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3학년인데요 선생님이 동래구의 대표적인 문화재를 찾아 보라고 했는데...

전3학년인데요 선생님이 동래구의 대표적인 문화재를 찾아 보라고 했는데...

작성일 2007.10.19댓글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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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빨리 찾아주세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동래학춤,

우장춘박물관,

전 동래구에사는데

아는게 이거밖이네요

죄송해요 ^^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점수을먹어주마 풉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quote_txt-->너무 기니까 요약해서 쓰세요<!--/quote_txt-->

자성대(부산진지성:釜山鎭支城)

부산광역시기념물 제7호. 부산 동구 범일동 소재 자성대(子城臺) 안에 있으며 면적은 1만 8285 m2이고 본래 부산포의 외성(外城)이었던 것을 1593년(선조 26)에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 부자가 일본식 성으로 새로 쌓았으며, 왜군이 물러간 뒤에는 명나라 장군 만세덕(萬世德) 휘하의 군대가 잠시 주둔하기도 했다. 뒤에 자성대를 중심으로 성을 쌓고 사대문인 진동문(鎭東門:동문) ·금루관(金壘關:서문) ·종남문(鐘南門:남문) ·구장루(龜藏樓:북문)를 세워 관아를 정비한 후 부산진첨사영으로 사용했다.

또 성 안에는 객사(客舍)인 공진관(拱辰館)과 폐문루(閉門樓)인 제남루(濟南樓), 그리고 동헌인 검소루(劒嘯樓)와 군기소(軍器所)인 청상루(淸霜樓), 관청 외에 15동이 있었고, 성 밖에는 진남루 외에 4동이 있었다. 1974년 동문 ·서문과 자성대 위의 장대(將臺)를 새로 건축하여 동문을 건춘문(建春門), 장대를 진남대(鎭南臺)라 하고 이듬해에는 동문 주위에 새로 성곽을 세웠다.

현재 최고 10 m, 최저 1.5 m의 성벽이 성지(城址)로 남아 있으며, 자성대에는 임진왜란 때의 명장 천만리(千萬里)를 기리는 천장군기념비(千將軍記念碑)와 최영장군비각이 있다. 이 성 서문의 양측 성곽에 끼여 있던 우주석(隅柱石)에는 “이곳은 나라의 목에 해당하는 남쪽 국경이라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또 이 성은 일명 자성대 ·마루야마성[丸山城] ·고니시성[小西城] ·만공대(萬公臺)라고도 하는데, 자성대라는 이름은 부산진성을 모성(母城)으로 했을 때 그 자식의 성과 같다는 뜻과 산꼭대기에 자성(子城)을 만들고 장대를 세웠다는 데에서 나온 것이며, 고니시성은 1597년(선조 30)에 고니시가 주둔한 적이 있다 하여 나온 이름이다. 또 만공대는 만세덕 군대가 주둔한 적이 있고, 그 뒤에는 만공단(萬公壇)이 있었다 하여 나온 이름이다.


동래 복천동 고분군 [東萊福泉洞古墳群]

부산 동래구 복산동(福山洞) 북쪽 대포산 구릉에 조성된 고분군.
 
소재지  부산 동래구 복산동(福山洞)
시대  신라 ·가야
규모  100여 기
 
구릉의 원래 이름을 따서 학소대(鶴巢臺)고분군이라고도 한다. 1969∼1972년 동아대학에 의해 10여 기가 최초로 발굴된 이래, 부산대학이 1974년 구릉 동쪽 사면에 있는 3기의 고분을 발굴하였다. 이후 1980∼1994년 부산대학박물관과 부산시립박물관에 의해 6차에 걸쳐 100여 기가 넘는 고분군이 발굴조사되었다.

이 지역의 지배자 집단의 묘역인 것으로 보이는데, 무덤의 형식은 크게 덧널무덤[木槨墓]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墓]과 독무덤[甕棺墓]이나, 덧널무덤과 구덩식돌덧널무덤이 주가 된다. 대형묘는 구릉의 정상부를 따라 능선의 진행방향(등고선과는 직교하는 방향)으로 입지하며 중소형묘는 구릉 사면에 등고선을 따라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사회적인 계급에 따라 고분의 위치를 달리하여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울산 하대고분군, 김해 대성동고분군, 함안 도항리고분군 등에서도 이와 비슷한 예가 보인다. 처음에는 시신이 매장된 으뜸덧널[主槨]과 유물이 매장된 딸린덧널[副槨] 모두가 덧널인 양식이 이용되다가, 으뜸덧널이 구덩식돌덧널이고 딸린덧널이 덧널인 것으로 변해가고, 마지막에는 딸린덧널이 폐지된 단독 구덩식돌덧널로 되었다가 곧 앞트기식돌방으로 교체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발굴된 상당량의 토기는 신라 ·가야 토기 편년의 기준이 된다. 또한 특징적으로 갑옷 ·투구가 많이 출토되었다. 갑옷 ·투구 이외에도 말갑옷[馬甲], 말머리가리개[馬胄] 등 철로 만든 무기가 상당수 출토되어서 당시 말을 이용하여 전투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매장시설의 바닥에는 덩이쇠[鐵鋌]가 1∼3열씩 깔리기도 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한조에 철을 화폐 대신으로 쓴다는 기록이 있는데, 덩이쇠가 다른 철제용품을 만드는 재료의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시 화폐로 쓰였을 가능성이 많다.


동래 패총 [東萊貝塚]

부산 동래구 수민동(壽民洞)에 있는 초기 철기시대의 조개무지.
 
지정번호  사적 제192호
소재지  부산 동래구 수민동
시대  초기 철기시대
종류  조개무지
 
사적 제192호. 동래역 구내에 인접한 낮은 대지 위에 있는 저지성(低地性) 함수산(鹹水産) 조개무지이나 현재는 해안선에서 약 6km 떨어져 있다. 1930년 철도공사를 하다가 발견하였으며, 1967∼1968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3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하였다. 유적의 층위는 근세층(近世層), 혼토패층(混土貝層), 철재(鐵滓)와 소토(燒土) ·회(灰) 등을 다량으로 포함한 회색점질토층으로 되어 있다.

출토 유물로는 이른바 김해식 토기라고 하는 두들림무늬토기가 많고, 토기의 형태로는 쇠뿔잡이가 두드러졌으며 둥근바닥에 종구(縱溝)의 구멍을 배열한 시루가 있다. 석기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으나 골각기가 비교적 많고 철기로는 녹각(鹿角)으로 만든 손잡이와 함께 쇠손칼이 출토되었다. 제3기 회색점질토층에서는 제철지(製鐵址)로 보이는 유지가 발견됨으로써 고대 제철 관계 유적으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동래부사청동헌 [東萊府使廳東軒]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에 있는 조선시대 관아 건물.
 
지정번호  부산유형문화재 제1호
지정연도  1972년 6월 26일
소재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421-7
시대  조선시대
크기  정면 7칸, 측면 4칸
분류  관아건축
 
1972년에 부산광역시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겹처마 단층 팔작지붕의 목조 건물이다.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관아건물로 부사(府使)가 공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이 건물은 1636년(인조14) 동래부사(東萊府使) 정양필(鄭良弼)이 창건하였으며 1711년(숙종 37)에 동래부사 이정신(李正臣)이 충신당(忠信堂)이라는 현판(懸板)을 걸고 조선 말기까지 사용해왔다. 그뒤 동래군 청사(廳舍), 보건소 등으로 사용하면서 벽면과 마루 등을 개조하였다.

동래부는 정3품 당상관인 부사가 재임하던 곳이며 국방 및 대일(對日) 외교상 중요한 곳이므로 관아 건물도 다른 고을에 비해 규모가 컸으나 일제강점기에 대부분의 건물이 철거·이전되었다. 지금까지 부산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단일건물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유일한 동헌으로 조선 후기의 관아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4호
명   칭   망미루
  (望美樓)
분   류   누(정).각
수   량   1동
지정일   1972.06.26
소재지   부산 동래구 온천동 208
소유자   부산시
관리자   동래구


동래부사청 앞에 세웠던 조선 후기의 문루이다.

조선 영조 18년(1742)에 지었다고 하며, 옛날 한양에서 부임해 온 동래부사가 임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하여 ‘망미루’라 불렀다고 하며, 고종 32년(1895) 동래도호부가 동래관찰사영으로 승격됨에 따라 ‘포정사’라고도 하였다. 1919년 동래의 3·1운동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1층은 통행을 위하여 개방하였고, 2층에는 큰 북을 달아 동래성 4대문의 여닫는 시각과 정오를 알렸다고 한다. 앞면에는 ‘동래도호부(東萊都護府)’, 뒷면에는 ‘망미루(望美樓)’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망미루는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는 전형적인 관아 문루이다.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5호
명   칭   독진대아문
  (獨鎭大衛門)
분   류   관아건축
수   량   1동
지정일   1972.06.26
소재지   부산 동래구 온천동 20-2
소유자   부산광역시
관리자   동래구


조선시대 관청이었던 동래부사청의 대문이다. 조선 인조 14년(1636)에 동래부 동헌인 충신당이 세워질 때 함께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원래는 동래부사청 동헌의 입구에 있었으나 20세기 초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웠다.

문 가운데에 ‘동래독진대아문(東萊獨鎭大衙門)’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것은 효종 6년(1655) 동래부의 군사권이 경상좌병영의 지휘 아래 있던 경주진영에서 독립하였음을 뜻한다.

앞면 3칸·옆면 1칸인 3문 형식의 건물로, 사방이 개방되어 있고 문짝은 달려 있지 않다.

독진대아문은 규모는 작지만 흔하지 않은 3문 형식의 아문건물 중 하나이다.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6호
명   칭   동래향교
  (東萊鄕校)
분   류   향교
수   량   1동
지정일   1972.06.26
소재지   부산 동래구 명륜동 235
소유자   부산광역시향교재단
관리자   부산광역시향교재단


향교란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께 제사지내고, 지방 백성들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했던 국립교육기관을 가리킨다.

동래향교는 조선 태조 1년(1392)에 교육을 널리 확산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전국의 부·목·군·현에 각각 하나씩 향교를 세울 때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 세울 당시에는 지금의 동래고등학교 자리인 읍성 동쪽문 밖에 있었으나, 후에 여러 차례 옮겨 지었다가 순조 12년(1812)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향교 안에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유학자들을 모신 대성전, 학문을 강의하는 명륜당, 학생들이 생활하는 동재와 서재, 그리고 동무와 서무, 반화루 등의 부속건물들이 있다.

전체적인 건물의 배치는 반화루에서 볼 때 정면에 명륜당과 동·서재가 모여 배움의 공간을 이루고 있고, 오른쪽으로 대성전과 동·서무가 모여 제사공간을 이루고 있다. 대성전과 명륜당이 앞뒤 일렬로 놓인 일반향교의 건물배치와는 달리 동서 양쪽으로 구분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정문인 2층 문루를 ‘반화루’라고 한 것은 성인을 따라 덕을 이루고 임금을 받들어 공을 세우기를 원한다는 뜻에서 나온 말인데, 동래향교의 교품이 어떠하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로부터 토지와 책·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정원 70명의 학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적인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8호
명   칭   장관청
  (將官廳)
분   류   관아건축
수   량   1동
지정일   1972.06.26
소재지   부산 동래구 수안동 510-1
소유자   동래기영회
관리자   동래기영회


동래부에 속해 있던 조선 후기 군장관들의 집무소이다.

동래부는 옛부터 왜(倭)와 대치하는 국방상의 요충지로, 조선 효종 6년(1655) 동래 독진을 설치하고, 그 뒤 양산군과 기장현에 속해있던 군사까지도 통합·지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군사상의 지휘가 강화됨에 따라 장수나 변장·부장·참장 등 군장관의 기관으로 장관청이 설치된 듯하다. 장관청은 현종 10년(1669)에 처음 지었고, 숙종 원년(1674)과 숙종 6년(1680)에 다시 지었다. 숙종 32년(1706)에는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었다.

앞면 7칸·옆면 1칸 규모로, ㄱ자 모양의 집이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이며, 본 건물 이외에 행랑채와 대문이 딸려 있다.

장관청은 여러 차례에 걸친 개조로 변형이 심하지만, 조선 후기의 관아건물로 당시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13호
명   칭   고려오층석탑
  (高麗五層石塔)
분   류   석탑
수   량   1기
지정일   1972.06.26
소재지   부산 동래구 온천동 301-15
소유자   사유
관리자   권철현


탑이 서 있던 원래의 터는 알 수 없고, 일제시대에는 일본인의 별장 정원에 있었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2층 기단(基壇)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었으나, 지금은 아래층 기단과 5층 지붕돌, 머리장식이 없어진 상태이다. 기단에는 기둥모양이 조각되어 있고, 탑신의 3층이상 몸돌은 그 아래층 지붕돌과 한 돌로 되어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층과 2층은 4단이고, 3층과 4층은 3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새로 만들어 얹어 놓은 머리장식이 있다.

전체적으로 높고 가파른 편으로, 탑신은 1층 몸돌에 비해 2층 몸돌이 급격히 줄어들었으나 그 이상은 거의 줄지 않았다. 고려 시대에 세운 탑으로 추정된다.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21호
명   칭   군관청
  (軍官廳)
분   류   관아건축
수   량   1동
지정일   1973.06.08
소재지   부산 동래구 안락동 238
소유자   국유
관리자   충렬사관리사무소


조선시대 관아인 동래부사청 건물 중의 하나로, 군관들이 군사일을 보던 곳이다. 세워진 시기는 정확히 알지 못하나 숙종(재위 1674∼1720) 때 여러 차례 보수를 하였고 순조 12년(1812)에 다시 증축한 것으로 되어있다. 한일합방 이후에는 관아로의 기능을 잃고 방치되어 오다가 주변의 도시화로 인해 1982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앞면 6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군관청은 군 장관들이 업무를 보던 장관청과 더불어 이 지방의 국방을 담당하는 중심기관이었으며 대표적인 관아건물이다.
 

종   목   시도기념물   5호
명   칭   동래읍성지
  (東萊邑城址)
분   류   성지(성곽)
수   량   103,647㎡
지정일   1972.06.26
소재지   부산 동래구 복천,안락,명륜,칠산,명장동일대
소유자   국유
관리자   동래구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동래읍성은 마안산을 거쳐 구릉지와 동래 시가지의 평탄한 지역을 포함하여 쌓은 읍성으로,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현종 12년(1021)에 동래읍성을 수리하였으며, 그 뒤 우왕 13년(1387)에 왜구를 막기 위해 동래성을 크게 고쳐 쌓아 둘레가 3090자, 높이 13자라고 전한다.

왜적 방어의 제1관문인 이 성은 조선시대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부산 진성과 함께 왜적의 1차 공격목표가 되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었던 것을 조선 영조 7년(1731)에 다시 증축하여 당시 규모가 둘레 1729자였고, 4곳에 문을 만들었다.

동문을 지희루, 서문을 심성루, 남문을 무우루, 암문(적 또는 상대편이 알 수 없게 작게 꾸민 성문)을 은일루라 하였다. 남문에는 양 날개가 달린 듯 좌우로 뻗은 성벽인 익성이 있고, 나머지 3개의 문에는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튼튼히 지키기 위해, 성문밖으로 원형이나 방형으로 쌓은 옹성을 두어 적으로부터 성을 방어하고 있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평지의 성벽은 대부분 철거되었고, 마안산을 중심으로 성곽의 모습만 겨우 남아있다. 현재 북문과 옹성, 동장대, 서장대 등이 부분적으로 복원되어고 있다.
 

종   목   시도기념물   11호
명   칭   송공단
  (宋公壇)
분   류   석(계)단
수   량   2,762㎡
지정일   1972.06.26
소재지   부산 동래구 복천동 229-78
소유자   부산시
관리자   동래기영회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왜적과 장렬히 싸우다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과 여러 군민들의 충절을 기리고 있는 제단이다.

동·서·남·북의 4단으로 되어있는 이곳에는 북쪽은 송상현·조영규·노개방, 동쪽은 유생 문덕겸·비장 송봉수·김희수·신여로, 서쪽은 노개방의 부인·송상현의 첩 금성·정발의 첩 애향, 남쪽은 향리 송백·부민 김상·두촌녀 및 이름없는 여러 사람들의 단이 마련되어 있다.

조선 영조 18년(1742) 동래부사 김석일이 설치한 것으로, 원래는 그 전에 동래읍성의 남문 밖 농주산(지금의 동래경찰서 자리)에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이들의 제단을 세워 동래부사 송상현·부산첨사 정발·양산부사 조영규·동래교수 노개방 등을 모셨는데, 이 단이 마련되면서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매년 음력 4월 15일에 제사를 지내다가 이후 동래성에서 순절하지 않은 분들의 제사는 모시지 않게 되어, 부산에서 순절한 분들은 정공단, 다대포에서 순절한 분들은 윤공단으로 옮겨 제사를 지내게 되었고, 일제시대 이후 부터는 음력 4월 14일로 날짜를 옮기어 제사를 올리고 있다.
 

종   목   시도기념물   13호
명   칭   임진동래의총
  (壬辰東萊義塚)
분   류   묘
수   량   일원
지정일   1972.06.26
소재지   부산 동래구 복천동 산17-1
소유자   부산시
관리자   동래구


임진왜란 때 왜의 대군을 맞아 동래부사 송상현과 함께 동래성을 지키다 순절한 군·관·민의 유해를 거두어 모신 묘소이다.

영조 7년(1731)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퇴폐한 동래읍성을 수축할 때 임진왜란의 격전지였던 옛 남문터에서 많은 전사자의 유골이 발견되어 삼성대 부근에 6개의 무덤을 만들어 안장하였다.

일제시대 말 토지개간으로 동래구 복천동 뒷산 영보단 부근에 이장하였다가, 1974년 현 위치인 금강공원으로 옮겨왔다. 성의 함락일인 음력 4월 15일에는 동래구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현재 묘역에는 담장이 설치되어 있으며, 담장 밖에는 제사를 지낼 수 있는 건물과 비석이 세워져 있다. 1731년 동래부사 정인섭이 글을 쓴 이 비석은 앞면에는 ‘임진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이 뒷면에는 유해지총의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종   목   시도기념물   14호
명   칭   온정개건비
  (溫井改建碑)
분   류   석비
수   량   1기 339㎡
지정일   1972.06.26
소재지   부산 동래구 온천동 135-26
소유자   부산시
관리자   동래구


온정은 온천을 말하는 것으로, 이 비는 동래부사 강필리가 동래온천을 수리한 공로를 기록하고 있다.

동래온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삼국유사』에서 볼 수 있는데 신라의 재상 충원공이 이곳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갔다는 내용이다. 『신동국여지승람』에는 물이 계란을 익힐 만큼 뜨거웠으며 병자가 목욕을 하면 병이 잘 나아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던 곳이라고 적고 있다.

높직한 석축 위에 비를 세웠는데 네모진 받침돌 위로 모서리 양끝을 사선으로 처리한 직사각형 비몸을 세운 형태이다. 비문에 의하면 이 온천은 조선 숙종 17년(1691) 건물을 짓고 돌로 두 개의 탕을 만들어 놓았다. 그 후 건물이 낡고 탕이 막혀 이용하기에 불편하여, 새로 부임한 부사 강필리가 이를 수리하여 남탕과 여탕을 나눈 9칸짜리 건물을 지었는데, 그 모습이 화려해 마치 꿩이 나르는 것 같았다고 한다.

비는 영조 42년(1766) 10월에 건립되었다.
 

종   목   시도기념물   16호
명   칭   내주축성비
  (萊州築城碑)
분   류   석비
수   량   1기
지정일   1972.06.26
소재지   부산 동래구 온천1동 131-4
소유자   부산시
관리자   동래구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었던 동래읍성을 동래부사 정언섭이 대대적으로 다시 쌓은 후 이를 기념하고자 세워놓은 비이다.

형태는 네모반듯한 받침돌 위로 비몸을 올리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돌 윗면에는 도드라진 연꽃무늬를 둘러 새겨 놓았으며, 비몸의 앞면에는 축성에 관한 사실을 20행으로 새기고 뒷면에는 축성에 종사한 임원의 명단을 기록하였다. 머릿돌에는 한 쌍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비문은 김광악이 짓고 송광제가 썼으며 글씨는 유우기의 것이다.

영조 11년(1735) 남문밖 농주산에 세운 것을, 영조 41년(1765)에 옮겨 세웠다가 순조 20년(1820) 다시 남문거리로 옮겼으며, 지금의 자리로 옮긴것은 일제시대이다. 동래성 연구의 가장 정확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동시에 조선조 후기 성축사의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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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조사

... 3학년때 겨울방학숙제를 해서 내야되요^^ 그래서 선택과제로 문화재 조사하기를 했는데... 문화재를 잘... 한국의 대표적인 석굴사찰로, 정식 문화재 명칭은...

안동시에잘 알려지지 않은 문화재

... 많은 문화재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이러한... 두루 찾아 교유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헌종 때... 가히 대표적인 것으로 일컬어질 만 하다. 이 선돌은 와룡에서...

우리고장(부산)의 문화재좀 가르쳐...

... 그런데 오늘 선생님께서 부산의 문화재를 조사해... 유형문화재 제5호 지 정 일 1972.06.26 소 재 지 부산 동래구... 중심기관이었으며 대표적인 관아건물이다. 11.범방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