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무제에 대해 궁급합니다!* (급함) 내공 150

*한 무제에 대해 궁급합니다!* (급함) 내공 150

작성일 2021.04.22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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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하다 중국의 한 무제(전한) 시기에 대해 근본적으로 궁금해져서 물어봅니다 자세히 답변 해주시면 좋겠어요.

1. 한 무제의 활동 및 업적이 무엇이 있는가? (많을 수록 좋음)

한 무제의 활동 및 업적:

2. 각각 해당하는 한 무제 (전한)시기에
일어난 활동에 대해 알려주세요 최대한 많이 !!
ex) 경제: 평준법, 정치: 군현제 확대 등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국제: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대체로 인간이란 처음에는 부지런하다가도 나중에는 게을러진다. 아무리 강직한 사람이라도 마침내는 해이해지기 쉽다.(…)임금이란 부지런하고 검소해야 정치를 잘할 수 있다. 문제(文帝)와 경제(景帝)는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성공하였으나, 무제(武帝)는 방종하고 지나친 욕심을 부렸기 때문에 실패하였다.” 1430년, 한무제 이후 약 1500년 뒤, 조선의 세종은 신하들과 경연을 벌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를 거울 삼아, 평생 초심을 잃지 않으며 나라 다스리기에 부지런하고 검소하고자 애썼다.

유교, 제국의 중심에 서다

유학자들의 이상에 가장 가까운 군주였던 세종의 평가처럼, 한무제는 유학자들에게는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초기에는 동중서(董仲舒)를 기용하고 유교를 국교화하는 등 “훌륭한 업적”을 이루었지만, 만년에는 진시황처럼 무리한 정복 사업과 건축 사업, 사치스러운 생활, 불로장생에의 헛된 욕망 등으로 정치를 그르쳤다는 것이다. 이런 평가도 일리가 있지만, 한무제의 손에 의해 비로소 중국은 동북아시아의 한 국가를 넘어 세계제국으로 발돋움했다는 것이 현대 역사가들의 일반적인 평가이기도 하다.

중국 제7대 황제, 한무제 유철은 기원전 141년에 16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말로는 이렇게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로 그의 즉위까지는 곡절이 많았다. 그는 부황 경제(景帝)의 열한 번째 아들이었으며 그나마 후궁의 소생이었다. 적장자 승계 제도를 원칙으로 했던 한나라에서 그가 황제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 왕씨(효경황후)는 야심이 크고 모략에 뛰어난 여인이었다.

그녀는 먼저 경제와 매우 친하여 권세가 대단했던 경제의 누이 장공주의 딸과 유철을 혼인시킨 뒤, 장공주와 힘을 합쳐 황태자와 그의 모친 율희를 모함해 결국 황태자가 폐위되고 얼마 후 자살하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경제와 사이가 좋았던 경제의 동생 양왕 역시 함정에 빠트려 황위 계승 후보에서 탈락시켰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유철에게 옥좌가 돌아갈 수 있었다.

한무제는 즉위 당시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소년이었으나, 즉위 직후 널리 바른 정치를 하기 위한 대책을 묻고, 여기에 응한 동중서의 대책을 답변확정함으로써 유교를 중국의 국교로 만드는 길을 열었다. 한나라를 세운 한고조 유방은 본래 서민 기질, 무인 기질이 두드러져 유학자들을 좋게 보지 않았다. 게다가 진나라의 혹독한 정치와 초-한대전의 후유증에 시달려 기진맥진해 있는 백성들을 달래려면 도교의 자유분방함이 좋다고 여겼다. 그래서 한나라는 원래 도교(정확히 말하면 전설상 인물인 황제 신앙과 결부된 황로학(黃老學))를 존중하는 왕조로 출발해서 그때까지 이어져 왔다. 하지만 무제는 유교를 대신 내세우려는 의지가 강했는데, 천하에 두루 황제의 위엄을 과시하고 통치권력을 체계화하려면 유교가 적합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진시황을 본받아 사상 통제를 할 필요성도 느꼈는데, 다만 지나치게 엄격한 법가보다는 더 온건하고, 지나치게 느슨한 황로학보다는 더 질서정연한 유교가 알맞아 보였다.

이는 단순히 사상의 문제만도 아니어서, 어린 황제가 유교를 진흥하려 한다는 말이 퍼지자 황로학을 받드는 무리가 무장을 한 채 대궐 문 앞에 새까맣게 모여 소요를 일으키기도 했다. 또 황로학의 열렬한 신봉자였던 무제의 할머니, 두태후가 손자의 ‘철없는’ 행동을 바로잡겠다고 나섰다. 무제는 할 수 없이 유교의 국교화를 늦출 수밖에 없었으나, 그런 반발은 유교를 기필코 진흥하겠다는 그의 결심을 굳혀 주었다. 신하들이 감히 황제의 명령을 정면으로 치받는다거나, 아무리 태후라도 여자가 정치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일은 유교의 가르침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기원전 135년에 두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무제는 지체없이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설치하고 최초의 유교식 학교인 명당(明堂)과 태학(太學)을 건립하는 등 자신의 뜻을 거침없이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두태후의 일족을 숙청하고, 황로학을 따르는 나이든 대신들도 새롭게 갈아치우며 조정을 본격적으로 장악해갔다. “하나로 통일된 대제국”으로서의 중국은 진시황이 처음 틀을 잡았지만, 그 대제국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유교를 받드는 전통은 한무제가 시작한 것이었다.

고비사막에서 대동강까지

그러나 무제가 무제(武帝)라 불리는 이유는 그가 외치(外治) 쪽에서 거둔 눈부신 업적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부터 중국의 북방에는 흉노라는 막강한 위협 세력이 있었다. 통일 제국인 한나라도 이를 감당하지 못해, 한고조 시절에 정벌하려다 그만 거꾸로 포위를 당한 끝에 겨우 풀려난 이후로는 매년 거액의 뇌물을 바치거나 황실의 여자를 보내는 일로 그들의 침입을 달래 오는 처지였다.

한무제는 ‘천자(天子)’ 체면을 형편없이 구기고 있는 이 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하기로 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군사조련에 힘쓰고 유능한 장군을 물색하여 발탁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한 뒤, 기원전 129년부터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을 비롯한 명장들을 앞세워 흉노를 맹공격했다. 이는 큰 성공을 거두어 흉노는 고비사막 저편으로 쫓겨간다. 그런데 흉노 공략에 앞서 마음을 놓을 수 없던 무제는 고비사막 저편에 있다는 서역(西域) 나라들과 동맹을 맺고자 장건(張騫)을 파견한다. 장건은 기원전 139년에 수도 장안을 출발해 흉노의 포로가 되는 등 우여곡절을 거쳐 13년 만에 귀국한다.

장건에게서 대월지, 대완, 대하, 강거, 누란, 오손, 신독 등 무려 60개에 달하는 서쪽 나라의 존재를 전해 들은 무제는 “만 리에 걸쳐 국토를 넓힐 기회다” 하며 먼저 장건에게 서역 나라들을 설득해서 한나라에 조공하게 하도록 임무를 주었다. 이는 실패했으나 다시 오손과 동맹을 맺는 일로 장건을 파견했고, 이는 성공했다. 무제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서역 국가들을 세력권에 포함시키려 했는데, 특히 기원전 104년에는 이광리에게 6만 명의 군사를 주어 대완을 정복하게 했다. 이는 중국의 판도 확대에 그치지 않고, 동서간 교류의 젖줄인 비단길(실크로드)이 본격적으로 열림을 의미했다. 한무제 시대에 한제국은 서역만이 아니라 동서남북으로 두루 뻗어나갔다. 동쪽에서는 민월과 동월을 정복하고, 남쪽에서는 남월을 무너트렸다. 그리고 기원전 108년에는 4년간의 전쟁 끝에 왕검성을 함락시키고 조선을 멸망시켰다.

영광의 그림자는 길다

이처럼 문과 무 양쪽에서 빛나는 업적을 이룩한 무제였으나, 말년에는 근심과 고민이 끊이지 않았다. 거대해진 제국을 유지하고 계속되는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해 무제는 새로운 농업생산량 증대 기술을 도입하고, 소금과 철을 전매했으며, 물가 조절을 빌미로 균수법(均輸法)과 평준법(平準法)을 실시해 상인들의 호주머니를 긁었다. 그래도 재정은 지속적으로 모자랐는데, 무제가 대규모 건설에 취미를 붙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열여덟에 불과하던 즉위 2년째부터 자신의 능을 건설하게 했는데, 그 규모는 진시황의 여산릉에 버금갔다. 말년에는 미앙궁과 장락궁을 놔둔 채 새로 크고 화려한 건장궁을 건축하고 또 별궁을 이곳 저곳에 지었으며, 거액의 비용을 들여 태산에서 봉선(封禪) 의식을 거행했는데 천자의 위엄을 보이는 목적 외에도 그것이 불로장생과 연결된다는 속설이 작용했다고 한다. 그렇게 낭비를 거듭하다 보니 백성들에게 부담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30년쯤 뒤 하후승은 그런 피해를 “온 백성이 유랑민이 되고 그 절반은 죽었으며, 풍년이 들어도 기아를 면치 못해 서로 아이를 바꾸어 잡아먹었다”고 묘사했다. 이는 과장이 지나친 표현인 듯하지만, 당시에 벌써 지나친 사치와 낭비가 한무제의 명성에 먹칠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스스로가 후궁에서의 음모의 결과 옥좌에 앉았기 때문인지, 옥좌를 둘러싼 음모와 유혈사태가 그치지 않았다. 기원전 122년부터 종실인 회남왕, 형산왕, 강도왕의 반역 음모가 차례로 발각되어 처형이 줄줄이 이어졌는데, 2만 명이 넘는 사람이 한 자리에서 처형되기도 했다. 기원전 91년에는 태자가 역모를 꾸민다는 모함을 받자, 처벌되기 전에 선수를 치고자 정말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자살했다. 무제는 태자의 모후인 위황후(흉노 토벌의 영웅 위청의 누나였다)를 폐위시키고 처형했으며 위씨 일족과 태자의 친지들도 숱하게 처형했다.

창읍애왕이 새 후계자로 낙점되었으나 그는 병사했다. 결국 마지막에 새로운 태자로 책봉되어 무제 사후에 제위에 오른 사람(한소제)은 유불릉(劉弗陵)이었는데, 무제는 그를 태자로 정하자마자 모후 구익부인을 죽였다. 과거 한고조 사후에 여후가 어린 왕을 끼고 권력을 농단한 일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고 한다. 그러나 소제는 즉위 후 곧 병사하고 창읍왕이 뒤를 이었으나 곽광(또 하나의 영웅인 곽거병의 동생이었다)이 그를 폐위시키고 무제 때 반란을 일으켰다 죽은 태자의 손자를 대신 황제로 세우고는 한동안 권력을 농단했다. 유교를 높이 받들었지만 정작 유교가 강조하는 근검절약과 애민 정신, 그리고 한 핏줄끼리의 우애와 신뢰는 거의 실천하지 않았던 한무제. 그러기에 그의 말년은 쓸쓸했으며,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제왕이 닮지 말아야 할 군주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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