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사상으로 왜사람이 도덕적으로 살아야하는지..

칸트의 사상으로 왜사람이 도덕적으로 살아야하는지..

작성일 2008.11.24댓글 1건
    게시물 수정 , 삭제는 로그인 필요

도통이해가 안되고 혼란스럽습니다..

 

칸트의 사상으로 왜 사람이 도덕적으로 살아야 되나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좋은 답변이 이미 나와있길래 인용합니다. 길다 싶으시면 서론 부분만 읽어보셔도 답이 되실거에요.

 

 

Ⅰ. 서 론

자연적 존재로서 인간은 짐승과 마찬가지로 생물적 본능의 지배를 받고 충동적 행동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을 타고난 존재로서 자연적 존재인 짐승과 구별된다. 이 이성을 계발하게 되면 인간은 욕망충족에 만족하기보다 욕망을 억제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하게 된다. 칸트는 인간을 이성으로 도덕법칙을 입법할 수 있는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합리성을 추구하는 우리들의 특성을 고려할 때 칸트가 제기하는 '도덕법칙과 자유'의 문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칸트의 도덕철학은 인간 존엄성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칸트는 당시 유럽을 풍미하던 자연론적 인간관에 반발을 느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인간의 본질은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규명될 수 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따라서 자연 법칙이 인간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규명하면, 인간의 정체를 파헤칠 수 있다는 것이다. 칸트도 자연법칙의 이해로 자연현상을 설명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자연법칙은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의 소산이며, 자연현상도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선천적 인식능력의 산물이라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자연속에 있으면서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부분과 자유의 영역에 있으면서 자유의 법칙 혹은 도덕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인간은 자연의 산물이기에 다른 동물과 같이 육체를 가지며 욕구의 주체가 된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자유의지를 가지기 때문에 욕구에 위배되는 행위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질 의무를 지닌다. 때문에 인간의 경우에만 '당위(sollen)'라는 개념이 의미를 갖는다.

만약 인간이 단순한 동물에 불과하다면 무엇을 '해야 한다'는 표현은 무의미할 것이다. 충동에 따라 먹고 마시고 움직이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나 말에게 무엇을 기대할 뿐이지 의무를 부과하지 않으며 책임을 묻지도 않는다. 그러나 인간에게만 이러한 것을 요구하는 이유는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근거로 의무를 이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것을 "당위는 능력을 함축한다."고 표현한다. 한편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욕구에 따라 움직이는 경우도 있으며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우리가 신이라면 우리는 모두 '해야 할 일'만 할 것이고 따라서 인간에게 의무를 부과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 당위가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이처럼 인간의 이중적 구조, 즉 인간은 동물처럼 욕구에 의해 움직이지만 신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의무를 이행할 수는 없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일 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명백해진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은 도덕법칙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칸트는 자연현상에 자연법칙이 있듯이 인간의 심성에는 도덕법칙이 있다고 주장한다. 자연과학자들의 과제는 그 자연법칙이 무엇이며 그것이 자연 현상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규명하는 일인 것과 마찬가지로 윤리학자의 임무는 그 도덕법칙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인간행위를 규제하는지를 밝히는데 있다. 따라서 의무를 이행하며 행위해야 하는 자유의 법칙, 즉 도덕법칙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본문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Ⅱ.도덕법칙의 원리

1.선의지와 의무

칸트의 도덕법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전통적인 윤리학자의 목표라고 볼 수 있는 '최고선'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므로써 자신의 논의를 시작한다. "이 세계안에서, 아니 그밖에서조차 우리가 무제한적으로 선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의지(Good will)뿐이다." 선의지는 어떤 상황에서는 선하고 다른 상황에서는 악하며, 우연히 어떤 사람이 그것을 원한다면 선하고, 원하지 않는다면 악한 그런 것이 아니다. 선의지의 선함은 어떤 맥락이나 목적이나 욕구 등과의 관련에 의해서 조건지워지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선의지는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으로 선하다.

그는 '선의지'라는 개념을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으로 말미암아 행위하는 것'으로 명확하게 정의한다. 우선 '의지'라는 말을 살펴보면, 의지는 이성과 감성의 중간에 위치하는 심성으로서 이성처럼 판단함과 동시에 감성처럼 행위를 일으키는 능력도 갖추고 있다.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떤 종류의 행동을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이라는 개념이 의지에 적용될 때의 의미를 밝히기 위하여, 칸트는 그가 도덕의식의 특출한 측면이라고 생각한 의무의 개념에 주의를 돌린다. 의무 때문에 행위하는 의지가 선의지다. 그러나 선의지가 필연적으로 의무에 말미암아 행위하는 것이라고 가정해서는 안된다. 전적으로 선하고 완전한 의지는 결코 의무로 말미암아 행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무라는 바로 그 개념 안에는 욕구나 경향성의 극복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완전하게 선한 또는 칸트가 '신성하다'고 부르는 의지는 본성적으로 경향성을 저지하지 않고도 그 자체가 선한 행위를 함에 있어 자신을 드려낼 것이며, 따라서 전혀 의무의 개념에서 행위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지를 신성하다고 가정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자신의 의무를 행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유한한 피조물인 인간은 분명히 어떤 주관적 한계를 지닌다. 인간의 의지는 완전히 선하지 않으며 감정적 욕구나 경향성의 영향을 받는데, 이런 것들은 인간에게 선의지가 나타나는 데 있어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장애물이 없다면 인간의 선의지가 필연적으로 드러날 선한 행위들은 인간에게 의무로, 즉 이런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행해야만 하는 행위들로 나타난다. 인간이라는 조건하에서의 선의지는 의무에서 말마암아 행위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완전한 선이라는 이상에 도달할 수 있다면, 우리의 욕구를 훈련시켜 더 이상 극복할 장애물이 없도록 해야할 것이다. 어둠이 있어 밝음이 돋보이듯이 장애물들은 선의지의 선을 뚜렷하게 만드는데 도움이 되며, 그런 장애물과의 관련없이 선을 헤아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의지는 그것을 극복하는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써 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선의지는 우리의 욕망과 본성적 경향성에 의해 퇴색되어 갈 것이다.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것은 신성한 의지가 아니라 인간이 지닌 선의지이다. 그러므로 모든 선의지에 대한 많은 부분이 예외없이 참이라고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칸트는 선의지가 의무에서 행위하므로서 명백히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칸트를 가장 잘 해석하려면, '우리는 의무에서 말미암아 행위함'을 이해해야 한다. 의무는 우리 배후에 있으면서 어리석은 행위를 저지하고, 다양한 자발적 충동들이 서로 방해하지 않고 조화롭게 작용하도록 순간순간마다 등장할 준비가 되어있는 통제력이다. 이것은 선한 사람에 있어서 의무이고, 그의 생활은 의무의 관념에 의해 통제된다. 그는 의무와 상충하는 제어하기 어려운 충동들을 경계하며 그가 처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도덕적 욕구들에 무감각해지는 것을 경계한다. 그러나 이런 신중함을 인정하더라도 그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행복의 추구가 의무와 상충하지 않는 한 스스로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지니고 있다.

칸트가 이처럼 의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도덕적 가치가 행위의 결과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데 있다. 우리가 행위를 통하여 산출한 결과는 실제 산출된 결과와 반드시 동일한 것이 아니다. 칸트는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는 그 가치에 있어 그것이 산출하는, 나아가 산출하려 하는 결과에 전혀 의존하지 않음을 주장한다. 이렇게 주장하면서 그는 모든 형태의 공리주의를 거부한다.




2.순수실천이성

인간 이성이 인간의 행위, 특히 도덕적 행위에 있어 어떤 역할을 한다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져 왔다. 칸트에 있어서 이성은 이론이성(die theore-tische Vernunft)과 실천이성(die praktische Vernunft)으로 나누어진다. 이론이성은 인식에 관한 것이고, 실천이성은 행위에 관한 것이다. 전자는 있는 것에 관한 문제(진리의 문제)이고 후자는 있어야 할 것에 관한 문제(선의 문제)이다. 순수이성의 영역은 경험에 제한되어 있는 반면, 실천이성은 선험적 이념에까지 범위가 확대된다. 이러한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는 동일한 능력이다. 우리는 사고할 수 있는 존재이므로 이론이성을 이해하며, 행위할 수 있는 존재이므로 실천이성을 이해한다. 유일한 차이점은 우리가 이론이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사고에 대하여 사고하지만, 실천이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행위에 대하여 사고한다는 점이다.

칸트는 때로 실천이성을 의지와 동일시하며, 어떤 때는 이성이 의지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자의 용어 사용이 더욱 만족스럽다. 전자의 용어 사용은 우리의 의지 작용이 사고와 마찬가지로 이성적이며, 의식 사고에 의해서 인과적으로 영향을 받음을 말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성을 의지를 결정하는 것으로 말한다면, 의지작용 역시 인식적 측면을 지니며, 따라서 추상하여 고려될 수 있음을 지시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고 또한 추상하여 고려될 수 있는 의지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

칸트는 실천적인 것을 의지와 원칙에 따라 행위할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했다. 실천적 원칙에 따라 행위할 수 있는 능력은 이성적 존재의 선험적 성격을 형성한다. 감성적으로 선천적인 것은 인간을 감각에 제한된 자연존재로 만들지만, 인간의 의지에 놓여 있는 도덕적 실천적인 것, 즉 순수실천이성은 인간을 무한한 가능성을 실천하는 창조적 인간으로 만든다. 칸트는 도덕적 실천이성이 이론적 인식의 우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인식의 요소를 결여하지 않고 오히려 인식(도덕적 인식, 도덕적 이론)에 근거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이론과 실천 사이의 대립 관계에서 칸트는 이론의 편에 있어서는 경험적 영역에 속해 있고 또한 경험적인 것에 의존하고 있음에 비해, 실천이성편에서는 초경험적인 자유와 이념인 가치의 편에 선다. 칸트가 실천이성을 우위로 주장하는 것은 이론이성의 관심이 실천이성의 관심에 종속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인간의 모든 관심은 실천이성의 관심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즉 삶의 가치 서열에 있어서 실천적인 것이 앎의 행위보다 높이 평가되기 때문이다.

칸트는 행위의 측면에 있어서 이성이 실천적 방식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성적 존재만이 법칙의 개념 (법칙에 대한 자신의 이해 )에 따라서 행위하는 능력을 지닌다고 말한다. 그는 이점에서 법칙에 따라 작용하기는 하지만 그들 자신의 법칙의 개념에 따라 행위할 수 없는 자연의 사물과 이성적 존재를 대비 시킨다. 자연의 모든 사물은 그들이 인과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대로 작용하는 한에 있어서만 법칙에 따라 작용하는 것이다.

사실 이성적 존재는 도덕법칙을 외부적인 강제력에 순종하듯이 마지못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도덕법칙에 순종하므로써 이성적 존재가 자신에게 순종하는 것이요, 그 자신이 스스로 법칙을 설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적 존재는 자율적 존재이며 도덕적 행위를 통해서 스스로 자유의 존재임을 드러낸다. 이성적 존재는 도덕법칙의 명령이 자신의 욕망과 배치될지라도 도덕법칙의 보편성을 원한다는 것을 자신의 본질로 삼고 있다. 이 내용은 뒤 장 '도덕법칙과 자유'에서 상세히 설명해 보기로 하겠다.

보편적인 도덕법칙이 자연적 욕망과 마찰을 일으킴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순수 실천이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은 그가 따르는 행위의 준칙이 자기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보편적인 법칙이 되도록 행동할 때 진정한 의미에서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된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은 경험적 욕망에 따르면서도 그것을 초월하려고 한다. 이러한 초월을 유도하는 것이 바로 실천이성이다. 따라서 실천이성은 경험적 욕망을 통제하고 규정하는 보편적 원칙을 제공한다. 개별적 욕망을 보편적 원리에 종속시키는 실천이성이야말로 이론이성보다 우위를 점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실천이성은 준칙을 법칙으로 이끌어간다.

유한한 이성적 존재의 경우 준칙이 없이는 의지의 작용이나 행위가 존재할 수 없으며, 우리가 의지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준칙에 따라서 행위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의지를 어떤 법칙에 따라서, 즉 준칙에 따라서 그 자신의 행위를 결정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실천 이성은 의지와 동일하다. 그럼 준칙과 법칙이란 무엇인가? 또 그것은 서로 어떤 관계에 있으며 도덕법칙을 정당화하는 이론적 근거가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3.준칙과 법칙


칸트에 의하면, 어떤 행위의 도덕적 가치는 그 행위의 결과로부터가 아니라 행위자의 준칙으로부터 도출된다. 그리고 이 준칙은 그것이 행위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법칙을 준수하고 존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준칙은 행위의 주관적 원리이다.‥" 행위자의 준칙이나 법칙들이 도덕법칙과 모순될 수 있는 것처럼 물론 행위자의 준칙은 도덕법칙에 일치할 수도 있다. 한 인간의 준칙은 그가 자신의 행위에서 따르려고 선택하는 일반적인 규칙(a general rule)이다. 그 준칙을 택한다는 것은 그가 준칙에 따르려고 의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가 사실상 언제나 그렇게 따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들 모두는 적어도 때로는 우리들이 위반하는 준칙을 소유한다.

준칙에 대한 이와 같은 설명은 행위의 가치가 행위의 준칙에 의해 규정된다는 칸트의 견해에 양립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약 준칙이 도덕법칙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 문제는 어떻게 준칙은 그것이 낳은 행위들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경험적 실질적 준칙과 선천적 형식적 준칙을 구별해야 된다. 실제로 우리는 칸트가 준칙이라고 부르는 것에 따라 행위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의지의 주관적인 원칙을 갖고 있다. 그런데 유한한 의지는 보편적 법칙에 대한 존경에 의해 발동되지 않는다면 선한 것이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지들이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준칙들 혹은 의지의 주관적인 원칙들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도록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준칙들을 거부해야한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즉 우리의 준칙들이 원칙으로서 보편적인 도덕적 입법의 가능한 형태가 될 수 있다면, 이성은 우리가 법 그 자체에 대한 존경에 의해서 그 준칙들을 인정해야 하고 존경해야할 것을 요구한다.

칸트가 말하고 있는 원칙 또는 법칙이란 바로 도덕법칙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럼 그가 말하는 도덕법칙은 과연 무엇인가? 만약 그것이 밝혀지지 않는다면 무엇에 대한 의무인지 모를 뿐만 아니라 선의지 조차도 공허한 개념이 된다. 그러면 도덕법칙에 대해 살펴보자. 칸트에 의하면 도덕법칙이 일종의 법칙인 이상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하고 그것은 특히 행위의 법칙이기 때문에 인과율이 모든 현상에 적용되는 것처럼 도덕법칙은 인격을 갖춘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행위에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도덕법칙은 자연법칙과는 달리 인간의 행위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의무감, 즉 도덕적 당위를 규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행동이 어떠한 경우에 어떻게 나타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지침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덕법칙은 마치 선물상자와도 비슷하다. 우리는 선물 꾸러미를 받을때 고마와하고 그 다음에는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가 궁금해 한다. 그 속에 예상했던 것보다 더 좋은 것이 들어있다면 더욱 고마와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실망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칸트의 도덕법칙이 순전히 형식적이라고 하는 것은 내용들이 없는 이 상자와 같다는 뜻이고, 그것을 무조건 명령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은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든 상관하지 말고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고마와 하라는 것과 비슷하다. 예컨데 도덕법칙이 법칙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법칙에 대한 존경으로 말미암아 행위하는 것이다.

여기서 칸트는 앞서 설명한 준칙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그는 이 준칙을 보편법칙의 형식, 즉 텅빈 선물상자 속에 놓아 보라고 한다. 그렇게 했을때 준칙은 보편성을 띠는 도덕법칙으로 승화되고 누구에게나 무조건 적용되는 정언적 명법(정언적 명법, der kategorischer Imperative)으로 나타난다. 그는 이것을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준칙인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라고 표현한다. 이 명법은 행위의 도덕성을 판단하는 방법을 말해 준다. 즉 나 자신의 생활신조가 모든 사람의 것으로 되어도 좋다고 인정될 때 그것은 곧 도덕성을 갖는 것이다.

우리들은 항상 순수하게 도덕적 준칙에서 행위할 수 있게끔 구성되고, 그러한 준칙을 기초로 하지 않는 행위에 대한 경향에 결코 복종하지 않을 그러한 존재를 상상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존재는 칸트가 "성스럽다"로 부르는 존재일 것이며, 성스러운 의지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이상(ldeal)에 도달할 수 없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는 그릇된 행위를 하려고 하는 것을 느낄 것이고 그러한 경우 욕구와 의무간의 갈등을 경험할 것이다. 그는 성공하든 성공하지 못하든 간에 도덕성의 형식적 원리에 일치하는 준칙을 자신에게 부과하려 할 것이다. 부과된 규칙들은 명법이다. 신성한 존재와는 달리 인간은 도덕성의 형식적 원리를 항상 명법으로 이해할 것이다. 이제 그의 정언명법의 성격과 적용의 문제를 자세히 살펴보자.





Ⅲ.정언 명법의 해석


1.정언명법의 정식


인간의 일상적 행위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이성의 가장 기본적인 작용은 의식에 나타나는 개별적인 것을 다른 개별적인 것과 결부시키고, 그때에 규칙, 합법칙성 등등 보편적인 것을 적용시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단지 개별적인, 모든 보편성을 결여한 행위의 충동에 의해서 규정될 수 없게 된다. 오히려 행위의 충동은 필연적으로 보편성 자체의 계기, 즉 행위의 규칙의 계기를 가지고 있다. 앞에서 논술한 바와 같이 칸트는 이러한 그때 그때의 주관적인 행위의 규칙을 준칙이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는 대상에 의한 규정성을 행위의 실질적 (내용적) 계기라고, 또 그때그때의 준칙을 형식적 계기라고 부를 수 있다. 준칙은 나의 실천이성, 즉 행위를 규정하는 이성의 소행이다. 그러나 모든 준칙이 다 도덕적 타당성을 가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도덕적으로 타당한 준칙이 있고, 또 도덕적으로 타당하지 못한 준칙이 있다.

칸트에 의하면 명법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가언적(假言的)인 명법이고, 다른 하나는 정언적(定言的) 명법이다. 가언명법은 "만일∼라면 X를 하라","만일 ∼라면 당신은 X를 해야 한다."라는 형식을 취한다. 예컨대 "당신이 건강하기를 원한다면 많은 운동을 하라", "행복할려면 돈을 많이 벌어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명법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설득력을 지닐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언명법은 조건(if)에 의존하지 않는다. 예를들어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라"는 도덕적 명령이 "타인들을 적으로 삼는 것을 회피하고자 원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친절 그 자체를 위해 명령되는 것이지 어떤 보다 큰 (자기 이익적인)목적을 위해서 명령되는 것은 아니다. 정언명법인 도덕법칙은 어떠한 경우에도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이며, 그 댓가는 건강이나 행복이 아니라 자유로운 이성적 인간임을 다시 한번 확인 해준다는 것 뿐이다.

칸트가 {도덕형이상학원론} 및 {실천이성비판}에서 제시하고 있는 도덕법칙, 즉 정언명법은 크게 다섯가지 법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플라톤은 그것들을 각 법식에 나타나는 핵심용어를 중심으로 고유명칭을 부여하고 있다. 즉 [보편법칙의 법식], [자연법칙의 법식], [목적자체의 법식], [자율의 법식] 및 [목적왕국의 법식]이 그것들이다. 칸트는 근본형식을 보편법칙, 목적자체의 법칙, 목적왕국의 법칙의 세가지로 정식화하였다. 그는 무려 다섯 가지의 서로 다른 정식을 제시하여 우리를 놀라게 했는데, 그중 둘은 단일 주제에 대해 말하고 있고, 지금 정식화한 세가지 정식의 방법이 보다 명료함을 드러낸다. 첫째 정식은 정언 명법의 형식과 관계된다. 둘째 정식은 내용과 관계된다. 세째 정식은 이 두 정식을 하나로 연결한다.

첫째 정식은 "너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기를 너로 하여금 동시에 의욕할 수 있도록 하는 바로 그러한 준칙에 따라 행위하라"이다. 이러한 원리는 그리스도의 황금률(the Golden Rule), 즉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에서 찾을 수 있으며, 공자의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원리는 실제의 많은 상황에서 적용된다.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 보아라', '그가 너에게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니?'와 같은 일상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대화는 이러한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 첫째 정식은 불공평을 배제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는 어떤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은지 그른지 자기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바꿔 말하면 자기 자신을 위해 예외를 만드는 것은 도덕적이지 않다. 이 정식은 무엇이 행위를 옳게 하는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지 않다. 단지 어떤 행위가 그른가를 알아내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할 뿐이다.

우리는 정식 "∼에게 x 하라"이 도덕적 판단, 즉 도덕적 의미에서 "하여야 한다."(ought)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판단은 보편적 명령의 형식을 취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정언명령의 형식에 관계된다고 말하였다. "나는, 또는 당신은 도덕적으로 x를 하여야 한다."는 말은 단순히 한 개인에 대해 주어진 직접적인 권고나 명령-"x를 하라","내가 x를 하게 하시오"-의 성격을 갖지 않는다. 그 말은 이러한 종류의 상황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모두가 동등하게 x를 하여야 함이 요구된다는 것을 함축한다. 정식 x는 내용에 관계되므로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의 기준을 제시한다.

두째 정식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모든 타인의 인격에 있어서 인간성을 단순히 수단으로서만 사용하지 말고 동시에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행위하라"이다. 이 명법에 따르면 인간은 자타를 막론하고 언제나 목적으로 대우 받아야 한다. 그러나 사람을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도 반드시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인간성을 수단으로 사용하여야할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인간성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과 함께 사용하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인격은 이성적 존재의 자기 목적성을 의미하며, 인간성은 이성적 의지를 가진 특성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목적이라는 것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인데, 여기서의 목적은 의지의 자기 규정적 객관적 근거이며, 모든 이성적 존재에게 동등하게 타당해야 하는 것이다. 이성적 존재는 인격이라는 자신의 절대적이며 본질적인 가치로 인하여 단지 결코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 존중을 주장하는 칸트의 사상은 루소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두번째 정식은 첫번째 정식과 동일한 원리에 의거한다. 즉 두번째 정식은 이미 첫번째 정식에 함축되어 있다. 첫번째 정식은 모든 사람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는 준칙에 따라 행위하도록 명령한다. 이것은 행위를 결정할 때 타인의 이성적 의지를 고려할 것을 의미한다. 다시말해 첫번째 정식에서와 같이 보편화할 수 있는 원칙에 의거해서 행위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서로 입장을 바꾸어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한다. 이것은 결국 나를 포함한 모든 인격을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 자체로 간주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므로 이성적 존재라는 개념으로부터 두번째 형식에 관한 접근도 가능하다. 즉 보편화 가능성에 따라 행위하는 이성적 존재는 실천이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행위를 하고 공통된 목적을 갖게 되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따라서 타인을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은 자기모순이 된다. 다시 말하면 이성적 존재는 타인도 역시 자신과 동일한 법칙에 따라 행위할 수 있다는 방식에서 행위해야 한다.

세번째 정식은 바로 "너의 준칙을 통하여 너 자신이 항상 보편적 목적의 왕국의 법칙을 세우는 구성원처럼 행위해라"이다. 세번째 정식 또한 두번째 정식으로부터 추론 가능하며, 첫번째 정식과 다를 바 없다. 즉 목적 자체로서의 각 이성적 존재는 모든 법칙에 관해서 자기 자신을 동시에 보편적 입법자로 간주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성적 존재를 목적 자체로 규정하는 것은 바로 그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을 행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또한 거꾸로 자신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은 타인을 목적 자체로 간주해야 가능하다. 플라톤은 이 세번째 정식을 "목적왕국의 정식" 이라고 부른다. 목적의 왕국은 개별적인 목적 자체로서의 이성적 존재를 사회적으로 결합한 체계이며, 이성적 존재를 보편적 법칙에 의해 결합한 체계이다. 이러한 체계에서 이성적 존재는 자신과 타인을 언제나 결코 수단으로가 아니라 동시에 목적 자체로 취급해야한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이성적 존재는 스스로 보편법칙을 부여하고 동시에 그 자신도 그 법칙에 복종하는 성원이어야 한다. 목적의 왕국에서 모든 이성적 존재는 이러한 체계를 구성하고 있는 보편 법칙에 복종해야 하므로 이러한 체계의 成員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성적 존재는 이러한 보편적 법칙을 세우는 입법자이므로 이러한 체계의 元首이기도하다.

칸트에 따르면 이러한 목적의 왕국에서 모든 것은 가격을 갖거나 尊嚴을 갖는다. 가격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동가물에 의하여 대체될 수 있는 상대적 가치를 갖지만 존엄을 갖는다는 것은 모든 가격을 초월한 것이므로 대체할 수 없는 내적 가치를 지닌 숭고한 것이다. 목적왕국에 있어서 인간이 도덕법칙에 복종하는 것만으로는 숭고함이 없지만 인간이 도덕법칙에 복종함과 동시에 도덕법칙의 입법자라는 점에서 인간의 숭고성이 있으며 존엄의 가치가 있다. 이처럼 칸트의 윤리는 인격을 절대적 가치로 여기는 인격존중의 윤리이다. 칸트 이후의 사회가 이 인격주의의 윤리를 토대로 하고 있음을 볼 때 그의 정언명법의 도덕적 가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Ⅳ.정언명법의 근거로서의 자유

1.선험적 자유


도덕법칙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선의지 이외에 자유의 개념이 필요하다. 자유도 역시 선의지와 의무개념과 맞물려 있다. 칸트에 있어서 자유가 제기된 단초는 그의 제 1비판의 선험적 원리론의 제2부 선험적 변증론이다. 그는 자유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어떠한 것이 그것에 의하여 생멸되며 그 원인이 또한 다른 선행원인에 의하여 필연적 법칙에 따라서 한정되지 않는 일종의 인과성 즉 자연법칙에 따라 진행되는 현상을 스스로 시작케 하는 원인의 절대적 자발성 (eine absolute Spontaneitat)이며, 또는 그것이 없이는 자연의 진행에 있어서까지도 현상의 계기적 계열이 원인의 방향에 대하여 완전한 것으로 될 수 없는 그러한 선험적인 것" 자유는 자연의 필연적 인과계열에서 벗어나 있는, 따라서 시·공간상의 존재자의 술어는 '이념'이며, 이런 뜻에서 초월적 이념이다. 초월적 이념으로서의 자유는 아직 있지 않은, 있어야할 것을 지향하는 의지, 곧 실천이성의 행위에서 이상(Ideal)을 제시한다. 이론이성은 자연법칙이 지배하는 현상계 내의 인간의 인식이라는 점에서 현상계를 벗어나 인식대상을 구할 수 없다. 단지 순수이성의 인식대상은 자연의 인과법칙에 철저히 지배되지만 인간은 이성적 존재로서 자연의 인과 법칙에 그대로 지배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현상계에 인과성을 행사한다고 하는 것은 인간 자신이 의지를 지니고 있는 지성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러한 두가지 법칙, 자연의 인과법칙과 자유법칙을 매개하는 위치에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감성적 존재로서 현상계에 속한는 유한한 존재인 동시에 이성적 존재로서 물자체에 속하며, 따라서 스스로 도덕법칙을 실천할 수 있는 실천적 의지 즉 자유의지를 가지기 때문이다. 인간 이성은 그 원인이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속에 있으므로 자발적이며 가장 근원적이다. 따라서 이성은 의지, 특히 순수의지이며 이것은 자기 원인에 의해 나타나므로 자유가 전제되어 있다.

칸트는 자유의 개념을 선험적 이념(transzendentale Idee)에서 이끌어 낸다. 그는 이 선험적 이념을 순수이성 이념이라고 했다. 즉 이념은 완전성을 갖고있는 개념인데, 이 완전성의 이념은 우주에 대한 완전성의 이념을 ①시간적 시초,세계의 한계 ②생성에 대한 원인성에 있어서의 절대적 자주성 ③가변적 사물에 대한 절대적 필연성 ④전체에 대한 부분의 단순한 것에서 구할때 네개의 순수이성의 이율배반이 생긴다. 칸트의 선험적 자유를 보다 본질적 입장에서 규명하기 위해서 이율배반의 제3의 항목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칸트는 그 정립과 반정립에서 이렇게 제시한다.

定立: "자연법칙에 따른 인과성은 세계의 현상이 모두 거기에서 도출될수 있는 유일한 인과성이 아니다. 현상의 설명에는 곧 자유의 인과성을 상정할 필요가 있다."

反定立: "자유는 존재하지 않고 세계 내의 모든 것은 오직 자연법칙에 따라서 일어난다."

칸트는 이 원인성의 절대적 자주성을 자유라고 하였고, 이를 "선험적 이념"이라고 했다. 선험적 자유는 자연법칙에 구속되지 않는 것으로서 어떤 것도 앞세움을 허용치 않는 역학적 작용의 제1시초이다. 선험적 자유와 자연법칙은 서로 차이는 있으나 자연법칙의 무제약적 원인성이 곧 선험적 자유이다. 칸트는 자연법칙이 지배하는 영역과 자유법칙이 지배하는 영역을 구분한다. 정립이 주장하는 자유법칙을 물자체계 즉 가상계에 적용시키고, 반정립이 주장하는 자연법칙을 현상계에 적용시키므로서 양자가 적용되는 영역을 구별하여 이율배반을 해결하려 한다. 현상계는 인간의 제한된 유한한 마음에 나타나는 것으로서 지니는 세계이고, 이 세계는 오직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만 드러나므로 또한 감성계라고 불릴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의 배후에 그 근거로서 그자체로 참으로 존재하는 세계, 즉 그자체로 존재하는 사물들의 세계를 상상하여야 한다. 이 세계가 물자체의 세계로 묘사된다.

사실상 칸트의 견해에서 모든 인식은 사고와 감각의 결합에 의존함으로 물자체의 세계는 비록 상상될 수 있고 또한 상상되어져야만 할지라도 전혀 우리에게 인식될 수 없다. 이러한 두 원리에서 실천이성 영역이 확보되고 선험적 이념인 선험적 자유는 실천이성의 논리적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 양자를 매개하는 위치가 인간존재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인간은 한편으로 현상계에 속해 있으면서, 또 한편으로 도덕계(예지계)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인간에게 있어서 바로 주관적인 근저에 있는 의지의 자유를 물자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자유의 본질에 대해 살펴 보았다. 그럼 자유의 존재는 어떻게 증명되는 것일까? 칸트는 우리가 도덕법칙을 통해서 선험적 이념에 접근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도덕법칙이 자유로부터 성립된 것으로 입증되면 선험적 자유와 도덕법칙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가 밝혀질 것이며, 또한 자유의 존재성이 명백히 드러날 것이다. 이것은 다음 장에서 논하기로 하겠다.




2.도덕법칙과 자유와의 관계


칸트에 따르면 "자유와 무조건적 실천법칙, 즉 도덕법칙은 서로가 서로에게 관계하고 있다." 즉 자유를 설명하기 위해선 도덕법칙이 있어야 하고, 도덕법칙을 설명하기 위해선 자유의 개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나는 자유는 확실히 도덕법칙의 존재근거요, 도덕법칙은 자유의 인식근거임을 지적하려 한다."라고 함으로써, 도덕법칙과 자유와의 관계를 모호하게 설명하고 있고, 순환론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 도덕법칙과 자유의 선후의 관계를 좀더 분명히 해보자.

칸트는 자유와 도덕법칙 간의 선후관계를 논하면서 도덕법칙이 자유보다 먼저 우리에게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무조건적으로 실천적인 것(Unbedingt-Praktischen)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즉 그것은 자유에서인가, 실천법칙에서인가? 그런데 무조건적으로 실천적인 것에 대한 인식은 자유에서 출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첫째는 자유에 대한 최초의 개념은 소극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를 직접적으로 의식할 수 없기 때문이요, 둘째는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현상들의 법칙 -- 따라서 자유의 장반대인 기계적 자연 -- 만을 인식하기 때문에 경험으로 우리가 자유를 추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 우리가 우리의 의지의 준칙을 생각해 내자마자 -- 직접적으로 의식하는 것은 도덕법칙이다. 도덕법칙이 먼저 우리에게 나타난다. 이성이 도덕법칙을 어떠한 감성적 제약에 의해서도 극복할 수 없는, 아니 그러한 제약에서 완전히 독립적인 규정근거라고 명시함으로써 도덕법칙에서 자유의 개념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주장이 옳다고 한다면 칸트 윤리학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너는 해야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라는 사상도 이해가 가능하다. 우리는 도덕법칙을 통해서 자유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칸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도덕법칙은 순수이성의 사실로서 주어져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선험적으로 인식하며, 자명한 것으로 확신한다고 한다.… 따라서 어떠한 '연역'(Deduktion)이라도, 즉 이론적, 사변적, 혹은 경험에 의거한 이성의 노력이라도, 도덕법칙의 객관적 실재성을 증명할 수 없다.… 그러나 '도덕적 원리의 연역'을 추구하는 것이 허사였지만, 대신에 전혀 예기치않던 일이 나타났다. 그것은 즉 도덕원리 자체가 거꾸로 탐구하기 어려운한 능력을 증명할 수 없었고, 사변이성은 그런 능력을 적어도 가능한 것으로 가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곧 자유의 능력이다. 그리고 그 자신을 변명할 아무런 근거도 필요치 않은 도덕법칙은, 자유의 가능성 뿐만 아니라 자유의 현실성 까지도 증명한다."

만일 칸트의 이런 주장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우리는 도덕법칙에만 머물고 자유의 개념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에 대해 칸트는 자신의 주장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도덕법칙은 자유의 인식근거이고, 자유는 도덕법칙의 존재근거'라는 그의 주장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밀고 나간다면 '순환론'(Zirkel) 내지는 '선결문제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리고 칸트 자신도 이러한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시인하고 있다.

따라서 도덕법칙과 자유와의 관계를 다른 측면에서 고찰하지 않는 한 칸트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우리는 이에 칸트의 도덕법칙과 자유의 개념을 세분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칸트는 도덕법칙을 두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하나는 양심의 사실로서 우리에게 자명한 도덕법칙이고, 다른 하나는 실천적 자유에서 수립된 도덕법칙이다. 물론 여기서 도덕법칙은 서로 별개의 도덕법칙이 아니라, 전적으로 동일한 도덕법칙을 두 측면으로 바라본 것이다. 둘째로 칸트는 자유를 선험적 이념으로서의 자유와 실천적 자유로 나누고, 실천적 자유를 의지의 자유와 자의의 자유로 다시 세분하고 있다.

그럼 지금까지 논의한 도덕법칙의 원리인 선의지와 의무, 순수실천이성, 준칙 등을 통해 도덕법칙과 자유의 관계 개념을 논해 보고자 한다. 칸트 자신의 용어를 빌리자면, 양심의 사실로서의 도덕법칙이란 '인간에게 선한 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선의지는 건전한 자연적 오성에 이미 내재해 있으며 가르쳐지기보다는 오히려 계발되기만 하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선의지는 "그것이 실현하고 성취하는 것에 의해서나 어떤 설정된 목적을 달성하는 데 적합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의욕만으로, 즉 자체만으로 선한 의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안에서, 아니 더 넓게 이 세계 밖에서도 우리가 무제한적으로 선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의지 뿐이다." 우리는 "내가 의지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선하게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할지 심오한 통찰력을 필요치 않는다. … 단지 내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보기만 하면 된다. 즉 '너는 준칙이 보편적인 도덕법칙이 되기를 의욕할 수 있느냐 ?' 만일 그와 같이 의욕할 수 없다면 그 준칙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이런 일은 그 준칙이 너나 너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손해 때문이 아니라, 그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수립의 원리로 통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편적인 법칙수립을 이성이 나에게 직접 존경하도록 강요한다."

여기서 논의되고 있는 도덕법칙은 그야말로 양심의 사실(Faktum)로서의 도덕법칙이다. 이 도덕법칙은 자유라는 개념이 우리의 머리 속에 떠오르기 전에 사실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도덕법칙을 생각해내는 순간 우리는 그 근거를 찾게된다. 여기서 자유의 개념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자유의 전제없이 생겨난 도덕법칙은 타율적인 법칙이지 자율적인 법칙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사실로서의 도덕법칙이 우리에게 주어지자마자 우리에겐 자유가 요청되는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이념으로서의 자유, 즉 선험적 자유를 통해서 자유의 가능성을 고찰한 바 있다. 그 자유의 가능성이 도덕법칙을 통해서 실재성으로 바뀌는 것이다. 도덕법칙이 사실로서 나타나는 그 만큼 자유의 실재성도 분명히 인식되는 것이다. 그렇게 인식된 자유는 도덕법칙을 향해 나아간다. 즉 그 스스로가 도덕법칙을 구성해 나가게 되는 것이다.



Ⅴ. 결 론


칸트의 도덕법칙은 인간의 순수한 이성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칸트에 있어서의 선험적 자유가 인간 행위와 관계함은 행위의 절대적 자발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는 이 선험적 자유를 실천적 행위의 근거로 생각한다. 칸트는 현실적인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이념으로서의 자유의 참 모습을 실천적 행위법칙에서 찾으려 했다.

칸트는 모든 쾌락주의나 공리주의를 물리친다. 그렇다고 해서 행복이나 경향성을 완전히 끊고, 금욕적이고 고행적인 삶만이 도덕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보지 않았다. 사실 칸트는 인간의 유한한 주체는 욕구에서 결코 해방될 수는 없다고 보았다. 때문에 욕구나 경향성에 쏠리는 마음의 원리, 즉 실질적인 준칙이 보편적 도덕법칙에 항상 동시에 타당해야 한다는 것이 그가 말한 정언명법의 내용이다. 이것은 욕구나 경향성에의 준칙을 완전히 없애야 한다는 주장으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행복에 대해서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권리를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의무가 문제시되는 순간에 행복을 고려하지 말것을 요구한다. 심지어 그는 의무를 행하는데서 오는 즐거운 마음을 진정한 선의 징표라고도 보았다.

칸트는 인간 개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강조했다. 우리 의지의 형식적 준칙이 따라야만 한다는 도덕법칙은 우리의 자유의 산물이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법칙에 우리가 따라야만 한다는 것은 합리적인 주장일 수 있다. 그런 법칙에 따른다는 점에서 인간은 존엄하다. 칸트의 목적왕국은 이런 자유롭고 존엄한 인간들이 모여 조화를 이룬 윤리적인 공동체일 것이다. 칸트의 도덕철학은 이렇듯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의 강조라는 토대 위에 이룩되어 있다. 칸트는 그 속에서 개인의 도덕적 이상과 사회윤리의 목표와의 조화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논자는 우리 사회가 '도덕성 회복'을 강조할 정도로 방향감각을 잃고 있고 대학에서도 반성없이 사회의 타락상에 그대로 물들어 가고 있는 이때, 이 시대가 찾고자 하는 인간의 모습을 되새기며 바람직한 삶의 양식의 계기를 칸트의 철학을 통해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 칸트는 도덕적 존재로서 인간을 파악하면서 인간의 도덕성이 이성능력을 발휘하여 감성적 충동을 억제하는 데에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칸트의 '도덕법칙과 자유'의 관계를 통하여 각자가 행위의 주체로서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고 예지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태도를 견지하기를 기대하게 된다.

왜사람이 도덕적으로 살아야하는지..

... 칸트의 사상으로 왜 사람이 도덕적으로 살아야 되나요?? 좋은 답변이 이미... 규제하는지를 밝히는데 있다. 따라서 의무를 이행하며 행위해야 하는 자유의 법칙, 즉...

칸트의 도덕법칙

...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행복의 추구가 의무와 상충하지 않는 한 스스로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지니고 있다. 칸트가 이처럼 의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도덕적...

칸트의 정언명령

... 착하게 살아야 하니까 이런 답을 원하는건 아닙니다. 사람 윤리적이어야 하는지 칸트가 설명한 바가 있는지... 생각에는 칸트는 기본적으로 인간은 도덕적으로 살아가야...

칸트는 실존주의 철학자인가요? 아님.....

... 모든 사람(특히 젊은이들)에게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성찰을 통해 획득한 주체성으로 어떤삶을 살아야 하는지는 우리의 과제다. 고등학생이구요 윤리와사상대신...

어떤 조건을 갖추며 살아야 하나요?

...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는거에요. 그래서 말인데요. 윤회를 만들려면 현생에서 어떤 조건을 갖추며 살아야 하나요? 답변부탁 ※ . 윤회 ( 輪廻 ) 환생 ( 還生 ) 사상은 .. 잘못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모범적이고 도덕적인 학생이며 대인관계는 평범합니다.... 자신들의 냄비근성과 가식은 인정하지 않을까요.... 나의 사상이 존재하듯이 다른 사람사상, 존재를...

죽음, 철학, - 주의란?(시대정신과 이념의...

... 대체 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난 이렇게 죽어야... 행동을 하는 집단이 있다고 할 때, 그들을 표현하려면 그들의 사상을 표현할 단어가 필요하겠죠? 그럴 경우 '~주의...

윤리와 사상 교과서 정리좀...

... 하늘이다.”라는 사상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과... ‘우리는 살아야 하는가?’,‘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창조하고자 하는 집단적인 행동 ㉡ 특징 ․ 뚜렷한 이념과...

하나님은 왜 사람에게 육체적(성적)...

... 기독교는 도덕적 우위를 점할 필요가 있었기에 한 때 혼전순결 운동이 있었던 것이고, 혼전순결은 마치 기독교의 사상처럼 되어버린거죠. 사실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