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카뮈를 실존주의 철학자의 하나로 분류를 합니다.
다만 실존주의란게 좀 스펙트럼이 넓어요. "쥐나 돌고래나 똑같은 포유류다."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데, 워낙 넓어서 그 안에서도 서로 생각이 많이 틀린 것이죠. 카뮈가 실존주의라 불리기 싫어한것도 그러한 다른 동시대 실존주의자들하고 하나로 싸잡아서 똑같다고 불리는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자기는 틀리다는 것이죠. 게다가 "실존주의"라는 말 자체가 본래 반대편에 서서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비아냥 거리면서 부르던 멸칭으로 자주 사용 되었기 때문에 정작 그 시대의 실존주의자들은 "실존주의"라는 말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보통 실존주의하면 샤르트르를 말하는데, 샤르트르는 인간의 선택을 중요시합니다. 그런데 카뮈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샤르트르는 인간을 "우주에 던져진 존재."로 생각하는 반면에 카뮈의 세계관에서 인간은 "시지프""입니다. 시지프는 그리스 신화에서 언덕위로 바위를 옮기는 벌을 받았는데, 꼭대기에 바위를 옮겨 놓으면 바위가 다시 바닥으로 굴러가서 언덕위로 밀기를 다시 반복하기를 무한히 반복해야하는 운명에 있습니다. 카뮈는 현대의 인간을 시지프의 처지와 같다고 봤습니다. 결과를 놓고 보면 어차피 허무로 돌아갈 무의미한 노력과 투쟁이 반복되는 삶이죠.
여기서 실존주의라면 일단 바위 굴리기를 멈추고 뭐가 되든지 선택을 시작하라고 할 것입니다. 반면에 카뮈는 인간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믿는게 착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형태로 다시 시지프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죠.
카뮈가 제시하는 인간은 자신이 그러한 부조리한 시지프스의 운명에 처해있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위를 언덕위로 미는 시지프 같이 그 속에서 끊임없이 하루하루 무너지지 않고 노력하기를 반복하는 그 과정 자체가 인간다운 것이고,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이방인 소설은 바로 자신의 고통의 원인을 전혀 모르던 주인공이 자신이 갇혀있는 시지프의 운명을 자각하기 까지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넷플릭스에서 "보잭 홀스맨"이란 만화가 있는데, 카뮈의 이러한 철학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