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서 중동, 이슬람, 아랍어 관련 답변을 주로 달고 있는 swastika3입니다.
개인 사업 경력을 지속하고 있으며 알제리에서도 1년 이상 근무한 바 있습니다.
질문자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 프랑스-알제리 식민지 vs 한국-일본 식민지
-> 일본의 한국 식민통치를 ‘식민 전체주의(colonial totalitarianism)’라고 규정하고 있는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정책은 “인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의 식민통치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가혹한 것”이었다(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 1968). 물리적 억압을 넘어, 언어와 역사의 소멸은 물론, 창씨개명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민족 말살 그 자체를 시도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의 반일 감정은 뿌리가 깊고 철저했다는 점을 그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가혹’한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한국인의 대응은 저항과 굴종으로 나타났습니다.
식민지 치하에서 한민족이 보낸 35년은 저항과 투쟁의 역사였습니다.
저항에 대한 일본의 탄압과 회유가 계속됐지만, 국내외에서 전개된 크고 작은 저항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식민지배는 한국인의 저항의 강도와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탄압의 강도를
조절하며 때로는 회유책, 때로는 강압적 지배, 또 때로는 문화통치를 구사했었습니다.
그러나 일관된 목표는 ‘반도인(半島人)을 충량(忠良)한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 개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한국인의 일본인화였던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또한 알제리를 점령하고 일제와 같은 방식을 구사했었는데, 프랑스는 1830년 알제리를
침략해 식민지로 삼았었습니다. 바로 그 해에 파리에선 부르주아 계급이 절대왕정으로부터 정치적·
시민적 권리를 쟁취한 ‘7월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안으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혁명’을 하는 동안, 밖으로는 북아프리카의 다른 나라를
침탈하는 제국주의 행태를 보인 셈입니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사실상 프랑스의 한 부분으로 여겼습니다.(드골 때 외인부대 1공정 연대가
반란의 거점으로 삼은 데도 알제리이기도 합니다만) 알제리가 지중해 바로 건너편 북아프리카에
위치해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 아니라 아프리카 식민지 개척의 교두보 구실을 했기 때문입니다.
무려 132년에 걸친 오랜 식민통치 역사도 한 몫 했었습니다.
프랑스인 거주지는 유럽처럼 개발됐고, 무슬림들의 기독교 개종을 외치며 모스크를 성당으로
바꿔버리기도 했습니다.
알제리는 오랜 식민통치 기간 동안 프랑스에 동화되면서, 프랑스 제국의회에 대표를 파견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엔 많은 알제리 젊은이들이 나치 독일에 점령된 프랑스를 도와 총을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통치와 저항세력 탄압은 다른 어느 제국주의 국가 못지 않게 폭력적이고
잔혹했습니다.
일본에서 우리나라 독립군 투사들을 잡아서 731부대에서 마루타 생체 실험을 했던 것과 같은 만행
혹은 조선인 거지들을 잡아서 일본군 헌병 장교가 검술 연습으로 목을 친다는 만행 등 처럼
프랑스 군은 알제리 이슬람 독립 투사가 잡히면 여성이면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윤간을 했고
가장이면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죽는 것을 보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알제리 독립군들의 머리를 잘라 저잣거리에 조롱거리로 내두는 건 일상 다반사였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알제리 제국주의의 만행이 일제의 조선 지배시 만행과 일백 상통하는 겁니다.
즉 이들은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를 강요하면서 피식민지배국가에게
강요를 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알제리인들과 조선인들
의 친프랑스파, 친일파와 같은 세력들을 만들어 냄과 동시에 제국주의에 격렬하게 저항했던
독립투사를 만들어냈다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나치 독일이 항복했던 1945년 5월8일, 프랑스군은 알제리에서 자치를 요구하던 시위자들에게 발포해
수만명을 죽였습니다. 이른바 ‘세티프 학살’입니다.
알제리 땅에서 독립전쟁이 한창이던 1961년엔 프랑스 거주 알제리인들의 비무장시위를 경찰이
유혈진압해 많게는 700명을 학살하고 일부 주검들을 센강에 던져버렸습니다.
당시 일간 <르몽드>는 “정의가 센강에 던져져 버렸다”고 개탄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2001년에야 이 학살을 인정하고 유감을 표시했습니다.
1954년에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는 민족해방전선(FLN)의 주도로 독립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독립때까지 150만명의 알제리인이 희생되었습니다.
즉 그레고리 헨더슨이 제국주의를 강요하는 열강들을 유럽과 동북아에서 한국과 알제리를
비교한 것도 공통적인 속성 패권 유지 및 언어 및 문화 말살 등의 정책을 썼다는 점에서
언급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