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규와 송규

연규와 송규

작성일 2006.08.17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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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규하고 송규가 있었는데요

 

연규의 별명은 코찌질이에요. 생긴건 이준기

 

랑은 전혀 안닮았구요.. 구봉서 닮았어요

 

송규는 별명은 송팅이 구요.. 생긴건 호로비츠 닮았어요

 

송팅팅팅 카드는 할인이 되나요?

 

연규는 땡구인데

 

한대 때리면 땡땡 거리는데.. 어떻게 할까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일단 땡구를 존나 방망이로 때린다음 송충이를 데려다가 관광시키세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 불교 [ 佛敎 , Buddhism ] : 석가모니(釋迦牟尼)를 교조로 삼고 그가 설(說)한 교법(敎法)을 종지(宗旨)로 하는 종교.

불교라는 말은 부처(석가모니)가 설한 교법이라는 뜻과(이런 의미에서 釋敎라고도 한다) 부처가 되기 위한 교법이라는 뜻이 포함된다. 불(佛:불타)이란 각성(覺性)한 사람, 즉 각자(覺者)라는 산스크리트 ·팔리어(語)의 보통명사로, 고대 인도에서 널리 쓰이던 말인데 뒤에는 특히 석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불교는 석가 생전에 이미 교단(敎團)이 조직되어 포교가 시작되었으나 이것이 발전하게 된 것은 그가 죽은 후이며, 기원 전후에 인도 ·스리랑카 등지로 전파되었고, 다시 동남아시아로, 서역(西域)을 거쳐 중국으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왔고, 한국에서 일본으로 교권(敎圈)이 확대되어 세계적 종교로서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14세기 이후로는 이슬람교에 밀려 점차 교권을 잠식당하고 오늘날에는 발상지인 인도에서는 세력이 약화되었으나, 아직 스리랑카 ·미얀마 ·타이 ·캄보디아, 티베트에서 몽골에 걸친 지역, 한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지역에 많은 신자가 있으며,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다.
다른 여러 종교와 비교하여 불교가 지니는 중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신(神)을 내세우지 않는다. 불타가 후에 이상화(理想化)되고 확대되어 절대(絶對) ·무한(無限) 및 그 밖의 성격이 부여되고, 각성과 구제의 근거가 되고 있으나 창조자 ·정복자와 같은 자세는 취하지 않는다. ② ‘지혜(智慧)’와 ‘자비(慈悲)’로 대표된다. ③ 자비는 무한이며 무상(無償)의 애정이라 할 수 있어, 증오(憎惡)나 원한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일반적으로 광신(狂信)을 배척하고 관용(寬容)인 동시에 일체의 평등을 관철하고자 한다. ④ 지혜의 내용은 여러 가지로 발전하는데, 일체를 종(縱)으로 절단하는 시간적 원리인 ‘무상(無常)’과, 일체를 횡(橫)으로 연결하는 공간적 원리인 ‘연기(緣起)’가 중심에 있어, 이것은 후에 ‘공(空)’으로 표현된다. ⑤ 현실을 직시(直視)하는 경향이 강하다. ⑥ 모든 일에 집착과 구애를 갖지 않는 실천만이 강조되고 있다.
⑦ 조용하고 편안하며 흔들리지 않는 각성(覺性:解脫)을 이상의 경지(境地)로 삼아 이를 ‘열반(涅槃)’이라 한다. 그 교의(敎義)는 석가의 정각(正覺)에 기초를 둔다. 그러나 8만 4000의 법문(法門)이라 일컫듯이 오랜 역사 동안에 교의의 내용은 여러 형태로 갈라져 매우 복잡한 다양성을 띠게 되었다. 불(佛)도 본래는 석가 자체를 가리켰으나 그의 입적(入寂) 후 불신(佛身)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 2신(身) ·3신 등의 논, 또는 과거불 ·미래불, 또는 타방세계(他方世界)의 불, 보살(菩薩) 등의 설이 나와 다신교적(多神敎的)으로 되었다.


2. 유교 [ 儒敎 ] : 공자를 시조(始祖)로 하는 중국의 대표적 사상.

공교(孔敎) ·공자교(孔子敎)라고도 한다. 인(仁)을 모든 도덕을 일관하는 최고이념으로 삼고,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일종의 윤리학 ·정치학이며, 수천 년 동안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양사상을 지배하여 왔다.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난 공자는 대성(大聖)이었으나 고국인 노(魯)나라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15년간 여러 나라로 돌아다니며 ‘선왕(先王)의 도(道)’를 역설하였으나 끝내 그 이상을 펴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사학(私學)을 열어 많은 제자를 가르치는 한편 《시(詩)》 《서(書)》의 2경을 정리하고 예(禮) ·악(樂)을 선정하였으며 《춘추(春秋)》를 저술하고 또한 《역(易)》을 좋아하여 그 해석서라 할 수 있는 《십익(十翼)》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의 진수(眞髓)는 그가 죽은 후, 제자들이 수집 편찬한 그의 언행록인 《논어(論語)》에서 잘 나타난다. 공자는 인을 가장 중시하였으며, 인은 곧 효(孝)이며 제(悌)라 하여 인의 근본을 가족적 결합의 윤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육친(肉親) 사이에 진심에서 우러나는 애정을 강조하는 한편, 그것을 인간 사회의 질서 있는 조화적 결합의 원리로 삼고, 정치에도 전개시켰다. 그것은 춘추시대 말기의 인간주의적 풍조의 영향을 받아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도덕성에 주목하고, 거기서부터 현실사회의 혼란을 구제하려 하였다. 공자는 훌륭한 정치를 행했던 주(周)의 예악(禮樂)을 끌어들여 그 실행을 강조하면서, 예는 전통적 ·관습적인 사회규범이며 그것은 곧 인의 사회성 ·객관성을 보증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후 맹자가 나타나 인의 실천을 위한 의(義)의 덕을 내세워 인의(仁義)를 병창(倂唱)하였으며 또한 인간의 본성은 선(善)이라 하여 내면적인 도덕론을 펴고, 선한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덕치(德治)로서의 왕도론(王道論)을 주장하였다. 맹자에 의하여 유교는 뚜렷하게 내면적으로 심화되고 또 정치론으로도 정비되었으며 한편 오륜(五倫)도 이 무렵에 시작되었다. 얼마 후 순자(荀子)가 나타나 맹자의 내면화에 반대이론을 내세웠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악(惡)이므로, 외면적 ·객관적인 예에 의해서만 수양이 완성된다고 생각하여 예를 강조하였다. 또 공자와 맹자가 존중하던 불가지(不可知)인 하늘의 존재를 추방하고 인간의 독자적 입장을 주장하였다.

1. 한대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유교는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대박해(大迫害)를 받아 한때 소멸하는 것도 같았으나 한(漢)나라 무제(武帝)에 이르러,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유교는 국가적 교학이 되어 그 지위를 굳혔다. 공자를 존숭하고, 정치계급은 오경(五經:역경 ·서경 ·시경 ·예기 ·춘추)을 읽도록 요청하여 유교는 왕조의 체제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전한(前漢) 때는 어떤 1경(經)에만 치중하는 학풍이 일더니 후한시대에는 여러 경서를 종합 검토하고 그것을 주석(註釋)하는 훈고학(訓學)이 성행하여 이것이 당대(唐代)로 계승되었다.

2. 신유교
신유교(新儒敎)란 도학(道學) ·주자학(朱子學) ·양명학(陽明學) 등을 이르는 말이다. 후한 말기에 전래한 불교와, 노장사상(老莊思想)에 바탕을 둔 도학은 육조시대에 융성하여 서로 항쟁하는 가운데, 유교는 침체상태를 보였으나 당나라 때 도학의 선구자인 한유(韓愈)가 유교의 도통을 밝히고 숭유척불(崇儒斥佛)의 기치를 들었다. 이어 북송(北宋)에 이르러 주돈이(周敦) ·정호(程顥) ·정이(程) 등이 나와 과거 훈고에만 치중하던 유교를 형이상학적인 면에서 다루어 크게 부흥시켰고 이어 남송의 주자(朱子)는 이들 학설을 집대성하여 주자학을 확립시켰다. 그는 5경(經)에 대신하여 4서(四書:대학 ·논어 ·맹자 ·중용)를 존중하고 이에 대한 《사서집주(四書集註)》를 저술하여 명성을 남겼으며 그 밖에도 《역본의(易本義)》 《시집전(詩集傳)》 등 많은 저술활동을 하였다.
주자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입각하여 이(理)와 기(氣)를 구분하고, 이를 만물의 근본이 되는 형이상의 도(道)라 하였으며, 기를 만물의 도구(道具)가 되는 형이하의 기(器)라 하였다. 그러나 주자와 거의 같은 시대의 육상산(陸象山)은 견해를 달리하여 ‘심즉리(心卽理)’의 일원론(一元論)을 주장하였다. 그의 육학(陸學)은 심학(心學)이라고도 하였으며 이것은 명나라의 왕양명(王陽明)에게로 계승되어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양명학이 정립되었다.

3. 몰락
청대(淸代)에 이르자 유교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표방하는 고증학(考證學)이 대두하여 공허한 이론에만 치중하는 송학(宋學:주자학 ·양명학)을 물리치고 고정(考訂) ·교감(校勘) ·훈고를 통하여 고전(古典)의 참뜻을 이해하려 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아편전쟁을 계기로 중국의 유교는 종말기를 맞이하였다. 열강의 침략, 청조(淸朝)의 부패에 궐기한 중국인은 많은 개혁안을 제출하였으며 그 중에서 공양학파(公羊學派)인 캉유웨이[康有爲] 등은 유교의 변법자강책(變法自强策)을 주장하여 근대국가로의 탈피를 꾀하였으나 수구파(守舊派)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그 후 유교는 밀려드는 근대과학에 자리를 양보하였다.
특히 신해혁명(辛亥革命) 이후 전개된 근대화운동은 봉건체제의 모든 것을 부정하여, 유교도 그 정신적 지주였다는 뜻에서 적대시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운동의 열기가 식고 평정을 되찾으면서 전통문화가 재검토되었고, 그 결과 유교도 앞으로의 문화창조에 기여할 수 있는 요소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화된 이후 유교는 탄압되고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4. 한국
유교가 한국에 전래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시대 때, 당(唐)나라의 학제인 국학(國學)을 받아들인 때를 그 기원으로 삼는다. 즉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에 태학(太學)을 세웠으며, 백제는 국학을 세운 기록은 없으나 285년(고이왕 52)에 이미 왕인(王仁) 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한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유학이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에도 오래 전부터 전래된 것 같으나 국학의 건립은 훨씬 늦어 682년(신문왕 2)에야 실시되었다. 그 후 신라에서는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내 학문을 장려하고 최치원(崔致遠)은 당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을 떨쳤으며 설총(薛聰)은 이두(吏讀)를 창시하여 구경(九經)을 해석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유교는 유능한 관리를 양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고, 부차적으로는 지도계급으로 하여금 경사(經史)에 통하게 하고 사부(詞賦)와 문장을 능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태조의 숭불정책(崇佛政策)으로 유교가 한때 부진하였다가 992년(성종 11)에 비로소 국자감(國子監)을 세웠고 문종 때는 최충(崔沖)이 9재(齋)를 설치하고 학도를 가르쳤다. 그러나 무관의 발호와 계속된 전란으로 유교는 240년간이나 다시 침체상태에 빠졌다가 제25대 충렬왕 때 안향(安珦)이 왕을 따라 연경(燕京)에 다녀오면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입수해 온 후 정부에 건의하여 국학을 세우고 대성전(大成殿)을 건립하여 공자를 존숭하는 등 유교 부흥에 힘썼다. 그는 또한 한국에 주자학(朱子學:性理學)을 처음 수입하였으므로 주자학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그의 문하에는 백이정(白正) ·우탁(禹倬) ·권부(權溥)등이 있어 모두 주자학 부흥에 힘썼으며, 그 학통은 고려 말의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정몽주(鄭夢周) 등에게로 전승되었다.
특히 그 중에서 정몽주는 성리학에 정통하고 도덕과 경륜(經綸)에도 일가를 이루어 동방 이학(理學)의 조(祖)라 불린다. 조선시대에는 개국 초부터 태조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유교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유교의 기초를 처음으로 확립한 학자는 정도전(鄭道傳)이다. 그는 《불씨잡변(佛氏雜辨)》 등의 논설을 통하여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같은 시대의 유학자 권근(權近)도 많은 저술로 이에 동조하였다. 한편 고려의 유신(儒臣)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종직(金宗直)은 당대의 유종(儒宗)이 되었고, 그의 문인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은 가장 유명하였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희생되었다. 다시 조광조(趙光祖)가 유도(儒道)의 정치를 펴려 하였으나 기묘사화로 실패하고 많은 사류(士類)도 함께 화를 입었다. 이어 을사사화에는 이언적(李彦迪) ·노수신(盧守愼) 등의 거유(巨儒)가 유적(流謫)되었으며 거듭되는 사화로 유학자들은 차차 벼슬을 단념하고 산림(山林)에 숨어 오로지 학문과 후진양성에 전념하게 되었다.
서경덕(徐敬德) ·조식(曺植) ·김인후(金麟厚) 등은 그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서경덕은 종래 답습하여 오던 주자의 이기이원론에 대하여 중국 장횡거(張橫渠)의 태허설(太虛說)을 이어받아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주장함으로써 한국 주기론(主氣論)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 후 명종 ·선조 때에는 많은 유학자가 배출되어 한국 성리학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이황(李滉:퇴계) ·이이(李珥:율곡)가 가장 뛰어나 이황을 ‘동방의 주부자(朱夫子)’, 이이를 ‘동방의 성인(聖人)’이라 할 만큼 그 학풍은 후대의 학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황은 4단 7정(四端七情)의 이기이원론을 주장하여 많은 저술로써 이를 확립하였고, 그 학설은 일본에 전해져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를 비롯한 여러 주자학자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쳐 동양사상에서 한국의 성리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그의 문하에서는 조목(趙穆)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정구(鄭逑) 등 저명한 학자가 배출되었다. 한편 이이는 주기설(主氣說)을 확립시켰으며 그 학설은 김장생(金長生) ·이귀(李貴) ·조헌(趙憲) 등을 거쳐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등에게 이어졌다. 이황의 학통은 이상정(李象靖) ·이진상(李震相) 등이 적극 발전시켰으며, 송시열의 문인 권상하(權尙夏)의 제자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은 인(人) ·물(物) ·성(性)에 대한 이론을 달리하여 낙론(洛論)과 호론(湖論)으로 갈리어, 이 무렵부터 유교는 별다른 발전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당쟁(黨爭)과 예송(禮訟)의 소인(素因)이 되었다. 그리하여 공리공론만 거듭되는 순리학파(純理學派)를 대신하여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을 주장하는 실학파(實學派)가 대두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로는 유형원(柳馨遠) ·이익(李瀷) ·박지원(朴趾源) 등이 있다.
그러나 이 학파는 때마침 동점(東漸)한 서학(西學)에 물들었다는 혐의로 조정의 탄압을 받아 끝내 탁월한 경륜을 펴지 못하고 쇠퇴하였다. 그 후 성리학이 부흥하는 기세를 보였으나 이들은 여전히 여러 학설로 갈리어 자기 학파의 학설만 주장하였다. 조선 후기의 이같은 유학자들의 지나친 형식과 체면에 집착하는 완고와 고집은 한국 개화에 커다란 장애가 되었으며 다만 일제의 침략으로 국세가 위급하자 송병선(宋秉璿) ·최익현(崔益鉉) ·조병세(趙秉世) ·민영환(閔泳煥) ·이준(李儁) ·안중근(安重根) 등의 유학자가 앞장서서 애국의 대의를 펼쳤다. 8 ·15광복 후 전국 유림의 조직체인 유도회(儒道會)를 결성하고 성균관대학을 창립, 유교정신에 의한 새로운 민주교육이 실시되었다.



3. 그리스도교 [ Christianity ] : 1세기에 태어난 나자렛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로 믿는 종교.

불교·이슬람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종교를 이룬다. 원어(原語)는 크리스티아노스(Christianos)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는데, 그 뜻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기점과 근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며 이 인류의 구원자로 믿는 것을 신앙의 근본교의로 삼는다.
그리스도교는 역사적으로 변천을 겪는 동안 크게 보아 로마가톨릭교회·동방정교회(正敎會)·프로테스탄트교회의 세 갈래로 갈라졌으며, 이 밖에도 동방정교회 내의 몇몇 독립적인 교회들과 프로테스탄트교회 내의 수많은 종파들이 세계 곳곳에 퍼져 있다.

4. 천도교 [ 天道敎 ] : 조선 후기 1860년에 최제우(崔濟愚)를 교조로 하는 동학(東學)을 1905년 제3대 교조 손병희(孫秉熙)가 천도교로 개칭한 종교.

최제우는 전통적 유교 가문에서 태어나 지방의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조선 후기는 국내적으로는 외척(外戚)의 세도정치와 양반·토호들이 일반 백성에 대한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자행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민란이 각지에서 발생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의 무력침략의 위기를 맞던 시대였다.
최제우는 21세에 구세제민(救世濟民)의 큰 뜻을 품고 도(道)를 얻고자 주류팔로(周流八路)의 길에 나서 울산 유곡동 여시바윗골, 양산 천성산 암굴에서 수도하고 도를 갈구하여 1860년 4월 5일 '한울님(하느님)'으로부터 인류 구제의 도인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게 되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도의 이름을 '무극대도'라고만 하였다. 최제우가 포교를 시작하여 많은 교도들이 모이자, 관(官)과 유생들이 혹세무민한다는 구실로 탄압하여 부득이 전남 남원 교룡산성(蛟龍山城)으로 피신하였다. 이 때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많은 저술을 하였다.
특히 1862년 1월경에 지은 《논학문(論學文:東學論)》에서 처음으로 무극대도는 천도(天道)이며 그 학은 서학이 아닌 ‘동학(東學)’이라고 천명하였다. 이로써 동학이라 지칭하게 되었다. 이 해에 다시 경주의 박대여(朴大汝) 집에 머물면서 포교하자, 충청·전라 지방에서까지 수천 명의 교도들이 모여들자 교도들을 조직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1862년 12월 동학의 신앙공동체인 접(接)제도를 설치하고 접주(接主) 16명을 임명하였다. 최제우는 1863년 3월 경주 용담정으로 돌아와 대대적인 포교활동에 나섰다. 접주들로 하여금 교도들을 수십 명씩 동원하여 용담정에 와서 강도(講道)를 받게 하는가 하면, 동학 교단 책임을 맡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해월(海月) 최경상(崔慶翔:時亨)을 선임하였다.
한편 관의 탄압을 예견하고 그 해 8월 14일에는 도통(道統)을 최경상에게 완전히 물려주었다. 날이 갈수록 동학 교세가 커지자, 놀란 조정은 그해 12월 10일에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를 파견, 최제우를 체포하여 이듬해 3월 10일 대구에서 정형을 집행하여 최제우는 41세를 일기로 순도하였다.

1. 종교사상
동학, 즉 천도교는 신, 즉 한울님을 모시는 유신적(有神的) 종교인데, 신관을 비롯하여 인간관·윤리관·역사관·수행체제가 모두 독특하다.
① 신앙대상인 한울님(天主)은 유일신으로 인격적이며 모든 사람들이 모시고 있는 초월적이면서 내재하는 신이며, 아직도 참뜻을 펴려고 애쓰는 신이다. 그러나 창조주나 심판의 신은 아니다. 그리고 신은 영적인 것과 기적(氣的)인 것을 아울러 갖고 있다고 본다.
② 인내천(人乃天)으로 대표되는 천도교의 인간관은 사람을 한울님처럼 존엄한 존재로 본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존엄한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사람의 존엄성이 곧 한울님의 존엄성과 같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인간평등과 존엄성을 신앙의 실천적인 핵심으로 삼는다.
③ 사인여천(事人如天)으로 대표되는 윤리관은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섬기듯이 하자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보고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처럼 섬겨야 한다. 1920년대의 천도교가 어린이운동의 목표로 어린이의 윤리적 해방을 내세웠던 것도 역시 어린이도 한울님을 모셨다고 보는 천도교의 신앙에서 연유된 것이다.
④ 천도교는 개체 영(靈)의 존재를 인정하지도, 부인하지도 않았으나 영생론을 주장한다. 영생은 종교적인 높은 체험의 경지에 이르면 가난 속에서도 행복을 느끼며, 시간 속에서도 영원을 살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⑤ 천도교의 역사관은 발전론과 순환론을 겸한 파동형(波動形:起伏盛衰論) 사관으로 보며, 문명의 단위를 동·서로 양분하여 지금은 대전환의 시기인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시점으로 본다. 즉 지금까지의 문명은 사라지고 전혀 새로운 문명이 전개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⑥ 천도교는 현세주의적인 종교로서 모든 사람이 한울님처럼 대접받을 수 있는 정치·경제·문화 체제가 이루어지도록 힘써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자는 종교이다. 그 과정에서 평등한 인간구제, 부유한 사회구제를 위한 정신개벽·민족개벽·사회개벽 운동을 추진함으로써 사회변동을 위한 현실참여에 적극적이 된다.

2. 수행체제
천도교의 수행은 개인적으로는 청원(請願)과 기복(祈福)이 수반되지만, 신앙체제를 확립하여 도성입덕(道成立德)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는 데 있으며, 집단적으로는 신앙공동체를 이루면서 희생·봉사로써 보국안민(輔國安民)·포덕천하(布德天下)·광제창생(廣濟蒼生)에 이바지하는 데 두고 있다.
그의 실행을 위해서 성(誠)·경(敬)·신(信)을 실천 윤리의 준칙(準則)으로 삼고 있으며, 종교행위로는 ① 주문(呪文), ② 청수(淸水), ③ 심고(心告), ④ 경전봉독(經典奉讀), ⑤ 기도, ⑥ 성미(誠米), ⑦ 시일식(侍日式), ⑧ 기념식 등이 있다. 주문은 본 주문이 13자로서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이며, 강령주문(降靈呪文)은 8자로서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이다.
이 글을 수없이 반복하여 외우는데, 그 목적은 마음을 닦고(修心), 기운을 바르게(正氣) 하는 데 있다. 심고는 “한울님 감응하시기를 축원하면서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다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청수는 모든 제례의식 때 깨끗한 물을 그릇에 떠다 바치는 것이며, 경전봉독은 《천도교 경전》(《東經大典》과 《龍潭遺詞》)을 경건하게 읽는 것이다. 기도는 심고 ·청수봉전(奉奠) ·주문 읽는 것을 시간과 날짜를 정해놓고 행하는 것을 말하며, 성미는 우리들이 끼니마다 먹는 음식을 한울님의 녹(祿)이라고 생각하여 끼니마다 쌀 등을 한 숟가락씩 뜨는 것을 말하는데, 이를 모아서 교단에 바친다.
시일식은 1주일에 한 번(일요일에 교당에서 행함) 집회하여 의식을 행하는 것이며, 기념식은 창도일(創道日) 등 기념할 만한 날에 의식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 중에서 주문·청수·시일·성미·기도를 특히 오관(五款)이라 하여 교인의 의무로 정하고 있다.
제사의식은 향아설위(向我設位)라 하여 제수를 모시는 사람을 향해 차려놓는데, 이것은 조상이나 스승님의 영(靈)도 내 안에 모셔져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끝으로 천도교의 수행기본(修行基本)은 기원만도, 깨달음만도 아닌 ‘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의 은총과 자력을 겸하는 데 있다.

3. 약사
천도교는 관의 탄압으로 최제우가 순도한 이후 교세가 급격히 줄어들었으나 제2세 교조 해월 최경상의 노력으로 다시 복구, 1870년경에는 신도수가 수천에 이르렀다. 그러나 영해지방에서 이필제(李弼濟)가 주축이 되어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을 일으켜 1871년 3월 10일 군아(郡衙) 습격과 8월 2일의 문경 초곡 군기고 습격사건으로 300여 교도가 희생되어 또다시 타격을 받았다. 1875년 최경상은 이름을 시형(時亨)으로 고치고 강원도 지방과 충청도 지방의 포교를 시작, 많은 교도를 얻었다. 이때 최시형은 양천주(養天主),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실천적 수도요령과, 위생 등 생활의 합리화를 내세워 민중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리하여 1880년에는 강원도 인제와 단양 천동에서 《동경대전(東經大典)》과 《용담유사(龍潭遺事)》를 최초로 목판 간행하여 경전종교로서의 기틀을 세웠다. 이후 충청도 지방으로, 1889년경에는 교세가 전라도 지방까지 뻗치기에 이르렀다.
1892년경에 이르자 신앙자유를 내세워 충청도 공주와 전라도 삼례에서 대대적인 민중시위를 벌였는데 이후부터 교세는 급격히 늘어났다. 이듬해인 1893년에는 서울 광화문 앞에서 정부를 상대로 한 종교 자유화와 교조신원을 소청하였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자 3월에는 충청북도 보은 장내리에서 수만 교도들이 모여 보국안민·척왜양이(斥倭洋夷)를 내세운 반봉건·반제국주의적 정치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 운동 역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894년 3월에 이르러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全琫準) 고부 접주에 의해 고부민란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전봉준·김개남(金開南)·손화중(孫華中)·김덕명(金德明) 등 지방의 동학 대접주가 공동으로 동학군을 동원, 동학농민운동으로 발전시켰다.
5월에는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이루어져 53곳에 집강소(執綱所:군사위원회 같은 것)가 설치되어 폐정(廢政)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청·일전쟁이 일어나 결국 청국이 패퇴하기 시작하자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을 강점하려 들었는데 이때 최시형은 전 동학군에 기포령(起包令)을 내려 반제국주의 무력항쟁에 나서도록 하였다. 그러나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에게 패퇴, 수만의 희생을 내고 막을 내렸다. 이로부터 4년 뒤인 1898년에는 최시형마저 체포되어 6월에 순도함으로써 동학(천도교)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1900년에는 지도급 인물 중 손천민(孫天民)과 김연국(金演局)이 체포되어 손천민이 순도하자, 위기를 느낀 제3세 교조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는 1901∼1902년에 망명길에 나서 상하이[上海]까지 갔다가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으로 일본에서 1906년 1월까지 머물렀으며,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국내 동학군을 동원하여 진보회(進步會)를 조직, 10월 8일 360곳에서 30만 명이 색옷입기와 단발을 단행하는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한국 근대화의 민중운동이었으나 동학군이 주동이 되었음이 세상에 알려지자 곧 탄압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국내 지도자인 이용구(李容九)가 단독으로 일진회(一進會)와 합동, 노골적인 친일행위를 자행하였다.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근대적 종교체제를 갖추는 데 힘썼다. 1906년 1월 말경에 귀국하여 2월부터 천도교 중앙총부를 설치하고, 9월에는 이용구를 포함한 교도 62명을 출교 처분하였다.
1910년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자 종교적 수행을 강화하는 한편 보국안민이라는 슬로건 아래 민족해방운동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국민교육을 위해 800여 개의 강습소를 설치, 기본교육에 힘썼으며 보성전문학교·동덕여학교를 경영 또는 보조하는가 하면, 16개 학교에 보조금을 제공하였다. 1919년 3월 1일 천도교는 그리스도교계·불교계 인사 및 학생들과 더불어 독립운동을 위한 대민중시위를 주도하였다. 1922년 5월 19일 제3세 교조인 의암 손병희가 생애를 마치자 한때 교세는 주춤하였다. 그러나 청년들에 의해 1919년 9월에 발족한 천도교 청년교리 강연부를 토대로 1920년 3월에 천도교청년회를 조직, 종합잡지 《개벽(開闢)》을 간행함으로써 문화운동이 시작되었고, 1921년에는 어린이운동의 선구자인 천도교소년회를 발족시켰다. 1922년 9월에는 천도교청년회를 천도교청년당(黨)으로 발전시켜 여성운동·농민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때 천도교가 간행한 잡지만도 《개벽》을 비롯하여 《신여성》 《어린이》 《학생》 《농민》 《천도교 월보》 《신인간》 《별건곤(別乾坤)》 《자수대학강의》 등이 있었는데,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서 1935년 이후부터는 거의 마비상태에 들어갔다. 그러자 천도교 청년들은 오심당(吾心黨:22년 조직)을 조직, 1935∼1936년에 조선독립운동을 꾀하다 발각되어 많은 인사가 체포·구금되었고, 1938년에는 제4세 대도주 춘암(春菴) 박인호(朴寅浩)가 주도한 멸왜기도사건(滅委祈禱事件)이 발각되어 수십 명이 체포·구금되기도 하였다.
1945년 8·15광복 이후 국토가 양단되자 북한에서는 천도교 북조선종무원과 천도교 청우당(靑友黨)을 조직, 활동하였는데 280만 교인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1948년 북한측이 유엔감시하의 총선거를 반대, 이미 분단정권을 세우고 국토 분단을 영구화하려 하자, 1948년 2월에 3·1재현운동, 즉 남북통일 총선거운동을 전개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1만 700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로부터 조직적인 탄압을 받았는데 그래도 많은 교도들은 영우회(靈友會)라는 이름 아래 국토통일운동을 계속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북한에서는 많은 교도들이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5. 대종교 [ 大倧敎 ] : 단군(檀君)숭배를 기초로 하는 민족종교.

근본 교리는 성(性) ·명(命) ·정(精)의 삼진귀일(三眞歸一)과 지(止) ·조(調) ·금(禁)의 3법이다. 대종교는 종교로 출발하였지만 그 시기가 바로 일제(日帝)가 한국을 강점(强占)할 때였으므로, 종교로서보다는 항일독립운동에 더 많은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교조(敎祖) 나철(羅喆:1863∼1916)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간섭과 강박이 날로 심해지자 이를 항의하고자 3차에 걸쳐 도일(渡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여 구국운동이 몇 사람의 애국정객만으로는 이룩될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국가의 기틀을 튼튼히 하고 민족을 부흥시키는 원동력은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있다고 보고, 1909년 동지 오기호(吳基鎬) 등 10명과 함께 서울특별시 종로구 재동(齋洞)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를 공포함으로써 고려시대 몽골의 침략 이후 700년간 단절되었던 국조 단군을 숭앙하는 단군교를 창시하였다.
시교(始敎)한 지 1년 만인 1910년, 교도수는 2만여 명으로 늘었고, 교명을 ‘대종교’로 개칭하는 한편, 같은해 만주 북간도(北間島)에 지사(支司)를 설치하였다가, 1914년에는 대종교 본사(本司)를 이 곳으로 옮겨 포교 영역을 국내와 만주 일대로 확대시켰다. 1916년 나철이 죽자 제2세 교주 김헌(金獻)이 취임하였는데, 그는 대종교의 종리(倧理)라 할 수 있는 《신단실기(神檀實記)》와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저술하고, 3 ·1운동 이후 만주로 들어가는 동포들을 포섭하

200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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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규와 송규

연규하고 송규가 있었는데요 연규의 별명은 코찌질이에요. 생긴건 이준기 랑은 전혀 안닮았구요.. 구봉서 닮았어요 송규는 별명은 송팅이 구요.. 생긴건 호로비츠 닮았어요...

우리 아기 이름을 지어주세요...

... 연국 연규 연기 연무 연섭 연세 연수 연우 연욱 연웅 연재 연준 연찬 연태 연호 연효... 손호 송규 송균 송기 송빈 송욱 송웅 송원 송준 송태 송학 송호 송환 수건 수동 수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