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자 오일러에 관한 것좀 가르쳐 주세요

수학자 오일러에 관한 것좀 가르쳐 주세요

작성일 2003.08.18댓글 5건
    게시물 수정 , 삭제는 로그인 필요

수학자 오일러에 관한 것을
중요한것만 찝어내
주세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오일러 [ Euler, Leonhard , 1707.4.15~1783.9.18 ]

 

 

(출처: 서비스 백과사전 참고)

 

 

요약☞

 

스위스의 수학자·물리학자.

국적 : 스위스

활동분야 : 수학, 물리학

출생지 : 스위스 바젤

주요저서 : 《미분학 원리》(1755) 《독일 왕녀에게 보내는 편지》

 

자세히☞

 

바젤 출생. 주로 독일·러시아의 학사원을 무대로 활약하였고, 해석학의 화신(化身), 최대의 알고리스트(algorist:數學者) 등으로 불렸다. 그의 연구는 수학·천문학·물리학뿐만 아니라, 의학·식물학·화학 등 많은 분야에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 처음에는 목사가 되기 위하여 바젤대학에서 신학과 헤브라이어를 공부하였으나, 수학에서 J.베르누이의 관심을 끌어 곧 D.베르누이, N.베르누이와 사귀었다. 이와 같이 베르누이가(家) 사람들의 조언과 상트페테르부르크학사원에 간 베르누이 형제의 소개로, 처음에는 그 학사원의 의학부에 이어서 수학부에 적을 두었다.

 

1740년 프리드리히대왕의 초청을 받아 베를린으로 이주하였다. 그 후 24년간 베를린학사원의 수학부장으로서 연구에 몰두하였으나 점차 궁정에서의 인기가 떨어져 다시 예카테리나 여제(女帝)의 청을 받자 1766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후에 시력을 잃고 장님이 되었으나 천부적인 기억력과 강인한 정신력으로 연구를 계속하였다. 수학자로서의 연구를 시작한 시기는 뉴턴이 죽은 시기에 해당하여 해석기하학·미적분학의 개념은 갖추어져 있었으나 조직적 연구는 초보단계로 특히 역학·기하학의 분야는 충분한 체계가 서 있지 않았다.

 

이러한 미적분학을 발전시켜 《무한해석 개론 Introductio in Analysis Infinitorum》(1748) 《미분학 원리 Institutiones Calculi Differontial》(1755) 《적분학 원리 Institutiones Calculi Integrelis》(1768∼1770), 변분학(變分學:극대 또는 극소의 성질을 가진 곡선을 발견하는 방법)을 창시하여 역학을 해석적으로 풀이하였다.

 

이 밖에도 대수학·정수론(整數論)·기하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 큰 업적을 남겼다. 그 중에도 삼각함수의 생략기호(sin, cos, tan)의 창안이나 ‘오일러의 정리’ 등은 널리 알려져 있다. 베를린 시대에 프리드리히대왕의 질녀에게 자연과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쓴 《독일 왕녀에게 보내는 편지》는 당시 계몽서로서 유명하였으며 7개 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또다른답변vV-----------------------------------

 

 

 

 

 

 

(출처:http://www.seoul-gchs.seoul.kr/%7Estudy/math/sgc3316.htm)

 

요약☞

 

[수학은 아름다워 2 / 육인선] 오일러는 스위스의 바젤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부터 수재였으므로 그의 아버지는 스스로 아들을 교육시켰으며, 자신의 뒤를

 

잇게 하려고 바젤 대학에 입학시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게 하였다. 그런데 당시

 

이 대학에는 수학자 일가로 소문난 베르누이 집안의 두 아들이 다니엘

 

(Daniel Bernoulli, 1700~1782)과 니콜라우스(Nikolaus Bernoulli, 1695~1926)가 있었다.

 

이들과 친해지면서 수학을 공부하게 된 오일러는 결국 수학에만 전념하게 된다.

 

 

 

자세히(내용이 길게 됬네요..)☞

 

20세가 되던 1727년, 오일러는 문화 부흥을 꿈꾸는 러시아의 여왕 캐더린 1세의 초청으로 러시아의 아카데미에 가게 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가 도착하던 날 여왕은 죽고, 그뒤를 이은 피터 2세는 학문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일러는 몹시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 되다.

1730년 다시 안나 1세가 여왕의 자리에 오르자 아카데미가 되살아났고, 오일러는 이후 10년간 그곳에서 연구에 정열을 쏟게 된다.

오일러는 1733년 결혼하여 페테르스부르크에 정착하여 13명이나 되는 자녀를 얻었으나 이 중 8명은 요절하고 만다. 28세이던 1735년은 오일러에게 아주 불행한 해였다. 지나친 연구와 러시아의 추운 날씨 때문에 오른쪽 눈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에 다른 수학자들이 몇 달 동안이나 끙끙대던 문제가 오일러에게 주어쪘는데, 그는 이것을 단 3일 만에 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렇지만 이때 생긴 화농으로 인하여 결국은 실명 하게 된 것이다.

1741년에 오일러는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Friedrich, 1712~1786)는 다시 그를 불러들인다.

그렇지만 그해(1766년) 그는 남은 왼쪽 눈마저 실명하는 불운을 겪는다.

학자가 눈이 안보이며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일러는 조금도 좌절하지 않고 그전보다 더 많은 논문을 썼다. 물론 그가 직접 쓸 수 없었으므로 조수에게 대필시키는 방법으로.

이후 17년 동안 오일러는 장님인 채로 수학 연구를 계속하였다. 이것은 그의 뛰어난 기억력과 암산력 덕분이었다. 그는 수학 전분야의 공식을 다 암기하고 있었으며, "마치 사람이 숨을 쉬는 것처럼, 새가 하늘을 나는 것처럼 계산 했다." 는 말을 들을 만큼 계산에 능숙했던 것이다.

오일러는 1783년 손자와 놀면서 천왕성의 퀘도를 계산하다가 파이프를 떨어뜨리면서 "죽는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76세 였다.

오일러가 남긴 논문은 수학, 천문학, 물리학 등 여러 분야에 걸친 엄청난 양의 것이었다.

그가 죽은 후 제자들이 그의 전집을 간행하려 했으나 자료가 너무 많고 돈이 많이 들어 손을 못대고 있다가 1909년이 되어서야 전국적으로 기부금을 모아 1권을 발행하게 된다.

그후 오일러의 전집만을 발행하는 특수한 출판사가 설립되어 작업을 한 결과 현재는 45책의 전집으로 와성되었다.

오일러는 여러 가지 기호를 새로이 만들어 쓴 것으로도 유명한데, 우리가 잘 아는 원주율을 로 쓴 것도 그였다. 또 삼각함수를 로 쓰고, 삼각형에서 각을 A, B, C로, 각각의 대변을 a, b, c로 쓰기 시작한 사람도 오일러이다.

 

 

 

 

 

 

 

 

 

 

---------또또다른답변vV(이건 긴내용인데요.참고개념으로 읽으시라고..^- ^)---------

 

 

 

 

 

(출처=http://www.mathstart.org/man/man_18.htm)

 

1707-1783 스위스의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Leonhard Euler)는 18세기의 가장 뛰어난 수학자라 할 수 있다.

 

업적의 양이나 질에서 어느 수학자도 오일러를 능가하기는 어렵다. 일생 동안 500여 편의 저서와 논문을 발표하였고, 현재까지 나온 전집만 하여도 75권에 이른다.

 

심지어 그가 시력을 완전히 상실하였을 때에도 그의 연구 활동은 위축되지 않고 계속되었다.

 

오일러가 살아 있는 동안 과학잡지나 학술지들은 실을 글이 떨어질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었는데, 이는 오일러가 잡지에 기고한 논문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죽은 후 43년이 지나서야 그의 저서들을 모두 출판할 수 있었다고 한다.

 

1707년 스위스의 바젤에서 태어난 오일러는 목사였던 아버지의 바람으로 한때 신학 공부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재능과 근면성으로 당시 유명했던 수학자 베르누이의 인정을 받아, 그의 도움으로 1727년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에 임용되었다.

 

그가 처음 임용된 자리는 수학이 아닌 의학부였는데, 그는 이 자리를 위해 생리학을 공부하였으며, 이때 귀의 생리학을 공부하면서 음향의 본성과 전파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했다.

 

또한 오른쪽 눈의 시력약화로 요양중 음악에 흥미를 가져 ‘새로운 음악 이론의 시도’라는 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수학이 아닌 다른 분야에 대한 공부를 할 때에도 그의 관심은 언제나 수학적인 방향으로 귀착되었다.

 

다니엘 베르누이가 스위스로 돌아간 이후 오일러는 그 뒤를 이어 수학 교수 자리에 앉았고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었다.

 

1735년 그는 마침내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으나 이러한 신체적 결함 역시 그의 연구 생활을 조금도 저해하지 못하였고, 오일러는 수학 분야뿐만 아니라 그 응용 분야로 역학, 유체 역학, 광학 등의 주요한 문제들을 연구하였다.

 

러시아의 억압적인 정치 상황에 싫증난 오일러는 1747년에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청을 받아들여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베를린 생활은 프리드리히와의 불화로 행복하지 못했다.

 

프리드리히는 수학을 장려하는 것을 의무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는 자신이 수학을 잘하지 못하였으므로 이를 경멸하였다.

 

그러나 오일러의 재능은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화, 하수, 운하, 연금제도 등의 실질적인 문제에 그를 기용했다.

 

오일러는 프리드리히와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자 1766년 예카테리나 2세의 간절한 초청을 받아들여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다.

 

1771년 왼쪽 눈마저 실명 상태가 되었으나 그는 연구 활동을 계속했고 처음에는 아들에게, 후에는 서기에게 연구 내용을 받아쓰게 하면서 물 흐르듯 쏟아지는 그의 연구와 활동을 중단하지 않았다.

 

오일러는 삼각 함수의기호 사인(Sin), 코사인(Cos), 탄젠트(Tan)와 호수의 기호i, 자연 대수의 밑수 e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사람이다.

 

오일러의 자취는 어느 수학 교과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해석학, 미분방정식, 특성함수, 방정식론, 수론, 미분기하학, 사영기하학, 확률론 등의 수학 분야뿐만 아니라 물리학 분야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고, 또한 변분계산법과 복소함수론을 만들기도 했다.

 

오일러가 유한의 패턴을 무한으로 확장할 때 다소 부주의했다든지, 영혼이 물질이 아니라는 것을 진지하게 증명하는 등 그의 수학적 비실제성을 비판하는 소리도 있지만 이것이 그의 위대한 업적의 빛을 바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오일러는 실명에도 불구하고 죽는 순간까지 수학적인 활동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이와 천왕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갑자기 쓰러졌다.

 

그는 쓰러지면서 마지막으로 “나는 이제 죽는다.”라는 말을 남기고 의식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1783년 9월 7일이었다.

 

 

 

 

 

 

수학계의 거인 오일러씨(보일러아님-_ -;)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오일러 [ Euler, Leonhard , 1707.4.15~1783.9.18 ]

 

 

(출처: 서비스 백과사전 참고)

 

 

요약☞

 

스위스의 수학자·물리학자.

국적 : 스위스

활동분야 : 수학, 물리학

출생지 : 스위스 바젤

주요저서 : 《미분학 원리》(1755) 《독일 왕녀에게 보내는 편지》

 

자세히☞

 

바젤 출생. 주로 독일·러시아의 학사원을 무대로 활약하였고, 해석학의 화신(化身), 최대의 알고리스트(algorist:數學者) 등으로 불렸다. 그의 연구는 수학·천문학·물리학뿐만 아니라, 의학·식물학·화학 등 많은 분야에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 처음에는 목사가 되기 위하여 바젤대학에서 신학과 헤브라이어를 공부하였으나, 수학에서 J.베르누이의 관심을 끌어 곧 D.베르누이, N.베르누이와 사귀었다. 이와 같이 베르누이가(家) 사람들의 조언과 상트페테르부르크학사원에 간 베르누이 형제의 소개로, 처음에는 그 학사원의 의학부에 이어서 수학부에 적을 두었다.

 

1740년 프리드리히대왕의 초청을 받아 베를린으로 이주하였다. 그 후 24년간 베를린학사원의 수학부장으로서 연구에 몰두하였으나 점차 궁정에서의 인기가 떨어져 다시 예카테리나 여제(女帝)의 청을 받자 1766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후에 시력을 잃고 장님이 되었으나 천부적인 기억력과 강인한 정신력으로 연구를 계속하였다. 수학자로서의 연구를 시작한 시기는 뉴턴이 죽은 시기에 해당하여 해석기하학·미적분학의 개념은 갖추어져 있었으나 조직적 연구는 초보단계로 특히 역학·기하학의 분야는 충분한 체계가 서 있지 않았다.

 

이러한 미적분학을 발전시켜 《무한해석 개론 Introductio in Analysis Infinitorum》(1748) 《미분학 원리 Institutiones Calculi Differontial》(1755) 《적분학 원리 Institutiones Calculi Integrelis》(1768∼1770), 변분학(變分學:극대 또는 극소의 성질을 가진 곡선을 발견하는 방법)을 창시하여 역학을 해석적으로 풀이하였다.

 

이 밖에도 대수학·정수론(整數論)·기하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 큰 업적을 남겼다. 그 중에도 삼각함수의 생략기호(sin, cos, tan)의 창안이나 ‘오일러의 정리’ 등은 널리 알려져 있다. 베를린 시대에 프리드리히대왕의 질녀에게 자연과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쓴 《독일 왕녀에게 보내는 편지》는 당시 계몽서로서 유명하였으며 7개 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또다른답변vV-----------------------------------

 

 

 

 

 

 

(출처:http://www.seoul-gchs.seoul.kr/%7Estudy/math/sgc3316.htm)

 

요약☞

 

[수학은 아름다워 2 / 육인선] 오일러는 스위스의 바젤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부터 수재였으므로 그의 아버지는 스스로 아들을 교육시켰으며, 자신의 뒤를

 

잇게 하려고 바젤 대학에 입학시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게 하였다. 그런데 당시

 

이 대학에는 수학자 일가로 소문난 베르누이 집안의 두 아들이 다니엘

 

(Daniel Bernoulli, 1700~1782)과 니콜라우스(Nikolaus Bernoulli, 1695~1926)가 있었다.

 

이들과 친해지면서 수학을 공부하게 된 오일러는 결국 수학에만 전념하게 된다.

 

 

 

자세히(내용이 길게 됬네요..)☞

 

20세가 되던 1727년, 오일러는 문화 부흥을 꿈꾸는 러시아의 여왕 캐더린 1세의 초청으로 러시아의 아카데미에 가게 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가 도착하던 날 여왕은 죽고, 그뒤를 이은 피터 2세는 학문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일러는 몹시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 되다.

1730년 다시 안나 1세가 여왕의 자리에 오르자 아카데미가 되살아났고, 오일러는 이후 10년간 그곳에서 연구에 정열을 쏟게 된다.

오일러는 1733년 결혼하여 페테르스부르크에 정착하여 13명이나 되는 자녀를 얻었으나 이 중 8명은 요절하고 만다. 28세이던 1735년은 오일러에게 아주 불행한 해였다. 지나친 연구와 러시아의 추운 날씨 때문에 오른쪽 눈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에 다른 수학자들이 몇 달 동안이나 끙끙대던 문제가 오일러에게 주어쪘는데, 그는 이것을 단 3일 만에 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렇지만 이때 생긴 화농으로 인하여 결국은 실명 하게 된 것이다.

1741년에 오일러는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Friedrich, 1712~1786)는 다시 그를 불러들인다.

그렇지만 그해(1766년) 그는 남은 왼쪽 눈마저 실명하는 불운을 겪는다.

학자가 눈이 안보이며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일러는 조금도 좌절하지 않고 그전보다 더 많은 논문을 썼다. 물론 그가 직접 쓸 수 없었으므로 조수에게 대필시키는 방법으로.

이후 17년 동안 오일러는 장님인 채로 수학 연구를 계속하였다. 이것은 그의 뛰어난 기억력과 암산력 덕분이었다. 그는 수학 전분야의 공식을 다 암기하고 있었으며, "마치 사람이 숨을 쉬는 것처럼, 새가 하늘을 나는 것처럼 계산 했다." 는 말을 들을 만큼 계산에 능숙했던 것이다.

오일러는 1783년 손자와 놀면서 천왕성의 퀘도를 계산하다가 파이프를 떨어뜨리면서 "죽는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76세 였다.

오일러가 남긴 논문은 수학, 천문학, 물리학 등 여러 분야에 걸친 엄청난 양의 것이었다.

그가 죽은 후 제자들이 그의 전집을 간행하려 했으나 자료가 너무 많고 돈이 많이 들어 손을 못대고 있다가 1909년이 되어서야 전국적으로 기부금을 모아 1권을 발행하게 된다.

그후 오일러의 전집만을 발행하는 특수한 출판사가 설립되어 작업을 한 결과 현재는 45책의 전집으로 와성되었다.

오일러는 여러 가지 기호를 새로이 만들어 쓴 것으로도 유명한데, 우리가 잘 아는 원주율을 로 쓴 것도 그였다. 또 삼각함수를 로 쓰고, 삼각형에서 각을 A, B, C로, 각각의 대변을 a, b, c로 쓰기 시작한 사람도 오일러이다.

 

 

 

 

 

 

 

 

 

 

---------또또다른답변vV(이건 긴내용인데요.참고개념으로 읽으시라고..^- ^)---------

 

 

 

 

 

(출처=http://www.mathstart.org/man/man_18.htm)

 

1707-1783 스위스의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Leonhard Euler)는 18세기의 가장 뛰어난 수학자라 할 수 있다.

 

업적의 양이나 질에서 어느 수학자도 오일러를 능가하기는 어렵다. 일생 동안 500여 편의 저서와 논문을 발표하였고, 현재까지 나온 전집만 하여도 75권에 이른다.

 

심지어 그가 시력을 완전히 상실하였을 때에도 그의 연구 활동은 위축되지 않고 계속되었다.

 

오일러가 살아 있는 동안 과학잡지나 학술지들은 실을 글이 떨어질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었는데, 이는 오일러가 잡지에 기고한 논문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죽은 후 43년이 지나서야 그의 저서들을 모두 출판할 수 있었다고 한다.

 

1707년 스위스의 바젤에서 태어난 오일러는 목사였던 아버지의 바람으로 한때 신학 공부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재능과 근면성으로 당시 유명했던 수학자 베르누이의 인정을 받아, 그의 도움으로 1727년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에 임용되었다.

 

그가 처음 임용된 자리는 수학이 아닌 의학부였는데, 그는 이 자리를 위해 생리학을 공부하였으며, 이때 귀의 생리학을 공부하면서 음향의 본성과 전파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했다.

 

또한 오른쪽 눈의 시력약화로 요양중 음악에 흥미를 가져 ‘새로운 음악 이론의 시도’라는 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수학이 아닌 다른 분야에 대한 공부를 할 때에도 그의 관심은 언제나 수학적인 방향으로 귀착되었다.

 

다니엘 베르누이가 스위스로 돌아간 이후 오일러는 그 뒤를 이어 수학 교수 자리에 앉았고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었다.

 

1735년 그는 마침내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으나 이러한 신체적 결함 역시 그의 연구 생활을 조금도 저해하지 못하였고, 오일러는 수학 분야뿐만 아니라 그 응용 분야로 역학, 유체 역학, 광학 등의 주요한 문제들을 연구하였다.

 

러시아의 억압적인 정치 상황에 싫증난 오일러는 1747년에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청을 받아들여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베를린 생활은 프리드리히와의 불화로 행복하지 못했다.

 

프리드리히는 수학을 장려하는 것을 의무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는 자신이 수학을 잘하지 못하였으므로 이를 경멸하였다.

 

그러나 오일러의 재능은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화, 하수, 운하, 연금제도 등의 실질적인 문제에 그를 기용했다.

 

오일러는 프리드리히와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자 1766년 예카테리나 2세의 간절한 초청을 받아들여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다.

 

1771년 왼쪽 눈마저 실명 상태가 되었으나 그는 연구 활동을 계속했고 처음에는 아들에게, 후에는 서기에게 연구 내용을 받아쓰게 하면서 물 흐르듯 쏟아지는 그의 연구와 활동을 중단하지 않았다.

 

오일러는 삼각 함수의기호 사인(Sin), 코사인(Cos), 탄젠트(Tan)와 호수의 기호i, 자연 대수의 밑수 e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사람이다.

 

오일러의 자취는 어느 수학 교과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해석학, 미분방정식, 특성함수, 방정식론, 수론, 미분기하학, 사영기하학, 확률론 등의 수학 분야뿐만 아니라 물리학 분야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고, 또한 변분계산법과 복소함수론을 만들기도 했다.

 

오일러가 유한의 패턴을 무한으로 확장할 때 다소 부주의했다든지, 영혼이 물질이 아니라는 것을 진지하게 증명하는 등 그의 수학적 비실제성을 비판하는 소리도 있지만 이것이 그의 위대한 업적의 빛을 바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오일러는 실명에도 불구하고 죽는 순간까지 수학적인 활동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이와 천왕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갑자기 쓰러졌다.

 

그는 쓰러지면서 마지막으로 “나는 이제 죽는다.”라는 말을 남기고 의식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1783년 9월 7일이었다.

 

 

 

 

 

 

수학계의 거인 오일러씨(보일러아님-_ -;)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8세게 최대의 수학자 오일러 (1707~1783년)

 

 

<800여 편의 저서>

 

18세기 최대의 수학자라고 할 수 있는 오일러는 1707년 스위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저서는 800여 편이나 되고 전집만도 45권의 분량을 남겼다.

 

그는 해석학의 체계를 세웠고, 변분학 등 많은 수학상의 업적을 남겼다.

 

 

<장님이 된 연구가>

 

 

그는 연구가 지나쳐 앞을 못 보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않고 12년 동안이나 연구를 계속하였다.

 

오일러의 연구 가운데 가장 빛나는 공적인 미적분 학은 그가 베를린에 있는 동안에 완성하였다.

 

그는 25년간 베를린에 머물러 있으면서 연구를 계속했기 때문에 흔히 도이칠란트 사람이라고 오해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곳은 스위스였고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다.

 

목사인 그의 아버지는 일찍부터 그에게 수학을 가르쳐 주었고, 오일러는 자연스럽게 수학 연구에 몰두 할 수 있게 되었다.

 

 

<러시아와 독일에서>

 

 

오일러는 주로 독일에서 많은 연구 생활을 했는데, 러시아에 15년 동안 있으면서 많은 수학 공식을 연구해 냈다.

 

그는 1738년 러시아 지도를 만드는 데 수학적으로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 일에 열중하다가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그래도 그는 젊은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장님이 된 뒤에도 2만연 쪽의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제자들의 계산은 암산으로 검산하곤 했다.

 

 

<18세기 최대의 수학자>

 

 

오일러의 연구는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빛나는데, 삼각 함수의 기호인 사인(sin), 코사인(cos), 탄젠트(tan) 등을 비롯하여 자연 대수의 근에 쓰이는 기호 e, 허수의 기호인 i도 전부 그가 처음으로 사용한 기호이다

 

 

▷수학적 업적

 

1.오일러는 삼각 함수의기호 사인(Sin), 코사인(Cos), 탄젠트(Tan)와 호수의 기호i, 자연 대수의 밑수 e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사람이다.

 

2.해석학, 미분방정식, 특성함수, 방정식론, 수론, 미분기하학, 사영기하학, 확률론 등의 수학 분야뿐만 아니라 물리학 분야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고, 또한 변분계산법과 복소함수론을 만들기도 했다.

 

3.오일러가 유한의 패턴을 무한으로 확장할 때 다소 부주의했다든지, 영혼이 물질이 아니라는 것을 진지하게 증명하는 등 그의 수학적 비실제성을 비판하는 소리도 있지만 이것이 그의 위대한 업적의 빛을 바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오일러는 실로 수학의 역사상 가장 많은 저술을 하였다. 그의 연구는 수론, 대수학, 급수론, 대수해석, 미적분학, 해석기하학, 확률론, 역학 등에 걸쳐 있으며, 총 45권의 저서와 700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수학에 있어서 함수 의 표기, 자연로그의 밑, 삼각형의 내접원의 반지름r, 삼각형의 외접원의 반지름 R, 합의 기호 ,허수단위 등은 오일러의 의하여 보편화되었다. 또한, 그는 오일러의 공식 을 발견하였으며,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문제를 통하여 그래프 이론의 기초를 닸았다.

 

▷유명한 에피소드

 

제가 싹 찾아봤는데..시력에 관한 일화 말고는 없는것 같아요..

 

스위스에서 태어난 오일러는 러시아와 독일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냈다. 그가 러시아에 있을 때의 일이다. 여제 에카테리나의 궁정에 토대된 프랑스의 철학자 디드로는 무신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에 싫증이 난 에카테리나가 오일러에게 이 철학자의 입을 막아버리도록 명하자 오일러는 디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 엄숙하고 확신에 찬 태도로 그에게 말했다.

 

"각하, (a+bn)/n=x 그러므로 신은 존재합니다. 대답 해주십시오."

 

디드로가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폭소가 터졌고 디드로는 프랑스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에게 불행이 닥친 것은 파리 학사원 상을 받으려고 시도하면서이다. 저명한 수학자들이 몇 개월의 시간을 달라고 할 정도로 어려운 문제를 그는 상을 받기 위하여 사흘 만에 풀었는데 너무나 오래 긴장한 상태로 집중한 결과 오른쪽 눈이 안보이게 된 것이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17년은 완전한 장님으로 보냈다. 그러나 베에토벤이 귀가 먼 후에도 음악 활동을 계속 했던 것처럼 눈이 안 보이게 된 후에도 오일러는 복잡한 계산은 머리 속에서 암산으로 하여 논문은 구술하면서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살았다고 한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시력이나 청력보다는 자신의 재능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통찰력과 그것에 매진하는 성실성인 것이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스위스의 수학자·물리학자.

국적 : 스위스

활동분야 : 수학, 물리학

출생지 : 스위스 바젤

주요저서 : 《미분학 원리》(1755) 《독일 왕녀에게 보내는 편지》

 

자세히☞

 

바젤 출생. 주로 독일·러시아의 학사원을 무대로 활약하였고, 해석학의 화신(化身), 최대의 알고리스트(algorist:數學者) 등으로 불렸다. 그의 연구는 수학·천문학·물리학뿐만 아니라, 의학·식물학·화학 등 많은 분야에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 처음에는 목사가 되기 위하여 바젤대학에서 신학과 헤브라이어를 공부하였으나, 수학에서 J.베르누이의 관심을 끌어 곧 D.베르누이, N.베르누이와 사귀었다. 이와 같이 베르누이가(家) 사람들의 조언과 상트페테르부르크학사원에 간 베르누이 형제의 소개로, 처음에는 그 학사원의 의학부에 이어서 수학부에 적을 두었다.

 

1740년 프리드리히대왕의 초청을 받아 베를린으로 이주하였다. 그 후 24년간 베를린학사원의 수학부장으로서 연구에 몰두하였으나 점차 궁정에서의 인기가 떨어져 다시 예카테리나 여제(女帝)의 청을 받자 1766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후에 시력을 잃고 장님이 되었으나 천부적인 기억력과 강인한 정신력으로 연구를 계속하였다. 수학자로서의 연구를 시작한 시기는 뉴턴이 죽은 시기에 해당하여 해석기하학·미적분학의 개념은 갖추어져 있었으나 조직적 연구는 초보단계로 특히 역학·기하학의 분야는 충분한 체계가 서 있지 않았다.

 

이러한 미적분학을 발전시켜 《무한해석 개론 Introductio in Analysis Infinitorum》(1748) 《미분학 원리 Institutiones Calculi Differontial》(1755) 《적분학 원리 Institutiones Calculi Integrelis》(1768∼1770), 변분학(變分學:극대 또는 극소의 성질을 가진 곡선을 발견하는 방법)을 창시하여 역학을 해석적으로 풀이하였다.

 

이 밖에도 대수학·정수론(整數論)·기하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 큰 업적을 남겼다. 그 중에도 삼각함수의 생략기호(sin, cos, tan)의 창안이나 ‘오일러의 정리’ 등은 널리 알려져 있다. 베를린 시대에 프리드리히대왕의 질녀에게 자연과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쓴 《독일 왕녀에게 보내는 편지》는 당시 계몽서로서 유명하였으며 7개 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저도 요즘 수학자 때문에 걱정입니다.ㅋㅋ
제가 어제 봤던 사이트 복사해서 올려봅니다. 참고만하세요..^^
수행닷컴 이라고.. 거기 정말 자료는 무지 많네요..
무료충전소에서 공짜로 다운 됩니다. 하지만, 이왕이면 숙제는 자기손으로 직접..^^

수학자 오일러에 대해서......
수학자 오일러의 생애와 업적에 대하여 조사하였으며, 중학생 수준입니다. A4 두장정도 분량 입니다. 원고지로는 10장 정도 나오구요.(한글97)
뉴턴의일생
과학자이자 수학자인 뉴턴에 일생이 적었다. 많은 정리를 남긴 뉴턴은 중학교부터 - 고등학교에이르기 까지 많이 배우는 인물이다.(한글97)
수학자들에 대한 일화
아무도 풀지 못한 문제에 나오는 수학자들에 대한 내용 간추린것(한글97)
패르마의 대정리 기록
17세기 프랑스의 수학자 페르마(Fermat;1601-1665)는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수학계의 풀리지 않는 과제로 남아있던 의문의 정리(定里)를 남겼다. 프랑스의 법률가로서, 지방의원을 지내기도 했던 그는 수학의 여러 분야에 걸쳐서 많은 중요한 업적들을 남겼으나,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들도 많다. 그것들의 설명이다 (한글97)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읽고나서.. (고등독후감)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읽고 쓴 감상문입니다. 수학 관련 책이라 줄거리 및 내용 인용이 2/5정도, 감상과 느낀점, 생각 등이 3/5입니다 여성 수학자들에 대한 생각이 꽤 되기때문에 여학생에게 적합할 것 같습니다.
수학자에 대해서
Ⅰ. 디오판토스 (Diophantus : 246?~330?) Ⅱ. 오일러(Leonhard Euler : 1707.4.15~1783.9.18) Ⅲ. 가우스 (Gauss, Karl Friedrich : 1777.4.30~1855.2.23) (한글97)
수학관련 인물보고서 -힐베르트
인물의 사진이 포함되어있구요. 초등학생 이용하세요. 표지도 합해서 3페이지 입니다. 수학자의 일생과 에피소드를 조사했습니다.(한글97)
톰슨에 대하여
수학자 톰슨에 대하여 조사하였다 (한글97)
아르키메데스의 업적
지레 귀류법 유체역학 부력등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의 업적에 관해 탐구했으며 중3수준입니다.
수학자에게 편지쓰기
편지글이며 학교 수행평가로 한 수학자에게 편지쓰기글입니다. 가우스에게 썼으며 수준은 초등학생입니다. (좀 짧아요)(한글97)
수학자의 일화와 업적 <페르마>
수학자 ‘페르마‘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페르마의 일화를 1개 조사했으며, 중학생 수준이고, 사진 한장 있다.(한글97)
기호의 역사
수학자에 대한 설명과 허수, 가감승제에 대한 이야기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줄간격 160에 a4용지 4장으로 되어 있다. 글자크기는 10이다.(한글97)
갈루아를 읽고
수학자 갈루아라는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보았습니다. 전기문 형식의 독후감으로 줄거리 위주로 써보았습니다. 책에 내온 나용만으로만 적지 않았습니다. 필요한 내용은 읽어서 적어보았습니다.(한글97)
가우스
중학교 과정에 나오는 수학자 입니다..(한글97)
뉴턴을 읽고
뉴턴이라는 위인전기를 읽고 쓴 글입니다. 뉴턴은 영국의 유명한 과학자이며 수학자이기도 합니다. 뉴턴이 한 명언도 같이 넣어보았으며 수준은 중1,2학년입니다.(한글97)


수학자 더보기>>

THANK YOU CN

수학자 오일러에 관한 것좀 가르쳐 주세요

수학자 오일러에 관한 것을 중요한것만 찝어내 주세요. 오일러 [ Euler, Leonhard , 1707.4.15~1783.9.18 ] (출처:네이버 서비스 백과사전 참고) 요약☞ 스위스의 수학자·물리학자....

수학자 오일러에 대하여 부탁드려요....

숙제가 수학자 오일러에 대하여 조사하는 거여서..ㅠㅠㅠ 부탁 드립니다. ㅠㅠ... 그 외 물리학이나 변분법에 관한 업적도 많이 있다. 수학용어 오일러 각도 : 공간에서의...

수학자 오일러에대해서좀 알려주세요

수학자 오일러에 대해서 빨리알려주세요 오일러에... 해서 오일러는 하찮은 때문에 스승을 괴롭히지 않고... 위치에 관한 뛰어난 해석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수학자 오일러의 생애와 업적

수학자 오일러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서 가르쳐주세요. 보기좋은 연표도 좋아요.^^ 요약☞ 스위스의 수학자... 그는 어떤 이와 천왕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수학자 오일러의 대해서..

... 오일러의 생애와 수학자로써의 발명등등, 중요한것들만 골라서 간단히... 유명하였으며 7개 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해석학에 관한 많은 논문과 저사가 있다.

수학자 오일러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서…

수학자 오일러의 생애와 업적을 최대한 써주시구요..... 해서 오일러는 하찮은 때문에 스승을 괴롭히지 않고... 위치에 관한 뛰어난 해석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수학자 오일러의 업적과 한일 내공검(25)

... 수학자 오일러의 업적과 생애 그리고 이론등을 설명해주시고 어떻게 해서 이론을 알게 돼었는지 알려주세요 ... ▷유명한 에피소드 제가 싹 찾아봤는데..시력에 관한...

수학자 오일러의 생애와 업적

... 업적의 양이나 질에서 어느 수학자오일러를 능가하기는 어렵다. 일생 동안... 그는 어떤 이와 천왕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갑자기 쓰러졌다. 그는...

수학자 오일러에 대해서....

제가 이번에 방학숙제가 오일러에 대해서 A4 용지 1장... 가우스에 관한 모든것을 다 조사했습니다. 그럼 많은... 2적당 ( 짧아요)(한글97) 라그랑주 라그랑주란 수학자에 대해...

수학자좀 가르쳐주세요

... 이야기도 ;; 죄송;; 잘몰라가지구요,, 가우스 (1777 - 1855) : 도이칠란트의 수학자 19세기 전반 최대의 수학자로서... 그의 증명은 이전의 뉴우튼, 오일러 시대의 수학과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