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다음 구절이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사람들은 그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사물들에 가치를 부여해왔다. 먼저 사물들에 그 의미를, 일종의 인간적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그들 자신을 ‘사람’, 다시 말해 ‘가치를 평가하는 존재’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치 평가, 그것이 곧 창조행위다. 귀담아듣도록 하여라. 창조하는 자들이여! 평가된 모든 사물에게는 가치평가 그 자체가 가장 소중한 보물이요 귀중한 물건이니. 평가라는 것을 통하여 비로소 가치가 존재하게 된다. 그런 평가가 없다면 현존재라는 호두는 빈껍데기에 불과할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사물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니체의 말이 중요하다. 사물에 부여한 가치는 새로운 해석 체계, 혹은 새로운 관점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체에게 인간은 본질적으로 “가치 평가를 수행하는 자”, 다시 말해 “창조자”로 정의되었던 것이다. 오직 창조자만이 자신의 삶을 보존할 수 있는 법이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는 기존의 해석 체계를 끊임없이 파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기 때문에 창조자가 현실을 부정하는 허무주의자로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니체는 반문할 것이다. 진정한 허무주의자란 자신이 힘에의 의지가 약화되는지도 모르고 기존의 해석 체계를 답습하는 일반 사람들 아니냐고 말이다.
니체의 말대로 인간은 세계에 대한 해석을 변화시킬 수 있는 창조자다. 만약 제대로 새로운 해석 체계를 창조했다면, 우리는 자신이 가진 힘에의 의지,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의 표현을 빌리자면 코나투스(conatus)가 증진되었다는 느낌을 얻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해석 체계를 창조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같이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존의 해석 체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새로운 해석 체계를 창조하려면 주변의 질시와 동시에 고독을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어느 면에서 보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일종의 철학적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남의 해석 체계로 세상을 살아가던 사람이 자신만의 해석 체계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623282.html#csidxcebd261a9f31509ab7ac9b9f78ab55f
사물을 관념화 하는 것이 창조입니다.
뇌 밖의 물자체를 뇌 안의 관념으로 만드는 것이 창조입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사물 살해'라고 합니다.
즉 뇌 밖에 있는 진짜 사물을 죽이고 뇌 안에 가짜 사물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아래 링크를 참조 바랍니다.
(참조 : https://kin.naver.com/qna/detail.naver?d1id=11&dirId=1111&docId=399164147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꽃', 김춘수-
어떤 것을 평가한다는 것은 그것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나의 뇌 밖에 있는 진짜 그는 죽었고 그는 나의 뇌안에 꽃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일단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으면 그는 내가 죽을 때까지 나에게 '꽃'이어야만 합니다.
만일 내가 죽인 뇌 밖의 진짜 그가 되살아나면 나는 불안(angst)에 빠져 정신병에 걸리게 됩니다.
내가 이름을 부르지 않은 뇌 밖의 진짜 그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한 미지의 존재고 유령입니다.
다시는 그가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던 그 지옥같은 불안의 시절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는 누구지?'라는 공백(privation)은 나에게 불안을 야기합니다.
어두운 밤길을 가는데, 갑자기 눈앞에 뭐가 불쑥 나타났습니다.
그게 뭔지는 모릅니다. 그게 뭔지 모르는 불안이 지속되면 정신병에 걸립니다.
정신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뇌는 그것이 '귀신'이라고 상상하고 그것을 믿어 버립니다.
즉 '뭔지 모르는 그것'(하나의 몸짓)을 '귀신'(꽃)이라고 이름을 부르는 것이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즉 '뭔지 모르는 그것'이 뇌 안에서 '귀신'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이제 불안은 공포로 전환됩니다.
불안은 대상이 없는 정신적 무질서이고 공포는 대상이 있는 정신적 무질서입니다.
가령 공포증은 환공포증, 폐소공포증, 고소공포증 등 대상이 특정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