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자랑스러운 인물

대구의 자랑스러운 인물

작성일 2012.05.12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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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초3인데요

학교 숙제로 대구의 자랑스러운 인물을 알아오라고 그래요

대구의 자랑스러운 인물 가르쳐 주세요!

예를 들면

1)자랑스러운 인물의 이름

2)그 사람이 자랑스러운 이유

3)그 사람이 왜 그일을 하게 되었는지

4)그때 당시 대구의 상황은 어땠는지

이 정도내용을 좀 간추려서 써주시면 좋겠내요!

 

저주글은 신고합니다!

내공15걸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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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자랑스러운 인물)

 

1.우배선 (1569-1621)


본관 : 단양

별칭 : 자는 사성
호 :  월곡

 
어려서부터 학문에 종사하였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어 향리에서 학문에만 종사였습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24세의 나이에 대구에서 서사원 등과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는 사재를 털어 의병을 모집, 화원 달성 등지에서 왜군과 싸워 연전연승하여 그 위용을 떨쳤다. 이러한 전공으로 인해 초토사 김성일의 천거를 받아 예빈사 참봉에 기용되었다. 그후에도 계속 왜군과 싸워 많은 전공을 세워 군기사( 판관이 되었으며, 이어서 합천군수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그의 거처를 모르는 조정에서는 수소문 끝에 그를 찾아 1600년 금산군수에 명하였다. 그러나 사련원에서 정사를 전적으로 향리에게 맡겨 부역이 고르지 못하고 백성들이 유망사태를 빚게 되었다고 탄핵하여 파직시킬 것을 청하자 스스로 사직하였다.

 

1603년 다시 낙안군수를 지냈으며, 1604년에는 임진왜란 시의 전공으로 인해 선무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 광해군 때에는 두문불출하고 역학연구에 전념하였다. 덕동사에 제향되었다.
 
달서구 상인동의 월곡역사공원에 월곡 선생의 동상과, 월곡역사박물관, 단양우씨종가, 낙동서원 등이 있다.

 

2.백기만 (1902~1967)


호 : 목우

필명 : 백태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경북 대구
주요작품 : 「꿈의 예찬」 「내 살림」 「기쁨」 「거화」 
 
대구고보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중퇴. 양주동, 유엽 등과 함께 「금성」지 동인으로 출발, 그 후 「개벽」 「여명」지 등의 편집을 맡기도 하였다.

 

초기에는 「금성」에 「꿈의 예찬」 「내 살림」 「기쁨」「거화(炬火)」 등 많은 시를 발표하였다. 3. l 운동 때 대구의 학생운동을 주도하여 투옥된 것을 비롯, 광복 전까지 꾸준히 항일운동을 벌인 지사적(志士的) 시인이기도 하다.
 

조선시인선집」을 편간하기도 했고, 1951년에는 「상화와 고월」, 1959년에는 경북 작고예술가 평전인 「씨 뿌린 사람들」을 간행하였다.

 

1924년에〈청개구리〉를 발표하여 두각을 나타내었다. 이후 그는 민족시인 이상화와 교유하면서 학생들을 동원하여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붙잡혀 투옥되는 등 항일저항활동을 하였다. 특히 그는 이상화가 죽은 뒤에 대구 달성공원에 상화시비를 건립하는데 앞장섰고, 이상화와 이장희의 시를 정리하여 「상화와 고월」 및「씨뿌린 사람들」을 간행하는 등 대구와 경상북도 지역 향토시인들을 정리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의 시세계는 신선한 감각과 신비주의적인 감수성을 기반으로 하며, 시형은 산문적인 호흡을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일제말 많은 문인, 정치가, 교육자들이 훼절했지민 끝까지 뜻 굽히기를 거부했던 백기만은 지조의 인물이라 할것이요 그의 꿋꿋한 지조와 못다피운 예술의 열정은 그가 지은「대구 시민의 노래」말과 함께 길이 기억될 것이다.

 

대구시민의 노래 작사자인 그는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는 철저히 저항했던 지사였고, 1920년대 이후는 학국문단을 빛나게 했던 시인으로 활동했으며, 광복 이후에는 불의를 용납지 않던 언론인으로, 그리고 대구문화예술계의 거봉으로 한평생을 살아온 자랑스러운 대구의 인물입니다

 

백기만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 두류공원에 시비를 건립하였으며 현재 인물동산내에 친구인 이상화 동상, 이장희 시비, 현진건 문학비와 같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3. 이갑성 (1889.10.23~1981.3.25)

 

본관 : 전주
호 : 연당
활동분야 : 독립운동
출생지 : 대구
주요수상 :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독립운동가로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다.

1915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그는 1919년 최연소자로 청년층을 대표하여 민족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습니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비롯한 각급 학교의 학생중심 시위운동을 주도하고 태화관을 중심으로 한 민족대표의 서명운동과 전단살포의 중책을 맡아 활약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습니다. 1924년 세브란스 의학의 지배인으로 활동하고 1926년 YMCA이사가 되어 항일청년운동을 지도하였습니다. 1931년 경성공업의 지배인을 역임하고, 같은해 신간회 사건으로 상해로 망명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바로 독립촉성국민회를 결성, 회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47년 김규식 등과 협력 입법의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1950년 제2대 민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1952년 국민회의 최고위원에 추대되었습니다.

 

자유당 말기에는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조용한 생활을 하였으나, 1963년 민주공화당의 창당 때에는 그 발기위원이 되었습니다. 1965년 광복회장에 취임하여 독립유공자들의 복지증진을 위하여 노력하였고, 같은해 이준 열사 기념사업회 총재로 활약하는 한편, 삼일동지회 고문으로도 활동하였습니다.

 

80세 이후에는 민족대표 33인의 유일한 생존자로 3.1운동의 기념비적 인물로서, 해마다 거행되는 3.1기념행사를 지켜보다가 1981년 92세의 나이로 여생을 마쳤습니다.

 

4.이상백 (1904~1966)


본관 : 경주
호 : 상백(想白) 또는 백무일재(白無一齋)
출생지 : 대구
주요수상 : 건국문화훈장 대통령장(1963)
주요저서 : 「조선문화사연구논고」 「이조 건국의 연구」
 
아버지는 시우이며, 큰형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상정, 둘째형은 민족시인 상화이다. 구한말의 선각자이며 큰 부호인 큰아버지 일우가 세운 우현서루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915년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어서 일본 와세다제일고등학원을 거쳐, 1927년 와세다대학 문학부 사회철학부를 졸업하고, 1930년 일본농구협회 임원을 거쳐 이듬해 일본체육회 상무이사에 선임되었는데, 1932년 제9회 올림픽대회 일본 대표단 임원으로 로스앤젤레스에 다녀온 후, 1935년 일본체육회 전무이사가 되었다. 이듬해 제11회 올림픽경기대회 준비위원으로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스웨덴, 폴란드 등을 방문하고, 1939년 와세다대학교 재외 특별연구원으로 중국에 가서 2년 6개월간 동양학을 연구하였다.

 

그 뒤 와세대대학 동양사상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재외특별연구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동양학연구를 더욱 깊이 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수학, 연구하는 동안에도 자주 서울을 내왕하면서 국내학계와 긴밀히 交遊하여 진단학회의 창립에 참여하고 「진단학보」에 논문을 게재하기도 하였다. 1945년 경성대학 교수로 취임했고, 2년 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를 창설하고 죽을 때까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연구와 교육에 진력하였다. 또 1957년에 한국사회학회를 창설하고 이 학회의 11대 회장으로서 한국사회학계를 주도하였다.

 

8·15광복 후 194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가 된 후, 사회학과 주임, 부속박물관장, 동아문화연구소장을 역임하고, 1955년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밖에 대한민국학술원 회원·국사편찬위원·한국사회학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한국 사회학의 개척자로 활약, 조선왕조사 연구에도 업적을 남겼다

 

그의 학문분야는 크게 국사학과와 사회학으로 나눌 수 있다. 국사분야의 연구는 「삼봉인물고」 「위화도회군고」 「재가금지습속의 유래에 대한 연구」 「고려말이조초에 있어서의 이성계일파의 전제개혁운동과 그 실적」등으로 여말선초의 사회사 해명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그의 연구성과는 우리나라 사회사연구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사회학분야의 활동으로는 한국사회학의 초창기에 국내최초로 사회학과를 설립하고, 대학강의와 교양지 및 학술지를 통하여 사회학의 보급에 주력한 것을 특기할 수 있다.

 

만년에 이르러 그는 국학, 동양학의 연구를 위하여 서울대학교에 동아문화연구소를 설립, 그 초대소장으로서의 연구계획의 수립, 학술세미나의 개최 등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는 고고미술에도 조예가 깊어 높은 식견과 감식안을 지녀 서울대학교 박물관장, 국보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 보존위원, 국립박물관 심의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그 방면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밖에도 훈민정음을 해설한 「한글의 기원」을 저술하였고, 많은 논설 국내외기행문 수필 등을 남겼다.

 

그는 일찍이 유명한 농구선수로 활약한 바 있으며, 그 뒤에는 체육이론가로서 그리고 체육행정가 또는 체육계의 지도자로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8. 15광복 후 조선체육동지회를 창설, 위원장이 되고, 1946년 조선체육회 이사장을 거쳐 1951년 대한체육회 부회장에 취임하였다. 제15∼18회 올림픽대회에서는 한국대표단 임원, 단장 등으로 활약하고, 1964년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 종신직인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에 선출되었다. 1963년 건국문화훈장 대통령장을 받았으며, 서울대학과 대한체육회의 공동장으로 고향에 안장되었다. 일본 체육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일본정부로부터도 훈3등 욱일중수장이 추서되었다.

 

1963년 건국문화훈장 등 생전에 여러 가지 훈장과 상을 받은 바 있으며, 1966년 타계하자 서울대학교 및 대한체육회 공동장으로 고향인 달성군 화원읍 구라동 선산에 안장되었으며 죽은 뒤에는 모란장이 추서되었다.

 

저서에「조선문화사연구논고」「이조건국의연구」「한글의기원」「한국사:근세전기편·근세후기편」「농구지도의 이론과 실제」 「서해도서」 등이 있고 역서에「정치사회학」「사회학개론」 등이 있다.

 

5.이시영 (1882~1919)

 

본관 : 경주(慶州)
호 : 우재(又齋)
본명 : 중현(仲賢)
활동분야 : 독립운동
출생지 : 대구
주요수상 : 대통령표창(1963) 
 
대구가 낳은 위대한 애국자요 항일 운동가인 우재 이시영이 있다.

 

1914년 베이징으로 망명하여 상하이 등지로 왕래하며 항일무력봉기를 꾀하다가 국내에 잠입하여 활약하던 중 애국단사건으로 대구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후 안희제, 최준, 박상진, 서상일 등과 광복단을 조직, 구입하던 중에 다시 체포되었다가 풀려나와 1919년 3·1운동 전에 지방 유림들을 상경하게 하여 독립선언서를 지방에 밀송시키고,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을 하다가 병사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 되었다.

 

경북이 낳은 민족운동의 큰 별 김창숙이 병석에서 나라 형편을 걱정하며 『우재가 살아있었다면 나라꼴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텐데…』라고 한탄했고 이범석 또한 같은 말로 그의 요절을 애석히 여겼다는 일화로 미뤄 우재의 항일민족정신이 얼마나 투철하고 그의 인품이나 경륜이 동지들 사이에 존경의 대상이 되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우재는 1882년 1월 10일 대구에서 이관준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이관준은 호를 만당이라 했으며 성리학의 대가였다.

 

우재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으나 문약한 선비로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몸이 건장하여 무인의 기상이 있었으며 그러면서도 글과 글씨, 그림에 모두 능했으며 말보다 실천이 앞서는 그런 성격이었다. 이러한 그의 성격과 과단성 있는 추진력 때문에 도산 안창호는 그를『날개달린 호랑이』라고 칭찬해 마지않았다 한다.

 

우재는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듬해 스무다섯살 때 기울어가는 국운을 한탄하고 남의 나라를 삼키려는 일본을 무찌르겠다는 결연한 각오 아래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로부터 13년동안 그의 생애는 나라와 겨레를 위한 가시밭길이었다.

  

그는 북경, 만주일대 그리고 국내의 각지를 그야말로 날개달린 호랑이처럼 휘돌아 다녔다. 괄괄한 성격의 그는 실력투쟁만이 독립의 길이라고 확신하고 윤상태, 서상일, 정운일 등과 애국단이란 비밀조직을 만들었다. 애국단을 조직한 그들은 우선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서모라는 당시 대구부호의 지원을 얻기로 했다. 그러나 서부자는 이름난 구두쇠인데다 민족의식이 없어 말로 해서는 응하지 않을 것 같았고 더욱 서는 우제의 사돈이었다.

 

우재는 서부자의 아들을 애국단에 가입시켜 그가 자발적으로 군자금을 희사하기를 원했으나 서부자는 끝내 모른체 했다. 군자금은 마련해야겠고 저쪽에서는 응할 기미가 없자 최후 수단으로 하루밤 그의 아들을 앞세우고 그 집에 침범했다가 정체만 드러낸 채 실패하고 말았다.

 

우재는 일경에 체포되어 강도죄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후 우재는 다시 최준, 안희제, 서상일 등 동지를 규합하여 광복단을 조직했다. 광복단은 무기를 구하고 병사를 길러 일본 세력에 무력으로 겨루자는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이다.

 

1914년 우재는 다시 고국을 떠나 북경으로 가 그곳에서 항일운동에 이바지했다. 우제가 그때 쓴 일기(손자 이용, 원화여고 교장 보관)를 보면 백남채(제헌국회의원)와 늘 함께 일했음을 알 수 있다.

 

우제는 백남채 외에도 김좌진, 김동삼 등과도 많은 일을 했다. 1918년 귀국했고 이듬해 2월에는 지청천, 한용운( 등과 함께 영남유림 대표 2백여명을 서울로 보냈다. 그 때 유림측에서 우제에게 민족대표로 서명해 달라고 하자『내 목적은 오직 왜놈과 싸우는 것』이라며 과격한 활동 노선을 밝혔다. 그 후 임시정부에서 재무부장관 서리를 맡아 달라는 것도 거절했는데 역시 같은 이유에서다.

 

3·1운동 직후 우재는 그를 따르는 한위건, 김영호 등 청년을 데리고 만주로 가서 유하현 삼원포에 한인무관학교를 세웠다. 이 무관학교에서 인재를 길러내 힘으로 왜적을 몰아내겠다는 원대한 꿈이었다.

 

그러나 오랜 방랑생활로 피로가 쌓였던지 그는 그 해(1919) 7월 9일 식중독으로 병을 얻어 서른여덟살 젊은 나이로 타계하고 말았다. 광야를 휘닫던「날개달린 호랑이」가 그 큰 꿈의 한가닥도 펴지 못한채 북녘땅에 묻혔고 그 유해조차 고국땅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그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은 안창호는『문무 겸전한 우재가 갔으니 또하나 큰 별을 잃었구나』땅을 치며 통곡했고 성제 이시영도『나라의 큰 별이었는데…』말을 잇지 못했다 한다.

 

우재가 북경에 있을 때(35세) 쓴 다음 시는 고국 그리는 혁명가의 마음을 잘 나타내준다.

 

버들잎은 푸르러 작은 길을 덮는데 홀로 잔을 기우리니 감회가 깊구나

 

몇몇 곳을 떠다니며 마음 붙일 곳을 찾았던가.

 

어디서 들려오는 젊은이의 노래소리, 큰 일에 몸바쳐 천지를 떠도니 마음에는 거리낌없다.

 

고개돌려 고국길 보니 더욱 아득만 하고,

 

종일 돌아가자 애쓰나 이룰 길 없구나,

 

망연히 물러서 숲속에 핀 꽃을 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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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래두, 답변 드립니다. 초등학교 1학년 이라서 엄마한테 물어봣더니 이것만 가르쳐줬어요. 대구 스타디움에서 2011년에 세계육상선수권대회 했대요.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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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자랑스러운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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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생략!!ㅈㅅ)초등학교3학년인데 대구의 자랑스러운 인물좀 부탁드립니다. 빨리 해가야 되거든요.오늘안으로 부탁드려요밤엔안되구요 내공50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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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자랑거리 인물과 그 사람이 했던일을 1개만 골라 초3에 맞게 설명을 해주3 이상한말,욕안 됩니다~! (대구 출신의 자랑스러운 인물) 1.우배선 (1569-1621) 본관 : 단양 별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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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자랑스러운 인물 좀 알려주세요......... 좀빨리 알려주세요.................. 그리고 오늘날의 인물이면 더좋습니다. 내공 15겁니다. 이인 [李仁, 1896.9.20~1979.4.5]...

대구의 자랑 스러운 인물

... 사회숙제가 대구의 자랑스러운 인물 조사거든요.. 내일 까지니까 빨리 알려주시고요 내공냠냠,욕은 금지!!! 잛은 답변으로 빨리 부탁드립니다~ 최동보 [崔東輔, ?~?]...

대구의 자랑스러운 인물과 일 좀...

대구의 자랑스러운 인물과 일 좀 적어주세요.(내일까지에요 급합니다!!!!!) 내공냠냠이나 비방글 욕 등은 신고하러 gogo (대구의 자랑스러운 인물과 일) 1.우배선 (1569-1621) 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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