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가(法家)의 사상
1. 한비자(韓非子) 이전의 법가(法家)사상
중국 역사상 '법(法)'은 춘추시대까지만 해도 예(禮)를 보완하는 것으로서 기능하여, 양자 사이에 커다란 대립은 없었다. 그러나 전국시대의 급격한 사회변동을 겪으면서 법은 예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법가들은 대체로 실제적인 정치가로서 내외 정세를 법에 의한 정치로 대처하고자 하는 시도를 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러한 그들의 기본토대는 순자(荀子)의 성악설(性惡說)이었다. 제(齊) 환공(桓公)을 도와 패업을 이룬 관중(管仲)이나, '형서(刑書)'를 만듦으로써 실정법을 공포한 정(鄭)의 자산(子産) 등에서부터, '법치(法治)'를 내세워 위(魏)에서 변법을 시행한 것으로 유명한 이회(李 ), 신료들을 통제·제어하는 '술(術)'을 강조한 한(韓)의 신불해(申不害), 그리고 신하가 군주에 복종하는 것은 군주의 세력이지 결코 그의 덕행이나 재능때문이 아니라고 하여 '세(勢)'를 강조한 신도(愼到), 그리고 진(秦) 효공(孝公)을 도와 2차 걸친 강력한 개혁을 단행하여 이후 진(秦)의 통일기반을 제공한 상앙(商 ) 역시 법가(法家)로 유명한 인물들이었다.
2.한비자(韓非子)의 사상
위의 여러 법가사상을 총망라하고 집대성한 이로서, 우리는 한비자(韓非子)를 들 수 있다. 전국시대 말기는 한창 평화와 통일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한 시기였고, 그 현실적인 방안으로서 부국강병, 그리고 전쟁에 의한 합병이 중시되던 시기였다. 이런 때, 한비자는 기존의 여러 법가사상들, 즉 술(術)·세(勢)와 법(法)을 통합하여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지배를 추구하였다. 법(法)과 술(術)·세(勢)를 통합했다는 것은 법치(法治)의 운영방법으로서 술치(術治)와 세치(勢治)를 병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즉 민(民)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법(法)이 필요하고, 관리를 부리기 위해서는 술(術)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법(法)과 술(術), 그리고 세(勢)는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이라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법치(法治)의 기본은 철저하고 엄격한 상벌(賞罰)을 통해 '사적인 것을 배척하고 공적인 것을 이롭게[排私利公]'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한비자가 집대성한 법가사상은 이후 진시황(秦始皇)과 이사(李斯)에 의해 실현되어, 진(秦)이 춘추전국시대의 분열상황을 극복하고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는 기틀이 되었다.
(그러나 진왕조가 단명한 후 한대 이래 법가는 유가에 밀리게 된다. 그 이유는 '교화'나 '위민(爲民)'의 이상이 없다는 데 있다. 법치를 강조하고 있지만 법에 의한 통치의 정당성 또는 합리적 근거를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난세를 극복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적합하나 안정 국면에 적용하기에는 부족하였던 것이다.)
묵가(墨家)
묵자(墨子)의 사상
묵가(墨家)를 제창한 묵자(墨子)는 일찍이 유가의 학설을 배웠으나, 유가의 형식주의와 불평등성에 반대하여 묵가를 세웠다. 예컨대 공자는 어리석은 군주라도 신하가 잘 보필하면 정치가 잘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한 반면, 묵자는 왕위세습을 반대하고 훌륭한 인물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묵가에서는 또한 유가에서 중시하는 예의와 음악을 허례허식의 낭비로 배척하고, 부모의 삼년상 역시 같은 이유로 비난하였다. 그리고 유가의 가족제도 및 인간상호간의 특수한 관계를 중시한 차등적인 사랑[仁]에 반대하여, 인간이 자신을 사랑하듯 다른 사람을 평등애[兼愛]로 사랑할 때 사회의 평화가 온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유가가 내세관을 부정한 데 반해, 묵자는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귀신을 모시는 제사가 현세에 축복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었다.
묵자는 또한 생산활동과 함께 절약[節用]을 강조하면서 정치의 임무를 역설하였는데, 국가부강·인구증가·정치의 공정함을 강조하고, '백성의 굶주림, 추위에 입을 것이 없는 것, 일하는 자가 쉴 곳이 없는 것'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묵가의 사상에는 권위주의적 경향이 강하여, 추종자에게 절대 복종을 요구하고 엄격한 훈련을 통해 교단을 강화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절대적인 겸애설과 공리주의, 지나친 금욕주의 등으로 점차 신망을 잃게 되어 차츰 그 힘을 잃어갔다. 결국 현실주의적이며 중용주의적인 중국인들의 성격이 비현실적인 묵가의 사상보다는 보다 현실적인 유가의 차등애(差等愛)쪽을 선택한 것이다.
제자백가의 사회적 배경
춘추시대 말기부터 전국시대에 걸쳐 독창적인 사상을 지닌 많은 학자들이 출현하였다. 이들을 일컬어 제자백가(諸子百家)라 한다. 그 이전까지는 사상가라 할 수 있는 자가 거의 없고, 개인적인 저서 또한 별로 없었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기존의 봉건적 사회질서가 무너지면서 그 때까지 간부(官府)나 귀족이 독점하고 있던 학문과 지식이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상의 자유와 지식의 확대로 인해, 자신의 능력에 따라 습득한 지식을 이용하여 신분상승을 실현코자 하는 강력한 사회적 욕구가 분출될 수 있었다. 또한 학자를 우대하는 풍조를 들 수 있다. 전국시대 각국의 경쟁은 자연히 부국강병의 추진으로 이어지고, 이에 따라 능력있는 학자[士人]를 우대하는 풍조가 팽배하였다. 게다가 각국의 분립이 사상의 다양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었다. 국가권력이 강력하면 사상과 학문을 통제하기 쉬워 다양한 사상의 발달은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각 파의 학설이 쉽게 용인되었으며, 또 사실상 이것들을 모두 하나로 통일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정치적 혼란이 도리어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퍼온곳=
http://aped.snu.ac.kr/cyberedu/cyberedu2/kor/kor12-01.html
^^ 도움되실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