에 세월이 흘러서 용인 아들이 자기 어머니를 모셔다가 효도를 하며 살고 싶다고 하였으나 진천쪽의 아들들이 놓아주지를 않아 결국은 재판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재판의 결과는 결국 살 때는 그냥 진천에서 살고, 남편하고 돌아간 뒤에는 용인 쪽의 아들이 모시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53) 밑구녁 좀 다오

 

시아버지가 아들 사는 집에 오게 되었는데 마침 아들은 없고 며느리만 배추를 닦고 있었다. 시아버지는 배추가 먹고 싶어 배추소리는 빼고 "밑구녁좀 다오" 하니까, 며느리가 "아버님은 씹두 못하면서 밑구녁을 달라고 해요" 하였다. 나중에 시아버지가 돌아간다고 하자 며느리가 배웅을 하게 되었는데 마침 오른쪽 허벅지를 긁으면서 한다는 말이 "아버님은 요기두 못하고 가시면서…"라고 하였다.

 

(54) 게으른 며느리

 

아주 게으른 며느리가 있었는데 결국은 쫓겨나게 되었다. 그러자 동네사람들이 쫓겨난 이유에 대하여 수군대며 말하기를, 그 집안이 인색해서 그 며느리가 고기장수가 왔을 때 고기를 주물럭거리다가 그 손을 국속에다 넣어 가지고 씻어서 먹다가 쫓겨났다고 하였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사람이 한마디하기를 "아니 손이 그렇게 협해서 어떻게 해. 그 손을 갖다가 우물에다 뿌려야 동네 사람들이 다 먹지"라고 하였다.

 

(55) 효부의 대(代) 잇는 슬기

 

홀시아버지와 과부며느리가 한집에 살고 있었는데 며느리는 시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봉양을 하였다. 하루는 며느리가 시아버지 자고 있는 방에 들어가서는 정력을 시험해 보았다. 그리고는 친정 간다고 나가서는 마침 가난한 집의 어머니와 딸을 거리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딸을 길러주겠다고 데리고 와서는 자기 시아버지와 결혼을 시켜서 아들을 낳게 하여 집안의 대를 잇게 하였다.

 

(56) 세마대

 

왜군이 쳐들어와 권율 장군과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왜군은 삼천병마골 뒤에 숨어서 금방이라도 쳐들어올 듯이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면서 성안의 물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권율 장군은 적군의 이런 동정을 살피고는 군량미를 모두 꺼내어서 으스름 달밤에 전부 말에 뿌리게 하였다. 왜군은 이것을 보고는 성안에서는 물이 없어서 금방 죽는다고 했는데 물로다 말을 씻는 것을 보고는 겁을 집어먹고 도망을 쳐서 권율 장군이 왜군을 크게 무찌를 수가 있었다.

 

(57) 지지대

 

정조는 부친을 화산에 모셔놓고 자주 참배를 하셨는데, 끝나고는 바로 환궁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수원을 떠나 환궁하실 때는 북쪽에 있는 고개를 넘어가며 이 고개를 넘으면 한동안은 다시 부모를 볼 수 없음을 한탄하였다. 그래서 얼마쯤 가다가는 걸음을 멈추고 화산을 바라보고 다시 또 조금 가다가는 멈추고 하여 행차가 너무나 지지하여 그때부터 그 고개를 '지지대'라고 불러왔다

 

(58) 김홍집과 민요

 

김홍집은 고종 26년(1889)에 수원유수로 부임을 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세도정치가 날로 심해, 김씨네의 권세가 치솟는 반면 왕권은 쇠약해져 기강이 문란해지고 지방에서는 탐관오리들의 횡포가 심각하여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그 당시에 수원에서도 소위 '칼회'라는 집단이 있어서 일시에 봉기를 하여 당시 팔달문 밖 '인도레'라는 동네에 집단으로 살고 있던 김씨들을 습격하였다.

이 난동은 곧 일시적인 행동에 그치고는 즉시 해산이 되었는데 나라에서는 관군 300명을 파견하여 즉시 진압시키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김홍집은 이미 소요가 끝난 뒤고 또 군대가 수원에 오면 큰 소동이 일어날 것이 걱정이 되어 서둘러 한양으로 올라가서는 마침 한강에서 건널 준비를 하고 있던 군대를 만나게 되었다. 김홍집은 행군을 멈추게 하고는 조정에 들어가서 임금에게 군대를 거두어줄 것을 간곡히 간청하여 허락을 받아내게 되었다. 그 후 수원의 민요사건은 김홍집 유수가 긴급히 수습한 덕에 조용히 가라앉게 되었다.

 

(59) 정조와 능참봉

 

정조가 어느 날 화산릉을 참배하고 환궁하기 위하여 화성에 도착했을 때 마침 비가 오기 시작하여 가지 못하고 성내에 있는 행궁에 머물게 되었다. 비가 밤새도록 오자 정조는 땅속에 누워 계시는 아버지를 생각하고는 즉시 가서 묘를 살펴보게 하였다. 그리고는 능참봉이 만약에 불이라도 켜놓고 있으면 괜찮지만 편안히 자고 있으면 압송을 해오라고 시켰다.

군졸들이 가보니 능참봉이 정장을 하고는 퍼붓는 빗속에서 묘에 엎드려 있었다. 돌아와서 사실대로 전하니 정조가 기뻐하여 관복을 다시 내리고 상금과 벼슬을 주었다. 원래 능참봉이 이렇게 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어느 날 능참봉이 지나가던 초라한 사람을 잘 대접하여 주었는데 그 사람이 떠나면서 아무날 아무시만 잘 넘기면 된다고 일러주었다. 그런데 마침 그날에 임금이 행차를 하고 갔는데 비가 많이 와서 환궁을 못할 것을 미리 알고는 이렇게 처신함으로써 오히려 위기를 넘기고 복이 되게 하였다.

 

(60) 채정승과 목화

 

채제공은 조선 정조 때의 명상이며 뛰어난 학자였다. 정조는 많은 책을 읽어 해박하였는데 어느 날 불경을 읽다가 화도화(花桃花)라는 기묘한 구절을 보고는 이것이 목화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것을 알만한 사람이 많지 않아 과거시제로 낼까 하다가 채제공이 알고 있을 것 같아 그냥 덮어두었다. 그 후 채제공이 죽고 정조는 이것을 시제로 내었는데 마침 딱 한 사람만이 뜻을 바로 알고 썼다. 그래서 불러다가 물어보았더니 이 선비가 간밤에 채제공의 무덤 근처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꿈속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가르쳐주었다고 하여 임금은 채제공은 죽어서도 당할 수가 없는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61) 팔달산의 유래

 

이고는 고려말의 학사로서 공민왕 때에 나라가 점차 쇠망해질 것을 미리 알고는 은퇴하여 수원에서 살게 되었다. 이고가 사는 뒷산을 탑산이라고 불렀는데 공민왕이 당시에 사자를 보내어 무엇으로 소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으니까, 집 뒤에 작은 산이 하나 있는데 사방 막힌 데가 없이 사통팔달하여 아름답기가 그지없어 이곳에 살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하였다. 그후 조선 태조가 등극을 해서는 이고에게 나와서 벼슬을 하라고 여러 차례 권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자 화공을 시켜 산의 모습을 그려오게 하였다. 그림을 본 태조가 역시 아름답다고 하며 칭찬을 하고는 그 산을 팔달산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600여 년 동안 그렇게 불려져 내려오고 있다.

 

(62) 수원 깍쟁이

 

이 자료는 새로이 채록한 것이다. 제보자는 이일규(70세, 팔탄면 출생, 전 향남면장), 박춘옥(73세, 원래 피난민, 수원에 50년 거주)이다.

 

질: 양반 삼십리 뛴거. 그거 얘기 좀 해 주세요.

이: 수원 깍쟁이?

박: 수원 깍쟁이는 딴게 아니고 개성사람이랑 편지왕래를 서로 하는데 내중에 가보니까 수원 사람들은 뭔가 저 개성사람하고 편지왕래를 하는데 개성에 가니까 어쨌든 개성사람이 수원에 오니까 저 편지오는 걸 전부 물을 발랐드래. 그래서 수원사람 깍쟁이라고.

이: 그거는 지금 얘기한 거를 지금 내가 복원한다면 수원 깍쟁이가 왜 수원깍쟁이냐 하면 6·25사변 때 나온 얘기인데 개성 깍쟁이들은 고리대금업자들이거든. 함경도는 물장사고 개성 깍쟁이들은 고리대금업자라서 돈을 많이 벌고 하는데 6·25 때 피난을 딱 갔는데 노숙을 하다가 추우니까 전부 피난간 빈집에 들어가 자게 됐단 말이야. 개성 사람하고 경기도 사람하고 그 중에 수원사람이지. 그러면 그전에 지금 화성군도 그전에 수원군이었거든. 같이 자게 됐는데 추워서 잘 수가 없었거든. 그래서 개성 깍쟁이가 수원 깍쟁이한테 제의를 한 거야. "아 이거 추워서 도저히 못 잘 테니 찢어진 문을 재 바르고 자자. 그러니 나 혼자 바르기는 저기 하니 문풍지하고 풀을 사와야겠는데" 개성 깍쟁이가 수원 깍쟁이한테 그랬단 말이야. "그럼 넌 뭐 사올래?" 수원 깍쟁이가 "아 나는 문풍지를 사오겠다. 문풍지" 그러니까 천상 개성 깍쟁이는 풀을 사와야 될거 아니야? 그래 풀을 사다 바르고 자고 일어났단 말이야. 식전에 자고 일어나서 보니까 아 수원 깍쟁이가 바른 문을 홀랑 뜯어서 개거든. 그래서 개성 깍쟁이가 "야 그건 문에 바른걸 왜 뜯어가냐?" "야 임마. 이건 내가 돈주고 사온거야. 그러니까 나는 뜯어 가지고 또 딴데가서 바르고 자야겠어." 그래서 개성 깍쟁이는 풀을 사다가 붙였으니까 뜯어갈게 있어야지. 그래 수원 깍쟁이한테 졌다 이 말이야. 그래 수원 깍쟁이라는 것이 원래는 수원 깍쟁이가 아니라 남양 깍쟁이라는 거야. 원래는 남양 사람들이야. 그전에 남양군이 있었어요. 남양군에 있기 때문에 남양군이 이조 때 없어지고설랑 수원군으로 통합이 됐어. 그러다가 또 다시 광복과 동시에 화성군이 생겨서 헐려져 나갔고 그렇게 된 거야. 그래 수원 깍쟁이가 그래서 유래가 된 거지.

 

(63) 수원 나그네

 

조선 정조때 전해 오는 이야기이다.

 

지극한 효심을 지녔던 정조대왕은 수시로 사도세자가 묻힌 능으로 행차를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미복차림으로 아무도 모르게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 안녕리(지금의 수원이 조성되기 전까지 여기가 실제 수원이었다. 지금의 수원은 정조17년 1793년에 화성으로 이름 붙여지면서 시작되었다. 화성이 수원으로 바뀐 것은 고종 23년 1895년이었다.)로 암행을 하게 되었다.

 

그 때 마침 밭에서 일을 하던 농부를 만나게 되었는데,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에 대해 그 농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농부에게 능을 가리키며 저곳이 어떤 곳인가를 물은즉, 농부는 저곳은 뒤주대왕의 애기능이라고 대답하였다. 정치적 희생양으로 뒤주속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지만 않았어도 왕이 되었을 사도세자의 능이라 뒤주대왕이라 했고, 애기능이라 한 건 임금님들의 산소를 능이라 하지만 왕이 못되셨으니 그렇게 부른 것이라고 하였다.

 

정조는 내심으로 크게 기뻐하였다. 대신들의 반대로 사도세자를 추존하지 못하고 있던 차, 한 농부의 입에서 뒤주대왕 애기능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그 농부에 대하여 너무나 고마웠다. 그래서 농부에게 글을 얼마나 읽었는지 물어보았다. 그 농부는 책도 많이 읽고 과거도 여러 번 본 실력 있는 선비였으나, 번번이 낙방한 불운한 선비였다. 다시 한번 과거를 봐 보라는 정조의 말에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또 떨어질 것이 뻔하다 하면서 관심이 없었다.

 

정조는 그 농부의 마음을 겨우 돌려 다시 한번 과거를 보게 하였다. 그리하여 정조는 급히 환궁하여 과거시험을 보게 하는 영을 내렸다.

 

과거시험을 보러간 선비가 과거시제를 받아보니 융능 근처에서 있었던 자신과 어느 선비의 대화를 적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자신만 붙게 될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 급제하고 왕을 배알하던 중 알고 보니 그 어느 선비가 바로 임금님이었던 것이다.

 

 

 

 

도움이 잘 되셨나요?

 

답변확정 안하셔도 되요~

 

그냥 점수 많은 되길 바래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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