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러건트 유니버스』에 이은 초대형 베스트셀러!
2002년 올해의 책(《KBS TV, 책을 말하다》《조선일보》《동아일보》《한겨레》 등)으로 주목 받았던 『엘러건트 유니버스』에 이어 승산이 새롭게 내놓는 야심작. 『우주의 구조』는 출간된 이후, 2005년 6월 현재까지 줄곧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로 선정되는 등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승산에서는 2005년 세계물리의 해에 맞춰 세계적인 수준의 다양한 물리책을 선보임으로써(근간 예정, 『천재: 리처드 파인만의 삶과 과학』,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Ⅱ』 등) 학생들에게는 순수자연과학에 대한 흥미를 고취시키고, 일반인들에게는 첨단과학에 대한 고급정보를 주고자 한다.
가장 친숙하면서도 가장 낯선 물리학의 영원한 수수께끼―시간과 공간
저자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오래된’ 테마를 잡고 이야기를 끌어 나간다. 그것은 그가 인간의 사고 자체를 다루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간과 공간은 ‘원자설(물질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 개념으로서)’과 함께 가장 오래된 과학적 주제이자, 철학적 주제이다. 물론 저자는 ‘과학적인 방식’으로 접근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노라면, 이것은 일종의 철학이란 생각마저 든다. 시간과 공간은 인간의 사고 가장 깊숙이 내재된 관념이다. 어떤 것을 상상하더라도 그것에는 마치 그림의 배경처럼 시간과 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칸트는 그래서 시간과 공간을 선험적(先驗的)인 것으로 보았다. 인간의 인식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배경 내에서만 이루어지고, 이러한 인식의 한계는 인간이 ‘물자체(物自體)’를 파악할 수 없게 하는 한계가 된다고 규정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물리학은, 그리고 브라이언 그린은 바로 그 ‘배경’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시간과 공간에 대해 물리법칙이 말하고 있는 것. 그것을 쫓아가다 보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깨닫게 된다. 즉 브라이언 그린에 따르면, ‘고정적인 시간과 공간’이라는 ‘배경’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과학적 관점(뉴턴)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가 따라잡고자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진정한 실체이며, 그러한 ‘배경으로부터 독립적인(background independent)’ 이론이다.
저자는 “진정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며, 그것은 바로 ‘자살’에 관한 것이다”라는 카뮈의 문장으로 그의 글을 시작한다. 실존주의 철학의 우두머리를 불러들인 것은 아마도 ‘삶’이라는 문제 앞에서 ‘진리’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라는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자, 일반 독자들(삶의 문제에 매몰된)을 물리학의 세계로 끌어들이려는 전략쯤일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카뮈가 자신에게 던진 화두를 정리한다. “물리학이 더욱 발전하면 공간의 차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것이고 신경생리학이 발전하면 두뇌의 구조가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질 것이다…그러나 이 모든 정보들이 과연 인간의 삶과 인간이 추구하는 진리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인가? 카뮈는 이 점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진리란 사고의 영역에 존재하며, 오로지 경험에 의해 그 실체가 밝혀진다는 것이 카뮈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긴, 반경 6,370km 남짓한 지구의 표면 위에서 100년 이내의 짧은 생을 살다 가는 인간이 우주적 스케일의 시간과 공간을 ‘취미 삼아’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행동이라 할 수 없다. —역자 후기 중
같은 초끈이론 학자이기도 한 역자의 후기까지 접하게 되면,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우리는 왜 시간과 공간, 우주의 본질을 알려고 하는 것일까? 물리학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철학적 주제에 대해 첨단물리학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올해 이 한 권의 과학책을 읽어 보기 바란다.
시간은 왜 미래로만 흐르는가? 공간은 왜 3차원처럼 보이는가?
책에서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듯, 그는 어쩔 수 없는 ‘플라토니안(platonian)’이다. 그는 인간의 ‘생존’보다는 우주적 진리에 더 관심이 있다. 다만 그가 진리에 도달하는 수단으로 택한 것은 철학이 아닌, ‘수학과 과학’이다. 그리고 그 위대한 도구는 ‘인간의 오성(五性)’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진정한 시간과 공간의 의미’에 대해 묻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당연하게만 생각하는 질문들을 던지려고 하는 것이다—시간은 왜 미래로만 흐르는가? 공간은 왜 3차원처럼 보이는가?
끈이론 학자, 젊은 혁명론자(new revolutionaries)
이 책은 미국에서 신구(新舊)세대 과학자 간의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파인만과 함께 양자전기역학의 총아(寵兒)였던, 지금은 80대의 원로과학자이자 대중저술가로 활약 중인, 프리먼 다이슨(Freeman Dyson)은 《The New York Review of Books》에 기고한 『우주의 구조』 서평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영국 자유당의 황금기였던,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이전에 허버트 애스퀴스는 귀족적인(patrician) 총리였고, 윈스턴 처칠은 시끄럽고 다루기 힘든 젊은 정치인이었다. 하원의원의 질의시간이면, 처칠은 자주 도발적이고 난처한 질문들로 애스퀴스를 괴롭혔다. 한번은 이러한 처칠의 맹공이 끝나고, 애스퀴스는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나는 단지 하나만이라도, 저 젊은이가 모든 것에 대해 아는 것처럼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I wish I knew as much about anything as that young man knows about everything).” 우주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청중을 사로잡는(eloquent) 언어로 펼쳐 보이는 브라이언 그린의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것은 바로 애스퀴스가 처칠에게 느꼈던 감정이었다. 애스퀴스는 내가 이 책에 대해 느꼈던 반응을 정확하게 표현했던 것이다.
다이슨은 스스로를 보수주의자(conservatives)라고 칭하면서 젊은 혁명론자들(young revolution‐aries)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이 논의 속에는 양자역학과 끈이론이라는 이론 간의 단절이 흐르고 있다. 이를 이해하려면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과 양자역학, 그리고 끈이론의 탄생배경을 알아야 한다.
중력과 양자역학을 하나로―통일장 이론(unified theory)
물리학의 역사는 통일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전물리학의 아버지, 뉴턴은 ‘만유인력’의 이름으로 돌멩이부터, 천체 사이의 움직임까지를 아우르는 운동법칙을 세웠다. 맥스웰은 전기력과 자기력이 하나의 힘이라는 것을 밝혀냈으며, 여기에 아인슈타인은 시공간을 통폐합한 새로운 중력이론을 주창했다. 특히 그의 유명한 공식인 ‘E=mc2’는 물질과 에너지의 관계까지도 통합시키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말년에 이러한 모든 힘들을 통합하는 단 하나의 이론―‘통일장 이론’을 만들어 내고자 온 힘을 기울였다.
현대물리학의 가장 강력한 두 가지 도구로 일컬어지는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은 서로에 대해 배타적이다. 애초에 이 이론들은 서로 적용범위가 달랐는데, 상대성이론이 다루고 있는 세계는 ‘중력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이다. 그것은 ‘사과의 떨어짐’을 ‘지구의 질량에 의해 휘어진 시공간의 곡률이 일으키는 사건’으로 이해하는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 양자적 불확정성은 그 의미를 잃는다. 양자역학이 다루고 있는 세계란 아주 작은 규모(플랑크 길이, 약 10-33cm)의 영역으로, ‘불확정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계이다. 고전역학이 어느 순간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알 수 있으면, 그 입자의 과거와 미래를 모두 알 수 있다고 한 반면, 양자역학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확률뿐이라는 것이 달랐다. 유명한 얘기지만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놀이를 즐기지 않는다”는 말로 양자역학을 부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험결과는 양자역학을 지지하는 쪽으로 밝혀졌고, 아인슈타인의 ‘통일장 이론’은 점차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던 것이다.
끈이론(책에서는 ‘초끈이론’과 동의어로 사용됨. ‘초끈이론’은 ‘초대칭(supersymmetry)이 도입된 끈이론’의 줄임말이다)은 이러한 맥락에서 다시 이 두 이론을 통합시키려고 한다. 때문에 끈이론을 ‘모든 것의 이론(TOE: theory of everything)’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앞서 말했듯이 이와 같은 끈이론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양자역학의 이론가들이다. 양자역학의 황금기를 체험했던 이들은 양자역학만으로, 혹은 상대성이론만으로도 우주에 대한 많은 사실들을 알아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에 만족해하였다.
브라이언 그린은 어떤 이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의 새로운 중력이론 이후에도 여전히 뉴턴이론은 우주선을 쏘아 올릴 때나, 천체간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데 유용하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도 그의 논지는 일관되어 있다. 그는 유명한 초끈이론가지만 초끈이론만을 설명하는 데 내용을 투자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뉴턴에서부터 시작한다. 그가 뉴턴부터 시작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관념(여기서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즉 선입견과 가장 합치되기 때문이다.
사실 ‘절대불변의 고정된’ 시간과 공간의 개념 자체가 절대적인 관념은 아니었다. 고대인의 순환적 시간관을 굳이 들지 않더라도, 라이프니츠와 마흐 같은 과학자들 역시 상대적 공간의 개념을 받아들였다. 그것이 아인슈타인에 와서 ‘시공간(spacetime)’으로 통합되었던 것이다. 또한 양자역학은 고전적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 균열을 일으켜, 아주 작은 영역에서는 전-후, 좌-우, 상-하(공간 관념), 선-후(시간 관념) 등의 구분을 없애버렸다.
그것을 너의 할머니에게 설명할 수 없다면, 너는 그것을 진정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브라이언의 그린 특유의 입담은 ‘시간과 공간의 과학적 역사’라는 쉽지 않은 주제를 명쾌하게 풀어가고 있다. 그의 책에 대해 가장 자주 듣는 평가 중의 하나가 ‘핵심을 피하지 않으면서도 명쾌한 설명’이라는 것이다. 교양과학도서로서의 한계와 이론물리학자로서 물리학의 정수(精髓)를 담아내려는 노력 사이에서, 그는 ‘수식 없는 물리학’이란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의 고뇌는 15장에서 잠깐,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몇 년 전에 내가 『엘러건트 유니버스』를 집필했을 때에도 어머니는 처음 한두 페이지를 읽더니 머리가 아프다며 더 이상 읽기를 포기하셨다.” 일반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수학 대신 그가 택한 것이 바로 비유이다. 그의 전작에서도 그랬지만, 두 번째 책에서는 더욱 탁월한 비유들을 만나 볼 수 있다. 그의 첫 작품을 읽어보지 않았다면, 혹은 사 놓고 읽어 보지 않았다면, 이 책을 먼저 읽어 보길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