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야!” “아니야.” “나야!”
유명 인물이나 물건의 정통성을 둘러싼 지역 간의 원조(元祖) 경쟁이 뜨겁다. 지역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지방자치시대에는 시간이 갈수록 노력하는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 간에 격차가 벌어지고, 격차가 생기는 주요 원인 중의 하나가 이미지 선점이기 때문이다. 이미지를 선점한 지역은 영화·드라마·가요 등의 주요 소재가 돼서 캐릭터 상품도 판매하고 관광객도 늘어나기 마련이다.
부여 대 익산, 서동요 드라마 촬영지 유치 신경전
장수 대 진주, 논개 출생지와 성장지 달라 대립
장성 대 강릉, “홍길동이 살았던 곳”“허균의 생가”
하동 대 구례, 녹차 첫 재배한 시배지(始培地) 논쟁
곡성 대 옹진, “심청이 살던 곳” “인당수의 위치”
대전 대 청원, 신채호 출생지와 성장지 간 연고 다툼
영덕 대 울진, 대게 산지와 집산지 간 갈등 소송까지
통영 대 거제, 행정구역 분할 뒤 유치환 출생지 논란
지역 간의 원조 경쟁은 인물이나 물건이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데서 비롯된다. 사람의 경우 출생 지역과 성장 지역 또는 활동 지역이 다른 경우가 많고, 비슷한 물건이 여러 곳에서 날 때는 원조 논쟁이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다.
서동(薯童·훗날 백제 무왕)은 호동왕자, 바보 온달과 더불어 고대 한국사의 대표적인 로망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이다. 요즘 전북 익산시와 충남 부여군은 서동을 둘러싸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백제 서동과 신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를 다룬 SBS 월화 드라마 ‘서동요(薯童謠)’가 인기리에 방영 중이기 때문이다.
이들 지역은 드라마가 뜨기 전부터 서동의 본고장을 둘러싸고 신경전을 폈다. 우리 역사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백제문화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커졌기 때문이다. 부여는 왕궁 소재지를, 익산은 서동의 출생지를 각각 연고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서동에 관한 한 라이벌 의식이 강한 두 곳이 서동을 다룬 드라마 제작에 발벗고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 익산은 두 곳에, 부여는 한 곳에 각각 서동요 촬영세트장을 설치하고 기싸움을 벌이고 있다. 부여군과 익산시는 열악한 재정에도 불구하고 서동요 제작에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부여군은 세트장 부지매입, 세트 건립, 제작 지원 등에 거금 60억원을 투자했다. 부여군의 1년 예산이 약 2500억원이니 전체 예산의 2.4% 가량을 이 프로젝트에 투자한 셈이다. 서동요 촬영이 있던 지난 2월 22일 부여군의 촬영세트장에는 관광객이 넘쳐났다. 세트장 입구에는 선화공주, 서동, 백제 무왕 등 드라마 관련 이름을 붙인 매점 여섯 곳이 성업 중이었다. 이날 SBS 서동요 공식 카페인 ‘서동애가’ 회원 40명은 배우들과 기념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서울 강동구 명일동에서 왔다는 성공회대학 디지털컨텐츠학과 2학년 김선경(여·20)씨는 “부여는 처음 와봤다”며 “주연 조현재씨를 비롯해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을 직접 볼 수 있어 너무 좋다”고 말했다. 부여군청 안중완 서동요 제작지원팀장은 “작년 10~11월에는 평일에 3000~4000, 주말에 7000~8000명의 인파가 몰렸다”며 “요즘은 겨울인 탓에 평일 600~800명, 주말에 2000~4000명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부여군 측은 무척 흡족해 하는 표정이다. 김무환 부여군수는 “서동요 세트장 설치로 우리 지역에 직접효과 144억원을 포함해 총 1000억원의 파급효과가 예상된다”며 “드라마 제작에 지원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익산시에는 서동의 생가와 선화공주의 사가(私家) 촬영세트장이 있다. 당초 SBS 측은 왕궁이 있던 부여에만 세트장을 건립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1월쯤 익산시가 서동의 출생지라는 연고권을 주장하며 세트장 유치전에 뛰어들면서 익산에도 세트장이 들어섰다. 익산시는 세트장 두 곳 건립에 총 12억원을 지원했다. 지난 2월 22일 선화공주의 사가가 있는 여산 세트장을 찾아갔다. 이곳은 드라마 초기에 많이 등장했으나 요즘은 드라마가 종반에 접어들면서 촬영이 뜸해졌다. 그런데도 관광객들은 산비탈에 위치한 이곳을 찾아가기 위해 주차장에서 600m나 떨어진 산길을 마다 않고 끊임없이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광주에서 부인과 함께 용무를 마치고 올라오다가 고속도로에서 안내 표지판을 보고 들렀다는 신경상(40·경기도 수원시 망포동)씨는 “열렬한 서동요 팬인데 촬영세트장을 봤으니 드라마를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익산시 김성도 영상지원팀장은 “작년 9월 5일 첫 방송 이래 관광객 30만명이 다녀갔다”며 “익산에는 관광객이 연간 120만~130만명이 다녀가는데 서동요 방송 이후 관광객이 20% 늘었다”고 말했다.
임진왜란의 최대 헤로인인 논개(論介·1574~1593).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끌어안고 진주 남강에 투신한 그녀는 애국과 절개의 상징적인 존재로 요즘도 대중적인 인기가 높다. 논개는 출생지와 성장지가 영·호남에 걸친다. 출생지는 전북 장수, 성장지는 경남 진주다.
논개가 진주에서 사망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지만 그녀의 고향이 어딘지는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장수군은 일찍부터 논개 기념사업을 벌여왔다. 장수군에서는 논개를 부를 때 성을 붙여 주논개(朱論介)로 호칭한다. 1955년에 논개 사당을 건립하고 함태영 부통령으로부터 현판을 받아서 논개 사당에 걸어놨다. 1965년부터는 해마다 5월과 10월에 ‘의암(義巖·논개의 호) 주논개 대축제’를 열고 있다. 이 축제 때는 전국에서 10만명의 관광객이 몰려든다. 장수군은 논개 캐릭터도 개발했으나 아직 상품화는 초기 단계에 그치고 있다.
진주는 상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이지만 일찍부터 논개 기념사업을 벌여왔다. 조선 말기인 1868년부터 해마다 5월 넷째 주 금·토·일 사흘간 ‘진주논개제’를 지내오고 있다. 이 축제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축제의 하나다. 최근에는 논개 캐릭터를 개발, 진주에서 나오는 우수 농산물과 특산품에 부착하고 있다.
그러나 두 지역이 논개를 둘러싸고 대립만 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논개 표준 영정을 공동으로 제작하고 있다. 진주시와 장수군은 지난 2월 15일까지 신청서를 배부한 데 이어 오는 5월 22일부터 5월 31일까지 응모 작품을 접수할 예정이다. 장수군 빈창근 문화계장은 “두 지역이 보관 중인 논개 영정이 다르고 영정을 그린 화가가 친일 논란이 있어서 표준 영정을 함께 만들기로 합의했다”고 말했다.
충청북도 청원군과 대전광역시는 역사학자이며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申采浩·1880~1936) 선생을 둘러싸고 연고권을 주장하고 있다. 신채호 선생은 대전에서 태어나 충북 청원군에서 자랐다. 먼저 움직인 쪽은 충북이다. 충북도와 충북교육청은 단재교육원을 설립하고 단재문화예술제전을 개최하고 있으며 단재교육상도 제정해 해마다 시상하고 있다. 한발 늦은 대전시는 단재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으나 관련 유품을 구하기 어려워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지역 간의 원조 경쟁은 가상인물로까지 번지고 있다. 전남 장성군과 강원도 강릉시는 허균이 지은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을 둘러싸고 경쟁하고 있다. 장성군은 조선왕조실록 등 한·중·일 3국의 기록을 근거로 홍길동은 1443년 무렵 장성에서 태어난 실존인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군청 홈페이지에도 아예 ‘홍길동의 고향 장성과 함께’라고 명시하고 있다. 2004년부터 ‘장성 홍길동 마라톤대회’를 열고 있다. 올해는 2월 6일부터 4월 10일까지 접수를 받아 4월 30일 마라톤대회를 연다. 홍길동을 활용한 캐릭터상품도 다양하게 개발해 시판 중이다.
강릉시는 홍길동 외에도 관광자원이 많은 편이어서 장성군에 비하면 다소 느긋한 입장이다. 강릉시는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 생가 주변에 1만6000평 규모의 부지를 매입해 애니메이션 시설 등을 갖출 계획이다.
경남 하동군과 전남 구례군은 녹차를 처음 재배한 곳을 뜻하는 시배지(始培地) 원조를 둘러싸고 자존심 싸움을 벌이고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흥덕왕 3년(828) 김대렴(金大廉)이 당나라에서 차 종자를 가져와 지리산 일대에 처음 심었다고 돼 있다. 문제는 이곳이 지리산 중에서도 어디냐는 것이다. 이를 둘러싸고 구례군과 하동군은 각각 자기 지역이 시배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두 지역 간의 시배지 경쟁은 문화재 지정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동군 쌍계사 부근의 차나무 재배지역인 ‘쌍계사 차나무 시배지’는 1987년 경남 기념물 제61호로 지정됐다. 이에 맞서 전라남도는 1991년 구례군 장죽전(長竹田) 녹차 시배지(始培址·처음 재배한 터)를 전남 기념물 제138호로 지정했다.
전남 곡성군과 인천시 옹진군은 효녀 심청 문제가 걸려 있다. 곡성군은 곡성에 살던 맹인 원량의 딸 원홍장이 심청전의 모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곡성군은 심청 테마마을, 심청공원, 심청축제 등 심청과 관련된 사업에서 기세를 올리고 있다. 반면 옹진군은 심청이 바다에 빠진 인당수가 황해도 장산곶과 백령도 사이에 있는 등 심청전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지명이 관내 백령도에 산재해 있다고 맞서고 있다.
이미지 선점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대게다. 대게 하면 ‘영덕대게’를 연상하는 사람이 많은데 국내에서 대게가 가장 많이 잡히는 곳은 영덕이 아니라 울진이다. 그러나 영덕대게가 유명한 것은 울진이 교통이 불편한 반면 영덕은 상대적으로 교통이 편리해 집산지로 각광 받았기 때문이다. 브랜드 이미지를 선점한 영덕은 유리한 고지에 놓여 있다. 외지인들이 울진보다 영덕에 와서 대게를 많이 소비하고, 울진 사람들도 울진에서는 물량을 다 소화할 수 없기 때문에 기름값 써가며 배를 영덕까지 몰고 가서 대게를 파는 경우가 많다.
원조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소송도 불사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영덕과 울진은 지자제 첫해인 1995년부터 대게의 원조를 둘러싸고 샅바싸움을 벌이다가 이듬해에는 대게 이름을 둘러싸고 법정싸움까지 벌였다. 결론은 무승부. 그래서 지금은 각각 영덕대게, 울진대게로 표기하고 있다.
청마(靑馬) 유치환(1908~1967) 시인의 출생지를 둘러싼 소송도 있었다. 통영이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거제와 통영으로 나뉘면서 유치환 시인의 출생지 논란이 불거졌던 것이다. 먼저 기세를 올린 곳은 통영. 2000년 통영시가 청마문학관을 먼저 세웠다. 이에 유치환 시인의 딸 세 명이 통영시를 상대로 소송을 냈으나 서울고등법원은 2004년 7월 통영시의 손을 들어줬다. 딸들은 통영시의 청마문학관 안내판에 아버지의 출생지가 잘못 기재돼 있으니 삭제하라고 통영시에 요구했었다. 재판부는 가족들이 유치환 시인이 거제에서 태어나 통영으로 이사했다고 주장하지만 자작시에서 스스로 통영에서 출생했다고 밝힌 만큼 출생지를 거제로 단정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부여·익산=박영철 주간조선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