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의 유적지,유물,관광지

수원의 유적지,유물,관광지

작성일 2009.08.23댓글 5건
    게시물 수정 , 삭제는 로그인 필요

음 수원의 유적지, 유물, 관광지에 대해 좀 서주세요.

ㅎㄷㄷ 방학숙제ㅠㅠ

내공 최대한 많이검(75)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유적)

 

1.화성


종 목  사적  제3호 
면 적 188,048㎡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일원
시 대 조선시대

화성은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쌓은 평산성이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정조 18년(1794)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쌓았다.

 

성벽은 서쪽의 팔달산 정상에서 길게 이어져 내려와 산세를 살려가며 쌓았는데 크게 타원을 그리면서 도시 중심부를 감싸는 형태를 띠고 있다. 성안의 부속시설물로는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들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특히 다른 성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창룡문·장안문·화서문·팔달문의 4대문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들과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은 점이 화성의 특징이라 하겠다.

 

화성은 쌓은 후 약 2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성곽과 시설물이 무너지기도 하고 특히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파손되었는데, 1975년부터 보수,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효심에서 근본이 되어 당파정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 그리고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화성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화령전


종 목  사적  제115호 
면 적 12,288㎡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 92-2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본받기 위하여 순조 1년(1801)에 수원부의 행궁 옆에 건물을 짓고 화령전이라 하였다.

 

처음 지어질 당시의 화령전은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정전인 운한각을 비롯하여, 이안청·재실·전사청·향대청·제기고·외삼문·내삼문·중협문이 있었다. 이 중 남쪽에 있었던 향대청과 제기고 건물은 남아있지 않다. 정전 현판의 글씨는 순조가 직접 쓴 것이다.

 

이곳에 속하는 건물들은 대부분이 정전인 운한각의 건축규범에 따라 지어졌다. 특히 이안청은 지붕이 있는 복도식으로 정전과 연결이 되어있어, 눈이나 비가 올 때도 젖지 않도록 하였다.

 

순조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으며, 직접 정조가 태어난 탄신일과 돌아가신 납향일에 제향을 지내기도 하였다. 제향은 1920년 일본인에 의해 정조의 초상화가 창덕궁으로 옮겨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궁궐에 지어진 다른 영전들과는 달리, 수원에 세워진 화령전은 대칭에 의한 격식과 기능에 따른 영역의 구분이 확보된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몇 채의 사라진 건물을 제외하면 비교적 좋은 상태로 보존되어 당시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3.화성행궁


종 목  사적  제478호 
면 적 37,268㎡
지 정 일 2007.06.08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6-2번지 외 
시 대 조선시대


행궁은 왕이 지방에 거둥할 때 전란, 휴양, 능원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다. 또 1790년에서 1795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그 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뽑히는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유수가 집무하는 내아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치루었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1801년 행궁 옆에 화령전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을 봉안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화성행궁은 일제 시기 이후 갖가지 용도의 건물로 이용되면서 그 모습을 잃게 되었다.

 

1995년부터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1996년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997년 봉수당 상량식을 거행하였다. 2006년에는 행궁앞 광장부지에 대한 시굴조사가 이루어져 명당수 호안석축과 신풍교 교대지가 확인되어 2007년에 새롭게 복원이 이루어졌다.

 

4.팔달문


종 목  보물  제402호  
지 정 일 1964.09.0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2가 138 등
시 대 조선시대


수원성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중국성의 모습을 본뜨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아 훨씬 발달한 모습을 하며 한국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이 문은 수원성의 남쪽문으로 이름은 서쪽에 있는 팔달산에서 따 왔다. 문루는 앞면 5칸·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문의 바깥쪽에는 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해 반원 모양으로 옹성을 쌓았다. 이 옹성은 1975년 복원공사 때 고증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또한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버려 지금은 성문만 남아 있다.

 

수원성 안쪽에 있는 여러 건물 중 가장 크고 화려하며, 발달된 조선 후기의 성문 건축형태를 고루 갖추고 있는 문화재이다.
 


5.화서문


종 목  보물  제403호  
지 정 일 1964.09.0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25-2 
시 대 조선시대


수원성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중국성의 모습을 본뜨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아 훨씬 발달한 모습을 하며 한국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화서문은 수원성의 서쪽문으로 문의 모든 시설과 크기는 동쪽의 창룡문과 거의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네모 반듯한 큰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위에 1층의 건물을 세웠는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되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 건물이고, 축대의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과 문의 앞쪽에 벽돌로 쌓은 반달모양의 옹성이 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구실을 하며 2중의 방어 효과를 갖는다.

 

또한 주위를 돌아가며 총이나 활을 쏘는 구멍이 뚫린 낮은 담을 쌓아 보호되도록 하였다. 옹성의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공심돈이 성벽을 따라서 연결되어 있다. 공심돈은 속이 텅 비었다는 뜻으로 지금의 초소 구실을 하던 곳이다. 안에는 계단을 따라 오르내릴 수 있고 층마다 바깥을 향해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도록 구멍이 있어 철저한 방어가 되도록 하였다.

 

한국의 다른 성곽 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시설로서, 구조도 특이하며 화서문을 중심으로 일대의 경치에 한층 더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6.수원 광주이씨 월곡댁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123호 

지 정 일 1984.01.10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383 
시 대 조선시대


안채·바깥채·헛간·광이 울안에 자리하고 있는 초가집이다. 안채의 상량문에 의하면 조선 고종 25년(1888)에 지어진 것으로 되어있다. 집 뒤로는 얕은 산이 둘러져 있고 앞으로는 조그마한 개울이 흐른다. 주변에 오랜 한옥이 많고 감나무가 있어 옛스러운 맛을 지니고 있다.

 

안채는 평범한 ㄱ자형으로 부엌·대청·안방·건넌방으로 되어있다. 초가인 지붕은 두께가 대단히 두껍다. 동편의 끝칸이 부엌이고 이어 안방이 있다. 바깥채와 안채는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ㅁ자형으로 배치되었다. 경기도의 서해안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배치형태이며, 이 마을의 대부분 집도 여기에 속한다. 사랑방은 위아랫방을 안채와 직각으로 배치하였고 대문만이 부엌을 향하였다. 마당 앞에는 헛간·외양간이 있다.

 

바깥마당 맞은편의 헛간채는 20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살림채는 담장으로 막았지만 바깥마당은 사방으로 트여 있고, 헛간채 남쪽에 비켜서 마당 안으로 출입하는 입구가 인상적이다. 광채는 안채와 거의 같은 건축 연대를 보인다.

 

부엌 가까이 우물이 있고 뒷동산쪽으로 감나무·단풍나무 등을 심어 운치를 살렸다. 집을 지은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학문적인 가치가 있다.

 

7.김준룡장군 전승지 및 비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38호

지 정 일 1977.10.1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하광교동 산1-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무신 김준용(?∼1641)이 중국 청나라 군대와 싸워 이긴 것을 기념한 비가 있는 곳이다.

 

김준용은 선조 41년(1608)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전라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군사를 이끌고 용인의 광교산에서 중국 청나라 군대를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이후 지방관과 병마절도사를 지냈고 죽은 후에는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정조 18년(1794) 수원성 축성의 총 책임을 맡았던 영의정 채제공이 그의 업적을 전해듣고 전승터였던 광교산 바위에 전승을 기념하는 글을 새기도록 하였다고 한다.

 

8.심온선생 묘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53호

지 정 일 1979.09.10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이의동 산13-10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초기의 문신 안효공 심온(?∼1418) 선생의 묘소이다.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 조정에서 벼슬을 하다가 조선 왕조 건국에 참여하였다. 태종 11년(1411)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포악한 정치를 일삼던 박영우를 파직시키고 대사헌이 되어 관의 기강 확립에 힘썼다. 세종이 즉위하자 국왕의 장인으로서 영의정이 되었다. 태종 18년(1418)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 도중에 태종의 병권장악을 비난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의주에서 체포되어 수원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 사건은 국왕의 장인으로서 세력이 커짐을 염려한 태종과 좌의정 박은 등이 거짓으로 꾸민 사실이 후에 밝혀지게 되어 세종은 관직을 복직시키고 안효라는 시호를 내렸다.

 

묘역 안에는 돌로 만든 석등과 좌우에 문인석 1쌍이 배치되어 있고 안평대군이 글을 쓴 묘비가 있다. 묘역 아래에는 9대손 심하단이 글을 짓고 서명균이 글씨를 쓴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세워져 있다.

 

9.팔달산 지석묘군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25호

지 정 일 1991.10.12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권선구 교동 산3-1 
시 대 청동시대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산 남쪽 기슭에 바둑판식 고인돌 4기가 있는데, 가장 큰 것은 길이가 1.8m이고 두께가 0.45m이다. 수원시립중앙도서관 오른쪽 기슭을 따라 팔달산으로 조금 오르다보면 평평한 구릉 위에 1호·2호 고인돌이 서로 가까이 있다. 이로부터 위로 100m쯤 떨어진 곳에 3호·4호가 있는데 3호 고인돌은 하부구조가 드러나 있고 옆에 덮개돌로 보이는 돌이 흙속에 묻혀 있다. 

 

10.아담스기념관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75호

지 정 일 2001.01.22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10번지 
시 대 일제강점기


대한제국 말 수원지방에는 감리교가 들어오면서 수원과 남양 지역의 교회들이 많은 남녀 교육기관을 설립함으로써 이 지역의 근대화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삼일학교의 아담스 기념관은 기독교의 박애정신을 바탕으로 한 미국 아담스(Adams) 교회 신도들의 온정으로 신축되었기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름 붙여졌다.

 

수원지방 감리사였던 노블(W.A.Noble) 목사는 삼일학교가 설립초부터 교사도 없이 중포산 기슭의 교회 건물에 더부살이하고 있어 고통을 겪는 딱한 사정을 아담스 교회에 호소하였고, 교인들이 교사의 건립기금으로 20,000엔을 노블 목사를 통해 삼일학교 측에 전달하여 1923년 새 교사의 건립이 이루어졌다. 당시 교회의 신축 설계는 미국 아담스 교회 선교부에서 하였으며 공사는 중국인 왕영덕이 맡았다고 한다. 이 건물은 1940년에 새 교사인 고 최태영 기념관을 건립할 때까지 교실과 사무실로 사용하였으나 이후에는 삼일중학교의 본관으로 교장실과 교무실, 채플실, 기도실 등으로 사용하였다.

 

1988년에는 현관 부분을 수리하였고 1층 내부에 강관 기둥을 설치하여 보강하였으며 1997년에는 건물의 안전도와 결로원인을 찾아내기 위한 정밀안전진단을 실시한 바 있다. 최근에는 1층을 미술과 특별교실과 방송실, 창고 등으로 쓰고 있으며 2층에 화장실을 증축하여 재단사무실로 사용하고, 지하층은 농구부실로 사용하고 있다.

 

아담스 기념관은 우진각지붕의 2층 벽돌조 양옥으로 건물 한쪽에 치우쳐 현관이 위치하고 있다. 지하층에는 거칠게 다듬은 돌을 쌓고 1,2층은 적벽돌로 벽체를 쌓았으며 층간에 목조 마루틀을 설치하여 바닥을 꾸몄다. 지붕은 벽체 위에 목조 트러스(truss)를 올리고 널판을 깔아 함석판을 올린 구조이다. 수원지역에 세워진 기독교 선교학교(mission school)가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음을 고려해볼 때 이를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는 것이 바람직함.

 

11.수원축만제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200호

지 정 일 2005.10.17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436-1 
시 대 조선시대


화성의 서쪽 여기산 아래 축조한 저수지로 축만제둔의 관개시설로 만들어졌다. 정조23년(1799) 정조는 내탕금 3만 냥을 들여 축만제를 만들게 하고 수문 2곳을 갖추었다. 몽리면적은 232두락으로 화성 주변의 인공 저수지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으며 과학 영농의 본보기 시설물이다.

 

만석거와 만년제에 뒤이어 축조된 축만제는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화성 서쪽에 있어 일명 서호로 불리고 있으며 서호에 비치는 낙조로 유명하다.

 

12.여기산 선사유적지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201호

지 정 일 2005.10.17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256-1외 
시 대 청동시대


여기산유적은 서호 서쪽의 구릉에 있다. 1979~1984년까지 4차에 걸쳐 숭실대학교박물관에서 유적의 일부를 발굴조사하였다.

 

이 유적에서는 구멍무늬토기가 출토되는 청동기시대 집터와 경질무문토기와 두드림무늬토기가 출토되는 원삼국시대의 집터가 확인되었다. 집터의 시설 중 특징적인 것은 온돌시설의 초기형태라 할 부뚜막이 있는 화덕자리 시설이 확인되었고, 서까래와 볏집 지붕이 조사되어 당시의 가옥구조에 관한 귀중한 자료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생활용구인 토기류와 철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주거지내부에서 검게 탄 볍씨가 출토되어 서호 일대 주변 저습지대에서 벼농사를 하며 생업을 이어갔음을 알게 되었으며 나아가 수원지방 벼농사의 기원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13.수원향교

 

종 목  문화재자료  제1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권선구 교동 43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지방에 설립한 국립교육기관으로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동시에 담당하였다.

 

원래 화성군 봉담면 와우리에 있던 수원향교는 조선 정조 19년(1795)경 현 위치로 옮겨 세우고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향교는 앞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을 두고 뒤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을 둔 전학후묘의 배치를 하였다.

 

명륜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이며,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앞면 가운데 3칸에 문을 달았고 양쪽 2칸은 막혀 있다. 대성전은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고 동무와 서무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공자와 그의 제자 등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제사 의례에 적합하도록 앞면에 개방된 마루를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14.향미정


종 목  수원시 향토유적 제1호
지 정 일  86.4.8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251

시 대  조선시대


조선조 정조대왕이 화성 축성 당시 부근 농민들의 관개용수로 쓰기 위하여 인공호수를 동서남북에 축조한 것중 서쪽에 위치한 호수인 서호의 남쪽에 세운 정자로 낙조와 잉어가 유명했다고 한다. 당시 이 곳의 잉어는 특히 유명하여 궁중에 약용으로 진상했다고 하며 정 자의 이름은 소동파의 '항주의 미목'이란 시에서 딴 것이라고 한다.

 

15.창성사지

 

종 목  수원시 향토유적 제4호

지 정 일  1986.04.08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상광교동 산41

시 대  시대미상

수원시 상광교동 광교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지로 광교산의 주봉인 비로봉 남동쪽 자락에 있다. 현재는 폐사되었으며, 언제, 누가 창건하였는지 알 수 없다. 진각국사 탑비에 고려 우왕 8년(1382) 국사를 지낸 천희가 이 절에서 입적하였다는 사실만 알려질 뿐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

 

1951년까지 민가 형태의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소실되었다. 절터에는 건물기단과 주춧돌, 옥개석, 기와조각, 석축 등이 남아 있다. 1963.1.21 보물 14호로 지정된 이 비는 1965.6.9. 창성사지에서 팔달구 매향동 13-1번지로 이전되었다. 


 

16.정유선생 묘


종 목  수원시 향토유적 제6호
지 정 일  90.1.4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하동 408-1

시 대  조선시대


정유선생은 조선중기 중종 명종대의 문신으로 자는 공탁, 호는 양진당, 본관은 온양이다. 연산군 10년에 출생하여 무술년에 탁영시에 급제한 후 승문원에 처음으로 보하였으며 이후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하고 이어 동지사로 중국에 다녀온후 사헌부 대사헌으로 승진하였으며 한성부윤으로 전보하였다가 황해도 관찰사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 묘는 부인과 쌍분으로 묘역이 100여평이며 중앙에 묘비 1기와 상석1개가 있으며 문인석2기, 망주석2기가 배치되어 있다. 이 묘역은 1566년에 조성하고 묘비는 1586년에 건립하였다.

 

17.이목동 출토 석곽묘

 

종 목  수원시 향토유적 제7호

지 정 일  2006.12.26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영통구 창룡문길 443 수원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시대 
 

장안구 이목동에서 발굴조사되어 이전 · 복원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 무덤이다. 이목동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집터 2기, 통일신라시대 석곽묘 2기가 조사되었다.

 

유물은 청동기시대의 구멍무늬토기, 그물추, 가락바퀴, 돌칼 등과 통일신라시대의 굽다리완, 뚜껑달린 굽다리접시, 병, 완 등이 출토되었다. 

 

18.꽃뫼 제사유적지


종 목  수원시 향토유적 제8호
지 정 일  90.1.4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688-4

시 대  조선시대


수원시 중심 서쪽에 있는 서호천 근처의 낮은 구릉에는 꽃뫼 제사 유적지가 있습니다. 여러형태의 묘와 제사를 지내는 데 필요한 각종 용구들이 발견되어, 꽃뫼 제사 유적지라 부르고 향토 유적 제8호로 지정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제사 유적들은 철기 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것들이라 한다.

 

(유물)

 

1.창성사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

 

종 목 보물 제1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3-1

시 대 고려시대


 진각국사의 행적을 알리는 탑비로 창성사터에 있다. 직사각형의 비받침 위에 비몸돌을 세운 다음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비문을 새긴 비몸돌은 마멸이 심하고 오른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으며, 지붕돌은 경사면이 완만하다.

 

비문에는 진각국사가 13세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浮石寺)를 중수하는 등 소백산에서 76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이 실려있다. 입적한 다음 해인 우왕 12년(1386)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이 비가 세워졌다.

 

간략화된 고려 후기 석비의 형식을 보이고 있으며, 선봉사대각국사비(보물 제251호)와 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 신륵사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등과 비교할 만 하다. 글씨는 고려 전기의 힘있는 풍모가 사라진 투박한 것으로, 고려 후기의 글씨가 퇴보하였음을 보여준다. 비문은 이색이 짓고 승려인 혜잠이 글씨를 새겼다.

 

2.채제공 초상화(시복본)

 

종 목  보물  제1477-1호 
지 정 일 2006.12.29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선경도서관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사도세자의 신원 등 자기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 인물인 채제공의 초상화이다.

 

수원시 소장 <시복본(1792년작)>은 채제공 73세상으로 사모에 관대를 한 옅은 분홍색의 관복 차림에 손부채와 향낭을 들고 화문석에 편하게 앉은 전신좌상이다.

 

시의 내용대로 정조로부터 부채와 향낭을 선물 받은 기념을 표시하기 위해서인 듯 손을 노출시켜 부채와 향낭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연출되었다. 수원시에 함께 소장되어 있는 유지 초본 3점 또한 중요한 자료이며 향낭도 함께 남아 있다.

 

3.박유명 초상

 

종 목  보물  제1489호  
지 정 일 2006.12.29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영통구 수원역사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박유명(1582∼1640)은 1620년(광해군 12) 무과에 급제하고, 1623년에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 3등에 책록되고 그 뒤 당상선전관을 거쳐 오위장을 역임하였다. <박유명 초상>은 낮은 오사모를 쓰고 과장된 둥근 어깨를 하고 있으며 단령이 뒤로 뾰족하게 뻗친 모양, 바닥의 채전 등에서 17세기 공신 도상의 형상을 잘 보여준다.

 

이 초상과 함께 후대의 이모본으로 추정되는 작품이 있다. 이 이모본은 거의 동일한 형상이며 안료는 보다 선명하다.

 

<박유명 초상>은 17세기 공신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또한 호랑이 흉배의 무관초상화로서 주목된다. 그런데 이모본의 경우는 원본과 양식적으로 상이하며 작품의 수준도 다소 떨어지므로 원본 1점만을 지정한다.

 

ㅇ 규격(세로x가로) : 170 x 88.3cm 

 

4.팔달문 동종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9호

지 정 일 1976.07.0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영통구 창룡문길 443 수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팔달문 2층 누각에 걸려있는 높이 123㎝, 입 지름 75㎝ 크기의 동종을 이전한 것이다. 종을 매다는 용뉴에 1마리 용을 조각하였고, 그 아래 약간 오무라든 종의 몸체를 연결하였다. 전체적인 비례와 공간의 구조가 안정감을 준다. 용뉴에는 활짝 핀 꽃을 생동감있게 장식하였으며, 종의 위쪽에는 2단으로 정사각형의 구획을 나누고, 그 안에 범자를 양각하였다. 띠에 잇대어 4곳에 유곽과 보살상을 교대로 배치하였고, 유곽 둘레에 덩굴무늬를 새겼다. 돌출된 9개의 유두는 보상화무늬로, 가운데 1개만 유난히 도드라졌다.

 

종의 중간에는 이 종에 관한 내력이 기록되어 있고, 아래쪽에 보상화와 덩굴무늬를 새긴 띠가 있다. 명문에 의하면 이 종은 고려 문종 34년(1080)에 개성에서 만들었고, 조선 숙종 13년(1687)에 만의사 주지 도화승이 불교 의식에 사용하고자 다시 주조하였다고 한다.

 

이 종은 17세기 후반의 사실적인 범종 양식을 잘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종일 뿐 아니라, 생동감 넘치는 용뉴는 조선 후기 조각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5.봉령사 석조삼존불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1호

지 정 일 1994.10.29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248 봉령사

시 대 고려시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봉령사 대웅전 뒤편 언덕에 건물을 지으려고 땅을 파다가 출토된 삼존불이다. 삼존불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는데, 모래가 많이 섞인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부분적으로 훼손이 심하다.

 

각각 아래로 향한 연꽃잎이 새겨진 대좌를 가지고 있으며, 1구는 좌상이고 2구는 입상이다. 앉아 있는 본존불을 중앙에 두고 좌우에 서 있는 협시불을 배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존불은 민머리에 양쪽 귀와 목이 짧으며, 돌이 닳아서 희미하게 보이지만 얼굴은 원만한 모습이다. 옷은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고,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놓았으며 왼손은 가슴에서 손바닥을 안으로 향하게 했다. 두 협시불 역시 본존불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오른손을 밑으로 내려 옷주름을 잡고 있는 점이 다르다.

 

각 부분의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6.봉녕사 불화(신중탱화.현왕탱화)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2호

지 정 일 1994.10.29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248 봉녕사 
시 대 조선시대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족자나 액자의 형태로 만들어서 거는 불화의 한 종류이다. 봉령사 약사전 안에는 2폭의 탱화가 안치되어 있는데, 신중단에 모셔둔 신중탱화 1폭과 현왕단에 모셔둔 현왕탱화 1폭이 그것이다.

 

신중탱화는 가로 168㎝, 세로 178㎝의 크기로, 비단 바탕에 채색하였다. 그림은 위쪽에 제석과 범천이 무리를 거느리고 있는 모습을, 아래쪽에 중앙의 위태천을 중심으로 팔부신장과 용왕, 금강상 등을 그려놓았는데, 각 상들의 배열과 채색이 우수한 조화를 이룬다. 제석과 범천은 석가불을 보좌하는 보살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의 성격을 띤다. 위태천은 남쪽을 지키는 여덟 장군 중 하나로 역시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이다. 그림의 내력을 적은 기록으로 보아, 조선 고종 28년(1891) 화사 광조가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왕탱화는 가로 131㎝, 세로 104㎝의 크기로, 역시 비단에 채색하였다. 현왕탱화는 주로 19세기 이후에 유행했던 그림으로서, 사람이 죽은 지 3일 만에 재판을 하는 현왕과 그 무리들이 묘사되며, 시왕도와 거의 비슷한 배열을 하면서 지옥 장면만 생략한다. 이 그림 역시 중앙에 현왕(염라대왕)을 중심으로 좌우에 판관·녹사 등을 배치하였는데, 약사전에 함께 걸려 있는 다른 탱화들과는 구도나 채색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화폭 아래쪽의 기록을 통해 고종 15년(1878) 화사 완선이 제작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7.박유명 초상 모본

 

종 목  문화재자료  제142호

지 정 일 2009.03.1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영통구 창룡문길 443 수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원본인 보물 제1489호 박유명 초상화를 이모한 초상으로 원본에 충실하며, 17세기 공신도상 중 정사공신상과 진무공신상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관광지)

 

1.광교산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상광교동 , 하광교동 

 

광교산은 수원의 북쪽에서 오는 찬바람을 막아주며 시가지를 품에 안고 있는 수원의 주산으로 원래 이름은 광악산이었으나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광교산으로 명명되었다고 전해진다. 광교산은 경부고속도로와 서울-수원간 도로 사이에서 남북으로 약 2㎞ 정도에 걸쳐 뻗어있는 산으로 수원시 상광교동에 속해 있다. 산의 능선이 매우 한적하면서도 완만하고 사이에 수목이 우거져있어 산림욕을 하거나 당일코스로 오붓하게 산행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옛부터 광교산은 수원 8경의 하나로 불렸는데 광교적설이라 하여 광교산에 눈이 내려 나무에 수북히 쌓여 있는 경치의 아름다움은 8경 중에서도 첫 번째로 손꼽혔다. 1994년까지만 하여도 가을(1개월)과 봄(3개월)에는 산불 우려로 전면 입산 통제하였으나, 1995년 가을부터는 주민 휴식 공간 제공과 여가선용 기회 확대를 위해 연중 개방하고 있으며, 훼손된 등산로변과 자연경관을 산림자연환경 스스로가 회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2003년 2월 1일부터 3년 단위 단계적으로 광교산 휴식년제를 실시 중이다.

 

2.원천유원지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원천동 , 이의동, 하동 일원 

 

원천유원지는 119만평의 광활한 면적에 두 개의 저수지와 숲이 우거진 야산을 자원으로 조성하였으며, 유원지 내에는 보트 327척, 수상가옥 5척, 2개의 수영장, 유원지 회주도로, 신대저수지, 낚시터 등이 있고 수목이 우거진 곳에 대규모 야영장, 심신단련장, 원천그린랜드, 원천호수랜드, 수상을 지나는 케이블카와 관광호텔 등 관광시설 조성사업들이 진행 중에 있다.

 

원래는 농업용수용도인 인공호수로 개발되었는데 "먼내"라고 하여 잉어낚시터로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0.52㎢ (윗방죽과 아랫방죽)나 되는 넓은 호수와 주위를 둘러싼 알맞은 높이(10m)의 구릉, 우거진 송림 등이 조화를 이루어 피서 · 관광지로 각광을 받았다. 주변에 과채단지 등도 있어 농촌의 풍미를 즐기기에도 적당한 호반 유원지이다.

 

3.수원온수골온천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권선구 권선동 1296-5(권선 3지구내) 

 

수원온수골온천은 지하 700m 암반에서 끌어올린 100% 천연온천수를 사용하였으며, 중탄산나트륨성분으로 물이 부드럽고 자극이 적어 피부에 탄력을 주어 매끄러워지는 효과와 촉촉하고 부드러워지는 특성이 있다.

 

4.수원 효원공원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1117 

 

1994년 효를 상징하는 각종 기념물을 세워 조성하였다. 어머니상 등 어린이들에게 효에 대한 마음을 일깨워 줄 수 있는 여러가지 조각상을 관람할 수 있다. 자매도시 제주시를 상징하는 제주거리가 조성되어 있으며 전통팽이게임장도 들어서 있다. 잔디밭은 무료결혼식장으로도 활용된다. 농구장과 배드민턴장·족구장 등을 갖춰 청소년들이 많이 찾는다. 1998년 7월 16일에는 청소년들을 위한 푸른쉼터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한편 공중화장실은 도내에서 가장 쾌적하고 아름다운 화장실로 손꼽힌다.

 

1999년 6월 조성된 제주거리는 길이 160m, 너비 3m로 돌하르방과 제주탄생신화의 주인공인 설문대할망상·해녀상 등이 있고 제주도 전통초가 모형과 한라산 노루상·정낭 등이 설치되어 있다. 거리주변은 제주도 나무로 조성하였으며 길도 제주도의 돌로 포장하였다. 한편 제주시에서는 우당도서관 내에 수원 화성 모형을 설치하였다. 2000년 1월 1일에는 시민 1천명의 손도장을 받아 밀레니엄조형물을 세웠다. 공원 입구에서 경기도문화예술회관의 야외음악당에 이르는 430m거리는 문화관광부에서 문화의 거리로 지정하였다. 이 거리에서는 수원예술제 등 각종 문화행사가 열린다. 수원시외버스터미널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있으며, 인근에 수원성곽과 융건릉·용주사·광교유원지· 경기도문화예술회관·수원월드컵경기장 등이 있다.

 

공원에서 주택은행 동수원지점 맞은편까지 너비 15∼20m, 길이 440m의 거리는 나혜석거리이다. 길 좌우로 벤치와 카페·레스토랑 등이 들어서 시민들의 도심 휴식터로 각광을 받는다. 이 거리는 수원에서 출생하여 우리나라 첫 여성 서양화가가 된 나혜석 (1896∼1948)을 기념하여 조성한 곳이다. 조명과 음향시설을 갖춘 만남의 광장과 분수대 등이 있으며, 음악공연과 전시회·행위예술을 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5.인계예술공원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1128 

 

수원시의 팔달구에 자리한 인계예술공원은 명칭이 말해주듯 휴식과 음악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다. 울창한 소나무숲 등 조경이 잘된 이 공원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야외 공연장인 수원야외음악당도 들어서 예술공원의 골격을 갖추고 있다. 또한 경찰의 수시순찰로 개장 이래 범죄발생이 없는 것도 인계예술공원의 자랑이다.

무엇보다도 인계예술공원의 백미는 야외음악당이다. 야외음악당 건물 내부에는 수원시립교향악단, 시립합창단의 전용연습실과 분장실 등이 있고 각 홀의 구조와 스피커가 조화를 이루어 잔디광장의 어디서나 최고의 음향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1996년에는 한국 건축 문화 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6.나혜석거리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시도 중 1-25호선, 나혜석 거리) 

 

나혜석 거리는 수원 태생인 최초의 한국 여성 서양화가 정월 나혜석 여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약 300m가량의 문화 거리로 문화예술회관, 효원공원, 야외 음악당 등을 연결하는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로 내 분수대, 음악이 흐르는 화장실, 조경수가 잘 조성되어 있는 보행자 전용 도로로서 거리 공연과 같은 다양한 볼거리, 주변의 전문식당가로 먹거리가 산재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문화와 만남이 공존하는 거리이다.

 

* 음식문화촌
경기도가 지역일부를 2006년에 음식문화 시범거리로 지정 삼계탕, 왕갈비, 냉면 등 향토음식을 맛볼 수 있다.

 

7.팔달공원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산1 

 

해발 128m로 수원의 주산인 팔달산과 화성을 내포하고 있는 공원으로, 팔달산회주도로변 벚꽃길과 생활체육시설이 다양하게 있어 시민 체력 증진 기여 및 산책로 등 화성을 찾는 관광객 및 인근 주민들의 쉼터로 매우 좋은 곳이며 장안공원 및 화서공원이 인접하여 있어 함께 이용할 수 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김준룡 장군 전승지 및 비


*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 제38호 * 소 유 : 국 유
* 위 치 : 수원시 장안구 상광교동 산41번지
* 크 기 : 가로 40㎝, 세로 135㎝ * 재 료 : 자연암벽
* 시 대 : 조선조 중기 및 후기

수원시 장안구 하광교동 광교산 중간쯤 올라가면 호항골이 있다. 이곳에는 큰 바위가 있으며 바위에는 글자가 음각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곳을 의성탑이라고도 불러오고 있다. 광교산의 높이는 582m로 고려시대에는 89암자가 있었다고 하여 큰 산으로 일러오고 있다.

조선조 17대 인조 14년(1636)에는 만주에서 일어난 후금, 즉 청나라의 태조가 직접 지휘를 하면서 대군을 이끌고 우리나라에 침공을 해 온 것이다.
파죽지세로 쳐들어온 이 병자호란때 인조임금은 할 수 없이 한양에서 가까운 남한산성에 파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는 남한산성에 농성을 하고 인조대왕을 포위한 호군과의 치열한 공박전이 펼쳐지고 있을 때였다.

이 무렵 전국에서는 의병들이 일어났고 근왕병의 영을 받는 각 도에서는 근왕병을 인솔하고 남한산성으로 임금님을 구원하기 위하여 장도에 오른 때 였다.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있던 충양공 김준룡 장군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이 위급함을 알고 전라도 내의 근왕병인 휘하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북상하게 되었다.

장군은 복상하는 도중 충청도 직산을 경유하여 수원에 이르러 광교산에서 호군을 맞게 되었다. 호군은 대거 진로를 막으므로 김 장군은 작전상 호군을 광교산중으로 유인하여 백병전을 전개하여 호군의 대장인 백양고라 장군과 함께 호장 3명과 호군 태반을 무찔러 대승을 거두어 근왕병의 사기를 올렸다.

그러나 그후 김준룡 장군은 남한산성에까지 이르지 못한채 결국 호군의 역습으로 패하고 말았다. 채제공은 이러한 김준룡 장군의 승첩 사실을 듣고 전승지인 광교산 자연암벽에 전승을 기념하는 글을 새기도록 하였다고 한다.

전란이 끝나자 장군은 어영대장으로 등용되고 그후 1640년(인조 20)애 김해도호부사로 1년간 재직하다 영남절도사가 된다. 그러나 병이 깊어 사임하고 집으로 돌아가던중 10리쯤 여관에서 객사하니 향년 56세였다.

장군은 1587년(선조 20) 12월 24일에 출생하여 1642년(인조 20) 11월 5일 그 수를 마치는 동안 겸인지용의 용기와 슬기가 있었으며 의연하고 과묵하며 남달리 백성을 사랑하여 사욕에 치우치지 않는 성품이었다고 한다.


2) 지지대비

경기도유형문화재 24호

정조가 부왕 장헌세자의 원침인 현륭원 전배를 마치고 환궁하는 길에 이 고개를 넘으면서 멀리서나마 현륭원이 있는 화산을 바라 볼 수 있게 되므로, 의례이 이곳에 행차를 멈추게 하고 현륭원 쪽을 뒤돌아 보면서 이곳을 떠나기를 아쉬워하였기 때문에 정조가 행차가 느릿느릿 하였다 하여 지지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지대비는 순조 7년(1807년)에 건립되었는데 비는 판석방 부상이 비면이 있고, 지붕형 묘석이 비상에 얹혀 있으며 높이 1.5m에 폭이 0.6m이다. 지지대비는 홍문관 제학 서영보가 선하고 윤사국이 글씨를 썼으며 순전 기원 후 180년 정묘 12월에 건립하였다고 건립년월을 기록하고 있다.


3) 팔달문 동종 -경기도 유형문화재 69호

보물 제402호로 지정되어있는 팔달문 2층 문루에 동종이 있는데 이 종은 조선 숙종 13년에 만들어진 종으로서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사료(史料)나 문헌등은 없으므로 자세한 근거는 알 수 없다.
다만 종신에 수원부 수동면(현 화성군 동탄면) 무봉산 만의사에 봉단되어 있었던 것으로 전해온다. 동종으로는 큰 종이며 우리 나라의 전형적인 선종 양식을 취해 만들어진 종으로 보이며 전체적인 비례와 공간의 구조가 안정감이 있으며 세부적인 묘사수법도 매우 사실적이다.
이 종은 17세기 후반의 사실적인 범종 양식을 잘 갖추고 잇는 대표적인 종이며 생동감 넘치는 종뉴는 조선 후기 조각을 엿볼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다.


4) 노송지대

경기도 기념물 제19호

정조대왕이 현륭원 식목관에게 내탕금 1,000냥을 하
사하여 소나무 500주와 능수버들 40주를 식재하게 하
였던 곳으로 지지대에서 수원 국도를 따라 약 5㎞구간
에 이르는 낙락장송 지대이다.
현재는 파장동과 이목동 일대에 당시에 심었던 노송이
남아 있다.


5) 창성사지

수원시 향토유적

창성사지는 상광교 시내 버스 종점의 다리를 건너지 않고 음식점을 거쳐 그대로 30분쯤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예전에는 약수터인 미약 절터가 창성사지라고 잘못 알려졌었으나 얼마전 이곳 표지판을 옮겨 위치를 바로 잡았다. 창성사는 고려 시대 국사였던 진각국사가 수행을 하던 절이었다. 당시 광교산에는 89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창성사는 그 중에서도 큰 절이었다고 한다.

현재 창성사지의 건물은 남아 있지 않으나 축대와 건물기단, 주춧돌, 우물터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주변에는 기와 조각이 숱하게 발견되고 있다.

일부 현존하고 있는 2단의 기단석은 화강암과 잡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층기단은 톨이 2m정도니나 붕괴되어 약 100평의 사지를 이루고 있다.


6) 수원시 파장동 이병원 가옥


ㅇ 지정번호 : 중요민속자료 제123호

ㅇ 소 유 : 이 순 흥

ㅇ 위 치 : 장안구 파장동 383

ㅇ 재 질 : 목조 초가

ㅇ 시 대 : 조선시대 (1888년)

ㅇ 안채 대청 상량문에 의하면 1888년(광서 14년 무자 3월 18일 유사)건
축되었다. 집 뒤에는 얕으막한 산이 둘러있고 앞에는 조그만 개울이 흐른
다. 주변에 오래된 한옥이 많고 곳곳에 감나무가 심어져 있어 꽤 유서깊
은 마을임을 알 수 있으나 근래 도시화로 말미암아 주변경관이 많이 파괴
되었다.

집은 모두 초가집으로 지어졌는데 튼 ㅁ자형의 살림채와 바깥마당, 그
앞의 헛간채, 뒤란, 기타 광채들로 이루어졌다.

안채는 평범한 ㄱ자형집인데 보간격을 앞퇴를 둔 간반 크기로 했으며
건너방은 2간으로 만들어서 집머리를 ㄷ자로 약간 구부렸다. 대청은 2간
너비이고 안방은 상하방이며 골방은 없다.

구조는 대청 중앙부분이 긴보 5량이고 구들부분은 1고주 5량이며 부엌
은 평 4량으로 했다. 기둥은 네모이고 도리는 납도리이며 보는 양측면을
수직으로 반깎아 암기와를 한장 얹어두었으며 서까래는 아주 잘 다듬어져
있다. 평고대 위에는 빗물이 그 끝사이로 스며들지 않도록 흙을 발라두었
고 지붕은 초가인데 두께는 대단히 두꺼워서 한자 반 가량이며 그 끝이 부
른지붕으로 많이 숙였다. 안방 앞문은 가운데 정(井)자 살을 가진 불발기
쌍문으로 되었고 창은 용(用)자 창으로 꾸몄다. 민가로서는 전체적으로 법
식에 따라 정성껏 지은집이다.

사랑채 역시 곱은자꼴로 안채를 엇비슷하게 막은 ㄴ자를 이룬다.

사랑방이 위아랫방으로 안채와 직각되게 배치되고 대문이 부엌을 향하게
계획되었다. 마당 앞에는 헛간, 외양간, 구들이 배치되었다. 구조는 맞걸
이 3량 구조인데 다만 사랑방 부분만 1고주 5량으로 처리해서 구들 앞에 2
간 마루방을 시설하고 있다. 마루방은 보간격이 큰 반각으로서 특이한 점
은 바깥마당 부분의 창에 모두 덧문을 달아서 판장문으로 막고 있다는 점
이다. 이것은 19세기 말에 화적떼들의 피해가 너무 심했으므로 밖으로 통
하는 모든 문은 판장문으로 보호한 때문이다. 이 집은 사랑방의 보간격이
커서 용마루가 마치 낙타 등 모양의 율동을 가졌다.

바깥마당 맞은편에는 5간의 헛간채가 마련되었는데 건축년대는 20세기
중엽 정도로 추측된다. 살림채는 담장으로 둘러쌌지만 바깥마당은 사방으
로 트였고 헛간채 남쪽에 비켜서 마당 안으로 진입하는 판석통로는 입구임
을 암시하는 것으로 인상적이다,

뒤란에는 우물 및 향나무, 감나무, 단풍나무등이 심어졌고 구석에 단간
초가인 광채가 자리해서 민가 뒤란 정원시설의 정취를 한 껏 풍겨준다.

기타 살림채의 곁채들은 최근에 건축된 것들이고 여기 광채만이 안채와
거의 같은 건축년대로 보인다.


7) 궐리사(闕里祠)

오산역에서 궐동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면 도심지와는 다르게
논과 밭이 나온다. 왠지 고향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하는 마
을이다. 마을 한쪽에 새로 지은 아파트들이 있어 그느낌이 다소
줄어들긴 하지만 그래도 도시에 사는 우리들에게 이 마을은 고향
의 향수를 느끼게 한다. 지금은 비록 오산시 신장동에 속하는 작
은 마을에 불과하지만, 이 마을은 대단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마
을이다. 당연히 이 곳 어르신들의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

왜 이런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역시 역사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 지금은 외지 사람들의 유입으로 동족 마을의
형태를 잃어버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마을은 우리 나라에서 공
씨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일것이다. 공씨! 웬 공씨가 많이 살고
있지?하고 의아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곳은 동양의 가장 위
대한 사상가라고 일컬어지는 공자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공자라면 중국 사람인데 그 후손이 여기 살고 있다면 그들은 중국
사람이란 말인가 하고 또다시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
만, 여기에 사는 이들은 중국 사람이 아니고 당당한 대한 민국 사람
이다.

기록에 의하면 옛날 공자의 후손 일부가 우리 나라로 와서 수원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 '궐동'이다. 궐동이란
지명은 이곳에 있는 궐리사 때문에 만들어진 지명이 아니다. '궐동'
혹은 '궐리'는 [조선왕조실록]에도 그 지명이 나오고 있다. '궐리'
라는 말이 옛날 공자가 노나라에서 살던 고향의 이름이다. 그래서
이곳에 정착한 그의 후손들이 이 땅의 이름을 '궐리(闕里)'라고 부
른 것이 아닌가 싶다.

이곳에 궐리사가 세워지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정조 임금 때문이다.
정조 임금이 살아 계시던 시대에 이곳은 수원 땅이었다. 지금이야
도시의 발달로 옛 수원이 수원, 오산, 화성, 의왕 등으로 나누어 졌
지만 정조 대에만 해도 모두 수원 땅이었다. 정조는 자신의 부친인
사도세자의 묘소를 이곳 수원 읍치자리로 옮기고, 수원을 대도회로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궐리
사'를 창건하는 사업이었다. 비록 지금은 작아 보이는 건물이지만
'궐리사'창건의 의미는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정조는 즉의 16년이 되는 해 10월 3일에 이 곳의 지형을 그림으로 그
려 올리게 하여 땅의 형세를 확인한 후에 궐리 옛 터에 사당을 세우게
하고 조정 내각에 있는 공자의 성상을 모시게 하고 영당에 모셨던 진
영도 모시게 한 다음 궐리사란 편액을 친히 쓰겠다고 하였다. 정조의
이러한 지시로 궐리사의 공사는 시작하여 정조 17년 5월 12일에 완공
되었다. 이 비용은 진휼청의 창고에 유치된 돈 2천민(緡)을 떼어서 만
들었다. 공사가 완공된 직후인 6월 24일 이문원에 보관되어 있던 공자
의 진본을 이곳에 다 옮겨 모셨다.

이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당시 왕실에 공자의 진
본은 이것밖에 없었다. 하나 뿐인 진본을 당시 궁궐이 아닌 수원의 궐
리사에 보냈으니 정조의 수원 사랑이 얼마나 대단 했는지를 알 수 있다.
정조의 궐리사 창건의 의미는 수원을 당대 유학의 본산으로 삼고자 했
던 것이다. 한양이 아닌 수원을 유학의 본산으로 만들어 많은 유생들이
수원으로 와서 공부하고 성장하기를 바랬던 것이다. 결국 이 사업은 정
조의 왕권강화와도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궐리사 창건은 정조
가 차후에 수원으로 도읍을 천도할 계획이었다는 주장을 뒷받침 하는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조는 궐리사의 향사 의식을 직접 지시하
는 성의까지 보이고 있으니 정조가 이 궐리사에 대해 얼마나 많은 애착
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 왕과 조정에서는 이
곳 궐리사에 신경을 안 쓸 수 없었다. 순조 대에는 조정의 정승을 보내
제사를 올리게 할 정도였다.

물론 지금의 궐리사는 옛 영화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정조 대왕
의 흔적을 쫓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가보아야 할 장소이다. 이 궐리사를
나와 옆동네인 대호밭으로 가면 또 다른 볼거리가 있다. 바로 상투 틀고
있는 만년 소년 '김용문'씨가 운영하는 '빗재가마'가 그 곳이다. 가마라
고 해서 청자나 백자를 만드는 곳은 아니다. 바로 우리 백성들이 사용했
던 질그릇인 옹기를 만드는 가마다. 대호밭 한켠에 자신이 어린 시절 살
던 집을 그대로 이용해 가마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그집 앞마당은 온
통 항아리로 가득하다.

궐리사와 빗재가마라, 중국 문화의 '우리화'와 우리 문화의 '더욱 우리
화'. 한번 가서 눈으로 확인해 보자. 아이들을 데리고 가면 더욱 좋겠다.
그 녀석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8)융.건릉 (隆.建陵)

부모가 죽으면 자식은 땅에다 묻고,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가슴에 묻는다 라는 말이 있다. 즉 자식이 부모를 생각하는
것보다 부모의 자식사랑이 더욱 크다는 말이다. 이 말을 자
식들이 아니라고 부정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말
이 인간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일까? 물론 우리 모두에게 적
용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아직도 융건릉을 안 가본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거
짓말이겠지!'하고 되물은 적이 있다. 다녀왔다해도 초.중.
고 재학시절 소풍으로 다녀온 것이라 별 감동을 느끼지 못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자연 융건릉은 융릉과
건릉의 합친 말로 융릉은 사도세자의 능이고, 건릉은 정조
의 능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
다.

조선 시대에 능을 조성한다는 일은 국가의 가장 큰 일이고,
엄청난 국력이 들어가는 일이다. 지금이야 기계가 있어서
별거 아닐 수도 있겠지만, 모든것을 사람의 힘으로만 하던
그 시절에는 참으로 슬프도록 힘든 일이었다. 이런 고통스
러운 일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정조가 현륭원의 조성 공사
를 한 것을 보면 그의 한이 얼마나 절절한지 알 수 있다.

정조 나이 11살, 왕자라고 하여도 귀여움을 받고 싶어할 나
이였다. 하지만 그는 귀여움 받을 생각은 하지 못하였다.
할아버지인 영조와 아버지인 사도세자와의 갈등, 외할아버지
와 아버지의 갈등 등 어린 나이에 그가 겪은 생활은 또래 아
이들과는 너무도 달랐다. 이러한 갈등은 결국 사도세자의 죽
음으로 이어졌다. 너무나도 뜨거운 여름, 그 여름에 할아버
지가 아버지를 뒤주에 가두고 못질을 하는 모습을 본 어린 소
년은 한 평생 가슴에 못이 박혀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아버
지를 살려달라고 울며불며 매달리며 애원해도 소용없었다.
정조의 소년 시절은 이로써 끝이 난 것이다.

왕이 된 정조는 비로소 때가 되었음을 알고 아버지의 묘를 온
나라에서 가장 좋은 땅으로 알려져 왔던 곳으로 옮기고자 하
였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융건릉이다.

사도세자는 역적이 되어 죽음을 맞이한 것이기 때문에 왕자의
예로 장례를 치를 수도 없어서 양주 땅 배봉산의 후미진 곳에
작은 봉분으로 추라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사실 정조에게도 아
버지가 역적으로 죽은 사실은 자신의 왕 노릇에도 큰 장애로
남아있었다. 역적의 아들이 왕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기 때문이라도 더욱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온전한 곳에 묻어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렇
지만 정조는 이 문제 때문에 아버지의 묘를 옮긴 것은 아니었
으며, 진정한 정조의 뜻은 한 많은 아버지를 명당에 묻히게 해
주고 싶은 너무나 인간적인 바램이었다.

정조는 능의 조성으로 인해 백성들이 고통받는 것을 우려하여
막대한 돈을 들여 현재의 수원으로 이장하고 최고의 석수와 모
수로 하여금 조선시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었다.

이전에 능역에 동워되는 일은 국가에 대한 의무였기 때문에
임금을 주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정조는 백성들에게 노임을
주어 농사일을 못하는 것에 대해 보상을 해주었다. 아버지를
위해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자 하는 큰 뜻이 있었기 때
문이다. 이로써 사도세자의 안식처인 현륭원이 만들어지고, 정
조는 평생의 한을 풀게 되었다.

이후 정조는 갑작스런 죽음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매년 수원으로 내려왔고, 죽은 이후에도 평상시의
유언대로 아버지의 곁에 잠들었다. 아마도 살아 생전에 받지
못한 아버지의 따스한 정을 저승에서라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르
겠다. 정조는 현륭원에 올적마다 얼마나 울부짖었는지 목숨이
끊어지려 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닐 정도였다.

융건릉을 가는 길은 힘들지 않다. 차가 없어도 북문, 남문, 수원
역 정류장에서 24번 버스가 15분마다 있어 30분이면 충분하다.
차를 가지고 가면 병점에서 들어가도 되고 수원역에서 수원대학
앞으로 가도된다. 한번쯤 아이들과 함께 멀리 힘들게 나가지 말
고 도시락을 싸서 이곳에 가자. 그리고 아이들에게 정조가 가졌
던 부모에 대한 효심을 말해주자. 그것이 우리 아이들에게 그와
같은 아름다운 마음씨를 갖게 해주리라 믿는다. 두 부자의 묘소
앞에서 마음껏 뛰어 놀아도 결코 성내거나 노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말해줄 것이다."아버지는 하늘이다. 어버이
살아실제 섬기기를 다하여라"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유적)

 

1.화성


종 목  사적  제3호 
면 적 188,048㎡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일원
시 대 조선시대

화성은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쌓은 평산성이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정조 18년(1794)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쌓았다.

 

성벽은 서쪽의 팔달산 정상에서 길게 이어져 내려와 산세를 살려가며 쌓았는데 크게 타원을 그리면서 도시 중심부를 감싸는 형태를 띠고 있다. 성안의 부속시설물로는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들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특히 다른 성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창룡문·장안문·화서문·팔달문의 4대문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들과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은 점이 화성의 특징이라 하겠다.

 

화성은 쌓은 후 약 2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성곽과 시설물이 무너지기도 하고 특히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파손되었는데, 1975년부터 보수,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효심에서 근본이 되어 당파정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 그리고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화성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화령전


종 목  사적  제115호 
면 적 12,288㎡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 92-2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본받기 위하여 순조 1년(1801)에 수원부의 행궁 옆에 건물을 짓고 화령전이라 하였다.

 

처음 지어질 당시의 화령전은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정전인 운한각을 비롯하여, 이안청·재실·전사청·향대청·제기고·외삼문·내삼문·중협문이 있었다. 이 중 남쪽에 있었던 향대청과 제기고 건물은 남아있지 않다. 정전 현판의 글씨는 순조가 직접 쓴 것이다.

 

이곳에 속하는 건물들은 대부분이 정전인 운한각의 건축규범에 따라 지어졌다. 특히 이안청은 지붕이 있는 복도식으로 정전과 연결이 되어있어, 눈이나 비가 올 때도 젖지 않도록 하였다.

 

순조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으며, 직접 정조가 태어난 탄신일과 돌아가신 납향일에 제향을 지내기도 하였다. 제향은 1920년 일본인에 의해 정조의 초상화가 창덕궁으로 옮겨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궁궐에 지어진 다른 영전들과는 달리, 수원에 세워진 화령전은 대칭에 의한 격식과 기능에 따른 영역의 구분이 확보된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몇 채의 사라진 건물을 제외하면 비교적 좋은 상태로 보존되어 당시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3.화성행궁


종 목  사적  제478호 
면 적 37,268㎡
지 정 일 2007.06.08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6-2번지 외 
시 대 조선시대


행궁은 왕이 지방에 거둥할 때 전란, 휴양, 능원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다. 또 1790년에서 1795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그 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뽑히는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유수가 집무하는 내아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치루었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1801년 행궁 옆에 화령전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을 봉안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화성행궁은 일제 시기 이후 갖가지 용도의 건물로 이용되면서 그 모습을 잃게 되었다.

 

1995년부터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1996년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997년 봉수당 상량식을 거행하였다. 2006년에는 행궁앞 광장부지에 대한 시굴조사가 이루어져 명당수 호안석축과 신풍교 교대지가 확인되어 2007년에 새롭게 복원이 이루어졌다.

 

4.팔달문


종 목  보물  제402호  
지 정 일 1964.09.0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2가 138 등
시 대 조선시대


수원성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중국성의 모습을 본뜨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아 훨씬 발달한 모습을 하며 한국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이 문은 수원성의 남쪽문으로 이름은 서쪽에 있는 팔달산에서 따 왔다. 문루는 앞면 5칸·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문의 바깥쪽에는 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해 반원 모양으로 옹성을 쌓았다. 이 옹성은 1975년 복원공사 때 고증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또한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버려 지금은 성문만 남아 있다.

 

수원성 안쪽에 있는 여러 건물 중 가장 크고 화려하며, 발달된 조선 후기의 성문 건축형태를 고루 갖추고 있는 문화재이다.
 


5.화서문


종 목  보물  제403호  
지 정 일 1964.09.0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25-2 
시 대 조선시대


수원성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중국성의 모습을 본뜨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아 훨씬 발달한 모습을 하며 한국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화서문은 수원성의 서쪽문으로 문의 모든 시설과 크기는 동쪽의 창룡문과 거의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네모 반듯한 큰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위에 1층의 건물을 세웠는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되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 건물이고, 축대의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과 문의 앞쪽에 벽돌로 쌓은 반달모양의 옹성이 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구실을 하며 2중의 방어 효과를 갖는다.

 

또한 주위를 돌아가며 총이나 활을 쏘는 구멍이 뚫린 낮은 담을 쌓아 보호되도록 하였다. 옹성의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공심돈이 성벽을 따라서 연결되어 있다. 공심돈은 속이 텅 비었다는 뜻으로 지금의 초소 구실을 하던 곳이다. 안에는 계단을 따라 오르내릴 수 있고 층마다 바깥을 향해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도록 구멍이 있어 철저한 방어가 되도록 하였다.

 

한국의 다른 성곽 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시설로서, 구조도 특이하며 화서문을 중심으로 일대의 경치에 한층 더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6.수원 광주이씨 월곡댁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123호 

지 정 일 1984.01.10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383 
시 대 조선시대


안채·바깥채·헛간·광이 울안에 자리하고 있는 초가집이다. 안채의 상량문에 의하면 조선 고종 25년(1888)에 지어진 것으로 되어있다. 집 뒤로는 얕은 산이 둘러져 있고 앞으로는 조그마한 개울이 흐른다. 주변에 오랜 한옥이 많고 감나무가 있어 옛스러운 맛을 지니고 있다.

 

안채는 평범한 ㄱ자형으로 부엌·대청·안방·건넌방으로 되어있다. 초가인 지붕은 두께가 대단히 두껍다. 동편의 끝칸이 부엌이고 이어 안방이 있다. 바깥채와 안채는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ㅁ자형으로 배치되었다. 경기도의 서해안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배치형태이며, 이 마을의 대부분 집도 여기에 속한다. 사랑방은 위아랫방을 안채와 직각으로 배치하였고 대문만이 부엌을 향하였다. 마당 앞에는 헛간·외양간이 있다.

 

바깥마당 맞은편의 헛간채는 20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살림채는 담장으로 막았지만 바깥마당은 사방으로 트여 있고, 헛간채 남쪽에 비켜서 마당 안으로 출입하는 입구가 인상적이다. 광채는 안채와 거의 같은 건축 연대를 보인다.

 

부엌 가까이 우물이 있고 뒷동산쪽으로 감나무·단풍나무 등을 심어 운치를 살렸다. 집을 지은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학문적인 가치가 있다.

 

7.김준룡장군 전승지 및 비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38호

지 정 일 1977.10.1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하광교동 산1-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무신 김준용(?∼1641)이 중국 청나라 군대와 싸워 이긴 것을 기념한 비가 있는 곳이다.

 

김준용은 선조 41년(1608)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전라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군사를 이끌고 용인의 광교산에서 중국 청나라 군대를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이후 지방관과 병마절도사를 지냈고 죽은 후에는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정조 18년(1794) 수원성 축성의 총 책임을 맡았던 영의정 채제공이 그의 업적을 전해듣고 전승터였던 광교산 바위에 전승을 기념하는 글을 새기도록 하였다고 한다.

 

8.심온선생 묘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53호

지 정 일 1979.09.10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이의동 산13-10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초기의 문신 안효공 심온(?∼1418) 선생의 묘소이다.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 조정에서 벼슬을 하다가 조선 왕조 건국에 참여하였다. 태종 11년(1411)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포악한 정치를 일삼던 박영우를 파직시키고 대사헌이 되어 관의 기강 확립에 힘썼다. 세종이 즉위하자 국왕의 장인으로서 영의정이 되었다. 태종 18년(1418)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 도중에 태종의 병권장악을 비난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의주에서 체포되어 수원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 사건은 국왕의 장인으로서 세력이 커짐을 염려한 태종과 좌의정 박은 등이 거짓으로 꾸민 사실이 후에 밝혀지게 되어 세종은 관직을 복직시키고 안효라는 시호를 내렸다.

 

묘역 안에는 돌로 만든 석등과 좌우에 문인석 1쌍이 배치되어 있고 안평대군이 글을 쓴 묘비가 있다. 묘역 아래에는 9대손 심하단이 글을 짓고 서명균이 글씨를 쓴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세워져 있다.

 

9.팔달산 지석묘군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25호

지 정 일 1991.10.12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권선구 교동 산3-1 
시 대 청동시대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산 남쪽 기슭에 바둑판식 고인돌 4기가 있는데, 가장 큰 것은 길이가 1.8m이고 두께가 0.45m이다. 수원시립중앙도서관 오른쪽 기슭을 따라 팔달산으로 조금 오르다보면 평평한 구릉 위에 1호·2호 고인돌이 서로 가까이 있다. 이로부터 위로 100m쯤 떨어진 곳에 3호·4호가 있는데 3호 고인돌은 하부구조가 드러나 있고 옆에 덮개돌로 보이는 돌이 흙속에 묻혀 있다. 

 

10.아담스기념관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75호

지 정 일 2001.01.22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10번지 
시 대 일제강점기


대한제국 말 수원지방에는 감리교가 들어오면서 수원과 남양 지역의 교회들이 많은 남녀 교육기관을 설립함으로써 이 지역의 근대화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삼일학교의 아담스 기념관은 기독교의 박애정신을 바탕으로 한 미국 아담스(Adams) 교회 신도들의 온정으로 신축되었기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름 붙여졌다.

 

수원지방 감리사였던 노블(W.A.Noble) 목사는 삼일학교가 설립초부터 교사도 없이 중포산 기슭의 교회 건물에 더부살이하고 있어 고통을 겪는 딱한 사정을 아담스 교회에 호소하였고, 교인들이 교사의 건립기금으로 20,000엔을 노블 목사를 통해 삼일학교 측에 전달하여 1923년 새 교사의 건립이 이루어졌다. 당시 교회의 신축 설계는 미국 아담스 교회 선교부에서 하였으며 공사는 중국인 왕영덕이 맡았다고 한다. 이 건물은 1940년에 새 교사인 고 최태영 기념관을 건립할 때까지 교실과 사무실로 사용하였으나 이후에는 삼일중학교의 본관으로 교장실과 교무실, 채플실, 기도실 등으로 사용하였다.

 

1988년에는 현관 부분을 수리하였고 1층 내부에 강관 기둥을 설치하여 보강하였으며 1997년에는 건물의 안전도와 결로원인을 찾아내기 위한 정밀안전진단을 실시한 바 있다. 최근에는 1층을 미술과 특별교실과 방송실, 창고 등으로 쓰고 있으며 2층에 화장실을 증축하여 재단사무실로 사용하고, 지하층은 농구부실로 사용하고 있다.

 

아담스 기념관은 우진각지붕의 2층 벽돌조 양옥으로 건물 한쪽에 치우쳐 현관이 위치하고 있다. 지하층에는 거칠게 다듬은 돌을 쌓고 1,2층은 적벽돌로 벽체를 쌓았으며 층간에 목조 마루틀을 설치하여 바닥을 꾸몄다. 지붕은 벽체 위에 목조 트러스(truss)를 올리고 널판을 깔아 함석판을 올린 구조이다. 수원지역에 세워진 기독교 선교학교(mission school)가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음을 고려해볼 때 이를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는 것이 바람직함.

 

11.수원축만제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200호

지 정 일 2005.10.17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436-1 
시 대 조선시대


화성의 서쪽 여기산 아래 축조한 저수지로 축만제둔의 관개시설로 만들어졌다. 정조23년(1799) 정조는 내탕금 3만 냥을 들여 축만제를 만들게 하고 수문 2곳을 갖추었다. 몽리면적은 232두락으로 화성 주변의 인공 저수지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으며 과학 영농의 본보기 시설물이다.

 

만석거와 만년제에 뒤이어 축조된 축만제는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화성 서쪽에 있어 일명 서호로 불리고 있으며 서호에 비치는 낙조로 유명하다.

 

12.여기산 선사유적지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201호

지 정 일 2005.10.17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256-1외 
시 대 청동시대


여기산유적은 서호 서쪽의 구릉에 있다. 1979~1984년까지 4차에 걸쳐 숭실대학교박물관에서 유적의 일부를 발굴조사하였다.

 

이 유적에서는 구멍무늬토기가 출토되는 청동기시대 집터와 경질무문토기와 두드림무늬토기가 출토되는 원삼국시대의 집터가 확인되었다. 집터의 시설 중 특징적인 것은 온돌시설의 초기형태라 할 부뚜막이 있는 화덕자리 시설이 확인되었고, 서까래와 볏집 지붕이 조사되어 당시의 가옥구조에 관한 귀중한 자료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생활용구인 토기류와 철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주거지내부에서 검게 탄 볍씨가 출토되어 서호 일대 주변 저습지대에서 벼농사를 하며 생업을 이어갔음을 알게 되었으며 나아가 수원지방 벼농사의 기원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13.수원향교

 

종 목  문화재자료  제1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권선구 교동 43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지방에 설립한 국립교육기관으로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동시에 담당하였다.

 

원래 화성군 봉담면 와우리에 있던 수원향교는 조선 정조 19년(1795)경 현 위치로 옮겨 세우고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향교는 앞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을 두고 뒤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을 둔 전학후묘의 배치를 하였다.

 

명륜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이며,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앞면 가운데 3칸에 문을 달았고 양쪽 2칸은 막혀 있다. 대성전은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고 동무와 서무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공자와 그의 제자 등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제사 의례에 적합하도록 앞면에 개방된 마루를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14.향미정


종 목  수원시 향토유적 제1호
지 정 일  86.4.8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251

시 대  조선시대


조선조 정조대왕이 화성 축성 당시 부근 농민들의 관개용수로 쓰기 위하여 인공호수를 동서남북에 축조한 것중 서쪽에 위치한 호수인 서호의 남쪽에 세운 정자로 낙조와 잉어가 유명했다고 한다. 당시 이 곳의 잉어는 특히 유명하여 궁중에 약용으로 진상했다고 하며 정 자의 이름은 소동파의 '항주의 미목'이란 시에서 딴 것이라고 한다.

 

15.창성사지

 

종 목  수원시 향토유적 제4호

지 정 일  1986.04.08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상광교동 산41

시 대  시대미상

수원시 상광교동 광교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지로 광교산의 주봉인 비로봉 남동쪽 자락에 있다. 현재는 폐사되었으며, 언제, 누가 창건하였는지 알 수 없다. 진각국사 탑비에 고려 우왕 8년(1382) 국사를 지낸 천희가 이 절에서 입적하였다는 사실만 알려질 뿐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

 

1951년까지 민가 형태의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소실되었다. 절터에는 건물기단과 주춧돌, 옥개석, 기와조각, 석축 등이 남아 있다. 1963.1.21 보물 14호로 지정된 이 비는 1965.6.9. 창성사지에서 팔달구 매향동 13-1번지로 이전되었다. 


 

16.정유선생 묘


종 목  수원시 향토유적 제6호
지 정 일  90.1.4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하동 408-1

시 대  조선시대


정유선생은 조선중기 중종 명종대의 문신으로 자는 공탁, 호는 양진당, 본관은 온양이다. 연산군 10년에 출생하여 무술년에 탁영시에 급제한 후 승문원에 처음으로 보하였으며 이후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하고 이어 동지사로 중국에 다녀온후 사헌부 대사헌으로 승진하였으며 한성부윤으로 전보하였다가 황해도 관찰사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 묘는 부인과 쌍분으로 묘역이 100여평이며 중앙에 묘비 1기와 상석1개가 있으며 문인석2기, 망주석2기가 배치되어 있다. 이 묘역은 1566년에 조성하고 묘비는 1586년에 건립하였다.

 

17.이목동 출토 석곽묘

 

종 목  수원시 향토유적 제7호

지 정 일  2006.12.26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영통구 창룡문길 443 수원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시대 
 

장안구 이목동에서 발굴조사되어 이전 · 복원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 무덤이다. 이목동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집터 2기, 통일신라시대 석곽묘 2기가 조사되었다.

 

유물은 청동기시대의 구멍무늬토기, 그물추, 가락바퀴, 돌칼 등과 통일신라시대의 굽다리완, 뚜껑달린 굽다리접시, 병, 완 등이 출토되었다. 

 

18.꽃뫼 제사유적지


종 목  수원시 향토유적 제8호
지 정 일  90.1.4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688-4

시 대  조선시대


수원시 중심 서쪽에 있는 서호천 근처의 낮은 구릉에는 꽃뫼 제사 유적지가 있습니다. 여러형태의 묘와 제사를 지내는 데 필요한 각종 용구들이 발견되어, 꽃뫼 제사 유적지라 부르고 향토 유적 제8호로 지정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제사 유적들은 철기 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것들이라 한다.

 

(유물)

 

1.창성사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

 

종 목 보물 제1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3-1

시 대 고려시대


 진각국사의 행적을 알리는 탑비로 창성사터에 있다. 직사각형의 비받침 위에 비몸돌을 세운 다음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비문을 새긴 비몸돌은 마멸이 심하고 오른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으며, 지붕돌은 경사면이 완만하다.

 

비문에는 진각국사가 13세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浮石寺)를 중수하는 등 소백산에서 76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이 실려있다. 입적한 다음 해인 우왕 12년(1386)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이 비가 세워졌다.

 

간략화된 고려 후기 석비의 형식을 보이고 있으며, 선봉사대각국사비(보물 제251호)와 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 신륵사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등과 비교할 만 하다. 글씨는 고려 전기의 힘있는 풍모가 사라진 투박한 것으로, 고려 후기의 글씨가 퇴보하였음을 보여준다. 비문은 이색이 짓고 승려인 혜잠이 글씨를 새겼다.

 

2.채제공 초상화(시복본)

 

종 목  보물  제1477-1호 
지 정 일 2006.12.29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선경도서관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사도세자의 신원 등 자기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 인물인 채제공의 초상화이다.

 

수원시 소장 <시복본(1792년작)>은 채제공 73세상으로 사모에 관대를 한 옅은 분홍색의 관복 차림에 손부채와 향낭을 들고 화문석에 편하게 앉은 전신좌상이다.

 

시의 내용대로 정조로부터 부채와 향낭을 선물 받은 기념을 표시하기 위해서인 듯 손을 노출시켜 부채와 향낭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연출되었다. 수원시에 함께 소장되어 있는 유지 초본 3점 또한 중요한 자료이며 향낭도 함께 남아 있다.

 

3.박유명 초상

 

종 목  보물  제1489호  
지 정 일 2006.12.29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영통구 수원역사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박유명(1582∼1640)은 1620년(광해군 12) 무과에 급제하고, 1623년에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 3등에 책록되고 그 뒤 당상선전관을 거쳐 오위장을 역임하였다. <박유명 초상>은 낮은 오사모를 쓰고 과장된 둥근 어깨를 하고 있으며 단령이 뒤로 뾰족하게 뻗친 모양, 바닥의 채전 등에서 17세기 공신 도상의 형상을 잘 보여준다.

 

이 초상과 함께 후대의 이모본으로 추정되는 작품이 있다. 이 이모본은 거의 동일한 형상이며 안료는 보다 선명하다.

 

<박유명 초상>은 17세기 공신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또한 호랑이 흉배의 무관초상화로서 주목된다. 그런데 이모본의 경우는 원본과 양식적으로 상이하며 작품의 수준도 다소 떨어지므로 원본 1점만을 지정한다.

 

ㅇ 규격(세로x가로) : 170 x 88.3cm 

 

4.팔달문 동종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9호

지 정 일 1976.07.0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영통구 창룡문길 443 수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팔달문 2층 누각에 걸려있는 높이 123㎝, 입 지름 75㎝ 크기의 동종을 이전한 것이다. 종을 매다는 용뉴에 1마리 용을 조각하였고, 그 아래 약간 오무라든 종의 몸체를 연결하였다. 전체적인 비례와 공간의 구조가 안정감을 준다. 용뉴에는 활짝 핀 꽃을 생동감있게 장식하였으며, 종의 위쪽에는 2단으로 정사각형의 구획을 나누고, 그 안에 범자를 양각하였다. 띠에 잇대어 4곳에 유곽과 보살상을 교대로 배치하였고, 유곽 둘레에 덩굴무늬를 새겼다. 돌출된 9개의 유두는 보상화무늬로, 가운데 1개만 유난히 도드라졌다.

 

종의 중간에는 이 종에 관한 내력이 기록되어 있고, 아래쪽에 보상화와 덩굴무늬를 새긴 띠가 있다. 명문에 의하면 이 종은 고려 문종 34년(1080)에 개성에서 만들었고, 조선 숙종 13년(1687)에 만의사 주지 도화승이 불교 의식에 사용하고자 다시 주조하였다고 한다.

 

이 종은 17세기 후반의 사실적인 범종 양식을 잘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종일 뿐 아니라, 생동감 넘치는 용뉴는 조선 후기 조각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5.봉령사 석조삼존불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1호

지 정 일 1994.10.29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248 봉령사

시 대 고려시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봉령사 대웅전 뒤편 언덕에 건물을 지으려고 땅을 파다가 출토된 삼존불이다. 삼존불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는데, 모래가 많이 섞인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부분적으로 훼손이 심하다.

 

각각 아래로 향한 연꽃잎이 새겨진 대좌를 가지고 있으며, 1구는 좌상이고 2구는 입상이다. 앉아 있는 본존불을 중앙에 두고 좌우에 서 있는 협시불을 배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존불은 민머리에 양쪽 귀와 목이 짧으며, 돌이 닳아서 희미하게 보이지만 얼굴은 원만한 모습이다. 옷은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고,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놓았으며 왼손은 가슴에서 손바닥을 안으로 향하게 했다. 두 협시불 역시 본존불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오른손을 밑으로 내려 옷주름을 잡고 있는 점이 다르다.

 

각 부분의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6.봉녕사 불화(신중탱화.현왕탱화)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2호

지 정 일 1994.10.29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248 봉녕사 
시 대 조선시대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족자나 액자의 형태로 만들어서 거는 불화의 한 종류이다. 봉령사 약사전 안에는 2폭의 탱화가 안치되어 있는데, 신중단에 모셔둔 신중탱화 1폭과 현왕단에 모셔둔 현왕탱화 1폭이 그것이다.

 

신중탱화는 가로 168㎝, 세로 178㎝의 크기로, 비단 바탕에 채색하였다. 그림은 위쪽에 제석과 범천이 무리를 거느리고 있는 모습을, 아래쪽에 중앙의 위태천을 중심으로 팔부신장과 용왕, 금강상 등을 그려놓았는데, 각 상들의 배열과 채색이 우수한 조화를 이룬다. 제석과 범천은 석가불을 보좌하는 보살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의 성격을 띤다. 위태천은 남쪽을 지키는 여덟 장군 중 하나로 역시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이다. 그림의 내력을 적은 기록으로 보아, 조선 고종 28년(1891) 화사 광조가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왕탱화는 가로 131㎝, 세로 104㎝의 크기로, 역시 비단에 채색하였다. 현왕탱화는 주로 19세기 이후에 유행했던 그림으로서, 사람이 죽은 지 3일 만에 재판을 하는 현왕과 그 무리들이 묘사되며, 시왕도와 거의 비슷한 배열을 하면서 지옥 장면만 생략한다. 이 그림 역시 중앙에 현왕(염라대왕)을 중심으로 좌우에 판관·녹사 등을 배치하였는데, 약사전에 함께 걸려 있는 다른 탱화들과는 구도나 채색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화폭 아래쪽의 기록을 통해 고종 15년(1878) 화사 완선이 제작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7.박유명 초상 모본

 

종 목  문화재자료  제142호

지 정 일 2009.03.1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영통구 창룡문길 443 수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원본인 보물 제1489호 박유명 초상화를 이모한 초상으로 원본에 충실하며, 17세기 공신도상 중 정사공신상과 진무공신상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관광지)

 

1.광교산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상광교동 , 하광교동 

 

광교산은 수원의 북쪽에서 오는 찬바람을 막아주며 시가지를 품에 안고 있는 수원의 주산으로 원래 이름은 광악산이었으나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광교산으로 명명되었다고 전해진다. 광교산은 경부고속도로와 서울-수원간 도로 사이에서 남북으로 약 2㎞ 정도에 걸쳐 뻗어있는 산으로 수원시 상광교동에 속해 있다. 산의 능선이 매우 한적하면서도 완만하고 사이에 수목이 우거져있어 산림욕을 하거나 당일코스로 오붓하게 산행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옛부터 광교산은 수원 8경의 하나로 불렸는데 광교적설이라 하여 광교산에 눈이 내려 나무에 수북히 쌓여 있는 경치의 아름다움은 8경 중에서도 첫 번째로 손꼽혔다. 1994년까지만 하여도 가을(1개월)과 봄(3개월)에는 산불 우려로 전면 입산 통제하였으나, 1995년 가을부터는 주민 휴식 공간 제공과 여가선용 기회 확대를 위해 연중 개방하고 있으며, 훼손된 등산로변과 자연경관을 산림자연환경 스스로가 회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2003년 2월 1일부터 3년 단위 단계적으로 광교산 휴식년제를 실시 중이다.

 

2.원천유원지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원천동 , 이의동, 하동 일원 

 

원천유원지는 119만평의 광활한 면적에 두 개의 저수지와 숲이 우거진 야산을 자원으로 조성하였으며, 유원지 내에는 보트 327척, 수상가옥 5척, 2개의 수영장, 유원지 회주도로, 신대저수지, 낚시터 등이 있고 수목이 우거진 곳에 대규모 야영장, 심신단련장, 원천그린랜드, 원천호수랜드, 수상을 지나는 케이블카와 관광호텔 등 관광시설 조성사업들이 진행 중에 있다.

 

원래는 농업용수용도인 인공호수로 개발되었는데 "먼내"라고 하여 잉어낚시터로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0.52㎢ (윗방죽과 아랫방죽)나 되는 넓은 호수와 주위를 둘러싼 알맞은 높이(10m)의 구릉, 우거진 송림 등이 조화를 이루어 피서 · 관광지로 각광을 받았다. 주변에 과채단지 등도 있어 농촌의 풍미를 즐기기에도 적당한 호반 유원지이다.

 

3.수원온수골온천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권선구 권선동 1296-5(권선 3지구내) 

 

수원온수골온천은 지하 700m 암반에서 끌어올린 100% 천연온천수를 사용하였으며, 중탄산나트륨성분으로 물이 부드럽고 자극이 적어 피부에 탄력을 주어 매끄러워지는 효과와 촉촉하고 부드러워지는 특성이 있다.

 

4.수원 효원공원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1117 

 

1994년 효를 상징하는 각종 기념물을 세워 조성하였다. 어머니상 등 어린이들에게 효에 대한 마음을 일깨워 줄 수 있는 여러가지 조각상을 관람할 수 있다. 자매도시 제주시를 상징하는 제주거리가 조성되어 있으며 전통팽이게임장도 들어서 있다. 잔디밭은 무료결혼식장으로도 활용된다. 농구장과 배드민턴장·족구장 등을 갖춰 청소년들이 많이 찾는다. 1998년 7월 16일에는 청소년들을 위한 푸른쉼터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한편 공중화장실은 도내에서 가장 쾌적하고 아름다운 화장실로 손꼽힌다.

 

1999년 6월 조성된 제주거리는 길이 160m, 너비 3m로 돌하르방과 제주탄생신화의 주인공인 설문대할망상·해녀상 등이 있고 제주도 전통초가 모형과 한라산 노루상·정낭 등이 설치되어 있다. 거리주변은 제주도 나무로 조성하였으며 길도 제주도의 돌로 포장하였다. 한편 제주시에서는 우당도서관 내에 수원 화성 모형을 설치하였다. 2000년 1월 1일에는 시민 1천명의 손도장을 받아 밀레니엄조형물을 세웠다. 공원 입구에서 경기도문화예술회관의 야외음악당에 이르는 430m거리는 문화관광부에서 문화의 거리로 지정하였다. 이 거리에서는 수원예술제 등 각종 문화행사가 열린다. 수원시외버스터미널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있으며, 인근에 수원성곽과 융건릉·용주사·광교유원지· 경기도문화예술회관·수원월드컵경기장 등이 있다.

 

공원에서 주택은행 동수원지점 맞은편까지 너비 15∼20m, 길이 440m의 거리는 나혜석거리이다. 길 좌우로 벤치와 카페·레스토랑 등이 들어서 시민들의 도심 휴식터로 각광을 받는다. 이 거리는 수원에서 출생하여 우리나라 첫 여성 서양화가가 된 나혜석 (1896∼1948)을 기념하여 조성한 곳이다. 조명과 음향시설을 갖춘 만남의 광장과 분수대 등이 있으며, 음악공연과 전시회·행위예술을 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5.인계예술공원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1128 

 

수원시의 팔달구에 자리한 인계예술공원은 명칭이 말해주듯 휴식과 음악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다. 울창한 소나무숲 등 조경이 잘된 이 공원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야외 공연장인 수원야외음악당도 들어서 예술공원의 골격을 갖추고 있다. 또한 경찰의 수시순찰로 개장 이래 범죄발생이 없는 것도 인계예술공원의 자랑이다.

무엇보다도 인계예술공원의 백미는 야외음악당이다. 야외음악당 건물 내부에는 수원시립교향악단, 시립합창단의 전용연습실과 분장실 등이 있고 각 홀의 구조와 스피커가 조화를 이루어 잔디광장의 어디서나 최고의 음향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1996년에는 한국 건축 문화 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6.나혜석거리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시도 중 1-25호선, 나혜석 거리) 

 

나혜석 거리는 수원 태생인 최초의 한국 여성 서양화가 정월 나혜석 여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약 300m가량의 문화 거리로 문화예술회관, 효원공원, 야외 음악당 등을 연결하는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로 내 분수대, 음악이 흐르는 화장실, 조경수가 잘 조성되어 있는 보행자 전용 도로로서 거리 공연과 같은 다양한 볼거리, 주변의 전문식당가로 먹거리가 산재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문화와 만남이 공존하는 거리이다.

 

* 음식문화촌
경기도가 지역일부를 2006년에 음식문화 시범거리로 지정 삼계탕, 왕갈비, 냉면 등 향토음식을 맛볼 수 있다.

 

7.팔달공원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산1 

 

해발 128m로 수원의 주산인 팔달산과 화성을 내포하고 있는 공원으로, 팔달산회주도로변 벚꽃길과 생활체육시설이 다양하게 있어 시민 체력 증진 기여 및 산책로 등 화성을 찾는 관광객 및 인근 주민들의 쉼터로 매우 좋은 곳이며 장안공원 및 화서공원이 인접하여 있어 함께 이용할 수 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타운하우스 매물 찾기 정말 어려우시죠?"

이제 이곳저곳 헤매지 마시고

하우스랩에서 한번에 해결하세요 !

좋은 위치 매물부터 오픈되지 않은 현장들까지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1:1 맞춤 정보를 제공합니다.

■ 이달의 추천매물 "북수원 더리안"

판교 운중더디바인, 동탄 글렌힐즈56

각 지역을 대표하는 최고급 단독주택단지

많은 분들이 기다리신

경기 북부 최고급 명품단독주택단지

북수원 더리안이 드디어 오픈합니다.

(1월 중순 예정)

압도적인 입지를 자랑하는

상위 1%를 위한 명품 단독주택단지

북수원 더리안

기회는 선착순 단 21분 !

아래 하우스랩을 통해 사전예약을 신청하시면

가장 빠르게 홍보관을 방문할 수 있습니다.

관심있는 분은 지금 바로 신청하세요.

망설이시면 기회는 없습니다.

지금 바로 검색창에

"하우스랩 더리안 사전예약"을 입력해보세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수원의 유적지로는 화성, 화령전 등이 있습니다

수원에는 관광지, 가볼만한 곳 정말 많이 있죠~

유명 관광 명소와 여행지 등 보기 편하게 정리되어 있는 곳 소개해드릴게요

여행 계획 짜실 때 도움 되실 거예요

아래 링크 참고해보시고 도움되셨길 바랄게요!

*

http://soonwidot.co.kr/rank/search.php?stx=%EC%88%98%EC%9B%90+%EA%B0%80%EB%B3%BC%EB%A7%8C%ED%95%9C%EA%B3%B3

수원의 유적지,유물,관광지

수원의 유적지, 유물, 관광지에 대해 좀 서주세요. ㅎㄷㄷ 방학숙제ㅠㅠ 내공 최대한 많이검(75) (유적) 1.화성 종 목 사적 제3호 면 적 188,048㎡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수원의유적지,유물,관광지(방학숙제요...

... 융건릉에대한정보랑요, 유물할만한것과관광지조사할만한거정보좀...ㅠㅠ 늦어도8원29일까지해주시면...ㅎㅎ 내공있습니다~!! (수원의 유적지) 1.화성 종 목 사적 제3호 지...

수원에있는 유적지,유물,관광지에 뭐가...

... 방학이 얼마 않남아서,, 급해요~~ 자세하게 부탁드려요^^ 수원에 있는 유적지 ,유물 ,관광지좀 알려주세요^^ 수원 화성 종 목 사적 3호 명 칭 화성 (華城) 분 류 성지(성곽)...

포항시의 유물,유적지,관광지

포항시의 유물,유적지,관광지좀 알려주세요. 필요없는 말,욕설,내공냠냠,저주글... 16.수원김씨 남계공파 종중문적 종 목 문화재자료 제368호 지 정 일 2002.07.15 소 재 지 경북...

천안의 유물,유적지,관광지 이름이랑...

천안의 유물 ,유적지, 관광지 이름이랑 설명 좀 가르쳐 주세요. 방학숙제라서 빨리 답변해주세야 해요. 방학이 8.27일 까지라 8.28까지 가져가야 되거든요. 신문처럼 만들려고...

경기도 안성 유적지, 유물, 관광지 등 좀...

저희 학교 방학 숙제가 경기도 안성시(제가 사는 지역) 유적지, 유물, 관광지등을 스크랩... (천주교 수원교구 공동묘지) 시내 5일장터(터미널 뒷골목 부근하고 삼부아파트 앞터...

서울의 관광지,유적지 알려주세요

서울의 관광지,유적지 갈켜주세염....내공은 아는대로... 유산위원회에서 수원 화성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석기시대의 유물 및 선사시대 영상 방영을 위한 50석...

경기도 고양시의 유적지관광지좀요...

경기도 고양시의 유적지관광지좀여!!!!!!!!1 제발요......... 몰아 수원 독산성에 포진하여 서울을 탈환하고자 경기... 등 유물이 많이 나와 아마도 백제 때 처음 축성되었던...

안양 유적지.명물 들 소개좀요

... 수원에선 화성이 유명한것처럼 안양에선 뭐가유명하죠? 안양의 명물로는 안양팔경이 있습니다. 안양의 유적지... 휴식처로서 관광지로서 매우 각광받는 지역의 하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