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파구의 유명한 인물과 장소

송파구의 유명한 인물과 장소

작성일 2010.03.06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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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학년 인데여~

학교 숙제로 송파구의 유명한 인물과 장소를 알아오는게 숙제에요~

좀 부탁드려요, 님들~ 쉽게 나오지가 않아서 질문합니다!

이상한 글은 바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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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구의 유명한 인물

 

1.김구 (1649(인조 27)~1704(숙종 30))

 

조선 후기의 문신.본관은 청풍. 호는 관복제.아버지는 관찰사였다.

 

1669년(현종 10) 사마시에 합격하고, 1682년(숙종 8) 춘당대문과에 장원하여, 전적과 각 조의 낭관을 거쳐, 사헌부와 사간원에 있을 때, 노론.소론의 격렬한 대립을 완화하기 위한 만언에 가까운 시무소를 올려 일반의 찬탄을 받았으며, 양파의 대립을 조정하는 데 힘썼다.

 

경연관.수찬.승지 등을 거쳐 황해도.충청도.전라도.평안도의 4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대사간을 거쳐 1697년 강화유수로서 장녕전을 경영한 공으로 가자되었으나, 오도일.이광좌등으로부터 흉년으로 모든 역사를 정지시켰는데도 내전을 통해 나온 명을 받들어 집을 지었다 하여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이어 판결사에 있으면서 노산군(단종)의 복위를 극력 주장하여 숙종으로 하여금 단종의 위를 추복하게 하였고, 아울러 단종비 신씨의 묘를 능으로 추봉하고 능역을 감독하여 그 공으로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이어 육조의 판서를 거쳐, 1703년 우의정이 되었다.

 

임금의 위엄에 굽히지 않았고, 의리에 따라 처신하였으므로 임금의 총애와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병서와 도가류에 정통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가 힘찼다.글씨로는 고성에 있는 <백천교중병비>와 선사에 있는 <김수신도비>가 있다.시호는 충헌이다.

 

만년에 송파구 방이동 몽촌토성 안에 거주하였는데, 광주유수도 이곳까지 찾아와 인사드리고, 비록 죄를 지은 자라도 이곳에 들어오면 그의 허락을 얻은 뒤에야 체포할 수 있는 등 이 일대에 큰 세력을 갖고 있었다 한다.

 

묘도 몽촌토성내에 있는데, 묘에는 곡장을 두르고 장명등과 문인석이 각 1쌍씩 있다.묘 앞에는 영조 19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이의현이 짓고 서명균이 쓴 이 비는 「충헌 김공신도비」라 되어 있다. 화강암의 용대위에 조석의 비신이 있으며 그 위에 역시 같은 화강암의 가담석이 얹혀져 있다.

 

2.김상헌 (1570(선조 3)~1652(효종 3))

 

조선 인조.효종 상신 본관은 안동.자는 숙도, 호는 청음.석실산인(중년 이후 양주 석실에 퇴귀해 있으면서 사용).서간노인(만년에 안동에 은거하면서 사용).서울출생.

 

돈녕부도정 극효의 아들이며, 우의정 상용의 동생이다.3세때 큰아버지인 현감 대효에게 출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참의에 발탁되자 공신세력의 보합위주정치에 반대 시비와 선악의 엄격한 구별을 주장함으로써 서인 청서파의 영수가 되었다.

 

1635년 대사헌으로 재기용되자 군비의 확보와 북방 군사시설의 확충을 주장하였고, 이듬해 예조판서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보필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 최명길등의 주화론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안동으로 은퇴하였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경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었다.
잡혀갈 때 남긴 시조가 그의 애국충절을 말해준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시문과 조천록.남차록.청평록.설교집.남한기략 등으로 구성된 <청음전집> 40여권이 전한다.시호는 문정이다.

 

3.서거정 (1420(세종 210)~1488(성종 19))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달성. 자는 강중, 초자는 자원, 호는 사가정, 증조부는 호조전서이고, 아버지는 목사 미성이며, 어머니는 권근의 딸이다.

 

학문이 매우 넓어서 천문.지리.의약.점술.성명.풍수에까지 관통하였으며,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특히 詩에 능하였다.

 

그의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사가집>이 전하며, 공동찬집으로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동국선>, <경국대전>, <연주시격언해>가 있고, 개인저술로서는 <역대연표>, <동인시화>, <태평한화골계전>, <필원잡기>, <동인시문>등이 있다.

 

광주의 구암서원에 제향되었다가 대구로 옮겨졌다.시호는 문충이다.

 

50세 전후에 자신도 한강변의 별야겸 우거지를 마련하였다.

 

처음에는 광진 즉 아차산하 지금 광장동에 농장을 마련하고 수시로 나와 심신을 휴양하며 강변풍물을 시로 읊었다.

 

그후 죽음에 이르러서 후손들에게 자신의 묘 또한 이곳에서 멀지않은 현 방이동 근처에 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대한제국 말까지 이곳 방이동(안산)에 묘가 있었는데 일제의 도시계획 등으로 인해 후손들이 구암서원 근방의 선산으로 이장해 갔다.

 

4.어효첨 (1405~1475)

 

조선초기 직제학 어변갑의 아들, 자는 만종, 호는 귀천, 시호는 문효이며 본관은 함종이다.

 

그는 세종12년에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한후 예조참의를 거쳐 이조, 호조, 병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냈고 세조9년에는 이조판서, 성종5년에는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그의 성품은 순결하고 학문에 조예가 깊어 음양풍수등의 미신을 적극 배척한 인물로 유명하였으며 그는 아버지 장례때에도 지관을 부르지 않았다고 <해동묭산록>에 기록되어 있다.

 

함종어씨의 가문들은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수 없다’하여 어씨가 수백기의 묘들이 따가운 햇볕을 피해 서늘한 북쪽이나 서쪽을 향하고 있고 또한 이들의 집성촌 역시 남향이 아닌 북향 또는 서향으로 자리잡는 특별한 전통을 이어 내려오고 있다.

 

저서는 <예기일초>)가 있다.

 

5.오달제 (1609(광해군 1)~1637(인조 15))

 

병자호란 때 삼학사의 한 사람.본관은 해주. 자는 이휘, 호는 추담. 윤해의 아들이다.

 

19세에 사마시에 합격, 1634년(인조 12) 26세에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전적.병조좌랑.시강원사서.정언.지평.수찬을 거쳐, 1636년에 부교리가 되었다.이때 후금의 세력이 날로 커져 칭제건원하고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조선을 무섭게 위협하여 왔다.이에 화친을 위하여 주화파 최명길 등의 주장으로 사신을 교환하게 되자, 임금을 속이고 삼사의 공의를 위협, 제지하여 임의로 사신을 보낸 최명길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나라와의 화의를 끝까지 반대하였다.

 

인조가 청군에 항복하게 되자, 청나라측에서는 전쟁의 책임을 척화론자에게 돌려 이들을 찾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윤집과 더불어 자진하여 척화론자로 나서서 적진에 잡혀가 청나라로 끌려가게 되었다.

 

적장 용골대는 그의 뜻을 꺾기 위하여 처자를 거느리고 청나라에 와 살라고 회유하기도 하고, 또 협박하기도 하였으나 그는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불의라고 하고 저들의 말을 쫓으면 오랑캐가 되고 마는 것이라 하여 끝까지 항변하였다.

 

마침내 심양성 서문 밖에서 윤집.홍익한과 함께 처형을 당하였다.

 

세상에서는 이들을 삼학사라고 하여 그들의 절개와 충성을 높이 기리게 되었다.

 

그는 묵매화에도 뛰어났는데, 어몽룡.조속.허목의 화풍을 따르면서도 명나라의 묵매화풍의 영향을받아 구도가 조금은 번잡한 감을 준다.

 

그의 그림은 <묵매도> 2점이 전하며, 이러한 구도의 묵매화는 뒤의 조지운.홍수주.박동진.조희룡.이공우 등의 묵매화에 영향을 주었다.

 

좌승지.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주 남한산성의 현절사, 평택의 포의사, 홍산의 창열서원, 영천의 장엄서원, 고령의 운천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충렬공유고>가 있다.시호는 충렬이다..

 

6.윤집 (1606(선조 39)~1637(인조 15))

 

조선 후기의 문신.본관은 남원. 자는 성백, 호는 임계.고산.현감 형갑의 아들이며, 남양부사 계의 아우이다.

 

1627(인조 5) 22세에 생원이 되고 1631년(인조 9)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에 설서가 되었으며 1636년(인조 14)에 이조정랑.부교리에 이어 교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국왕과 조정 대신들이 남한산성으로 난을 피하였으나 청병에게 산성이 포위되어 정세가 극히 불리하게 되었다.

 

최명길 등이 화의로 위기를 극복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때 오달제.홍익한 등과 함께 화친의 사신을 보내자고 주장하는 최명길의 목을 벨 것을 청하였으며, 최명길이 국왕의 뜻을 움직여 화친의 일을 성립시키고자 입대하여 승지와 사관을 물리치도록 청하자 이를 규탄하는 극렬한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옛날 화친을 주장하여 사필의 베임을 피할 수 없었던 주회와 같은 대간도 감히 사관을 물리치지 못하였다고 극렬한 말로 규탄하는 한편, 국왕이 대연을 꺼리지 않고 오직 사특한 의논만을 옹호하고 간사한 신하만을 의지하면 마침내 나라를 잃어버리고 만다고 경고하였다.

 

화의가 성립되자 청나라측에서 척화론자의 처단을 주장하니 그는 오달제와 더불어 소를 올려 자진하여 척화론자로 나섰다.

 

청병에 의하여 끌려갈 때도 조금도 절개를 굽히지 아니하여 청병이 오히려 감복하여 존경하였다고 한다.

 

청나라에서 고문과 회유 등으로 그의 뜻을 돌리려 하였으나 몸을 굽히는 굴복의 모욕은 죽는 것보다 도리어 더한 모욕이라며 끝내 굴하지 않고 항변하다 마침내 심양성 서문밖에 끌려가 사형당하였다.

 

세상에서는 오달제.홍익한과 더불어 삼학사라고 이른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주 남한산성의 현절사, 강화의 충렬사, 평택의 포의사, 홍산의 창렬서원, 영천의 장엄서원, 고령의 운천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이다.

 

7.이집 (1314(충숙왕 1)~1387(우왕 3))

 

고려 말기의 학자.문인.본관은 광주, 초명은 원령, 자는 호연, 호는 둔촌, 광주 향리 당의 아들로 광주목에서 나서 충목왕 때 과거에 급제하므로써 이색.정몽주.이숭인등과 서로 교유하였다.

 

문장을 잘 짓고 지조가 굳기로 명성이 높았다. 1368(공민왕 17) 신돈을 탄핵하다가 신돈의 미움을 사 생명의 위협을 받자, 가족과 함께 경상도 영천 최원도의 집으로 도피하여 고생 끝에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1371년 신돈이 주살되자 개경으로 돌아와 판전교사사에 임명되었으나 출세할 뜻이 없어 곧 사직하고, 광주땅 안둔골에 집을 짓고 전야에 묻혀 살면서 시를 지으며 일생을 마쳤다.

 

후손에서 5명의 정승, 6명의 판서, 7명의 공신이 나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광주목과 여주목의 인물조에 소개되고 있는 이지직, 이지강, 이지유, 이장손, 이인손, 이예손, 이극배, 이극감, 이극중, 이극균, 이세필, 이세광, 이세우, 이세좌 등이 그러한 둔촌인파이다. 광주 귀암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저서에 <둔촌유고>가 있다.

 

현 강동구 둔촌동은 그가 이곳에서 일시 거주하였으므로 그의 호를 따서 이름한 것이며, 둔촌동 522-6의 앞길에서 길동 4거리를 경유 명일동 산 11-4의 앞길까지 이르는 폭 25.5m, 길이 3,870m의 길을 둔촌로라 이름한 것은 이 때문이다.

 

강동구 둔촌동에 거주했던 인물을 송파구 인물편에 실음은 이곳이 모두 옛날 광주지역이었으며, 이집은 광주이씨의 시조가 되기 때문에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음이다.

 

8.조운휼 (1332(충숙왕 복위 1)~1404(태종 4))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본관은 풍양. 평장사 맹(孟)의 31대손이다.

 

이인복의 문인이며, 1357년(공민왕 6)에 문과에 급제하여 안동서기가 되고, 합문사인을 거쳐서 1363년에 2등공신이 되었다. 이듬해 국자감직강이 되었고 이어서 전라·서해·양광의 삼도안렴사를 지냈다.

 

1374년 전법총랑으로 사직하고, 상주 노음산 기슭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석간누하옹이라고 하고 외출할 때는 반드시 소를 타고 다녔다.

 

이때 <기우도찬>,<석간가>등의 시를 지었다. 1377년(우왕 3) 다시 등용되어서 판전교사사로 있다가 1380년에 사임하고, 광주 고원강촌(몽촌)으로 퇴거하였다. 그곳에서 판교원,사평원을 중건하여 원주가 되고 공사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다.

 

은둔생활 8년째인 1388년(우왕 14) 전리판서로 기용되었고, 창왕이 즉위하자 서해도 도관찰사로 나가 왜구를 토벌하였다.

 

그후 계림부윤, 강릉부사 등을 역임하는 동안 선정을 베풀었다.

 

조선조 때 검교정당문학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퇴하고 고원강촌에 은거하여 지내다가 태종4년 73세로 자신의 묘지문을 손수 지어놓고 여생을 마쳤다.

 

몽촌에 일거하면서 그는 밭에 나가 농사지어 생계를 유지하고 아정에 나가 강산풍월을 읊으며 소를 타고 가까운 곳에 있는 정금원, 광진원을 왕래하면서 행여들을 돌보아 주었다.

 

9.최명길 (1586(선조 19)~1647(인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본관은 전주. 자는 자겸, 호는 지천.창랑.아버지는 영홍부사 기남이며, 어머니는 참판 유영립의 딸이다.

 

1614년(광해군6)에 병조좌랑,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 1등이 되어 완성부원군에 봉하여졌으며, 이어 이조참판이 되어 비변사 유사당상, 홍문관 부제학, 사한부 대사헌 등을 거쳤다.

 

1632년 이조판서, 1635년 호조판서,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론을 펴 극렬한 비판을 받았다.

 

1642년 영의정을 지냈으며, 1645년 인조를 보필하다 죽었다.

 

그런데 그가 심양에 잡혀가서 비록 갇힌 몸이 되었으나 늠름한 태도로 시종일관 비굴한 빛이 없었다.

 

이때에 김상헌은 그의 늠름한 태도에 “공의 주화가 오로지 나라를 위한 충성에서 비롯한 것임”을 비로소 알고 마음으로 탄복하였다.

 

그후로 김상헌은 자손들에게 최공 집안과 대대로 세의를 도모하라는 유언까지 남기었다고 전한다.

 

성리학과 문장에도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으며, 글씨에 있어서도 동기창제로 이름이 있었다.

 

저서로는 <지천집> 19권과 <지천주차> 2책 등이 있다.박천의 지천사에 제향. 시호는 문충이다.

 

10.홍익한 (1586(선조 19)~1637(인조 15))

 

오달제.윤집과 더불어 이른바 “병자 삼학사”의 한 사람.본관은 남양, 자는 백승, 호는 화포.운옹. 찬성 숙의 현손으로, 진사 이성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김림의 딸이며, 백부인 교위 대성에게 입양되었다.이정구의 문인이다.

 

1615년(광해군 7) 생원이 되고, 1624년(인조 2)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서를 거쳐, 1635년 성균관 장령이 되었다.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속국시하는 모욕적인 조건을 내걸고 사신을 보내오자, 상소하여 제호를 참칭한 죄를 문책하고 그 사신들을 죽임으로써 모욕을 씻자고 주장하였다.

 

마침내 이 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미처 강화로 피난가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그는 최명길 등의 화의론을 극구 반대하였는데, 이 난으로 그의 두 아들과 사위가 모두 적의 칼에 죽었고, 아내와 며느리는 적에게 붙들렸으나 몸을 깨끗이 보존하고자 자결하였으며, 늙은 어머니와 딸 하나만이 살아 남았다.

 

이듬해 화의가 성립되었는데, 조약이 거론될 때, 김상헌.오달제.김집 등과 척화를 주장하였다.

 

강화체결 이후 조정의 권유로 청군의 화를 피하기 위하여 평양부서윤으로 나갔으나, 청나라의 강요로 화친을 배척한 사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오달제.운집과 함께 청나라로 잡혀갔다.

 

그곳에 붙들려갔어도 문초하던 청장 용골대에게 “작년 봄에 네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소를 올려 너의 머리를 베자고 청한 것은 나 한사람 뿐이다.” 하였고, 갖은 협박과 유혹에도 끝내 굽히지 않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그를 비롯한 삼학사가 살해된 정확한 날짜도 모르고 오래도록 감추어져 오다가 효종 때에 홍익한에게 도승지, 윤집에 부제학, 오달제에 좌승지를 추증하게 하였고, 숙종 19년(1663)에는 삼학사에게 영의정이 추증되어 그 절개를 기리게 되었다.

 

광주의 현절사, 강화의 충렬사, 평택의 포의사, 홍산의 창렬서원, 부안의 도동서원, 영천의 잠엄서원, 고령의 운천서원, 평양의 서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화포집>, <북행록>, <서정록>이 있다.시호는 충정이다.

 

송파구의 유명한 장소

 

1.풍납리토성

 

종 목 사적 제1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송파구 풍납동 72-1외

시 대 삼국시대


한강변에 남아있는 초기 백제시기의 토축 성곽으로, 주로 풍납토성이라 부른다. 원래는 둘레가 4㎞에 달하는 큰 규모의 토성이었으나, 1925년 홍수로 남서쪽 일부가 잘려나가 현재는 약 2.7㎞ 가량 남아있다.

 

토성의 형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이다. 성벽은 돌이 없는 평야지대에서 성을 쌓는 방식으로 고운 모래를 한층씩 다져 쌓았다. 성벽의 표면은 잔디와 잡초로 덮여 있는 곳이 많으며, 높이는 일정하지 않다. 동쪽에는 4곳에 출입문으로 여겨지는 흔적이 남아있다.

 

풍납리식 민무늬토기·신라식 토기들과 그물추·물레·가락바퀴(방추차)·기와 등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유물들이 출토되어, 백제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임을 알게 되었다.

 

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도성인 위례성으로 보는 견해와 방어성으로 보는 두가지 의견이 엇갈리고 있어 더욱 연구·조사 되어야 한다. 그러나 초기 백제의 중요한 성으로서 당시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유적이며, 주변에 몽촌토성과 석촌동 고분군과 관련되어 역사적으로도 매우 가치있는 곳이다.

  

 

2.방이동 백제 고분군

 

종 목 사적 제270호

지 정 일 1979.12.28

소 재 지 서울 송파구 방이동 산47-4

시 대 백제


서울 방이동 일대에 있는 백제전기(4C초∼475)의 무덤들이다.

 

제1호 무덤은 봉토의 지름이 12m, 높이 2.2m로 널길(연도)과 널방(현실)을 가진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다. 도굴로 인해 남아 있는 유물이 없었으나, 주민에 의해 3접의 토기가 수습되었다. 4호 무덤은 아치형천장(궁륭식천장)을 한 굴식돌방무덤으로, 자연적으로 유약이 입혀진 회청색경질 굽다리접시(고배)와 굽다리접시뚜껑을 비롯한 토기류와 철제류가 출토되었다.

 

6호 무덤에서 나온 회청색경질 굽다리접시의 경우 굽구멍(투창)이 전형적인 신라토기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이다. 이는 6세기 이후 한강유역이 신라영토로 되었을 때 만들어진 신라무덤일 가능성도 있다.

 

방이동 유적은 백제의 수도가 한성에 있을 때 만들어진 전기무덤으로 가락동·석촌동무덤과 함께 한성백제의 문화를 알 수 있는 유적이다.

 


3.몽촌토성

 

종 목 사적 제297호

지 정 일 1982.07.22

소 재 지 서울 송파구 오륜동 88-3

시 대 백제


한강의 지류인 성내천 남쪽에 있으며, 둘레가 약 2.7㎞ 되는 백제 전기의 토성이다.

 

자연 지형을 이용해 진흙으로 성벽을 쌓고, 나무 울타리로 목책을 세웠던 흔적도 확인되었다. 자연 암반층을 급경사로 깎아 만들기도 하였으며, 성을 둘러싼 물길인 해자도 확인되었다. 조사 결과 문터와 집자리, 저장용 구덩이가 확인되었고, 출토유물로는 동전무늬가 찍힌 자기조각과 여러 종류의 토기류, 철제 무기류 등이 나왔다. 특히 동전무늬가 찍힌 자기조각은 중국 서진(265∼316)대의 유물이어서 시대 확인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있는데, 백제의 도성인 위례성이라는 견해와 방어용 성이라는 견해가 있다. 위치·규모·출토유물로 볼 때 백제 초기 군사적·문화적 성격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유적이며, 주변에 풍납토성과 백제 석촌동 무덤들을 비롯한 백제 전기의 유적이 있어 역사적으로도 가치있는 곳이다.

 


4.충헌공 김구 묘역

 

종 목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9호

지 정 일 1984.11.03

소 재 지 서울 송파구 방이동 몽촌토성내

시 대 조선시대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앞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김구(1649∼1704)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김구는 숙종 8년(1682) 문과에 급제한 후 사헌부 ·사간원에 재직하면서 당대의 시국에 대한 많은 상소를 올리는 한편 노론과 소론의 격심한 당쟁을 완화시키려 애썼다. 그후 대사간을 거쳐 판결사로 있을 때에는 노산군의 복위를 주장하여 단종으로 왕위를 회복시켰고, 아울러 단종비 송씨의 묘를 능으로 추봉하고 능을 조성하는 공사를 맡아 보았다. 이후 형조판서를 거쳐 숙종 29년(1703) 우의정이 되었다. 그는 임금을 충직하게 섬기고 국왕의 위력에 굽히지 않았으며 의지에 따라 처신하여 임금의 총애와 백성들의 존경을 받아 그가 죽은 뒤 ‘충헌’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지붕돌에는 용, 봉황, 불로초, 구름 등의 무늬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어 단순하고 밋밋한 아랫부분과 대조를 이룬다.

 

영조 19년(1743)에 세운 비로, 비문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의현이 짓고 글씨는 서명균이 썼다.

 


5.삼전도비

 

종 목 사적 제10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송파구 석촌동 289-3

시 대 조선시대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조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비석으로 높이 3.95m, 폭 1.4m이고, 제목은 ‘대청황제공덕비’로 되어있다.

 

조선 전기까지 조선에 조공을 바쳐오던 여진족은 명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 급속히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하고, 더욱더 세력을 확장하여 조선을 침략하는 등 압력을 행사하면서 조선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였다. 나라의 이름을 청으로 바꾼 여진족이 조선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자 두 나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결국 인조 14년(1636) 청나라 태종은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조선에 쳐들어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남한산성에 머물며 항전하던 인조가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머물고 있는 한강가의 삼전도 나루터에서 항복을 하면서 부끄러운 강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고 그 결과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이경석이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어 만주어 및 몽골어를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자료이다.

  


6.석촌동 백제 초기 적석총

 

종 목 사적 제243호

지 정 일 1975.05.27

소 재 지 서울 송파구 석촌동 61-6
시 대 백제


적석총이란 고구려 초기부터 나타난 고구려 계통의 무덤으로서 돌무지무덤이라고도 한다.

 

석촌동 무덤들은 백제 초기에 만들어진 무덤으로서 일제 때 처음 조사되었다. 1호, 2호 무덤은 주민들이 농사 짓는 땅으로 이용해서 내부구조와 유물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며, 3호 무덤은 기원전·후부터 나타나는 고구려 무덤 형식인 기단식돌무지무덤(기단식적석총)이다.

 

무덤은 높은 지형을 평평하게 하고 밑 테두리에는 매우 크고 긴 돌을 두르고 자연석으로 층단을 이루면서 쌓아올려 3단으로 되었는데, 옛 고구려 지역인 만주 통구에 있는 장군총보다 큰 것임이 밝혀졌다. 5호 무덤은 조사가 완전하게 되지 않아 구조와 유물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무덤 주변에는 무덤을 두르고 있는 돌을 2단으로 쌓았다.

 

내부구조에 대해서 확실히 알 수는 없고, 이 지역 지배계층의 무덤으로서 주변에 만들어진 무덤의 주인보다는 낮은 계층의 사람들 같고, 독무덤(옹관묘)이나 작은 돌방무덤(석실묘)에 묻힌 사람들 보다는 조금 높은 신분계층의 사람들의 무덤으로 볼 수 있다.

 

이 무덤들은 가락동·방이동 무덤과 함께 초기 백제의 문화와 역사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7.신선경과 유인호 묘역


종 목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8호

지 정 일 1991.12.24
소 재 지 서울 송파구  오금동 5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전기의 문신인 신선경의 묘를 비롯한 거창 신씨들의 묘역이다.

 

신선경은 세조 1년(1456) 사헌부 장령을 거쳐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거창 신씨는 원래 중국 송나라 개봉부 출신인 신수가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의 수도 개경에 왔다가 고려에 귀화하여 고려인이 됨으로써 거창 신씨의 시조가 되었다.

 

묘소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공원 내에 있는데, 이 가운데 신선경의 묘는 약 500년 전에 조성된 것으로 정부인 한씨와의 쌍분이다. 2개의 봉분 가운데에는 묘비·상석이 있는데 묘비 윗부분이 연꽃무늬로 장식되어 있어 묘비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임진왜란 때 이항복과 함께 3등공신으로 선조대왕을 보필한 문양공 류희림, 문원군 류복룡, 공조참의 류인호의 묘소이다.

 

류희림은 복룡의 아들로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명종 15년(1560) 1,000여명의 성균관 유생을 대표하여 다시 일어나고 있는 불교를 비판하고, 선종·교종 모두를 폐지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명종 16년(1561) 식년문과에 병과로 합격하여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선조 14년(1581) 형조참판으로 동지사가 되어 중국 명나라에 다녀왔으나 가지고 간 지방의 산물이 부족하여 낮은 벼슬자리로 옮겨졌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첨지중추부사로서 왕을 호종하여 좌승지로 발탁되었다. 이후 동지중추부사·예조참판 등을 거쳐 1597년 동지돈녕부사가 되었다. 죽은 뒤인 선조 37년(1604) 호성공신 3등에 봉해지고 문양공에 봉해졌다.

 

묘소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공원내에 있으며, 묘역에는 상석·망주석(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돌기둥)·문인석·신도비(왕이나 고관들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무덤 가까이에 세워두는 비) 등이 있다. 


 

8.롯데월드  

 

소 재 지  서울 송파구 잠실동 40-1

 

롯데그룹이 국민들의 여가 선용과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 설립하고 운영하고 있는 테마파크이다. 롯데월드는 모험과 신비를 주제로 한 실내 주제공원인 롯데월드 어드벤처, 호수공원인 매직아일랜드, 쇼핑몰, 민속박물관, 아이스링크, 호텔, 백화점 등으로 구성되어 관광, 레저, 쇼핑, 문화를 한곳에서 해결할 수 있는 대단위 복합생활공간이다.

 

롯데월드 어드벤처에서는 최첨단 탑승시설을 비롯하여, 환상적인 퍼레이드, 각종 영상 시스템, 레이져쇼, 공연, 각국의 음식을 연중무휴로 즐길 수 있다. 롯데월드 어드벤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실내 테마파크이다. 어드벤처 연간 입장객 6백 여만명 중 10%는 외국인들이다.

 

민속박물관에는 한국의 오천년 역사와 민속 문화가 역사전시관, 모형촌, 놀이마당, 저자거리로 나누어져 쉽고 재미있게 재현되어 있다. 롯데월드 가든스테이지는 롯데월드 공연의 중심무대로 각종 시즌 뮤지컬 쇼, 공개방송 등의 다양한 이벤트가 진행된다.

 

롯데월드 호반무대는 롯데월드 매직아일랜드에 위치한 야외 무대로 석촌호수를 배경으로 각종 공연이 수시 상영된다. 롯데월드 스타에비뉴는 한류스타 조성거리로 체험형 엔터테인먼트 시설이다.

 

9.올림픽공원  

 

소 재 지  서울 송파구 방이동 88번지

 

올림픽공원은 백제시대의 유적과 현대적 감각의 최신식 경기장이 공존하면서 숲과 잔디밭 또한 훌륭한 여가공간이다. 88서울올림픽의 유산인 올림픽공원은 도시민의 생활수준 향상으로 건강 증진에 대한 욕구가 높아지면서 도시 안에 마땅한 휴식공간이 없는 시민들에게 단순한 휴식처 뿐만 아니라 국내 최대의 스포츠 마당으로 부각되고 있다.

 

올림픽 공원은 체육공간, 문화예술공간, 역사와 교육의 장소, 휴식공간 등 다양한 용도를 갖춘 만능공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한 백제 초기의 유적인 몽촌토성과 몽촌해자(인공호수)를 중심으로 43만평의 대지 위에 조성되어 있고, 세계적인 조각작품들, 기념조형물, 88놀이마당, 산책로, 올림픽 문화센터 등이 들어서 있다. 이 외에도 각종 유료, 무료 공연이 수시 개최되고 있어 시민들을 위한 다목적 휴식공간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서울올림픽을 치른 수영장, 체조경기장, 펜싱경기장, 역도, 테니스장을 비롯, 경륜장이 있으며, 각종 스포츠교실은 쾌적한 공간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다.

 

또한 88서울올림픽대회를 가념하는 유명 작가들의 조각품들이 야외에 전시 돼있어서 문화예술공간으로도 한 몫을 다한다. 올림픽공원 내에 있는 몽촌토성은 백제가 고대국가의 터전을 마련한 한성시대, 즉 3세기-4세기때 만들어진 거성의 하나이다. 하남 위례성으로 추정된다. 사적 제 297호로 지정되어 있다.

 

올림픽공원은 걸어서 한 바퀴 도는데 약 3시간 이상이 걸릴 정도로 넓은 공간이기 때문에 진입로와 동선을 미리 익혀둬야 관람이 편하고 시간을 절약하려면 평화의 광장 옆에서 호돌이열차(Road Train)를 탑승하면 된다.

 

10.석촌호수

 

소 재 지  서울 송파구 잠실1동 47

 

'석촌호수'의 원래 이름은 송파나루로서 북쪽의 잠실벌은 나루터가 있었던 곳으로 한강 상류에서 흘러온 흙이 쌓여 인공 섬이 생겼다고 한다.

 

석촌호수는 동호와 서호로 나눠져 있는데 동호는 송파구 주민들의 운동 장소와 주변 직장인들이 점심 또는 저녁 퇴근 후 차 한 잔을 마시며 여유를 즐기는 공간으로 사랑 받고 있으며 서호는 롯데월드의 매직아일랜드와 서울 놀이마당이 있어 놀거리, 즐길거리가 풍부하여 좋다.

 

밤이 되어 어두워지면 주변 주상복합 아파트들의 불빛과 롯데월드의 야간 조명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밤을 연출해 낸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저도

3학년인데 숙제를내주셨어요 근데 저는김구를 유명한인물로하였어요

장소는 올림픽공원할꺼에요 님도그러게하세요~~

그럼숙제잘해보세요 그리고

저보다잘쓴님들이많을꺼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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