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수학자 열두명만 소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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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7.07.24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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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한 수학자 열두명만 소개해주세요~

 업적이나 발견한 공식

 공식의 예

 

뭐 이정도만 설명해주시면 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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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수학자

 

가르베르스(1898.5.16)

독일의 수학자 및 자연과학자. 1937~38년 베를린 의학사 자연사연구소 연구원이었고, 41~46년 라이프치히대학 강사를 거쳐, 47년 함부르크대학 강사가 되었다. 특히 이슬람교의 자연과학에 정통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Ein Werk Tabit bin Qurra’s 웑er ebene Sonnenuhren》(1936) 등의 역주(譯註)가 있다.

 

가생디(1592.1.22~1655.10.24)

프랑스의 철학자·물리학자·수학자. 프로방스 출생. 에크스대학에서 신학을 공부, 이 대학의 신학·철학 교수가 되었으나, 자연과학 연구에 전념하기 위하여 교수직을 사임하고, 1645년에 파리의 콜레주 루아얄의 수학교수가 되었다. 최초의 역작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에 대한 역설적 연구》(24)에서 명백히 밝힌 바와 같이, 사상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스콜라 철학 제파(諸派)에 대해 격렬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였으며, 수학을 비롯한 자연과학 방면의 활약에서는 유물론적 세계관을 기조로 하였다. 그는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의 유물론적 원자론(唯物論的原子論)에 입각하여 물질과 독립된 시간과 공간의 존재를 논증하고, 이의 불멸(不滅)을 주장하였으며, 더 나아가서는 경험 지식을 모든 인식의 원천이라고 선언하여 R.데카르트의 합리주의와 형이상학적 개념에 반대하였다. 그가 주장한 원자론은 18세기 프랑스 계몽기의 감각론자(感覺論者)나 백과전서파(百科全書派)에게 큰 영향을 줌으로써 근대원자론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과학자로서는 천체의 관측과 지중해의 수로도(水路圖)작성에 업적을 남겼다.

 

갈루아(1811.10.25~1832.5.31)

프랑스의 수학자. 파리 교외 부르라렌 출생. 군(群)의 개념을 처음으로 고안하였고, ‘갈루아의 이론’으로도 유명하다. 파리의 고등이공과학교에 입학하려다 실패하였으나, 1829년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30년 정치운동에 참가해서 퇴학당하였다. 또한 국왕을 탄핵하여 투옥되었는데, 가출옥 중에 경찰관이 도발한 것이라고도 하는 결투로 인해 21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방정식론에 관한 연구 결과도 프랑스 학사원에서 등한시되었으나, 그가 죽은 후, 결투 전날 밤에 친구인 A.슈발리에에게 보낸 유고(遺稿)에서 비로소 그 위대성이 알려졌다. 유고에는 타원적분(楕圓積分)과 대수함수(代數函數)의 적분에 관한 것, 방정식론에 관한 것이 요약되어 있다. 그 내용에는 군(群)의 개념 도입이나 갈루아 이론의 본질적인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갈루아의 사상에 포함된 군의 개념은 기하학이나 결정학(結晶學)에도 응용되었고, 물리학에도 풍부한 연구수단을 제공하였다.

 

가우스(1777.4.30~1855.2.23)

독일의 수학자. 대수학·해석학·기하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겨, 19세기 최대의 수학자라고 일컬어진다. 수학에 이른바 수학적 엄밀성과 완전성을 도입하여, 수리물리학(數理物理學)으로부터 독립된 순수수학의 길을 개척하여 근대수학을 확립하였다. 한편 물리학, 특히 전자기학(電磁氣學)·천체역학(天體力學)·중력론(重力論)·측지학(測地學) 등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브룬스비크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빈궁한 가운데 성장하였지만, 일찍부터 뛰어난 소질을 보였기 때문에, 어머니와 숙부의 노력으로 취학할 수 있었다. 10세 때 등차급수의 합의 공식을 창안하는 등 신동(神童)으로 알려져 브룬스비크공(公) 페르디난드에게 추천되어, 카롤링고교를 거쳐 괴팅겐대학에 진학하였다. 고교시절에 이미 정수론(整數論)·최소제곱법[最小自乘法] 등으로 독자적인 수학적 업적을 올렸는데, 괴팅겐대학 재학 시절에 정 17각형의 문제에 열중한 것이 수학의 길을 선택하기로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 가우스는 헬름슈테트대학으로 옮겨 22세 때 학위를 받았으며, 그 후 다시 브룬스비크로 돌아와 페르디난드공(公)의 도움을 받으면서 수학을 계속 연구하였다. 1801년에 간행된 명저(名著) 《정수론연구(整數論硏究):Disquistiones arithmeticae》는 2차의 상호법칙의 증명을 풀이하였으며, 합동식(合同式)의 대수적 기법을 도입하여 이 분야에 획기적인 업적을 쌓아 올렸고, 학위 논문에서 이룩한 대수학의 기본정리의 증명과 더불어 학계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그에게 대학에서의 지위를 가져다준 것은 오히려 천체역학에 관한 업적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의 학계에서 뉴턴역학의 영향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즉, 1801년 소행성 케레스(Ceres)가 발견되자, 이 별의 궤도결정이 문제로 대두되어, 가우스가 이를 계산해 내어 해결한 공을 인정받아 1807년에 괴팅겐대학 교수 겸 천문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800년 이후 가우스의 연구는 대략 4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는 소행성의 궤도결정을 시작으로 천체역학을 연구하던 20년까지의 시기이고, 이 시기의 연구는 《천체운동론》(1809)에 집대성되어 있다. 또한, 수학 분야에서는 초기하급수(超幾何級數)의 연구 및 복소변수(複素變數)의 함수론의 전개가 있다(베셀에게 보낸 서한에 적혀 있으며, 훗날의 코시의 정리도 포함한다). 제2기는 측지학(測地學)에 관계한 시기로서, 21년에 하노버 정부와 네덜란드 정부의 측지사업의 학술고문으로 위촉받은 일이 계기가 되어 곡면론(曲面論)의 검토, 즉 곡률(曲率)의 문제, 등각사상(等角寫像)의 이론, 그리고 곡면의 전개가능성 등을 고찰하였다. 이것은 미분기하학(微分幾何學)으로 향하는 최초의 일보였다. 한편, 정수론의 영역에서도, 주로 4차(次)의 상호법칙 연구에서 비롯하여 복소정수(複素整數)의 연구에 이르러 대수적(代數的) 정수의 이론을 창시하였고, 이것은 아이젠슈타인, 쿠머, 데데킨트 등에게 계승되었다. 또한, 데이터의 처리와 관련하여 21∼23년의 논문에서 최소제곱법을 이론화하여 통계에서 가우스분포의 의의를 강조하였다. 제3기는 30년부터의 10년간으로서, 주요 관심사는 물리학 쪽으로 옮겨져 갔다. 특히, W.E.베버와의 협력 아래 추진한 지구자기(地球磁氣)의 측정 및 이의 이론적 체계화가 두드러진 업적이다. 괴팅겐에 자기관측소를 설립하고, 측정을 위하여 자기기록계를 제작하였으며, 또한 절대단위계(絶對單位系)를 도입함으로써 전자기학의 기초를 닦는 데 공헌하였고, 한편으로는 퍼텐셜론(論)을 전개하여 이것의 수학적 기초의 수립을 추진하였다. 이 밖에, 전신기(電信機)의 발명과 모세관현상의 연구 등도 이 시기에 이룩한 것이다. 40년경부터 만년에 이르는 제4기에는, 오늘날의 위상해석학(位相解析學)인 위치해석학 및 복소변수의 함수와 관련된 기하학을 연구하였다. 이상과 같이 수학자이며 동시에 관측자이기도 했던 그는 ‘괴팅겐의 거인(巨人)’으로서 이름을 남겼지만, 우선권 다툼이라든지 후진의 업적에 대한 냉담한 태도 등으로 가끔 나쁜 평을 받게 된 것은 아마도 완전성을 중요하게 여긴 그의 성격 탓인지도 모른다. 그의 좌우명은 “수(數)는 적으나 완숙하였도다”였다.

 

갈루아(1811.10.25~1832.5.31)

프랑스의 수학자. 파리 교외 부르라렌 출생. 군(群)의 개념을 처음으로 고안하였고, ‘갈루아의 이론’으로도 유명하다. 파리의 고등이공과학교에 입학하려다 실패하였으나, 1829년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30년 정치운동에 참가해서 퇴학당하였다. 또한 국왕을 탄핵하여 투옥되었는데, 가출옥 중에 경찰관이 도발한 것이라고도 하는 결투로 인해 21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방정식론에 관한 연구 결과도 프랑스 학사원에서 등한시되었으나, 그가 죽은 후, 결투 전날 밤에 친구인 A.슈발리에에게 보낸 유고(遺稿)에서 비로소 그 위대성이 알려졌다. 유고에는 타원적분(楕圓積分)과 대수함수(代數函數)의 적분에 관한 것, 방정식론에 관한 것이 요약되어 있다. 그 내용에는 군(群)의 개념 도입이나 갈루아 이론의 본질적인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갈루아의 사상에 포함된 군의 개념은 기하학이나 결정학(結晶學)에도 응용되었고, 물리학에도 풍부한 연구수단을 제공하였다.

 

갈릴레이(1564.2.15~1642.1.8)

이탈리아의 천문학자·물리학자·수학자. 피사 출생. 피렌체의 시민계급 출신이다. 성과 이름이 비슷한 이유는 장남에게는 성을 겹쳐 쓰는 토스카나 지방의 풍습 때문이다. 1579년 피렌체 교외의 바론브로사수도원 부속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마치고, 81년 피사대학 의학부에 입학하였는데, 이 무렵 우연히 성당에 걸려 있는 램프가 혼들리는 것을 보고 진자(振子)의 등시성(等時性)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84년 피사대학을 중퇴하고 피렌체에 있던 가족과 합류하였다. 이곳에서 아버지 친구이자 토스카나 궁정수학자인 오스틸리오 리치에게 수학과 과학을 배우면서 대단한 흥미를 느꼈다. 이때 습작(習作)으로 쓴 논문이 인정을 받아 92년 피사대학의 수학강사가 되었고, 같은 해 베네치아의 파도바대학으로 옮겼다. 파도바대학에서는 유클리드기하학과, 천동설(天動說)을 주장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가르치는 한편, 가정교사 노릇을 하면서 리치에게 배운 응용수학을 연구하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간단한 군사기술 입문》 《천구론(天球論) 또는 우주지(宇宙誌)》 《축성론(築城論)》 《기계학》은 이 시기의 저서이다. 베네치아의 여성과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었으며, 파오로 사르피 같은 당대의 뛰어난 학자·귀족 등과 친교를 맺었다. 1604년의 《가속도운동에 관해서》에서 발표한 근대적인 관성법칙(慣性法則)의 개념도 이미 그 전에 사르피에게 보낸 서한에 나타나 있다. 1609년 네덜란드에서 망원경이 발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손수 망원경을 만들어 여러 천체에 대하여 획기적인 관측을 하였다. 예를 들면, 당시에는 완전한 구(球)로 믿었던 달에 산과 계곡이 있다는 것, 모든 천체는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생각하였는데, 목성(木星)도 그것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등이었다. 10년에 이러한 관측결과를 《별세계의 보고》로 발표하여 커다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해에 교직생활을 그만두고 고향 피렌체로 돌아가서 토스카나대공(大公)인 메디치가(家)의 전속학자가 되었다. 그 후로도 천문관측을 계속하여 12∼13년에 태양흑점 발견자의 명예와 그 실체의 구명(究明)을 둘러싸고, 예수회 수도사인 크리스토퍼 샤이너와 논쟁을 벌여, 그 내용을 《태양흑점에 관한 서한》에서 발표하였다. 이 무렵부터 갈릴레이는 자신의 천문관측 결과에 의거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地動說)에 대한 믿음을 굳히는데, 이것이 로마교황청의 반발을 사기 시작하였다. 성서와 지동설과의 모순성에 관하여 제자들에게, 그리고 자신이 섬기는 대공(大公)의 어머니에게 편지형식으로 자기의 생각를 써 보냈는데, 이로 말미암아 로마의 이단심문소로부터 직접 소환되지는 않았지만 재판이 열려, 앞으로 지동설은 일체 말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제1차 재판). 18년에 3개의 혜성이 나타나자 그 본성(本性)을 둘러싸고 벌어진 심한 논쟁에 휘말리는데, 그 경과를 《황금계량자(黃金計量者)》라는 책으로 23년에 발표하였다. 여기서 직접적으로 지동설과 천동설의 문제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천동설을 주장하는 측의 방법적인 오류를 예리하게 지적하였으며, 우주는 수학문자(數學文字)로 쓰인 책이라는 유명한 말을 함으로써 자기의 수량적(數量的)인 자연과학관을 대담하게 내세웠다. 그 후 숙원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2대 세계체계에 관한 대화:Dia1ogo sopra 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 tolemaico e copernicaon》의 집필에 힘써, 제1차 재판의 경고에 저촉되지 않는 형식으로 지동설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이 책은 32년 2월에 발간되었지만, 7월에 교황청에 의해 금서목록(禁書目錄)에 올랐으며, 갈릴레이는 로마의 이단심문소의 명령으로 33년 l월에 로마로 소환되었다. 4월부터 심문관으로부터 몇 차례의 신문을 받고, 몇 가지 위법행위가 있었음을 자인하였다. 그러나 갈릴레이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과정에서 심문소 당국이 증거로 제시한 서류 중 몇 가지는 그 진실성이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6월에 판결이 내려졌고, 그는 그것을 받아들여 앞으로는 절대로 이단행위를 않겠다고 서약하였다(제2차 재판). 그 뒤 갈릴레이는 피렌체 교외의 알체토리에 있는 옛집으로 돌아왔는데, 사랑하는 장녀와 시력마저 잃었지만 마지막 대작인 《두 개의 신과학(新科學)에 관한 수학적 논증과 증명:Discorsi e dimonstrazioni mathematiche intorno a due nuove scienze attenenti alla meccanica》의 저술에 힘썼으며, 일단 정리되자 신교국(新敎國)인 네덜란드에서 출판하였다. 이어 속편 집필에 착수하였지만,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죽은 후에는 공적(公的)으로 장례를 치를 수 없었으므로 묘소를 마련하는 일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만년에는, 스승의 전기를 쓴 V.비비아니와, 기압계(氣壓計)에 그 이름을 남긴 물리학자 토리첼리의 두 제자가 그의 신변에 있었다. 갈릴레이의 생애는 르네상스기와 근대와의 과도기에 해당되며, 구시대적인 것과 새로운 것이 그의 생활이나 과학 속에도 공존하고 있었다. 천문학에서는 지동설을 취하면서도 케플러의 업적은 전혀 이해하지 않았고, 물리학에서의 관성법칙을 발견했지만 이것의 정식화(定式化)는 데카르트에게 넘겨주었다. 또한, 일상생활에서도 자유가 주어지는 파도바대학을 떠나 봉건제후(封建諸侯)의 전속학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인간다운 면은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 뛰어난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골즈브로(1881.5.19~1963.5.26)

영국의 해양학자·수학자. 더럼대학 수학교수(1928∼48), 이학부장(34∼36), 문학부장(36∼38)을 역임하였다. 동력학적 조석론(潮汐論), 증발(蒸發) 및 강우(降雨)의 불균일로 인한 해류 등의 이론적 연구가 있다.

 

괴델(1906.4.28~1978.1.14)

미국의 수학자·논리학자. 오스트리아 출생. 빈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후, 동대학 강사(1933∼38)로 있었다. 그 동안 과학적 방법 위에 철학의 기초를 세우려고 한 빈 학파에 속하여, 그 후 수학기초론이나 논리학의 방법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가져온 많은 ‘괴델의 정리’를 발표하였다. 특히 유명한 것으로는 1931년 발표한 ‘불완전성 정리’인데, 이것은 당시의 H.힐베르트나 B.러셀과 같이 공리적인 방법에만 의존하여 수학의 체계를 세우려는 확신을 좌절시킨 정리이다. 38년 나치스 정권의 박해로 미국으로 이주하여, 프린스턴고등연구소 연구원이 되었다. 주요 저서 논문으로는 《냕er formale unentscheidbare S둻ze der Principia Mathematica und verwandter Systeme》(1931) 《The Consistency of the Axiom of the Choice and of the Generalized Continuum-Hypothesis with the Axioms of Set Theory》(48) 등이 있다.

 

구르사(1858.5.21~1936.11.25)

프랑스의 수학자. 랑자크 출생. 툴루즈 이과대학 강사(1881∼85), 파리 이공과대학 연습교사(96 이래), 소르본대학의 미·적분학 교수(97)를 지냈다. 함수론·미분방정식론·불변식론(不變式論)·곡면론 등 분야에 대한 공헌이 크다. 주요저서로는 《Th럒rie des fonctions alg럃riques et de leurs int럊rales》(Appel과의 공저, 1896) 《Cours d'analyse math럐atique》(1905) 등이 있다.

 

굴베르그(1836.8.11~1902.1.14)

노르웨이의 화학자·수학자. 크리스티아니아(지금의 오슬로) 출생. 크리스티아니아대학에서 화학·수학·물리학을 공부한 후, 1861년에 왕립 육군사관학교의 수학 및 열역학 교사를 지냈다. 69년에는 모교인 크리스티아니아대학의 응용수학 교수가 되었다. 64년 의형(義兄)인 화학자 P.보게와 함께 ‘질량작용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이는 P.E.M.베르틀로와 생지르의 화학평형에 관한 실험결과(1862)를 바탕으로, 보게가 300회 이상의 실험을 하고 굴베르그가 이를 수식(數式)으로 정리하여 법칙화한 것이다. 처음에 쓴 노르웨이어 논문과 두 번째의 프랑스어 논문(67)은 학회의 인정을 받지 못했으며, 77년에 이 법칙을 독자적으로 발견한 J.H.반트호프의 영향을 받아 독일어로 쓴 세번째 논문(79)이 겨우 주목을 받았다. 굴베르그는 67~90년 분자론에 입각하여 기체·액체·고체의 일반상태식(一般狀態式)을 구하는 여러 가지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물리화학의 응용에도 관심이 있었으며, 또 75년에는 노르웨이에 미터법을 답변확정하게 하였다.

 

그라스만(1809.4.15~1877.9.26)

독일의 수학자·언어학자. 슈테틴의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이곳의 중학교 선생으로 평생을 보냈다. 독학한 것으로 생각되는 수학에서는 《광연론(廣延論):Ausdehnungslehre》(1844)의 저자로서 유명하며, 언어학에서는 인도유럽 조어(祖語)의 대기음(帶氣音:有氣音)에 관한 ‘그라스만의 법칙’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하다. 광연론은 수(數)에 관한 기초이론으로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며, 20세기에 들어와서 주목을 끌면서 그라스만 대수(代數)로서 전개되게 되었다. 또 만년에 출판한 인도의 고전 《리그베다의 사서(辭書):W쉜ter-buch zum Rigveda》와 번역 《리그베다:Rigveda》(2권)는 인도의 옛 주해(註解)에 얽매이지 않고 서유럽 인도학의 새로운 학문적 입장에서 연구한 것이며, 특히 전자는 지금까지도 이를 대신할 만한 것이 없을 정도이다.

 

그레고리(1638.11~1675.10)

스코틀랜드의 수학자·발명가. 미적분학의 고안에 공헌하였으며, 반사망원경을 발명하여 이것을 저서 《Optica Promota》(1663)에 기재하기도 하였다. 또한, 기하학적 도형의 면적측정에 관한 독자적 방법을 발표하여 호이겐스와 논쟁을 벌였으며, 망원경에 관하여 I.뉴턴과 서신을 교환한 일도 있다. 세인트앤드루스대학(1669)과 에든버러대학(74) 교수를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Geometriae pars universalis》(68) 《Exercitationes geometricae》(68) 등이 있다.

 

그린(1793.7.14~1841.3.31)

영국의 수학자. 가업을 이어 빵 제조업에 종사하는 한편 수학을 독학했다. 학자들과는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연구 결과는 알려지지 않은 채 있다가, 그 일부분이 우연히 K.F.가우스에게 발견되었고 W.T.켈빈에 의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전자기현상(電磁氣現象)의 수학적 이론을 만들려고 시도, 퍼텐셜함수를 도입하여 ‘그린의 정리(적분정리)’를 유도하였고 그린함수를 결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전자기학(電磁氣學)의 해석적 취급이 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수학의 일부분으로서의 퍼텐셜론(論)을 향한 길이 열렸다. 저서로는 《전기학 및 자기학(磁氣學)의 이론에 수학해석을 응용하는 시도》(1828)가 있다.

 

내시(1920)

미국의 수학자. 웨스트버지니아주(州) 블루필드 출생. 프린스턴대학에서 교환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1994년 J.하사니, R.젤텐과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수상하였다. 60년대 중반부터 내시는 기업체간의 상호작용과 시장움직임을 예측하기 위해, 체스나 포커와 같은 일반적인 게임에서 적용되는 전략에 초점을 두고 연구하여 내시균형이라는 개념을 정립하였다. 게임에서 각 경기자들이 어떤 특정한 전략을 선택하여 하나의 결과가 나타났을 때, 모든 경기자가 이에 만족하고 더 이상 전략을 변화시킬 의도가 없을 경우를 균형이라 한다. 그런데 이 중 상대방의 최적전략에 대해서만 최적인 전략을 찾아내서 균형의 개념을 정립하는 것, 즉 내시균형은 상대방의 최적전략에 대한 본인의 최적전략이라는 성격을 띤다.

 

네이피어(1550~1617.4.4)

영국의 수학자. 에든버러 근교의 머키스턴성(城) 출생. 스코틀랜드의 귀족 출신으로 남작이다. 13세에 세인트 앤드루스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그 후 프랑스에 유학하여 앙드리크 하반(河畔)에서 오랫동안 체재하였으며, 1608년 이후로는 머키스턴성으로 돌아와서 살았다. 수학·신학·점성술 등을 좋아하였는데, 특히 신학에서는 열렬한 신교도로서 로마교황과 그 권위에 반대하여 《성 요한 묵시록 전체에서의 소박한 발견:A Plain Discovery of the Whole Revelation of Saint John》(1594)을 발표하였다. 또 점성술에서는 예언에 관한 저술을 하는 등 그 재능을 보였다. 특히 40여 년에 걸친 수학 연구로 산술·대수(代數)·삼각법 등의 단순화·계열화를 꾀하였으며, 연구영역이 ‘네이피어 로드’ 등 계산기계의 고안에까지 미쳤다. 그 중 계산의 간편화를 목적으로 한 로그의 발명은 수학사상 커다란 업적이었다. 즉, 1614년 《경이적인 로그법칙의 기술:Mirifici Logarithmorum Canonis Descriptio》로 로그의 성질을 명백히 하였으며, 16년에는 H.브리그스와 협력하여 10을 밑[底]으로 하는 상용로그표를 만들기 시작했으나 완성시키기 전에 죽어 《경이적인 로그법칙의 구조》(1619)가 유고로서 출판되었고, 그 일은 브리그스에게 인계되었다. 그는 로그를 등차수열적 운동과 등비수열적 운동을 대응시켜서 발견해 냈다. 또한, 소수기호(小數記號)의 도입자로서도 알려졌다.

 

노이만(1832.5.7~1925.3.27)

독일의 수학자·이론물리학자. 브란덴부르크 출생. F.노이만의 아들이다. 바젤대학·튀빙겐대학·라이프치히대학 등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기하광학(幾何光學)·퍼텐셜론 등 수리물리학 방면의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 뉴턴 역학의 바탕인 관성의 법칙에 관해 그 성립 조건을 검토하고 공간 내의 고립물체의 운동을 인식하기 위해 기준절대좌표계를 상정했다(?軸系의 이론). 학술지 《Mathematische Annalen》의 창간에도 기여하였다.

 

노이만(1903.12.28~1957.2.8)

헝가리 출신의 미국 수학자.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생. 은행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수학에 재능을 보였다. 1919년 베를린대학 및 취리히대학에서 공부하고 부다페스트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27년 베를린대학 강사로 있다가 30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학 강사, 이어 수리물리학(數理物理學) 교수를 거쳐 33년 프린스턴고등연구소 교수가 되었다. 37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고 43년 이후에는 미국 원자력위원회에서 활약하였다. 그의 연구는 수학기초론에서 시작하여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설정 등 수리물리학적 과제를 대상으로 하고, 또한 수리경제학(數理經濟學)이나 게임의 이론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였다. 현대적 수학기초론의 출발점이 된 《집합론의 공리화(公理化)》(28)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27) 《힐베르트 공간론》(27) 등은 모두가 20대에 이룬 업적이었다. 그리고 《게임의 이론》(28) 《에르고드이론의 연구》(32)를 집필하고, 또 《위상군론(位相群論)》에서는 《콤팩트 위상군에서의 힐베르트 제5문제의 해결》(33)이나 《군(群) 위의 개주기(槪週期) 함수론》(34)으로 군 위의 조화해석(調和解析)의 연구를 발전시켰다. 44년에는 O.모르넨슈테른과 《게임이론과 경제행동》을 저술하였으며, 그 이후에는 고속도 전자계산기(MANIAC:기상연구에 이용된 초기의 컴퓨터)의 연구·제작과 수치해석에 기여한 공로로 페르미상(Fermi賞)을 수상하였다. 그 외에 머리(Murray)와 함께 작용소환론(作用素環論)·연속기하(連續幾何)를 창시하였다. 45년에는 계산기계 연구소장, 54년에는 원자력위원이 되었다.

 

뇌터(1882.3.23~I935.4.14)

독일의 수학자. 에를랑겐 출생. 대수기하학자 M.뇌터의 딸이며, 동생 F.뇌터도 이론물리학 교수였다. 에를랑겐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후에 괴팅겐대학에서 연구를 계속하였다. 1922년 괴팅겐대학 교수가 되어, 19세기의 수학으로부터 현대 수학으로의 과도기적인 추상대수학을 추진하여 D.힐베르트, 바일 등과 함께 괴팅겐대학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18년 발표한 ‘가환환(可換環)의 이데알론(論)’으로 이른바 뇌터환(環)을 정식화한 것을 비롯하여 데데킨트환(環)의 분석(1926), 판별식 정리의 연구를 하였으며, 비가환대수(非可換代數)의 연구로 다원수론(多元數論)을 전개하여 접합적(接合積)·갈루아이론·국소유체론(局所類體論)과 추상대수학의 중심 과제를 거의 포괄하는 업적을 남겼다.

 

뉴턴(1642.12.25~1727.3.20)

영국의 물리학자·천문학자·수학자·근대이론과학의 선구자. 잉글랜드 동부 링컨셔의 울즈소프 출생. 수학에서의 미적분법 창시, 물리학에서의 뉴턴역학의 체계 확립, 이것에 표시된 수학적 방법 등은 자연과학의 모범이 되었고, 사상면에서도 역학적 자연관은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아버지는 그의 출생 전에 사망하였고, 어머니는 그가 3세 때 재혼하는 등 불운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1661년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칼리지에 입학, 수학자 I.배로의 지도를 받아 케플러의 《굴절광학(屈折光學)》,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解析幾何學)》, 월리스의 《무한의 산수》 등을 탐독하였으며, 64년 학사학위를 얻었다. 64∼66년 페스트가 크게 유행하자 대학이 일시 폐쇄되어 뉴턴도 고향으로 돌아와 대부분의 시간을 사색과 실험으로 보냈다. 그의 위대한 업적의 대부분은 이때 싹트게 된 것이라고 하며, 사과의 일화도 이때 있었던 일이다. 67년 재개된 대학에 돌아와 이 대학의 펠로(특별연구원)가 되고 이듬해에는 메이저펠로(전임특별연구원)가 됨과 동시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69년 I.배로의 뒤를 이어 루카스교수직에 부임하였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의 최초의 강의도 광학(그 내용은 뉴턴 사후 《광학강의》로 1729년 출판되었다)이었으며, 초기 연구는 광학분야에서 두드러졌다. 광학에 대해서는 이미 울즈소프 시절부터 스스로 수집·정비한 실험기구를 이용해 빛의 분산현상을 관찰하였으며, 특히 굴절률과의 관계에 대하여 세밀히 조사하였다. 한편 망원경 제작도 연구, 굴절광은 스펙트럼을 만들지만, 반사광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기초로, 반사식(反射式)이 수차(收差:色收差도 포함)와 효율면에서 한층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68년 뉴턴식 반사망원경을 제작했다. 이 망원경은 천체관측 등에 크게 공헌하여 이 공적으로 72년 왕립협회회원으로 추천되었다. 그 해에 《빛과 색의 신이론(新理論)》이라는 연구서를 협회에 제출하였는데, 그 내용은 백색광이 7색의 복합이라는 사실, 단색(單色)이 존재한다는 사실, 생리적 색과 물리적 색의 구별, 색과 굴절률과의 관련 등을 논한 것이었다. 75년 박막(薄膜)의 간섭현상인 ‘뉴턴의 원무늬’를 발견하였으며, 빛의 성질에 관한 연구로 광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광학》(1704)을 저술했다. 수학에서는 65년 이항정리(二項定理)의 연구를 시작으로, 무한급수(無限級數)로 진전하여 66년 유분법(流分法), 즉 플럭션법을 발견하고, 이것을 구적(求積) 및 접선(接線) 문제에 응용하였다. 이것은 오늘날의 미적분법(微積分法)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성과를 69년에 논문 로 발표하였다. 유분법의 전개에 대해서는 에 수록되어 있다. 76년 그와 동일한 미분법을 발견한 라이프니츠와 우선권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졌는데, 이 무렵부터 그의 사고방식도 실험적 방법에서 수학적 방법으로 그 중점이 옮겨져 스스로를 수학자라고 하였다. 뉴턴의 최대 업적은 물론 역학(力學)에 있다. 일찍부터 역학 문제, 특히 중력(重力) 문제에 대해서는 광학과 함께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구의 중력이 달의 궤도에까지 미친다고 생각하여 이것과 행성(行星)의 운동(이것을 지배하는 케플러법칙)과의 관련을 고찰한 것은 울즈소프 체류 때 이루졌다고 한다. 70년대 말로 접어들면서 당시 사람들도 행성의 운동중심과 관련된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수학적 설명이 곤란해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는데, 뉴턴은 자신이 창시해낸 유율법(流率法)을 이용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확립하였다. 87년 이 성과를 포함한 대저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가 출판되었으며, 이로써 이론물리학의 기초가 쌓이고 뉴턴역학의 체계가 세워졌다. 3부로 된 이 라틴어 저서는 간단한 유율법의 설명에서 시작하여 역학의 원리, 인력의 법칙과 그 응용, 유체(流體)의 문제, 태양-행성의 운동에서 조석(潮汐)의 이론 등에 이르기까지 계통적으로 논술되어 있다. 또 방정식론 등의 대수학(代數學) 분야의 여러 업적은 《Arithmetica universalis sive de compositione et resolutione arithmetica liber》(1707)로 간행되었다. 88년 명예혁명 때는 대학 대표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고, 91년 조폐국(造幣局)의 감사(監事)가 되었으며, 96년 런던으로 이주, 99년 조폐국 장관에 임명되어 화폐 개주(改鑄)라는 어려운 일을 수행하였다. 1703년 왕립협회 회장으로 추천되고 1705년 나이트 칭호를 받았다. 한편 신학(神學)에도 관심을 보여 성서의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고대사 해석을 검증하고, 천문학적 고찰을 첨가해 연대기를 작성하였다. 이 성서 연구를 통해 삼위일체설을 부정하는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보냈으며, 런던 교외의 켄징턴에서 죽었다. 장례는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거행되고 그 곳에 묻혔다. 근대과학 성립의 최고의 공로자이며, 그가 주장한 ‘자연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라고 하는 역학적 자연관은 18세기 계몽사상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니코마코스(50~150?)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아라비아의 게라사 출생. 신(新)피타고라스 학파이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산술서 《산술입문》을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수론(數論)의 기초, 특히 수의 성질과 분류를 취급하고 있다. 중요한 것으로는, 세제곱수는 연속되는 모든 홀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법칙의 발견이 있다. 즉, 13=1, 23=3+5, 33=7+9+11,··· 이 책은 그 후 아풀레이우스, 보에티우스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되어, 중세에는 산술서로서 유클리드기하학과 함께 매우 높이 평가되었다. 음악에 관해서도 저서《화성학(和聲學)》을 남겼다.

 

다르부(1842.8.14~1917.2.23)

프랑스의 수학자. 파리에서 공부하며 C.에르미트의 지도를 받았다.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장기간 재직하면서 프랑스의 수학계를 이끌었으며 수학 및 천문학 잡지 《Bulletin des sciences math럐atiques et astronomiques》의 창간에 힘썼다. 19세기 초엽부터 기하학이 걸어온 좌표적·해석적 경향을 계승하여, 해석학과 상미분방정식론 또는 군론 등을 기초로 하여 기하학을 발전시켰으며, 그의 주요 저서인 《일반곡면론강의(一般曲面論講義)》(4권, 1887∼96)는 미분기하학의 명저로 알려져 있다. 곡면론과 미분방정식론의 관련, 도형의 연속적 변형, 가동좌표축(可動座標軸)의 도입, 허원소(虛元素)의 사용, 또 사원좌표(四圓座標), 오구좌표(五球座標)의 도입 등에서 창의성을 발휘하였고, 또 G.F.B.리만에 관한 이해도는 독일의 F.클라인과 비견된다고 한다. 그는 행정적·교육적 수완도 뛰어나 J.H.푸앵카레의 전기도 썼다.

 

달랑베르(1717.11.16~1783.10.29)

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철학자. 계몽사조기(啓蒙思潮期)를 대표하는 문인의 한 사람으로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며, 그 종신서기(終身書記)였다. 그는 섭정 오를레앙공(公) 시대에 저명한 살롱을 가진, 사교계의 꽃 드 탕생 후작부인의 사생아로 출생하여, 생후 곧 노트르담 성당 옆의 작은 교회 계단에 버려졌다 한다. 근처에서 살던 유리 직공 달랑베르의 아내가 주워다 길렀다. 그의 이름은 그가 20세 때 스스로 지은 이름이다. 그의 친아버지인 데투시 장군이 그를 경제적으로 돌보았고, 죽은 후 거액의 유산을 남겼으며 또 장군의 유력한 친지가 그를 비호하여 23세에 아카데미 회원에 선출되었다. 12세 때 콜레즈 드 카틀 나시옹에 입학하여 신학·법률·의학을 공부하였으나, 얼마 후 철학·수학·물리학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특히 역학(力學)에서는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주저 《역학론:Trait?de dynamique》(1743)은 26세 때 공간(公刊)한 것인데, 그는 이 저서에서 그 당시에 프랑스에서 주류를 이루던 데카르트주의를 배척하고, 물체와 그에서 독립된 공간을 생각하는 뉴턴주의의 입장을 취하였다. 또, 물체의 운동을 정역학(靜力學)의 경우와 같은 평형상태(平衡狀態)로 옮겨서 고찰하는 ‘달랑베르의 원리’를 설명하고, 역학의 일반화의 기초를 닦아 해석역학으로의 전개를 마련함으로써 역학발전의 한 단계를 이룩하였다. 이 밖에 세차(歲差)와 장동(章動)의 문제(49), 달의 운동론에 관련된 3체(三體)문제의 연구 등, 천체역학 방면에도 공헌하였다. 사상가로서도 계몽사상가의 중심인물로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였으며, 특히 D.디드로와 공동으로 편집·간행한 《백과전서》는 유명하다. 이 전서에서 수학·물리학·천문학 항목을 집필하였으며, 이 점은 백과전서파의 주장이었던 수학과 자연과학에 역점을 둔 데서 비롯되었으며, 이 《백과전서》의 주류를 이루는 부분이었다. 그가 쓴 서론 속에 이 취지를 강조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동시에 F.베이컨의 사상을 기초로 과학의 기원과 역사적 발전을 고찰하고, 과학의 분류를 시도함으로써 과학편(科學編)에 큰 전망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그의 철학적 입장은 감각적 인식론에 머물러 종교적 견해에는 많은 의문을 제시하면서도 디드로처럼 철저하지도 못해 일종의 물심이원론에 시종하였다.

 

데데킨트(1831.10.6~1916.2.12)

독일의 수학자. 브라운슈바이크 출생. 법학교수의 아들로 태어나 카롤린대학에서 수학하고 괴팅겐대학에 진학하여 M.A.슈테른, K.F.가우스, W.베버 등의 강의를 들었다. 또한 가우스의 후임이었던 디리클레의 영향도 받았다. 1854년 괴팅겐대학의 강사가 되었으며, 58년 취리히공과대학 교수를 거쳐 브라운슈바이크 고등기술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수학 활동은 넓은 의미의 ‘수(數)’ 전반에 걸친 거의 모든 영역에 미쳤으며, 추상성과 일반성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군(群)을 공리계(公理系)로 정의했던 초기의 연구에서도 이 경향은 명백했지만, 가장 유명한 역작인 《연속과 무리수》(1872)에서 풍족한 결실을 보였다. 여기에서 무한집합을 고찰하였고 절단개념(切斷槪念)의 도입으로 연속성을 규정하였으며, 무리수의 개념을 명확히 함으로써 해석학의 기초 수립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 밖에 이데알이라 불리는 집합의 소분해(素分解)의 연구로 대수적 수에 관한 이론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데자르그(1591.3.2~1661.10)

프랑스의 수학자. 리옹 출생. 건축가로서도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군(軍)의 건축기사로 일하였는데, 1628년 드 리슐리외경(卿) 휘하에서 라 로셸포위작전에 종군하였으나, 곧이어 파리로 은퇴하여 기하학을 연구하였다. 기술적인 투시도법의 이론면을 고찰하여 기하학에 무한원(無限遠)의 사상을 도입하고, 또 대응(對應)의 개념을 사용하여 사영적(射影的)으로 기하학적인 표시법의 체계를 건설하였다. 《원추곡선론》(1636)은 이러한 고찰을 근거로 원추곡선을 사영기하학적(射影幾何學的)으로 설명한 것으로서 근세 기하학의 기초를 이룩한 중요한 고전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러한 뛰어난 업적이 당시에는 극히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인정받지 못하고 사장되었다가 200년이 지난 1845년 M.샤를의 고서에서 발굴, 비로소 중요성이 재인식되었다. 그 사상은 파스칼이나 드라 히레 등에 의해 근세 기하학 전개에 영향을 끼쳤다. 또 건축가로서는 당시의 리옹시청사(市廳舍)를 설계했다. 작품으로는 《투시화법론:Trait?de la Section Perspective d’une atteinte aux럙럑ements des rencontres d’un c셬e avec un plan》(1636) 《평면과 원추와의 교합에 관한 연구계획 초안:Brouillon Project d’une atteinte aux evenements des rencontres d’un c퓆e avec unplan》(39) 《건축에서의 돌 절단법:La coupe des Pierres en I’architecture》(40) 등이 남아 있다.

 

데카르트(1596.3.31~1650.2.11)

프랑스의 철학자·수학자·물리학자. 투렌라에 출생. 근세사상의 기본틀을 처음으로 확립함으로써 근세철학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그는 세계를 몰가치적(沒價値的)·합리적으로 보는 태도(과학적 자연관)를 정신의 내면성의 강조(정신의 형이상학)와 연결지워 이를 이원론(二元論)이라고 하였다. 이원론은 동시에 근세사상 전체에 통하는 이원성의 표현이다. 프랑스 중부의 관료귀족 집안 출신으로 생후 1년 만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10세 때 예수회의 라 플레슈학원에 입학, 프랑수아 베롱에게 철학을 배웠다. 1616년 푸아티에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학교에서 배운 스콜라적 학문에 불만, 세상을 통해 배울 것을 결심하고 여행에 나섰다. 18년에는 지원장교로서 네덜란드군에 입대했다. 수학자 베이크만과 알게 되어, 물리수학적 연구에 자극을 받아 ‘보편수학(普遍數學)’의 구상에 이르렀다. 20년 군대를 떠나 유럽 각지를 전전하다가 25년부터 파리에 체재, 광학(光學)을 연구한 끝에 ‘빛의 굴절법칙’을 발견하였다. 29년 이후에는 네덜란드에 은거하며 철학연구에 몰두하여 형이상학 논문 집필에 종사하였으나, 같은해 3월 제자로부터 환일(幻日) 현상의 해명을 요청받고 중도에 자연연구로 전향, 결국 자연학(自然學)을 포괄하는 《우주론:Le Trait?de la monde》의 구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 논문의 완성단계에 G.갈릴레오의 단죄사실(斷罪事實)을 듣고, 지동설을 주내용으로 한 이 책의 간행을 단념, 그 대신 37년 《방법서설(方法敍說):Discours de la m럗hode》 및 이를 서론으로 하는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의 세 시론(試論)을 출간하였다. 41년 형이상학의 주저 《성찰록: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44년에는 《철학의 원리:Principia philosophiae》를 출간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데카르트 사상의 혁신성이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 ‘자유로운 나라’였던 네덜란드도 캘빈파(派) 신학자들의 박해로 살기 어려운 곳이 되었다. 그 무렵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49년 가을 스톡홀름으로 가서 지내던 중 폐렴에 걸려 생애를 마쳤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카르트는 수학자로서는 기하학에 대수적 해법을 적용한 해석기하학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물체에는 무게라는 실재적 성질이 있기 때문에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하는 스콜라적 자연학에 만족하지 못하고, 물리 수학적 연구를 통하여 물질, 즉 연장(延長)이라는 기계론적 자연관으로 이끌려 갔다. 그의 형이상학적 사색은 이른바 방법적 회의(懷疑)에서 출발한다. 학문에서 확실한 기초를 세우려 하면, 적어도 조금이라도 불확실한 것은 모두 의심해 보아야 하는데, 세계의 모든 것의 존재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치더라도 이런 생각, 즉 의심을 하는 자신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근본원리가 《방법서설》에서 확립되어, 이 확실성에서 세계에 관한 모든 인식이 유도된다. 의심하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에서 무한히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이 결과할 리가 없다는 데서 신의 존재가 증명되고, 신의 성실이라는 것을 매개로 하여 물체의 존재도 증명된다. 더욱이 정신은 사고하는 것만으로, 다시 말하면 신체 없이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심신의 실재적 구별도 확정된다. 이리하여 정신과 물체가 서로 독립된 실체로 세워지고 이 물심이원론에 의해 기계론적 자연관의 입장의 기초가 마련된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심신결합의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도덕의 문제를 풀 수 없기 때문에, 이 물심분리와 심신결합의 모순 조정에 데카르트 이후 형이상학의 주요한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디리클레(1805.2.13~1859.5.5)

독일의 수학자. 뒤렌 출생. 정수론(整數論)·급수론(級數論)·수리물리학 등에 공헌하였다. 프랑스에서 이주해 온 집안의 아들로 파리에서 수학(修學)하고 당시 그 곳 수학의 대가들을 만났는데, 특히 J.J.푸리에와 친하게 지냈다. 훔볼트의 초청을 받아 독일의 여러 대학에서 수학을 강의하고, 1839년 베를린대학 교수, 그 후 55년 K.F.가우스의 후임으로 괴팅겐대학 교수가 되었다. 연구 방면에서도 가우스가 구축해 놓은 정수론을 계승, 이것을 심화부연(深化敷衍)하는 공적을 남겼다. 어떤 조건 밑에서 산술급수가 무한의 소수(素數)를 포함한다는 정리를 비롯하여, 디리클레의 급수를 제시하고 이것을 정수론에 응용함으로써 해석적 정수론을 창시하는 등, 그 자신의 정수론에 대한 공헌도 대단했다. 한편 전문가들도 어렵다는 가우스의 《정수론》을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한 공적도 높이 평가되었다. 그 외에도 푸리에급수를 써서 함수의 근대적 개념 성립에 공헌하였고, 또 경계값 문제에서는, 이른바 ‘디리클레의 문제’를 다루어 퍼텐셜론(論)을 정밀화하는 등 여러 방면에 업적을 남겼다. 또, 명강의로도 유명하여 그의 강의 스타일은 후에 독일 각 대학의 강의 형식의 기초가 되었다. 주요저서인 《정수론으로의 미분적분학의 여러 응용에 관한 연구》(1839)는 오늘날의 해석적 정수론의 기원이 되었다.

 

드로비슈(1802.8.16~1896.9.30)

독일의 철학자·수학자. 라이프치히 출생. J.헤르바르트의 제자이자 1842년 라이프치히대학 교수이다. 논리학적으로는 형식논리학에서 존재와 사유(思惟)의 일치로서의 형이상학적 논리학으로 이행(移行)하고, 심리학적으로는 수학적 심리학의 입장에 섰다. 주요저서는 《신논리학:Neue Darstellung der Logik nach ihren einfachsten Verh둳tnissen》(1836) 《헤르바르트의 철학체계:Beitr둮e zur Orientierung 웑er Herbarts System der Philosophie》(43) 《수학적 심리학:Erste Grundlinien der mathematischen Psychologie》(50) 등이다.

 

드모르간(1806.6.27~1871.3.18)

영국의 수학자·논리학자·서지학자(書誌學者). 인도 마두라 출생.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하고, 1828년 22세의 나이로 신설된 런던대학 수학 교수에 취임, 명강의로 이름을 떨쳤다. 66년 교수직을 사임하고 스스로 수학협회를 창설, 초대 회장이 되었다. 수학자로서는 연구 주제를 엄밀한 기초 위에 둘 것을 강조하였고, 특히 집합연산의 기초적 법칙을 발견했는데 이 법칙은 그의 이름을 따서 ‘드모르간의 법칙’이라 한다. 근대적인 대수학(代數學)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특히 논리학적 측면을 개척하여 선각자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확률론에도 공헌하였다. 38년에는 ‘수학적 귀납법’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경험과학과 수학적 증명에서의 귀납법의 차이점을 강조하였다. 기지(機智)가 뛰어난 능변가이자 문장가로서도 유명하여 철학자 W.해밀턴과의 논쟁은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그는 수학·수학사상의 보급에 기여하였고, 산술·초등대수·유클리드기하학 등을 계몽하기 위하여 알기 쉬운 해설로 책을 저술하여 수학교육 혁신에 이바지하였다. 주요저서로는 《산술원론(算術原論)》(1831) 《대수원론(代數原論)》(35) 《대수학의 기초에 관하여》(41,47) 등이 있다.

 

드무아브르(1667.5.26~1754.11.27)

프랑스 출신의 영국 수학자. 위그노교도였기 때문에 1685년 낭트 칙령의 폐지에 따라서 프랑스를 떠나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에서 가정교사로 생계를 꾸려갔다. 런던에서는 I.뉴턴 등과 친교를 맺고 97년 영국학사원 회원, 그 후에는 베를린·파리의 아카데미 회원에 선출되었다. 주요업적으로는 3각법에 관한 기본정리로서 ‘드무아브르의 정리’로 알려진 법칙과 확률론에 있어서의 정규확률곡선의 발견이 있고, 보건수학(保健數學) 분야에서도 연금에 관한 연구를 남겼다. 주요 저서로는 《우연의 교의(敎義):The Doctrine of Chances》(1917) 《해석잡론(解析雜論)》(30) 등이 있다.

 

디리클레(1805.2.13~1859.5.5)

독일의 수학자. 뒤렌 출생. 정수론(整數論)·급수론(級數論)·수리물리학 등에 공헌하였다. 프랑스에서 이주해 온 집안의 아들로 파리에서 수학(修學)하고 당시 그 곳 수학의 대가들을 만났는데, 특히 J.J.푸리에와 친하게 지냈다. 훔볼트의 초청을 받아 독일의 여러 대학에서 수학을 강의하고, 1839년 베를린대학 교수, 그 후 55년 K.F.가우스의 후임으로 괴팅겐대학 교수가 되었다. 연구 방면에서도 가우스가 구축해 놓은 정수론을 계승, 이것을 심화부연(深化敷衍)하는 공적을 남겼다. 어떤 조건 밑에서 산술급수가 무한의 소수(素數)를 포함한다는 정리를 비롯하여, 디리클레의 급수를 제시하고 이것을 정수론에 응용함으로써 해석적 정수론을 창시하는 등, 그 자신의 정수론에 대한 공헌도 대단했다. 한편 전문가들도 어렵다는 가우스의 《정수론》을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한 공적도 높이 평가되었다. 그 외에도 푸리에급수를 써서 함수의 근대적 개념 성립에 공헌하였고, 또 경계값 문제에서는, 이른바 ‘디리클레의 문제’를 다루어 퍼텐셜론(論)을 정밀화하는 등 여러 방면에 업적을 남겼다. 또, 명강의로도 유명하여 그의 강의 스타일은 후에 독일 각 대학의 강의 형식의 기초가 되었다. 주요저서인 《정수론으로의 미분적분학의 여러 응용에 관한 연구》(1839)는 오늘날의 해석적 정수론의 기원이 되었다.

 

디오판토스(246?~330?)

3세기 후반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했던 그리스의 수학자. 대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주저 《산수론(算數論) Arithmetica》은 13권 중 6권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주로 1차부터 3차까지의 정방정식과 부정방정식의 문제와 해법이 다루어져 있다. 특히, 해법의 부정해석(不定解析)은 디오판토스의 해석이라고 불린다. 그는 마이너스(-)·미지량(未知量)·상등(相等)·거듭제곱 등의 기호를 조직적으로 채용했다. 그의 《산수론》은 아라비아어(語)로 번역되어 그곳 학자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뒤에 라틴어로 번역되어 중세 말기에 유럽으로 전파되어 대수학 발달에 공헌했다. 저서 중 ‘주어진 제곱수를 2개의 제곱수로 나누어라’라는 문제는 뒤에 페르마에게 영향을 끼쳐, 페르마의 정리가 되었다고 한다.

 

라그랑주(1736.1.25~1813.4.10)

프랑스의 수학자·천문학자. 이탈리아의 토리노 출생. 19세 때 그곳 왕립육군학교 수학 교수가 되었다. 1766년 프리드리히(2세) 대왕에게 초청되어 L.오일러의 후임으로 베를린 과학아카데미 수학부장에 취임하였다. 대왕 서거 후 87년 파리로 이사하여 혁명정부의 미터법 제정위원장으로 일하였다. 95년 신설된 고등사범학교(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의 교수가 되고, 그 후 파리의 이공과대학 초대 학장이 되었다. 학문적인 초기의 업적에는 등주문제(等周問題)에서 시작한 변분법(變分法)이 있으나, 이것은 오일러의 방법을 순수하게 해석적인 것으로 발전시킨 방법으로, 라그랑주는 이 변분법을 역학의 여러 문제에 응용하였다. 그가 해명한 해석역학은, I.뉴턴의 미적분에 의한 운동방정식이 확립된 후 100년만의 일로, 그때까지 발전한 해석학을 역학에 응용한 것이며, 그의 저서 《해석역학》(1788)에 의해, 역학은 하나의 새로운 발전의 단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라그랑주의 해석역학에 의한 운동방정식은 뉴턴의 방법에 비해 보다 일반적으로 운동의 미분방정식을 유도할 수 있다. 대수(代數)에 있어서의 그의 일반화 방향은 5차 이상의 대수방정식 해법에 대한 연구로서, 이 연구는 근(根)의 치환군(置換群)에 착안한 것으로, N.H.아벨과 E.갈루아의 업적의 선구자 역할을 한 것이다. 이 외에도 정수론·타원함수론·불변식론(不變式論) 등에 관해 많은 연구 업적이 있으며, 천체역학 분야에도 기여하였다. 특히 삼체문제(三體問題)의 연구는 유명하다.

 

라마누잔(1887.12.22~1920.4.26)

인도의 수학자. 어렸을 때부터 수학에 관심을 가져오다가 15세 때 대학 도서관에서 빌린 수학책을 통해서 재능이 있음을 알았으나 집안이 가난한데다 신분이 낮고 학력이 없어 어려운 연구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영국의 수학자 G.H.하디(1877∼1947)에 의해서 특이한 재능이 높이 평가되어 정부의 연구비를 지원받게 되었고, 1914년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때까지 그는 근대수학이라는 것을 모르고 연구하였고, 또 추론(推論)에는 많은 오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적 방법에 의한 깊은 명찰과 직관과 귀납으로써 뛰어난 결과들을 많이 도출해 내었다. 그 뒤에 영국에서 발표된 연구 가운데는 현대 정수학(整數學)의 깊은 부분에 관계되는 중요한 예상이 몇몇 남아 있다. 특히 자연수 n의 분할수(分割數) p(n)에 관한 것이 유명하다. 18년 30세의 젊은 나이로 로열 소사이어티 회원으로 뽑혔다. 19년 인도로 귀국하였으나, 병으로 32세에 세상을 떠났다.

 

라이프니츠(1646.7.1~1716.11.14)

독일의 철학자·수학자·자연과학자·법학자·신학자·언어학자·역사가. 라이프치히 출생. 그리고 외교관·정치가·기사(技師) 등 실무가로서도 유능하였다. 라이프치히대학의 도덕철학 교수의 아들로 어려서 아버지의 장서 중 철학·고전을 탐독하고 논리학에 흥미를 가졌다. 12세 때 거의 독학으로 라틴어에 통달하였고 1661년 15세 때 라이프치히대학에서 법률과 철학을 수학, 이어 예나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였다. 이 무렵에 쓴 논문 《개체의 원리:De Principio Individui》(1663) 《결합법론:De Arte Combinatoria》(66)은 주목할 만한 것으로, 그 내용은 후일까지 그의 사상을 일관하였다. 66년 라이프치히대학에 학위를 신청하였으나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67년 뉘른베르크의 알트도르프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하였으나, 이 대학이 제공한 객원교수의 자리를 사퇴하고, 그곳에서 연금술사들의 결사 로젠크로이체르에 들어가 비서가 되어 화학에 관한 지식을 얻었다. 그는 마인츠후국(侯國)의 정치가인 J.C.보이네부르크 남작과 알게 되어 70년 마인츠후국의 법률고문이 되었다. 정치생활에 들어가 마인츠후국의 외교사절로서 72년 이후 파리에서 활동하였으며, 루이 14세의 침략으로부터 독일의 안전을 지키는 일에 전념하면서도 형이상학을 연구하였다. 또 런던과 파리의 뛰어난 수학자·물리학자들과도 접촉하여 자연과학의 연구를 추진하였다. 《구체적 운동의 이론》 《추상적 운동의 이론》은 70년경에 쓴 것으로, ‘불가분의 점(點)’의 가설에 서서, 운동을 물질의 본질인 것으로 보려는 형태를 취하였다. C.호이겐스, A.아르노, N.말브랑슈, R.보일 등과의 접촉에서는 당시의 최고 수준의 수학이나 데카르트 철학을 흡수하여 많은 논문을 쓰고, 영국 왕립학회회원이 되어, 그 후 우수한 계산기를 발명하였다(74). 그러나 보이네부르크나 마인츠 선거후(選擧侯)가 잇달아 죽었으므로 그는 프랑스에 체류한 채 생활의 기반을 잃게 되었다. 프랑스 학술원의 연금을 받으려는 공작도 실패하여, 76년 브라운슈바이크 뤼네부르크후(侯) 프리드리히의 초청을 받아들여 하노버로 갔다. 그 도중 스피노자와 회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노버가(家)에서는 궁정고문이나 도서관리 등의 일을 맡아, 죽을 때까지 이 자리에서 다면적인 활동을 하였다. 거기에는 공법학자·정치가로서의 활동, 독일 통일을 지향하는 신구 양 교회 및 신교 각파의 통일을 위한 노력, 《지구 선사(先史)》를 계기로 한 일반사의 연구, 언어 연구, 광산의 치수(治水)나 거기에 따른 풍차의 설계·건설, 백과전서의 계획, 아카데미 설립의 노력(1700년 베를린 과학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초대원장이 됨) 등이 포함된다. 이 밖에 그의 이름을 영원히 빛나게 한 수학·자연과학·철학상의 연구도 계속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말년은 불우하였으며, 실의 속에 70세의 생애를 하노버에서 마쳤다. 수학에서는 미적분법의 창시(1684∼86)가 유명하다. 이것은 뉴턴과는 별개로 전개된 것이며, 미분 기호, 적분 기호의 창안 등 해석학 발달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역학(力學)에서는 R.데카르트를 비판하여 ‘활력’의 개념을 도입하고, 그 개념을 주어 역학적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향해 커다란 진전을 남겼으며(86), 위상(位相) 해석의 창시도 두드러진 업적의 하나이다. 철학에서는 데카르트, 스피노자의 철학을 극복하고, 거기에 젊을 때부터의 ‘보편학’의 구상을 체계화한 《형이상학서설(形而上學敍說) Discours de M럗aphysique》(86)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둘러싼 논쟁을 통하여 발전시킨 ‘표현’과 ‘표출’ ‘실체’ 개념의 결실인 유고(遺稿) 《단자론(單子論):Monadologia》(1720)이 유명하다. 실체개념을 논한 논문 중에는 ‘예정 조화(豫定調和)’의 개념을 도입(1696)하기도 하여 베일과의 논쟁을 초래하였다. J.로크의 비평으로서의 유고 《신인간오성론(新人間悟性論)》(1765)이나 《변신론(辯神論):Th럒dic럆》(1710)도 유명하다. 그의 지우(知友)였던 프로이센 왕비 조피 샤를로테를 위해서 쓴 《변신론》은 예정 조화의 입장에서 철학과 종교의 융화를 꾀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상은 독창적인 것이었으나, 한편 신학적·형이상학적 요소(신과 예정 조화)를 지님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변증법적 요소(개별과 보편, 유한과 무한의 연관, 실체의 자립 개념 등)를 갖추고, 신앙고백과 논리적 논증이 공존하여, 기계론을 극복하려고 하면서 모순율을 기초로 하는, 말하자면 모순을 내포한 타협적인 것이었다. 그 배경을 당시 독일의 모순에 가득찬 사회적 생활에서 구하려는 견해도 있다.

 

라플라스(1749.3.23~1827.3.5)

프랑스의 천문학자·수학자. 칼바도스의 보몽타노주 출생. 1765년 육군학교 위탁학생으로 있을 때부터 수학의 재능을 나타냈다. 67년 파리에서 달랑베르의 인정을 받고 고등사범학교와 에콜폴리테크니크 교수로 취임하여 행렬론·확률론·해석학 등을 연구하였다. 73년 수리론(數理論)을 태양계의 천체운동에 적용하여 태양계의 안정성을 발표하였다. 또한 오일러와 라그랑주 이래 미해결문제로 남아 있던 목성과 토성의 상호섭동(相互攝動)에 의한 궤도의 이심률과 경사각은 오랫동안 변화하지 않고 장주기변동을 한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그 후 이 변동 한계에 관해 라그랑주와 서로 반론이 거듭되었으나, 84∼86년 라플라스가 《파리과학아카데미 기요(紀要)》라는 잡지에 3편의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해결되었다. 87년 달의 공전가속도는 지구 궤도의 이심률 변동에 기인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이와 같은 획기적 성과를 체계화하여 1799~1825년 《천체역학》(전 5권)을 출판하였다. 이것은 뉴턴의 《프린키피아》와 맞먹는 명저로 간주된다. 1796년 간행된 일반인을 위한 저서 《세계계도설(世界系圖說)》은 태양계의 기원에 관한 성운설의 구상을 내용으로 담고 있으며, 이것은 칸트의 설(說)을 보충·개정하는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란다우(1877.2.14~1938.2.19)

독일의 수학자. 베를린 출생. 1909년 괴팅겐대학 교수가 되었으나, 33년 나치스의 유대인 박해로 대학에서 쫓겨났다. 그 후에는 베를린으로 돌아가서 생활하였으며, 그 동안에 케임브리지대학 등의 초청으로 국외를 여행한 일도 있다. 저서나 논문이 많은데, 특히 해석적 수론(解析的數論)과 함수론에 크게 기여하였다. 초기의 저서 《소수분포론(素數分布論)》(1909)에서는 역사적으로 이론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자신의 최신의 기여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설명하였으나, 10년대 후기의 저서나 논문에서는 간결한 문체를 사용하였다. 수학논문의 이와 같은 문체를 란다우슈틸(Landau-Stil)이라고 부른다.

 

람베르트(1728.8.26~1777.9.25)

독일의 물리학자·천문학자·수학자·철학자. 알자스 뮐하우젠 출생. 재봉직공인 아버지를 돕기 위해 12세 때 학교를 그만둔 후 17세 때 법률가의 비서가 되면서 인문학·철학·과학을 독학하였다. 천문학에 흥미를 가지게 되어 광학을 연구, 《광도측정법》(1760) 《혜성궤도의 특이성》(61) 《세계의 구조에 대한 우주론적 서간》(61) 등 3권의 저서를 공간(公刊)하였다. 이 때문에 전 유럽에서 유명해져 프리드리히대왕에 의해 베를린아카데미회원, 교수의 지위까지 올랐으며, 토목측량과 같은 국가적 사업에도 중용되었다. 천문학 연구에서는 혜성의 궤도 결정의 기본문제 처리(람베르트의 정리)에서 시작하여 우주구조설(람베르트의 星辰系)을 통해 은하 설명을 시도하였고, 물리학에서는 광도측정에 대한 기초 확립에 뜻을 두고 실험(람베르트의 법칙)하여 람베르트의 광도계를 제작하였다. 또 자기장의 역제곱의 법칙을 발견하여 쿨롱의 선구자가 되었고, 열학에서는 습도측정 연구로 습도계·열도계를 제작해서 저서 《고온계측》(79)에서 열복사 연구의 기초를 세웠다. 또 기체의 부피가 0이 되는 점을 절대영도로 정의하여 그 값을 -273 ℃라고 정하였다. 수학에서는 《자유투시법》(59)을 써서 화법기하학(畵法幾何學)을 도입하였고, 평행선공리문제를 연구하여 비(非)유클리드기하학을 개척하였다. 람베르트급수 도입, 쌍곡선함수 발견 등도 뛰어난 업적이다. 철학저서로는 《신(新)오르가논》(64) 《체계학》(71) 등이 있다. 이들은 수학과 정밀한 증명을 철학에 결부시키려는 의도 아래 전개된 것으로 C.볼프의 이성론과 J.로크의 경험론을 서로 결합시켜 독특한 인식론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러셀(1872.5.18~1970.2.2)

영국의 논리학자·철학자·수학자·사회사상가. 몬머스셔 트렐렉 출생. 명문 귀족의 아들로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하고 한때 동대학 강사로 근무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중의 반전운동(反戰運動)이 화근이 되어 대학에서 쫓겨났고, 18년에는 6개월간 옥고를 치르었다. 그 후 유럽 각국과 러시아·미국 등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대학의 강의도 맡았으나, 주로 저술에 주력하였다. 또한 여러 가지 사회운동을 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며, 195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논리학자로서의 러셀은 G.프레게의 업적을 계승, G.페아노, 쿠츨러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J.W.R.데데킨트, G.칸토르 등의 현대수학의 성과를 근거로, 19세기 전반에서 비롯된 기호논리학의 전사(前史)를 집대성하였다. A.N.화이트헤드와 공저(共著)인 《수학원리》(3권, 1910∼13)는 바로 이의 성과이다. 그는 논리의 개념이나 연산(演算)을 기본으로 하여 전체 수학을 그것으로부터 도출(導出)했으며, 나아가 수학적 대상을 실재라고 간주하는 논리주의의 구상을 밝혔다. 그는 이 시도를 실수(實數)의 도출에까지 성공시켰으며 그 외에도 집합론 역리(逆理)의 발견, 그리고 그것의 해결을 꾀하는 계형이론(階型理論), 환원의 공리(公理), 기술이론(記述理論) 등 다양한 창의에 의한 공헌을 하였다. 논리주의의 구상이나 위의 여러 이론은 그 후 K.괴델 및 다른 학자에 의해 부정 또는 수정되었지만, 이 분야에 남긴 그의 업적의 의의는 현재도 상실된 것은 아니다. 철학자 러셀의 성과는 특히 이론철학에서 현저하다. G.E.무어, L.비트겐슈타인 등과 함께 케임브리지학파의 일원으로, 19세기 말부터 영국에서도 유력한 학설이었던 관념론에 대해 실재론을 주장하였다. 다만 그의 입장에는 시대에 따른 변화가 크게 눈에 띈다. 예를 들면, 한때지만 그는 영국 헤겔학파의 영향 밑에 있었으며, 마이농류(流)인 개념실재론(槪念實在論)의 경향도 보였다. 이것에 관한 저서로는 《철학의 제문제》(1912)가 있다. 그러나 그의 인식론·존재론의 일반적 경향은, 한편으로는 자기의 논리를 소재(素材) 방법으로 삼았으며, 다른 면에서는 영국 고유의 경험론의 전통을 근거로 삼았다. 또한 논리적 원자론의 이름에서도 명백한 바와 같이 실재의 이론적 단위를 설정하여, 그것에의 환원이나 분석을 중시하는 입장을 취한 점도 명백하다. 그의 사상은 빈학파나 훗날의 영국 철학의 발전을 위해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윤리학에서는 처음에 무어와 거의 같은 입장을 취하였으나, 후에 논리실증주의자의 정서설(情緖說)에 가까운 입장으로 옮겼다. 사회사상가로서의 러셀은 케임브리지대학 졸업 직후 독일 사회주의자들과 교우하여 마르크스주의에 공명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를 방문, 혁명지도자와 혁명 후의 실정에 접하게 된 그는 오히려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그의 경향은 서구적 자유를 근간(根幹)으로 하는 사회민주주의로서, 정치이론도 과학이론과 같이 이데올로기나 광신적 독단에서 해방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실천가로서의 러셀은 1907년 하원의원으로 입후보하여 낙선했고, 20년대는 일반대중을 위한 많은 책을 저술하였으며, BBC 방송 출연 등으로 유명해졌으나 크게 환영받지는 못했다. 60년 ‘100인 위원회’를 구성, 핵무장 반대 연좌농성을 이끌어 네번째 부인과 함께 금고형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철학적 경력은 길고 또 그 다룬 주제가 다양할 뿐 아니라 그 입장도 다양한 변천을 보인다. 기호논리학의 수법으로 철학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그의 영향은 20세기 철학에 유례가 없는 것이다. 저서로는 위에서 소개한 것 외에도 《외계의 지식》(14) 《수리철학 서설》(19) 《정신의 분석》(21) 《물질의 분석》(27) 《의미와 진실의 탐구》(40) 《서양 철학사》(45) 《자서전》(3권, 69) 등이 있다.

 

레기오몬타누스(1436~1476)

독일의 천문학자·수학자. 쾨니히스베르크 출생. 본명은 Johann M웞ler. 1452년 빈에서 포이어바흐로부터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공부하였다. 61년 스승의 사망 후 로마로 유학, 그리스어 원전 《알마게스트:Almagest》 등 여러 과학서적을 번역하였다. 68년 이들 원전을 가지고 귀국한 후, 뉘른베르크의 부호 B.발터의 도움을 얻어 71년 독일 최초의 천문대를 건설하고, 새로운 천문기기(天文器機)의 제작과 천체관측에 힘썼다. 그리고 관측자료를 토대로 54년부터 60년까지 《천체위치추산표(天體位置推算表)》를 편집하였다. 또한, 항성과 달 사이의 각거리를 측정하여 원격(遠隔) 2지점의 시간을 비교하는 방법(태음거리법)을 창안하였다. 이를 이용함으로써 원양항해에서의 경도결정이 가능하게 되었고, 대항해(大航海)시대의 막이 올랐다. 72년 핼리혜성을 관측하고, 이것을 처음으로 천체로 인정하였다. 75년 로마교황청의 초청으로 개력(改曆)위원회에 참여하기 위해 로마로 갔으나 급환으로 사망하였다.

 

레비치비타(1873.3.29~1941.12.29)

이탈리아의 수학자. 파도바 출생. 1898년 파도바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1918~38년 로마대학 교수를 지냈다. 무솔리니가 이탈리아의 대학교수에게 파시스트당 정부에 대한 선서를 요구하였지만 과학자로서의 양심 때문에 선서를 할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스승인 리치와 함께 절대미분학(絶對微分學)을 창시하고 그 결과를 《절대미분학의 방법과 그 응용》(1900)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유클리드공간에서의 평행의 정의를 리만공간으로 확장하였다. 텐서 해석(解析)은 리만기하학의 연구에 적절한 방법이고 아인슈타인에 의한 일반상대성이론, 그리고 중력장의 이론에도 사용되었다.

 

레코드(1510?~1558)

영국의 수학자·의사. 펨브룩셔의 템비 출생. 옥스퍼드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옥스퍼드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뒤에 궁정에 초빙되어 에드워드 6세와 메리 1세의 시의(侍醫)가 되었다. 영국에서 최초로 코페르니쿠스설(說)을 이해하고 주장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의 산술서(算術書) 《제예(諸藝)의 기초》(1540)는 당시 유럽의 수준을 능가하는 것으로서 기호를 사용하였고, 또 교사와 학생의 대화형식으로 썼다. 《기지(機智)의 숫돌:Whetstone of Witte》(1557)은 영국 최초의 대수서(代數書)로서, 이 책에서는 오늘날 많이 쓰이는 등호가 이미 사용되었다. 그 밖에 기하학서인 《지혜로의 길:The Pathway to Knowledge》(51)이 있다. 감옥에서 죽었는데, 투옥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레티쿠스(1514.2.16~1576.12.4)

독일의 천문학자·수학자. 본명은 Georg Joachim von Lauchen. 오스트리아의 펠트키르흐 출생. 뉘른베르크대학에서 수학하였으며, 1536년 비텐베르크대학, 42년 라이프치히대학 등에서 수학 교수를 지냈다. 1539∼41년 코페르니쿠스를 프라우엔부르크로 찾아가 그 밑에서 학문을 닦았다. 그리고 코페르니쿠스의 주요저서 《천구(天球)의 회전에 대하여》의 출판에 노력하였으며, 또 스스로 그 해설서 《코페르니쿠스설(說) 제1화》(40)를 발표하여 지동설의 보급에 힘썼다. 특히 수학부문을 보충하기 위하여 10초 간격의 사인표를 끈기 있게 계산하였으며, 탄젠트표와 시컨트표의 계산은 그의 사후에 제자 V.오토가 완성하였다(56).

 

로바체프스키(1792.12.1~1856.2.24)

러시아의 수학자. 1807년 카잔대학에 들어가 수학을 공부하였다. 학생시절에는 매우 난폭하여 감옥에 들어간 일도 있으나 수학에는 재능이 뛰어났다. 11년 카잔대학을 졸업한 후 대학에 남아 교편을 잡았고, 16년 젊은 나이로 정교수가 되어 수학 외에 천문학·물리학 등도 강의하였다. 그 뒤 대학 도서관장·박물관장을 겸하였고 수학·물리학부장이 되었다가 27년 학장이 되었다. 유클리드기하학의 기초공리를 검토하여 유클리드기하학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기하학의 성립 가능성을 상정(想定)하여 26년 카잔 수학·물리학 협회에서 발표하여 헝가리의 J.볼리아이와는 별도로 비유클리드기하학을 창시하였다. 이 연구에 대한 당시의 반응은 냉담하였고 연구 초고(草稿)마저 분실하였으나, 29년 카잔대학 학보에 다시 발표하고 그 구체적 전개에 힘을 기울였다. 그 후 그 성과를 40년 베를린에서 발표한 《평행선 이론의 기하학적 고찰:Geometrische Untersuchungen zur Theorie der Parallellinien》에 집약하여, K.F.가우스를 위시한 수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대수학에서는 《유한의 계산》(34), 수학해석(數學解析)에서는 《3각급수의 소멸》(34) 《무한급수의 수렴성》(41) 《몇몇 적분에 대하여》(52) 등이 있고, 함수의 미분 가능성과 연속성의 구별을 처음으로 지적하고 ‘로바체프스키 방정식’으로 불리는 대수방정식의 수치해법을 행하는 등 폭넓은 연구를 하였다.

 

르루아(1870.6.8~1954.11.11)

프랑스의 철학자·수학자. 처음에 과학을 배워 1898년에 과학박사가 되었고, 파리고교에서 수학을 가르쳤으나, H. 베르그송의 권유로 철학으로 전향하였다. 1921년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되고, 45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자유롭게 자기를 창조하는 자아(自我)를 바탕으로 프래그머티즘의 입장에서 과학과 종교를 논하였다. 과학은 실천을 목적으로 현실을 정리하는 것이고 종교적 도그마도 도덕적인 행위의 원천이라고 보고 진리의 인식을 삶에서 구하였다. 주요저서에 《도그마와 비판:Dogme et Critique》(1906) 《제1철학시론(試論):Essai d’une philosophie premi뢳e》(2권, 56∼58)이 있다.

 

르베그(1875.6.28~1941.7.26)

프랑스의 수학자. 에콜 노르말을 졸업하고, 파리대학과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되었다. 학위논문 《적분(積分)·길이·면적》에서, 리만이 정립해 놓은 적분의 정의를 더욱 일반적인 점집합의 관점에서 정의하였다. 이 이론은 근대적인 적분론의 단서도 되고, 확률론의 측도론적 연구를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푸리에 급수론 등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보다 일반적인 힐베르트공간론(Hilbert space)으로서 취급받게 되었다. 또한 위상기하학(位相幾何學)에 있어서도 밀집성의 정의와 밀집한 집합에 관한 르베그수(數)의 도입 등 기초가 되는 연구를 하였다.

 

르장드르(1752.9.18~1833.1.10)

프랑스의 수학자. 툴루즈 출생. 파리의 종교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775년 파리의 육군사관학교 교수가 되었고, 83년 아카데미 프랑스츠의 회원이 되었다. 또 에콜 폴리테크니크(이공과대학)의 시험관 및 측지감독관 등을 지냈다. 타원적분·오일러 적분 등의 적분학과 유클리드기하학의 기초 및 최소제곱법, 측지학 등에 걸쳐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1798∼1830년의 《정수론(整數論):Th럒rie des nombres》에서는 ‘2차 상반법칙’의 공식을 정립하여 그의 이름을 붙인 제곱잉여에 관한 기호(Legendre’s symbol)를 남겼다. 1806년 《최소제곱법에 관하여:Sur la M럗hode des Moindres Quarr럖》에서 ‘최소제곱법’을 K.F.가우스에 앞서 발표하였고, 25∼26년 《타원함수론:Trait?des fonctions elliptiques》에서 이른바 퍼텐셜(potential)의 개념으로 불리는 ‘르장드르함수’를 도입한 ‘타원적분’의 분류를 논하고 있는데 이는 19세기에 있어서의 타원함수론 발전의 선구가 되었다. 그의 저서 《적분학 연습》 《타원함수론》 《오일러 적분론》 등은 오랫동안 교과서로서의 권위를 지켜 왔는데 특히 《기하학의 요소들:El럐ents de g럒m럗rie》는 근대적인 초등기하학의 교과서로서 각국어로 번역되었으며, 또한 삼차원 조화함수와 관련되는 구함수(球函數)에 대하여 그의 이름을 붙인 미분방정식은 유명하다.

 

리(1842.12.12~1899.2.13)

노르웨이의 수학자. 노르드피오르데이드 출생. 크리스티아니아대학(현 오슬로대학)에서 수학한 후, 1869년 독일의 베를린으로 갔다. 그곳에서 F.클라인(1849∼1925)과 친교를 맺고 공동으로 수학연구를 하고 논문도 썼다. 그 후 71년 크리스티아니아대학으로부터 학위를 받고 이듬해에 이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73년 연속변환군의 연구를 시작하여 ‘리의 구면기하학(球面幾何學)’을 발견하였으며, 84년 이후 F.엥겔(1821∼96)과 협력하여 변환군 연구를 계속하였다. 86년 클라인의 뒤를 이어 라이프치히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98년까지 강의하였다. 98년에 건강을 해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변환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여 해석적인 형태로 이 운동을 추구하여 기하학적 변환의 이론에 신기원을 이루어 놓은 것과 함께 변환의 일반이론의 기초를 확립함으로서 연속군(連續群)의 이론을 창시하였다. 이 연속군을 리군(群)이라 부르는 것은 그의 이름을 따서 붙인 때문이다. 또한 미분방정식론에의 공헌도 컸다. 저서에는 F.엥겔과의 공저인 《변환군론(變換群論):Theorie der Transformationsgruppen》(3권, 1893)과 G.셰파스와의 공저인 《연속군론(連續群論) 강의》 등이 있다.

 

리만(1826.6.17~1866.7.20)

독일의 수학자. 하노버 출생. 괴팅겐대학과 베를린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851년 괴팅겐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51년 같은 대학 강사, 57년 조교수, 59년 디리클레의 후임으로 교수가 되었다. 폐결핵 때문에 만년을 이탈리아에서 보냈다. 그의 짧은 일생을 통해 발표한 논문의 수는 비교적 적지만, 수학의 각 분야에서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복소함수론에서의 연구의 특징은, 유체역학적 고찰에 의해 수학의 다른 많은 영역과 복소함수론 사이에 광범위한 유사성이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또 복소함수의 기하학적인 이론의 기초를 닦아 준 점이다. 1851년의 학위논문에서, (x, y) 평면을 (u, v) 평면 위에 등각적(等角的)으로 사상(寫像)시켜, 한 평면 위의 임의의 단일연결역(單一連結域)이 다른 평면 위의 임의의 단일연결역으로 변형될 수 있는 함수를 증명하였다. 이것은 57년의 아벨함수에 관한 논문으로, 위상수학적 고찰을 해석학으로 도입한 리만면(面)의 개념으로 유도한 것이다. 54년의 교수자격 취득 논문에서, 리만적분을 정의하고, 삼각급수의 수렴에 관한 조건을 제시했는데, 이 적분의 정의는 함수가 적분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이 정의는 20세기에 접어들어 H.르베그에 의해 더욱 포괄적인 정의가 부여되었다. 54년 취임강연에서 기하학의 기초를 논하면서, 리만공간의 개념을 도입하여, 리만공간의 곡률(曲率)을 정의하였다. 이 연구는 로바체프스키 등에 의해 발견된 비유클리드기하학도 어느 특별한 경우, 즉 곡률이 음[負]인 공간으로서 주어지는 것이었다. 곡률이 양[正]인 곡면상에서의 기하학은 리만기하학이라 불리며, 구면(球面)에서는 직선은 대원(大圓)으로 정의되며, 거기서는 두 개의 직선은 반드시 두 점에서 교차되며, 따라서 평행선은 없다. 그의 기하학의 기초가 된 것은 직선이란 무엇이냐, 또 그것을 정의하기 위한 장소는 어떤 곳이냐 하는 점으로 요약된다. 58년 소수분포에 관한 논문에서는 ζ함수를 응용하여 해석적 수론의 기초를 닦았다. ζ함수의 성질에 대한 리만의 가정 ‘ζ(s)는 s=x+iy에 대해서 생각할 때 x>1/2로 0점은 없다’는 오늘날까지 증명도 부정도 되지 않은 상태이다. 만년에는 W.E.베버의 영향을 받아서, 이론물리학에 흥미를 가졌으며 물리학에서 사용되는 편미분방정식(偏微分方程式)에 대해서 강의하였다. 그가 죽은 뒤 베버에 의해 출판되었다.

 

리에스(1880.1.22~1956.2.28)

헝가리의 수학자. 함수해석학의 개척자로 유명하다. 1914년 클루지대학 교수, 45년 부다페스트대학 교수로 취임하였다. 리스 피셔의 정리(1907)에 의해서 초기 양자론 분야에 공헌하였고, 에르고드 이론, 반순서(半順序) 벡터공간 이론, 위상기하학 등의 분야에도 공헌하였다. 주요저서에 《Le뛬ns d’analyse fonctionnelle》(52)이 있다.

 

리우빌(1809.3.24~1882.9.8)

프랑스의 수학자. 1825년 파리 이공과대학에 입학하였다가 2년 후에 교량토목학교로 옮겼다. 31년 이공과대학 조교수, 38년 교수가 되었으며, 다음해 아카데미 데 시앙스의 회원이 되었고, 51년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되었다. 업적은 거의 수학 전분야에 걸쳐 약 450편의 논문을 발표한 것 외에 잡지 《순수응용수학(일명 리우빌 잡지)》(36년)을 창간하였으며, 74년까지 그 편집을 맡았다. 논문 중의 초월수의 존재 증명과 미분·적분 및 해밀턴의 정준운동(正準運動) 방정식의 풀이는 이후의 연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정준방정식에 대한 보존정리는 통계역학에서 에르고드이론의 기초가 되었으며, E.갈루아가 대수방정식을 승근(乘根)으로 풀 수 있는 여러 조건을 밝힌 사실을 《순수응용수학》에 발표하여 세상에 소개하였다. A.L.코시와 협력하여 ‘리우빌의 정리’를 발표하였다.

 

리치쿠르바스트로(1853.1.12~1925.8.6)

이탈리아의 수학자. 라벤나의 루고 출생. 1890년 이래 파도바대학 교수로 있었다. G.F.B.리만의 이론을 계승하여 ‘리만기하학’을 2차 미분형식의 불변식론(不變式論)과 관련시켜 전개해서 절대미분학을 창시하였다. 텐서해석의 정식화는 그의 이론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리치의 텐서’ ‘리치의 공식’ 등으로 그 이름이 유지되고 있다.

 

린델뢰프(1870~1946)

핀란드의 수학자. 1887년 헬싱키대학에 입학했으며, 90년의 첫 논문은 미분방정식에 관한 것이었다. 93년 학위를 받고, 95년 헬싱키대학 강사가 되어 1903~38년의 정년퇴직에 이르기까지 동 대학의 교수로 있었고, 그 이후에는 명예교수가 되었다. 또 1907년부터는 북유럽의 대표지 《악타 마테마티카》의 편집에 종사하였다. 현재 상식화되어 있는 함수론의 기초사항에 대한 중요한 공헌은 이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어 정함수의 값분포 내지는 Ch.E.피카르의 정리 연구로 옮겼는데, E.프라그멘과의 공동연구에 의해 근대함수론에 끼친 공헌은 특히 눈부시다. 조화함수에 의한 평가라는 원리에 근거한 여러 성과는 R.네반리나, A.보이를링, L.V.알포르스 등에게 계승되어 기하학적 함수론의 기초를 이룩하였다. 한편, 이 사이에 그의 이름을 붙인 점집합론의 결과가 얻어졌다. 이어 1920년 무렵부터 등각사상론으로 옮기어 경계의 대응에 관한 업적을 성취하였다. 만년에 저술한 《해석학 교정(解析學敎程)》(5권)은 교과서로도 이용되었다. 헬싱키대학 재임 43년간을 통하여 직접 또는 교과서를 통해서 수학계에 끼친 영향은 크다. 특히 함수론 분야에서는 그의 문하에서 F.이베르센, P.J.미르베르크, 네반리나 형제, 알포르스 등 현대 함수론에 있어서의 세계적 지도자가 배출되었다.

 

매클로린(1698.2~1746.6.14)

영국의 수학자. 스코틀랜드의 킬모든 출생. 15세에 글래스고대학을 졸업, 19세에 애버딘의 매리셜 칼리지 수학 교수가 되었으며, 1725년 에든버러대학 교수가 되었다. 뉴턴의 학통을 이어, 플럭션법을 연구, 미분학에 이바지하고, 이것을 기하학에 응용하였다. 급수전개에 관한 ‘매클로린의 정리’를 발견하여 저서 《유율법(流率法)》(42)을 기술하였으며, 이 책에는 조석(潮汐)의 이론 등도 포함되어 있어 물리학에도 이바지하였다.

 

멀리스(1996.7.5)

영국의 수학자·경제학자. 스코틀랜드 미니개프 출생. 1957년 에든버러대학과 63년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컬리지에서 각각 석사 학위와 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69~95년 옥스퍼드대학에서 강의를 한 뒤,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하였다. 미국 컬럼비아대학 경제학 교수인 W.S.비크리 교수의, 정보가 불완전하거나 불균형한 상황하에서의 경제적 인센티브를 분석적으로 연구한 이른바 ‘비대칭 정보하에서의 유인’이라는 이론에 대한 이론적 창의성을 보완하는 등, 비크리의 경제이론을 수학적으로 뒷받침하고 설명해 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비크리와 함께 96년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였다.

 

메넬라우스(?~?)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천문학자·물리학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출생. 98년 로마에 천문대를 건립하였다. 저서로, 원의 현에 관한 저작(6권)이 있었다고 하나 없어지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는 아라비아어·헤브라이어·라틴어 등으로 번역된 《구면학(球面學):Sphaerica)》(3권)이 있다. 이것은 구면삼각형을 취급한 것으로, 유클리드의 평면삼각형에 대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제1권에는 구면삼각형의 개념과 정의 등이 있고 제2권은 천문학의 입장에서 구면학을 취급하였으며, 제3권에는 ‘메넬라우스의 정리’를 비롯하여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본》 제6권과 유사한 비례의 제명제(諸命題)가 있다.

 

몽주(1746.5.10~1818.7.28)

프랑스의 수학자. 본 출생. 어릴 때부터 재능이 뛰어나 소화(消火) 펌프·측량기 등을 만들었으며, 16세 때 리옹에서 물리학 교사가 되었다. 그 뒤 육군 공병학교 재학 중에 축성(築城)에 관한 문제를 종래의 산술적인 계산으로 풀지 않고 자기가 안출한 기하학적 방법으로 짧은 시간에 풀어 교관으로 발탁되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화법기하학(畵法幾何學)의 기원인데 당시에는 프랑스의 군사기밀로서 15년간이나 공개되지 않았다. 1780년 파리대학에서 수력학(水力學)을 강의하였고, 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후 군수품 생산기술과 조직에 진력하였으며, 새로운 도량형의 제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92년 혁명정부의 해군상(海軍相)이 되었고, 그의 제안으로 94년 에콜 폴리테크니크가 창설되자 그 곳의 중심 멤버로 활동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나폴레옹의 신임과 우대를 받아 이탈리아·이집트 등의 원정에 참가하였으며 이집트에서는 이집트 학회를 창립하였다. 왕정복고 후에는 당국의 손길을 피해야 했고 학사원에서도 추방당하여 실의 속에 세상을 떠났다. 주요저서 《화법기하학:G럒m럗rie descriptive》이 95년 간행되었고, 같은해에 《기하학에의 해석학(解析學)의 응용:Application d’analyse ?la g럒m럗rie》도 간행되어 오늘날의 적분기하학(積分幾何學)의 선구자가 되었다.

 

뫼비우스(1790.11.17~1868.9.26)

독일의 수학자·천문학자. 프로이센 출생. 라이프치히·괴팅겐·할레 등지의 여러 대학에서 공부하고, K.F.가우스의 문하생이 되었다. 1815년 라이프치히대학 천문학 교수, 44년 동 대학 천문대장이 되었다. 천문학 이외에도 기하학·역학 등을 연구하여 업적을 남겼다. 기하학에서는 동차좌표(同次座標)의 일종인 중심좌표를 처음으로 도입한 업적으로 유명해졌다. 주요저서로는 《중심해석(重心解析)》(27)이 있다. 사영기하학(射影幾何學)의 기초를 굳혔으며, 직선기하학 연구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면(面)의 표리(表裏)의 구별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에 대한 연구로 널리 알려져 있다.

 

민코프스키(1864.6.22~1909.1.12)

독일에서 활동한 러시아 출신의 수학자. 리투아니아의 코브노 근교 출생. 쾨니히스베르크대학에서 공부했다. 그 무렵부터 D.힐베르트와 평생에 걸친 친교를 맺기 시작했다. 1895년 쾨니히스베르크대학 교수가 되었고, 96년 취리히대학, 이어서 1902년 괴팅겐대학으로 옮겼다. 정수론에 기하학적 방법을 도입하여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연구로 유명하다. 일반적으로 ‘민코프스키의 시공세계(時空世界)’ 즉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의 4차원적 시공(時空)의 기하학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상대성이론의 시간·공간개념을 논하였고, 또한 물리법칙의 로렌츠군(群)에 대한 불변성을 해명하여 상대성이론의 형성에 공헌을 하였는데, 4차원세계의 기하학은 그 묘상화에 기여를 한 것이었다. 주요저서로 《수의 기하학:Geometrie der Zahlen》(1896) 《디오판토스 근사론(近似論):Diophantische Approximationen, eine Einf웘rung in die Zahlentheorie)》(1907) 《공간과 시간:Raum und Zeit》(1909) 등이 있다.

 

밀른(1896.2.14~1950.9.21)

영국의 천문학자·수학자. 헐 출생.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하고, 1920년 케임브리지대학 태양물리천문대 부대장, 22년 천체물리학 강사, 25년 맨체스터대학 응용수학 교수, 28년부터 사망시까지 옥스퍼드대학 수학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초기에는 항성대기의 열전리(熱電離) 이론을 연구하고, 29년 이후 항성의 내부구조론을 연구하여, 완전기체에 의한 에딩턴의 항성모형을 비판하고, 축퇴(縮退)가스에 의한 백색왜성 이론을 전개하였다. 한편, 우주론에서는 우주팽창에 대한 독자적인 이론을 전개하였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기초를 둔 우주공간에 대하여 균일성·등방성을 전제로 하는 뉴턴운동학에 의한 우주모형을 구상하여 《운동학적 상대론》(1948)으로 발표하였다.

 

바나흐(1892.3.30~1945.8.31)

폴란드의 수학자. 크라쿠프 출생. 1922년 루보프대학 강사가 되었고, 27∼45년 동대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함수해석(函數解析)을 연구하여 위상공간(位相空間)의 이론을 창시·발전시켰다. 그는 벡터의 크기 개념을 확장한 놈을 통하여 거리를 도입한 바나흐공간으로 알려진 놈(norm) 선형공간의 개념으로 유명하다. 주요저서에 《선형연산론:Th럒rie des op럕ations lin럂ires》(1932)이 있다.

 

바이어슈트라스(1815.10.31~1897.2.19)

독일의 수학자. 바이에른주(州) 오스텐펠데 출생. 1834~38년 본대학에서 상업과 법률을 배운 뒤 뮌스터대학에서 C.구더만에게 사사하여 타원함수론을 연구하였다. 그 후 오랫동안 가톨릭 계통 김나지움의 교사직을 맡으면서 수학관계의 중요한 논문을 발표하고, 56년 베를린대학의 초빙을 받아 교수로서 종신토록 재직, 항상 용의주도하게 준비된 강의로 성가(聲價)를 높여 많은 청강생이 모여들었다. 김나지움 시대에는 초타원적분(超楕圓積分)·아벨함수, 나아가 대수적 미분방정식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가 발표한 복소변수의 해석함수(解析函數)에 대한 개념은 G.리만의 개념과 자주 비교된다. 바이어슈트라스가 엄밀한 해석적 표현을 중시한 데 반하여 리만은 기하학적·물리학적 직관에 의존하였다. 최대의 공헌은 멱승수(冪乘數)로서 복소함수이론의 기초를 이룬 일이다. 이는 J.L.라그랑주의 미적분 대수화(代數化)를 복소평면에서 더욱 완전하고 엄밀하게 기초를 이룩하고 다시 이를 발전시킨 것이다. 어떤 수렴원(收斂圓) 안에서 멱승수로서 전개되는 함수의 값을 다시 해석접속(解析接續)으로써 이를 확장하였다. 그의 엄밀성은 모든 연구결과에 나타나, 변분법(變分法)의 연구, 동일수렴(同一收斂)의 발견, 도처에서 미분할 수 없는 연속함수의 제시 등 그 이후의 수학의 엄밀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바일(1885.11.9~1955.12.8)

독일의 수학자·이론물리학자. 엘름스호른 출생. 1908년 괴팅겐대학을 졸업, 적분방정식에 관한 연구논문으로 학위를 받았다. 취리히 공과대학 교수, 괴팅겐대학 교수, 프린스턴대학 객원 교수를 역임하고, 34년 이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연구에 전렴하였다. 업적은 수학·이론물리학의 기본적 연구에서부터 과학전반에 이르고 있다. 구체적으로 적분방정식, 리만면(面) 등의 해석학 연구, 무리[群]의 표현, 특히 콤팩트군(群)·반단순(半單純) 리군(群)의 표현론, 또한 군론(群論)의 지식을 널리 이용한 양자역학의 연구, 미분기하학, 수학기초론의 연구 등이 있는데, 특히 유리형함수(有理型函數)와 해석곡선(解析曲線)과의 관계를 밝힌 선구적 업적을 발표하여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저서로 《수학과 자연과학의 철학》 《시메트리》 등이 있다.

 

배로(1630.10~1677.5.4)

영국의 수학자·신학자. 런던 출생. 케임브리지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다녔다. 파리·이탈리아·콘스탄티노플에서 고전을 연구하고 1659년 귀국하여 사제가 되었으며, 60년 케임브리지대학의 그리스어(語) 교수로 임명되었다. 63년 수학의 루커스 교수직이 신설되자 초대 교수가 되었으며, 여기서 행한 광학(光學)과 기하학의 강의로 뉴턴에게 영향을 주었다. 69년 뉴턴에게 교수직을 물려주고 신학에 전념하기로 했으나, 70년 찰스 2세의 시승(侍僧)으로 뽑혔고, 이어 트리니티 칼리지의 학장이 되어(71) 죽을 때까지 재직하였다. 수학연구에 있어서는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 등의 고전적 저작의 해석에 주력하는 한편, 광학과 기하학에서 독자적인 연구를 개척하였으며, 특히 페르마의 접선법의 발전과 미분·적분이 서로 역관계에 있다는 증명은 미적분학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서 유명하다. 열렬한 왕당파(王黨派)였으며 사상적으로는 케임브리지 플라톤파(派)에 속하여, 시간과 공간의 절대성을 주장하였다.

 

버코프(1884.3.21~1944.11.12)

미국의 수학자. 하버드대학과 시카고대학에서 공부하고, 나중에 프린스턴대학과 하버드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19세기 말경부터 J.H.푸앵카레, S.리야프노프 등이 정성적(定性的)·위상적 방법을 도입하여 크게 발전시킨 미분방정식론을 연구하였다. 정성적·위상적 방법을 계승하고, 푸앵카레가 못다한 정리도 증명하였으며, 1912년 역학계의 이론도 세워 이 분야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 31년에 제시한 ‘에르고드 정리’의 성립조건도 통계역학의 기초를 닦는 데 기여하였다.

 

베르누이(1654.12.27~1705.8.16)

스위스의 수학자. 바젤 출생. 처음에는 성직자가 되려고 하였으나, 수학을 독학하다가 여러 나라의 여행을 계기로 수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1682년부터 바젤대학에서 물리학을 강의하였고, 이어 86년 수학 교수가 되었다. 그 후 84년 발표된 G.W.라이프니츠의 논문을 보고 흥미를 느껴 동생 요한과 함께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해석학을 전개하여 등하강곡선(等下降曲線)을 발견하였다(90). 라이프니츠는 베르누이 형제가 자기와 함께 미적분학의 건설자라고 말하고 있다. 베르누이는 나중에 동생과 사이가 나빠져, 요한이 제출한 최속강하선(最速降下線)의 문제를 푸는 동시에 등주(等周) 문제를 제출하는 등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한편 그들은 99년 파리 과학아카데미의 첫 외국인 회원으로 형제가 모두 뽑혔으며, 또 1701년 베를린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그 밖에 급수에 관한 업적, 확률론에 대한 공헌(여기에는 베르누이數와 대수의 법칙과 관련된 베르누이의 정리가 포함된다), 진자(振子)의 진동중심에 관한 연구 등이 있다. 유저로는 《추론의 예술 Ars Conjectandi》(1713)가 있다.

 

베르누이(1667.8.6~1748.1.1)

스위스의 수학자. 바젤 출생.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여 학위를 받았으며, 다시 의학을 공부하여 그 학위도 받았다(1694). 그러는 한편 수학에도 흥미를 가져, 87년경부터 형 야콥과 협력하여 해석학을 연구하였고, 그 전개에 공헌하였다. 90년부터는 파리에 머물며 ‘무한소해석(無限小解析)’‘적분법’을 체계적으로 강의하였다. 95년 그로닝겐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형이 사망한 후로는 바젤대학에 초빙되었다(1705). 급수의 연구, 최속강하선(最速降下線)에 대한 문제 제출 등이 있은 후, 해석학을 물리학에 응용하는 문제에 관심을 돌려 실체진자(實體振子)를 다루었으며, 또 역학에 있어서의 가상변위(假想變位)의 원리를 정식화하였고, 뿐만 아니라 역학에서의 활력의 개념을 주장하여, 라이프니츠를 옹호하였다. 후계자 육성에도 주력하였는데, 18세기의 대수학자 L.오일러도 그의 제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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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가우스

연수의 덧셈의 공식을 발견한 사람이다.(예는 1+2+3.....+100같은 것)그리고 복소수를 파악했다.

2.피타고라스

피타고라스의 법칙을 발견함.(예:A제곱 플러스 B제곱은 C제곱 플러스)

3.유클리드

기하학 원론을 말한 사람

4.라이프니츠

미적분학의 기본 정리를 발견하고 이 주제에 관한 개념의 대부분을 개발하였으며, 미분법의 수많은 기본 공식을 만들어 내었다.
5.아르키메데스

유레카!아시죠?물의 부력과 포물선의 구적 만든 사람

6.최석정

9*9방진을 만들었다

요기 까지만 할께여~~~점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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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베르스(1898.5.16)

독일의 수학자 및 자연과학자. 1937~38년 베를린 의학사 자연사연구소 연구원이었고, 41~46년 라이프치히대학 강사를 거쳐, 47년 함부르크대학 강사가 되었다. 특히 이슬람교의 자연과학에 정통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Ein Werk Tabit bin Qurra’s 웑er ebene Sonnenuhren》(1936) 등의 역주(譯註)가 있다.

 

가생디(1592.1.22~1655.10.24)

프랑스의 철학자·물리학자·수학자. 프로방스 출생. 에크스대학에서 신학을 공부, 이 대학의 신학·철학 교수가 되었으나, 자연과학 연구에 전념하기 위하여 교수직을 사임하고, 1645년에 파리의 콜레주 루아얄의 수학교수가 되었다. 최초의 역작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에 대한 역설적 연구》(24)에서 명백히 밝힌 바와 같이, 사상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스콜라 철학 제파(諸派)에 대해 격렬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였으며, 수학을 비롯한 자연과학 방면의 활약에서는 유물론적 세계관을 기조로 하였다. 그는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의 유물론적 원자론(唯物論的原子論)에 입각하여 물질과 독립된 시간과 공간의 존재를 논증하고, 이의 불멸(不滅)을 주장하였으며, 더 나아가서는 경험 지식을 모든 인식의 원천이라고 선언하여 R.데카르트의 합리주의와 형이상학적 개념에 반대하였다. 그가 주장한 원자론은 18세기 프랑스 계몽기의 감각론자(感覺論者)나 백과전서파(百科全書派)에게 큰 영향을 줌으로써 근대원자론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과학자로서는 천체의 관측과 지중해의 수로도(水路圖)작성에 업적을 남겼다.

 

갈루아(1811.10.25~1832.5.31)

프랑스의 수학자. 파리 교외 부르라렌 출생. 군(群)의 개념을 처음으로 고안하였고, ‘갈루아의 이론’으로도 유명하다. 파리의 고등이공과학교에 입학하려다 실패하였으나, 1829년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30년 정치운동에 참가해서 퇴학당하였다. 또한 국왕을 탄핵하여 투옥되었는데, 가출옥 중에 경찰관이 도발한 것이라고도 하는 결투로 인해 21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방정식론에 관한 연구 결과도 프랑스 학사원에서 등한시되었으나, 그가 죽은 후, 결투 전날 밤에 친구인 A.슈발리에에게 보낸 유고(遺稿)에서 비로소 그 위대성이 알려졌다. 유고에는 타원적분(楕圓積分)과 대수함수(代數函數)의 적분에 관한 것, 방정식론에 관한 것이 요약되어 있다. 그 내용에는 군(群)의 개념 도입이나 갈루아 이론의 본질적인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갈루아의 사상에 포함된 군의 개념은 기하학이나 결정학(結晶學)에도 응용되었고, 물리학에도 풍부한 연구수단을 제공하였다.

 

가우스(1777.4.30~1855.2.23)

독일의 수학자. 대수학·해석학·기하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겨, 19세기 최대의 수학자라고 일컬어진다. 수학에 이른바 수학적 엄밀성과 완전성을 도입하여, 수리물리학(數理物理學)으로부터 독립된 순수수학의 길을 개척하여 근대수학을 확립하였다. 한편 물리학, 특히 전자기학(電磁氣學)·천체역학(天體力學)·중력론(重力論)·측지학(測地學) 등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브룬스비크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빈궁한 가운데 성장하였지만, 일찍부터 뛰어난 소질을 보였기 때문에, 어머니와 숙부의 노력으로 취학할 수 있었다. 10세 때 등차급수의 합의 공식을 창안하는 등 신동(神童)으로 알려져 브룬스비크공(公) 페르디난드에게 추천되어, 카롤링고교를 거쳐 괴팅겐대학에 진학하였다. 고교시절에 이미 정수론(整數論)·최소제곱법[最小自乘法] 등으로 독자적인 수학적 업적을 올렸는데, 괴팅겐대학 재학 시절에 정 17각형의 문제에 열중한 것이 수학의 길을 선택하기로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 가우스는 헬름슈테트대학으로 옮겨 22세 때 학위를 받았으며, 그 후 다시 브룬스비크로 돌아와 페르디난드공(公)의 도움을 받으면서 수학을 계속 연구하였다. 1801년에 간행된 명저(名著) 《정수론연구(整數論硏究):Disquistiones arithmeticae》는 2차의 상호법칙의 증명을 풀이하였으며, 합동식(合同式)의 대수적 기법을 도입하여 이 분야에 획기적인 업적을 쌓아 올렸고, 학위 논문에서 이룩한 대수학의 기본정리의 증명과 더불어 학계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그에게 대학에서의 지위를 가져다준 것은 오히려 천체역학에 관한 업적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의 학계에서 뉴턴역학의 영향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즉, 1801년 소행성 케레스(Ceres)가 발견되자, 이 별의 궤도결정이 문제로 대두되어, 가우스가 이를 계산해 내어 해결한 공을 인정받아 1807년에 괴팅겐대학 교수 겸 천문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800년 이후 가우스의 연구는 대략 4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는 소행성의 궤도결정을 시작으로 천체역학을 연구하던 20년까지의 시기이고, 이 시기의 연구는 《천체운동론》(1809)에 집대성되어 있다. 또한, 수학 분야에서는 초기하급수(超幾何級數)의 연구 및 복소변수(複素變數)의 함수론의 전개가 있다(베셀에게 보낸 서한에 적혀 있으며, 훗날의 코시의 정리도 포함한다). 제2기는 측지학(測地學)에 관계한 시기로서, 21년에 하노버 정부와 네덜란드 정부의 측지사업의 학술고문으로 위촉받은 일이 계기가 되어 곡면론(曲面論)의 검토, 즉 곡률(曲率)의 문제, 등각사상(等角寫像)의 이론, 그리고 곡면의 전개가능성 등을 고찰하였다. 이것은 미분기하학(微分幾何學)으로 향하는 최초의 일보였다. 한편, 정수론의 영역에서도, 주로 4차(次)의 상호법칙 연구에서 비롯하여 복소정수(複素整數)의 연구에 이르러 대수적(代數的) 정수의 이론을 창시하였고, 이것은 아이젠슈타인, 쿠머, 데데킨트 등에게 계승되었다. 또한, 데이터의 처리와 관련하여 21∼23년의 논문에서 최소제곱법을 이론화하여 통계에서 가우스분포의 의의를 강조하였다. 제3기는 30년부터의 10년간으로서, 주요 관심사는 물리학 쪽으로 옮겨져 갔다. 특히, W.E.베버와의 협력 아래 추진한 지구자기(地球磁氣)의 측정 및 이의 이론적 체계화가 두드러진 업적이다. 괴팅겐에 자기관측소를 설립하고, 측정을 위하여 자기기록계를 제작하였으며, 또한 절대단위계(絶對單位系)를 도입함으로써 전자기학의 기초를 닦는 데 공헌하였고, 한편으로는 퍼텐셜론(論)을 전개하여 이것의 수학적 기초의 수립을 추진하였다. 이 밖에, 전신기(電信機)의 발명과 모세관현상의 연구 등도 이 시기에 이룩한 것이다. 40년경부터 만년에 이르는 제4기에는, 오늘날의 위상해석학(位相解析學)인 위치해석학 및 복소변수의 함수와 관련된 기하학을 연구하였다. 이상과 같이 수학자이며 동시에 관측자이기도 했던 그는 ‘괴팅겐의 거인(巨人)’으로서 이름을 남겼지만, 우선권 다툼이라든지 후진의 업적에 대한 냉담한 태도 등으로 가끔 나쁜 평을 받게 된 것은 아마도 완전성을 중요하게 여긴 그의 성격 탓인지도 모른다. 그의 좌우명은 “수(數)는 적으나 완숙하였도다”였다.

 

갈루아(1811.10.25~1832.5.31)

프랑스의 수학자. 파리 교외 부르라렌 출생. 군(群)의 개념을 처음으로 고안하였고, ‘갈루아의 이론’으로도 유명하다. 파리의 고등이공과학교에 입학하려다 실패하였으나, 1829년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30년 정치운동에 참가해서 퇴학당하였다. 또한 국왕을 탄핵하여 투옥되었는데, 가출옥 중에 경찰관이 도발한 것이라고도 하는 결투로 인해 21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방정식론에 관한 연구 결과도 프랑스 학사원에서 등한시되었으나, 그가 죽은 후, 결투 전날 밤에 친구인 A.슈발리에에게 보낸 유고(遺稿)에서 비로소 그 위대성이 알려졌다. 유고에는 타원적분(楕圓積分)과 대수함수(代數函數)의 적분에 관한 것, 방정식론에 관한 것이 요약되어 있다. 그 내용에는 군(群)의 개념 도입이나 갈루아 이론의 본질적인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갈루아의 사상에 포함된 군의 개념은 기하학이나 결정학(結晶學)에도 응용되었고, 물리학에도 풍부한 연구수단을 제공하였다.

 

갈릴레이(1564.2.15~1642.1.8)

이탈리아의 천문학자·물리학자·수학자. 피사 출생. 피렌체의 시민계급 출신이다. 성과 이름이 비슷한 이유는 장남에게는 성을 겹쳐 쓰는 토스카나 지방의 풍습 때문이다. 1579년 피렌체 교외의 바론브로사수도원 부속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마치고, 81년 피사대학 의학부에 입학하였는데, 이 무렵 우연히 성당에 걸려 있는 램프가 혼들리는 것을 보고 진자(振子)의 등시성(等時性)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84년 피사대학을 중퇴하고 피렌체에 있던 가족과 합류하였다. 이곳에서 아버지 친구이자 토스카나 궁정수학자인 오스틸리오 리치에게 수학과 과학을 배우면서 대단한 흥미를 느꼈다. 이때 습작(習作)으로 쓴 논문이 인정을 받아 92년 피사대학의 수학강사가 되었고, 같은 해 베네치아의 파도바대학으로 옮겼다. 파도바대학에서는 유클리드기하학과, 천동설(天動說)을 주장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가르치는 한편, 가정교사 노릇을 하면서 리치에게 배운 응용수학을 연구하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간단한 군사기술 입문》 《천구론(天球論) 또는 우주지(宇宙誌)》 《축성론(築城論)》 《기계학》은 이 시기의 저서이다. 베네치아의 여성과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었으며, 파오로 사르피 같은 당대의 뛰어난 학자·귀족 등과 친교를 맺었다. 1604년의 《가속도운동에 관해서》에서 발표한 근대적인 관성법칙(慣性法則)의 개념도 이미 그 전에 사르피에게 보낸 서한에 나타나 있다. 1609년 네덜란드에서 망원경이 발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손수 망원경을 만들어 여러 천체에 대하여 획기적인 관측을 하였다. 예를 들면, 당시에는 완전한 구(球)로 믿었던 달에 산과 계곡이 있다는 것, 모든 천체는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생각하였는데, 목성(木星)도 그것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등이었다. 10년에 이러한 관측결과를 《별세계의 보고》로 발표하여 커다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해에 교직생활을 그만두고 고향 피렌체로 돌아가서 토스카나대공(大公)인 메디치가(家)의 전속학자가 되었다. 그 후로도 천문관측을 계속하여 12∼13년에 태양흑점 발견자의 명예와 그 실체의 구명(究明)을 둘러싸고, 예수회 수도사인 크리스토퍼 샤이너와 논쟁을 벌여, 그 내용을 《태양흑점에 관한 서한》에서 발표하였다. 이 무렵부터 갈릴레이는 자신의 천문관측 결과에 의거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地動說)에 대한 믿음을 굳히는데, 이것이 로마교황청의 반발을 사기 시작하였다. 성서와 지동설과의 모순성에 관하여 제자들에게, 그리고 자신이 섬기는 대공(大公)의 어머니에게 편지형식으로 자기의 생각를 써 보냈는데, 이로 말미암아 로마의 이단심문소로부터 직접 소환되지는 않았지만 재판이 열려, 앞으로 지동설은 일체 말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제1차 재판). 18년에 3개의 혜성이 나타나자 그 본성(本性)을 둘러싸고 벌어진 심한 논쟁에 휘말리는데, 그 경과를 《황금계량자(黃金計量者)》라는 책으로 23년에 발표하였다. 여기서 직접적으로 지동설과 천동설의 문제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천동설을 주장하는 측의 방법적인 오류를 예리하게 지적하였으며, 우주는 수학문자(數學文字)로 쓰인 책이라는 유명한 말을 함으로써 자기의 수량적(數量的)인 자연과학관을 대담하게 내세웠다. 그 후 숙원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2대 세계체계에 관한 대화:Dia1ogo sopra 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 tolemaico e copernicaon》의 집필에 힘써, 제1차 재판의 경고에 저촉되지 않는 형식으로 지동설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이 책은 32년 2월에 발간되었지만, 7월에 교황청에 의해 금서목록(禁書目錄)에 올랐으며, 갈릴레이는 로마의 이단심문소의 명령으로 33년 l월에 로마로 소환되었다. 4월부터 심문관으로부터 몇 차례의 신문을 받고, 몇 가지 위법행위가 있었음을 자인하였다. 그러나 갈릴레이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과정에서 심문소 당국이 증거로 제시한 서류 중 몇 가지는 그 진실성이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6월에 판결이 내려졌고, 그는 그것을 받아들여 앞으로는 절대로 이단행위를 않겠다고 서약하였다(제2차 재판). 그 뒤 갈릴레이는 피렌체 교외의 알체토리에 있는 옛집으로 돌아왔는데, 사랑하는 장녀와 시력마저 잃었지만 마지막 대작인 《두 개의 신과학(新科學)에 관한 수학적 논증과 증명:Discorsi e dimonstrazioni mathematiche intorno a due nuove scienze attenenti alla meccanica》의 저술에 힘썼으며, 일단 정리되자 신교국(新敎國)인 네덜란드에서 출판하였다. 이어 속편 집필에 착수하였지만,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죽은 후에는 공적(公的)으로 장례를 치를 수 없었으므로 묘소를 마련하는 일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만년에는, 스승의 전기를 쓴 V.비비아니와, 기압계(氣壓計)에 그 이름을 남긴 물리학자 토리첼리의 두 제자가 그의 신변에 있었다. 갈릴레이의 생애는 르네상스기와 근대와의 과도기에 해당되며, 구시대적인 것과 새로운 것이 그의 생활이나 과학 속에도 공존하고 있었다. 천문학에서는 지동설을 취하면서도 케플러의 업적은 전혀 이해하지 않았고, 물리학에서의 관성법칙을 발견했지만 이것의 정식화(定式化)는 데카르트에게 넘겨주었다. 또한, 일상생활에서도 자유가 주어지는 파도바대학을 떠나 봉건제후(封建諸侯)의 전속학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인간다운 면은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 뛰어난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골즈브로(1881.5.19~1963.5.26)

영국의 해양학자·수학자. 더럼대학 수학교수(1928∼48), 이학부장(34∼36), 문학부장(36∼38)을 역임하였다. 동력학적 조석론(潮汐論), 증발(蒸發) 및 강우(降雨)의 불균일로 인한 해류 등의 이론적 연구가 있다.

 

괴델(1906.4.28~1978.1.14)

미국의 수학자·논리학자. 오스트리아 출생. 빈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후, 동대학 강사(1933∼38)로 있었다. 그 동안 과학적 방법 위에 철학의 기초를 세우려고 한 빈 학파에 속하여, 그 후 수학기초론이나 논리학의 방법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가져온 많은 ‘괴델의 정리’를 발표하였다. 특히 유명한 것으로는 1931년 발표한 ‘불완전성 정리’인데, 이것은 당시의 H.힐베르트나 B.러셀과 같이 공리적인 방법에만 의존하여 수학의 체계를 세우려는 확신을 좌절시킨 정리이다. 38년 나치스 정권의 박해로 미국으로 이주하여, 프린스턴고등연구소 연구원이 되었다. 주요 저서 논문으로는 《냕er formale unentscheidbare S둻ze der Principia Mathematica und verwandter Systeme》(1931) 《The Consistency of the Axiom of the Choice and of the Generalized Continuum-Hypothesis with the Axioms of Set Theory》(48) 등이 있다.

 

구르사(1858.5.21~1936.11.25)

프랑스의 수학자. 랑자크 출생. 툴루즈 이과대학 강사(1881∼85), 파리 이공과대학 연습교사(96 이래), 소르본대학의 미·적분학 교수(97)를 지냈다. 함수론·미분방정식론·불변식론(不變式論)·곡면론 등 분야에 대한 공헌이 크다. 주요저서로는 《Th럒rie des fonctions alg럃riques et de leurs int럊rales》(Appel과의 공저, 1896) 《Cours d'analyse math럐atique》(1905) 등이 있다.

 

굴베르그(1836.8.11~1902.1.14)

노르웨이의 화학자·수학자. 크리스티아니아(지금의 오슬로) 출생. 크리스티아니아대학에서 화학·수학·물리학을 공부한 후, 1861년에 왕립 육군사관학교의 수학 및 열역학 교사를 지냈다. 69년에는 모교인 크리스티아니아대학의 응용수학 교수가 되었다. 64년 의형(義兄)인 화학자 P.보게와 함께 ‘질량작용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이는 P.E.M.베르틀로와 생지르의 화학평형에 관한 실험결과(1862)를 바탕으로, 보게가 300회 이상의 실험을 하고 굴베르그가 이를 수식(數式)으로 정리하여 법칙화한 것이다. 처음에 쓴 노르웨이어 논문과 두 번째의 프랑스어 논문(67)은 학회의 인정을 받지 못했으며, 77년에 이 법칙을 독자적으로 발견한 J.H.반트호프의 영향을 받아 독일어로 쓴 세번째 논문(79)이 겨우 주목을 받았다. 굴베르그는 67~90년 분자론에 입각하여 기체·액체·고체의 일반상태식(一般狀態式)을 구하는 여러 가지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물리화학의 응용에도 관심이 있었으며, 또 75년에는 노르웨이에 미터법을 답변확정하게 하였다.

 

그라스만(1809.4.15~1877.9.26)

독일의 수학자·언어학자. 슈테틴의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이곳의 중학교 선생으로 평생을 보냈다. 독학한 것으로 생각되는 수학에서는 《광연론(廣延論):Ausdehnungslehre》(1844)의 저자로서 유명하며, 언어학에서는 인도유럽 조어(祖語)의 대기음(帶氣音:有氣音)에 관한 ‘그라스만의 법칙’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하다. 광연론은 수(數)에 관한 기초이론으로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며, 20세기에 들어와서 주목을 끌면서 그라스만 대수(代數)로서 전개되게 되었다. 또 만년에 출판한 인도의 고전 《리그베다의 사서(辭書):W쉜ter-buch zum Rigveda》와 번역 《리그베다:Rigveda》(2권)는 인도의 옛 주해(註解)에 얽매이지 않고 서유럽 인도학의 새로운 학문적 입장에서 연구한 것이며, 특히 전자는 지금까지도 이를 대신할 만한 것이 없을 정도이다.

 

그레고리(1638.11~1675.10)

스코틀랜드의 수학자·발명가. 미적분학의 고안에 공헌하였으며, 반사망원경을 발명하여 이것을 저서 《Optica Promota》(1663)에 기재하기도 하였다. 또한, 기하학적 도형의 면적측정에 관한 독자적 방법을 발표하여 호이겐스와 논쟁을 벌였으며, 망원경에 관하여 I.뉴턴과 서신을 교환한 일도 있다. 세인트앤드루스대학(1669)과 에든버러대학(74) 교수를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Geometriae pars universalis》(68) 《Exercitationes geometricae》(68) 등이 있다.

 

그린(1793.7.14~1841.3.31)

영국의 수학자. 가업을 이어 빵 제조업에 종사하는 한편 수학을 독학했다. 학자들과는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연구 결과는 알려지지 않은 채 있다가, 그 일부분이 우연히 K.F.가우스에게 발견되었고 W.T.켈빈에 의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전자기현상(電磁氣現象)의 수학적 이론을 만들려고 시도, 퍼텐셜함수를 도입하여 ‘그린의 정리(적분정리)’를 유도하였고 그린함수를 결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전자기학(電磁氣學)의 해석적 취급이 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수학의 일부분으로서의 퍼텐셜론(論)을 향한 길이 열렸다. 저서로는 《전기학 및 자기학(磁氣學)의 이론에 수학해석을 응용하는 시도》(1828)가 있다.

 

내시(1920)

미국의 수학자. 웨스트버지니아주(州) 블루필드 출생. 프린스턴대학에서 교환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1994년 J.하사니, R.젤텐과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수상하였다. 60년대 중반부터 내시는 기업체간의 상호작용과 시장움직임을 예측하기 위해, 체스나 포커와 같은 일반적인 게임에서 적용되는 전략에 초점을 두고 연구하여 내시균형이라는 개념을 정립하였다. 게임에서 각 경기자들이 어떤 특정한 전략을 선택하여 하나의 결과가 나타났을 때, 모든 경기자가 이에 만족하고 더 이상 전략을 변화시킬 의도가 없을 경우를 균형이라 한다. 그런데 이 중 상대방의 최적전략에 대해서만 최적인 전략을 찾아내서 균형의 개념을 정립하는 것, 즉 내시균형은 상대방의 최적전략에 대한 본인의 최적전략이라는 성격을 띤다.

 

네이피어(1550~1617.4.4)

영국의 수학자. 에든버러 근교의 머키스턴성(城) 출생. 스코틀랜드의 귀족 출신으로 남작이다. 13세에 세인트 앤드루스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그 후 프랑스에 유학하여 앙드리크 하반(河畔)에서 오랫동안 체재하였으며, 1608년 이후로는 머키스턴성으로 돌아와서 살았다. 수학·신학·점성술 등을 좋아하였는데, 특히 신학에서는 열렬한 신교도로서 로마교황과 그 권위에 반대하여 《성 요한 묵시록 전체에서의 소박한 발견:A Plain Discovery of the Whole Revelation of Saint John》(1594)을 발표하였다. 또 점성술에서는 예언에 관한 저술을 하는 등 그 재능을 보였다. 특히 40여 년에 걸친 수학 연구로 산술·대수(代數)·삼각법 등의 단순화·계열화를 꾀하였으며, 연구영역이 ‘네이피어 로드’ 등 계산기계의 고안에까지 미쳤다. 그 중 계산의 간편화를 목적으로 한 로그의 발명은 수학사상 커다란 업적이었다. 즉, 1614년 《경이적인 로그법칙의 기술:Mirifici Logarithmorum Canonis Descriptio》로 로그의 성질을 명백히 하였으며, 16년에는 H.브리그스와 협력하여 10을 밑[底]으로 하는 상용로그표를 만들기 시작했으나 완성시키기 전에 죽어 《경이적인 로그법칙의 구조》(1619)가 유고로서 출판되었고, 그 일은 브리그스에게 인계되었다. 그는 로그를 등차수열적 운동과 등비수열적 운동을 대응시켜서 발견해 냈다. 또한, 소수기호(小數記號)의 도입자로서도 알려졌다.

 

노이만(1832.5.7~1925.3.27)

독일의 수학자·이론물리학자. 브란덴부르크 출생. F.노이만의 아들이다. 바젤대학·튀빙겐대학·라이프치히대학 등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기하광학(幾何光學)·퍼텐셜론 등 수리물리학 방면의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 뉴턴 역학의 바탕인 관성의 법칙에 관해 그 성립 조건을 검토하고 공간 내의 고립물체의 운동을 인식하기 위해 기준절대좌표계를 상정했다(?軸系의 이론). 학술지 《Mathematische Annalen》의 창간에도 기여하였다.

 

노이만(1903.12.28~1957.2.8)

헝가리 출신의 미국 수학자.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생. 은행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수학에 재능을 보였다. 1919년 베를린대학 및 취리히대학에서 공부하고 부다페스트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27년 베를린대학 강사로 있다가 30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학 강사, 이어 수리물리학(數理物理學) 교수를 거쳐 33년 프린스턴고등연구소 교수가 되었다. 37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고 43년 이후에는 미국 원자력위원회에서 활약하였다. 그의 연구는 수학기초론에서 시작하여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설정 등 수리물리학적 과제를 대상으로 하고, 또한 수리경제학(數理經濟學)이나 게임의 이론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였다. 현대적 수학기초론의 출발점이 된 《집합론의 공리화(公理化)》(28)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27) 《힐베르트 공간론》(27) 등은 모두가 20대에 이룬 업적이었다. 그리고 《게임의 이론》(28) 《에르고드이론의 연구》(32)를 집필하고, 또 《위상군론(位相群論)》에서는 《콤팩트 위상군에서의 힐베르트 제5문제의 해결》(33)이나 《군(群) 위의 개주기(槪週期) 함수론》(34)으로 군 위의 조화해석(調和解析)의 연구를 발전시켰다. 44년에는 O.모르넨슈테른과 《게임이론과 경제행동》을 저술하였으며, 그 이후에는 고속도 전자계산기(MANIAC:기상연구에 이용된 초기의 컴퓨터)의 연구·제작과 수치해석에 기여한 공로로 페르미상(Fermi賞)을 수상하였다. 그 외에 머리(Murray)와 함께 작용소환론(作用素環論)·연속기하(連續幾何)를 창시하였다. 45년에는 계산기계 연구소장, 54년에는 원자력위원이 되었다.

 

뇌터(1882.3.23~I935.4.14)

독일의 수학자. 에를랑겐 출생. 대수기하학자 M.뇌터의 딸이며, 동생 F.뇌터도 이론물리학 교수였다. 에를랑겐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후에 괴팅겐대학에서 연구를 계속하였다. 1922년 괴팅겐대학 교수가 되어, 19세기의 수학으로부터 현대 수학으로의 과도기적인 추상대수학을 추진하여 D.힐베르트, 바일 등과 함께 괴팅겐대학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18년 발표한 ‘가환환(可換環)의 이데알론(論)’으로 이른바 뇌터환(環)을 정식화한 것을 비롯하여 데데킨트환(環)의 분석(1926), 판별식 정리의 연구를 하였으며, 비가환대수(非可換代數)의 연구로 다원수론(多元數論)을 전개하여 접합적(接合積)·갈루아이론·국소유체론(局所類體論)과 추상대수학의 중심 과제를 거의 포괄하는 업적을 남겼다.

 

뉴턴(1642.12.25~1727.3.20)

영국의 물리학자·천문학자·수학자·근대이론과학의 선구자. 잉글랜드 동부 링컨셔의 울즈소프 출생. 수학에서의 미적분법 창시, 물리학에서의 뉴턴역학의 체계 확립, 이것에 표시된 수학적 방법 등은 자연과학의 모범이 되었고, 사상면에서도 역학적 자연관은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아버지는 그의 출생 전에 사망하였고, 어머니는 그가 3세 때 재혼하는 등 불운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1661년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칼리지에 입학, 수학자 I.배로의 지도를 받아 케플러의 《굴절광학(屈折光學)》,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解析幾何學)》, 월리스의 《무한의 산수》 등을 탐독하였으며, 64년 학사학위를 얻었다. 64∼66년 페스트가 크게 유행하자 대학이 일시 폐쇄되어 뉴턴도 고향으로 돌아와 대부분의 시간을 사색과 실험으로 보냈다. 그의 위대한 업적의 대부분은 이때 싹트게 된 것이라고 하며, 사과의 일화도 이때 있었던 일이다. 67년 재개된 대학에 돌아와 이 대학의 펠로(특별연구원)가 되고 이듬해에는 메이저펠로(전임특별연구원)가 됨과 동시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69년 I.배로의 뒤를 이어 루카스교수직에 부임하였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의 최초의 강의도 광학(그 내용은 뉴턴 사후 《광학강의》로 1729년 출판되었다)이었으며, 초기 연구는 광학분야에서 두드러졌다. 광학에 대해서는 이미 울즈소프 시절부터 스스로 수집·정비한 실험기구를 이용해 빛의 분산현상을 관찰하였으며, 특히 굴절률과의 관계에 대하여 세밀히 조사하였다. 한편 망원경 제작도 연구, 굴절광은 스펙트럼을 만들지만, 반사광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기초로, 반사식(反射式)이 수차(收差:色收差도 포함)와 효율면에서 한층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68년 뉴턴식 반사망원경을 제작했다. 이 망원경은 천체관측 등에 크게 공헌하여 이 공적으로 72년 왕립협회회원으로 추천되었다. 그 해에 《빛과 색의 신이론(新理論)》이라는 연구서를 협회에 제출하였는데, 그 내용은 백색광이 7색의 복합이라는 사실, 단색(單色)이 존재한다는 사실, 생리적 색과 물리적 색의 구별, 색과 굴절률과의 관련 등을 논한 것이었다. 75년 박막(薄膜)의 간섭현상인 ‘뉴턴의 원무늬’를 발견하였으며, 빛의 성질에 관한 연구로 광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광학》(1704)을 저술했다. 수학에서는 65년 이항정리(二項定理)의 연구를 시작으로, 무한급수(無限級數)로 진전하여 66년 유분법(流分法), 즉 플럭션법을 발견하고, 이것을 구적(求積) 및 접선(接線) 문제에 응용하였다. 이것은 오늘날의 미적분법(微積分法)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성과를 69년에 논문 로 발표하였다. 유분법의 전개에 대해서는 에 수록되어 있다. 76년 그와 동일한 미분법을 발견한 라이프니츠와 우선권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졌는데, 이 무렵부터 그의 사고방식도 실험적 방법에서 수학적 방법으로 그 중점이 옮겨져 스스로를 수학자라고 하였다. 뉴턴의 최대 업적은 물론 역학(力學)에 있다. 일찍부터 역학 문제, 특히 중력(重力) 문제에 대해서는 광학과 함께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구의 중력이 달의 궤도에까지 미친다고 생각하여 이것과 행성(行星)의 운동(이것을 지배하는 케플러법칙)과의 관련을 고찰한 것은 울즈소프 체류 때 이루졌다고 한다. 70년대 말로 접어들면서 당시 사람들도 행성의 운동중심과 관련된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수학적 설명이 곤란해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는데, 뉴턴은 자신이 창시해낸 유율법(流率法)을 이용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확립하였다. 87년 이 성과를 포함한 대저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가 출판되었으며, 이로써 이론물리학의 기초가 쌓이고 뉴턴역학의 체계가 세워졌다. 3부로 된 이 라틴어 저서는 간단한 유율법의 설명에서 시작하여 역학의 원리, 인력의 법칙과 그 응용, 유체(流體)의 문제, 태양-행성의 운동에서 조석(潮汐)의 이론 등에 이르기까지 계통적으로 논술되어 있다. 또 방정식론 등의 대수학(代數學) 분야의 여러 업적은 《Arithmetica universalis sive de compositione et resolutione arithmetica liber》(1707)로 간행되었다. 88년 명예혁명 때는 대학 대표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고, 91년 조폐국(造幣局)의 감사(監事)가 되었으며, 96년 런던으로 이주, 99년 조폐국 장관에 임명되어 화폐 개주(改鑄)라는 어려운 일을 수행하였다. 1703년 왕립협회 회장으로 추천되고 1705년 나이트 칭호를 받았다. 한편 신학(神學)에도 관심을 보여 성서의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고대사 해석을 검증하고, 천문학적 고찰을 첨가해 연대기를 작성하였다. 이 성서 연구를 통해 삼위일체설을 부정하는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보냈으며, 런던 교외의 켄징턴에서 죽었다. 장례는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거행되고 그 곳에 묻혔다. 근대과학 성립의 최고의 공로자이며, 그가 주장한 ‘자연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라고 하는 역학적 자연관은 18세기 계몽사상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니코마코스(50~150?)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아라비아의 게라사 출생. 신(新)피타고라스 학파이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산술서 《산술입문》을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수론(數論)의 기초, 특히 수의 성질과 분류를 취급하고 있다. 중요한 것으로는, 세제곱수는 연속되는 모든 홀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법칙의 발견이 있다. 즉, 13=1, 23=3+5, 33=7+9+11,··· 이 책은 그 후 아풀레이우스, 보에티우스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되어, 중세에는 산술서로서 유클리드기하학과 함께 매우 높이 평가되었다. 음악에 관해서도 저서《화성학(和聲學)》을 남겼다.

 

다르부(1842.8.14~1917.2.23)

프랑스의 수학자. 파리에서 공부하며 C.에르미트의 지도를 받았다.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장기간 재직하면서 프랑스의 수학계를 이끌었으며 수학 및 천문학 잡지 《Bulletin des sciences math럐atiques et astronomiques》의 창간에 힘썼다. 19세기 초엽부터 기하학이 걸어온 좌표적·해석적 경향을 계승하여, 해석학과 상미분방정식론 또는 군론 등을 기초로 하여 기하학을 발전시켰으며, 그의 주요 저서인 《일반곡면론강의(一般曲面論講義)》(4권, 1887∼96)는 미분기하학의 명저로 알려져 있다. 곡면론과 미분방정식론의 관련, 도형의 연속적 변형, 가동좌표축(可動座標軸)의 도입, 허원소(虛元素)의 사용, 또 사원좌표(四圓座標), 오구좌표(五球座標)의 도입 등에서 창의성을 발휘하였고, 또 G.F.B.리만에 관한 이해도는 독일의 F.클라인과 비견된다고 한다. 그는 행정적·교육적 수완도 뛰어나 J.H.푸앵카레의 전기도 썼다.

 

달랑베르(1717.11.16~1783.10.29)

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철학자. 계몽사조기(啓蒙思潮期)를 대표하는 문인의 한 사람으로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며, 그 종신서기(終身書記)였다. 그는 섭정 오를레앙공(公) 시대에 저명한 살롱을 가진, 사교계의 꽃 드 탕생 후작부인의 사생아로 출생하여, 생후 곧 노트르담 성당 옆의 작은 교회 계단에 버려졌다 한다. 근처에서 살던 유리 직공 달랑베르의 아내가 주워다 길렀다. 그의 이름은 그가 20세 때 스스로 지은 이름이다. 그의 친아버지인 데투시 장군이 그를 경제적으로 돌보았고, 죽은 후 거액의 유산을 남겼으며 또 장군의 유력한 친지가 그를 비호하여 23세에 아카데미 회원에 선출되었다. 12세 때 콜레즈 드 카틀 나시옹에 입학하여 신학·법률·의학을 공부하였으나, 얼마 후 철학·수학·물리학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특히 역학(力學)에서는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주저 《역학론:Trait?de dynamique》(1743)은 26세 때 공간(公刊)한 것인데, 그는 이 저서에서 그 당시에 프랑스에서 주류를 이루던 데카르트주의를 배척하고, 물체와 그에서 독립된 공간을 생각하는 뉴턴주의의 입장을 취하였다. 또, 물체의 운동을 정역학(靜力學)의 경우와 같은 평형상태(平衡狀態)로 옮겨서 고찰하는 ‘달랑베르의 원리’를 설명하고, 역학의 일반화의 기초를 닦아 해석역학으로의 전개를 마련함으로써 역학발전의 한 단계를 이룩하였다. 이 밖에 세차(歲差)와 장동(章動)의 문제(49), 달의 운동론에 관련된 3체(三體)문제의 연구 등, 천체역학 방면에도 공헌하였다. 사상가로서도 계몽사상가의 중심인물로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였으며, 특히 D.디드로와 공동으로 편집·간행한 《백과전서》는 유명하다. 이 전서에서 수학·물리학·천문학 항목을 집필하였으며, 이 점은 백과전서파의 주장이었던 수학과 자연과학에 역점을 둔 데서 비롯되었으며, 이 《백과전서》의 주류를 이루는 부분이었다. 그가 쓴 서론 속에 이 취지를 강조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동시에 F.베이컨의 사상을 기초로 과학의 기원과 역사적 발전을 고찰하고, 과학의 분류를 시도함으로써 과학편(科學編)에 큰 전망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그의 철학적 입장은 감각적 인식론에 머물러 종교적 견해에는 많은 의문을 제시하면서도 디드로처럼 철저하지도 못해 일종의 물심이원론에 시종하였다.

 

데데킨트(1831.10.6~1916.2.12)

독일의 수학자. 브라운슈바이크 출생. 법학교수의 아들로 태어나 카롤린대학에서 수학하고 괴팅겐대학에 진학하여 M.A.슈테른, K.F.가우스, W.베버 등의 강의를 들었다. 또한 가우스의 후임이었던 디리클레의 영향도 받았다. 1854년 괴팅겐대학의 강사가 되었으며, 58년 취리히공과대학 교수를 거쳐 브라운슈바이크 고등기술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수학 활동은 넓은 의미의 ‘수(數)’ 전반에 걸친 거의 모든 영역에 미쳤으며, 추상성과 일반성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군(群)을 공리계(公理系)로 정의했던 초기의 연구에서도 이 경향은 명백했지만, 가장 유명한 역작인 《연속과 무리수》(1872)에서 풍족한 결실을 보였다. 여기에서 무한집합을 고찰하였고 절단개념(切斷槪念)의 도입으로 연속성을 규정하였으며, 무리수의 개념을 명확히 함으로써 해석학의 기초 수립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 밖에 이데알이라 불리는 집합의 소분해(素分解)의 연구로 대수적 수에 관한 이론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데자르그(1591.3.2~1661.10)

프랑스의 수학자. 리옹 출생. 건축가로서도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군(軍)의 건축기사로 일하였는데, 1628년 드 리슐리외경(卿) 휘하에서 라 로셸포위작전에 종군하였으나, 곧이어 파리로 은퇴하여 기하학을 연구하였다. 기술적인 투시도법의 이론면을 고찰하여 기하학에 무한원(無限遠)의 사상을 도입하고, 또 대응(對應)의 개념을 사용하여 사영적(射影的)으로 기하학적인 표시법의 체계를 건설하였다. 《원추곡선론》(1636)은 이러한 고찰을 근거로 원추곡선을 사영기하학적(射影幾何學的)으로 설명한 것으로서 근세 기하학의 기초를 이룩한 중요한 고전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러한 뛰어난 업적이 당시에는 극히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인정받지 못하고 사장되었다가 200년이 지난 1845년 M.샤를의 고서에서 발굴, 비로소 중요성이 재인식되었다. 그 사상은 파스칼이나 드라 히레 등에 의해 근세 기하학 전개에 영향을 끼쳤다. 또 건축가로서는 당시의 리옹시청사(市廳舍)를 설계했다. 작품으로는 《투시화법론:Trait?de la Section Perspective d’une atteinte aux럙럑ements des rencontres d’un c셬e avec un plan》(1636) 《평면과 원추와의 교합에 관한 연구계획 초안:Brouillon Project d’une atteinte aux evenements des rencontres d’un c퓆e avec unplan》(39) 《건축에서의 돌 절단법:La coupe des Pierres en I’architecture》(40) 등이 남아 있다.

 

데카르트(1596.3.31~1650.2.11)

프랑스의 철학자·수학자·물리학자. 투렌라에 출생. 근세사상의 기본틀을 처음으로 확립함으로써 근세철학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그는 세계를 몰가치적(沒價値的)·합리적으로 보는 태도(과학적 자연관)를 정신의 내면성의 강조(정신의 형이상학)와 연결지워 이를 이원론(二元論)이라고 하였다. 이원론은 동시에 근세사상 전체에 통하는 이원성의 표현이다. 프랑스 중부의 관료귀족 집안 출신으로 생후 1년 만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10세 때 예수회의 라 플레슈학원에 입학, 프랑수아 베롱에게 철학을 배웠다. 1616년 푸아티에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학교에서 배운 스콜라적 학문에 불만, 세상을 통해 배울 것을 결심하고 여행에 나섰다. 18년에는 지원장교로서 네덜란드군에 입대했다. 수학자 베이크만과 알게 되어, 물리수학적 연구에 자극을 받아 ‘보편수학(普遍數學)’의 구상에 이르렀다. 20년 군대를 떠나 유럽 각지를 전전하다가 25년부터 파리에 체재, 광학(光學)을 연구한 끝에 ‘빛의 굴절법칙’을 발견하였다. 29년 이후에는 네덜란드에 은거하며 철학연구에 몰두하여 형이상학 논문 집필에 종사하였으나, 같은해 3월 제자로부터 환일(幻日) 현상의 해명을 요청받고 중도에 자연연구로 전향, 결국 자연학(自然學)을 포괄하는 《우주론:Le Trait?de la monde》의 구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 논문의 완성단계에 G.갈릴레오의 단죄사실(斷罪事實)을 듣고, 지동설을 주내용으로 한 이 책의 간행을 단념, 그 대신 37년 《방법서설(方法敍說):Discours de la m럗hode》 및 이를 서론으로 하는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의 세 시론(試論)을 출간하였다. 41년 형이상학의 주저 《성찰록: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44년에는 《철학의 원리:Principia philosophiae》를 출간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데카르트 사상의 혁신성이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 ‘자유로운 나라’였던 네덜란드도 캘빈파(派) 신학자들의 박해로 살기 어려운 곳이 되었다. 그 무렵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49년 가을 스톡홀름으로 가서 지내던 중 폐렴에 걸려 생애를 마쳤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카르트는 수학자로서는 기하학에 대수적 해법을 적용한 해석기하학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물체에는 무게라는 실재적 성질이 있기 때문에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하는 스콜라적 자연학에 만족하지 못하고, 물리 수학적 연구를 통하여 물질, 즉 연장(延長)이라는 기계론적 자연관으로 이끌려 갔다. 그의 형이상학적 사색은 이른바 방법적 회의(懷疑)에서 출발한다. 학문에서 확실한 기초를 세우려 하면, 적어도 조금이라도 불확실한 것은 모두 의심해 보아야 하는데, 세계의 모든 것의 존재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치더라도 이런 생각, 즉 의심을 하는 자신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근본원리가 《방법서설》에서 확립되어, 이 확실성에서 세계에 관한 모든 인식이 유도된다. 의심하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에서 무한히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이 결과할 리가 없다는 데서 신의 존재가 증명되고, 신의 성실이라는 것을 매개로 하여 물체의 존재도 증명된다. 더욱이 정신은 사고하는 것만으로, 다시 말하면 신체 없이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심신의 실재적 구별도 확정된다. 이리하여 정신과 물체가 서로 독립된 실체로 세워지고 이 물심이원론에 의해 기계론적 자연관의 입장의 기초가 마련된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심신결합의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도덕의 문제를 풀 수 없기 때문에, 이 물심분리와 심신결합의 모순 조정에 데카르트 이후 형이상학의 주요한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디리클레(1805.2.13~1859.5.5)

독일의 수학자. 뒤렌 출생. 정수론(整數論)·급수론(級數論)·수리물리학 등에 공헌하였다. 프랑스에서 이주해 온 집안의 아들로 파리에서 수학(修學)하고 당시 그 곳 수학의 대가들을 만났는데, 특히 J.J.푸리에와 친하게 지냈다. 훔볼트의 초청을 받아 독일의 여러 대학에서 수학을 강의하고, 1839년 베를린대학 교수, 그 후 55년 K.F.가우스의 후임으로 괴팅겐대학 교수가 되었다. 연구 방면에서도 가우스가 구축해 놓은 정수론을 계승, 이것을 심화부연(深化敷衍)하는 공적을 남겼다. 어떤 조건 밑에서 산술급수가 무한의 소수(素數)를 포함한다는 정리를 비롯하여, 디리클레의 급수를 제시하고 이것을 정수론에 응용함으로써 해석적 정수론을 창시하는 등, 그 자신의 정수론에 대한 공헌도 대단했다. 한편 전문가들도 어렵다는 가우스의 《정수론》을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한 공적도 높이 평가되었다. 그 외에도 푸리에급수를 써서 함수의 근대적 개념 성립에 공헌하였고, 또 경계값 문제에서는, 이른바 ‘디리클레의 문제’를 다루어 퍼텐셜론(論)을 정밀화하는 등 여러 방면에 업적을 남겼다. 또, 명강의로도 유명하여 그의 강의 스타일은 후에 독일 각 대학의 강의 형식의 기초가 되었다. 주요저서인 《정수론으로의 미분적분학의 여러 응용에 관한 연구》(1839)는 오늘날의 해석적 정수론의 기원이 되었다.

 

드로비슈(1802.8.16~1896.9.30)

독일의 철학자·수학자. 라이프치히 출생. J.헤르바르트의 제자이자 1842년 라이프치히대학 교수이다. 논리학적으로는 형식논리학에서 존재와 사유(思惟)의 일치로서의 형이상학적 논리학으로 이행(移行)하고, 심리학적으로는 수학적 심리학의 입장에 섰다. 주요저서는 《신논리학:Neue Darstellung der Logik nach ihren einfachsten Verh둳tnissen》(1836) 《헤르바르트의 철학체계:Beitr둮e zur Orientierung 웑er Herbarts System der Philosophie》(43) 《수학적 심리학:Erste Grundlinien der mathematischen Psychologie》(50) 등이다.

 

드모르간(1806.6.27~1871.3.18)

영국의 수학자·논리학자·서지학자(書誌學者). 인도 마두라 출생.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하고, 1828년 22세의 나이로 신설된 런던대학 수학 교수에 취임, 명강의로 이름을 떨쳤다. 66년 교수직을 사임하고 스스로 수학협회를 창설, 초대 회장이 되었다. 수학자로서는 연구 주제를 엄밀한 기초 위에 둘 것을 강조하였고, 특히 집합연산의 기초적 법칙을 발견했는데 이 법칙은 그의 이름을 따서 ‘드모르간의 법칙’이라 한다. 근대적인 대수학(代數學)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특히 논리학적 측면을 개척하여 선각자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확률론에도 공헌하였다. 38년에는 ‘수학적 귀납법’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경험과학과 수학적 증명에서의 귀납법의 차이점을 강조하였다. 기지(機智)가 뛰어난 능변가이자 문장가로서도 유명하여 철학자 W.해밀턴과의 논쟁은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그는 수학·수학사상의 보급에 기여하였고, 산술·초등대수·유클리드기하학 등을 계몽하기 위하여 알기 쉬운 해설로 책을 저술하여 수학교육 혁신에 이바지하였다. 주요저서로는 《산술원론(算術原論)》(1831) 《대수원론(代數原論)》(35) 《대수학의 기초에 관하여》(41,47) 등이 있다.

 

드무아브르(1667.5.26~1754.11.27)

프랑스 출신의 영국 수학자. 위그노교도였기 때문에 1685년 낭트 칙령의 폐지에 따라서 프랑스를 떠나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에서 가정교사로 생계를 꾸려갔다. 런던에서는 I.뉴턴 등과 친교를 맺고 97년 영국학사원 회원, 그 후에는 베를린·파리의 아카데미 회원에 선출되었다. 주요업적으로는 3각법에 관한 기본정리로서 ‘드무아브르의 정리’로 알려진 법칙과 확률론에 있어서의 정규확률곡선의 발견이 있고, 보건수학(保健數學) 분야에서도 연금에 관한 연구를 남겼다. 주요 저서로는 《우연의 교의(敎義):The Doctrine of Chances》(1917) 《해석잡론(解析雜論)》(30) 등이 있다.

 

디리클레(1805.2.13~1859.5.5)

독일의 수학자. 뒤렌 출생. 정수론(整數論)·급수론(級數論)·수리물리학 등에 공헌하였다. 프랑스에서 이주해 온 집안의 아들로 파리에서 수학(修學)하고 당시 그 곳 수학의 대가들을 만났는데, 특히 J.J.푸리에와 친하게 지냈다. 훔볼트의 초청을 받아 독일의 여러 대학에서 수학을 강의하고, 1839년 베를린대학 교수, 그 후 55년 K.F.가우스의 후임으로 괴팅겐대학 교수가 되었다. 연구 방면에서도 가우스가 구축해 놓은 정수론을 계승, 이것을 심화부연(深化敷衍)하는 공적을 남겼다. 어떤 조건 밑에서 산술급수가 무한의 소수(素數)를 포함한다는 정리를 비롯하여, 디리클레의 급수를 제시하고 이것을 정수론에 응용함으로써 해석적 정수론을 창시하는 등, 그 자신의 정수론에 대한 공헌도 대단했다. 한편 전문가들도 어렵다는 가우스의 《정수론》을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한 공적도 높이 평가되었다. 그 외에도 푸리에급수를 써서 함수의 근대적 개념 성립에 공헌하였고, 또 경계값 문제에서는, 이른바 ‘디리클레의 문제’를 다루어 퍼텐셜론(論)을 정밀화하는 등 여러 방면에 업적을 남겼다. 또, 명강의로도 유명하여 그의 강의 스타일은 후에 독일 각 대학의 강의 형식의 기초가 되었다. 주요저서인 《정수론으로의 미분적분학의 여러 응용에 관한 연구》(1839)는 오늘날의 해석적 정수론의 기원이 되었다.

 

디오판토스(246?~330?)

3세기 후반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했던 그리스의 수학자. 대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주저 《산수론(算數論) Arithmetica》은 13권 중 6권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주로 1차부터 3차까지의 정방정식과 부정방정식의 문제와 해법이 다루어져 있다. 특히, 해법의 부정해석(不定解析)은 디오판토스의 해석이라고 불린다. 그는 마이너스(-)·미지량(未知量)·상등(相等)·거듭제곱 등의 기호를 조직적으로 채용했다. 그의 《산수론》은 아라비아어(語)로 번역되어 그곳 학자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뒤에 라틴어로 번역되어 중세 말기에 유럽으로 전파되어 대수학 발달에 공헌했다. 저서 중 ‘주어진 제곱수를 2개의 제곱수로 나누어라’라는 문제는 뒤에 페르마에게 영향을 끼쳐, 페르마의 정리가 되었다고 한다.

 

라그랑주(1736.1.25~1813.4.10)

프랑스의 수학자·천문학자. 이탈리아의 토리노 출생. 19세 때 그곳 왕립육군학교 수학 교수가 되었다. 1766년 프리드리히(2세) 대왕에게 초청되어 L.오일러의 후임으로 베를린 과학아카데미 수학부장에 취임하였다. 대왕 서거 후 87년 파리로 이사하여 혁명정부의 미터법 제정위원장으로 일하였다. 95년 신설된 고등사범학교(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의 교수가 되고, 그 후 파리의 이공과대학 초대 학장이 되었다. 학문적인 초기의 업적에는 등주문제(等周問題)에서 시작한 변분법(變分法)이 있으나, 이것은 오일러의 방법을 순수하게 해석적인 것으로 발전시킨 방법으로, 라그랑주는 이 변분법을 역학의 여러 문제에 응용하였다. 그가 해명한 해석역학은, I.뉴턴의 미적분에 의한 운동방정식이 확립된 후 100년만의 일로, 그때까지 발전한 해석학을 역학에 응용한 것이며, 그의 저서 《해석역학》(1788)에 의해, 역학은 하나의 새로운 발전의 단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라그랑주의 해석역학에 의한 운동방정식은 뉴턴의 방법에 비해 보다 일반적으로 운동의 미분방정식을 유도할 수 있다. 대수(代數)에 있어서의 그의 일반화 방향은 5차 이상의 대수방정식 해법에 대한 연구로서, 이 연구는 근(根)의 치환군(置換群)에 착안한 것으로, N.H.아벨과 E.갈루아의 업적의 선구자 역할을 한 것이다. 이 외에도 정수론·타원함수론·불변식론(不變式論) 등에 관해 많은 연구 업적이 있으며, 천체역학 분야에도 기여하였다. 특히 삼체문제(三體問題)의 연구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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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카르트 : 허수와 좌표 평면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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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차나 그런건 알아서 해야죠 보나마나 숙제겟져?

숙제는 혼자하는게 조아여

미래를 생각해서 혼자하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명한 수학자 열두명만 소개해주세요

유명한 수학자 열두명만 소개해주세요~ 업적이나 발견한 공식 공식의 예 뭐 이정도만 설명해주시면 되요^.^ 부탁드립니다~ 유명한 수학자 가르베르스(1898.5.16) 독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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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수학자 5명만 알려주세요 근데요 제가 찾아본걸 한번 쭉 읽어보니까... 형제의 소개로, 처음에는 그 학사원의 의학부에 이어서 수학부에 적을 두었다. 1740년...

유명한 수학자 알려주세요 .

유명한 수학자를 조사해가야되는데 .. 한 3~4명이면 되요 .. 이런형식으로 써주세요. (이름) (생애) (업적) 가우스... 유클리드를 소개하고 몇 가지 정리를 증명하기도...

유명한 수학자 알려주세요

유명한 수학자 알려주세요 정말 많이 유명한 사람으로 알고싶네요... 알랑베르의 소개로 《백과전서》의 제작에 참여한 일이 있다. 아벨[ Niels...

유명한 수학자 4명을 알려주세요!

... 저희 학교 방학숙제가 수학자 4명을 조사해 오는... 특별히 유명하다. 정수론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그... 그가 피사로 돌아왔을때 그는 그 체계를 유럽에 소개하였...

역사적으로 유명한 수학자들~~

역사적으로 유명한 수학자들 업적와 이론좀 알려주세요.... 그리 많지 않아도 되고요......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벤다이어그램은 집합 사이의 관계를 도식화하는 도구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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