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1에 알맞은 수학자 5명만~(내공 있음)

중 1에 알맞은 수학자 5명만~(내공 있음)

작성일 2006.07.09댓글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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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1이 배우는 수학과정에 관련된 수학자 5명만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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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칸토어 - 집합론을 창시한 사람입니다. 중학교 1학년 처음 들어갔을 때 배운 집합 단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만하임 출생. 1877년 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가 되었다. 저서 《수학사() Vorlesungen über Geschichte der Mathematik》(1880∼1908)는 그가 친필로 쓰고 감수()한 고대에서 18세기까지의 제1~3권과 9인의 수학사가가 집필한 제4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표적인 수학사의 저서로 알려졌다. 이 밖에 《수학사론집() Abhandlungen zur Geschichte der Mathematik》(1877∼1912)을 편집 ·창간하였다.

 

2) 벤 - 역시 집합과 관련된 수학자 입니다. 벤다이어그램을 만든 사람이죠^^ 벤다이어그램은 집합 문제를 풀 때 많이 쓰이는 거 아시죠?

 

벤은 벤다이어그램으로 유명한 영국 수학자이다.

잉글랜드의 훔버사이드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열아 홉이 되던 해인 1853년 케임브리지의 카이우스 칼리지에 입학했다. 그는 칼리지에 입학할 당시만 해도 수학과 관련된 특별한 지식도 별로 없었다. 1857년 졸업과 동시에 특별 연구원이 되었다. 벤은 영국국교의 복음파라는 종교 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졸업 2년후인 1859년에는 사제로 임명받고 1년간 부목(副牧)으로 있었다. 1862년에는 다 시 케임브리지대학으로 돌아와 윤리학을 강의하게 된다.

이 시기 벤은 논리학과 확률론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벤은 불(George Boole)의 기호논리학을 발전시켰고 그의 책 "가능성의 논리"에서는 확률이론을 연구했다. 이 책은 매우 독창적이고 통계이론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의 유명한 벤다이어그램은 1880년 논문 "명제와 논리의 도식적, 역학적 표현에 관하여"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벤다이어그램은 집합 사이의 관계를 도식화하는 도구로서 개발된 것이다. 이 논문은 여러 철학잡지와 과학저널에 소개되었다. 형식논리에 있어 도형이나 도표(다이어그램)를 사용한 역사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틀림없는 사실은 이런 다이어그램이 벤과 관련되어 있다고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벤 이전 에도 다이어그램을 사용한 흔적은 있지만 구체적이고 논리적으로 엮은 것은 벤의 몫이었다. 1881년에는 그의 논리 학관련 첫 책인 "기호논리학"이 출판되기도 했다. 기호논리학에는 그의 논리학에 관한 모든 업적이 총망라되어 있 다고 평해진다. 1889년에는 "경험논리의 원리"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한편 1883년 벤은 영국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기에 이른다. 이즈음 벤은 새로운 방향으로 자신의 관심사를 선회 한다. 1870년 이미 교회를 떠났던 그의 관심이 역사로 바뀐 것이다. 벤은 자신의 칼리지 역사에 관한 책을 저술했 다. 그후 그는 캠브리지 대학의 역사서를 엮는 방대한 작업을 시작했다. 1822년 첫권을 출판한 것을 비롯해 세권 을 완성했는 데, 그의 작업은 뒤이어 계속돼 현재 여덟권의 케임브리지 사서(史書)가 편찬되었다.

벤은 기계제작 등에도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는 등 다른 분야의 재주도 출중했다. 한 예로 크리켓볼을 굴리는 기 계를 제작했는 데 성능이 뛰어났다고 한다. 1909년 호주의 크리켓 경기팀이 케임브리지를 방문했을 때 벤의 기계 가 네 번이나 최고수를 이겼다고 한다.

혹자는 벤을 수학적 업적이 전혀 없는데도 벤다이어그램이란 별 것 아닌 도안 하나로 유명해졌다고 비판한다. 하 지만 벤다이어그램이 논리학에 남긴 족적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리고 논리학과 수학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수학이 논리적 엄밀성과 객관성을 가진 학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추상적인 수학을 그림으 로 구체시킨다는 장점이 있다. 어쨌든 벤은 수학사에 이름을 확연히 남긴 것만을 틀림없다.

 

3)에라토스테네스 - 집합 중 자연수의 성질에 관련된 수학자 입니다. 그 단원에서 소수라는 것에 대해 배우는 데요.  소수를 걸으는 체에 대해서 배웠었죠? 그 체가 바로 에라토스테네스의 체라고 합니다.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는 지중해의 남쪽 연안에 있는 키레네(Cyrene)에서 태어났으며 나이는 아르키메데스보다 몇 살쯤 아래였다.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아테네에서 보내고 약 40세쯤 되었을 때 이집트톨레미 3세의 초청으로 알렉산드리아로 와서 그의 아들의 개인교수로 일했고 또 알렉산드리아 대학의 도서관장을 지내기도 했다. 기원전 194년경 노인이 되었을 때 눈병 때문에 거의 장님이 되다시피하여, 결국 스스로 단식하여 자살하고 말았다.

 에라토스테네스는 당시의 지식의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는데 수학자, 천문학자, 지리학자, 역사학자, 철학자, 시인, 하물며 운동가로서까지 명성을 날렸다. 알렉사드리아 대학의 학생들은 그를 5종 경기의 침피언인 '펜타슬루스'(Pentathlus) 라고 불렀다. 그는 또 '베타'(Beta)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이 별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많다. 어떤 사람들은 이 '베타'라는 별명이 그의 광범위하고 뛰어난 지식이 그를 제 2 의 플라톤으로 간주할 만한 것이었지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고 또 한 편으로 그가 많은 분야에서 뛰어나긴 했지만 어떤 한 분야에서도 항상 동시대이늬 1인자가 되지 못하고 2인자였기 때문에 그를 '베타'라고 불렀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에 아폴로니우스(페르가의 아폴로니우스와 동명이인)라는 학자가 '엡실론'(Epsilon)으로 불렸다는 것을 보면 이는 다소 신빙성이 없는 주장처럼 보인다. 그래서 역사학자 제임스 고우(James Gow)는 아마도 베타와 엡실론은 단순히 그리스 숫자(2와5)로부터 유래된 것으로서 그 숫자는 그들 두 사람과 관계된 대학의 사무실이나 강의실 번호일 것이라고 주장 하였다. 한편 헤라에스티오(Ptolemy Hephaestis)는 아폴로니우스가 주로 달을 연구했는데 문제 ε 이 달을 상징하므로 그는 엡실론으로 불렀을 것이라고 주정하기도 했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산술분야에서 n보다 작은 모든 소수를 발견하는 다음 방법을 생각해냈는데 흔히 이를 '체'라고 부른다. 우선 3부터 시작하여 n보다 작은 홀수를 다 쓴다. 그런 다음 3으로 부터 매 세 번째 수를 모두 지우고 다시 5로부터 매 다섯 번째 수를 모두 지우고 다시 7로부터 매 일곱 번째 수를 모두 지우고 또 11로 부터 매 열한 번째 수를 모두 지우고 이런 식으로 계속해 간다. 이 때 어떤 수는 두 번 이상 지워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남는 수에 2를 첨가하면 n보다 작은 모든 소수를 얻게 된다.

 

4) 디오판토스 - 일차방정식 관련된 수학자 입니다. 디오판토스의 묘비라고 해서 디오판토스가 죽을 때 자기 생애에 대해서 묘비에 방정식 문제를 새겼습니다.


 3세기 후반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 했던 그리스의 수학자. 대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주저 《산수론(算數論) Arithmetica》은 13권 중 6권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주로 1차부터 3차까지의 정방정식
부정 방정식의 문제와 해법이 다루어져 있다. 특히, 해법의
부정 해석(不定解析)은 디오판토스의 해석이라고 불린다. 그는 마이너스(-)·미지량(未知量)·상등(相等)·거듭제곱 등의 기호를 조직적으로 채용했다. 그의 《산수론》은 아라비아어(語)로 번역되어 그곳 학자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뒤에 라틴어
번역 되어 중세 말기에 유럽으로 전파 되어 대수학 발달에 공헌했다. 저서 중 ‘주어진 제곱수를 2개의 제곱수로 나누어라’라는 문제는 뒤에 페르마에게 영향을 끼쳐, 페르마의 정리가 되었다고 한다.

디오판토스의 묘비에는 그의 인생 역정을 수수께끼로 묘사한 글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신의 축복으로 태어난 그는 인생의 1/6을 소년으로 보냈다.

그리고 다시 인생의 1/12이 지난 뒤에는 얼굴에 수염이 자라기 시작했다.

다시 1/7이 지난 뒤 그는 아름다운 여인을 맞이하여 화촉을 밝혔으며,

결혼한지 5년만에 귀한 아들을 얻었다. 아! 그러나 그의 가엾은 아들은

아버지의 반밖에 살지 못했다. 아들을 먼저 보내고 깊은 슬픔에 빠진

그는 그 뒤 4년 간 정수론에 몰입하여 스스로를 달래다가 일생을 마쳤다.

디오판토스가 살다간 햇수를 x이라고 하자.

우리는 그의 묘비에 적힌 서술에 따라 그의 인생 역정을 다음과 같이 세분할 수 있다.

생의 x/6동안 소년이었다. x/12동안은 청년이었으며,

그후 x/7을 더 보낸 뒤에 결혼하였다. 결혼 후 5년만에

아들을 낳았으나, 아들은 아버지의 반(x/2)밖에 살지 못했다.

아들을 먼저 보낸 후 슬픔 속에서 4년을 더 살다가 그의 생을 마감했다.

디오판토스의 나이는 위의 기간들을 모두 더한 것이므로

x =
x/6 + x/12 + x/7 + 5 + x/2 + 4

라는 방정식을 얻게 된다. 이 식의 우변을 계산하면,

x = 25x/28 + 9

이 되고 동류항을 정리하여 x을 구하면,

3x/28 = 9

x =
84

를 얻는다, 따라서 디오판토스가 죽었을 때, 그의 나이는 향년 84세였다

 

5) 데카르트 - 함수와 순서쌍에서 좌표 부분을 중1 때 처음 배우죠. 그 좌표를 처음 만든 사람이 바로 데카르트 입니다.

 

투렌라에 출생. 근세사상의 기본틀을 처음으로 확립함으로써 근세철학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그는 세계를 몰가치적()·합리적으로 보는 태도(과학적 자연관)를 정신의 내면성의 강조(정신의 형이상학)와 연결지어 이를 이원론()이라고 하였다. 이원론은 동시에 근세사상 전체에 통하는 이원성의 표현이다. 프랑스 중부의 관료귀족 집안 출신으로 생후 1년 만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10세 때 예수회의 라 플레슈학원에 입학, 프랑수아 베롱에게 철학을 배웠다. 1616년 푸아티에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학교에서 배운 스콜라적 학문에 불만, 세상을 통해 배울 것을 결심하고 여행에 나섰다. 1618년에는 지원장교로서 네덜란드군에 입대했다. 수학자 베이크만과 알게 되어, 물리수학적 연구에 자극을 받아 ‘보편수학()’의 구상에 이르렀다. 1620년 군대를 떠나 유럽 각지를 전전하다가 1625년부터 파리에 체재, 광학()을 연구한 끝에 ‘빛의 굴절법칙’을 발견하였다.

1629년 이후에는 네덜란드에 은거하며 철학연구에 몰두하여 형이상학 논문 집필에 종사하였으나, 같은해 3월 제자로부터 환일() 현상의 해명을 요청받고 중도에 자연연구로 전향, 결국 자연학()을 포괄하는 《우주론 Le Traitéde la monde》의 구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 논문의 완성단계에 G.갈릴레이의 단죄사실()을 듣고, 지동설을 주내용으로 한 이 책의 간행을 단념, 그 대신 1637년 《방법서설() Discours de la méhode》 및 이를 서론으로 하는 《굴절광학》《기상학》《기하학》의 세 시론()을 출간하였다.

1641년 형이상학의 주저 《성찰록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1644년에는 《철학의 원리 Principia philosophiae》를 출간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데카르트 사상의 혁신성이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 ‘자유로운 나라’였던 네덜란드도 캘빈파() 신학자들의 박해로 살기 어려운 곳이 되었다. 그 무렵 스웨덴크리스티나 여왕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1649년 가을 스톡홀름으로 가서 지내던 중 폐렴에 걸려 생애를 마쳤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카르트는 수학자로서는 기하학에 대수적 해법을 적용한 해석기하학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물체에는 무게라는 실재적 성질이 있기 때문에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하는 스콜라적 자연학에 만족하지 못하고, 물리 수학적 연구를 통하여 물질, 즉 연장()이라는 기계론적 자연관으로 이끌려 갔다. 그의 형이상학적 사색은 이른바 방법적 회의()에서 출발한다.

학문에서 확실한 기초를 세우려 하면, 적어도 조금이라도 불확실한 것은 모두 의심해 보아야 하는데, 세계의 모든 것의 존재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치더라도 이런 생각, 즉 의심을 하는 자신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근본원리가 《방법서설》에서 확립되어, 이 확실성에서 세계에 관한 모든 인식이 유도된다. 의심하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에서 무한히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이 결과할 리가 없다는 데서 신의 존재가 증명되고, 신의 성실이라는 것을 매개로 하여 물체의 존재도 증명된다.

더욱이 정신은 사고하는 것만으로, 다시 말하면 신체 없이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심신의 실재적 구별도 확정된다. 이리하여 정신과 물체가 서로 독립된 실체로 세워지고 이 물심이원론에 의해 기계론적 자연관의 입장의 기초가 마련된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심신결합의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도덕의 문제를 풀 수 없기 때문에, 이 물심분리와 심신결합의 모순 조정에 데카르트 이후 형이상학의 주요한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6) 아르키메데스 - 이건 2학기 때나오는 건데요. 원기둥, 구, 원뿔의 부피에 관련되어 있습닌다.

 

시칠리아섬시라쿠사 출생. 천문학자 피디아스의 아들로 태어나, 젊어서부터 기술에 재능이 있어, 그가 만든 수력천상의()는 극히 정밀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집트에 유학 중 나선()을 응용해 만든 양수기는 ‘아르키메데스의 나선식펌프’로 불리며, 지금도 관개용 등에 쓰이고 있다. 당시 문화의 중심이던 알렉산드리아의 대()연구소 무세이온에서 수학자 코논(Conon:BC 260년경 활약)에게 기하학을 배우고 시라쿠사로 돌아와 많은 수학서()를 썼다. 아르키메데스에 얽힌 일화 가운데는 그가 지렛대의 원리 응용에 뛰어난 기술자였다는 사실과 관계되는 것이 많다. 지렛대의 반비례 법칙을 발견한 그는 시라쿠사왕 히에론 앞에서 “긴 지렛대와 지렛목[]만 있으면 지구라도 움직여 보이겠다”고 장담하였다.

왕이 해변 모래톱에 올려놓은 군함에 무장병을 가득 태우고 이것을 물에 띄우라 하였더니, 아르키메데스는 지렛대를 응용한 도르래를 써서 이를 쉽게 해냈다. 또 하루는 왕이 갓 만든 금관을 구했는데, 그것이 위조물로 순금이 아니고 은이 섞였다는 소문을 들었다. 왕은 아르키메데스에게 명하여 그것을 감정하라고 하였다. 생각에 골몰한 아르키메데스가 우연히 목욕탕에 들어갔을 때 물 속에서는 자기의 몸의 부피에 해당하는 만큼의 무게가 가벼워진다는 것을 문득 알아냈다. 흥분한 그는 옷도 입지 않은 채 목욕탕에서 뛰어나와 “알아냈다, 알아냈다(Heurēka!, Heurēka!)”라고 외치며, 집으로 달려가 그 금관과 같은 분량의 순금덩이를 물 속에서 달아 본즉 저울대는 순금덩이 쪽으로 기울어 금관이 위조품인 것을 알아내었다. 그는 이 원리을 응용하여 유명한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발견하였다. 즉 위조왕관에는 은이 섞여 있어 같은 무게의 순금보다도 부피가 크고 따라서 그만큼 부력()도 커진다는 것이다.

지중해의 패권을 둘러싼 3차에 걸친 로마카르타고의 전쟁 중 제2차 포에니전쟁(BC 218∼BC 201) 때 시라쿠사는 카르타고의 편을 들어 로마군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게 되었다. 이 때, 아르키메데스는 이미 70세를 넘은 고령이었지만, 이 위기를 구하기 위하여 각종 투석기 ·기중기 등 지렛대를 응용한 신형무기를 고안하여 로마의 대군을 크게 괴롭혔다. 수년 후 시라쿠사가 함락되던 날,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단순한 기술자가 아닌 기하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그날 아르키메데스는 뜰의 모래 위에 도형을 그리며 기하학의 연구에 몰두하고 있던 중, 다가오는 사람 그림자가 로마 병사인 줄도 모르고 “물러서거라, 내 도형()이 망가진다”고 외쳤다. 그러나 로마병사는 그를 몰라보고 그의 목을 쳤다. 또 만년에 죽은 뒤 건립하도록 유언된 그의 묘에는 뜻밖에도 구()에 외접()하는 원기둥의 도형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그가 고심 끝에 발견한 정리() “구에 외접하는 원기둥의 부피는 그 구 부피의 1.5배이다”라는 것을 나타낸 것이었다.

한편, 아르키메데스는 유클리드 등 다른 기하학자들과는 달리 기하학의 문제를 푸는 데도 역시 지렛대의 원리를 사용하였다. 즉 동질()의 구와 원기둥을 만들고 이것을 저울에 달아 후자는 전자의 1.5배의 무게가 있음을 미리 알아 두고, 그 다음 이것을 귀류법()을 써 기하학적으로 증명하는 방법을 썼다. 같은 방법에 의한 다른 정리의 발견, 예컨대 포물선에 둘러싸인 넓이는 그와 동일한 밑변과 동일한 높이의 내접삼각형의 4/3배라는 것 등에도 사용되었다. 그는 기하학을 기술과 연결지은 학자로서 더 나아가 원주율이라든가, 우주의 크기를 나타내는 기수법() 등, 수학을 널리 실제문제 해결에 연결지음으로써 한층 더 그리스수학을 진전시킨 학자였다. 저작으로는 《평면의 균형에 대하여》 《포물선의 구적()》 《구()와 원기둥에 대하여》 《소용돌이선[]에 대하여》 《코노이드(conoid)와 스페로이드(spheroid)》 《부체()에 대하여》 《원()의 측정에 대하여》 《모래 계산자()》 《가축문제() 기타》 등이 알려져 있다.

 

7) 오일러 - 이것도 2학기 때 나오는 건데요. 입체도형에 관련된 공식입니다.

v (점의개수) - e (변의개수) +f (면의개수) = 2  라고 나오네요^^

 

바젤 출생. 주로 독일·러시아학사원을 무대로 활약하였고, 해석학의 화신(), 최대의 알고리스트(algorist:) 등으로 불렸다. 그의 연구는 수학·천문학·물리학뿐만 아니라, 의학·식물학·화학 등 많은 분야에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 처음에는 목사가 되기 위하여 바젤대학에서 신학과 헤브라이어를 공부하였으나, 수학에서 J.베르누이의 관심을 끌어 곧 D.베르누이, N.베르누이와 사귀었다. 이와 같이 베르누이가() 사람들의 조언과 상트페테르부르크학사원에 간 베르누이 형제의 소개로, 처음에는 그 학사원의 의학부에 이어서 수학부에 적을 두었다.

1740년 프리드리히대왕의 초청을 받아 베를린으로 이주하였다. 그 후 24년간 베를린학사원의 수학부장으로서 연구에 몰두하였으나 점차 궁정에서의 인기가 떨어져 다시 예카테리나 여제()의 청을 받자 1766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후에 시력을 잃고 장님이 되었으나 천부적인 기억력과 강인한 정신력으로 연구를 계속하였다. 수학자로서의 연구를 시작한 시기는 뉴턴이 죽은 시기에 해당하여 해석기하학·미적분학의 개념은 갖추어져 있었으나 조직적 연구는 초보단계로 특히 역학·기하학의 분야는 충분한 체계가 서 있지 않았다.

이러한 미적분학을 발전시켜 《무한해석 개론 Introduction in Analysis Infinitorum》(1748) 《미분학 원리 Institutiones Calculi Differontial》(1755) 《적분학 원리 Institutiones Calculi Integrelis》(1768∼1770), 변분학(:극대 또는 극소의 성질을 가진 곡선을 발견하는 방법)을 창시하여 역학을 해석적으로 풀이하였다.

이 밖에도 대수학·정수론()·기하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 큰 업적을 남겼다. 그 중에도 삼각함수의 생략기호(sin, cos, tan)의 창안이나 ‘오일러의 정리’ 등은 널리 알려져 있다. 베를린 시대에 프리드리히대왕의 질녀에게 자연과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쓴 《독일 왕녀에게 보내는 편지》는 당시 계몽서로서 유명하였으며 7개 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1)~5) 수학자 까지는 중학교 1학년 1학기 부분이구요. 6)~7)은 2학기 부분입니다.

막 생각나는 사람들이 ㅎㅎ 이 사람들 뿐이네요^^

 

그럼 꼭 많은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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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수학자들은

1.  벤 (벤다이어 그램으로 유명한 영국의 수학자)

2.  아르키메데스 (파이-3.14...를 최초로 정리하고,  부력의 법칙을 발견한 수학자)

3.  피타고라스(피타고라스의 정리)

4.  (이건 참고로 하시라고..) 군터→싸인 코싸인발견 / 핑케→탄젠트 발견

5.  디오판토스 (디오판토스의 방정식)

 →디오판토스는 그의 업적과 더불어 묘비에 새겨진 글귀로 더욱 유명하다. 그의 묘비에는 .. 

"이 무덤 아래 디오판토스 잠들다. 이 경이에 찬 사람, 여기잠든이의 기예의 힘을 빌어 여기에 그의 나이를 적는다. 

x/6+x/12+x/7+5+x/2+4=x

이것을 풀면 x=84 이다. 즉, 84살까지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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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투렌라에 출생. 근세사상의 기본틀을 처음으로 확립함으로써 근세철학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그는 세계를 몰가치적·합리적으로 보는 태도(과학적 자연관)를 정신의 내면성의 강조와 연결지어 이를 이원론이라고 하였다. 이원론은 동시에 근세사상 전체에 통하는 이원성의 표현이다. 프랑스 중부의 관료귀족 집안 출신으로 생후 1년 만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10세 때 예수회의 라 플레슈학원에 입학, 프랑수아 베롱에게 철학을 배웠다. 1616년 푸아티에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학교에서 배운 스콜라적 학문에 불만, 세상을 통해 배울 것을 결심하고 여행에 나섰다. 1618년에는 지원장교로서 네덜란드군에 입대했다. 수학자 베이크만과 알게 되어, 물리수학적 연구에 자극을 받아 ‘보편수학’의 구상에 이르렀다. 1620년 군대를 떠나 유럽 각지를 전전하다가 1625년부터 파리에 체재, 광학()을 연구한 끝에 ‘빛의 굴절법칙’을 발견하였다.  1629년 이후에는 네덜란드에 은거하며 철학연구에 몰두하여 형이상학 논문 집필에 종사하였으나, 같은해 3월 제자로부터 환일() 현상의 해명을 요청받고 중도에 자연연구로 전향, 결국 자연학을 포괄하는 《우주론》의 구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 논문의 완성단계에 G.갈릴레이의 단죄사실을 듣고, 지동설을 주내용으로 한 이 책의 간행을 단념, 그 대신 1637년 《방법서설 》 및 이를 서론으로 하는 《굴절광학》《기상학》《기하학》의 세 시론을 출간하였다. 1641년 형이상학의 주저 《성찰록》, 1644년에는 《철학의 원리》를 출간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데카르트 사상의 혁신성이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 ‘자유로운 나라’였던 네덜란드도 캘빈파신학자들의 박해로 살기 어려운 곳이 되었다. 그 무렵 스웨덴크리스티나 여왕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1649년 가을 스톡홀름으로 가서 지내던 중 폐렴에 걸려 생애를 마쳤다. 

 

 

 

 

 

오일러

 

바젤 출생. 주로 독일·러시아학사원을 무대로 활약하였고, 해석학의 화신(), 최대의 알고리스트(algorist:) 등으로 불렸다. 그의 연구는 수학·천문학·물리학뿐만 아니라, 의학·식물학·화학 등 많은 분야에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 처음에는 목사가 되기 위하여 바젤대학에서 신학과 헤브라이어를 공부하였으나, 수학에서 J.베르누이의 관심을 끌어 곧 D.베르누이, N.베르누이와 사귀었다. 이와 같이 베르누이가() 사람들의 조언과 상트페테르부르크학사원에 간 베르누이 형제의 소개로, 처음에는 그 학사원의 의학부에 이어서 수학부에 적을 두었다.

1740년 프리드리히대왕의 초청을 받아 베를린으로 이주하였다. 그 후 24년간 베를린학사원의 수학부장으로서 연구에 몰두하였으나 점차 궁정에서의 인기가 떨어져 다시 예카테리나 여제()의 청을 받자 1766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후에 시력을 잃고 장님이 되었으나 천부적인 기억력과 강인한 정신력으로 연구를 계속하였다. 수학자로서의 연구를 시작한 시기는 뉴턴이 죽은 시기에 해당하여 해석기하학·미적분학의 개념은 갖추어져 있었으나 조직적 연구는 초보단계로 특히 역학·기하학의 분야는 충분한 체계가 서 있지 않았다.

이러한 미적분학을 발전시켜 《무한해석 개론 Introduction in Analysis Infinitorum》(1748) 《미분학 원리 Institutiones Calculi Differontial》(1755) 《적분학 원리 Institutiones Calculi Integrelis》(1768∼1770), 변분학(:극대 또는 극소의 성질을 가진 곡선을 발견하는 방법)을 창시하여 역학을 해석적으로 풀이하였다.

이 밖에도 대수학·정수론()·기하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 큰 업적을 남겼다. 그 중에도 삼각함수의 생략기호(sin, cos, tan)의 창안이나 ‘오일러의 정리’ 등은 널리 알려져 있다. 베를린 시대에 프리드리히대왕의 질녀에게 자연과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쓴 《독일 왕녀에게 보내는 편지》는 당시 계몽서로서 유명하였으며 7개 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가우스

대수학·해석학·기하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겨, 19세기 최대의 수학자라고 일컬어진다. 수학에 이른바 수학적 엄밀성과 완전성을 도입하여, 수리물리학()으로부터 독립된 순수수학의 길을 개척하여 근대수학을 확립하였다. 한편 물리학, 특히 전자기학(천체역학()·중력론(측지학() 등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브룬스비크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빈궁한 가운데 성장하였지만, 일찍부터 뛰어난 소질을 보였기 때문에, 어머니와 숙부의 노력으로 취학할 수 있었다. 10세 때 등차급수의 합의 공식을 창안하는 등 신동()으로 알려져 브룬스비크공() 페르디난드에게 추천되어, 카롤링고교를 거쳐 괴팅겐대학에 진학하였다. 고교시절에 이미 정수론(최소제곱법[] 등으로 독자적인 수학적 업적을 올렸는데, 괴팅겐대학 재학 시절에 정 17각형의 문제에 열중한 것이 수학의 길을 선택하기로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

가우스는 헬름슈테트대학으로 옮겨 22세 때 학위를 받았으며, 그 후 다시 브룬스비크로 돌아와 페르디난드공()의 도움을 받으면서 수학을 계속 연구하였다. 1801년에 간행된 명저() 《정수론연구(): Disquistiones arithmeticae》는 2차의 상호법칙의 증명을 풀이하였으며, 합동식()의 대수적 기법을 도입하여 이 분야에 획기적인 업적을 쌓아 올렸고, 학위 논문에서 이룩한 대수학의 기본정리의 증명과 더불어 학계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그에게 대학에서의 지위를 가져다준 것은 오히려 천체역학에 관한 업적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의 학계에서 뉴턴역학의 영향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즉, 1801년 소행성 케레스(Ceres)가 발견되자,이 별의 궤도결정이 문제로 대두되어, 가우스가 이를 계산해 내어 해결한 공을 인정받아 1807년에 괴팅겐대학 교수 겸 천문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800년 이후 가우스의 연구는 대략 4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는 소행성의 궤도결정을 시작으로 천체역학을 연구하던 1820년까지의 시기이고, 이 시기의 연구는 《천체운동론》(1809)에 집대성되어 있다. 또한, 수학 분야에서는 초기하급수()의 연구 및 복소변수()의 함수론의 전개가 있다(베셀에게 보낸 서한에 적혀 있으며, 훗날의 코시의 정리도 포함한다).

제2기는 측지학()에 관계한 시기로서, 1821년에 하노버 정부와 네덜란드 정부의 측지사업의 학술고문으로 위촉받은 일이 계기가 되어 곡면론()의 검토, 즉 곡률()의 문제, 등각사상()의 이론, 그리고 곡면의 전개가능성 등을 고찰하였다.

이것은 미분기하학()으로 향하는 최초의 일보였다. 한편, 정수론의 영역에서도, 주로 4차()의 상호법칙 연구에서 비롯하여 복소정수()의 연구에 이르러 대수적() 정수의 이론을 창시하였고, 이것은 아이젠슈타인, 쿠머, 데데킨트 등에게 계승되었다. 또한, 데이터의 처리와 관련하여 1821∼1823년의 논문에서 최소제곱법을 이론화하여 통계에서 가우스분포의 의의를 강조하였다.

제3기는 1830년부터의 10년간으로서, 주요 관심사는 물리학 쪽으로 옮겨져 갔다. 특히, W.E.베버와의 협력 아래 추진한 지구자기()의 측정 및 이의 이론적 체계화가 두드러진 업적이다. 괴팅겐에 자기관측소를 설립하고, 측정을 위하여 자기기록계를 제작하였으며, 또한 절대단위계()를 도입함으로써 전자기학의 기초를 닦는 데 공헌하였고, 한편으로는 퍼텐셜론()을 전개하여 이것의 수학적 기초의 수립을 추진하였다. 이 밖에, 전신기()의 발명과 모세관현상의 연구 등도 이 시기에 이룩한 것이다.

1840년경부터 만년에 이르는 제4기에는, 오늘날의 위상해석학()인 위치해석학 및 복소변수의 함수와 관련된 기하학을 연구하였다.

이상과 같이 수학자이며 동시에 관측자이기도 했던 그는 ‘괴팅겐의 거인()’으로서 이름을 남겼지만, 우선권 다툼이라든지 후진의 업적에 대한 냉담한 태도 등으로 가끔 나쁜 평을 받게 된 것은 아마도 완전성을 중요하게 여긴 그의 성격 탓인지도 모른다. 그의 좌우명은 “수()는 적으나 완숙하였도다”였다.

 

히파티아

알렉산드리아 출생.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천문학자이던 테온의 딸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에 대한 강의를 하였다가 이교()의 선포자라 하여 그리스도교도에게 참살당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주교()가 된 키레네의 쉬네시오스는 그녀의 가장 저명한 제자이다. 스이다스에 몇 가지 그녀의 수학·천문학적 저술의 표제가 있으나 책은 모두가 잔존하지 않는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John Venn 1834-1923)


벤다이어 그램 칸트라는 수학자가 3+3을 5라고 주장하고 설명하는 것을 열심히 듣다가 칸트가 죽고 나서 왜 그렇게 되었는지 연구하다가 칸트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찾게 되었는데, 그것이 벤다이어 그램 입니다.

칸트 집합에 대하여 수학을 공부하다가 집합도 수학이라고 주장하고 어이없는 주장을 했으며, 3+3이 5라고 주장을 했는데, 이 그것을 듣고, 벤다이어 그램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벤다이어 그램 칸트가 먼저 발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수학 협회에서 들어주지 않자 칸트는 자살을 했습니다. 그래서 은 근거를 찾다가 벤다이어 그램을 발견 했던 것 입니다. 벤다이어 그램의 원래 생각은 칸트였으나, 이 발표를 한 것 입니다. 그래서 벤다이어 그램을 발견 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1.출생연도 : 1834년

2.어릴시절 일화 :  어릴땐 별로 똑똑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대학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수학에 관련된 특별한 지식은 없었답니다.


3.학력 : 1853년 케임브리지의 카이우스 칼리지


           (Caius College of Cambridge University)에 입학


           1857년 졸업과 동시에 특별연구원


           1862년에는 다시 케임브리지대학으로 돌아와 윤리학을 강의


4.개발해낸 법칙 같은 것 4개정도: '가능성의 논리'(Logic of Chance, 1866)에서는확률론 연구


1889년 '경험논리의 원리'(The Principles of Empirical Logic)라는 책을 냄


무엇보다도 젤 중요한 벤 다이어그램 창시


총 8권의 책을 냄 


따로 계발해낸 법칙은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5.사망 날짜:  1923년


나의 생각 : 벤을 수학적 업적이 전혀 없는데도 벤다이어그램이란

            별 것 아닌 그림 하나로 유명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추상적인 수학을 그림으로 나타낸 다는 장점이 있다.

            칸트가 뭐 어쩌구 저쩌구 되었든 간에 벤은 수학사에

            이름을 확연히 남긴 것만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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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 설명이요 ㅠㅠ

... ㅠ 수학자 자세하게 설명쫌요 ㅎ 내공잇어요 ㅎ ㅎ 벤... 아이들 5명만이 살아남았다. 업적 [편집] 제타 함수를 처음 만들어 썼다. 그 때까지 많은 수학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