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탈리즘에 대해..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작성일 2003.08.15댓글 1건
    게시물 수정 , 삭제는 로그인 필요

오리엔탈리즘에 대해서 알고 싶은데요..

그 근원이라던지.. 대충에 내용을 살펴봤는데요..

백과사전을 짜집기하여 답변을 해서 그런지 무슨 소린지 이해가 잘 되지 않더라구요..

오리엔탈리즘이 서양인의 시각으로 동양을 바라본다고 했는데..

동양을 동경하는 시각인지,, 아님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인지 궁금해요..
(답변을 보니까 둘다 있어서리..)

아시는 대로 답변 부탁드려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동양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오리엔탈리즘의 정의도 조금 달라집니다.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오리엔탈리즘을 평하면 일반적이며 덜 부정적이고 철학, 문화의 측면을 강조하여 평하면 어느정도 부정적입니다. 동양을 동경하는 의미가 오리엔탈리즘에 있다는 데에는 개인적으로 부정적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신비와 신기함 또는 호기심의 대상으로 동양을 본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너무 긍정적이라든가 너무 부정적이라든가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균형잡힌 정의가 필요합니다.

오리엔탈리즘의 사전적 정의 : 낭만주의의 한 경향인 이국취미(異國趣味)를 대표하는 것으로 오리엔트, 즉 동방세계에 대한 동경을 표현상의 동기 또는 제재(題材)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풍조는 아주 막연한 것이었으나 18세기경부터 유럽 각지의 상류계급 사이에 유행하여 시누아즈리(chinoiserie:중국취미) ·튀르크리(turquerie:터키취미) 등이라고 하여 미술이나 음악의 주제로 삼게 되었다. 모차르트 작곡의 《터키행진곡》이 그 한 예이다.
19세기에 들어와 동방과의 교류가 빈번해짐에 따라 작가 자신이 동방의 나라들을 여행하여 직접 그 풍토와 풍속에 접하여 그들의 표현영역을 확대하는 경향이 커졌다. 이는 동시에 작가들의 직접 체험을 통하여 유럽과는 전혀 다른 정신세계에 눈을 뜨게 한 것을 의미하며 오리엔탈리즘은 일부 낭만주의자들의 독점물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미술에서는 고전주의자인 앵그르까지도 《오달리스크》 《터키 목욕탕》과 같은 동방적인 주제의 명작을 그렸던 것이다.
문예상에서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하면 용어에 내포된 ‘오리엔트’의 개념, 즉 고고학(考古學)이나 역사학상의 ‘오리엔트’와 같이 분명한 것은 아니고 극동지방이나 아프리카 북부까지도 포함한 동방세계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통례이다.


다음의 두 긴 글을 잘 읽으시면 어느 정도 개념이해에 도움이 되시리라 봅니다.(사전적 정의와 비교하시길)

문명의 격차에 대한 두 가지 분석:


근세 유럽으로부터 발생한 민족이라는 단위는 18, 19세기를 거치면서 공고화되고, 제국의 시대를 계기로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민족주의가 발생하게 된 중요한 요인들은 흔히 자본주의, 근대적 산업발달, 부르주아 민주주의 등을 들곤 한다. 하지만 좀 더 근본적인 문제에 천착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요인들을 포괄하고 그것에 앞서는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물질적/사상적인 면에서의 이런 근대적 변화는 왜 유럽에서 먼저 일어났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들은 유럽 밖의 세상에 이 변화를 강요했는가? 이 두 가지 의문은 강자의 약자에 대한 억압으로 점철된 근대 이후의 세계사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으로 유효하며, 끊이지 않는 민족적/종교적 갈등을 완화할 대안을 모색하는 데 단서가 되는 것으로 중요하다. 여기서는 각 의문들에 대한 깊이있는 분석을 제시한 두 책을 소개하고 어떤 면에서 서로가 보완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지 논의해 보려고 한다. 첫 번째 의문에 대한 답으로써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를 꼽았고, 두 번째 의문에 대한 책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을 꼽았다.
근대 문명은 왜 유럽에서 발달되었는가? 이에 대한 답은 가깝게는 중세 이후의 동서양 역사를 비교하여 얻어질 수 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의 문명은 황제 중심의 강력하게 통합된 질서를 안정되게 유지해온 반면 유럽은 종교적 권위가 의심받은 이후 병렬적인 국가들의 혼란상 속에서 사회경제적 근대화가 가능했다는 시각이다. 이것은 유럽과의 비교대상을 중국으로 삼았을 경우인데, 그 이외의 지역에서 유럽에 앞설 만한 문명이 없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시각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지구상의 거의 모든 곳에서 살고 있었고 유럽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곳의 사람들이 제국주의의 수난을 받았다. 유럽이 근대화를 꽃피울 때 아프리카의 주민들은 왜 그만한 문명을 발달시키지 못했을까? 또 아메리카는? 오세아니아는? 유럽 문명의 모태가 된 근동의 주민들은?
의 저자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이 의문에 답하기 위해 역사 이전의 시기에 초점을 맞춘다. 인간이 언제부터 대륙 곳곳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는지, 그 중에 특정 지역에 정착한 주민들만 선별적으로 문명을 발달시키게 된 요인은 무엇인지를 밝힘으로써 유럽과 아시아가 다른 대륙에 앞선 문명을 발달시키게 된 현상을 설명한다. 논의를 뒷받침하기 위해 저자는 진화생물학, 생물지리학, 인류학, 언어학 등의 광범위한 자연과학의 성과들을 동원하는데, 그 폭넓은 지적 오지랖과 적절한 논리 전개에 따른 치밀함이 놀랍기도 하거니와, 인문학적 접근이 되기 쉬운 질문에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논의를 풀어나간다는 점이 이채롭다.
문명의 격차를 설명하는 관점 중에 서양 문명의 세계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흔히 동원되는 것이 인종주의 적 관점이다. 유럽인이 선천적으로 뛰어나서 세계를 정복할 문명을 갖게 되었고, 아시아인은 그보다 하등한 종족이어서 식민지 시절을 겪었고, 아메리카 인은 더 하등해서 자신의 땅에서 몰려났다는 요지의 주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인종주의 적 시각의 완전한 반대 지점에서 치밀한 답변을 내놓는다. 저자는 초기 인류의 이동, 작물, 가축, 기후, 지형, 세균, 문자, 권력구조 등의 상세한 분야의 자료를 토대로 유사 이전에 예고된 문명의 불균형을 설명해낸다. 그에 따르면 인종간의 선천적인 능력 차는 무시할 만한 것이며, 놀라운 문명의 격차는 지리적 환경에 의한다는 것이다.
얼른 눈에 보이는 차이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16세기에 백 수십 명의 스페인 군대가 수백만의 잉카제국을 완전히 장악해 버린 일이 있다. 1:10000. 이런 마법 같은 일은 스페인 인의 능력이 만 배로 뛰어났기 때문이라고는 설명할 수 없다.(그래서 스페인 군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돌렸다.) 그들은 총과, 면역성을 갖지 못한 세균과, 문자를 가진 문명으로부터 배운 전략을 갖고 있었다. 반면 잉카 인들은 가죽 방패와 석기를 들고 있었으므로, 스페인 군은 쉽게 잉카의 황제를 생포할 수 있었다. 순진한 잉카 인들은 금덩이를 바치면 황제를 풀어줄 것으로 생각했지만, 배반의 역사에 닳고닳은 스페인 군에 의해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여기서 한 단계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보자. 잉카문명은 왜 그때까지 석기시대였을까? 잉카 인은 왜 유럽인이 가져온 질병에 목숨을 잃고, 그 반대는 되지 않았을까? 잉카 인은 왜 문자를 갖지 못했을까?
문명은 정착생활로부터 시작한다. 수렵 민의 이삿짐은 필연적으로 단촐 해야 했으므로, 무게가 많이 나가는 발명품을 만들 수가 없다. 그리고 광장이나 성역, 관청과 같은 공공장소도 발달시킬 수 없으므로 문명을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정착을 해야 한다. 북아메리카 서안과 같은 먹을 것이 아주 풍부한 곳에 정착한 소수의 예를 제외하고는 정착 민이 수렵생활을 유지하기는 힘들다. 정착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경작을 겸해야만 하고, 인구밀도가 늘어날수록 경작비율과 생산성을 늘려야 한다. 농업 생산성 향상이 인구밀도를 높이고, 높은 인구밀도가 생산성 향상의 요인으로 작용하는 순환고리 속에서 초기 문명이 발생한다.
농작물이 어느 정도의 지식만으로 자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농사를 일찍 시작하지 못해서 문명이 낙후된 민족은 지능이 모자란 탓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수렵 민들은 그들 주변의 동식물의 특성과 용도에 대해 어느 식물학자보다도 상세히 알고 있으며 최대한으로 그것을 활용할 줄 안다. 문제는 작물 화에 용이한 식물은 그리 흔하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몇 안 되는 작물 화에 용이한 야생식물들마저 지중해 연안에 편중돼 있었다. 농작물 분포의 확산 지도를 그려보면 지중해 연안에서 출발해 유럽 전역으로 서서히 퍼져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농업 화는 자생 식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작물에 적합한 외래종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된 것이다.
유럽과 아메리카 문명의 차이는 다른 요인에 의해 더 벌어진다. 동서 방향으로 뻗은 유라시아 대륙에 비해 남북 방향으로 뻗은 아메리카 대륙은 어렵게 얻은 작물과 정착문명이 전파되는데 더 어려운 환경에 있었다. 농작물은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데, 남북 방향보다는 동서 방향의 기후가 대체로 유사하므로 동서 방향의 전파 속도가 훨씬 빠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잉카 문명의 경우에는 고산지대에 있었으므로 기후학적인 섬에 해당되어 작물이 외부로 빠져나갈 경로가 없었다.
세균도 유럽인이 아메리카를 정복하는 데에 큰 공헌을 했다. 유럽에서 건너간 페스트나 결핵 등에 전혀 면역을 갖지 않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몰살에 가까운 사망률을 보인 경우는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유럽인을 공포에 떨게 할 세균을 갖지 못했을까? 보통 인간에게 치명적인 세균은 가축으로부터 옮아온다. 인간에게 발병하는 세균이 가축에 있던 세균과 동일한 것은 아니고, 가축에게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이 인간에게도 위험한 것은 아니지만, 가축과의 오랜 생활 속에서 가축이 보유한 세균이 변이를 일으켜서 인간에게 위험한 형태로 전염된다고 한다. 유라시아 인들은 오래 전부터 가축을 길들여왔지만 아메리카 인들에게는 가축이 없었다는 점이 그들이 세균전에 밀린 요인이다.
아메리카 인들에게 가축이 없었다는 것은 아메리카 대륙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와 연관 있다. B.C. 12000년에서 B.C. 10000년 사이에 인류가 베링 해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 왔다. 이것은 수백만~수만 년 전에 이주가 완료된 유라시아 대륙보다 훨씬 늦은 것으로, 이미 도구를 다루는 상당한 기술을 익힌 상태에서 건너갔을 것이다. 가축화에 적절한 대형동물들은 사냥에도 적절하기 때문에, 효과적인 기술을 가진 상태에서 처음 이들 동물을 처음 만난 인류는 이들을 모두 식량으로 쓰고 멸종시켰을 것이다.
이 사실은 유럽인들이 폴리네시아나 아프리카 중부 지방에 대규모 정착촌을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한 설명도 가능하게 해 준다.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인들은 가축을 키우지 않아서 유럽인에게 전염시킬 치명적인 질병이 없었다. 하지만 폴리네시아나 아프리카 중부의 경우 인간에게 옮을 수 있는 수많은 질병이 있었는데, 유럽인들은 그에 대한 항체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원주민을 몰아내고 대규모 이주를 실현시키는 데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이 외에도 이 책에는 문자의 발생원인, 사회 구조와 발명의 필요성, 필요 없어진 기술의 도태 등 여러 가지 문명 불균형 요인에 대한 치밀한 탐구가 이어진다. 지리적으로도 유럽과 잉카 문명의 비교뿐 만 아니라, 폴리네시아에서의 문화적 다양성, 아프리카에서의 인종 분포 변화, 테즈메이니아 인이 낙후된 문명을 가진 이유, 마다가스카르 섬의 인류학적 특이성 등, 다양한 영역에 시선을 던진다. 구미를 당기는 저자의 서술방식도 읽는 즐거움을 충분히 느끼게 해 준다. "...은 왜 그럴까?" 라는 질문을 던져두고 차분하게 근본 원인을 하나씩 벗겨나가는 서술방식은 호기심 많은 독자에게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주제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 "xxx일 수도 있는데 왜 ooo일까?" 라는 질문도 수시로 던지는데, 논리적 비약을 최대한 배제하려는 아주 성실한 학자적 태도도 그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천혜의 자연조건 속에서 문명을 발달시킨 유럽은 17세기를 맞으면서 시선을 유럽 대륙 밖으로 돌렸다. 그들은 새로이 맞닥뜨린 이 세계를 어떻게 보았는지, 그리고 새로운 세계에 사는 사람들보다 자신들이 앞선 문명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을 억압하면서 어떻게 스스로를 정당화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을 통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가 문자 이전 시대의 물질적 세계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은 문자 이후 시대의 언어적 세계에 주안점을 두고 분석에 들어간다. 언어적 세계 안에서 서양은 동양을 어떻게 바라보았나 하는 질문은 철학에서 인식론의 문제로 연결된다. 저자가 누차 밝혔듯, 이 책의 방법론은 푸코의 언표 이론과 지식-권력에 대한 이론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는데, 부정확한 지식으로 대강을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다
인식론에서는 주체가 어떻게 객관적으로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가를 다룬다. 칸트는 에서 인식이 대상에 종속되어 있다고 보는 종래의 인식론을 뒤집어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전에 그것을 규정하는 어떠한 틀이 있음을 제시하고, 그 틀을 초험적인 범주로 규정해서 그 범주표를 제시했다. 다시 말하면 대상의 인식은 주체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한편 푸코는 주체와 세계의 관계 속에서 언어가 매개를 함을 주목하고 언어의 질서에 세계와 주체가 모두 종속되어 있다고 보았다. 푸코가 생각하는 인식 가능성의 틀은 칸트가 말한 경험 이전의 보편적인 범주가 아니라 바로 담론의 질서이다.
담론(discurs)2)은 방법적 질서에 따라 제시된 판단들의 체계로서, 넓게는 일상적인 담화활동에서부터, 지식으로서 체계를 갖춘 언설들, 엄밀성을 띤 과학적 명제들까지를 포괄한다. 담론을 이루는 것은 명제나 어구들인데, 명제나 어구는 언표적 장 속에 존재하는 여러 언표의 계열들 중 특정한 것이 현실화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언표는 명제가 어떤 의미를 부여받기 이전의 것으로, 언표적 장은 기표와 기의의 특정한 연결상태가 아닌 기표가 기의를 부여받을 수 있는 경우의 수들의 집합이다. 이 공간 안에서 담론의 질서가 펼쳐지고, 사물에 대한 인식이 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장갑차 사고를 낸 미군은 무죄”라는 명제는 많은 한국인이 틀린 명제로 판단하겠지만, 한국인의 언표적 장 속에 존재하는 언표중 하나이다. 그러나 “거북이가 우산을 입고서 민주주의를 먹는다.”는 문장은 알 수 없는 낱말을 사용하지도, 문법적으로 오류가 있지도 않지만 의미를 연결시킬 재주가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담론의 질서 속에 들어와 있지 않은 세계는 인식할 수 없고 따라서 명제의 수준에서 판단을 내리거나 담화의 수준에서 발화할 수 없는 것이다.
유럽인들은 낮선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서 그들 담론의 질서를 재구성하고 확장할 필요를 느꼈다. 동양에 관한 이미지를 모으고, 문헌을 정리하고, 탐험하고, 언어를 연구하고, 생활상을 조사해서 동양을 표상 하는 담론(오리엔탈리즘)을 구축해낸 것이다. 서양인이 바라보는 동양은 오리엔탈리즘 속의 동양이다. 그것이 동양인이 바라보는 그들 자신의 모습과 같은지 다른 지의 여부가 이 사실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일치할 경우에도 어디까지나 서양은 동양을 오리엔탈리즘을 통해서 바라본다.
푸코는 지식-권력이란 개념으로 진리임을 공인 받은 지식(과학, 제도권의 주류 학문, 예절)이나, 국가권력 등의 권력의 구체적 형태를 지식-권력의 한 양태로 파악한다. 푸코에게 권력은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 간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효과이다. 지식은 순수하게 옳거나 그르지 않다. 지식에 진위의 구분을 내리는 것은 권력이 담론을 통제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앞서의 예를 다시 들어보자. 미군은 한국에서 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군과 한국 민중과의 관계에서 권력 효과가 일어나는 것이고 “장갑차 사고를 낸 미군은 무죄”라는 지식이 참인가 거짓인가는 미국과 한국의 관계설정(권력)에 따라서 결정된다.
마찬가지의 논의가 에도 바탕이 된다. 서양은 동양에 우월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그들이 멋대로 구성한 지식을 정당화시킬 수 있었다. 그들은 자체적인 논리적 정합성을 갖는 텍스트들을 양산했고, 이것으로부터 동양을 ‘창조했다’. 문헌학, 언어학, 지리학, 해부학 등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학문이 동원되어 동양을 연구했고, 그 연구성과는 다시 동양에 대해 말하는 다른 연구의 기초자료로서 작용했다. 오리엔탈리즘은 그렇게 자기증식을 하며 우월한 서양의 대립 쌍인 열등한 동양의 상을 만들어갔다. 동양은 실제 거주민의 삶과는 상관없이 기괴하고, 선정적이고, 낭만적인 곳이 되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 저자가 빚을 졌다고 고백한 푸코의 사상에 얼마나 충실한 책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에서는 권력을 국가기관이 가진 행정력으로서의 권력이라기보다는 국가가 미치지 않는 미시적인 영역에서 신체에 작용하는 힘으로 파악한다. 그래서 19세기가 오면서 수형자의 처벌방식이 관대하고 박애 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도 더 미세하게 수형자를 통제해 오는 권력의 움직임을 읽어낸다. 그러나 에 사용된 ‘권력’과 ‘지식’이란 낱말의 용법은 일상적인 맥락에서의 용법과 거의 일치한다. 그래서 오리엔탈리즘의 본격적인 서막으로 나폴레옹이(국가권력) 학자(지식 생산자)들을 데리고 이집트에 원정을 간 이야기를 든다. 게다가 논의의 전반적인 흐름이나 서문에 밝힌 연구방향도 푸코의 고고학이나 계보학의 방법과는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족이지만 맑스에 대한 저자의 시각에 대해서 잠깐 문제삼고 싶다. 맑스가 식민지 인도에서 영국에 착취당하면서 한편으로 근대화를 이루는 것을 보고 “영국은 이 혁명을 초래함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역사의 도구로서 역할을 수행해 왔다.”고 평하고 이어 괴테의 시를 인용한 것으로, 저자는 맑스가 “낭만주의적인 오리엔탈리즘”에 빠져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맑스가 말한 “역사의 도구”라는 것은 동양을 우월한 서양문명에 종속시키는 낭만적 사업을 말하는 것 이라기 보다는, 전근대적 경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고, 장차 공산 혁명을 촉발할 토대를 마련하는 단계를 영국이 수행해 준 것을 말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어서 오리엔탈리스트는 “인간을 광범위한 집합의 견지에서 파악하고 또 추상적인 일반개념으로서 인식했다”고 비판하고 맑스도 예외가 아니라고 했는데, 이것 역시 맑스가 인간 개체보다는 계급을 단위로 사고한 것은 사실이나, 오리엔탈리즘과는 다른 입장에서 접근한 구분으로, 저자의 맑스 이해가 부적절한 것이다.
이 다루는 ‘오리엔트’는 주로 근동 지방에 한정되어 있고, 그에 대립되는 서양도 프랑스와 영국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반면, 가 대립시켜서 검토하는 대상은 유럽과 유럽 아닌 대륙 전체에 걸쳐 있어서 논의 대상의 차이가 크다. 하지만 큰 흐름으로 보면 두 책에서 다루는 주제들을 비교하고 보완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데 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은 언어적인 세계에서의 서양인의 세계관을 다루는 만큼, 에서 간단하게 다룬 인종주의 적 시각의 좀 더 풍부한 예를 제시한다. 이 예에서 보여지는 주장은 에 제시된 것처럼 초보적인 수준의 것들은 아니다.
보는 바와 같이, 셈 인종은 모든 점에서 그 단순성으로 인하여 미완성의 종족이라고 생각된다. 인도-유럽어족에 대한 이 종족의 관계는-감히 유추를 사용한다면-유화에 대한 연필화와 같다. 이 종족은 완벽함의 필수조건인 다양성, 활달함 그리고 생명의 풍요함을 결여하고 있다. 창조력이 결여되어 있어서 은혜로운 소년기를 보낸 뒤에는 오직 가장 평범한 남자가 되는 것과 같이, 셈 인종은 그 최고의 만개를 일찍 경험하기 때문에 그 뒤에는 참된 성숙을 이룩할 수가 없다.
푸코의 방법론은 진리의 모습을 한 권력의 허구성을 밝히는 데에는 유효하지만, 단지 밝히기만 할 뿐 변화를 위한 이론적인 전망을 제시하거나 현재 권력의 뒤를 업고 있는 지식을 대체하는 데 실천적인 지침이 되어주지는 못한다는 지적이 있다.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논의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좀 더 포지티브한 정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에 오리엔탈리즘이 행사하는 동양에 대한 권력을 포지티브한 방식으로 반박하는 역할을 의 성실한 과학적 방법이 하고 있다고 보인다.
이상으로 과 에서 다룬 문명의 불평등에 대한 고찰을 살펴보았다. 이 서양인이 보는 동양에 관한 지식-권력의 구조를 드러내고 는 이것을 적극적으로 반론하여 인간 삶의 다채로운 모습을 긍정하는 입장에 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실천이다. 오리엔탈리즘과 그 변종인 미국의 이슬람 인식, 러시아의 체첸 민족에 대한 입장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리고 가깝게는 우리 나라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우리의 ‘오리엔탈리즘’은 어떠한가? 우리는 국가경쟁력과 민족적 단결을 주장하는 한편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틀로서의 우리 사회의 담론은 건강한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한국의 古代近東學
배철현 / 세종대 교수. 고대근동학.



1. 들어가는 글 : 문명의 시작과 ‘고대근동’

인간이 고대 문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을 역사적으로 최근의 일이다. 서양인이 자기도취의 세계관에 감금되어 있다가 타자他者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에 널리 퍼진 산업혁명 이후였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유럽인들이 서서히 非유럽국가들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고 그들이 제국주의의 일환으로 정복한 非유럽적인 문화, 즉 ‘오리엔트’를 발견하였다.
유럽인들에게 고대 문명은 그리스나 로마 역사가들, 혹은 성서기자들이 제공하는 이차적이며 다소 왜곡된 정보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리엔트’를 식민화하는 도구였던 유물을 연구하는 고고학archaeology과 문헌을 연구하는 고전 문헌학philology들의 노력으로 자기들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두 가지 사상적인 기둥인 ‘헬레니즘Hellenism’과 ‘헤브라이즘Hebraism’의 뿌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유럽인들의 ‘고대 근동’ 발견은 우연이었다. 이들이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접근한 중동지방에서 뜻하지 않게 자기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오리엔트’를 발견하면서 자기들의 정체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근간을 이루는 ‘고대 근동ancient Near East 문명’을 발견하였다. 인간문명civilization의 필수 요건인 ‘도시’, ‘문자’가 처음으로 창조된 곳이 바로 ‘고대 근동’이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은‘고대 근동’을 문명이 아침의 해처럼 힘차게 떠오르는 곳이라 하여 ‘(태양이) 뜨는’ 혹은 ‘동쪽의’라는 의미를 가진‘오리엔트(orient ‘고대근동’ 혹은 ‘오리엔트’는 단순히 지형적인 개념은 아니다. 미국에서 ‘오리엔트’하면 한국을 포함한 동양을 의미하지만 유럽 전통에서 ‘오리엔트’는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타인, 터키, 이라크, 그리고 이란을 포함한 ‘근동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총체적인 문화현상이다. 요즘 학술 잡지에서 ‘고대 근동’이나 ‘오리엔트’라는 용어 대신에 아시아 대륙에 서쪽에 위치한다 하여 ‘西아시아’라고 부르기도 하나, 이 용어는 단순히 지형적인 개념이며 ‘中東’은 근대이후 정치, 경제, 그리고 이슬람 문명을 이르는 용어이기에 이 글에서는 사용하지 않겠다.
이 글에서 필자는 ‘고대 근동’을 이집트, 팔레스티나,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이란과 터키를 포함한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멸망시켜 고대근동지방에 시작된 헬레니즘 이전의 문명이 태동된 곳을 이르는 용어로 사용하고 ‘오리엔트’는 보다 문화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으로 고대 근동과는 같은 지형을 이르는 용어로 기원 후 7세기부터 시작한 이슬람 문명까지 포함한 문명을 이르는 용어로 사용할 것이다.
서양문명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으로 구성되어있고 말한다. 유럽인들은 이 두 개의 사상적인 기반이 개체문화個體文化의 천재들이 일구어 낸 개별적인 사상이라고 여겼다. 아니 그렇게 분리하는 것이 인문학의 諸분야를 설명하는데 쉬운 도구가 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헤브라이즘은 《구약성서》 안에 그 사상적인 본질을 담고 있고 헬레니즘은 호머 詩人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 그리고 후에 《신약성서》를 통하여 그리스도교와 함께 서양의 기둥이 되었다.
《구약성서》의 이미지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며, 인간들에게 도덕적이며 영혼靈魂에 관련된 문제를 해결해 줄 모범 답안지로 여겨졌다.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로 대표되는 헬레니즘은 인간에게 정치, 경제, 예술과 같은 인간들이 모여 살기 위한 현실적인 공간을 훌륭히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 천재적인 서양문명 기둥의 개별성이 최근 점점 부식되고 있다.


2.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 가져다 준 해석의 눈

사이드가 1978년에 발간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은 아마도 20세기 末 발간된 다른 어떤 책보다도 인문학을 접근하는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준 것 같다. 사이드에 따르면 ‘유럽’과 ‘오리엔트’라는 두 개의 상반된 개념은 유럽의 학자들, 특히 유럽 제국주의 학자들이 유럽의 강력한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非유럽을 정복하기 위한 도구로 만들어 낸 것이라 주장하였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자화자찬의 우물 안에 개구리식의 서양의 학문 담론을 코페르니쿠스적인 문화 해석방법으로 일침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새로운 방법론의 파장이 지금도 우리에게 새롭고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물론 사이드 이전에도 유럽인들이 ‘오리엔트’를 총괄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유럽이 19세기에 경험한 오리엔트를 상세히 기록한 R. 슈왑Schwab의 《La Renaissance orientale》(Paris: Payot, 1950), 그리고 유럽의 식민지사를 그린 V. G. 키어난Kiernan 작품인 《The Lords of Human Kind: Black Man, Yellow Man, and White Man in an Age of Empire》 (Boston: Little Brown, 1969)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위의 책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법으로‘오리엔트’를 접근한다.
사이드는 프랑스 철학자인 M. 푸꼬Foucault(1926∼84)의 영향을 받아 이전의 오리엔트에 관한 유럽인들의 작품을 하나의 ‘담화discourse’로 보았다. 다시 말해 유럽인들은 르낭, 플로베르, 로렌스의 작품을 통해 그들의 지배대상인 非유럽적인 것을 ‘오리엔트’라는 추상적인 세계로 정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세계관을 상정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오리엔트’의 부정적인 개념이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非유럽적인 것, 자기와 다른 것을 자기네 기준대로 이해하여 식민지적 역사관을 고취시키려고 시도를 했다. 그러므로 유럽과 오리엔트의 관계는 주객主客, 더 나아가 주종主從 관계가 서서히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푸코가 사이드에게 오리엔트를 이해하는 데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설명해주었다면,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 A. 그람시Gramsci(1891∼1937)는 사이드에게 유럽과 오리엔트의 관계를 ‘헤게모니’로 설명하게 해주었다. 유럽인들의 오리엔트에 관한 사고는 그람시가 주장하듯이 무자비한 강요에 의해 고취되는 것이 아니라, 흔히들 아는 상식이나 전통적인 지혜라고 알려진 아주 평범한 사건이나 생각에 대한 무의식적인 동의에서 시작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한 사회의 지식층의 대부분은 기성 사회의 권력의 하수인이 되어 자기들도 모르게 ‘헤게모니’를 형성하기 위하여 권력층을 위한 변명을 상식이나 전통, 혹은 보수의 이름으로 구축한다. 바로 사이드는 그람시로부터 ‘헤게모니’ 이상의 문화 해석방식을 보았다. 곧 사이드는 그람시를 통해 자신이 팔레스티나 사람으로서 경험한 주관적인 상황을 개념화, 객관화하는 시각을 길렀다.
그래서 사이드는 한 문화를 비판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작가 자신이 역사과정의 산물이라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사이드는 팔레스티나 사람으로서 《오리엔탈리즘》을 통하여 유럽 오리엔탈리스트에게 빼앗긴 오리엔트를 다시 찾아 해방시키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그는 그의 책에서 “오리엔탈리즘은 인간 상실과 민족 해체의 역사”(《Orientalism》, 337쪽)라 하였고 “들을 오리엔탈리즘과 같은 사고의 사슬에서 해방시키는 것” (《Orientalism》, 339쪽)이 그가 글을 쓰는 목적이라 하였다.


3. 서양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의 대상이었던 ‘오리엔트’는 고대근동이다

사이드는 오리엔트을 연구하는 학자인‘오리엔탈리스트orientalist’의 가장 중요한 창작물은 ‘오리엔트’ 그 자체라고 주장하고 ‘오리엔트’는 대부분의 아시아와 중동 지방을 총괄하여 이르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수많은 문화와 인종들이 모인 ‘오리엔트’를 하나의 집단으로 매도하려는 시도는 오리엔탈리스트의 가장 큰 업적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에게 전형적인 ‘오리엔탈oriental’이란 오리엔트 문화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으로 생물학적으로 열성을 타고나 문화적으로 뒤졌음은 물론 진화가 덜된 인종을 총체적으로 이르는 말이었다.
특히 오리엔탈리즘에 관한 담론과 이미지는 대부분 권력과 성에 관한 은유로 묘사된다. 곧 여성적이고 약한 오리엔트는 유럽의 지배를 기다린다. 그들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하나의 창작물로 상정한 오리엔트라는 ‘他者’는, 이전에 표현된 적이 없는 개념의 집합체였다. 오리엔트가 오리엔탈리스트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오리엔트는 오리엔탈리스트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현대 서양인들이 ‘아랍’ 민족에 대한 편견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는 사이드가 가진 ‘오리엔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에 일부 동의는 하지만, ‘오리엔트’가 가진 긍정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요소를 부각시키고자 한다. 물론 사이드가 서양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의 대상으로 아랍에 대한 서양의 삐딱한 시각, 그리고 非서양 문화에 대한 편견을 지적한 것은 중요한 우리시대의 담론이다. 그러나 18세기말부터 본격적으로 서양인들의 연구 대상이 되기 시작한 오리엔트는 ‘아랍’일 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수메르,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지금의 이라크]), 이집트, 히타이트(지금의 터키 또는 소아시아), 페르시아(이란)였다.
이들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생겨난 인류 최초의 문명들이 일어난 이른바 ‘비옥한 초승달fertile crescent’이라고 불리는 지역이다. 유럽인들에게 오리엔트는 명확하게 경계가 그어진 지형적인 개념이 아니었지만 당시 그들의 오리엔트는 ‘고대 근동ancient Near East’이었다. 사이드는(《Orientalism》, 58쪽) ‘오리엔트’가 헤로도토스와 알레산더 대왕에 의해 알려지고 알렉산더가 정복한 후에 오리엔트를 ‘근동Near East’, ‘극동Far East’, ‘익숙한 오리엔트Familiar Orient’(이스라엘과 팔레스티나 지역), 그리고 ‘새로운 오리엔트a novel Orient’(아메리카 대륙)로 나누었다고 전한다.
사이드의 ‘오리엔트’인 아랍은 18세기부터 유럽인들의 고고학 발굴로 새로운 학문의 대상된 ‘오리엔트’, 즉 고대 근동, 특히 수메르, 바빌로니아, 앗시리아와는 적어도 천년 이상의 차이가 있다.


4. 원래의 ‘오리엔트’는 바로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다

‘오리엔트’에 관한 연구는 고대 근동이 위치한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두 강들 사이의 (지역)’)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서 시작된 인류 문명의 가장 오래된 발상지 수메르,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연구에서 시작하였다. 현재 이라크의 남부에 자리잡았던 수메르인들은 지금부터 약 오천삼백 년 전인 기원전 3300년부터 문자를 사용하고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이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을 키.엔.기ki.en.gi라고 불렀다.
키.엔.기는 나중에 남부 바빌로니아와 북부 앗시리아에게 그 문화를 넘겨주어, 그 역동적인 문화가 지중해를 중심으로 태어날 그리스의 헬레니즘과 팔레스티나의 헤브라이즘에 근간을 마련하였다.‘오리엔트’를 대상으로 고전문헌학적인 본격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오리엔탈리스트는 명실공히 독일 괴팅겐의 한 고등학교 라틴어 교사였던 G. F. 그로테펜트Grotefend(1775∼1853)이다.
그는 1802년 괴팅겐 대학에 있는 ‘왕립 과학원’에서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Persepolis에서 발견된 비문(고대 페르시아 비문들은 대부분 세 가지 다른 쐐기문자로 쓰여 있다: 인도-유럽어의 일종인 고대 페르시아어Old Persian, 셈어의 일종인 아카드어Akkadian, 그리고 세상의 어떤 언어와도 연관이 없는 고립인 엘람어Elamite이다)을 연구하였다. 특히, 그는 중기 이란어(임금에 관한 관용구를 중심으로)를 아베스타어 및 산스크리트어와 비교 연구하여 고대 페르시아어 판독에 기여하였다.
그는 이 비문들에 쓰인 글자 모양이 ‘못’과 비슷하다하여 ‘쐐기문자cuneiform’라 하였다. 그로테펜트의 40여 쪽에 달하는 그의 논문은 20년 후인 1823년 J. F. 샹폴레온Champollion(1790∼1832)에 의해 판독된 ‘성각문자聖刻文字, hieroglyph’와 더불어 유럽 들의 첨예한 학문의 대상, 즉 ‘오리엔트 연구oriental studies’가 되었다. 고대근동에서 발견된 60만 장 이상의 쐐기문자 토판 문서들이 처음으로 유럽인 학자들에게 소개되기 시작하여 오리엔트의 신비를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5. 그로테펜트와 쐐기문자의 판독

오늘날 이라크는 ‘비옥한 초승달’지역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기원전 3500년경 기후의 급격한 변화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인간들이 정착하기에 알맞은 장소가 되었다. 메소포타미아에 농업이 정착되고 새로운 도시, 지역 국가, 그리고 제국帝國이 생겼고 또한 문자가 생겨났다. 우리가 추적할 수 있는 인류 최고의 문자가 그림글자 형태로 이곳에서 기원전 3300년에 우룩Uruk이라는 수메르 도시에서 발견되었다.
그림문자로 시작된 ‘쐐기문자’는 기원전 2600년경 점차로 간략화되고 추상화되어 수메르어가 고대근동지역의 문자로 자리잡는다.
그 후에 바빌로니아 제국, 앗시리아 제국, 히타이트 등 고대 근동 전역에 쓰이는 문자가 되었다. 이 쐐기문자가 기원후 75년까지 사용되어 쐐기문자는 3000년 이상 사용된 문자이다. 쐐기문자는 고대근동과 인류에게 역사를 선사하였다. 바빌론의 함무라비 왕, 라가쉬의 구데아 왕, 센나헤립의 앗시리아 왕이 쐐기문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쐐기문자는 19세기 초 판독될 때까지 천오백 년 이상 사람들에게 장식으로만 여겼다. 1618년 G. S. 피구에로아Figueroa가 그리스-로마 저자들이 그들의 작품에서 언급한 고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King Darius the Great과 그의 후손들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에서 수많은 유적지의 흔적을 보았다. 이 유적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새로 발견한 알 수 없는 문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 문자들은 아람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혹은 아랍어도 아니다. 이들은 삼각형으로 피라미드나 오벨리스크 모양으로 보기에는 거의 유사하다.
여기에서 필사한 쐐기문자가 1657년에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이집트의 성각문자hieroglyphs와는 달리 유럽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1700년 영국 옥스포드 대학의 히브리어와 아랍어 교수였던 T. 하이드Hyde는 이 문자들이 쐐기처럼 생겼다하여 설형문자楔形文字, cuneiform(cuneus ‘쐐기’ + fo@rma ‘모양’, 즉 쐐기모양 또는 쐐기문자)라 불렀다. 1712년 네덜란드의 의사이며 고전학자인 E. 캠퍼Kaempfer는 자기가 1686년에 방문해서 그린 쐐기문자 문서를 출판하였다.
그러나 1770년대까지 쐐기문자 판독에는 진전이 없었다. 덴마크의 여행가였던 C. 니부르Niebuhr는 페르세폴리스에 써있는 문자는 모두 세 종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세 종류의 문자가 후에 언어학적으로 밝혀진 인도-유럽어인 고대 페르시아어, 고립어인 엘람어, 그리고 셈어인 아카디아어였다. 니부르의 작업은 18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쐐기문자 판독의 기초를 놓은 셈이다.
쐐기문자 판독에 첫 진전을 본 사람은 앞서 언급한 독일 괴팅겐의 고등학교 라틴어 선생이었던 그로테펜트였다. 그는 상식과 중기 이란어와 산스크리트어, 그리고 고전문헌 등에서 반복되는 관용어구를 대입시켜 고대 페르시아를 1802년에 거의 판독하게 된다. 그가 만든 음절표에 실수가 있었고 그가 대학 교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그가 쐐기문자 판독의 선구자였다는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쐐기문자 판독이 진행되면서 페르세폴리스에 있는 단문보다는 장문長文의 쐐기문헌이 필요하게 되었다. 쐐기문자의 ‘로제타 석비’라고 할 수 있는 ‘비시툰 비문The Bisitun Inscription’이 이란의 자그로스 산맥의 서쪽 비시툰山에 새겨져 있었다. 지상으로부터 60m 깎아진 듯한 절벽에 페르세폴리스의 비문처럼 세 가지 쐐기문자가 적혀있었다.
영국의 장교이자 외교관인 H. C. 로린슨Rawlinson(1810∼1895)은 1826∼33년까지 인도에 장교로 머물면서 힌디어, 아랍어, 현대 이란어를 배웠다. 그 후 이란 국왕 군대를 훈련시키기 위해 비시툰 지역이 속해 있는 케르만자 지방의 책임자로 부임했다. 그는 탁월한 체력과 동네 양치기 소년의 도움으로 1100행 이상이 되는 비시툰 비문을 모두 베끼는 데 성공했다. 1847년의 일이다. 로린슨이 쐐기문자의 판독자라 알려지긴 했지만 그는 이집트어를 판독한 샹폴레옹처럼 그 과정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지 않았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그는 많은 힌트를 아일랜드 신부이자 학자인 E. 힝스Hicks의 노트를 차용한 것처럼 보인다.

6. ‘오리엔탈리스트’들의 업적 : 문화 패러다임의 변화

가. 都市
문명의 세 가지 기본 요소는 ‘도시’, ‘자금’, 그리고 ‘문자’이다. 그 중에서도 도시는 가장 중요하다. ‘문명’이라는 영어 단어 civilization도 civis(시민), civitas(도시-국가)라는 라틴어 단어에서 유래한다. 기원전 8000년경 이집트에서 팔레스티나,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소위 ‘비옥한 초승달’에서 인간생활의 형태를 바꿀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영국의 考古인류학자 V. 고돈Gordon의 용어를 빌리자면 ‘新석기 혁명Neolithic Revolution’인 농업이 일어나면서 舊석기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인간이 도약했다. 정교한 돌도 만든 농기구의 출현으로 인간은 채집하고 사냥하는 생활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와 견줄만한 사건이 거의 4700년 후인, 기원전 33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남부지역에서 일어났다. 이 사건은 ‘도시 혁명’으로 無문자시대에서 문자시대로, 前역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촌락시대에서 도시시대로의 변화였다. 그 전에 도시가 간헐적으로 이스라엘의 사해死海근처에 있는 여리고Jerico城이나 아나톨리아(터어키의 옛 지명)에 있는 챠탈 휴육처럼 독립적으로 도시가 존재했지만, 유프라테스江과 티그리스江 사이라고 불리는 ‘메소포타미아’의 남부지역인 ‘수메르’지역에서 처음으로 여러 도시가 체계적으로 생기기 시작하였다.
‘도시 혁명’은 대개 신탑神塔이라고 여겨지는 높이 쌓아올린 ‘지구라트ziggurat’와 그 부속 건물들을 중심으로 이전의 촌락에서 도시로 탈바꿈한다. 고대 수메르인들은 이전까지 해오던 유목생활과 상생相生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도시문화를 형성하였다. 도시라는 단어는 쐐기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수메르어로 ‘우루uru’, 시리아 지역의 에블라(현재명으로는 텔-마르딕)에서 기원전 24세기경 번창했던 문명의 언어였던 에블라어로는 ‘에르무er-mu’, 셈어인 아카드어로는 ‘알루a@lu’, 히타이트어로는 ‘합피라스happiras’로 등장한다. 이 단어들의 원래의 의미는 모두 ‘시장’이다.
실제로 기원전 1800년에 그 전까지의 수메르 왕들의 행적을 기록한 《수메르 왕조 기록Sumerian King List》에 도시의 시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88. 왕홀이 하늘에서 내려왔을 때,
89. 멋진 왕관과 왕좌가 하늘로부터 내려왔을 때,
90. 왕은 규칙적인 의례를 지내려고 부단히 노력했고,
91. 정결한 장소 위에 이 도시들의 벽돌을 올려놓았다.
92. 이들에게 이름이 주어졌고 (건물을 건축할 때 사용할 바구니가 할당되었다.)
93. 첫번째는 ‘에리두’이다. 닌투 여신이 누딤무드신에게 주었다.
94. 두번째는 바드티비라이다. 그녀는 왕자이자 성자신에게 주었다.
95. 세번째는 라락이다. 그녀는 파빌삭신에게 주었다.
96. 네번째는 십파르이다. 그녀는 우투신에게 주었다.
97. 다섯번째는 슈룹팍이다. 그녀는 수두신에게 주었다

이 《수메르 왕조 기록》은 大홍수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도시들을 소개하고 있다. 실제로 수메르 지역에서 기원전 2900년에 홍수 지층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류 최초의 도시를 만든 기록이 《구약성서》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이다. 이 사건은 지구라트를 중심으로 도시를 만들려고 하는 메소포타미아인들의 기억을 기록하였다.

나. 資金
도시가 생겨나 유지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다. 자금이라는 영어단어인 capital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부의 척도였던 양, 염소의 숫자에서 유래했다. capital은 원래 ‘머리’를 의미하는 단어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富의 척도인 양이나 염소의 머리(capital) 숫자에서 유래했다. 재산을 의미하는 영어단어인 chattel이나 cattle도 바로 ‘양’에서 온 단어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전은 기원전 7세기경 아나톨리아의 리디아 지역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고 그 후 고대 페르시아 제국 시대에, 제국의 영토였던 인도에서 그리스까지, 박트리아Bactria에서 이집트까지 널리 유통되었다.
경제학자들에 의하면 ‘돈’은 다음 세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 교환의 수단, 액수의 단위, 그리고 가치의 표준이다. 동전이 등장하기 이전 이런 기능을 할 수 있는 “교환 가능한 물건”은 무엇이었나? 메소포타미아에 양털, 대추 야자, 물고기 기름, 말린 고기, 가죽 그리고 무엇보다도 곡물(보리와 밀)이 그런 것들이었다. 특히 보리에 대해서 수메르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금, 은, 양, 염소를 가진 자는 누구든지 보리를 가진 자 문 앞에서 하루종일 기다릴 것이다.
이 이야기는 〈가축과 곡식의 논쟁〉이라는 수메르 시의 결론 부분이다. 여기서 수메르어로 ‘쉐S#E’로 읽히는 단어인 보리가 모든 물건의 기준으로 선택된다. 초기시대에는 보리가 ‘돈’으로 통용이 되었지만 점차 보리는 ‘은’에게 자리를 내준다.

다. 文字

문자는 초기 고대근동의 상업활동을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도시가 생겨나고 중앙집권적 경제가 자라나면서 왕국이나 신전의 서기관들이 신전에 딸린 저장창고에 드나드는 곡식의 수량과 양과 염소의 수를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고대인들은 자기들의 기억의 한계를 믿을 만한 기록을 통해 해결하려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냈다.
기원전 3300년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도시 우룩에서 발견된 인류 최초의 문자는 이집트어, 중국어, 마야어 등과 마찬가지로 그림문자이다.
이러한 그림문자는 메소포타미아뿐만 아니라, 엘람(지금의 이란 남서부)에서 기원전 3200년, 이집트에서 기원전 3000년에 발견되었다. 아르메니아에서 발원하여 페르시아灣으로 유입되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오랜 기간 동안 가져온 침적토가 쌓인 메소포타미아 지역 남부 수메르에서는 널려져 있는 굳지 않은 점토판에 갈대 줄기의 뾰족하게 자른 끝을 그 위에 눌러 그림 글자를 그렸다. 이 토판문서는 태양 밑에서 자연히 구워져 반영구적半永久的인 기록이 된다.
초기 문자들은 숫자를 나타내던 것으로 그림 문자 형태의 물건이 함께 발견되기도 한다. 현재로서는 이 그림문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수소’ 표시는 수소의 머리 모양을 그리고, ‘날’이나 ‘태양’은 두 산 사이에 떠오르는 태양표시이다.
초기 문자가 쓰여진 점토판 문서의 85%가 우룩에서 발견되었다. 이 점토판 문서의 대부분이 숫자가 적혀 있다. 아마도 쐐기문자로 쓴 점토판문서는 수메르 도시들의 늘어가는 경제를 뒷받침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빙하기 시대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중요한 그림을 그린 것처럼, 수메르의 도시 거주자들은 진흙을 이용하여 도시경제에 중요한 문서를 작성하였다.


7. 새로운 패러다임 제시

그로테펜트와 같은 오리엔탈리스트의 연구로 이제 이전까지의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기원을 오리엔트를 통해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오리엔트라는 개념은 페르시아 시대(기원전 6세기~3세기)에 생기게 되었다. 당시 그리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고대 근동을 대대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오리엔트’와는 독립적으로 자기들만의 자화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중세기, 실제로는 십자군 전쟁에 이르러서야 ‘오리엔트’라는 단어와 개념이 서양인들의 사전에 수록되기 시작하였다.
‘오리엔트’에 대한 종속적이며 부정적인 이미지는 아랍이 중동에서 태동되기 900년 전, 기원전 6세기에 그리스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이미 형성되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는 그리스와 오리엔트와의 전면적인 대결을 묘사한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사이다. 미국의 극작가 G. 비달Vidal은 그의 작품 《창조》에서 고대 그리스인의 오리엔트에 대한 편견을 전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에서 그리스 대사로 파견된 고레스 스피타마Cyrus Spitama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의 내용인 ‘그리스인과 非그리스인과의 전쟁’을 묘사하고 다음과 같이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한다.
나는 장님입니다. 그러나 나는 귀머거리는 아닙니다. 내 불행이 불완전하여 어제 여섯 시간 동안 역사가라고 자칭하는 사람(헤로도토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를 포함한 아테네 사람들이 말하는 ‘페르시아’ 전쟁은 허튼 내용입니다. 나는 (차라리) 원로원 발언석에서 일어나 그를 대면하여 온 아테네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릴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보다 많이 압니다. 저는 ‘그리스’ 전쟁의 기원을 압니다. 그는 모릅니다. 어떻게 그가 알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리스인이 알 수 있습니까? 저는 일생을 페르시아 궁전에서 지냈습니다. 그리고 제 나이 칠십오 세인데, 제 부친이 그랬듯이 저도 ‘위대한 임금’을 모셔왔습니다. 그 임금들은 저의 절친한 친구 크세르크세스와 그리스인들에게 ‘위대한 다리우스’라고 알려진 임금입니다.
고레스 스피마타는 자기가 살았던 페르시아와 헤로도토스가 《역사》에 기록한 페르시아는 다르다는 것을 언급한다. 페르시아가 그리스인인 헤로도투스에 의해 기록된 것처럼, 오리엔트가 유럽인에 의해 표현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역사》인 것이다.
‘서양’의 시작이라고 하는 고대 그리스는 당시 페르시아 제국과 전쟁을 치르면서 ‘페르시아’라는 자기네와 다른 문화를 경험한다.
그 뒤 로마 행정 문서에서 처음으로 ‘오리엔트’에 대한 대비 개념으로 ‘옥시덴트’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와 달리 로마인들은 스스로를 ‘옥시덴스’는 ‘해가 지는 곳, 서쪽, 서양’이라고 불렀다. 이 양극兩極적인 개념인 ‘오리엔트’와 ‘옥시덴트’가 11세기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유럽인들의 사전에 등장한다. 당시 ‘예루살렘’에 사는 ‘오리엔트’, 곧 ‘아랍’인들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무참히 학살되었다. 그들은 또한 보기에 낯설고, 알 수 없고, 때로는 신비하고 색정적色情的인 것에다 ‘오리엔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카드모스Cadmos’는 그리스에 알파벳을 가져다주어 서양인들의 바이블인 호머의 《일리야드》와 《오딧세이아》를 문자화하도록 한 장본인인데 그 이름의 어원은 다름 아닌 ‘오리엔트’의 언어인 셈어 어근 q-d-m(동쪽)에서 유래하였고, 페니키아의 왕 ‘아게노르’의 딸로 황소로 변장한 ‘제우스’신에게 납치 당한 ‘유로파Europa’(오늘날의 유럽)의 어원도 다름 아닌 ‘오리엔트’의 언어인 셈어 어근 ‘-r-b/p’, 곧 ‘해가 지는 곳, 서쪽’에서 유래했다. 여기에서‘유럽’이란 단어가 그들이 오리엔탈리즘으로 식민지화한 ‘아랍’과 같은 어원이라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오리엔트의 일부분이던 페르시아의 만남은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자기정체성自己正體性’을 찾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18세기말부터 시작된 오리엔탈 르네상스의 주역으로서 ‘옥시덴탈’에게 ‘문자’와 ‘이름’을 제공해 주었다. 오리엔탈 르네상스는 ‘오리엔트’를 ‘옥시덴트’의 눈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오리엔트’의 눈으로 해석하는 것이며, 東·西양의 벽인 서양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을 불식시키고 동서화합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8. 오리엔탈리즘의 아이러니 : 오리엔탈 르네상스의 탄생

오리엔트와 옥시덴트의 대립은 지난 200년 간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학문 발전의 결과였다. 이념적인 보호주의를 목적으로 한 점차 전문화하는 학문체계가 ‘순수하고 고전적인’ 그리스를 투사하여 다른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는 완전한 독립체로 묘사하였다. 18세기 전까지만 해도 고전문헌학과 신학은 서로 연관을 맺으며 히브리 성서(그리스도교의 《구약성서》)는 그리스 고전과 더불어 인류 문명사의 두 기둥인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라고 여겨졌다.
이야페투스Iaphetus는 가이야(땅의 神)와 우라노스(하늘의 神)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성서의 야벳Japheth과 같은 어원으로 ‘이야페투스’와 ‘야벳’ 모두 셈어 어근 y-p-t로서 ‘아름답다’라는 의미이다. 19세기 전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야벳어Japhite’라고 불렀다.
18세기까지만 해도 다음 도식처럼 ‘오리엔트’와 ‘유럽’은 서로 같은 문화벨트를 조성하였다.

1. 함 이집트 문명
노아 > 2. 셈 고대근동/아시아 > 헤브라이즘
3. 야벳 유럽 > 헬레니즘

이와 같은 사실은 성서에 셈(고대근동/오리엔트)과 야벳이 한 형제로 묘사됨으로 드러난다. 히브리 성서 창세기 5장 32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노아는 오백 세가 되어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

이와 같이 고대 근동과 유럽의 구조는 18세기 이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변화로 동-서양의 맥을 단절시켰다. 첫째로 고전문헌학이 신학과 결별을 선언했다. 1777년 F. A. 볼프Wolf에 의해서 고전문헌학studiosus philologiae이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맘때쯤 J. J. 빈켈만Winckelmann이 독립적인 고전문헌학의 장을 열었다.
두 번째, J. G. 헤르더Herder가 낭만적인 민족주의를 개진하였다. 그에 따르면 문학과 정신문화가 한 국가, 한 종족, 한 인종마다 저마다 있으며, 다른 문화의 영향보다는 각 문화의 기원이나 유기적이며 독자적 발전을 한다.
그러므로 한 문화의 정체성은 다른 문화들과의 비교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문화의 자화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보편적인 유형보다는 K. O. 뮐러Mueller의 ‘그리스 부족문화’가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개념을 독일어로 Stammeskultur, 즉 다른 모든 문화를 파생시키는 ‘근간문화根幹文化’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 당시 우연히도 유대인들이 유럽에서 동등한 법적인 권리를 주장하여, 易으로 독일의 낭만적인 민족주의와 불화를 일으켜‘오리엔탈리즘’의 한 분파인 ‘안티-세미티즘anti-Semitism’의 불씨가 지펴졌다.
세 번째, 고전문헌학자들이 인도-유럽 문화를 발견하기 위해서 原인도유럽어Proto Indo-European와 그 문화를 再구성하기 시작한다. 1796년 인도의 대법관이며 영국과 아일랜드의 국립아시아학회Royal Asiatic Society in Ireland를 만든 W. 존스 경Johns은 옥스퍼드大에서 고전문헌학을 전공한 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인도에 정착한 뒤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 나서 인도 문화에 대한 중요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존스는 이 논문에서 산스크리트어가 페르시아어와 함께 그리스어, 라틴어를 포함한 대부분의 유럽어와 같은 어군이라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산스크리트어는 얼마나 오래된 언어인지 알 수 없으나 놀라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어보다 완벽하고 라틴어보다 어휘가 풍부하다. 동시에 이들과 동사의 어근과 문법의 형태에서 아주 유사하여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 어느 고전학자도 이들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공동의 (언어) 자료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와같은 이유로 약간의 다른 숙어를 사용하기는 했으나 고딕어(고대 독일어), 셀트어(아일랜드어)가 산스크리트어와 페르시아어와 함께 동일한 어군에 속하는 것 같다.
이때부터 유럽학자들은 산스크리트어가 유럽어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유럽학자들의 原인도유럽어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그 밖의 언어들, 특히 셈어와 이집트어를 하등下等한 문화의 언어라고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1884년 빌라모비츠-뭘렌도르프Wilamowitz-Moellendorff는 “셈인들과 이집트인들의 민족과 국가는 오랜 기간동안 쇠퇴하여 그들의 문화가 오래되었음에도 그리스-인도 문화에 아무런 공헌도 하지 못했다”고 증언하였다. 그는 오히려 나중에 ‘오리엔트’에서 오는 모든 문화가 헬레니즘적이라고 주장하였다.
특히 지금의 터키 지방에 있었던 小아시아에서 인도-유럽어 가운데 가장 오래된 히타이트어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더욱더 ‘헬레니즘’의 우위를 주장하였다. 히타이트는 메소포타미아 문화를 여과하여 그리스로 전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특히 세계 제1차대전과 제2차 대전 사이에 독일에서 새로운 해석방법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문화의 업적을 평가하는 데 독립적이고 자기 해석적인 형태를 발전시켜 보편적인 문화유형보다는 헬레니즘적인 것을 강조하였다.
유럽인들의 이런 ‘헬레니즘’ 지상주의至上主義는 20세기에 들어와 히틀러를 중심으로 한 나치주의에 의해 변질되었는데, 그들은 인도와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사용되었던 문화적인 개념인 ‘아르야Arya’를 ‘인종’개념으로 변질시켰던 것이다. 19세기부터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개진된 ‘과학주의’는, 이전의 윤리나 도덕의 기준을 형이상학적인 방법이나 유대-기독교 전통이 아닌 경험적인 과학에 바탕을 두어 설명하였다. 또한 과학은 유럽인들의 업적이며 인간 업적 가운데 최고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非유럽인종과 섞이지 않는 순수한 유럽인들을 재구성하기 위해 그들의 고향을 찾는 시도를 시작한다. 그들은 그전까지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노아의 아들, ‘야벳’계열에 속한다고 믿어 오다가, 이 인종 개념을 버리고 그들의 조상이 될 만한 새로운 종족을 찾아 나섰다. 18세기 말 새롭게 발견된 산스크리트 문헌을 중심으로 한 인도 문명을, 기원 전 15세기경 인도를 침입하여 高度의 문명을 건설한 ‘아리야’인들, 곧 ‘유럽인’들 것이라고 억지 주장하였다. 나치와 히틀러는 다리우스 대왕과 크세르크세스가 세계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사용한 ‘평화와 조화의 상징’인 ‘아리야’를 ‘전쟁과 파괴의 상징’으로 전락시켰다. 그 결과가 20세기 인류 최대의 비극悲劇인 유대인 大학살사건이다

헬레니즘 > 오리엔트 > 셈족 문명(헤브라이즘); 이집트 문명

그러나 최근 고대근동 문헌이 판독되고 유럽, 그리고 美洲 학자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자, 이전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F. 볼Boll과 K 베졸트Bezold는 점성학占星學 분야에서 그리스 점성술의 고대 근동 기원에 대해 저술을 하였고, O. 노이게바우어Neugebauer는 ‘피타고라스 정리’가 나오기 1000년 전에 이미 메소포타미아에서 이 이론을 증명한 토판 문서를 발표하였다.
그리스 신화와 유사한 신화들이 고대 근동의 쐐기문헌들에서 알려지면서 서서히 그리스 문화를 이해하는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도른사이프Dornseiff는 고대 근동의 그리스 영향에 대한 연구를 신화에서 찾았다. 히타이트어의 판독으로 히타이트 신화 ‘일루얀카와 타이폰Illuyanka and Typhon’이야기는 처음에는 고전학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1946년에 판독된 “하늘의 왕권Kingship in Heaven”이란 토판 문서에서 쿠마르비Kumarbi가 하늘 신에 의해 거세당하는 신화가 알려지고 이 신화는 헤시오드에 나오는 우라노스Uranos와 크로노스Kronos 신화와 대비를 이룬다. 쿠마르비-크로노스의 대비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힛타이트 신화가 어느 정도 그리스 신화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받아들여졌다. 또한 헤시오드의 《신통기》는 기원전 14세기경 지금의 아르메니아와 터키에서 발견되는 후리아어/히타이트어 신화, 메소포타미아에서 특히 바빌론 신화와의 유사점이 수없이 논의되어 왔다.
문학적, 신화적인 주제를 빌려온 것 이외에 종교적 제의祭儀적 영향은 아프로티테Aphrodite 神에서 찾을 수 있다. 고전 문헌학자들은 아프로디테 신에 대한 제의가 메소포타미마의 이쉬타르Ishtar 여신의 제의와 유사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이 신화의 인도-유럽적인 기원조차 이 메소포타미아의 여신에게서 유래했다. 또한 프로메테우스신화가 메소포타미아의 엔키 신화의 유사점이 논의되기도 했다.
호머의 《일리야드》에서 오케아노스Okeanos와 그의 아내인 테쒸스Tethys는 모든 신의 기원 신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아마도 메소포타미아의 창조신화인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에 나오는 모든 신들의 조상이며 지하수地下水를 상징하는 압수Apsu와 바닷물을 상징하는 티아맛Tiamat과 대비된다.
이와 같은 시도는 최근 옥스포드의 고전학자 M. 웨스트의 책 《The East Face of Helicon : West Asiatic Elements in Greek Poetry and Myth》(Oxford, 1997)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다음과 같은 구조를 제안하고자 한다.

고대근동 그리스 문명(헬레니즘)
셈족 문명(헤브라이즘)


9. 나가는 글

서양문화는 고대 근동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모체母體를 고대 근동에서 찾을 수 있다. 21세기의 현대인들은 모든 문명의 최고를 서로 받아들이고 공유하여 인간 가치는 강조하는 한편 보호주의나 인종주의人種主義는 타파하여야 한다. 물론 문명이나 문화간의 차이는 공통가치의 예외로써 각 문화가 소중히 지켜 나가야 한다.
한국 들의 서양 따라잡기는 그들의 근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서양이 고대근동의 문명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 창조하여 헬레니즘이라는 독특한 문명을 만들었고, 고대 셈족인들이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유일신 종교를 만든 것처럼, 우리도 한번 걸러진 헬레니즘, 헤브라이즘을 연구함과 동시에, 이들의 발생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18세기부터 일어난 ‘오리엔탈리즘’은 부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오리엔트, 곧 지중해地中海를 중심으로 태어난 인류 최초의 문명은 헬레니즘의 소유도, 헤브라이즘의 소유도 아니었다. 이‘오리엔탈 르네상스’덕분에 어느 시대보다도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온 고대근동의 문화 유산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태동시킨 문명의 子宮으로서 21세기의 첨예한 연구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문화는 독립적으로 그 씨앗으로부터 싹이 트는 식물이 아니다. 문화는 자기 문화의 부족한 점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과감히 받아들이고 다른 문화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으로 계속해서 배우는 과정 속에서 형성한다. 특별히 문화는 ‘나와 다른 것, 이상하고 외국적인 것’, 즉 ‘他者’를 배우려는 의지로부터 출발한다. 우리가 서양을 깊이 알기 위해서는 서양의 두 사상, 즉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뿌리인 ‘고대 근동 문명’을 이해하면 우리에게 새로운 해석의 틀을 제공할 것이다.
19세기 초부터 시작된 오리엔탈 르네상스로 말미암아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모체를 간직한 고대 근동의 자료, 특히 메소포타이아의 쐐기문자로 쓰여진 토판 문서가 60만 장이나 발견되었다. 이 고대 근동의 자료는 이전에 지난 2000년 동안 서양학자들도 접근할 수 없었던 자료들이었다. 이를 통해 한국인들이 새롭게 서양의 기원을 새롭게 인식하고, 그 거울에 비추어 한국인의 문화도 再조명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오리엔탈리즘에 대해서 알고 싶은데요.. 그 근원이라던지.. 대충에 내용을 살펴봤는데요.. 백과사전을 짜집기하여 답변을 해서 그런지 무슨 소린지 이해가 잘 되지 않더라구요....

오리엔탈리즘주제

안녕하세요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고민해볼만 한 주제가 무엇이 있을까요 레포트를 써야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얕은 주제밖에 생각이 안나서요.. 설명도 적어주시면...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세요 서방(유럽 및 그 후손들이 사는 나라)은 이성적,합리적인 데 비하여 동방(아시아쪽)은 비이성적,비합리적이라는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 어릴때 서구 문화가 더 수준높은 문화다 이런걸 배우지 않았는데도 이런 사고를 가지고 있는 이유가 오리엔탈리즘 때문이다라고 볼 수 있나요?? Orientalism =동양 멸시...

로빈슨크루소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에...

... 그러나 저는 프라이데이에게 초점을 맞추어 서구인의(서구인 동양인이라 구별할 수 없지만 표현상) 로빈슨 크루소에 나타난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만히...

네오오리엔탈리즘

... 오히려 <이슬람 사회>에 대해선 기존의 오리엔탈리즘보다 훨씬 극대화하고 자극적으로 변했죠.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네오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비단...

오리엔탈리즘,글항목식요약

... 동양에 대해 말하는 다른 연구의 기초자료로서 작용했다. 오리엔탈리즘은 그렇게 자기증식을 하며 우월한 서양의 대립 쌍인 열등한 동양의 상을 만들어갔다. 동양은 실제...

오리엔탈리즘!!!!그 예에는 어떤게...

오리엔탈리즘.. 이 나타난 영화나 책 혹은 광고...는 어떤게 있을까요? 많이 나오는... 이런 영화를 보다보면 감독의 의도, 한국영화의 제작환경, 배우수급체계 등등에 대해 깊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