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소개

중국 소개

작성일 2023.07.14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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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약칭 중국)은 유라시아 대륙의 동남부에 위치한다. 중국의 국토는 러시아 · 캐나다 · 미국에 이어 세계 제4위이고, 중국의 황하문명은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이다. 2015년 현재 국민 총생산량은 11조 2766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8,280달러이다. 2013년 이후 국가주석은 습근평(習近平, Xi Jinping)이고, 국무원 총리는 이극강(李克强, Li Keqiang)이다.

수도는 1949년 9월 27일 베이징[北京, Beijing]으로 결정되었고, 그 이전에는 북평(北平)으로 불리었다. 북경은 경(京)으로 약칭하며,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정부의 소재지로, 중국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의 중심지이고, 중국 옛 도시 중 하나이다.

중국 인구는 대부분 한족(漢族)이고, 몽골[蒙古] · 회(回) · 장(藏) · 묘(苗) · 조선족(朝鮮族) 등 55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소수민족은 전체 인구의 약 7%에 불과하지만 이들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의 면적은 전체 면적의 약 50∼60%로 대부분 변경지역이다.

중국 국가통계국의 발표에 의하면, 2008년 총인구는 13억 2802만 명으로, 작년보다 673만 명이 증가하였다. 일년 동안의 출생 인구는 1608만 명으로 출생율은 12.14%이고, 사망 인구는 935만 명으로 사망률은 7.06%이며, 자연 증가율은 5.08%이다. 출생 인구 성별 비례는 120.56%이다. 2016년 현재 중국의 총인구는 13억 7354만 1278명이다.

중국 면적은 959만 6960㎢로 세계 육지 면적의 15분의 1 및 아시아 면적의 4분의 1를 차지하고 있고, 한반도의 약 44배로 러시아, 캐나다, 미국 다음으로 세계 제4위이다. 중국은 아시아 대륙의 동부와 태평양의 서안에 위치해 있다. 영토의 북단은 흑룡강성(黑龍江省)의 막하(漠河, 북위 53°30′), 남단은 남사군도(南沙群島, 북위 4°)로 위도 차이가 49도이고, 동단은 흑룡강과 우수리 강이 만나는 곳(동경 135°05′), 서단은 파미르 고원(동경 73°40′)으로 경도 차이가 60도이다. 남에서 북까지 그리고 동에서 서까지의 거리는 각각 약 5천 킬로미터 이상이다. 육지 국경선의 거리는 약 2만 2,800 킬로미터로, 동쪽에는 북한, 북쪽에는 몽고, 동북쪽에는 러시아, 서북쪽에는 카자흐스탄 · 키르기스스탄 · 타지키스탄, 서쪽과 서남쪽에는 아프가니스탄 · 파키스탄 · 인도 · 네팔 · 부탄, 남쪽에는 미얀마 · 라오스 · 베트남 등과 연접하고 있다. 중국 육지 주변으로는 약 5,400개의 도서가 있고, 그 중 최대 도서는 타이완(臺灣島)이고, 두 번째는 해남도(海南島)이다. 중국 최남단 해역에는 동사군도(東沙群島) · 서사군도(西沙群島) · 중사군도(中沙群島) · 남사군도(南沙群島)가 있고, 이들로 인해 주변 국가와는 영토분쟁이 존재하고 있다.

중국의 법정 화폐는 인민폐(人民幣)이다. 중국인민은행(人民銀行)은 인민폐를 관리하는 국가의 주관기관으로 인민폐의 설계 · 인쇄 · 발행을 책임진다. 인민폐의 단위는 위앤(元, Yuan)이고, 인민폐의 보조화폐는 쟈오(角, Jiao)와 펀(分, Fen)이다. 1위앤은 10쟈오이고, 1쟈오는 10펀이다. 중국은 인민폐 발행 이후 50여 년 동안 5종의 인민폐를 발행하여, 지폐 · 금속폐 · 보통기념폐 · 귀금속기념폐 등 여러 품종의 화폐를 구성하고 있다. 2010년 유통하는 인민폐는 중국인민은행이 1987년 발행한 제4종 인민폐와 1999년 발행한 제5종 인민폐으로, 2종의 인민폐가 동시 유통되고 있다. 제4종 인민폐에는 1쟈오 · 2쟈오 · 5쟈오 그리고 1위앤 · 2위앤 · 5위앤 · 10위앤 · 50위앤 · 100위앤 등 9종 액면이 있고, 그 중 1쟈오 · 5쟈오 · 1위앤에는 지폐와 동전 2종이 있다. 그리고 이번에 50위앤 · 100위앤의 대액면 인민폐를 새로이 발행하기 시작했다. 제5종 인민폐에는 1쟈오 · 5쟈오 그리고 1위앤 · 5위앤 · 10위앤 · 20위앤 · 50위앤 · 100위앤 등 8종 액면이 있고, 그 중 1쟈오 · 5쟈오 · 1위앤에는 지폐와 동전 2종이 있다. 그리고 이번에 시장유통의 필요에 따라 20위앤 액면을 새로이 발행하고, 2위앤 액면을 폐기시켰다.

중국의 언어는 표준어 · 방언 · 소수민족 언어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중국의 공식 표준어는 현대 북경어(北京語)을 중심으로 구성된 한어(漢語, Hanyu) 혹은 보통화(普通话, Putonghua)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부르는 ‘중국어’의 명칭은 여러 가지이다. 현재 중국에서는 93% 이상의 다수를 점하는 한족(漢族) 언어를 공용어(公用語)로 하고 있어, 이 공용어를 공식적으로 ‘한어’라고 한다. 중국의 표준어는 ‘보통화’라고 한다. 중국에서 현대적 의미의 보통화를 제정하기 전에는 ‘관화’(官話)라는 명칭의 북방방언이 가장 널리 통용되었다. 북방방언을 관화라고 하는 것은 이 사투리가 명대 · 청대 이래로 관계(官界)의 통용어(通用語)로 사용된 데서 연유한다. 중화민국 초기 시절 관화에 근간을 두고 있는 말을 정식 보통화로 제정하고 그 명칭을 ‘국어’(國語)라 하였으며, 중화민국이 타이완으로 옮겨간 후에도 그 명칭을 그대로 쓰고 있다. 국어란 명칭은 현재 홍콩에서도 보편적으로 쓰인다. ‘화어’(華語)는 주로 싱가포르 · 말레이지아 · 필리핀 · 인도네시아 등지의 화교 사회에서 쓰는 명칭이다. 이곳의 화교들은 화인(華人)이라 하는데, 이들의 언어라고 하여 화어라고 한다. 이들 동남아 화교들은 대부분이 중국의 남방 지역에서 진출한 사람들로 중국의 남방 방언이 우세하나, 상호 의사 소통을 위해 중국 본토의 보통화를 표준어로 삼고 있다. 사용 배경이 달라서 상호 부분적인 차이는 있으나 보통화 · 국어 · 화어는 같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물론 이들 간의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다.

중국에는 넓은 지역만큼이나 다양한 방언들이 존재한다. 방언이란 중국 인구 90% 이상이 사용하는 한족의 지방언어를 뜻한다. 한족을 제외한 55개 소수민족이 사용하는 언어는 방언에 포함되지 않는다.

중국의 소수민족은 자신의 언어와 문자를 사용한다.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은 거의 모두 자신들의 언어를 가지고 있으며, 그 중에서 단지 21개 민족만이 자신들의 문자를 가지고 있다. 예로 회족 · 만주족 등 3개 민족이 한자를 사용하고, 조선족 · 몽고족 · 티벳족(Tibetian), 장족(藏族) · 장족(壯族) · 위구르족 등 11개 민족이 자신의 고유 문자와 통용 문자를 사용하며, 묘족(苗族) · 이족(彝族) 등 7개 민족은 비록 자신의 고유 문자를 갖고 있으나 별로 사용하지 않고, 나머지 34개 민족은 자신의 문자를 갖고 있지 않다.

중국 각 민족의 언어는 서로 다른 어계에 속하는데, 중국 소수민족의 언어는 매우 복잡하며,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 장어계(漢藏語系)에 속하는 것이 가장 많으며, 한어 · 장어(壯語) · 묘어 등 20개 어종이고, 알타이어 계에 속하는 것으로는 조선어 · 위구르어 · 카자흐어 · 우즈베크어 · 키르기스어 · 몽고어 등 17개 어종이 있다. 그 이외에 남아시아어 계에 속하는 것과 인도유럽어계가 있으며, 타이완의 고산족어는 남도어계(南島語系)에 속한다.

중국 문자는 한자(漢字)로, 1956년 이후 중국에서는 일부 한자를 간소화시킨 간체자(简体字)를 정자(正字)로 규정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현재 2,225자의 간체자가 있다. 1958년부터는 한자의 읽는 방법으로 기존의 주음부호(注音符號)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한어병음방안(漢語倂音方案)을 답변확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알파벳 자모를 차용하여 중국음을 표기하는 방법으로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중국의 법정 기념일로는 신년(1월 1일, 휴가 1일), 춘절(음력 1월 1일, 음력 12월 30일부터 음력 1월 2일까지 휴가 3일), 청명절(음력 당일, 휴가 1일), 국제 노동 부녀의 날(3월 8일, 부녀자 반공일), 식목일(3월 12일), 국제 노동자의 날(5월 1일, 휴가 1일), 중국 청년의 날(5월 4일, 14세 이상 청년 반공일), 단오절(음력 당일, 휴가 1일), 국제 간호사의 날(5월 12일), 어린이의 날(6월 1일, 14세 미만 소년 아동 휴가 1일), 중국공산당 창당기념일(7월 1일), 중국인민해방군 건군기념일(8월 1일, 현역 군인 반공일), 스승의 날(9월 10일), 추석(음력 당일, 휴가 1일), 건국 기념일(10월 1일, 휴가 3일), 기자의 날(11월 8일) 등이 있다.

한다. 중앙위 위원 및 후보위원의 정수는 전대에서 결정되고 대략 300명이다. 1997년 제15기 중앙위원은 193명이고 후보위원은 151명이며, 2002년 제16기 중앙위원은 198명이고 후보위원은 158명이다. 2007년 제17기 중앙위원은 204명이고 후보위원은 167명이다.

중앙위는 중앙과 지방의 당과 국가의 핵심간부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그 구성원은 중국 지도층의 성격을 대변한다. 중앙위 전체회의(약칭 中全會)은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中央政治局)에 의해 매년 1회 이상 소집되고, 대규모 회의로 인해 정책결정기구의 기능이 비효율적이다. 그러므로 정치국이나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내정된 정책이나 중앙 기구의 인사 변동사항을 형식적으로 발의 · 승인 · 비준한다. 주요 업무에는 정치국 위원 · 정치국 상무위 위원 · 중앙위 서기의 선출 활동이 있다.

중앙위원회 총서기

1982년 12기 당 대회에서 당 주석제를 폐지하고, 총서기가 당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당 주석은 모택동이 1937년부터 1976년까지 재임하였고, 그 뒤를 화국봉이 승계하고 1981년 사임하였다. 당시 총서기 호요방(胡耀邦, Hu Yaobang)이 공석을 겸임하였다. 1989년 천안문사태로 총서기 조자양(趙紫陽, Zhao ziyang)이 실각하자 강택민이 승계하였고, 2007년 이후 제17기는 호금도가 담임하고 있다.

총서기의 권한은 중앙정치국 회의와 정치국 상무위 회의를 소집하고, 중앙서기처의 업무를 주재한다.

중앙정치국 및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중국 권력의 핵심기구이다. 중앙정치국의 기능은 중앙위 폐회기간 중 중앙위의 권한을 행사하고, 국가와 당에 관계되는 모든 정책을 최종 결정하며, 국가 · 당 · 군의 고위 간부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다. 특히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신중국의 최고 통치집단으로, 중국정치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최고위 지도층이다.

정치국의 구성원으로 제15기(1997년 10월 선출) 정치국 위원은 22명(정치국 상무위원 7명 포함) 후보위원 2명 등 총 24명이고, 제16기(2002년 11월 선출) 정치국 위원은 24명(정치국 상무위원 9명 포함) 후보위원은 1명 등 총 25명이다. 제17기(2007년 10월 선출) 정치국 위원은 25명(정치국 상무위원 9명 포함)이다.

중앙서기처

중앙서기처(中央書記處)의 기능은 정치국과 정치국 상무위의 지도 하에 당 중앙의 일상 업무를 관장하는 일선 행정기구이고, 정책결정기구는 아니다. 구성원은 중앙정치국 상무위의 지명을 통해 중전회에서 선출된다. 제17기 중앙서기처 서기는 6명이다.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준독립적인 지방 조직을 설치할 수 있다. 중앙기율검사위의 기능은 중앙위의 지도 하에 당원의 부패와 비행을 척결하는 등, 당풍(黨風)을 유지하고 당의 노선 · 방침 · 정책과 결의의 집행을 감독한다. 현재의 구성원으로는 서기 1명, 부서기 8명, 상무위원 19명이 있다.

중앙군사위원회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기능은 군대내 당의 활동을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하며, 산하 기구인 인민해방군 총정치부(總政治部)를 통해 군 내부에서의 정치공작을 책임진다.

모택동은 1935년부터 1976년까지 당 중앙위 · 중앙군사위의 주석을 겸임하였고, 그 이후 화국봉이 계승하였다. 1981년 6월 11기 6중전회에서 등소평이 피선되었고, 1989년 11월 13기 5중전회에서 계승하여 2002년 11월 16기까지 강택민이 연임하였다. 2004년 9월 당 16기 4중전회에서 호금도가 선출되었다. 2013년 3월부터 습근평이 중앙위원회 총서기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중앙인민공화국의 제 7대 주석을 겸임하고 있다. 현재 당 중앙군사위의 구성원은 주석 1명, 부주석 2명, 위원 8명으로 당 중앙위에서 선출한다.

군 조직

중국 군사력의 조직은 인민해방군(人民解放軍), 인민무장경찰부대(人民武裝警察部隊), 민병(民兵)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민해방군

기원

중국의 정규군으로, 1927년 8월 1일 강서성(江西省) 남창시(南昌市)에 주둔하던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 중국국민당의 군대)의 일부가 중국공산당의 지도 하에 무장 폭동하여 중국공산당군(中國共産黨軍)을 창건하였다. 1927년부터 1937년까지 국공내전 시기에 중국공농홍군(中國工農紅軍)으로 개칭하고, 당시 30만 명의 병력으로 성장하였다. 1937년부터 1945년까지 항일전쟁 시기에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 휘하에 편입되어, 120만 명의 팔로군(八路軍)과 신사군(新四軍)으로 성장하였다. 1945년부터 1949년까지 국공내전 중 1947년 9월 중국인민해방군(中國人民解放軍)으로 개칭하고, 1949년 10월 건국 직전 460만 대군으로 증강되었다.

역할

신중국에서 정치와 군의 관계는 불가분으로,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모택동은 주장한다. 1949년 중국공산당의 승리는 인민해방군에 의한 군사적 승리에서 비롯되었다. 문화혁명 시기에 당과 정치 기관이 마비된 공백을 군이 보충함으로써, 군의 정치적 역할은 현저히 증대되었다.

문화혁명 이후 당의 재건에 따라, 군의 정치적 역할이 다소 감소되었으나, 군대와 군 지도자는 정치 · 사회 각 분야의 비군사적 영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여전히 발휘하였다. 특히 정치 권력이 위기에 직면할 경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실례로는 1989년 6월 천안문사태의 진압이 있었다.

성격

인민해방군은 중국공산당의 당군(黨軍, 당의 군대)으로 발족되었던 특성을 계속 유지하여, 공산정권 수립 이후에도 당중앙군사위원회가 실질적인 군권을 장악하였다. 1982년 신헌법은 국가중앙군사위원회를 신설하여, 표면적으로는 군의 통수권이 당에서 국가로 이전하는 당군에서 국군으로의 성격 변화 과정을 거쳤지만, 실질적으로는 당중앙군사위와 국가중앙군사위는 인적 구성이 동일하고, 오히려 당중앙군사위의 권력이 우위에 있다.

지휘체계

헌법의 규정에 의하면 국가중앙군사위는 군의 최고 정책결정과 지휘기관으로, 국무원 산하에 국방부 · 국방과학기술위원회 등 군사와 관련된 국가 행정기관을 설치하고 있다. 인민해방군 지휘체계의 중추는 국가중앙군사위으로, 4대 막료기구인 4총부(總部) 즉 총참모부(總參謀部), 총정치부(總政治部), 총후근부(總後勤部), 총장비부(總裝備部)를 통해 각 대군구(大軍區) · 해군 · 공군 · 제2포병 등을 지휘한다.

총참모부는 국가중앙군사위의 지도 하에 있는 전군의 최고 지휘기관이다. 전군의 작전계획, 병력배치, 최고 통수권자의 명령 하달, 작전 운영, 교육훈련, 장비의 편성, 소집동원, 각 군구(軍區) · 군종(軍種) · 병종(兵種)의 조정 등 업무를 관장한다.

총정치부는 당중앙군사위의 지도 하에 군내부 당의 사상 · 정치공작을 관장하는 최고기관이다. 휘하에 문화부와 선전부를 설치하고, 군에 대한 사상 · 정치적 통제 역할을 수행하고, 군 내부에서의 당의 조직 · 선전 · 교육 · 문화 · 보안 업무를 담당한다.

총후근부는 국가중앙군사위의 지도 하에 전군의 후방 병참 업무를 관리하는 최고 지도기관이다. 군수물자 보급, 시설보수, 수송, 병기생산과 관리 등의 업무 담당한다.

총장비부는 전군의 장비 업무에 대한 조직 · 지도를 책임지는 영도기관으로, 종합설계와 장비 과학연구 구매 등을 담당한다.

군대조직

인민해방군 조직은 육군, 해군, 공군, 제2포병 등 4개 군종으로 편성되어 있다.

육군의 병종(兵種)은 보병 · 포병 · 장갑병 · 공정병 · 방화학병 등으로 구성되고, 편제는 군(軍: 군단), 사(師: 사단)를 기본적 전술 단위로 하여, 단(團: 연대), 영(營: 대대), 연(連: 중대), 배(排: 소대), 반(班: 분대) 등으로 조직되어 있다. 군구의 수비대와 국경 및 지방부대도 육군에 속한다.

해군은 국가중앙군사위의 지도 하에 독립적으로 작전임무를 수행하며, 휘하에 사령부, 정치부, 후근부, 장비전술부, 항공병부를 설치하고 있다. 현재 중국 해군은 북해함대(北海艦隊), 동해함대(東海艦隊), 남해함대(南海艦隊) 등 3개 함대로 조직되어 있다.

공군은 국가중앙군사위의 지도 하에 독립적 작전임무를 수행하며, 휘하에 사령부, 정치부, 후근부, 항공공정부를 설치하고 있다. 공군주요 부대로는 항공(航空)부대, 방공(防空)부대, 공강(空降, 공수)부대 등이 있다.

제2포병은 국가중앙군사위의 수직적 지도를 받는 특수부대이다. 지대지(地對地)전략 핵무기 사용에 대한 조직 체계를 지휘하며, 중거리 · 원거리 · 대륙간 탄도부대 및 공공 · 정찰 · 기상 · 통역 · 수송 등 전문 기술부대로 조직되어 있다.

지방편제

인민해방군의 지역편제는 7개 대군구(大軍區), 29개 성급 군구로 구성되어 있다.

대군구는 관할 구역에서 총부 업무를 대행하고, 소재지의 육 · 해 · 공군의 합동작전을 통일적으로 지휘하며, 군구에는 사령부, 정치부, 후근부를 설치한다. 7개 대군구는 심양군구, 북경군구, 제남군구, 남경군구, 광주군구, 난주군구, 성도군구이다.

성군구(省軍區)와 군분구(軍分區)는 군대계통에 예속되는 동시에 지방단위의 군사공작부문에 소속된다.

현(縣) · 시(市) 인민무장부(人民武裝部)는 소재지 군(분)구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고, 성군구의 사령부는 소속된 대군구의 지시를 받고 보고를 하며, 성군구와 대도시 경비구(警備區)의 사령원(司令員)은 치안 유지에 대한 책임을 지는 등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각 군구에 사령원과 정치위원을 두고, 당이 군을 지배하는 중국 정치 특성에 따라 정치위원이 사령원보다 우위를 차지한다.

인민무장경찰부대(약칭 武警)

1983년 4월 무경총부가 공식적으로 창설되었고 총병력은 약 100만 명으로, 원래는 치안 담당 부대이다. 총부(總部)는 국무원 공안부 산하 소속으로, 공안부와 중앙군사위원회의 복수 지휘 아래에 있다. 무경의 조직은 총대(總隊), 지대(支隊), 대대 및 중대가 있고, 유사시에는 정규군 부대로 즉시 전환될 수 있도록 무경은 훈련한다.

민병

평소에는 생산에 종사하는 군중 무장조직으로 인민해방군의 예비역 부대이다. 항일전쟁 시기에는 팔로군을 돕는 지방 농민의 자위조직에서 발전하였다. 1958년 8월 이후 인민공사의 무장조직으로 구성되어, 당시 병력 약 2억 5천 만 명이었다. 현재 민병대는 비직장이나 부락별로 자위대 형태로 유지되고 있다.

병역제도

건국 초기에는 혁명 시기의 지원병제도를 답습하고, 1955년 제1기 전인대 제2차회의 이후 의무병제도를 병용 실시하였다. 1984년 5월 제6기 전인대 제2차 회의에서 새로운 병역법을 통과하여, 의무병을 위주로 한 의무병 · 지원병 결합제도 및 민병과 예비역을 결합한 병역제를 답변확정하였다. 중국 국민은 병역에 복무하고, 민병조직에 참가하는 법률적 의무를 가지고 있다.

의무병의 복무연한은 육군 3년, 공군 · 해군 · 육군 특종기술부대 4년, 해군 함정부대 · 육군 선박부대 5년이고, 지원병의 복무연한은 일반적으로 10∼25년에 40세를 초과하지 않으나, 군의 필요나 개인 희망 경우에는 연장이 가능하다.

경제

신중국의 경제정책은 1980년대를 전후로 하여 개혁 · 개방정책의 이전과 이후로 대별할 수 있다. 개혁 · 개방 이전의 경제는 대체로 사회주의 계획경제(計劃經濟)를 위주로 운용되었고, 개혁 · 개방 이후의 경제는 사회주의 시장경제(市場經濟)를 위주로 운용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중국 경제정책의 전반적인 이해를 위해, 먼저 사회주의 경제이론으로서의 계획경제를 살펴보고, 등소평의 등장과 함께 제시된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내용을 살펴본다.

사회주의 경제이론

마르크스(K. Marx)는 1840년대 영국의 경제 · 사회를 대상으로 하여 자본주의의 기원과 생성 및 변천을 분석하고 자본주의의 폐단점을 강조하며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제도로서 사회주의 이론을 주장하였다. 경제사상으로서의 사회주의에 대해 서방의 선진 공업국가에서는 관심도 가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부정하였다. 그러나 맑스주의가 제정 러시아를 붕괴시켰던 볼셰비키 10월 혁명의 이론적 지주로서 사회주의 소련 정권의 수립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자, 동유럽과 중국 등에서는 사회 혁명 이론으로 신봉되었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분석하면서 제기한 경제학설은 생산수단 소유제와 분배제도의 개선을 주장하였고, 특히 강조한 점은 자본주의 경제의 경쟁과 무정부상태를 ‘계획적이고 비례적인 발전 규율(The Law of Planned Proportional Development)’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산당 정권이 성립되면 계획경제를 신봉하는 것이 사회주의 국가의 유일한 정책 노선이 되었다.

중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1949년 중국공산당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소련식 계획경제를 도입하였고, 1953년부터는 5개년 경제개발 계획을 수립하여 경제 발전에 운용하였다. 소련 볼셰비키의 혁명 이론(볼셰비즘)은 당시 러시아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 적용하기 위한 레닌의 맑스주의에 대한 해석을 기초로 한 것이며,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사상이 러시아적 상황에 맞추어 급진적으로 변용된 것이다. 중국도 마찬가지로 마르크스 · 레닌주의의 경제이론을 도입하고, 경제 발전의 실패와 좌절 등을 경험하면서, 당시 신중국의 상황에 적합한 경제 발전 정책을 학습해 나간다.

계획경제 정책의 실시

1979년까지의 모택동 시기에 중국에서 실행되었던 경제 발전 정책은 소련 모델(Soviet Model)를 적용한 계획경제 방식이었다. 당시 소련의 경제계획과 기업관리체제는 전반적인 국민경제를 일종의 가계경제(家計經濟)로 간주하고, 가계경제의 주요 결정자인 가장(家長)과 같은 역할을 국가가 담당하면서 수요에 근거하여 조직적인 생산을 수행하였다. 때문에 모든 기업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생산하고, 모든 생산물을 국가에 헌납하는 경제 활동을 담당하였다. 또한 모든 원자재도 국가가 제공하게 되고, 기업은 어떤 자주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와 같은 고도의 중앙집중적 계획경제 제도는 제도적으로 공유공영 · 중앙계획 · 명령지도 · 고정가격제도를 실시하며, 그리고 정책적으로 고축적 · 고성장 · 저소비 · 저임금 · 중공업 우선 정책을 실시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경제체제는 제도와 정책적으로 소비자 주권은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 단지 계획 자주권만이 강조되는 형태로서, 생산력이 낙후된 국가에서의 실현에는 강제성과 방대한 행정체계의 수립을 수반해야 되는 선천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당시 중국으로서는 정치 · 외교 · 국방 등의 관계에서 취한 오로지 소련 일변도의 경향으로 인해, 당시 중국보다 선진적인 소련의 경제정책 모델의 답변확정이 경제 분야에서도 선택할 수 있는 최선책이었다.

1949년부터 1952년까지 토지개혁과 사회주의 개조 운동을 거쳐 국가 체제를 정비한 신중국은 1953년 1차 5개년 경제계획부터 소위 소련 모델을 적용하는 중공업 우선 발전의 불균형 발전전략을 답변확정하게 된다. 1979년까지 실시된 중국 계획경제 정책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과도기 총노선(過渡期 總路線, 1953 · 1957)

중국은 사회주의 3대 개조(농업 · 수공업 · 자본주의 상공업의 사회주의 개조)를 완성하고, 중공업 우선 발전을 추진하여 국가 사회주의 공업화의 기초를 달성하고자 하였다. 또한 중국이 농업국가인 점을 감안하여 농업의 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여 집단화 작업을 병행하였다. 초기에는 토지 개혁이 성공적으로 실시되고, 농업 · 공업 생산량이 1950년에 비해 약 70% 성장하는 등 상당한 효과가 있었으나, 후기에 이르러 중공업 정책의 무리한 추진으로 인해 경제 성장에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 1958 · 1960)

과도기 총노선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1958년 중국은 사회주의건설 총노선을 제기하며 모택동 방식의 대약진 운동을 전개하였다. 대약진 운동의 기본 목표는 맹목적인 생산 대약진과 생산관계에 있어서의 일대이공(一大二公)을 추구하였다. 일대이공은 인민공사(人民公社) 체제의 기본 특징으로, 즉 대(大)는 인민공사의 규모가 크고 사람이 많고 토지가 많아 대규모적인 생산과 건설이 행해지는 것을 말하고, 공(公)은 사회주의화 · 집단 소유화를 말한다. 이들 조치로 철강 생산을 강령으로 하는 주요 전략을 택하였고, 농촌에서는 인민공사 운동이 전개되어 농촌의 집단화를 통한 정사합일(政社合一) 체제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과도한 대약진 운동은 정책의 맹목성과 자연 재해로 인해 실패하였다. 특히 자본과 기술이 부재한 상태에서 노동력과 충성심만으로 급진적 경제 건설을 추진하려는 대약진 운동은 대내적 산업 기반의 허약함과 대외적 소련 지원의 차단 등으로 인해 더욱 좌초를 당하였다.

조정정책(調整政策, 1961 · 1965)

대약진 운동이 가져온 엄청난 실패는 중국 지도부로 하여금 ‘조정(調整) · 공고(鞏固) · 충실(充實) · 제고(提高)’라는 8자(字) 방침의 개량 전략을 실시하게 하였다. 조정 시기에 국내 경제의 수습을 위해 유소기(劉少奇) · 등소평이 전면에 나서 급진적 노선과 인민공사의 평균주의를 극복하는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당시의 주요 조치로는 농업 중시 · 국민생활의 향샹을 위한 각종 장려제도의 실시 등이 있었는데, 이들 조치로 인하여 중국 경제는 급속한 회복을 하게 된다. 그러나 권력의 제2선으로 후퇴한 모택동은 유소기와 등소평을 주자파(走資派: 자본주의 노선을 추종하는 자)로 비판하며, 처절한 정치권력 투쟁을 진행함으로써, 회복되어 가던 경제 상황을 마비시킨다. 이런 정치적 국면이 바로 모택동의 급진파와 유소기의 온건파 사이에 발생한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다.

문화대혁명의 좌경 노선(左傾路線, 1966 · 1976)

10년 동안의 동란으로 역사적 평가를 받는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전체적으로 전쟁불가피론(戰爭不可避論)과 3선건설(三線建設)로 대표되는 전략이 보여주듯이 경제에 관해서는 거의 정체상태이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이미 실패한 대약진 시기의 각종 정책들을 보다 더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기 때문에, 중국의 국민경제는 더욱 커다란 피해를 입게 되었다. 문화대혁명은 등소평이 집권한 이후 중국을 개혁 · 개방으로 인도하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양약진(洋躍進) 시기의 정책(1977 · 1979)

1976년 극좌파 4인방이 몰락하고 10년 내란이 종료된 후 모택동을 승계한 화국봉(華國鋒)은 또다시 신속한 발전을 기도하는 급진정책을 입안하였다. 즉 서양의 자금과 기술을 도입하여 크게 도약하고자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 때문에 이를 양약진이라고 한다. ‘23년 계획’이라고도 불리는 양약진 정책은 2000년에 초강대국이 되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화국봉의 권력 기반이 취약한 관계로 인하여 효과적인 정책 집행이 어려웠으며, 그 모험적인 정책은 결국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는, 문화대혁명 기간과 그 이전의 좌경적 착오를 수정하고 ‘조정(調整) · 개혁(改革) · 정돈(整頓) · 제고(提高)’라는 신8자방침을 제기하여, 근본적인 경제이론의 전환을 시도하면서, 중국 경제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개혁 · 개방 이전의 중국 경제는 계획경제 자체가 계획에 의한 생산활동에 참여하는 원인으로 인하여, 변동하는 각종 경제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기 어려운 점 그리고 방대한 행정계통이 경제를 관리할 수밖에 없는 약점 이외에도, 중국 자체의 정확한 경제정책 방침의 미흡 및 계속되는 시행착오에서 발생하는 심각한 좌우파 투쟁 등으로 인해서, 상당히 낙후한 상태로 머물러 있었다.

이상 중국 경제정책의 변천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과도기 총노선 시기(1953∼1957)는 불균형 발전의 소련 모델을 적용하고, ② 대약진 운동 시기(1958∼1960)는 모택동의 좌경적 모험 노선이고, ③ 1차 조정정책 시기(1961∼1965)는 후르시초프 모델의 수정주의 노선이고, ④ 문화대혁명 초기(1966∼1970)에는 모택동 노선이 부활하고, ⑤ 2차 조정정책 시기(1971∼1975)는 수정주의와 모택동 노선의 종합이고, ⑥ 문화대혁명 말기(1975∼1976)는 4인방의 극좌 노선이고, ⑦ 양약진 시기(1977∼1979)는 3차 조정정책 시기로 수정주의가 부활하였다.

등소평 경제이론

등소평 경제이론의 진수는 중국적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이다.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를 통해 신중국의 지도자로 재등장한 등소평은 10년 동란의 문화대혁명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 생산력과 인민 대중의 창조력을 발전시키고, 중국공산당과 공산주의의 영도적 지위를 확보하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았다.

등소평은 문혁을 극복하면서 중국 국가 발전의 최대 목표인 4개 현대화(농업 · 공업 · 과학기술 · 국방의 현대화)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선 과거 약 30년 동안 중국을 통제해 왔던 모택동사상의 속박을 풀기 위한 정지작업을 시작하였다.

즉 화국봉 노선의 양개범시론(兩個凡是論)과 논쟁을 개시하였다. 등소평은 화국봉 노선에 반해서 ‘실천시검험진리적유일표준(實踐是檢驗眞理的唯一標準: 무슨 정책이든 실천해서 성과를 거두면 그것이 바로 진리)’이라는 실사구시적 실용주의 노선을 제창한다. 등소평은 모택동 말기의 개인적 착오와 모택동사상의 차이를 명백히 구별하며, 자신의 노선은 모택동사상을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등소평은 모택동사상을 기초로 한 중국공산주의 혁명이 당시 중국의 현실과 마르크스 · 레닌주의를 결합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듯이, 현재 중국의 사회주의 건설도 현재의 국가 정세에 의거해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사회주의란 어떤 고정된 모델이 아니며 각국의 실제 상황과 마르크스 · 레닌주의의 보편 진리가 결합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현대 중국의 적용은 바로 ‘중국적 사회주의’이다. 중국적 사회주의는 곧 마르크스 · 레닌주의의 보편적 진리와 중국적 실제 상황의 결합체이고, 이것이 현재 중국의 현대화 노선을 설정하는 기초를 구성하고 있으며, 중국적 사회주의현대화 건설 이론은 등소평이론으로 표현되고 있다.

신중국이 1980년대 이래로 추진한 중국 현대화 건설의 기조에는 등소평의 현대화 사상이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그 구체적 현상은 개혁 · 개방의 천명 · 1992년 남순강화(南巡講話) · 중국공산당 14전대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론 등 일련의 조치에서 나타나고 있다.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형성

1978년 개혁 · 개방 정책 실시 이후, 중국 지도층은 경제 발전의 속도와 범위의 문제에 대해 대립과 갈등 관계가 지속되었다. 종전의 정책 하에서는 행정적 명령을 통한 계획된 범위 내에서 모든 경제 활동을 고정시키고 시장의 중요성을 무시하였다. 즉 계획경제는 수요와 공급의 차질을 초래하여 생산품의 공급 부족 혹은 과잉상태를 야기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 사회주의와 상품경제를 상호 대립되고 배척되는 것으로 간주하였던 종래의 관념을 타파하고, 사회주의는 본래 공유제(公有制)를 기초한 계획적 상품경제라는 새로운 계획적 상품경제론이 제기되었다.

소위 계획적 상품경제란 생산부문들이 상대적으로 독립된 경제 주체이다. 상대적 독립이란 사회주의국가가 사회 전체의 경제 발전의 방향을 파악하고 거시적인 측면에서 결정을 내리고 계획을 작성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곧 사회의 생산은 계획만으로 조정되는 것이 아니라, 계획 주도 하의 시장원리에 의한 조절도 충분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1992년 10월 중국공산당 제1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강택민(江澤民, Jiang Zemin) 총서기는 정치공작 보고를 통해 13전대에서 답변확정된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에 입각한 중국적 사회주의 현대화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의 확립을 공식적으로 제안하였다. 즉 그 동안의 개혁 · 개방 과정 중에서 나타난 각종 자본주의적 요소들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을 제기한 것이다.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이 중국 경제의 이론으로 정립되기까지에는 다음과 같은 이론 형성 과정이 있었다.

주보론(主補論) 시기

1979년 2월 이선념(李先念,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 부주석 겸 국무원 부총리)은 “계획경제와 시장경제를 결합하여, 계획경제를 위주로 하고, 시장경제를 보조 수단으로 하는 체제를 수립하자”고 주장하면서, ‘시장경제’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1979년 3월 진운(陳雲,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은 ‘계획과 시장 문제’라는 담화 중에, “전체 사회주의시기의 경제는 2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계획경제 부분이며, 다른 하나는 시장조절 부분이다. 계획경제 부분은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것이며, 시장조절 부분은 종속적이고 부차적인 것이지만 필수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중국공산당의 문헌 중에서는 최초로 시장조절이라는 개념을 제기하였다.

1979년 11월 등소평은 “우리는 계획경제를 위주로 하여 시장경제를 결합시켰다. 그러나 이것도 사회주의 경제이다. 시장경제는 자본주의의 전유물이 아니며, 사회주의도 시장경제를 실행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중국 지도부는 시장경제의 필요성에 대해 재인식하는 의견을 전개했지만, 여전히 중국 경제체제는 계획경제를 위주로 하는 체제라고 강조하였다. 이런 상황의 인식 하에서 1982년 9월 12전대는 계획경제를 위주로 하고, 시장조절을 보충으로 하는 주보론(主補論) 체제를 공식으로 천명하였다.

내재통일론 시기

제한적이나마 시장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 중국은 기존의 계획 생산에 의한 ‘생산품’이 아닌 시장의 필요에 의한 ‘상품’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87년 13전대에서는 “사회주의의 계획적 상품경제 체제는 반드시 ‘계획’과 ‘시장’이 내재적으로 통일된 체제이어야 한다”라고 천명하였다.

계획과 시장의 내재적인 결합이라는 내재통일론(內在統一論)의 제기는 계획과 시장을 둘러싸고 장기간 지속되었던 이원구조적 논쟁을 종식시켰다.

성사성자(姓社姓資) 논쟁 시기

1989년 6 · 4사건으로 조자양(趙紫陽, 당시 중국공산당 총서기)은 보수파에 의해 실각되고, 보수 성향의 중국 지도부는 ‘시장경제’를 ‘자산계급 자유화’ · ‘화평연변(和平演變, 평화적 정권전복)’과 동일시하며, 공유제 경제의 기초를 전복하는 개념으로 간주하였다. 이에 따라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기준을 어디에 맞출 것인가 하는 중국 경제체제의 경향에 관한 논쟁(즉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기준에 관한 성사성자 논쟁)이 가열되었다.

1990년 12월 등소평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구분은 ‘계획’이나 ‘시장’ 성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에도 시장이 있으며, 자본주의에도 계획에 의한 통제가 있다”, “시장경제를 약간 실행한다고 해서,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며, 계획경제와 시장조절은 모두 필요한 것이다. 시장에 어두우면 낙후를 감수해야 하며 세계 정보에도 어둡게 된다”라는 기존의 의견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천안문 사건의 후유증으로 인해 등소평의 의견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 했다.

남순강화(南巡講話) 시기

천안문사건 이후, 중국 경제는 침체기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등소평은 “제3의 혁명”을 외치며, 중국 남부지방을 시찰하여 개혁 · 개방을 가일층 고취하고자 시도하였다. 등소평은 1992년 1월 18일부터 2월 21일까지 무한(武漢) · 심천(深圳) · 주해(珠海) · 상해(上海) 등지를 방문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11기 3중전회 이후의 노선 · 방침을 관철하고, 1개 중심(一個中心: 경제 건설을 중심으로 함) · 양개 기본점(兩個基本点: 개혁 · 개방 노선과 4개 기본노선을 견지함)을 견지한다. 성사성자의 새로운 사회주의의 기준에 관한 논쟁에 대해, “사회주의 생산력 발전에 유리한가 여부가 판단 기준이다”, 즉 ‘계획’이든 ‘시장’이든 간에 경제 발전에 유리하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 수단임을 강조하였다. 향후 현대화 과정에 있어, 일부 지역의 경제가 우선 발달하고 일부 주민의 경제가 우선 부유해지는 선부론(先富論)을 제기하며, 모택동 방식의 평등주의를 타파하였다.

이와 같이 시장의 역할을 긍정하고 기존의 경제 발전의 성과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려는 남순강화의 주요 정신은 14전대에서 공식적으로 이념화되었고, 중국 경제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시장경제를 정착시켰다. 당시의 국제 환경도 중국이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을 형성하는 데 커다란 배경이 되었지만, 이와 더불어 중국이 시장경제 노선을 답변확정한 국내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92년 초 등소평이 남순강화에서 강조한 개혁 · 개방정책을 지지하기 위함이다. 등소평은 남순강화에서 “계획경제는 사회주의의 전유물이 아니고 자본주의 경제에도 계획적 요소가 있으며, 시장경제는 자본주의의 전유물이 아니고 사회주의도 시장적 요소가 있다. 계획과 시장은 경제 수단일 뿐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종래 계획과 시장 관계에 대한 사상적 속박을 제거하는 작용을 하였다. 당시 10여 년에 걸친 개혁과 개방의 경험이 있었다. 개혁과 함께 진행된 연해지역의 개방으로 인하여 경제가 급성장하게 됨으로써, 시장의 기능이 충분히 발휘되는 지역에서는 경제 활력도 비교적 강하고 발전 상태도 비교적 양호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자본주의도 귀감이 될 만한 요소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자본주의에 비해 사회주의의 우세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본주의 국가를 포함한 선진국들의 발달된 경영방식과 관리방법을 받아 들여 사회주의의 발전을 위해 이용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사상을 해방하고 개혁과 개방을 가속화시켜야 비로소 사회주의제도를 공고히 하고 공산당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 개혁과 개방 이래로 시장의 범위가 점차 확대되고 상품의 가격이 대부분 개방되었으며, 계획이 직접 관리하는 영역이 점차 줄어들었다.

역사적 관계

선사시대부터 중국 대륙과의 관련이 깊었으며, 특히 위만(衛滿)의 침입과 한무제(漢武帝)의 침입으로 중국과의 접촉이 많아지고,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樂浪郡)에는 중국식 문화가 이식되었다. 중국인들은 고조선의 여러 종족을 포함하여 중국의 동쪽에 있던 민족을 동이(東夷)라고 불렀는데, 중국 선진(先秦)의 문헌에 동이와의 관계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조선의 여러 민족도 일찍부터 중국과 접촉하고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또한 고대의 중국인은 동이에 대하여 다른 이민족보다 문화의 수준이 높다고 생각하여 친근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리하여 공자도 『논어(論語)』에서 “동이가 있는 곳에 살겠다(欲居九夷)”고 하였고, 『맹자(孟子)』에서는 중국의 전설적인 현군 순(舜)도 동이의 사람이라고 하였다.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이 중국의 기록에 처음 보이는 것은 전국시대(기원전 475∼기원전 221)에 이루어진 『전국책(戰國策)』 · 『관자(管子)』 등에서 이며, 이들 기록에 따르면 조선은 전국시대 연(燕)나라의 동쪽에 있고,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을 산출하여 중국에서 그것을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기원전 11세기 말 중국의 은나라가 망한 뒤 주나라의 무왕(武王)이 은나라 왕실의 친척인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했다고 하여 기자조선이라고 한다. 그런데 기자가 봉해졌다는 최초의 기록은 전한(前漢) 때의 문헌인 『상서대전(尙書大傳)』과 『사기(史記)』에 보이는 것으로, 이것은 은나라가 망하고 800여 년이 지난 뒤의 기록이며, ‘조선’이라는 명칭도 은나라가 망한 뒤 적어도 600년 이후의 기록에 보이기 때문에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것은 후대에 조작된 전설일 가능성이 많다.

전한 초기에 한의 제후국인 연나라 사람 위만이 조선에 와서 기자조선을 멸망시키고 기원전 194년에 위만조선을 세웠다. 그가 멸망시킨 나라가 기자조선이라는 것은 믿기 어려우나 새로 나라를 세운 것은 사실이며, 위만이 조선에 올 때 상투를 틀고 있었기 때문에 그도 동이 계통의 사람일 것이라는 설이 있다.

위만조선은 80여 년 간 계속되다가 한무제의 침입으로 멸망하였으며, 한무제는 이곳에 4군(郡)을 설치하였다. 조선 땅에 두었던 4군은 조선의 세력에 굴복하여 설치된 지 20여 년 만에 4군 중 2군이 폐지되고, 현도군(玄菟郡)은 쫓겨서 서북으로 옮겨갔으며, 한반도 안에는 겨우 낙랑군만이 그 서북쪽에 남았으나 4세기 초에 모두 소멸되고 말았다.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삼국이 고대국가로 발전한 시기는 중국 대륙에서 후한 이후 삼국(三國) · 남북조(南北朝)의 분열기를 거쳐 통일제국인 수 · 당에 이르는 시기에 해당한다. 고구려는 이미 기원전 1세기에 국력이 성장하여 중국을 자주 괴롭혔다. 그러나 부여는 중국과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다.

부여는 삼국보다 일찍이 국가의 체제를 정비하고 중국과 접하고 있어서 기원전 1세기의 기록인 『사기(史記)』에 그 이름이 보이며, 49년에는 부여 왕이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에게 사신을 보낸 일이 있다. 또한 111년과 167년 부여 왕은 낙랑군과 현도군을 공격한 일도 있다. 하지만 중국과는 대체로 우호적이었고, 122년고구려가 현도성을 포위했을 때는 원병으로 이를 구원하기도 하였다. 200년경 부여의 위구태(尉仇台)는 공손탁(公孫度)과 혼인관계를 맺고, 244년과 245년위나라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칠 때 위나라 군사를 환영하고 군량을 공급하였다. 그러나 3세기 말에는 서쪽으로부터 선비족(鮮卑族) 출신 모용씨(慕容氏)의 침략을 받고, 이어서 남으로는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4세기 말에는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5세기에 한반도 및 요동 · 만주지역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고, 삼국의 주도적 위치를 유지하고 있던 고구려는 6세기 후반에 들면서 중국 대륙을 통일한 수나라와 충돌하게 되었다.

일찍이 고구려의 장수왕은 당시 중국이 남북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을 이용하여 북조의 북위(北魏) · 동위(東魏) · 북제(北齊) · 북주(北周) 등과 차례로 통교하는 한편, 바다를 통해 남조의 동진(東晉) · 송 · 제(齊) · 양(梁) · 진(陳) 등에도 사신을 보내어 친선을 도모함으로써 중국 세력을 견제하고 북방으로부터의 위협을 예방하였다.

그러나 수나라가 남북조를 통일하고(589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뒤 수나라와 직접적인 외교관계를 맺음으로써 고구려와 중국 사이의 우호관계는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였다.

한편 4세기 후반에 그 세력이 커져 남조의 동진과 우호적인 관계를 통하여 북의 고구려를 견제하던 백제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표면상 친화를 유지하면서 내용적으로는 이를 경계하고 왜(倭)와 연결하려 하였다. 이와 같이 고구려와 백제의 세력이 수나라에 대항하여 연결되는 반면, 신라는 오히려 수나라에 접근하였다. 그리하여 수나라와 그 뒤를 이은 당나라의 여러 차례에 걸친 고구려 침입이 시작되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입하기에 앞서 고구려는 598년(영양왕 9)에 말갈의 군사를 동원하여 요서(遼西)지방을 공격하였다. 이에 수나라 문제(文帝)는 30만의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큰 타격을 입고 철수하였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번번이 실패하여 마침내 이로 말미암아 수나라는 망하고 당나라가 일어났다.

당나라 고조(高祖) 때는 고구려와의 화친을 꾀하여 서로 사신을 파견하고 포로를 교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태종(太宗)은 세계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으로 주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고, 고구려에도 압력을 가하였다. 이에 대비하여 고구려는 16년간에 걸쳐 요동(遼東)지방에 1,000리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쌓았다. 644년 드디어 태종은 오랜 준비 끝에 요동에 침략군을 보낸 후 이듬해에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여 요동성을 함락시켰으나, 50만 대군으로 2개월이 지나도록 작은 산성인 안시성(安市城)을 굴복시키지 못한 채 결국 철군하고 말았다. 2년 뒤 태종은 다시 고구려를 침입할 계획이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장기전을 택하기로 하였다.

그 뒤 당나라 고종(高宗)은 거듭 고구려를 공격하다가, 663년 드디어 신라와 연합해서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어서 668년에는 고구려도 멸망시켰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 9도독부(都督府)를 두었으며, 또 평양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었는데, 그것은 고구려의 옛 땅뿐만 아니라 백제의 땅과 신라까지 그 지배하에 두기 위한 것이었다. 고구려가 망한 직후부터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는 고구려의 옛 땅을 지배하기 위한 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신라는 그것을 용인하지 않아 고구려가 망한 지 8년이 지난 676년에 당나라 군사를 한강 유역에서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지역을 경계로 하는 한반도의 통일을 이루었다.

삼국시대 한 · 중 간의 문화관계를 보면,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한자문화(漢字文化)가 계속하여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한자 및 유교 문화의 보급은 삼국의 가족제도와 국가체제에 있어 유교적 이념과 제도 그리고 교육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와 함께 중국에서 전래된 불교는 토속신앙과 결부되어 호국신앙으로서의 기능이 매우 컸으며, 불교미술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문화는 우리 문화의 유산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고대의 중국은 이민족의 내왕과 문물교류에서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많은 승려와 학자가 중국에 가서 불교와 유학을 배우고 그 경전을 가져왔으며, 최치원(崔致遠)과 같이 그곳에 가서 수학한 후 과거에 합격하고 문필로 활약한 인물도 많았다. 또 중국의 산둥반도와 그 밖의 지역에는 신라인의 거류지인 신라방(新羅坊)이 있었고, 그들 거류민은 오늘날의 치외법권과 같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진 · 한의 통일 이후 중국의 이민족에 대한 조공관계(朝貢關係)는 서서히 제도화되어, 처음의 삼국 대 중국 관계는 정식 조공이 아니라 입조(入朝)에 불과하던 것이 남북조시대에 이르러 정기적인 조공관계가 성립되었으며, 오랜 세월을 거쳐 명 · 청시대에 완비되었다.

고려가 건국했을 때 중국은 오대(五代)의 혼란기였다. 당나라가 망한(907년) 뒤 후량(後梁)이 섰으나 그 또한 얼마 되지 않아 망하고(923), 이어서 후당(後唐) · 후진(後晋) · 후한(後漢) · 후주(後周) 등 모두 5왕조가 차례로 교체되었으며, 주변 지역에서도 10국이 흥망을 거듭하는 혼란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들 여러 나라와 고려는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문물의 교류와 조공을 통한 우호적 접촉을 유지해 갔다. 고려는 정치적 지원이나 물자의 교역 및 선진 문화의 수입 등을 목적으로 5대 제국(諸國)과 교섭을 계속하였으며, 5대 제국은 고려로부터 전적(典籍)을 얻어 가는 등 문물 교류를 통하여 이익을 보는 면이 많았다.

이러한 관계는 후주를 이은 송나라와의 교섭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때는 북방의 거란족 · 여진족 · 몽고족이 차례로 일어나 큰 세력을 형성함으로써 그 관계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매우 어렵고도 복잡하였다. 송나라와 고려 간에 국교가 처음 열린 것은 962년(광종 13)이었다. 두 나라는 오랫동안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고려는 송에 대하여 친선외교를 폄으로써 중간에 끼어 있는 거란족이나 여진족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의도와 함께 송의 선진 문화를 수입하려 하였다. 이에 비하여 송나라는 개국 이래로 문치주의를 답변확정한 결과 국방력이 극히 약화되어 동북으로부터 강대한 거란족과 여진족의 침략을 연이어 받고 있었으므로 고려를 통하여 그들의 압력을 배후에서 견제하려는 정치적 · 군사적 목적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이처럼 두 나라는 서로 처지를 달리했지만 우호적인 관계는 끝까지 유지되었으며, 공식적인 조공관계나 비공식적인 접촉을 통한 문물 교류는 자못 성하였다.

거란족의 요나라는 발해를 멸망시킨 나라로 고려 초부터 고려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거란족은 3차(993년 · 1010년 · 1018년)에 걸쳐 고려를 침입했으나 서희(徐熙)의 담판과 강감찬(姜邯贊)의 구주대첩으로 실패하였다. 여러 차례의 침입에서 요나라는 번번이 대패했고, 고려 또한 오랜 전란에 지쳤으므로 두 나라는 서로 화평을 바라게 되어 1019년(현종 10)에 두 나라 간에 화약이 성립되었으며, 이후 두 나라 사이에는 대체적으로 평화관계가 유지되었다.

한편 여진족은 본래 고려에 순종하여 투화(投化)하거나 조공을 바치다가 10세기 이후 그들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고려의 북방을 침범하게 되었다. 이에 1107년(예종 2)에는 윤관(尹瓘)이 17만의 대군으로 그들을 토벌하고 9성(城)을 쌓았으며, 2년 뒤 여진족이 배반하지 않고 조공을 바치겠다는 청을 받아들여 9성에서 철수하였다. 1115년 여진족은 금(金)나라를 건국한 뒤 고려에 대하여 형제의 나라로 국교를 맺을 것을 청하였으며, 1125년(인종 3)요나라를 멸망시킨 뒤 금나라에 간 고려의 사신이 칭신(稱臣)하지 않는다 하여 고려의 국서를 받지 않았다. 이듬해 봄에 당시 고려 조정의 실권자 이자겸(李資謙)은 중의의 반대를 물리치고 금에 사신을 보내어 사대(事大)의 예를 취하기로 하였다. 그 뒤 고려 조정에서는 북벌론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고, 두 나라 관계는 그 후 약 1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금나라의 국력이 쇠퇴해 가는 13세기 초 몽고족이 대륙의 북방에 흥기하여 급격하게 세력을 떨치기 시작했는데, 같은 시기에 만주 방면에서는 거란족의 후예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 거란족은 1216년(고종 3) 9만의 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침입한 일이 있으며, 거란족의 유적(流賊: 떠돌아다니며 노략질을 하는 도적)들의 침입이 빈번하였다. 이에 몽고족의 칭기즈칸(成吉思汗)은 1219년고려에 원군을 보내어 거란족의 유적을 무찔렀다. 그러나 그 뒤 몽고족은 고려에 많은 공물을 요구했는데, 고려는 이에 응하지 않고 몽고족의 사신을 냉대하였다. 그러다가 1225년 몽고족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압록강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두 나라 관계가 더욱 악화되어 1231년에 제1차 몽고침입이 있었다. 불시에 침입을 당한 고려는 당시의 집권자 최우(崔瑀)의 주장으로 강화도로 천도하여 항전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그 뒤 30년 간에 걸친 몽고족의 여러 차례의 침입과 약탈로 인하여 1258년 고려 조정의 육지 귀환과 태자의 친조(親朝)를 조건으로 두 나라가 강화를 맺었다. 그리하여 약 30년에 걸친 침략과 항쟁이 끝나고 두 나라의 관계는 다소 원만해졌다.

그러나 고려에 대한 원의 간섭과 영향력은 고려의 왕실 · 정치제도 · 습속 등에 크게 작용하였다. 두 왕실의 통혼으로 고려의 왕이 원의 공주나 종실(宗室: 왕의 친족)의 딸과 혼인하여 고려는 원의 부마국(駙馬國)이 되었으며, 고려의 관제나 칭호가 원의 제도와 상등한 것은 변경하여 원과의 차이를 표시하였다. 또 호복(胡服)과 변발 등 몽고족의 생활풍습과 몽고어가 침투하였고, 경제적 · 인적 착취도 강화하여 무리한 공물과 공녀를 요구하였다. 문화관계에서는 원나라의 학문과 서예가 전래되었고, 성리학이 전래되어 조선 왕조의 이념이 되었다.

조선시대 중국과의 관계는 곧 명 · 청의 관계인데, 조선 초기 명과의 관계는 그다지 원만하지는 않았다. 고려와 조선의 왕조 교체에 대한 명의 소극적인 태도와 북방의 여진족에 대한 두 나라의 세력관계에 따라 두 나라 사이에 몇 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조선의 태조이성계(李成桂)가 즉위한 직후의 문제로 태조의 즉위를 명나라가 승인하는 문제, 공로(貢路)를 폐쇄한 문제, 표전문제(表箋問題), 통혼문제, 명제로부터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받는 문제 등은 사신 내왕과 교섭 결과로 몇 년 사이에 해결되었으나, 여진문제와 세공문제, 그리고 화자(火者)와 처녀의 진헌(進獻)문제는 오랫동안 두 나라간의 현안(懸案)이 되었다.

이러한 현안들도 15세기에 접어들면서 두 나라 사이의 문물 교류가 성해짐에 따라 해결되어 조 · 명 관계는 원만해지고, 조선의 조정과 사대부 사이에는 점차 사대(事大) · 숭명(崇明)의 경향이 나타났으며, 임진왜란 · 정유재란 때 명의 원조를 계기로 그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 · 명 간의 평화적인 관계는 북방의 여진족이 다시 흥기하여 1616년(광해군 8)누르하치(奴兒哈赤)가 후금(後金)을 건국함으로써 위협을 받게 되었다.

태조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태종(太宗)은 호전적이어서 1627년(인조 5) 봄 조선에 침입하여 정묘호란을 일으켰으며, 1636년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친 뒤 그 해 겨울 그들의 요구에 미온적이었던 조선을 침입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청군의 급격한 진격으로 왕자 등은 강화로 피난하고 인조와 세자는 황급하게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하였으나, 이듬해 정월에 한강변의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화약을 맺었다.

그리하여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끊고 청과 사대의 관계를 맺어 조 · 명 간의 옛 관습에 따라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냈으며, 또 막대한 양의 세공을 바쳤다. 이러한 사행을 통하여 연경(燕京)에 가는 사신들은 중국 문물을 접하고 서적을 구입하였으며, 나아가서는 중국을 통하여 서양의 학술과 문물에도 접할 수 있었다. 특히, 청대 학술의 전성기인 고종(高宗)의 건륭시대는 조선의 영조와 정조에 걸친 시기에 해당되며, 이 시기의 학문 발달에 미친 청대 학술의 영향은 매우 컸다. 종교에서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온 것도 중국을 통해서였다.

19세기 말 일본은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을 계기로 강화도조약을 맺어 그들의 조선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 한편 러시아가 극동에서 남하정책을 꾀하고 있었으므로 청은 조선에 권고하여 ‘조미수호조약(朝美修好條約)’을 맺게 함으로써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켰다. 1882년에는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의 간섭이 심해져 흥선대원군을 납치했으며, 군대를 훈련시켜 갑신정변을 진압하는 데도 큰 몫을 해냈다. 이러한 간섭은 조선의 불만을 야기시켜 친러정책을 취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뒤 1894년부터 1895년에 걸친 청일전쟁의 패배 결과 청은 조선에서 손을 떼고, 아울러 과거의 관계도 청산되어 조선은 형식상 독립국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청을 대신하여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 침략의 야욕을 구체화하게 되었다. 따라서 애국지사들은 중국 본토와 만주 등지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이에 대하여 중국인들은 상당히 동정적이었다.

1912년 신해혁명의 결과로 중화민국이 수립되고 손문(孫文, Sun Wen)이 초대 임시총통에 취임하자, 한국 독립운동을 이끌던 애국지사들은 손문을 만나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도록 요청하였으며, 손문도 깊은 관심과 동정을 표하였다. 또한, 1918년 11월 전후문제를 설명하고자 중국에 온 미국윌슨(Wilson, T. W.) 대통령의 특사 크레인(Crane, C. R.)과 만나 우리 대표의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요구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도 파리강화회의 중국측 대표였던 왕정연(王正延)과 육징상(陸徵祥)이었다. 이처럼 한국 독립운동은 중국인들, 특히 손문 중심의 광동군 정부(廣東軍政府) 관련 인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1919년 상해에 한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중국 혁명지도자들과 한국 독립운동은 더욱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특히 5 · 4운동을 계기로 조중항일연석회의(朝中抗日聯席會議)를 소집하고 중국측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한다고 성명하였다. 한국의 임시정부는 1921년 9월에 의정원(議政院)의 결의로 신규식(申圭植)을 전권사절로 임명하여 중국광주(廣州)의 광동호법정부(廣東護法政府)에 보냈다. 당시 비록 국제적으로 승인받지는 못했던 광동호법정부이었지만, 이 중국 정부는 한국 임시정부를 처음으로 승인하였다. 1925년 광동호법정부는 손문이 죽은 뒤 국민정부(國民政府)로 개조되어 북벌을 시작하였는데, 한국의 애국지사들도 참가하였다.

그런데 중국국민당의 좌우파 분열로 국민정부도 분열되자 한국 독립운동도 그 영향을 받아 일부는 중국공산당에 개별적으로 참여하였다. 또 1927년에는 조봉암(曺奉岩) · 여운형(呂運亨) · 홍남표(洪南杓) 등이 중국공산당 한인 지부를 결성하여 한국독립운동자동맹을 중국공산당에 조직적으로 결부시켰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에서는 전국적으로 반일 감정이 확대되었고, 이와 함께 1932년상해의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윤봉길(尹奉吉)의 의거가 일어남으로써 한국 독립운동은 중국의 정당 · 군 · 민간단체와 관련된 인사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다. 만주지역에서는 중국 의용군왕덕림(王德林) · 마점산(馬占山) 등이 조선독립군과 연합하여 한중항일연군(韓中抗日聯軍)을 조직하여, 일본 관동군(關東軍)에 대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37년에는 7 · 7사변으로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또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국민정부가 전면 항일전으로 나가게 되었다. 따라서 중국의 한국 독립운동 지원은 바로 그들의 항일전과 같은 것이어서, 어떠한 제한도 고려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김구(金九) · 김약산(金若山)의 두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김구는 남경(南京)에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光復陣線 혹은 光線으로 약칭)를 결성하였으며, 김약산 중심의 좌파단체들은 조선민족혁명당 · 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 · 조선혁명자연맹의 세 단체를 소집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 약칭 民線)을 성립시킨 뒤 연맹의 투쟁 강령인 중국항일전쟁에의 참가에 따라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중국의 항일전에 참여하여 크게 기여하였다.

이처럼 한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고 필요하게 되자 국민정부는 1939년김구와 김약산에게 좌우 양파인 ‘민선’과 ‘광선’을 연합하여 항일복국(抗日復國)을 결성하도록 권고하였다. 또한 1940년 9월한국 임시정부 안의 우익 3당(한독당 · 국민당 · 조선혁명당)의 요구 아래 한국광복군이 창설됨으로써 조선의용대를 한국광복군으로 개편하여 군사위원회에 예속시켰다.

그러나 그 뒤 한국광복군은 한국 임시정부에 예속되어 임시정부의 주권이 크게 향상되었다. 직접 미군 사령부에 요구하여 그들의 연락조를 한국광복군에 파견시켜 주도록 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으며, 심지어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승만(李承晩)도 중국에 있는 한국광복군을 바탕으로 교섭하였다. 한편 중국공산당의 지원 아래 있던 연안파(延安派)는 별도로 조선의용군을 조직했는데, 그 배후에는 중국공산당과 8로군(八路軍)이 있었으며, 그들과 함께 항일전에서 활동을 전개하여 그 세력이 확충되었다. 이와 같이, 중국에서의 한국 독립운동은 중국의 항일운동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투항이 너무 빨리 이루어지고, 종전 후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점령군 사령관 하지(Hodge, J. R.)가 한국광복군은 해산하고 귀국해야 한다는 규정에 따르도록 요구하여 한국광복군은 해산된 채 귀국했으며, 조선의용군도 개인 자격으로 귀국함으로써 건국 이후의 국군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를 잃고 말았다.

현대적 관계

중국과 북한

중국과 북한의 외교 수립은 1949년 10월에 이루어졌으며, 1950년 10월중국은 19개 군 57개 사단의 약 85만 명을 6 · 25전쟁에 참전시켰다. 중국의 6 · 25전쟁 참전 명분은 자신의 안전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脣亡齒寒 保家衛國) 자기 안전 확보에 두었으나, 당시 소련에 대한 중국의 의존성과 중국에 대한 소련의 절대적 영향력, 6 · 25전쟁 참전을 자신의 정치권력 통합에 이용하려는 정치적 목적 및 참전을 통한 스탈린(Stalin, I. V.)의 신임 획득 등 복합 원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중국의 6 · 25전쟁 참전과 1953년 7월의 비밀군사협정 체결을 통하여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혈맹관계로 발전하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중소(中蘇)분쟁의 표면화, 중국의 문화혁명, 월남전 확대 등의 사건으로 인하여 상호 밀착과 소원관계가 반복되었으나, 기본적으로 두 나라의 관계는 긴밀하였다. 이는 당시 중국의 외교정책이 기본적으로 양대진영론(兩大陣營論)과 중간지대론(中間地帶論) 같은 진영론에 입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 북한의 대남전략에 대한 적극 지원 확약과 1971년 8월의 무상군사원조협약 체결 등 중국의 북한에 대한 정치 · 경제 · 군사 분야의 지원이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여기에는 1970년대 모택동(毛澤東, Mao Zedong)과 화국봉(華國鋒, Hua Guofeng)에 의해 추구되었던 적극적인 반소노선이 중국에 대한 북한의 전략적 지위를 크게 제고시켰기 때문이다.

1975년 4월 김일성(金日成)의 중국 방문 및 1978년 5월화국봉과 9월등소평(鄧小平, Deng Xiaoping)의 북한 방문 등 최고 지도자들의 상호 방문으로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더욱 강화 되었고, 특히 중국은 북한의 통일노선을 지지함과 동시에 주한 미군의 철수를 주장하였으며, 두 개의 한국정책을 반대하였다.

그런데 1978년 말중국공산당의 11기 3중전회 이후 개혁개방의 실용주의노선 적극적으로 추진되면서 중국의 대외정책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과거 중국 외교정책의 신축성을 크게 제한했던 양대진영론과 이데올로기에서 탈피하여, 다원화를 추구하는 독립 자주외교 노선을 답변확정함에 따라 한국에 대한 중국의 인식과 태도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중국의 새로운 외교정책과 한국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과거 북한관계에 기초하여 형성되어 온 중국의 한반도정책에 점진적인 수정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1980년대 말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남북한 대화 및 관계 발전에 대한 중국의 적극적인 처지가 북한의 처지와 일치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중국의 한반도정책이 북한정책과 완전히 일치했던 과거의 일원화정책과는 달리 점차 이원화 현상으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한 통일문제와 관련하여 중국은 교차 승인이나 유엔 동시가입 문제는 한반도의 통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대하면서, 중국의 통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했던 ‘1국가 2체제(一國兩制)’방식에 의한 남북한 문제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1950년대 혁명과 이념적 일치성을 기반으로 했던 북방 삼각 협력체제가 중소분쟁으로 붕괴되자, 북방 삼각관계는 북한을 중심으로 하는 이변적 관계(二邊的 關係)로 발전하였다. 중 · 소 관계의 개선은 북방 삼각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나, 1950년대와 같은 삼각 협력체제로 발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과거 중 · 소 대립의 악화는 중 · 소의 북한에 대한 경쟁관계를 심화시킴으로써 북한에 대한 그들의 행동반경을 제약하고, 동시에 중 · 소에 대한 북한의 행동반경을 확대시켰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소련의 해체로 중 · 소 관계는 중 · 러 관계로 변화되어 한반도에 대한 중 · 러의 행동반경을 제고시키게 되었고, 이는 중국과 북한, 중국과 한국의 관계 발전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중국과 한국

중국은 1949년 10월 대륙에 정권을 수립한 이후 양대진영론에 입각한 대소(對蘇) 일변도정책을 선포하고 반미(反美)를 외교의 기본 척도로 삼았기 때문에, 모든 친미(親美) 국가는 곧 적대 국가로 여겨 중국의 한반도정책은 중국의 북한정책에 의해 결정되었고, 한국과의 관계는 근원적으로 단절되었다. 따라서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가 중소분쟁의 표면화, 문화혁명, 월남전 확대 등으로 밀착과 소원의 관계가 반복되면서도 중국의 한국 관계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1972년 12월 등소평이 정권을 장악하여 개혁개방을 선언한 이후 많은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기본 정책노선은 여러 측면에서 전개되어, 1973년한국은 공산권에 대한 문호개방을 위해 6 · 23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에 한국도 중국 접근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1974년 1월 「한일대륙붕협정」 체결을 비롯하여 한 · 중 간 어로분쟁 등과 관련한 비난을 전개하는 등 한국의 실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중국의 북한에 대한 정치 · 경제 · 군사 분야의 지원이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두 나라 최고 지도자의 상호 방문으로 중국과 북한의 관계가 더욱 강화되던 시기로, 남북한에 대한 기본 정책의 변화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1978년 말 개혁개방의 실용주의노선과 독립 자주외교 노선을 답변확정함에 따라, 한국에 대한 중국의 인식과 태도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82년 제12기 전국인민대표대회(全國人民代表大會)의 호요방(胡耀邦, Hu Yaobang)의 정치 보고에서 중국이 우호국이 될 수 없는 국가군(國家群)에서 한국이 제외된 것은 바로 중국의 한국관에 이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중국의 한국관 및 인식의 변화는 과거 금기시해 왔던 한국과의 관계에서 신축성과 현실주의적인 정책 추구를 가능하게 하였다.

1983년 5월 중국인에 의한 중국민항기 납치로 한국에 불시착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중국은 국제민항기구나 일본 등 제3국을 통한 간접적인 해결방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급속히 중국 당국의 관계자를 파견하여 우리나라 관계자와 직접 사태 수습을 위한 교섭을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두 나라간의 교섭 결과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중국 정권 성립 후 처음으로 접촉을 갖게 되었다. 이때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호가 중국 당국자에 의해 처음으로 호칭되고 문서화되었다. 이것은 중국의 기존 한국정책에 중대한 변화를 의미함과 동시에 한 · 중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전환점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을 전후하여 중국은 간접 교역과 직접적인 인적 · 체육 교류의 확대 등 비정치적인 영역에서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보다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1979년부터 홍콩 · 일본 등 제3국을 통한 간접 교역이 시작된 이래 두 나라 사이의 교역은 크게 확대되어 왔다. 특히 이러한 간접 교역은 앞으로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서 직접 교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다지는 역할을 하였으며,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여건들이 점차 성숙되어 가고 있었다.

물질 유인 · 경쟁 개념과 시장경제이론 같은 자본주의 경제방식의 적극 도입, 지방과 기업의 자주권 확대, 민법통칙과 기타 경제법규 등을 비롯한 경제체제에 대한 적극적 개혁 · 개방정책은 중국 경제체제와 다른 이질적 체제의 서방이 중국 진출에 유리한 환경요인을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외교관계가 없던 1991년까지 한국의 중국 경제 진출에도 유리하게 작용해 나가고 있었다.

특히 중국측은 한국 기업과의 접촉을 통하여 한국 기업의 중국 투자문제를 거론하고, 중국 내 자원개발과 건설사업의 참여에 대한 관심을 보여 왔다. 이에 따라 한국과 중국의 경제협력관계는 더욱 발전함과 동시에, 1992년 8월 외교관계를 수립함에 따라, 지금까지 추진되어 온 일련의 중국 경제 진출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인적 교류면에서 1983년 7월 친인척 간의 상호 방문이 허용된 이래, 한국과 중국 간에는 이산가족들의 초청 방문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또 중국에서 개최되는 국제회의에 한국 관리의 입국이 허용됨으로써 한국인의 중국 방문이 확대되어 갔으며, 중국인들의 한국 방문도 점차 증대되었다.

특히 다른 어느 영역보다도 체육 교류가 활발히 전개되어 1979년 6월항주(杭州, Hangzhou)에서 개최된 세계배드민턴대회의 초청장을 보내는 등, 1970년대 말부터 적극적인 접근 자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뒤 1984년에 곤명(昆明, Kunming)에서 있었던 데이비스동부예선 테니스대회에 한국 대표단이 참석한 이후, 1984년 4월 광주(廣州, Guangzhou)의 제11회 아시아축구연맹총회, 10월 상해의 제10회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 및 1985년 4월 항주 제17회 아시아역도선수권대회 등에 한국 대표단이 참석하였으며, 중국측은 1984년 4월 제8회 아시아청소년농구선수권대회와 제2회 아시아수영선수권대회에 참석한 것을 비롯하여 한국에서 개최되는 각종 대회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한 중국은 1984년 9월 제3차 아시아올림픽위원회 총회에 공식 대표단을 파견하였으며, 특히 1986년 제10회 서울아시아경기대회에 대규모 대표단을 파견함으로써 한국과 중국의 관계 발전에 중요한 전환점을 형성하였다. 그 뒤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경기대회에도 중국은 750명의 대규모 대표단을 파견하였으며, 1990년 북경에서 개최되는 제11회 북경아시아경기대회에는 한국 대표단이 참가하였다.

결국 1992년 8월 정식 국교가 수립됨에 따라 체육 교류도 더욱 활발해지면서 모든 구기종목이 교차로 두 나라를 오가며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사례가 늘어나게 되었다. 한편, 두 나라 인적 교류도 1987년에는 1,800명에 불과하던 것이 1988년에는 1만 명에 이르고, 1989년에는 약 2만 3천 명이 상호 방문함으로써 2년 만에 10배 이상의 상호 방문이 이루어졌고, 중국에 대한 투자도 꾸준한 급신장세를 보여 2015년에는 수출 1,371억 4000만 달러와 수입 902억 4000만 달러에 이르는 급성장을 보였다.

특히 1990년 10월 20일 두 나라 간에 일부 영사 기능을 포함하는 무역대표부 설치를 합의함으로써 두 나라 관계 발전에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간접 교역과 인적 · 체육 교류의 확대 등 관계 개선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중국 간의 공식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에서의 관계 발전에는 1991년까지 엄격한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중국이 북한과의 기존 우호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얻고 있는 이익을 상쇄할 만한 중요한 이익이 한 · 중 간에 나타나지 않았던 정치적 역학관계는 두 나라 우호관계 증진 발전에 어려움을 가져왔고,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계속 두 나라 관계 발전의 주요 저해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1978년 말 등소평의 등장에 따른 개방개혁정책을 선언한 중국의 새로운 대외정책과 1980년대 초부터 한국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과거 북한관계에 기초하여 형성되어 온 중국의 한반도정책에 수정을 가하게 하였다. 그리고 1980년대 말부터 해체되기 시작한 소련에서 러시아로의 변혁은 중 · 소 관계의 냉전체제 해소로 중국의 외교정책에 폭을 넓혀 주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소련의 해체로 미국이 소련 관계에서 중국 관계로 중심축을 옮기게 되자 중국의 미국정책도 차츰 그 힘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입장은 1989년 천안문사태 이후 잠시 주춤하기는 했지만, 미국의 중국정책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중국이 택한 중국식의 개방과 중국의 독자노선을 미국이 상당 부분 인정하고 있다는 반증이며, 이를 바탕으로 한 중국은 한반도정책에서도 북한정책과 완전히 일치했던 과거의 일원화정책을 탈피하여 점차 다원화정책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다 경제적 실용노선을 추구하기 시작한 중국은 한국의 경제 발전이라는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변화는 드디어 1992년 8월 24일 양국의 국교정상화로 나타났고, 중국의 대외개방과 현대화정책 추진으로 양국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지고 경제교류는 급성장하게 되었다.

한 · 중 양국은 1992년 8월 수교 후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급속한 관계발전을 이룩하고 있다. 특히 양국은 함께 경제 · 통상 등 실질 협력관계를 증진시킴으로써, 각 방면에서의 관계가 전반적으로 양국의 이익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중국은 그간의 한 · 중 관계 발전에 따라 한국과의 협력을 더욱 중시하고 있으며, 개혁개방정책을 원만히 추진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 긴요한 만큼 4자회담을 거쳐 6자회담 참여 등을 통해 건설적인 역할을 다하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우리로서도 중국과의 대화와 협력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

한편, 한 · 중 양국 관계는 수교이후 경제분야 위주의 실질 우호 협력 증진에 중점을 두고 발전해 왔으나, 1998년도에는 정무분야를 포함한 포괄적 협력의 확대 기반을 마련한 중요한 해였다. 양국은 한반도 평화와 안정 유지 및 역내 경제 · 안보 분야 협력을 위해 4자회담은 물론 UN과 APEC 및 ASEM 등 국제무대에서의 협력관계를 강화해왔으며, 특히 1998년 11월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국빈 방중 때에는 ‘21세기의 한 · 중 협력동반자관계’ 구축을 규정한 「한 · 중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형사사법공조조약, 복수사증협정, 청소년 교류 양해각서, 철도분야 교류협력약정 등에 서명함으로써, 정치 · 경제 · 문화 등 제반 분야에서 포괄적인 협력기반을 마련하였다.

1998년에는 양국간 정부 고위인사 교류도 활성화되어, 11월김대중 대통령과 강택민(江澤民, Jiang Zemin)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 및 4월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제2차 ASEM 정상회의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주용기(朱鎔基, Zhu Rongji) 중국 국무원 총리의 회담 등 정상급 교류는 물론, 7월 외교통상부장관 공식 방중 등 4차례의 한 · 중 외무장관회담(4월 ASEM 외무장관회의, 9월 UN 총회, 11월 대통령 국빈 방중)이 개최되었다. 양국 정부 간 관련부처에서도 상호 고위인사 교류가 활발히 전개되어 감사원장과 정보통신부장관과 문화관광부장관 등의 방중 및 중국 대외무역합작부 부부장 등의 방한이 있었다. 양국 의회 및 정당 간 교류도 활성화되어, 2월 김종필(金鍾泌) 자민련 명예총재, 5월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대표단, 11월 김용환(金龍煥) 의원 등 자민련 대표단, 12월 양성철 의원 등 새정치국민회의 대표단 등이 방중하였고, 3월 이성인(李成仁, Li Chengren) 공산당 대외연락부 부부장, 호금도(胡錦濤, Hu Jintao) 국가부주석 겸 공산당 중앙위 정치국 상무위원 등이 방한하였다. 한 · 중 간의 정책협의회도 빈번히 개최되어, 양국 간의 주요 현안들에 있어서 상호 입장 차이를 좁히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서해에서의 어업 질서의 조속한 확립을 위한 양국 간 어업회담이 타결되어 한 · 중 어업협정이 11월 가서명되었고, 배타적 경제수역(Exclusive Economic Zone: EEZ) 경계획정회담도 열렸다. 그 외에 한 · 중 외교부 정책기획협의회와 영사국장회의, 문화공동위원회 등이 개최되었으며, 특히 중국이 해외여행 자유화 대상지역에 한국을 포함시키는 조치가 있었다.

또한 1998년도 대중국 교역액은 184억 달러(수출 119억 달러, 수입 65억 달러)로 양국은 상호 각각 3번째(미국, 일본 다음) 교역 대상국이 되었다. 대중국 투자 역시 활발히 진행되어서 실제 투자 기준으로 40억 달러에 달해 중국은 우리의 제2의(미국 다음) 투자대상국이 되었으며, 특히 건설부문에 있어서 중국은 우리의 최대 시장으로 부상하였다.

우리의 최대 무역 흑자 지역인 홍콩과의 실질관계도 주권반환 전과 다름없이 계속 증진되어, 한국 · 홍콩 간 1998년도 교역이 98억 달러(우리 무역 흑자 87억 달러)에 달하였으며, 인적 교류도 급증하여, 1998년에 35만명(홍콩 방문 12만 7천 명, 한국 방문 22만 4천 명)에 달했다. 이로써 홍콩을 포함한 중국이 우리의 최대 무역 흑자 국가로 급부상하였다.

그리고 한 · 중 간에 자동차, 고화질 텔레비젼, 전자교환기 분야 등 산업분야 협력의 진일보 발전을 위한 일련의 교섭이 꾸준히 진행되었다. 1994년 6월 한 · 중 환경협력공동위가 서울에서 개최된 이래 황해 오염 방지 및 산성비에 대처하기 위한 환경분야 협력도 강화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협력 체제는 한 · 중 무역실무회의, 경제공동위원회 · 환경공동위원회 등 경제협력을 위한 각종 협의체제들이 정기화되면서 더욱 확대 심화되고 있다.

한편 각종 학술 · 예술 교류 등 문화 협력도 다양하게 전개되어 양국 국민 간의 상호 이해와 우의 증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1999년 9월 양국의 저명한 학자가 참가하는 제5차 한 · 중 미래포럼이 상해에서 개최되어 21세기에 한 · 중 관계의 바람직한 발전에 관해 심도 있는 논의를 하였으며, 11월에는 상해 사회과학원과 우리 외교안보연구원 간 세미나가 상해에서 개최되었다.

이러한 한 · 중 간 급속한 관계 발전에 힘입어 양국간 인적 교류도 급증하고 있다. 2015년도 한 · 중 인적 교류는 우리측 기준으로 1,042만 8000명(한국인 방중 444만 4천 명, 중국인 방한 598만 4천 명)이다다.

중국에는 1998년 말 1,500여 개의 업체가 진출해 있고, 3만 5천 명 이상의 교민이 장기체류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은 교민 보호 및 중국 진출 기업의 원활한 지원을 위한 총영사관 추가 개설 등 효율적인 공관 지원 체제의 정비가 필요하였다.

1992년 8월 24일 한 · 중 수교 이후, 양국의 우호협력관계는 여러 분야에서 신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정치적으로 양국 지도자의 평상적 상호 방문 혹은 국제 활동에서의 회견 등은 상호 이해와 신뢰를 증진시켰고 양국 관계의 발전을 추진시켰다. 경제적으로 양국의 호혜 협력은 계속 심화되고 서로가 중요한 무역 동반자가 되었다. 문화 · 교육 · 과학기술 등 분야에서의 교류와 협력도 날로 활발해지고 있다.

먼저, 정치관계와 고위층 상호 방문에서 있어, 2000년 10월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중국주용기 총리가 방한하여 회담을 진행하고, 양국은 한 · 중 관계를 전면적 협력의 새 단계로 높이기로 동의하였다. 2003년 7월 7일부터 10일까지 노무현 대통령이 호금도 국가주석의 초청으로 중국을 공식 방문하여, 양국은 한 · 중 전면적 협력동반자관계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2008년 2월 25일 호금도 중국 국가주석의 특사로 국무원 위원 당가선(唐家璇, Tang Jiaxuan)이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였다. 당가선은 이명박 대통령과 만나 호금도 국가주석의 전언을 전달하고, 중국 정부가 한국 관계를 중시하며 한 · 중 관계 발전의 전면적 추진을 희망한다고 표명하였다.

2008년 5월 12일 중국 사천성(四川省)에서 대지진이 발생하자, 한국 정부는 중국에게 500만 달러의 원조를 제공하고 구조대를 파견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방중 기간 사천성 재난지역을 직접 방문하여 위문하였다.

2008년 5월 27일부터 30일까지 이명박 대통령은 중국을 공식 방문하여 호금도 당시 중국 국가주석과 회담하고, 국무원 총리 온가보(溫家寶, Wen Jiabao), 전국정협주석 가경림(賈慶林, Jia Qinglin)과 각각 회견하였다. 쌍방은 한 · 중 우호협력관계의 진일보 발전 및 공동 관심의 지역과 국제문제에 대해 깊은 의견을 교환하고, 「한 · 중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한 · 중 전면적 협력동반자관계’를 ‘한 · 중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로 제고시키는 데 의견을 일치하였다.

2008년 8월 25일부터 26일까지 호금도 중국 국가주석은 한국을 공식 방문하여 이명박 대통령과 회담하고, 김형오 국회의장, 한승수 국무총리와 각각 회견하였다. 쌍방은 「한 · 중 공동 코뮈니케」를 발표하여, 한 · 중 관계는 양국에게 중요한 관계라고 인식을 같이 하고, 5월 양국이 발표한 「한 · 중 공동성명」의 기초 위에서 한 · 중 전략적 협력 동반자관계를 전면적으로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양국은 장기적인 공동 발전을 기본 목표로 삼아 상호 협력을 전방위적으로 확대 심화하고, 지역과 국제의 중요문제에서의 협조를 강화하며, 장기적 평화와 공동 번영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인류의 발전과 진보를 위해 역량을 공헌하기로 선언하였다.

2008년 9월 6일부터 7일까지 한승수 국무총리는 중국을 방문하여 온가보 국무원 총리와 회견하였다. 중국은 한국과 환경보호 · 통신 · 금융 · 물류 · 에너지 등 분야에서의 협력을 강화하고, 한 · 중 자유무역지구 수립 절차를 추진하며, 산업 구조조정의 경험을 공유하여, 양국 경제가 지속 가능한 발전 중 호혜를 실현하기를 희망한다고 표명하였다.

2009년 4월 3일 이명박 대통령은 런던G20 제2차 금융 정상회의 기간에 호금도 국가주석과 회견하였다.

2009년 5월 25일 유명환 외무부 장관은 하노이 제9차 아시아 · 유럽 외무장관 회의 기간에 중국 외교부 장관 양길지(楊洁篪, Yang Jichi)와 회견하였다. 양국은 한 · 중 정치 · 경제 · 문화 등 각 분야에서의 양호한 교류 협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공동으로 노력하여 양국 관계의 지속적인 발전을 추진하기를 희망한다고 표명하였다. 양국은 최근의 정세 하에서 한반도 비핵화 절차를 지속적으로 견고히 추진하고,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인식을 같이 하였다.

둘째로, 경제 협력과 무역 관계에 있어,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 과학 · 기술 협력 협정(1992년 10월), 무역 협정(1992년 10월), 경제 · 무역 및 기술 협력공동위 설립 협정(1992년 10월), 투자 보장 협정(1992년 12월), 해상 운송 협정(1993년 6월), 우편 · 전기통신 분야 협정(1993년 8월), 환경 협력 협정(1993년 11월), 문화 협정(1994년 4월), 산업협력위 설치 협정(1994년 6월), 한국기상청 · 중국기상국간 서울 · 북경간 기상통신회선 설치 협정(1994년 7월), 이중과세 방지 협정(1994년 9월), 항공 협정(1994년 10월), 원자력 협정(1995년 2월), 세관 협력 협정(1995년 4월) 등 양국 간 주요 협정이 단기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양국의 경제 · 무역 협력은 안정적이며 신속히 발전하였다.

중국 해관총서(海關總署, General Administration of Customs of the PRC)의 통계에 따르면, 2004년 한 · 중 무역액은 900억 7천 만 달러이고, 42.5% 성장하였다. 그 중 중국의 수출은 278억 2천 만 달러이고 수입은 622억 5천 만 달러로, 각각 성장은 38.4%와 44.3%이다. 2005년 양국 무역액은 1,119억 3천 만 달러에 달하고, 동기 대비 성장은 24.3%이다. 그 중 중국의 수출은 351억 달러이고, 동기 대비 성장은 26.2%이며, 수입은 768억 2천 만 달러이고 동기 대비 성장은 23.4%이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무역 동반자이고 최대 수출 시장이며, 한국은 중국의 제3대 무역 동반자이다.

2005년 9월 말까지 한국의 대중 투자는 모두 37,532건이고, 실제 사용액은 295억 5천 만 달러이다. 그 중 2004년 한국의 실제 대중 투자는 62억 5천 만 달러로 39.2% 성장하고 한국 대외 투자 총액의 45.8%를 차지하며, 2005년 1월부터 9월까지 한국의 실제 대중 투자는 36억 1천 5백 만 달러이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해외 투자 대상국이다.

2008년 한 · 중 무역액은 1,861억 1천 만 달러로 16.2% 성장하였다. 그 중 중국의 수출은 739억 5천 만 달러이고, 수입은 1,121억 6천 만 달러로, 각각 31%와 8% 성정하였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무역 동반자이고 최대 수출 시장 겸 수입 공급자이며, 한국은 중국의 제3대 무역 동반자이다.

2008년 말까지 한국의 대중 투자 누계는 419억 달러로, 중국은 한국의 최대 해외 투자 대상국가이고, 한국은 중국의 제4대 외상 직접투자 공급국가이다.

끝으로, 한 · 중 양국은 과학기술 · 문화 · 교육 · 사법 분야와 지방정부 사이에서 모두 우호적인 교류와 협력관계를 수립하였다. 한국은 중국상해 · 청도(靑島) · 광주(廣州) · 심양(沈陽) · 성도(成都) · 홍콩에, 그리고 중국은 부산에 각각 총영사관을 설치하였다. 양국은 주요 도시 사이에 65개의 정기 여객기 항로를 개설하여 매주 375회 운행하고, 5개의 정기 화물기 항로를 개설하여 매주 13회 운행하고 있다. 한국 인천 · 부산은 중국천진(天津) · 청도 · 대련(大連) · 연대(烟臺) · 위해(威海) 등지와 정기 여객선 · 화물선 항로를 개설하고 있다.

2015년 한 · 중 사이 인적 왕래는 연인원 1,042만 8천 명에 달하고, 그 중 한국인의 방중 연인원은 444만 4천 명이고, 중국 국민의 방한 연인원은 598만 4천 명이다. 2015년 말까지 한국의 재중 유학생은 약 80만 명으로 재중 외국 유학생 총수의 40%를 초과하며, 중국의 재한 유학생은 95만 명이다.

한 · 중 군사 교류는 점진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양국은 상대국 주재 대사관에 모두 무관을 파견하고 있다. 1998년 8월 중국인민해방군 부총참모장 웅광해(熊光楷, Xiong Guangjie)가 한국을 방문하였고, 1999년 8월 한국 국방부 장관 조성태가 중국을 방문하였다. 2000년 1월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겸 국방부 장관 지호전(遲浩田, Chi Haotian)이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였다. 2001년 10월 한국 원양순항훈련편대가 중국을 방문하고, 12월 한국 국방부 장관 김동신이 방중하였다. 2002년 1월 한국 공군 참모총장 이억수가 방중하고, 2004년 10월 한국 해군 총참모장 문정일이 방중하였다.

양국은 문학 · 예술 · 체육 · 교육 · 위생 · 방송 · 영화 · 텔레비젼 · 신문 · 출판 등 분야에서도 신속한 교류를 발전시키고 있다.

양국 주요 도시 사이에는 47개 정기 여객기 항로가 있어 매주 830여 회가 운행되고, 10개 정기 화물기 항로가 있어 매주 47회가 운행되고 있다. 한국 인천 · 부산 · 평택은 중국천진 · 청도 · 대련 · 연대 · 위해 · 연운항(連雲港) 등지와 정기 여객선 · 화물선 항로가 있다.

양국은 모두 104 쌍의 우호 도시 관계를 맺고 있다. 양국의 우호 단체로는 한중우호협회 · 한중문화협회 · 21세기한중교류협회 · 한중경영인협회 · 한중친선협회와 중한우호협회 등이 있다. 양국 수도의 대사관 설치 이외에 한국은 중국상해 · 청도 · 광주 · 심양 · 성도 · 서안(西安) · 홍콩에 그리고 중국은 한국 부산 · 광주에 각각 총영사관을 두고 있다.

한 · 중 양국은 역사적 연관성, 지정학적 근접성, 정치적 상관성, 문화적 유사성, 경제구조의 보완성 등 요인을 고려할 때, 21세기에도 양국 사이 우호와 협력 그리고 경쟁의 관계는 계속 진행되어 나갈 것이다. 특히 양국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유지가 동북아는 물론 세계의 평화와 안정 유지에도 긴요하다는 공통 인식을 견지하고 있어, 한반도 긴장 완화와 평화 정착을 위한 공동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다만 상이한 사회 체제에 따른 법과 제도 및 국민 간 인식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점이 양국 관계의 진행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한 · 중 양국은 이들 문제를 원만히 극복해 나가기 위한 지속적인 상호 이해와 노력이 필요하다.

중국 안의 우리 문화

우리나라와 중국은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유일한 국가이기 때문에 특수하고 복잡미묘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첫째, 시대마다 국경선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국가 형성기에서부터 고구려시대까지 지금의 중국 동북지방 일대는 얼마간의 흥망성쇠가 있었지만 우리의 영토이었으며, 가장 많이 확장될 때는 중국 화북지방까지 넓혀진 적도 있다. 남북국시대인 발해 때도 다소 축소는 되었지만 역시 중국 동북지방은 우리의 영토가 분명한 우리의 옛 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뒤 우리 민족과 친연관계가 있는 요 · 금 등 동북방 민족이 우리의 옛 영토를 점령하였고, 명 · 청이 번갈아 지배하게 되어 지금까지 우리 민족은 이 지역에서 사실상 주권이 박탈당한 상태이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피가 면면히 이어져 왔고 다시 근세의 이민으로 전체 인구의 상당수를 우리 민족이 차지하고 있으며, 옛 민족유산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현재 중국 동북부 일대는 한국 민족문화가 살아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우리나라와 국경선을 맞대고 있으므로 가장 밀접하게 문화교류가 이루어져 왔다는 점이다. 역대에 걸쳐 공식 사절의 내왕은 물론, 승려 · 상인의 교류와 함께 수시로 대규모의 이민도 있어서 중국 본토와의 교류도 매우 활발하였다. 따라서 중국 본토에 남아 있는 우리의 문화유적이나 유물도 상당수에 이르며, 간접적인 자료도 흔한 편이라고 하겠다. 또한, 중국 정사인 『이십오사(二十五史)』에 있는 우리 민족에 대한 기록은 사료로서 가치가 매우 높다.

선사(先史)시대

우리나라와 중국의 교류는 구석기시대부터 있어 왔겠지만 민족 교류의 실상은 거의 알 수 없다. 그러나 기원전 6000년 경 전후부터 시작된 신석기시대부터는 직접적인 교류 이루어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중국 쪽에서는 전 극동지역이 비슷한 신석기문화라고 이해하려는 경향도 있지만, 만주 일대나 현재의 우리나라를 포함한 각지의 신석기문화는 중국황하 유역인 이른바 중원(中原)과는 다른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상호간에 유사점이 많아 어느 정도의 교류관계는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였던 만주 일대의 신석기문화는 우리나라와 직접적으로 관련되고 있다. 가령 심양(瀋陽)의 신락문화(新樂文化)나 요령성(遼寧省)의 우하량유지, 객좌현 동산취문화(東山嘴文化) 등의 만주 일대 신석기문화는 시베리아 신석기문화 등과 관련하여 고조선(古朝鮮) 문화와의 관계를 신중히 고려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단군조선은 만주에서 우리나라 북부에 걸쳐 존재했던 우리의 신석기시대 문화를 반영하는 선국가(先國家) 형태이었다고 생각되므로, 하나의 문화권이었음이 분명하다. 중원의 신석기시대 문화인 용산문화(龍山文化) 등도 우리나라 신석기문화와 어느 정도 교류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흑도의 유사성 등에서 이를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원전 2000년 경에서부터 1000년 경 사이에 시베리아 내지 만주 일대에서부터 우리나라에 걸쳐 동일한 청동기 문화가 존재한다. 신석기시대의 유문토기가 아닌 무문토기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고, 이들은 주로 구릉지대에서 농기구와 함께 나오고 있어 농경사회로 여겨지고 있는 문화이다. 묘제는 지석묘와 석관묘인데, 무문토기와 함께 중국의 중원지역에는 보이지 않는 특징적인 무덤형식이다. 여기에서는 마제석검과 더불어 세형동검(細形銅劍)이 반출되고 있는데, 세형동검은 이보다 선행하는 비파형동검(만주식 동검)에서 계승, 발전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함께 청동단추 · 세문경(細文鏡) · 동모(銅鉾) 등 특징적인 청동기들이 대량으로 광범위하게 출토되고 있어서 바로 한국적인 청동기문화로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문화 유적은 몽고 · 만주 · 한국 · 시베리아 그리고 멀리 유럽까지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지만, 특히 우리 청동기문화와 가장 깊이 관련되고 있는 지역은 북으로 내몽고의 적봉(赤峯) 하가점, 동으로 만주의 길림과 송화강 일대, 서로는 요서(遼西)에 이르고 있다. 특히 길림의 소달구, 내몽고의 하가점, 요령의 조양 12대영자 등 수많은 문화층은 그 좋은 예이며, 요령 객좌현 북동의 청동기문화층도 이 같은 예에 속할 가능성이 짙다. 이 지역은 우리나라의 북부지역과 함께 기자조선의 영역으로 여겨지고 있다. 기자조선의 실체는 논의가 분분하지만, 만주와 우리나라 북부지역에 세력을 떨친 지배적인 국가형태가 존재했던 것이 분명하므로, 이 지역의 당시 국가로 생각한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기자조선으로 불릴 수 있는 이 지역 청동기문화를 담당한 민족은 신석기시대의 고아시아족이 아니라 예맥족(濊貊族)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에 예맥족만 거주했다고는 보지 않으며, 선주민을 비롯해서 여러 민족이 혼재하면서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청동기문화의 담당 계층인 지배 민족은 예맥족으로 보는 견해에 일단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이 예맥족은 농경문화인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기자조선이라는 국가 형태를 건설하여 고대 문명을 꽃피웠을 것이다. 우리는 만주 일대에 분포해 있는 청동기문화 유적에서 이런 사례를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 청동기문화를 계승한 이 지역의 철기문화도 우리나라와 직접적으로 관련되고 있는데, 그것은 위만조선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진·한(秦漢)시대

진 · 한시대가 되면 우리나라와 중국은 문화교류가 더욱 활발해지며, 우리의 옛 땅인 만주 일대와 북부지역 일부에서는 중국측의 팽창정책에 따라 심각한 각축전이 벌어지게 된다. 특히 한나라는 무제 때부터 흉노를 정벌하여 서역까지 복속시켰고, 그 여세를 몰아 우리나라를 침략하였다. 당시 막강하게 세력을 떨치던 위만조선을 패망시켜 이 지역의 일부를 일시 점거하여 한사군(漢四郡)이라는 식민지로 삼게 된 것이다.

현재 위만조선의 분명한 유적지나 유물은 밝혀져 있지 않고, 한사군도 변천이 심해서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는 것은 역시 어려운 편이다. 그러나 중국 문화는 한의 동방 진출에 따라 우리나라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이해된다.

한사군의 낙랑을 비롯한 식민지에는 직접적인 한문화가 남게 되었고, 우리나라 남부에까지 한의 문화가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쳐온 것이다. 그러나 이 한사군을 통하여 우리의 문화가 중국으로 전파되기도 한 사실 또한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위·진·남북조·수·당(魏晉南北朝 · 隋唐)시대와 삼국(三國)시대

이 시대부터 우리나라와 중국의 사이에 본격적인 문화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특히 두 나라에 다 같이 획기적인 영향을 끼친 불교문화를 통하여 적극적인 교류가 전개되었다. 이와 함께 부여와 삼국, 특히 고구려는 만주 일대에 강력한 대제국을 건설하여 동북아시아의 강자이자 독특한 문화국을 이룩하였으므로, 전 만주 내지 북중국에 걸쳐 이들의 유적 · 유물이 무수히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백제는 산둥반도 일대까지 진출하여 영토를 확장했던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므로, 이 일대에도 백제 문화의 흔적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이 일대에 우리 문화의 발자취를 분명하게 남긴 나라는 고구려이다. 고구려 문화는 국내성이나 요동성 같은 도시적인 성곽이나 이들 성을 중심으로 한 사원지(寺院址)와 불교미술들, 그리고 무덤과 무덤벽화 등에 잘 남아 있다. 만주 일대의 고구려 옛 영토에는 수많은 성(城)들이 있었다. 성은 당시의 지방 중심이자 도시였으며, 방어진지를 겸하고 있는 군사도시였으므로 문화의 집산지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모든 문화는 이러한 성곽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가운데 수도(首都)는 나라의 중심지로 최대의 도시였음이 분명하다. 첫 번째 수도는 졸본(卒本)이었으나, 제2대 유리왕 22년에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였다. 현재의 집안 통구지역에 해당되는 곳인데 국내성과 환도(丸都, 일명 산성자)산성 등 두 성이 있다. 이 두 성이 약간의 이동은 있었겠지만 427년(장수왕 15) 평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장기간에 걸쳐 고구려의 수도 구실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국내성에는 역대에 걸친 고구려 문화 유적이 산재하고 있으며, 이 지역 일대에는 수많은 유적과 유물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밖에 고구려의 국력을 상징하던 요동성과 안시성, 백암성(白巖城)과 신성(新城), 용성(龍城: 지금의 조양)과 숙군성(宿軍城), 부여성과 남소성 등은 강대한 고구려의 국력과 광활한 국토를 단적으로 알려 주는 성곽 도시들이다. 이 가운데 요동성과 안시성 등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요동성에는 육왕탑(育王塔)을 비롯하여 많은 불교 사원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듯이, 중국 문화를 수용하던 문화의 중심지였을 뿐더러 광개토대왕이 직접 친행했던 것으로 보이는 국방의 요충지로, 수 · 당의 침략 때 최선의 방어를 한 유명한 국방도시였다. 안시성 역시 당군의 침략 때 선전분투해서 당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유명한 도시였다.

이러한 성곽 도시들은 오늘날 대부분 폐허로 변하여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있는 예도 많으며, 남아 있는 경우도 심하게 파괴되어 있는 형편이다. 앞으로 이러한 고구려 성곽 유적들은 치밀한 발굴에 의해 그 전모를 드러내야 할 것이며, 이러한 발굴은 우리나라 조사단과 합작으로 이루어져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환도산성, 이른바 산성자산성은 현재 7㎞에 달하는 거대한 석축성곽이 남아 있어서 당시의 광대했던 성곽 규모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국내성은 집안 시가지 주위에서 발굴되었는데, 거대한 석축성곽이 나타나 당시의 규모를 알 수 있게 되었지만, 유물이나 기타 도시 유적에 대해서는 좀 더 상세한 발굴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성곽과 함께 고구려의 무덤(고분)과 비석도 만주 전 지역에 걸쳐 산재해 있지만, 국내성 일대에 가장 많이 남아 있다. 특히 국내성 부근에 있는 장군총(將軍塚)과 대왕총(大王塚)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장군총은 광개토대왕비 동북쪽에 축조된 거대한 무덤인데, 7층 5단씩 쌓은 석축무덤이다. 피라미드처럼 생겼다고 하여 피라미드형이라 불리는 이 석축무덤은 이집트의 피라미드, 마야의 석축제단 등과 함께 석축문화의 장관으로 높이 평가될 수 있다. 이러한 석축무덤은 서울 방이동 일대와 충주지방에까지 전파된 독특한 고식(古式)무덤이어서, 우리 문화의 유적으로 크게 주목되고 있다.

이 장군총과 인접한 곳에 있는 광개토대왕석비는 장군총과 함께 고구려의 영광과 위엄을 과시하고 있는 석조문화의 대표적인 예이다. 높이 6m의 우람한 자연석에 새겨진 이 비석에는 1,775자 정도 되는 광개토대왕의 생애에 얽힌 갖가지 사건이 잘 정리되어 있다. 광개토대왕의 생애는 결코 단순한 개인의 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곧 고구려의 발전사이며, 나아가 우리나라의 흥륭사여서, 이 비석은 우리나라 역사 발전의 큰 획을 긋는 중요한 유적이라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서 삼국간의 역사는 물론 북중국과 만주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와 바다 건너 일본의 정세까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실로 중대한 사료인 셈이다. 더구나 일본인들은 여기에 적힌 글자를 변조 또는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해석하여 일본 중심적인 이해를 하는 데 급급한 편이다. 그들은 몇 자의 단문에 집착하여 역사 왜곡도 서슴지 않고 있으며, 이것은 중국인들의 이해와도 어느 정도 맞아 그 기세가 더욱 확산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우리 학자들의 대응도 활발하지만, 앞으로 좀 더 신중하고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우리 손으로 바른 해석을 이루어내야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고구려의 벽화고분들과 기타 고분군들이 집안을 중심으로 수없이 산재해 있다. 집안에 있는 고분만 하더라도 1만 기(基) 이상이며, 전 만주 일대에 걸쳐서는 10만 기 이상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집안 일대의 벽화고분만 하더라도 모두 19기가 알려져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장천(長川)1호무덤, ② 장천2호무덤, ③ 모두루무덤[牟頭婁塚], ④ 환문무덤[環文塚], ⑤ 무용무덤[舞踊塚], ⑥ 씨름무덤[角抵塚], ⑦ 산연화무덤[散蓮花塚], ⑧ 오회분(五盔墳)4호무덤, ⑨ 오회분5호무덤, ⑩ 사신무덤[四神塚], ⑪ 삼실무덤[三室塚], ⑫ 통구12호무덤, ⑬ 우산하(禹山下)41호무덤, ⑭ 산성하(山城下)332호무덤, ⑮ 산성하983호무덤, 귀갑무덤[龜甲塚], 미인무덤[美人塚], 만보정(萬寶汀)1368호무덤, 마선구(麻線溝)1호무덤 등이다.

기존의 고분벽화무덤으로는 귀갑무덤이나 씨름무덤, 무용무덤이나 사신무덤 같은 것이 유명하다. 귀갑무덤은 단실형의 무덤으로 주인공의 실내생활도가 왼쪽 벽에 그려진 일종의 인물 풍속도 그림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장식무늬가 공존하는 것이 특징인데, 이 무덤은 귀갑무늬가 특징 있게 표현된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산연화무덤이 있는데, 연꽃무늬가 산화(散花)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장식무늬가 그려진 무덤 가운데 가장 이른 무덤은 만포진 대안에 있는 환문무덤인데, 각 벽면에 20여 개의 동일한 둥근 무늬가 그려진 것이다.

씨름무덤은 우산의 남쪽 기슭 경사지에 무용무덤과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현실(玄室)과 전실(前室)로 구성된 쌍실무덤인데, 현실 정벽(북쪽)에는 주인공과 2인의 부인이 있고, 주위로 시종들이 시립하고 있는 생활풍속도가 있다. 동벽에 있는 풍속도가 이 무덤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중앙에는 새가 앉아 있는 성스러운 나무, 왼쪽에 부엌, 오른쪽에 씨름하는 모습이 그려진 재미있는 풍속도이다.

무용무덤은 외형은 씨름무덤과 흡사하지만, 내부는 현실 · 통로 · 전실 · 연도가 연속적으로 배치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벽화는 전실에서부터 현실까지 전면적으로 그려진 것인데, 정벽(북동쪽), 오른쪽 벽(북서쪽), 왼쪽 벽(남동쪽)에 걸쳐 연회장면이 연속적으로 그려져 있다. 북벽에는 장막이 드리워진 방에 주인공과 부인이 승려에게 공양하고 있으며, 각 상마다 음식물이 진수성찬으로 차려져 있고, 오른쪽 벽에는 소달구지를 탄 2인의 승려와 사냥 장면, 왼쪽 벽에는 기마인물상과 춤추는 무희들이, 천장에는 일월성신들이 무덤을 장식하고 있다.

사신무덤(통구사신총, 通溝四神塚)은 네모 부채꼴의 단실 무덤형식인데 주벽에 사신도가 두드러지게 그려져 있고, 배경은 비운문(飛雲文)으로 가득 메우고 있다.

이들 외에 새로 발굴 · 조사된 벽화무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장천1호무덤이다. 무덤은 집안 동북 45㎞에 위치한 분지에 있다. 남쪽으로 압록강에 면해 있고, 세 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이 분지에는 강가 작은 구릉 상에 120여 기의 적석무덤과 봉토무덤군이 있는데, 구릉 위의 제일 높은 곳에 가장 거대한 봉분이 바로 장천1호무덤이다. 벽화는 전실 · 현실의 4벽 · 연도 · 천장 · 석문 정면 · 관 위에까지 묘사되고 있어서 현란한 채색의 세계를 연출하고 있다. 현실 남벽에는 무덤 주인공 부부와 가무공연 장면이 그려져 있고, 동벽에는 높은 수미대좌 위에 앉은 불상과 부처에게 예배하는 주인공 부부, 두 권속, 그리고 비천과 연화생(蓮花生) 장면이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은 고구려 불교의 실상과 불상의 수용 및 특징을 가장 생생하게 알려 주는 확실한 예로서 크게 주목되고 있다. 이러한 벽화고분들은 수많은 고분군 속에 위치하고 있어서 이들 전체 무덤도 크게 주목되고 있으며, 이들 무덤들이 발굴되어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 졸본 옛터로 알려진 환인(桓仁)지방에서도 현재 750여 기의 적석무덤들이 발견되었고, 고력자촌 적석대묘 등 44기 이상이 발굴되었는데, 유물은 철제품과 은제품들이 대부분이다.

두 번째 수도 국내지방에서도 1만 기 이상의 고분군이 조사되었는데, 집중적으로 분포된 곳은 우산하고분군 · 산성하고분군 · 만보정고분군 · 칠성산고분군 · 마선구고분군 · 하해방고분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 가운데 발굴된 고분에서는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우산하68호분에서는 향토(정, 鼎) · 시루(증, 甑) · 솥(부, 釜) · 대야(세, 洗) 등 4점의 청동기가 출토되었는데, 중국 서진시대의 것과 연관이 있는 세련된 작품들이다. 우산하3319호무덤에서 발견된 ‘丁巳(정사)’ 명(銘) 수막새 기와와 인물 상반신 화상석 등도 주목되며, 우산하1080호무덤에서 출토된 금동제 장신구들과 당시의 문화상을 연관시켜 보면 흥미를 끌게 된다. 산성하159호와 152호무덤에서 출토된 금동혁대금구(金具)도 무늬와 형태에서 주목된다.

만보정1078호무덤에서 출토된 금동제 마구, 특히 말안장 4점은 신라나 가야 지방 말안장과 연관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와 함께 칠성산1196호무덤에서 출토된 금동제 말안장과 청동기들도 고구려 문화의 실상을 잘 나타내 주는 중요한 작품들이며, 삼국과 중국의 교류관계를 단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 밖에 국내성과 요동성 등지에는 많은 절터들이 남아 있겠지만, 현재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 전모를 밝힐 수는 없다.

백제도 산동반도(山東半島) 일대에까지 진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백제 문화의 흔적이 중국 땅에 남아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점은 앞으로 치밀한 연구와 발굴이 있어야만 알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백제는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에 사절과 승려를 통하여 전파된 백제 문화의 자취를 찾을 가능성도 있다.

신라는 중국과의 교류가 삼국에서 제일 늦었지만 한강 유역을 확보한 6세기 중엽부터는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고신라 때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절이 중국에 건너갔고, 승려들도 수없이 내왕하였다. 원광(圓光)과 자장(慈藏) 등은 대표적인 예인데, 이들이 수도했던 여러 절에는 그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을 테지만 현재로서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부터는 중국 전역에 신라 문화의 발자취가 보다 짙어진다.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이 그들의 문화를 이역만리에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천룡산 석굴(天龍山 石窟)이 크게 주목을 끈다. 이 석굴은 백제의 명장이었던 흑치상지(黑齒常之)의 딸 흑치씨와 고구려 유장 순(珣) 부부에 의해 조성되었던 것인데, 우리 유민에 의해 조성되었기 때문에 얼마간은 우리나라의 조형 의지가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 불상들은 중국 당나라 최고의 사실조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기 때문에 특히 주목된다. 중앙아시아 일대를 제패했던 고구려의 유장 고선지(高仙芝)도 고구려 문화의 발자취를 어느 정도 남겼을 것이며, 고구려적인 기질을 은연중에 서역과 인도에까지 심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예에서 보다시피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이 중원과 일부 중국 일대에 걸쳐 그들의 문화를 남긴 것은 분명한 일이지만 그 구체적인 발자취는 앞으로 좀 더 검토 · 조사되어야 할 것이다.

통일신라 때는 신라 문화가 중국 문화에 더욱 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산동 적산 일대와 장강 일대에 신라의 교포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적산의 신라방은 대표적인 신라 거류민들의 거류지였고, 여기에 있던 법화사(法華寺)는 신라 문화의 중국 쪽 전진기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절에서 행해지던 의식과 생활습관, 즉 사찰의 의식주생활은 물론 예배대상인 불상과 불화까지도 신라식이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일본 승려 엔닌[圓仁]의 기행문에서 어느 정도 그 내용이 밝혀져 있지만, 거류지 신라방의 문화 또한 신라 문화를 그대로 이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張保皐)의 해상을 통한 무역활동도 단단히 한몫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천룡산 석굴 조성과 비슷한 경우는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중국의 가장 유명한 석굴사원인 용문석굴 가운데 ‘신라석굴’이라는 석굴이 있는 것이다. 아마도 신라의 승려가 조성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사실 신라 승려들은 중국 전역에 있는 유명 · 무명의 각 사찰에 머물거나 사찰을 조성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나라 왕실의 극진한 예우를 받은 원측법사(圓測法師)가 수도 장안에 있던 서명사(西明寺)의 개창 조사가 된 이후 많은 유학승들이 신라의 문화를 중국의 사찰에 심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그들의 바랑 속에는 신라의 생활용구 · 책 · 불상 들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문물은 신라 승려들의 정신문화까지도 중국 속에 전파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서안의 흥교사에 안치된 원측법사탑도 이러한 예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9세기 중엽 회창폐불사건(會昌廢佛事件)으로 신라 승려들이 대거 귀국하면서 당나라 유학승들은 훨씬 축소되고 만다. 신라의 공식 사절과 그들이 가져간 예물들이 중국의 당 문화에 얼마간의 영향을 끼쳤을 것이고, 이들 유물들이 현재도 남아 있을 가능성이 짙다. 그 간접적인 예가 몇 가지 있다. 당건릉(乾陵)에 배치된 신라사절상(新羅使節像)은 당에서 만든 것이지만 신라인의 발자취이므로 우리의 주목을 끌고 있다. 건릉의 배총 장회태자 묘에도 신라 사절상으로 보이는 사절상이 있으므로, 신라 사절들의 대단한 활약상을 단적으로 알려 주고 있다. 그들은 유학생들과 함께 1년 내지 수년 이상 중국에 체재하면서 당 조정 내외에 걸쳐 활발한 교류활동을 전개하여 일종의 주중 외교사절 격이었으므로 그들이 가져간 교류문물, 가령 정교한 만불산(萬佛山), 순금불상 등의 교역에 의해 신라 문화는 어느덧 당에 상당히 뿌리를 내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하였다. 그러한 유적과 유물이 만주 일대 곳곳에 산재해 있다. 발해 문화의 성격을 가장 잘 알려 주는 것은 수도이다. 발해의 수도는 네 곳이 있다.

첫 번째 수도는 길림성 돈화(吉林省敦化)오동성이고, 두 번째가 중경 현덕부(中京顯德府), 네 번째가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이며, 세 번째 · 다섯 번째가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이다.

이 상경은 3대 문왕(文王)이 755년에 옮긴 뒤 몇 년간 동경에 이도한 것 외에 계속 수도로 군림했기 때문에 발해 문화의 정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외성과 내성으로 구성된 이 도시는 중국 당의 장안성과 맞먹는 굉걸하고 화려한 도시였다고 한다. 내성 안에는 궁성(주위 길이 2.5㎞)이 있는데, 금란전 등 5기의 궁전지가 있고 1기의 문루가 남아 있다. 내성에는 관청건물이 있었지만 현재는 담장(45㎞)과 금원(禁苑)만 남아 있다. 외성은 시민들의 거주지였으므로 주택 · 가로 · 사원들이 있었는데, 현재 성곽과 가로, 절터, 불상과 석등들이 남아 있다. 성곽은 둘레가 17㎞ 이상이며, 가로는 5줄의 대로(40m)가 바둑판처럼 나 있고, 절터도 10곳이나 남아 있다.

이곳에 남아 있는 석불상과 석등이 융성했던 발해 불교문화의 자취를 단적으로 알려 주고 있다. 석불상은 1.8m 높이의 좌불상으로 여러 차례 파손되었으나 현재는 보수되어 원래의 위치에 있으며, 석등은 6m 높이의 거대한 것인데 상 · 중 · 하대와 화사석까지 완전한 웅장한 석등이다. 또한 금동불 · 동불 · 철불 · 도자불과 소조불이 대량으로 출토되었고, 4겹의 사리함도 1975년에 출토되어 발해 문화의 수준을 알려 주고 있다.

이 밖에 많은 성곽 유지들이 있는데, 돈화의 고성지(오동성 · 석호산성 · 흑성토성 · 마권자산성 · 성산자산성 · 남대자산성) 9곳이 조사되어 많은 유물과 건물지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많은 성곽들도 남아 있다. 발해의 고분들 또한 많은 양이 산재해 있는데, 이 중 돈화육정산(六頂山)의 100여 기 가운데 발굴된 정혜공주무덤(貞惠公主墓) 등이 유명하다. 또한 고구려 무덤형식을 계승하고 있는 단실묘들이 많은데, 정혜공주무덤이 가장 완전하게 남아 있다. 집안의 고구려 모두루무덤과 비슷한 형식이어서 고구려 문화가 계승되었음을 잘 알 수 있다.

특히 여기서 출토된 묘비는 발해의 성립과 성격 등 발해 역사를 밝힐 수 있는 귀중한 예이며, 석사자등은 발해의 문화를 가늠할 수 있다. 여러 고분에서 출토된 금귀고리 · 토기 · 기와 · 옥류 등도 초기 발해 문화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새로이 발견된 무덤벽화도 발해 문화의 진면목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송·원(宋元)시대와 고려시대

고려와 송 · 원과의 교류 역시 대단히 활발하였다. 고려에서도 송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송에서도 고려의 문물을 상당히 많이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령 송에서 불교 서적을 대량으로 수입해 간 것은 그 단적인 예이다. 원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빈번하였다. 고려의 사경승들을 대거 유입해 갔으며, 각종 문물들도 가져갔던 사례들이 많이 있다. 그 예 가운데 하나가 북경에 있는 금자사경(金字寫經)이다.

명·청(明淸)시대와 조선시대

조선과 명과의 관계는 건국 때부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래서 명의 문화도 물밀듯이 밀려왔지만 조선의 문화도 중국에까지 전파되었다. 조선의 사신 일행들은 연간 몇 차례씩 명에 파견되는데, 황엄이 가져간 사리와 법화사불상의 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때 조선의 문물이 대량으로 넘어갔다. 또 조선의 문인 사대부들과 중국의 학자들이 긴밀하게 교류했으므로 조선의 문화유산이 중국에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청의 문화는 강희 · 건륭의 문화융성기 이후 북학파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으며, 그 이후 고증학파들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조선의 문화도 척화파들의 강제 체류 이후 은연중에 심어졌고, 사신외교에 의해서도 어느 정도 전파되었을 것이다. 산둥에 있는 조선 학자의 비석의 존재 등은 그 단적인 예라고 하겠다.

한인(한민족)의 이주와 교포사회

1999년 6월까지 중국 대륙에는 204만의 교포들이 길림 · 흑룡강 · 요령 등지에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었고, 전체 교포의 60% 이상이 길림성에 모여 있었으며, 내몽고 자치구에도 소수의 교포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5년 1월에는 192만6017명의 교포들이 있었으며, 수교에 따른 체류자도 늘어나 당시(1995.1.) 1만4381명에 이르고 있다.

이들 교포들의 초기 이주는 대부분 식량과 인삼 채취 및 비옥한 농토를 찾기 위한 것으로, 주로 경제적 요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1907년 제2차 한일협약과 1910년 한일합병조약의 강제 체결 이후 일본 통치에 반대하는 의병, 군인들과 관리, 교육자 및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정치 지도자들이 간도지역으로 이주하였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동양척식주식회사가 한국에 대거 투자하고, 일본 농민을 한국으로 대거 이주시킴으로써 남한 각지의 소농민들이 농토를 잃게 되었으며, 이들 농토를 상실한 농민들이 보다 저렴한 간도 · 흑룡강 지역 등으로 농토를 찾아 이주하여 주로 벼농사에 종사하게 되었다. 특히 일제강점 이후 조선총독부에 의한 간도 한인의 보호정책과 대륙정책의 일부로 나타난 계획적인 일본의 한인 이주정책은 한국인의 만주 이주활동을 더욱 촉진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당시 한인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였고, 중국 지주에 예속된 소작농들이었으며 일부는 상업에 종사하였다. 고향을 떠나 살아야 했던 특수한 환경 속에서 정신적인 의지가 절실하였고, 이에 따라 만주의 한인사회에서는 종교와 신앙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컸으며, 특히 기독교가 가장 왕성하였다.

중국 내의 한인들은 그 이주 배경과 한국의 민족독립운동에 특별한 구실을 했던 배경에서 초기 1세대의 경우 한국에 대한 모국관념이 대단히 강하였고, 이에 따라 중국에 대한 이심력과 저항이 강하게 나타났던 것이 중국 내 다른 토착소수민족과 다른 점이었다.

그러나 이들 초기 세대가 지나가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들의 자손들인 2 · 3세대의 한인들은 한국에 대한 모국관념이 약화되고 있고, 이에 따라 중국 내 한인사회에서 민족관과 국가관이 구별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즉, 제1세대와는 달리 이 젊은 세대들은 민족적으로는 한민족이지만 한국을 조국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약화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중국 내 한인들은 중국인이나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 월등히 높은 교육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경제생활도 비교적 발달되어 있다.

또한, 소수민족에 대한 중국 정부의 적극적인 보호정책에 따라 중국 내 한인사회는 한국 고유의 전통 · 언어 · 관습 · 문화 등을 잘 유지, 발전시켜 가고 있으며, 민족적 자부심도 강하게 지니고 있다. 특히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접경하고 있는 연변(延邊)은 조선족자치주를 형성하고 있으며, 한국 교포가 80만 명이나 집단 거주하고 있다. 또 연변에는 1,900명의 학생이 있는 연변대학 등 한인사회의 인재를 양성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하는 고등교육기관들이 있으며, 특히 연변대학의 경우 재학생의 70%와 교직원의 80%가 한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학 연구 현황

타이완에서의 한국학 연구는 정치 이데올로기와 관련하여 볼 때 그 대상이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나, 주로 한국의 독립운동에 관한 연구분야에서 성과가 있다. 한편 중국에서 학문적 연구 대상으로서의 한국학은 그 범위와 수준에서 미국 · 일본 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낙후되어 있다. 이것은 과거 중국 사회에서 혁명적 이데올로기 성향이 강하였고, 또 문화대혁명과 같은 극단적인 좌경노선으로 객관적인 학문 연구 풍토와 기반이 취약했던 데다가, 특히 중국과 북한은 상호 혈맹적인 혁명적 유대관계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한국학에 대해 객관적으로 연구하기가 어려웠다.

실용주의 정책노선이 나타나기 시작한 1979년 이전까지 이루어졌던 한국에 대한 부분적 연구도 북한과의 혁명적 혈맹관계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범위와 방향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당시 한반도 특히 남한에 대한 연구는 긍정적 측면보다는 남한 사회의 모순과 부정적 측면에 대한 연구가 초점이 되었다.

그러나 1979년 이후에 나타난 중국에서의 개혁실용주의노선은 정치와 학문연구의 엄격한 분리를 가져왔고, 이에 따라 중국에서의 한국학 연구 방향에도 많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 특히 중국에서의 현대화 노선은 남한 경제발전 모델 등 한국 및 한국학 연구에 관심을 불러일으켜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에 따라 1980년대 말에 중국에서는 외교부 부설 국제문제연구소의 아세아태평양연구실, 국무원 산하 현대국제관계연구소의 동아연구실, 상해국제문제연구소의 일본연구실 및 사회과학원 세계경제정치연구소 등 정책 · 학술 연구기관과 북경대학의 아시아 · 아프리카연구소, 길림대학의 조선연구실 등 일부 대학의 부설 연구소에서는 한국의 경제를 비롯한 정치외교 · 국제정세 · 남북한관계 등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특히 북경대학에는 동방어문학과 내에 조선어문조(朝鮮語文組)가 있어 한국의 언어 · 문화 · 역사 등을 가르치고 있으며, 연변대학 내에는 남북한의 경제 · 철학 · 역사 · 어학 · 문학 · 교육을 연구하는 조선연구소를 비롯하여, 민족연구소 · 고적연구소 등 한민족의 특수성을 연구하는 여러 학술연구소가 있다.

그리고 1992년부터 1999년 말 상해 복단대학에 한국학강좌 운영지원사업을 우리나라에서 계속 벌여오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중국 북경대학, 북경어언문화대학, 산동대학, 연변대학, 요녕대학 등에 한국학 관력 객원교수제를 도입하여 우리나라에서 이들을 지원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학 관련 자료들이 일정량 소장되어 있는 복단대, 북경대, 북경어언문화대 등에 관련 자료를 체계화 하는 데 드는 제반 경비를 일정 부분 지원하고 있다. 이어 요녕대 · 북경대 · 북경어언문화대 · 복단대 · 인민대 · 중앙민족대 · 연변대 · 항주대 · 산동대 · 길림성사회과학원 · 상해사회과학원 · 타이완한국연구회 등에서 수행하는 각종 한국연구프로그램을 우리나라에서 지원하고 있다. 한편 한글로 된 『연변일보』를 비롯하여 『천지』 · 『아리랑』 · 『문학예술연구』 · 『은하수』 · 『장춘문예』 · 『노다지』 · 『진달래』 등 한글 잡지들이 발간되고 있다.

1980년대 중국 내에서 중국조선사연구회 · 중국조선언어연구회 · 중국조선문학연구회 · 중국남조선경제연구회 · 중국조선정치경제연구회 등 다방면의 한국학 관계 학술단체들이 설치된 바 있는데, 이것은 1970년대 후반 이후 중국에서의 한국학 연구에 대한 관심의 증대와 발전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편 1990년대 국교 이후 양국이 우호증진에 따라 1999년 이래 북경대 · 북경어언문화대 등에 한국국제교류재단 주관 하에 한국학 연구와 관련된 사업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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