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고장의 문화재좀 제발 알려주세요

광주 고장의 문화재좀 제발 알려주세요

작성일 2011.07.11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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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광주에사는 3학년입니다. 선생님이 우리 고장의 문화재를 조사하려고 하셨는데요 제발최대한 빨리 알려주세요그리고 사진도 부탁 제발~~~~~~~~~~~~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광주 고장의 문화재 45개를 올려드리니 몇개 적어가세요^^

 

(광주 고장의 문화재)

 

1.중흥산성 쌍사자석등

 

종 목 국보 제103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광주 북구 매곡동 산83-3 국립광주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 이라고도 하며, 대개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자리한다. 일반적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을 이루는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이 석등은 큼직한 연꽃이 둘러진 아래받침돌 위로 가운데기둥 대신 쌍사자를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두 마리의 사자는 뒷발로 버티고 서서 가슴을 맞대어 위를 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사실적이면서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어 주목된다. 8각의 화사석에는 4개의 창이 뚫려 있고,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장식이 번잡하지 않아 간결하면서도 사실적인 수법이 돋보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그다지 크지 않으면서도 뛰어난 조각기법과 아름다운 조형미를 보여주는 걸작이라 하겠다. 원래는 중흥산성내에 있었으나, 일본인이 무단으로 반출하려 하여 경복궁으로 옮겨 놓았다가 지금은 국립광주박물관 실내에 전시하고 있다.

 

2.광주 지산동 오층석탑

 

종 목  보물 제11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광주 동구 지산동448-4

시 대 통일신라시대  

 

광주시내에는 동서로 상당한 거리를 두고 2기의 오층석탑이 있다. 이 가운데 동쪽에 있는 탑을 동오층석탑이라 하는데 이 부근은 백천사지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고증할만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탑은 이중기단 위에 세워진 5층석탑으로 하층기단 면석에는 귀 기둥과 탱주 2주가 있고 몇 개의 판석으로 되었으며, 상층기단 중석도 역시 몇기의 판석으로 되어 있다. 탑신부에 있어서 탑신과 옥개석은 각각 1石인데 각층 탑신면에서는 귀기둥이 있다. 옥개석은 추녀사이가 좁아져 두꺼우며, 전각에 이르도록 직선이고 상면에서 반전되고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이 남아있으나 파손이 심하다. 1955년 해체수리시 4층옥개석 윗면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그후 1961년 다시 수리를 하여 일부 석재를 보완하였다. 탑신을 비롯해 각부가 고준하게 보이는 것으로 신라석탑의 기본형을 잃지 않은 신라 하대석탑이다.

 

3.(전) 광주 성거사지 오층석탑

 

종 목  보물 제10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광주 남구 구동16-2

시 대  고려시대

 

이 탑이 있는 곳은 원래 성거산또는 성구강이라 불렀으며 산의 모양이 거북처럼 생겼다고 전해진다. 거북이 광주를 이롭게 하는 좋은 동물이라 생각하여 광주를 떠나지 못하도록 등에 성거사를 세우고 목 위치에 오층석탑을 세웠다고 한다. 탑의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으나 전체적인 상태는 매우 양호한데, 통일신라 때의 이중기단 양식에서 단층기단 양식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탑의 오층 몸체부 중 초층을 다섯 개의 돌로 짜맞춘 것이 다른 탑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특징이며 지붕돌의 추녀와 몸체부의 알맞은 비례, 상층으로 올라가면서 줄어드는 각층의 비율이 크지않아 전체적으로 높게 보이면서도 튼튼한 안정미와 수려함이 넘치는 고려시대 탑으로서는 뛰어난 수작이다.

 

4.약사암 석조여래좌상

 

종 목  보물 제600호

지 정 일  1976.08.04

소 재 지  광주 동구 운림동11 약사암

시 대  통일신라신대  

 

약사암 대웅전에 주불로 봉안 된 이 석조여래좌상은 원래 있었던 광배가 떨여져 나간 것을 제외하고는 호남지방에 산재되어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가운데 가장 미려하고 원형이 잘 보전된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불상의 머리는 나발 위에 육계가 사발처럼 낮고 넓게 표현되었으며 얼굴은 둥글 넓적하고 백호와 초생달 같은 눈썹, 긴눈과 높지 않은 코, 도톰한 입술 등 80종호를 두루 갖추어 자비에 넘치는 상호를 나타내고 있고 입가에는 신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다. 귀는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상처럼 귓밥이 짧아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지며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나 어깨는 넓고 앞가슴이 풍만해서 상체가 약간 숙여져 보인다.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벗어서 드러낸 우견편단이며 옷주름은 다리의 아래까지 덮은 상현좌 형식인데 간략화 되어 있다. 대좌는 각각 1개의 돌로 다듬은 상·중·하대석으로 구성되었다.

 

약사암은 화순 쌍봉사를 세운 철감선사가 증심사를 짓기전에 이 암자를 세워 기거하면서 증심사를 지었다로 전하지만 고증할 길은 없다. 새인봉은 원래 사인봉 또는 사인암이라 전해져 있는데, 이름은 천제단을 향하여 군신이 봉조하는 형국에서 유래하였다. 약사암 대웅전은 사인암과 천제단의 일직선상에 있어 명당이라 전해지고 있다.

 

5.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종 목  보물 제13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광주 동구 운림동56 증심사

시 대  통일신라시대

 

통일신라시대에 널리 포교되기 시작한 화엄사상은 9세기에 이르러 많은 화엄종찰이 세워지면서 화엄경의 주존인 비로사나불의 조성을 유행시켰다. 비로사나불이란 인류를 구하기 위해 석가가 인간의 몸으로 화생하여 세상에 나타났다고 보는 입장에서 석가를 화신불이라하고 석가불이 설한 불멸의 법을 상징하여 형상화한 것이 법신불이란 뜻의 비로사나불이다. 그러므로 비로사나불이 짓는 손모양은 한모양인데 곧 「무와 유, 공과 물질, 법과 비법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뜻으로 한 손의 검지를 세워 다른 손으로 감싸쥐는 모양인데 이를 지권인이라 한다.

 

이 불상의 특징이라면 불상의 32상 80종호를 따르지 않고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된 점이며 하체를 크게하여 안정감에 역점을 둔 것이라 하겠다. 광주읍지 사찰조의 기록으로는 「신라 법흥왕 4년 무술년(518)에 양나라 고승 철감국사 초창」이라고 하나 쌍봉사를 세운 통일신라 철감선사의 잘못된 기록으로 보인다.

  

6.충효동 도요지


종 목  사적  제141호 
지 정 일 1964.08.29
소 재 지 광주 북구  금곡동 179-5 
시 대 고려시대


무등산 북쪽 충효동에 자리잡은 가마터로,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까지 상감청자·분청사기·백자를 굽던 곳이다.

가마의 구조는 사람이 드나드는 출입시설·도자기를 집어넣는 번조실·굴뚝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둥근 무덤 형태가 연결된 모양으로 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과 출토유물의 연도를 통해 1430년을 전후해 만들어지기 시작된 것으로 보고있다. 그 후 약 70∼80년간 자기제작이 지속되다가 16세기 초에 중단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초기에는 분청사기만 만들다가 백자가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같이 제작했으나, 분청사기의 무늬가 조잡해지면서 생산량이 줄어들었다. 반면 백자를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질이 좋아지고 생산량도 늘어 분청사기가마에서 백자가마로 성격이 바뀌었다. 백자는 크기가 작은 것이 주를 이루는데 비해 분청사기는 크고 작은 것 모두 있고, 종류도 접시·종지·잔·병·항아리·벼루·제기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분청사기에 주로 사용된 무늬는 국화·나비·물고기·게·구름무늬 등이며 여러 무늬를 조합하여 그리기도 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운영되었던 곳으로, 청자부터 분청사기를 거쳐 백자로 넘어가는 과정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7.신창동 유적


종 목  사적  제375호 
지 정 일 1992.09.09
소 재 지 광주 광산구  신창동 512-1 
시 대 철기시대


전라남도 광산군 영산강 유역 낮은 평야지대에 자리한 초기 철기시대의 늪과 못터, 토기가마터, 배수시설, 독무덤(옹관묘) 등 고대 농경문화와 생활유적이 있는 곳이다.

 

독무덤은 53기가 발견되었고, 그 안에서 토기와 철기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지역 독무덤은 영산강 유역 삼국시대 독무덤 계보가 선사시대까지 올라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 가치가 크다.

 

늪과 못터에서 토기, 목제, 석기 등의 유물이 나왔는데, 특히 빗, 괭이, 나무 뚜껑과 같은 목제유물들은 당시 생활모습을 알려 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이와 함께 불탄쌀, 볍씨, 살구씨와 같이 농경문화를 짐작할 수 있는 것들도 발견되었고, 터에서는 토기 제작기술의 발전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움집터에서는 바닥 가운데에 타원형 화덕을 설치하였다.

 

이 유적은 초기 철기시대 생활문화연구와 농경생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고 목제 유물을 통해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어 중요하다. 

 

 

8.광주향교


종 목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9호

지 정 일 1985.02.25
소 재 지 광주 남구  구동 22-3 
시 대 조선시대


향교란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께 제사지내고, 지방 백성들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했던 국립교육기관을 가리킨다.

 

광주향교는 원래 조선 태조 7년(1398) 서석산 장원봉 아래 지었으나 호랑이로 인한 피해가 심해 성 안으로 옮겼다가, 홍수로 다시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정유재란(1597)으로 당시의 건물들은 모두 불탔고, 지금 있는 건물들은 그 뒤에 다시 지은 것들이다.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을 앞쪽에 두고,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인 대성전을 뒤쪽에 둔 전학후묘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로는 동무와 서무·동재와 서재·내삼문·외삼문·비각 등이며, 비교적 간단한 구조로 짜인 소박한 건물들이다. 비각 안에는 흥학비와 중수비·위성묘비 등이 있다.

 

광주향교는 현재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주로 경서와 문집류의 책들을 많이 보관하고 있어 지방 향토사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9.지산재


종 목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0호

지 정 일 1979.08.03
소 재 지 광주 남구  양과동 715-1 
시 대 조선시대


통일신라말 대학자인 최치원을 기리기 위해서 영조 13년(1737)에 지은 사당이다. 원래는 영당을 세워 최치원의 초상만을 모셔왔으나, 조선 헌종 12년(1846)에 지산사를 지어 최치원을 중심으로 최운하·최향안 등을 모셨다. 그 뒤 고종 23년(1886)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로 인해 영당만 남고 모두 철거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22년에 다시 지은 것이며, 지산재는 당시 서원의 강당으로 사용된 건물이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건물의 앞면 중앙에는 김규태가 쓴 ‘지산재’란 현판이 걸려 있으며, 현재 경내에는 영당과 내삼문, 외삼문이 있다.

 

지산재는 조선 후기 영당과 서원이 함께 있는 형태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지니고 있다. 

  

 

10.병천사


종 목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호

지 정 일 1979.08.03
소 재 지 광주 서구  금호동 458 
시 대 일제강점기


고려말의 충신인 정몽주를 비롯하여 지용기·정충신·지계최·지여해 등을 모시는 사당이다.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을 당한 후 선조들의 절의와 애국정신을 이어받기 위하여 이 지방 세력가인 지응형이 1924년에 지은 것이다.

 

경내에는 사당·영당·동재·서재·강당·전사실·내삼문·원직사 등이 있는데 건물 가운데 가장 크고 보존을 요하는 강당 1동만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강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이며,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를 두었고 앙쪽은 방을 들였다.

 

병천사는 서원과 비슷하다고 느낄 정도로 규모가 큰 사당건축이다. 

 

11.환벽당


종 목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호

지 정 일 1972.01.29
소 재 지 광주 북구  충효동 387 
시 대 조선시대


광주호 상류 창계천의 충효동 언덕 위에 높다랗게 자리잡은 정자로, 조선시대 때 나주목사 김윤제가 고향으로 돌아와 건물을 세우고, 교육에 힘쓰던 곳이다. 전에는 ‘벽간당’이라고도 불렀다. 송강 정철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까지 머물면서 공부했다고 한다.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원래는 전통적 누정 형식이었으나, 다시 세우면서 가운데 2칸은 방으로 하고 앞쪽과 오른쪽을 마루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우암 송시열이 쓴 글씨가 걸려 있으며, 임억령과 조자이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있다.

 

환벽당 아래로는 조대와 용소가 있는데, 여기에는 김윤제와 정철에 얽힌 일화가 전한다. 어느날 김윤제가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다 조대 앞에서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난 김윤제가 이상히 여겨 급히 그곳에 내려가보니 용소에서 한 소년이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 소년의 비범한 용모에 매혹되어

데려다가 제자로 삼고 외손녀와 결혼시켰는데, 그가 훗날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정철이었다고 한다.

 

12.정지장군 예장석묘


종 목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호

지 정 일 1975.12.30
소 재 지 광주 북구  망월동 산176 
시 대 고려시대


고려 후기의 무신인 경렬공 정지(1347∼1391) 장군의 묘소이다.

 

공민왕 14년(1365)에 사마시에 장원급제하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공민왕 23년(1374)에 우리나라 최초로 수군 창설 계획을 올려 전라도 안무사로 발탁되었으며, 우왕 3년(1377)에는 순천 도병마사가 되어 순천·낙안 등지에 침입한 왜군을 격퇴하였다. 우왕 14년(1388)에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 종군하여 그 공로로 공양왕 2년(1390)에 2등공신에 봉해지면서 판개성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현재 묘역에는 돌로 만들어진 묘와 묘비, 석인(石人) 2기가 있다. 
  


13.전상의장군 예장석묘


종 목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3호

지 정 일 1977.10.20
소 재 지 광주 북구  화암동 산239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전상의(1575∼1627)의 장군의 묘소이다.

 

장군은 선조 36년(1603)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첫 벼슬로 내외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인조 3년(1625)에는 구성부사로서 좌영장을 겸하였다.

 

광해군 9년(1617) 오윤겸과 함께 회답사로 일본에 건너가 임진왜란 때 끌려간 동포 1500여 명을 귀국시키는 공을 세웠다. 또한 인조 5년(1627)에 후금이 인조의 친명정책을 구실삼아 3만 대군으로 침략하자 안주성 싸움에서 분전하였다. 그러나 구원병이 오지 않자 모든 장병과 함께 죽기를 각오하고 누각 위에 올라 싸우다 53세의 나이로 전사하였다.

 

난이 끝난 후 자헌대부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관직이 높여졌으며, 숙종 10년(1684)에는 안주의 충민사에 헌종 15년(1849)에는 광주의 경렬사와 제주의 귤림서원에 배향되었다.

 

현재 묘역에는 장군과 정부인 풍천 임씨 및 광산 김씨가 합장되어 있으며, 묘 아랫부분에는 둘레석이 둘러져 있다. 묘 앞에는 1857년에 세운 묘비가 있고, 묘역 근처에는 유적보존회에서 1979년에 세운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다.

 

 

14.충효동 정려비각


종 목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4호

지 정 일 1985.02.25
소 재 지 광주 북구  충효동 440 
시 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김덕령(1567∼1596)과 그의 부인 흥양 이씨, 그의 형 김덕홍(1558∼1592), 그의 아우 김덕보(1571∼1596) 등 일가족의 충효와 절개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마을 앞에 세운 비석과 비각이다.

 

김덕령은 그의 형이 고경명의 지휘 아래 참전한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자 상중(喪中)인데도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막기 위해 진해와 고성 등지에서 싸웠다. 그러나 이몽학의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으로 혹독한 고문 끝에 20일만에 옥사하였다. 그의 부인 이씨는 정유재란 때 추월산에 피신해 있다가 일본군의 추격을 받고 순절하였다. 또한 그의 동생은 두 형을 잃고 전쟁 후에 잠시 장릉참봉이란 벼슬을 지냈을 뿐 벼슬을 사양하고 은거생활을 하였다.

 

이 비는 정조 13년(1789) 세운 것으로 높이 220㎝·너비 68㎝이며, 위쪽에는 비각을 얹어 놓았다.

 

비각은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며 삼문과 담장이 둘렀다. 특히 비석의 뒷면에는 김장군 일가의 충·열·효에 대한 칭찬의 글 뿐 아니라 ‘충효지리(忠孝之里)’라는 동네 이름까지 임금이 직접 지어 내렸다는 내용이 써있어 특이하다. 

 

15.허백련 춘설헌


종 목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5호

지 정 일 1986.09.29
소 재 지 광주 동구  운림동 산151 
시 대  근대


춘설헌은 한국화의 대가 의재 허백련이 해방 직후인 1946년부터 1977년까지 30년간 살면서 작품활동을 하던 곳이다.

 

허백련은 조선 후기 한국 남종화를 완성했던 허련의 후손으로, 허련의 아들 허형에게서 그림의 기본을 익히고, 일본과 서울에서 그림공부를 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1938년 전라도 광주에 정착하여 활동하면서 연진회를 발족하여, 전통서화와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고, 삼애학원을 설립하여 농촌지도자를 육성하였다. 또 일본인이 버리고 떠난 무등산의 차밭을 인수해 춘설다원을 경영하면서, 전통차의 재배와 보급에 힘썼다.

 

춘설헌은 1950년에 종래의 낡은 집을 헐고 벽돌로 새로 지은 건물로 마루에는 춘설헌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마루 왼쪽으로는 작품활동을 하던 2개의 방이 있는데, 하나는 온돌방이고 하나는 일본식 다다미방이다. 

  

 

16.오지호가


종 목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6호

지 정 일 1986.09.29
소 재 지 광주 동구  지산동 275 
시 대  조선시대


서양화가인 오지호(1905∼1982) 선생이 조선대 교수로 근무 중이던 1954년부터 198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던 집이다.

 

선생은 전라남도 화순 출신으로 호는 모후산인이다. 인상주의의 회화 양식을 받아들여 토착화시킨 화가로 광주 미술 연구회를 조직하는 한편 전남도전을 세워 지방 미술의 발전을 주도하면서, 광주권 화단에 구상 회화의 화풍을 정착시켰다.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초대작가 등을 역임하였고 1976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초가집으로 앞면 4칸·옆면 1칸 규모인 이 집은 앞과 뒤에 툇마루가 딸려 있다. 전면에는 4각기둥을, 뒷면에는 둥근기둥을 세웠으며 화실로 사용한 6평 정도 크기의 문간채는 북쪽에 빛이 잘 들어오게 만든 채광창이 있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이 가옥은 원래 100여년 전의 건물이었으나 퇴락하여 1986년에 전면적으로 수리하였다.

 

한국 미술 발전에 크게 기여한 오지호 선생이 작품에 전념하던 곳으로 선생의 작업과 삶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17.포충사


종 목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7호

지 정 일 1974.05.22
소 재 지 광주 남구  원산동 947-1 
시 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활약한 고경명(1533∼1592)과 그의 장남 고종후(1554∼1593)·둘째 고인후(1561∼1592) 등 3부자와 유팽로(1554∼1592)·안영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고경명은 임진왜란 때 60세의 고령으로 의병 7천명을 이끌고 왜군과 맞서 싸우다가 금산전투(1592)에서 전사하였다. 그를 따라 의병에 참여하여 왜군과 맞서 싸웠던 둘째 아들인 고인후와 유팽로·안영이 모두 금산 전투에서 고경명과 함께 전사하였고 큰아들인 고종후만 겨우 살았다. 아버지와 아우를 잃은 그는 다시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싸웠으나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선종 31년(1603) 광주 제봉산 아래 5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을 마련하였고 나라에서 ‘포충사’라는 이름을 내렸다.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 장성의 필암서원과 함께 훼손되지 않은 전라도 지방의 2개 서원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일제시대 때 폐사되었다가 유림들이 다시 세웠고 그 뒤 1978년 정부에서 벌인 정화작업으로 예전에 있었던 사당 건물은 보수되고 새로운 사당을 세웠다. 사당 앞에는 동재와 서재, 강당과 그의 유품을 보관하고 있는 장서각이 있다. 

 

 

18.양송천 묘역


종 목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8호

지 정 일 1978.09.22
소 재 지 광주 광산구  동호동 32-2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송천 양응정(1519∼1581) 선생의 묘소이다.

 

중종 35년(1540)에 생원시에 장원급제하고, 명종 7년(1552)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간 뒤 홍문관 부수찬, 예문관, 승정원 등을 거쳐 대사성에 이르렀다.

 

당시부터 싹트기 시작한 당쟁의 희생양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후진양성에 전념했던 선생은 제자 송강 정철에게 ‘궁리의 뿌리없이 먼저 문자에 능한 자는 있을 수 없다. 나 역시 늦게나마 그것을 깨닫고 후회하고 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고 말하여 글을 잘 쓴다고 깊은 사상 없이 함부로 붓을 날리는 일이 없도록 당부하였다.

 

현재 묘역에는 묘 앞에 상석과 향로석,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는데 비문은 민병승이 지었다. 이곳에는 선생의 아들이며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충민공 양산숙의 묘와 선생의 손자인 한림학사 양만용의 묘가 함께 있다. 

 

 

19.빙월당


종 목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9호

지 정 일 1979.08.03
소 재 지 광주 광산구  광산동 452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전기의 문신인 기대승(1527∼1572)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선생은 성리학의 대가로 새 학설을 제시하여 학계에 주목을 받았으며 특히 스승인 이황 선생과 사단칠정을 주제로 한 8년 간의 서신왕래는 너무나 유명하다.

 

원래 이곳은 기대승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박상·박순·김장생·김집 등 조선의 명신들을 함께 배향하고 있는 ‘월봉서원’의 강당이었다.

 

월봉서원은 그가 죽은 뒤 그를 추모하기 위해 큰아들인 기효승이 선조 11년(1578) 세운 것으로 정조가 ‘빙월당’이라 이름을 지어 내렸다.

 

앞면 7칸·옆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며 앞면과 오른쪽 반 칸에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1980년 새로 세운 사당과 그의 저서를 보관하고 있는 장판각, 내·외삼문이 높다란 대지 위에 서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 

 

20.양씨 삼강문

 

종 목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1호

지 정 일 1985.02.25
소 재 지 광주 광산구  박호동산 131-1 
시 대 조선시대


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에 있는 양씨삼강문은 충민공 양산숙 일가 7명을 기리기 위해 인조 13년(1635)에 세운 정려문이다.

 

정려문은 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해 나라에서 그 동네에 세워주는 문을 뜻한다. 양씨삼강문은 정면 5칸·측면 1칸짜리 맞배지붕의 평범한 건물이다.

 

원래는 양산숙을 비롯하여 효자, 열녀, 절부 각 2명씩을 모셨으나, 회진임씨 문중으로 출가한 양산룡의 딸은 임씨문중에서 모시고 있어 현재는 6분의 정려만을 모시고 있다.

 

충신으로 모셔진 양산숙은 임진왜란(1592) 때 진주성 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김천일장군과 함께 순절한 무인이다. 효자로 모셔진 양산룡과 양산수는 양산숙의 형제로, 정유재란(1597) 때 삼양포에서 왜군을 만나 어머니를 구하려다 순절한 인물들이다.

 

절부로 모셔진 양산숙의 어머니인 죽산박씨는 왜군을 만나 바다에 투신하여 순절하였으며, 그의 부인인 광산이씨 또한 왜적에 항거하다가 자결하였다. 김광운에게 출가한 누이 양씨는 왜군을 만나 바닷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고 말았다.

 

21.용아생가


종 목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3호

지 정 일 1986.02.07
소 재 지 광주 광산구  소촌동 363-1 
시 대 조선시대


한국의 서정시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한 용아 박용철(1904∼1938) 선생의 생가이다.

 

김영랑·정지용·정인보 등과 문학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30년 순수시 전문지인 『시문학』을 발간하여 그 창간호에 대표작 『떠나가는 배』,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시문학』, 『문예월간』 등 문예지를 간행하였고 방대한 역시편 등을 통하여 해외문학을 우리나라에 소개한 것은 한국 근대 문학사에 큰 공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저서로 『박용철전집』2권이 있다.

 

이 집은 선생의 고조부가 지었다고 전하지만 19세기 후반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며, 슬레이트 지붕을 1995년 원래 초가로 복원하였다. 본채와 사랑채, 행랑채, 사당, 서재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는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왼쪽은 부엌이며 가운데 2칸은 방으로 꾸몄다.

 

사랑채는 5칸이며 사당은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행랑채는 4칸으로 사랑채로 들어가는 대문이 딸려 있다.

 


22.무진고성지


종 목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4호

지 정 일 1989.03.20
소 재 지 광주 북구  북구 두암동 산136외, 동구 지산동.산수동 일원 
시 대 통일신라


광주광역시 북구 무등산에 있는 성터로, 무등산의 북쪽 지맥인 장원봉을 중심으로 잣고개의 장대봉과 제4수원지 안쪽의 산 능선을 따라 타원형으로 만들어졌다. 성벽은 바닥에 5단 정도를 돌로 쌓아올리고, 그 위의 성벽을 잡석으로 채우는 방식이다.

 

성벽의 남북 길이는 1000m이고, 동서의 너비는 약 500m, 둘레는 3500m에 달하는 규모가 큰 성이다. 성안에서 ‘관(官)’, ‘국성(國城)’ 등의 글자를 새긴 기와조각들과 새, 귀신의 얼굴을 새긴 막새기와, 그리고 순청자, 상감청자 자기조각들이 발견되었다. 특히 잣고개 남쪽 위층 건물터에서 발견된 새무늬 수막새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새무늬가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출토되는 유물들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까지 사용된 성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23.화담사


종 목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8호

지 정 일 1993.03.20
소 재 지 광주 서구  화정동 781-23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 문신인 정희 선생을 중앙에 모시고 좌우에 그의 아들 정초·손자 정수충과 정오도·민제장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처음에는 사경과 예법에 뛰어나고 청렴결백한 정수충의 영정을 모신 영당이였으나, 정조 8년(1784) 그의 위패를 함께 모시면서 사당의 격을 갖추었다. 정조 20년(1796)에는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민제장을, 순조 6년(1809)에는 정몽주의 제자로 충절을 지킨 그의 할아버지인 정희와 세종 때 학문과 예술, 과학, 기술 등에 업적을 남기고 청렴했던 그의 아버지인 정초의 위패를 함께 모셨다. 그 뒤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제사를 지내지 않다가 1905년 다시 제사지내기 시작했다. 1906년 송시열의 제자로 충효가 뛰어났던 정오도의 위패를 추가하고 정희의 위패를 중앙에 두어 지금의 틀을 갖추었다.

 

제사를 올리는 공간인 화담사는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며 앞쪽에는 넓은 마루가 있다. 건물 앞쪽으로는 내삼문인 양양문이 있고 계단을 내려가면 중간에 학문을 연구하는 공간인 동재와 서재가 있어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양식을 갖추고 있다.

 
 

24.금곡동 제철 유적


종 목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1호

지 정 일 1994.02.18
소 재 지 광주 북구  금곡동 798번지 일원 
시 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김덕령 장군과 관련된 유적지로, 무기를 만들던 곳이다.

 

무등산 꼭대기에서 서북쪽으로 뻗은 능선이 비교적 완만한 경사지의 평탄한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주검동’이라 불리우기도 한다.

 

이곳은 위아래 2단으로 돌을 쌓고, 제철 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한 급경사면을 만든 후 제철, 단조(광석에서 금속을 뽑아 두드려 만드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철기 생산에 필요한 기본과정과 시설을 배치해 놓았다. 제철로는 작은 판돌과 깬돌을 이용하여 직사각형으로 만든 후 그 안을 점토 등으로 다졌다. 제철로에서 생산된 철을 다시 가열하여 불순물을 없애는 정련로는 가운데 바닥의 판돌이 열 때문에 갈라져 있다. 제철로의 동쪽 8m에는 단조철기(두드려서 만든 철기)에 사용되었던 단조로와 단조대석이 있다. 단조로는 많이 파손되어 그 형태가 변형되었는데, 타원형 내지는 직사각형으로 보인다. 단조대석은 불순물이 없어진 철괴로, 단조철기를 만들던 시설이다. 제철로와 정련로에서 생산된 철괴의 불순물을 없애는데 이용했던 대형대석이 확인되었고, 철제·단조박편·철촉·철촉반제품·추형철기 등의 제철유물과 분청자·질그릇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출토된 유물들로 보아 조선시대인 15∼16세기에 사용되었던 유적으로 보인다. 

 


25.명화동 장고분


종 목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2호

지 정 일 1995.04.20
소 재 지 광주 광산구  명화동 170-5 
시 대 삼국시대


영산강의 충적지 가장자리에 있는 평동저수지 위의 낮은 구릉에 있는 삼국시대 무덤이다.

 

봉분의 평면은 사다리꼴과 원형을 이어 놓은 형태이며, 사다리꼴의 밑변을 제외한 부분은 도랑이 감싸고 있어 전체적인 형태가 방패형이다. 봉분의 길이는 33m이고 원형부분에 돌방(석실)을 만들었으나, 도굴과 파괴로 석실의 구조는 알 수가 없다.

 

발견된 유물도 매우 적으나 사다리꼴과 원형의 연결부분 가장자리를 따라 봉분에 박혀있는 원통형토기는 그 배치형태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예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또한 무덤 밑에서 청동기시대의 집터가 발견되어, 이지역에서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화동 전방후원 형태의 무덤은 봉분과 도랑의 모양, 원통형토기의 배치 등이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비슷해 고대 한일관계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26.범세동선생 묘


종 목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3호

지 정 일 1998.02.12
소 재 지 광주 광산구  덕림동 산94-1 
시 대 조선시대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포은 정몽주의 제자인 복애 범새동의 묘지이다. 고려 공민왕 18년(1369)에 과거에 급제하여 덕녕부윤, 간의대부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화해사전』,『동방연원록』등의 책을 펴냈다.

 

조선 왕조의 개창을 반대하며 고향인 나주(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복만동)에 은거하였으며, 조선 태종이 여러 차례 벼슬을 권했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죽은 뒤 후덕군에 봉해지고 문충의 시호를 받았다.

 

묘역 안에는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묘비와 문인석이 있다. 1.65m 높이의 묘비는 대리석으로 만들어 화강암의 사각형 대좌에 맞추어 세웠다. 상당한 거리를 두고 마주보고 서 있는 문인석은 높이 210㎝로 각이 진 관모를 쓰고 눈·코·입이 뚜렷한 얼굴에 두 손을 가슴에 모아 홀을 들고 있다. 

 

 

27.광주학생운동 발상지

 

종 목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6호

지 정 일 1999.04.30
소 재 지 광주 북구  북구 누문동 144-45외 동구 장동 39-12번지 
시 대 일제강점기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하였던 학생들이 다니던 학교의 교사부지의 일부를 문화재로 지정한 것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우발적인 한·일 학생간의 충돌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축적된 민족의식과 독립의지의 적극적인 표출이며, 일제의 탄압과 착취, 차별교육에 대항한 민족운동이다. 광주에서 항일 시위를 전개한 후 전국의 194개 학교 54,000여명의 학생들이 참가하여 일제를 놀라게 한 사건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태동은 광주공립고등보통하교, 광주공립농업학교,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전라남도공립사범학교 학생들이 "조선민족을 일본제국으로부터 독립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성진회, 독서회, 소녀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단체들은 동료 학생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시켰고, 일제에 항거하여 몇차례의 동맹휴학을 강행하면서 단결력을 키웠다. 이러한 독립의식과 단결력은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발생한 조선여학생희롱사건이 발단이 되어 11월 3일의 항일시위를 전개하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는 현재 광주제일고등학교이고, 광주공립농업학교는 북구 임동에 있었으나 현재는 택지로 변하였고, 현재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는 현재 전남여자고등학교이고, 전라남도공립사범학교는 현재의 중앙도서관 자리에 있었다. 이 가운데 광주제일고등학교와 전남여자고등학교의 일부를 기념물로 지정하였다.

 

28.이장우 가옥


종 목  광주광역시 민속문화재  제1호

지 정 일 1989.03.20
소 재 지 광주 남구  양림동 128 
시 대 조선시대


안채·사랑채·행랑채·곳간채·대문간으로 구성된 상류양식의 기와집으로 1899년에 지은 것이다.

 

안채는 ㄱ자형 집으로 규모가 큰 편이다. 왼쪽부터 툇마루·건넌방·대청·안방·부엌 그리고 꺾이면서 작은방이 배열되어 있다. 온돌방의 문은 겹문으로 안은 미닫이, 밖은 여닫이문을 설치하였다. 대청에는 들어열개문을 설치하여 필요시 개방할 수 있게 하였다.

 

최근에 욕실을 개조하였으나 전반적으로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전통가옥이다. 

 

 

29.최승효 가옥


종 목  광주광역시 민속문화재  제2호

지 정 일 1989.03.20
소 재 지 광주 남구  양림동 166-19 
시 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최상현의 집이다. 양림산의 동남쪽 끝부분에 있으며 1920년대에 지은 매우 큰 규모의 전통가옥이다.

 

동쪽을 향한 一자형 평면의 안채는 오른쪽의 경사진 지형을 자연 그대로 이용하여 조그만 공간의 반지하층을 구성하여 율동감을 주었다. 서향인 뒤쪽은 마루를 두르고 미닫이 창문을 만들어서 서쪽의 빛을 차단하고 있다. 또한 미닫이 창문으로 인해 방이 어두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벽면 윗부분에 창을 설치하였다. 대청을 제외하고는 모든 장소에 다락을 설치하여 독립운동가들을 피신시키는 장소로 사용했다고 한다.

 

한말의 전통가옥에서 개화기의 한옥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건축사적 의미가 큰 집이다.
  


30.김용학 가옥


종 목  광주광역시 민속문화재 제3호

지 정 일 1989.03.20
소 재 지 광주 북구  매곡동 306 
시 대 일제강점기


살림집과 정자가 언덕 위에 조화롭게 배치된 집으로 1900년대 초에 지었다. 동북쪽이 낮고 서남쪽이 높은 지형을 살려 낮은 곳에 사랑채와 안채를 동서 중심축에 배치하였다. 주거공간의 왼쪽에 연못과 하은정을 그 뒤쪽에는 연파정을 배치하여 자연과 어울리도록 하였다.

 

안채마당에서 돌계단을 따라 동산에 올라가면 오래된 벗나무에 둘러싸인 하은정과 연파정이 있다. 하은정과 연파정은 1933년에 지은 정자이다. 연파정은 원래 김용학의 아버지 김희수가 할아버지를 위하여 지었는데, 김용학이 아버지를 위하여 하은정을 지으면서 불이나 다시 지었다고 한다.

 

이 집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아름다운 주변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집이다.
  


31.증심사


종 목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

지 정 일 1984.02.17
소 재 지 광주 동구  운림동 56 
시 대 신라


무등산 서쪽 기슭에 있는 절로, 기록에 따르면 철감선사 도윤(798∼868)이 신라 헌안왕 4년(860)에 지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려 1970년 대웅전을 시작으로 각종 부속 건물들을 차례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 오백전, 지장전, 비로전을 비롯하여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채가 있다. 이 중 오백전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들은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오백전은 대웅전 뒤에 있는 건물로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이다. 안쪽에는 오백 나한상을 모시고 있는데 조선 세종 25년(1443)년 절을 고쳐 세울 때 지은 것이라 전하고 있다. 대웅전은 절의 중심 건물로 석가모니불상을 모시고 있으며, 비로전에는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다.

 

증심사에는 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131호)을 비롯하여 삼층석탑(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과 석조보살입상(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이 있다.
  


32.약사암


종 목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호

지 정 일 1984.02.17
소 재 지 광주 동구  운림동 11 
시 대 고려시대


증심사는 철감선사 도윤이 신라 헌안왕 4년(860)에 세운 절로 송광사에 딸린 절이다. 증심사 입구에서 약사 계곡을 따라 새인봉 쪽으로 오르다보면 비교적 규모를 갖춘 약사암이 모습을 드러낸다.

 

약사암은 증심사의 부속 암자로 철감선사 도윤이 증심사를 세우기 직전인 850년경 ‘인왕사’라는 이름으로 지었고, 고려 충렬왕 32년(1306)년 절을 고쳐 세우면서 ‘약사암 ’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1974∼1984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대웅전, 운림당, 운림선원, 강원 등이 있다. 대웅전은 석가여래를 모신 중심 건물로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 있는 다포 양식이다.

 

운림당과 강원은 스님들이 생활하는 요사채로 마주보게 배치되었다. 대웅전에 모신 석조여래좌상(보물 제600호)과 대웅전 앞에 있는 3층석탑이 9세기경 작품으로 추정되어 이 사찰의 역사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33.무양서원


종 목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호

지 정 일 1987.12.31
소 재 지 광주 광산구  월계동535-1 
시 대 일제강점기


고려 인종(재위 1122∼1146) 때 어의이면서 명신인 장경공 최사전을 중심으로 그의 후손 4명(손암 최윤덕, 금남 최부, 문절공 유희춘, 충열공 나덕헌)을 모시고 있는 서원이다.

 

최사전은 의술로써 벼슬에 나갔는데 왕의 총애를 받아 높은 벼슬에 오른 사람이다.

 

무양서원은 1927년에 탐진 최씨 문중이 전국 유림의 호응을 얻어서 세운 서원이다. 서원의 이름은 광주의 옛 지명에서 따 왔다고 하는데, 강당인 이택당을 중심으로 왼편과 오른편에 합의문과 합인문이 있다.

 

합의문을 지나면 오른편에 동재인 성지재가 있고 왼편에는 서재인 낙호재가 있다. 또한 높은 땅 위에 담장이 있는 무양사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것은 사당 안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원래 서원은 제사 기능과 교육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탐진 최씨 문중에서는 1945년 광산구 쌍암동에 무양중학교를 설립하여 지금까지 교육기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34.풍영정


종 목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호

지 정 일 1987.12.31
소 재 지 광주 광산구  신창동852 
시 대 조선시대


풍영정은 조선시대 승문원판교를 지낸 김언거(1503∼1584)가 벼슬을 물러난 뒤 고향에 돌아와 지은 정자로 1948년에 후손들이 지붕을 수리하였다.

 

김언거는 중종 20년(1525)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명종 15년(1560) 승문원판교를 끝으로 고향에 내려왔다. 풍영정에서 지내면서 김인후·이황 등의 이름 높은 유학자들과 교우하였다.

 

풍영정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정자 안쪽에는 이황·김인후 등이 지은 현판들과 한석봉이 쓴 ‘제일호산’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35.만귀정


종 목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호

지 정 일 1984.02.29
소 재 지 광주 서구  세하동 274-1 
시 대 일제강점기


만귀정은 흥성 장씨의 선조인 장창우가 학문을 가르쳤던 옛 터에 후손들이 그의 덕을 기리고자 지은 정자이다.

 

1934년에 세웠으며 1945년에 고쳐 지은 건물로 앞면 2칸·옆면 2칸 규모를 갖추고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만귀정 안에는 많은 시문과 현판들이 걸려 있다.

 

만귀정은 큰 연못 가운데에 세운 정자로 다리를 사이에 두고 다른 정자들과 한 줄로 늘어서 있다.

 


36.용두동 지석묘


종 목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6호

지 정 일 1984.02.29
소 재 지 광주 서구  용두동 25 
시 대 청동시대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광주 용두리 고인돌군은 남북 방향으로 3줄이 배치되어 있는데 현재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은 10기이며, 주위에 덮개돌을 지탱하는 받침돌이 여러 개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2∼3기 정도 더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0개의 고인돌 중에는 전라남도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탁자식 고인돌이 1기 있고, 나머지는 바둑판식이다. 탁자식 고인돌의 덮개돌은 길이 1.5m, 너비 0.65m이며, 3개의 받침돌이 지탱하고 있다. 이들 고인돌의 덮개돌은 이곳에서 1㎞ 떨어진 송악산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광주 지역에서는 모두 103기의 고인돌이 발견되었는데, 이곳에서는 탁자식 고인돌 1기가 발견된 것이 특징적이다.

 

 

37.용진정사


종 목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

지 정 일 1985.02.25
소 재 지 광주 광산구  왕동 산3-2 
시 대 대한제국시대


한말의 도학자 오준선(1851∼1931)이 강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오준선은 오하규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항규에게 입양되었다. 18세부터는 노사 기정진에게 배우며 학문의 폭을 넓혔으며, 일제의 회유정책에도 굽히지 않고 1917년에 용진산에 들어가 생을 마칠 때 까지 후학을 가르쳤다.

 

용진정사는 원래 용진사라는 절이 있던 곳인데 절이 허물어 진 뒤 정안 이씨가 그 터를 가지고 있었다. 이때 오준선의 뜻을 전해 듣고 절터의 일부를 내주어 건물을 짓게 되었다.

 

오준선이 죽은 뒤 문인들이 강당 동쪽에 3칸의 용진영당을 세우고 1924년 채용신이 그린 초상화를 모셨다. 영당의 좌우벽에는 큰아들 오헌수와 둘째 아들 오동수의 영정이 함께 걸려 있다. 

 

 

38.운림동 석실고분


종 목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9호

지 정 일 1989.03.20
소 재 지 광주 동구  운림동 산18 
시 대 백제


무등산 장원봉의 동남쪽으로 비탈진 곳에 위치한 무덤들이다.

 

모두 6개의 무덤이 있으나 널(관)을 넣었던 돌방(석실)이 완전히 드러난 것은 2기 뿐이다. 1호와 2호 무덤은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바닥은 얇은 판돌들을 물이 잘 빠지도록 이중으로 깔고, 가장 밑바닥은 회갈색의 단단한 진흙을 냇돌과 섞어 기초를 다졌다. 올라가면서 무덤방의 너비를 줄인 후 정상부에 2매의 뚜껑돌을 올려 그 무게로 동서벽을 유지하게 한 맞조림식 돌방무덤이다.

 

운림동 돌방무덤은 이 고장의 백제사 연구가 문헌상 어려운 실정에서, 이 지방에서 보기드문 백제식 돌방무덤의 출토로 고고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39.호가정

 

종 목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4호

지 정 일 1990.11.15
소 재 지 광주 광산구  본덕동 1 
시 대 조선시대


호가정은 조선시대에 설강 유사(1502∼1571)가 지은 정자로, 호가정이라는 이름은 중국 송나라 소강절이 말한 ‘호가지의’에서 따온 것이다.

 

명종 13년(1558)에 처음 세웠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지고 고종 8년(1871)에 다시 지었다. 그 뒤 1932년과 1956년에 고쳐 지었다.

 

설강은 중종·명종대의 인물로 여러 관직을 지냈으나, 다른 관료의 모함으로 벼슬을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당시 이름 높은 유학자들과 교우하였으며, 후대 사람들이 그의 시를 즐겨 읊었다. 죽은 뒤 광주 경렬사에 신위를 모셨으며, 그의 글로는 『설강유고집』과 『위친필봉제축유서』가 전하고 있다.

 

정자는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정자 안쪽에는 ‘호가정’이라 새긴 현판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새겨 놓은 편액들이 걸려 있다.

 

40.풍암정


종 목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5호

지 정 일 1990.11.15
소 재 지 광주 북구  충효동 718 
시 대 조선시대


풍암정은 조선 선조와 인조 때 활동하였던 풍암 김덕보(1571∼?)가 지은 정자로 ‘풍암’이라는 이름은 그의 호를 따서 붙인 것이다.

 

김덕보는 임진왜란 때에 큰형 덕홍이 금산싸움에서 죽고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하던 작은형 덕령까지 억울하게 죽자, 이를 슬퍼하여 무등산 원효계곡을 찾아와 학문을 연구하며 평생을 살았다. 후에 의열사에 신주를 모셨다.

 

풍암정은 앞면 2칸·옆면 2칸 규모로 이루어져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고 ‘풍암정사’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41.삼거동 고인돌

 

종 목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7호

지 정 일 1990.11.15
소 재 지 광주 광산구  삼거동 산50번지외 
시 대 청동시대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있는 이 고인돌은 바둑판식으로 주변 200m 이내의 구릉 위에 모두 49기가 2개의 무리를 지어 분포하고 있다. 49기의 고인돌중 20여 기는 덮개돌을 지탱하는 받침돌이 없으며, 덮개돌은 원형과 타원형으로 형태가 일정하지 않다.

 

23기로 이루어진 한 무리의 고인돌은 동서로 위치하고 있는데, 2기만 덮개돌이 1∼1.3m로 두껍고 나머지는 얇은 편이다. 또 다른 한 무리는 북두칠성 모양으로 모여 있는데 크기는 모두 작은 편이다. 이곳에는 돌을 구할 수 있는 장소가 없기 때문에 외부에서 운반하여 고인돌을 만든 것으로 보이고, 칠성마을이라는 이름은 고인돌이 놓인 형태에서 따온 것 같다. 

  

 

42.임암동.원산동 선사주거지 및 석곽묘


종 목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8호

지 정 일 1992.10.22
소 재 지 광주 남구  임암동 64,원산동 1 
시 대 선사시대


광주의 임암동과 원산동을 구분짓는 돌머리라는 낮은 구릉에 분포하는 선사시대 집자리와 돌덧널무덤(석곽묘)이다.

 

이 일대는 영산강 지류인 대촌천의 상류로 취락형성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임암동 주거지는 일부 유실되었는데, 그 형태는 원형에 가까운 타원형이다. 내부구조는 북벽 가까이에 감실을 가지고 있고, 가운데 기둥 구멍과 북벽 사이에 타원형의 화덕 자리가 있다. 이 화덕 자리를 중심으로 민무늬토기가 집중 분포한다. 기둥 구멍을 중심으로 서북쪽에 갈돌, 화덕 자리, 모룻돌이 발견되어 이 부분이 부엌이었음을 알게 해 준다. 동남쪽은 숫돌과 돌조각들이 나와 도구를 제작하던 곳으로 보인다.

 

집자리 주위에는 돌덧널무덤이 있는데, 돌방과 일부 천장돌을 갖춘 채 확인되었다. 돌방의 동벽은 1매의 긴 대석으로 만들고 남북벽은 깬돌로 쌓았다. 바닥은 자연암을 깎아 그대로 사용하였다.

 

돌방의 구조로 보아 삼국시대의 구덩식돌방무덤(수혈식석실분)으로 추정한다.

 

 

43.광주읍성 유허


종 목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0호

지 정 일 1994.04.13
소 재 지 광주 동구  광산동 12-2번지외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광주읍성이 있었던 곳이다. 1879년 간행된 『광주읍지』에 따르면 광주읍성은 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 8,263척 높이 9척이며, 동·서·남·북에 성문이 있었다고 한다.

 

1979년에 간행된 『광주시사』에 의하면 일본군이 한말 의병항쟁을 탄압하기 시작한 1908년부터 1918년 사이에 철거되었으며, 4대문의 위치와 성 밖에는 주위에 물길을 만든 도랑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동쪽의 서원문은 대의동 옛 광주문화방송 4거리, 서쪽의 광리문은 황금동 옛 미국공보관 4거리, 남쪽의 진남문은 광산동 옛 전남대학교 의과대학가는 4거리, 북쪽의 공북문은 충장로 4가 충장파출소 4거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광주읍성은 일본군의 ‘남한폭포대토벌작전’에 의해 철거되고, 그 자리에 도로가 개설되어 일본인 시가지가 형성되면서 훼손되었다. 현재는 읍성의 성벽과 관련된 돌들과 흙으로 된 둑이 남아있다. 

  

 

44.김봉호가옥

 

종 목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5호

지 정 일 2000.05.18
소 재 지 광주 광산구  하남동 71번지 
시 대 근대


1946년에 지은 집으로 안채, 문간채 등과 축사를 갖추고 있다.

 

안채는 앞면 6칸·옆면 1칸 규모의 건물로 왼쪽에서부터 방·부엌·큰방·대청마루·건넌방 순으로 되어 있다. 큰방과 대청마루, 건넌방 위에는 대청 다락방을 설치하였는데 3칸 규모로 넓고 높이도 높아 특이하다.

 

문간채는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서양식 기와를 얹었다. 외양간·대문·방·헛간·뒷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45.만취정


종 목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6호

지 정 일 2002.12.27
소 재 지 광주 광산구  동호동 419 
시 대  일제강점기


만취정은 남동마을 입구 우측에 길게 수평으로 자리를 잡아 만취정, 남동사, 동호사를 마을앞 도로와 나란히 배열하여 현실적인 자연 형태의 원리를 잘 적용하고 있다. 정자는 정남향을 바라보고 있으며 남동사의 방향은 조금씩 지형의 축에 따라 약간씩 남서로 기울어져 배치되어 있다. 정자와 남동사의 경내에는 소나무를 비롯하여 단풍나무 은행나무 동백나무 수양버드나무 매실나무 넝쿨사철나무 청흑접목 단풍나무 등 송죽화초의 정원으로 꾸며져 있고 주위 사면이 탱자 울타리로 둘러져 있어 그 경관이 아름답고 자연스럽다. 특히 정자 앞과 동호사로 가는 사이의 뜰에는 200년 이상의 수령을 가진 적송은 만취정의 정취를 더해준다.

 

만취정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1칸 전후퇴가 있고 어칸이 양측면 칸 보다 1척 정도 크며 팔작지붕 기와 건물이다. 외주는 원통형 기둥으로서 정면 4개의 기둥 아래에는 잘 다듬어진 원통형 주초 위에 세웠고 그 밖의 기둥은 자연석 덤벙주초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다. 건물 중앙에 있는 온돌방 둘레의 각 모서리에는 네모기둥을 세웠다. 이처럼 외부 공간과 이주를 원주로 사용한 것은 하늘과의 관계이고 온돌방 주위의 기둥이 네모인 것은 인간과의 관계에 의한 천지인 사상이 아닌가 여겨진다.

 

만취정 심원표는 조선조 단종 때 대제학을 지낸 명신 망세정 심선(沈璿)의 후예로 일찍부터 학업에 전념하여 뛰어난 덕행을 갖춘 한 말의 선비이다. 그의 나이 이십 이전에 문간공 노사기를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위인의 도를 배웠고 신축년에는 문충공 송병선으로부터 존양의 의리를 배웠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 선공감역의 벼슬이 제수 되었음에도 나아가지 않고 오로지 자연 경관을 즐기는 야인 생활에 충실하였다. 일제의 침략이 감행되자 심원표는 당시의 의병장 김준 전수용 심수택 등을 도와 많은 협찬을 하였고 왜적들의 은사금을 단호히 거절하여 그 부당함을 꾸짖었다. 이로 인해 왜적의 미움을 사 장성 및 광주 등지의 헌병소에 구인되어 많은고초를 겪었고 총포사살의 위협에도 조금도 두려워함이 없이 태연자약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이러한 그가 만년에 이 정자를 지어 만취라 하였다. 「만취」라는 말은 눈보라의 추운 겨울에도 그의 본색이 변하지 않는 소나무의 굳은 절개를 가리켜 부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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