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 고죽국 뜻 궁금해요.

환단고기 고죽국 뜻 궁금해요.

작성일 2020.12.31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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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죽국孤竹國

중국 상말주초商末周初 시기에 고죽국孤竹國의 왕자로 알려진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이야기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사기史記』「백이열전伯夷列傳」에 따르면 백이와 숙제는 은殷나라 고국군孤竹君의 아들이다. 부친은 작은 아들 숙제를 왕으로 세우려고 하였다. 부친이 돌아가자 숙제는 왕위를 맏형인 백이에게 양보했지만 백이는 부친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고 하면서 달아났다. 숙제 또한 왕위를 계승하지 않고 달아나자 중간 아들中子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둘은 주周 문왕文王을 만나러 서쪽으로 가던 중 은나라를 토벌하러 가는 무왕武王을 만났다. 그들은 무왕에게 신하로서 군주를 살해하는 것은 인仁이 아니라며 만류하였다. 그 후 무왕이 주나라를 세우자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다 굶어 죽었다는 것이다[伯夷叔齊, 孤竹君之二子也. 父欲立叔齊, 及父卒, 叔齊讓伯夷. 伯夷曰, 父命也. 遂逃去. 叔齊亦不肯立而逃之. 國人立其中子. 於是伯夷叔齊, 聞西伯昌善養老, 盍往歸焉及至, 西伯卒, 武王載木主, 號爲文王, 東伐紂. … 武王已平殷亂, 天下宗周, 而伯夷. 叔齊恥之, 義不食周粟, 隱於首陽山, 采薇而食之及餓且死.].

일반적으로 고죽국은 상대商代 제후국으로서 북경北京 및 하북성 연산燕山 일대를 세력권으로 춘추시대까지 존속했다고 이해한다. 『사기』「주본기周本紀」에서는 "고죽의 옛 성은 평주 노룡현에 서남쪽으로 12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은나라의 제후국으로 성은 묵태씨다[孤竹故城, 在平州盧龍縣, 南十二裏, 殷時諸侯國也, 姓墨胎氏.]"라고 하였다. 또 "백이·숙제는 고죽에 있다[伯夷·叔齊在孤竹.]"라고 하였는데, 『사기집해』에서는 이를 "고죽은 요서군遼西郡 영지현令支縣이다[在遼西令支]"라고 설명하였다. 『제왕세기帝王世紀』에는 "탕은 특별히 묵태墨台씨를 고국에 봉하였다[湯, 特封墨台氏, 於孤竹.]"라고 하였다. 그 위치에 대해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 요서군遼西郡 조에서는 "영지에 고죽성이 있다. … 응소가 말하기를 옛 백이국으로 고죽성이 있다(令支, 有孤竹城. … 應劭曰 故伯夷國, 今有孤竹城.]"라고 하였다. 춘추시기에는 산융山戎과 영지令支와 인접한 하북성河北省 노룡盧龍 일대를 주 근거지로 보고 있다. "桓公二十三年. 山戎伐燕, 燕告急于齊. 齊桓公效燕, 遂從山戎. 至于孤竹而還.]"(『사기』「齊太公世家」), " … 遂北伐山戎, 制令支, 斬孤竹而南歸, 海濱諸侯莫敢不來服.]"(『국어國語』「제어齊語」)

그리고 상나라 일대의 고죽국의 세계世系는 모두 11세를 전하였다고 하나 문헌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백이숙제와 그 부친인 초初 2세대뿐이다. 『사기』「백이열전伯夷列傳』에서는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백이와 숙제의 부친 이름은 초初, 자는 자조子朝이다[ … 相傳至, 夷, 齊之父, 名初, 字子朝.]"라고 하였다. 1973년 요령성 객좌현喀左縣 북동촌北洞村에서 상말주초의 고죽기孤竹器가 출토됨에 따라 고죽국의 영역이 노룡을 중심으로 요서 일대를 포함한다고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고죽국에 대해서 문헌 사료도 부족하여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또 백이·숙제가 숨어 살았던 수양산首陽山을 고려나 조선조 유학자들은 황해도 해주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왕사립은 "『사기』「백이열전』에서 제가들을 인용한 주석에 의하면, 수양산은 모두 6곳이 있는데,

① 『사기집해史記集解』에서 마융馬融은 '하동河東 포판蒲坂 화산華山 북쪽과 하곡河曲 가운데에 있다'고 하였고, ② 『사기정의史記正義』에서 조대고曹大家(家자는 '고'로 읽음)가 『유통부幽通賦』에서, '농서수隴西首에 있다'라고 하였고,

③ 대연지戴延之의 『서정기西征記』에서는, '낙양洛陽 동북쪽에 수양산이 있는데 이제사夷齊祠가 있는데 지금의 하남 언사偃師의 서북쪽에 있다'라고 하였으며,

④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백이·숙제가 주왕紂王을 피하여 북해北海(발해)의 물가로 가서 살았다'라고 하였고,

⑤ 『설문해자 說文解字』에서는, '요서에 있다'라고 하였으며

⑥ 『장자(莊子)』에 의하면, '백이숙제가 서쪽으로 기양岐陽으로 가서 주무왕이 은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보고 … 이 두 사람이 북쪽으로 수양산으로 가자마자 굶어 죽었다'고 하였다. 『채미가采薇歌』의 첫 구절인 '저 서산에 오르다[登彼西山]'와 서로 호응된다. 이는 섬서성陝西省 청원현清源縣의 수양산으로, 기양岐陽(지금의 섬서 기산岐山) 서북으로, 서주西周 본토 안에 위치하게 된다"라고 하여 섬서 기양설岐陽說을 지지하고 있다(王士立, '孤竹國歷史文化綜述', 2006).

갑골, 금문에는 상의 제후국인 '죽竹'으로 나타나는데 죽竹이 고죽孤竹과 같은지 의문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죽을 고죽孤竹의 생략이나 지칭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갑골문 중에는 고국 관련 기록이 많지 않으며 상나라와의 관계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복사에는 고죽을 후侯로 호칭하거나 상商에 공물을 납입하기도 하였고, 복사를 담당하기도 했다. 또 왕사王事에 근로하였고 상商과 혼인 관계도 맺기도 하며 상 왕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때로는 소방召方과 같은 세력과 함께 상을 침략하기도 하였다.

한편 갑골문에서 고죽의 위치가 나타나지 않는데 소방召方, 북단北單과 같은 방국 명이나 염炎과 같은 지명과 함께 나타난다. 소방은 상과 지속적인 전쟁을 벌인 국가로 그 위치를 현재 하남성河南省 언성현郞城縣 동쪽에 있었다고 본다. 따라서 고죽국이 소방과 함께 상나라의 변경을 공격하였다는 것은 서로 인근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 또 상이 소방을 정벌한 복사卜辭가 많다는 것을 보면 소방은 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고죽 역시 소방이나 상의 부근에 있었다고 봐야한다(배진영, '출토자료로 본 고죽', 『이화사학연구梨花史學硏究』 제 33집, 286쪽).

염炎은 연燕을 의미하기 때문에 현재의 연산산맥燕山山脈 지역으로 보지만 염炎이 연燕이 된다는 것은 근거가 희박하다. 그리고 "고대의 연산燕山이 현재의 연산산맥이 아니라 북경 서남쪽 방산房山 지역의 대방산大坊山, 백화산百花山 등을 연산이라 지칭한다[常征, 召公封燕及燕都考-兼辨燕山, 燕易王, 燕昭王.]"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陳北 滙編, 『燕文化硏究論文集』, 133~134쪽), 또 『춘추좌전春秋左傳』 양공襄公 4년에 "겨울 10월에 주邾와 거莒나라 사람들이 증鄫나라를 침략하였다. 장홀臧紇(노나라의 대부)은 증나라를 구원하려고 주나라를 쳤지만 호태狐駘에서 패하였다[冬十月, 邾人, 莒人 伐鄫, 臧紇救鄫, 侵邾, 敗於狐駘.]"라는 기록에 근거하여 염炎을 산동 남부의 담성郯城으로 고증하여 상대 고죽의 위치를 산동 남부의 등현藤縣 부근으로 비정하기도 한다[閻忠, '西周春秋時期燕國境內及其周邊各族考略, 『중국고고집성中國考古集成』 화북華北 권卷 7).

이처럼 갑골문에서 고죽의 위치를 찾기란 쉽지 않고 당시 상商의 정치 구역은 상구商丘를 포함하여 현재의 하남성 일부와 산서성山西省 남부를 가로지르는 황하를 중심으로 태항산太行山 서쪽을 넘지 못하였다고 본다. 따라서 대부분의 갑골문에 나오는 방국도 이 범위 안에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와 함께 소방召方이 하남성 언성현郾城縣 속탑하시属漯河市에 있었다고 보면 고죽도 그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 객좌喀左를 중심으로 한 요서 일대에서 발견된 고죽기孤竹器가 이 지역을 고죽 세력권으로 보는 결정적 근거가 되었지만 일반 묘장이 아닌 임시 저장 구덩이인 교장에서 출토되었다는 점과, 연대도 상말주초의 기물에 한정되어 있고 고죽관련 유물이 출토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넓은 영역을 차지했다고 보기 힘들다.

이형구는 요령성 객좌현 북동北洞 유적에서 출토된 고죽명뢰孤竹銘罍와 기후명방정箕侯銘方鼎이 두 제후諸侯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고, 은대의 고죽과 상말주초의 기자箕子가 시간을 달리하여 같은 지점에서 나타난 점은 양자兩者 사이에 선후先後(殷末周初)하여 계승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죽국의 중심 위치는 대릉하大凌河 중류 객좌 현 현성縣城, 대성자大城子를 중심으로 오늘날은 은말주초殷末周初의 청동기가 발견되고 있는 지역을 모두 포함한다고 하였다. 중국사에 보이는 고죽국의 위치는 문헌상의 기록과 잘 부합하며, 기자동주箕子東走의 초기 지리적 위치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고대의 문헌기록이나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따라서 고죽국과 기자와의 관계는 서로 계승 관계라는 것이다(이형구, '발해연안북부 요서·요동 지방의 고조선', 『고조선단군학』 12, 63~65쪽).

현재 노룡 일대에는 백이·숙제와 관련된 전설과 이제의 고향(夷齊古里)·이제정夷齊井·이제묘夷齊廟·청풍대淸風臺·이제독서처夷齊讀書處 등과 같은 유적이 있다. 이곳에는 오랫 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민요 중에서는 '난수灤水의 북쪽 이제리夷齊里' 라든가 '난수灤水의 동쪽 고죽성' 등의 구절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고죽의 옛 성은 노룡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보기도 한다(朱玉環·田軍民·洪娟, '試論孤竹文化', 『中州今古』, 2002. 50~51쪽).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에는 "제환공齊桓公 23년 (BCE 663)에 산융山戎이 연燕나라를 쳤다. 연나라가 급박함을 제나라에 알리니 마침내 제나라 군사가 고죽까지 이르렀다가 돌아갔다[二十三年, 山戎伐燕, 燕告急於齊. 齊桓公救燕, 遂伐山戎, 至于孤竹而還.]"라고 하여 고죽국의 존재를 밝히고 있다. 『수서隋書』「배구전裵矩傳」에도 "고죽국은 고구려 땅이다[高麗之地, 本孤竹國也.]"라고 하여 고죽국의 영토가 후에 고구려의 통치 영역이 되었음을 주장하였다.

중국의 왕옥량王玉亮은 "강역이란 뜻이 담긴 국가는 춘추전국 즈음에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상나라, 주나라 때는 아직 강역이란 개념이 없었다. 고죽국은 절대로 넓은 강역을 갖고 있을 수 없으며 관할하는 지역은 다만 노룡盧龍, 천안遷安이 있는 분지라고 생각한다. 고고학적으로도 요서에서 발견된 고죽국의 청동기는 시간상 하가점 상·하층문화 사이에 있어 상나라 말기보다 빠르지 않고 서주 초기보다 늦지 않다. 고죽국이 하북 노룡에서 요서의 객좌와 조양 등 지역으로 이동한 시기가 바로 이 때다. 산융山戎의 남하로 귀족들은 달아나고 일부 고죽인들은 현지에 계속 남아서 생활했기 때문에 후세의 사람들은 요서를 고죽국의 땅으로 여기고 있다"라고 하였다(王玉亮, '試論孤竹的地望及 '疆域' -兼論遼西出土 '孤竹' 器物之原因', 『沈陽 教育學院學報』, 58쪽).

염충閻忠은 "상나라 말에 주왕이 동이를 치자고 고죽군은 주왕을 피해 북쪽으로 난하 하류 지역으로 옮겨갔는데, 이것이 바로 맹자가 말한 '백이가 주紂를 피하여 북쪽 바닷가에 기거하였다[伯夷辟紂, 居北海之濱]'이다. 북해는 곧 지금의 발해다. 북쪽으로 옮겨간 고죽군은 지금의 노룡 일대에도 거주하였으며 그 활동 범위를 난하 하류 지역까지 넓혔다. 주나라 때 고죽은 연나라의 관할에 속하였으며 BCE 664년 제나라 환공이 북쪽으로 산융을 징벌하면서 고죽도 큰 타격을 입어 그 후부터는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다"라고 주장하였다(閻忠, '西周春秋時期燕國境內及其周邊各族考略, 『中國考古集成』 華北卷 7, 164~165쪽).

따라서 요서 일대는 고죽국이 오래 영유한 지역이기보다는 전쟁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 의해 이동하여 잠시 거주하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리고 객좌喀左 지역은 상商 문화가 미치지 못하는 지역으로, 하상夏商 시기에 대릉하를 중심으로 하는 연산燕山 남북 지역의 대표 문화는 하가점 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였다. 하가점 하층문화 이후에 위영자문화魏營子文化가 발생하였다. 또 북경 일대는 장가원 상층문화張家園上層文化(圍坊 3期 유형)가 나타나서 영정하永定河 남북 지역을 포괄하였다. 이처럼 상·주商周 시기에 요서 지역은 하가점 하층 문화夏家店下層文化 계보의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商의 문화적 영향력이 미치지 못했다. 이렇게 본다면 상주 시기에 이 지역에서 세력 집단의 존재가 확인된다 할지라도 이 세력이 상대商代의 상문화商文化를 가진 제후국이나 방국으로 존립할 여지가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 난하灤河 유역에 위치한 노룡 지역은 고고문화考古文化 유형이 장가원 상층문화張家園上層文化에 속하는 지역이다. 한편 고죽이 통괄하던 또 다른 지역은 고죽 청동기가 출토된 객좌 지역을 포괄하는 요서 지역으로 위영자魏營子 유형에 속한다. 『통전通典』에는 "영주營州 유성현柳城縣은 옛 고죽국이다[營州柳城縣, 古孤竹國也.]"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지역의 고고문화의 계보는 앞서 살펴본 고죽국의 세력 범위에 두 종류의 고고문화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고죽이 요서 지역을 통괄하였다고 할 경우, 고죽국이 통괄하는 상대商代 말기의 이 두 지역은 고고문화 유형이 동일 계보에 속하지 않는다. 이는 혈연 유대를 기초로 하는 씨족氏族 방국方國이 동시에 두 개의 다른 고고문화 유형으로 나눠질 수는 없다는 점에서 상대에 이 지역은 고죽국의 세력 범위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정황으로 본다면 상대商代 고죽국은 객좌를 중심으로 한 요서 지역에 오랫동안 존립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요서 객좌에서의 고죽기孤竹器 출토는 단지 서주西周 이후 고죽국의 지리적 위치만을 반영할 뿐이라 할 수 있다(裵眞永, '甲骨·金文으로 본 商代 北京地域 政治體', 『中國史硏究』 47, 13~18쪽).

환단고기 고죽국 뜻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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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가 뭔가요??

... 궁금해요~~ 환단고기는 무엇인가요? 『환단고기』는 안함로의 『 삼성기』... do/OFpXcT ▶고죽국은 은의 제후국이 아니라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다. http://dok.do/hlTF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