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8세기에 근대사회에 영향을 끼친 사람들의 업적

16~18세기에 근대사회에 영향을 끼친 사람들의 업적

작성일 2006.05.27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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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코 다가마

몽테스키외

스위프트

괴테

애덤스미스

제너

린네

칼뱅

루터

뉴턴

 

 

이사람들이 근대사회에 끼친 영향과 업적을 7줄 이상 적어주세요

내용 잘된 사람한테 감사내공 드릴게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바스코다가마

 

어린 시절에 대하여서는 에보라에서 수학과 항해술을 배웠다는 것 외에는 분명하지 않다. 마누엘 1세의 인정을 받아, B.디아스희망봉() 발견 후로 숙원이던 인도항로 개척의 원정대장이 되었다. 1497년 7월 4척의 선대()를 인솔하고 리스본을 출범하였다. 도중까지 동행한 디아스의 조언대로, 시에라레온 앞바다에서 대서양을 서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혁명적 항법()을 써서(약 6,400 km), 11월 희망봉을 돌아 대륙 동해안을 북상()하여 모잠비크 ·몸바사를 통과, 1498년 4월 마린디에 도착하였다.

도중에 이슬람교도들의 적대적 방해로 시달림을 받았으나, 우호적인 마린디에서는 이슬람의 수로() 안내인 이븐 마지드의 도움으로 인도양을 횡단하였다. 5월 22일 캘리컷에 도착, 70년에 걸친 인도항로 발견의 대사업을 성취하였다. 그러나 독점무역에 위협을 느낀 이슬람 상인들의 방해와, 무력()에 대한 지방 영주()들의 경계심 때문에 정식 통상교섭은 난항을 거듭, 3개월 만에 겨우 약간의 향료를 입수하였다. 10월 다시 인도양을 횡단하여 올 때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항해하나, 괴혈병() ·열병 등으로 선원의 반 이상을 잃었다. 1499년 9월 가까스로 리스본에 귀환하여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귀족이 되어 연금()을 받았다.

그 뒤로 인도무역은 해마다 확대되었으나 현지인과의 마찰이 점차 격화되어, 1502년 다시 15척의 대함대()를 인솔하고 인도에 건너갔을 때에는 이슬람과 힌두 연합함대의 반격을 받았다. 이를 격파하고 코친 ·카나놀 등 각지에 상관()을 설치, 인도무역 독점의 기초를 다졌다. 그 뒤 백작에 봉해지고, 국왕의 인도정책 고문이 되었다. 1524년 국왕을 대신하여 현지 공관()의 부패숙정을 위해 인도에 갔으나, 과로가 겹쳐 병을 얻고 코친에서 죽었다.

 

몽테스키외

 

입법, 행정, 사법의 삼권분립을 처음 주장한 계몽사상가
보르도 출생. 계몽사상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이다
1721년 당시의 프랑스를 풍자적으로 비판한 작품 서간체의 소설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익명으로 출판하였다.

아카데미 회원에 선출되어 1728년부터 영국에 3년간 체재하였다.

그 동안 각국의 정치 ·경제에 관해 관찰하고, 기록하여 이를 바탕으로 하여

《로마인의 성쇠원인론》등을 저술하였고, 또 10여 년이 걸린 대저《법의 정신》을 완성하였다.

이것은 곧 금서목록에 올랐으나 2년 동안에 22판을 냈다.

법을 연구하자면 우리들이 생활하고 있는 구체적 현실의 상황에서 출발하여야 한다고 믿어 '자유의 거울’인 영국 헌법의 원리를 상세히 분석하고 개인의 자유는 국가권력이 사법 ·입법 ·행정의

3권으로 나뉘어 서로 규제 ·견제함으로써 비로소 확보된다고 하는 그의 3권분립의 이론은, 왕정복고 , 미국의 독립 등에 영향을 주었고, 19세기의 자유주의가 옹호하게 되는 기본적 자유의 규정에 공헌하였다.

 

스위프트

아일랜드 더블린 출생. 유복하였으나 아버지가 그의 탄생 전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백부의 손에 양육되었다. 더블린의 트리니티칼리지를 졸업한 뒤 은퇴한 외교관으로 정치인이었던 W.템플의 비서가 되어, 그 집에 기식하였다. 그 때까지의 생활이 후년의 풍자작가 스위프트의 성격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1694년 한때 템플가()를 나와 아일랜드에서 영국교회의 목사가 되었으나, 곧 템플가로 되돌아갔다가 템플이 죽자 다시 아일랜드로 가서 성직에 복귀하였다. 그 후부터 정치에 야심을 갖고, 이따금 런던을 왕래하였고, 당시 2대 정치세력이던 휘그당토리당 양쪽에 접근, 팸플릿을 써서 논전()을 폈다.
1713년 더블린의 세인트패트릭성당사제장으로 임명되었으나, 그것은 그에게 승진이라기보다 오히려 정적 또는 정우들의 경원책()의 일환인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누구에게나 위험한 논객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정계와 문단의 배후 실력자적 존재였으나, 14년 앤 여왕이 죽자 당시 그의 정적이던 휘그당 세력이 압도적으로 많아져, 그는 아일랜드로 낙향하였다.

1730년대 말엽부터 정신착란 증세가 나타나, 1742년에는 발광상태에 빠졌다. 스위프트의 이름과 함께 반드시 연상되는 2명의 여성, 스텔라라고 불리는 에스터 존슨과 바네사라고 불리는 에스터 바넘리의 어느 쪽에 대해서도 정상적인 애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관계는 전기상 흥미깊은 문제이다. 주요저서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1726)를 비롯하여, 정치 ·종교계를 풍자한 《통 이야기 A Tale of Tub》(1704) 《책의 전쟁 The Battle of the Books》(1704), 스텔라 앞으로 된 일기적 서간집 《스텔라에게의 일기 The Journal to Stella》(1710∼1713) 등이 있다.

 

괴테

 

 괴테는 무슨 괴테인지 모르겠네요

 

애덤스미스

 

애덤스미스의 이론이 사회에 끼친 영향은 자유방임주의의 태동입니다. 애덤스미스가 국부론을 편찬한 이래로 탈규제가 가속화됩니다. 그리고 그 흐름은 1930년 경제 대공황으로까지 이어지구요. 거기서부터 케인즈의 이론에 의해(사실은 케인즈의 조언을 약간 받아들인 대통령의 경제 사조직에 의해서 - New deal -) 정부가 시장 경제의 후견인 역할을 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수정자본주의가 태동하게 됩니다. 애덤 스미스의 경제 이론의 요지로 추가되어야 할 것은 신축적이라는 점입니다. 기억해두세요. 고전이론과 케인즈이론의 차이점입니다. 가격이 신축적으로 변한다면 정부의 개입은 의미가 없습니다. 고전학파의 제일 중요한 특징이 가격의 역할의 신봉입니다. 케인즈는 임금의 경우 장기 계약이나 사회적 제약에 따라 신축적으로 변하기 힘들다는 점을 지적하고 투자 역시 기업가의 직감같은 분위기에 따라 변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제너

무슨 제너?,,

 

린네

근대 분류학(分類學, Taxonomy)의 창시자이며, 이명법(二名法, Binominal Nomenclature)을 고안한 린네는 스웨덴 시골 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원예를 좋아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어린 식물학자'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가 고안한 명명법은 속명과 종명을 나란히 쓰는 것으로 오늘날에도 생물학의 기본적인 분류 체계로 사용되고 있다.
스웨덴의 룬트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나 식물학과 자연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웁살라 대학을 거쳐 1735년부터는 네덜란드에서 주로 활약하였다. 1735년 《자연의 체계》를 출판하여 동물계, 식물계, 광물계의 구분을 제시하였고, 1737년에는 《비판적 식물학》을 통해 새로운 명명법을 제안하였다. 그는 세계의 동식물 표본 목록을 만들고 종을 자신의 분류체계에서 적당한 자리에 배치하는 일에 혼신의 노력을 쏟아, 1751년 《식물학 철학》을 출간하였는데, 이 책은 식물학자들이 식물의 이름을 기술하고 그것을 정확하게 분류하는 데 필독서가 되었다.
린네의 업적 가운데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종의 개념을 명확히 한 일이다. 그는 종이 식물학의 기본 단위가 된다고 보았으며, 성서적인 가르침에 따라 고정 불변한다고 보았다. 종이 불변한다는 그의 생각은 다윈 이후의 진화론에 의해 거부되기는 했지만, 동식물 분류학과 자연사 연구는 그의 노력에 힘입어 든든한 기틀을 잡을 수 있었다.

 

칼뱅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방 누아용 출생. 아버지는 지방 귀족의 비서 ·경리 등으로 일한 소시민이었다. 1523~1528년 파리에서 신학을, 그 후 오를레앙 부르주의 대학에서는 법학을 공부했다. 1532년 세네카의 《관용에 대하여》의 주해(註解)를 발표하여 인문주의자로서의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1533년 에라스무스와 루터를 인용한 이단적 강연의 초고를 썼다는 혐의를 받고, 은신해 지내면서 교회를 초기 사도시대의 순수한 모습으로 복귀시킬 것을 다짐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와 결별했다.

그는 이른바 ‘돌연한 회심(回心)’에 의해 복음주의적(福音主義的), 즉 프로테스탄트주의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1535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이단에 대한 박해로 신변의 위험을 느낀 그는 스위스의 바젤로 피신하여, 그 곳에서 1536년 복음주의의 고전이 된 《그리스도교 강요(綱要: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를 저술하였다. 이것은 박해받고 있는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해 변호하고 그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무렵,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위해 함께 일할 것을 G.파렐에게서 요청받고 그의 종교개혁 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런데 처음부터 신권정치(神政政治)에 기반을 둔 엄격한 개혁을 추진하려 했기 때문에 파렐과 함께 추방되어,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설교자(說敎者) ·신학교수로 있으면서 《로마서 주해》를 저술, 추기경 사드레와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3년 후에는 상황의 변화로 다시 제네바에 초빙되어 거기서 《교회규율》(1542)을 제정하고 교회제도를 정비하여, 세르베토스 등의 인문주의자들을 누르고 제네바의 일반 시민에게도 엄격한 신앙생활을 요구하여, 신정정치적 체제를 수립하였다. 제네바는 그 후 종교개혁파의 중심지로서 전 유럽에 영향을 끼쳤다

 

루터

 

그의 업적은 대부분 문서 형태로 남아 있어, 원문의 큰 책이 100권(바이마르판 루터전집)에 이른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1520)는 《로마서 강의》(1515∼1516)와 함께 초기의 신학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루터는 상황 속에서 자기를 형성하고 발언하는 신학자였기 때문에, 만년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저서와 강의를 통하여 그의 사상을 남김없이 토로하였다.

그는 신학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철저한 은혜와 사랑에 두고, 인간은 이에 신앙으로써 응답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하느님께 반항하고 자기를 추구하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자유로운 군주’이면서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며, 신앙의 응답을 통하여 자유로운 봉사, 이 세계와의 관계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면에서는 특히 모든 직업을 신의 소명(召命)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 그 이후의 직업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더욱이 이러한 견해는 성서에만 그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실천한 것도 중요한데, 1525년 카타리나와 결혼한 것도 이같은 실천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정세 속에서 이러한 신앙적 주장을 관철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인데, 칼뱅이나 다른 종교개혁자와 함께 종교개혁을 르네상스와 함께 근세에의 전환점으로 만들었다.

 

뉴턴

유복자로 태어난 뉴턴이 애초 어머니의 영향으로 농사꾼이 될 뻔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만약 농사일을 좋아하여 대학 진학을 포기했더라면 만유인력의 법칙과 미적분학의 확립으로 고전역학의 기초를 쌓은 그의 이름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1661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한 뉴턴은 4년 후 페스트 때문에 학교가 휴교하자 고향인 링컨셔로 돌아와 머물렀다. 수학과 광학, 천문학, 역학 등에 대한 방대한 연구의 토대가 이루어진 것이 바로 이 때였다.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도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이 이론을 통해 뉴턴은 케플러가 제시한 행성의 타원궤도 운동을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만유인력을 중심으로 한 그의 역학체계는 1687년에 출간된 에서 체계적으로 소개되었는데, 이것은 다윈의 과 함께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과학책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뉴턴의 과학적 업적은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그는 독일의 라이프니츠와 비슷한 시기에 미적분법을 창안하여 근대 수학의 큰 줄기를 바꾸었고, 1672년부터 1975년까지 3년에 걸친 연구 끝에 을 출간하여 실험 물리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여기서 그는 빛을 입자로 보고 프리즘을 사용해서 백색광을 굴절시켜 여러 단색광으로 분리한 다음 그 단색광이 특유의 굴절률을 가진다는 사실도 보여주었다.
재미있는 것은 뉴턴이 일생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연구한 과제는 다름 아닌 '연금술'이었다는 점이다. 만유인력의 개념도 당시를 지배하던 "떨어진 공간을 통해 힘이 작용할 수 있다"는 연금술적인 생각이 크게 반영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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