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자 20인

수학자 20인

작성일 2008.01.22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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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 15인 이상을 알아가야 합니다.

기간은 별루 주지를 않아서 빨리 끝내야 합니다.

출생연도와 국적, 특징, 수학이론 순 10줄이상 등등....

많이 써주시기 바랍니다^^

내공40이구여, 내공만 받으려구 그냥 쓰시는 분들은 no!!!!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람베르트

 

알자스 뮐하우젠 태생 독일의 물리학자·천문학자·수학자·철학자로서 재봉직공인 아버지를 돕기 위해 12세 때 학교를 그만둔 후 17세 때 법률가의 비서가 되면서 인문학·철학·과학을 독학하였다. 천문학에 흥미를 가지게 되어 광학을 연구, 《광도측정법》(1760) 《혜성궤도의 특이성》(61) 《세계의 구조에 대한 우주론적 서간》(61) 등 3권의 저서를 공간(公刊)하였다. 이 때문에 전 유럽에서 유명해져 프리드리히대왕에 의해 베를린아카데미회원, 교수의 지위까지 올랐으며, 토목측량과 같은 국가적 사업에도 중용되었다. 천문학 연구에서는 혜성의 궤도 결정의 기본문제 처리(람베르트의 정리)에서 시작하여 우주구조설(람베르트의 星辰系)을 통해 은하 설명을 시도하였고, 물리학에서는 광도측정에 대한 기초 확립에 뜻을 두고 실험(람베르트의 법칙)하여 람베르트의 광도계를 제작하였다. 또 자기장의 역제곱의 법칙을 발견하여 쿨롱의 선구자가 되었고, 열학에서는 습도측정 연구로 습도계·열도계를 제작해서 저서 《고온계측》(79)에서 열복사 연구의 기초를 세웠다. 또 기체의 부피가 0이 되는 점을 절대영도로 정의하여 그 값을 -273 ℃라고 정하였다. 수학에서는 《자유투시법》(59)을 써서 화법기하학(畵法幾何學)을 도입하였고, 평행선공리문제를 연구하여 비(非)유클리드기하학을 개척하였다. 람베르트급수 도입, 쌍곡선함수 발견 등도 뛰어난 업적이다. 철학저서로는 《신(新)오르가논》(64) 《체계학》(71) 등이 있다. 이들은 수학과 정밀한 증명을 철학에 결부시키려는 의도 아래 전개된 것으로 C.볼프의 이성론과 J.로크의 경험론을 서로 결합시켜 독특한 인식론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는 1761년에원주율 π 가 무리수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가우스

 

독일의 수학자. 대수학·해석학·기하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겨, 19세기 최대의 수학자라고 일컬어진다. 수학에 이른바 수학적 엄밀성과 완전성을 도입하여, 수리물리학(數理物理學)으로부터 독립된 순수수학의 길을 개척하여 근대수학을 확립하였다. 한편 물리학, 특히 전자기학(電磁氣學)·천체역학(天體力學)·중력론(重力論)·측지학(測地學) 등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브룬스비크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빈궁한 가운데 성장하였지만, 일찍부터 뛰어난 소질을 보였기 때문에, 어머니와 숙부의 노력으로 취학할 수 있었다. 10세 때 등차급수의 합의 공식을 창안하는 등 신동(神童)으로 알려져 브룬스비크공(公) 페르디난드에게 추천되어, 카롤링고교를 거쳐 괴팅겐대학에 진학하였다. 고교시절에 이미 정수론(整數論)·최소제곱법[最小自乘法] 등으로 독자적인 수학적 업적을 올렸는데, 천제적인 소질로 인하여 19세 때인 괴팅겐대학 재학 시절 원에 내접하는 정 17각형의 문제에 열중한 것이 수학의 길을 선택하기로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 가우스는 헬름슈테트대학으로 옮겨 22세 때 학위를 받았으며, 그 후 다시 브룬스비크로 돌아와 페르디난드공(公)의 도움을 받으면서 수학을 계속 연구하였다. 1801년에 간행된 명저(名著) 《정수론연구(整數論硏究):Disquistiones arithmeticae》는 2차의 상호법칙의 증명을 풀이하였으며, 합동식(合同式)의 대수적 기법을 도입하여 이 분야에 획기적인 업적을 쌓아 올렸고, 학위 논문에서 이룩한 대수학의 기본정리의 증명과 더불어 학계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그에게 대학에서의 지위를 가져다준 것은 오히려 천체역학에 관한 업적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의 학계에서 뉴턴역학의 영향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즉, 1801년 소행성 케레스(Ceres)가 발견되자, 이 별의 궤도결정이 문제로 대두되어, 가우스가 이를 계산해 내어 해결한 공을 인정받아 1807년에 괴팅겐대학 교수 겸 천문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발견은 대부분 괴팅겐 대학 재학 중에 실마리를 얻었다고 한다.

1800년 이후 가우스의 연구는 대략 4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는 소행성의 궤도결정을 시작으로 천체역학을 연구하던 20년까지의 시기이고, 이 시기의 연구는 《천체운동론》(1809)에 집대성되어 있다. 또한, 수학 분야에서는 초기하급수(超幾何級數)의 연구 및 복소변수(複素變數)의 함수론의 전개가 있다(베셀에게 보낸 서한에 적혀 있으며, 훗날의 코시의 정리도 포함한다). 제2기는 측지학(測地學)에 관계한 시기로서, 21년에 하노버 정부와 네덜란드 정부의 측지사업의 학술고문으로 위촉받은 일이 계기가 되어 곡면론(曲面論)의 검토, 즉 곡률(曲率)의 문제, 등각사상(等角寫像)의 이론, 그리고 곡면의 전개가능성 등을 고찰하였다. 이것은 미분기하학(微分幾何學)으로 향하는 최초의 일보였다. 한편, 정수론의 영역에서도, 주로 4차(次)의 상호법칙 연구에서 비롯하여 복소정수(複素整數)의 연구에 이르러 대수적(代數的) 정수의 이론을 창시하였고, 이것은 아이젠슈타인, 쿠머, 데데킨트 등에게 계승되었다. 또한, 데이터의 처리와 관련하여 21∼23년의 논문에서 최소제곱법을 이론화하여 통계에서 가우스분포의 의의를 강조하였다. 제3기는 30년부터의 10년간으로서, 주요 관심사는 물리학 쪽으로 옮겨져 갔다. 특히, W.E.베버와의 협력 아래 추진한 지구자기(地球磁氣)의 측정 및 이의 이론적 체계화가 두드러진 업적이다. 괴팅겐에 자기관측소를 설립하고, 측정을 위하여 자기기록계를 제작하였으며, 또한 절대단위계(絶對單位系)를 도입함으로써 전자기학의 기초를 닦는 데 공헌하였고, 한편으로는 퍼텐셜론(論)을 전개하여 이것의 수학적 기초의 수립을 추진하였다. 이 밖에, 전신기(電信機)의 발명과 모세관현상의 연구 등도 이 시기에 이룩한 것이다. 40년경부터 만년에 이르는 제4기에는, 오늘날의 위상해석학(位相解析學)인 위치해석학 및 복소변수의 함수와 관련된 기하학을 연구하였다. 이상과 같이 수학자이며 동시에 관측자이기도 했던 그는 ‘괴팅겐의 거인(巨人)’으로서 이름을 남겼지만, 우선권 다툼이라든지 후진의 업적에 대한 냉담한 태도 등으로 가끔 나쁜 평을 받게 된 것은 아마도 완전성을 중요하게 여긴 그의 성격 탓인지도 모른다.

 

오릴러

 

바젤 태생의 스위스 수학자·물리학자로 오이레르라고도 한다. 주로 독일·러시아의 학사원을 무대로 활약하였고, 해석학의 화신(化身), 최대의 알고리스트(algorist:數學者) 등으로 불렸다. 그의 연구는 수학·천문학·물리학뿐만 아니라, 의학·식물학·화학 등 많은 분야에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 처음에는 목사가 되기 위하여 바젤대학에서 신학과 헤브라이어를 공부하였으나, 수학에서 J.베르누이의 관심을 끌어 곧 D.베르누이, N.베르누이와 사귀었다. 이와 같이 베르누이가(家) 사람들의 조언과 상트페테르부르크학사원에 간 베르누이 형제의 소개로, 처음에는 그 학사원의 의학부에 이어서 수학부에 적을 두었다. 40년 프리드리히대왕의 초청을 받아 베를린으로 이주하였다. 그 후 24년간 베를린학사원의 수학부장으로서 연구에 몰두하였으나 점차 궁정에서의 인기가 떨어져 다시 예카테리나 여제(女帝)의 청을 받자 66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후에 시력을 잃고 장님이 되었으나 천부적인 기억력과 강인한 정신력으로 연구를 계속하였다. 수학자로서의 연구를 시작한 시기는 뉴턴이 죽은 시기에 해당하여 해석기하학·미적분학의 개념은 갖추어져 있었으나 조직적 연구는 초보단계로 특히 역학·기하학의 분야는 충분한 체계가 서 있지 않았다. 이러한 미적분학을 발전시켜 《무한해석 개론:Introductio in Analysis Infinitorum》(1748) 《미분학 원리:Institutiones Calculi Differontial》(55) 《적분학 원리:Institutiones Calculi Integrelis》(68∼70), 변분학(變分學:극대 또는 극소의 성질을 가진 곡선을 발견하는 방법)을 창시하여 역학을 해석적으로 풀이하였다. 이 밖에도 대수학·정수론(整數論)·기하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 큰 업적을 남겼다. 그 중에도 삼각함수의 생략기호(sin, cos, tan)의 창안이나 ‘오일러의 정리’ 등은 널리 알려져 있다. 베를린 시대에 프리드리히대왕의 질녀에게 자연과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쓴 《독일 왕녀에게 보내는 편지》는 당시 계몽서로서 유명하였으며 7개 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해석학에 관한 많은 논문과 저사가 있다.

 

뉴턴

 

영국의 동부 Lincolnshire 지방의 울즈 소프에서 출생한 물리학자·천문학자이자 17세기 최대의 수학자의 한사람으로 근대이론과학의 선구자이다. 뉴턴의 생애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643년부터 1669년 대학 졸업 때까지를 제 1기로 소년시절이라 할수 있다. 제 2기는 1669년부터 1687년까지 캠브리지의 교수로 있으면서 가장 생산적인 시기이고, 제 3기는 앞의 두 기간을 합한 것보다 더 긴 시간인데 뉴턴은 학자로서가 아니라 수학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귀족으로서의 생활을 죽을 때까지 계속하였다. 캠브리지에서 뉴턴의 목표는 법학학위였다. 첫 해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공부하였고, 나머지 3년 동안 뉴턴은 데카르트 철학, 비에트, 데카르트, 월리스 등의 대수와 해석 기하, 갈릴레이의 지동설 등을 공부하였다. 뉴턴의 수학적인 재능은 캠브리지의 바로우 교수에 의해 발견되었다. 과학에서 그의 천재성은 1665년 페스트로 말미암아 대학이 문을 닫아 고향으로 돌아와야만 했을 때 갑자기 나타났다. 2년 정도의 시간 동안 뉴턴은 광학, 물리학, 천문학에서 혁명적인 진보를 시작했다.
집에 있는 동안 뉴턴은 라이프니쯔 의 발견 이전에 미적분학의 기초를 세웠다. 그의 유율법은 함수의 적분은 단순히 미분하는 절차의 역이라는 결정적인 통찰에 기초를 두고 있다. 미분을 기본 연산으로 간주함으로써 뉴턴은 넓이, 접선, 곡선의 길이, 함수의 최대값 최소값 구하기 같이 명백하게 무관한 문제를 풀기 위해 개발된 서로 다른 기술을 통합하는 간단한 해석적 해법을 만들었다. 뉴턴은 1671년에 De Methodis Serierum et Fluxionum를 썼지만 출판하지는 못했는데, 1736년에 john Colson에 의해 영어 번역으로 출판되었다.
1669년에 바로우가 은퇴하면서 뉴턴이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뉴턴은 광학에 착수했는데, 페스트의 2년 동안 햇빛은 단순한 실재물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모든 과학자들은 햇빛은 단순한 실재물이라로 믿어 왔으나 뉴턴은 망원 렌즈 속의 색 수차 때문에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뉴턴은 가는 햇빛을 프리즘으로 통과시켰을 때 생기는 색의 스펙트럼을 기록하였다.
뉴턴은 햇빛은 여러 각도로 분산되는 다양한 형태의 광선의 혼합물이고, 다양한 형태의 광선은 서로 다른 스펙트럼의 색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유로 뉴턴은 반사렌즈를 이용한 망원경은 항상 색 수차를 만들 것이라는 정도에서 벗어난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그는 반사 망원경을 제작하였다.
반사 망원경을 기증한 후 1672년에 뉴턴은 영국 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해에 빛과 색에 대한 첫번째 과학적인 논문 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를 출판하였다.
뉴턴의 논문은 잘 접수되었지만 후크와 호이겐스는 빛이 파동이 아닌 작은 입자의 운동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실험으로만 증명하려는 뉴턴의 시도를 반대하였다. 아마도 뉴턴의 명성때문에 19세기 파동 이론이 재기되기 전까지는 뉴턴의 미립자 이론이 지배적이었다.
뉴턴과 후크의 사이가 나쁘게 되자 뉴턴은 영국 학술원을 떠났고, 1703년 후크가 죽기까지 그의 광학 연구를 출판하지 않았다. 1904년에 뉴턴은 Opticks를 출판했는데 그의 관찰 결과를 설명하면서 그의 미립자 이론에 빛의 파동성을 사용해야만 했었다.
뉴턴의 가장 큰 업적은 만류인력의 법칙으로 절정을 이루는 물리학과 천체 역학에서 나타난다. 1666년에 뉴턴은 세가지 운동법칙의 초기버전을 만들어냈다. 뿐만 아니라, 등속원운동하는 물체에 원심력을 만드는 법칙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뉴턴은 원운동의 역학을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하였다.  수학에서의 미적분법 창시, 물리학에서의 뉴턴역학의 체계 확립, 이것에 표시된 수학적 방법 등은 자연과학의 모범이 되었고, 사상면에서도 역학적 자연관은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아버지는 그의 출생 전에 사망하였고, 어머니는 그가 3세 때 재혼하는 등 불운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1661년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칼리지에 입학, 수학자 I.배로의 지도를 받아 케플러의 《굴절광학》,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 월리스의 《무한의 산 수》 등을 탐독하였으며, 64년 학사학위를 얻었다. 64∼66년 페스트가 크게 유행하자 대학 이 일시 폐쇄되어 뉴턴도 고향으로 돌아와 대부분의 시간을 사색과 실험으로 보냈다. 그의 위대한 업적의 대부분은 이때 싹트게 된 것이라고 하며, 사과의 일화도 이때 있었던 일이 다. 67년 재개된 대학에 돌아와 이 대학의 펠로(특별연구원)가 되고 이듬해에는 메이저펠로 (전임특별연구원)가 됨과 동시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69년 I.배로의 뒤를 이어 루카스교수 직에 부임하였다. 저서 [Method of fluxions](1671)에서 소위 미분-적분학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또 [Principia(1687)]에서 운동의 법칙을 확립하였고 그가 확립한 법칙에 바탕을 둔 역학을 뉴우튼 역학이라 한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의 최초의 강의도 광학(그 내용은 뉴턴 사후 《광학강의》로 1729년 출판되었다)이었으며, 초기 연구는 광학분야에서 두드러졌다. 광학에 대해서 는 이미 울즈소프 시절부터 스스로 수집·정비한 실험기구를 이용해 빛의 분산현상을 관찰 하였으며, 특히 굴절률과의 관계에 대하여 세밀히 조사하였다. 한편 망원경 제작도 연구, 굴절광은 스펙트럼을 만들지만, 반사광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기초로, 반사식이 수차 와 효율면에서 한층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68년 뉴턴식 반사망원경을 제작했다. 이 망원 경은 천체관측 등에 크게 공헌하여 이 공적으로 72년 왕립협회회원으로 추천되었다. 그 해 에 《빛과 색의 신이론》이라는 연구서를 협회에 제출하였는데, 그 내용은 백색광이 7색의 복합이라는 사실, 단색이 존재한다는 사실, 생리적 색과 물리적 색의 구별, 색과 굴절률과 의 관련 등을 논한 것이었다. 75년 박막의 간섭현상인 ‘뉴턴의 원무늬’를 발견하였으며, 빛의 성질에 관한 연구로 광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광학》(1704)을 저술했다. 수학 에서는 65년 이항정리의 연구를 시작으로, 무한급수로 진전하여 66년 유분법, 즉 플럭션법 을 발견하고, 이것을 구적 및 접선 문제에 응용하였다. 이것은 오늘날의 미적분법에 해당하 는 것으로, 그 성과를 69년에 논문 로 발표하였다. 유분법의 전개에 대해서는 에 수록되어 있다. 76년 그와 동일한 미분법을 발견한 라이프니츠와 우선 권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졌는데, 이 무렵부터 그의 사고방식도 실험적 방법에서 수학적 방 법으로 그 중점이 옮겨져 스스로를 수학자라고 하였다. 뉴턴의 최대 업적은 물론 역학(力學)에 있다. 일찍부터 역학 문제, 특히 중력 문제에 대해서는 광학과 함께 큰 관심을 가지 고 있었으며, 지구의 중력이 달의 궤도에까지 미친다고 생각하여 이것과 행성의 운동(이것 을 지배하는 케플러법칙)과의 관련을 고찰한 것은 울즈소프 체류 때 이루졌다고 한다. 70년 대 말로 접어들면서 당시 사람들도 행성의 운동중심과 관련된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 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수학적 설명이 곤란해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는데, 뉴턴은 자신이 창시해낸 유율법을 이용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확 립하였다. 87년 이 성과를 포함한 대저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가 출판되었으며, 이로써 이론물리학의 기 초가 쌓이고 뉴턴역학의 체계가 세워졌다. 3부로 된 이 라틴어 저서는 간단한 유율법의 설 명에서 시작하여 역학의 원리, 인력의 법칙과 그 응용, 유체의 문제, 태양-행성의 운동에서 조석의 이론 등에 이르기까지 계통적으로 논술되어 있다. 또 방정식론 등의 대수학 분야의 여러 업적은 《Arithmetica universalis sive de compositione et resolutione arithmetica liber》(1707)로 간행되었다. 88년 명예혁명 때는 대학 대표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고, 91 년 조폐국의 감사가 되었으며, 96년 런던으로 이주, 99년 조폐국 장관에 임명되어 화폐 개 주라는 어려운 일을 수행하였다. 1703년 왕립협회 회장으로 추천되고 1705년 나이트 칭호를 받았다. 한편 신학에도 관심을 보여 성서의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고대사 해석을 검증하고, 천문학적 고찰을 첨가해 연대기를 작성하였다. 이 성서 연구를 통해 삼위일체설을 부정하는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보냈으며, 런던 교외의 켄징턴에서 죽었다. 장례는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거행되고 그 곳에 묻혔다. 근대과학 성립의 최고의 공로자이며, 그가 주장한 ‘자연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라고 하는 역학적 자 연관은 18세기 계몽사상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네이피어

 

영국의 수학자. 에든버러 근교의 머키스턴성(城) 출생. 스코틀랜드의 귀족 출신으로 남작이다. 13세에 세인트 앤드루스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그 후 프랑스에 유학하여 앙드리크 하반(河畔)에서 오랫동안 체재하였으며, 1608년 이후로는 머키스턴성으로 돌아와서 살았다. 수학·신학·점성술 등을 좋아하였는데, 특히 신학에서는 열렬한 신교도로서 로마교황과 그 권위에 반대하여 《성 요한 묵시록 전체에서의 소박한 발견:A Plain Discovery of the Whole Revelation of Saint John》(1594)을 발표하였다. 또 점성술에서는 예언에 관한 저술을 하는 등 그 재능을 보였다. 특히 40여 년에 걸친 수학 연구로 산술·대수(代數)·삼각법 등의 단순화·계열화를 꾀하였으며, 연구영역이 그가 고안한 곱셈, 나눗셈 세제곱셈에 이용되는 네이피어 보온 또는 네이피어의 계산봉이라는 ‘네이피어 로드’ 등 계산기계의 고안에까지 미쳤다. 그 중 계산의 간편화를 목적으로 한 로그의 발명은 수학사상 커다란 업적이었다. 즉, 1614년 선분 AB위를 A로부터 출발하여 B로 행하는데, 그 속도가 나머지 PB의 길이에 비례하는 것처럼 점의 운동을 생각하여《경이적인 로그법칙의 기술:Mirifici Logarithmorum Canonis Descriptio》로 로그의 성질을 명백히 하였으며, 16년에는 H.브리그스와 협력하여 10을 밑[底]으로 하는 상용로그표를 만들기 시작했으나 완성시키기 전에 죽어 《경이적인 로그법칙의 구조》(1619)가 유고로서 출판되었고, 그 일은 브리그스에게 인계되었다. 그는 로그를 등차수열적 운동과 등비수열적 운동을 대응시켜서 발견해 냈다. 또한, 소수기호(小數記號)의 도입자로서도 알려졌다.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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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수학자 허민님이 지식iN에...

... 저서로 <수학자의 뒷모습>이 있고, 역서로 <영부터 무한대까지>, <수학의 위대한 순간들>, <수학적 경험> 등이 있다. 1번은 x=20인거 같고요 2번은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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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점 해주세염 내공20인거아시저 오늘중으로 최소한 11시까지염~ 이상한 나라의... 작가인 루이스 캐럴(1832~1898)은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수학교수를 지낸 수학자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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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은 1.996이다." - 수학자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생각한 다음, 고개를... 답이 20인 식을 만들어 보세요 ● 9를 4개 사용해서 답이 100이 되는 식을 만들어...

2005년 1월 수학전시회 어디서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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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퀴리보고서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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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하는 질문이 되길 바랍니다.

... 여기서, 수학자라면 당연히 보다 다른 각도에서 구태를 극복할 방법을 모색했을 법하고 그것이 당시(19세게기)에 가장 첨단으로 발전된 다항식 연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