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기구의 발달배경

열기구의 발달배경

작성일 2005.03.23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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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비행기를 하늘로 보내기 위핸 모두 4가지의 힘이있죠.

날수 있게 도와주는것은 양력인데요

날아서 가게 하는 추진력이 있죠

추진력은 프로펠러나 제트엔진이 쓰이며, 바람의 영향으로 속도가 붙을수도 있습니다.

밑에 이야기는.. 더 자세한 내용입니다.

1. 몽상시대

인간은 먼 옛날부터 하늘을 날기를 희망해 왔는데 이러한 희망을 증명해 주는 고대의 전설이 전해진다. 이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 나오는 전설로서 데달루스(Daedalus)와 그의 아들 아카루스(Icarus)가 밀랍(Wax)과 새의 깃털로 만든 날개를 달고 크레타(Creta)섬에서 탈출하고자 하나 실패하고, 그후 1783년까지의 시대에는 주로 인공날개를 사람의 팔과 다리로 움직여 하늘을 날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중세, 곧 로마제국이 멸망한 서기 476년부터 15세기말까지 일천년간의 꿈에서 깨어난 선각자 중의 한 사람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가 있다. 다빈치는 많은 새를 해부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의 결론은 "새는 수학적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기계이며, 그의 모든 운동을 인간능력으로 구체화 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으며, 1505년에 발표한 이 논문은 후세의 글라이더나 동력항공기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다빈치의 결론은 지상에서만 행동하는 인간의 힘(출력)과 체중에 대한 비율을 너무 과대평가한 점과 극히 복잡한 새의 날개 운동을 너무 과소평가한 모순점을 내포하고는 있으나, 앞으로 돌아올 비행시대를 예고하고 비행을 수학적 법칙에 따라 실현할 수 있다는 결론을 제시하였다는 측면에서 하늘을 날으려는 인류의 꿈을 실현하는데 획기적인 기초를 제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빈치의 제안을 냉정하게 비판하는 일파인 이탈리아의 생리학자이며 수학자이고 천문학자인 "죠바니 알폰조 보렐리"는 그가 전공하는 생리학과 수학을 응용하여 새의 날개치기 운동을 역학적으로 해석하고, 새의 체중과 힘의 관계를 인간과 비교하였다.
이 결과 "인간은 무거운 체중으로 인하여 인력 만으로의 비행은 불가능하다"고 단정하였다. 이것은 다빈치의 제안을 결정적으로 뒤집어 놓고야 말았다. 보렐리가 이때 부정만 하지 않고 다른 운동을 이용하면 비행가능성이 있다고 부언하였다면 비행 발전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2. 부력비행시대(기구와 비행선의 발명)


다빈치가 시사한 비행기는 손쉽게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비행기보다 한발 앞서 하늘을 나는 도구로서 부력을 이용한 기구가 발명되었다.
이러한 착상은 사람의 팔과 다리에 새의 날개를 대신할 수 있는 표면체를 부착시켜 새와 같이 날 수 없다면 구름과 같이 공중에 떠서 하늘을 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러 나오게 된 것으로, 1670년에 가톨릭 신부인 프란시스코 드 라나(Rrancesco de Lana)가 공기보다 가벼운 비행체(Lighter than Air)를 인간비행의 실질적인 해결방안으로 제시했는데 드 라나의 비행선(Aerial Ship)은 얇은 구리판으로 만든 4개의 속이 빈 기구에 선체를 매어 다는 방식이었다. 그는 대기압과 진공에 대하여 그 당시 알려진 이론을 가지고 기구로부터 공기를 빼서 진공을 만든다면 부력이 작용하여 선체가 공중에 뜰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물론 이러한 설계가 실제로 제작되어 실험에 옮겨졌었다면 진공이 된 기구는 외기의 압력으로 찌그러져 실패하였을 것이다. 그후 세계 최초의 열기구 시험비행은 1709년 8월 8일 포르투갈의 인도대사관에서 이루어졌는데, 포르투칼 국.내외, 로마교황 및 각국 고위 사절들이 참석한 가운데 실시되었다. 사용된 열기구는 사람이 탈 수 없는 시험용 소형 모델로서 바르톨로메 데 구스망(Bartolomeu de Gusmao) 신부가 제작, 직접 시험비행을 실시했다.
이 기구는 얇은 종이로 공기주머니를 만들고 공기주머니 아래에 가벼운 접시를 매달아 접시안에 기름을 묻힌 나무를 넣고 불을 붙여 더운 공기를 만들어 공기주머니 안으로 들여보내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었다. 이 열기구는 3.5m까지 빠르게 올라갔지만 안타깝게도 국왕의 시종이 화재를 염려하여 이 열기구를 파괴해 버렸다.

그 후 최초로 기구를 띄운 사람은 프랑스의 제지업자였던 몽골피에(Montgolfier: 1740~1799) 형제로 그들은 불을 때면 연기가 상승하는데 착안하여 종이와 천을 붙인 직경 10m의 기구를 제작하여 1783년 6월 5일 프랑스의 리용(Lyons)에서 많은 구경꾼들 앞에서 시험을 하였는데, 밀짚과 양털을 태워 가열된 연기를 기구안으로 채워 넣어 약 1,800m 높이까지 상승시켰다.
이것은 인간이 만든 물건으로 지상을 떠나 상승한 최초의 기록이다. 같은 해 11월 몽골피에 형제는 기구에 2명의 남자를 태우고 "브로뉴" 삼림에서 이륙하여 파리 상공을 높이 약 900m, 거리 9km, 비행시간 약 20분의 기록을 세웠다.
몽골피에 형제의 기구비행 성공 이후 100여년 동안 기구연구가들은 기구의 방향조종 문제에 대해 고심해왔다. 즉, 기구는 공중에 뜰 수는 있으나 바람에 따라 흐르므로 이것을 조종하기 위한 노, 돛, 바람개비(Fan) 등을 기구에 부착하여 조종을 시도해 보았으나 큰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852년 프랑스의 알리 지파알(Henri Giffard)에 의해 이러한 조종비행에 관한 해결방안이 제시되었는데, 그는 담배(Cigar) 모양의 길쭉한 기구를 만들어서 3마력의 출력을 내는 증기기관에 프로펠러를 달아 방향조종을 시도하였다.



3. 양력비행시대(비행원리의 발견)


인류의 욕구는 구름처럼 떠다니는 비행선에서 나는 비행기로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다.빈치의 "날개치는" 비행기의 암시에 대한 보렐리의 부정적 결론 이후 한세기 반이 흘러갔다. 지상에서만 활동하던 인류에게 "날개치는 비행"은 너무나 복잡한 행위이며 무리한 방식이었다.
그 이후에 영국의 과학자 조지 케이레이(George Cayley, 1773~1857)가 새처럼 날개치는 방식이 아닌 기계적 방식에 의한 비행의 가능성을 시사한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그의 이론은 1809년에서 1810년 사이에 발표된 "공중비행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밝혀졌다. 논문의 골자는 양력의 원리란 연을 공중에 날리는 것과 같으며 실로 맨 연은 알맞는 각도에서 맞바람을 받으면 공중에 떠오르며, 바람이 약할 때는 실을 잡고 뛰어서 바람을 많이 받게 하면 "양력"이 더 많이 생긴다는 논리로써, 받음각(영각: Angle of Attack)을 갖고 비행하는 평판에 생기는 공기력은 비행방향에 평행된 항력(Drag)과 비행방향에 수직인 양력(Lift)으로 나누어지며 알맞는 동력을 써서 항력을 이기면 양력으로써 상당한 중력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케이레이의 또 다른 위대한 발견은 날개 단면을 유선형으로 하여 더 큰 양력을 얻을 수 있다고 시사한 것이다. 이는 날개 윗면을 굽어지게 설계하면 날개 윗면을 흐르는 공기는 날개 아랫면을 흐르는 공기보다 긴 거리를 이동하게 되어 날개 윗면 공기는 아래면 보다 속도가 빨라지며 따라서 기압이 낮아진다. 이리하여 날개 윗면에 생긴 저기압의 작용으로 날개는 끌려 올라가 양력이 생긴다고 하는 획기적인 양력이론이었다. 케이레이는 실험을 통하여 날개를 유선형화 하면 1파운드의 항력 대가로 30파운드의 양력을 얻을 수 있다고 예언하였으며,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원리는 받음각에 의한 연(Kite) 형태식의 양력과 유선형 날개에 의한 양력이 합쳐진 것이라고 최종결론을 내린 것으로 오늘날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이론이 되었다.

그는 1804년 그의 이론을 실험하기 위하여 154평방 피트의 날개면적을 가진 모형 글라이더를 만들었다. 이 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그는 실험에서 발견한 사실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여러 관점에서 볼 때 케이레이경(Sir George Cayley)의 글라이더는 최초로 제작되어 비행을 한 진정한 의미의 항공기라고 할 수 있으며, 그가 발표한 일련의 보고서는 후일에 라이트 형제를 포함한 비행기 설계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케이레이"의 선각자적인 탁견은 양력이론뿐만 아니라 종횡(세로.가로) 안정성을 조사, 연구한 것으로써 비행기가 날기 백년전에 양력의 발생을 이론화 시킨 "케이레이"는 틀림없는 "비행기의 아버지"로 존경할 만하다.



4. 무동력 비행시대(글라이더의 출현)

"케이레이"의 양력이론을 계승한 항공가로서 독일의 오토 릴리엔탈(Otto Lilienthal, 1848~96)이 있는데 그는 48세에 글라이더 시험비행 중 추락하여 사망할 때까지 비행에 일생을 바친 감동적 인물이다.

릴리엔탈은 1889년 "항공기술의 기초로서 새의 비행"이라는 저서를 출판하였고 본격적인 실험을 시작한 것은 1890년부터이며 1891년에 제작한 날개면적 10m, 무게 18kg 크기의 글라이더로서 "케이레이"의 이론에 따라 날개 이외에 수직안정판을 꼬리날개에 부착하였다. 릴리엔탈은 글라이더 날개 중앙에 구멍을 뚫고 거기서 머리를 위로 내밀고 어깨와 팔 무릎으로 매달려 언덕 위에서 뛰어 내려 활공하였다. 여기에서 최대의 문제점은 세로(종) 안정성이었는데, 결국 이것이 그의 생명을 빼앗았다. 릴리엔탈은 승강타를 붙이지 않고 공중에서 두발을 움직이며 신체중심을 이동시켜 세로안정을 얻는 방식을 사용하였으나 새도 아닌 사람으로써 정확한 중심을 유지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랐으며, 머리에 끝을 매서 꼬리날개을 조작하는 방식도 고안하였으나 이러한 방법에 익숙하기 전인 1896년 15m 높이에서 공중조작을 하던중 안정을 잃어 추락하여 사망하였다. 그는 그동안 2,000회 이상의 활공시험을 하였으며, 최장거리 400m, 최고높이 23m까지 상승하였다.

세로안정의 불균형은 제2의 희생을 요구하였다. 릴리엔탈의 용감한 형제인 스코트랜드인 기사 파아시이.핏챠(Percy Pitchery)는 그의 글라이더 "호오크" 호로서 많은 활공시험을 하였으며, 그는 스승인 릴리엔탈의 죽음 후에도 같은 방식으로 실험을 계속하다가 1896년 9월에 같은 사고로 사망하였다.

또 다른 글라이더 연구가인 프랑스 태생 미국인 옥타브 슈뉴우트(Octave Chanute)는 12겹 날개 글라이더를 제작하였고, 다음에 5엽(겹날개), 3엽에서 겹날개로 귀착시켜 이 글라이더로서 2,000회 이상 활공을 하였지만, 한번도 사고가 없었으며 그는 자기의 연구자료를 모아서 1891년 "공중항행법"과 1894년 "공중비행기의 진보"라는 저서를 출판하여 다음날 라이트 형제에게 좋은 참고자료가 되었다.


5. 항공역학의 해명과 동력비행시대


케이레이의 양력이론을 계승하고, 릴리엔탈 및 다른 항공이론가들의 이론을 종합한 결과 귀착된 결론은 동력(Engine)의 장착이었다. 동력비행에 성공한 라이트 형제(Wilbur Wright 1867~1912, Orbille Wright 1871~48) 이전의 사람들은 너무나 이론가이었거나 반대로 너무나 현상에만 고집하는 지나친 실천가였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동력비행의 개발에 필요한 것은 이론을 존중하면서 이론을 실제 시험으로 입증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한 항공선각자들의 출현이 요구되었다.

글라이더의 선구자인 케이레이가 1804년에 만든 모형 글라이더들은 과학적인 이론에 부합되는 것으로서, 이것을 실물로 만들어 이에 맞는 경량인 엔진을 붙이면 성공적으로 비행하는 것은 확실히 가능할 것으로 보여졌다.
이것을 실제로 실행에 옮긴 사람이 바로 미국 오하이오주의 자전거 제조업자였던 라이트 형제로 1903년 이들에 의해서 인류 최초의 유인 동력비행은 실현되었다.

라이트 형제가 인류 최초의 동력비행을 성공하게 된 이면에는 상인이면서도 기술자다운 주의깊은 관찰자였으며, 또한 그들은 대단한 독서가로 특히 비행하고자 하는 욕망은 일찍이 릴리엔탈의 경험과 같은 비행관련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행에 관한 문제를 대체로 3가지로 나누어 생각하였는데, 즉 (1) 지속비행을 할 수 있는 날개의 제작, (2) 동력의 발생과 적용, (3) 비행기가 이륙한 후의 조종 등이었다.
그들은 형이 먼저 제안하면 동생이 같이 협력하는 형태로 상호 협조하여 모든 일을 진행하였으며, 그들은 날개치지 않고 활공하는 새의 움직임을 주의깊게 관찰하였다. 특히 그가 착상한 것은 새가 날개를 좌우 반대로 비틀어 선회하는 방법이었다. 그들은 먼저 두겹 연을 만들어서 1899~1900년에 실험한 후 제1호 글라이더를 제작하였다.

라이트 형제는 제1호 글라이더의 시험결과가 좋아서 자신을 얻었으나 신중하고 합리적으로 실험했다. 더욱 정밀한 방법으로 1901년부터 1902년 8월까지 손수 만든 풍동을 사용하여 - 세계 최초의 풍동실험 - 여러 가지 날개 단면형의 공기역학적 특성을 측정하였다. 이 결과를 이용하여 3번째 글라이더까지 만들어 약 1,000번의 활공비행을 하였다.
1903년 여름부터 동력비행기 제작에 착수한 그들은 항공기 탑재용 엔진(4기통 12마력)을 설계 제작하고 "플라이어(Flyer) 제1호"에 장착하여 1903년 12월 17일 목요일 오전 10시 30분에 인류 최초로 동력비행을 실시하였다.
라이트 형제가 성공한 비결의 하나로서 들 수 있는 것은 약 1년 동안에 걸친 체계적이며 기초적인 풍동실험에 의한 공기 역학적인 해석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라이트형제는 이 실험에 입각하여 1902년 9월부터 10월에 걸쳐 제3호 글라이더 꼬리부분에 수직안정판을 장착하고, 좌우 날개끝 뒷전을 반대로 굴곡시켜 횡안정을 수정하는 방식을 적용하였다.

플라이어는 날개 폭이 40.5피트나 되는 복엽기로서, 날개는 나무로 만든 골격(Frame)에 광목을 덮어 만들었으며 복엽의 날개를 나무로 만든 받침대와 피아노선으로 결합시켰다. 2개의 추진기(프로펠러)는 그들 스스로가 설계해서 만든 가솔린 엔진에 톱니바퀴와 자전거용 체인으로 연결하여 회전하도록 하였다. 이 프로펠러는 수개월 동안의 치밀한 계산을 거쳐 설계한 것이며, 2개의 프로펠러는 비행기에 회전력(Torque)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서로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도록 되어 있었다.
또한 이 비행기는 바퀴가 없었으며, 바퀴 대신 착륙용 썰매를 부착하였다. 이 비행기는 60피트의 레일 위에 있는 작은 트롤리(Trolley)에 얹혀서 엔진의 동력에 의해서 충분한 속도가 얻어졌을 때 트롤리에서 분리되어 비행이 시작되는 방식을 택하였다.

날개의 조종은 조종사의 대퇴부(엉덩이)에 연결된 줄을 이용하였으며, 조종사는 아래 날개의 중앙에 엎드려서 조종을 하도록 하였다. 좌우로 방향을 바꿀 때에는 엉덩이를 옆으로 움직여서 날개를 움직였고, 상승하거나 하강할 때에는 앞쪽에 달려 있는 승강타를 기울여서 조종하였다. 조종사의 무게를 포함한 기체중량은 750파운드(340kg)였다.

후에 오빌 라이트는 첫 번째 비행을 성공한 후, 역사적인 순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이 비행은 겨우 12초밖에 계속되지 못하였지만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을 태운 기계가 스스로의 동력으로 하늘을 안전하게 속력의 감소없이 날았고 이륙할 때와 같은 높이의 지면에 착륙하였다."
이렇게 하여 1903년 12월 17일은 항공역사상 신기원이 시작된 날로 라이트 형제의 성공은 많은 사람들에게 비행기 제작의 호기심을 크게 불러 일으켜 항공기 발달을 가속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라이트 형제와 듀몽의 비행에 자극을 받아 비행을 향한 열기는 더욱 고조되었는데 프랑스의 보아상(Voisin)형제, 루이 볼레리오, 앙리 팔망(Henri Farman), 영국의 로벨 에스노.펠트리 등이 각각 설계한 비행기와 또는 "레온 루바 밧술"이 설계한 "앙트와 넷트" 등의 다양한 비행기들이 출현하였다.

이러한 프랑스의 위력을 과시하는 행사인 인류 최초의 비행대회가 1909년 8월 22일부터 8일간 파리 북동지인 란스에서 당시로서는 최신 항공기들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어 항공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1908년 윌버 라이트가 프랑스에 와서 비행시간 2시간 20분, 연 비행거리 150km인 대기록을 세운데 대결하듯 1909년 7월에 프랑스인 볼레리오가 영불 해협 횡단비행을 성공시킴으로써 프랑스의 자존심을 다소 회복하였다.


6. 제1차 세계대전과 항공기 발달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비행기는 하나의 스릴 있는 진기한 스포츠용구로 생각되고 있었으며, 무기로서의 사용가치가 충분히 검토되기 전인 1914년에 제1차 대전이 발발했다. 그러나 1차대전을 계기로 항공기의 필요성이 증대됨으로써 급격한 성능향상을 보이게 되었다. 미국의 경우 대전에 참전하게 되었을 때 미육군 항공대(공군의 전신)는 55대의 항공기밖에 보유하고 있지 않았으며 그나마 대다수는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1914년경까지 항공기는 시속 90마일 정도의 성능이었으며, 전쟁이 긴박해짐에 따라 대량의 성능 좋은 항공기가 필요하게 되었다. 1차대전 말기에는 시속 140~155마일로 비행할 수 있는 항공기가 설계되었고, 1,000마일의 무착륙 비행을 할 수 있는 항공기들이 출현하였다.

전쟁 초기에 항공기는 주로 정찰임무를 담당하여 적의 위치를 탐색하는데만 이용되었으며 무장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찰비행 중 적기와의 조우가 잦아지자 조종사들은 권총을 휴대하고 공중에 올라가 서로 권총으로 대결하는 공중전이 벌어졌으며, 곧 이어 기관총을 항공기에 탑재하여 본격적인 공중전을 벌이게 되었다.
초기의 공중전에서 사용된 기관총은 항공기 전방에 있는 프로펠러의 손상을 피하기 위해 항공기 측방 또는 후방에서 발사가 이루어졌으나, 1915년 프랑스 조종사인 롤랑 가로스(Roland Garros)가 프로펠러에 장갑강판을 구부려서 부착하여 항공기 전방으로의 기총을 발사할 수 있도록 되었다. 독일도 전방발사 기총의 이점을 충분히 인식하여 치차(Gear)를 이용한 프로펠러 회전 동기식(Synchronized) 전방발사 기총을 개발하여 프랑스에 보복하였다.

이때부터 정찰기로서의 항공기의 역할은 전투기로 탈바꿈하게 되었으며 많은 항공전의 영웅들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1차대전을 통하여 항공기는 전쟁에 있어 필수불가결의 중요 병기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4년간의 전쟁기간을 통하여 항공기술 및 산업면에서 놀라운 발전을 보게 되었다. 즉 1차대전의 항공기 발달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항공기 성능이 전반적으로 향상되었으며,
둘째, 전투기, 폭격기, 정찰기 등 용도에 따라 항공기 형태가 확실하게 분류되었으며,
셋째, 항공기의 본격적인 발달로 무기로서의 비행선은 무가치하게 되었고,
넷째, 대전 중 항공기의 급격한 소모 및 용도 다양화로 그 생산방법이 공업화되어 대량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1차대전 중 항공기 설계, 기술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는 독일의 공학자인 휴고 융커스(Hugo Junkers)가 제작한 전 금속제의 단엽기로 이 항공기는 외팔보(Cantilever)의 날개를 갖고 있어서 외부의 받침대(Strut)나 당김줄(Bracing)이 필요가 없게 됨으로써 구조적 혁신을 이루게 되었다. 대량생산 측면의 좋은 예로 대전 전 프랑스의 월평균 항공기 생산대수는 60여대였으나 대전 참가 후 4개월이 경과한 후에는 총 5,000여대로 급속히 증가하였으며, 월평균 항공기 소모율도 전체 생산대수의 42%에 달하였다(참고: 미국 48%, 독일 37%)

항공기의 군사적 운용측면에서 1차대전은 그 의의가 막중하다고 할 수 있는데, 대전 전인 1910년경에 군용기로서 기술적으로 실용화된 항공기는 1911~1913년경부터 조직, 편성면에서 전술적 용도로 구체화되기 시작하였고, 대전 직전인 1913~1914년부터 프랑스나 독일군 작전부를 중심으로 '비행기는 단순히 탐색만이 아니고 장래 지상결전에 참가하여 유리하게 협력할 수 있다'라는 주장이 강하게 표출되었다.
이리하여 대전 말기인 1917년경에는 항공부대를 별도로 편성하여 항공작전을 전문적으로 수행하기 시작하였으나, 1차대전 중 항공기의 운용은 여전히 지상군 부대에 대한 지원임무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던 것이 1차대전이 끝나고 부터는 전쟁에서의 경험과 교훈 및 이탈리아의 '듀헤' 장군과 같은 많은 항공사상가들의 논리적 주장에 힘입어 항공력의 독립화 형태를 보이기 시작하여 유럽 각국에서 공군은 독자적인 군으로서 속속 독립하게 되었다.

1918년에 프랑스는 항공사단을 창설하였고, 영국은 공군을 육.해군과 다른 별도의 군으로 독립.편성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공군을 창설하였다. 한마디로 1차대전의 가장 중요한 군사적 의의는 바로 항공력의 중요성 인식과 공군 독립체제의 형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7. 대비행 시대의 전개


제1차대전이 종결된 다음해인 1919년부터 1933년까지의 14년간은 대장정, 즉, 장거리 비행기록 수립시대로 전개되었다. 장거리비행 경쟁의 첫테이프를 끊은 나라는 제1차대전 때 그다지 활약이 많지 않았던 이탈리아로서, 1920년 2월 14일 "로마"를 출발하여 중동, 인도, 중국 상해 그리고 한국 서울 여의도를 거쳐 5월 11일에 일본 동경에 도착하였다. 2대의 SVA기에 페리린과 별 파니니, 마쉐로와 마렛트의 2개조로 편성하여 비행시간 109시간, 평균시속 160km로 장거리 비행에 성공하였다.

비행중 최고 속도 기록은 시속 240km로 당시로서는 상당한 고속비행이었다. 이 대장정은 또한 당시 항속거리가 짧은 항공기로서 한국을 항로상에 징검다리로 이용한 첫 사실로 우리나라 항공역사에도 큰 의의가 있다. 그 다음의 대장정은 미국의 전직 우편비행 조종사였던 찰스 린드버그(Charles A. Lindberg)에 의한 역사적인 세계 최초의 무착륙 대서양 횡단비행으로 그의 용감한 비행은 세계 항공사에 길이 기억될 훌륭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미국에서는 우편물 수송을 위한 우편비행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는데, 1925년 정부주관의 우편비행기 운영에 관한 법안인 켈리 법안(Kelley Act)이 의회에서 통과되고 그 이듬해인 1926년에는 항공상업법(Air Commerce Act)이 제정되어 미 상무성내 항공국이 창설되는 등 상업항공이 급속히 발전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비행은 가능하였다. 특히 우편비행 조종사 시설에 쌓은 그의 야간비행 기량은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역사적인 비행은 1927년 5월 20일 뉴욕의 루즈벨트 비행장을 이륙하여 대서양을 횡단, 총 5,800km의 거리를 33시간 30분 동안 비행하여 프랑스 파리 근교의 르 부르제(Le Bourget)비행장에 무사히 안착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때 그의 나이는 불과 25세였으며, 린드버그가 탑승한 항공기는 미국 랜(Ryan)사가 제작한 NYP기인 '세인트 루애스의 정신(Spirit of St. Louis)'호로서 총 1,400리터의 연료탑재 능력을 가진 야심적 항공기였다. 세인트 루이스의 정신(Spirit of St. Louis)'호의 실물은 현재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대서양 횡단비행에는 한 프랑스인이 희사한 25,000달러의 상금이 걸려 있어서 린드버그 이전에도 몇 번의 시도가 있었다. 즉, 린드버그의 비행이 있기 바로 전해인 1926년 9월 프랑스 제일의 격추왕 루네 퐁크(Rene Fonk)가 도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린드버그의 비행 불과 2주일 전인 1927년 5월 8일에는 프랑스의 샤를르 낭제셀이 백조호에 탑승, 파리에서 이륙하였으나 행방불명되었다.
새로운 항공로를 개척하려면 큰 위험이 따르며 과학적인 준비와 우수한 기술, 그리고 용의주도한 승무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처녀비행에 일단 성공하게 되면 지형, 기상상황, 비행 소요시간을 실지로 측정할 수 있으며, 이후 항공망 구성의 귀중한 경험과 자료를 획득할 수 있게 된다.


8. 상업항공과 현대 항공기술의 발전


찰스 린드버그에 의한 대서양횡단 비행의 대성공은 각계에 자극을 주었으며 각국에서는 비행기로 승객이나 화물을 운반하는 항공수송업을 본격적으로 육성하는데 주력하게 되었다. 제1차대전 때에 "죽음의 무기상인"이었던 포커(Fokker)는 평화가 찾아오는데 따라 재빨리 고익단엽 단발 수송기인 F.B/3 제작에 착수하였다.
이 기종은 1926년 북극비행, 1927년 남극비행, 192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호주 브린스베인까지 11,00km 9일간의 장거리 비행에 성공적으로 사용되어 그 우수성을 발휘하였다. 이 기종은 성능은 우수하였으나 순수한 목재날개를 장착하고 있어 돌풍, 요란 등의 악천후에 영향을 많이 받는 취약점이 있어 불가피하게 금속기로 개조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따라서 중.소형기로서 모험적인 장거리 비행을 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상업비행으로 관심이 바뀌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30년대의 항공기 개발 방향도 자연 이전의 기록비행용 또는 경기용 특수 항공기 개발에서 실용기의 개발과 성능향상으로 전환되었는데, 1930년대의 항공기 개발은 다방면에서 급속한 기술적 진보를 보이게 되었다. 그 주요특징으로서 기체는 전천후성을 갖춘 금속화 방향으로 진전되어 경금속 알루미늄이 사용되었다.
이들 재료의 진보는 복엽식 날개구조에서 단엽식으로 전환할 수 있게 되었으며, 날개의 부착위치도 고익에서 저익으로 전환되어 항공기 성능이 현저히 향상되었다.
또한 접개식(Retractable) 이.착륙 장치와 양력 추가발생 장치인 플랩(Flap)이 개발되고 과급기(Supercharger)가 부착된 효율이 높은 엔진이 개발되었고 가변피치(Variable Pitch) 프로펠러가 사용됨으로써 고공, 고속 및 경제적인 비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외에도 무선통신 및 항법장비와 각종 비행계기의 개발로 인해 야간 및 계기비행 능력이 크게 증대되었다. 이 당시 대표적으로 우수한 상업용 항공기로서 미국의 Douglas DC-3 항공기를 들 수 있는데 이 항공기는 금속제 단엽기로서 획기적인 항공기로 평가를 받았으며, 1936년 7월 시카고에서 뉴욕까지 최초로 비행한 후,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까지 세계 수송기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그 당시 전세계 항공로의 거의 90%를 석권하였다.

이 DC-3 항공기는 그때까지 이루어진 연구개발의 결과가 종합된 혁신적인 대형수송기로서 새로운 항공수송 시대의 전환점이 되었는 바, 금속(All Metal)의 단엽기로서 강력한 공냉식 성형엔진(Air Cooled Radial Engine)을 양쪽에 장비할 수 있는 튼튼한 날개를 갖고 있었으며, 빠른 속도와 안정성 및 높은 경제성으로 인하여 각 항공사는 이 기종을 주력 비행기로 답변확정하였고, 미국은 DC-3 항공기와 그 후속기의 개발로 세계 상업항공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기타 속도향상에 있어서는 1907년 시속 41km이던 것이 1936년 4월 26일 독일의 벤델(Wendel)은 시속 755km로 프로펠러기로서의 최고속 비행기록을 수립하였으며, 고도는 1909년에 453m이던 것이 1938년 10월 22일 피치 복엽기로 17,033m, 항속시간은 1903년 윌버.라이트가 59초 비행한 것이 1939년에는 90시간 이상, 항속거리는 1908년 150km이던 것이 1925년에 3,166, 1938년에 11,520km로 기록이 갱신되었다.


9. 제2차 세계대전과 항공기 발달


1차대전에서 항공기의 유용성이 입증됨에 따라 그 활용도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항공기를 함정에 탑재하여 필요한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항공모함이 등장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초월, 언제 어디에서나 대규모 항공전력을 운용 가능케 되어 항공기는 전장의 보조수단이 아닌 결정적 수단이 되기에 이르렀다.
전운이 또 다시 전 세계를 뒤덮기 시작했던 1940년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매년 50,000대의 군용항공기를 생산하는 항공기 생산계획을 발표하였다. 당시 이 계획은 다른 나라에서는 공상적인 것으로 보았으나 미국은 이 계획을 실현시켰으며, 실제 전쟁 중에는 그 이상의 항공기를 생산하였다. 군의 새로운 작전요구에 따라 항공기의 속도와 항속거리를 증가시킨 새로운 종류의 항공기를 설계하여 생산하였으며 전쟁이 끝날 무렵까지 약 30만대의 항공기가 생산되었다.
미국 외의 여러 나라에서도 2차대전을 계기로 많은 수의 우수한 항공기를 개발, 생산하여 전쟁에 투입하였다. 제2차 대전 초기에 사용된 전투기로서는 독일의 하인켈, 메사 슈미트와 융커스, 영국의 스피트 파이어와 호크 허리케인, 미국의 그루만 F6F 헬켓트, 일본의 제로센 전투기 등이었다.
또한 전쟁의 후반에 개발된 항공기는 미국의 록히드 P-38 라이트닝, F-51 무스탕, 콜세어가 있으며, 독일의 포케 프 FW190과 구소련의 La-5등이 유명하다. 제1차 대전 때의 항공기는 거의 정찰 및 전투임무로 활약하였고, 폭격은 원시적인 수법으로 수류탄을 투하하는 정도의 전술적 목적으로만 운용되던 것이 2차대전에 들어서는 폭격기가 특별히 맹활약을 하였다.
특히 전쟁말기에는 전선부근에 배치된 적 지상군 부대를 공격하던 전술폭격의 형태를 넘어 적지 깊숙이 침투하여 직접적인 전투요원 및 작전시설만이 아니라 간접적인 전쟁지원 요원들 까지도 공격대상으로 하였으며, 적 국력의 심장부를 강타하여 전의를 상실케 하는 전략폭격에 대량의 항공기가 동원되어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노력을 담당하게 되었다.

제1차대전 때의 독일이 제펠린 비행선으로 런던을 야간에 공습한 것이 바로 전략폭격의 시초라 할 수 있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미국과 영국의 장거리 폭격기들에 의한 대규모 폭격으로 나치 독일과 군국 일본을 굴복시킴으로써 연합군이 승리하게 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미국의 대표적인 장거리 폭격기인 B-29(Super Fortress)는 많은 폭탄 적재량과 우수한 장거리 비행능력으로 무수한 전략적 폭격임무를 수행하여 적의 전쟁수행 능력을 파괴하는 한편, 전의를 상실케 하는 등 그야말로 적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1945년 8월 B-29에 의한 원자탄 투하는 일본을 무조건 항복케 하는 결정타가 되었다.

2차대전 당시의 주요 폭격기로는 독일의 '하인켈 He-111'과 융커스 Ju-88', 영국의 '아브로 랭커스타'와 '힌드레 페이지 해리팍스', 미국의 'B-17'과 'B-29'등을 들 수 있다. 2차대전 중의 폭격기에 있어서 특기할 점은 폭탄투하 방식의 개선으로서 조준장치를 사용하여 정조준 폭격을 실시함으로써 폭격의 정확도를 높였으며, 레이더를 이용하여 폭격기를 목표상공으로 유도, 표적을 확인케 함으로써 야간이나 구름이 낀 날씨에서도 정확한 폭격이 가능하여 피해효과가 대단히 높아졌다는 것을 들 수 있다.
한편, 2차대전 중 항공기 발달사와 관련한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의 하나로 제트기의 출현을 들 수 있는데 당시 분사추진 항공기는 전쟁에 사용하기에는 충분한 준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였으나 2차대전 말기에 소수이기는 하나 실전에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독일은 약 1,000대 정도의 제트기(Me-262)를 제작하여 이중의 몇대 만을 대전말기에 참전시켰으며 연합군측 제트항공기의 최초 출격은 노르망디(Normandy) 상륙작전에 출격한 영국의 쌍발 그로스타 미디어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제트기의 개발은 대전이 끝나서야 이루어졌으며, 1948년 영국의 제트기가 초음속 비행을 함으로써 제트시대의 막이 올려지게 되었다.


10. 제트엔진의 등장과 실용화


제2차대전을 통하여 항공기 발달사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제트엔진과 레이더의 등장이다. 제트엔진이 출현된 이유로는 피스톤 엔진에 의한 "프로펠러" 방식은 항공기 성능향상의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프로펠러는 회전하는 날개이므로 비행기가 음속에 도달하기 전에 프로펠러 끝 부근에 충격파가 발생하여 기체를 음속까지 가속시키지 못한다. 따라서 프로펠러 추진방식의 항공기로서는 이론상 시속 755.1km 이상의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프로펠러 추진방식은 엔진의 힘으로 프로펠러를 고속 회전시켜 공기를 항공기 뒤로 밀어냄으로써 그 반작용으로 항공기를 전방으로 이동시키는 방식을 적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프로펠러를 사용치 않고 다른 수단으로 공기를 뒤로 밀어낼 수 없을 것인가에 착안한 것이 제트엔진이다. 제트엔진이란, 공기를 흡입한 후 동체 내의 연소장치에서 연료를 혼합하여 연소되게 하여 고온고압의 가스를 발생, 뒤로 분사시켜 그 반작용 힘으로 추진되는 반사 추진장치의 일종이다.
제트엔진의 발명은 영국, 독일, 이태리, 미국 등 각자의 주장이 있으나 이중 영국의 주장이 가장 유력한 설이다. 이는 영국의 프랭크.횟틀이 케임브리지대학 재학 중에 고안하고 1930년에 정식으로 특허를 내면서 이루어졌다.
이를 계기로 독일은 1939년 8월 '하인켈 He-178'기에 이탈리아는 1940년 8월에 '카프로니 캄피니 CC-2'항공기에 각각 제트엔진의 토대가 되는 발동기 제트를 장착하여 시험비행에 성공함으로써 제트시대를 맞게 되었다.

1941년 5월 14일 독일은 프랑크 횟틀의 제트엔진을 '글로스터 E28-39'기에 장착하여 비행에 성공하였으며, 영국은 1944년 '글로스터 미디어' 제트전투기를 개발하였는데 Rolls Royce 터보제트 엔진을 장착하여 우수한 성능을 나타냈으며 독일의 영국본토 공격용 V-1 로켓 요격에 활양하였다.
미국은 제트추진 군용기 개발에 있어 남다른 노력을 꾸준히 기울여 왔는 바, 1942년 Bell 10 XP-59형 '에어코메트'(Air Commet)기가 개발되고 1944년 1월에는 Lockheed사의 'F-80 Shooting Star'가 제작되었으며, 1947년 6월 30일에는 'Bell X-1'에 의한 역사적인 세계 최초의 로켓 항공기의 비행이 실시되기에 이르렀는데, 유명한 미국의 시험비행 조종사인 예거(Charles E. Yeager)가 탑승하여 시속 1003.91km(약 542KTS)의 당시 세계 최고속도를 수립하였고, 동년 10월 14일에는 세계 최초로 음속의 장벽을 돌파하였다.
미국은 지속적으로 항공기 분야의 연구개발을 추진하여 프로펠러 비행시대에서 제트비행, 그리고 더 나아가 초음속 비행시대로의 전진을 가속화 시켰는데 초음속 비행을 위한 항공기 구조적인 문제 및 고속비행시 발생하는 고열과 관련한 금속 재료적인 제반 문제점을 무난히 극복하여 드디어 "F-86 세이버(Sabre)" 제트전투기를 개발 함으로써 명실공히 제트시대를 선도하기에 이르렀다.
이 F-86 전투기는 1950년대 초 한국전에 참전하여 소련의 미그(MiG) 전투기와 격돌, 세계 최초의 제트기간의 공중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13:1의 우세한 격추율을 기록하여 당시 미국의 항공기 제작기술이 소련보다 한발 앞섰음을 증명해 주었다.

이러한 제트시대로의 변화는 비단 군용 전투기에서 뿐만 아니라 상용 민간항공기에도 넓게 파급되었는 바 즉, 제2차 대전 중에 급속하게 발전되었던 폭격기나 군용 수송기의 설계 및 제작기술은 전쟁이 끝나자 장거리 수송기에 응용되었으며 성능도 향상되었고 최대속도는 2차대전 중의 전투기와 비슷하며 항속거리는 대서양 무착륙 횡단이 이루어질 정도로 발달되었다.
대표적인 장거리 고속수송기로는 B-29에서 발전한 보잉사의 '스트라트 크루저'와 C-54에서 발전된 더글라스사의 'DC-4/6/7/8' 등으로 이 항공기들은 모두 2차대전 중에 그 기초연구가 이루어졌다. 이후 민간항공기에도 제트기가 등장하게 되는데 세계 최초로 취항한 민항기는 영국의 터보제트 여객기인 'Commet Ⅰ'항공기로서 1952년 5월 2일부터 런던과 남아프리카의 요하네스버그간 정기항로에 취항하였다. 그러나 이 Commet Ⅰ 항공기는 수년간 연속적인 공중폭발 사고가 발생하여 대대적으로 개조되기도 하였다.

본격적인 제트수송기 시대는 보잉사의 독자적 계획에서 시작되었으며 제트수송기는 100명 이상의 승객을 탑승하고 무착륙으로 대서양을 횡단하여 태평양을 한번 착륙하고 횡단할 수 있는 성능을 구비토록 요구되었다.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기종으로 보잉 707이 등장하여 1954년 7월에 처음 각 노선에 배치되었고, 이어서 보잉 727이 출현하였다.
원거리용으로는 미국의 보잉 707, 더글라스 DC-8 개량연장형, 소련의 TU-104와 IL-62, 중거리용으로는 보잉 727, 프랑스 슈드 아비아시용사의 카라벨 등이 있다. 음속이하의 제트수송기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한 단계는 터보팬 항공기의 개발로 500명을 한번에 수송할 수 있는 대형기의 필요성에 많은 전문가들은 회의심을 갖게 되었으나 록히드사의 L-500(C-5)와 더글라스사의 DC-10, 그리고 보잉 747 등 거대기 실용시대로 발전되었다.
또한 1970년대에 벌써 초음속 제트여객기(SST: Super Sonic Transporter)인 영.불 합작의 콩코드(Concorde), 소련의 TU-144등이 출현하여 음속의 2배로 비행을 하기에 이르렀다.


11. 현대의 항공기


일찍이 네덜란드의 알버트 프레스만은 "항공기의 혜택으로 인류는 하나의 공동체로 뭉쳐지며 대기의 바다를 통하여는 여러 나라의 국민이 하나로 통일하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그의 예언은 이제 서서히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인류 최초의 동력비행이 라이트형제에 의해 실현된 후, 불과 수십년 안에 항공기술은 다이나믹한 발전을 거듭해 지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미줄 같은 항공망으로 뒤덮이게 되었으며, 축적된 첨단 항공우주 과학기술은 인간을 달표면에 안착시키게까지 되었다.
이러한 항공분야의 눈부신 발전은 비행기원 100주년을 내다보는 2000년대를 맞이하면서 더욱 성숙되어 항공기는 더 이상 발전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고도로 정밀화 되었다. 최근의 걸프전에서 대활약을 했던 '보이지 않는 항공기' F-117스텔스(Stealth)기를 비롯하여 수년간의 연구개발 끝에 답변확정된 미국의 F-22 차세대 제공전투기 및 B-2폭격기 등을 보고 있으면 불과 100여년 전만 하더라도 인류의 '꿈'에 불과했던 하늘로의 비상이 너무도 빨리 현실로 이루어져 인간의 무한한 능력에 새삼 경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현대의 항공기는 성능상의 발전 뿐만 아니라 그 용도도 다양화 되어 항공기 종류에 있어서 현재 세계적으로 운용되고 있는 군용기만으로도 수백종에 이르고 있다.
이제 인류는 지구공간의 범위를 넘어서 우주공간의 정복으로 그 방향을 선회하였는 바, 속도 3~6MPH의 도보시대에서 속도 30~45MPH의 기마시대, 그리고 아음속 항공기 시대를 거쳐 초음속의 항공기 시대로 오기까지의 과정을 비추어 보면 우주의 정복도 멀지 않은 장래에 확실히 이루어질 것이다.




답변되셧는지요??

나름대로 좀 적어봤습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앞 분이 잘 적어서 사진이나...

 

 

1783년 11월 몽골피에 형제에 의해 그토록 염원했던 최초의 유인비행이 이루어졌다. 지름 10m의 거대한 기구는 500m 높이까지 올라가서 25분 뒤에 9km 떨어진 곳에 무사히 내려왔다. 그 거대한 기구가 떠오르게 하는 데는 뜨거운 공기가 사용되었다. 공기를 가열하면 부피가 팽창되고 가벼워져서 위로 올라가 되는데 그러한 원리를 이용한 장치가 바로 열기구인 것이다. 열기구는 공기를 가열하기 위한 연소장치(Burner), 뜨거운 공기를 가두어 줄 동그란 모양의 공기주머니(Envelope), 그리고 사람이나 비행에 필요한 장비를 싣는 바구니(Basket or Gondola)로 이루어져 있다. 초기의 열기구는 공기주머니의 공기를 가열하기 위해서 밀짚과 나뭇가지 등을 태워서 종이로 만든 공기 주머니를 가열시켰다. 하지만 1950년대 이후로는 액체 프로판 가스(LPG)를 연료로 공기주머니를 가열시키고 있다. 특히 열기구에 이용되는 공기주머니는 연소장치의 열에 잘 견디고 놓은 고도에서 찢어지지 않아야 하는데, 폴리우레탄이 코팅된 나일론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부터 코딩하시면 됩니다-->
열기구가 떠오르게 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먼저 송풍기로 공기주머니에 찬 공기를 채워 넣는다. 그리고 나서 공기주머니가 부풀어 오르게 되면 연소 장치로 연료를 태워 공기 주머니 안의 공기를 가열시킨다. 그렇게 가열된 공기는 가벼워져서 위로 올라가게 되고 공기주머니를 서서히 들어 올리게 된다. 시간이 충분히 지나 공기주머니 안의 공기가 충분히 가열되면 공기주머니에 부력(떠오르게 하는 힘)이 생겨 열기구를 들어 올리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열기구는 둥근 공 모양을 하고 있지만, 자동차 모양, 음료수깡통 모양, 동물 모양 등 다양한 열기구들이 세계 각지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광고 및 전시효과를 위한 용도만이 아닌 사람이 직접 탑승하여 공기의 기상 상태를 측정하고 항공자료를 분석, 파악 하는데도 사용되고 있으며, 세계일주, 동해안 횡단 등 항공 스포츠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한 국내에서도 대통령배 대회, 기구협회장배 대회 등이 열리고 있으며, 토함산, 안산, 양평 등 여러 곳에서 즐길 수 있다.

같이 뽑아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열기구의 발달배경

열기구의 발달배경은 어떻게 되나요??? 두 사람을 위해 올립니다. 1783년 11월 몽골피에 형제에 의해 그토록 염원했던 최초의 유인비행이 이루어졌다. 지름 10m의 거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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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기구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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