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를 공부할 수 있는 책 추천 부탁드립니다.

니체를 공부할 수 있는 책 추천 부탁드립니다.

작성일 2017.12.22댓글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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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로웹, 네이슨 레오폴드 사건에 대해 알아보다가
그 사람들을 그렇게 미치게 만든 니체의 사상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 공부를 해보려고 하는데

철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과생이라 어떤 것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모르겠네요ㅜㅜ

니체의 초인론에 대해서 좀 그 사람의 사상을 잘 볼 수 있을만한 책이 어떤게 있을지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더해서 어떻게 철학을 공부할 수 있는지도? 부탁드립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일단 니체 평전부터 시작하시는 게 나을 듯합니다.

최근에 두 권이 새롭게 번역되어 나왔는데, 나름 권위자들이 썼고 내용이 좋습니다.


1. <니체 : 그의 삶과 철학>

저자 : 레지날드 J. 홀링데일 지음 ;김기복,이원진 옮김 | 발행사 : 북캠퍼스 | 발행년도 : 2017

2. <니체 : 그의 사상의 전기>

저자 : 뤼디거 자프란스키 지음 ;오윤희,육혜원 옮김 | 발행사 : 꿈결 | 발행년도 : 2017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걍 시중에 철학사 책 3~4권 골라서 읽어보세요. 그런데 이해하려고 읽지 말고 한 달 내로 3~4권을 빠르게 존나 빠르게 읽는다는 자세로 읽으세요. 그 다음 그 중에서 그나마 잘 읽힌 책을 한 번 더 보시고 그 책 부록이나 다른 책 부록에 나온 서적들 중에 읽고 싶은 거 읽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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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저자:니체)

개성에 따라서 니체의 철학을 느끼는 정도를 달리하겠지만,여러번 반복하여 습독하여야 할것으로 사료되며 개인적으로는 많은 도움이 되었으며 추천하고픈,책입니다.
나아가,
나는 누구인가?의문으로부터 모든철학의 기초이자 철학의 종결이지않나 여겨지는 사견입니다.
감사합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로웹이나 레오폴드, 히틀러 같은 사람은 니체의 권력의지, 노예도덕이나 주인 도덕 등을 잘못 이해한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니체의 사상만큼 건전한 사상은 그 이전에는 없었던 것같습니다.

그는 필연적으로 도래할 수 밖에 없는(현대에 실제로 만연한) 허무주의를 어떻게 극복하고, 실제로 구현가능한 삶과 존재의 의미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에 대해 내놓은 처방들이 그의 저서들이니까요.  


현대 철학자 대부분은 니체 사상과 관련이 있기에, 20세기 중반 이후의 철학자들 사상을 읽으면 니체 사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니체의 초인론은 아래 글 중 (pp507~514 우리 삶의 목적)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생의 모든 의미(존 메설리 지음)라는 책에는 '니체'가 별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이 책 내용 중 3/4 정도는 아마도 니체의 사상일 거라고 여겨집니다. 

그 이유로 이 책 중 니체의 사상인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 아모르파티, 감정과 정서의 회복 등과 관련되는 글 몇 단락 올려봅니다. 


       ********** 

 

인생의 모든 의미 - 존 메설리

- 삶의 의미에 대한 101가지 시선들 -

 

p165 (알베르까뮈 / 허무주의에 맞선 반항) 시지프스가 자신의 운명을 의식하는 것은 비극이다. 그러나 그 의식은 시지프스로 하여금 신들을 경멸할 수 있게 해주고, 그 경멸은 약간의 만족감을 준다..운명은 우리의 삶에 목적이 없다고 비난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반응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운명이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도록 말이다. “그때부터 주인이 없는 이 우주는 그에게 황량하지도 않고 허무하지도 않게 느껴진다. 그 바위의 원자 각각, 어둠이 충만한 그 산의 광물 각각이 그 자체로 세계를 이룬다. 높이를 향한 몸부림 그 자체만 해도 사람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프스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 허무주의 속으로 파고들어가 허무주의를 극복해버리는 니체의 방식과 유사합니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설 4. “나는 몰락 외에 살아갈 방도를 모르는 자들을 사랑한다. 그들은 피안을 향해 건너가는 자들이기 때문이다”와 관련) 

 

p172 (웨스트팔과 체리 / 네이글에 대한 비판) 열심히 나비를 수집하는 사람이나 오랜 세월동안 별을 관찰하는 천문학자를 상상해보라. 이들에게는 뽐냄이나 영원한 관점의 흔적조차 없다. 이런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몰입할 뿐이다... 영원한 관점은 그냥 무시하고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재미있게 놀고, 흄이 너무 심각한 형이상학을 치유하는 비법이라고 주장한 주사위놀이를 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아니면 흥미로운 놀이나 일에 몰두하든지 말이다. 삶은 반항이나 경멸이나 아이러니 같은 거창한 반응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런 반응들 대신에 그냥 주관적으로 음악이나 테니스에 몰입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이런 몰입은 영원한 관점과 거리가 한참 멀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지복의 섬'에서 그렇다, 그대 창조자여! 그대들의 삶속에서 많은 애절한 죽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대들은 모든 무상한 것들의 대변자이며 긍정자가 되어야 한다.” 참조

 

p181 (조엘 파인버그 / 허무주의를 그냥 끌어안기) 하루 종일 탁구공을 치는 것은 객관적으로 부조리하더라도, 그는 본성적으로 그 활동을 즐긴다. 그에게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본성을 충족시키는 것이 좋다. 탁구를 치려는 욕망이 그의 본성이니까 말이다. 더 나아가 자기충족은 자기애를 필요로 한다. “자기애의 가장 참된 표현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향한 헌신이며, 이것이 자신의 본성의 충족이다. 비록 그 본성이 부조리하더라도 말이다.” 요컨대 자기충족이 중요하다. 자기충족이 없으면 자기애를 가질 수 없고, 자기애가 없으면 자기 충족을 이룰 수 없다.

 

  -> 니체의 아모르파티(자기자신을 사랑하라)와 관련 

 

p185 (사이먼 크리츨리 / 허무주의를 긍정하기) 그녀는 떠나면서 세상의 모든 평범한 것들에게 작별인사를 건넨다. “똑딱거리는 시계들아, 먹을거리와 커피야, 새로 다린 드레스와 따뜻한 목욕물들아, 안녕, 잠들기와 깨어나기도 이젠 안녕.” 사는 동안 우리가 평범한 것들의 아름다움을 간과한다는 것은 비극이다. 에밀리는 실망하지만, 우리는 깨닫는다 - 우리는 비범한 평범함의 진가를 알아보고 긍정해야 마땅하다. 어쩌면 이것이 허무주의에 대한 최선의 대응일 것이다. 허무주의로부터 교훈을 얻어 무의미성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 허무주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음을 깨닫는 것 말이다.

 

-> 니체의 아모르파티, 차라투.. '나누어주는 덕'에 대하여 중 이미 대지 주위에는 어떤 새로운 향기가 감돌고 있다. 축복을 가져다 주는 향기가! 그리고 새로운 희망이!” 와 관련

 

p221 (존 케커스 / 비도덕적 삶도 유의미할 수 있다) 결국 케커스는 삶의 의미에 대한 다원론적 접근법을 내놓는다. 유의미한 삶은 다양한 형태를 띤다는 것이다. 다원론적 관점의 해심 주장은 보편적인 대답을 제시하는 모든 접근법들은 오류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기본 주장은, 도덕적으로 나쁜 삶이 유의미할 수도 있고 도덕적으로 좋은 삶이 무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정통 견해와 정반대로, 삶을 유의미하게 만들어주는 요소와 삶을 좋게 만들어 주는 요소는 다르다. -

 

-> 차라투... ‘세 가지 악에 대하여와 관련

 

p246 (버트런드 러셀 /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숭배하기) 그러나 거대한 우주적 힘의 궁극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중요한 측면에서 이 무의식적 힘보다 더 우월하다. , 인간은 자유로우며 자기의식을 가졌다. 여기에서 인간의 가치가 나온다. 그러나 대다수의 인간은 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영원한 괴로움을 유예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신들을 달래고 구슬리는 쪽을 택한다...오히려 우리는 세계가 나쁨을 용감하게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진리, 좋음, 아름다움, 완벽함을, 우주가 이것들을 파괴하리라는 사실에 아랑곳없이 사랑해야 할 것이다. 이 우주적 파괴력과 그것이 초래하는 죽음에 저항함으로써 우리는 참된 자유를 발견한다. 우주는 우리의 삶을 앗아가겠지만, 우리의 생각은 그 우주적 힘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무력한 반항의 쓰라림 없이, 우리가 외적인 운명의 지배에 체념하는 법과 비인간적 세계는 우리의 숭배를 받을 가치가 없음을 깨닫는 법을 모두 배웠을 때, 마침내 무의식적 우주를 변형하고 재단장하여, 상상의 도가니 속에서 변환하여, 새롭고 찬란한 황금의 이미지가 낡은 진흙 우상을 대체하게 만드는 것이 가능해진다.

 

-> 니체의 힘에의 의지’ (의지는 자유를 가져다준다)와 관련

 

p258 (R.M. 헤어 /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 우리 모두는 일반적으로 무언가에 마음을 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는 무언가가 중요하다. 이런 중요성을 우리는 세계에서 발견하지 않는다. ‘중요성이란 우리가 사물과 사람에 부여하는 속성이다. 우리는 정말로 관심을 기울일 만한 것들에서 가치(혹은 의미)를 발견한다고 헤어는 주장한다.

 

 

p292 (테리 이글턴 / 아가페적 사랑이 답이다) 우주는 의식적으로 설계되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무언가 말하려 애쓰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저 카오스적인 것도 아니다. 정반대로 우주의 바탕에 깔린 법칙들은 과학자들을 눈물 흘리게끔 만드는 아름다움, 대칭성, 경제성을 드러낸다. 신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든지, 아니면 세계는 철저히 무작위하고 부조리하다는 생각은 그릇된 양자택일이다.

 

삶의 의미는 어떤 문제의 해답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와 관련이 있는 사안이다. 삶의 의미는 형이상학적이지 않고 윤리적이다.” 그렇다면 의미와 행복을 성취하기 우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열쇠는 행복을 이기심에서 떼어내어 인류에 대한 사랑과 연결하는 것이다. 유의미한 삶의 핵심 요소는 아가페적 삶이다.

 

p295 (모리츠 슐리크 / 삶의 의미는 창조적 놀이에서 발견된다) 슐리크는 내재적으로 가치있는 할동들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활동들에서는 수단과 목적이 통일되어 있다. 즉 수단이 곧 목적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면, 일은 놀이일 수 있다. 바꿔 말해 놀이와 창조적인 일은 일치할 수 있다. 예술가의 일이나 과학적 혹은 철학적 지식을 얻기 위한 탐구에서는 창조적인 놀이가 뚜렷이 발견된다. 거의 모든 활동이 예술로 변환될 수 있고, 슐리크는 예술적이 되기 위해서 일하고 싶어 한다.

 

p298 상단 (수전 울프 / 객관적 가치들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기) 유의미한 삶은 객관적으로 가치 있는 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때 이루어진다.

 

p309 (빅토르 프랑클 / 의미탐구) 삶의 의미는 생산적인 일, 사랑하는 관계, 고통을 품위 있게 견디기에서 발견된다.

 

p312~p314 (크리스토퍼 벨쇼 / 관계들과 기획들) 기획, 도덕적 삶은 객관적으로 좋은 것들이며 우리의 주관적 삶에 의미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만물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걱정은 근거가 없다.

 

p465 (줄리언 헉슬리 / 진화를 지휘하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얻는다.)

 

우주에서 우리의 자리에 대한 새로운 견해와 연계된 종교는 일단 실현의 개념을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 인간의 가장 성스러운 의무이자 가장 영광스러운 기회는 이 지구에서 일어나는 진화과정의 최대 실현을 촉진하는 것이다. 이 의무이자 기회는 인간 자신의 내재적 가능성들을 가장 완전하게 실현하는 것을 포함한다.

 

진화론적 인본주의 덕분에 나는 우리가 태어난 이 낯선 우주를 외경심과 궁금증을 동반한 사랑의 대상이자 지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볼 수 있었다. 또한 나의 경이감과 궁금증이 이 우주에서 중요하고 가치 있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경험하는 세속적 기쁨과 만족, 공포와 비참을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실현의 개념과 연결할 수 있었다...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노력과 창조적 활동과 즐거움의 긍정적인 의미를 승인한다. 어떤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인데,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한때 내가 보기에 추상적이며 고립된 구역들에 머물렀던 지적인 사변과 영적인 열망을 구체적 현실 속에 유의미한 자리로 복귀시켰다. 또한 그럼으로써 내가 자연과 하나라는 느낌을 회복시켰다.

 

 

p476~478 <형이상학으로서 진화> 우주의 진화에 대한 연구는 삶(생명)의 유의미성이 점전 더 증가해왔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주요 받침대는 목적과 의미를 의식하는 존재들의 출현이다. 과거에는 정신이 없는 우주에 의미나 목적이 없었던 반면, 지금은 의미들과 목적들이 있다. 이 의미들은, 응집하여 별과 행성을 이루고 이어서 유기체들의 재료가 된 물질에서 기원했다. 그 유기체들은 진화하여 뇌를 갖춘 몸과 그 속성들 행동, 의식, 개인적 정체성, 자유, 가치, 의미 을 획득했다. 의미는 진화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복잡하게 부분들과 부분들의 상호작용으로 조직된 뇌가 물리적 환경과 상호작용하고 이어서 문화적 환경과 상호작용할 때, 의미가 발생했다. 그 상호작용은 양방향으로 일어났다. 뇌는 생물학적 인지적 환경에 영향을 미쳤고, 이 환경은 뇌에 영향을 미쳤다. 이 같은 유기체와 환경 상호간 상호작용의 결과는 의미 등이 스며들어 있는 실재였다...

만일 의미와 가치가 계속 출현한다면, 우리는 그 유의미한 과정에 참여하고 그 과정을 촉진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발견할 것이다. 과거 의미들의 결과이자 미래 의미들의 출현을 위한 통로로서 우리는, 헉슬리와 테야르가 희망한 대로, 점점 더 고조되는 위대한 서사시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상상 속에서 우리는 더 위대한 수준의 존재, 의식, 기쁨, 아름다움, 좋음, 그리고 의미를 향해 어쩌면 절정까지 상승하는 황금 사슬의 고리로서 존재한다. 그런 찬란한 과정의 일부로서 우리는 미리 창조된 의미가 우리의 삶 속에 스며들어 있음을 발견할 것이며, 궁극적으로 우리와 하나인 우주 속으로 의미를 다시 주입함으로써 화답할 것이다.

 

-> 니체 유고(1881년 봄 ~ 1882년 여름). 11[148] - 너의 삶 전체는 마치 모래시계처럼 되풀이하여 다시 거꾸로 세워지고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또 끝날 것이다 - 네가 생겨난 모든 조건들이 세계의 순환 속에서 서로 다시 만날 때까지, 그 사이에 위대한 순간의 시간. 그 다음에 너의 모든 고통과 모든 쾌감과 모든 친구와 적과 모든 희망과 모든 오류와 모든 풀줄기와 모든 태양빛을 다시 되찾을 것이다. 모든 사물의 연관 전체를 되찾을 것이다. 네가 하나의 낟알로 들어 있는 이 고리는 항상 다시 빛난다...

 

 

 

p491(알프레드 테니슨 / 오디세우스의 몸부림) - 율리시스는 항구에서가 아니라 우리를 이리저리 내던지는 어둡고 험한 바다에서 즐거움과 의미를 발견했다. 거기서 우리는 집을 발견할 희망 없이 싸우면서 우리 삶의 의미와 짜릿함을 발견한다.

 

-> 차라투.. ‘전쟁과 전사에 대하여 와 관련

 

p496(니코스 카잔차키스 / 희망을 거부함) 열망, 희망, 삶의 의미에 대해 카잔차키스보다 더 깊이 숙고한 사람은 어쩌면 없을 것이다. 이른 시기에 그는 특히 인간이 스스로를 초인으로 만든다는 이체의 디오니소스적 비전과 베르그손의 개념인 생의 약동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니체에게서 카잔차키스는 인간이 두려움이나 보상에 대한 희망 없이 전진하기만 하면 오로지 의지의 힘으로 자유에 이를 수 있음을 배웠다. 파리에서 카잔차키스를 가르친 베르그손은 진화하는 생명의 힘이 물질을 만들고 어쩌면 더 고등한 생물들도 창조한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이 생각을 종합하여 카잔차키스는, 우리는 보편적인 엔트로피에 맞서 싸움으로써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고 선언하고, 이 생각을 신과 연결했다. 카잔차키스가 보기에 신이란 단어는 기본 물질을 시스템으로 조직하여 점점 더 미묘하고 발전된 형태의 존재들과 의식들을 표출할 수 있게 해주는 반-엔트로피적 생명력을 의미했다. 우리 삶의 의미는 우리와 이 기상천외한 생물들을 연결하는 사슬에서 우리의 자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신비롭고 비가시적인 충동에 휩쓸려 다함께 상승한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아무도 모른다. 묻지 말고, 더 높이 올라가라! 어쩌면 우리는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아무도 우리에게 삶에 대한 보상을 지불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더 좋다! 덕분에 우리가 최종이며 최강의 유혹, 곧 희망의 유혹을 극복할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 차라투.. / ‘환희와 열정에 대하여’, ‘산 위의 나무 등과 관련

 

p504(윌 듀런트 / 모든 것에서 의미를 발견하기) “삶의 의미는 삶 안에 있어야 한다 .. 삶의 고유한 본능적 갈망들과 자연적 만족들에서 의미를 추구해야 한다. 예컨대 왜 우리는 활력과 건강의 이면에 숨어있는 의미를 캐물어야 할까?... 만일 당신이 불치병에 걸렸다면, 나는 당신에게 임종 성찬을 제공하고 당신을 죽게 놔두겠다... 그러나 건강하다면 두 다리로 일어설 수 있고 음식을 소화할 수 있다면 칭얼거림을 집어치우고 태양을 향해 고맙다고 외쳐라.

요컨대 삶의 가장 단순한 의미는 즐거움이다. 경험 그 자체의 유쾌함. 건강의 유쾌함, 근육과 감각, 혀와 귀와 눈의 순수한 만족이다. 만일 아이가 어른보다 더 행복하다면, 그것은 아이가 몸을 더 많이 가지고 영혼은 더 적게 가졌으며 철학보다 자연이 더 먼저임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팔다리를 풍부하게 놀릴 뿐, 팔다리의 의미를 묻지 않는다... 설령 아름다운 순간들 외에는 삶에 의미가 없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렇게 빗속을 터벅터벅 걷거나, 바람에 맞서거나, 순백의 설원에 발자국을 남기거나, 노을이 밤으로 바뀌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삶을 사랑할 이유로 너무나 충분하다.“

 

듀런트도 사랑, 관계, 활동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중요성과 내용의 비밀은 당사자의 모든 에너지를 소모하며 인간의 삶을 이전보다 조금 더 풍요롭게 만드는 과제를 가지는 것이다.” 듀런트는 자신의 가족과 일, , 책들에서 가장 큰 행복을 발견했다. 가난과 고통 속에서 완전히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가난과 고통 앞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만족과 고마움을 느낄 수는 있다. “최후의 국면에 나의 보물은 어디에 있을까? - 모든 것에.”

- 차라투... / ‘배후세계론자 등과 관련

 

pp507~514 (존 메설리 / 우리 삶의 목적, 우리는 덜 생각할 수 있을까? 우리는 덜 생각해야 할까? / 그럼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우리 삶의 목적) 삶의 의미에 대한 종교적, 철학적, 과학적 생각들을 훑어보았으니 이제 우리의 결론을 내놓으려 한다.

첫째, 삶의 의미를 묻는 문제에 대한 종교적 해결책들은 심히 문제적이며 대체로 무의미하다고 우리는 단언한다....요컨대 인류는 몸에 안 맞는 옷이 된 종교를 초월하여 삶 안에서 의미를 창조하고 발견하고 증가시키는 사명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둘째, 의미는 의식적인 주체와 객관적 자연세계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생한다고 우리는 단언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객관적으로 좋은 것들에 주관적으로 관여함으로써 행복, 즐거움, 성취감, 목적, 충만감, 의미를 발견한다. 객관적으로 좋은 것들의 예를 들자면, 사랑하는 관계, 즐거운 활동, 타인을 돕기, 생산적인 일, 지식 추구, 미적 향유 등이 있다. 객관적 실재는 주체들이 의미를 창조하는 방식에 한계를 부여한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실재 속에 잠재된 의미가 실현될지 여부는 주체들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의미는 의식적인 주체들이 객관적 실재 속에 잠재하는 의미를 끌어낼 때 발생한다.

셋째, 더 유의미한 삶의 가능성은 우리가 인생의 주관적 객관적 한계들을 극복하는 정도에 비례해서 증가한다고 우리는 단언한다. 따라서 우리의 삶을 최대한 유의미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의 존재를 옭죄는 모든 지적, 감정적, 심리적, 물리적, 도덕적 제약들을 줄이고, 가능하다면 결국 없애는 것은 도덕적 정언명령이다. 또한 의미의 발생에 유리하도록 외부세계를 일굴 필요도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계 양쪽 모두를 일궈야 한다. 그렇게 진화 서사시의 주인공으로서 우리의 역할을 끌어안고 세계 안의 지식, 사랑, 즐거움, 아름다움, 좋음, 의미의 양과 질을 늘리고 반대되는 것들을 줄이는 일에 나서야 한다. 이것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목적의 한계들) 하지만 삶의 목적을 안다고 해서 삶의 유의미성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수도 있다. 세계를 더 좋게 바꾸기는커녕, 우리 자신을 파괴하고, 의식이나 즐거움이나 아름다움의 빛을 잃은 채로 영원히 팽창하는 캄캄하고 차갑고 외로운 우주를 남길지도 모른다. 결국엔 모든 것이 소멸할 테고 말이다... 바꿔 말해 우리의 삶은 목적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의미를 가질 수는 없다. 게다가 지적인 숙고는 우리의 뿌리 깊은 실존적 고민들을 결코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다.. 시간의 흐름은 끊임없이 우리를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현재에 침입하여 우리의 즐거움을 감소시키는 그 영구적인 소멸의 흐름. 이 근본적인 덧없음과 그에 대한 우리의 의식은, 현재가 물러나면서 우리 자신의 죽음이 전속력으로 달려온다는 것을 일깨운다.. () 무엇을 해야 할지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는 완전한 만족에 이르지 못한다.

 

(더 많이 살고 더 적게 생각하기 / 우리는 덜 생각해야 할까?) 이 책을 돌이켜보면, 철학적 고민의 칙칙한 색조와 감각의 세계에 빠져들 때 느끼는 즐거움 사이의 현격한 대비가 충격적으로 눈에 띈다. 우리가 보는 산과 바다에서, 우리가 걷는 산책길과 먹는 밥에서, 몸을 쓰는 놀이와 철학적 대화에서 느끼는 즐거움에서,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였을 때 느끼는 온기에서, 우리는 의미를 발견한다기보다 의미를 향한 욕구를 초월한다. 그럴 때 삶은 그 자체로 충만하다. 우리가 웃고 놀고 사랑할 때, 세계의 모든 참상은 순간적으로 사라진다. 우리는 의미를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다시 생각이 실존적 고뇌를 되살린다면? 어쩌면 우리는 덜 생각할 수 있고 덜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삶은 우리의 생각이 도달할 수 있는 깊이보다 더 깊다.

 

하지만 덜 생각하면서 살기가 과연 현실적인 해결책일까? 자기반성과 숙고는 우리 본성의 일부인데,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웃고 놀고 사랑하고 나면, 생각이 돌아오기가 마련이다. 무슨 행복이 이렇게 덧없지? 왜 우리는 고통을 겪고 죽어야 하지? 혹시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우리의 질문들을 오랫동안 피할 수 없다. 결국 우리의 방어자세는 흐뜨러지고, 질문들은 돌아온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깊은 질문들을 피할 수는 없더라도 피해야 한다는 것은 옳은 말이 아닐까?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질문들은 평범한 일상에서 흔히 가려지는 내면의 깊은 저수지를 드러낸다... 우리의 생각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깊고 풍부한 내면의 삶을 선사한다. 몸과 감각의 세계를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생각은 우리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생각을 억누르지 말아야 한다. 이처럼 우리의 질문들을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 되므로, 활동에서 의미를 발견하라는 처방은 부분적으로만 유효하다.

 

(그럼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요컨대 그 무엇도 우리의 모든 의심을 잠재우고 걱정을 가라앉히지 못한다. 삶이 제공하는 제한적인 의미도, 우리의 목적에 대한 앎도, 희망이 약속하는 바도, 활동에 몰두하기도 그럴 역량이 없다. 결국 죽음이 우리를 영원히 잠재울 뿐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억울하다는 심정으로 삶을 저주하지 않도록, 현재 삶의 일부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또한 현재를 거부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향상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 창조적 긴장은 현실의 한계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것들에 반역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이 반역은 의미를 빚어내고, 창조하고, 증가시키는 일을 포함한다. 현재의 현실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인다면, 한계들이 없는 미래를 꿈꾸고 그 미래를 실현하기 위해 몸부림친다면, 우리는 세계 안의 의미를 증가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장 우리는 불확실성과 불안을 우리의 지적인 정직성과 감정적인 진실성의 증거로 품고 살 수밖에 없다. 맹목적인 신앙이나 쉬운 대답들을 답변확정하는 사람들과 달리, 우리는 검쟁이들의 싸구려 해결책들을 조롱한다. 그리고 우리가 죽어야 한다면,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를 파괴하려 한 힘들에 무릎 꿇지 않은 자유로운 사람으로서 죽을 것이다. 우리는 그 힘들을 물리치려 애쓰지만 아직 물리치지 못했다. 당분간 우리는 삶이 제공하는 제한된 즐거움과 의미를 누리면서 인간의 한계를 제거하기 위해 애쓰고 부정적인 생각들을 최선을 다해 억눌러야 한다. 이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삶의 한 가지 방식일 따름이다.

 

* 차라투.. / ‘서설’ “인간이 위대한 점은 목적이 아니라 다리라는 점이다

 

(삶은 궁극적으로 유의미할까?) 만일 모든 좋은 것들이 무한히 존재하거나 무한한 존재에 접근한다면, 만일 개인들이 어떤 식으로든 그 무한한 존재 혹은 되어감(becoming)에 참여한다면, 그리하여 어떤 식으로든 과거의 모든 해악이 보상된다면, 영원한 관점에서 볼 때 근본적으로 유의미하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의식이 꺼진다면, 우리의 삶은 완전하고 철저하게 무의미할 것이다. 또한 삶이 더 큰 무지와 추함과 고통으로 퇴보한다면, 삶은 무의미할뿐더러 악할 것이다. 이 경우에는 삶이 신속하게 끝나는 것이 더 낫고, 삶이 아예 없었던 것이 더욱 더 낫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이 궁극적으로 유의미한지, 약간은 유의미한지, 전혀 무의미한지, 철저히 악한지 아직 모른다. 따라서 우리의 최초 질문 삶은 궁극적으로 유의미할까? -에 대한 최후의 대답은, 삶이 궁극적으로 유의미하려면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는 알지만, 삶이 궁극적으로 유의미한지 또는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여 삶을 유의미하게 만들 때만, 삶은 완전히 유의미해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바를 모두 발견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의심을 모두 제거할 수 없다. 우리는 공포를 모두 가라앉힐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아무 것도 보장받지 못했으며, 우리가 바라는 바는 정반대지만, 우리 곁에는 늘 심연이 있다. 영원한 빛과 무한한 어둠 사이의 면도날 같은 길 위에 우리가 있다. 우리는 표류하는 중이며 스스로를 구조해야 한다.

 

-> 니체는 위와 같이 망설이지 않음. 그는 삶은 유의미하다라고 결론내고 무수히 반복되는(영원회귀 되는) 자기에게 나타나는 기쁘고, 따분하고, 괴로운 현상들과 함께 하면서(=자기자신을 긍정하고 사랑하면서)것들이 드러내는 삶의 의미를 만끽(=창조적 삶)하라는 처방을 제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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