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 관한 것

부산에 관한 것

작성일 2015.12.30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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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전통이나 전설, 문화, 상징, 명소 등을 자세히 적어주세요!


#부산에 관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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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전설

 

1.마하사의 16나한

 

동래 연산동 뒷산에 신라 때 지었다고 하는 마하사의 16나한이 안치되어 있으니 이 나한에 대하여 한 전설이 있다.

 

선조 초엽이라고 한다. 어느해 이 절 공양중이 동짓날이 되어 새벽 일찍이 동지 팥죽을 쑤려 고 부엌에 나가 화로에 묻어둔 불덩이를 찾았으나 불이라곤 없었다. (옛날에는 성냥이 없고 불쇠 또는 불덩이를 묻어 놓고 사용하였다.) 그래서, 안타까운 나머지 먼저 팥을 씻어 솥에다 안쳐 놓고 불씨를 얻으려고 아랫마을 갓직이(산지키는 사람)집으로 갔더니 갓직이 말이 조금 전에 상좌가 불을 얻으러 왔기에 불을 주고 또 먼저 쑤어 놓은 우리집 팥죽을 주었더니 먹고 갔다고 했다. 절에는 상좌도 없을 뿐더러 불을 얻으러 보낸 일이 없으므로 공양중은 이 말을 이상하게 여기어 절 부엌으로 돌아와 본, 활로에 불덩이가 벌겋게 들어 있었다. 이것을 본 공양중은 참으로 이상한 일 이라하고서 그 불로 동지 팥죽을 쑤었었다.

 

그리하여 죽을 퍼서 나한전에 올리려고 갔더니 십육나한중 오른쪽에서 셋째 나한의 입술에 팥죽이 묻어 있었으므로, 그제야 공양중은 이것은 나한 님이 불 없는 것을 보시고 동자로 화신하여 아랫마을 갓직이 집으로 가서 불씨를 얻어다 죽을 쑤게 한 것인 줄 깨달았다고 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몇 십년 전까지도 그 나한님의 입술에는 동지 팥죽이 묻어 있었다고 전해 온다.

2.개좌골에 얽힌 전설

 

해운대구 반송2동 운동부락과 양산 철마면 경계지점인 계용을 예로부터 개좌골이라 불러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이와 같은 지명을 갖게 된 전설의 유래를 보면,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부터 철마면 장정들은 모두 부산에 있는 각 진영에 입방군으로 복무하게 되어 있었다. 이곳 연구리 라는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서홍도 부산성의 입방군으로 복무하게 되었다. 자기 집에서 부산성까지는 60리가 넘는 먼 거리였다. \

 

그는 이런 먼길을 걸어서 낮에는 입번을 하고 밤에는 부모님이 계시는 집에 돌아와서 부모님께 극진한 효도를 하였다.혹독한 추위와 폭설로 산길이 막히고, 폭우로 기이 없어져도 한번도 빠짐없이 60리 길을 내왕하였는데 그는 혼자 다니기가 외로워서 누렁개 한 마리를 길동무로 삼아 언제나 데리고 다녔다. 어느 해 이른 봄철이었는데, 이날 따라 무척 피곤한 서홍은 여느때와 같이 입번을 마치고는 부랴부랴 걸음을 재촉하여 60리 길을 걸어서 이곳 개좌산 고갯길까지 왔던 것이다. 이제 집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는지라 피곤한 몸을 잠깐 쉬어 가려고 들고 있는 횃불을 돌 위에 놓고는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그 사이에 횃불이 풀섶에 번져 곤히 잠든 서홍은 불길이 휩싸이게 되고 말았다. 그 사이에 횃불이 풀섶에 번져 곤히 잠든 서홍은 불길이 휩싸이게 되었다. 이를 본 누렁개는 멍멍 짖으면서 조인의 옷자락을 물고 흔들며 깨웠지만 깊은 잠에 빠진 주인은 깨어나지 아니하였다.

 

그러자 누렁개는 산밑에 있는 개울까지 달려가서 온 몸에 물을 뭍여 달려와서 주인의 주위의 풀섶에 물을 적셔 불이 번지는 것을 막았다. 이 누렁개는 주인을 살리고자 필사적으로 있는 힘을 다하다가 그만 지쳐 끝내 연기에 질식하여 죽고 말았다. 얼마 후에 잠에서 깨어난 서공은 이 광경을 보고 충성스러운 누렁개가 자기 생명을 구해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일이 알려지자 그 효자의 그 충견이라 하여 모두가 칭송하였고, 부산첨사는 서홍의 군역을 면하게 하여 주었고, 연구리에는 효자비를 세웠는데, 그 비각이 아직도 보존되어 있으며, 그 일 이 있은 후부터는 그 산 고개를 개좌산이라고 불렀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기장현 읍지에 서홍의 효행록이 이와 비슷한데 충견의 전설은 빠져 있다. 우리 나라의 전설집에 주인의 생명을 구한 충견의 전설은 몇 가지 있지마는 이처럼 실감나게 하는 전설을 찾아볼 수 없다.

3.백록의 동래 온천

 

우리 나라 수많은 온천 중에서도 동래 온천의 역사는 가장 깊다고 한다. 대충 우리나라의 온천에 관한 전설을 간추려 보면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백학, 백록이 온천을 발견했다는 얘기들이다. 동래 온천 역시 이 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백록이 와서 잠자고 가는 곳을 파보니 따뜻한 샘이 솟아올랐다고 한다. 지금 동래 온천장서도 역사가 긴 여관인 "백록관"이라는 이름도 이에 유래된다고 한다. 여기서 동래 온천에 관한 다른 전설 하나를 소개해 보자. 지금으로부터 1천 수백년 전에 신라터 동래 고을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절름발이 노파가 살고 있었다. \

 

어느날 노파는 집 근처에 있는 논에 백학 한마리 날아와 절룩거리면서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 불구의 노파는 같은 처지에 놓인 학에 크게 동정을 하며 한 참 동안 시선을 학에서 떼지 않았다. 학은 다음날도 역시 그곳에 와서 서 있었다. 그리곤 사흘째 되는 날 학 은 이상하게도 다리를 절지 아니하고 그 근처를 몇 바퀴나 돌다가 기쁜 듯 힘차게 날아가 버렸다. 이것을 본 노파는 "이상한 일이다. 학의 다리가 낫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다." 이렇게 독백하면서 학이 있던 곳을 가보니 따끈따끈한 쌤이 솟고 있었다. "나도 이 물에 다리를 담가 보아야겠다. 아마 이것이 다리를 고쳐주는 약수이구나." 노파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절름거리는 다리에 몇 번이고 몇 십 번이고 약수를 찍어 발랐다. 이 약수는 신기하게도 효험이 있어 수일 후에 그 다리가 부자유함이 없이 마음대로 움직이게 되었으니 노파의 기쁨은 더말할 나위 없었다. \

 

이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곤 사람들은 이 샘을 온천이라고 불렀고, 병이 있는 사람은 모두 이 곳을 찾았다는 것이다.

 

4.백학의 동래온천

 

지금으로부터 천 수백 년전, 신라 때의 일이다. 동래 고을 외진 마을에 의지할 곳이 없는 혼자 늙어가는 노파가 한 사람 살고 있었다. 더구나 오래 전부터 앓아온 악성 관절염으로 오른쪽 다리를 쓰지 못하는 절름발이였다. 노파는 젊어서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가 되어 유복자로 태어난 아들 하나를 키우며 겨우겨우 살아왔다. 그러나 그 아들마저 혼기를 앞두고 나무하러 갔다가 벼랑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노파는 비탈에 일구어 놓은 밭에 채소를 가꾸거나 마을 사람들의 잔심부름이나 하며 겨우 끼니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나마 쌀독의 곡식이 바닥나는 이른봄이면 노파는 들판으로 나가 나물을 캐어다 연명하며 살아가야 했다. 그 해의 이른봄에도 노파는 지치고 쇠잔한 몸을 이끌고 늘 다니던 들판으로 나가야 했다. 동네에서 한 마장이나 떨어진 금정마을 가까운 곳의 늪지대 부근이었다. 노파는 매서운 겨울을 또 넘기고 살아 남은 모질고 질긴 목숨을 한탄하며 한 나절을 쉬엄없이 나물을 캐었다. 짓무른 눈앞이 더욱 흐려지며 배가 고파 오기 시작했다. 못쓰게 된 다리와 허리가 쑤시고 결리며 온몸이 칼로 저미듯 아파왔다.

 

노파는 잠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노랗게 흔들리는 하늘을 쳐다보며 긴 한숨을 토했다. 그때였다. 하늘 저쪽에서 백학 한 마리가 몹시 지친듯한 날개짓으로 날아와 눈앞에 빤히 보이는 늪지대에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무심히 백학을 쳐다보던 노파는 새삼 눈을 크게 떴다. 백학이 다리 하나를 몹시 절며 곧장 쓰러질듯 절룩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노파는 그 백학이 측은하고 불쌍한 마음에 자기 몸 아픈 것도 잊고 지켜보다가 다시 나물을 캐기 시작했다. 백학은 노파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 늪지대에 그냥 머물고 있었다. 이튿날 노파가 다시 그 들에 나갔을 때도 어제의 백학은 여전히 그 늪지대에 머물고 있었다. 사흘째 되는 날에도 백학은 그 늪지대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노파는 나물 바구니를 놓아두고 성하지 못한 다리를 절뚝거리며 백학이 있는 곳으로 가보았다. 날개를 접은 채 서 있는 백학은 노파가 다가가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노파가 백학 곁으로 좀더 가까이 다가가자, 그제서야 백학은 몇걸음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놀랍게도 백학은 전혀 다리를 절지 않는 것이었다.

 

노파는 아무래도 이상하여 다시 조심조심 백학 곁으로 다가갔다. 백학은 노파의 마음이라도 읽은 듯 역시 자리를 몇 걸음 옮겼다. 거짓말처럼 다리를 절지 않았다. 노파는 자기 눈을 의심하며 다시 한번 백학의 다리를 지켜보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백학은 땅을 걷어차며 힘차게 하늘로 솟아올랐다. 하늘로 솟아오른 백학은 마치 작별 인사라도 하듯 자기가 앉았던 자리 부근을 몇바퀴나 돌다가 활기찬 날개짓으로 멀미멀리 날아갔다. 노파는 백학이 사라진 하늘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노파는 아무래도 기이한 생각이 들어 백학이 있었던 곳으로 한발 더 다가가 보았다. 그곳에는 움푹 패인 작은 웅덩이 하나가 있었다.

 

그런데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웅덩이 안에는 맑은 물이 가득 고여 있고, 그 물에서 뜨거운 김이 솟아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웅덩이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땅 밑에서 맑은 샘물이 끓는 물처럼 끊임없이 솟아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노파는 조심스럽게 웅덩이 곁에 쪼그리고 앉아서 슬그머니 손가락 끝을 물속에 담가 보았다. 뜨거웠다. 노파는 놀라 손을 빼고 한참을 더 웅덩이 물을 드려다 보았다.

 

노파는 다시 손을 물 속으로 가만히 넣어 보았다. 뜨끈뜨끈한 것이 참을 만했다. 손을 씻어 보았다. 물의 감촉이 유난히 미끈미끈했다. 노파는 계시처럼 떠오르는 이 생각에 얼른 옷을 걷어올리고 두 다리를 물속에 천천히 담갔다. 아니나 다를까. 노파는 금새 따뜻한 온기가 온몸에 퍼지면서 그때까지 쑤시던 통증이 일시에 사라지는 듯한 상쾌함을 것을 느꼈다. 노파는 그 후로 며칠을 계속하여 그 웅덩이로 가 다리를 담그고 편히 쉬곤 하였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지금까지 꼼짝도 할 수 없었던 오른쪽 다리가 거짓말처럼 풀리며 움직여지는 것이 아닌가. 노파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합장한 채 하늘을 향해 수없이 되뇌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웅덩이에 다리 담그기를 계속했다.

 

마침내 노파의 다리는 옛날처럼 마음대로 움직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쑤시던 허리며 온몸의 통증도 씻은 듯이 사라지고 날듯이 가벼워지는 것이었다. 노파의 다리가 고쳐진 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곧 노파의 말을 듣고 너도나도 그 웅덩이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온몸에 부스럼이 난 사람이 찾아가 그물에 몸을 담그면 하루만에 깨끗이 없어졌다. 악종 피부병으로 십년 넘게 고생하던 사람도 그 물에 한번 몸을 담그고는 고쳤다. 소문은 마을에서 마을로 퍼지고 온 나라로 알려졌다. 그렇게 해서 소문을 듣게 된 멀리 조정 대궐의 어른들까지도 행차하게 되었다.

 

5.만덕고개와 빼빼영감

 

동래 남문밖에 동래와 구포장을 번갈아 다니면서 삿자리 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홀아비가 살았다. 성도 이름도 없이 빼빼영감으로 통하는 이 삿자리 장사는 어떻게 여위고 피골이 상접하였던지 성내 사람들도 빼빼영감이라 했다. 이 영감이 하루는 구포장에 갔다가 여러 장꾼들과 함께 험한 만덕고개를 넘게 되었다. 이 고개는 동래에서 구포로 넘어가는 험한 산길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옛날부터 동래부 관하에선 최대 도적들의 소굴이었으니 지금 양정동의 마비현(모너머 고개) 화적떼도 이 무리에 비하면 문제가 되질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만덕고개를 "만등고개"로도 불렀는데 만 사람이 무리를 지어 올라가야 도적을 피할 수 있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장꾼들이 구포장을 보고 동래로 돌아오는 길에 만덕고개에 있는 주막에서 잠시 쉬게 되었다. 이때 10여명의 도적 무리가 뛰어 들면서 "꼼짝마라! 움직이면 죽인다."라고 사나운 얼굴을 지으며 장꾼들을 한 사람씩 묶었다. 그리고 괴수되는 자가 물건을 판 돈과 가진것을 모조리 내어 놓으라고 위협했다.

 

이때 빼빼영감이 용감히 앞으로 나서서 도적을 향하여 "여기있는 장꾼들은 위험한 고개를 다니면서 겨우 끼니를 이어가는 불쌍한 사람들이옵니다. 아무리 도둑질을 하고 산다고 하지만 사람을 보고 물건을 털어야 될 것이 아니옵니까? 라고 애걸하는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도적들은 빼빼영감에게 달려들면서 "이놈 묶인 녀석이 무슨 잔소리냐" 하면서 뭇매를 때리고 발길로 차는 등 땅바닥 위에 쓰러뜨렸다.

 

영감은 주저하듯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더니 벌떡 일어서자, "이놈들! 이 끈을 풀어주지 못하겠느냐"고 외치는 그의 눈에는 살기가 등등하였다. 도둑들의 시선이 빼빼영감에게 모일 땐 벌써 몸뚱이에 묶인 밧줄은 모두 끊어진 뒤였다. 이놈 때리고 저놈을 밀어 넘어뜨리는 그 솜씨는 비호같이 날쌨다. 이 비상한 완력에 감당할 수 없었던 도적들은 모두 도망쳐 달아났다.

 

그리곤 그는 묶인 장꾼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풀어 주었다. 이때 힘을 얻은 장꾼들은 다쳐서 못달아난 도둑들을 잡아 동래로 가자고 했으나 그는 "우리들에게 소득이 없는 일이라면 그만두는 것이 좋겠소. 그자들은 이젠 도둑질을 하지 않을 것 자 술이나 한잔 합시다." 라고 술과 안주를 있는 대로 가져오라고 주모에게 청했다. 그리고, "여러분 이 술은 모두 제가 사겠습니다. 마음껏 잡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한가지 부탁이 있는데 마을에 내려가거든 오늘 일어난 이야기만은 하지 말도록 거듭 부탁 드립니다." 라고 당부했다. 술대접까지 잘받은 장꾼들은 흐뭇한 마음으로 고개를 내려와서 각각 제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사흘 후 장꾼의 한 사람이 빼빼영감의 집을 찾아갔더니 그 집은 텅텅 빈집이 되어 있었다. 이 소문이 밖으로 새어 나오자 나라에서 빼빼영감이 비상한 힘을 가진 장사인 것 을 알고 찾았으나 그 행적을 알길이 없다고 한다.

 

6.범어사 매학동자

 

임진란 때 범어사에 매학이란 중이 있었다. 이 중은 욕심이 많아 신도들의 재물을 탐내어 수단을 가리지 아니하고 축재에만 눈이 어두웠다고 한다. 하루는 매학이 지금의 금정구 선동(仙洞) 그 당시 우리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던 소산(蘇山) 앞을 지나가다가 조그마한 집에 서기가 돌고 있음을 보았다. 매학은 옷깃을 바루고 그 집을 들어서니 웅장한 소리를 내며 옥동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얼마동안 기다리던 매학은 산모에게 "이 아이는 佛家에 인연이 깊은 동자로 보 잘 길러 주시면 몇년 후 내가 찾아와서 데리고 가겠습니다." 라고 말했더니 산모는 순순히 응했다.

그후 10년이 지나 매학은 이 아이를 절에 데리고 와서 상좌로 삼았다. 어느날 매학은 상좌를 나무하러 산으로 보냈더니 빈손으로 돌아왔다. "하루종일 어디에서 놀다 오는거냐? 왜 염치없이 빈손으로 돌아왔느냐"고 노기를 띠고 나무랐다. "스님! 놀다온게 아니옵니다. 제가 풀을 헤치고 나뭇가지를 낫으로 베었더니 그 나뭇가지에서 생생한 피가 흘러 나오기에 무서워서 도저히 나무를 할 수 없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매학은 노발하며 "고약한 놈같이 어디서 그런 거짓말을 배웠느냐? 나뭇가지에서 피가 나올리가 있는가? 내 앞에서 당장 물러서 나가라." 고 상좌는 그 길로 절을 떠나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수도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상좌가 금강산으로 떠난 2년뒤 매학은 범어사 절간에서 병으로 죽었는데, 이때 부터 이 절 고방에 큰 구렁이가 도사리고 앉았으니 절간 스님들은 불안하였다. 그런데 이 구렁이는 이상하게 팥죽을 잘 먹었기에 절에서도 구렁이에 대한 대접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금강산에서 매학의 죽음을 들은 상좌는 범어사로 돌아왔다. 그는 여장을 풀기 바쁘게 즉시 고방쪽으로 가서 문을 열고 구렁이를 향해 정중히 절을 올렸다. 그리고 한참동안 독경하다가 "스님, 이 일이 웬 일이옵니까? 어서 허물을 벗어 승천하옵소서" 이렇게 말하며 서서히 밖으로 나오니 구렁이도 순순히 꿈틀거리며 상좌를 따라나왔다. 구렁이가 냇가에 이르렀을 때도 독경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구렁이는 바위에다 머리를 한참동안 처박곤 하더니 길게 뻗으며 숨졌다. 이때 구렁이의 몸에서 한 마리의 새가 나오더니 상좌의 품에 안겼다. 다음날 상좌는 새를 안고 다시 금강산으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도중 이 새는 짐승들이 교미하는 곳마다 날아가려고 몸부림쳤으므로 상좌는 이를 막느라고 애를 태우곤 했다.

어느날 해저문 뒤 상좌는 인가를 찾다가 젊은 부부가 살고 있는 집에 쉬게 되었다. 상좌는 새를 주인에게 맡기면서 "열달 후에 당신들 내외가 아들을 낳을테니 잘 키워 주옵기 바랍니다. 그 아이는 불가에 인연이 있는 동자이오니 10년 후에 내가 다시 찾지요" 라고 말하고 혼자 떠났다. 그후 상좌는 다시 이집을 찾아와 동자를 얻어갔다. 상좌는 이 아이에게 열심히 불도를 닦게 했으니 차츰 고승의 풍모를 갖추게 되었다. 하루는 상좌가 이 스님앞에 무릎을 꿇고 "스님!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하고 안타깝게 물었더니 "그게 무슨 말씀이옵니까?" 하고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스님! 스님은 매학스님의 화신이옵니다. 정신을 차려 저를 보시옵소서. 원래 저는 스님의 제자였습니다." 라고 목멘 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하여 상좌는 다시 제자가 되고 매학동자는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7.만덕사지의 비밀

 

고려의 대사찰 만덕사가 왜 이처럼 폐사지로 머물고 있는지 그것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되고 있다. 더구나 이 사찰은 고려 충혜왕의 서자 석기가 유배되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고,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승병을 모아 왜적과 격전을 치른 임란 항전 사찰로도 명성이 높았다는 일본의 기록도 있다. 만덕사의 폐사지에는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된 당간지주와 돌담 등이 남아 있고, 규모가 대단히 큰 8각석과 기왓장들이 뜰에 놓여 있어 눈길을 끌게 한다.

또 이 사찰에는 1995년 6월에 '산신지위'라 새겨진 돌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만덕사지에는 임시 법당이 만들어져 사찰의 재건 불사를 위해 정성을 모으고 있으나, 언제 지난날의 대사찰로 복구가 될는지는 아직은 미지수로 보인다. 또 만덕사지에서 출토된 3층 석탑은 부산시 남구 대연동 부산시립박물관의 뜰에 옮겨져 있는 등 아직도 풀어야 할 많은 과제들을 안고 있다.

만덕사에 얽힌 내력을 기록하고 있는 국내 사료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전부이다. 그러나 이들 기록에도 만덕사가 석기 세자의 유폐 장소였다는 사실만 기록하고 있을 뿐, 사찰의 창건 연대나 폐사 연도와 그 연유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고 있다. ≪고려사≫ 종실열전과 ≪고려사절요≫는 '충혜왕의 서자 석기의 머리를 깎아 만덕사에 두었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비록 절의 위치나 내력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이곳 만덕사의 규모나 유적 유물로 보아 역사의 기록과 부합되는 곳으로 인정되어 왔었다.

충혜왕의 서자 석기가 만덕사에 유배되어 있었다는 것은 1356년(공민왕 5년)에 석기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던 음모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이 사건의 내막은 대략 다음과 같다. 충혜왕에 이어 즉위한 공민왕은 원나라의 쇠약을 틈타 배원정책을 펴나갔다. 원나라에 빌붙어 권세를 누리던 부원파를 숙청하고, 원(元)의 연호 사용을 금지하는가 하면, 원의 간섭으로 개편되었던 관제를 복구 환원하였다. 이런 사태에 반대하여 부원파를 중심으로 석기를 받들어 왕으로 추대하려는 음모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불궤를 도모한 일파는 참수 좌천되고, 석기는 외방으로 추방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석기가 희생양이 된 것이다. 허다한 부원 분자들이 처형을 면치 못한 판국에는 석기는 외방으로 추방되는 정도의 처벌로 끝난 것을 보면, 그는 불궤를 도모한 혐의가 있다기 보다는 부원 분자들을 숙청하기 위한 하나의 구실로 이용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어쨌든 만덕사는 석기의 유배로 역사에 기록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충혜왕의 서자 석기가 이곳에 유배되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또 그가 어째서 금정산 기슭의 이 먼 골짜기까지 유배장소를 선택 받았는지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만덕사가 어떤 연유로 폐사가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 또한 없다. 다만 일본의 ≪조선정벌기≫에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승군들이 대거 항거한 이 사찰을 불태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만덕사가 임진왜란 때 왜적의 병화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것은 그 지리적 여건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숙명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적들은 동래성을 함락시키기 위해서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 구포에서 만덕고개를 넘어야 했다. 그 고갯마루 길목에 만덕사가 있었던 만큼 왜적들의 침입을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본의 불교 사료인 ≪불교대연표≫와 대덕사에 수장되어 있는 ≪조선정벌기≫ 동래 함락편, 그리고 대덕사의 주지이자 대정대학 교수인 후지하라박사가 고증한 <고려 동래현="동래현" 수미산(="금정산)" 명?"명? 만덕사="만덕사"> 등의 기록에는 임란 당시 만덕사는 일본군에 격렬한 항전을 벌인 것으로 돼 있다. 특히, 사명대사가 팔도의 의승군을 모집, 만덕사에 집결시키고 유격전을 전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사명대사는 동래부사 송상현, 다대포 첨사 윤흥신, 부산진 첨사 정발장군을 원호했으며, 다대포·자성대·부산포로 공격해 오는 왜군을 막기 위해 대회전에 임했다는 것이다. 사명대사가 만덕사에서 의승군을 대규모로 동원하여 왜적에 대항케 했다는 것은 물론 일본측의 기록으로 국내의 어떤 문헌에도 언급이 없다. 그 만큼 신빙성이 희박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만덕사의 사찰 규모로 본다면 능히 의승군을 동원하여 항쟁을 벌였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만덕사는 고려 개국 공신이자 신라의 마지막 화랑장군 노강필과 이엄 선사에 의해 고려 태조 10년(927년)에 건립되었다는 설도 있는 만큼 고려 사찰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만덕동 골짜기에 폐사지로 남아 임란 이후 지금까지 낮잠을 자고 있는 이 사찰은 모든 것이 수수께끼 그대로이다.

현재의 임시법당으로 오르는 돌담은 아마도 국내 최대 규모의 넓고 큰 거대한 바윗돌을 대칭형으로 쌓은 것으로, 그 크기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지렛대를 이용하여 그 거대한 돌을 옮겼다고 해도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불가사의한 일로 생각될 수밖에 없는 놀라운 크기이다. 상계봉 남쪽의 산록 한 골짜기에 있는 이 만덕사지 또한 금정산의 역사의 한 편린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 역사의 실체를 규명하는 학술작업이 아직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노릇이다. 만덕사의 베일을 벗길 때 금정산의 역사도 그만큼 빛을 띠게 될 것이다.

 

부산의 문화축제

 

1.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


* 지역별  부산시 
* 주최/주관기관  부산국제영화제조직위원회
* 최초개최년도  1996
* 개최기간  2015.10.01 ~ 2013.10.15

* 행사장소  해운대 : 야외상영장, 메가박스, CGV, 롯데시네마 , 남포동 : 대영시네마 
* 축제성격  문화예술
* 관련홈페이지   http://www.piff.org.
 

축제의 유래 및 특성
- 1996년 초 당시 낙후된 부산의 산업구도 개편과 21세기 미래산업으로서 영상산업 유치 필요성 대두
-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유치 확정에 따른 도시 이미지 제고 필요
- 시민의 영상문화 저변확대와 문화향수 기회 제공

 

▶ 지역특성
인근 제주, 경주, 울산 등 관광과 산업이 연계되며 대륙의 관문으로 환태평양의 주요 항로에 위치하여 국제 물류,관광 도시적 입지여건을 갖춘 산, 강, 바다 천혜의 자연경관과 1,2,3차 산업을 보유한 도시특성으로 영상산업 발전에 최적의 입지를 갖춤

 

▶ 주요행사 내용
한국 영화 파노라마, 아시아 영화의 창, 월드시네마, 와이드 앵글, 오픈시네마, PPP (Pusan Promotion Plan), 특별이벤트

 

 

 

2.제19회 기장 멸치축제

 

* 지역별 부산광역시 기장군

* 주최/주관기관 기장멸치축제추진위원회

* 부제  통통 튀는 생생 멸치! 정 넘치는 기장으로

* 최초 개최년도 1997

* 개최기간  2015.04.24(금)~2015.04.26(일)

* 행사장소  기장군 기장읍 대변항 일원

* 축제 성격 관광특산

 

 ▶ 축제의 유래 및 특성

우리나라 전멸치의 60%를 수급하는 기장 대변항을 중심으로 기장 멸치를 홍보하고 먹거리, 볼거리를 개발,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함

 

▶ 지역특성

- 복주머니 형태의 대변항을 중심으로 개최

- 축제기간에는 멸치털이 등 다른곳에서 보기 어려운 문화체험

- 어촌·도시가 공존하는 지형적인 정취가 매력적임

 

축제행사종목

- 길놀이

- 멸치회 무료시식회

- 멸치털기 체험

- 멸치잡이 체험

 

 

 

3.금정산성 역사문화축제

 

* 지역별 부산광역시 금정구

* 주최/주관기관 금정구/금정문화예술인협의회, 금정문화원

* 최초 개최년도 1996

* 개최기간 2015.05.22(금)~2015.05.24(일

* 행사장소  부산 금정구 금정산성 동문/ 금성동 일원

* 축제 성격 문화예술

 

축제 소개

금정구는 금정산과 천년고찰 범어사가 있는 역사와 예술의 고장으로, 품격 높은 문화예술행사와 특색 있는 지역문화를 창출하고, 구민에게 문화향유를 통한 창조성 개발 및 삶의 질 향상을 추구하기 위해 1996년부터 2010년까지 15회 금정예술제를 개최하였으며 전통문화와 지역특성을 살린 축제로의 전환을 위하여 2011년 주민의견 수렴을 거쳐 전통과 미래가 어우러진 새로운 축제의 서막을 여는 『제1회 금정산성 막걸리 축제』를 개최하게 됨『금정산성 막걸리 축제』는 국내 유일의 전통 누룩 제조 방식의 민속주 1호인금정산성 막걸리를 주제로 하였으며 전국 최장 산성 금정산성(사적 215호, 18,845m)과 연계하여 대중성과 예술성이 결합된 다양한 프로그램 구성으로 축제 품격을 향상, 금정산성 막걸리의 다양한 문화컨텐츠 개발로 한국 민속(전통)주의 세계화 도모함.

 

축제의 유래 및 특성

- 품격 높은 문화예술행사와 특색 있는 지역문화 창출

- 구민에게 문화향유를 통한 창조성 개발 및 삶의 질 향상 추구

 

▶ 지역특성 : 부산 최고의 주거 · 교육 · 환경의 도시

- 금정산의 수려한 자연환경과 주거도시기반이 잘 정비된 정주도시

- 부산종합버스터미널, 경부고속도로, 도시고속도로의 시·종점인 교통관문도시

- 문화회관, 도서관, 예술중·고, 부산대학이 있는 문화예술도시

- 금정산~범어사~금정체육공원~회동수원지로 연결되는 생태관광도시

 

▶ 주요행사 내용

- 여는마당 : 장승제막식, 마당놀이, NGN어린이합창단노래, 금정구여성합창단노래, 개막식, 퓨전모듬북, 창작무용극‘금샘’, 불꽃놀이

- 참여마당 : 안우성 재즈 Quartet, 극단 에저또의 뮤지컬 시스터액트, 일렉쿠키 콘서트, 시조경창대회, 주민자치센터 솜씨자랑 한마당, 주민자치센터 수강생 작품전, 어르신 한마음 큰잔치, 청소년문화축제, 금정사생대회·백일장, 풍물경연대회

- 공연마당 : 연극 ‘동승’, 국악 ‘동초제판소리와 극의 대향연, 음악 ‘한국가곡의 밤’,금정구여성합창단 정기연주회, 무용 ‘세계를 향한 몸짓’, 오페라 ‘굴뚝청소부 샘’,초청 ‘정선아리랑’

- 전시마당 : 금정미술전, 금정사진전, 금정시화전, 금정야외서예전, 목금토화 야외조각전

- 딸림마당 : 부산산악문화축제, 풀벌레(곤충)축제, 웰빙건강체험마당, 민물고기전시전

- 닫는마당 : 시와 소리와 영상과 춤의 어울림

 

 

 

4.제20회 부산바다축제

 

* 지역별 부산광역시

* 주최/주관기관 (사)부산문화관광축제조직위원회

* 최초 개최년도 1996

* 개최기간 2015.08.01(토)~2015.08.08(토) 0

* 행사장소  부산 해운대구 해운대해수욕장 등

* 축제 성격 문화예술

 

축제의 유래 및 특성

부산바다축제는 천혜의 자연경관인 해운대 ,광안리, 다대포 등 도심속에 펼쳐진 해수욕장을 축제장으로 여름 휴가철 부산을 찾는 관광객과 시민들에게 즐길꺼리와 오락, 문화 예술공연을 펼치는 대규모 여름바다축제

 

▶ 지역특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해양도시이며 대규모 해수욕장이 도심 안에 펼쳐져 청소년을 비롯한 관광객들의 근접성이 높고 해양물류중심의 산업전략으로 바다를 이용한 문화산업에 시민들의 관심이 높다.

 

▶ 주요행사 내용

4개부분 총32개 행사

<주요행사>

전야콘서트, 개막행사, 현인가요제를 비롯한 음악회, 부산국제해변무용제

<시민체험행사>

전국윈드서핑, 비치발리볼대회, 핀수영대회, 장애인한바다축제, 체험해양스포츠, 사이버바다축제

<단위행사>

부산바다마당극제, 프로게임대회, 수필낭송한마당, 청소년바다예술제, 전통무예시연 등

<각 구·군별 행사>

차 없는 거리공연, 썸머콘서트, 해운대비취페스티벌, 달맞이언덕축제,송정해변축제

 

 

 

5.2015 부산 영도다리축제

 

* 지역별 부산광역시 영도구

* 주최/주관기관 부산광역시 영도구

* 최초 개최년도 1993

* 개최기간 2015.09.04(금)~2015.09.06(일)

* 행사장소  부산 영도구 남항대교 특설 행사장

* 축제 성격 문화예술

 

축제소개

영도다리 축제를 통하여 부모님 세대에게는 아스라이 멀어진 지난날의 추억을 만나고, 자라나는 2세들에게는 힘들게 살아오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은 부모님과 과거의 공간에서 만남을 통하여 근검절약의 정신함양과  효의 재발견을 추구하고자 축제를 열고 있다.

 

 ▶ 축제의 유래 및 특성

문화예술에 대한 구민의 관심과 교양을 넓히고 구민 정서를 순화시키며, 향토문화 발전의 기틀을 조성하기 위해 1993년 제1회 영도다리축제를 개최한 이래 매년 특색있고 다양한 문화관광체육 프로그램으로 편성

 

▶ 지역특성

천혜의 경관을 갖춘 해양관광 도시

태종대, 동삼동 패총 등의 문화관광 유적

봉래산, 75광장, 절영해안산책로등의 천혜의 자연경관

 

▶ 주요행사 내용

서예, 백일장, 사생대회, 아동극, 문화의 광장 운영, 청소년 오케스트라 축하연주회

 

 

 

부산의 상징

 

1.동백꽃

 

 

 

시화(동백꽃) 1970.3.1 지정
시목(동백나무) 1970.7.1 지정


진녹색의 잎과 진홍색의 꽃의 조화는 푸른바다와, 사랑이 많은 시민의 정신을 그려내고,
싱싱하고 빛이나는 진녹색 활엽은 시민의 젊음과 의욕을 나타낸다.
 
2.갈매기
 
 
 
시조 - 갈매기 1978.7.1 지정

새하얀 날개와 몸은 백의민족을 상징합니다. 끈기있게 먼 뱃길을 따라 하늘을 나는
갈매기의 강인함은 부산 시민의 정신을 잘 나타내기 때문에 부산의 새로 선정되었답니다
 
3.고등어
 
 
 
시어 - 고등어 2011.7.6 지정

『Dynamic, Powerful, Speedy』
태평양을 누비는 강한 힘으로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도약하는 해양수산도시 부산을 상징

 

부산의 명소

 

1.오륙도
 

남구 용호동의 부산항 앞 바다에 있습니다.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22호입니다. 육지인 승두말쪽에서 보면 우삭도, 수리섬, 송곳섬, 굴섬, 등대섬 등 5개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부산항을 드나드는 배는 반드시 오륙도를 지나야 하기 때문에 부산의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2.자갈치시장
 

부산항의 냄새와 맛을 풍기는 수산물 시장입니다. 싱싱한 해산물로 아주 유명한 곳이지요. 옛날 이곳에 자갈이 많았기 때문에 자갈치로 불리게 되었답니다. 시장 주변에서는 남포동 건어물 가게, 영도 다릿목 약재상, 영도 나룻배 등을 볼 수 있습니다.
 

 

3.낙동강하구
 

낙동강 하구는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으로, 철새의 먹이가 되는 물고기와 조개 등이 많습니다. 그리고 갈대와 물풀이 우거져 둥지를 짓기에도 좋답니다. 철새를 보호하기 위해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지요. 
  

 

4.범어사
 

지은지 1300년이 넘는 큰 절입니다. 우리나라 5대 사찰 중의 하나이며, 통일신라시대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집니다. 범어사 경내에서는 보물 제434호인 대웅전, 보물 제250호인 삼층석탑 등 여러가지 문화재도 볼 수 있습니다. 
  

 

5.유엔기념공원
 

한국전쟁 때 우리나라를 도와 전쟁에 참가했다가 목숨을 잃은 외국군인들이 잠들어 있는 곳입니다. 영국, 터어키,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 21개국 전사장병의 유해 총 2,300기의 영령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세계에서 하나뿐인 유엔묘지입니다. 
  

 

6.충렬사
 

임진왜란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들께 제사를 지내는 곳입니다. 1605년 동래부사 윤훤이 임진왜란 때 전사한 동래부사 송상현의 넋을 기리기 위해 동래읍성의 남문 안에 송공사를 세우고 매년 제사를 지낸 것이 시초가 되었다고 해요. 현재는 부산 출신 의병 49위와 당시 순국한 무명용사 91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매년 5월 25일 온 시민의 정성을 모아 제사를 드리고 있지요. 
  

 

7.태종대
 

영도 남쪽에 있는 부산의 대표적인 명소입니다. 갖가지 모양의 암석과 깎아 세운 듯한 절벽과 동굴이 파도와 어울려 절경을 이루는 곳이지요. 이곳에는 파도에 의해 만들어진 특이한 해안 지형을 잘 관찰할 수 있습니다. 신라 태종 무열왕이 이곳에 들러 활을 쏘고 군사를 훈련했다고 해서 태종대로 불리게 되었다는군요. 
  

 

8.해운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해수욕장과 온천이 있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입니다. 또, 와우산 달맞이고개는 달맞이 장소로도 유명하지요. 동백섬에 가면 넓은 광장과 최치원 선생의 동상을 볼 수 있습니다. 
  

 

9.금정산성
 

삼국 시대(신라)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산성의 길이는 약 17㎞이고, 성벽의 높이는 1.5m~3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산성이랍니다. 낙동강 하구와 동래 지방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바다로 침입하는 적을 막을 수 잇었습니다. 
  
 
10.동래야류


120여 년의 전통을 지닌 가면극으로서 그 구성이 연극의 1막 2막처럼 모두 4과장으로 나뉘어서 각기 다른 내용의 이야기로 진행되는 들놀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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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하셔서 부산명예훼손변호사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계신 같습니다. 사안이... 방안에 관한 법적 조언을 받아보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법무법인 파트원은 서울,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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