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즈 역사 ppt

비틀즈 역사 ppt

작성일 2023.12.21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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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사회, 대중문화를 중심으로해서 비틀즈를 소개할건데 차례나 목차를 어떤 식으로 해야할까요 내일인데 도와주시고 혹시 가능하시면 내용정리나 포인트도 간단히 부탁드릴게요 ㅜㅜ


#비틀즈 역사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964.2.7 미국 첫 방문, 음악으로 세상을 평정하다

1964년 2월 7일 비틀즈를 태운 비행기가 런던 공항을 출발하자, 미국 WMCA 방송은 마라톤 중계하듯 이 세기의 밴드가 자국에 당도하는 모습을 방송하기 시작했다. “비틀즈 시간으로 오전 6시 30분입니다. 그들은 30분 전에 런던을 떠났습니다. 뉴욕을 향해 대서양을 건너오고 있는 중이군요. 비틀즈 주변의 온도는 32도입니다.”

영국 출발부터 미국 도착까지 일거수일투족 생중계

이날 오후 1시 35분, 비틀즈는 미국 뉴욕에 있는 케네디 공항에 내렸다. 1만 명이 넘는 10대들이 공항을 가득 메우고 함성을 질렀다. 괴성을 질러대는 팬들 사이를 뚫고 비틀즈가 공항에 마련된 기자회견장에 도착했다.

“노래 한 곡 해주시겠어요?”

“돈을 먼저 주셔야죠” 존 레논이 대답했다.

“여러분을 나이 든 세대에 대한 사회적인 반항의 일부라고 할 수 있나요?”

“지저분한 거짓말이군요.”

“베토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멋진 분이죠. 특히 그 분이 쓴 시는 정말 멋져요.”

링고 스타의 대답이었다.

이틀 뒤인 2월 9일 밤 비틀즈가 출연한 TV프로그램 ‘에드 설리번쇼’가 방송됐다. 이날 방송은 7천3백만 명이 시청했다. 당시까지 최고 기록이었다. ‘에드 설리번쇼’가 방영되는 동안 뉴욕에서는 자동차 휠캡 도난 사고조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 전역에서 10대가 일으킨 주요 범죄는 단 한 건도 없었던 것이다. 비틀즈가 미국에서 공연한 1964년 2월 첫 주, 그들의 노래는 미국 히트 차트 1위에 올랐다. 이어 4월 4일자 빌보드 차트는 1위부터 5위까지 모두 비틀즈의 노래가 차지했다. 1964년 미국 싱글 레코드 판매의 60%는 비틀즈의 노래였다. ‘브리티쉬 인베이젼(영국의 침략)’이란 말이 무리가 아니었다. 비틀즈는 음악으로 미국을 완전히 점령했다.

리버풀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네 명의 청년

비틀즈는 존 레논(John W. Lennon 1940.10.9~1980.12.8), 폴 매카트니(James Paul McCartney 1942.6.18~ ),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1943.2.2~2001.11.29), 링고 스타(Ringo Starr 본명 Richard Starkey 1940.7.7~) 등 네 명의 영국 리버풀 출신 청년이 모여 결성한 그룹이다. 리버풀 출신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네 젊은이는 여러 경로를 거쳐 비틀즈라는 거대한 대중음악의 활화산 속으로 모여 들었다. 비틀즈가 언제 출범했는지를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른바 비틀즈 유일의 공인 전기로 평가 받는 ‘더 비틀즈(대교베텔스만)’의 저자 헌터 데이비스가 기록한 바를 좇아가면, 존 레논은 분명하게 엘비스 프레슬리로부터 영향을 받고 음악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존 레논은 “어린 시절 나에게 영향을 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엘비스가 나타나기 전까지는.”이라고 밝히고 있다.

네 명의 멤버 중 존과 폴이 만난 것을 비틀즈 출범의 한 계기라고 한다면, 리버풀 인스티튜트에서 존이 폴을 만난 1957년 7월 6일을 꼽을 수 있다. 존은 이 날을 “바로 그날이었다. 모든 것이 시작된 날. 내가 폴을 만난 바로 그날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이 비틀즈란 이름을 정식으로 쓰기 시작한 날을 비틀즈의 출범이라고 한다면 시간이 좀 더 흘러 1959년이 되어야 한다. 리버풀의 퀴리뱅크 고등학교에 다니던 존은 스쿨밴드 ‘쿼리멘’을 결성해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존과 폴 모두 리버풀 인스티튜트로 진학하면서 더 이상 ‘쿼리멘’이란 이름을 쓸 수는 없었다. 이들은 그때그때 떠오르는 대로 이름을 바꾸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서로 다른 색깔의 셔츠를 입고 왔다고 해서 ‘레인보우스(The Rainbows)’ 어떤 때는 ‘문독스(The Moondogs)'란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지방 도시 라이브 클럽의 최고 인기 밴드 '실버 비틀즈'

1959년에 이르러서야 이들은 ‘비틀즈’란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딱정벌레(beetles)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나는 그 철자를 BEAT-les로 바꾸어 써보았다. 비트(beat)음악을 연상시키는 말장난이었다.”라고 존은 밝히고 있다. 그러나 당시 밴드 이름은 길어야 한다는 유행에 따라 ‘키다리 존과 실버 비틀즈(Long John and the Silver Beatles)'라고 붙였다. 그리고 한 오디션에서 이름을 물었을 때 '실버 비틀즈'라고 말한 뒤부터 '실버 비틀즈'는 1959년 내내 이들의 이름이 됐다. 어쨌든 ‘실버 비틀즈’로 활동하던 이들은 1960년 독일 함부르크로 옮겨가 연주활동을 시작한다. 당시 이들의 멤버는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과 드러머로 피트 베스트, 베이스로 스튜어트 서트클리프 등이었다. 비틀즈는 함부르크에서 1960년 12월 초까지 머물렀다. 조지는 당시 겨우 17세로 아직 미성년자여서 학생여권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1960년 12월 리버풀로 돌아온 비틀즈는 리버풀 중심가의 최고 라이브 클럽으로 자리잡고 있던 캐번 클럽에서 공연을 시작했다. 1961년 1월부터 1962년 2월까지 1년여 동안 이들은 모두 292회의 공연을 가지며 리버풀 최고의 밴드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 영국의 한 지방도시의 인기 밴드일 뿐이었다.

리버풀의 인기 밴드가 된 비틀즈는 1961년 4월 두 번째 함부르크 여행을 떠난다. 조지는 18세가 되었고 취업허가서를 받을 수 있었다. 두 번째 함부르크 여행에서 비틀즈는 첫 음반을 녹음했다. 첫 번째 함부르크 여행에서 데모 음반을 만들기는 했지만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고 이번에는 토니 셰리던이라는 가수의 반주을 맡아 녹음한 거였다. 존은 이번 녹음을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팀 이름도 ‘비트 보이스(The Beat Boys)'였다. 비틀즈 평전 작가 헌터 데이비스는 이름이 바뀐 이유를 “비틀즈라는 이름이 복잡하다고 음반제작자가 생각한 모양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음반에는 스튜어트 서트클리프는 참가하지 않았다. 스튜어트는 스스로 베이스 기타보다 그림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폴이 베이스를 맡게 되고 스튜어트는 비틀즈를 떠났다. 1961년 7월 네 명의 비틀즈는 스튜어트를 함부르크에 남겨 둔 채 리버풀로 돌아왔다. 스튜어트는 함부르크의 미술대학으로 진학해 미술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나 스튜어트는 1962년 4월 뇌출혈로 사망했다.

매니저에게 발탁돼 멤버 교체와 함께 성공가도를 달리다

비틀즈의 매니저이자 이들을 스타로 만든 정신적 지원자였던 브라이언 앱스타인이 비틀즈를 처음 만난 것은 1961년 11월 9일이었다. 이날 점심시간에 맞춰 브라이언 앱스타인은 비틀즈가 공연하고 있는 캐번 클럽을 찾았다. 그가 운영하고 있는 음반사에 듣도 보도 못한 비틀즈란 그룹이 독일에서 녹음한 노래인 ‘마이 보니(My Bonnie)'를 찾는 사람이 이틀 동안 세 명이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틀즈를 처음 본 앱스타인의 기억은 별로 상쾌하지 않다. “그리고 비틀즈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내 생애 최초로 비틀즈를 보게 된 것이다. 그들은 단정하거나 깔끔하지는 않았다. 연주하면서 담배를 피우고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하고 서로 때리기라도 할 것처럼 굴었다. 관중에게 뒷모습을 내밀고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자기들끼리 농담을 하고 낄낄 웃었다. 그러나 관중은 대단히 흥분했다. 무엇인가 인간 자기력 같은 것을 내뿜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그들에게 빠져들게 되었다.”라고 앱스타인은 회고하고 있다.

그로부터 4주 뒤 앱스타인은 비틀즈와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했다. 제대로 된 계획과 연주일정, 무대 매너 등 비틀즈의 삶 전체를 관리하던 앱스타인은 1962년 5월 레코드 회사 EMI의 자회사인 팔로폰과 녹음계약을 체결했다. 데카, 컬럼비아, EMI 등 대형음반사를 비롯해 여러 작은 음반사로부터 모두 계약거절을 당한 뒤였다. 그러나 이해 8월 팔로폰과 녹음을 불과 한 달 앞두고 드러머 피트 베스트가 강제 탈퇴 당했다. 그리고 링고 스타가 새로운 드러머로 들어왔다. 이로서 드디어 존 레논(리듬 기타), 폴 매카트니(베이스 기타), 조지 해리슨(리드 기타), 링고 스타(드럼)라는 비틀즈 라인업이 완성됐다.

내놓는 곡마다 빅히트 치며 전세계 팝 음악 평정

1962년 9월 11일 EMI의 자회사 팔로폰에서 일하던 조지 마틴은 비틀즈를 런던으로 불러 비틀즈 최초의 영국 음반인 ‘러브 미 두(Love Me Do)’를 녹음했다. 싱글 뒷면 곡은 ‘피에스 아이 러브 유(P.S. I Love You)'였다. 링고의 드럼은 처음에는 제작자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다. 링고는 ‘러브 미 두’에서는 드럼을 쳤지만, ‘피에스 아이 러브 유’에서는 다른 사람이 드럼을 쳤다. 링고는 탬버린을 흔들었을 뿐이었다. 다행히 ‘러브 미 두’가 앞면에 실렸다. 비틀즈의 영국 첫 음반 ‘러브 미 두’는 영국 음반 집계 최고 성적이 17위였다. 그러나 1962년 11월 26일 녹음돼 1963년 1월에 발매된 두 번째 싱글 ‘프리즈 프리즈 미(Please Please Me)'가 1위를 차지했다.

이후 비틀즈는 '어 하드 데이즈 나잇(A Hard Day's Night: 1964년 7월)', '비틀즈 포 세일(Beatles for Sale: 1964년 12월)', ‘헬프(Help: 1965년 8월)', ‘러버 소울(Rubber Soul: 1965년 12월)', ‘리볼버(Revolver: 1966년 9월)', ‘서전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Sergean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1967년 6월)', ‘더 비틀즈(The Beatles: 1968년 11월)', ‘옐로우 서브마린(Yellow Submarine: 1969년 1월)' 등의 앨범을 펴내며 세계 팝 음악을 지배하는 밴드로 군림한다.

비틀즈는 1969년 10월 마지막 걸작 앨범 ‘애비 로드(Abbey Road)'를 내고, 1970년 4월 10일 폴 매카트니가 솔로 앨범 발매와 동시에 비틀즈 탈퇴를 선언하면서 해체했다. 비틀즈가 해체한 지 한 달 뒤인 1970년 5월, 그 전에 제작됐던 ‘렛 잇 비(Let It Be)’가 발매됐다. 이후 존 레논은 1980년 12월 8일, 그의 팬이었던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남은 비틀즈 멤버들은 존 레논의 미완성 곡이었던 ‘프리 애즈 버드(Free As Bird)' '리얼 러브(Real Love)'를 각각 1994년 1995년에 공동 녹음했고, 조지 해리슨은 2001년 11월 29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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