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스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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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8.06.20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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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수학의 아버지 가우스(Garl Friedrich Gauss;1777~1855)는 대수학의 기본 정리를 비롯하여 정수론, 해석 함수, 타원 함수, 미분 기하학, 비유클리드 기하학, 위상 수학 등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다. 또 천문학과 전자기학, 측지학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영주의 원조를 받아 진학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Garl Friedrich Gauss;1777~1855)는 프러시아 북부의 하노버와 가까운 브라운슈바이크에서 1777년에 태어났다. 가우스의 아버지는 정원사와 벽돌공 일을 하고 있었는데, 자기 자신이 그의 능력에 합당한 교육을 받는 일에 한사코 반대하였다. 이 아버지에 대해서는 한번도 마음으로부터 애정을 느낀 일이 없었다고 가우스 자신도 공언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가우스의 어머니는 가우스에게 큰 기대를 걸고 애정을 그를 지켜 보았다. 97세로 이 세상을 떠난 그녀는 죽을 때까지 자식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가우스도 진정으로 마음으로부터 어머니를 섬겼는데, 어머니가 세상을 뜨기 4년 전에 앞이 안 보이게 되자 자신 이외의 누구도 어머니의 시중을 들지 못하게 했을 정도였다.

어머니의 남동생(외숙부) 프리드리히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어린 가우스를 잘 교육하였다. 이 외숙부에 대해 가우스가 감사해 하는 마음은 그 자신의 이름에 프리드리히가 되어 영원히 남아 있다.

가우스 자신이 "나는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벌써 계산하였다."고 말한 것처럼 그의 계산 능력은 천부적이어서, 세 살 때에 이미 아버지의 계산 잘못을 지적했을 정도였다. 또 10세 때에는 학교 선생님이 낸 등차 급수(等差 級數, geometric series)의 합의 문제를 즉석에서 풀어 선생님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이를 기뻐한 선생님은 당시에 가장 내용이 충실하다는 산술 교과서를 사서 가우스에게 주었다. 가우스가 단숨에 그것을 읽어 버린 것을 보고 선생님은 놀라고 말았다. 그 후부터는 그 선생님의 친구였던 파테르스가 대수학에서의 가우스의 스승이 되었다. 파테르스가 대수학에서의 가우스의 스승이 되었다. 파테르스는 또 브라운슈바이크공(公)이었던 페르디난(Ferdinand) 공작에게 가우스의 이야기를 하였고, 가우스는 이 공작의 재정적 원조 덕택으로 카롤린 고등학교(3년)와 괴팅겐 대학(3년)을 마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공작은 가우스에게 연금(年金)을 주어 그가 연구를 계속할 수 있게 하였다. 1806년에 나폴레옹이 프러시아를 침공하자 공작은 프러시아 군의 사령관이 되어 싸웠는데 결국 패하고 말았다. 당시 브라운슈바이크에 살았던 가우수 집 앞의 큰 길을 반사 상태의 중상을 입은 공작의 마차가 지나가는 것을, 가우스는 슬퍼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공작이 죽은지 2년 후에 가우스의 아버지도 이 세상을 떠났다. 보호자를 잃어 곤궁에 빠진 가우스에게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현재의 레닌그라드) 학사원에서의 부름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이미 세계 최고의 수학자가 되어 있던 가우스를 독일에 머물게 하기 위하여 홈볼트(A.F.von Humboldt;1769~1859)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가우스에게 괴팅겐 천문대장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 괴팅겐에서 가우스는 그 후 50년 동안 연구 생활을 하게 되었다.

고교 시절에 최소 제곱법을 발견

가우스의 생활은 매우 간소하였다. 어떤 친구가 말한 것처럼 '작은 서재, 녹색의 덮개를 씌운 작은 책상, 희게 칠한 키가 큰 책상, 폭이 좁은 소파, 70세 때부터 사용한 팔걸이 의자, 갓이 달린 램프, 불기가 없는 침실, 변변치 않은 식사, 실내복, 벨벳의 모자, 이것이 그가 필요로 한 모든 것이며 그것은 또한 그에게 썩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는 오락으로 새로운 과학, 외국어, 고전 문학, 그리고 세계 정치를 즐겼다. 그는 매일 아침 한 시간 정도 박물관에 들러 세계 각국에서 오는 신문을 읽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의 보호자였던 페르디난드 공작이나 그의 조국, 그 자신을 괴롭혔던 나폴레옹의 생애에 관한 문헌들도 이리저리 뒤지며 이책 저책을 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등학교 재학 중에 가우스는 뉴턴의 <프린키피아(Principia)> (자연 철학의 수학적 여러 원리)를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후 일새 동안 뉴턴에 대한 가우스의 존경심은 변하지 않았다. 가우스는 고등학교에 재학할 때부터 정수론(整數論,Theory of numbers)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으며, 또 '최소 제곱법(method of least squares)'을 발견하였다. 또 많은 측정을 하여 미지수의 수보다도 훨씬 많은 방정식을 얻었다. 이 경우에 가장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미지수의 수치를 추정하는 방법이 바로 최소 제곱법이다.

1796년에 19세의 가우스는 자와 컴퍼스만으로 정17각형을 작도하는 방법을 발견하였는데, 이것이 가우스로 하여금 수학의 세계에 헌신하겠다는 결단을 내리게 하였다. 이 1796년~1814년에 이르는 사이의 수학적 발견을 가우스는 과학 일기에 기록하였다. 이 일기가 학계에 공표된 것은 가우스가 세상을 떠난 후 43년이 지나고 나서의 일이었다. 이 기술은 장기간의 연구 결과만을 간단히 기록한 것이로, 그 해독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그 안에 기록된 146개의 기술 중에서 두 개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참으로 놀란 만한 일기인데, 이것은 당시의 수학계보다도 가우스가 약1세기 정도 앞서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증거이기도 한다.

이처럼 개인의 일기에 쓴 것이지만. 가우수는 그가 얻은 결과를 여간해서 공표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완전주의 때문으로, 마지막에 발표할 때에도 그 결론에 도달하게 된 사고 과정이나 기초 등은 완전히 제외하였다. 따라서 그가 얻은 결과는 옳았지만 그것을 일반 수학자가 이해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 사이에 주석이 있어야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이었다. 그가 사용한 스탬프에는 적은 수의 과실이 달린 한 그루의 나무가 그려져 있는데 '적은 수이지만 다 익었다.'는 표어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전적으로 그 표어 그대로 일하는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정수론은 수학의 여왕이다.'

1799년에 가우스가 박사 학위를 딴 논문의 제목은 <대수학의 기본 정리>이다. 이 논문은 모든 대수 방정식(代數方程式)이 그 차수와 같은 수의 근(根,root)을 가진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가우수에 따르면 이 경우의 근은 a+bi의 형태를 하고 있다. 단 a와 b는 실수이고, i는 허수(虛數,imaginary number)'라고 불리게 되었다. (a, b)를 데카르트 좌표(카테시언 좌표)라고 하고 복소수를 평면상의 한 점에 대응시켜 이 점과 원점을 연결하는 화살표를 생각하면, 이 화살표는 역학이나 물리학에 자주 등장하는 벡터(vector)와 비슷한 성질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힘의 합에 관한 '평해 사변형의 법칙'은 그것이 그대로 복소수의 합에 대응하는 것이다.

1801년에는 저서 <정수론 연구>를 출판하였는데, 이 책은 그의 후원자였던 페르디난드 공작에게 바쳐졌다. 정수론은 가우수가 가장 높이 평가한 연구 분야인데, "수학은 여러 과학의 여왕이고, 정수론은 수학의 여왕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 저서에서 가우스는 n개의 미지수를 가진 n개의 연립 1차 방정식을 푸는 올바른 방법을 발표하였으며, 그 안에서 행렬식(行列式,determinant)의 생각을 사용하였다.

이 무렵에 가우스이 관심은 순수 수학을 떠나 천문학, 측지학, 전자기학 등의 실제적인 방면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 계기가 된 것은 19세기의 첫날에 이탈리아 바레르모 천문대의 피아치(G.Piazzi;1746~1826)가 발견한 행정 케레스였다. 케레스는 며칠 동안 관측되고 나서 어딘가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 며칠 동안 관측되고 나서 어딘가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 며칠동안의 관측만을 기초로, 가우스는 케레스가 다시 나타날 위치를 계산하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이 계산은 이러한 종류의 계산을 하다가 스위스의 수학자 오일러(L. Euler ; 1797~1783)가 눈이 멀게 되었다고 하는 엄청난 계산이었다. 마침내 그가 예언한 위치에서 케레스가 발견되었다. 가우스의 이름이 더욱 유명해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 계산 방법을 설명한 논문은 1865년에 출판되었는데, 그 논문에서 그는1795년이래 그가 이용해 온 최소 제곱법의 설명도 발표하였다.

1805년에 가우스는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이 부인은 세 명의 자식을 남기고 180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보다 3년 전에 그의 은인 페르디난드 공작도 죽고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은 독일은 비참한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1810년에 재혼을 하면서 가우스의 상황은 다시 호전되었다.

공표되지 않은 수많은 발견

1811년에 가우스는 복수소 Z=X+Yi의 해석함수(解析函數, analytic function) f(x)를 연구하였다. 해석함수는 일의적(一義的)이고 또 정칙(正則)한 함수이다. Z의 어떤 수치 대하여 f가 단 하나의 정해진 수치를 취하는 것이 일의적이고, Z 주변의 어떤 점으로부터 이것에 접근하여도 그 미분치(微分値)가 단 하나로 정해지는 것이 정칙이다. 복소 함수가 해석기이기 위한 조건으로서 이른바 '코시의 정리'가 있다. 이 정리는 가우스가 발견하고, 그보다 뒤에 프랑스의 코시(A.L. Cauchy;1789~1857)가 다시 발견하였다. 중력론, 전자기학, 각도를 바꾸지 않는 지도의 투영, 즉 등각사상(等角寫像)의 연구에 해석 함수는 꼭 필요한 것이다.

해석 함수, 중력론, 전자기학, 천채 운동의 연구와 관련하여 가우스는 퍼텐셜(potential)이라는 양(量)을 고안하고, 그에 대한 기본적인 논문을 1840년에 발표하였다. 중력이나 전자기력은 벡터(vector)이고 크기와 방향을 가진 양이다. 이에 대해 퍼텐셜은 크기만을 가진 양이고, 스칼라(scalar)라 불린다. 스칼라인 퍼텐셜을 어느 방향으로 미분(微分)하면 그것이 그 방향의 힘의 성분이 된다. 힘의 세 성분을 조사하는 대신에 하나의 스칼라량(量)인 퍼텐셜만을 연구하면 된다는 의미에서 퍼텐셜은 물리학에서 매우 유용한 양이다. 이 연구가 바로 가우스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해석 함수의 연구에서 가우스가 코시에 앞섰던 것과 마찬가지로, 앞에서 말한 최소 제곱법에서는 가우스는 이것을 재발견한 프랑스의 르장드로(A. M. Legendre;1752~1833)보다 앞서고 있었다. 또 가우스의 과학 일기의 1799년의 기술에 따르면 타원의 둘레를 구하는 문제와 관련된 이른바 타원 적분(타원 함수)의 2중 주기의 문제도, 가우스는 노르웨이의 아벨(N. H. Abel;1802~1829)이나 독일의 야코비(K. G. J. Jacobi;1804~1829)에 앞서서 발견하였다. 삼각 함수(三角函數)가 2라는 주기를 가지고 있는데 대하여, 이 타원 함수는 2중 주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 뒤에서 말하게 될 비유클리드 기하학(non-Euclidian geometry)에서는 러시아의 로바체프스키(N. I. Lobachevskii;1793~1856)에 앞서고 있었다. 참으로 대단한 천재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그가 그것을 발견하고 몇 년 후에 다른 사람이 같은 것을 재발견하여도, 가우스는 침묵을 지킨 채 자신의 우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가 이들보다 앞섰다는 것은 과학 일기 또는 개인에게 보낸 서신에 의해서만 밝혀지는 그런 일이었던 것이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개척

가우스는 1820년경부터 1850년경에 걸쳐서 정부의 측지 관계의 학술 고문을 맡아, 측량이나 자기측량(磁氣測量)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측량 관계의 방대한 데이터를 정리하는데에는 그가 소년 시절에 생각해 낸 최소 제곱법이 도움이 되었다. 또 측량 관계의 일이 자극이 되어 곡면 기하학에 대한 그의 연구가 시작되었다. 곡면 기하학에 그가 도입한 중요한 생각은 '곡률(曲率)'이다. 곡률은 이 곡선에 가장 잘 일치하는 원의 반지름으로 정의된다. 반지름이 작으면 작을수록 곡선은 갑자기 굽어지고, 이 점에서의 곡률은 커지게 된다. 면의 곡률도 이와 거의 같은 방식으로 정의된다. 가우스는 곡면 위의 한 점 부근의 측정만으로 곡면의 곡률이 결정된다는 것을 밝혔다.

곡면 기하학과 관련되어 가우스는 현재 '미분 기하학(微分 幾何學, differential geometry)'이라 불리고 있는 학문이 기초를 세웠다. 곡률이 그 좋은 보기인 것처럼 미분 기하학은 한 점의 바로 부근에서의 곡선이나 곡면, 또 보다 고차의 성질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한 점과 아주 가깝다는 조건 등으로, 미분기하학에서는 거리의 제곱 이상의 항은 생략된다. 가우스의 연구에서 영감을 얻은 독일의 리만(G. F. B. Riemann;1826~1866)은 1854년에 '기하학의 기초를 이루는 가설'이라는 논문을 썼다. 언뜻 생각하면 미분 기하학은 추상적인 학문이어서 현실의 세계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20세기가 되어서이다. 1910년에 아인슈타인이 제창한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미분 기하학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곡면 기하학과 관련되어 가우스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연구하였다. 그리스 시대의 기하학자 유클리드가 세운 제5의 공준(公準, postulate)에 따르면, 주어진 직선 위에 없는 한 점을 지나 그 직선과 평행한 직선은 오직 하나만 그을 수 있다. 그러나 가우스는 이러한 평행선을 몇 개나 그을 수 있다는 공리(公理, axiom)에서 출발하여도, 모순이 없는 2차원의 기하학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였다. 이 경우에도 밝혔을 뿐이지 그것을 발표하지는 않았다.


측지학이나 전자기학에도 공헌

이론적 연구만이 아니라 가우스는 또 타고난 실험적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 측지학에서 반사광을 보내는 데 사용되는 체오돌라이트(천체나 다른 물체의 방위각과 양각을 재는 기계), 자기력계, 전신기 등이 그의 뛰어난 능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실 끝에 자석을 매달아 그 진동의 주기를 측정하고, 다른 장소에서 똑같은 측정을 하면 이 두 장소에서의 자기력의 비례를 구할 수 있다. 이러한 측정을 비교 측정이라고 한다. 가우스는 물리학자인 베버(W. Weber ; 1804~1891)와 함께 이러한 비교 측정이 아닌 지구 자기의 절대 측정법을 고안하고 또 실제로 실행하였다. 물리학에서는 모든 물리량은 길이, 질량, 시간의 세 기본 단위로 나타내 주어야 한다. 자기력이라던 것이다. 그의 이 연구를 기념하여 자기 선속 밀도(磁氣線速密度)의 단위로서 '가우스'가 사용되고 있다.

가우스는 4차수에 대해서도 연구하였다. 4차수는 간단히 말해 a×b=b×a라는 곱셈의 교환율(交換律)이 성립되지 않는 수이다. 가우스와 같은 시대의 영국의 수학자 해밀턴(W. R. Hamilton ; 1805~1865)은 약 15년의 세월이 걸려 이 기묘한 수를 연구하였다. 가우스가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데에 어느 정도의 세월이 걸렸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자신의 과학 일기의 몇몇 페이지에 자신이 얻은 결과만을 간결하게 써 놓았을 뿐이다.

곱셈의 교환율이 성립하지 않는 양은 현실 세계와는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미분 기하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것도 역시 현실 세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즉 1920년에 등장한 '양자 역학(量子力學, quantum dynamics)'에서 이러한 물리량이 문제가 된 것이다. 가우스는 또 현재 '위상 기하학(位相幾何學, topology)'이라 불리고 있는 기하학을 연구하였다. 이것은 도형이나 공간을 연속적으로 변형시켜 나갈 때, 그 변형에도 불구하고 불변인 성장을 조사하는 기하학이다. 그 종류의 문제에 대한 한 가지 보기는 주어진 곡면에 절단선을 가한 후 그 곡면을 한 평면 위에 평탄하게 펼치려면, 최소한 몇 개의 절단선을 곡면에 가해야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원뿔면, 원환면(圓環面), 구면(球面)에 대한 절단선의 수가 각각 1, 2, 그리고 무한치가 된다는 것은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하학의 기초를 세운 사람이 가우스이다.

청년 시절의 가우스는 밀려드는 새로운 관념들을 제어할 수가 없어서 종종 침묵을 지키고, 그것을 기록하는 일만 했다고 한다. 이러한 가우스의 천재성의 비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가우스는 답하고 있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나처럼 깊이, 또 부단히 수학적 진리에 몰두하면 그들도 마찬가지의 일을 할 수 있다." 이것은 그가 가장 존경한 뉴턴이 말한 "언제나 그 일을 계속 생각함으로써 발견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고 할 만큼 유사하다.

수학의 다양한 분야를 개척하고 근대 수학의 아버지가 된 가우스는 1855년 2월 23일에 77세로 생애를 마쳤다. 그 직후 그가 평생 동안 몸에 간직하고 있던 시계도 멈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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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스
출생 : 1777년 4월 30일
사망 : 1855년 2월 23일
출생지 : 독일
직업 : 수학자, 해외 역사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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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본명 Johann Carl Friedrich Gauss
학력
입학년도 졸업년도 출신학교 및 전공
1795 1798 괴팅겐대학교
경력
경력기간 경력내역
  ~   괴팅겐 자기관측소 설립
1821   ~   하노버정부, 네덜란드정부의 측지사업 학술고문
1807   ~   괴팅겐대학 교수, 천문대장
1800   ~   타원함수 발견
1799   ~   대수학의 기본 정리 증명
1796   ~   복소수평면 도입
1795   ~   최소제곱법 발견
1795   ~   2차 형식에 관한 상호 법칙 발견

 

근대 수학의 아버지 가우스(Garl Friedrich Gauss;1777~1855)는 대수학의 기본 정리를 비롯하여 정수론, 해석 함수, 타원 함수, 미분 기하학, 비유클리드 기하학, 위상 수학 등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다. 또 천문학과 전자기학, 측지학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영주의 원조를 받아 진학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Garl Friedrich Gauss;1777~1855)는 프러시아 북부의 하노버와 가까운 브라운슈바이크에서 1777년에 태어났다. 가우스의 아버지는 정원사와 벽돌공 일을 하고 있었는데, 자기 자신이 그의 능력에 합당한 교육을 받는 일에 한사코 반대하였다. 이 아버지에 대해서는 한번도 마음으로부터 애정을 느낀 일이 없었다고 가우스 자신도 공언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가우스의 어머니는 가우스에게 큰 기대를 걸고 애정을 그를 지켜 보았다. 97세로 이 세상을 떠난 그녀는 죽을 때까지 자식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가우스도 진정으로 마음으로부터 어머니를 섬겼는데, 어머니가 세상을 뜨기 4년 전에 앞이 안 보이게 되자 자신 이외의 누구도 어머니의 시중을 들지 못하게 했을 정도였다.

어머니의 남동생(외숙부) 프리드리히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어린 가우스를 잘 교육하였다. 이 외숙부에 대해 가우스가 감사해 하는 마음은 그 자신의 이름에 프리드리히가 되어 영원히 남아 있다.

가우스 자신이 "나는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벌써 계산하였다."고 말한 것처럼 그의 계산 능력은 천부적이어서, 세 살 때에 이미 아버지의 계산 잘못을 지적했을 정도였다. 또 10세 때에는 학교 선생님이 낸 등차 급수(等差 級數, geometric series)의 합의 문제를 즉석에서 풀어 선생님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이를 기뻐한 선생님은 당시에 가장 내용이 충실하다는 산술 교과서를 사서 가우스에게 주었다. 가우스가 단숨에 그것을 읽어 버린 것을 보고 선생님은 놀라고 말았다. 그 후부터는 그 선생님의 친구였던 파테르스가 대수학에서의 가우스의 스승이 되었다. 파테르스가 대수학에서의 가우스의 스승이 되었다. 파테르스는 또 브라운슈바이크공(公)이었던 페르디난(Ferdinand) 공작에게 가우스의 이야기를 하였고, 가우스는 이 공작의 재정적 원조 덕택으로 카롤린 고등학교(3년)와 괴팅겐 대학(3년)을 마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공작은 가우스에게 연금(年金)을 주어 그가 연구를 계속할 수 있게 하였다. 1806년에 나폴레옹이 프러시아를 침공하자 공작은 프러시아 군의 사령관이 되어 싸웠는데 결국 패하고 말았다. 당시 브라운슈바이크에 살았던 가우수 집 앞의 큰 길을 반사 상태의 중상을 입은 공작의 마차가 지나가는 것을, 가우스는 슬퍼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공작이 죽은지 2년 후에 가우스의 아버지도 이 세상을 떠났다. 보호자를 잃어 곤궁에 빠진 가우스에게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현재의 레닌그라드) 학사원에서의 부름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이미 세계 최고의 수학자가 되어 있던 가우스를 독일에 머물게 하기 위하여 홈볼트(A.F.von Humboldt;1769~1859)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가우스에게 괴팅겐 천문대장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 괴팅겐에서 가우스는 그 후 50년 동안 연구 생활을 하게 되었다.

고교 시절에 최소 제곱법을 발견

가우스의 생활은 매우 간소하였다. 어떤 친구가 말한 것처럼 '작은 서재, 녹색의 덮개를 씌운 작은 책상, 희게 칠한 키가 큰 책상, 폭이 좁은 소파, 70세 때부터 사용한 팔걸이 의자, 갓이 달린 램프, 불기가 없는 침실, 변변치 않은 식사, 실내복, 벨벳의 모자, 이것이 그가 필요로 한 모든 것이며 그것은 또한 그에게 썩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는 오락으로 새로운 과학, 외국어, 고전 문학, 그리고 세계 정치를 즐겼다. 그는 매일 아침 한 시간 정도 박물관에 들러 세계 각국에서 오는 신문을 읽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의 보호자였던 페르디난드 공작이나 그의 조국, 그 자신을 괴롭혔던 나폴레옹의 생애에 관한 문헌들도 이리저리 뒤지며 이책 저책을 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등학교 재학 중에 가우스는 뉴턴의 <프린키피아(Principia)> (자연 철학의 수학적 여러 원리)를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후 일새 동안 뉴턴에 대한 가우스의 존경심은 변하지 않았다. 가우스는 고등학교에 재학할 때부터 정수론(整數論,Theory of numbers)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으며, 또 '최소 제곱법(method of least squares)'을 발견하였다. 또 많은 측정을 하여 미지수의 수보다도 훨씬 많은 방정식을 얻었다. 이 경우에 가장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미지수의 수치를 추정하는 방법이 바로 최소 제곱법이다.

1796년에 19세의 가우스는 자와 컴퍼스만으로 정17각형을 작도하는 방법을 발견하였는데, 이것이 가우스로 하여금 수학의 세계에 헌신하겠다는 결단을 내리게 하였다. 이 1796년~1814년에 이르는 사이의 수학적 발견을 가우스는 과학 일기에 기록하였다. 이 일기가 학계에 공표된 것은 가우스가 세상을 떠난 후 43년이 지나고 나서의 일이었다. 이 기술은 장기간의 연구 결과만을 간단히 기록한 것이로, 그 해독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그 안에 기록된 146개의 기술 중에서 두 개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참으로 놀란 만한 일기인데, 이것은 당시의 수학계보다도 가우스가 약1세기 정도 앞서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증거이기도 한다.

이처럼 개인의 일기에 쓴 것이지만. 가우수는 그가 얻은 결과를 여간해서 공표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완전주의 때문으로, 마지막에 발표할 때에도 그 결론에 도달하게 된 사고 과정이나 기초 등은 완전히 제외하였다. 따라서 그가 얻은 결과는 옳았지만 그것을 일반 수학자가 이해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 사이에 주석이 있어야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이었다. 그가 사용한 스탬프에는 적은 수의 과실이 달린 한 그루의 나무가 그려져 있는데 '적은 수이지만 다 익었다.'는 표어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전적으로 그 표어 그대로 일하는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정수론은 수학의 여왕이다.'

1799년에 가우스가 박사 학위를 딴 논문의 제목은 <대수학의 기본 정리>이다. 이 논문은 모든 대수 방정식(代數方程式)이 그 차수와 같은 수의 근(根,root)을 가진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가우수에 따르면 이 경우의 근은 a+bi의 형태를 하고 있다. 단 a와 b는 실수이고, i는 허수(虛數,imaginary number)'라고 불리게 되었다. (a, b)를 데카르트 좌표(카테시언 좌표)라고 하고 복소수를 평면상의 한 점에 대응시켜 이 점과 원점을 연결하는 화살표를 생각하면, 이 화살표는 역학이나 물리학에 자주 등장하는 벡터(vector)와 비슷한 성질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힘의 합에 관한 '평해 사변형의 법칙'은 그것이 그대로 복소수의 합에 대응하는 것이다.

1801년에는 저서 <정수론 연구>를 출판하였는데, 이 책은 그의 후원자였던 페르디난드 공작에게 바쳐졌다. 정수론은 가우수가 가장 높이 평가한 연구 분야인데, "수학은 여러 과학의 여왕이고, 정수론은 수학의 여왕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 저서에서 가우스는 n개의 미지수를 가진 n개의 연립 1차 방정식을 푸는 올바른 방법을 발표하였으며, 그 안에서 행렬식(行列式,determinant)의 생각을 사용하였다.

이 무렵에 가우스이 관심은 순수 수학을 떠나 천문학, 측지학, 전자기학 등의 실제적인 방면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 계기가 된 것은 19세기의 첫날에 이탈리아 바레르모 천문대의 피아치(G.Piazzi;1746~1826)가 발견한 행정 케레스였다. 케레스는 며칠 동안 관측되고 나서 어딘가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 며칠 동안 관측되고 나서 어딘가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 며칠동안의 관측만을 기초로, 가우스는 케레스가 다시 나타날 위치를 계산하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이 계산은 이러한 종류의 계산을 하다가 스위스의 수학자 오일러(L. Euler ; 1797~1783)가 눈이 멀게 되었다고 하는 엄청난 계산이었다. 마침내 그가 예언한 위치에서 케레스가 발견되었다. 가우스의 이름이 더욱 유명해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 계산 방법을 설명한 논문은 1865년에 출판되었는데, 그 논문에서 그는1795년이래 그가 이용해 온 최소 제곱법의 설명도 발표하였다.

1805년에 가우스는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이 부인은 세 명의 자식을 남기고 180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보다 3년 전에 그의 은인 페르디난드 공작도 죽고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은 독일은 비참한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1810년에 재혼을 하면서 가우스의 상황은 다시 호전되었다.

공표되지 않은 수많은 발견

1811년에 가우스는 복수소 Z=X+Yi의 해석함수(解析函數, analytic function) f(x)를 연구하였다. 해석함수는 일의적(一義的)이고 또 정칙(正則)한 함수이다. Z의 어떤 수치 대하여 f가 단 하나의 정해진 수치를 취하는 것이 일의적이고, Z 주변의 어떤 점으로부터 이것에 접근하여도 그 미분치(微分値)가 단 하나로 정해지는 것이 정칙이다. 복소 함수가 해석기이기 위한 조건으로서 이른바 '코시의 정리'가 있다. 이 정리는 가우스가 발견하고, 그보다 뒤에 프랑스의 코시(A.L. Cauchy;1789~1857)가 다시 발견하였다. 중력론, 전자기학, 각도를 바꾸지 않는 지도의 투영, 즉 등각사상(等角寫像)의 연구에 해석 함수는 꼭 필요한 것이다.

해석 함수, 중력론, 전자기학, 천채 운동의 연구와 관련하여 가우스는 퍼텐셜(potential)이라는 양(量)을 고안하고, 그에 대한 기본적인 논문을 1840년에 발표하였다. 중력이나 전자기력은 벡터(vector)이고 크기와 방향을 가진 양이다. 이에 대해 퍼텐셜은 크기만을 가진 양이고, 스칼라(scalar)라 불린다. 스칼라인 퍼텐셜을 어느 방향으로 미분(微分)하면 그것이 그 방향의 힘의 성분이 된다. 힘의 세 성분을 조사하는 대신에 하나의 스칼라량(量)인 퍼텐셜만을 연구하면 된다는 의미에서 퍼텐셜은 물리학에서 매우 유용한 양이다. 이 연구가 바로 가우스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해석 함수의 연구에서 가우스가 코시에 앞섰던 것과 마찬가지로, 앞에서 말한 최소 제곱법에서는 가우스는 이것을 재발견한 프랑스의 르장드로(A. M. Legendre;1752~1833)보다 앞서고 있었다. 또 가우스의 과학 일기의 1799년의 기술에 따르면 타원의 둘레를 구하는 문제와 관련된 이른바 타원 적분(타원 함수)의 2중 주기의 문제도, 가우스는 노르웨이의 아벨(N. H. Abel;1802~1829)이나 독일의 야코비(K. G. J. Jacobi;1804~1829)에 앞서서 발견하였다. 삼각 함수(三角函數)가 2라는 주기를 가지고 있는데 대하여, 이 타원 함수는 2중 주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 뒤에서 말하게 될 비유클리드 기하학(non-Euclidian geometry)에서는 러시아의 로바체프스키(N. I. Lobachevskii;1793~1856)에 앞서고 있었다. 참으로 대단한 천재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그가 그것을 발견하고 몇 년 후에 다른 사람이 같은 것을 재발견하여도, 가우스는 침묵을 지킨 채 자신의 우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가 이들보다 앞섰다는 것은 과학 일기 또는 개인에게 보낸 서신에 의해서만 밝혀지는 그런 일이었던 것이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개척

가우스는 1820년경부터 1850년경에 걸쳐서 정부의 측지 관계의 학술 고문을 맡아, 측량이나 자기측량(磁氣測量)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측량 관계의 방대한 데이터를 정리하는데에는 그가 소년 시절에 생각해 낸 최소 제곱법이 도움이 되었다. 또 측량 관계의 일이 자극이 되어 곡면 기하학에 대한 그의 연구가 시작되었다. 곡면 기하학에 그가 도입한 중요한 생각은 '곡률(曲率)'이다. 곡률은 이 곡선에 가장 잘 일치하는 원의 반지름으로 정의된다. 반지름이 작으면 작을수록 곡선은 갑자기 굽어지고, 이 점에서의 곡률은 커지게 된다. 면의 곡률도 이와 거의 같은 방식으로 정의된다. 가우스는 곡면 위의 한 점 부근의 측정만으로 곡면의 곡률이 결정된다는 것을 밝혔다.

곡면 기하학과 관련되어 가우스는 현재 '미분 기하학(微分 幾何學, differential geometry)'이라 불리고 있는 학문이 기초를 세웠다. 곡률이 그 좋은 보기인 것처럼 미분 기하학은 한 점의 바로 부근에서의 곡선이나 곡면, 또 보다 고차의 성질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한 점과 아주 가깝다는 조건 등으로, 미분기하학에서는 거리의 제곱 이상의 항은 생략된다. 가우스의 연구에서 영감을 얻은 독일의 리만(G. F. B. Riemann;1826~1866)은 1854년에 '기하학의 기초를 이루는 가설'이라는 논문을 썼다. 언뜻 생각하면 미분 기하학은 추상적인 학문이어서 현실의 세계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20세기가 되어서이다. 1910년에 아인슈타인이 제창한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미분 기하학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곡면 기하학과 관련되어 가우스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연구하였다. 그리스 시대의 기하학자 유클리드가 세운 제5의 공준(公準, postulate)에 따르면, 주어진 직선 위에 없는 한 점을 지나 그 직선과 평행한 직선은 오직 하나만 그을 수 있다. 그러나 가우스는 이러한 평행선을 몇 개나 그을 수 있다는 공리(公理, axiom)에서 출발하여도, 모순이 없는 2차원의 기하학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였다. 이 경우에도 밝혔을 뿐이지 그것을 발표하지는 않았다.


측지학이나 전자기학에도 공헌

이론적 연구만이 아니라 가우스는 또 타고난 실험적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 측지학에서 반사광을 보내는 데 사용되는 체오돌라이트(천체나 다른 물체의 방위각과 양각을 재는 기계), 자기력계, 전신기 등이 그의 뛰어난 능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실 끝에 자석을 매달아 그 진동의 주기를 측정하고, 다른 장소에서 똑같은 측정을 하면 이 두 장소에서의 자기력의 비례를 구할 수 있다. 이러한 측정을 비교 측정이라고 한다. 가우스는 물리학자인 베버(W. Weber ; 1804~1891)와 함께 이러한 비교 측정이 아닌 지구 자기의 절대 측정법을 고안하고 또 실제로 실행하였다. 물리학에서는 모든 물리량은 길이, 질량, 시간의 세 기본 단위로 나타내 주어야 한다. 자기력이라던 것이다. 그의 이 연구를 기념하여 자기 선속 밀도(磁氣線速密度)의 단위로서 '가우스'가 사용되고 있다.

가우스는 4차수에 대해서도 연구하였다. 4차수는 간단히 말해 a×b=b×a라는 곱셈의 교환율(交換律)이 성립되지 않는 수이다. 가우스와 같은 시대의 영국의 수학자 해밀턴(W. R. Hamilton ; 1805~1865)은 약 15년의 세월이 걸려 이 기묘한 수를 연구하였다. 가우스가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데에 어느 정도의 세월이 걸렸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자신의 과학 일기의 몇몇 페이지에 자신이 얻은 결과만을 간결하게 써 놓았을 뿐이다.

곱셈의 교환율이 성립하지 않는 양은 현실 세계와는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미분 기하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것도 역시 현실 세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즉 1920년에 등장한 '양자 역학(量子力學, quantum dynamics)'에서 이러한 물리량이 문제가 된 것이다. 가우스는 또 현재 '위상 기하학(位相幾何學, topology)'이라 불리고 있는 기하학을 연구하였다. 이것은 도형이나 공간을 연속적으로 변형시켜 나갈 때, 그 변형에도 불구하고 불변인 성장을 조사하는 기하학이다. 그 종류의 문제에 대한 한 가지 보기는 주어진 곡면에 절단선을 가한 후 그 곡면을 한 평면 위에 평탄하게 펼치려면, 최소한 몇 개의 절단선을 곡면에 가해야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원뿔면, 원환면(圓環面), 구면(球面)에 대한 절단선의 수가 각각 1, 2, 그리고 무한치가 된다는 것은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하학의 기초를 세운 사람이 가우스이다.

청년 시절의 가우스는 밀려드는 새로운 관념들을 제어할 수가 없어서 종종 침묵을 지키고, 그것을 기록하는 일만 했다고 한다. 이러한 가우스의 천재성의 비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가우스는 답하고 있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나처럼 깊이, 또 부단히 수학적 진리에 몰두하면 그들도 마찬가지의 일을 할 수 있다." 이것은 그가 가장 존경한 뉴턴이 말한 "언제나 그 일을 계속 생각함으로써 발견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고 할 만큼 유사하다.

수학의 다양한 분야를 개척하고 근대 수학의 아버지가 된 가우스는 1855년 2월 23일에 77세로 생애를 마쳤다. 그 직후 그가 평생 동안 몸에 간직하고 있던 시계도 멈췄다고 한다.

가우스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세요

가우스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세요 가능한 자세한 다변 부탁 드립니다. 근대 수학의 아버지 가우스(Garl Friedrich Gauss;1777~1855)는 대수학의 기본 정리를 비롯하여 정수론, 해석...

가우스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세요

가능한 자세히요.. 근대 수학의 아버지 가우스(Garl Friedrich Gauss;1777~1855)는 대수학의... 이 외숙부에 대해 가우스가 감사해 하는 마음은 그 자신의 이름에 프리드리히가 되어...

가우스에 대해 자세히알려주세요!...

... 수학자 가우스에대해자세히 알려주세요^^* A4용지 한장에 거의 다 들어갈수 있도록이요! 부탁드립니다~~ 정확하게 해주신 분께는 제가 내공점수 별 5개 드릴께요!!!...

가우스에 대해

가우스가 수학자란거 밖에 모르겠네요 자세히알려주세요 저는 가우스 하면 떠오르는 것이 1에서 100까지 더한 최연소 수학자라고 말하고 싶네요. 그 당시 계산기도 없고...

가우스에 대해자세히 알려주세요

... 가우스란 분이 유명한 수학자라 면서요.. ? ㅎㅎ 제가 알기 쉽게... 이 분의 업적.. 등등.. 자세하게 알려주세요.. 내공 10 밖에 걸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럼..이만.....

가우스 ([X]^2)-([X])-2

가우스 ([X]^2)-([X])-2 범위를 모를 때 풀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자세히 알려주세요. 대략 ([x]-2)([x]+1) [x]=2 [x]... n에 대해 n<= x < n+1 이면 [x]=n 입니다. 그러므로 [x]=n...

가우스 기호 질문

가우스 기호에 대해 자세히알려주세요! 학교에서는 안 배운 개념인데..문제집만 보고 하려니 어렵네요.. 푸는 방법도 알려주세요!^^ 가우스 기호로 [x]라고 쓰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