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마르크와 상앙

비스마르크와 상앙

작성일 2019.10.17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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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혈재상인 비스마르크와

중국사에서 철의 재상으로 꼽힐 수 있는 상앙이

비슷하게 추구한 점, 행동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또 고대의 사람과 근대의 사람이 비슷하게 행동하게 한 이데올로기(?) 등의 설명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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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앙

효공의 열렬한 지원을 받아 상앙은 법치 철학에 근거한 여러 가지 개혁을 실행하였다. 상앙은 군제, 세제, 법제를 정비하고 토지제도와 군현제를 시행하는 대개혁을 단행했다. 이로 인하여 진나라는 주변국에서 군사강국인 중앙집권 국가로 변화하였다. 행정적 변화는 농업에 중점을 두어 진행되었으며 귀족의 권력은 줄어들었다.

상앙은 그렇게 진나라가 전국시대를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으며 그 덕분에 옛날 진(晉)나라에 빼앗겼던 황하 이서 지역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비스마르크

독일 제국의 수립 이후 비스마르크는 숙적 프랑스가 세력을 재건하여 독일에 복수할 가능성을 극도로 경계했으며, 이에 따라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것을 외교 정책의 제1 과제로 삼았다. 또 비스마르크가 평생 일관되게 관철한 외교 철칙은 "외교란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다."라고 전해지며, 프랑스의 고립도 이 수준의 원칙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영국이 각지의 식민지 확장 등으로 기타 강대국들과 갈등이 심한 가운데 유럽 내에서는 중립적 태세를 취하자, 공통의 이해 관계가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손을 잡는 동시에 친러시아 정책을 펴면서 프랑스의 우방국이 될 만한 강대국 자체를 없애버린 것이다. 통일 이후에는 전쟁을 벌였던 오스트리아와 관계를 회복시키고 프랑스를 고립시켰으니 비스마르크의 외교력이 어떤 수준이었는가를 잘 나타내주는 사례다. 이렇게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러시아 사이에 맺어진 동맹 관계를 3제 동맹이라고 하는데, 세 국가가 모두 제정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19세기 후반 유럽 내 세력 균형의 효시로 평가된다.

그러나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범슬라브주의적 팽창을 시도하면서 잦은 위기가 벌어졌는데, 1877년 러시아-투르크 전쟁 당시 러시아의 지지를 받는 발칸 국가의 영토 확장을 베를린 조약을 통해 축소시키면서 갈등이 심각해져 한때 3제 동맹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 본인은 러시아가 다시 독일과 손을 잡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이렇게 1881년 재건된 3제 동맹은 1884년에 재확인되고, 1887년에는 독일과 러시아 간에 재보장 조약이 맺어져 비스마르크의 해임까지 생명을 유지한다.

자유주의자인 프리드리히 3세와는 성향상 자주 대립했고,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 황후와는 사이가 매우 나빴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독일 통일 후에는 사람이 바뀐 것마냥 평화주의자로 돌변했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항상 보수적 현실주의자였고 더 이상의 전쟁은 독일에 해롭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때문에 빌헬름 2세를 비롯한 팽창론자들에게 밀려 물러나면서, 비스마르크는 "이런 식으로 가면 내가 떠나고 15년 후에는 파멸이 올 것이다."라고 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15년 후 삼국 협상이 성립되고 독일은 외교적으로 완전히 고립되어 양면 전쟁에 위협에 쳐하게 되었다.

실제로 해임된 1890년 이후 17년 만에 유럽 내에서는 삼국 동맹삼국 협상의 대립이 심해졌고, 그 원인도 빌헬름 2세의 반영 - 반러시아 정책이었다. 다만 기폭제가 된 발칸 반도 문제는 오히려 1870년대 이후로 계속 심각해지던 문제로, 비스마르크도 '여리박빙'의 상황에서 다루었던 문제이다. 일례로 러시아와 재보장 조약을 맺고 오스트리아와 2국 동맹을 각각 맺었지만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관계는 갈수록 나빠졌다. 이 난제를 잘 다룬 것이 비스마르크의 업적에 포함된다. 하지만 결국 2국 동맹은 빌헬름 2세의 재보장 조약 거부로 인해 깨지게 되었고, 빡친 러시아는 1892년에 프랑스와의 러불동맹을 맷어서 독일 포위를 사실상 완성시켰다.

이렇게 보면 비스마르크 체제를 유지하는것이 독일 입장에서도 더 낫겠지만, 식민지 쟁탈전에 막차를 탔던 그때의 독일(=빌헬름 2세) 입장에서는 비스마르크 체제를 유지하면서 팽창하는것이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는 중립을 지켰던 과거와 다르게 아프리카와 뉴기니 그리고 산동반도를 차지하게 되니 기존 식민지를 많이 확보한 영국과 프랑스와의 충돌을 피할수가 없었고, 또한 보어인들에게 간접적으로 지원을 해준 보어전쟁과 직접적으로 프랑스와 외교로 싸운 모로코 위기로 영국과 프랑스와의 극심한 외교적 분쟁이 일어나자 당연히 물러설리가 없는 빌헬름 2세가 해군을 팍팍 밀어주면서 영국의 역린을 건들었고, 비스마르크 체제에서 러시아와 함께 중요했던 영국이 등을 돌리고 프랑스와 영불협상이 성사가 되는 결과가 일어났다.

반면 국내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민주주의의 제대로 된 정착을 방해하는 헌법적 규범과 의회의 의사를 제멋대로 개변하고 무시하는 등의 행태를 보였다. 제국 재상은 제국 의회가 아닌 황제에게만 책임을 진다는 규정인데, 이 때문에 독일의 학자들에게서는 국내정치에 관한 한 그리 좋은 평을 받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자본주의를 윤리적 측면에서 정당화한 막스 베버이다. 베버는 아예 대놓고 비스마르크를 가리켜 독일 민주주의 발전을 가로막은 사람이라고 깐다. 다만 이 규정은 사실 비스마르크가 의회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반면 빌헬름 1세는 말 그대로 좌지우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 자신의 보수성도 엄청난데 1848년 혁명 당시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정신이상을 일으켜 노동자들의 시위를 무력진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켜 국왕을 폐위하고 무력진압에 찬성하는 동생 빌헬름 1세를 국왕으로 올리려는 계획을 주도했을 정도로, 그 계획 때문에 차후 빌헬름 1세의 재상이 되었을 때도 빌헬름 1세의 왕비는 비스마르크가 실제론 영국으로 일시 망명한 빌헬름 왕세제 대신 야심가인 국왕과 왕세제의 조카를 왕위에 앉힐 음모로 여겼기에 상종하지 못할 역적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수십명의 소작농을 거느린 대지주로서, 소작농을 무장시켜 수도로 진격하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로 전통적 군주제와 반혁명 정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런 과격성은 이후 어느 정도 누그러지게 된다.

그런데 그 사상과는 반대로 세계최초로 1883년 의료보험, 1884년 산재보험, 1889년 연금보험 등을 실행하여 사회보장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즉 현재 4대 사회보험 중 3개가 비스마르크 체제 아래에서 최초로 만들어졌다. 4대보험중 하나인 고용보험법은 1927년에 만들어졌으며 이는 네덜란드, 영국에 이어서 3번째. 이 부분에 대해선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사회주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라는 평가가 있다. 더 큰 것을 요구하는 봉기가 일어나기 전에 미리 적절한 선을 그어버린 것. 사회주의 견제는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비스마르크가 만들어낸 복지제도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유지, 발전되면서 독일이 복지국가로 도약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문화투쟁과 반사회주의자법에도 불구하고 1888년에 빌헬름 1세가 죽은뒤부터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프리드리히 3세가 자유주의 성향이라서 충돌이 벌어질것이라고 예상되었는데 프리드리히 3세가 3개월만에 세상을 뜨면서 자리를 이어갈것처럼 보였지만, 막상 빌헬름 2세도 프리드리히 3세처럼 자유주의적인 성향은 아니더라도 사회안정을 위해서 가톨릭 세력과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들과 화해를 모색하려하는 노선을 탔기 때문에 충돌이 이어졌고, 루르 광산 파업에서 비스마르크가 일방적인 진압을 주장한데 반해서 빌헬름 2세가 중재를 하자고 하면서 황제와의 갈등이 커지게 되었다. 이 때는 빌헬름 2세 황제가 작정하고 노동자들의 권리증진과 가톨릭계와의 화합을 외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국은 비스마르크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고 이러한 분위기에서 치러진 1890년 총선에서 가톨릭계 정당인 중앙당(Zentrumspartei)이 최대 의석을 가진 정당이 되었고, 사회주의 정당인 독일 사회민주당(이 시기 이후 독일 사회민주당은 주요 정당으로 부상)이 최다 득표를 기록했다.[27] 이 총선에서 親비스마르크파의 주요 정당인 국민자유당(Nationalliberale)이 절반 이상의 의석을 잃는 등 친비스마르크파는 대패했고, 이로써 그 동안의 사회주의자-가톨릭탄압정책에 대한 명분을 잃은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2세에 의해서 결국 제국 수상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비스마르크의 수상 퇴임을 풍자한 만평. 배에서 떠나는 선장(비스마르크)의 모습을 바라보는 빌헬름 2세의 모습을 담고 있다. 약 50년쯤 후, 윈스턴 처칠이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직후 총선거에 패배하여 퇴임할 때도 이를 패러디한 만평이 등장했다.

사실 비스마르크가 독일 내에서 인기를 끈 것은 빌헬름 2세가 하도 경망스럽게 구는 것에 질려버린 것이 결정적이었고, 빌헬름 2세와 비스마르크의 관계는 사임 이후에도 악화일로였다. 아들의 결혼식으로 빈에 갔을 때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를 접견하려 했으나, 빌헬름 2세는 프란츠 요제프에게 편지를 보내 접견을 방해했고 비스마르크의 후임자인 제국 재상은 각지의 관리들에게 비스마르크를 접대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을 정도였다. 그러자 당시 황가의 큰어른이 비스마르크가 죽기 전에 화해하지 않으면 황제에게도 큰 흠이 될 것이라고 직언했을 정도였다.

빌헬름 2세는 차후 비스마르크와 만남을 가지긴 했으나 역시 전 재상의 충언을 듣는 체 마는 체할 정도였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젊은 황제와의 불화로 사임한 이후에도 지방신문 사설의 주요인사로 정계에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려 하였다. 국가주의자라는 비난을 들을 수는 있어도 어찌되었건 일평생 일선에서 열심히 뛴 인물임은 분명하다. 한편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말년에는 거의 평화주의에 기울었고 평화주의자로 불릴만한 발언도 했다. "전투를 앞둔 병사의 눈동자를 본 사람은 전쟁을 어렵게 생각한다."

프리드리스루흐에 있는 비스마르크 영묘 안에 안치된 비스마르크의 석관. 오른쪽은 아내의 석관이다.

말년 황제와의 갈등관계 때문에 빌헬름 2세의 신하라는 말을 듣기는 싫었는지, 석관에는 '황제 빌헬름 1세에게 진정으로 충실했던 독일인 공복'(...)이라는, 생전에 자신이 직접 쓴 묘비명을 쓰라고 유언했다. 그래도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가 사망하자 장례식에 참석했고, 국장도 제안했으나 유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한편 비스마르크가 사망했을 때, 임종 자리에 가족들이 비운 사이 일부 기레기기자들이 침입해서 방금 사망한 그의 사진을 찍어 잡지에 돌리는 사태가 벌어진다. 혹자는 이를 가리켜 '세계 최초의 파파라치 사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당연히 병자였던 그의 모습은 엉망진창 지저분한 모습. 결국 기자들은 체포되어 처벌받고, 이후 그의 사진은 온건한 임종 모습이 유포되었다.

보통 널리 알려져 있는 피도 눈물도 없는 철혈재상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실제로는 전쟁보다는 외교적 방법을 선호하였다. 위의 일화처럼 그는 전장에서 불구가 된 참전 용사를 볼 때마다 가슴 아파했다.

그 유명한 연설도 "국가의 대문제" 즉 독일 통일을 두고 한 이야기지 일반적으로 나 불도저요! 한 것이 아니다. 당시 독일 통일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대독일주의를 주창하며 대를 이어 알프스 이북 독일연방에 종주권을 행사하려는 오스트리아, 커다란 중부유럽 통일국가를 이웃하기 싫어 나는 독일을 매우 사랑한다. 그래서 독일이 여럿이었으면 좋겠다 간섭해 온 프랑스를 어떻게 배제하느냐였는데, 이것이 외교적으로 해결될 전망은 없었다.

물론 목표를 위해서 불가피할 때는 전쟁도 불사했다. 그러나 그 전쟁도 적에게 필요 이상의 피해나 굴욕을 주는 것에는 매우 반대했다. 비스마르크 재임시절 발생한 전쟁은 보오전쟁, 보불전쟁인데, 이는 독일 통일을 위해서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전쟁을 통해 굴복시키는 것 이외는 길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두 전쟁을 통해 독일 통일이라는 과업을 이룬 후에는 새로 건설된 독일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전쟁을 억제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에 전력을 기울였다. 고로 비스마르크는 고전적 현실주의자, 국익지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외교관 출신 답게 유럽 내 많은 국가들에게 프로이센의 입장을 잘 주지시키려고 노력했고 이것은 일말의 합리성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비스마르크는 클라우제비츠처럼 전쟁은 어디까지나 외교, 정치의 연장인 수단으로 보았다. 외교에서 각국의 신뢰를 얻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독일의 외교정책이 성공한 것이며 각국의 첨예한 이익 다툼 속에서 비스마르크가 원하던 대로 정세가 진행된 것은 독일 통일 이후에는 불필요한 식민지는 반대하며 유럽 국경의 현상유지를 주장했기 때문에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독일의 강력한 군사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기술과 경제력, 그리고 실전에서의 증명덕분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의 충언을 마지막에라도 들었어야 했다. 그는 비스마르크의 말을 안 듣고 제1차 세계 대전 일으켰다가 져서 베스트프로이센이랑 포젠을 잃었다. 이것은 또한 히틀러나치가 발호하는 빌미가 되어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켜서 패배하였다. 그 결과 남은 오스트프로이센 전체, 슐레지엔, 포메른 대부분, 브란덴부르크 중 노이마르크 지역인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을 영구히 폴란드러시아에 할양해야 했고, 독일은 동독서독으로 분열되어 40년 간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

결국 비스마르크의 의도와 짜놓은 구도대로 갔으면, 오데르 나이세 선 동쪽 영토는 현재에도 독일의 영토로 남아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전쟁을 일으키지 않은 것이니(...) 영토을 빼앗을 구실도 없어지니까.

철혈 재상의 강인하고 냉혹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대외적인 이미지와는 다르게 실제로는 상당히 감수성이 풍부했으며, 신경쇠약 때문에 자주 과식했고 사망원인도 과식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눈물도 많았다고 한다. 아들이 반대하는 결혼을 하려하자 울면서 자살하겠다고 말린적도 있으며 보오전쟁의 보상 조약 체결을 둘러싸고 빌헬름 1세와 대립이 생겼을 때는 울면서 자2살 소동을 벌여 빌헬름 1세의 뜻을 꺾은 적도 있다고 한다.

한 번은 비스마르크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사임하겠습니다!'라고 외치자 빌헬름 1세도 '제국에는 나보다는 비스마르크가 더 필요하다'면서 '그럼 내가 퇴위하겠다!'고 맞받아쳤다. 어찌 됐든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가 설득하면 마뜩찮아해도 들어주었기 때문에, 빌헬름 1세가 91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비스마르크는 큰 상심에 빠졌다.

이후 빌헬름 2세가 자기 말을 안 듣자 똑같은 짓을 했는데, 빌헬름 2세가 무시하자 열받아서 잉크병을 빌헬름 2세의 이마에 던졌다카더라가 있었는데 이는 당시 찌라시의 보도였고, 실제로는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2세에게 모독에 가까운 구박을 받았어도 결코 예의를 잃지 않았다. 총리 임기 말년에 빌헬름 2세가 비스마르크에게 누구를 만나는지, 어떤 대화를 하는지 일일히 문서로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자 뚜껑이 열려서 잠시 이성을 잃은 적이 있지만, 퇴임 이후에도 아들뻘 나이의 빌헬름 2세에게 훈계하려고 했지 한판 붙자는 식으로 대들진 않았다.

그리고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원하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무력을 사용했다. 두 전쟁 모두 중요한 전투에서 이긴 다음 고삐를 쥐고 원하는 것을 가져갔다. 1870년 독일 통일 이후 실각할 때까지 그의 정책 목적은 철저히 전쟁을 막기 위한 세력 균형을 추구하는데 있었다.

자신의 미국인 친구 존 말트리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식료품점 주인이 자기 일을 싫어하는 것처럼 정치를 싫어했다. 말트리는 비스마르크의 대학 동창이었고, 이후 미국의 외교관이 되었다. 비스마르크와는 노년까지 쭉 편지로 교류했다.

6.1. 일화[편집]

여하튼 사생활 및 사고방식이 꽤나 독특했던 듯하며, 여러가지 일화나 명언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독일 제일의 저술가라는 말도 있을 정도다. 다만 19세기 독일 산문의 대가라는 평가를 받는 대 몰트케와 비교한다면 밀리기는 한다.

젊은 시절 늪에 친구가 빠졌는데 구해줄 자신이 없자 빠진 친구를 구해주지 않고 총을 친구에게 겨누고 "너를 구하진 못하겠고 차마 천천히 죽는걸 볼 수도 없으니 고통없이 죽여주겠다"하고 말을 해서 친구가 화들짝 놀라 스스로 있는 힘을 다해 알아서 나오게 한 일화가 유명하다. 이에 대해서는 "평소에 너 정말 꼴 보기 싫었지만 내색은 못 하고 있었는데 이 참에 여기서 뒈져라!"라며 도발했다는 판본도 있다. 결국 이 말을 듣고 잔뜩 빡친 친구는 겨우 빠져나오고 나서 "구해주지는 못할 망정 나더러 죽으란 거냐!"라며 비스마르크를 두들겨팼더니 비스마르크는 친구에게 사죄하면서 말하길, "날 용서하게, 내가 겨눈건 자네의 포기하는 마음이네"라고 하자 친구가 그제서야 받아들였다는 이야기. 빠져나와서 망정이지 못 빠져나왔으면 과연 철혈재상 소리나 들었을 일화 워낙 황당한(?) 일화라 한국이나 일본 등에서 훈육용으로 지어낸 거짓말[30]이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 하지만 이 일화는 비스마르크 생전인 1882년에 나온 신문기사에도 이미 언급된 적이 있는 유서 깊은 이야기다. 물론 세설신어에 조조와 원소 버전으로 동일한 이야기가 실린 것을 생각해보면 동서고금으로 널리 퍼져있던 교훈적인 민담 내용이 비스마르크의 일화로 각색된 것일 수도 있다고 한다.

귀족 여식을 아내로 맞이할 때 장인을 상대로 치밀한 작전과 노력을 해 사기친 일화같은 카더라식 에피소드도 있다. 하지만 결혼에 이르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신론이나 다름없던 이신론(理神論. 신의 존재를 인정하긴 하지만, 종교적인 의미로 신봉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규칙의 일환으로서만 인정한다)에서 루터교로 개종한 것이고, 그나마도 33세 때였다. 러시아 대사시절 47세의 나이에도 러시아 대사의 25살난 아내와 연애행각을 벌였다. 아내와 러시아 대사가 대인배라서 눈감아주지 않았다면, 엄청난 스캔들로 비화해서 꽤나 골치아팠을 것이다.

개를 좋아했는데 자신의 애견이 죽어가는 모습을 비스마르크에게 보이기 싫어 자취를 감추어버린 적이 있다. 개를 비롯해 무리생활을 하는 동물들은 이런 습성이 있다.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죽기 직전까지 말썽 부리는 줄 알고 개를 야단치려고 찾고 있었던 사실을 몹시 후회한 기록도 있다. 임종시에도 그 개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고 하는데, 그 이름은 술탄. 그레이트 데인이다. 개를 자기 오른편에 놓고 협상을 하기도 했다. 상대방이 흥분해서 주먹쥔 팔을 휘두르자 개가 주인님을 공격하려는 줄 알고 상대방을 공격하려든 일화도 있다.

자주 인용되는 비스마르크의 명언으로서 "청년들에게 해줄 말은 단 세 마디뿐이다. 일하라, 더욱 일하라, 죽을 때까지 일하라."가 있다. 그러나 위에 쓰여 있듯이 정작 본인의 청년시절 생활은 성실함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훈장에 관련된 일화도 유명하다.

단순한 유머 혹은 대담한 병사 개인에 대한 주목을 위한 이야기로 자주 받아들여지지만, 국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가치와 현실 사이의 거리감을 지적할 때 언급되어 국가주의를 비판하는데 자주 인용되는 뼈 있는 일화다. 이 이야기는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탈무드에서 유머로 언급한다. 사실 주목해야 할 것은 원수랑 농담 따먹는 저 사병의 패기 그런데 공산주의 유머에도 똑같은 일화가 있다.

사랑의 학교에 따르면 비스마르크가 몰트게를 찾아가기 위해서 마차를 탔다가 소년을 보고 태워줬다. 그 소년은 가난한 연극배우로 홀로 있는 어머니를 위해서 주머니의 돈을 드린 다음 극장으로 가려고 하자 그가 극장에 좀 늦게 가면 어떠냐고 말하자 소년이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냐고 이야기했다. 그 소년의 모습에 감동 받은 그는 극장으로 찾아가 화환을 보내 경의를 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7. 어록[편집]

8. 기타[편집]

은퇴한 곳인 프리드리스루흐는 현재 당시 철도역 건물을 개조한 비스마르크 박물관이 있다. 비스마르크의 상징이 되는 레인코트, 베르사유 독일 황제 선포식 그림, 훈장 등 엄청난 레어템들이 가득하다(...). 다만 찾아가기는 조금 껄끄러운데, 함부르크에서 S반(전철 격)으로 갈 수 있는 마지막 역 다음 역(2km 상당)에 있다는게 문제. 이 구간(즉 한 정거장 구간)을 걸어가든가 아니면 2시간마다 한 번씩 오는 차 시간 맞춰서 맞는 승강장에서 기다려야 한다. 원칙적으로는 돈을 내야 하지만 말 그대로 한 정거장 구간에 열차표 검사는 거의 하지 않으므로 돈은 들지 않는다. 역 바로 옆에 있는 박물관 입장료는 저렴한 편이다. 비스마르크와 아내의 석관이 안치된 영묘도 근처에 위치하며, 찾아간다면 참배도 할 수 있을 듯.

한편 쇤하우젠(Schönhausen, 작센-안할트 주)에 있던 비스마르크 생가는 1700년경 비스마르크의 조상이 짓고 비스마르크가 태어난 쇤하우젠 1성(Schönhausen I)[35]과 70회 생일 선물로 받은 쇤하우젠 2성(Schönhausen II)이 있었는데, 하필 쇤하우젠이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민주공화국에 들어가면서 1958년에 "프로이센 융커와 잔재 청산"이라는 명목으로 쇤하우젠 1성을 파괴해 버려 이제는 부속 건물밖에 없다.

당시 한반도는 조선 말기로 비스마르크는 흥선대원군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인물이다. 실제 사망년도도 1898년으로 같다. 다만 비스마르크가 흥선대원군보다 나이가 다섯 살 위고, 흥선대원군이 비스마르크보다 5개월 정도 먼저 죽었다. 그러나 사상이 크게 다르다보니 둘이 잘 비교되지는 않는 편이다. 고집불통인건 비슷하지 않나

동시기 청나라에서 활동한 (8년 늦게 태어나 3년 늦게 죽은) 이홍장과 비교되기도 한다. 실제로 둘은 모두 일선에서 퇴진한 1896년 서로 만나기도 했다. # 면담 내용을 수록한 동아일보 기사 둘 모두 '제국'을 몸으로 보여주는 듯한 거구가 인상적이다. 두 국가 모두 두 사람이 마음먹은대로 흘러가진 않았지만... 이 기사를 패러디한 "이홍장과 비스마르크"라는 BL 야설이 존재한다. OMG

악마의 사전에 따르면 한번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훈장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미 해군아이오와급 전함일본 해군야마토급 전함 이전 세계 최대의 전함이었던 크릭스마리네비스마르크급 전함은 1번함 비스마르크는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미국 노스다코타 주의 주도인 비스마르크(Bismarck)는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독일계 미국인이 이 주에 압도적으로 많이 거주하는 것과도 연관되어 있다. 도시 자체는 전형적인 행정 중심 도시로, 노스 다코타 주 안에서는 파고(Fargo)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 그러나 인구 적기로 유명한 노스 다코타답게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라고 해 봤자 광역권 다 합쳐서 약 12만 명밖에 안 된다(…).

아돌프 히틀러 연간에 나온 2부작 영화에는 유태계 정치인들의 마수 때문에 물러나고 독일은 또다른 제국을 세워야 한다고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치의 선전 과정에서 제대로 왜곡당한 피해자. 물론 비스마르크 때문에 피해를 입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입장에선 왜곡당해도 싼 놈이겠지만

가끔 비스마르크 때의 독일을 제2제국, 히틀러 때의 독일을 제3제국이라 해서 비스마르크가 1차 세계대전에 가담한 걸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있다. 비스마르크는 20세기 되기 전에 사망했다. '비스마르크 체제' 항목에 설명되어 있지만, 비스마르크는 유럽의 평화와 세력 균형을 꾀했던 인물이다. 만일 비스마르크가 살아있었다면, 가담은 커녕 극구 반대했을 일.

비스마르크와 상앙

철혈재상인 비스마르크와 중국사에서 철의 재상으로 꼽힐 수 있는 상앙이 비슷하게 추구한 점, 행동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또 고대의 사람과 근대의 사람이 비슷하게...

중국사에서 철의 재상들을 알려주세요.

... 철의 재상이라면 독일의 비스마르크에 버금가는 중국의 재상을 말씀하시는구요. 엄청 많지만... 우선 상앙,제갈량,조조,도르곤,범려...만 나열해보았습니다. 중국의 철의...

저기요.. 제가좀 바빠서 그러는데...

... 359 秦 孝公, 상앙을 등용 - 제1차 상앙변법. 350 제2차 상앙변법. 진, 咸陽으로 천도. 333 蘇秦, 合從策 성립. 소진이 6국의 재상을 겸임. 299 초 懷王이 진에 포로가 됨...

서양 법가사상

... 그외에 절대왕정 국가들도 따져보면, 중앙집권적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고, 독일의 관방학과 그것을 이끈 비스마르크도, 따지자면 변법과 상앙과 비슷한...

진시황질문좀

... 개혁한 상앙 덕분이었습니다. 진시황제 영정은 상앙과 여불위가 다 차려놓은 밥상에...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명예퇴직시켰던 것과도 비슷합니다. 아래에 관련 글 링크합니다.