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역사의 갈등상황

세계역사의 갈등상황

작성일 2004.06.22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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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중2이구요,,

갈등상황을 각각 5가지 적어주세요,,

시민혁명 청교도,명예,미국,프랑스의 혁명

산업혁명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동아시아의 근대적성장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근대적운동

이렇게 다섯지의 갈등을 각각 5가지 적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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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혁명 청교도,명예,미국,프랑스의 혁명
부르주아 혁명. 서민에게 기본적 인권ㆍ시민적 자유를 보장하여 봉건제를 타도하고 자본주의 체제에로의 길을 터놓은 혁명으로 부르주아지가 중책이며, 농민ㆍ 도시의 소시민ㆍ 프롤레타리아가 가담하기도 했다.

시민혁명과 시민사회의 성립

(1) 영국혁명과 입헌정치의 확립

1) 혁명의 배경

가) 사회의 변화

* 장원제도 붕괴 - 요우먼(자영농민), 젠트리(근대적 지주) 성장 → 하원장악
* 근대적 산업 발달 - 상공업 시민 계층 형성
* 청교도 성장 - 젠트리·상공업자층 → 영국의 입헌적 전통 존중 경향

나) 스튜어트왕조의 전제정치(제임스 1세, 찰스 1세)

* 입헌적 전통 무시 - 의회 승인없이 세금 징수, 왕권신수설 신봉
* 특권 상인에 의한 독점권 부여
* 국교회 강화 - 청교도 탄압 → 국왕과 의회 대립 심화 → 17세기 중엽, 청교도혁명

2) 청교도혁명

가) 의회의 '권리청원' 제출(1628)

* 의회의 과세 승인권, 불법 인신 구속 금지 - 일시적으로 승인
* 찰스 1세의 의회 해산 - 11년간 의회 정치 단절

나) 의회파와 왕당파의 대립

* 스코틀랜드 장로파의 반란 진압 경비 마련을 위한 의회 소집(1640)
* 의회의 왕의 과세 요구 거부, 왕의 실정 비난 → 왕의 의회에 대한 무력 탄압
* 청교도혁명의 시작 - 의회파와 왕당파 간의 내란(1642) 발생
* 크롬웰의 의회파 승리 - 철기군 조직, 신형군으로 왕군에 승리 → 공화제 수립

다) 크롬웰의 통치

* 의회파의 분열 - 독립파(군대 장악) ↔ 장로파(의회 장악, 입헌 군주정 주장)
* 독립파의 지도자 크롬웰이 장로파를 무력 숙청, 찰스 1세 처형(1649) → 공화정
* 항해조례 제정(1651)- 네덜란드 중개무역에 타격 →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 승리
* 청교주의에 입각한 금욕적인 독재정치 - 수평파 제거(철저한 민주주의 주장), 호국경에 취임(1653)

3) 명예혁명과 입헌정치의 확립

가) 왕정복고

* 크롬웰의 독재에 반감, 크롬웰 사후 공화정 붕괴, 찰세 2세 즉위(1660)
* 의회의 왕권 견제 - 국왕이 친카톨릭 정책 및 전제적 경향을 드러냄
심사령(1673, 공직을 국교도에 한정함),인신보호령(1679, 자의적 인신 구속 금지) 제정
* 토리당(국왕 지지)과 휘그당(입헌군주제 지지) 형성 - 제임스 2세의 왕위계승문제

나) 명예혁명

* 제임스 2세(찰스 2세 계승)의 전제정치 강화 및 카톨릭 부활 시도
* 제임스 2세 추방 - 휘그당과 토리당이 협력·축출
* 메리(제임스 2세의 딸)와 윌리엄(메리의 남편)을 공동 왕으로 추대(1688)
* '권리장전' 승인(1689)- 의회의 입법권·과세권 확인, 의원선거 자유, 의원 면책권
* 입헌군주제 확립

다) 대영제국 설립(1707, 앤 여왕) - 영국 의회와 스코틀랜드 의회 병합

라) 내각책임제 시작 - 조지 1세 즉위 이후, 의회 다수파가 내각을 조직, 의회에 책임짐

(2) 미국의 독립혁명

1) 미국 독립혁명의 원인

가) 영국의 식민지 건설

* 종교적(청교도)·경제적(상인) 이유의 망명 집단
* 18세기 전반까지 북아메리카 동부 연안지대에 13개 식민지 건설
* 식민지의 자치권 인정(총독 임명 - 형식적)

나) 중상주의정책 강화

* 7년 전쟁 이후, 본국 재정난 해결 위해 식민지 통제 강화 - 중상주의적 통제 강화
* 인지조례 제정 - 모든 문서에 인지를 붙이게 함

다) 식민지인의 저항 - '대표없는 곳에 과세할 수 없다' → 영국 상품 불매 운동 전개

라) 인지조례를 폐지하고 타운센트조례를 제정, 각종 수입품에 세금 부과함 - 반대 운동 ꁁ) 차세 이외의 세금 폐지

2) 독립혁명과 합중국의 탄생

가) 독립전쟁의 발발

* 발단 - 보스턴 차 사건(1773)
* 보스턴 근교의 렉싱턴에서 무력 충돌(1775)
* 제 2차 대륙회의 소집 - 독립전쟁 결의, 워싱턴을 총사령관에 임명

나) 독립선언서 발표

* 1776년 7월 4일 발표, 제퍼슨 등이 기초
* 근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 천명 - 인간의 자유·평등의 자연권, 주권재민의 원칙,압제에 대한 저항권 등(로크의 계몽사상의 영향)

다) 프랑스·에스파냐·네덜란드 등의 식민지군 원조, 러시아 등의 중립 - 영국 고립

라) 요크타운 전투 승리(1781)

마) 파리조약(1783) - 13개 식민지 독립 인정, 미시시피강 동부 영토 양도

바) 아메리카 합중국의 성립

* 헌법제정 회의 - 아메리카 합중국 헌법 제정(1787) ← 연방주의, 삼권분립에 기초
* 합중국 헌법의 한계 - 노예 무역 폐지 조항 삭제, 원주민 인권 문제에 무관심
* 아메리카 합중국 탄생(1789) -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됨

사) 미국 독립혁명의 의의

* 절대왕정에 대항한 시민혁명 - 최초의 민주주의 공화국 수립
* 근대 민주주의 기본 원리 체득 - 프랑스혁명에 영향 끼침

(3)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1) 구제도의 모순

가) 구제도의 모순

* 제 1신분(성직자)·제 2신분(귀족)의 특권적 지위 - 토지·관직 독점, 면세혜택
* 제 3신분(시민, 농민, 수공업자, 소상인) - 국가재정 대부분 부담, 지위보장안됨

나) 시민계급의 활동

* 신분제 사회에 불만 - 정치적·경제적 지위 불일치
* 계몽사상의 수용 → 구제도 타파와 자유로운 시민 사회 건설 욕구

다) 농민의 활동

* 봉건적 공납과 무거운 세금에 시달림 → 구제도에 불만
* 시민계급의 움직임에 동조할 태세 갖춤

라) 미국혁명의 영향을 받음

2) 혁명의 시작과 국민의회

(1) 혁명의 시작

가) 정부 재정의 파탄

* 루이 14세 시대 말기 이후 호화로운 궁중생활과 대외전쟁으로 재정 위기 시작
* 루이 16세, 미국독립혁명 지원(참전)
* 튀르고·네케르의 재정개혁안 - 특권계급에 과세 시도 →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

나) 루이 16세의 삼부회 소집 - 의결방법을 놓고 신분간의 대립

특권계급 → 신분별 표결 고집
제 3신분 → 머리 수 표결 주장

(2) 국민의회

가) 국민의회 결성

* 평민 대표 및 진보적 일부 귀족과 하급 승려 중심
* 새 헌법 제정을 요구 - '테니스 코트의 서약'

나) 국왕의 국민의회 무력 탄압 → 파리 민중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1789. 7. 14)

전국적인 농민 봉기의 빈발

다) 국민의회의 활동

* 봉건적 특권의 폐지 결의(봉건적 공납의 유상 폐지가 골자)
* 인권선언 답변확정(1789. 8. 26) - 인간의 자유·평등, 국민주권, 언론·출판의 자유,

재산권의 불가침 등 → 민주주의와 시민사회 발전 계기

* 개혁 조치 - 교회재산의 몰수, 길드의 폐지, 지방행정제도의 개혁 등
* 바렌 도피사건-국왕의 국외 탈출 기도, 입헌군주제 실험 계기, 혁명 과격화의 원인
* 헌법제정(1791)-입헌군주제·단원제 의회, 유산계급에게만 선거권부여(하층민 불만)

3) 혁명의 과격화와 공포정치

(1) 혁명의 과격화

가) 입법의회 시대

* 제한선거에 의한 입헌군주제 헌법 답변확정(91년 헌법) → 헌법에 따라 입법의회 소집
* 지롱드당의 성장 - 온건한 공화파 → 입법의회의 주도권 장악
* 혁명전쟁 시작(1892) -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 프로이센의 오스트리아 지원

망명 귀족 및 이웃 군주들의 반혁명 책동

지방 의용군의 파리 운집과 파리 민중의 폭동 → 왕권 정지

나) 국민공회 시대

* 국민 공회 소집 - 공화정 선포(제 1공화정)
* 급진적 자코뱅당의 득세 - 국왕인 루이 16세 처형

열강의 제 1차 대프랑스 동맹 결성,자코뱅당과 지롱드당의 대립 격화

(2) 공포정치

가) 자코뱅당의 권력 장악 - 지롱드당 숙청
나) 공포정치 실시

* 로베스피에르 - 공안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혁명정부 수립
* 반혁명 혐의자와 반대파의 단두대 처형

다) 자코뱅당의 정책

* 징병제 - 대 프랑스 동맹군 격퇴, 반혁명 진압
* 최고가격제 등 통제 경제 실시
* 봉건적 공납의 무상 폐지
* 혁명력과 미터법의 제정
* 이성 숭배 등

라) 테르미도르의 반동

* 자코뱅당의 공포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만
* 로베스피에르 처형 - 온건 공화파 부상 → 새로운 헌법 제정(1795)

(3) 총재정부

가) 총재정부 수립

* 온건 공화파 중심의 '95년 헌법 제정'
* 제한 선거에 의한 양원제 의회와 5명의 총재로 구성된 총재정부 수립

나) 총재정부의 무능과 부패

* 자코뱅당과 왕당파의 양면 공격
* 계속되는 대외 전쟁으로 시련 → 강력한 왕권을 기대하는 여론 상승

4) 나폴레옹의 대두와 제 1 제정

가) 나폴레옹의 쿠데타 - 통령정부 수립

나) 통령 나폴레옹의 활동

* 독재정치 실시 - 중앙집권강화 → 언론과 사상 통제
* 프랑스 은행 설립
* 나폴레옹 법전 편찬 - 프랑스혁명의 성과 반영
* 영국과 아미앵 조약 체결(1802) - 제 2차대 프랑스 동맹 붕괴시킴

다) 제 1제정 성립

* 1804년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
* 유럽 대륙에 군림 - 라인동맹 결성 → 신성로마제국 해체, 프로이센 격파
* 대륙봉쇄령 - 경제적 봉쇄 시도(영국), 대륙 여러나라 반발 - 나폴레옹 몰락 계기

5) 나폴레옹의 몰락

가) 각국의 민족의식 성장

* 나폴레옹 정복 전쟁 - 유럽 각국에 프랑스혁명 이념 전파, 근대화 촉진의 계기
* 민족의식 각성 - 에스파냐 → 반나폴레옹 반란

프로이센 → 틸지트조약(1807) 이후, 슈타인·하르덴베르크의 개혁 (농노제 폐지, 행정개혁, 군제개혁)
러시아 →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영국과 통상 지속

나) 나폴레옹의 몰락

* 러시아 원정 실패(1812)
* 제 4차 대프랑스 동맹 - 라이프치히 전투 승리, 파리 점령, 나폴레옹 엘바 섬 유배
* 엘바 섬 탈출, 황제로 복귀, 워털루 전쟁에서 패배(1815) - 세인트헬레나 섬 유배

다) 의의

* 유럽에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확산
* 유럽의 낡은 질서체제를 붕괴시키는 데 이바지

산업혁명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에서 정점을 이룬 시민 혁명은 전제적인 절대 왕정을 무너뜨리고 봉건적 잔재를 제거함으로써 근대 시민 사회와 국민 국가성립의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 혁명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완성시켰다. 그리하여 19세기에는 국민 국가를 단위로 자본주의적 시민 사회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노동 문제를 비롯한 새로운 사회 문제가 제기되고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회주의도 대두하였다.

산업 혁명의 불길이 세차게 일어 나던 19세기 초반의 런던 ,대학 입시에 시달리는 일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영국의 청소년들이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귀기울여 보자.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제레미아 혜인즈(12살) : "4곱하기 4는 8이고, 4를 4개 더하면 16입니다. ", "왕이란 모든 화폐와 황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 나라에도 왕이 있는데, 그는 여왕이고 그녀의 이름은 알렉산드라 왕녀라고 합니다. ,왕녀는 남자입니다." 윌리암 터너(12살) : "나는 잉글랜드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나라가 있다고는 생각합니다만 이전에는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습니다." 에드워드 테일러(15살):"런던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헨리 매튜만(17살) : "자주 교회에 다녔습니다. 설교에 나오는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 밖의 다른 이름은 하나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하나도 모릅니다, 그는 살해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어딘가가 다릅니다. 이는 그가 신심이 깊은 데가 있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소녀 : "악마는 착한 사람입니다. 그가 어디 살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그리스도는 나쁜 놈이었습니다."

이 소녀(10살)는 god을 dog이라고 쓰고 여왕의 이름도 몰랐습니다 -「아동 노동 조사 위원회 보고서 제5차 보고서」 중에서).

이 아이들은 개그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별난 구석이 있는 아이들은 더욱 아니다. 산업 혁명 당시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교육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받아 보지 못한 채 일터로 내몰려 장시간 노동으로 혹사당했다. 눈부시게 진행되는 산업 혁명의 뒤편에는 당시의 문명 예찬자들을 당혹케 한 이러한 예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다. 산업화로 인하여 기계들이 풍부한 부와 물자를 생산하는 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도처에 가난한 사람들이 넘실대며 아동들이 기막힌 무지 상태에 방치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의 머리로도 납득하기 어려운 현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묘한 부조화는 어떻게 발생 한 것일까? 지금부터 산업 혁명 당시로 돌아가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던 것 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산업혁명을 왜 굳이 '혁명'이라고 부르는가?

산업 혁명은 16세기에서 19세기 전반에 이르는 영국 자본주의 발전 과정의 클라이맥스로서, 대체로 18세기 후반면 공업에서의 기술 혁신을 시발로 하여 이후 100여 년 동안 진행된 전 산업에 걸친 변혁의 과정을 일컫는다. 하지만 클라이맥스라는 표현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100여 년에 걸친 산업 혁명기 동안에 기술적인 차원에서만 본다면 '혁명'이라고 할 만한 폭발적이고 급격한 변화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는 특별히 주목할 만한 어떤 분수령을 이루는 사건도 없었다. 제니 방적기, 와트의 증기 기관, 철도 등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중요한 발명들은 오랜 시일에 걸친 사소한 기술적 발전이 끊임없는 시행 착오의 과정을 거쳐 퇴적된 결과 나타난 것이지 결코 하룻밤 사이에 출현하여 잠들어 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한 사건은 아니었다. 전체 인구 중에서 차지하는 공업 인구의 비중이나 산업 생산 전체에서 차지하는 자본주의적 공업 생산물의 비중 등을 본다면 오히려 영국의 산업화는 19 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시기의 특징이지 소위 산업 혁명기의 특징으로 볼 수는 없었다. 영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기 시작한 1840년대-1850년대에도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영국은 여전히 농업국이었지 공업국은 아니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근거로 일부 학자들은 산업 혁명이라는 용어 대신 '산업화'라고 부르기를 주장하며 산업 '혁명'이란 것이 과연 존재했는가 하는 의문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런데도 구태여 18세기 후반에서 19 세기 전반에 이르는 이 시대를 가리켜 산업 '혁명'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사실 이 용어가 최초로 등장한 것은 1840년대 사회 사상가들의 입을 통해서였다. 당대의 사상가들은 점진적인 기술 변화의 배후에서 전개되는 중대한 사회적 변화, 더욱이 되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읽어 냈고 이를 혁명이라는 용어로 적절히 묘사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중세 봉건제하의 양대 세력이었던 봉건 영주와 농노를 대신하여 자본가와 산업 노동자가 사회의 중추 세력으로 등장했다. 또 경제 생활의 중심이 농업에서 공업으로 이동하고 도시가 서서히 이루어졌다. 한편 산업 혁명의 선두주자 영국은 막강한 공업력을 무기로하여 세계 시장을 석권하여 경제 활동의 무대를 과거와는 달리 세계적인 범위로 확대시켰다. 그리하여 한 민족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없는가 문명이냐 아니면 야만이냐를 결정하게 되는 사상 유례가 없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산업 혁명이 혁명일 수 있는 까닭은 이러한 근본적 변화의 중심 축에 바로 그것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왜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시작되었을까 ?

해상권 장악과 무역 독점


18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산업 혁명과 자본주의의 본격적 발전을 위한 유리한 전제 조건이 마련되어 있었다. 우선 영국은 1588년 스페인 무적 함대를 격파함으로써 16세기 내내 진행된 네덜란드, 스페인과의 해상권 쟁탈전에 최후의 승자가 되었고 17세기에는 모직물을 비롯한 상품무역과 노예시장을 독점하고 유럽과 아메리카 식민지, 인도를 연결하는 황금의 삼각 무역을 통해 막대한 상업적 부를 축적하게 된다. 아직 자본주의가 확립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무역 독점으로 생긴 이득은 자본주의 발전과 산업 혁명에 필요한 화폐적 부를 축적하는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전제 조건은 국내에서 조성되고 있었다. 14세기에 장원 경제의 붕괴 과정이 개시된 이래 다양한 자영 농민과 자영 수공업자들이 등장하였고 자급 자족적인 장원 경제를 대신하여 지역별 시장권이 형성되었다. 이와 같은 시장은 과거부터 존재해 온 원격지 상업이 발전된 것이지만 일단 산업 혁명이 개시되어 자본주의적 공업으로부터 다량의 생산물이 쏟아졌을 때 그것을 소화할 수 있는 유통 측면의 전제 조건 을 형성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노동력의 측면

지역별 시장권을 일구어 나간 주요 세력이었던 자영 농민, 자영 수공업자 층의 형성 과정이 이들의 경제적 자립화 과정이었다고 한다면, 때를 같이하여 농촌 지역에 광범하게 출현한 빈민, 유랑민, 각양 각색의 노동자들(품팔이꾼이라 부르는 게 더 적절한 것이다.)이 기계제 대공업에 종속되어 간 과정은 자본주의적 산업화를 노동력 공급이라는 측면에서 준비해 가는 과정이었다. 이는 두 차례에 걸친 인클로저 운동을 통해 완성된다. 인클로저 운동은 모직물 무역이 주는 막대한 이익에 의해 촉발되었는데, 모직물은 당시의 가장 중요한 무역 품목의 하나로서 영국의 해상 무역 독점하에서 실로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모직물의 해외 수요가 확대되고 그 이익이 증대할수록 양모의 안정적인 대량공급이 절실히 필요하였고 이에 따라 대토지 소유자들은 양떼를 방목하기 위해 농민들에게서 몇 백만 에이커의 토지를 강탈하였으며 많은 농민들은 토지에서 쫓겨나 유랑길에 올랐다. 영국의 전원이 아름다운 녹색의 풀밭으로 변해 갈수록 농민들의 고통은 더욱 심각해졌다. 이에 대해 토마스 모어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양은 본래 몹시 양순하여 먹이를 조금만 주어도 만족스러워 했는데 지금은 아주 탐욕스럽고 흉포해졌으며 심지어 사람을 잡아먹기까지 한다.

물론 이 과정은 순탄하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어서 도처에서 인클로저에 저항하는 농민의 봉기가 잇따랐다. 애초 대토지 소유자들에 의해 개별적으로 진행되던 인클로저 운동은 농민들의 저항에 부딪치자 정부와 의회의 후원하에 더욱 강력하게 추진되었고 농민들의 저항은 결국 분쇄되고 말았다.


화폐 자본의 축적

한편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풍부한 노동 공급과 함께 다량의 화폐가 사전에 축적되어야 한다. 자본축적을 위한 화폐적 부의 원천은 다양한 것이었다. 우선 영국 상인들은 상품 무역의 독점과 반문명적인 혹인 노예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윤을 수중에 넣고 있었다. 이와 함께 영국은 식민지 약탈과 해상 약탈(도둑질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고리 대금업 등으로 대량의 화폐를 끌어 모았다. 또 하나의 중요한 자본 축적 원천은 봉건 경제의 붕괴 과정에서 등장한 다양한 자영 농 밀 자영 수공업자층 중에서 성공한 부류들이 보유한 소규모 자본이었는데 이들 중 사업 감각을 가진 이들은 산업 혁명이 시작되자 재빨리 다양한 공업 분야에 뛰어들어 공업의 주역으로 변신한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 18세기 후반 영국은 산업 혁명의 전제 조건인 풍부한 노동 공급과 다량의 화폐 자본이라는 면에서 어느 나라보다도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 것이다.


산업 혁명은 왜 면공업에서 불이 붙었을까 ?

산업 혁명 이전에 영국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이었던 모직물은 매뉴팩처 방식으로 생산된 사치품으로서 주된 수요자가 해외에 있었다. 반면 면직물은 일상적인 의생활에 이용되는 대량소비형 생필품이었으며 주로 내수 시장을 겨냥한 생산이 가능했다. 그렇지만 면직물의 이러한 특징이 곧바로 자본주의적 공업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봉건 경제하에서도 면직물은 이미 생산되고 있었고 이는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 나아가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유독 영국에서 면직물 공업이 산업 혁명의 시발점을 이루게 되었던 것은 왜일까? 봉건 경제하에서 면직물은 주로 농업과 수공업이 분리되지 않은 장원 경제 단위로 자급 자족되고 있었다. 따라서 면직물이 대량 생산된다 할지라도 마땅한 국내 시장을 발견하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면직물의 자급 체계가 이미 무너지고 다수 국민들은 시장에서 면직물을 구입해야만 했으며 면직물의 시장 생산이 부분적으로나마 이미 시작되고 있던 참이었다. 방대한 수요 시장의 형성은 약간의 자본과 기술 지식을 가진 중산 계층(초기 산업 자본가)에게 구미가 당기는 돈벌이 기회를 주었다. 하아그리브스, 아크라이트, 크롬프튼 등은 출신 배경은 약간씩 달라도 모두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감지하고 그 변화를 주도한 인물들이었다. 바야흐로 만들기만 하면 팔리는 둘도 없는 기회가 온 것이다. 누가 얼마나 많은 것을, 얼마나 팔지, 그리고 얼마나 적은 노력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이것이 성공의 열쇠였다. 기술 혁신의 경쟁이 불붙었다. 방적기와 직조기의 연이은 혁신이 이루어졌고 이는 다시 값싸고도 능률적이며 지리적 제한에 구애되지 않는 새로운 동력원으로서 증기력과 증기 기관의 혁신을 촉발했다. 또 기계와 증기 기관의 보급에 따라 철강업과 기계 공업의 기술 혁신이 그 뒤를 이었으며 1850년대의 철도, 선박 등의 수송 혁명에 이르러 산업 혁명은 완성을 보게 된다. 이와 함께 과거의 전통 사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근대 산업 사회가 경제적으로 완성된 것이다.


산업 혁명의 빛과 그늘

프랑스의 석학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산업 혁명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맨체스터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는 이 도시의 노동자 거주 지역을 가로질러 흐르는, 공장 폐수로 오염된 시커먼 강물을 보면서 맨체스터와 산업 혁명에 대한 자신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더러운 하수구로부터 전세계를 비옥하게 만드는 인간의 땀의 강물이 흘러나오며 순수한 황금도 흘러나온다. 인간이 가장 애써 이룩한 이 문명이 그 기적을 이루는 바로 이곳에서 인간은 야만인으로 되어 버렸다."



확실히 공장제 기계 공업으로 대표되는 거대한 생산력은 인류에게 빈곤과 야만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을 가져다 주었다. 인간 생활이 더 편리하고, 더 안전하며 풍요롭게 될 가능성이 활짝 열린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었을 뿐이었다. 현실은 어떠했는가?

현실은 어떠했는가 ?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상태

여성과 아동 또한 훨씬 적은 시간과 노력으로 조작법을 배울 수 있는 기계의 보급이 가속화됨에 따라 전통적인 수공업 기술을 사용하던 남성 숙련 노동자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되었고 산업 자본 가들은 인건비를 크게 절약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보다 다루기 쉬운 노동력을 대량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함께 최저 12시간에서 16시간 심지어 20 시간에 이르는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이 부인과 아동들을 포함한 노동자 전체를 괴롭혔고 극도의 저임금으로 노동자 가정은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다, 첫머리에서 본 문명화된 대영제국 소년들의 어처구니없는 교육 상태가 이제는 납득이 될 것이다.


노자 대립의 격화

산업 혁명 초기에 노동자들은 아무런 제도적 보호 장치를 가지고 있지 않고 노동조합 또한 존재하치 않았기 에 자본가들의 무제한적인 이윤 동기에 의해 큰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자각이 싹터감에 따라 노동자와 자본가의 극한 대립이 온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식민지 수탈의 강화

산업 혁명이 초래한 또 다른 중요한 영향은 식민지의 고통이다. 이전에는 군사력을 앞세운 단순한 약탈과 무차별한 원주민 학살이 식민지 지배의 내용이었던 반면,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식민지의 경제적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본국의 공업 생산물의 수출 시장이자 원료의 공급 기지로서 식민지는 더욱 체계적인 수탈의 대상이 되었고 식민지를 획득하기 위한 경쟁이 서유럽 국가들 사이에 본격화됨으로써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식민지 민족들의 고통스런 역사가 시작되었다. 영국의 면직물 수출을 촉진하기 위해 인도의 가내 수공업적인 직포업은 궤멸 당했고 영국 면공업에 값싼 원료를 공급하기 위해 북아메리카의 흑인 노예 수입은 산업 혁명과 함께 더욱 확대되었다.


우리는 산업 혁명의 개략적인 전개 과정과 함께 그 양면성을 살펴보았다. 돌이켜보건대 인류는 산업 혁명을 거부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산업 혁명이 가져온 다수 인간의 고통과 식민지의 비참한 운명을 흔쾌하게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현대 산업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여전히 산업 혁명의 그림자를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다음의 질문은 단순히 과거를 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산업 혁명의 좋은 측면을 발전시키고 나쁜 측면을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는가?

산업 혁명이 낳은 결과의 양면성을 생각하면서 다음 글을 읽고 기계 파괴 운동을 평가해 보자.

단순한 노동이 자본가의 지휘 아래 기계의 운동에 따라 작업하게 됨에 따라 인간 노동이 기계의 부속물처럼 되어 버렸다, 중세 수공업의 장인 제도에서는 사장(師匠), 수습 장인의 서열 관계에도 불구하고 인간 관계에서는 온정과 협조가 있었다. 그러나 자본가적 노동의 성립과 더불어, 수공업의 숙련 노동과는 달리 단순 노동이 기계의 운동에 봉사하면 되게 되었다. 이에 노동의 권위는 상실되고 노동자의 지위는 저하되었다, 때문에 수공업자 숙련공은 기계를 증오했다. 그들은 기계에 밀려나서 일터를 잃었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실질 임금이 저하하여 생활이 곤란하게 될 때, 왕왕 기계 파괴 운동(러다이트 운동)에 나섰다. 노팅검에서는 메리야스 기계를, 코크셔에서는 면업의 역직기를, 요크셔에서는 양모 공업의 절취기를 파괴했다. 1811-1812년에 러다이트 운동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 소란으로 발명가중 더러는 국외로 피난하기도 하였다. (최종식 「서양 경제사론」중에서)

도움말

이 같은 소란은 삶을 위한 본능의 폭발이긴 하였지만, 하나의 넌센스였다. 먼저 이전 시대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거대한 생산력을 인류에게 가져다 준 점에서 산업 혁명은 발전적인 의의를 지닌다. 이로써 인간은 빈곤과 야만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하였다. 하지만 이는 아직 현실은 아니었다. 노동자들의 빈곤, 여성과 아동 노동의 가혹한 착취와 장시간 노동 등은 산업 혁명에 의해 유발된 인간의 새로운 불행이었다. 또한 다수 국민이 불건강한 생활 주거 환경과 무교육 상태에 방치되었다. 어떤 노동자들은 이러한 모든 불행의 원인이 기계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산업 혁명이 인류에게 가져다줄 풍요와 행복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차츰 지금 겪고 있는 고통과 불행이 기계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니라, 산업 혁명으로 굳어진 자본가와 노동자 관계라는 새로운 인간 관계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과도한 인간 혹사를 저지하는 사회 입법을 만드는 노출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1833년 일반 공창법이 제정되고 1847년에 와서는 10시간 노동, 여성과 아동의 노동 시간 제한 및 야간 근로 금지를 법제화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노동자의 정치 참여를 위한 차티스트 운동과 경제적 조건 개선을 위한 노동 조합 운동 등이 생겨났다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민족주의 [ 民族主義 , nationalism ]



민족에 기반을 둔 국가의 형성을 지상목표로 하고, 이것을 창건(創建) ·유지 ·확대하려고 하는 민족의 정신상태나 정책원리 또는 그 활동.

민족주의는 본래 매우 비합리주의적이고 다의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이것에 일률적인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

민족주의가 성립하는 데는 2가지 조건이 필요하였다. 첫째, 세계는 하나라고 하는 이상과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세워진 세계제국(世界帝國)이 무너지고 많은 독립국가가 나타나, 종래의 보편적인 종교 ·문화를 대신하는 새로운 민족적인 종교 ·문화를 창조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이렇게 이룩된 독립국가를 국민들이 ‘우리들의 국가’로서 받아들여 사랑하고 이에 긍지를 느끼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첫째 조건은 16세기 이후 그리스도교 세계의 통일이 무너지고 로마교황이나 신성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지 않는 많은 독립국가가 나타남으로써 충족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에 나타난 독립국가는 그 대부분이 절대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국민들이 이것을 ‘우리들의 국가’로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거리가 먼 존재였다. 왕은 절대군주로서 절대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국민은 전혀 권리를 가지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국민이 그들의 국가를 ‘우리들의 국가’로 느끼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군주의 절대권을 제한하거나 배제하여 국민의 권리를 신장시킬 필요가 있었다. 진정한 의미의 ‘국민의 국가’가 되어야만 비로소 국민은 국가에 애착을 느끼고 긍지를 갖게 되며, 조국(fatherland)이라고 부르게 되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최초로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난 곳은 17세기경의 영국이었다. 그러므로 민족주의를 세계에서 제일 먼저 꽃피운 나라도 영국이라 할 수 있다.



1. 역사

세계사적으로 보면, 민족주의가 세계를 움직이는 결정적인 힘이 된 것은 18세기 초였으나, 영국은 이보다 빨라서 17세기에 이미 민족주의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세계에서 제일 먼저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영국은 부르주아지의 성장도 다른 어느 나라보다 빨랐다. 그들은 성장과정에서 중세의 미망(迷妄)을 타파하는 과학적 정신을 발전시켜, 왕권의 시녀가 되어버린 국립교회(國立敎會)의 개혁을 주장하는 한편, 국가와 국토를 국민의 것으로 만드는 혁명적인 정치이론을 창안하였다. 그리하여 이것을 17세기의 청교도혁명을 통하여 최초로 실천하였다. 이것은 또한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쳐 독립전쟁(1776∼1782)을 일으키게 하였다. 본국의 압정(壓政)에 시달리던 미국은 본국과 투쟁하는 가운데 민족주의를 형성하였다. 투쟁의 선두에는 부르주아지가 섰으며, 그들은 민족주의가 갖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교묘히 이용하여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민족주의가 가장 전형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은 18세기의 프랑스혁명(1789)에서이다. 여기에서는 혁명의 와중(渦中)에 민족주의가 형성되었다. 혁명의 선두에는 부르주아지가 서서 민중을 이끌었고, 민중의 압력을 배경으로 하여 군주의 절대권(絶對權)을 부인하는 한편, 성직자·귀족의 특권을 폐지하고 인권선언을 공표하였다. 혁명정권이 내걸었던 '자유·평등·박애'의 기치(旗幟)는 프랑스 국민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이외의 나라들에도 커다란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까닭으로 혁명의 진행은 프랑스의 군주와 귀족은 물론, 전(全)유럽의 군주·귀족들까지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무력간섭이 시작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 사이에서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일어난 애국심과 민족주의는 이를 완전히 물리쳤다.

당시의 프랑스에서는 민족주의란 절대군주에게 반대하는 일이며, 애국심이란 혁명을 지키는 일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민족주의는 공화제(共和制)와 민주주의를 뜻하였고 애국자는 곧 혁명가를 뜻하였다. 이런 경향은 1793년 자코뱅당(黨)의 독재기에 최고조에 달하였으며, 이 시기에는 민족주의가 민주주의와 공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1794년 쿠데타에 의하여 자코뱅당이 몰락하자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1799년 나폴레옹의 쿠데타 성공과 함께 더욱 심화되었다.



2. 반동화

프랑스에서 민주주의가 민족주의로부터 등을 돌리기 시작한 시기는 나폴레옹이 유럽대륙에 대하여 침략전쟁을 시작한 시기와 일치한다. 이 전쟁 중에 유럽대륙에서 새로운 형태의 민족주의가 탄생하였다. 즉, 프랑스의 민족주의는 프랑스의 침략군에 대한 국민의 저항 가운데서 탄생하였으며, 이의 지도적 역할을 한 것은 부르주아지가 아니고 절대군주의 정부 및 귀족들이었다. 이들 절대군주의 정부 및 귀족들은 프랑스의 침략군에 대한 국민의 증오심을 교묘하게 이용하면서 그들의 계급적 이익과 모순되지 않는 형태로 민족주의를 옹호발전시켰다. 여기서는 민족주의가 당초부터 민주주의나 합리주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다루어졌고, 국민의 권리보다도 왕실의 영광이, 이성(理性)보다도 본능이 구가(謳歌)되었다. 혁명은 미치광이짓으로 간주되고 도리어 과거의 전통이 찬미되었다. 절대군주나 귀족들은 이와 같은 민족주의를 이용하여 그들의 권위를 지켰고 혁명을 방지하는 방패로 삼았다.

19세기 말, 제국주의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민족주의의 반동화(反動化)는 점차 심화되어 갔다. 제국주의는 민족주의의 부정(否定)임과 동시에 그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민족국가의 테두리를 무너뜨리고 다른 민족을 한 국가의 지배하에 두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는 민족주의의 부정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다른 민족을 병합·흡수함으로써 그 힘을 과시하고 권위를 높이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는 민족주의의 발전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제국주의 단계에서도 부르주아지는 민족주의를 최대한으로 이용하였다.

민족주의는 그들에게는 외국침략이나 제국주의 전쟁을 미화(美化)하고, 약소민족에 대한 압박을 합리화하며 식민지나 반(半)식민지의 주민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한 정신적인 근거로 간주되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1920년대에서 30년대에 걸쳐 파시즘이 나타나, 민족주의가 파시즘의 노예가 된 단계에서 극점(極點)에 달하였다. 여기에서는 국가 또는 민족이 절대시되고 극단적인 에고이즘이나 침략전쟁이 신성화된 반면, 개인의 자유·평등·인간성의 가치는 완전히 부정되었다. 나치스시대의 독일, 파시즘시대의 이탈리아는 그 가장 좋은 보기였다. 이와 같은 종류의 반동적 민족주의를 아시아에서 발전시킨 국가는 일본이었다.

일본은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의 영향을 받아 천황제(天皇制)라는 절대주의체제를 확립하여 천황·귀족·지주 중심의 민족주의를 발전시켰다. 일본은 청일전쟁·러일전쟁·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거두자 자본주의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킴과 동시에 천황제를 수정·변질시켜 독특한 파시즘체제를 만들어내어 대규모 침략전쟁에 나섰다.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황통(皇統)'이니 '세계무비(世界無比)의 국체'니 하는 따위가 조작되고, 그것을 지킨다는 구실 아래 국민의 자유가 억압되었으며, 그들의 침략전쟁에는 이른바 '성전(聖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처럼 민족주의가 변전(變轉)을 거듭하는 사이에 당초 그것이 부정하려고 하였던 것을 긍정하게 되었고, 타도하려고 하였던 것을 옹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에 의하여 고전적인 민족주의가 갖는 본래의 혁명적 정신이 역사상에서 완전히 말살된 것은 아니었다. 제국주의 제국(諸國)에서 민족주의가 자유의 적에게 봉사하며 반동화되어 가고 있을 때, 이들 제국주의 제국에 의하여 핍박받고 있던 반(半)식민지·식민지에서는 새로운 민족주의가 혁명적 정신의 기수(旗手)로서 등장하였다.



3. 식민지민족주의

식민지 민족주의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서 먼저 동부아시아에, 이어서 동부아시아에서 서남아시아로, 서남아시아에서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로 식민지 ·반식민지 세계의 전역에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역사의 추진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식민지 민족주의는 고전적 민족주의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었다. 고전적 민족주의는 자본주의가 봉건세력의 억압에 항거하여 성장하는 과정에서 탄생된 민족주의였으므로, 한결같이 반(反)봉건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나, 식민지 민족주의의 경우는 이보다 더욱 복잡하였다. 즉, 식민지 민족주의는 자본주의가 무르익어 제국주의의 단계로 접어든 시기에, 제국주의의 압제하에 신음하던 식민지에서 일어난 민족주의였으므로, 반(反)제국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식민지 중에도 제국주의와 결탁한 토착의 봉건세력이 제국주의의 앞잡이가 되어 민족주의의 신장을 억제하는 경우에는 반봉건적 성격을 띠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 경우에도 민족주의의 주요한 적은 토착의 봉건세력이기보다는 그 배후조종자인 제국주의자였다. 그러므로 반제국주의야말로 식민지 민족주의와 고전적 민족주의를 구분하는 기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과거 일제(日帝)의 압제하에서 일어났던 한민족의 독립운동이 반제국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식민지 민족주의의 성격을 잘 말해주고 있다.



4. 사회주의국가의 민족주의

1848년 K.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 중에서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조국이 없다"고 말하였으나, 그 프롤레타리아가 아이러니하게도 1917년 러시아혁명에 의하여 그들의 조국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소련을 그들만의 조국이 아니라 온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조국이라고 선전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 소련 한 나라뿐이었던 프롤레타리아의 조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복수(複數)로 늘어났다. 이에 따라 민족주의문제는 사회주의 세계에서도 무시될 수 없는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의하면, 사회주의국가간의 관계를 규율하는 원리는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이지 민족주의가 아닌 것으로 되어 있다. 또,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오직 상대국의 독립과 주권을 존중하고 그 내정에 간섭함이 없이 호혜평등의 입장에서 물심양면의 형제적 원조를 제공하여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럼으로써 전근대적 농업국에 머물던 후진국도 더불어 선진공업국으로 성장해 감으로 민족주의가 발생할 여지가 없다고 단정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회주의국가에서 민족주의가 여전히 건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회주의국가라고는 하지만 현시점에서 그 경제구조가 국민경제로서 조직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기반으로 민족주의가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중·소 대립을 비롯한, 소련의 침공을 받은 아프가니스탄 민족주의자들의 반소(反蘇)게릴라전, 유고슬라비아의 티토이즘, 그리고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의 자유노조운동 등 사회주의국가 사이에서 일어난 각종 이해대립은 이를 잘 입증한다.

자유주의 [ 自由主義 , liberalism ]



개인의 여러 가지 자유를 존중하고, 봉건적 공동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사상 및 운동.

자유주의란 매우 다의적(多義的)인 개념으로, 그 규정도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자유주의는 최근 4세기 동안 서양문명을 이끌어온 대표적인 사조(思潮)라는 점에서 서양 근대사에 자유주의의 역사적 전개(展開)부터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자유주의의 원리】 서양의 자유주의는 15세기 말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상으로서, 운동으로서, 또한 생활양식으로서, 제도로서 형성·발전되어 온 원리로서, 그 광범위하고 다양한 내용을 획일적으로 정식화(定式化)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유의 원리의 공통된 내용을 중심으로 파악한다면 다음의 두 가지 점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보편적 인권의 원리, 즉 정신적·사회적 활동에 있어서의 온갖 개인의 자유와 이니시어티브의 원리이다. 그것은 개성(個性)과 그 활동의 다양성을 전제로 하며, 이성적(理性的)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보다 나은 것이 형성될 것을 믿는 입장이다. 개인의 정신적·사회적 활동의 자유에 대한 비인간적·강제적 구속과 획일화를 가능한 한 제거하는 것은 그 당연한 결과이다. 예컨대 시민적 자유(civil liberties)―신체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종교의 자유, 사고(思考)와 표현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 죄형법정주의(罪刑法定主義)를 비롯하여 재판에서의 정당한 절차(due process)의 존중 등은 이 원리의 전형적 표현이다.

둘째는 보편적 시민권의 원리, 즉 이들 시민적 자유를 지킬 수 있도록 정치제도와 정책과 기관을 비판하고, 만들고, 고쳐 만들 수 있는 자유를 모든 남녀에게 인정하는 원리이다. 정치사회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권리로서의 참정권(參政權), 정치에 있어서의 토론과 설득과정의 중시, 정치에 대한 사고와 비판의 자유, 보도에의 권리(알 권리), 정치적 집회·결사활동의 자유, 소수자의 권리보호 등의 정치적 자유가 여기에 포함된다. 그 밑바탕을 이루는 것은 제도는 자연이 아니고 인간의 작위(作爲)이며, 자기 목적이 아니고 인간의 생활을 위한 수단이라는 원리이다.



1. 역사적 형성

역사적으로 자유주의는 중세의 사회원리에 대한 대항원리로서 등장하였다. 중세사회는 영주(領主)의 농노(農奴)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인격적 지배를 바탕으로, 가톨릭 교회에 의한 전(全)사회관리를 이데올로기로 삼아 그 양자의 복합체로 성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세사회의 붕괴는 한편으로는 영주제를 대신하는 새로운 생산양식의 전개와 다른 한편으로는 통일교회제를 대신하는 새로운 신앙형식의 전개라는 두 가지 동향(動向)의 복합에 의해서 그 계기가 주어지게 되었다. 전자는 생산력의 향상과 화폐경제의 침투로 말미암아 힘을 얻기 시작한 농노가 점차 영주권력에 의한 규제를 벗어나 경제활동에서의 자주성을 획득해가는 과정, 즉 자본제(資本制)로의 이행과정으로 전통과 권위와 경제 외적 강제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키는 데에 물질적인 힘이 되었다. 후자는 종교개혁으로서 나타난 동향이다. 신앙의 내면화에 바탕을 둔 새로운 대항교회의 형성은 광범한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통일교회의 권위를 뒤엎는 에너지를 조달하는 결정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이 두 가지의 동향이 복잡하게 서로 얽혀서 마침내 영국 ·프랑스에 혁명이라는 돌파구를 열어 중세사회원리에 대신하는 새로운 사회원리가 확립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상의 과정에서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은, 첫째, 자유주의가 반드시 리버럴한 원리 내지 방법으로서 형성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컨대 지방영주의 할거성(割據性)을 타파하여 경제활동의 자유화와 통일적인 국내시장의 형성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절대군주의 폭력장치가 불가결하였으며, 또한 이 절대주의는 종종 신앙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로마 교황의 간섭을 물리치고 국내의 대항교회의 형성을 지원하기도 하고 관용정책을 답변확정하기도 하였다. 사실, 18세기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독일의 부르주아지는 시민적 자유의 옹호자로서의 절대군주 또는 계몽전제군주에 기대를 걸었다. 한편 M.루터나 J.캘빈 등은 개혁사상 속에 신앙의 내면화(개인화)의 계기를 담았으면서도 개혁된 교회의 권위의 강제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예컨대 제네바라든가 독립 네덜란드에서는 관용과 학문연구의 자유를 주장하는 인문주의자(人文主義者)는 도리어 탄압을 받았다. 중요한 것은 D.에라스무스 등의 관용사상이 아니고 개혁교회의 권위주의야말로 중세적 규범의 구속을 가장 효과적으로 분쇄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영국 ·미국 ·프랑스의 정치적 자유주의가 토론과 설득에 의해서가 아니라 최종적으로는 내란과 혁명에 의해서 쟁취되었다는 사실은 새삼스럽게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자유주의는 역사적으로 볼 때 종종 자유주의에 대립되는 원리의 관철로 예기치 않았던 결과로서 귀결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둘째, 자유주의의 정치적 성격의 양의성(兩義性)에 대해서이다. 자유주의는 절대군주의 주권을 국민이 탈취함으로써 얻어졌는데, 이것은 국민주권의 절대성에 대한 단순한 승인은 아니었다. 국민주권은 어디까지나 신앙의 자유와 사적(私的) 경제활동의 자유와 같은 시민적 자유확보를 위한 수단이었으며, 그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서 국민의 신탁을 담당하는 통치기관의 권력남용을 방지하기 위하여 특히 엄격한 감시의 눈이 필요하게 되었다. 정교분리(政敎分離) ·권력분립 ·억제균형(抑制均衡)의 원리는 그 한 예이다. 여기서 정치권력에 대한 자유주의의 소극적 태도를 볼 수 있다. 한편 주권이 절대군주의 손을 떠나 개인이 국민으로서 주권을 형성할 경우에는 개인의 자유와 국가주권과도 아무런 모순이 아니며, 오히려 거기에야말로 자유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권력은 국민의 것으로서 국민에 의해서 행사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정치권력에 대한 적극적 자세를 볼 수 있다. 자유주의는 이와 같이 정치에 대한 불신과 긍정과의 역설적 결합인 것이다. 영국혁명에서의 청교도의 슬로건(자유로운 국가에서의 자유로운 교회)이나 프랑스혁명의 권리선언의 슬로건(사람 및 시민의 권리의 선언) 등은 이와 같은 양의성을 실제로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셋째로, 이상과 같은 자유주의의 정치적 원리의 성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종교적 역할에 대해서이다. 이 점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17세기의 영국이다. 거기서는 영국 국교회(國敎會)와 대항하는 캘비니즘계(系)의 수많은 섹트(분파교회:分派敎會)가 형성되었다. 이들 섹트들은 소수집단으로서의 소수파의 자유를 요구하고, 신앙의 자유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여 이러한 요구를 바탕으로 저항의 통일목표를 쌓아올렸다. 한편, 이들 섹트에서 교회관(敎會觀)이 전환되었다. 전통과 신의 권위에 의거하는 강제조직으로서의 교회를 대신하여 신도(信徒)의 자주적 결사와 신도의 상호계약으로서의 교회가 세워졌다. 그리고 이 교회관의 전환이야말로 국가관의 전환을 가져왔다. 다시 말해서 교회계약이라는 구상은 자주적 개인의 상호계약에 의한 국가형성이라는 구상을 촉발한 것이다. 자유주의가 ‘사회계약설’이라는 정치사상을 전개하기에 이른 배경에는 이상과 같은 종교적 요인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자유주의는 중세적 원리에 대한 대항원리이면서도 그 모두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중세 가톨릭 교회는 그 최성기(最盛期)에는 황제 ·제후(諸侯)를 제압할 만한 실력을 갖추었는데, 이는 달리 말하면 정치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자율적 영역이 교회라는 형태로 성립하고, 이 자율적 영역이 거꾸로 정치권력을 수단으로 해서 규정할 수 있었다는 말이 된다. 정치권력의 영역적 한정성 ·수단성이라는 근대 자유주의원리도 그런 점에 있어서는 중세적 유산의 계승이라 해도 무방하다.



2. 현대와 자유주의

개인의 자유를 중핵(中核)으로 하는 사회구조는 그 국가형태로 볼 때 소극국가(消極國家) ·중성국가(中性國家) ·야경국가(夜警國家) 등으로 표현되듯이 자유방임(自由放任)을 낳게 되고, 당연히 약육강식의 현상을 낳게 되어 사회적 ·경제적으로 실질적인 평등을 요구하는 광의의 사회주의에 의하여 도전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20세기에 출현한 나치스와 공산정권 등의 좌 ·우익의 독재정치에 대한 역사적 경험은 자유주의가 지상의 가치로 삼아온 내면적 자유, 정치적 ·사회적 자유 등이 보편적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아시아의 근대적성장
◆ 동아시아의 근대적 성장

1. 유럽 세력의 아시아 침략
(1) 유럽 세력의 아시아 진출
① 유럽 세력의 아시아 진출
㉠ 배경 : 16세기 신항로가 개척되면서 적극적으로 진출하기 시작
㉡ 활발한 무역 활동 :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인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지에 진출
㉢ 주도권의 변화 : 17세기에는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이 본격적으로 활동 시작
② 아시아 진출의 형태
㉠ 거점의 마련 : 초기-아시아 각지에 거점을 마련하고 상품을 수입하는 형식
㉡ 크리스트교의 포교 : 중요한 목적의 하나

(2) 산업 혁명 이후 유럽 열강의 아시아 침략
① 유럽 세력의 아시아 침략
㉠ 배경 : 18세기 후반 산업 혁명의 영향으로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
㉡ 목적 : 원료의 공급과 시장 확대
② 아시아 침략의 형태
㉠ 초기 : 왕실이나 특허를 받은 회사에 의해 아시아 진출
㉡ 변화 : 국가가 직접 식민지 경영

(3) 청의 쇠퇴
① 청의 쇠퇴 :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사회·경제적 모순 노출, 관리들의 부패와 가혹한 착 취, 백련교도의 난을 민간 용병으로 진압
② 영국의 진출
㉠ 동인도 회사의 진출 : 동인도 회사를 이용하여 청과 무역
㉡ 무역의 적자 : 초기 무역에서 막대한 양의 은을 중국에 지불

(4) 아편 전쟁 (1840∼1842)
① 원인 :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이용 중국과 무역 → 청의 대외 무역 통제로 곤란 → 무역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해 삼각 무역 시작 → 영국의 아편 수출로 중국 국민 건강 악화와 은의 유출 → 아편 무역 금지
② 경과 : 중국의 강경책(임칙서의 아편 몰수, 통상 금지) → 영국 침공
③ 결과 : 난징 조약(불평등) 체결 → 5개 항구 개항, 홍콩을 영국에 할양
④ 의의 : 중국 식민지화의 단서, 중국 근대화 운동에 자극
(5) 애로호 사건
① 원인 : 아편 전쟁 이후 보다 많은 이권을 차지하려는 영국의 야욕 → 영국의 통상 확대 요구, 중국의 무역 개선 불이행, 중국 관리의 애로호 습격
② 경과 : 영국은 프랑스와 연합하여 베이징 점령
③ 결과 : 톈진 조약과 베이징 조약 체결(1860) → 외국 공사의 베이징 주재, 크리스트교 의 포교 허용, 영국에 주룽 반도 할양, 러시아에 연해주 할양

2. 중국의 근대화 운동

(1) 태평 천국 운동 (1850∼1864)
① 원인 : 아편 전쟁의 패배로 청조의 위신 손상 → 청조에 대한 반발 급증, 경제적 어려움 → 배상금을 민중에게 강제 징수
② 내용 : 청조타도(멸청흥한), 크리스트교와 유교 사상을 융합한 이상 국가 건설, 남녀평 등, 토지의 균등 분배 및 악습 철폐 주장
③ 결과 : 지도층의 분열, 한인 의용군과 외국군의 활약으로 실패
④ 의의 : 중국 근대 역사상 최초의 농민 운동이자 근대적 민족 운동

(2) 양무 운동
① 배경 : 아편전쟁, 태평천국 운동을 겪으면서 서양 무기의 우수성 인식
② 목표 : 서양 기술을 도입하여 부국 강병의 개혁 추구
③ 내용 : 새로운 문물의 수입, 군비의 근대화와 군수 공업 육성 → 한인 관료 주도
④ 한계 : 전통 사상과 제도는 유지한 채, 서양의 기술만을 도입 하려 함 → 청·일 전쟁의 패배로 실패

(3) 변법 자강 운동 (1898)
① 배경 : 양무 운동 실패, 청·일 전쟁의 패배, 좀더 근본적인 개혁 필요
② 내용 : 서양 의회 제도 도입(입헌군주제 도입) →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범으로 삼음
③ 결과 : 서태후 등 보수 세력의 탄압으로 실패
(4) 의화단 운동 (1899∼1901)
① 배경 : 열강 침략 강화 → 중국인의 배외 감정 고조, 크리스트교의 확산
② 내용 : 부청멸양(청을 도와 서양을 친다) → 반크리스트교 운동, 반제국주의 운동
③ 결과 : 열강의 무력 진압, 외국군의 베이징 주둔, 막대한 배상금 지불
④ 의의 : 외세배척 운동, 복고적 성격의 민족 운동

(5) 신해혁명
① 원인 : 의화단 운동 실패 이후 청조와 서구 열강에 대한 반감
② 쑨원의 혁명 운동 추진 : 중국 혁명 동맹회 결성, 삼민주의(민족, 민권, 민생) 주창
③ 신해혁명(1911) : 민간 철도 국유화에 반대 → 우창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대
④ 결과 : 중화민국 정부 수립(1912) → 최초의 민주 공화정, 청조 멸망(1912)

3. 일본의 근대화 운동
(1) 일본의 개항과 메이지 유신
① 일본의 개항
㉠ 도쿠가와 막부의 제한 무역 : 외국과의 통상 수교 거부, 네덜란드 인과의 제한적인 무역만을 허용
㉡ 문호 개방 : 19세기 중엽 미국의 강요로 문호 개방 → 미·일 화친 조약 체결(1854)
② 메이지 유신(1868)
㉠ 배경 : 지방의 무사계급이 막부를 타도, 국왕 중심의 신정부 수립(1868)
㉡ 내용 : 외국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임, 봉건 제도를 과감히 타파
㉢ 의의 :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

(2) 일본의 대륙 침략
① 배경 : 상품 시장, 원료 공급지의 확보
② 조선 침략 : 조선과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 조약 체결(1876)
③ 청·일 전쟁(1894∼1895) 승리 : 조선에 대한 침략 기반 구축
④ 러·일 전쟁(1904) 승리 :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 → 조선에 대한 일본의 우월권 인정
⑤ 조선의 식민지화 : 조선의 국권 침탈 → 만주, 중국 등 대륙 침략 본격화

4. 한국의 근대화 운동
(1) 개항과 근대화
① 문호 개방 : 운요호 사건 → 강화도 조약의 체결 → 3개 항구(부산, 원산, 인천)개항
② 개화와 척사의 대립 :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

(2) 근대화와 자주 운동
① 동학농민운동(1894) : 농민들이 주축이 되어 외세배격, 내정개혁 요구
② 갑오개혁(1894) : 근대화의 계기
③ 독립협회의 조직(1896) : 애국 선각자에 의해 조직, 자주 독립, 자유 민권, 자강 개혁
④ 의병 운동 : 일본의 침략에 무력으로 대항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근대적운동

4.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근대적 성장



♣ 학습 핵심 : 서양의 식민 통치하에서 인도와 동남아시아도 서서히 근대적인 사회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그 변화는 식민통치의 편리를 위해 시작되었기 때문에 민족의 주체적인 발전을 오히려 왜곡하기도 하였다. 이에 이들 민족들은 스스로 근대화 운동과 함께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1) 인도의 민족 운동과 근대적 성장

① 영국의 인도 침략

·배경: 무굴제국 쇠퇴, 종교갈등, 동인도 회사의 인도 경영

·플라시 전투(1757): 영국이 프랑스를 물리치고 인도경영 장악

·영국의 인도 지배: 동인도 회사―면제품 판매, 강제적 면화와 아편재배,

힌두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종교적 대립을 부추켜 인도 국민 분열

·세포이 항쟁(1857-1858): 민족적 반영운동, 진압후 무굴제국 멸망,

영국령 인도 제국 수립(1877).



② 인도의 근대화 운동

·브라모 사마지: 힌두교의 우상 숭배 비판, 폐습 개선 시도

·인도 국민 회의(1885): 층, 종교인 중심의 반영 운동

―스와라지(자치), 스와데시(국산품 애용), 민족교육, 영국 상품 배척



2) 동남 아시아 각국의 근대적 성장

① 열강의 동남아시아 침략

·내덜란드: 자바 지배(18C)―재배식민정책(커피,사탕수수;플랜테이션 경영),

몰루카제도, 보루네오 일부를 병합하여 동인도(인도네시아) 성립.

·영국 : 미얀마 정복하여 인도제국에 편입. 싱가포르,

말라카를 합쳐 영령 말레이연방 형성(1895)

·프랑스: 청·프 전쟁 승리로 베트남 지배(1885),

캄보디아 합쳐 프령 인도차이나연방 형성(1887)



② 동남아시아의 근대화 운동

·베트남: 통킹의숙을 설립하여 새로운 문물 도입,

베트남 광복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주도

·미얀마: 청년 불교도 협회를 중심으로 반영 운동 전개

·시암(태국): 영국과 프랑스의 완충지로 독립 유지, 서구식 관료제와 교육제도 도입

→ 입헌군주제

·필리핀: 미국·에스파냐 전쟁 때 아기날도가 독립을 선언, 미국이 무력탄압, 미

국 식민지가 됨

·인도네시아: 반네덜란드 운동이 지속됐고, 1911년 이슬람 동맹이 결성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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