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누이방정식과 오일러방정식 서술 좀 해주세요

베르누이방정식과 오일러방정식 서술 좀 해주세요

작성일 2003.12.04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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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누이 방정식과 오일러 방정식 간결하고 중요한 부분만
서술 좀 해주세요 둘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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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누이 정리는요...쉽게 정압(Static Pressure) + 동압(Dinamic Pressure) = 전압(Total Pressure) 이라 설명합니다.
다시말해서 유체속의 한 점의 압력은 방향에 관계없이 일정하게 작용하는데 이것을 정압이라 하고, 정압의 크기는 유체가 정지상태일때 최대가 됩니다.
유체가 흐를때의 입자는 속도를 가지며, 이 속도가 압력으로 나타내어지는데 유체의 운동에너지를 해당되는 압력으로 환산한것을 동압이라 합니다.
정상 흐름에서의 압력은 전압(Total Pressure) 이고, 이것은 정압과 동압을 합한 값과 같습니다. 전압이 일정하기때문에 동압이 증가하면 상대적으로 정압은 감소하게되는것입니다.
그렇다면 연속의 법칙에 대치시켜 생각해보면, 정상흐름이고,점성이 없는 유체인 완전유체(Perfect Fluid)가 비 압축성 유체일때 유체가 흐르는 통로(Stream Tube)의 단면적이 S₁, S₂유속이 V₁, V₂일때 유입량과 유출량을 같다고 본다면, S₁V₁= S₂V₂가 됩니다.
실제 우리 주변의 유체는 점성이 있거나 압축성이거나 흐름에 저항이 가해지거나 하는등의 이유로 정확히 일치하지 않습니다만, 이 원리를 이용해 하루 수천만이 하늘을 나르거나 바다위를 떠 달릴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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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체역학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입니다.

베르누이의 방정식은 역학적 에너지 보존 법칙의 변형이라 생각할 수 있다. 비압축성 유체가 양끝의 높이가 다른 관에 담겨져 있다고 가정하자. 이때 한 쪽 끝에 P1 의 압력을 가해서 dV 만큼 밀려나면 비압축성 유체임으로 반대편 구멍으로 다른 압력 P2 으로 dV 만큼 밀려날 것이다.유체가 외부에서 받은 일의 크기는

đW = d F촵d r = -Pds촵d r = -PdV가 된다.

이때 유체가 외부에서 받은 일은 역학적 에너지 보존 법칙에 의하여 역학적 에너지의 변화량만큼이 된다. 즉, 체적 dV 의 질량이 dm 일 때 (- P2dV) - (-P1dV) = [½(dm)v2²+(dm)Ω2]-[½(dm)v1²+(dm)Ω1]가 된다. 여기서 Ω 는 단위 질량당 위치에너지를 의미한다. 중력장의 경우 Ω = gh가 된다. 양변을 dV 로 나눈후 상태 2와 상태 1에 관련된 항을 각각 좌변과 우변으로 이항하면 P1 + ½ρv1² + ρΩ1 = P2 + ½ρv2² + ρΩ2인 베르누이 방정식을 얻을 수 있다.

다시 말해 H = P + ½ρv² + ρΩ의 값은 항상 일정하다. H 는 유체가 갖는 체밀도 에너지이다. 베르누이 일가는 수학자 가문으로 유명한데 베르누이가의 첫 수학자는 베르누이 방정식을 발표한 다니엘 베르누이의 백부 야콥 베르누이였다.

그리고 두번째가 다니엘의 부친 요한 베르누이였고 세번째가 바로 다니엘이었다. 야콥과 요한은 서로 경합하며 뉴턴과 대립했던 라이프니츠의 미적분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형제간인 둘의 사이가 나중에 별로 좋지 않았는데 이유는 물론 학문적 의견 대립이었다. 부자간인 요한과 다니엘 역시 다툼이 있었는데 선취권을 두고 한 다툼이었다. 야콥은 확률론의 실질적 출발이었던 "추론술"의 저자였고 베르누이 시행의 제안자이다. 요한은 18 세기 전반의 저명한 수학자였으며 18세기 최고의 수학자인 오일러의 스승이기도 하다. 테일러 급수의 선후문제를 두고 뉴턴파의 테일러와 다투기도 하였다. 다니엘은 현의 진동론에 관한 일반해인 삼각급수해를 구했는데 이는 훗날 푸리에 급수의 시초가 된다. 그리고 중합의 원리를 이용, 일반 진동을 단순한 고유진동으로 분석 종합한 업적도 있다. 물론 다니엘의 가장 유명한 업적은 베르누이 방정식의 성립이었다.

출처 http://www.machinenow.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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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러의 공식은 지수함수와 삼각함수를 연결해 주는 중요한 공식으로

공학을 전공하는 사람, 특히 신호처리, 영상처리 등 frequency를 이용하는

학문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사용하는 공식입니다.

이 공식은 오일러가 1743년에 미분방정식 y''+y=0을 연구하다가 발견한 공식입니다.

증명을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증명을 하기 위해서는 테일러 전개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테일러 전개는 임의의 연속함수를 다항식의 합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미 알고 계시리라 생각되지만 혹시 배우지 못한 부분이라면

미적분학이나 대학 교양수학 정도의 책을 참고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지수함수와 삼각함수의 경우 테일러 전개는 다음과 같습니다.

exp(x) = 1 + x + (x^2)/2! + (x^3)/3! + (x^4)/4! + ... ...

sin(x) = x - (x^3)/3! + (x^5)/5! - (x^7)/7! + ...

cos(x) = 1 - (x^2)/2! + (x^4)/4! - (x^6)/6! + ...

이제 식에서 x 대신에 ix를 대입하면

exp(ix) = 1 + ix - (x^2)/2! - i(x^3)/3! + (x^4)/4! + i(x^5)/5! - (x^6)/6! - i(x^7)/7! + ...

= (1 - (x^2)/2! + (x^4)/4! - (x^6)/6! + ...) + i(x - (x^3)/3! + (x^5)/5! - (x^7)/7! + ...)

= (cosx) + i(sinx)

이로써 증명이 끝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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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러의 생애 [ Euler, Leonhard , 1707.4.15~1783.9.18 ]
바젤 출생. 주로 독일·러시아의 학사원을 무대로 활약하였고, 해석학의 화신(化身), 최대의 알고리스트(algorist:數學者) 등으로 불렸다. 그의 연구는 수학·천문학·물리학뿐만 아니라, 의학·식물학·화학 등 많은 분야에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 처음에는 목사가 되기 위하여 바젤대학에서 신학과 헤브라이어를 공부하였으나, 수학에서 J.베르누이의 관심을 끌어 곧 D.베르누이, N.베르누이와 사귀었다. 이와 같이 베르누이가(家) 사람들의 조언과 상트페테르부르크학사원에 간 베르누이 형제의 소개로, 처음에는 그 학사원의 의학부에 이어서 수학부에 적을 두었다.

1740년 프리드리히대왕의 초청을 받아 베를린으로 이주하였다. 그 후 24년간 베를린학사원의 수학부장으로서 연구에 몰두하였으나 점차 궁정에서의 인기가 떨어져 다시 예카테리나 여제(女帝)의 청을 받자 1766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후에 시력을 잃고 장님이 되었으나 천부적인 기억력과 강인한 정신력으로 연구를 계속하였다. 수학자로서의 연구를 시작한 시기는 뉴턴이 죽은 시기에 해당하여 해석기하학·미적분학의 개념은 갖추어져 있었으나 조직적 연구는 초보단계로 특히 역학·기하학의 분야는 충분한 체계가 서 있지 않았다.

이러한 미적분학을 발전시켜 《무한해석 개론 Introductio in Analysis Infinitorum》(1748) 《미분학 원리 Institutiones Calculi Differontial》(1755) 《적분학 원리 Institutiones Calculi Integrelis》(1768∼1770), 변분학(變分學:극대 또는 극소의 성질을 가진 곡선을 발견하는 방법)을 창시하여 역학을 해석적으로 풀이하였다.

이 밖에도 대수학·정수론(整數論)·기하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 큰 업적을 남겼다. 그 중에도 삼각함수의 생략기호(sin, cos, tan)의 창안이나 ‘오일러의 정리’ 등은 널리 알려져 있다. 베를린 시대에 프리드리히대왕의 질녀에게 자연과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쓴 《독일 왕녀에게 보내는 편지》는 당시 계몽서로서 유명하였으며 7개 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오일러의 업적

오일러는 실로 수학의 역사상 가장 많은 저술을 하였다. 그의 연구는 수론, 대수학, 급수론, 대수해석, 미적분학, 해석기하학, 확률론, 역학 등에 걸쳐 있으며, 총 45권의 저서와 700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수학에 있어서 함수 의 표기, 자연로그의 밑, 삼각형의 내접원의 반지름r, 삼각형의 외접원의 반지름 R, 합의 기호 ,허수단위 등은 오일러의 의하여 보편화되었다. 또한, 그는 오일러의 공식 을 발견하였으며,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문제를 통하여 그래프 이론의 기초를 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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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답변이 아닌것이 좋네요. ringo0878 님의 글

오일러(L. Euler, 스위스, 1707 - 1783)

오일러는 스위스의 바젤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수재였던 그는 자신의 뒤를 잇게 하려는 아버지에게서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바젤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당시 이 대학의 수학자 일가로 소문난 베르누이 집안의 두 아들인 다니엘과 니콜라우스와 친하게 지내면서 수학을 공부하게된 오일러는 결국 수학에만 전념하게 된다. 20세 되던 1727년, 오일러는 문화 부흥을 꿈꾸는 러시아의 여왕 캐더린 1세의 초청으로 러시아의 아카데미에 가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가 도착하던 날 여왕은 죽고, 그 뒤를 이은 피터 2세는 학문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일러는 몹시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 된다. 1730년 다시 안나 1세가 여왕의 자리에 오르자 아카데미가 되살아났고, 오일러는 1733년 결혼하여 페테르스부르크에 정착하여 13명이나 되는 자녀를 얻었으나 이 중 8명은 요절하고 만다. 또한 28세이던 1735년은 지나친 연구와 러시아의 추운 날씨 때문에 오른쪽 눈을 잃게되는 불행한 해였다. 당시 다른 수학자들이 몇 달 동안이나 끙끙대던 문제가 오일러에게 주어졌는데, 그는 이것을 단 3일만에 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때 생긴 화농으로 인하여 결국 실명하게 된 것이다. 1741년에 오일러는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청으로 베를린에 와서 극진한 대우를 받게 되지만, 러시아의 여왕 캐더린 2세는 다시 그를 불러들인다. 그렇지만 그 해 남은 왼쪽 눈마저 실명하는 불운을 겪는다. 학자가 눈이 안 보이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일러는 조금도 좌절하지 않고 그 전보다 더 많은 논문을 썼다. 물론 그가 직접 쓸 수 없었으므로 조수에게 대필시키는 방법으로, 이후 17년 동안 오일러는 장님인 채로 수학 연구를 계속하였다. 이것은 그의 뛰어난 기억력과 암산력 덕분이었다. 그는 수학 전 분야의 공식을 다 암기하고 있었으며, "마치 사람이 숨을 쉬는 것처럼, 새가 하늘을 나는 것처럼 계산하였다."는 말을 들을 만큼 계산에 능숙했던 것이다. 오일러는 1783년 손자와 놀면서 천왕성의 궤도를 계산하다가 "죽는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76세였다. 오일러가 남긴 논문은 수학, 천문학, 물리학 등 여러 분야에 걸친 엄청난 양의 것이었다. 그가 죽은 후 제자들이 그의 전집을 간행하려 했으나 자료가 너무 많고 돈이 많이 들어 손을 못 대고 있다가 1909년이 되어서야 전국적으로 기부금을 모아 한 권을 발행하게 된다. 그 후 오일러의 전집만을 발행하는 특수한 출판사가 설립되어 작업을 한 결과 현재는 45권의 전집으로 완성되어 있다. 오일러는 여러 가지 기호를 새로이 만들어 쓴 것으로도 유명한데, 우리가 잘 아는 를 사용하고 삼각형에서 각을로, 각각의 대변을 로 쓰기 시작한 사람도 오일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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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계의 거인 오일러

18세기 수학 발전에 공헌한 위대한 수학자를 들면 오일러(Leonharrd Euler, 1707-l783), 푸리에(J.B.J. Fourier, 1768-1830),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r, 17l7-1783), 르장드르(Adriene Marie Legendrer, 1752-l833), 라플라스(Dierr Simon Laplace, 1749-l827), 몽주(Gaspard Monge, l746-1818), 람베르트(Johann Heinrich Lamberr, 1728-1777) 등을 거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에 오일러가 가장 뛰어난 수학자였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양에 있어서나 질에 있어서나 그를 능가하기는 어렵다. 그는 평생 동안에 500편 이상의 저서와 논문을 출판하였다. 오일러의 연구 목록에는 죽은 뒤에 출판한 것까지 포함해서 886항목이나 있으며, 현재까지 나온 전집은 75권에 달한다. 생애를 통해 그가 쓴 논문의 분량은 연평균 약 800쪽이 되는 셈이다. 이 방대한 저작들은 심오하게 수학의 면모를 바꾸어 놓은 한 스위스 시민의 천재성에 대한 증거가 되고 있다. 이런 엄청난 양을 전해들을 때 과장이거나 가공적인 이야기이며 역사적 사실일 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이다. 오일러는 l707년 스위스의 바젤에서 태어났다. 그가 어려서부터 보인 천재적인 기질은 놀라운 것도 아니다. 아버지는 칼빈파 목사였는데 그를 당시 유명한 요한 베르누이 밑에서 공부하도록 주선하였다. 오일러는 후에 스승과 함께 지냈던 때를 회상했는데 일 주일 내내 공부하고도, 토요일 오후 스승과의 면담시간에는 그가 해결하지 못한 수학 문제를 가지고 베르누이에게 도움을 청했다고 한다. 항시 따뜻할 수만은 없던 베르누이는 처음에는 제자의 잦은 질문 때문에 짜증을 내기도 해서 오일러는 하찮은 것 때문에 스승을 괴롭히지 않고 가능한 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결심을 굳히기도 했다. 기분이 언짢든 어떻든 베르누이는 차츰 재능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오일러는 높은 수준의 수학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하고, l9세에는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상을 받았는데 이는 배에 돛을 다는 최적 위치에 관한 뛰어난 해석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오일러가 당시까지 돛을 달고 바다를 항해하는 배를 보지 못했다는 것은 해학이다.
l727년 오일러는 러시아의 성 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아카데미에 임용되었다. 당시 러시아는 파리와 베를린의 과학 아카데미에 필적할 만한 연구소를 꿈꾸고 있던 표트르 대제의 꿈을 실현하려고 애쓰고 있는 때였다. 러시아로 유치한 학자 중에는 요한의 아들인 다니엘 베르누이도 끼여 있었는데 오일러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은 다니엘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기이하게도 자연과학 분야의 자리로 오일러가 임명된 곳은 의약과 생리학 분야였다. 이렇게 러시아 해군의 의무장교라는 야릇한 자리를 포함해서 매우 불안전한 출발을 하였지만 종래에는 다니엘 베르누이가 스위스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를 그만두었을 때 그 뒤를 이어 수학교수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 때가 l733년이었다.
그 때까지 오일러는 무한한 정력과 거대한 창의성을 발휘하여 수학자로서의 인생을 결정짓고 있었다. 비록 1730년대 중반기부터 오른쪽 시력이 약화되었지만 신체적 결함은 연구생활을 조금도 저해하지 못했다. 그는 중단 없이 기하학, 수론, 순열조합론 등 다양한 수학 분야뿐 아니라 응용 분야로서 역학, 유체역학, 광학 등 중요한 문제의 연구를 수행했다. 눈이 멀어가면서도 광학적으로 빛의 신비를 설명하려 하고 있는, 한 인간을 상상한다는 것은 비통하기도 하지만 높은 정신을 찬양하게 된다.
1741년에 그는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왕하의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의 수학부장의 자리로 옮기기 위해 성 페테르부르크를 떠난다. 이 초청에 응한 것은 다분히 황제 치하에서의 억압적인 정치 분위기가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베를린의 상황도 이상(理想)과는 거리가 멀었다. 프리드리히는 오일러가 재미없고, 너무 조용하고, 잘난 체하지 않은 학자라고 생각했다. 이 프러시아의 대왕은 오일러의 한쪽 시력이 약하다는 것에 개의치 않고 그를 '수학적 외눈박이'라고 불러댔다. 이런 대접과 아카데미 안에서의 잡음과 정치적 씨름 때문에 오일러는 러시아의 캐서린 2세때 다시 성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 l7년 뒤 사망하기까지 머물렀다. 오일러는 친절하고 너그러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야채를 기르는 단순한 즐거움과 l3명이나 되는 자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오일러는 은둔 생활과 내성적인 그리고 보기 드문 수학의 선구자의 한 사람인 뉴턴과는 현저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오일러를 보고 있으면 이런 종류의 천재들이 반드시 정신질환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 기분이 좋아진다. 오일러는 비록 좋은 성격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1771년에는 왼쪽 눈까지도 나빠져 거의 실명상태가 되었다. 실명과 통증 가운데도 저작을 쉬지 않고 놀라운 방정식과 수식을 제자로 하여금 받아쓰게 하였다. 음악가인 베토벤에게 귀먹은 것이 아무 장애가 되지 않았듯이 오일러에게도 실명이 수학의 흐름을 저지시킬 수는 없었다. 그는 온 생애를 통해 비상하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기억력의 축복을 받았다. 수론의 연구에서 기억력은 큰 도움을 주었는데, 처음 l00개의 소수를 다 외우고 있을 뿐 아니라, 제곱, 세제곱, 네제곱, 다섯, 여섯 제곱수까지 외우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수표를 뒤적이고, 연필을 꺼내어 종이에 계산을 하고 있는 동안 그는 이나 같은 수를 암산으로 해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약과이다. 그는 아주 어려운 계산도 암산으로 해냈는데 50자리까지도 정확하게 계산해 낼 수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의 예술원 회원이며 전기작가인 아라고(Francois Arago, 1786-1853)는 오일러는 '마치 사람이 호흡하는 것처럼, 독수리가 하늘을 나는 것처럼' 겉보기에는 별달리 애쓰는 흔적도 없이 계산을 한 것 같다고 쓰고 있다. 계산 능력뿐 아니라 많은 것들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연설문, 시, .로마 서사시인 버질(Virgil)이 지은 이니이드(Aeneid)는 소년 시절에 송두리째 외우고 반세기가 지난 늙은 나이에도 한 획도 틀리지 않게 외우고 있었다. 어떤 소설가도 감히 그에 필적할만한 기억력을 가진 사람을 등장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오일러의 명성의 일부는 그가 지은 교과서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 중에 수학적으로 높은 수준의 어려운 책도 있었지만 쉬운 책을 쓰는 것도 품위가 떨어지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책은 1748년에 출판된 이다. 이 고전적인 수학에 관한 상설은 유클리드의에 비교될 만한 것으로 그 안에 조기 수학자들에 의하여 발견된 것을 개관하고, 재조직하고 증명을 새롭게 하고 해서 이 한 권으로 지금까지 나온 대부분의 저작을 뒤져볼 필요가 없게 만들어버렸다. 이것에 이어 l755년에는 을, l768-74년 사이에는 세 권으로 된 을 출판해서 오늘날에 이르는 해석학의 일반적인 방향을 인도한 셈이 되었다.
그의 모든 교과서는 명료하고 알기 쉬었으며, 수학적인 기호를 잘 선택해서 기초적인 수학적 개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참으로 오일러의 수학적인 저술은 오늘날의 독자에게 처음으로 현대적인 책을 대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이것은 현재적인 수학적 기호를 썼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시의 영향력이 너무 커서 그 뒤에 오는 모든 수학자들이 그의 스타일과 기호와 형식을 본받았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그뿐 아니라 독자들이 수학을 배우는데 자기 수준의 이해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전제하에 책을 썼다. 오일러는 주제의 본성을 깊숙이 통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에게는 잘 전달하지 못하는 상투적 수학자는 아니었다. 그와는 정반대로 가르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인 사람이었다. 콩도로세(Marquis de condorcer, 1743-1794)는 오일러에 대해, "그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작은 만족보다는 제자를 가르치는 일을 더 좋아했다."고 말했는데 이는 그가 원한다면 수학적 힘으로 누구든 놀라게 해 줄 수 있는 오일러 같은 사람에게 알맞은 찬사이다.
오일러의 수학에 관한 논의는 어떤 면에서는 에 귀결되는데 통권 73권 886책에 달하는 논문의 집대성이다. 그의 생전에 쓴 논문인데 라틴어, 프랑스어, 독어 등 여러 종류의 문자가 함께 섞여 있으며, 결과는 너무 방대하고 눈이 먼 기간까지도 너무 신속하게 이루어져, 모두들 출판해 내는 데 그의 사후 47년이 걸렸다고 한다.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의 저작은 수학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총보는 음향학, 공학, 역학, 천문학, 세 권에 달하는 망원경과 현미경의 고안에 관한 논문도 실려 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누군가가 l8세기 후반 4분의 3세기 동안에 발표된 수학에 관한 논문을 도두 모아 놓는다면 어림잡아 3분의 1은 오일러의 펜에 의해 쓰여진 것이 된다고 말했다. 그의 저작을 수집해 놓은 도서관 서재 앞에 서면, 믿어지지 않은 눈으로 선반마다 차 있는 큰 둥치들을 보게 될 것이다. 세미나 논문을 수록한 수천 쪽의 이 책들이 수학의 새로운 방향에 물꼬를 텄는데, 미적분학으로부터 그래프 이론, 복소해석학, 미분방정식까지 새로운 방향을 정리해 주고 있다. 실제로 수학의 각 분야마다 중요한 정리들이 하나씩 있는데 그것은 오일러의 기여에 의한 것이다. 오일러의 표수(Euler characteristic), 오일러의 다항식(Euler polynomial), 제1, 2종 오일러 적분(Euler's integral), 오일러 상수(Euler's constant), 오일러 방진(方陣}, 오일러 함수(Euler's function) 등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다. 이것은 오일러의 결과의 반도 이야기하지 못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다른 사람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수많은 수학적 결과들은 사실은 오일러에 의해서 발견되었으며 그의 자작의 커다란 덩치 속에서 일부를 뽑아 낸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태반이다. 한 익살꾸러기가 완전히 농담만은 아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정리와 법칙들이, 발견자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선례가 많이 있다. 제대로 되었다면 반은 오일러의 이름이 붙었어야 할 것이다.

오일러는 l783년 9월 7일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실명에도 불구하고 죽는 순간까지 수학적인 활동을 중지하지 않았었다. 보고된 바에 의하면 마지막 날을 손자들과 함께 최근의 정리와 천왕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놀고 있었다고 한다. 오일러에게 죽음은 졸지에 다가왔는데 콩도르세가 말한 것처럼 "그가 계산하며 사는 것을 그만 두었다"하는 순간에 숨을 거둔 것이다. 그는 성 페테르스부르크에 안장되었다. 그곳은 그가 오고 떠나고 또 왔지만 행복한 여러 해를 지낸 곳이었다.




내용출처 -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ir_id=1104&docid=276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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