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대통령?? 518??

전두환 대통령?? 518??

작성일 2013.01.22댓글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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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어느 정도 지식은 있으나 좀 더 객관적으로 알아보고 싶어서 여쭤보는거에요.

1. 5.18 민주화 항쟁에 대해서 어떻게 광주 사람들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사람들이 접했을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의견이 이리도 분분한지?

 

 

2. 전두환 전대통령님이 5.18 및 12.12 사태로 인해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그리도 쉽게 풀려나셨는지?

-또한 5.18 및 12.12사태에 대해 충분한 국민들의 의견 수렴이 있었는지.

 

 

3. 5.18 민주화 항쟁은 당시 분들에게 어떤 의의가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좀 더 연배가 있으신 분이 답변해 주셨으면해요.

 

 

중학생, 고등학생.. 심지어 초등학생들까지 5.18에 대해나 여러 정보들에 가치관이 확립되 있지 않은 채로 얕은 지식... 이곳 저곳에서 눈으로만 본 지식을 공유하는 걸 보았는데요..

제 질문에는 답변 올리지마세요. 제대로 자기 가치관이 확립되어 있지 않을 나이시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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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말씀드렸듯이 고등학생 이하는 의견도 올리지마세요. 제가 하도 많이 학생들이 올리는 글을 봐서요.

구경만 하시고 작성하시지 말아주세요. 연배 있으신 분들 말좀 들어보고 싶은데요...
아직까지 답변들 보면 드는 생각이.. 역시 교과서나 여러 문서화된 자료...
교수님들 말씀.. 이러한 배워오고 알고 있던 정보들이 맞는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해 왔고,
그래도 다른 분들 답변을 통해서 알아보고 싶습니다.

다들 답변 적으실때 참고자료좀 올려주세요. 나아가서.. 문서화된 자료, 소스라도 ! 신뢰도가 떨어지니깐요.
누가 이렇게 말 했었다. 저랬으니깐 이런거다. 이런 식의 근거 없는 자료 말구요.

복사 붙여넣기 하시는 분들도 자제해주세요. 주문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요..

좌익이다 우익이다 상관 없지만 지나치게 폄하하려는 목적으로 답변 작성하시는 정치 성향이

매우매우매우매우 강하신 분들은 굳이 절 위해서 답변을 적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

 


#전두환 대통령 임기 #전두환 대통령 기간 #전두환 대통령 당선 #전두환 대통령 박탈 #전두환 대통령 나이 #전두환 대통령 취임 #전두환 대통령 선거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 #전두환 대통령 업적 #전두환 대통령 묘지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 대부분은 민중항쟁, 민주화 운동이라하나 극우 세력은 기존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폭동이라고도 합니다. 예를 들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일어난 ANC의 흑인 해방투쟁이 남아프리카 국민당에 의해 폭동이라고 불리는 것 처럼요.

 

 우리나라는 지금 진보와 보수 간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기존 역사적 틀을 제대로 볼 수 없으며, 이것을 평가하려면 국제적으로 평가해야합니다. 근데 국제적으로는 518민중항쟁 이라고 봅니다.

 

 박정희가 죽고나서, 전두환이 빠르게 군부를 장악, 육군참모총장에게 하극상을 펼칩니다. 그리고 이를 '12.12 쿠데타'라고 합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가 하극상 당하고 전두환은 최규하를 설득시켜 무혈로 정권을 탈취하려하나, 각지에서 시민들이 낌새를 알아채고, 전두환 무리들을 비판합니다.

 

 그 중에 제일 격했던 지역이 전라남도 광주였고,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김대중이 반독재 시위를 주도합니다. 전두환은 김대중을 무력으로 감금했고, 이 때문에 5.18이 일어난 겁니다. 즉, 신군부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운동은 민주화운동입니다. 기존 틀에서 헌법적 가치는 '자유민주주의'지만 신군부는 헌법 가치를 이미 깨트렸죠.

 

 당시 군통수권자가 최규하였지만, 전두환은 꼭두각시 최규하를 설득해 계엄령을 선포캐하고, 실질적으로 당시 광주 계엄군은 전두환 소속이나 다름없었죠.(당시, 정승화에게 하극상을 한다음 실질적으로 전두환이 짱이었고, 최규하는 사태 파악못하는 허수아비에 불과함. 전두환은 하나회에 소속된 군인 인맥을 이용해 쿠데타를 계획했는데, 실질적으로는 이미 사태가 끝난지 오래였기 때문에 군부는 거의 전두환의 명령을 따르는 부대와 다름이 없었음.)

 

즉, 신군부 정확히는 파시즘 세력에게 대항하는 것이었으므로, 폭동이라기 보다는 민중항쟁 또는 민주화운동이 맞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민주혁명이라 하는데, 5.18은 실패로 끝났으므로 혁명은 아닙니다.

 

2. 6월 항쟁이후 약 10년 후 정세가 회복되고나서 호남권 민주당(평화민주당)이 득세하게 됩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영남권 민주당(통일민주당) 총재인 김영삼이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을 결성했습니다. 즉, 기존 민주화 세력을 배신하고 신군부 세력과 힘을 합친 것이죠. 때문에 힘이 세진 김영삼이 대통령이 됩니다.

 

 그러나, 전두환의 여러 비민주적인 행태를 국민들은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고, 그래도 국민들은 민주화 지사였던 김영삼에게 전두환 처벌을 요구합니다. 근데, 합당했던 세력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는 사실상 전두환의 후계자였죠. 그리고 민주자유당 정파에서도 노태우파가 일부 있었고요. 이들은 기존의 거대한 민주정의당 표밭을 가꾸고 있었기 때문에 겁이 납니다. 따라서, 김영삼은 5.18에 대한 문책은 대충 넘기고 12.12 쿠데타만으로 벌을 따져 전두환을 형식적으로 처벌한 것이고, 전두환은 전직 대통령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얼마 안살고 다시 나오죠.

 

3. 5.18을 폭동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당시 정세가 어떤지 잘 몰랐던 사람입니다. 또는 역사적으로도 지식이 매우 전무한 상태입니다.

 

 5.18은 신군부 세력의 등장에 반발하여 생긴 민주화 운동입니다. 애초에 신군부 세력이 등장하지 않았고, 다른 민주적 후보가 당선되었으면 5.18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즉, 5.18의 발단도 신군부 세력의 등장 그 자체라는 겁니다. 즉, 여기서 폭동이 아니란게 밝혀지죠.

 

 민주공화국에서 모든 국민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어야하고 재산권, 자유권, 생존권이 보장되어야합니다. 또한 재산권, 자유권, 생존권을 보장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국가가 그러한 책임을 제대로하지 못하고 자유민주주의에서의 권리를 박탈하는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이것은 무장투쟁의 정당성을 이미 확보한 것입니다.

 

다른 나라로 비교해봅시다.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도 국민당 파시스트 정부에 무장투쟁을 했었고

 

소련의 스탈린 독재에서는 우크라이나의 아나키스트들이 크론시타트 민중항쟁을 주도했습니다.

 

쿠바에서 바티스타 독재 정부에서 카스트로가 쿠바 혁명을 일으켰고(물론 후에는 독재화됐지만)

 

중국에서는 신해혁명, 프랑스의 왕당파에 반대한 공화파들이 일으켜 세운 파리 코뮌 등

 

기존 역사에서는 이 모든것을 '폭동'이라기 보다는 혁명 또는 민중항쟁으로 봅니다. 근데 극우 세력은 역사를 국제적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단순히 5.18은 겉보기엔 폭동같으니 폭동이라 주장하는 겁니다.

 

 모든 민중항쟁은 일어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폭동이라 주장하는 것은 정부몫을 제대로 못한 정부만이 폭동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폭동이란 무엇일까요?

 

 정의하겠습니다. 폭동이란 자신의 모든 권리가 보장되는데도 불구하고, 특정 이익을 위해 파괴공작을 일삼는 행위를 말합니다. 5.18은 당시 1212 쿠데타 후 신군부 세력에 의해 국민은 다시 자유권, 생존권, 재산권 등 여러 민주적 가치를 상실한 상태가 될 것이란게 자명한 예측이었고, 자신들의 당연한 권리를 위해 싸운 겁니다.

 

그러나 폭동에서는 그런게 없으며, 오직 특정 정파를 위해 기존 사회 관습의 따름, 보장되는 권리를 포기하고 단순한 군중들의 심리로 공작을 일으키는게 바로 폭동입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그 내용들을 모두 정리해서 설명하자면 매우 방대한 내용들이라

다 설명하기 곤란합니다.

 

제 블로그 내용을 참조하면 좋겠네요.

 

우리나라의 정치 갈등 시작은

건국 초부터 시작 되었죠

건국초에는

건국세력과

공산빨갱이 세력과의

다툼이었습니다.

이 흐름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겁니다.

 

공산 빨갱이 세력들이

북한과 내통하면서

대한민국 공산화를 위해

역사를 부정하고

대한민국을 부정하여

우파 세력에대한 모략질을 하고 있는겁니다.

타 국가들의 좌우 대립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죠.

이는 북괴가 무너지기 전까지 지속될겁니다.

 

탈북자들이 한결같이

민주화세력들을 비판하는 이유도

똑같은 이치입니다.

공산빨갱이 세력들은

본색을 감추기 위해

민주화라는 탈을 쓰고

선전선동을 하고 있는겁니다.

우파든 좌파든

누구의 말이 옳고 그른가는

사실 팩트에 입각한

바른 자료를 봐야 합니다.

그리고 논리적인 사고를 하면 되는거죠

 

1+1=2 라고 주장하는 측과

1+1=18 이라고 주장하는 측의

진실을 가려내려면

그에 대한 지식과

논리력이 있어야 겠죠.

명심해야 할 한가지는

우리나라

그러니까 대한민국은

건국부터

자유민주주의 3권분립 법치주의 국가였다는 겁니다.

 

이런 나라에서 민주화운동을 한다????

민주화운동은 북한같은 공산 독재 왕권 국가에나 필요한 운동이죠...

대한민국 건국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 3권분립 법치주의 국가입니다.

그리고 모든 대통령은 헌법이 정한

선거에 의해 선출되었습니다.

쿠데타로 정권잡은 대통령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단 거짓말 속임수로 대통령이 된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김대중 노무현이죠...

차근 차근 논리적으로 접근하고 사실에 입각한 진실을 보는 안목을 가지길 바랍니다.

 

교과서나

친구의 말에 의존하지 마세요.

왜 스스로 논리적 사실에 입각한 안목을 길러야 하는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5.18을 지금은 민주화운동이라고

교과서에 인용하고 있지만

이는 명백한 거짓이고 사기입니다.

이런 일을한 기관이

헌법재판소,국회,대법원 입니다.

이들 기관이 대국민 사기쳐서

5.18광주폭동을 민주화운동이라 역사를 뒤집었죠.

하지만 논리와 진실은 5.18광주폭동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

5.18광주폭동이 폭동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5.18광주폭동이 폭동이라는 증거는

1980년 대법원 판결이 있으며

1997년 대법원판결의 논리속에 담겨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건국부터 자유민주주의 국가였습니다.

모든 주권이 국민들에 있는 나라며 법치주의 국가죠

5.18광주폭동을 옹호하는 측에서

심심하면 예를들어 주장하는것중에 하나

프랑스 혁명 3.1운동을 듭니다.

 

프랑스 혁명이나

3.1운동은

왕권 그러니까 모든 주권이 왕에있는 나라였고

이에 주권을 국민으로 이동한 사건이죠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것이 또하나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 그리고 3.1운동은

그 시대적 배경과 원인 목적이 뚜렸합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그리고 3.1운동 시점에서의

범죄행위들

그러니까

강도 강간 살인 폭행 폭동 등이

왕권 혹은 일제시대에 독재정권하에서 일어났다고 하여

혁명이나 항일운동이라 하지 않습니다.

일제시대건 독재시대건

강도 강간 살인 폭행 폭동은

강도 강간 살인 폭행 폭동이죠

 

5.18폭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던 자유민주주의 법치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민주화라는 이상한 운동은 필요없는 운동이었습니다.

뿐만아니라

5.18광주폭동이 일어나게된 이유가

전두환의 쿠데타

신군부가 내린 불법적인 5.17비상계엄때문이라 하는데

1980년 부터

1997년 까지

대한민국 국민들 전체가 알지 못했습니다.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는지

신군부가 불법적인 5.17비상계엄을 선포했는지......

 

1980년 전두환 최규하 그리고 대법원은

12.12는 박대통령 시해사건 조사를 위해 정승화를 체포하던중 일어난 사건이었고

정승화는 범죄자라 판결하였으며

5.18광주폭동은 폭동이라 판결하였습니다.

전두환이 12.12쿠데타를 일으키고

실권을 잡아 불법적인 5.17비상계엄을 선포했다고

대법원이 판결한건

김영삼 정권하에서의 5.18특별법에의해 서며

1997년입니다.

그러니까 1997년도에 그 사실을 알게된겁니다.

 

그럼

5.18광주폭도들은

1980년 5.18일

전국민들이 알지 못하던

전두환 쿠데타설

신군부의 5.17비상계엄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누가 그런 사실을 알려줬을까요?

어떤 증거를 가지고 알았을까요?

그리고 어떤 경로를 통해

그것이 사실이라고 확인했을까요?

 

또 한가지

대한민국 전국민이 모르던

지역무기고를

5.18광주폭도들은 어떻게 알아

전남지역 44개 무기고를 단 4시간 만에 탈취하였을까요?

100퍼센트 확실한 사실은

1980년 5월 18일 광주폭도들은

전두환이 12.12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증거

신군부가 불법적인 5.17비상계엄을 선포했다는 증거

를 확보한적이 없으며

최규하가 허수아비라는 과학적 확인을 한적이 없고

사실관계를 확인한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전두환은 12.12쿠데타를 일으켰다

신군부는 불법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리고 우연히 5.18광주폭동이 일어났다.

따라서 5.18광주폭동은 민주화운동이다

 

이를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경찰이 살인범을 잡았습니다.

20년후에 그 경찰은 살인범을 검거하기 직전

뇌물을 주고 진급한 불법을 저질렀다는게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그 살인범은 검거될당시 경찰에 저항하며

그 경찰에 정부의 따까리 독재경찰이라 욕을 퍼부었다 합니다.

따라서 그 살인범은 민주화운동가라라는 논리입니다.

 

이는

1997년 대법원이 판결한 논리

5.18광주폭동을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는 논리

교과서,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등의 내용 과 논리입니다.

 

<<요약>>

5.18광주폭동을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는

학자,정치인,법관.....들의 논리는

"전두환의 다단계쿠데타가 일어난 시점에서 우연히 일어난 5.18광주폭동범죄이므로

민주화운동이다." 로 요약됩니다.

 

정승화의 위법행위(쿠데타)

육군본부 B-2벙커는 국방부 청사 지하에 구축돼 있다.
8시 05분, B-2벙커 상황실에 도착한 정승화는 당직사령에게
김재규와 김정섭을 총장실로 안내하고, 스스로는 쏜살같이 상황실로 들어갔다.
그는 상황장교를 부릴 틈도 없이 그 스스로가 전화기를 들고 전광석화의
속도로 계엄선포를 위한 예비조치들을 취했다.

국방장관, 합참의장, 연합사부사령관, 각군총장, 참모차장, 정보참모,
작전참모, 본부사령, 헌병감, 그리고 수경사령관을 호출했다.
이들을 비상 호출하려면
먼저 노재현 국방장관으로부터 허락을 득해야 했다.

그러나 정승화는 계통을 무시했고, 국방장관을 무시했다.

8시 10분경, 정승화는 수도권의 주요 부대들(4개)의 동정을 체크하는 일이었다.
체크하는 부대마다 다 이상 징후를 보이지 않았다.
핵심을 체크하기 전에 외곽부터 조심스럽게 체크한 것이다.
외곽부대들에 이상 징후가 없자 그는 드디어
차지철만이 지휘할 수 있는 핵심부대인 수경사의 사령관 전성각에 전화를 걸어
“부대 이상 없느냐, 병력은 장악하고 있느냐”하고 물었고,
이상 없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정승화는 곧바로 3가지 지시를 내렸다.

1)앞으로 총장의 명령만 받을 것,
2)지금 즉시 출동준비를 할 것,
3)사령관은 즉시 B-2벙커로 올 것 들이었다.
치지철이 지휘하는 수경사를 장악했던 것이다.

이는 차지철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월권적 행위였다.

부대에 ‘이상이 없다’는 것은 차지철이 쿠데타를 위해
대통령을 살해한 범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만일 차지철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면 맨 먼저 수경사 병력이 쿠데타 주도세력이
되어 비상목표들에 출동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승화가 1996년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진술한 부분
즉 “12월 26일 밤 11시 40분경, 김계원이 노재현과 정승화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순간까지 차지철이 범인이라고 의심했다”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 거짓말인 것이고,
이 말이 옳다고 판시한 판사들은 이상한 오판을 한 것이 된다.

정승화는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것을 차 안에서 간지러운 질문을 던지는
순간에 알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8시 20분‘차지철만이 지휘할 수 있는 근위대 수경사’를 장악하기
직전에는 100% 알았을 것이다.
8시 30분, 노재현 국방장관이 벙커로 달려왔다.
그런데도 정승화는 노재현을 무시하고 오직 김재규가 요청한
계엄선포 준비 작업에만 몰두했다.

1980년 3월 7일 정승화내란방조사건 제2차 공판에서 증인으로 나온
노재현은 그 순간을 이렇게 진술했다.

변호인: 전화로 비상소집 연락을 받을 때 무슨 이유인지 들었습니까?

노재현: 못 들었습니다. 총장의 음성이 보통 때와는 달리 상당히 당황한 음성이었습니다. “장관님 빨리 나오십시오”해서 “어디요”했더니 “육본 벙커로 나오셔야 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변호인: 총장실로는 정총장이 안내했습니까?

노재현: 정총장이 안내해서 바로 옆방으로 갔는데 총장실이 아니어서 다시 나와 총장실로 갔습니다.(주: 총장실이 아닌 옆방으로 안내한 것은 정승화가 노재현과 김재규를 한방에 넣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아마도 김재규의 말실수가 염려됐을 것이다.)

변호인: 총장실에 김정섭이 있었습니까?

노재현: 김정섭과 김재규가 앉아 있었습니다.

변호인: 그때 각하가 청와대 만찬석에서 돌아가셨다는 말은 없었습니까?

노재현: 그냥 “돌아가셨다”고만 했습니다.

변호인: 어떻게 돌아가셨나”고 자세히 물은 적은 있습니까?

노재현: “아니 이게 무슨 소리요? 어떻게 된거요?” 물었더니 정승화 총장은
아무 말이 없었고, 옆에 있던 김재규가 나서서 “차차 알게 된다, 우선
보안을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위성 측면에서 보면 정승화는 바로 이때 국방장관에게,
김재규로부터 전화를 받고 궁정동에 가서 식사를 했던 사실,
김재규와 함께 차를 타고 오면서 있었던 행동들에 대해 말했어야 했다.
하지만 정승화는 그런 사실을 숨겼다.

위 사실을 상급자인 국방장관에게 보고하는 것은, 군에서 일생을 보낸
육군총장으로서는 생리와 같은 의무였다.
생리를 자제하면서까지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것은
의도적으로 속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고위직에 있을수록 그래서 행동은 투명해야 하며,
투명하지 않은 행동에 대해서는 억울하더라도 의심과 의혹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8시 40분, 합참의장, 연합사 부사령관, 공군총장, 해군총장 등이 도착하자
김재규가 나섰다. “대통령이 유고이니 이 사실을 3일간 비밀에 부치고 즉각
계엄을 선포해야 합니다.”정승화는 이들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묵묵히
상황처리에만 몰두했다.
군 수뇌들을 호출한 것은 육군총장이고, 수뇌들에게 “비밀을 지키고
계엄을 선포해야 한다”는 지시를 한 사람은 김재규인 것이다.
이때의 정승화의 얼굴 표정은 어떠했을까? 어둡고 무거워 보였을 것이다.
정승화와 김재규의 모습들을 지켜본 군 수뇌들은 무엇을 직감했을까?
“아니, 웬 중앙정보부장이?” 이런 의문과 함께 아마도 정승화와 김재규가
콤비가 되어 상황을 주도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9시경, 김재규는 박흥주를 시켜 김계원에게 전화를 대라고 하였다.
박흥주가 여러 가지 통로로 전화연결을 시도하여 김계원과 통화를 했다.

김계원: 큰 영애가 아버지는 어디 계시냐고 묻기에 다른데 계신다고
얼버무렸는데 또 물으면 뭐라고 하지?

김재규: 잘했오

평소와는 다른 고압적인 말투였다.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하는 이 반말은 청와대에서 전화를 받는 김계원에게나
총장실에 있는 군수뇌들에게나 다 같이 강한 메시지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얼마 후에 김재규는 정승화를 시켜 김계원과 다시 통화를 했다.

김재규: 여기 국방장관과 각군 총장이 다 모여 있으니 이리로 오시오.

김계원: 총리께서도 여기 계시니 이리로 오시오.

김재규: 안됩니다. 국무총리를 모시고 실장께서 이리로 오시오.

김계원이 잠깐 멈칫하는 것 같더니 “알겠오 내가 그곳으로 가겠오” 하고 결심을 했다.
김재규의 승리였다. 김계원이 “김재규가 국방부로 오라 합니다” 하고 말하자
최규하 총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말 없는 총리에게 김계원이 또 이렇게 말했다.
“김재규가 청와대 경호실이 무서워 못 오는 것 같습니다.
빨리 계엄부터 선포하여 치안을 유지해야 하니 그리로 가시지요”
이 말에 총리와 장관들이 따라 나섰다.
“김재규가 청와대 경호실이 무서워 못 오는 것 같습니다.”
이 말 속에는 무슨 의미가 들어 있는가?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한 범인’이라는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
대통령을 살해했기에 청와대 경호실이 무섭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시점에서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김재규가 대통령과 차지철을 모두 살해했다’는 것을 재차 확인했을 것이다.

이때 정승화는 1군 및 3군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진돗개2를 발령했다.
20사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육사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9공수여단장에게는 육군본부로 출동하라 명령했다.
이렇게 해놓고 그는 상황실을 나와 김재규가 있는 총장실로 가서 그가
취한 조치들을 설명해주고 계엄군이 점령해야 할 특별한 목표라도 따로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계엄군이 점령해야 할 목표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김정섭이 방송국, 변전소, 상수도, 은행 등이라고 불러주자
이를 메모했다.

김재규는 군통수권 선상에 있는 사람이 아니며 따라서
정승화의 직속상관이 아니다. 정승화의 직속상관은 노재현 장관이며
노재현은 그때 정승화 옆에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국방장관은 무시한 채
김재규의 지시에 따라 병력을 동원해 놓고, 다른 방으로 건너가
그가 취한 조치내용을 보고하면서 계엄군 배치에 대한 지시를 내려달라 했다.
이는 정승화가 이미 국방장관을 돌려놓고 김재규를
군통수권자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9시 10분, 정승화의 호출을 받은 수경사 사령관 전성각 소장이 벙커로 들어왔다.
정승화가 호출한지 한 시간이 경과한 시각이었다. 정승화는 전성각 사령관에게
청와대 외곽을 포위하라고 지시했다. 이어서 청와대 경호실차장 이재전 중장에게
전화를 걸어 “수경사 병력이 청와대 외곽을 포위할 것이니, 일체의
경호실 병력을 동결하라, 앞으로는 내 지시만 따르라”고 명령했다.
이 명령으로 청와대 밖인 궁정동 안가의 총성 사태를 조사하기 위해 출동했던
경호실 요원들이 철수하고 말았다.

궁정동 안가는 청와대 울타리 밖에 있었다.
이 포위명령은 청와대 내의 경호실 병력이 청와대 외부에 위치한 궁정동 안가
현장으로 접근하는 것을 2중으로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재전 경호실차장에게‘경호병력 동결’을 지시할 때의 정승화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혹시나 이재전이 ‘경호병력 동결’ 지시에 불복할 수도 있겠다 하는 의심을 했을 것이다.
이런 그에게 ‘수경사 병력이 청와대 외곽을 포위할 것’이라고 알려준 것은
‘경호병력이 이미 포위되어 있으니 다른 마음을 먹지 말라’는 묵시적 압력이었을 것이다.
안전조치를 2중으로 취한 것이다. 이에 이재전은 총장이 이미 수경사 병력까지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을 것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정승화가 실세라는 뜻이다.

정승화는 청와대에 있는 김계원과 아주 똑같은 조치를 취했다.
첫째는 경호실 병력이 범죄 현장으로 가는 것을 막아 진실규명의 길을 차단한 것이고,
둘째는 범인 김재규를 은닉시킨 것이다.

만일 정승화가 청와대 경호병력을 동결시키지 않았다면?
시해현장을 향해 출동했던 경호실 병력이 현장으로 갔을 것이고,
거기에 남아 있던 중정(중앙정보부) 총잡이들과 한판 전투를 벌였을 것이다.

중정 총잡이들이 사살됐거나 또는 체포됐을 것이고, 그랬다면
김재규와 정승화의 행적이 만천하에 드러났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김재규-김계원-정승화가 번개 같은 속도로 체포됐을 것이다.

수경사는 총장의 지휘를 받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차지철만의 지휘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경호실 병력 역시 차지철만이 지휘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정승화는 수경사령관과 경호실 차장 모두에게 총장의 지시 이외에는
그 어떤 지시도 받지 말라고 쐐기를 박았다.
서슬 퍼런 차지철이 살아있다면 언감 생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월권행위였던 것이다.
이때의 정승화 마음속엔 차지철이 이미 죽고 없었던 것이다.
차지철과 대통령이 함께 식사를 하다가 대통령이 살해됐다면
차지철도 살해됐을 것이라고 믿는 게 상식이다. 그렇다면 맨 먼저 의심이 가는 대상이
대통령과 함께 식사를 했던 김재규일 것이다.
이런 의심이 수경사령관과 경호실차장으로부터‘부대 이상 없음’이라는 말로 확인됐고,
이를 확인한 정승화는 차지철이 지휘하는 두 사람,
즉 경호실차장과 수경사령관에게 직접 명령을 내렸고,
그 명령은 김재규를 보호하는 명령이었다.

정승화는 아마도 김재규와 “한 배”를 탔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의리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자신이 살아남으려면 김재규를 살려내야만 한다는 생각을
했을 수 있었을 것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면 정승화가 감히 그렇게
빨리 경호실 병력을 동결하는 조치까지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1979년 12월 22일자 전성각의 진술조서에는
정승화 총장의 월권행위가 잘 드러나 있다.

정승화의 명령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수경사 상황실에 알아보니 안가 쪽에서
총성이 났다는 보고를 들었다. 이상하다 직감하면서 벙커로 갔다. 정총장의 모습이 초조하고
당황해 하는 것 같았다. 수경사의 지휘는 경호실장이 한다. 갑자기 총장이 지휘하는 것이 이상했다.

병력출동에 대한 상황처리에서 정승화는 최초에 20사단과 9공수여단에게는 출동명령을
내렸었다. 그리고 나중에 생각하기를 그렇게 하면 사회가 소란스러워지게 되고 사회가
소란스러우면 김재규에 불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출동 명령을 취소시켰다.
이 역시 정승화가 김재규 편에 서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정승화가 김재규와 한 편이 될 마음이 없었다면
그는 가장 먼저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보고를 했어야 했다.
“장관님, 금방 각하께서 총격을 받아 사망하셨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만나 뵙고 보고 올리겠습니다.
우선 제 생각으로는 1.3군에 진돗개2를 발령하고
군 핵심 수뇌들을 소집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어려운 일, 복잡한 일,
민감한 일을 할 때에는 책임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라도
여러 사람들과 의논하여 공개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고위직들의 생리다.
그런데 정승화는 모두를 따돌리고 혼자서
비밀스럽게 상황을 처리했다.

국방장관이 도착했을 때 그동안 자기가 겪었던 일들을 소상히 이야기 하고
처분을 기다렸어야 했다. 만일 이렇게 했다면 국방장관은 즉시 보안사령관을 불러
김재규-김계원-정승화를 모두 데려다 조사하라고 지시했을지 모른다.
아마도 정승화는 ‘비상국무회의’가 끝날 때까지만 잘 넘기면
막강한 계엄사령관이 될 텐데 여기에서 체포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계엄은 전시,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를 맞이하여
군 병력의 동원이 없으면 공공의 질서가 유지될 수 없을 경우에
한하여 대통령이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선포하는 것이다.
정승화는 육해공군 3개 군 총장들 중에서 육군참모총장일 뿐이었다.
대통령 유고에 대한 상황처리의 주체는 국방장관과 최규하 총리였다.
국방장관이 핵심수뇌들 및 참모들과 함께 의논하고 의논한 결과를
비상국무회의에 반영시킨 후에 처리했어야 할 그런 중대한 사안을
정승화는 비상국무회의도 열리기 전에 그리고 국방장관과 총리를
배제한 채 불법적인 월권을 했던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아마도 정승화는 김재규가 차에서 그를 치켜 올릴 때
이미 계엄사령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들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그는 김재규가 차에서 시킨 대로 비밀을 지키면서 묵묵히
그리고 재빠른 속도로 계엄을 선포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했다.
이에 더해 정승화는 벙커에 오자마자 경호실 병력을 동결시키는 명령을 내려
결과적으로 김재규가 저지른 사고현장을 보호하고, 범인이 누구인지
규명할 수 없도록 했다.

이 모두가 고위급 장군들에게는 합치된 상식이요 상황처리 공식에 속했던 것이다.
마치 농구나 축구선수들이 일일이 말로 하지 않고 순간순간의 눈치로
팀워크를 이루어 내듯이! 김재규, 김계원, 정승화 이 세 사람이 일치된 행위를
보인 것은 이 세 사람이 한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김재규가 추진하고 있는 유혈혁명에 공조하는 것으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목적이 같기에 두 사람이 취한 조치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을 주도한 법관들은 이러한 장군 세계의 상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승화가 이재전에게 경호병력을 동결하라 지시한 것이
김재규를 감싼 행위가 아니라고 판결했다.

수사기록으로본 12.12 와 5.18 중에서...
 
 

5.18은 폭동입니다.

5.18이 민주화운동이란것은

명백한 사기입니다.

계엄군이 자위권으로 총을쏜 상황을 폭도들이 만들었죠.

계엄군에 차량을 돌진시키고 경찰에 차량을 돌진시켜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했지요.

또 5.17 비상계엄은 정당한 헌법명령이었습니다.

최규하와 이희성계엄사령관이

당시의 폭력난동을 진압하기위해

비상계엄을 발동한것입니다.

수십만 데모 군중이 연일 최규하정부 물러나라고 난동을 부리고

경찰을 깔아 죽이고 파출소를 불태우고....

이런 상황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지 않을 대통령이 어디 있겠습니까?

해서 5.17비상계엄을 선포한거에요.

이 비상계엄을 불러오게한 원흉이 바로

김대중 입니다.

김대중은 박정희가 서거하자

이때다 하고서는

폭력시위를 주도하면서

최규하정부에 엄포를 놓고

정권을 내어놓으라 협박한것입니다.

이런것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용납될수 없는 반란행위지요.

이런 관계로 5.18폭동 진압이후 김대중은 사형선고를 받게 되는겁니다.

5.18폭동이 일어나고

공수부대원은

헌법이 명한데로 시위진압에 나선것이고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김대중의 하수인들은 폭력시위를 벌였고

수많은 유언비어를 퍼트리면서

일반시민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합니다.

그 유언비어가 모두 지역감정유발시키는 거짓말들입니다.

요즘 말로 보이스 피싱이라고 봐야겠죠.

이렇게 폭력시위가 극에 달하면서

부상자 사상자가 속출하게 됩니다.

전쟁을 방불케하는 폭력시위현장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어야 한다는건 불가능한 주문입니다.

그리고 비상계엄하에서

시위는 어떤 이유든 불법이고

진압당해야 하는겁니다.

사실이 이런데 어떻게 5.18폭동이 민주화운동이 됩니까?

현재

교과서나

방송등에서 나불거리는

대국민사기 민주화운동 픽션은

89년 황석영 윤이상이

월북하여

김일성 지령받아 만든 픽션입니다.

해서 이 내용은 엄청 허술합니다.

요약하자면

전두환이 쿠데타를 했다.

이를 막기위해 광주시민들이 시위를 했다.

전두환은 광주시민을 학살하라 지시했다.

입니다.

자 여기서 이 엉터리 픽션의 핵심이 있습니다.

전두환이 쿠데타를 하여 정권을 찬탈하려 한다는 정보를

광주시민이 어떻게 알았는가 하는겁니다.

전두환이 쿠데타 한다고 자랑하고 다녔습니까?

전두환이 쿠데타를 할려고 하였다면

비밀스럽게 진행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만약 전두환이 쿠데타를 하려한다는 정보를

전두환 측근이 광주시민에 주었다면

그 측근이 누구인지 밝혀야겠지만 그런 인물은 전혀 없습니다.

또 광주시민들이 만약 그 쿠데타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면

그것이 사실인지 어떻게 확인했는가 입니다.

한나라의 정권을 무력으로 찬탈하려 한다는 정보는

매우 중대한 사건이고 그에대한 정확한 정보 확인 절차가 있어야 합니다.

자 어떻게 광주시민들은 전두환이 쿠데타를 하려 한다는 정보를 확인했을까요?

89년 황석영이 월북하여

김일성 지령받아 만든

5.18 항쟁 픽션에는 이런 사항이 없습니다.

사실관계에서도 이런 사항은 전혀 없습니다.

5.18폭동 사기꾼들이

폭동을 무리하게 사기치려다 보니

이런 사항이 쏙~ 빠진거죠.

또한가지

전남 무기고 38개가 단 4시간만에 털렸습니다.

극비사항인 무기고위치를 광주시민은 어떻게 알고있었는가 하는 겁니다.

2개연대분의 무기가

단 4시간만에 털렸는데

이 사항을 점검해 봅시다.

먼곳은 100키로

인접한 반경 40키로

내의 극비사항인 무기고 38곳이 털렸습니다.

단4시간 만입니다.

목적지로 가는데 1시간..

(버스내에는 무기를 탈취할 조직이 미리 탑승하고 있었고

이는 대략 16명 의 인원일겁니다.

무기고 위치 정보보유자 1명

운전자 1명

무기적재자 10명

내부 감시자 2명

외부 감시자 2명

이들은

이들만 무기고를털러가면 정체가 드러날 가능성이 있기때문에

위장 그리고 들러리로 시민들을 탑승시킵니다.

그리고 무기를 적재할 군용 트럭도 몰고 갑니다.

군용 트럭에는 대략 2.5톤의 무기가 적재 됩니다.

이이상 적재 되면 트럭이 낙오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군용트럭에는 적량의 무기를 적재해야 하는것이고

이 무기들의 쓰임새와 적재시 안전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노하우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준비를 하여 목적한 무기고 까지 가는데 1시간 걸릴겁니다)

무기를 적재하는데는 빠른 속도가 필요했을겁니다.

정부에서 급파된 정부요원들이 이들의 사진을 찍을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 내용을 보면 실제 그런 일이 있었다

북특전사 출신들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해서 10여명이 대략 2.5톤의 무기를 빠른 속도로 적재했을겁니다.

다시 시위장소로 복귀하는데 대략 30~40분 정도 소요 되었을 겁니다.

먼곳은 더 많은 시간을

그리고 예비군대대나 지서에는 더 많은 차량과 인원이 갔을 겁니다.

즉 전남지역에 널려있는 38개 무기고 ....직경 100키로 미터 내의...

무기고를 단 4시간만에 이런식으로 다 털었다는 것은

사전 준비가 매우 치밀한 군사 작전이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대한민국 현역 군인들로

6개월이상 훈련을 시켜도 불가능한 군사 작전이었습니다.

이런 사항을 어찌 광주시민들이 할수있었겠는가

그런데 2006년 북특전사 출신 탈북자들이

5.18폭동당시

북특전사가 남파되어

폭동을 유발 확대시키기 위해 무기고를 털었다 진술하였으며

그 내용이 매우 구체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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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폭동이 진압되고나서

전라도에서는 지역감정이 극에 달합니다.

경상도 차량에는 기름을 주유해주지않고

경상도 사람에는 밥도 팔지않고

경상도 사람에는 여관방도 내어주지 않고

경상도 사람에 김대중 만세 삼창을 부르게 시켰습니다.

민주화 운동 했다면서

왜 지역감정이 극에달하여 경상도 사람에 저런 행동을 했을까요?

이는 지역감정 유발시키는 유언비어에 일어난 폭동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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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옹호론자들의 주장
수사기록은 신군부가 작성한것이므로 믿을수없다.
교도소 습격사건은 조작이다.
탈북자들의 주장은 증거가 없다.
5.18측 자료는 유네스코가 인정했으므로 믿을수있다.
전두환은 하극상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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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이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는측은 5.18측 주장만 옳다하고
5.18이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측은 5.18측 주장이 틀렸다고 하는겁니다.
그러니 5.18이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신다면
5.18측이 제시하는 자료들중 의문나는 점을 해결해줘야 하는겁니다.

그런데 그 의문나는점이 5.18의 핵심 내용입니다.
5.18이 일어나게한 원동력이고
확장되어 대규모 무장시위를 하게된 두뇌라고 할수있죠

다이너 마이트가 광주 시민이라면
이 다이너 마이트가 터질수 있도록 불을 당긴 사람말입니다.

누군가 전두환이국권 찬탈하려한다고했다 ,
누군가 경상도군인이 전라도 씨말리러 왔다고 했다,
누군가 무기고를 털자고해서 몰려갔다,
누군가 무기고 위치를 알아서 따라갔다,
누군가 교도서를 습격하자고해서 따라갔다...

이런 5.18을 민주화운동이라 주장하는측의 자료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누군지는 몰라도 누군가가 그렇다 하기에 확인도 하지 않고
쫒아가서 얼떨결에 민주화운동했다....입니다.

그럼 왜 누군가가준 정보
그리고 누군가가준 정보의 진위확인이 중요한지
설명하겠습니다.

++++++++++

예를 들어
차가 도로가에 한대 서있습니다.
그리고 그 차 앞에는 한 여인이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 옆에는 운전자가 그 여인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10여명의 남자들에게
누가 차로 저 여인을 치어 살해했다 알려줍니다.

그래서 그 10명의 남자들이 화가 단단히 나서
사건 현장으로 달려가려 합니다.

헌데 누군가 이들에게 몽둥이를 줍니다.

그 몽둥이를 들고 사건현장으로 달려가
그 운전자를 두들겨 패 줍니다.
그리고 운전자가 사망했습니다.

자 이 10명의 남자들은 의인일까요?
폭력배 일까요?



나중에 안 사실은
도로가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있는 여인을
운전자가 발견하고 앞에 차를 세웁니다.
그 여인의 상태를 확인하려 앞에 서있었던 겁니다.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
누가 10명의 남자들에게 그 정보를 줬는지
누가 몽둥이를 줬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이들은 의인일까요?
폭력배일까요?


++++++++++++++++

그러면 이런질문을 할수있을겁니다.

만약 실제 그 운전자가 그 여인을 차로 치었다면
그들은 의인인가? 폭력배인가?

이에 대한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그렇다면 민주화운동이란것이
모 아니면 도로
정확한 사실확인 없이
누군가의 말에 의존하여
일단 저지르고 본다음
운좋게 맞아떨어지면 민주화운동이되고
아니면 폭력배가 된단 말인가?

++++++++++

이렇기 때문에

최초정보제공자

최초정보전달자

정보의 진위확인자가 중요한겁니다.

+++++++++

5.18폭동 옹호론자들이 절대 거짓말 할수없는 내용 (1).

전두환이 정권을 찬탈하려 한다는 정보말이죠
이는 엄청난 중대 사건입니다.

한나라의 정권을 무력으로 잡겠다는거죠
그럼 이 정보를 누군가 알아내서 대학생이나 광주시민에게 전달했을거 아닙니까?

그사람이 누구입니까?

설마 누구인지도 모르는 어떤이가 그런 중요한 정보를 광주시민에게
전달하여 무장투쟁을 하자 했는데

아무런 확인도 없이 네~그렇군요 하고서는
무기고 탈취하여 계엄군에 총을 쏜게 아니것죠

그리고 그 누군가 즉 정보를 전달한 이의 정보가
정확하다는걸 광주시민들은 어떻게 확인하였는가?

(전두환이 국권을 찬탈하려한다.

최규하는 허수아비다. 이에대한 정보 진위를 어떻게 확인했나요?)

사실확인을 했으니
"맞다! 전두환이 정권을 찬탈하려한다 는 정보와 사실이 딱~ 맞다"
인정하고 무장투쟁을 했겠지요.

이런 사실확인도 없이
무작정 무기고 털어서 무장항쟁을 하진 않앗겠지요

자! 누가
어떤경로로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아내서
광주시민 누구에게 전달하였고

그 광주시민은 어떻게 그 사실이 맞다는걸
확인 하였는지
설명해 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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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폭동 옹호론자들이 절대 거짓말 할수없는 내용 (2).

38개 무기고 위치를 누군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왜 나타나질 않는가?
국가 유공자가 뭔지 몰라서?
죄의식때문에?
아니면 38개 무기고 위치를 안사람은
현재 대한민국에 살지 않아서?
설마 귀신이 38개 무기고 위치를 알려줬다고 말하고 싶은건 아니겟죠.

누군가는 알고있었것지?

무기고 탈취는 매우 중요한 대목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 위치를 누가 알려줬는지 아무도 모른다?

즉 5.18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사람이 있기는 한데
누구인지는 모른다?

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사람
광주5.18의 핵심 역할을 한사람
이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정보 유출자
정보 전달자
정보 확인자
정보 확산자

무기고 위치를 알고있었던자 최소38명

이들은 어디로 사라진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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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보제공자와 38개무기고위치정보제공자가 누구인의
중요성이 또하나 있습니다.
만일 5.18이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는 측에서
위 정보제공자들을 알지못한다면
5.18의 주인이 바뀔수 있다는 겁니다.

5.18의 주연급들이 누군인지 모르기때문에
막말로 개나 소나 돼지가 와서 그 정보는 내가 알려줬다 라고 한다면
5.18의주인이 정신병자 혹은 개나 소나 돼지가 될수 있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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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정보제공자 무기고 위치 정보제공자 이들이 사망했다 가정한다면
만약 이들이 사망했다고 한다 하더라도 또다른 의문이 여기 가세하는 겁니다.
이 중요 정보제공자의 정보를 확인한 절차가 없다는것이 이상한겁니다.
누군가 최초 정보를 줬는데 100퍼센트 믿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시위를 했다?
극비사항인 무기고 위치를 누군가 알고있어 안내하는데 이에 아무도 의심을 갖지 않았다.?
38개 무기고를 털러간 38개 조직이 있습니다.
이 조직들중 극비사항인 무기고위치정보제공자에 대하여

신분이나 그 정보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물어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 의혹을 해소시켜 주지 않는다면
결국 5.18주인공은 북 특전사 출신들이 되는겁니다.

누군가 전두환이국권 찬탈하려한다고했다 ,
누군가 경상도군인이 전라도 씨말리러 왔다고 했다,
누군가 무기고를 털자고해서 몰려갔다,
누군가 무기고 위치를 알아서 따라갔다,
누군가 교도소를 습격하자고해서 따라갔다

그런데 북특전사 출신들이 그 누군가가 우리요 하고 5.18의 주인임을 천명했고
이에대한 구체적 진술을 했습니다.

자 이 사건 즉 북특전사들의 증언

이들이 증언한 5.18관련 내용의 의미가 바로
5.18주인이 없다는 것이고, 5.18측에서 그 누군가를 제시하지 못하면
5.18주인은 북특전사가 될수있는겁니다.

특히 유언비어 그리고 38개 무기고 위치를 어떻게 파악하여
38개 분팀을 만들어 무기고까지 갔는지 매우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5.18이 순수 광주시민들에 의해 일어났다면
빨리 정보제공자 ,38개 무기고위치 정보제공자를 찾아내야 하는겁니다

누군가 운전하다가 교통사고를 내고 뺑소니를 쳤다.
운전자는 도망쳐 어디론가 사라지고 자동차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그럼 자동차가 범죄자인가?
운전자가 범죄자죠?
그 운전자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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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남은
5.18유네스코등재 설명은 매우 간단합니다.
히로시마 원폭돔도 평화의 상징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
유네스코는 특별한 사건이면 무엇이든 등재시킬수 있는곳입니다.

따라서 5.18이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고

민주화운동이라 고무도장을 찍어준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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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폭동 옹호론자들이 절대 거짓말 할수없는 내용 (3).

전두환은 하극상을 일으켰다?
정승화가 계엄사령관이고 전두환보다 계급이 높아서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이 체포하면 하극상이 된다?

그렇다면 상급자가 범죄를 저지르면 모두 하극상이 되고
대통령이 범죄를 저지르면 아무도 체포할수 없는것인가?
대한민국의 법은 만인에 전국민에 공평하기때문에
대통령이든 계엄사령관이든
범죄를 저지르면 집행자에 의해 언제든지 체포될수있다.

정승화는 범죄자 김재규의 뜻에 동조하여 직속상관인
국방장관의 명령없이 불법적인 계엄선포를 진행했고
이과정은 5.18민주화운동이라 주장하는 측에서도 알고있는 내용이다.

(제 블로그 12.12의 진실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즉 정승화는 운좋게 계엄사령관이 되기 이전에
범죄를 저질렀고 범죄자가 계엄사령관이 된것에 불과하다.

정승화와 최규하는 전두환에 조사를 받고있다는 사실도 알고있었다.

만약 정승화를 체포한것이 하극상이나 쿠데타가 된다면

정승화와 최규하를 수사한것도 하극상이고 쿠데타가 되는것이다.

그런데 정승화와 최규하는 전두환의 수사에 적극협조를 하였다.

특히 정승화는 전두환의 수사과정에 수차례 번복까지 하였다.

수사를 받는다는것은 용의선상에 있는 사람들이고

이는 곳 혐의가 있으면 언제든지 체포된다는 말이다.

즉 수사를 받고있던 정승화 최규하는 언제든지 체포될수있다는것에 동조한것이나 다름없다.

또 전두환의 수사내용이 부당하다 여겨지면 법정공방을 통해 밝히면 되는 일이었다.

이것이 어떻게 하극상이요 쿠데타인가?

++++++++++++

++++++++++++

5.18폭동 옹호론자들이 절대 거짓말 할수없는 내용 (4).

최규하는 전두환의 허수아비다?

전두환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였길래

그리고 최규하가 얼마나 나약했길래

허수아비가 된단말이죠

최규하가 허수아비라는 과학적 근거는 무엇입니까?

만약 최규하가 허수아비였다면 왜 지금은 대통령이 누군가의 허수아비가 되었는지

조사하지 않습니까?

전두환보다 더 무서운 김일성 김정일의 허수아비도 될수있을것이고

함마 전기톱 최류탄이 날아다니는 공포의 국회를보고 허수아비가 될수있을것이고

보다더 효과적인 최면이나 약물 아니면 가족을 인질로 잡아 협박하여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만들 가능성도 있는거 아닙니까.

이렇게 비추어볼때

만약 최규하가 전두환의 허수아비였다면

김영삼은 박계동의 허수아비고

노무현은 김대중의 허수아비고

김대중은 김정일의 허수아비고

이명박은 촛불좀비의 허수아비가 맞는겁니다.

+++++++++++++++++++

+++++++++++++++++++

전두환이 5.18폭도들과 다른것은

전두환은 정승화의 범죄사실을 면밀히 조사하여
증거를 확보하고 법에따라 체포한것이고

5.18폭도들은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에 의하여 들은 정보를
확인도 하지 않고 누군가가 털어준 무기로 무장하여
폭동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

5.18옹호론자들의 5.18기록을보면

누군가 전두환이국권 찬탈하려한다고했다 ,

누군가 경상도군인이 전라도 씨말리러 왔다고 했다,

누군가 무기고를 털자고해서 몰려갔다,

누군가 무기고 위치를 알아서 따라갔다,

누군가 교도소를 습격하자고해서 따라갔다.

즉 5.18민주화운동설을 보면

머리는 없고 몸통만 있습니다.

더욱 웃긴건 민주화운동이라고 대대적으로

매년 5월 18일 마다 기념하면서 5.18의 주역 핵심인물이 누구인지

대한민국 국민들은 물론이고 광주시민들,5.18을 연구하는 단체들 조차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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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태에서 전두환이 쿠데타를 하려한다는 정보를 정신병자가 줬다며 이런 주장을 할수도 있을겁니다.

5.18이 일어나게된 최초 정보제공자는...

어떤 정신병자때문 이었습니다.

이 정신병자는 누가 한말을 1년동안 반복하는 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운좋게 정신병원을 탈출합니다.

정처없이 돌아다니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궁금이왈 쿠데타가 뭐야 하고 물엇습니다.

아직 코흘리게인 친구 띨띨이가 그걸 알리 없엇습니다.

헌데 TV에 전두환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냅다.

전두환에게 물어봐

하고 답해줬드랍니다.

그걸본 정신병자는 전두환이 쿠데타를 안다? 라며 중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전두환이 쿠데타를 안다?

그는 잠자는 시간을 빼고서는 전두환이 구데타를 안다?를 반복햇습니다.

그 정신병자는 정처없이 걷다 전라도 광주까지 갔더랍니다.

전두환이 쿠데타를 안다?를 중얼거리면서.


전라도광주에 도착한 정신병자는 기진 맥진 힘이 다떨어졌습니다.

그래도 중얼거렷습니다. 전~두~환이 쿠~데타를 하~아~안~다?

전남대 앞에서 비틀거리기 시작햇습니다.

그를본 광주시민이 놀라 그를 부축해 줍니다.

그는 그 광주시민을 보며

마지막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전~두~환이 쿠~쿠~데타~를 하~아~안~다?

이말에 놀란 광주시민들이

전두환이 쿠데타를 한다 라고 오해하여 일어난 폭동이엇습니다.

이런 주장을 누가 한다면

5.18이 민주화운동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떤대응을 하겠습니까?

"정신병자설은 허위다 " 이렇게 대응한다면

당연히 반문할것입니다.

그럼 전두환이 쿠데타를 할것이라 정보를 알려준 사람이 누구냐?

자~어떤 답변을 주시겠습니까?

결론적으로 광주5.18

정확한 정보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서 일어난 폭동입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탈북을해 서울에 살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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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폭동옹호론자들이 절대 거짓말 할수없는 내용 (5).

상식적으로 봐도 5.18은 폭동.

백번 천번 양보해도 5.18은 폭동입니다.

5.18이 그들 주장처럼 독재에 항거한 민주화운동이었다면
독재에 항거했거나
탄압에 항거했거나
부정부패에 분노했거나
이런 류의 명분으로
진압이 되고나서
그 폭동에 가담했거나 동조 동의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지역은
그에 준하는 분위기와 문화를 가지게 될겁니다.

그런데
80년이후 대한민국에선
이런 말들이 기정 사실로 인식화 되어있었습니다.

전라도에 경상도 차량이 가면 기름을 주유해 주지 않는다
전라도에 경상도 사람이 가면 밥도 팔지 않고 여관방도 주지않는다
전라도에 경상도 말투를 쓰면 구타를 당하거나 김대중 만세 삼창을 불러야 한다

전라도에서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는데
진압이후 이들은 왜 경상도에 분노하고 원한을 가졌겠습니까?

이는 지역감정 유발시키는 유언비어에 일어난 폭동이기 때문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북의 공작이 없었다 해주어도
5.18은 결코 민주화 운동이 될수 없습니다.

++++++++++++++++++++++++++++++++++++

5.18폭동 옹호론자들이 절대 거짓말 할수없는 내용 (6).



5.18측 사진자료엔

시작과함께 결론만 있다.

과정이 없다.

계엄군이 대검을 차고 달리는 장면 , 그리고 무참히 죽은 시신

------과정이 없다.

계엄군이 대검으로 폭력시위대를 찌르는 장면이 전혀 없다.

계엄군이 화염방사기를 매고 달리는 장면, 그리고 무참히 그을린 시신

------과정이 없다.

계엄군이 화염방사기로 폭력시위대를 불태우는 장면이 전혀 없다.

모든 5.18측 사진 자료에는

계엄군이 총 대검 화염방사기를 소지하고 있는장면만 있다.

그리고 시신이 무참하게 훼손된 사진만 있다.

왜그럴까?

1980~1990년도 사이에

광주비디오를 가지고 다니면서

선동하던 일이있었다. 물론 사진도 확대하여 같이 가지고 다녔다.

그 광주비디오에는 누군가가 폭력시위대를 무참히 찌르고 가르는 장면이 있다한다.

그런데 왜 공개를 하지 않을까?

너무 잔인해서?

그럼 왜 그렇게 잔인한 사진은 공개하는건가?

답은 간단하다

계엄군은 폭력시위대를 찌르지도 가르지도 불태우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5.18폭동 옹호론자들이 절대 거짓말 할수없는 내용 (7).

-시체장사-

폭도들은 당시 심하게 훼손된 시체를 끌고 다니면서 시민들을 동요케하며 선전선동을 했다.

그 시체를 끌고다니면서 시민들을 동요케 했을때 광주시민들은 내용의 진위여부를 어떻게 확인했을까?

공수부대원들이 죽였다는 시체에 대하여 어떤 확인작업을 했는가.

어떤 확인작업을 했기에 우리 대한의아들 공수부대원들이

무고한 시민을 살해하고 시신을 무참히 훼손했다

단정지었는가.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5.18은 민주화운동이 맞습니다.

 

우선

 

12.12사태부터 아셔야합니다.

 

12.12사태는 반란입니다.

 

하물며 박정희의 5.16쿠데타조차 '반란'은 아닙니다.무력으로 합법정권을 뒤엎기는 했어도

 

2년간의 군정을 국민들에게 동의 받았으며 2년뒤에 국민들의 지지로 대통령이 됬으니 어쨋든 약속을 지킨겁니다. 나중에 문제가된게 3선개헌 유신헌법이지

오히려 5.16쿠데타는 그저 쿠데타입니다.

 

하지만 12.12사태는 국가적인 반란입니다.

 

박정희를 이어서 최규하가 임시로 대통령직을 하고있었고 임시적으로 비상계엄령을 내리고

 

일정시간이 지나면 민주적으로 선거를 하여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때 다짜고짜 군대 끌고와서 이 나라를 맘대로 먹은게 전두환이고 12.12사태입니다.

 

국가반란으로 규정됬고 그로인해 사형선고도 받았습니다.

 

 

이런상황에서 결코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가 제대로된 정통적인 공권력을 가졌다 보기 힘듭니다.

 

불법적인 권력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전국적으로 전두환을 반대하는 데모가 일어났습니다.

 

전두환은 이들을 어떻게 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5.18때 북한이 개입했냐 안했냐 시민이 먼저 경찰을 떄렸냐를 떠나서

 

전두환이 경찰,군대를 동원하는것조차 일단 불법입니다.

 

 

폭동에 대하여..

 

폭동이라는 단어는 매우 모호합니다.

 

폭동의 정확한 의미는 조직되지않는 집단이 일으킨 소요로 엄밀히말하면 왠만한 데모,시위같은것도 폭동이라고 부를수도있습니다만

 

폭동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뜻을 담고있습니다. 인류역사를 바꿔논 프랑스혁명도 어찌보면 폭동 이지만

 

루이16세가 프랑스혁명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폭동인가?'라고 물어봤지만 라 로슈푸코 리앙쿠르 공작은 '폐하 폭동이 아니라 혁명입니다'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나라에서나 riot,폭동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으로 쓰였다는것이 드러납니다.

순수한 단어뜻으로는 그렇게 나쁜뜻이 아닙니다.

한자만 봐도 폭동은 봉기와 비슷한 말입니다. 하지만 폭동과 다르게 봉기는 좋은뜻으로 쓰입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말하는 폭동은 '조직되지 않은 집단이 정당하지 않게 폭력을 사용함'이겠지요.

 

 

 

5.18이 폭동일수도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군부가 폭동 진압했으니 잘했다~고 말할수도없는것이죠.

 

가정을 해봅시다.

 

1.시민들이 멋대로 경찰과 군인을 죽였을경우

 

2.북한군이 개입하고 선동하여 국기를 뒤엎으려 한 경우

 

3.교과서에 나온 내용...

 

1,2의 가정으로 볼때 5.18폭동,사태라는 단어가 적합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신군부는 잘못한것입니다.

 

시민들이 먼저 멋대로 경찰과 군인을 죽이고 소란을 폈다 하더라도 지나친 과잉진압입니다.

 

죽은사람과 실종자는 어마어마합니다.

 

앞서말씀드렸듯이 전두환의 신군부는 불법정부입니다. 합법정부가 폭동이라 쳐도 저런식으로 진압하면 난리납니다. 하물며 군대동원도 못하는 불법정부가 그런식으로 탱크와 공수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했다면 오히려 신군부가 더 잘못입니다.

 

만약 북한군이 개입했다고 칩시다. 그래도 신군부는 잘못입니다. 비상계엄령 내리고 외국인출입도 제한한 마당에 겨우 북한군 하나 내려오는것도 못막았습니다.국가를 위기에 빠트릴뻔한 전두환의 잘못입니다.

어쩔수없이 빨갱이들을 진압했어야 한다고 쳐도 빨갱이들뿐만 아니라 시민들까지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시민들이 빨갱이들에게 선동당하게 막지도 못하고 선동당하니깐 죽여버렸다?

더 나쁜새끼죠.

 

 

그런데 문제는 1,2의 주장이 근거가 없다는것입니다.

 

죽은 시체를 봐도 전경과 군인,공수부대의 시체는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최초사망자또한 장애인 대학생으로 밝혀졌고요.

 

전두환에게 협박당하고 돈먹은 전문가들이 처음에는 시민군이 쓰던 카빈소총 총알이 더 많이 박혔다고 구라쳤으나 나중에 다시 밝혀졌습니다. 군인들이 쓰던 M16으로 대부분의 사람이 죽었다고요.

 

어떻게 시민들이 무기를 그렇게 잘 다루고 4시간만에 무기고를 터는게 가능하냐고 이것은 조직적으로 누군가가 선동했다고 하지요.

 

오히려 용어상으로 조직적이면 폭동이 아닙니다. 불법신군부를 무너뜨리려는 민중의 거룩한 저항입니다.

수꼴들이여 자폭하지 맙시다.

 

그리고 경찰서 위치야 동네사람들이 다알텐데 무기고 4시간만에 터는거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은데다가 대한민국남자 대부분이 군대를 갔다오는걸 감안할때 총 잘다루는것도 무리가 아니죠.

 

결국 우기는게 북한개입설입니다.

 

이거면 문제가 있어도 전두환이의 입장이 약간 덜 난감해집니다. 과잉진압이지만 나라 위급해질뻔한걸 막았으니깐요.

 

근데 이것도 근거가 없습니다.

 

5.18을 북한이 기념한다고 하죠?

 

북한은 남한에서 일어난 모든 민중항쟁을 기념합니다. 4.19혁명 6.10항쟁 부마항쟁 등등..

 

그리고 진짜 5.18을 북한이 개입한거라치면 그거 숨길라고 기념 안하죠. 등신입니까?

 

어이없는건 시체중에서 신원미확인자가 손에 꼽을정도고 대부분이 시민이고 일부 군인이라는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런상황에서 시체몇기는 신원미확인자가 나타나는건 당연한것)

 

북한군이 개입했고 공수부대하고 한판 붙었으면 적어도 공수부대나 북한군이나 시체가 있어야할것아닙니까?

 

거기다가 북한군이 내려오기도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졌습니다. 아무리 능력좋은놈들이라도 어떻게 뚫습니까?

 

그리고 많고많은 동네중에 하필이면 광주일까요? 지금이나 되니깐 광주가 좀 큰 도시지 30년전 광주는 그리 큰 도시도 아니었고 이점도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광주는 미군부대가 주둔하고있었는데 미군부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죠. 비상계엄 뚫고 내려온 물건(?)들을 미군부대가 가만히 나뒀는데

 

전두환이는 북한군이 내려온걸 감지하고 공수부대를 보냈다? 

 

전두환은 슈퍼맨이나 되나봅니다.

 

이 슈퍼맨인 전두환이가 시민들 그렇게 학살해놓고서는 빨갱이들을 하나도 못잡았습니다.

 

5.18이후 신군부가 간첩잡을라고 이짓을 했습니다.

 

1980년 5월 21일 날 오전 8시부로 전라남도 지역에 진돗개 하나가 발령이 됐다. 5월 23일 저녁 전 해양경찰에 해안경계태세 강화지시가 떨어졌다. 전남 일대 전 해안에는 31사단 병력의 이 부대는 대간첩 침투작전 부대 3개 연대가 경계를 했는데, 93연대가 목표지역 해안, 95연대가 고흥 여수 지역 해안, 96연대가 무안 영광 지역 해안경계를 했다. 광주에서 화순으로 빠지는 길은 공수부대 7사단과 11사단이, 나주와 목포, 영광으로 가는 길은 20사단이, 담양 쪽으로 빠져나가는 길에는 3사단이 투입돼 광주 외곽을 전부 막고 있었으며 31일에는 해안까지 경계가 강화됐다.

 

정리해보죠.

 

북한특수부대가 비상계엄을 뚫고 그 많고 많은 도시중에 광주로 도착-시민을 선동함-광주옆동네 미군부대는 븅신같이 이것도모름-근데 전두환은 어떻게 알았는지 광주로 공수부대 투입해서 빨갱이잡는다고 시민들까지 학살함-북한특수부대는 시체하나 안남기고 광주 빠져나감-전라남도 간첩들 잡는다고 철통포위-이렇게 쇼하는데 정보력 더쩌는 미군은 가만히 있음-간첩잡는다고 개지랄 다떨었는데 간첩들은 북한으로 아무일 없다는듯 흔적도없이 귀화함

 

 

판타지소설을 쓰고계십니다.

 

이 판타지소설을 쓸정도로 북한 특수부대가 개쩌는애들이라고 칩시다.

 

이정도 쩌는애들이라면 북한에서도 함부로 못움직이는 애들일테고 이정도 주도적이려면 김일성정도거물이 움직여야하겠지요?

 

하지만 당시 김일성은 루마니아 방문중이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특수부대 보낼정도로 중요한 작전에 루마니아 방문중?

 

아실분은 아시다시피 김일성이는 어느나라 방문할때는 수뇌부,정부요직 다 데려갑니다. 반란을 방지하기 위함이라나.... 80년대 동유럽 지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수뇌부,정부요직도 없이 특수부대 스스로 판타지같은 일을 했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무슨 북한은 도라에몽의 도구라도 있는걸까요?

 

 

그 외의 반박

 

5.18때 김대중 석방이라는 요구가 있었다. 그냥 김대중 하나 살릴라고 일으킨거다.-부마항쟁도 김영상 석방이 원인이었다. 그리고 김대중 좋아하냐 싫어하냐를 따지지 않고 일단 멀쩡한 정치인 잡아다논거 석방하라는게 뭐가 잘못된건지 모르겠다.

 

탈북자단체의 증언이 있다.북한이 븅도 아니고 그런 국가기밀을 그런애들한테 알려주겠냐? 그리고 인터뷰 요청은 왜 안받아들이냐. 신상 공개도 필요없고 최소한 모자이크 해줄테니깐 얼굴까고 인터뷰좀 하라는데 그것도 안받아주고 카더라~ 하면서 우기면 뭐가 되냐? '내가 그 특수부대였음'해도 못믿을판에..

 

지만원판결때 지만원의 의견을 대법원이 받아들인것으로 볼수있기 때문에 5.18은 폭동이라고 할수도있다?

 5.18은 민주화운동이 맞습니다.

 

우선

 

12.12사태부터 아셔야합니다.

 

12.12사태는 반란입니다.

 

하물며 박정희의 5.16쿠데타조차 '반란'은 아닙니다.무력으로 합법정권을 뒤엎기는 했어도

 

2년간의 군정을 국민들에게 동의 받았으며 2년뒤에 국민들의 지지로 대통령이 됬으니 어쨋든 약속을 지킨겁니다. 나중에 문제가된게 3선개헌 유신헌법이지

오히려 5.16쿠데타는 그저 쿠데타입니다.

 

하지만 12.12사태는 국가적인 반란입니다.

 

박정희를 이어서 최규하가 임시로 대통령직을 하고있었고 임시적으로 비상계엄령을 내리고

 

일정시간이 지나면 민주적으로 선거를 하여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때 다짜고짜 군대 끌고와서 이 나라를 맘대로 먹은게 전두환이고 12.12사태입니다.

 

국가반란으로 규정됬고 그로인해 사형선고도 받았습니다.

 

 

이런상황에서 결코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가 제대로된 정통적인 공권력을 가졌다 보기 힘듭니다.

 

불법적인 권력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전국적으로 전두환을 반대하는 데모가 일어났습니다.

 

전두환은 이들을 어떻게 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5.18때 북한이 개입했냐 안했냐 시민이 먼저 경찰을 떄렸냐를 떠나서

 

전두환이 경찰,군대를 동원하는것조차 일단 불법입니다.

 

 

폭동에 대하여..

 

폭동이라는 단어는 매우 모호합니다.

 

폭동의 정확한 의미는 조직되지않는 집단이 일으킨 소요로 엄밀히말하면 왠만한 데모,시위같은것도 폭동이라고 부를수도있습니다만

 

폭동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뜻을 담고있습니다. 인류역사를 바꿔논 프랑스혁명도 어찌보면 폭동 이지만

 

루이16세가 프랑스혁명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폭동인가?'라고 물어봤지만 라 로슈푸코 리앙쿠르 공작은 '폐하 폭동이 아니라 혁명입니다'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나라에서나 riot,폭동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으로 쓰였다는것이 드러납니다.

순수한 단어뜻으로는 그렇게 나쁜뜻이 아닙니다.

한자만 봐도 폭동은 봉기와 비슷한 말입니다. 하지만 폭동과 다르게 봉기는 좋은뜻으로 쓰입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말하는 폭동은 '조직되지 않은 집단이 정당하지 않게 폭력을 사용함'이겠지요.

 

 

 

5.18이 폭동일수도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군부가 폭동 진압했으니 잘했다~고 말할수도없는것이죠.

 

가정을 해봅시다.

 

1.시민들이 멋대로 경찰과 군인을 죽였을경우

 

2.북한군이 개입하고 선동하여 국기를 뒤엎으려 한 경우

 

3.교과서에 나온 내용...

 

1,2의 가정으로 볼때 5.18폭동,사태라는 단어가 적합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신군부는 잘못한것입니다.

 

시민들이 먼저 멋대로 경찰과 군인을 죽이고 소란을 폈다 하더라도 지나친 과잉진압입니다.

 

죽은사람과 실종자는 어마어마합니다.

 

앞서말씀드렸듯이 전두환의 신군부는 불법정부입니다. 합법정부가 폭동이라 쳐도 저런식으로 진압하면 난리납니다. 하물며 군대동원도 못하는 불법정부가 그런식으로 탱크와 공수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했다면 오히려 신군부가 더 잘못입니다.

 

만약 북한군이 개입했다고 칩시다. 그래도 신군부는 잘못입니다. 비상계엄령 내리고 외국인출입도 제한한 마당에 겨우 북한군 하나 내려오는것도 못막았습니다.국가를 위기에 빠트릴뻔한 전두환의 잘못입니다.

어쩔수없이 빨갱이들을 진압했어야 한다고 쳐도 빨갱이들뿐만 아니라 시민들까지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시민들이 빨갱이들에게 선동당하게 막지도 못하고 선동당하니깐 죽여버렸다?

더 나쁜새끼죠.

 

 

그런데 문제는 1,2의 주장이 근거가 없다는것입니다.

 

죽은 시체를 봐도 전경과 군인,공수부대의 시체는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최초사망자또한 장애인 대학생으로 밝혀졌고요.

 

전두환에게 협박당하고 돈먹은 전문가들이 처음에는 시민군이 쓰던 카빈소총 총알이 더 많이 박혔다고 구라쳤으나 나중에 다시 밝혀졌습니다. 군인들이 쓰던 M16으로 대부분의 사람이 죽었다고요.

 

어떻게 시민들이 무기를 그렇게 잘 다루고 4시간만에 무기고를 터는게 가능하냐고 이것은 조직적으로 누군가가 선동했다고 하지요.

 

오히려 용어상으로 조직적이면 폭동이 아닙니다. 불법신군부를 무너뜨리려는 민중의 거룩한 저항입니다.

수꼴들이여 자폭하지 맙시다.

 

그리고 경찰서 위치야 동네사람들이 다알텐데 무기고 4시간만에 터는거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은데다가 대한민국남자 대부분이 군대를 갔다오는걸 감안할때 총 잘다루는것도 무리가 아니죠.

 

결국 우기는게 북한개입설입니다.

 

이거면 문제가 있어도 전두환이의 입장이 약간 덜 난감해집니다. 과잉진압이지만 나라 위급해질뻔한걸 막았으니깐요.

 

근데 이것도 근거가 없습니다.

 

5.18을 북한이 기념한다고 하죠?

 

북한은 남한에서 일어난 모든 민중항쟁을 기념합니다. 4.19혁명 6.10항쟁 부마항쟁 등등..

 

그리고 진짜 5.18을 북한이 개입한거라치면 그거 숨길라고 기념 안하죠. 등신입니까?

 

어이없는건 시체중에서 신원미확인자가 손에 꼽을정도고 대부분이 시민이고 일부 군인이라는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런상황에서 시체몇기는 신원미확인자가 나타나는건 당연한것)

 

북한군이 개입했고 공수부대하고 한판 붙었으면 적어도 공수부대나 북한군이나 시체가 있어야할것아닙니까?

 

거기다가 북한군이 내려오기도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졌습니다. 아무리 능력좋은놈들이라도 어떻게 뚫습니까?

 

그리고 많고많은 동네중에 하필이면 광주일까요? 지금이나 되니깐 광주가 좀 큰 도시지 30년전 광주는 그리 큰 도시도 아니었고 이점도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광주는 미군부대가 주둔하고있었는데 미군부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죠. 비상계엄 뚫고 내려온 물건(?)들을 미군부대가 가만히 나뒀는데

 

전두환이는 북한군이 내려온걸 감지하고 공수부대를 보냈다? 

 

전두환은 슈퍼맨이나 되나봅니다.

 

이 슈퍼맨인 전두환이가 시민들 그렇게 학살해놓고서는 빨갱이들을 하나도 못잡았습니다.

 

5.18이후 신군부가 간첩잡을라고 이짓을 했습니다.

 

1980년 5월 21일 날 오전 8시부로 전라남도 지역에 진돗개 하나가 발령이 됐다. 5월 23일 저녁 전 해양경찰에 해안경계태세 강화지시가 떨어졌다. 전남 일대 전 해안에는 31사단 병력의 이 부대는 대간첩 침투작전 부대 3개 연대가 경계를 했는데, 93연대가 목표지역 해안, 95연대가 고흥 여수 지역 해안, 96연대가 무안 영광 지역 해안경계를 했다. 광주에서 화순으로 빠지는 길은 공수부대 7사단과 11사단이, 나주와 목포, 영광으로 가는 길은 20사단이, 담양 쪽으로 빠져나가는 길에는 3사단이 투입돼 광주 외곽을 전부 막고 있었으며 31일에는 해안까지 경계가 강화됐다.

 

정리해보죠.

 

북한특수부대가 비상계엄을 뚫고 그 많고 많은 도시중에 광주로 도착-시민을 선동함-광주옆동네 미군부대는 븅신같이 이것도모름-근데 전두환은 어떻게 알았는지 광주로 공수부대 투입해서 빨갱이잡는다고 시민들까지 학살함-북한특수부대는 시체하나 안남기고 광주 빠져나감-전라남도 간첩들 잡는다고 철통포위-이렇게 쇼하는데 정보력 더쩌는 미군은 가만히 있음-간첩잡는다고 개지랄 다떨었는데 간첩들은 북한으로 아무일 없다는듯 흔적도없이 귀화함

 

 

판타지소설을 쓰고계십니다.

 

이 판타지소설을 쓸정도로 북한 특수부대가 개쩌는애들이라고 칩시다.

 

이정도 쩌는애들이라면 북한에서도 함부로 못움직이는 애들일테고 이정도 주도적이려면 김일성정도거물이 움직여야하겠지요?

 

하지만 당시 김일성은 루마니아 방문중이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특수부대 보낼정도로 중요한 작전에 루마니아 방문중?

 

아실분은 아시다시피 김일성이는 어느나라 방문할때는 수뇌부,정부요직 다 데려갑니다. 반란을 방지하기 위함이라나.... 80년대 동유럽 지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수뇌부,정부요직도 없이 특수부대 스스로 판타지같은 일을 했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무슨 북한은 도라에몽의 도구라도 있는걸까요?

 

 

그 외의 반박

 

원래 폭동이었는데 김대중,노무현때 명칭이 바뀐것이다. 김대중,노무현은 고사하고 김영삼때도 아닌 노태우때 이미 정식명칭은 5.18민주화운동이었습니다.

http://archives.kdemo.or.kr/PhotoView?pPhotoId=00755073

 

 

5.18때 김대중 석방이라는 요구가 있었다. 그냥 김대중 하나 살릴라고 일으킨거다.-부마항쟁도 김영상 석방이 원인이었다. 그리고 김대중 좋아하냐 싫어하냐를 따지지 않고 일단 멀쩡한 정치인 잡아다논거 석방하라는게 뭐가 잘못된건지 모르겠다.

 

탈북자단체의 증언이 있다.북한이 븅도 아니고 그런 국가기밀을 그런애들한테 알려주겠냐? 그리고 인터뷰 요청은 왜 안받아들이냐. 신상 공개도 필요없고 최소한 모자이크 해줄테니깐 얼굴까고 인터뷰좀 하라는데 그것도 안받아주고 카더라~ 하면서 우기면 뭐가 되냐? '내가 그 특수부대였음'해도 못믿을판에..

 

지만원의 판결로 인해서 5.18을 폭동이라고 불러도된다? http://pds25.egloos.com/pds/201212/30/07/2010____51.pdf

 

판결문이나 보고 반성하시고요. 지만원 소송은 전적으로 명예훼손에 관련된 소송입니다.

오히려 96년 대법원판결에서 5.18은 민주화운동으로 종결됬습니다.

 

 

 

 

 

 

 

최근 인터넷에서 나돌고 있는 유언비어들과 터무니 없는 주장들을 정리해봤습니다.


대법원에서는 이미 5·17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을 내란죄(폭동죄) 및 반란죄로
사형 선고를 내린 바 있습니다. 폭도는 전두환입니다.
폭도에게 맞서 싸운 사람들이 폭도라는 주장만큼 황당한 주장이 어딨습니까.

* 5.18을 폭동이라고할때 하는주장 list

1. 시민군의 무기 사용
1.01 계엄군이 총기를 발포하기 전 시민군이 먼저 총을 쐈다. 이를 증명하는 힌츠페터의 영상이 있다.
1.02 시민군이 조직적으로 군사적 기밀 장소인 무기고 습격을 짧은 시간 내에 46곳이나 한 것은 당시 광주에 불순분자가 배후로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1.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장갑차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1.04 신원미상의 시체가 있다는 것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의 소행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1.05 시민군은 도청에 TNT를 설치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다.
1.06 시민 측에서 의도적인 버스 돌격으로 경찰이 먼저 사망했다.
1.07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망자의 70% 가량이 시민군이 사용한 총기에 의해 사망했다.
1.08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중화기와 무전기로 중무장했던 것은 광주에 불순분자가 배후로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1.09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복면을 사용한 것은 이들이 남파 간첩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1.10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은 북한군의 무기였던 AK 소총 및 파파샤를 사용했다.
1.11 시민군에게 "조선인민군" 마크가 있는 실탄 사진이 있다.
1.12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은 시민들에게 총기를 무작위로 배포함으로써 극렬한 사회 분란을 조장했다.

2. 북침설
2.01 북한에서 5·18민주화운동을 기념한다는 것은 당시 북한이 광주에 간첩을 보낸 것을 의미한다.
2.02 북침설에 대한 증언이 있다(임천용 및 자유북한군인연합).
2.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일어난 간첩 신고에 대한 기사가 있다는 것은 5·18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개입했음을 증명한다(이창용).
2.04 5·18민주화운동 당시 일어난 간첩 신고에 대한 기사가 있다는 것은 5·18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개입했음을 증명한다(전옥주 및 차명숙).
2.05 인민군영웅렬사묘(인민군 영웅들의 렬사묘)에는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군인들을 기념하는 비석이 있다.
2.06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군은 잠수함을 통해 광주에 침입해 있었다.
2.07 윤기권이 5·18민주화운동 유공자임에도 불구하고 월북했다는 것은 이들이 간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2.08 5·18민주화운동 당시 배후세력이 있다는 사실을 신군부가 발표한 바 있다.
2.09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에서는 5·18민주화운동을 생중계했다.
2.10 (1.10) 시민군은 당시 북한군의 무기였던 AK 소총 및 파파샤를 사용했다.
2.11 (1.11) 시민군에게 "조선인민군" 마크가 있는 실탄 사진이 있다.
2.12 1985년 북한에서 발행된 '광주의 분노'라는 서적은 5·18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개입했음을 증명한다.

3. 기타
3.01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요구한 것은 민주화가 아닌 김대중의 석방에 불과했다.
3.02 어린이/임산부/학생에게도 총을 쐈다, 계엄군이 대검을 사용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3.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조직적으로 교도소를 습격했다.
3.04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파출소 등의 공공시설을 파괴했으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다.
3.05 고등법원은 지만원이 받은 소송에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라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3.06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은 절도를 자행했다.
3.07 80년대에 미국은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했으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다.
3.08 5·18민주화운동 진압 당시 대통령은 최규하였으므로 5·18민주화운동과 전두환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3.09 5·18민주화운동은 민주화에 대한 공로가 없으므로 민주화 운동이 아니다.
3.10 5·18민주화운동 당시에 유언비어가 나돌았으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다.
3.11 계엄 선포 당시의 사회 상황을 고려하면, 5·17비상계엄전국확대(5·17 쿠데타)는 정당화될 수 있다.
3.12 전두환은 이후에 사면을 받았으므로 내란죄와 무관하다.
3.13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무력을 사용한 건 사실이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으로 불려도 상관없다.
3.14 5·18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은 김대중 정부가 내린 편파적인 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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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민군의 무기 사용
1.01 계엄군이 총기를 발포하기 전 시민군이 먼저 총을 쐈다. 이를 증명하는 힌츠페터의 영상이 있다.
출처 : http://study21.org/518/photo/5-19.htm
http://www.study21.org/518/video/5-20.htm

이같은 유언비어의 퍼져나간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역사학도라는 한 극우인사의 황당한 주장에 있습니다.


역사학도에 따르면, 위 사진은 계엄군이 발포하기 전날인 20일 힌츠페터가 광주에서 촬영한 영상(http://www.youtube.com/watch?v=Rq_qa1HhnBo)에서 가져온 캡쳐 사진입니다. 사실 역사학도는 힌츠페터가 "조총련의 간계에 말려들어 조총련 충복 노룻"을 했다며 영상 촬영 날짜의 신뢰성을 스스로 비하하고 있지만, 이를 떠나서 영상 어디에도 해당 영상이 20일에 촬영됐다는 코멘트는 보이지 않습니다. 힌츠페터는 5월 19일에 광주로 내려갔다가, 도쿄에 돌아간 뒤 5월 23일에 다시 광주로 돌아가 광주 시민들을 촬영했습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0034715) 즉, 해당 영상은 광주시민들이 무장한 뒤인 23일에 촬영된 영상입니다. 20일에 촬영됐다는 주장은 단순히 그가 19일에 광주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내세우는 황당한 추측일 뿐입니다.

또한 역사학도는 위 사진이 5월 19~20일 사이의 사진이라는 단서가 "[광주 시민]이 이미 5월 19일에 나주경찰서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했기 때문이라 주장하고 있지만 이 역시 근거 없는 황당한 주장입니다. 1995년 완료된 5.18사건 의문점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에 따르면(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02648), 시위대가 본격적으로 무기탈취에 나서 나주 경찰소의 무기 가져간 것은 21일 오후 1시께 전남도청 앞에서 있었던 공수부대의 발포 다음입니다.


실제로 총을 먼저 발사한 건 계엄군입니다. 5월 19일, 계엄군 장갑차가 시위 군중에게 포위되자 계엄군은 시민을 향해 발포해 당시 조대부고에 다니던 학생이 총상을 입었습니다. 이를 보고 군의 정당방위라고 주장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5월 20일 밤 11시경 광주역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와 시위대의 공방전이 격렬해지고 시위대가 차량을 앞세워 군의 저지선을 돌파하려하자 계엄군이 또다시 발포를 했습니다. 이 때 비무장 시민 두 명이 죽었다는 것은 당시 계엄군의 총기 사용이 정당방위로 볼 수 없는 까닭입니다. 뿐만 아니라 5월 21일 13시 공수부대가 금남로에서 시민들에게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습니다. 시민들 스스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던 이 시점 이후로 광주 시민들은 총기로 무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총기 사용 이전에, 청각 장애인 김경철 씨가 계엄군에 의해 5월 19일 사망한 사례가 있습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273631). 즉, 최초의 사망자는 시민입니다.


1.02 시민군이 조직적으로 군사적 기밀 장소인 무기고를 짧은 시간 내에 46곳이나 습격을 한 것은 당시 광주에 불순분자가 배후로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출처 : http://www.bignews.co.kr/news/article.html?no=232312


지만원에 의해 퍼지게 된 해괴한 논리입니다.


1995년 완료된 5.18사건 의문점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입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02648).
"광주에서 시위대에 의한 무기탈취는 19일 오후 3시 15분께 시위대가 기독교방송국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31사단 경계병력으로부터 M16소총 1정을 탈취한 것이 처음으로 이 소총은 곧 회수됐으며 그후 20일 밤 11시께 광주세무서 방화, 점거시 지하실 무기고에서 칼빈 17정을 탈취했고 21일 오후 1시께 광산 하남파출소에서 칼빈 9정이 탈취됐으나 시위대가 본격적으로 무기탈취에 나선 것은 21일 오후 1시께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은 후로 시위대는 광주 인근지역으로 진출, 화순,나주 등 지방의 지.파출소와 화순광업소, 한국화약 등 방위산업체 등에서 대량의 무기와 실탄을 탈취했음."
즉 당시 광주 시민들은 경찰서, 파출소의 예비군 무기고, 또는 근처 방위 상업체에서 무기를 탈취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90년대 초 예비군 무기를 군부대로 이관하는 사업이 추진될 때까지 향방 무기는 경찰서와 파출서의 예비군무기고에서, 직장 무기는 직장 예비군무기고에 보관되고 있었습니다. 이 파출소들과 방위 상업체가 시민들이 찾기 쉬운 곳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군사적 기밀 장소"라는 수사를 이용해서 포장하려는 것은 시민군을 어떻게든 불순세력과 연관하려고 하는 비열한 의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군부는 무기고 습격에 가담한 자들을 5·18민주화운동 이후 "간첩죄"나 "반공법"에 의한 죄목이 아닌 "내란죄"로 처벌했습니다. 신군부 입장에서도 무기고 습격에 가담한 자들을 "간첩"으로 몰았을 때 진압의 정당성을 얻었을텐데 스스로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이들이 불순분자와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1.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장갑차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출처 : http://www.bignews.co.kr/news/article.html?no=232312


시민군이 아시아자동차 공장을 습격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당시 아시아자동차 공장이 광주 내의 유일한 자동차 공장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시민군이 아시아자동차 공장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시민들은 이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차량을 탈취하여 계엄군에 대항하였는데 그 때 사용한 장갑차는 바로 시가전을 대비해서 만들어진 KM900 장갑차입니다. KM900 장갑차는 궤도식 장갑차가 아닌 장륜(차륜형) 장갑차이죠. 이 차륜형 장갑차의 운전 방식은 일반적인 자동차의 운전 방식과 거의 동일합니다. 따라서 일반 시민이 이 장갑차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없다는 주장은 광주 시민들을 어떻게든 북한과 관련지으려는 억측에 불과합니다.


1.04 신원미상의 시체가 있다는 것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의 소행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출처 : http://www.bignews.co.kr/news/article.html?no=232312


황당한 논리입니다.


현재 5·18묘지에 5구의 신원미상의 시체가 묻혀있는 것은 사실입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43&aid=0001949099).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북한 개입설을 뒷받침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자,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직후에는 무려 30명에 달하는 시체의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고(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1/03/2012110300062.html) 대구 지하철 참사의 희생자 중 6명도 아직 신원 미상입니다(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2/18/2008021801357.html). 신원 미상자가 있다해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과 대구 지하철 참사가 북한의 소행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습니까? 터무니 없는 논리입니다.


1.05 시민군은 도청에 TNT를 설치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다.
출처 : http://blog.daum.net/sillasouls/109


우선 시민군이 도청에 TNT를 설치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두 가지 이상한 주장이 있는 것 같습니다. 1. 북한군이 아니었으면 다이너마이트 설치는 힘들었다. 2. TNT 설치는 시위대가 시도했던 대한민국 전복의 명백한 증거다.


광주민주화운동 일지의 원전인 『5.18 正史』에 따르면(http://cafe.naver.com/enature.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1), 당시 다이너마이트 설치를 담당한 사람들은 호남탄좌 화순광업소에 근무하고 있던 김영봉 씨 등 모두 13명이었습니다. 광업소에서 근무하던 분에게 다이너마이트 설치가 불가능한 일이었을까요. 북한군이 아니었으면 다이너마이트 설치는 힘들었다는 주장이 어불성설인 이유입니다.


다음으로, TNT 설치가 시위대가 시도했던 대한민국 전복의 명백한 증거라는 논리를 살펴봅시다. 위에서 언급했던 5.18 正史에 기록된 신만식 씨의 증언입니다. 신만식 씨 역시 화순 광업소 다이너마이트 유출 작업에 참여한 분입니다.


"떡밥과 뇌관 결합작업을 벌인것은 사실이지만 도화선을 연결하진 않았다. 형식적으로 다이너마이트 인근에 연결된 것처럼 보이게 해뒀을 뿐이다. 만약 담뱃불이라도 떨어지는 날이면 광주시내가 온통 불바다가 될게 뻔한데 그런 위험한 일은 할수가 없었다. 애초부터 다이너마이트는 위협용이었지 사용돼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시민군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다이너마이트는 단순한 위협용이었습니다. 의도적으로 전남도청을 폭파할 의도가 있었다면 도화선을 연결했을텐데 시민군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도화선 자체를 설치하지 않았다는 또다른 증거로는 온건파의 요청에 의해 폭약 제거를 시도한 배승일 씨에 대한 명예회복 판결이 있습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70116104502&Section=03). 뉴스 기사에 따르면, 배승일 씨는 당시 뇌관과 신관을 제거했습니다. 만약 도화선이 있었더라면 도화선을 먼저 제거했겠지요.


1.06 시민 측에서 의도적인 버스 돌격으로 경찰이 먼저 사망했다.
출처 : http://gall.dcinside.com/list.php?id=cdh&no=5295


말도 안 되는 거짓입니다.


우선, 먼저 사망한 쪽은 시민 측입니다. 목차 1.01를 봐주세요.
경찰이 시민 측에서 온 버스에 의해 사망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하게 의도적이지 않았습니다. 우선 광주민주화운동 일지의 원전인 5.18 正史에 수록된 증언에 따르면(http://cafe.daum.net/80518/N8mQ/40?docid=DKjbN8mQ4020031117052216)


"한편 이날 차량시위는 금남로에 이어 노동청 앞에서도 계속된다. 소위 노동청 전투라고 불리는 노동청 앞 오거리에서는 9시20분께 광주고속 차량 10대가 경찰 저지선을 뚫고 들어가 함평경찰서 소속 경관4명이 사망하기도 한다. 당시 광주∼남원간 정기노선을 운행하던 광주고속 운전기사 배용주씨 (당시나이 34세)는 정기노선운행을 마치고 본사에 도착, 이소식을 듣자 시내로 차를 몰고 나간다. 노동청과 도청사이로 들어온 배씨는 다른 차량들과 함께 맨앞으로 차를 운전, 도청을 향해나가기 시작한다. 갑자기 공수대로부터 발사된 최루탄 하나가 유리창을 깨고 들어와 차내에서 터지자 엉겹결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뛰어내린다. 그러나 그대로 시동이 걸린 차량은 계속 앞으로 돌진, 경찰들을 깔아버린 것. 배씨는 이 사건으로 체포돼 사형선고까지 받기에 이른다. 또 차량시위는 현대교통기사 김복만씨 (당시 29세)의 희생이 뒤따르기도 한다."


당시 경찰들을 사망하게 한 건 버스 기사의 고의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루탄 연기가 가득한 차 안에서 제대로 된 운전이 가능했을까요. 증언이 거짓이라 생각하는 분들은 당시 상황을 기록한 아래 사진을 봐주십시오.


버스 안에 가득한 최루탄 연기를 보십시오. 이 상황에서 제대로 운전을 해서 의도적으로 경찰들을 죽일 수 있었을까요. 이건 상식의 문제입니다.


1.07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망자의 70% 가량이 시민군이 사용한 총기에 의해 사망했다.
출처 : http://www.ilbe.com/4481766
http://systemclub.net/bbs/zb4pl5/view.php?id=n_1&page=5&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reg_date&desc=desc&no=46


신군부의 나팔수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분들이 계시다니 굉장히 안타깝습니다. 이같은 유언비어가 원천이 된 두 가지 서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우선 제5공화국은 1982년 신군부를 정당화하기 위해 작성한 서적 『계엄사』에서 총상에 의한 사망자 중 117명이 시민군이 사용한 칼빈 소총에 의해 죽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뒷받침할만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지해주십시오. 인터넷에서 떠도는 아래와 같은 도표도 같은 서적에서 나온 도표입니다.


반면, 1980년 5월 16일부터 6월 19일에 광주 지방검찰청에 의해 작성된「5.18관련 사망자 검시 내용」에서 따르면 사망자 1백65명의 사인은 총상이 전체 79.4%인 1백31명(M16 96명, 카빈 소총 26명, 기타 총상9명)으로 가장 많고, 개머리판. 곤봉 등에 의한 타박사가 18명, 차량사 12명, 대검 등에 의한 자상이 4명인 것이라고 합니다. 카빈 소총에 의한 사망자가 26명이라는 뜻입니다. 어떻습니까? 검찰청 입장에서 카빈 소청에 의한 사망자 숫자를 축소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82년 후에 군에서 나온 출처 없는 주장과는 많이 다른 내용입니다. 즉, 1982년 발표된 군의 주장은 거짓입니다.


보안사에서 발간한 5.18 자료를 인용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칼빈 및 기타 총상 사망자는 94명, M16 사망자는 38명이지만, 이 역시 거짓입니다. 당시 보안사는 505보안부대에서 파악한 사체 검안 자료를 가지고 167명에 대해 양민과 난동자(원문에는 폭도와 비폭도)로 분류하는 작업을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진행했습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이 분류 과정에 참여한 의사 2명과 목사는 사망자가 폭도로 분류될 경우 위로금 등이 지급되지 않았으므로 최대한 양민으로 분류하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처음 폭도로 분류된 것은 20여명이 조금 넘었으나 군에서는 이 정도의 비율이면 곤란하다고 하여 격론을 벌인 끝에 최종적으로 38명이 폭도로 분류됐습니다. 이 때, 분류 과정이 불확실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로는 마지막 사망자의 분류 과정이 있습니다. 바로 5월 27일 YWCA 안에서 사망한 고등학생이었는데, 이 학생은 경기도 출신으로 그 안에서 저항했다는 이유로 군측에서는 계속 ‘폭도’라고 주장했고, 세 사람은 고등학생인데 어떻게 폭도가 될 수 있냐며 시민들은 비폭도로 분류할 것을 주장해 결국 ‘비폭도’로 분류됐습니다. 이 같은 과정 때문에 사체 검안위원회 회의 결과 M16보다는 M1이나 카빈 사망자가 더 많아졌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자료의 원본이 됐던 505보안부대의 검시자료에 따르면(이 문서는 최근 공개되었습니다), 카빈 소총에 의한 사망자는 20명입니다. 즉, 보안사에서 원본 자료를 왜곡했다는 것입니다.


1.09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복면을 사용한 것은 이들이 남파 간첩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출처 : http://www.study21.org/518/photo/rioters-in-mask.htm


굉장히 황당한 주장이니,


6월 항쟁에 참여한 자랑스러운 시민들의 사진으로 답을 대신하겠습니다.
이들도 남파 간첩인가요.


1.10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은 북한군의 무기였던 AK 소총 및 파파샤를 사용했다.
출처 : http://www.ilbe.com/4474860, http://www.ilbe.com/77398014


둘 다 유언비어입니다.


AK 소총 사용에 대한 근거는 정말 정사갤/일베 등 모든 사이트를 뒤져봐도 아무데도 없군요. 하지만 몇몇 사람들이 시민군의 파파샤 사용을 증명한다며 제기한 재밌는 사진이 있습니다.

이들은 해당 사진이 "5.18광주민주화운동" 유물전에 있었던 사진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극단적인 예로 바로 옆의 확성기에 부착되어 있는 Q마크를 보십시오. Q마크 보증제는 82년에 도입된 건데 어떻게 80년에 이게 있었을까요. 사실 이 사진은 한 시민이 "오월 판화체험전 시민군 현장 체험전"에 참석해서 찍은 사진입니다. 시민군 소품을 어떻게 실제 총기로 과장할 수 있을까요. 모조품에 지나지 않다는 거죠. 그래도 이게 진짜 같다면 다른 각도에서 찍은 아래 사진을 보십시오.

장전 손잡이도 없고, 방아쇠울도 저런 모양인 파파샤 총기가 어딨습니까.. 원래 총기의 사진과 직접 비교해봅시다(https://www.google.ca/search?q=PPSH-41).


1.11 시민군에게 "조선인민군" 마크가 있는 실탄 사진이 있다.


조잡한 합성입니다.

1.12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은 시민들에게 총기를 무작위로 배포함으로써 극렬한 사회 분란을 조장했다.
출처 : http://www.ilbe.com/444804976


2. 북침설
2.01 북한에서 5·18민주화운동을 기념한다는 것은 당시 북한이 광주에 간첩을 보낸 것을 의미한다.
출처 : http://blog.daum.net/kagicstaton88/601
http://blog.naver.com/totoro890907/90146962497


제일 황당한 논리입니다.


예, 북한에서는 5·18민주화운동 뿐만 아니라 4·19혁명(http://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0100&num=21228), 6월항쟁(http://www.ytn.co.kr/_ln/0101_200706102202527375
), 심지어 3·1운동(https://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9000&num=68182)과 6·3항쟁(http://media.daum.net/breakingnews/view.html?cateid=100000&newsid=19930603173400596&p=yonhap)도 기념합니다. 그래서 4·19혁명과 6월항쟁 그리고 6·3항쟁은 북한의 소행이고 3·1운동은 공산투쟁입니까?


2.02 북침설에 대한 증언이 있다(임천용 및 자유북한군인연합).
출처 : http://www.study21.org/518/doc/nk-Kang.htm, http://www.ilbe.com/429606599


북침설에 대한 증언은 대부분 임천용이라는 이 괴악한 사람한테서 나온 증언입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시나요? 무려 북한에서 "암살용"으로 "휴대용 핵폭탄"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냐 하면 미국에서조차 이 사람을 난민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결정을 내렸죠(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0894678). 이 분의 정신상태가 이상하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물론, 정신상태가 멀쩡하지 않다고 해서 증언이 거짓이라고 확실하게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증언들이 엇갈린다면 어떨까요? 임천용은 총 세 곳에서의 인터뷰에서, 침투 인원을 어떤 곳에서는 450명으로, 어떤 곳에서는 1개 대대로, 어떤 곳에서는 2개 대대로 증언했습니다. 이 분의 오락가락한 증언은 여기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http://asegaew.egloos.com/2269768). 심지어 귀환 인원에 대해서도 제각각 다르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3군 사령관 출신인 서종표 의원은 이에 대해 "600명이 침투해서 광주에서 어떻게 활동을 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 해도 그 동안 정부와 군은 무엇을 했는가. 말도 되지 않는 내용을 군 경험을 가진 보수단체장이 말할 수 있는가"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75238).


심지어 다른 탈북 군인 협회인 탈북군인협회의 대표는 “자유북한군인연합과 협력해서 일하면 좋겠지만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 탈북군인협회와 자유북한군인연합은 일하는 방법이 달라 같이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이 안 된다. 특히 보여주기 사업, 이벤트성 사업 등은 지양해야 한다. ‘북한 보급창고 등을 까고 나오자’ 식의 선동적이고 과격한 활동이나 ‘5∙18 광주에 북한특수부대가 투입되었다’는 주장 등도 현실과 맞지 않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6100&num=53887) 이들의 주장이 현실과 맞지 않다는 또다른 근거입니다.


2.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일어난 간첩 신고에 대한 기사가 있다는 것은 5·18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개입했음을 증명한다(이창용).
출처 : http://www.study21.org/518/doc/nk-Kang.htm


끔찍한 왜곡입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보고서에는 간첩 이창용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창용의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에 의하면 5. 16. 전남 보성을 통해 침투했으며, 광주에서의 시위와는 상관 없이 남파됐다. 5․18과 관련한 임무나 광주로 잠입하기 위한 시도도 발견할 수 없다."
이창용이 검거 된 곳은 서울입니다. 게다가 그 때의 날짜는 무장투쟁이 시작되고 난 뒤인 5월 24일이었죠.
무엇보다도,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보고서에 의하면, 신군부 세력은 광주민주화운동을 북한과 연관된 것처럼 여론조작을 하기 위해 허위사실을 유포했습니다.


2.05 인민군영웅렬사묘(인민군 영웅들의 렬사묘)에는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군인들을 기념하는 비석이 있다.
출처 :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24632


뉴데일리라는 언론사의 신문사에서 나온 황색 유언비어입니다.


해당 뉴스 기사에 따르면, 10월 북한군 개입설을 증명하기 위해 김주호 박사가 공개한 자료는 바로 '인민군영웅렬사묘'를 촬영한 다음과 같은 사진 두 장 뿐입니다:


자, 김 박사는 이 묘에 있는 군인들이 5.18민주화운동과 관련되었다는 증거는 아무 것도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김 박사는 “비석에 이름이 새겨진 158명이 ‘남조선혁명투쟁에서 희생된 인민군 영웅들’이라는 사실을 각기 다른 문건에서 중복 확인했다,” “사망자의 ‘죽은 날’로 기록된 1980년 6월 19일은 소속부대의 광주남파작전 종결일로, 사망일을 이 날짜에 맞췄다”라고 주장했지만 김 박사는 그 문건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재밌는 사실은, 해당 사진의 '인민군영웅렬사묘'가 김주호 박사가 지칭하는 묘라는 명확한 증거 역시 없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북한이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사실을 밝히는 기사가 있었죠(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5041153541&code=910303). 이 기사에 따르면,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이 “어버이 장군님(김정일 위원장을 지칭)께서 월남전쟁에서 희생된 비행사들을 한시도 잊지 않으시다가 이국 땅에 묻혀있는 그들을 조국에 데려다 인민군 영웅 렬사묘에 안치하도록 하신데 대해 뜨겁게 회고하시였다.”라고 밝혔다고 합니다.


출처가 된 문건도 없고, 사진의 비석이 어떤 묘의 비석인지조차 밝히지 않으니, 김 박사의 주장은 근거없는 유언비어입니다.


2.06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군은 잠수함을 통해 광주에 침입해 있었다.
출처 : 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submarine.htm


근거 없는 유언비어입니다. 무장간첩이 침투한 것은 3월 23일, 35일, 27일에 있었으며, 그마저도 모두 검거되었습니다.


2.07 윤기권이 5·18민주화운동 유공자임에도 불구하고 월북했다는 것은 이들이 간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출처 : http://blog.daum.net/sionvoice/13756351


괴악한 논리적 비약이군요.


윤기권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재학중인 고등학생이었는데, 이 사람이 어떻게 간첩 훈련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더군다나, 윤기권이 북한으로 넘어갔다해서 5·18민주화운동에 참가한 시민들 대다수가 어떻게 간첩이 됩니까.


2.09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에서는 5·18민주화운동을 생중계했다.
출처 : http://study21.tistory.com/entry/%EA%B4%91%EC%A3%BC%EC%82%AC%ED%83%9C-%EC%83%9D%EC%A4%91%EA%B3%84%ED%95%98%EC%98%80%EB%8D%98-%EC%9D%B4%EB%B6%81-%EB%B0%A9%EC%86%A1


상식에서 벗어난 어불성설입니다.


역사학자라는 사람은 5월 28일자 대한뉴스가 당시 평양의 생중계 방송을 편집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근거는 전무합니다. 이건 상식의 문제입니다. 1980년 당시 기술로 중계시설이나 송신소도 없이 광주에서 수백 킬로미터가 떨어진 평양까지 어떻게 생중계를 했을까요. 동영상 후반에 나오는 북한 방송에서 나온 듯한 구호는, 5·18민주화운동 이후의 북한 방송의 보도일 수 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탈북자가 북한에서 계엄군이 시민군을 전기톱으로 머리를 갈라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을 생중계로 보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머리가 전기톱에 갈려 죽은 사람에 대한 검시기록은 없습니다.


3. 기타
3.02 어린이/임산부/학생에게도 총을 쐈다, 계엄군이 대검을 사용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유언비어가 아닌 사실입니다.


5월 20일에는 군인이 정조준한 총에 임신 8개월 된 최미애 씨가 맞아 쓰러졌고, 병원에 옮겼으나 아이와 함께 숨을 거두었습니다.
5월 24일, 신군부의 공수여단은 달리는 차에서 눈에 띄는 사람이나 집을 향해 M16을 마구 쏘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을 앞 저수지에서 목욕을 하던 중학교 1년 방광범 군이 그 자리에서 숨졌고, 마을 어귀에서 놀던 초등학교 1학년 전재수 군이 벗어진 신발을 주우려는 순간 10여 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했습니다.
대검 사용도 사실로 밝혀졌습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02648). 실제로 사망자 중 14세 이하의 사망자는 무려 8명에 이릅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59021).


다시 말하지만 대법원에서는 이미 5·17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을 내란죄(폭동죄) 및 반란죄로 사형 선고를 내린 바 있습니다. 누가 폭도인지는 자명하지 않습니까.


3.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조직적으로 교도소를 습격했다.
출처 : http://unifykorea.hosting.paran.com/xe/kwangjuinsurgence/23995
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submarine.htm


5·18민주화운동 당시의 신군부의 왜곡에 그대로 동조하는 분들이 아직도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이 같은 주장은 1980년 5월 당시 계엄군 기록(전교사 전투상보)에 ‘시민군의 교도소 습격’ 내용에서 시작된 유언비어입니다. 5·18기념재단의 설명대로, 시민군들은 광주의 고립과 봉쇄를 뚫고 담양과 장성에 광주의 사실을 알리기 위해 교도소 앞의 차단을 뚫어야 했고, 공수부대의 무차별 학살에 맞서기 위해서 교도소 앞으로 출동했을 뿐입니다(http://www.518.org/ease/board.es?mid=a10501000000&bid=0006). 당시 시민군이 광주 외곽으로 진출하려던 것을, "교도소 습격"으로 왜곡한 것입니다. 실제로 총격전이 일어난 곳은 근처 호남고속도로에서 일어난 것이 대부분이고, 교도소로 진출하려는 일부 시도가 있었습니다만 해당 사건에 관련된 시민군은 4명, 6명으로 교도소 습격 자체가 목표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6명 이하의 인원으로 교도소를 함락할 수 있나요. 상식의 문제입니다. 이에 따라 2007년 7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광주교도소 습격사건을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몰아가기 위해 관련자를 조작했음을 밝혀낸 바 있습니다.


오히려 신군부는 광주교도소 앞을 통과하던 민간인들을 학살했습니다. 2007년 7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신군부의 발포로 인해 가족과 함께 광주교도소 앞을 통과하던 차량, 아이들과 함께 광주를 떠나던 사람, 계엄군 주둔지역의 마을주민 등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http://asegaew.egloos.com/3653375를 참고해주십시오.


3.04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파출소 등의 공공시설을 파괴했으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다.
출처 : http://www.ilbe.com/437085841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을 파괴하는 주장입니다.


4. 19 혁명 때도 경찰서가 방화됐고, 6. 10 항쟁 때도 파출소와 방송국이 방화됐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4. 19 혁명과 6. 10 항쟁이 폭동이라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대한국민이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은 잘못됐네요.


3.05 고등법원은 지만원이 받은 소송에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라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출처 : http://www.ilbe.com/146457631


괴악한 비약이군요.


5·18단체가 고소한 사건에서 지만원이 무죄 판결을 받은 이유는 5·18민주화운동이 폭동이라는 지만원의 주장이 옳아서가 아니라, 지만원이 5·18단체 회원들을 직접 지칭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281626)


3.07 80년대에 미국은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했으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다.
출처 : http://www.ilbe.com/354176114


말장난하지 마십시오.


우선 극우세력이 가장 자주 인용하는 미국 헤리티지 재단의 보고서는 1985년에 작성된 것입니다. 우선 헤리티지 재단은 미국의 공화당 성향의 우파 싱크탱크라는 사실과, 전두환 정부의 비서실장인 허화평이 1983년 1월부터 1986년 6월까지 헤리티지 재단의 수석 연구위원을 지냈다는 사실을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헤리티지 재단의 보고서는 미국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보기 힘든 까닭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87년 6월 항쟁에 의한 민주화 이후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시작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 인사들이 제대로 된 정보를 알게 된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고서에는 5월 18일 전남대에서의 시위부터 이틀 간 두 명의 사망자가 나타났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1.01을 참조하십시오).


"...There were many injuries on both sides, but only two rioters were killed during the first two days of the confrontation." (http://www.heritage.org/research/reports/1985/09/south-koreas-kwangju-incident-revisited?query=South+Korea's+Kwangju+Incident+Revisited)


또한 이 보고서에서는 광주교도소에서 50명의 시민군이 사망했다고 보고하고 있지만 실제로 교도소로 진출하려 했던 시민군은 총 10명에 그쳤습니다 (3.06을 참고하십시오).


"...At the Kwangju Prison, for example, more than 50 armed rioters were killed during the numerous assaults against the government-held facility." (Ibid.)


이같이 왜곡된 정보만으로 헤리티지 재단이 당시 올바른 결론을 내릴 수 있었을까요? 불가능입니다.
그렇다면 5·18민주화운동 직후에 작성된 CIA의 기밀문서와 1980년 6월 25일에 발행된 미국 국방부의 보고서는 어떨까요. 여기에서도 5·18민주화운동을 광주 폭동(riot)으로 규정하지만 이 역시 당시 진상규명의 부족함과 신군부와의 공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해당 미국 국방부의 보고서에는 굉장히 흥미로운 사실이 보고되어 있습니다.

"그 전두환은 정부 조사관들에게 학생/시민들이 군인을 구타하는 영상물을 찾아낼 것을 명령했다. 그의 계획은 타임지나 뉴스위크지같은 외국 언론사가 촬영한 민간 시위에 대한 군인들 (대부분이 특전사)의 잔인한 대응을 상쇄시키려는 것이다. ...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해낸 것이 없다."


실제로 1989년 미 국무부는 5·18민주화운동을 "May 18th Kwangju Democratization Movement," 즉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했습니다(http://seoul.usembassy.gov/backgrounder.html).


3.08 5·18민주화운동 진압 당시 대통령은 최규하였으므로 5·18민주화운동과 전두환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출처 : http://www.ilbe.com/438961786, http://www.ilbe.com/439148590


다음은 전두환에 대한 내란죄 관련 판결문입니다.


"...피고인들이 이른바 12·12군사반란으로 군의 지휘권과 국가의 정보기관을 실질적으로 완전히 장악한 뒤, 정권을 탈취하기 위하여 1980. 5. 초순경부터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비상대책기구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시국수습방안' 등을 마련하고, 그 계획에 따라 같은 달 17.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전군지휘관회의에서 결의된 군부의 의견인 것을 내세워 그와 같은 조치를 취하도록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강압하고 병기를 휴대한 병력으로 국무회의장을 포위하고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여 국무위원들을 강압 외포시키는 등의 폭력적 불법수단을 동원하여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를 의결·선포하게 함으로써, 국방부장관의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대한 지휘감독권을 배제하였으며, 그 결과로 비상계엄 하에서 국가행정을 조정하는 일과 같은 중요국정에 관한 국무총리의 통할권 그리고 국무회의의 심의권을 배제시킨 사실, 같은 달 27. 그 당시 시행되고 있던 계엄법(1981. 4. 17. 법률 제3442호로 전문 개정되기 전의 것, 이하 같다) 제9조, 제11조, 제12조 및 정부조직법(1981. 4. 8. 법률 제3422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제5조에 근거하여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및 그 산하의 상임위원회를 설치하고, 그 상임위원장에 피고인 전두환이 취임하여 공직자 숙정, 언론인 해직, 언론 통폐합 등 중요한 국정시책을 결정하고 이를 대통령과 내각에 통보하여 시행하도록 함으로써,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회가 사실상 국무회의 내지 행정 각 부를 통제하거나 그 기능을 대신하여 헌법기관인 행정 각 부와 대통령을 무력화시킨 사실 등을 인정한 다음, 피고인들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게 하여 비상계엄 하에서 국가행정을 조정하는 일과 같은 중요국정에 관한 국무총리의 통할권과 이에 대한 국무회의의 심의권을 배제시킨 것은 헌법기관인 국무총리와 국무회의의 권능행사를 강압에 의하여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이므로 국헌문란에 해당하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여 헌법기관인 행정 각 부와 대통령을 무력화시킨 것은 행정에 관한 대통령과 국무회의의 권능행사를 강압에 의하여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이므로 역시 국헌문란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다."


다시 한 번 밝히지만 전두환은 내란죄, "즉 국토의 참절 또는 국헌문란(國憲紊亂)의 목적으로 폭동하는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폭도와 그 폭도에게 맞서 싸운 5·18민주화운동의 광주시민이 어떻게 아무런 관련이 없을 수 있습니까.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동이라 부르시려면 우선 전두환이 일으킨 12.12 쿠데타와 5.17 쿠데타가 쿠데타가 아니라는 걸 입증해야하지만 12.12 쿠데타와 5.17 쿠데타가 쿠데타라는 명백한 사실은 위의 판결문에서 보시다시피 이미 90년대 재판에서 수차례 확인한 진실이랍니다. 이후에 사면을 받았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목차의 3.12를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3.11 계엄 선포 당시의 사회 상황을 고려하면, 5·17비상계엄전국확대(5·17 쿠데타)는 정당화될 수 있다.


어떻게 일제가 하는 말과 한결같이 똑같습니까. 다음은 전두환에 대한 내란죄 관련 판결문입니다.


"...피고인들이 이른바 12·12군사반란으로 군의 지휘권과 국가의 정보기관을 실질적으로 완전히 장악한 뒤, 정권을 탈취하기 위하여 1980. 5. 초순경부터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비상대책기구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시국수습방안' 등을 마련하고, 그 계획에 따라 같은 달 17.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전군지휘관회의에서 결의된 군부의 의견인 것을 내세워 그와 같은 조치를 취하도록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강압하고 병기를 휴대한 병력으로 국무회의장을 포위하고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여 국무위원들을 강압 외포시키는 등의 폭력적 불법수단을 동원하여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를 의결·선포하게 함으로써, 국방부장관의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대한 지휘감독권을 배제하였으며, 그 결과로 비상계엄 하에서 국가행정을 조정하는 일과 같은 중요국정에 관한 국무총리의 통할권 그리고 국무회의의 심의권을 배제시킨 사실, 같은 달 27. 그 당시 시행되고 있던 계엄법(1981. 4. 17. 법률 제3442호로 전문 개정되기 전의 것, 이하 같다) 제9조, 제11조, 제12조 및 정부조직법(1981. 4. 8. 법률 제3422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제5조에 근거하여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및 그 산하의 상임위원회를 설치하고, 그 상임위원장에 피고인 전두환이 취임하여 공직자 숙정, 언론인 해직, 언론 통폐합 등 중요한 국정시책을 결정하고 이를 대통령과 내각에 통보하여 시행하도록 함으로써,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회가 사실상 국무회의 내지 행정 각 부를 통제하거나 그 기능을 대신하여 헌법기관인 행정 각 부와 대통령을 무력화시킨 사실 등을 인정한 다음, 피고인들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게 하여 비상계엄 하에서 국가행정을 조정하는 일과 같은 중요국정에 관한 국무총리의 통할권과 이에 대한 국무회의의 심의권을 배제시킨 것은 헌법기관인 국무총리와 국무회의의 권능행사를 강압에 의하여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이므로 국헌문란에 해당하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여 헌법기관인 행정 각 부와 대통령을 무력화시킨 것은 행정에 관한 대통령과 국무회의의 권능행사를 강압에 의하여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이므로 역시 국헌문란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다."


5·17비상계엄전국확대가 이래도 정당화된다고 보이십니까? 5·17비상계엄전국확대는 강압적인 쿠데타입니다. 이를 두고 당시 최규하의 재가를 받았으므로 상관없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을사조약이 무효인 이유를 생각해보십시오.


군부대로 국무회의장을 포위하고 외부와의 전화선을 끊어버린 상태에서 내린 결정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습니까. 미 국무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개진했습니다:
"NO information indicating a North Korean intention to attack was received by the United States during the period covered by this statement, nor did United States officials regard the domestic situation in the South as being so serious as to justify either Full Martial Law or harsh repressive measures."
"미국은 북한의 공격 의도가 있었다는 어떤 정보도 [1980년 당시] 받지 못 했고, 미국 정부는 대한민국의 당시 상황이 계엄령 또는 극심한 탄압을 정당화할만큼 심각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http://seoul.usembassy.gov/backgrounder.html)


3.12 전두환은 이후에 사면을 받았으므로 내란죄와 무관하다.


가소로운 말장난입니다. 사면은 "형벌의 면제"입니다.

 

 

 

 

 

 

유네스코에 올라왔다고 무조건 민주화운동이 아니다?

 

http://www.unesco.org/new/fileadmin/MULTIMEDIA/HQ/CI/CI/pdf/mow/nomination_forms/Korea%20Human%20rights.pdf

어떻게 올라왔는데

 

읽고 반성이나 합시다.

 

유네스코에서는 '광주민주화봉기'로 판정했습니다.

 

좋든 싫든 민중이 폭력을 사용한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유네스코에서조차 이 폭력은 정당한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참고링크:

http://blog.daum.net/kbsicom/49

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6100&num=53887
http://blog.daum.net/kbsicom/51
http://www.youtube.com/watch?v=sCXbu_Ekca4

http://blog.naver.com/chiyahn/20171304853

http://mirror.enha.kr/wiki/5.18%20%EA%B4%91%EC%A3%BC%ED%8F%AD%EB%8F%99%EC%84%A4

 

 

12.12는 반란이아니다? 정당한것이었다. 헛소리 집어 치우고 읽자.

 

이희성은 12.12 반란 이후 전두환이 직접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한 인물

 

이희성 1980년 당시 계엄사령관이 증언하는 12.12 사태

 

그 때 그건 전두환이가 확실히 잘못한 겁니다.
연행한다는 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야 되거든요.
소장이, 참모총장을 갖다 연행해야한다는 것이
국방부 장관한테 승인받을래도 국방부 장관이 노재현 장관이니까
전두환이 볼 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차라리 야단맞겠지요.
(전두환이) 대통령에게 이렇게 이렇게 얘기하니까
대통령이 뭐라고 했냐면, 나는 군부 내용을 모르니
국방부 장관을 통해서 가져오라 이렇게 얘기한 겁니다.
그래서 시간을 끌고 그러니까 자기네들은 뭐
큰 사건 일으키는 식으로 해서 끌고 가야 되는데
시간이 늦어지고 그러니까 불쑥 쳐들어간거에요.
(12.12 사태는 ) 하극상이오
쿠데타라기보다는 하극상입니다.
정승화 장군은 절대로 김재규의 손아귀에 들어가거나
김재규의 이용물이 되거나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전두환이가 자기 야심을 채우기 위해서
정승화를 제거하기 위해서 했다고 그렇게 봅니다.
12.12 사태 때 내가 곧 참모총장이 됐거든요.
사실은 그문제를, 1.212 문제를 가지고 조사를 해야되는 그 힘은 미치지 못해요.
왜냐하면 조사기관이나 보좌진이 전부 다 그쪽(보안사)에서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이걸 터뜨리면 번연히 군 전체가 쑥대밭이 되니까
할 수 없이 내버려 뒀거든요.
그게 타성이 되버린 겁니다.

 

12.12 사태 이후 전두환의 행태

 

제일 처음에 (전두환이) 그 때 소장이였거든요.
소장이 중장 진급을 자꾸 시켜달라고 나한테 애를 무척 태웠어요.
뭐 국방장관까지 동원해 가지고
뭐, 여러 사람을 동원해 가지고 했는데
그 때 소장되고 나서 중장 될 차례가 안되었을 때 자꾸 중장 진급시켜달라고 해서
이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해 중장할려고 그러느냐,
그런 걱정을 하고 있으면서
다른 뜻이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 다음에 차츰차츰 가보니까 애들이 하는 행동이요.
경호 문제를 굉장히 걱정을 하더라 이거요.
자기의 경호!
경호대장같은 사람을 해가지고
시내에 가든지 골프장에 가든지 하면
굉장히 대통령 행사 모양으로 경호를 해요.
얘네들이 왜 그러냐 할때
처음에는 12.12 일어나고 난 다음에 자기의 적이
많으니까 신변보호를 하기 위해 그랬지 않느냐
그 생각이 들고도, 쭉 가보니까 그 때도
'야 이것이 지금 큰 꿈을 꾸고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하고
이와 같은 것이 징후에 나타나더라 말이야.

 
 
 
 
 
 
재판당시 뉴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121200209101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5-12-12&officeId=00020&pageNo=1&printNo=23051&publishType=00010
 
5공청문회 당시 뉴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120100289101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12-01&officeId=00028&pageNo=1&printNo=173&publishType=00010
 
1988년 반란의 가장큰 피해자 정승화의 인터뷰: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112800209215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11-28&officeId=00020&pageNo=15&printNo=20666&publishType=00020
 
엔하위키:
 
 
 
 
전두환은 책임이없다? 전두환이 발포명령안함: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12060020920201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12-06&officeId=00020&pageNo=2&printNo=20673&publishType=00020
 
전라도출신 정웅이 진압한거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072600209134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6-07-26&officeId=00020&pageNo=34&printNo=23264&publishType=00010
 
 
 
 
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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