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버넷의 역사적. 영향

레오버넷의 역사적. 영향

작성일 2023.06.16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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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유파(Chicago school)를 창시한 레오 버넷은 광고 역사상 가장 열정이 뜨거웠던 인물로 손꼽힌다. 그는 말보로맨, 졸리 그린 자이언츠, 켈로그 토니 호랑이 등 전설적 광고 캐릭터 창조를 통해 미국적 가치와 정서를 가장 뚜렷이 구현했다. 1999년 《타임》지에 의해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100명의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1. 개인사

레오 버넷(Leo N. Burnett : 1891∼1971)은 1891년10월 21일 미시간주 세인트존스(St. Jones)에서 건어물 가게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 일을 도우면서 나름대로 독자적 영업, 판촉 테크닉을 익혔다. 배달트럭에 가게이름을 써넣는다든지 전단지를 만들어 배포하는 것 등이었다.

기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중•고등학교 시절 신문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부고기사를 써서 넘기는 일도 자주 했다. 1910년 미시간대학교 저널리즘 전공에 입학 후 스스로 학비를 벌었다. 대학 시절에는 영문학 교수 프레드 뉴턴 스코트(Fred Newton Scott)의 영향을 받아 《뉴욕 월드(NewYork World)》 신문을 정독하면서 글쓰기를 공부했으며 단편소설을 기고하기도 했다(Higgins, 1996).

1914년 여름학기 졸업 후 미시간대학교 부정기간행물인 《미시간 울버린(Michigan Wolverine)》 편집장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친구 홀리 태핑(Hawley Tapping)의 소개로 일리노이의 지역신문 《피오리아(Peoria)》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캐딜락 자동차 사보편집을 거쳐 광고일을 담당하게 된다. 이때 만난 사람이 "리더십의 형벌"이란 캐딜락 광고로 유명한 테오도르 맥마누스였다. 그는 20세기 소프트셀 크리에이티브 개척자 중 한 사람인 맥마누스의 직계 제자임을 늘 자랑스러워했다. 특히 대중심리에 기초한 보편적 상징을 활용하는 스타일에 큰 영향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해군에 입대했는데 오대호(五大湖)를 방위하는 공병대에 근무했기에 배는 타지 않았다. 제대 후 캐딜락 출신들이 새로 창립한 자동차회사 라파예트(La Fayette)의 광고관리자로 복직했고, 경기 불황으로 회사가 기울자 1921년 광고회사 호머 맥키(Homer McKee)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입사해 30대를 보낸다. 1930년 다시 어윈 웨이시(Erwin Wasey)로 자리를 옮겨 크리에이티브 담당 부사장을 역임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레오 버넷(Leo Burnett)사를 설립한 것은 44세 되던 1935년이었다. 시카고에 문을 연 회사의 자본금은 빌린 돈 5만 달러였다(Morrison, 1994).

대공황이 휩쓸고 있던 시기였음을 감안하면 대단히 모험적인 출발이었다. 그는 루비캄이 은퇴한 나이(52세)를 훨씬 넘긴 60세 이후 광고 인생 전성기를 꽃피운 대기만성형 인물이다. 태어난 곳(일리노이), 다녔던 회사(디트로이트 등), 창립한 광고회사 소재지(시카고)가 모두 미국 중서부 지역이다. 광고 산업 중심지인 뉴욕을 벗어난 5대호 연안 도시에서 평생을 보낸 것이다. 이러한 개인사적 배경이 버넷의 광고 크리에이티브에 독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칼 힉슨(Carl Hixon)의 표현을 빌리자면 버넷의 외모는 이랬다. "키가 작고 어깨는 아래로 축 처졌으며 배는 올챙이배다. 옷깃에는 늘 담뱃재가 떨어져 있다. 두 겹으로 된 커다란 턱 때문에 개구리처럼 보였다. 목소리는 퉁명스럽고 호전적이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툭 튀어나온 아랫입술이다."(Ogilvy, 1983)

그는 부하 직원을 엄하게 꾸짖곤 했지만, 동시에 자식에게처럼 솔직한 애정을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또한 광고인이 얼마나 열정적이며 자기 일을 사랑하는 존재인가를 여러 일화를 통해 증명했다. 새벽 5시에 기상해 아침식사 전까지 광고 창작에 몰두했고 8시 13분이면 출근을 했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일을 하다가 한밤중이 되면 옆구리에 서류뭉치를 낀 채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생각에 빠진 채 시카고 역에 내려서는 택시기사에게 "15층으로 갑시다!"라고 말한 사건은 두고두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평상시 무뚝뚝하고 수줍음에 가까운 태도와 달리 일단 광고 이야기만 나오면 '불타오르는 남자'로 변했다. 말년에 이르도록 광고 제작을 주도했다. 그가 주재하는 크리에이티브 리뷰보드는 격렬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광고가 맘에 들지 않으면 아랫입술을 쑥 내미는 습관이 있었는데, 휘하 크리에이터들은 자기들 시안이 답변확정될지 아닐지를 판정하기 위해 "입술돌출지수(LPI : Lip Protrusion Index)"라는 우스개 기준을 만들기도 했다. 답변확정 확률은 보통 10% 정도였고, LPI가 5 이상 기록되면 그 날 밤을 세워야 한다는 뜻이었다(Fox, 1997).

카피라이터 존 매튜(John Mathews)는 그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가혹하게 비판하자 12종류의 시안을 쓰레기통에 모두 처박아버렸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말보로 광고 모델로 오랫동안 출연했던 앤디 암스트롱(Andy Armstrong)은 자기 시안을 밀쳐두고 버넷이 스스로 시안을 내놓는 걸 보고, 그를 말없이 째려보다가 역으로 갔다. 그리고 기차표를 끊어 고향인 캘리포니아로 가버렸다(얼마 안 있어 돌아왔지만).

평생을 일중독에 빠져 있던 그의 취미는 단 두 가지였다. 140에이커에 달하는 고향마을의 농장을 찾아 나무를 심고 돌보는 것과 알링턴 경마장에서 마권을 사는 것이었다. 1961년 윌리엄 번벅, 데이비드 오길비와 함께 '카피라이터 명예의 전당'에 최초로 헌액되었고, 1972년 '광고 명예의 전당', 1993년 '아트디렉터스클럽 명예의 전당'에 추존되었다. 버넷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현역에서 일했다. 1971년이 되자 이제 일주일에 사흘 정도만 출근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해 6월 1일, 일생을 함께한 아내 나오미 버넷(Naomi Burnett)과 일리노이 레이크 취리히의 가족농장에서 저녁 식사를 하던 중 치명적 심장발작이 닥쳐왔다. 향년 79세였다(Morrison, 1994).

2. 내재적 드라마

내재적 드라마(inherent drama)는 버넷이 개척하고 확산시킨 시카고 유파의 핵심 크리에이티브 코드다. 이 개념은 광고할 "제품 자체에 숨어 있는 독특한 극적(dramatic) 요소"로 정의된다. 즉 광고 창작에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는 제품 본연의 어떤 스토리인데, 이것은 물리적 측면에서도 찾을 수 있고 심리적 측면에서도 찾을 수 있다. 버넷은 "모든 제품은 스스로 타고난 내재적 드라마가 있다. 크리에이터가 할 일은 그 같은 드라마를 찾아내어 뉴스 스토리처럼 신뢰감 있게 제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때는 소비자 대중의 마음에 쉽게 스며들 수 있도록 친근하고 일상적인 카피와 상징적 비주얼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재적 드라마의 대표적 사례로는 1945년 집행된 미국식용육협회(American Meat Institute) 광고를 들 수 있다. 버넷은 'Red on Red' 캠페인이라 불린 이 광고에서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색다른 접근을 시도했다. 쇠고기가 지닌 원래 이미지는 '살아 있는 싱싱함'인데 이를 구체화시키기 위해 (캠페인 제목이 말해주듯) 빨간 색 고깃살을 날 것 그대로 보여 줬던 것이다. 광고를 통해 요리하지 않은 생고기 사진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은 당시 금기사항이었다. 핵심 소비자인 주부들이 징그럽게 생각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전 조사를 통해 주부들이 실제로는 생고기를 혐오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에 따라 광고주의 강한 반대를 뚫고 기존의 금기를 깨트리는 시도를 한 것이다. 뉴욕의 하이 윌리엄스(Hi Williams) 스튜디오에서 촬영된 이 광고는 레드(red) 콘셉트를 강조하기 위해 빨간 색 배경 위에 더욱 빨갛게 표현된 쇠고기 속살 컷(cut)을 적나라하고 대담하게 보여 주었다(Higgins, 1986).

레오 버넷은 트릭을 쓰지 않고 제품 그 자체에서 찾아낸 내재적 드라마야말로 목표고객들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주목을 끌어낼 수 있는 무기라고 생각했다. 이 광고를 통해 그는 쇠고기가 지닌 '남성적 힘(a virile one)'이라는 드라마를 발견해 냈고 그것을 정직하게 표현함으로써 소비자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3. 커먼 터치

그는 광고 관련 조사가 실제 내용을 부풀리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조사의 의미와 활용에 대해 소극적 입장을 취했다. 회사 내에 존 코울슨(John Coulson)을 책임자로 하는 조사부서가 있었지만, 그곳에서 만든 보고서를 "코울슨의 멍청이들이 발견한 것"이라 불렀다. 조사는 광고 크리에이티브가 창조하는 결과를 입증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라고 그는 믿었다. 탁월한 광고제작물은 조사에 의존하기보다는, 제품 자체가 지닌 독특한 편익을 찾아내어 그것을 소박하고 흥미진진하게 표현하는 것에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커먼 터치(common touch)는 이 같은 광고철학을 구체화하는 무기였다. 굳이 번역하자면 '일반적 솜씨', '평범한 터치'라고 할 수 있지만, 그가 평생을 살았던 미국 중서부 사람들의 고유한 정서를 상징하는 이 단어의 미묘한 어감을 살리기는 어렵다. 차라리 원어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낫다. 번벅에 따르면 커먼 터치는 "광고 표현에서 날카로운 표현보다는 솔직하고 다정스러운 묘사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 같은 시도를 통해 메시지 수용자들이 광고에 대한 정감과 신뢰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핵심적이라는 것이다.

그가 만든 광고는 커먼 터치를 실현하기 위해 두 가지 가이드라인을 준수했다. 첫째는 활자체와 심벌을 보통 사람들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것으로 선택했다. 둘째는 당대의 사회문화를 배경으로 소비자 욕구나 믿음을 자연스럽게 제품과 연결시키는 역사적 소재나 민담을 자주 답변확정했다.

대표적 사례가 졸리 그린 자이언트(The Jolly Green Giant) 통조림 광고다. 이 캠페인은 미국 민담에 나오는 거인 폴 번연(Paul Bunyan) 스토리를 원용한 것이다. 광고에 등장한 초록색 거인이 얼마나 인기를 끌었던지 광고주인 미네소타 밸리(Minnesota Valley) 통조림회사는 회사 이름을 아예 그린 자이언트 컴퍼니(Green Giant Company)로 바꿔버렸다. 대중심리 속에 내재된 집단 무의식적 원형(archetype)을 활용하는 이 같은 방식은 버넷을 당대의 다른 크리에이터와 구별 짓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4. 대표작

버넷은 광고 제작에서 프리미엄 소구, 섹스 어필, 속임수, 교묘한 술책적 기법을 거부했다. 대신 제품이 지닌 독특한 브랜드 개성(brand personlaity)을 찾아낸 다음 그것을 인간적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 같은 스타일이 가장 탁월하게 구현된 사례가 말보로 캠페인이다.

필립 모리스의 말보로는 1920년대 미국 최초의 필터담배로 출시되었다. 이후 '오월처럼 부드럽다(Mild as May)'라는 슬로건을 통해 여성 흡연자 대상 캠페인을 전개했고, 그 결과 맛이 부드러운 여성용 담배로 소비자들에게 각인되었다. 반면에 판매는 지지부진함을 면치 못했다. 1954년 이 회사는 상황 타개를 위해, 담뱃갑이 우그러지지 않고 뚜껑이 잘 열리는 신제품 곽담배(flip top box)를 세계 최초로 시장에 내놓았다. 이와 함께 광고대행사를 레오 버넷으로 바꾸었다(Morrison, 1994).

이듬해 초 버넷은 그때까지의 핵심 목표고객을 완전히 바꾼 새로운 캠페인을 시도하게 된다. 말보로가 구축한 여성적 이미지가 제품 판매에 도움이 안 된다는 조사 결과에 따라, 신제품의 타깃을 담배를 많이 피우는(heavy smoker) 육체노동자 계층으로 선택한 것이다.

이때 버넷은 제품이 지닌 고유한 특성과 타깃 이미지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내재적 드라마를 발견했다. 이것이 바로 '카우보이 : 말보로맨(Malboro man)'이다. 1955년 1월 새로운 캠페인이 시작되자마자 말보로는 기존의 이미지를 신속하게 탈피했다.

버넷은 자신이 창조한 이 캐릭터를 "말안장 위에 올라탄 남자 중의 남자"로 소개했다(http://time.com/time/time100/builder/profile/burnett2.html). 광고에 등장한 카우보이 캐릭터는 사람들 사이에 남성미, 원초적 이미지, 자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현대 광고 역사상 가장 강력한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거칠고 과묵한 사나이의 탄생이었다.

카우보이를 찾아낸 것은 그야말로 탁월한 '내재적 드라마'의 구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말보로는 파워풀하고 남성적인 이미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이 캠페인은 첫 광고가 집행된 이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핵심 비주얼, 모델 이미지, 크리에이티브 톤과 매너가 바뀌지 않고 집행 중인 세계 최장수 광고 캠페인이다. 단일 브랜드에 대한 단일 이미지 캠페인이 이렇게 오랫동안 집행된 사례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말보로가 오늘날 미국을 대표하는 문화적 코드로 자리 잡은 것은 이 같은 지속적 누적효과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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