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의 대한것

울산의 대한것

작성일 2010.07.17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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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울산의 문화재

2. 울산의 인물

3. 울산의 축제

4. 울산의 전설

 자세히 부탁 드립니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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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문화재)

 

1.울주 천전리 각석

 

종 목 국보 제147호

지 정 일 1973.05.04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산210

시 대 신라

 

태화강 물줄기인 내곡천 중류의 기슭 암벽에 새겨진 그림과 글씨이다. 아래 ·위 2단으로 나누어 서로 다른 내용이 다른 기법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조각이 가득하다.

 

윗단에는 쪼아서 새기는 기법으로 기하학적 무늬와 동물, 추상화된 인물 등이 조각되어 있다. 사실성이 떨어지는 단순화된 형태인데 중앙부의 태양을 상징하는 듯한 원을 중심으로, 양 옆에 네 마리의 사슴이 뛰어가는 모습과 맨 왼쪽의 반인반수(머리는 사람, 몸은 동물인 형상)상이 눈에 띈다. 표현이 소박하면서도 상징성을 갖고 있는 듯한 이 그림들은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진다.

 

아랫단은 선을 그어 새긴 그림과 글씨가 뒤섞여 있는데, 기마행렬도, 동물, 용, 배를 그린 그림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기마행렬도는 세 군데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간략한 점과 선만으로도 그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배그림은 당시 신라인의 해상활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글자는 800자가 넘는데 왕과 왕비가 이 곳에 다녀간 것을 기념하는 내용으로, 법흥왕대에 두 차례에 걸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 중에는 관직명이나 6부체제에 관한 언급이 있어 6세기경의 신라사회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사람이 이루어 놓은 작품으로, 선사시대부터 신라시대까지의 생활, 사상 등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어느 특정 시대를 대표한다기보다 여러 시대의 모습을 담고 있어 더욱 의미가 깊은 유적이다.

 

 

2.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종 목 국보 제285호

지 정 일 1995.06.23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산234-1

시 대 기타

 

 높이 3m, 너비 10m의 ‘ㄱ’자 모양으로 꺾인 절벽암반에 여러 가지 모양을 새긴 바위그림이다. 바위그림을 암각화라고도 하는데, 암각화란 선사인들이 자신의 바램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커다란 바위 등 성스러운 장소에 새긴 그림을 말한다. 전세계적으로 암각화는 북방문화권과 관련된 유적으로 우리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1965년 완공된 사연댐으로 인해 현재 물 속에 잠겨있는 상태로 바위에는 육지동물과 바다고기, 사냥하는 장면 등 총 75종 200여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육지동물은 호랑이, 멧돼지, 사슴 45점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호랑이는 함정에 빠진 모습과 새끼를 밴 호랑이의 모습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멧돼지는 교미하는 모습을 묘사하였고, 사슴은 새끼를 거느리거나 밴 모습 등으로 표현하였다. 바다고기는 작살 맞은 고래, 새끼를 배거나 데리고 다니는 고래의 모습 등으로 표현하였다. 사냥하는 장면은 탈을 쓴 무당, 짐승을 사냥하는 사냥꾼,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어부 등의 모습을 묘사하였으며, 그물이나 배의 모습도 표현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선사인들의 사냥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길 기원하며, 사냥감이 풍성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바위에 새긴 것이다.

 

조각기로 쪼아 윤곽선을 만들거나 전체를 떼어낸 기법, 쪼아낸 윤곽선을 갈아내는 기법의 사용으로 보아 신석기말에서 청동기시대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과 점을 이용하여 동물과 사냥장면을 생명력있게 표현하고 사물의 특징을 실감나게 묘사한 미술작품으로 사냥미술인 동시에 종교미술로서 선사시대 사람의 생활과 풍습을 알 수 있는 최고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3.망해사지 석조부도

 

종 목 보물 제17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청량면 율리 산16

시 대 통일신라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이 2기의 부도는 망해사의 법당 북쪽에 동·서로 자리하고 있는데, 동쪽 부도는 파손되어 있던 것을 1960년 11월 복원한 바 있다. 서로 규모와 양식이 같으며, 각 부분이 8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탑신을 받치는 기단은 3개의 받침돌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받침돌은 8각으로 구성하고, 그 위로 연꽃무늬를 조각한 돌을 올렸으며, 가운데받침돌은 높은 8각의 단 위에 다시 낮은 3단이 층을 이뤄 받치고 있다. 윗받침돌은 옆면에 16잎의 연꽃잎을 이중으로 조각하였는데 그 모양이 화사하다.

 

탑신은 각 면마다 창의 형태를 새겼고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으며, 4면에는 문짝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처마와 추녀가 수평으로 넓으며, 각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았던 작은 구멍들이 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 부분은 두 탑 모두 없어졌으나, 그 일부가 별도로 보관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전체적인 구성이나 조각수법이 다소 빈약하지만 각 부의 비례가 보기좋은 아름다운 작품이다.

 

 

4.청송사지 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38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청량면 율리 1202, 1203-1

시 대 통일신라

 

 남암산 아래에 있는 청송사 절터에 있는 삼층석탑이다. 이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은 각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기고, 마감돌 위에 다른 돌로 2단의 모난 괴임돌을 끼워서 각각 윗돌을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이 특히 길고 크며, 2층 몸돌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각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이 있고, 추녀가 두꺼워 지붕 네 귀퉁이의 치켜올림이 약하며 처마는 수평으로 길이가 짧다.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을 받치는 노반만 남아 있다.

 

이 탑은 기단의 짜임새가 정연하지 못하고, 1층 몸돌이 지나치게 큰 반면 지붕돌이 작아서 좋은 비례로 보기 어려우나, 지방에 분포된 신라 석탑의 한 예로 주목할 만하다. 또한 1층 몸돌의 괴임돌이 다른 돌로 되어 있는 점은 탑의 특이한 조형과 아울러 9세기 이후에 조성된 것을 짐작하게 한다.

 

1962년 해체, 수리할 당시 위층 기단에서 동제사리함이 발견되었다. 그 안에 청동여래입상 1구를 비롯하여 유리구슬 16점, 수정으로 만든 곱은옥 1점, 관옥 1점 등 30여 점이 발견되었다.

 

 

5.천황산 요지군

 

종 목 사적 제129호

지 정 일 1964.06.10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산143-1

시 대 조선시대

 

 요지는 도자기나 기와·그릇을 만들어 굽던 가마터를 말한다.

 

천황산의 봉우리 중 평평한 고원지대에 위치하는 백자 가마터로 5∼6기가 있다. 높이1,100m가 넘는 험준한 산의 꼭대기부분에 있어,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가마터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발견되는 백자조각들은 대접·사발·바래기·접시·술잔조각 등이 대부분이며, 접시 중에는 아가리가 안으로 말리거나 밖으로 말려있는 것도 있다. 품질이 좋은 편이 아닌 중·하품의 백자를 굽던 곳으로, 순백자 뿐 아니라 검은 빛깔로 그림이 그려진 철화무늬 백자조각들도 발견된다. 철화무늬는 소박하고 화려하지 않은 풀무늬 또는 원 모양과 원점 모양의 무늬가 그려져 있다.

 

경상도 해안 가까운 지역에서 드물게 발견되는 조선 중기의 지방 철화백자 가마터로 의의가 있다.

 

 

6.언양읍성

 

종 목 사적 제153호

지 정 일 1966.12.27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언양읍 동부리,서부리

시 대 조선시대

 

예부터 경주·울산·밀양·양산과의 교통 중심지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던 옛 언양 고을의 읍성이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처음에는 흙으로 성을 쌓았던 것을 이후 연산군 6년(1500)에 현감 이담룡이 확장하여 돌로 다시 쌓았다. 평지에 네모꼴로 만들어진 보기 드문 평지성으로, 원래는 둘레가 약 1,000m, 높이가 4m나 되었으며 성안에는 4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성을 쌓았던 큰 돌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성벽은 조선 전기 읍성 축조의 일반적인 방식이 반영되었다. 큰 돌을 대충 갈아 쌓은 후 빈 공간에 잔돌을 채워 성벽을 튼튼하게 하였다.

 

언양읍성은 전국의 중요 읍성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던 14∼15세기의 축조방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에 나타나는 축성법 변천 모습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7.울산병영성

 

종 목 사적 제320호

지 정 일 1987.07.18

소 재 지 울산 중구 서동 149-8외

시 대 조선시대

 

경상좌도의 병마절도사가 머물던 성으로, 조선 태종 17년(1417)에 쌓은 해발 45m 이하의 낮은 구릉을 이용해 골짜기를 두른 타원형의 성이다.

 

초기에는, 성벽 위에서 담처럼 생겨 몸을 숨긴 채 총이나 활을 쏘는 시설인 여장을 비롯한 기본적인 시설만 갖추었다. 그 후 세종 때에 이르러 국방력 강화를 위해 성을 보호하고 공격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옹성·적대·해자 등 여러 방어시설을 설치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당시 성의 둘레는 3,723척(약 1.2㎞)이고, 높이는 12척(약 3.7m)이며, 성 안에는 우물·도랑·창고 등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의 영성이며, 조선시대 성곽연구에 중요한 유적이다.

 

 

8.울주 검단리 유적

 

종 목 사적 제332호

지 정 일 1990.08.21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웅촌면 검단리 산62외

시 대 청동시대

 

 이 유적은 청동기시대의 대규모 집단 마을터로서 낮은 구릉의 비탈면에 위치한다.

 

마을 둘레에 못(환호)을 파 놓았는데, 이것은 당시 마을의 방위개념을 보여주는 자료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V’형태로 판 이 못은 현재 길이가 약 300m, 너비 50∼200㎝, 깊이 20∼150㎝ 정도이며, 이전에는 더 깊고 넓었을 것으로 보인다. 집자리와 움집터가 확인되었고 다양한 토기류와 석기류, 가락바퀴(방추차), 그물추 등 약 4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마을의 개념을 나타내는 못의 발견, 각종 유물들로 인해 당시의 생활상을 살필 수 있어 중요하며 청동기시대 연구에도 큰 역할을 하는 가치있는 곳이다.

 

 

9.울산동헌 및 내아

 

종 목 시 유형문화재 제1호

지 정 일 1997.10.09

소 재 지 울산 중구 북정동 349

시 대 조선시대

 

동헌은 조선시대의 지방장관인 원이나 수령들이 공적인 일을 하던 중심 건물을 말한다. 울산 동헌은 울산이 부·현·도호부 등으로 자격이 오르거나 떨어질 때마다 옮기거나 폐쇄하거나 새로 지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선조 32년(1599)에 울산이 부로 승격된 후 숙종 7년(1681)에 부사 김수오가 지었으며, 숙종 21년에 김수오의 아들 김호가 ‘일학헌’이라 이름지었다. 그 뒤 영조 39년(1763)에 부사 홍익대가 다시 지어서 현판을 ‘반학헌’이라 고쳐 달았다고 하나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영조 36년에 다시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헌의 규모는 앞면 6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또한 관청의 안채인 내아는 앞면 6칸·옆면 1칸의 ㄱ자형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울산 동헌은 병마절도사가 머물던 관청·수군절도사가 머물던 관청과 더불어 울산의 대표적인 관청이었으며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다.

 

 

10.울산향교

 

종 목 시 유형문화재 제7호

지 정 일 1997.10.09

소 재 지 울산 중구 교동 171-1

시 대 조선시대

 

 향교란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께 제사지내고, 지방 백성들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했던 국립교육기관을 가리킨다.

 

울산향교는 선조(재위 1576∼1608) 때 처음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다. 그 후 효종 3년(1652)에 현 위치로 옮겨 다시 지은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자를 비롯한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학문을 연마하던 명륜당을 비롯하여 동무와 서무, 동재와 서재, 청원루, 전사청, 전교실 등의 건물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로부터 토지와 서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30명의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적 기능은 사라지고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현재 이곳에서 한문서당을 운영하고 있다.

 

 

11.언양향교

 

종 목 시 유형문화재 제8호

지 정 일 1997.10.09

소 재 지 울산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 1086

시 대 조선시대

 

언양향교를 처음 세운 시기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반월산 아래에 지었고 이후 여러 차례 옮겨 지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 숙종 22년(1696)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 대성전을 지었으며, 숙종 26년(1700)에는 명륜당과 동재·서재를 지었다. 지금의 건물들은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것이다.

 

낮은 언덕을 등지고 평지에 지었으며, 교육공간을 앞쪽에, 제사공간을 뒤쪽에 둔 전학후묘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건물이 배치되어 있지 않고 명륜당 축과 대성전 축이 꺾여져 있다. 이는 향교를 옮겨 지을 때 대성전을 먼저 지어서 뒤에 지은 명륜당과 축이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로는 제사 공간으로 여러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대성전,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 학생들의 생활공간인 동재와 서재, 그리고 내삼문·외삼문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책·노비 등을 지급받아 운영하였지만 지금은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있다. 향교의 입구 양쪽에 조선시대에 세운 선정비들을 볼 수 있다.

 

 

12.남목마성

 

종 목 시 기념물 제18호

지 정 일 1998.10.19

소 재 지 울산 동구 동부동 산187-1외 14필지

시 대 조선시대

 

 울산광역시 동구에 있는 마성은 말이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목장 둘레를 돌로 막아 쌓은 담장으로, 높이 1.5m∼2m이고, 둘레는 1930보에 이른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사용할 말을 기르고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주로 해안가와 성 등을 중심으로 목장을 설치했다. 이 지역의 원래 지명은 남목(南木)이었는데, 목장이 설치되면서 남목(南牧)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전한다. 성종 2년(1471)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에 보면 염포의 동쪽 산림 일대에 방어진 목장이 있고, 효종 2년(1651)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울산읍지』에도 남목 남쪽에 마성이 표시되어 있다. 『학성지』에는 1651년 새로 마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성이 남목마성으로 여겨진다.

 

목장 감독관조에 보면 문음 6품을 두어 말을 관리하였으며, 매년 말 4필을 상납하였다.

 

 

(울산의 인물)

 

1.김문연  ( ? ~ 1314)
 
김문연의 본관은 언양으로 위렬공 김취려의 증손이다.
어려서 중이 되었다가 뒤에 환속하여 나이 30이 넘어도 능히 스스로 떨치지 못하다가 여동생이 고려 충렬왕의 숙창원비가 되자 처음으로 좌우위산원에 발탁되어 빨리 벼슬에 올라 첨의시랑 찬성사에 이르렀다.
충렬왕 31년(1305)에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을 때 왕유소 등이 원나라에 머물러 있는 충선왕과 충렬왕 부자 사이를 이간 시키려 할 뿐 아니라 또한 충선왕비 보탑실련공주를 개가 시키려고 책동하였다.
고세등과 함께 이를 분개하여 중서성에 왕유소등의 죄상을 폭로했으나 보탑실련공주에 의해 태형을 받았다. 이때 김문연은 원나라 무제의 즉위를 도와 공을 세움으로써 정계에 두각을 나타냈다.
또 여동생 숙창원비가 충선왕의 총애를 얻어 숙비로 봉해지매 벼슬이 첨의중호에 올랐다. 이에 앞서 본국의 정치를 다시 잡게된 충선왕의 명을 받아 우리나라로 돌아온 그는 구신 및 간신들을 제거하여 공을 세웠으며 뒤에 볼모를 데리고 원나라에 가서 신무장군 진변만호의 원나라 벼슬을 제수 받고 옥주호부를 하사 받았으며 언양군으로 봉해졌다. 뒤에이르러 독로화를 거느리고 원나라로 갔을때 또 진변만호부의 달로화적을 더하였다. 충숙왕 원년(1314)에 원나라로 돌아오다가 길에서 졸하였다. 김문연은 사람됨이 활달하여 우곡함이 없었고 매양 숙비의 좌우주변이 너무 사치함을 보고 이를 말렸다.
시호를 영신이라 하였으며 아들은 없었다.

2.김인후  (1510 ~ 1560)
 
조선의문신. 유학자. 자는 후지. 호는 하서,담제, 김안국의 제자로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과 함께 학문을 닦고, 중종 3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무원 정자에 등용되었다가 사가독서 했다.
후에 정자,박사,설서,부수찬들 거쳐 부모의 부양을 위해 옥과 현령으로 나갔다.
명종이 즉위하고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난 후에는 병을 이유로 고향장성에 돌아가 성리학의 연구에 정진, 누차 교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성경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하고, 이항의 이기일물설을 반대하여 이기는 혼합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에도 정통했다.
문묘를 비롯하여 장성의 필암서원, 남원으 노봉서원, 옥과의 영귀서원등에 제향, 시호는 문정.

3.김취려  (?~1234)
 
고려시대의 장군.
예부 시랑 부의 아들. 음관으로서 정위에 임명된 뒤 동궁 위를 거쳐 장군으로서 동부계를 진압한 후 대장군이 되었다.
1216년(고종 3) 거란병이 가족들을 이끌고 의주ㆍ영주ㆍ삭주 등지에 쳐들어와 식량을 약탈하고 그곳을 생활 근거지로 삼으려 하자 후군 병마사로 그들을 크게 물리쳐 금오위 상장군이 되고, 이듬해 다시 전군 병마사가 되어 충청ㆍ제천에까지 침입한 거란병을 크게 무찔러 격퇴했다.
1218년(고종 5) 그들이 다시 침입하자 병마사가 되고 원수 조충과 함께 이를 격퇴, 이듬해 강동성을 근거하여 저항하는 거란병을 합격하기 위해 몽고에서 군사 1만을 보내고 동진에서 2만을 보내 오자 몽고ㆍ동진과 연합하여 거란의 유종을 분쇄했다. 또한 이해 한순ㆍ다지 등이 의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 1222년(고종 9) 참지정사ㆍ판호부사, 뒤에 수태위ㆍ중서시랑평장사ㆍ판병부사에 이르렀다. 성미가 강직 청백하여 군기를 엄정히 하고 부하를 고루 아꼈고, 전장에서 기발한 계교를 써서 큰 공을 세웠다. 조충과 함께 고종 묘정에 배향, 시호는 위열

4.이의립 (1572 ~ 1642)
 
이의립은 월성인 이관람의 후손이다.
공의 할아버지인 이호는 경주의 효자리에 살았을 때 보문보사업을 이르켜 농사에 크게 이바지한 분이라 전해 온다. 공의 선대가 울주 땅으로 오게 된것은 할아버지 때에 두서면 전읍리로 옮겨 왔다.
공은 광해군 13년 음력 5월 28일에 전읍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날때부터 자질이 총명하여 격물에 통달하였고 어버이 섬기기에 효도가 지극하여 그 이름이 인근에 높았다.
7세때 가마귀가 먹이를 물어다가 새끼에게 먹이는 것을 보고 시를 짓기도 하였고 그는 불행하게 10세때 어머니 설씨를 사별하고 또한 21세 때에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 외로운 몸이 되었다.
선고 3년상을 마친 1643년 어느날 그는 감연히 일어나 크게 탄식하면서 자식으로서 뜻을 세우지 못하면 사람의 자식이라 할 수 없고 백성으로서 나라의 위난을 당하여 순국의 정성을 다하지 못한다면 어찌 신하라 할 수 있으랴 이미 양친이 다 세상을 떠났으니 어버이를 섬기는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뛰어 나감이 옳다. 나라의 위난을 눈앞에 보고 이를 해결함은 병과 농보다 더 막중한 것이 없고 조총과 화약은 유황이 없이는 무용지물이요 솥과 농구는 무쇠없이 이루어 질 수가 없다. 유황 수철 모두 우리나라에 생산됨이 없으니 이를 찾아 나서서 나라의 어려움에 보국하라라 하고 큰 뜻을 가슴에 품었다.
그후 치술령에 올라가서 백일 동안 산신에 기도하여 나라를 위하는 일에 있어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빌었다.

5.이지대
 
공의 호는 죽은이며 고려의 문하시중을 역임하였던 계림부원군 이제현이 4세손이다.
공은 천자가 강명 청직 할뿐 아니라 바른말을 잘하는 악악지풍을 가졌다.일찍 무과를 지망하여 갑과에 등과하여 수군으로 나아간 공은 경상도 수군만호가 되어 바다로 부터 오는 왜구를 지켰으며 이조 태조 3년(1394)에 왜선 한척을 나포하여 공을 세웠다. 이로 말미암아 태조는 그해 3월에 판교서감사 이문화를 보내어 술과 비단을 하사하여 위로 하였다고 한다.
공의 유허 두서면에는 공이 손수 심은 은행수가 5백년이 넘은 지금도 청청하여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또 공의 생전에 주량천의 흐름이 마을 뒤편으로 바꾸어 흐를때는 구량에서 떠나라는 말에 따라 어느해 심한 홍수로 강심이 마을뒤로 변하자 터를 비우고 자손들이 흩어졌다는 일화가 있다.
공의 묘는 경주시 명활산의 아배동에 있다.

6.박 구  (?~1289)
 
박 구는 본시 울주에 소속했던 어느 부곡 출신으로 그의 선대로 부터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고려 제24대 원종(1260~1274)때에 상장군이 되고 충렬왕 원년(1274)에 원나라 세조의 명령으로 여원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소용대장군 좌부도통으로 김방경을 따라 출전하여 공을 세웠다.
또 충렬왕 7년(1284)의 제2차 일본정벌에도 참전 하였다.
이듬해 동지밀직사사로 합포를 진수하고 충렬왕 9년(1283) 지밀직사사가 되어 성절사로 원나라에 다녀오고 뒤에 찬성사에 이르렀다.

7.김 윤
 
김윤의 자는 무기, 호는 죽헌이며 도첨의참리 김변의 아들로 고려 충렬왕 3년(1277)에 태어났으며 위렬공 김취려의 증손이다.
충렬왕때인 1290년에 합단이 침공함으로 나라사람들이 강화도에 들어가 피난하는데 김윤의 나이 14세로 가족을 이끌고 그도 피난하는것이 성인과 같으므로 일족이 다 그에 힘입었다.
음보로 노부판관에 보임되고 거듭 전직하여 신호위호군이 되었으며 홍자번의 추천으로 변정도감부사가 되었다.
시호는 정렬(貞烈)이라 하였으며 인자 신실하고 책보기를 좋아하여 법전을 많이 알았으므로 묻는 사람이 있으면 곧 답하여 의심이 없게 하였다.

7.김 자
 
김자는 동국여지승람에 언양현의 인물로 등재되어온 분이다. 본관은 언양이며 관찰사 김수익의 아들이다.
태종 8년(1408)에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태종 16년(1416) 8월에 이조정랑으로 있으면서 정전에서 있었던 문과와 무과의 과거에 문무 모두 중시 5인 친시 9인이 응시하는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직예문관이 되었으며 세종3년(1421) 10월에는 세자우보덕직전에 올랐다.
또 세종 4년(1422) 12월에 이르러 동부대언이 되었다가 세종 8년(1426) 9월에는 좌대언을 거쳐 우대언에 나아가 세종 11년에 졸하였다.
세종7년 11월에 좌부대언에 있을 때 고려조 말의 격구를 평하여 음란지풍에서 연유된 것이라 하였다.
묘는 광주의 남한산성 밖에 있다

8.일 선
 
일선의 호는 휴옹, 선화자, 경성 등이며 성은 장, 본관은 울산이다.
아버지는 장봉한이며 어머니는 박씨로써 이조 성종 19년(1488) 12월 19일에 출생하였다.
양친을 일찍 사별하여 무상을 느껴 13세의 나이로 출가하여 단석산에서 해산에게서 수학하다가 연산군 9년(1503)에 중이 되어 불교계에서 이름이 높았다.
일선이 온양면 발리에 있을때 하루는 일명 성인정이라고도 하는 옥련정에서 우물물을 퍼서 엄숙한 자세로 한동안 뿌리고 있었다.
뒤에 알게된 일이지만은 이때 해인사의 장판각에 불이 나서 타고 있을때 갑자기 동남쪽에서 검은 먹구름이 바람을 타고 몰아와서 한 바탕의 큰 소나기를 장판각에 퍼부어 불을 꺼지게 했다고 한다. 이는 다 일선이 옥련정 우물물로써 조화한 것이라하며 그 후로 그 우물 이름을 성인정이라고도 하였다고 전해온다.
또 휴옹의 출생지를 온양면 발리라고도 전해온다.

9.이 예  (1373 ~ 1445)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외교관
본관 학성. 호 학파. 시호 충숙. 경상남도 울산군 아전 출생. 1396년 기관 박준과 함께 왜적에게 잡혀간 울산군지사 이은 등을 시종하여 돌아오게 한 공으로 아전의 역을 면제받고 관직에 올랐다.
1401년 일기도에 사신으로 가서 포로 50명을 송환시키는 데 기여한 공으로 좌군부사직에 임명되었으며, 1410년까지 해마다 통신사가 되어 삼도에 왕래하면서 포로들을 송환하는 데 공을 세웠다. 1416년에는 유구국에 사신으로 가서 40명을 송환시켰으며, 1419년에는 이종무를 도와 대마도의 왜적을 소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후에도 일본을 40여 차례나 왕래하면서 포로송환과 무역 등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1438년 중추원첨지사에 올랐으며, 1443년 왜적이 변방을 약탈하자 자청하여 대마도체찰사가 되어 포로 7명과 도적질한 왜인 11명을 찾아온 공으로 중추원동지사로 승진하였다. 유고로 《학파실기》가 있다.

10.김 변 (1248~1301)
 
고려 때의 문신. 자는 손지.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낭증이 되었으며 충렬왕이 세자로 원나라에 있을 때 시종한 공으로 즉위하자 서권(10번 죄를 지어도 9번은 자손까지 용서 받는 것)을 하사받았다.
1295년 (충렬왕 21)에는 사관찬수관이 되어 원나라 세조의 사적을 편찬하였으며, 그 후 여러 요직을 거쳐 첨의참리에 올랐다. 시호는 문신공이다.
 
(울산의 축제)
 

1.간절곶해맞이축제


                  

지역별 울산시 울주군
주최/주관기관 울산광역시/해맞이축제추진위원회
최초 개최년도 2000
개최기간 매년12.31~후년 1.1
축제성격 문화예술
관련 홈페이지 http://ganjeolgot.ulsan.go.kr

○ 축제의 유래 및 특성
- 2000년 밀레니엄때부터 해맞이행사가 추진되면서 한반도에서 새해 가장먼저 해가 뜨는곳으로 관광객들이 매년 많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 지역특성
- 간절곶은 새해아침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으로 관광명소가 즐비하며 울창한 송림, 기암괴석이 주변환경과 어우러져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 주요행사내용
- 사전행사(퓨전국악, 팝페라기악, 일렉바이올린, 트롯댄스 등)
- 해맞이행사(해맞이영화관, 국악 실내악단, 합창단공연 등)
- 부대행사(태양을 향해 쏴라, 생쥐조형물 제막식, 해야솟아라/시낭송 등)
 

2. 동구문화축제


                  

지역별 울산시 동구
주최/주관기관 울산광역시 동구청/울산동구문화원
최초 개최년도 2004
개최기간 2008 10월중(1일간)
축제성격 문화
관련 홈페이지 

○ 축제의 유래 및 특성
- 지역문화의 활성화를 통해 주민들의 문화향수권 충족
- 건강한 사회문화와 가정 생활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가족원 이 함께 즐길수 있는 여가 문화의 장을 마련

 

○ 지역특성
- 동해의 푸른바다와 기암괴석, 울창한 해송으로 어우러진 일산해수욕장 및 대왕암공원, 선조들의 숨결이 묻어나는 동축사 전총사찰, 마성, 봉수대 등이 있으며 세계굴지의 조선산업이 어우러진 문화.관광.산업의 도시임

 

○ 축제행사종목
- 문화체험마당 : 베짜기, 화전놀이
- 민속공연마당 : 탈춤, 마당놀이, 전통혼례, 고전무용, 민요
- 문화전시마당 : 처용탈 전시, 옛 동구사진전, 한.일문화 교류 사진전
 

3.봉계 황우쌀축제


                  

지역별 울산시 울주군
주최/주관기관 두북농업협동조합/ 두북농협 봉계황우쌀 작목회
최초 개최년도 1997
개최기간 2008.10월초(1일간)
축제성격 관광특산
관련 홈페이지 

1)축제의 유래 및 특성
: 농업인과 도시소비자가 황금들녘에서 만나 한해의 풍년 농사에 대한 감사와 봉계황우쌀의 우수성을 널리 홍보하여 판로를 확보하고 생산농가에게는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1997년부터 울주군의 주요축제로 개최됨.

 

2)지역특성
: 울주군의 두동두서지역은 처정지역으로 친환경농법으로 벼를 재배하는 이 지역의 논에서는 메뚜기와 미꾸라지가 노 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음

 

3)주요행사 내용
: 봉계황우쌀 과년 전시회,도시민의 농촌체험 ( 낫으로 벼수확, 재래식 탈곡, 새끼꼬기, 짚신삼기) ,메뚜기 잡기, 농산물 직거래 장터, 향토음식점운영
 

4.울주외고산옹기축제


                  

지역별 울산시 울주군
주최/주관기관 울주군/울주외고산옹기협회
최초 개최년도 2000
개최기간 2008.10.9~10.12(4일간)
축제성격 문화예술
관련 홈페이지 

◆ 축제성격 : 관광특산. 체험형 문화축제
※ 문화관광부지정 예비축제, 제2회대한민국축제박람회 최우수축제선정, 가고싶은 축제 3위 선정, 2009 세계옹기문화엑스포 개최지

 

◆ 축제소개 : 외고산옹기마을은 전국 최대의 옹기집성촌이 형성되어 있어 전통유산인 옹기 기술의 발전과 계승을 위해 2000년 제1회 옹기축제를 개최하여 옹기의 변천 및 제작과정을 소개하는 등 옹기의 다양성과 실용성을 널리 홍보하기 시작

 

◆ 개최지역소개 : 우리나라에서 전국 50% 이상의 옹기를 생산하고 있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외고산옹기마을은 옛 조상의 지혜와 슬기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전통과 문화의 산실인 전국 최대의 민속 옹기마을이다.
1950년대부터 현재의 옹기를 굽기 시작한 외고산옹기마을은 기온이 연중 온화하고 수송 경로가 편리한 천혜의 옹기장소로 알려져 60~70년대부터는 전국 각지에서 350여명의 옹기장인과 도공들이 모여 옹기를 생산,수출하였다. 80년대이후 산업화로 인한 옹기수요의 부족 및 옹기전통문화에 대한 관심도가 낮아지면서 지금은 128가구 중 40여 가구가 옹기업에 종사하면서 그 맥을 잇고 있다.

 

◆ 개최장소 : 온양외고산옹기마을 일원
 

5.가지산 고로쇠 약수제


                  

지역별 울산시 울주군
주최/주관기관 상북면 고로쇠 생산자 협의회 / 상북면주민자치위원회
최초 개최년도 2001
개최기간 2008.3.7~3.9(3일간)
축제성격 관광특산
관련 홈페이지 

1) 축제의 유래 및 특성
: 통일신라 말에 도선 국사가 백운산(두서 내와)에서 이른 봄에 도를 닦던 중 잠시 쉬었다가 일어서려고 하니 무릎이 펴지지 않아 나뭇가지를 붙들어 겨우 일어나 부러진 나무에서 떨어진 물에 목을 적시니 곧마로 무릎이 펴졌다하여 골리수라 전해 내려오다 현재 고리수, 고로쇠등으로 유래되었 다.

 

2) 지역특성
: 가지산에서 생산되는 고로쇠약수는 해발 500m이상에서 기온편차가 많은 깨끗한 산간계곡에서 자란 고로쇠나무에서 1월말부터 2월말까지 재취하며, 다른 지역보다 1개월 정도 앞서 생산됩니다.

 

3) 주요행사 내용
: 길놀이 사물놀이 - 약수제(산신제) - 고로쇠 약수 시음회 - 다과회 - 윷놀이 - 고로쇠약수 직판장 및 지역특산물 판매

 

6.울산쇠부리축제


                  

지역별 울산시 북구
주최/주관기관 울산북구쇠부리축제추진위원회
최초 개최년도 2003
개최기간 2008.4.25 ~4.27(4월 마지막주 금,토,일)
축제성격 전통역사
관련 홈페이지 

▶ 축제의 유래 및 특성
○ 울산 달내 쇠부리놀이는 우리 북구 지역에서 신라시대 초시부터 산업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한 철의 제련작업을 재현 것으로, 지역의 특화된 축제로 승화시키기 위해 집중적인 연구와 놀이의 올바른 형성을 통해 지역문화제에 대한 주민의 관심도를 제고시키는 한편 문화향수를 충족시켜 북구를 대표하는 문화행사로 자리매김하기 위함

 

▶ 지역특성
○ 달천철장이 현재 시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달내 쇠부리터등 여러 곳에서 쇠부리 문화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는 철기문화의 중심지임

 

▶ 축제행사종목
∙메인행사 : 개막식, 쇠부리전야제, 두두락스티벌, 쇠부리놀이 재연, 쇠부리 퍼레이드, 폐막식
∙스페셜 행사 : 쇠부리 학술 세미나, 토철운반 경진대회, 북구민 어울림 한마당, 철 조각전, 두두리 굿, 쇠부리보존회 풍물경연, 쇠부리 도전! 골든 벨
∙전시·부대 행사 : 쇠부리역사관, 달천철장 역사사진전, 고대 야철로 전시, 대장간 체험장, 먹거리 장터운영, 특산물 홍보관
 

7. 대운산 철쭉제


                  

지역별 울산시 울주군
주최/주관기관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산읍산악회
최초 개최년도 2001
개최기간 2008.5월경(1일간)
축제성격 관광특산
관련 홈페이지 

1) 축제의 유래 및 특성
: 원효대사의 마지막 수도지로 알려진 낙동정맥의 최고봉 대운산(742m)에는 산 8,9부 능선에서부터 정상까지 철쭉군락지가 빽빽이 들어서 있어 매년 5월 경에 선문홍 철쭉꽃의 향연이 시작된다. 이러한 철쭉군락의 아름다움을 계속 보존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2001년부터 철쭉군락지의 주변 잡목 가지치기 사업과 대운산 철쭉제를 열어 대운산 철쭉군락지는 울주군의 아름다운 관광명소로 자리매김을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2) 지역특성
: 대운산 인근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간절곶 등을 비롯해 진하해수욕장, 서생포 왜성, 남창 재래시장, 온양 옹기회관 등의 관광명소가 자리잡고 있어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3) 주요행사 내용
: 철쭉제례, 풍물놀이, 가곡 민요 공연, 임산물구매 행운권 추첨, 대운산 정화활동 


8.울산고래축제


                  

지역별 울산시 남구
주최/주관기관 울산광역시남구/울산고래축제추진위원회
최초 개최년도 1995(최초)
개최기간 08. 5월~6월경
축제성격 문화예술
관련 홈페이지 http://www.whalekea.com

❍ 개최장소 : 울산광역시남구 장생포해양공원 및 시가지일원

❍ 축제유래 : 선사시대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울산 고래의 역시를 기념하고 관광 산업을 특화시켜 고래도시 울산의 인식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마련

❍ 지역특성 : 울산대공원, 문수국제양궁장, 장생포해양공원이 있어 시민을 위한 체육도시로서 기존의 교통행정 등 기반시설을 발판으로 한 관광도시

❍ 축제방향
- 고대 자연의 상징인 고래의 가치를 공유하는 고래체험 축제
- 고래도시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 인프라를 활용하는 역사문화 축제
- 울산의 고래테마를 관광자원화하는 테마관광 축제

❍ 주요행사내용
- 극경회유해면 탐사, 고래잡이 재현행사, 풍어제, 고래소망등 달기, 고래학술 행사, 고래가요제, 해군·해경정 승선행사
 

9.진하바다축제


                  

지역별 울산시 울주군
주최/주관기관 울주군/
최초 개최년도 1998
개최기간 2008.7월중(2일간)
축제성격 기타
관련 홈페이지 

▶ 축제의 유래 및 특성
○ 천혜의 자연경관으로 송림과 어울리는 아름다운 진하해수욕장을 찾는 관광객에세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군민화합을 통한 일체감 조성으로 여름철의 대표적인 지역축제로 관광울주 이미지 제고

 

▶ 지역특성
○ 울주군 서생면 진하리에 위치한 진하해수욕장은 백사장길이 2㎞, 사장면적 96,000㎡로 50,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곳으로 맑은 물 , 고운모래, 푸른송림이 잘 어우러진 해양 관광지로 백사장이 넓고 접근성이 용이하여 인근 부산지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동해남부 최고의 해수욕장임

 

▶ 축제행사종목
○ 식전행사 : 축하공연(대북공연, 모듬북공연, 개천무, 북춤, 설장고 등), 해상퍼레이드
○ 공식행사 : 바다가요제(초대가수 공연), 해변영화제, 불꽃놀이 등

 

◆ 장 소 : 진하해수욕장 특설무대

 

◆ 소 개 : 진하해수욕장 개장기간(7/4~8/17, 45일간)기간동안 진하바다축제를 개최하며, 명선도야경과 깨끗한 해안이 일품이다. 샤워장, 화장실 등 각종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인근 회시장에서는 싱싱한 해산물을 맛 볼수 있다.

 

◆ 인근관광지 : 간절곶, 서생포왜성, 대운산내원암계곡, 옹기마을, 울산온천 등
 

10.울산무룡예술제


                  

지역별 울산시 울주군
주최/주관기관 울산광역시북구/울산광역시북구문화예술회관
최초 개최년도 2004년
개최기간 2008년 9월중
축제성격 문화예술
관련 홈페이지 

▶ 축제의 유래

2008년 5회째를 맞이하여 국내단체는 물론 해외의 예술단체를 초청하여 주민들에게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

ㅇ 내용 : 공연 및 전시
- 공연 : 개막공연(야외광장), 호주원주민문화공연체험전, 연극 "변"
- 전시 : 호주원주민문화특별전

 

(울산의 전설)

 

1.계변천신

 

학성은 본시 신라의 개지변이었던 곳이다.

신라의 말기에는 이것을 계변성이라고 하였다.

신라 일대를 통하여 울산지방의 중심을 이루었던 곳은 범서면 굴화지방이었다.

 

신라말기에 이르러 중앙 귀족 지배층과 지방호족간의 대립항쟁으로 중앙의 정령은 지방에까지 먹혀 들어가지를 못하였다.

이럴때 계변성에는 유력한 박씨호족(뒤에 흥령박씨가 됨)이 대두하여 그 세력이 자못 떨쳤다. 이러한 신라말의 일이었다.

 

하루는 사람들이 북쪽하늘을 바라보니 한 천신이 학을 타고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신두산에 내려 사라지는 것이었다.

뒤로 이 천신은 사람들의 수록을 주장하는 계변천신이 되었다.

사람들은 또한 신두산을 일러 신학성이라 불렀다.

 

또 한편으로는 좀 다르게도 전해온다.

신라 효공왕 5년(901)의 일이라 한다.

하늘에 상학이 금신상을 몰고 날아왔다.

그래서 계변성 신두산에 와서 울고는 어디론지 사라졌다 한다.

사람들은 이것을 기이하게 여겨 계변성을 신학성이라 불렀다고 한다.

계변천신은 뒤로 혁혁한 신령이 되어 고을에 복을 내리므로 혈식하게 되었고 고을을 진압하여 왔다.

또한 고을 사람들은 천신을 받들어 서낭신으로 우러러 모시는 바가 되었다.

그러니 계변천신은 울산의 수호신이었던 것이다.

 

2.돗질산 도깨비

 

남구 여천동 울산항과 태화강의 하류가 만나는 지점에 울산의 안산(案山)인 돗찔산(猪頭山)이라 불리우는 아담한 야산 봉우리 하나가 다음과 같은 전설을 오늘에까지 전해주고 있다.

옛날 이 고을 관기(官妓) 초선이의 딸 월앵(月鶯)이라는 미모의 동기(童妓)가 있었다. 월앵이는 신분은 비록 어머니 신분 때문에 기적(妓籍)에 올라 기생으로서 갖추어야 할 예능과 예절들을 권반에서 이수 했으나 그녀의 부계(父系) 혈통은 양반인 정3품 통정대부 당상관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아버지의 혈통을 받은 것을 영광과 자랑으로 여기면서 행신범절과 몸가짐을 각별히 조심하면서 처녀로서의 순결을 철저히 지키려고 하였다.

그녀는 과연해 지면서 그 미모는 마치 달덩이처럼 아름답고 글공부를 열심히해서 시와 창에도 뛰어 났고 가야금이나 거문고를 타는 솜씨가 뛰어났으므로 선배 관기들의 사이에는 장차 뛰어난 명기로 이름을 떨칠것이라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뿐만아니라 관가나 풍류남아들 사이에도 월앵은 천재적인 이름난 기생이요 절세미인이라고 소문이 파다하여 젊은 남성들은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월앵은 과다한 소문과는 관계없이 마음속으로 사모하는 총각이 있었다. 그 총각은 어릴적부터 앞뒷집에 함께 살면서 소꿉장난을 하며 자라난 주호동이라는 청년이었다.

그 청년은 양반도 상민도 아닌 양인 계급이었다. 얼굴이 준수하고 총명영특하여 주위의 칭찬이 자자했으며 글공부에 열심히 정진하고 있었다. 월앵이의 마음은 오매불망 호동이만을 사모하고 동경했지만 호동이는 글공부에만 열중하느라고 미처 월앵이의 깊은 마음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다만 앞뒷집에서 자라난 소꿉친구 이상으로는 생각지 않고 월앵이의 요구에 따라 간혹 은밀한 밀회가 있었다.

월앵이는 물레방아간에서 은밀히 호동이를 만나 속삭이면서 백년가약을 꿈꾸며 호동이를 유혹하고 설득을 시켰다. 적극적인 월앵이의 간곡한 애정표현에 빠져 들어간 호동이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공부를 끝내고 과거에 급제하는 날 부부가 되자고 언약을 하였다. 그러나 월앵이는 권반에서의 이수과정도 끝나고 관기로서의 의무를 기피할 수가 없었다. 권주가를 불러야 했고 가야금이나 거문고 연주를 해야하고 시조를 읆조려야 했다.

 

그런데 주기가 도도해지면 풍류남아나 벼슬아치들은 이성을 잃고 절세미인 천재적인 동기 월앵이를 괴롭힌다. 월앵이는 그때마다 몸을 도사리고 그것을 거부한다. 월앵이의 마음속에는 “내가 비록 기생의 신분이지만 내 몸에 흐르는 피는 정3품 당상관인 위대한 것이기 때문에 내몸을 함부로 허락할 수가 없어, 그 뿐만아니라 마음속 깊이 사모하는 호동이가 있질 않는가”하고 다짐을 했다.

그러자 새로 부임 해 온 부사가 미리 월앵이의 미모와 명성을 듣고는 수청들기를 강요한다. 그러나 월앵이는 단호히 거절을 하고 만다. 부사는 몸이 달아서 얼렸다가 달랬다가 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러다가 휘영청 달밝은 밤에 월앵이와 호동이가 물레방아간에서 은밀히 만나 속삭이며 음침한 부사가 수청을 강요한다는 애기를 하자 호동이는 발칵 분개를 하며 장차 과거에 급제하여 암행어사가 되어 그런 가렴주구하며 패륜적인 수령방백놈들을 모조리 주살을 하겠다고 열변을 토하며 월앵이를 꼭 껴안았는데 이때 이 광경을 훔쳐보고 엿들은 이방청 아전놈이 부사에게 샅샅이 고자질을 하고 말았다.

 

그 다음날 월앵이는 부사의 부름을 받고 동헌으로 나갔더니 부사가 물레방아간에서 속삭인 놈이 누구며 무슨말을 주고 받았느냐고 다그친다.

월앵이는 억울하다고 변명을 하면서도 사실상 있었던 일이기에 내심 공포에 떨었다. 부사는 월앵이를 껴안고 속삭인 놈이 어느놈인지 당장 이실직고할 것이며 잡아다가 능지처참을 하겠다고 호통을 친다.

월앵이는 자신이 당하는건 이미 각오가 되어 있지만 화가 호동이에게 미치게 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호동이를 찾아 부사앞에 대령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퇴청하여 홍동이를 찾아 멀리 피신을 하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간밤에 물레방아간에서 한 애기를 샅샅이 알고있는 악질 부사가 그냥 있질 않고 당장 능지처참을 할 것이라고 하였다.

호동이는 자신이 분개해서 토해 낸 말을 기억하고 있기에 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호동이는 그 길로 정처없이 길을 떠나 발길이 닿은 곳이 전라도 남원땅이었다.

호동이는 여기서 은신생활을 하면서 농악패거리들과 어울려서 꽹과리 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부사는 월앵이를 불러다가 물레방아간에서 껴안고 부사의 험담을 한 그놈을 대령시키지 않는 죄로 월앵이를 잡아 가두고 말았다.

그리고는 수청들기를 회유한다. 밤이 야심하기만 하면 옥지기들은 월앵이를 데리고 부사의 침실로 가서 밀어 넣는다. 부사는 월앵이를 달래다가 마을 안들으니 완력으로서 덤비기 시작한다.

마치 성난 사자와도 같았다.

월앵이는 부사의 요구를 끝내 거절하다가 힘이 빠져 당할것만 같아서 그만 혀를 깨물고 입에 선혈을 토하면서 자결하고 말았다.

 

월앵이는 죽어서 원귀가 되어 돗질산 도깨비들과 어울렸다.

원귀 월앵이는 도깨비 두목들에게 못된 부사놈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애원을 한다.

도깨비 두목은 원귀 월앵이의 하소연을 듣더니 도깨비 무리들을 이끌고 그날밤 부사청으로 가서 부사를 향해 죄상을 열거하면서 호통을 친 다음 도깨비 방망이로 부사를 쳐 죽이고 말았다.

그 후 도깨비들은 비라도 올려고 찌부등 할라치면 돗질산에서 어김없이 나타나 풍악을 울리는데 신나게 한바탕 풍악을 울리고 나면 휴식을 하게 되는데 이때 원귀 월앵이가 도깨비 두목에게 사랑하는 호동도령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애원을 한다.

이때 도깨비 두목은 월앵이의 간청을 받자 그렇지 않아도 풍악을 울리때마다 징, 장구며 북은 잘 맞는데 꽹과리가 좀 덜맞아 아쉬웠는데 마침 월앵이가 찾고 사모하는 호동이는 지금 전라도 남원고을에서 호남제일의 꽹과리 선수로 명성을 날리고 있기에 당장 내일이라도 데려와서 우리와 함께 어울리게 해야겠다고 한다.

도깨비두목의 말을 듣고는 월앵이가 기뻐하며 두목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마을 머슴들이 비가 올것 같아서 마당 설거지를 하닥 도깨비들과 원귀 월앵이가 주고 받는 애길르 듣고는 다음날 돗질산으로 건너는 나루터 주막집에 모여 앉아 거동을 살폈다.

 

가랑비가 부실부실 뿌리는데 오후가 짐잣하자 저만치 들판을 가로질러 허겁지겁 달려오는 젊은이가 나타났다. 상투 쫒은 머리에 쓴 갓은 벗어서 등에 메고 개나리 봇짐을 동여 매고 두루막을 걷어 올려 동여 몪으고는 손에 꽹과리를 하나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젊은이는 나루터에 이르자 나룻배를 탈 생각은 않고 종아리를 둥둥 걷어 부치더니 강물에 뛰어든다. 이때 주막에서 지켜보고 있던 마을 머슴들은 젊은이를 붙잡았다.

“이봐요 젊은이 이 강물은 수심이 얼마나 깊은지 알기나 하고 뛰어드는거요? 들어가기만 하면 빠져 죽는단 말이요”

“아! 남이야 빠져 죽거나 말거나 왜 참견이요. 갈길이 바쁘니 이거 놓으시요”

“못놓아요 안돼!”

하고는 젊은이를 여러 사람이 달려들어 주막집 머릿방에 가두고는 문을 잠궈놓고 지켰다.

마을사람들은 그냥두면 강물에 빠져 수살귀신이 될 터이니 시간만 넘기면 살릴 수가 있닥 믿었다.

방안에 같힌 젊은이는 방안에서 문을 열어 달라고 소리치며 몸부림 치다가는 조용해 지더니 “여보시오들 나 그 물 한그릇만 주구려 목이 타서 죽겠습니다요” 사람들은 물한그릇을 떠서 방안으로 들여 보냈는데 그 후로 기척이 없이 조용하였다.

웬일일까 하고 문구멍으로 들여다 봤더니 물을 마시지 아니하고 코에 들어 부어서 죽고 말았다. 결국 마을 사람들의 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날 밤이었다.

돗질산에서는 또 한바탕 도깨비들이 신나는 풍악을 울리더니 가락을 뚝 머추고는 두목이 말하기를

“다들 어떻냐? 이제 전라도 호남제일의 주꽹과리가 어울리니 꽹과리 가락이 썩 잘 맞아 떨어지지?”

“예! 아주 멋들어지게 잘 치는 군요”

“그리고 월앵낭자 봐요, 이제 사모하는 호동 도련님을 만나게 해 줬으니 여한이 없겠지?”

“예! 두목님! 고맙고 또 고마울 뿐입니다.”

“자! 또 한바탕 치고 놀아 보자꾸나. 풍악을 울려라!”

하고는 신나게 또 한바탕을 치는 소리가 밤의 적막을 끊어 놓는다.

월앵이와 주호동의 이승에서 맺지 못한 연분은 결국 저승에서 맺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물에 빠져 죽을 사람은 접시물에도 빠져 죽는다는 叔명론을 확인시켜 주기도 한다.

 

3.무거와 김신암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儆順王) 때의 일이다.

천년에 가까운 화려와 번영의 극치를 자랑하던 신라도 말세에 들어와서는 귀족지배 계급들의 분열과 또한 사치에 젖은 문약으로 그 국토는 경주 일원으로 줄어 들고 후백제의 군대가 신라를 침입하여 영천(永川)에 이르러도 경애왕(景哀王)은 고려 태조에 구원을 청 할뿐이더니 고려 태조는 강병 1만으로 구원케 하였다.

이러한 절박한 정세도 잊은 채 고려의 구원군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임금은 포석정에서 환락에 잠겼다가 쳐들어온 견훤의 군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견훤의 손에 의해 새로이 세워진 임금이 경순왕이었다.

경순왕도 운수가 다 되어 이미 기울어지는 사직을 바로 잡을 기력이나 능력의 소유자가 되지 못하였다.

또 조야의 국론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왕자 마의태자 같은 사람도 나라의 운명이란 하늘에 달렸거늘 어찌 천년사직을 헛되이 할 것인가 하였으나 그 주장도 나라를 바로 잡는 데는 이미 힘이 되지 못하였다.

이때 경순왕은 백척 간두에 선 나라의 장래를 영축산의 문수대성의 계시를 받아 결정키로 결심하고 타자와 둘째 왕자를 거느리고 하곡현의 영축산을 찾아 길을 나섰다.

 

먼저 태화사에 이르러 참배하고 또 길을 나섰는데 중도에서 길가에 한 동자승(童子僧)이 나타나더니 대왕께서 오실 줄 알고 산으로 인도하여 모시고자 왔다고 고하였다. 왕은 다행히 생각하고 크게 만족하여 길을 따랐다.

그러나 삼호(三湖)앞에서 태화강을 건너자 얼마가지 아니하여 동자승은 그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왕은 직감에 이 동자승이 문수보살임을 느끼고 하늘은 이미 나를 저버리는구나 하여 크게 탄식하며 이제는 할 수 없다고 몇 번이나 되풀이하고는 실의에 빠지고 말았다.

 

이래서 왕은 발길을 돌려 월성에 환궁하여 사방의 땅이 다 타인의 소유로 돌아가고 나라의 힘은 약하고 쇠퇴하여 다시 일으키지 못함을 통탄한 나머지 고려태조에 항복하기를 꾀하였다.

이때 군신들의 의논은 제각기 찬반이 엇갈렸다.

왕자 마의태자는 말하되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는 법, 오직 나라 사랑하는 여러 충신들과 함께 민심을 크게 수습하여 나라를 굳게 하다가 힘이 다한 연후에야 말할 것이나 어찌 1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쉽사리 다른 나라에 내 줄 것이랴"하였다.

왕이 한숨지며 말하되"외롭고 위태함이 이와같아 형세는 이미 능히 온전할 수 없으니 이왕에 강하지도 못하고 또 약하지도 못하여 무죄한 백성들을 참혹히 죽게 하는 것은 내 차마 하지 못하는 바라"하고 고려에 국서를 보내어 귀부를 청하고 말았다.

 

왕자는 통곡하며 왕을 하직하고 곧 개골산(금강산)에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마의(痲衣)와 초식(草食)으로 그 생을 마치었다

또 막내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에 들어가 중이 되니 이름을 범공(梵空)이라 하고 법수 해인사에 머물다가 문수산 남쪽 산에 절을 지어 여기에서 살았으니 그 절 이름을 김신암이라 하였다.

이 절은 정조 10년(1780)판 읍지를 보면 ?문수암?남쪽 3리에 있는데 신라왕의 소창이라 하여 그때까지는 절이 실존하였다.

그 절로 말미암아 그 산명을 김신기산(金信基山)이라 불러 오다가 지금은 남암산(南巖山)이라 한다.

또 이 절에는 김신대(金信台)를 만들어 풍류를 즐기기도 하였으며 지금도 절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한편 앞에든 전설은 상전하여 전해오기를 왕이 크게 탄식한 자리를 '헐수정'이라 하였으며 동자가 자취를 감춘곳을 무거(無去)라 하여 무거동(無去洞)이라 하는 지명이 이 전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전설은 한편으로는 삼국유사의 진신수공과도 같이 전해온다.

또 이 전설의 주인공을 가르켜 무거 인근의 노인네들은 "짐부대왕"이라 하나 이는 "김부대왕"으로 경순왕의 이름인 것이다.

 

4.어사암과 원고개

 

때는 이조의 말기였다.

다운동 다전 마을에는 망조당 서인충의 5세손 서달급이 다산사를 정조 때 세워 망조당을 받들고 있었다.

어느날 울산도호부사가 이 다산사에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부하로부터 급한 기별이 왔다.

구름 마을을 지나가는 한 나그네가 있었는데 그 삶의 풍채나 거동이 아무리 보아도 보통 선비와는 다른 수상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도호부사의 머리는 번개처럼 스쳐가는 한 육감이 있었다.

급히 걸음을 재촉하여 지름길로 난곡 마을로 빠져나와 다시 발길을 돌려 구름 이쪽으로 나오니 큰 바위 위에서 어떤 나그네가 과연 발길을 멈추고 쉬고있는 중이었다.

이에 도호부사는 그 길손 앞으로 나아가 정중히 인사하며 성내로 길을 안내하였다 한다.

뒤에 알게 된 일이지마는 그 길손은 다름아닌 암행어사였다 한다. 그 일이 있은 후로부터 사람들은 길손이 쉬고있던 바위를 가리켜 어사암이라 하였고 도호부사가 길을 질러갔던 곳(지름길)을 원님이 질러간 고개라는 뜻에서 원고개라 하였다.

이 어사암은 높이 4m에 직경 3m되는 바위로 그 위에는 사람이 10명정도 앉을 수 있는 바위였으나 지금은 메워져 높지않다.

 

5.장군바우

 

상안동에는 남쪽 신선암(神仙岩)을 바라보고 의연하게 선 한바위가 있다.

사람들은 그 바위가 장군같다 하여 장군바위라 하며 이로 말미암아 마을이름 또한 장군바우라 한다.

어느 옛날에 일어난 일이라 한다.

남쪽의 신선암산(神仙岩山)에는 신선바우가 있어 아름다운 선녀와 같았다.

장군바우가 신선바우를 늘 대하게 되니 그만 서로 정이 들게 되었다.

그래서 서로간에 혼담이 이루어져 마침내 신선바우가 있는 곳으로 장군바우는 장가를 들게 되었다.

장군바우는 농도 마련하는가 하면, 말도 마련하였고, 신부를 태워 올 가마까지를 마련하여 놓았다.

장군바우가 장가를 드는 날이 다가와 분주하게 서두르고 있었다.

이때 한 여인이 근처의 시냇물에서 빨래를 하다가 보니 무슨 떠들썩하는 기색이 있어 귀를 기우려 보니 다름아닌 장군바우가 신선바우에 장가든다는 것이었다.

이를 알게 된 그 여인은 무심중에

“ 얄구저라, 장구바우도 장개가는가 배?” 하였다.

 

이 여인의 한마디 말이 그만 여름철의 서리가 되어 바위는 굳어버렸다. 이때 장군바우는 그 여인을 끌어당겨 그만 깔고 앉아버린 것이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에 장군바우 근처에는 가매바우, 농바우, 안장바우, 등도 그대로 굳어버려 지금도 장군바우와 더불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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