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말

우리나라말

작성일 2006.02.20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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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은 세종대왕이 만드신 훈민정음이라는것은

누구나가 아는 사실인데요.....

문득 이런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문자말고 ......대화를 나누는 우리 말은 언제부터 사용이

되었는지가 궁금해지네요.

결론적으로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기전에도 우리말은 사용했을것이고,

단지 문자로 표현을 하지못했다는것이겠지요.

과연 ,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말은 언제부터 사용했을까요?

 


#우리나라말 #우리나라말 사전 #우리나라말이 어려운 이유 #우리나라말 크기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한국의 한문에 대해 궁금하신 점은

가림토문자와 은나라의 갑골문자에 대해 이해하시면 풀 수 있습니다.

검색으로 님의 궁금증을 풀어 보실 수 있으니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저도 흥미가 있어서 찾아 보았습니다.

다음은 가림토문자와 갑골문자 및 은나라에 대한 자료입니다.



hyg123456님의 답변


가림토(加臨土) 글자가 만들어지고 사용되었던 곳

1.

강도(江都:江草)의 해운당에서, 또는 선천(宣川)의 묘향산 단굴암(檀窟庵)에서 계연수(桂延秀)가 저술했다고 알려진 한단고기(桓檀古記:소도경전본훈)에 가림토(加臨土:加臨多)의 38자(字) 정음(正音) 부호가 나온다.

이태백전서(李太白全書)의 기록(옥진총담)을 빌어 대진국(大震國:渤海)에서 가림토 정음표기로 당(唐)나라에 글을 보낸바 있었는데, 조정에서 해독하는 사람이 없어 이태백이 해독해주었다는 내용도 함께 실려있다.

대진국에서 당(唐)에 보낸 글에대한 이태백의 해독은, 일본서기 민달왕(敏達王) 원년(AD572)에 고구려가 국서를 일본에 보냈을 때 조정대신과 사관이 해독치 못하여 백제의 왕진(王眞)이 해독해 주었다는 내용과 유사하다.

가림토(加臨土)의 정음 부호는 15C 근세조선의 세종(世宗) 시대에 재정되었다는 훈민정음의 표음부호와 거의 같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가림토 정음(正音)의 기본부호 38자가 세종시대에 와서 28자로 축소 되었다는 성격 이외는 없다.

따라서 가림토(加臨土) 정음 글자가 훈민정음의 신(新:親)제정 28자보다 앞서 사용된 것도 틀림이 없다.

물론 한자(漢字)의 뜻을 전하고자 만들어진 표음(表音)글자의 체계로도 인정이
된다. 그러면서도 가림토 문자가 만들어지고 사용된 지역인 가림토(加臨土)가 어디였는가에 대한 해설은 있지도 않으며 고의적으로 설명을 회피한다.

가림토 지역에 대한 의문을 한단고기의 번역과 관계없는 필자에게도 많은 독자들의 질문이 쇄도 한적도 있고 지금도 질문을 한다.

이 기회에 지면을 통해 가림토(加臨土)에 대한 위치를 밝혀 궁금증을 풀어주고 싶다.

우선 계연수가 환단고기를 썼다는 강도(江都)와 선천(宣川)에 맞추어 가림토 위치를 찾아야 할 것 같다.

강도는 강화(江華)로도 쓰여지는데 강동(江東)의 화주(華週:中州)란 뜻이며, 강도는 강동(江東)의 도회지(도읍지)란 뜻이다.

강(江)은 황하의 별칭인 호강(胡江)에서 따온 것이다.

강동은 강서(江西)의 동쪽에 해당되며 하서(河西)의 동쪽에 하동(河東)이 설정된 의미와 같다.

또한 산동(山東:화산기준)도 된다.

선천의 선(宣)은 안(安)과 단( )의 합성글자로 동방( )의 북지(安)란 의미를 담고있는 글자다.

따라서 강화 및 강도·선천은 한반도의 강화도나 선천(평안도)과는 인연이 없다.

강도와 선천의 중심은 지금의 하남성(河南城) 지역의 개봉(開封)과 낙양(洛陽) 지역이며 영주(寧州)의 월국(越國)이 있었던 곳이다.

월국(越國)의 뜻은 중주(中州)·중국(中國)의 다른 표기다.

특히 선천은 녹읍(鹿邑)으로 개봉과 봉구의 다른 표현이며 일본사의 가고시마(鹿兒島)로 병칭되고 있다.


2.

가림토 문자는 대진국(大震國)에서 쓰여졌으며 신라의 북진(北鎭:북국)지역에 있었다고 하였다.

즉 동국의 북방에서 만들어지고 사용되었다는 뜻이다.

대진국은 곧 발해(渤海)며 발해는 부상국(浮上國)으로, 부상국(扶桑國)으로도 호환된다.

발해국의 장유가 오월(吳越)로 가림토 글자를 거문고에 새겨보냈는데 월(越)나라 사람들이 해독하지 못했다는 한단고기의 기록도 있다.

여기에 등장한 오월의 오(吳)와 월(越)은 하동에서 하북과 하남으로 나뉘어 있었다. 월은 중주의 뜻이며 백제(百濟)와 함께 있었다.

당연히 영월(寧越)로도 쓰여졌다.

고려 광종(光宗:AD949∼975)때 장유가 말한 오월(吳越)은 개봉의 황하 주변을 말하며, 특히 월(越)은 영월로서 개봉의 남쪽지역이 된다.

묘향산(妙香山)이란 동방의 북해지역에 있던 향산(香山)을 말하며, 지금의 하남성 낙양의 용문석굴(龍門石窟) 맞은편(동쪽)에 있다.

발해의 대평원 남쪽에 백제가 있었고 발해는 대진국의 의미와 어울리게 동방(동국, 동해)의 부상국(浮上國) 또는 부양군(浮陽郡) 지역에 있었다.

부양군이자 발해국의 중심지도 낙양과 정주·개봉의 황하주변이 된다.

역사에서 대진국이자 발해(진단국)가 현재의 동북3성과 극동에 있었다는 해설은 반도 한국사(韓國史)가 만들어 지면서 가능해졌고, 또 근래의 일이다.

따라서 계연수가 한단고기를 저술한 곳도 현재의 하남성이고, 장유가 거문고에 가림토 글자를 써넣어 보낸 월(越)나라도 하남에 있었다.

또 가림토 글자를 사용하였던 주체로서, 부양군과 발해로 병칭되던 해동의 성국인 대진국(진단)도 하동(河東:河南)에 있었기에 가림토를 반도나 동북3성 지역으로 해설할 이유는 없다.

일단 황하지대로 옮겨놓고 보면 한자(漢字:韓字)의 생성지역과 연관된 가림토 문자와 한글의 입맞춤은 해결이된다.

또 계연수의 별호인 홍행촌수의 홍행(紅杏)역시 홍주(紅州)와 행주(杏州)의 합성으로 지금의 하남성 노산(魯山)과 우현(禹縣:杏州)을 말한다는 것을 알아두면, 가림토 지역이 어느 곳인가를 알아 차릴수 있다.


3.

가림토(加臨土)의 가림(加臨)은 가주(加州)와 임주(臨州)의 합성이고, 오방(五方)의 중앙(중원)을 상징인 토(土)가 합쳐진 지역명이다.

토(土)를 다(多)로 한다고 해도 달(達)로서 같은 의미다.

달(月:達)은 월성(月城) 및 만월성(滿月城)이되어 중토와 중원의 의미인 월(越)로 돌아오고 내토(奈城) 와 내성(奈城)·나라(奈良)가 되어 기나이(畿內:경기) 및 중주의 야마토(大和)로 다시 돌아간다.

즉 가림토와 인연을 맺은 모든 역사지명은 하남(하동남로)이자 소중화(小中華) 지역을 원형질로 삼아 조선의 한성부로 돌아온다.

가주(加州)는 가평(加平)과 가림(加林)으로 환원되며 두지명은 같은곳의 이칭이다. 임주(臨州)는 임천(臨川) 및 림주(林州)로 병칭되고, 임하(臨河)·임진(臨津)과도 다르지 않다.

주(州)·천(川)·평(平)·양(壤)은 지명의 나(那)·라(羅)·야(耶:野)와 같은 뜻이다.

또한 가림의 림(林)은 시림(始林)의 뜻으로 '동방의 중심' 이란 곳이며, 시평(始平)과 임주(林州)의 약칭이다.

임주 역시 하남성 안양(安陽)에서 만날 수 있다.

따라서 가림토의 토(土)가 오행으로 중앙(中央:中原)을 상징하듯이 가림(加臨)은 백제의 가림성(加林城:嘉林城)과 임존성(任存城)이 있었던 곳이다.

또 고구려의 임천성(臨川城)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신라의 안동(安東)과 임하(臨河)가 있던 곳이기도 하고, 일본사의 축자(筑紫)·웅본(熊本)·기내(畿內) 및 나라(奈良)가 있던 곳이었다.

가라(加羅:加耶, 駕洛)가 있던 곳이며, 임나(任那) 일본부가 있었던 사주(司州)였기도 하다.

가라(加羅:加耶)가 '갈라지다, 나뉘어지다, 변지(邊地)'의 뜻이있고, 강(江)의 옛표기인 '가람' 과 맞물려 갈라지다의 한자표기인 기성(岐城)이 경남거제·경북 고령에 만들어지게 된것도 낙동강(洛東江)의 반도 이식과 깊은 인연이 있다.

낙동강이 상징하는 의미는 '낙양(洛陽)의 동쪽을 흐르는 강 '이란 뜻과 '낙수(洛水)와 대동강(大東江:黃河의 본줄기)이 합쳐지는 강' 이란 뜻이다.

낙동강은 김해(金海:東海)지역을 흐르고, 가락(駕洛) 지역을 있게한 보충설명도 해준다.

가락(駕洛)의 본래뜻은 '낙수(洛水)·낙주(洛州)·낙양(洛陽)지역의 군주(君主)' 가 있는 곳이란 뜻이다.

가락은 일본사의 기내(畿內)이자 본정(本町)으로서 한국사의 가야와 맞물려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지역도 되었다.

임나(任那)는 임주(任州) 또는 임현(任縣)지역이란 뜻으로 '동방의 북주(北州:任州, 10간기준) 에 있었던 나라' 의 뜻이다.

임나는 산해경에서 조선의 중심이 '동방의 북해(北海)'지역에 있었다고 기록한 내용과 통한다.

우리가 흔히 가라말(加羅馬)을 흑색(黑色)의 말로 표기하듯, 한단고기에서 신라·발해(대진국)·흑수국(黑水國)·보로국(寶路國:하남성의 보주와 로주사람) 사람이 사이좋게 지냈다는 곳도 하남성의 낙주지역이며 낙수와 황하연변에 있었던 나라가 가라(加羅:駕洛) 가 된다.

그러면 낙동강·가락(駕洛)·임나(任那)·흑수국(黑水國)이 있었던 하동(河東:晋州)의 허창(許昌)에서 아유타국(서역)에서온 허황옥(許黃玉) 왕비를 만날 수 있다.


4.

열도의 기나이(畿內) 나라현 신궁(神宮)에는 가림토 문자 및 훈민정음 글자가 새겨진 둥근 동판(銅版)이 있다.

일본사의 기나이 나라(奈良)는 백제의 공주(公州:웅주)·남부여(河南扶餘)·한성(漢城)과 같다. 또한 대가야국의 가락(駕洛)과도 같고, 백제의 가림성(加林城:加臨城)과 같으며 임존성(任存城)이 있었던 곳이다.

특히나 임주(任州)와 존성(存城)의 중심은 영주(寧州)의 건평(建平)이 되며, 지금의 하남성 낙양(洛陽)에 대한 이칭으로 쓰였다.

흑치상지(黑齒常之)의 아들인 준(俊)의 묘지명이 낙양의 망산(邙山)에서 아버지의 것과 같이 발견 되었는데, 준의 묘지명에 그의 증조부(상지의 조부)는 임본향(任本鄕)의 자사를 역임했고, 조부(상지의 부)는 임본향(任本鄕)의 호부상서를 역임했다고 쓰여져 있다.

임본(任本)이란 임주(任州:북국, 북주)의 중심인 본정(本町:中央)이란 뜻이며, 이곳은 지금의 하남성 낙양→정주→개봉이 연결되는 황하남북 지역을 말한다.

또한 준의 조부가 근무지로 했던 형산(荊山)·울포(蔚浦)·일역(日域:東州, 百濟)이란 지명도 하동이자 현재의 하남(河南)에 있었으며 현재도 있다.

특히 형산(荊山)은 하남성 정주(鄭州)로서 지금도 자형산(紫荊山)이 있다.

임본(任本)이란 곳이 바로 백제의 가림성과 임존성이고, 가락국(駕洛國)이 있었던 곳이며 일본사의 임나일본부 지역이다.

임나일본부 약칭이 임본(任本)이며 신라의 시림(始林)과 계림 지역으로서 동경(東京)이자 왕성(王城) 지역도 된다.

또한 고구려의 국내성(國內城) 지역이자 내토(奈吐)와 내성(奈城) 지역이며 나라(奈良)였다. 또한 경기 및 기내 였으며, 중화사의 광평(廣平)과 시평(始平)이었고, 동황성(東黃城:고구려)이 있었던 기주(冀州)였다.

임본(임나일본부)을 백제식으로 표기하면 풍달(風達:朴達)이 된다.

즉 백제의 흑치상지가 흑치부(흑수부) 출신으로서 풍달장군을 역임했던 연국(燕國)의 흑수부(북국)지역이다.

가림토의 토(土)를 중앙이 아닌 지(地)와 국(國)으로 해석해도 가림(加臨) 지역은 지금의 하남성의 황하지역에서 떠날 수 없고, 중심을 낙양→정주→개봉을 잇는 황하유역에서 찾으면 있다.

임나일본부 였기도한 일본사의 축자(筑紫)는 정주(鄭州)의 자형산(紫荊山) 지역에서 임점(任店)과 공현을 범주에 두고 있었다.

이곳이 곧 가림토 지역으로서 백제의 웅주(공주)였으며, 또한 한성부(漢城府)였다.

이곳에서 한글과 한자(漢字)가 만들어져 보급되었다.


5.

가림토 문자의 한글이 한자(漢字)의 뜻을 표현하기 위한 표음(表音)의 부호 및 글자로 생각할 때, 한자가 생겨난 곳에서 가림토 문자와 한글이 생겨났다고 보는 견해가 상식적이다.

한글을 한자로 쓰면 한글(韓契:汗契)이 되어 '대칸(大汗:황제)이 있는 한국에서 사용된 한자의 표음글자'로 정리가 되며, 이곳 역시 한국사 강역의 한성부(漢城府)가 있었던 현재의 하남성(하동, 산동) 지역에서 찾아야 있다.

한자의 원류이자 초기 문자였던, 갑골문자(甲骨文字)가 쓰여진 귀갑(龜甲)과 골편(骨片)이 처음 발견되고, 대량발견된 곳도 은허(殷墟:은나라, 조선왕국)였다.

은허는 상허(商墟)로도 병칭되며 지금의 하남성 황하 남북지역을 말한다.

즉 가림토(加臨土) 지역이며 조선왕국사(한국사)의 모두가 이루워졌던 지역이다.

한자를 발음할 때 이러한 모양의 부호를 사용하자고 약속(제정)하면서 생겨난 것이 가림토 정음 38자이고, 한글의 28자다.

문자와 언어 사이에는 신속하고 정확한 의미 전달이라는 경제성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럴 때 단음절의 표기가 실효성을 발휘한다.

모범적인 한자의 단음절 표기는 자음과 모음이 합쳐진(반절음 결합) '한글'을 상대할 표음자는 없다.

이럴 때 일본의 가나 또는 현중국의 한어병음자모 및 주음부호 표기는 2음절 이상으로 발음되어 한글의 방언(사투리) 성격을 헤어나지 못한다.

즉 조선의 왕국 지역인 한국(중국)에서 만들어진 라틴문자로서는 한자(漢字:韓字)가 있고, 라틴어 표음글자로는 한글(가림토문자)이 있었다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다.

한국사의 중심이자 왕국이 있었던 한성부(漢城府) 지역이 중국이듯이 한자(漢字)가 말하고자하는 상징도 중주(中州)·황주(黃州)에 있었던 조선의 한국(韓國)이자 중국(中國)에서 만들어지고 쓰여졌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 일역(日域:東國)의 본정(本町:중앙, 중심)인 임나(任那:북해왕국) 일본부지역에서 만들어진 표의(表意) 문자가 한자였다로 생각해도 된다.

또 역사를 통해 중국·한국·일본이 공동으로 한자를 만들었다고 보면 정확하다. 갑골문자가 많이 발굴되고 처음 발견된 현재의 하남성 지역의 황하 연변이 한자가 만들어진 곳이자 가림토 문자가 만들어진 가림토(加臨土)지역이며, 한국이자 칸국(汗國)에서만 쓰여졌던 한글(韓契)이 만들어 졌던 곳이다.

물론 조선의 왕국 지역이었던 한성부 지역이다.

중심은 낙양이 된다.

한글(韓契)은 한국 및 칸국(汗國:조선의 왕국)에서만 쓰여졌던 한자의 표음문자(表音文字)이고, 가림토 문자는 백제의 가림성과 임존성이 있었고, 가주(加州)·임주(臨州)가 있었으며, 가락국(駕洛:낙양, 정주)이 있었던 공주(公州)이자 웅주(熊州)에서 만들어지고 사용되었던 글자다.

신라의 안동이기도 하고 고구려의 내토와 내성이기도 했던 이곳은 한자(漢字)가 만들어진 한주(漢州) 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글·가림토글자·한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즉 한자가 만들어진 하남성 지역에서 가림토 글자와 한글이 만났던 것이다.

한단고기를 저술한 계연수의 강화(江華)이자 강도(江都)가 있었던 곳도 하동남로(하남성)인 강동(江東)에 있었고, 홍주(紅州)와 행주(杏州)가 합쳐진 계연수의 고향인 홍행촌(紅杏村)도 하남성에서 노산(魯山)과 우현(禹縣)으로 남아있다.

계연수는 안성마춤으로 지금의 하남성이자 한글→가림토글자→한자가 만들어진 묘향산(하남성 낙양의 향산)지역에서 한단고기를 저술했다.

바로 이곳에서 38자의 가림토 정음(正音) 글자가 만들어지고 쓰여졌다고 하였고, 대진국(진단)지역이자 발해가 있었던 부양군(浮陽郡) 지역으로서 계연수의 출생지이자 고향(故鄕)이라고 하였다.

한글의 초기 형태였던 가림토 글자의 탄생지를 한반도로 한정하여 한자·한글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1skan님의 답변글입니다.



가림토는 정말 있었을까.


흠. 님은 가림토 문자설을 확신하시는군요. 이미 까마득히 오래 전에 우리민족은 우수한 표음문자를 발명하여 사용했으며 세종은 단지 그 가림토 문자를 줏어모아 이름만 훈민정음으로 고쳐 리바이벌해서 내놓은 것이라는 주장이 가림토 문자설이지요.

먼저, 이 주장이 얼마나 근거있는 이야기인지부터 보아야겠습니다. 님은 '국어생활 관련 잡지'에서 '확실히 보았다'고 하셨는데 그 국어생활 관련 잡지가 어떤 잡지인지 모르겠으나 먼저 그 잡지가 국사편찬위원회와 한글학회를 합친 것 보다 훨씬 권위있고 정교한 학술서적이어야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국사편찬위원회와 한글학회를 동시에 쫑코먹일만한 그런 학술서적을 내고있는데 학계에서는 외면당하는 그런 학술단체를 님은 상상하시고 계십니까?


환단고기라는 책을 아마 들어 보셨을겁니다. 가림토 문자설은 이 책에서 시작됩니다. 무려 4185년 전인 고조선의 가륵 단군 때 뜬금없이 가림토정음이란 것을 발명하였다하고 그 글의 자체 38자가 실려 있습니다. 그러고는 그만입니다. 더이상은 그 글자가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지 이후로는 일체의 언급이 없이 넘어가버리죠. 이 기록을 가지고 지금 환단고기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4천여 년 전에 이미 우리민족은 우리의 독자적인 표음문자를 가졌다는 것이 환단고기를 통해 증명되었으니 국사교과서와 국어교과서를 수정하라고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국사기와 왕조실록 또는 고려사에 기록되었다 해도 그것이 그대로 역사가 되지 않습니다. 기록 중에는 여러가지 사정으로 곁길로 돈 기록이 많으므로 다시 정리하여 확증하여야 비로소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것을 소위 실증사학이라하여 타기할 역사관으로 보시는데 저 역시 이병도 김재원으로 대표되는 실증사학자의 농단에 우리역사가 얼마나 삐뚤어 졌나를 역사를 읽을 때마다 탄식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옛글에 이렇게 씌였는데 이것이 우리의 민족적 자만을 만족시키므로 일단 우리 역사로 편입시켜놓고 보자, 이런 태도 또한 역사를 보는 온당한 태도가 아닙니다. 잠시의 궁리는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근거가 불명한 책의 기록을 다만 우리의 자만심을 만족시킨다하여 어떤 뒷받침도 없이 더퍼노코 인용하는 것은 식민사관 못지않게 우리역사를 또 한번 욕먹이는 짓입니다.


환단고기 단군세기 제3세단군 가륵 2년(BC2181-고고학의 편년상 신석기시대 말기/청동기시대 초기로 분류) 삼랑(중국식 관명임) 을보륵에게 명하여 나랏정음(正音)38자를 만들게하여 이를 "가림토" 라고 하였다 하여 그 자모 38자가 실려있는데 얼핏 보아도 소리글자- 표음문자가 분명한 이 소위 가림토정음 중 28자는 그 자체와 모양이 그로부터 무려 3524년 후인 근세조선 세종 25년(AD1443)에 창제한 훈민정음 28자와 완전히 같고 나머지 10자는 거기에 약간의 변형을 가한 것으로 보이는데 만약 그렇다면 훈민정음은 세종이 가림토를 참고하여 옛글자를 응용 표절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가림토가 실제로 존재한 문자라면 어떻게해서 3500년 동안이나 깜쪽같이 숨어있다가 문득 세종의 눈에 띄어 훈민정음이 될 수 있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가림토의 창제가 사실이었다면 가륵단군 이후 가림토는 세종이전에 단 한번도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낸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가림토 설을 옹호하는 이들은 훈민정음 해례본의 "옛 전자를 본땄다(倣古篆)"라는 세 글자에 집착, 세종이 가림토 자체(字體)를 모방하여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한 '고전'이란 뭘 말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고전이란 옛 전자인데 훈민정음의 글자모양은 과연 옛 전서체와 흡사합니다. '방고전' 3자는 '옛 전서체를 본땄다'라는 뜻이지 어떻게 해석하여도 '옛 가림토를 본땄다'가 아닙니다. 가림토가 어떻게 해서 '옛전서'가 될 수 있는지?

만약 훈민정음이 정말 가림토를 모방했다면 '방고전'이 아니라 '효고서(效古書)'로 쓴다는 것은 한문을 조금이라도 배운 사람이면 딴 말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들은 늘상 평양 법수교 비문이나 만주 선춘령 이북의 바위에 새겨진 문양, 남해의 낭하리 암각화 등이 이 가림토로 쓴 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문양들은 얼핏 보기에도 가림토와는 조금도 닮지 않았으며 가림토 신봉자들은 남해 낭하리의 암각화를 자신있게 읽기를 "서불(徐市)이 지나간 곳"이라고 씌어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나 어떻게 보더라도 그 무늬는 가림토와는 비슷하지도 않으며 그렇게 주장하는 이들도 근거를 대어 설명하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단지 '그렇게 쓰였다'고 주장할 뿐입니다.

이 낭하리의 암벽무늬는 옛날 진시황의 동남동녀 천 명을 데리고 불로초를 찾으러 떠난 서불이 들렀다가 자신의 흔적을 남긴 것이라는 해석은 예전부터 있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해석은 진나라 시대의 한자로 '서불과처(徐市過處)' 네 글자라는 것이 예전의 해석이었죠. 그런데 지금 가림토로 읽는 사람들은 그게 한자가 아니라 가림토로 새긴 글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한자 네 글자가 아니라 뭔진 모르는데 '서불이 지나간 곳'이라는 뜻은 확실하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서불'이라는 이름을 한자가 아닌, 풀어서 쓴 글이어서 읽기가 어렵다고...중국인 서불이 당시엔 아무도 안살았을 남해를 지나가면서 굳이 자기 이름을 우리말로 풀어서 새겼다니...

그런데 사실은 이 암벽무늬는 한자도 아니고, 적어도 어떤 '문자'는 아닙니다. 그 탁본을 보면 보기에 따라서 네 사람과 두 짐승이 어울려 있는 '그림'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각자(刻字)가 아니라 각화(刻畵)인거죠.


어떤 오래된 비석을 놓고 그 비석에 새겨진 것 중에 가림토의 ㄱ이랑 ㅅ이랑 닮은 획이 보이므로 이 비가 가림토 문자로 쓰인 비이며 이로써 가림토의 존재가 증명되었다고 주장하는데 한자로 된 비문에도 찾아보면 가림토와 닮은 획이 많이 보입니다. 심지어 영어나 유럽의 루운 문자로 쓰인 비에도 가림토나 한글과 같은 획이 많이 있습니다. 비단 가림토 뿐이겠습니까? 일본의 히라가나나 가다가나를 거기 대입시켜도 꼭같이 생긴 부분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럼 일본인이 그옛날 만주 선춘령에 진출하고 북유럽에 깃발을 꽂은 증거라고 주장한다면 웃어줄까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권위있는 국어생활 잡지에 실어줘야 할까요?

가림토 신도들에게 묻겠는데 무엇이 증거라는 겁니까? 만약 그 비가 정말 가림토로 쓰인 것이라면 단 한 글자라도 읽어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신들이 ㄱ이랑 닮았다, ㅂ과 꼭같다고 하는 바로 그 글자를 못읽습니다그려.

가림토가 발명되었다는 BC22세기는 서쪽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수메르문명의 전성기였습니다.
이 시기 수메르인은 자신들의 일을 문자로 남겼는데 그 문자는 지금 완전히 해독되는 쐐기문자로서 그 모양과 표기법이 가림토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 수메르의 쐐기문자는 지금 가장 오래된 소리글자라는 것이 정설이며 지금 수메르의 쐐기문자가 새겨진 점토판은 커다란 도서관을 가득 채울만큼 많이 남아있어 단 한 글자 부스러기도 남지 않은 같은 시기의 가림토와 대조를 이룹니다.

환단고기의 삼성기 하를 보면 이 수메르가 수밀이(須密爾)로서 단군조선 이전의 환국신시때부터 환국의 식민지였다고 합니다. 그러한데 어째서 수메르의 쐐기글은 조선의 가림토와 조금도 닮은 점이 없으며 쓰는 법이 훈민정음과는 비슷하지도 않은지 모를 일입니다. 본래 상급의 문화는 하급의 문화로 절로 흘러가는 법입니다. 한데도 '식민지'인 수메르가 '종주국'인 조선의 뛰어난 표기법을 취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난해한 문자를 발명했다고 믿기는 힘든 일입니다.

가림토의 발명이 사실이라면 왜 이 글자는 그이후 쓰인 예가 단 하나도 없으며 이 글자가 새겨진 금석문이나 문서는 씻은듯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가림토의 일이 쓰여있는 단군세기 조차도 왜 가림토로 쓰지않고 한문으로 쓴 것일지.

쓰기쉬운 글자가 사라지고 까다로운 글자가 득세한다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쓰기편한 글자를 만들어만 놓고 쓰지않고 그대로 없애버렸다는 것을 따지지 말고 환단고기에 그렇게 기록되었으니 글자 그대로 믿으라는 것이 과연 어느 정도 학문이랄지 모를 일입니다. 더욱 가림토의 시대는 훈민정음의 불행한 시대와는 달리 사대주의의 대상이 아예 없었으며 언필칭 조선이 세계최대 선진국이었다는 것입니다.
훈민정음은 만들어진 이후 숱한 멸시와 박해를 견디면서도 꿋꿋이 살아남아 4백년 뒤 드디어 한자를 추방하고 글자살이의 주인이 되어있는 것이 지금의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환단고기 이외에서는 어떠한 유물 유적 기록 구전에서도 가림토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고고학적으로도 이와 유사한 흔적이 발견된 적은 조금도 없으며 오직 환단고기에만 존재하는 기록임을 보아 지금으로부터 4200년이나 전에 이와같은 과학적인 문자를 당대에 명령 한 마디로 발명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환단고기와 성격이 비슷한 규원사화에도 가림토의 일은 언급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러함에도 환단고기를 믿고 가림토설을 믿는 이들은 꾸준히, 끊임없이 한글학회 홈페이지 등에 등장하여 훈민정음의 가림토 복제설을 끝도 없이 되풀이 주장하고 있으니 참으로 모를 일입니다. 주장의 근거는 단지 "환단고기에 그렇게 기록되었다. 그러니 사실이다"라는 것 뿐이니 이토록 지겨운 일도 없습니다.


일본의 이른바 신대문자(神代文字: 아하루 문자)란 것은 천조대신이 이 세상을 다스리던 아득한 옛날 찬미의 신이 대신을 찬양하기 위해 사슴의 어깨뼈를 구운 뒤 뼈속에 생긴 금의 모양을 보고 만든 글자라고 합니다. 자음 9개와 모음 5개를 이리저리 연결해 모두 47 형태소로 되어있는 이 글자들은 서기369년 백제의 왕인이 한자를 왜에 전할 때까지 왜에서 쓰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자가 쓰임에 따라 사용되지 않고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 문자는 가림토보다 더욱 훈민정음을 닮았는데 일본의 일부 국수주의자들은 이것이 훈민정음의 원형이라고 주장합니다. 세종이 신대문자를 베껴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한글의 원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둘이나 되는 셈이 되니 한글의 복이라 할까요 화라 할까요.

한글의 가림토 원형설을 수용한다면 한글의 신대문자(아하루문자)원형설이 수용되지 않을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아하루문자는 1980년 이후에야 비로소 알려진 가림토보다 그 연원이 더욱 오래되고 쓰인 흔적이 일본의 여기저기에 확실히 남아있는 문자이니 만약 터무니없는 가림토 원형설을 받아 들인다면 아하루 원형설에 대해서는 뭐라고 배척하시렵니까? 「가림토는 기분좋지만 아하루는 왜놈꺼라 기분나쁘다 그러니 아하루설은 받아들일 수 없다」이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학문에서 그런 감정적 국수주의가?
일본의 국수주의 단체가 왜 가림토설을 은근슬쩍 지원하고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림토설을 지지하는 것이 왜,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도.

가림토와 신대문자의 공통점은 이 알기쉬운 글이 어렵고 까다로운 글인 한자와의 다툼에서 패배하여 영영 사라졌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믿기십니까?



윗 글은 어디에 제가 쓴 글의 일부를 약간 고쳐 실은 것입니다. 환단고기에는 어디에도 가림토로 글을 적었다는 흔적조차 없습니다.

당 현종 때 발해의 사신이 당에 왔는데 발해사신이 가져온 발해 글을 읽는 사람이 아무도 없자 사방에서 수소문 끝에 이백(시성 이태백)을 불러와서 해석하게 해서 망신을 면했다 합니다. 이때 이백은 자기 외는 발해문자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기화로 번역료를 톡톡히 우렸다는데 여기서 보듯이 발해는 독자적인 자신의 문자가 있었습니다.
삼국사기 신라 헌강왕 조에는 여진문자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여튼 뭔가 문자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림토는 아닙니다.

한자의 발명자는 우리민족입니다. 한자는 중국의 은나라때 발명되었는데 은이 조선족의 나라라는 것은 다 아는 이야기죠. 즉 우리민족은 표음문자의 최고봉인 한글과 표의문자의 최고봉인 한자를 모두 발명해낸, 문자사적으로 좀은 어이없는 민족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부는 여기서 그쳐야 합니다. 왜, 지금 우리가 쓰는 한글이 역사가 불과 500년 밖에 되지 않은게 원통하세요? 그래서 한글의 빛이 조금이라도 바랬다고 생각하십니까? 뿌리까지 훑으면 2천5백년 쯤 된 영어 알파벳에 비겨 오백년 된 우리 한글이 창피하신지요?



이러한 문자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기록이 서로 보충하면서 증명합니다. 그런데 가림토는 정말이지 환단고기에 스치듯이 적힌 그것 뿐입니다. 도대체 뭘 믿으시려는 겁니까?

아무나 책을 지어놓고 이것이 바른 역사서니 의심말고 무조건 믿으라 해서도 안되지만 거기 자기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다하여 즉시 경전으로 모시고 비판에 대해서는 모욕으로 대해서도 안되는 겁니다. 감정을 버리시고 냉정히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세종은 가림토를 베꼈을까? 우리가 지금 쓰는 이 글은 정말 4천 년이 넘는 오랜 문자인가? 꼭 그래야만, 4천 년이 넘은 글자라야만 우리글에 자부심이 생기는지? 글은 그 역사가 오래 되어야만 가치가 있는 것인지?


여자는 감정으로 사물을 대하고 남자는 이성으로 사물을 대한다는데 어쩐지 요즘은 그게 뒤집힌 것 같네요.
제가 꼴랑 점수 15 가지고 이렇게 긴 글을 쓰지 않습니다.


흠. 이제 제게 식민사관이니 노예사관이니 마구 쏟아지겠네요...




이의제기


관심을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먼저 桓을 한으로 읽으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桓은 어떤 자전에도 모두 환으로 독음되어 있지 한으로 독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환단고기를 한단고기로 처음 읽은 고 임승국씨도 그의 주해서 어디에서도 그렇게 읽어야 하는 타당한 이유를 제시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삼성기 하편 주에 "환인(桓因)은 환인으로 읽지 말고 반드시 '한임' 또는 '한님'으로 읽을 것이다"라고하여 근거없는 자신의 희망사항을 밝혔을 뿐입니다.

편의상 highknight님의 글을 먼저 제시하고 아래에 제 생각을 밝히는 쪽으로 하겠습니다. ---->아래가 님의 글이고 ====아래가 제 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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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의 삼성기 하를 보면 이 수메르가 수밀이(須密爾)로서 단군조선 이전의 환국신시때부터 환국의 식민지였다고 합니다.
-이 부분 이해가 안되는군요. 도대체 한단고기 어느 부분에 수밀이국이 식민지라고 나와있습니까?
12연방국으로 나와있는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언제부터 연방국이란말이 식민지를 뜻하게 되었는지 궁금하군요

====
삼성기 하편에 "...파나류의 나라라고도 하는데...남북이 5만리요 동서가 2만리니 통틀어 말하면 환국이요 나누어 말하면...(이하 수밀이 포함 12국의 이름을 들고)...합해서 12국이다."
12연방국이란 임승국씨의 주석에 나오는 말입니다. 원문에는 '12국'으로 되어 있는데 다시 읽어보니 이건 꼭 식민지라고만 해석할 문장이 아니군요. 심증은 가는데 문장이 꼭 그렇게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흠. 식민지라는 부분은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고집부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12국 중 주도국을 찾을 수 없습니다. 글쎄, 12국 중 어는 나라가 환인이 직할한 나라(邦)일지 삼성기 하를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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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쉬운 글자가 사라지고 까다로운 글자가 득세한다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이 것에 해답을 드리자면 고구려를 예로 들겠습니다. 고구려는 아시다시피 여러 민족들을 아우르던 대제국이였습니다. 그들의 말은 조금씩 달랐을겁니다. 그들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뜻을나타내는 표의문자가 더 효과적이지 표음문자가 효과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표음문자인 가림토문자가 잘 쓰이지 않게 된것이지 그 당시만해도 없애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후대로갈수록 사대주의에 빠져 한자를 고집하게되고 가림토문자는 묻혀버린거죠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단일민족이되고 표음문자가 필요해지면서 세종이 가림토를 부활시킨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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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때까지는 가림토가 쓰였다는 말씀이군요. 그렇다면 호태왕비, 단양적성비에 가림토의 흔적이 조금도 없는 것은 왭니까?
고구려가 전투하거나 정복하여 복속시킨 민족은 부여, 옥저, 예맥, 낙랑, 말갈, 전/후/북연, 북주, 비려, 백신 등 대개 동이족 계열로 그 후손들은 지금도 길리약, 축치, 캄챠달, 유카키르, 에벤스, 에벤키, 브리야트 등의 제민족으로 시베리아와 캄챠카에 걸쳐 살고 있는데 지금도 그 언어체계는 우리와 같고 같은 낱말이 많습니다. 같은 언어체계를 쓰는 민족들을 통합하는데에 언어구조가 다른 한족의 글이 효과적이란 말씀입니까? 가림토는 소위 12한국을 위한 글이 아니었습니까? 서울사람과 제주사람의 의사소통을 위하여는 한글보다 영어 알파벳이 효과적입니까?
후대로 갈수록 사대주의에 빠져 가림토가 없어졌다니 고구려가 어느나라에 대해 사대했다는 말씀이신지.
애초 가림토를 만들 때에는 표음문자가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그 글이 필요해서 만들었는데 같은 사람(모두 12한국의 후예일 것이므로)을 다스리는데에 그 글이 필요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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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4200년이나 전에 이와같은 과학적인 문자를 당대에 명령 한 마디로 발명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환단고기와 성격이 비슷한 규원사화에도 가림토의 일은 언급되어있지 않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200년전과 지금의 현대인들의 IQ가 많은 차이를 보이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별 차이 없었을겁니다. 단지, 지금과는 기술력의 차이죠
당대에 명령 한 마디로 발명했을 수도 있는겁니다.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마시죠. 오로지 한단고기에만 언급이 되어있다고 그 기록을 무시할 수도 없는겁니다. 모든 사서에 똑같은기록이 전부 기재되어 있어야 그 기록을 믿을 수 있다는건 어불성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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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에 그렇게 씌어 있으므로 그렇게 믿으라. 그렇다면 단기고사에 쓰인 일들도 모두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발해왕자 대야발이 쓴 책인데? 환단고기의 저자보다 더욱 확실한 사람이 썼는데?
단기고사에 뭐라고 씌어 있습니까? 단군시대에 증기기관을 발명했다, 잠수함을 발명했다, 천왕성,해왕성을 발견했다, 비행선도 만들었다, 등등.
4200년 전에 가림토같은 문자를 만들 정도면 저런 것들도 모두 가능합니다. 보십시오, 일본서기에 신공이란 여자가 단숨에 신라를 정복하자 그걸 본 백제왕과 고구려왕이 허겁지겁 굴러와서 신공 앞에 나란히 무릎꿇고 영영세세 일본국을 섬기겠노라고 맹세했다고 씌어 있습니다. 이 기록을 믿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게 기분나쁜 것은 거짓말이고 내 민족적 자만심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면 믿는 것입니까?...객관을 유지하셔야 할 것입니다.
역사는 기록을 믿는 것이 아니라 기록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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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림토는 기분좋지만 아하루는 왜놈꺼라 기분나쁘다 그러니 아하루설은 받아들일 수 없다」이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학문에서 그런 감정적 국수주의가?
-가림토는 일본의 신대문자보다 더 오래전에 발명된 문자입니다. 신대문자는 가림토의 변형이라는 소리조차 못들어보셨습니까? 님이 말씀하시는 가림토신봉자들은 그런 주장 한적 없습니다. 제대로 말씀하시죠
아무것도 모르는 네티즌들을 현혹하시지 말라구요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때 학자들을 만주쪽으로 자주 보냈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일본으로 보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상대의 주장에 반박하시려면 제대로 알고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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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성삼문과 신숙주 등을 13회나 요동의 음운학자 황찬에게 보낸 것은 훈민정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가 아니고 모두 훈민정음이 반포된 1446년 이후의 일입니다. 별 거 아니지만 참고삼아 붙이고...

저는 일본의 아히루문자가 훈민정음의 원형이라거나 영향을 받았다는 말씀을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 문장이 허술하여 오해가 있다면 그 부분을 아래와 같이 고치겠습니다.

[ 일본의 이른바 신대문자(神代文字: 아히루 문자)란 것은 천조대신이 이 세상을 다스리던 아득한 옛날 찬미의 신이 대신을 찬양하기 위해 사슴의 어깨뼈를 구운 뒤 뼈속에 생긴 금의 모양을 보고 만든 글자라고 한다. 자음 9개와 모음 5개를 이리저리 연결해 모두 47 형태소로 되어있는 이 글자들은 서기369년 백제의 왕인이 한자를 왜에 전할 때까지 왜에서 쓰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자가 쓰임에 따라 사용되지 않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문자는 가림토보다 더욱 훈민정음을 닮았는데 일본의 일부 국수주의자들은 이것이 훈민정음의 원형이라고 주장한다. 세종이 신대문자를 베껴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글의 원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둘이나 되는 셈이 되니 한글의 복이라 할지 화라 할지.

가림토와 신대문자는 기묘하게 닮았으면서 사실은 닮지 않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가림토와 훈민정음은 놀랍게 닮았고 신대문자와 훈민정음도 참 많이 닮았다. 그런데 가림토와 신대문자는 닮지 않은 것이다. 즉 훈민정음을 원형으로 하여 각기 다른 사람이 다르게 변형한 것이다. 그러니 두 문자는 훈민정음과는 닮았으나 이미 조합의 방법이 다른 등 그들끼리는 따로 노는 결과로 된 것이다.

한글의 가림토 원형설을 수용한다면 한글의 신대문자(아히루문자) 원형설이 수용되지 않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아히루문자는 1980년 이후에야 비로소 알려진 가림토보다 그 연원이 더욱 오래되고 쓰인 흔적이 일본의 여기저기에 확실히 남아있는 문자이니 만약 훈민정음의 가림토 원형설을 받아 들인다면 아히루 원형설에 대해서는 뭐라고 배척하려는 것인가? 「가림토는 기분좋지만 아히루는 왜놈꺼라 기분나쁘다 그러니 아히루설은 받아 들일 수 없다」이게 가능하다고 생각되는지? 학문에서 그런 감정적 국수주의가?
일본의 국수주의 단체가 왜 가림토설을 은근슬쩍 지원하고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가림토설을 지지하는 것이 왜,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도.

여기에 대해 가림토 신봉자들은 이렇게 설명한다.「이것이야 말로 가림토의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단군조선에서 만든 가림토는 당시 조선의 관경이던 왜 땅에 흘러 들어가 쓰였던 것이다」

분명히 아히루 문자가 새겨진 비석들은 연대가 길어야 2~ 3백년이다. 그리고 그 글이 보관된 신사들은 오래된 것도 4백년을 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신대문자에도 있는 'ㅓ'의 소리는 우리말에서는 발음기호[ ]로 나는데 비해 신대문자는 [e]로 읽는다. [e]를 소리내기 위해서는 'ㅔ'가 있으니 굳이 'ㅓ'를 [e]로 소리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가림토가 수천년 전 일본에 들어가 쓰였다면 읽는 법 또한 따라 들어간다는 것은 상식이다. 읽을 수 없는 글자는 곧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글자를 읽지 못하면서 글자가 수천년이나 살았다는 것은 언어도단이 아닌가. 그런데 일본인의 발음체제는 ㅓ뿐 아니라 아예 가림토(그리고 가림토를 복사했다고 주장하는 훈민정음도)를 읽지 못한다. 가림토가 일본에 전파되었다고? 일본에서 수천년간 이 문자를 썼다고? 그런데 가림토를 발음하지 못한다고?

그리고 한자에 불편을 느낀 일본인은 한자의 획을 따거나 변형해서 히라카나 가다카나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수천년 써 온 더 합리적인 글자를 버리고.

신대문자는 일본의 국학자 히라다 아쯔다네(平田篤胤: 18~ 19세기 인물)의 작품이란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서기, 고사기, 고엽집, 신찬성씨록 등 어디에도 흔적이 없고 일인 학자들도 머리를 흔드는 신대문자가 이미 일본서기의 시대에 존재했다고 주장해 주는것은 일본의 고문화를 빛내주는 일일 뿐이다.

가림토와 신대문자의 공통점은 이 알기쉬운 글이 어렵고 까다로운 글인 한자와의 다툼에서 패배하여 영영 사라졌다는 점이다. 이것이 믿기시는가? ]

님은 만주의 어디에서 탁본해 왔다는 그 비문 중 단한 글자라도 읽으실 수 있습니까? 가림토 신봉자, 환단고기 신봉자 중에서 그럴 수 있는 사람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지금 아테네 올림픽이 열리고 있지만, 저는 지금 헬라문자 중에서 가다카나를 꼭 닮은 글자를 당장 다섯 자는 찾아 내겠습니다. 그러고서 "읽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이건 일본문자가 확실하다"고 우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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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뭔가 문자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림토는 아닙니다.
-그 때 당시 쓰이던 문자가 가림토(혹은 가림토의 변형)이 아니라는 증거를 말씀해주시죠? 님이 앞에서 말한 증거로는 절대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님 말씀대로라면 그 당시 한자와는 체계가 다른 글자가 하나 더 있었다는 얘기가 되겠죠

====
그 문자가 가림토의 변형이라는 증거는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그 시대에 이르러 가림토가 이미 심각하게 변형되었다면 그보다 천년이나 뒤에 가림토를 베꼈다는 훈민정음은 왜 가림토의 변형이 아니고 원형입니까?
만약 세종이 이미 가림토의 원형을 얻었다면 무엇 때문에 신하들을 굳이 요동의 중국인인 황찬에게 계속 보내어 질문합니까? 원형을 얻었다면 그 음운과 용법에 대해 중국인에게 궁금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당시에 한자 말고도 글자는 많았습니다. 대개는 한자의 변형이지만 한자로는 자민족의 언어를 표현하는데에 한계를 느낀 민족들은 한자와는 체계도 문장구조도 다른 나름의 글자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여진, 위그르, 서장, 또 생각은 안나지만요.


---->
여담이지만..
여자는 감정으로 사물을 대하고 남자는 이성으로 사물을 대한다는데 어쩐지 요즘은 그게 뒤집힌 것
이라는 소리는 왜 하시는겁니까?
답변과 상관없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주시길..

====
저는 여자입니다^^ 질문하신 분은 남자분인데,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생각하시면 가림토설의 허구성이나 환단고기의 위서임을 파악하실 터인데 국수적(이건 감성에서 나옵니다)이고 감정적 애국주의에 빠져서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와서 한 이야기입니다.





갑골문자에 대해


whtnqja2님의 답변


귀갑문자 ·귀갑수골문자(龜甲獸骨文字)라고도 한다.
1899년 은나라의 옛 왕도 자리인 은허(殷墟)에서 발견되었다.
쓰여진 내용이 복점(卜占)에 관한 것이므로, 이것을 ‘은허복사(殷墟卜辭)’ 또는 간단히 ‘복사’라고도 한다.
귀갑이나 짐승의 뼈를 사용한 복점은 신석기시대부터 행해졌지만, 여기에 문자를 새긴 것은 오직 은나라시대만의 특색이다.
현재 알 수 있는 한자의 가장 오래된 형태로, 회화적 요소를 다분히 남기고 있으나, 순수한 그림문자보다는 상당히 진보되어 있다.

문자의 수는 대략 3,000자, 그 중 해독된 것은 약 절반이다.
그 후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반경(盤庚) 때부터 은말(殷末)까지 약 2백 수십 년에 걸친 것으로, 보통 이것을 5기(期)로 나누어 연구하고 있다.
내용은 제사(祭祀) ·군사(軍事) ·천상(天象) ·전렵(田獵) ·농경(農耕), 임금의 행행(行幸)과 안부(安否)에 관한 것이 많고, 이것으로 은대의 정치 ·사회 ·경제 등이 밝혀져서 전설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던 은왕조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왕조임이 실증되었다.


[참고] http://dugok.x-y.net/kor-his/world/c-gapgol.htm
[사진[ http://cont1.edunet4u.net/yjssu21/gabgol1.htm





ohdaihan님의 답변


갑골문자


한자의기원

한자(漢字)는 원시시대의 그림문자에서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원시인들은 사물의 형상(形象)을 그림으로 그려서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과 의사를 소통했던 것이다.
이러한 원시시대의 그림은 시대가 내려 오면서 점차 회화성(繪畵性)이 제거되고
기호화(記號化) 부호화(符號化)함으로써 문자(文字)의 체제를 갖추어 가게 되었다.
19세기말에 발견된 은(殷)나라의 갑골문(甲骨文)에서는 이러한 한자의 초기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한자는 원래 상형문자이기 때문에 글자의 형태가 다양하여 예술적인 방면에서
서예(書藝)가 발달하였다.


갑골문자

1899년 청(淸)나라의 금석학 학자 왕의영(王懿榮)이 베이징의 한 약방에서 용의 뼈라는 것에 새겨져 있는 고대문자를 발견하였다.

나진옥(羅振玉:뤄전위)은 이 갑골이 허난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의 소둔촌(小屯村), 즉 은왕조 후기의 왕도 유적인 은허(殷墟)에서 출토된 사실을 확인하고,
현지에 직접 가서 갑골과 더불어 고대의 동기(銅器) ·옥기(玉器) ·석기 ·골기
등을 발굴하였다.

그리하여 과거 역사적 문헌 속에 파묻혀 있던 은왕조의 왕계(王系)가
문헌에 적힌 대로 조갑(祖甲) ·조을(祖乙) ·대을(大乙) 등과 같이 십간(十干)의 하나를 이름에 붙였다는 것, 특히 합동으로 제사를 지낸 왕명과 그 순위가 대부분 문헌의 세계(世系)와 일치하며, 나아가서 그 전승(傳承)의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는 것도 있어 갑골문자는 은왕조가 선조의 제전(祭典)을 점친 문장, 즉 복사(卜辭)임이 증명되었다.

그 후 고고학자의 과학적인 발굴로 이러한 갑골이 은허에서 멀리 떨어진 정저우[鄭州]에서도 발굴됨으로써 갑골문자의 분포 범위가 은허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더욱 넓은 지역에 분포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대적 범위도 넓은 것으로 추정되어, 갑골문자가 은왕대의 은허에서만 출토된 것으로 한정할 수 없게 되었다.

은허에 대한 과학적인 발굴 결과, 갑골과 더불어 동기 ·옥기 ·도기(陶器) 등도 출토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리하여 갑골학 연구는 유물 ·유적의 고고학적 연구와 함께 진척되어,
금석학의 한 분과로서의 협의의 갑골학에서 고고학을 포함한 광의의 갑골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중앙연구원(中央硏究院)의 발굴을 주재한 동작빈(董作賓)은 2세기 이상에
걸친 은왕조 후반기의 복사(卜辭)를

① 갑골의 출토 상태,
② 서명한 점복사(占卜師)의 이름,
③ 제사를 받는 왕의 명칭,
④ 점복의 형성,
⑤ 문자의 자형(字形),
⑥ 서체(書體) 등에서 초기의 무정(武丁)에서부터 말기의 제을(帝乙) ·제주(帝村)까지의 5기로 구분한 《갑골문단대연구례(甲骨文斷代硏究例)》(1932)를 발표하여 갑골학의 신기원을 열었다.

점에 사용한 갑골은 은허 이외의 초기 유적에서는 멧돼지나 노루의 뼈도 섞여 있었으나, 은허에서 나온 것은 거북의 복부와 등의 딱지 또는 물소의 견갑골에 한정되어 있다.

점은 갑골 뒷면에 불을 쬐어 표면에 생긴 갈라진 금, 즉 조(兆)로 길흉을 점쳤다.

조가 잘 나타나게 하기 위하여 불에 쬐는 뒷면을 깎아내는 가공을 하였고, 이것도 점점 더 복잡해져서 은허 시기에 가장 정교하게 되었다. 점을 마친 뒤에 조 옆에 점을 친 이유를 새겼는데, 이것이 복사, 즉 갑골문자이다.

간혹 갑골 이면에 주(朱) 또는 묵(墨)으로 글씨를 쓴 것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점으로 보면 갑골문자는 조각된 문자가 아니어서, 고유한 의미의 금석학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갑골학은 금석학에서 발전하여 고고학적 부분에도 확대 되었는데,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은왕조의 문자를 대상으로 하므로, 중국 고대문화사의 연구에 필요불가결한 보조학이 되었다.





adadaegu님의 답변


은나라에 대해서


은왕조(殷王朝)는 동이족(東夷族)이었다 !!

은나라에서 사용한 甲骨文字 역시 한자의 모태이므로 漢字 역시 우리 東夷族이 만든 것이다 !!

大東夷! 그 廣大하고도 悠久한, 잃어 버린 歷史를 찾아서!

이른 바 삼황(三皇)인 태호복희.염제신농.황제헌원과 오제(五帝)인 소호금천.전욱고양.제곡고신.제요도당(요임금). 제순유우(순임금)가 동이족이라면 당연히 고대 은나라도 동이족이다.

고대 중국의 역사는 동이족의 여러 지류가 중원으로 흘러 들어가 성립된 왕조들의 역사에 지나지 않으며 현재 저 넓은 대륙땅에 산재한 56개의 소수 민족도 이러한 고대왕국의 잔영일 뿐이다.

중국의 학자들조차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시조라고 주장하는 삼황오제三皇五帝가 동이족임을 인정하고 있는데 왜 우리는 우리의 뿌리를 한반도에서만 찾으려고 하는 것일까!

등등 이곳(http://www.eundynasty.com/)에 가시면 자세한

내용을 보실수 있습니다.
내용출처 : 백과사전외
이의제기 내용추가 (2004-11-19 12:26 추가) 이의제기 내용보기
이의제기를 하셨는데 답변 내용을 잘못 이해하셨군요. 제 주장이 아니라 서로 상반된 견해가 있음을 객관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질문자가 폭넓은 시각을 갖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 답변 내용이고 연구대상임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저는 한자를 우리의 언어라는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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